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선과 맞선이 만났을 때
“지금 택시 탔어. 최선을 다해 늦지 않을 테니까 날 믿어 봐, 친구.”
사옥 앞에서 택시를 탄 연재는 잠시 수화기를 귀에서 떼고 목적지를 이야기했다. 맞선 장소인 W호텔까지 족히 30분은 소요될 것이다.
진희에게 늦지 않겠다고 장담했지만, 남은 시간 역시 30분이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달려갈 계획이다.
현조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느라 시간이 늦어진 탓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약속 시간이 7시 30분이란 점이었다. 현재 시간은 7시. 그러고 보니 현조의 맞선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문득, 현조는 잘하고 있을지 걱정되었다.
‘연재 씨, 현조 늦지 않도록 재촉하는 것 잊지 말아 줘요. 부탁합니다.’
정욱의 당부까지 듣고 나니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5시 40분부터 전무실을 기웃대다 현조에게 오해를 사기도 했다.
‘약속 있습니까? 있으면 먼저 퇴근해요.’
내내 심기가 불편한 상사에게 불평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조심스레 정욱의 당부를 새겨야 하는 처지라 미안할 따름이었다.
‘늦지 않으시려면 준비하셔야 합니다. 권 실장님께서 장소는 문자로 넣어 두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엄한 표정의 현조는 처음이었다. 정말이지 숨이 턱 막힐 만큼 싸늘한 표정을 짓던 현조가 축객령을 내렸다.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약속 정도는 지킵니다.’
그러더니 기어이 6시를 넘기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퇴근했던 현조였다.
“잘 가셨겠지. 아아, 몰라 몰라.”
확인 전화를 해 볼 수도 없으니 그저 잘 도착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 어딜 잘 가?
딴생각하다 통화 중인 걸 잊었다. 연재가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수화기 너머에서 보일 리 없었지만.
“으응, 나 잘 가고 있다는 말이었어.”
- 대충 인사하고, 간단히 저녁 먹고 헤어지면 돼. 미안해. 연재야.
미안하다는 말은 넣어 둬. 서연준에게 다 받아 낼 거니까.
“걱정하지마. 내가 알아서 잘해치울게.”
- 으응. 고마워. 서연재 넌 내 은인이야.
“나 지금 다 왔어. 끊을게.”
사실 한참 남았지만, 전화를 끊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호언장담했지만, 맞선은 처음이었다. 이후의 시간이 암담했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연재의 사정을 알 턱 없는 택시는 막히지도 않고 목적지로 데려갔다.
W호텔 앞에 도착한 택시에서 내린 연재는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뛰었다. 간신히 1분을 남겨 두고 목적지인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좋았어. 늦지 않았어.’
조용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휴대전화를 꺼내 액정을 켰다. 오늘 맞선 상대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가장 최근 메시지를 열었다. 진희로부터 온 메시지였고, 그 안에는 남자의 반명함판 사진과 나이, 직업, 이름 같은 기본 정보가 나열되어 있었다.
“예약하셨습니까?”
입구에 있는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서버가 다가와 물었다.
“윤성준 씨로 되어 있을 거예요.”
“안내 도와 드리겠습니다.”
앞장선 서버를 따라 걸었다. 창가 쪽에 자리한 중간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슈트를 입은 어깨가 꽤 넓었고, 머리도 단정했다.
기대하지 않은 만남이라도 낯선 사람과의 만남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테이블에 다다라 멈춰선 연재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눈인사와 함께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진희라고 합니다.”
남자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환한 미소를 지었다. 누가 봐도 젠틀한 이미지를 풍기는 남자는 사진에서 본 것보다 어려 보였다.
“반갑습니다. 윤성준입니다. 앉으시죠.”
자리를 권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의자에 동시에 앉았다. 첫인상은 3초, 하지만 연재는 그 3초마저도 필요 없었다. 목소리가 귀에 닿는 순간, 결정되었다.
예민한 청각은 다른 사람의 인상을 판단하는 데에도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흔히 말하는 이상형을 ‘목소리가 마음에 드는 남자’라고 할 정도였다.
거슬리지는 않았지만, 끌리지도 않았다. 평범한 직업의 평범한 인상처럼 목소리도 평범했다. 식사를 권해서 주문했고, 적당한 대화가 오갔다. 먹는 행위조차 없었다면 무료했을 자리였다.
“플로리스트라고 하셨죠?”
양심이 쿡쿡 찔렸다. 하지만, 기왕 하는 거 확실하게 해치워야 했다. 완벽하게 진희를 연기하고 마지막에 애프터는 정중하게 거절하면 된다.
“네. 맞습니다.”
“굉장히 잘 어울리세요. 꽃보다 더 예쁘시고.”
포크를 쥔 손이 순간 움찔했다. 낯선 사람에게 예쁘다는 찬사를 들어 본 게 언제더라,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꽃보다 예쁘다는 말이 크게 와닿지는 않았지만, 예쁘다는 말 자체는 싫지 않았다. 연재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활짝 웃었다.
그러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연재는 더 놀라고 말았다.
“감사한 뜻으로 웃은 건데 실례였나요?”
남자의 표정에서 당황함과 황당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뇨,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진희 씨 웃는 모습이 더 예쁘셔서요.”
“칭찬 감사합니다.”
맞선도 어려울 것 없구나,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고 그거라면 충분히 자신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긴장이 풀렸다.
***
[안녕하세요. 이진희라고 합니다.]
무료하던 차에 들린 목소리는 신선했다. 맞선 상대라고 나와 있던 여자와 쓸데없이 30분이나 앉아 있었는데, 그야말로 고역이던 참이다.
그런데 익숙한 목소리와 매칭되지 않는 낯선 이름이 귀를 찔러 왔다.
분명, 목소리는 서연재인데 다른 이름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세요?”
하지만 연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현조는 귀를 더 곤두세웠다.
“……씨?”
[플로리스트라고 하셨죠?]
[네, 맞습니다.]
플로리스트? 서연재가 아니라는 쪽에 조금 더 비중을 두었다.
등 뒤쪽으로 향하는 신경을 거두려던 차였다. 그런데 대답하는 억양에서 ‘네, 전무님.’과 겹쳐 들리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봐요!”
현조는 그제야 앞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눈길을 줬다.
“아, 미안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혹시, 저랑 있는 게 지루하신 건가요?”
연하영은 미간에 눈썹을 모으고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여자는 집요했다. 30분 동안 쓸데없는 말을 쏟아 냈고, 관심도 없는 질문에 대답을 요구했다.
오늘로 열세 번째 듣는 취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 어느 순간부터 대답을 건너뛰기 시작했고 지금은 아예 뒤쪽 테이블 대화에 관심이 쏠린 상황이다.
“지루하기보다는.”
끝낼 시간이 됐다.
“관심이 없습니다.”
이쯤 했으면 끝내는 것이 맞는 거다.
거절은 되도록 간결하게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이 매너다.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쳐다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아무래도 상대는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그러니 그만두죠. 서로 예의 차릴 정도는 한 것 같은데.”
“무슨…….”
현조가 손목을 털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간단한 동작 하나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만 덧붙이면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30분이면 충분한 것 같은데, 시간 낭비.”
“정말, 예의가 없으시군요.”
“관심 없는 일에 이 정도 시간을 투자했으면 예의는 충분한 것 같은데요.”
“그렇군요. 시간 낭비, 더 할 필요 없겠어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은 눈동자는 이제 싸늘하게 식었다. 여자는 자존심을 챙기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깔끔한 면은 마음에 들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래요.”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가 물이 담긴 잔을 가볍게 쥐었다. 현조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그래도 물벼락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곧 물 잔이 탁, 하고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들렸다.
“물 잘 마셨어요. 그럼.”
여자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더니 보란 듯이 뒤돌아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물벼락은 피했지만, 더는 이 피곤한 거절도 함부로 못 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후우.”
한숨을 내쉰 현조는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여전히 뒤쪽 테이블은 화기애애했다. 대화는 계속 이어졌는데, 누가 들어도 맞선이란 것을 알 수 있는 대화였다.
거슬려, 뭔가 거슬리는데 그게 뭔지 일단 생각이란 것이 필요했다.
[일은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긴 하지만, 저한테는 잘 맞아서 보람도 느끼고 즐거워요.]
플로리스트라, 서연재라면 꽃도 잘 돌볼 것 같긴 했다. 관리 잘하는 것이 서연재의 특기니까.
[역시 그렇군요. 저라도 예쁜 꽃을 매일 본다면 즐거울 것 같습니다. 저 언제 공방으로 놀러 가도 될까요?]
얼씨구, 현조는 저도 모르게 물컵을 꽉 움켜쥐었다.
[아, 그건 좀 곤란할지도 모르겠네요.]
[네?]
[아니, 아직 성준 씨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니까요.]
성준 씨이?
허. 세상 다정하게 모르는 남자의 이름을 부르다니.
현조는 쥐고 있던 물컵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아, 그렇죠. 맞습니다. 일단 가까워지는 것이 먼저죠. 그런 뜻으로 질문 좀 해도 될까요?]
집요한 놈. 현조가 미간을 찌푸렸다.
[진희 씨. 취미가 어떻게 되세요?]
[등산 좋아해요.]
[등산이요? 의왼데요. 진희 씨 외모로 보나 직업으로 보나 독서나 요리? 같은 거 예상했는데.]
[그런가요? 제가 보기랑 달라서요. 어려서부터 할머니랑 등산 다니는 걸 즐겼거든요.]
현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단번에 테이블을 벗어나 문제의 테이블로 걸어갔다.
당장 제 눈으로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서연재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고작 세 걸음을 떼는데, 기대감에 흥분한 심장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