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68)

연습은 실전처럼

‘하겠습니다.’

그렇게 기간 한정 부부 연극이 시작되었다.

‘주말에 시간 비워 둬요. 외조부 뵈러 갑시다.’

아니 무슨 번갯불에 콩을 튀겨도 일단 번개가 쳐야 하는 거 아닌가? 번개도 안 친 것 같은데 무슨 콩을 튀긴단 말인가.

아, 맞선이 번개였던가!

침대에 누워서 고민에 휩싸인 연재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아무도 몰래 결혼했다가 원하면 없던 일로 만들어 줄게요. 라는 말도 안 되는 설득에 넘어갔다.

“몰라, 몰라.”

어김없이 아침은 왔고, 밤새 잠을 설친 연재는 푸석해진 얼굴로 출근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다시피 헤집는데 복도를 울리는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문이 열리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현조가 들어섰다. 아니, 평소보다 더 얼굴색이 좋아 보였다.

마치 큰 고민을 덜어낸 사람처럼.

“좋은 아침입니다. 서 비서.”

그러더니 대뜸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연재는 숙였던 허리를 펴고 현조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처음이었다. 현조가 먼저 인사를 건네 온 것은.

집무실 안으로 커피를 들고 들어서자 이미 책상에 앉아 서류를 살피던 현조가 입을 열었다.

“권정욱 실장 올 때 되지 않았습니까?”

진한 향기가 그득하게 올라오는 커피를 막 내려놓는데 현조가 물었다. 쟁반을 품에 안은 연재가 날짜를 헤아렸다.

“네, 일정에 차질이 없으시다면 오늘 15시쯤 회사로 복귀하십니다.”

제주도 지점이 무사히 오픈했다는 연락은 이미 왔으니, 차질이 있을 리 만무했다.

“오늘은 긴급한 건이 아니면 서면 보고로 돌려요. 오후 일정도 딱히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있어도 중요한 건 아니면 다음으로 적당히 미루고.”

“네, 전무님. 더 지시하실 사항 없으십니까?”

“없어요.”

집무실에서 빠져나온 연재가 곧 사내 메신저를 열어 단체채팅방에 공지를 띄웠다.

[서면보고 17시 일괄 결재]

긴급한 일이 아니면 오늘 하루는 총괄사업부에 드나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연재는 오랜만에 느긋해졌다.

다음 달 비서실 예산을 짜고, 이번 달 경비 처리를 해 둘 생각이었다. 여유가 있을 때 미리미리 해 두지 않으면 월말에 골치 아파진다.

2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집중하느라 피곤한 몸을 기지개를 켜고 목을 한 바퀴 돌리는데 익숙한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생각해 봤는데.”

그렇게 유령처럼 나타나서 갑자기 말을 하시면 심장이 남아나질 않습니다. 전무님.

“외조부를 뵈러 갈 때 말입니다.”

하품까지 했으면 낭패라고 생각하면서 연재는 눈만 깜박였다.

“연인처럼 보이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연인처럼요……?”

스킨십을 말하는 걸까? 연기에 필요하다면서 손도 잡고 막? 그런 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

“생각하고 있는 그거 맞아요.”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아시고.”

“스킨십 말입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연재가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어째 날이 갈수록 그쪽 센서가 더욱 민감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디까지 괜찮을 것 같습니까?”

그렇게 갑자기 물어보면 대답할 말을 아직 생각하지 못했는데.

“예를 들어 주시면…….”

“손부터 포옹을 거쳐 입술…….”

“너무 과하게 몰입하신 것 같습니다. 손, 손만 잡아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연재가 정색하며 대답하자 현조가 아쉬운 표정으로 연재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불쾌했나? 어느 부분이 불쾌했던 걸까? 말을 자른 것? 아니면…….

“좋습니다. 그럼 ‘손’만 잡도록 노력하죠.”

어감이 좀 이상한데? 연재는 갸우뚱했지만, 현조는 이미 뒤돌아 집무실 문을 소리 나게 닫은 후였다.

***

“연재 씨, 오랜만.”

전무실에 들어선 정욱이 역시나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오늘은 대면 보고를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정욱은 예외였다.

제주도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현조를 만나기 위해 온 듯했다.

“실장님 오셨어요? 출장은 어떠셨어요?”

“매장 오픈 완료. 이로써 50호점 탄생인가?”

소담 50호점은 특별했다. 제주도에 탄생한 첫 지점이기 때문이었다.

지점이 생기면서 제주도 사업본부도 신설할 계획이라 선화가 특별히 정욱을 보낸 것이었다.

“그렇네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별거 아니라는 듯 웃음을 머금은 정욱이 전무실을 향해 돌아섰다.

“연재 씨, 혹시 연애해요?”

“네?”

정욱이 빤히 쳐다봤다. 너무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얼굴이 화끈댈 정도였다.

“요즘 좀 달라 보여서요.”

다르게 느껴질 만큼 뭔가 티를 낸 걸까? 연재는 자신의 행동을 가만히 돌아봤다. 딱히 드러내진 않은 것 같은데 괜히 찔렸다.

“아닌가? 내 눈에만 그렇게 보였나?”

“제가 이상했나요?”

“이상한 건 아니고, 아니에요. 일 봐요.”

환하게 웃으며 정욱이 돌아섰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가지 않아 지워졌다.

연재가 달라 보였다. 저렇게 분위기가 있는 사람이었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묘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노크한 정욱이 현조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전무님, 바쁘십니까?”

“왔으면 앉아.”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소파에 앉은 정욱이 현조를 빤히 쳐다봤다. 곧 현조가 의자에서 일어나 소파로 걸어와 앉았다.

“지점 오픈은 무사히 마쳤습니다. 제주점 지점장님께서 조만간 전무님도 한번 뵙고 싶어 하시더군요.”

“내가 이치영 씨를 만날 일은 없을 거야. 영원히.”

그 말에 정욱이 피식피식 웃고 말았다.

이치영 점장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학창시절 유난히 장난기가 많았던지라 현조는 치를 떨며 싫어했다.

그런 동창이 뜬금없이 소담을 오픈하겠다고 찾아왔을 땐 어이가 없긴 했었다.

“이치영은 여전하던데. 네 이야기만 했다 하면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느라 정신을 못 차리더라.”

“그 자식 원래 사이코였어, 잊었어?”

“아, 뭐. 술 먹고 하는 실수야 누구나…….”

“그 실수가 매번 나에게 향했다는 것이 문제지.”

현조의 말에 정욱이 고개를 슬며시 돌리고 웃음을 참느라 애썼다. 잠시 후, 노크와 함께 연재가 차를 들고 들어왔다.

“차 드세요. 실장님.”

현조의 시선이 연재에게 자연스레 이동했다.

“고마워. 연재 씨.”

영업용 미소라는 것을 알지만, 현조는 타인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는 연재가 오늘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한 번 거슬리기 시작하자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제주점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보도록 하죠. 권 실장.”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연재가 나가는 것을 노려보듯 하는 현조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너 오늘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매장 오픈 신경 쓰느라 피곤할 텐데 일찍 들어가서 쉬어.”

“나 아직 차 한 모금도 못 마셨는데.”

“마시고 가.”

기분이 묘했다. 생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기도 했다. 연재 동생과 있을 때 느껴지지 않던 미묘한 온도 차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분명하게 느껴지지만,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란 점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

“퇴근하죠.”

연재는 지금 막 집무실에서 나와 자신 앞에 서 있는 현조를 빤히 쳐다봤다.

“일이 남았습니까? 내가 퇴근하는데?”

모시는 상사가 퇴근하는데 일이 남았느냐고 묻는다. 물론 상사가 퇴근하면 비서의 일은 끝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같이 퇴근하자는 것처럼 보여서 몹시 당황스럽다.

“저도 곧 퇴근하겠습니다.”

“기다릴 테니 정리해요.”

어째서요? 라고 묻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에 연재는 묵묵하게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자, 자기야.”

가방을 챙기려 허리를 숙였던 연재는 등줄기로 소름이 일었다. 당황한 나머지 딸꾹질이 나오고 말았다.

낯부끄러워서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손부채질을 하는데 눈앞에 불쑥 하얗고 커다란 손바닥이 나타났다.

“익숙해져야죠. 연기를 제대로 하려면.”

“아, 저. 그…….”

언제나 정확한 발음으로 정확한 언어를 구사해 왔다고 자부했다. 그런 비서 생활에 커다란 위기가 닥쳤다. 말 못 하는 사람처럼 버벅거리고 있다. 몹시도 당황하니 그걸 바로잡을 여력도 없었다.

입만 벙긋거리며 눈앞에서 생글생글 웃는 현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뿐.

“손은 된다고 해서 내밀었는데 안 됩니까?”

“지금은 단둘이고, 여긴 회산데요.”

“그래서 ‘연습’이라고 말한 것 같은데, 자신 있어요?”

“자신이요?”

“실전에 바로 투입해서 잘할 자신.”

화사하게 웃으며 능청스럽게 이야기한다. 저 정도라면 자신은 몰라도 현조는 실전에서도 완벽하게 해낼 것 같다.

굳이 이런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노력하겠습니다.”

“같이 해요. 그 노력.”

“전무님은 이미 충분하신 것 같아서요.”

“그 말, 나더러 기대하라는 뜻입니까?”

아니, 거기서 왜 말이 그렇게 튀어 가는 건가요.

“좋습니다. 실전, 기대하도록 하죠.”

장난일까? 진심일까? 아니면 놀리는 걸까?

연재는 앞서 걷는 현조의 등을 빤히 바라보다 따라나섰다. 직원용 승강기가 아닌 임원용 승강기에 탔고, 승강기 안은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압박감에 숨이 막혔다. 뜨거운 수증기로 가득한 욕실에 옷을 입고 들어간 것처럼 압박감이 대단했다.

“자기라는 호칭 마음에 안 들어요?”

“마음에 안 드는 문제를 떠나 당황스럽고, 어색합니다.”

“그럼 역시나 익숙해질 때까지 단련하는 방법이 최선이겠군요. 손은 안 되니까, 호칭이라도 내가 도와주도록 하죠.”

현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연재는 그제야 현조의 의중을 파악했다.

이 남자는 지금 즐기고 있다!

“이상형이 어떻게 됩니까?”

혼자만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억울해서 연재도 각오를 다지듯 마음을 바꿨다. 까짓 연기라고 생각하자. 모든 것은 그저 목적을 위한 연기일 뿐이다.

“목소리 좋은데 노래도 잘 부르는 남자요.”

그런데 이 남자 갑자기 확 돌아서더니 환하게 웃는다. 어쩐지 확신이 가득한, 오만한 웃음 같다. 그런데도 너무 근사해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렇게 웃는 사람이었구나. 언제나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만 짓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환하게 활짝 웃는 사람이었다.

“몰랐습니까?”

그러더니 평소보다 10배는 더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한다.

“나, 굉장히 잘합니다. 노래.”

당연하다는 듯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애써 의식적으로 거부하려 했던 것이 한순간에 훅 치고 들어왔다. 이 남자의 목소리와 이 남자의 페로몬이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오감을 자극했다.

욕실처럼 답답하던 승강기 안에서 연재는 이제 얼굴이 점차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

말을 해야 하는데, 목구멍이 꽉 잠겨서 입을 벌린 채 빤히, 그저 빤히 바라보다 태연하게 마주 부딪혀 오는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띵- 마법의 주문이 풀리는 것처럼 승강기의 문이 열렸다.

“내리죠. 자기야.”

그가 악마라면 영혼부터 내주고 싶은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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