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68)

결혼의 의미

침묵이 흘렀다.

무겁고 탁한 침묵이 목구멍에 걸려 넓은 홀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공간, 단둘만이 존재하는 장소.

하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남자의 시선에 짓눌려 좁고 깊은 우물에 빠져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잖습니까.”

그가 생긋 웃음을 머금자 공기의 질이 달라진 것처럼 단숨에 숨 쉬는 것이 편해졌다. 압박감에서 해방되자 살 것 같았다.

“얼마든 질문할 기회도 줬고.”

현조를 둘러싼 소문을 떠올려봤다.

사생아, 외도. 그런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을 묻기엔 지나치게 거리가 멀다는 것이 연재의 생각이었다.

아니, 아무리 가까워도 쉽게 꺼내기 힘든 말들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 있을 테니까.”

한마디로 나는 언제나 열려 있으니, 네가 감당할 만큼만 궁금하면 된다는 뜻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감 하나는 국가대표급이었다.

“정말 저라도 괜찮은 건가요?”

기다렸다는 듯이 현조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속삭이고 싶다는 의도가 느껴진다면, 이 또한 그를 너무 잘 알게 된 부작용일까.

“확신이 없었는데.”

“…….”

“그동안 서연재 씨가 내게 한 짓이 뭘까 고민하자 답은 없고, 결심만 굳혀지더군요.”

무슨 짓이라니, 무슨 짓은 지금 당신이 내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서연재 씨가 대답해 봐요.”

“제가 그걸, 아니 그건, 전무님 마음의 문제 같은데…….”

“그래서 신기하고 답답하지 뭡니까.”

현조가 턱을 괸 상태로 눈을 접었다.

“고민을 해도 답은 안 나오고, 결심은 더욱 굳건해지니.”

“그건 말이 안 되는데…….”

“보기 좋게 서연재 씨가 내 마음을 훔친 거로 해 두죠.”

이젠 절도범이 되었다.

“그러니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어요?”

“제가 언제.”

“압니다.”

또 뭘?

“책임감이 무척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연재를 완벽하게 흔들었다는 것을 그 역시 확신하고 있었다.

***

‘보기 좋게 서연재 씨가 내 마음을 훔친 거로 해 두죠.’

눈을 곱게 접고 달콤하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흔들리고 말았다. 얕은 감정은 그가 던진 돌멩이에 끝없는 파장을 만들었다. 어쩌면 얕은 감정이라서 쉽게 흔들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민은 이제부터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앞에 사람이 있는 것조차 잊었다. 지금은 점심시간이고, 이곳은 직원 식당이었다. 숟가락에 국을 뜨다 멈춘 채 연재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맛있네요.”

“응? 뭐가? 국이? 난 좀 싱거워서 별론데.”

“저도요. 오늘은 좀 간이 안 맞는 것 같은데, 연재 선배는 좀 싱겁게 드시나 보다.”

이제는 뿔뿔이 흩어진 사장실 비서팀의 원년 멤버는 점심시간이 되면 직원 식당에서 만났다. 셋 중 가장 연장자인 금나리는 마케팅기획부로 두 번째 연장자인 연재는 총괄사업부로 그리고 막내인 은지영만 여전히 사장실에 남았다.

“그래요? 전 딱인데.”

“싱겁게 먹어야 건강에 좋데.”

“맞아요. 연재 선배가 그래서 피부도 좋은가 봐요.”

연재는 자신이 무슨 말을 얼마나 성의 없게 뱉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그저 머릿속은 어제 현조와 함께 나눈 대화로 가득했다.

종일 이런 상태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결국, 점심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끝났고, 퇴근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냥 갈 수도 없고.’

퇴근하겠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집무실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다. 거의 매일 저 안에 들어가면 일이 생겼으니까.

하지만 거쳐야 할 과정은 거쳐야 하니까.

노크 후, 문을 열고 들어가자 현조가 창문을 향해 서 있었다.

“전무님, 필요하신 것 없으시면 이만 퇴근하도록 하겠습니다.”

미동도 하지 않던 현조가 천천히 돌아섰다.

“고민이 많아서 힘들군요.”

고민은 제가 더 많은 것 같은데요.

“고민이라고 하시면…….”

“언제일까요.”

다 생략하고 언제냐고 물어보시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연재가 입술을 깨물었다.

“기다리는 일이 이토록 힘든 줄 처음 알았습니다.”

주춤, 연재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현조는 여전히 창문 앞에 서 있었는데 혼자 찔린 탓이었다.

여전히 대답을 미룬 채였으니까.

“오해하지 말아요. 다그칠 생각은 없으니까. 다만.”

다만?

“심장이 자꾸 쪼그라드는 느낌이 생경해서 견디기 어려울 뿐입니다.”

허억, 연재는 주춤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위험하다. 심장에 해로운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보다 저 남자다.

“그래서 말인데,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아, 네. 얼마든지.”

뭔가 눈빛이 반짝 빛나는 것처럼 보인 것은 착각일까? 고작 질문하나에 눈을 빛낼 위인이던가.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가고, 입술이 바짝 말라 혀로 입술을 축였다. 무슨 질문 하나 하는데 이렇게 멀리 돌아와.

“좋아하는 색이 어떻게 됩니까?”

핏, 잇새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무슨 대단한 질문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민트색입니다.”

“민트, 민트라. 그런 색이 있으려나.”

“네?”

“혼잣말입니다.”

혼잣말이 다 들리는데요.

“시간 됐으니 그만 퇴근하도록 해요. 수고했어요.”

“네, 전무님. 내일 뵙겠습니다.”

현조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내일, 봐요.”

별것 아닌 인사가 너무 달다.

***

출근하자마자 연재는 눈을 의심했다.

“뭐지, 저건……?”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뭘 잘못 먹으면 저런 게 눈에 보이는 걸까?

“생일 축하해요.”

익숙하고 달달한 목소리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들렸다. 항상 상사보다 일찍 출근했는데, 상사가 버젓이 먼저 출근해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넸다.

집무실 문에 기대선 눈부신 남자가 화사하게 웃으면서 건네는 축하 인사는 그 자체로 선물이었다.

“민트색 좋아한다길래. 특별 주문했어요.”

연재의 29번째 생일이었다. 꽃을 받아 본 기억이라고는 졸업식이 전부였다. 그리고 이렇게 특별한 꽃은 본 적도 없었다.

“가, 감사합니다.”

“마음엔 들어요?”

“흡족합니다.”

눈에 꽉 차게 들어온 것은 꽃밭이었다. 그러니까 비서 데스크 위에 꽃밭처럼 거대한 꽃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그것도 전부 민트색 장미였다.

어설픈 파란색도 아닌, 정말 민트색이었다. 투명한 빛이 도는 신비로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민트색 장미는 조명을 받아 더욱 아름다웠다.

“꽃말조차 없다더군요.”

꽃말조차 만들어지지 않는 민트 장미를 그는 눈앞에 가져다줬다.

“신비로움.”

연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꽃을 본 순간 느낀 감상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현조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말려 올라갔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 진지해서 미소 끝에 쓸쓸함이 묻어났다.

우리의 결혼이 우리의 사랑의 결실이 된다면, 그 자체로 신비로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이루어지지 않을 바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너무 많이 흔들어서는 안 된다. 그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저 여자를 보고 있으면 자꾸 조금 더 흔들어 보고 싶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자신이 생각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자조하고 말았다.

‘선을 넘어서는 안 되지.’

정신 차려, 류현조.

현조는 자신의 이름을 수없이 되새겼다. 마치, 잊어서는 안 되는 주문처럼.

***

“또야?”

모친이 내민 것은 다음 맞선 상대 정보였다.

“진희네 엄마가 추천해 준 사람이야. 이번에도 실수하면 알아서 해.”

진희 모친과 연재 모친은 대학 동기였다. 제법 사이가 가까웠고, 집도 가까운 편이라서 주말마다 만났다. 거기다 진희 모친에게 꽃꽂이를 취미로 배우는 중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맞선 상대까지 물어오는 건 좀 아니지 않은가.

“진희가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하는 바람에 너한테 넘긴 거야. 그쪽 꽃시장에서 알아주는 부자라더라. 남자는 지금 회계사 사무실을 차렸다고 하고.”

“아니, 그걸 왜.”

답답하지만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진희 남자 친구가 제 동생이니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니까.

속이 꽉 막혀서 식탁에 있는 생수만 벌컥벌컥 마셨다.

“아니면 꽃바구니 데려오래도.”

“엄마!”

“정말 아니야?”

며칠 전 받아온 꽃바구니 때문에 모친은 엄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상상이 전혀 엇나간 것은 아니지만.

“누가 마음도 없는데 비싼 돈 들여서 꽃을 사줘? 엄마는 다른 거 안 봐. 성실하기만 하면 돼.”

“엄마, 난 맞선은 안 나가요.”

“선택해. 데려오든 맞선을 나가든.”

낭패다. 사면초가였다.

***

그래, 사면초가다.

이젠 물러날 곳이 없었다. 연재는 제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하는 제안을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외조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그 이후에는 서 비서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습니다.”

결국, 흔들렸고 마음은 틈을 내비쳤다. 그와 퇴근 후 대화를 한 지 꼭, 일주일 만이었다. 마음의 틈으로 스며들기 시작한 현조를 더는 거부할 수 없었다.

“비공개로 해도 좋습니다. 서연재 씨가 나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사람은 양가 가족한정으로 해도 상관없습니다.”

스며들었지만, 마음을 온전히 주고받기에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상황은 급했고, 여유는 없었다.

결혼이 먼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서연재 씨는 결혼에 책임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 훔친 건 책임지라고 했으면서, 농담이었지만 설렜는데. 결혼은 역시 현실임이 분명하다.

“사랑은 어려운 이야기고, 내게 주어진 시간은 촉박합니다. 최선을 고민해 봤지만, 좋은 결과를 얻기는 힘들더군요.”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그는 면죄부를 먼저 제시했다. 외조부인 김 회장의 건강이 더욱 악화 되었고 시간은 촉박했다.

그리고 사랑은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진심이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지금, 딱 이만큼의 거리가 그에겐 필요했다.

“약속하겠습니다. 어떤 피해도 입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란 것을.”

서운함이 밀려왔다.

어차피 결혼이 목적이면 결혼만 달성하고 깨끗하게 정리하자는 말처럼 들렸다. 그동안 보여 준 모습들은 전부, 결혼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듯이 들렸다.

“그러니 서연재 씨의 시간을 조금만 내게 빌려주면 안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사람들을 속이는 일 아닐까요.”

“비난은 제가 다 감수하겠습니다.”

김 회장을 위한 쇼였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김 회장에게 받았던 사랑을 보답하기 위해서 연극이면 충분하다.

연극이 끝나면, 원래 있던 자리로 티끌 하나 묻히지 않고 돌려놓을 것이다.

“비밀리에 결혼식만 올리면 됩니다. 혼인 신고도 하지 않을 거고.”

구애하겠다던 말은 그러니까, 그럴싸한 포장일 뿐. 그 안에 숨은 진실은 이것이었다. 어쩌면 이편이 더 현실적이고, 와닿는 설득이었다.

신데렐라는 동화 속 이야기고, 신분 상승은 드라마 속 이야기다.

현실은 서로 필요한 사람끼리 연극으로 짜 맞출 수도 있는 것이 결혼이었다.

‘그런데 왜 자꾸 마음이 허전하고, 기분이 이상할까.’

눈을 질끈 감았다. 올해 결혼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거 아니야? 결혼했다 헤어지게 되더라도 더는 점쟁이의 말에 휘둘리지 않게 될 것이다.

“연극으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연극이라는 현조의 말이 뇌리에 박혔다.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각자의 필요에 의한 임시방편이 될 것이고, 기한이 끝나면 깨끗하게 남이 되는 관계.

그렇게 이 결혼에 의미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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