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68)

첫 번째 관문

이상했다. 정말이지 이상하다는 말 이외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연재의 손가락이 불안한 심리상태를 대변하듯 연신 톡톡 두드려댔다. 데려다주겠다는 것을 거부하고 제 차에 탔지만, 여운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류현조. 이 남자는 신기했다.

어떻게 한순간에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는 것일까?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이 남자의 속도를 감당하기 벅찼다.

“불도저야?”

한 번 결심한 것은 순식간에 밀어붙이는 재주를 타고난 것일까?

“사랑은 어렵다면서?”

결혼하자는 말과 함께 사랑이라도 싹트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혼이 꼭, 사랑의 씨앗이라도 된 것처럼.

‘나, 굉장히 잘합니다. 노래.’

그 한마디가 무어라고 이렇게 심장이 나대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그에게 휘둘리면서 그의 장단에 놀아나는 것이 싫지 않다는 것이 싫었다.

쉬운 여자가 된 것처럼.

아니, 이건 마치 기다렸다는 듯 결혼에 뛰어드는 것 같다. 모친에게 그렇게 싫다고 했으면서, 인연이 나타났다고 착각에라도 빠진 것처럼.

“미치겠다.”

당장 주말이면 현조의 김 회장을 만나러 갈 것이고, 그다음은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자신의 부모님을 만날 것이다. 그럼 게임은 끝이다.

이 결혼을 반대할 누구도 없을 테니까.

“결혼이 이렇게.”

아니, 아니다.

연재는 혼잣말을 머릿속에서 정정했다.

연극이다.

연극이라서 쉬운 거다.

같은 시간, 현조도 핸들을 놓고 제 손을 쳐다봤다. 손을 잡았다면 어떤 느낌이었을지, 아무렇지 않게 연습이라고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과연.”

결혼해야 한다. 상대는 까짓 누구든 상관없다. 걱정하는 김 회장을 위해 보란 듯이 연극을 해 줄 사람이면 충분했다.

시한부의 삶을 살아가는 외조부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해야 할 결혼이다. 그럼에도 1년 반을 맞선 시장에 떠돌았지만, 상대를 찾지 못했다.

누구든 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결혼은 결과적으로 아니었다. 하지만 연재를 본 순간 망설임은 사라졌다.

“정말 서연재라서?”

가능했을까. 사실 맞선 장소에서 마주친 순간 생각이랄 것도 할 것 없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말이었고, 행동이었다.

언제나 세심하게 챙겨주고, 잔잔한 호수처럼 맑고 조용한 여자. 깊은 심연은 언제나 고요한 것처럼, 서연재의 눈을 들여다보면 이유 없이 마음에 편했다. 동요하지 않고, 꾸미지 않는 맑은 눈동자.

하지만 진짜 서연재의 모습을 본 순간, 그것은 일부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짜 서연재는 활기가 느껴졌다.

“신기한 여자라는 건 확실한지도.”

암이었다.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나아졌다고 믿었는데, 재발했다.

외조부는 눈을 감기 전, 꼭 손주가 결혼해서 제대로 된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셨다.

하루가 급했다. 마음을 비우고 이제는 누구라도 만나야지 반 포기 상태에 이르렀다.

그런 와중에 서연재를 만났다. 서로가 결혼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어차피 할 결혼이라면, 모르는 사람보다는 연재가 백번 나았다.

“이보다 완벽할 수는 없잖아.”

혼잣말을 내뱉은 현조가 오디오를 볼륨을 높였다.

극한의 훈련이 필요한 때가 왔다. 내뱉은 말이 거짓이 아니려면, 진짜로 만들면 된다.

노래, 잘하는 남자가 될 시간이다.

***

“자, 지금부터 우리는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파릇파릇한 연인입니다. 그렇지? 자기야?”

아, 미치겠다. 이 남자를 따라 결국 오고야 말았다. 담벼락 아래 차를 세운 남자는 마법의 주문을 걸듯 재잘거렸다.

이곳은 그러니까. 현조의 외조부 댁이자 현조의 집이었다.

서울 한복판에 우아한 기품을 뽐내는 한옥은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연습 한번 해 보도록 하죠. 불러 봐요.”

운전석에 앉아 빤히 쳐다보면서 이야기하는 현조를 연재는 어이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게 어디 연습으로 될 문제인가?

“자…… 자…… 하아.”

“어렵습니까? 그게?”

“어렵습니다. 많이.”

29년 인생을 통틀어 그런 호칭으로 남자를 불러 본 적이 없다. 짝사랑하던 그 녀석에게도 그런 호칭은 사용해 본 적 없다.

그런데 그런 말이 어디 쉽게 입 밖으로 나오느냔 말이지.

“못하겠습니다.”

“노력으로 안 되는 건 없는데도?”

“노력의 영역이 아닌 것 같습니다.”

현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노력의 영역이 아니긴 하지. 이건 어디까지나 타고난 철판이 필요한 부분인 건 인정.

“전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데 어떻게 결혼할 사이라고 생각하겠어요?”

가족들에겐 현조의 정체를 숨길 수 없다. 다만, 그의 말처럼 전혀 연인처럼 보이지 않은 문제점이 있을 뿐.

“아니면 우리가 필요에 의한 합의한 결혼이라고 이야기할 참입니까?”

그 사실을 안다면 부모님이 허락할 리 없겠지. 절대.

“그럴 생각 아니면, 호칭은 바꾸는 게 낫겠죠?”

“그래도 ‘자기’는 못하겠습니다.”

흐응. 그렇단 말이지. 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현조가 제법 골똘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름 불러 봐요.”

“전무님 성함이요?”

고개를 끄덕이고 어서 불러 보라는 듯이 턱짓을 한다. 연재는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적어도 ‘자기야’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 정도는 각오해야 했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현조, 씨.”

순간, 바라보고 있던 현조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선명했다. 그의 눈가가 휘어지고 가늘어졌다.

“잘하네. 한 번 더 해 봐요.”

오래 들여다보는 습관 때문에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작은 변화도 놓치지 못한다. 아무래도 이 직업병 때문에 곤란한 일이 자주 발생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현조 씨.”

감정을 담지 않으려 부러 끊어지듯 세 글자만 뱉어 냈다. 그럼에도 그가 만족한 듯한 목소리로 칭찬을 할 때마다, 세심하게 바라봐야만 보이는 사소한 표정의 변화가, 간지럽다.

“좋아요. 갑시다.”

무슨 대단한 면접에 통과된 것처럼 연재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고 벨트를 풀었다. 결혼 프로젝트에 임할 시간이다.

차에서 내려 대문을 들어선 연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어요.”

정원을 품고 있는 집터가 넓었고, 한옥도 분리된 형태로 두 채였다.

“손잡을래요?”

“아뇨, 아직은.”

“길치잖아요. 서연재 씨.”

“아. 그랬죠.”

농담처럼 던진 말이란 걸 알지만, 농담으로 들리지 않을 만큼 넓은 정원이었다.

연재는 조심스레 현조가 내민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런데.

“오셨습니까.”

안경 낀 중년 남자가 현조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여전하시네요. 김 실장님.”

“전무님께서도 여전.”

“칭찬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분위기 깨는 데 선수라는 뜻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어쩐지 안경 낀 김 실장이라는 남자가 안타까워지는 연재였다.

***

첫인상은 무척이나 인자했다. 목소리도 표정도 인자함이 느껴졌다. 이원푸드의 창립자이자 좋은 기업인으로 칭송받는 그의 외조부는 대중매체를 통해 접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손주를 곁에 둔 뿌듯한 마음 가득한 인자한 할아버지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연재라고 합니다.”

“어서 와요. 오느라 고생이 많았지? 앉아요.”

긴장으로 떨리던 마음이 조금 느긋해졌다. 연재는 나이가 많은 분들을 대할 때면 오히려 편했다.

“밥은 먹었고?”

오후 2시, 부러 점심을 먹은 후 만나서 온 길이었다.

“먹었습니다.”

“나 아니면 누가 너 밥 먹었냐고 물어볼 것 같아?”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레퍼토리였다.

엄마는 그 말이 참 귀찮고 싫었다고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돌아가시고 나자 제일 많이 생각나는 말이 할머니의 밥 먹었냐는 물음이었다고 했다.

그 말이 떠올라서 식사 때마다 한동안 엄마는 울었다. 연재도 마찬가지였다. 외할머니에게 듣던 말을 지금은 엄마에게 매일 듣는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밥심으로 사는데, 먹었습니다.”

현조의 외조부가 허허, 웃음을 터트렸다. 호탕하지만 기력이 많이 쇠한 웃음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몇 달 안 남았다고 하더군요. 고생 참 많이 하셨는데 병까지 얻었고……. 그래서 마지막 소원은 들어 드리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듣는데, 시골에서 농사만 짓다가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떠올라서 가슴이 먹먹했다.

살림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외할머니는 그저 적적해서 일하신다고 했었다.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는데, 할머니가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몸을 움직여 일하시는 것이었다.

눈을 감는 날까지 할머니는 농사를 쉬지 않으셨으니까.

“합격! 현조야 나는 무조건 좋다. 네 어미가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찬성이다.”

“할아버지 그렇게 쉬운 남자였습니까?”

“이놈아, 너도 내 나이 먹어 봐. 말 한 마디만 들어 봐도 보여. 다 보여.”

기뻐해야 할 일인가. 연재는 잠시 고민하다 어색하게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집도, 현조의 외조부도 좋았다. 류현조라는 남자를 다시 생각하게 할 만큼.

“할아버님 어떤 걸 좋아하실지 몰라서 차랑 한과 좀 사 왔습니다.”

연재가 상 위에 제가 준비한 선물을 풀어놓았다. 구하기 힘들다는 녹차와 며칠 전 예약하고 어렵게 받아 온 한과였다.

“내가 한과 좋아하는 건 어찌 알고?”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뜬 김 회장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비서실장님께 조언을 구했습니다.”

“권 비서가 가르쳐 주던?”

“네. 할아버님께서 참 좋아하시던 한과라고 하셨습니다.”

정욱에게 음료수를 내밀고 얻은 정보였다. 김 회장은 한과 명인 김영순 선생이 만든 것을 좋아한다는 말에 예약 주문해서 오늘 새벽에 받아온 것이었다. 활짝 웃는 김 회장을 보고 있노라니 고급정보가 맞았다.

연재가 색이 고운 한과를 까서 김 회장에게 내밀자 김 회장이 달게 받았다.

“두고두고 혼자 아껴 먹어야겠어.”

“네, 꼭 할아버님만 몰래 드세요.”

곁에 앉아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현조도 결국 웃고 말았다.

“우리 현조가 애먹이진 않고?”

“전무님께서는.”

“그래, 기탄없이 편하게 이야기해 봐요. 이럴 때 얘기해야 내가 혼내 주지.”

즐거운 듯 이야기하는 김 회장의 음성이 여전히 들떠 있다.

“믿고 따르기에 부족함 없으신 분입니다.”

그것 보라는 듯 현조가 곁에서 의기양양해졌다. 그것을 본 김 회장 역시 제법이라며 엄지를 척 세웠다.

“나는 무조건, 이 결혼 찬성이야.”

쉽게 허락할 사람은 아니었다. 결혼하라는 말로 성화였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마음에 들어 할 사람이 절대 아니니까.

연재를 보며 기꺼워하는 김 회장의 얼굴이 병중인 것도 잊을 만큼 밝았다.

서연재의 효과는 실로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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