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68)

따뜻한 말의 온도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 같았다. 봄이라면 벚꽃이 만개했을 텐데, 조금 아쉬웠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두 시간 가까이 내달리다 휴게소에 들어갔다. 평일 휴게소는 한산했다.

“전무님 드세요.”

“고마워요.”

테이크아웃 커피를 내밀자 현조가 받아들었다. 아직 날씨는 쌀쌀했지만, 야외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기에는 좋았다.

“춥긴 해도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에요.”

“마시고 다시 출발하죠.”

다시 출발한 지 40여 분 만에 목적지인 전주 본점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들어선 세단이 자갈을 짓이기며 라인에 정확하게 섰다.

“내리지.”

차에서 내리자 ‘소담’이라고 적힌 나무 간판과 함께 오래된 한옥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졌다.

한옥은 언제 보아도 그 특유의 분위기가 멋스러웠다. 특히, 전주 본점은 한옥마을 안에 자리하고 있어서 주변 경관과도 잘 어우러졌다.

“들어가죠.”

차가운 목소리가 아직 가시지 않은 겨울을 닮았다. 어째서인지 현조는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창백한 얼굴, 창백한 목소리. 전주 본점에 도착하고부터 지금까지 류현조의 모든 것이 창백했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한기가 느껴졌다.

분명 휴게소까지는 괜찮았는데, 본점에 도착한 순간 분위기가 달라진 현조를 이해할 수 없었다.

“김장 행사는 무사히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것이 역력했다. 본점의 김 점장을 만나서 지금까지 이야기하는 동안 현조는 일관되게 건조했지만 정중했다.

그러나 창백한 안색은 스스로 컨트롤하기 힘든 것처럼 느껴졌다.

“별말씀을요. 직원들도 1년 중 가장 보람을 느끼는 일입니다.”

소담은 조금 특별하게 연말을 보냈다. 12월 중순이면 전국 지점에선 일주일 동안 김장을 했다. 어려운 이웃에게 김치를 나눠주기 위한 행사였다.

“회장님께서 참석하지 못하셔서 아쉬워하셨습니다.”

사회 환원의 일환으로 창립자인 김이원 회장이 만든 전통이었다. 그렇게 1년 동안 매장에서 사용할 분량과 이웃에게 나눠줄 김장을 했다.

초창기에는 김 회장이 아내와 둘이 이웃 주민에게 나눠주기 위해 시작했던 것이 지금은 규모가 점점 커져서 자원봉사들도 동참하는 행사가 되었다.

“저도 직원들도 안타까웠습니다. 회장님께서 계셨더라면 분위기가 더 좋았을 겁니다.”

정성을 담은 먹거리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는 믿음. 그것이 김이원 회장의 신념이었다. 그리고 끝없이 연구하고, 공부했다.

단순히 만들어 파는 것을 넘어, 더 건강하고 따듯한 음식을 고객에게 대접하고자 노력했다. 그런 노력은 당연하게도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

“좋은 일을 하고, 포상으로 휴가도 받는데 마다할 직원이 없지요. 그나저나 회장님 병환은 좀 어떠신지요?”

김 회장을 걱정하는 김 점장의 물음에 현조는 입안이 썼다.

“여전하십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곁에서 자료를 준비하던 연재는 조심스럽게 주전자에 담긴 따뜻한 차를 따라서 현조 앞으로 밀었다. 현조의 얼굴이 여전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사장님께서도 건강하시지요?”

선화의 안부도 빼놓지 않고 묻는 것은 당연했다.

“네, 건강하십니다. 메뉴 선별부터 해 볼까요?”

현조가 말 머리를 가볍게 돌렸다. 그러자 김 점장 역시 알아들었다는 듯이 더 묻지 않고, 원래 목적으로 넘어갔다.

꼬박 2시간을 더 열띤 회의를 마친 두 사람은 본점에서 준비한 점심을 먹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온돌방에 앉아 구첩반상을 앞에 두자 먹기도 전에 배가 불렀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한식의 매력을 극대화한 본점만큼 분위기까지 완벽한 지점은 없었다.

그만큼 전통이 살아 있었다.

“전주는 처음인데, 좋은 것 같아요.”

딱딱한 분위기를 환기하려 연재는 부러 대화를 시도했는데 대꾸해 주는 현조를 보자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열아홉 살 때까지 전라도 시골에 살았어요. 외할머니도 한동네에 사셨고요.”

의외라는 듯이 현조가 연재를 쳐다봤다.

“시내랑은 동떨어져서, 저 살던 곳은 산이랑 논밭뿐이었어요.”

연재의 말에 현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린 창호 너머로 처마 끝에 매달린 차양이 보였다.

바람결에 흔들려 소리가 듣기 좋게 울렸다. 창문은 뒤뜰을 향해 있었는데, 그 아래 보이는 연못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전부 마음에 꼭 들었다.

“어려서부터 산도 많이 탔어요. 할머니 따라서요.”

“산?”

내내 창백하던 현조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나아졌다. 조용히 눈을 맞추며 계속해 보라는 듯이 추임새를 넣자, 연재는 신이 났다.

“고사리 끊어 보셨어요? 버섯 따보셨나요? 안 해 보셨죠? 전 그걸 초등학교 입학하면서부터 했거든요. 할머니랑 밭에서 일하는 건 재미없었는데, 산에만 가면 기분이 좋았어요. 가끔 토끼랑 다람쥐를 보면 그날은 일기장이 동물원이 되거든요.”

이야기하는 연재의 눈빛이 신기할 만큼 반짝였다. 노래하듯 술술 풀어내는 이야기는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연재의 입을 통해 이야기가 생기를 얻었고, 살아 있는 것처럼 따뜻하게 귓가에 닿았다.

그게 신기해서 현조는 별것 아닌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서연재 씨 재미있네요.”

현조의 입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이 세 시간 만에 풀어졌다. 다른 건 다 잊게 했다.

자신이 지금 이곳을 얼마나 불편해하고 있는지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어! 전무님 웃으셨다.”

작은 미소 하나에 감동한 듯 손뼉을 마주치며 기뻐하는 여자라니, 신기하지 않은가. 조금만 더 저 여자의 다정함에 기대고 싶었다.

“뱀도 잡아 봤겠네요.”

농담, 머리를 비우고 생각 없이 뱉는 말. 가깝거나, 가까워지고 싶은 대상에게 주로 던지는 가벼운 말.

“뱀이요?”

“알지 않나? 그 몸통만 긴 생명체.”

하지만 자신이 왜, 이 여자에게 농담을 걸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산에 가면 많은 그거, 많이 잡았을 것 같은데.”

이야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거기서 뱀이 왜 나오는 건지 모르겠으나 한 번 뱉은 농담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대차게 밀고 나가 본다.

무엇보다 고작 농담에 표정을 굳히고 고개만 젓고 있는 여자가 귀엽다.

“뱀 술도 담가 봤겠고.”

“전 주로 도망 다니는 쪽이라서…….”

더욱 세차게 고개를 젓더니 이번엔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억지로 웃으려 애쓰고 있다.

조금 더 해 볼까? 체면을 지키려면 멈춰야 하는데 입이 근질거린다.

이제야 그날 시끄럽게 싸우던 그 남자와의 사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귀여운 반응이라면 얼마든 더 실없는 사람이 되고 싶어질 테니까.

“농담입니다.”

간신히 체면은 지켰다. 지켰나?

“저 뱀은 안 좋아합니다.”

정색하는 얼굴은 또 왜 저렇게 귀여운 건지.

“뱀 술은 마셔봤을 것 같은데.”

결국, 참지 못하고 한 마디 더 해 버렸다.

“전무님!”

현조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놀려먹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지, 한 달 가까이 그림처럼 조용하고 빈틈없는 여자라고 생각했던 날들이 애석할 지경이다. 이렇게 발끈하는 서연재라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농담, 농담입니다.”

“그렇게 웃으시면서 또 하실 거죠.”

“더 해도 됩니까?”

“그만하신다고 해도, 이젠 신빙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런, 내가 신뢰를 잃었나 보군요.”

신뢰를 잃은 상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궁금하다. 저 여자의 이야기가, 자신은 절대 모르는 어린 시절이.

“계속해 볼래요. 서 비서 과거 무척 흥미로운데.”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새침해 있던 연재의 얼굴이 단박에 풀어진다. 그 부드러운 표정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모든 걸 할머니와 함께했어요. 저에게 있어 외할머니는 고향이고, 고향 집 뒷산이에요. 그때는 할머니랑 함께 있는 시간이 모험이고 행복이었거든요.”

“할머니께서 서 비서 덕분에 행복하셨겠군요.”

맑고 순수한 눈빛을 가진 여자. 어째서 그토록 맑은 눈동자를 소유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과거가 지금의 그녀를 완성한 모양이다.

“그러셨다면 좋겠어요. 어리광부리던 모습만 생각나서……. 할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아직도 제 걱정을 하고 계실 것 같거든요.”

눈시울이 젖은 연재가 환하게 웃었다. 이별의 슬픔이 무뎌지기까지, 오랜 시간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울고 웃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예쁘게 웃을 수 없을 테니까.

“걱정 안 하실 겁니다. 이렇게 잘 웃고 있으니까.”

현조의 말을 끝으로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침묵의 온도는 처음과 달랐다. 차갑기만 하던 침묵은 따뜻하게 바뀌어 있었다.

창백하던 현조의 얼굴도 어느새 편안한 빛을 띠었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잔잔한 배경이 되었다.

***

눈이 지나치게 초롱초롱하다. 매사 진지하기만 할 것 같던 연재가 지금은 그저 호기심 많은 아이 같았다. 바라는 것을 말 못 하고 참고 있는 아이처럼 눈이 반짝인다. 차마 못 본체하기 힘든 눈이다.

“걷고 싶어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연재를 보고 있으니, 저절로 알 것 같다.

“괜찮습니다. 전무님께서 정해진 일정이 있으시고.”

“다음 일정이 공장 시찰인가.”

“맞습니다.”

현조가 잠시 말을 멈추고 연재를 빤히 쳐다봤다. 턱 끝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더니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1시간 뒤로 늦출 수 있겠어요?”

“절대 그럴 필요 없으십니다. 공장장님도 이미 기다리고 계실 거고요.”

이상하지, 그러지 말라는데 그러고 싶어지는 건 뭔지. 자신에게 이런 청개구리 기질이 숨겨져 있는지 오늘 처음 알았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네, 바로 이동.”

“서 비서가 연락하는 것보단 내가 직접 통화하는 편이 낫겠군요.”

눈빛에 마약이라도 넣은 건지 저 눈을 보면 거절하면 안 될 것 같다. 그래, 어차피 소화는 시켜야 하니까.

현조가 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연재에게 내밀었다.

“번호 입력해 줘요.”

“아, 정말 괜찮은데.”

그러면서 재빨리 누르는 손가락은 보이지도 않는다.

“여기.”

전화기를 받아 드는 현조의 입가가 부르르 떨렸다.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돌린 채 목을 가다듬었다. 최대한 무게를 싣고 목소리를 깔려면 웃음은 쥐약이다.

간결하게 통화를 마친 현조가 연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좀 걷죠. 소화도 시킬 겸.”

“네?”

“여긴 내가 잘 알거든.”

연재가 환하게 웃는다. 수화기 너머로 불만을 토로하던 공장장의 목소리는 그렇게 씻은 듯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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