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68)

결혼하고 싶은 이유

“늦어서 죄송합니다.”

미안한 기색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뻔뻔한 얼굴이다. 태연하게 자리에 앉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는데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금 웃은 거야? 오기 싫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곤혹인데 상대방의 예의 없는 태도가 불쾌함을 부추겼다.

“김민준입니다.”

“서연재예요.”

“초면이지만 서로 알 건 알 테니까. 모른 척 물어보는 거 생략하죠.”

이하동문이라 쏘아붙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러니까 이 자리로 말할 것 같으면 ‘맞선’ 자리였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지난밤, 불시에 방으로 들이닥친 모친이 맞선을 선포했다.

‘이번 주 금요일 저녁 7시, 너희 회사 1층 커피숍. 약속 잡아 놨으니까 나가기만 해.’

‘싫다 소리 하지 말고 일단 나가서 만나 봐. 올해 결혼까지 하려면 지금부터 서둘러도 늦어.’

‘교장 선생님이 추천한 교사니까, 아버지 얼굴에 먹칠할 생각 말고.’

부친의 직장 상사를 걸고넘어지자 별수 없었다. 부친 얼굴에 먹칠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다른 것이었다.

‘생각해 봐요. 처음 보는 사람이랑 통성명하고, 맞지도 않는 취미 같은 거나 물어보면서 조건 따져 가며 맞선 봐서 결혼하는 것보다 이쪽이 더 현실적이지 않습니까?’

‘일주일이면 되겠습니까?’

현조가 머릿속에 들어앉아 있는 기분이다.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던 현조는 그 후 한 마디도 더 하지 않았다. 꼭, 그전에 있었던 모든 일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색 하나 하지 않았다.

그러니 헷갈리는 것은 연재 몫이었다.

“질문 생략하자고 했더니 말을 안 하네요?”

정말 꿈 아니었을까?

“이봐요.”

마치 화장실에서 볼일 보고 나온 사람처럼 뒤가 너무 깨끗하잖아? 나 혼자만 생각하고 고민하는 거 아냐?

“서연재 씨!”

움찔, 몸을 떠는 연재를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시에 쳐다봤다.

“네? 무슨 일이죠?”

“하, 진짜. 서 선생님 따님이라고 일부러 예의 차렸는데 기분 나쁘네.”

“죄송해요. 무슨 말씀 하셨죠?”

근데 당신 목소리가 너무 큰 거 아닙니까? 여기 내 회사 사옥인데 아는 사람 있으면 반갑다고 달려오겠어요. 아주 그냥 맞선본다고 온 동네에 광고를 하세요.

‘가만, 이 카페 전무님 단골 아니었나!’

현조가 평소 야근하며 마시는 커피는 이곳에서 공수했다. 아침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빈 일회용 컵을 치우며 이곳 커피를 무던히도 자주 마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도 이 카페에 현조가 들이닥칠 수 있다는 뜻이었고.

설마, 레이더가 달린 것도 아니고 맞선 볼 때마다 찾아내겠어?

“나왔으면 적어도 서로 대화라는 걸 조금은 할 필요가 있지 않겠어요?”

“생략하자고 하셔서요.”

“내가 그렇게 별로예요?”

노골적으로 물으면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는 남자 때문에 테이블을 사이에 둔 거리가 가까워졌다. 연재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쭉 뺐다.

“커피 마시고 일어나요. 서 선생님께는 제가 대충 둘러대죠.”

“감사합니다.”

이렇게 또 한 번의 맞선이 아름답게 마무리되는구나. 맞선 별거 아니네. 흐뭇하게 생각하면 안 되는 거였다.

“이러니 내가 눈을 뗄 수가 없지.”

익숙한 목소리에 연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서연재, 생각하라고 준 시간이 너무 길어서 심심했나?”

“누구야, 당신은?”

“이 여자 생각 속에 사는 남자.”

“뭐?”

“돌려 말하니까 어렵나? 이 여자랑 결혼할 남자.”

입이 떡 벌어졌다.

엄마, 나 진짜 결혼하게 생겼어.

***

남자는 모든 것을 다 가졌다. 돈도, 명예도, 거기에 완벽에 가까운 외모까지. 어디 그것뿐인가. 그에 어울리는 환상적인 목소리까지 갖춘 남자다.

그런 남자와 결혼을 논하고 있다. 그것도 신성한 직장에서.

“생각해 봤습니까?”

며칠을 고민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사정 따위 남자에게 지금 먹히지 않을 것이다. 엉뚱한 사람과 버젓이 맞선을 보다 걸렸고, 그로 인해 남자는 몹시도 불쾌해 보였으니까.

“아직 날짜가 남았는…….”

“내가 시간을 너무 길게 주는 바람에 서 비서가 다른 남자와 맞선을 보게 된 것 아닙니까?”

그래서 네가 다른 남자와 맞선까지 보지 않았느냐고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왜 자꾸 오해할 상황이 반복되는 것인지 혀라도 깨물고 싶지만, 처음부터 오해라는 범위도 애매했다.

어쨌든 아직은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자 그럼 고민에 대한 대답은?”

“전무님께서도 아직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을?”

“저와 결혼하고 싶은 이유라던가, 결혼 상대가 저여야 하는 이유도.”

잘생긴 이마가 꿈틀하는 것 같더니 이내 반듯하게 펴졌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그는 언제나 여유가 넘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직업정신이 샘솟았다. 저 완벽한 여유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보필하고 싶은 욕구였다.

“맞선, 그만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다. 처음이야 진희를 대신해 얼결에 나간 자리지만, 어차피 결혼이 성사되는 날까지 모친은 끝내 맞선자리에 내보낼 것이다.

딸이 평생 혼자 살 팔자라는데, 그걸 알고 가만히 있을 모친이 아니니까.

“처음 보는 사람과 통성명하고, 궁금하지도 않은 취미 따위나 물어보면서 조건을 재고 상대를 고르고 골라 대는 맞선 시장을 벗어나는 방법. 목적이 같은 우리가 의기투합하면 간단합니다.”

그렇다고 이쪽이 더 나은 방법 같지는 않습니다만.

“무엇보다 난 서 비서와 결혼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는 점이 중요한 포인틉니다.”

“제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그러자 오만하고 우아하게 반짝이던 남자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난, 한 번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건 제 마음이 중요한 일이니까요.”

“그럼 방법은 하나겠군요.”

그의 입술 끝이 호선을 그렸다. 몹시도 우아하고 기품까지 느껴지는 미소였는데 어째서인지 등줄기가 저릿하며 오한이 들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는 것을 보면서 연재는 침을 삼켰다.

“허락할 때까지 구애하겠습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현조의 얼굴은 몹시도 화사했다. ‘구애’라는 말이 이토록 섹시한 단어였던가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대답해 봐요. 내가 얼마나 구애해야 허락할 겁니까?”

순간이지만 그냥 해도 좋을 것 같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단순히 이성에게 느껴지는 페로몬의 영역이 결혼의 제 1조건 이라면 당장 해치워도 아무 문제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은 자본주의의 중심 대한민국.

감각이 주는 끌림에 현혹되어 냉혹한 현실이 가리키는 ‘조건’이란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저런 남자와 결혼이라니. 꿈에서나 가능한 거다.’

연재는 이성을 되찾기 위해 잠시 숨을 골랐다. 진정하고 생각해야 한다. 아깝지만, 내 남자가 되기엔 너무 과하다.

“전무님과 제 조건이 부합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 조건, 이원푸드는 업계에서 손꼽히는 중견기업이다.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덜컥 아무나와 결혼하겠다는 현조의 말을 들어주긴 할까? 어림도 없는 소리다. 시작도 하기 전에 반대에 부딪히겠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고민할 가치도 없는 문제였다. 애초부터 이 남자와 뜨거운 연애를 했던 것도 아니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1그램도 없다.

그러므로 이 결혼은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라는 뜻이며, 그의 장난일 뿐이란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전무님은 말 그대로 이 회사의 후계자이시고, 저는 그런 전무님을 보좌하는 직원일 뿐입니다.”

“흐음. 그래서?”

“전무님께서 순간적인 충동으로 제안을 하셨다고 해서 이 결혼이 성사될 수 없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계속해요.”

뭐야 브리핑하는 거야? 나 지금.

“집안 어르신들께서 허락할 리도 없을뿐더러, 저 역시 전무님과 결혼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끝까지 들은 현조가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데스크 옆에 서 있는 연재 쪽으로 한걸음 다가왔다. 앉아 있을 때와 비교도 안 될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서 마주 보게 되자 거부할 수 없는 향이 코끝을 찔러왔다.

심장이 경고등을 울리며 뜀박질을 시작했다.

“정말, 하고 싶은 이유가 단 하나도 없습니까?”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숨을 내쉬면 고스란히 그의 얼굴에 닿을 것 같아서 연재는 고개를 모로 돌렸다.

“결혼은 연애가 아니니까요. 조건이 맞는 사람과 하는 것이 맞다 생각합니다.”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대답을 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말을 뱉을 때마다 심장이 입속에서 튀어나올 것 같아서 한마디 하고 나면 곧바로 침을 삼켜야만 했다.

“조건은 배제하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꼴깍, 가까워. 너무 가까워서 생각이란 걸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고민에 빠져 눈동자를 굴리다 하필 또 시선이 부딪쳤다.

찰나의 순간 부딪친 시선에 고개를 돌릴 틈조차 없었다.

질끈. 하는 수 없이 눈을 감아 버렸다.

“다시 시간을 주도록 하죠.”

코끝을 강하게 자극하던 청량한 향이 멀어졌다. 연재는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며 눈을 떴다. 현조는 책상에서 조금 떨어진 창가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그런 현조가 갑자기 몸을 돌려 창문을 바라보고 섰다.

멀뚱멀뚱,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하는데 이상한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왜…… 저러는 거지?’

목덜미가 붉었다. 평소엔 하얗기만 하던 그의 목덜미가 셔츠 목깃부터 머리카락 아래까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당황한 거야? 연재는 어리둥절했다.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것처럼 몰아붙이던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살갗을 붉힌 채 시선을 피하려 뒤돌아 서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전무님……?”

불렀지만 대답이 선 듯 돌아오지 않았다. 대답은 한참 만에 돌아왔다. 어색하게 들뜬 것 같은 목소리로.

“결혼하고 싶은 이유, 하나만 생각해 봐요.”

몹시도 낮은 목소리 끝은 약간 갈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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