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비밀 하나씩
진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상황을 터놓고 의논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모친은 무조건 좋아할 테고, 부친은 정신 나갔다고 생각하실 게 분명하다. 아니, 남의 멀쩡한 딸을 데리고 장난질을 하는 나쁜 놈이라고 쫓아가 멱살을 잡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연준은 그럴 줄 알았다고 하겠지만.
- 응, 연재야.
“나 지금 가도 돼?”
- 당연하지. 30분 후면 나도 집에 도착해. 집에서 보자.
전화를 끊고 다시 한 번 오늘의 일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니, 정리될 리 없었다. 차창을 내리자 흐린 하늘에서 기어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피스텔 입구를 통과해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진희의 집은 연재네 회사에서 더 가까웠다. 1층 상가에서 간단히 먹을 치즈케이크를 사 들고 10층을 눌렀다.
먼저 도착해 소파에 앉아 기다리자 진희가 왔다.
“연재 저녁은 먹었어?”
“아직, 너도?”
“응, 뭐 먹을래? 시켜 먹자.”
밥보다 술이 당겼다. 맨정신으로 이야기를 꺼내자니 굉장히 어색하고 쑥스러울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월요일이 아니던가.
고민하던 연재는 자신이 정해 놓은 선을 넘기로 했다.
“맥주 있어?”
연재의 말에 진희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술? 월요일부터? 너 무슨 일 있지?”
술을 즐기지만 절대 월요일부터 마시는 일은 없다. 상사를 보필하는 데 있어 자기 관리 역시 필수니까.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따르는 법이다. 거기다 원인 제공자가 류현조였으니 잠시 이성은 꺼놓기로 했다.
“맥주 있으면, 치킨 먹자.”
진희는 더 묻지 않고 주문했다. 10년을 한결같이 봐왔다, 스스로 정해 놓은 룰을 어긴다는 것은 그만큼 신중한 일이란 뜻일 테니까.
치킨은 배달의 민족답게 아주 빨리 왔다.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온 진희가 야무지게 까서 연재에게 내밀었다.
“이야기해 봐. 뭔데?”
치킨에 맥주가 들어가자 진희가 압박하기 시작했다. 어서 토해내란 뜻이었다.
“음…….”
“고민 집어치우고, 3초 안에 말 안 하면 나 안 들을 거야.”
말을 꾸밀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굳이 애써 돌려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 연재는 곧 입을 열었다.
“전무님이 결혼하재.”
캑캑 거리는 기침 소리가 요란하게 이어졌다. 연재가 미안함에 휴지를 뽑아 진희에게 내밀었다.
“그 말 농담 아니고 진짜란 말이야?”
“그랬나 봐.”
“남 일처럼 말하지 마. 며칠 사이에 썸 탄 거야?”
며칠 사이 썸이라니, 물론 며칠 사이 조금 이상해지긴 했지만. 어디까지 그것은 자신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
그런 사이에 결혼이라니 더 말이 안 되지만.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 농담이라고 하기에는 좀…….”
오늘 맞선자리에 등장한 것도 장난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과하지 않았나? 절묘하게 등장해 순식간에 맞선남을 제압하던 모습은 또 봐도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놀라웠다.
‘이 여자랑 결혼할 남자.’
화악, 얼굴에 단박에 열이 올랐다. 현조가 했던 말이 또다시 떠오르더니 귓속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아랫입술을 말아 문 연재가 손에 쥐고 있던 맥주를 단번에 들이켰다.
“왜 그러는 건데? 너 오늘도 무슨 일 있었지?”
“맞선 보다가 걸렸어.”
“맙소사! 네가 맞선 보는 건 어떻게 알고?”
한 마디, 한 마디 꺼낼수록 흥분하는 진희를 보며 연재는 한숨을 더욱 길게 내쉬었다.
“엄마가 나 내보내려고 우리 회사 1층 커피숍으로 약속을 잡으셨거든.”
“그런데 하필 그 시간에 너희 전무님이 내려와서 네 맞선을 깽판 놨다는 거야?”
“그, 그랬지.”
이야기하다 보니 이상하긴 했다. 아무리 회사 근처라지만, 어떻게 시간을 맞춘 것처럼 나타난 것일까.
설마 감시하고 있는 건가? 과대망상이 지나쳤다. 연재는 다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면 네 뒤를 밟았던가?”
“스톱, 너무 멀리 갔어. 전무님 야근하실 때마다 그 카페에서 커피 사다 드셔.”
“그래? 그렇다고 해도 너무 절묘한데…….”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던 진희의 상상력이 바람이 쏘옥 빠져나가는 것처럼 수그러들었다.
물론 사무실에 가서 이런저런 말을 더 들어야 했지만 그렇다고 뒤를 밟았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엔 그 사람은 너무도 바빴고, 그 정도로 절박할 이유도 없을 테니까.
이유라…….
‘결혼하고 싶은 이유, 하나만 생각해 봐요.’
그렇게 귀에 바짝 대고 속삭이지 말아요. 제발. 연재는 회상 속에서조차 생생한 감각에 진저리쳐졌다.
“넌 어때?”
“어떠냐니?”
“맞선 장소에 갑자기 나타났다며, 그것도 두 번이나. 너희 전무님이 짠, 하고 등장했을 때. 네 기분은 어땠느냐고.”
어땠냐니, 당연히…….
“놀랐지.”
“놀란 거야 당연하고, 그다음에 싫었어? 좋았어? 아니면 설렜어?”
예시를 들어 주는 진희의 말을 듣다가 연재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냥, 심장이 좀 뛰었달까?”
그거 보라면서 진희가 연재의 어깨를 치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어깨로 전해지는 통증보다 어째서 자신의 심장이 뛰었던 건지 도리어 그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게 설레는 거야.”
“내가 왜 설렜을까?”
“가르쳐 줄까?”
싱글싱글 웃으며 진희가 재미있다는 듯이 묻는다. 연재는 어리둥절해서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그럼 재미없겠지?”
생글생글 웃는 진희의 장난도 이미 안중에 없었다. 왜 심장이 뛰었는지, 심장이 뛰었던 순간을 떠올리느라 머릿속이 분주했다.
***
퇴근하겠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들어온 집무실이었다.
“어젠 잘 들어갔습니까?”
퇴근 무렵이 되어서야 생각났다는 서류에 시선을 둔 채 현조가 물었다.
“네, 전무님.”
들어가기야 잘 들어갔다. 진희의 말은 여러모로 충격이었고, 대리운전을 해 준 연준과 실랑이를 했다.
집에 도착하자 맞선이 어그러진 소식을 전해 들은 모친에게 등짝을 맞았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을 모친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선보기 싫다고 그런 장난을 쳤냐며 다그칠 때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으나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만년필을 손에 쥔 현조가 그것을 손가락 사이에서 한 바퀴 돌리다 멈추고, 탁 소리가 나게 책상에 놓았다.
“결혼하고 싶은 이유, 생각해 봤습니까?”
기습적인 질문에 연재는 잠시 망설였다. 밤새, 그가 내준 숙제 같은 질문에 답을 구하느라 머리털이 빠지도록 고민했다.
만약 결혼이란 것을 하게 된다면 적어도.
“사랑이죠.”
연재가 결심한 듯 대답했다.
어째서인지 퇴근 시간만 되면 현조에게 붙잡혀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은 기분 탓일까?
“사랑이라.”
오늘도 그랬다. 어차피 퇴근 시간 이후 약속이 정해진 것도 아니어서 뭐 상관없긴 했지만, 그를 사적으로 대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어딘지 조금 불편했다.
“그럼, 여기서 질문 하나 더 하죠.”
여기서 추가할 질문이 무엇일지 궁금해진 연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을 찾는 중입니까?”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서 비서가 맞선을 보러 다니는 이유 말입니다.”
“그건.”
결혼에 쫓기고 있기 때문이죠.
“보통은 연애하지 않을까 싶은데.”
“…….”
“사랑을 찾기 위해서 말입니다.”
“……아.”
“서 비서는 여러모로 특별한 모양입니다. 취미도, 성격도, 세계관도.”
그렇게 해석되는 건가? 맞선을 보는 하찮은 이유에서 한 사람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니 대단하다고 해 줘야 하는 거겠지?
“난 고작 적당히 결혼할 상대나 찾았는데.”
뒤끝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건 분명 어제 맞선에 대한 돌려 깍기로 들리는 건 착각이 아니겠지.
“저에 대한 오해가 깊어지신 것 같습니다.”
“어느 부분에서 말입니까.”
현조가 회전의자를 반 바퀴 돌리더니 턱을 살짝 치켜들고 서 있는 연재와 시선을 맞췄다.
“아니, 아닙니다.”
그 눈을 마주치자 해야 할 말이 조용히 목구멍을 틀어막고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아니라고 하면, 추가적인 질문을 할 수가 없는데.”
그것참 곤란한 일이 아니냐는 듯 현조가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이번에도 놀리는 중인 것이 분명하다.
난처해하는 것 같지만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가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남자에게 점점 길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머리는 반항해도 심장은 무언가를 잔뜩 기대하는 것처럼 그 옆에만 오면 두근두근, 콩닥콩닥해 댔다.
“그럼 방향을 바꿔 볼까요.”
이번엔 그의 입술이 아닌,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가 참으로 매력적이었고, 그것을 마주 대하는 심장은 쓸데없이 뛰었다.
꼴깍. 마른침을 저절로 삼켰다.
“서 비서는 내가 맛있어 보이나 봅니다.”
이건 또 무슨 벼락 맞을 소리란 말인가. 심장도 놀라서 쿵쾅쿵쾅으로 강도가 바뀌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자꾸 삼키길래. 타액을.”
아니, 보통은 침이라고 하지 않나? 그런데 타액이란 말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이유는 대체 뭐란 말인가.
저 남자의 입을 통해 필터링 됐을 뿐인데, 왜 야하게 들리냔 말이다.
이번엔 침도 삼킬 수 없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나에 대해 궁금한 건 없습니까?”
눈을 번쩍 떴다. 대화의 내용보다는 바람이 불 듯 옅게 흩어진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봄바람이 일 듯 따사롭고, 오월의 햇살처럼 미약하게 부서지는 웃음소리에 손이 닿지 않는 등줄기 어디쯤이 간지러웠다.
“기브 앤 테이크. 서 비서의 비밀 하나를 알려 줬으면, 내 비밀 하나쯤 궁금해 보란 뜻입니다.”
“아…….”
마치 하나라도 궁금해하지 않으면 당장 자기소개서라도 써서 보여 줄 것 같은 기세에 눌려 연재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서 비서 그거 좋아하지 않습니까?”
또 무슨 말을 하시려고.
“내 사생활 캐는 거.”
“오해가 또 깊어지신 것 같습니다. 전무님.”
가만히 당하기만 할쏘냐.
“오해라. 실망스럽군요.”
“어느 부분이 실망스러우신 건지.”
“굳이 상처받은 티는 내고 싶지 않으니까. 나만 알고 있겠습니다.”
이번엔 그의 입과 눈이 동시에 호선을 그렸다.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웃고 있는 남자가 눈이 부셔서 연재는 마른침을 삼키려다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 괴롭게 할 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