할 거면 제대로
첫 비서였다.
과장급에서 전무로 승진하는 바람에 파격 인사라는 꼬리표를 달았고, 동시에 비서를 얻었다. 그렇게 처음 총괄사업부 전무실에서 처음 마주친 사람이 바로 연재였다.
“준비성에 감탄했어요.”
연재의 얼굴에도 곧 화사한 미소가 걸렸다. 그 웃는 얼굴을 따라 현조도 미소 지었다.
“혹시 키우는 거 좋아합니까?”
연재를 처음 만나고 약 일주일 정도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태어나 누군가에게 이토록 살뜰한 챙김을 받는 일은 여태껏 겪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키우는 거요?”
“뭐, 식물이든 동물이든 키우는 거 잘할 것 같은데.”
그때까지 시동을 걸지 않던 현조가 차를 출발시켰다.
“좋아합니다.”
한옥 담장을 천천히 스쳐 가며, 현조가 즐겁다는 듯이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노래를 들으면서 박자를 맞추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그래서 그랬나.”
요즘 묘하게 조련당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은.
비서라는 존재가 그런 존재인가 싶었다.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때때로 그녀가 하는 말은 조건 없이 옳다고 느끼게 된다.
연재가 보여 주는 성실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빈틈없이 준비하고, 돌발 상황도 미리 대비하는 철저함 덕분에 현조는 요즘 연재에게 많은 부분 의지하게 됐다.
“무슨 말씀이신지……?”
“서 비서가 프로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그런 의미로 저녁 먹고 들어갈래요?”
저녁이란 말에 대답하려는 던 순간, 가방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울렸다. 연재는 가방을 열어 전화기를 꺼냈다. 액정에 뜬 이름은 진희였다.
“죄송합니다. 전무님, 잠깐 통화 좀 하겠습니다.”
“전무님?”
방금 전무님도 서 비서라고 하셨습니다. 입으로 말하는 대신 눈으로 콕 집었다.
“난 내가 원하는 순간에 언제든 ‘자기’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의 말을 곧바로 실천하는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손수 모범을 보여 주는 상관을 본받아야 할 때였다. 연재는 입꼬리를 바르르 떨며 입술을 움직였다.
“현조…… 씨.”
다정한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심장에 해로워 연재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진희야.”
- 연재, 연재, 서연재애애. 오늘 뭐 해?
“잠깐 볼일이 있어서 나왔어.”
- 그래? 그럼 오늘 만나기 힘들겠네? 주말이라 아줌마도 만나고, 너도 만나고, 밥도 먹고. 그러려고 했는데. 헤헤.
귀여운 녀석. 연재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녁?”
방금 현조가 제안한 저녁 식사에 대단 대답을 아직 안 했는데. 이렇게 겹치게 될 줄은 몰랐다. 연재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현조를 보는 순간 연재는 당황하고 말았다.
“아, 아아, 오늘은 나 빼고 먹으면 안 될까? 집에 연준이 있지? 나는 조금 늦을 것 같아서.”
- 너, 근데 왜 그렇게 당황해? 혹시……?
휴대전화를 쥐고 있는 손바닥에 땀이 고일 지경이었다. 현조와 같이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라도 이야기하면 그만이었다. 당황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신호등은 적색, 횡단보도를 앞에 두고 멈춰선 자동차.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저 시선 때문이었다.
은근한 시선은 꼭, 조용히 속삭이는 느낌이었다.
“혹, 혹시는 무슨. 나중에 이야기하자. 연준이랑 같이 먹어, 응? 미안해.”
- 흐응. 수상한데, 나 그럼 집에서 기다릴게.
“으응. 그래, 알았어.”
전화는 끊겼다. 한숨이 길게 나올 만큼 진땀을 뺐다.
“누구냐고 물어보면 벌써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까요?”
“친구예요.”
“그럼 ‘연준’이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어보는 시선이 묘하게 노골적이다. 때마침 신호가 바뀌었다.
“출발하셔야 해요.”
“말 돌리면 오해합니다.”
“보셨잖아요. 제 동생.”
“아, 예비 처남.”
예, 예비 처남? 결혼이라는 것은 낯선 단어를 생성하는 거구나. 얼마나 더 많은 낯선 단어들에 익숙해져야 하는 걸까.
“무슨 생각 합니까?”
“낯선 생각이요.”
“내가 낯선 사람은 아닐 테고, 또 맞선이라도 보려고요?”
연재가 고개를 돌려 운전하는 현조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이 남자 조금 위험한 거 아닐까?
“이런, 또 집착을 흘리고 말았군요.”
그렇게 웃으면서 그런 말을 하시면, 정말 위험한 거 아닙니까?
속으로 생각하던 연재는 픽, 웃고 말았다. 현조의 말투였다.
“내가 집착을 어떻게 할지 궁금합니까?”
“그럴 리가요.”
“그럼 다른 데선 그렇게 웃지 말아요.”
익숙한 사람과 낯선 결혼이라니.
낯선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만 같다.
얼마나 많은 낯선 것들을 그와 함께하게 될까.
***
계약을 위해 일본으로 출장을 가는 상황이었다.
필요한 서류를 체크하던 현조가 연재를 불러들였다.
“전무님, 부르셨어요.”
“어제 부탁한 단가표 정리됐습니까?”
“지금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곧 집무실을 빠져나온 연재가 정리해 둔 파일을 들고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말씀하신 단가표입니다.”
현조에게 건네자 현조가 파일을 열고 하나씩 체크를 시작했다. 경영지원팀에서 올라온 자료였지만, 특별히 정욱이 다시 검토해 준 서류였다. 첫 수출 계약이 달려 있기에 사장실에서도 각별히 주시했기 때문이었다.
“호텔은 오이시상사와 가까운 EL 호텔입니다.”
간략하게 확인을 마친 현조가 서류를 가방에 넣었다. 간결한 동작 하나도 놓치지 않고 연재의 눈이 따라붙었다.
옷걸이에서 외투를 가져온 연재가 입기 편하도록 펼치고 섰다.
“고마워요.”
팔을 하나씩 끼워 넣은 현조가 몸을 빙글 돌렸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연재와 마주 보게 됐다. 순간 놀란 연재가 주춤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 없는 서울 잘 부탁해요.”
풋, 하는 소리가 연재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사뭇 긴장한 모습을 보이는 현조를 걱정했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농담을 건네는 것을 보니 특유의 여유가 느껴졌다.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간 연재가 현조의 타이를 살짝 매만지고, 어깨를 가볍게 털어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현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으로 향하자 타이밍 좋게 정욱이 사무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공항까지 모시겠습니다. 전무님.”
“가지.”
현조가 앞서 걸음을 떼자, 그 뒤를 정욱이 말없이 따랐다.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존재감이 한순간에 사라지자 허전함이 밀려왔다.
그것도 잠시 인터폰이 울렸다. 불이 들어온 곳은 사장실이었다.
- 연재 선배, 사장님 호출이에요.
“네, 지금 갈게요.”
모시던 상사였지만 전무실로 이동한 후 부딪칠 일이 없었기에 부서 이동 후 첫 대면이었다.
사장실로 들어서자 지영이 비서 데스크에서 일어나 반겼다.
“사장님 안에 계세요.”
고개를 끄덕이고 사장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는 것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
“왔으면 앉아요.”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유난히 목소리가 차분한 사람이다. 몹시도 느긋하고 온도가 차가운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오히려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가게 만드는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네, 사장님.”
현조는 외조부인 김 회장을 소개해 줬지만, 어머니로 추정되는 김선화 사장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연재는 당연하게 이원푸드의 김선화 사장을 만나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잠깐 기다려요. 곧 끝나니까.”
연재는 긴장으로 허리를 더욱 곧추세웠다. 긴장되고 조심스럽고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곁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조차 차가운 사람. 김선화 사장을 3년 동안 보필했지만, 여전히 어려운 사람이었다.
침묵이 길어졌다. 들이마시는 공기마저 무겁고, 버거웠다. 공기 중에 녹아 있는 것은 산소가 아닌 무거운 침묵 같았다.
“그 아이와 정말 결혼할 생각인가요?”
한참 말이 없던 선화가 다시 입을 열었고, 그제야 연재는 선화가 부른 이유를 알았다. 30여 분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과 싸운 끝에 치고 들어온 말은 단도직입적이었다.
“짐작하는 대로 내가 류현조 전무 엄마 자격을 가진 사람이에요.”
‘엄마’가 아닌 ‘엄마 자격’이란 말이 어색했지만, 연재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러니 한 번쯤은 이런 대화를 거쳐야 하지 않겠어요?”
여전히 책상을 벗어나지 않고, 보던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던지듯이 내뱉고 있는 선화를 무심결에 바라봤다.
“다시 묻죠. 현조가 결혼을 제안했나요?”
이번엔 제안이란 말이 낯설었다. 하지만 이 결혼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말이었다.
“네, 제안하셨습니다.”
그제야 고개를 든 선화가 책상에서 벗어나 천천히 휠체어를 밀면서 다가왔다. 연재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앉아요.”
차갑다. 너무 차가워서 섬뜩했다. 연재가 다시 소파에 앉았다.
“언제부터 만났죠?”
사장실은 소파 상석이 비어 있었다. 김선화 사장의 자리였고,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선화가 휠체어를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사고였다고 했다. 10년 전, 사고로 남편을 잃고,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됐다. 휠체어를 멈춘 선화가 다시 물었다.
“부서 옮기고부터라면 굉장히 짧은 시간일 텐데.”
어떻게 그 짧은 시간 안에 결혼까지 제안 받았는지 묻고 있었지만, 이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현조가 맞선 보는 이유는 알고 있겠죠?”
“네.”
“그런 결혼을 왜 하겠다고 했는지 묻는 거예요.”
반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왜? 라는 질문을 해 올 것이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솔직하게 서로 결혼이 필요해서요. 라고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서로…….”
연극에 충실하려 입을 떼려던 순간 말문이 가로막혔다.
“돈을 주겠다고 하던가요?”
연재는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당황했다. 뭔가 이상하다. 머릿속에서 떠도는 생각들이 좀처럼 정리가 되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