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할 결혼 나랑 하자고.
“아, 네 제가 어려서 시골에.”
서연재가 맞았다. 현조는 뜨거운 시선으로 연재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전주 본점에 내려갔던 날, 제 앞에서 재잘대던 그 서연재가 지금은 낯선 남자 앞에서 재잘대고 있었다.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가 향하는 곳엔 남자가 앉아 있었고, 그녀의 눈에 담고 있는 사람도 남자라는 사실이 못 견디게 불쾌했다.
웃긴 건, 심지어 내 것도 아닌데. 어째서 내가 이러고 있을까.
“뒷산이 놀이터라 고사리 꺾고, 버섯 따고, 뱀 잡아다 뱀술 담그는 게 취미지, 서연재는.”
불쾌함을 이기지 못하고, 평소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말을 서슴없이 뱉었다.
어깨를 움찔 떨더니 연재가 고개를 들었다. 놀란 눈동자가 끝도 없이 커지는데 가슴 한구석에서 출처가 불분명한 통쾌함이 밀려왔다.
입술을 늘여 보란 듯이 미소를 지었다.
“진희 씨?”
“이 여자, 이름이 이진희가 확실합니까? 내가 알기로는 이 여자 이름은 서연재인데.”
남자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 또한 무척이나 짜릿했는데, 비유하자면 바람을 피우다 들킨 아내와 내연남의 현장을 습격한 기분이었다.
현조는 더욱 입꼬리를 쭈욱 늘여 미소 지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죠? 진희 씨? 저 남자분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이 여자, 내 여자라고.”
알아듣지 못하는 남자에게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을 끝으로 상황은 끝났다. 어설픈 변명조차 포기한 연재를 두고 남자는 붉어진 얼굴을 한 채 자리에 일어섰다.
***
그 시각, 연준은 진희와 깜짝 데이트를 위해 공방을 찾았다.
진희 혼자 사용하는 작은 공방은 꼭 유리로 된 온실처럼 온통 꽃과 식물뿐이었다.
유리 벽 너머로 공방을 살피니 여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진희, 깜짝 놀라게 해 주지.”
놀러 온 연재를 핑계로 두세 번 왔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센터피스를 만드는 진희를 보고 한눈에 반했었다. 꽃을 만지는 섬세한 손길과 꽃을 바라보는 자상한 눈길까지. 꽃집 둘째 딸답게 예뻤다.
“오늘은 뭘 만들고 있으려나.”
문을 등지고 서 있는 뒷모습이 바빠 보였다. 연준은 살며시 문을 열고 발소리를 죽여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옷 때문인가? 원래 저 정도 살이 붙어 있었나?’
평소 진희가 즐겨 입는 색상은 블랙 계열이었는데, 오늘은 옅은 베이지 상의였다. 웨이브 머리를 하나로 묶은 모양을 보면 진희가 맞는데…….
이진희가 아니면 누구겠어. 이진희 가게인데.
“누나!”
바로 등 뒤에 멈춰선 연준이 깜찍하게 불렀다.
***
“서연재 씨는 볼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는 재주가 있군요.”
남자가 일어난 자리에 현조가 앉았다. 자연스럽게 앉은 현조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꼬았다. 몹시도 여유로운 자세를 취했지만, 얼굴은 굳은 채였다.
“여기엔 사정이……. 그런데 전무님이 지금 여기에 계신 건지.”
“운명이겠지.”
이건 또 귀신이 곡하는 소리란 말인가.
“운명이요?”
뜬금없는 운명 타령에 연재는 현조를 그저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그보다, 맞선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대체 왜 이곳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무님, 맞선은……?”
“내 맞선이 그렇게 걱정됩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맞선은 잘 끝났으니까.”
“설마……. 여기서 맞선 보신 건가요?”
현조가 고개를 끄덕였고, 연재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서울에 있는 호텔이 여기 하나뿐인 것도 아니고 어쩌다 비슷한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맞선을 보게 된 것인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는 서연재 씨도 맞선 중이었던 모양인데.”
“말씀드렸듯이 여기에는 사정이…….”
“그 사정이 뭔지 몹시도 궁금하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사정이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연재는 이해를 말하는 현조의 말을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저가 맞선을 보든, 결혼을 하든 이분이 궁금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맞은편에 앉아 있는 현조의 눈은 지나치게 화난 것처럼 보였다.
“남자 친구도 알고 있을까. 걱정도 되고.”
눈으로 찌를 것만 같다. 대체 저 눈빛은 무엇 때문이며, 저 말투는 무엇 때문에 차가운 걸까.
연재는 목이 타는 것 같아서 일단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잔을 내려놓는데, 테이블에 놓인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흘끔, 연재가 눈만 아래로 굴려 휴대전화를 쳐다봤다. 진동하는 휴대전화가 자꾸 거슬렸다.
저걸 받는다는 핑계로 그냥 집에 가 버릴까? 고민하는 동안에도 휴대전화는 계속 울렸다.
“그건 오해십니다.”
“어느 부분이?”
오해라고 말하는데 요란하게 진동하던 테이블 위 휴대전화가 끊겼다.
“그 ‘남자 친구’ 부분이요.”
“오해라면 내가 잘못 알고 있다는 뜻입니까?”
“네, 그게.”
다시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눈동자를 슬쩍 내리깔고 다시 휴대전화를 쳐다보자 이번에도 연준이었다.
‘얜 대체 왜 자꾸 전화야.’
“받아요. 아무래도 남자 친구가 눈치챈 것 같은데.”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진동하는 전화기에 정신이 팔려 현조의 뒤엣말을 흘려들은 연재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나야.”
- 이진희 지금 어디 있어!
수화기 너머에서 엄청난 고음이 쏟아졌다. 연재는 귀가 아파 귀에서 휴대전화를 뗐다.
전화를 받기 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일은 터졌고, 수습은 해야 했다. 다시 휴대전화를 귀에 가져다 대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눌렀다.
친구와 동생이 연애하면 여러모로 손이 간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조심스레 입을 뗐다.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
상사가 보고 있는 자리에서 화를 낼 수 없으니 좋은 말로 타이르듯 했지만, 테이블 아래 감춘 빈손을 꽉 움켜쥐었다.
- 아 씨, 대답부터 해.
이게 진짜. 연재는 어금니를 사리물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여기만 벗어나면 둘 다 내 손에 죽었어. 속으로 염불을 외듯 중얼댔다.
‘귀엽네.’
이마도. 통화 중인 연재가 머리를 쓸어 올리는 것을 본 현조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맞, 우리 대화는 조금 이따 만나서 천천히 할까?”
- 좋아, 하나만 대답해. 이진희 지금 맞선 보러 간 거 확실해? 확실하냐고!
좋은 말로 끊으려던 연재는 순간 뒤통수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누가 그런 소릴 해! 누구야?”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연재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중차대한 일을 대행하느라 지금 개고생 중인 자신이 버젓이 이곳에 있는데, 이진희는 그걸 또 당사자에게 들켰다는 사실에 분노 게이지가 무한정 상승해 버렸다.
‘뭐야. 서연재. 화내는 것도…….’
씩씩. 콧바람까지 내뿜는 연재를 보면서 현조는 입꼬리를 말없이 끌어 올렸다.
- 진희 누나 어머님.
응? 진희 누나 어머니임? 아니, 아줌마는 대체 애한테 무슨 말을 어떻게 한 건지.
연재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아무래도 진희 아버지가 주선한 맞선이니 어머니가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연준이와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사실은 모르고 계실 테니 이야기한 것일 테고.
“아니! 아니야. 너도 알잖아. 엄마가 나 당장 결혼하라고 하는 거. 아줌마가 잘못 이야기하신 거야. 그 맞선 진희가 나가는 거 아니고 내 맞선이야. 나 지금 맞선 중이다?”
열변을 토했다. 미친 듯이 열변을 토하며 연준을 설득했다. 그러다 연재는 문득 싸늘한 시선을 느꼈다.
지금 자신이 말했던 맞선 장소에 맞선남은 사라지고 현조가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진희한테 확인하고 그러지 마. 남자가 자꾸 그러면 쪼잔해 보여.”
방금까지 오해라고 말했던 모든 것들을 전화 한 통으로 뒤집어 버렸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것 이진희라도 살려야지.
- 그래? 하긴, 나랑 사귀는데, 우리 진희가 뒤통수 칠 사람은 아니지. 알았어. 선 잘 보고. 잘생겼다고 계속 쳐다보고 그러지 마. 알지?
어느새 연준은 화가 풀렸는지 목소리가 한층 진정되어 있었다. 연재는 더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자꾸 쳐다보긴 누굴 자꾸 쳐다본단 말인가. 맞선남도 아닌데.
“서연재 씨.”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연재는 복잡해진 상황을 설명하기도 귀찮아 자포자기한 상태로 대답했다.
“네. 전무님.”
침이 꼴깍 넘어갔다. 무슨 말을 하려고 또 저렇게 빤히 쳐다보는 걸까. 저 부담스러운 시선 때문에 숨이 넘어갈 지경이다.
“결혼할 겁니까?”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지. 맞선 보러 왔다고 결혼이 금방 성사되는 거였으면 전무님은 지금 거기 왜 계시는데요.
말을 말자. 연재는 대충 대답했다.
“언젠가는요.”
피곤하다. 몹시도 피곤하다. 하루가 이틀처럼 길게 느껴질 만큼 지쳐 버렸다. 어서 빨리 저 남자에게서 벗어나 푹신한 침대에 눕고 싶었다.
그래, 푹신한 침대에 누울 수만 있다면 대충 아무 말이나 갖다 붙이자.
“나랑 하죠. 그 결혼.”
이 남자가 정말. 아무리 상사라지만 너무한 것 아닌가.
제가 방금 결혼하고 싶다 외쳤다지만, 상황을 보면 짐작 가능할 텐데. 이런 상황에 농담이라니 과해도 너무 과하지 않은가.
“전무님,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연재는 허탈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갑자기 말 놓을 때부터 느낌이 싸하다 했다.
“어차피 할 결혼, 나랑 하자고. 서 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