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68)

동병상련과 동상이몽

“안녕히 계세요는 또 뭔데.”

현조는 연재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다 제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서연재는 이상한 여자다. 처음 만났던 날도 그랬다. 홀린 듯한 눈으로 사람을 한참 바라보더니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바라보면 대체 어쩌자는 건데.”

마치 특별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세심하게 만지던 손끝의 작은 떨림까지. 너무 생생한 나머지 아직도 손가락이 입술을 더듬는 것만 같다.

그러다 불쑥, 입안에 침범했던 손가락을 하마터면 핥을 뻔한 것은 또 어떻고.

공공장소였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저도 모르게 본능에 놀아났을지도 모른다.

“이상한 여자야. 알면 알수록 이상해.”

머리를 세차게 저어 방금까지 있었던 황당한 일들을 떨쳐 냈다.

“전무님?”

언제 온 것인지 정욱이 불렀다. 현조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표정을 갈무리했다.

이곳에 온 이유는 소담 지점을 열고 싶다는 예비 점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마트와 극장이 하나로 연결된 건물의 푸드 코트에 자리를 잡아 놨다는 말에 현장 시찰 겸 나왔던 터였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굉장히 재미있는 일을 당하긴 했지.”

“표정만 보면 첫사랑이라도 마주친 것 같은데 말이죠.”

생각해 보니 꽤 오랜 시간을 혼자 지냈다. 연애라는 세포가 말라 죽었을지도 모른다.

“있어야 마주치지.”

“이번 맞선도 꽝이었습니까?”

놀리는 말을 하는 정욱의 얼굴이 즐거워 보였다.

“절차 끝났으면 가지.”

앞서 걷는 현조의 뒤를 정욱이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현조의 머릿속은 어느새 하나의 영상으로 가득 찼다.

기분이 묘했다. 서슴없이 다가오는 손을 피하려고 했으면 얼마든 피할 수 있었는데 피하지 않았다.

서연재. 툭 튀어나온 돌부리에 발이 채인 것처럼, 1분도 채 되지 않았을 그 시간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

영화를 보는 것은 역시나 곤혹스러웠다. 귀마개로 반쯤 귀를 막고 있었지만 엄청난 소리를 감당하기 벅찬 것은 여전했다. 꾸준히 훈련한 덕분에 이 정도로 사회생활도 가능했지만, 피곤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어후, 서연재 눈 밑에 다크서클 내려온 거 봐.”

진희가 혀를 끌끌 차며 연재의 눈 밑을 만졌다. 사실 영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영화 보기 직전에 생긴 엄청난 사건에 영혼이 반쯤 날아가 버린 상태라 영화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당장 월요일에 출근해서 현조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나 그게 걱정이었다.

“좀 먹어. 피로 회복엔 달달한 거만큼 좋은 거 없다.”

멍하니 앉아 있는 모양새가 답답했던지 진희가 숟가락으로 직접 아이스크림을 떠서 입가에 대준다. 얼결에 받아먹고 또 한참을 눈앞에 아른거리는 얼굴을 떨치려 고개를 힘껏 내저었다.

“하필이면 전무님을.”

“무슨 소리야? 너 무슨 일 있었어?”

있었지.

“아니. 별거 아니야. 그냥 뭐…….”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머릿속이 복잡했다. 월요일이 영원히 오지 않을 순 없을까?

“서연준은 어쩔 거야?”

오늘 만남의 목적을 잊고 있었다. 연재는 본론으로 돌아가 연준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단번에 숟가락을 내려놓은 진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일 만나기로 했어. 내가 잘 이야기할게.”

“내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서연준 인간성은 좋은데.”

“인간성만 좋은 건 아니지, 잘생겼잖아.”

어쭈, 이진희 좀 보게. 마음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네.

“연준이가 잘생겼어?”

“네 동생이니까.”

진희의 발그레해진 얼굴을 보며 연재는 미소 지었다. 연준의 짝사랑에 청신호가 밝혀진 탓이다.

“10년 봤으면 많이 봤으니까, 내가 더 보태지 않아도 연준이에 대해선 잘 알고 있을 거고, 그 녀석 곧 학교 배정받을 거야.”

서울에 이사 오고 처음 사귄 친구가 진희였다.

하얗고 예쁘기만 하던 진희는 억양에 남은 사투리마저 재미있다며 서슴없이 다가왔다. 그렇게 주말마다 집에 놀러 오고, 만나는 통에 연준과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것이다.

“응. 연준이한테 들었어.”

“넌, 네 마음은 어떤데? 연준이가 내 동생이라서 동생 같은 건 아니고?”

진희 부모님은 대규모 화원을 운영했다. 화원의 둘째 딸인 진희는 플로리스트로 공방을 운영하며 강의도 하곤 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사실 나도 그게 헷갈려. 이게 정인지 좋아하는 건지 구분이 안 돼.”

“날 빼고 생각해 봐. 그럼 답이 나오지 않겠어?”

고개를 끄덕이는 진희에게 아이스크림 한 숟가락을 떠서 먹였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네가 내 친구인 건 변함없어. 알지?”

고개를 끄덕이는 진희의 손을 따뜻하게 쥐었다.

***

착실하게 월요일이 되었고, 착실하게 출근했다.

그리고 연재는 출근 후부터 지금까지 심장에 무리가 올만큼 가슴을 졸이는 중이다. 초 집중모드로 바뀐 예민한 귀는 닫힌 문 너머에서 울리는 승강기 알림음에 온통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의 별명은 ‘서머즈’ 그야말로 개처럼 귀가 밝아서 생긴 별명이었다.

“오셨구나.”

승강기 안내음이 울리고, 대리석 복도를 울리는 구두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공포 영화에서 한밤중에 빈 복도를 울리는 소리 만큼이나 엄청난 울림이었다.

저벅저벅, 마침내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그분이 오셨다.

“좋은 아침입니다. 전무님.”

자리에서 일어나 평소보다 더 깊은 각도로 허리를 숙였다. 과장하자면 폴더 폰처럼 접힐 수 있겠구나 싶었다.

“커피 부탁해요.”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어색하게 흐르는 침묵이 무겁다. 압사당할 것 같은 기분에 연재는 빠르게 시선을 돌리려 했다. 돌리려고 했는데.

“서 비서.”

상사의 부름에 시선이 붙박혔다.

“네. 전무님.”

일이다. 프로의식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 나는 비서다. 비서다. 비서다.

“전주 가 봤습니까?”

어리둥절해서 눈동자를 굴렸다. 당연히 안 가 봤다.

“안 가 봤습니다.”

“그럼 이번에 한 번 가 보도록 하죠.”

제가요? 눈동자를 굴리며 반박할 말을 찾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 상상으로 떠오를 뿐.

“출장.”

아, 출장.

“출장이라면……?”

“나랑 같이.”

같이? 그러니까 지금, 그 일을 겪었는데 같이 출장을 가자는 뜻이란 말인가!

“준비해요. 30분 후에 출발할 겁니다.”

당일치기 일정으로 잡힌 출장이라 출근하자마자 고속도로 행이었다.

주말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현조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연재는 그런 현조의 얼굴을 의도치 않게 빤히 보고 말았다.

“왜요? 잘생김이라도 묻었습니까?”

연재는 귀를 의심했다. 이런 농담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오나.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상사의 낯선 모습을 처음 마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곧 연재는 수긍했다. 불과 몇 일전이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연준과 있었던 모습을 들킨 것을 생각하자 어째서인지 저절로 이해됐다.

“그렇게 만진 것도 그래서 아니었습니까?”

화르륵, 연재의 얼굴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붉어졌다. 세상에 그 일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다니, 덮고 지나갈 생각이 아니었던 거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운전 제가 할까요?”

화제를 돌려야 한다.

“사양하죠.”

매우 정중한 사양에 더 할 말이 없어진 연재가 손가락을 꼼질 거렸다.

“손버릇이 나쁜 줄 몰랐는데.”

현조는 분명 앞 유리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얼굴이 타는 기분이다. 뒤끝이 지독해!

“알면 알수록.”

“아, 하하.”

웃고 있지만, 울고 싶다. 이 나쁜 손이 문제다. 연재는 손가락을 감추려 슬그머니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번엔 주먹인가?”

이번엔 손을 펼쳐 허리 뒤로 감췄다. 그러자 운전석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몹시도 창피한데 그 웃음소리가 듣기 좋아서 연재도 결국 조용히 미소 짓고 말았다.

“서 비서.”

“네, 전무님.”

목소리가 다소 무거웠다. 또 실수한 것이 있었나, 하필 그런 실수를 해서 각인시켜 놓았으니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처럼 미리 걱정됐다.

“이번 주도 금요일 저녁 일정 잡혔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번엔 긴 한 숨소리가 들렸다. 그가 말하는 금요일 저녁 일정은 ‘맞선’ 이었기 때문이다.

“인생에 결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결혼은 인생에 없을 줄 알았다는 남자가 안타깝지만, 이쯤에서 다시 되새김질 해 줘야 하는 말이 있었다.

“전무님.”

운전대가 부서져라 쥐고 있던 현조와 아주 잠깐 시선이 부딪쳤다. 오늘따라 시선에 가시라도 박힌 것처럼 따갑다.

“계속해요.”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기한이.”

정욱이 그랬었다. 현조는 되도록 빨리 결혼해야 한다고. 외조부인 김 회장이 못 박은 기한이 올해까지라고. 그러니 현조의 맞선 일정에 절대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 당부했다.

“올해까지지.”

“네. 맞습니다.”

명확하게 못 박는 연재의 말에 현조가 쓰게 웃었다.

올해까지 결혼을 못 하면, 월급쟁이 전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후계자 자리는 물 건너간다는 뜻이다.

물론 그런 표면적인 이유도 있지만, 현조가 군말 없이 맞선을 전전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김 회장의 병환이 깊어진 까닭이었다.

“힘내십시오.”

그가 처한 상황이 남 일 같지 않았다.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남자는 지금 결혼이 시급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 남자는 결혼에 아무 관심이 없다.

“휴게소 필요하면 말해요.”

그리고 자신 역시 결혼은 계획에 없는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인생의 계획표에 뜬금없는 결혼이 끼어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비슷한 신세를 생각하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별거 아닙니다.”

“표정만 보면 끔찍한 악몽 같은데.”

그 정도로 얼굴에 드러났나?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처럼 결혼이라도 해야 하는 사연이라도 있나?”

동병상련의 아픔은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인가 보다. 연재는 말없이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빠르게 멀어지는 풍경이 어느새 산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 상황이면 재미있을지도.”

분위기에 취해 차창을 바라보던 연재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방금까지 안타까웠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부터 당신의 맞선을 사악하게 즐겨 주겠노라고 속으로만 생각하는 연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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