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68)

오해와 착각 사이에 낀 불신

“얼마 전 제가 전무님을 오래 쳐다본 것은, 절대 전무님께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마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태연했고, 귀찮은 듯한 말투였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건가? 아니지, 고양이 주인도 그렇게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쫓아다녔는데. 하물며 대놓고 쳐다본 사람이 아무렇지 않을 리 없겠지.

“만약 제가 쳐다보는 것이 불편하셨다면 그것은 제 오래된 습관이라서 그런 것이니 너그러이 양해 부탁드립니다.”

현조의 미간이 구겨졌다.

아침부터 뜬금없이 기억에서 지워 버린 일을 끄집어내서 부러 사과까지 하는 한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었다.

어딜 가든 주목받는 것은 일상이었다. 누군가 쳐다보는 것도 익숙했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사과를 받아 본 적은 없었다.

대부분 시치미를 뚝 떼고 안 본 척하거나, 좋아한다고 뜬금없는 고백을 하는 식이었으니까.

현조는 그제야 연재의 행동이 이해됐다.

꼬치꼬치 귀찮을 정도로 캐묻는 연재에게 의문을 가졌었는데 그게 다 첫눈에 반했다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가소로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날 좋아합니까?”

색다른 접근, 관심, 표현.

그래, 인정하지. 솔직함을 무기로 접근할 생각을 하다니 귀엽지 않은가.

“절대, 아닙니다.”

절대라는 부분에서 묘하게 거슬렸지만, 그런 감정이 아니라면 상관없었다. 별것 아닌 것으로 시간 낭비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만 나가 보라는 뜻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제가 그런 행동을 취하는 바람에 전무님께서 기분이 나쁘셔서 저와 거리를 두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거리?”

“네, 그래서 제게 일을 시키지 않으신 것 아닌가요?”

똑똑한 줄 알았더니 엉뚱한 건가?

현조가 들고 있던 펜을 툭 내려놓고 책상에 팔을 괸 채 연재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말한 것 같은데.”

지그시, 더욱 지그시.

“난 혼자 일하는 스타일이라고.”

그거야 들었지만 그럼 비서는 왜 뽑으신 건데요?

“그럼 제게 일을 시키지 않으시는 이유가.”

“맞아요. 기밀 사항투성이인 중요한 일을 남이 대신하는 걸 싫어합니다.”

“그럼 제가 쳐다봐서 불쾌하신 건.”

“메두삽니까?”

“…….”

“서 비서가 쳐다보면 돌이라도 됩니까? 그런 거 아니면 쓸데없는 거에 신경 쓰지 맙시다. 피곤하니까.”

연재는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말문이 막힌 채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인 채 뒤돌아 나와야 했다.

등 뒤로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뒤통수가 타는 것 같았지만 애써 외면하고 문을 닫았다.

세상의 모든 창피함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서연준, 이게 다 너 때문이야!’

***

몹시도 불편했다. 뜬금포 사과에 이어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연재는 생각했다. 대체 이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소문으로는 분명 이원푸드의 후계자란 말까지 나돌았다.

후계자라면 곱게 자란 왕자나 다름없을 텐데, 어째서 이 남자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는 것에 익숙할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니면, 정말 소문처럼 구박데기로 자란 건 아닐까?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헛소문일지도 모르는데.’

고개를 힘차게 내저어 봐도 결론은 하나로 귀결됐다.

‘아니면 아직도 내가 자길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오해가 풀린 게 아니었어?’

분명 아닌 걸로 결론이 난 것 아니었나!

힘차게 고개를 내젓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다름 아닌 정욱이었다.

사장실 비서실장 권정욱. 그는 연재가 현조의 비서로 일하게 된 후 거의 매일 보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반가운 나머지 연재는 재빨리 인사했다. 부서 이동 전 3년 동안 함께 일한 직속 상사를 매일 보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알게 된 사실 하나가 바로 정욱과 현조가 오래된 친구라는 것이었다.

“연재 씨, 이게 무슨 일이죠?”

인사에 대한 대답 대신 정욱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현조를 보며 물었다.

“이걸 왜 전무님께서 직접 하시는 겁니까?”

결재 파일을 들고 온 정욱이 복사기 앞에 서 있는 현조를 보고 꺼낸 말이었다.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연재는 덤이었다.

“권 실장. 내가 하겠다고 한 겁니다. 일단 기다려요.”

다가오는 정욱을 향해 복사기와 씨름하는 현조가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이었다.

현조의 한마디에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답답한 심정을 표출하던 정욱이 재촉하듯 말했다.

“외부 미팅은 안 가십니까?”

“지금 준비 중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왜 전무님께서 직접 하고 계시는지 이해가 안 돼서요.”

서울호텔에서 일본 측 바이어와 미팅이 잡혀 있었다. 남은 시간은 약 1시간.

지금 준비해서 출발해야 할 상황에 오전 내내 미팅 자료를 직접 만들고 있는 현조였다. 그러다 급기야 복사기 앞에서 복사까지 하는 실정이었다.

대단한 고집이었다.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키려는 듯 사소한 것까지 전부 혼자 해결하려 했다.

연재가 현조를 위해 하는 일이라고는 손님 접대와 현조의 커피를 챙기는 것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정마저도 스스로 체크하고 관리했으니까.

“연재 씨가 해야 할 일 아닙니까?”

입이 있되 말을 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을 누가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중요한 서류라서.”

“무슨 말입니까?”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전무님, 저랑 잠깐 이야기 좀 하시죠.”

비서실장이자 20년지기 친구인 정욱이 현조를 조용히 불러들였다.

손목시계를 흘끗 쳐다보며 초조해하던 현조가 미간을 구겼다.

“연재 씨, 복사 끝나면 정리해서 파일 부탁해요.”

정욱이 웃으며 현조를 데리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자마자 정욱이 현조를 향해 물었다.

“아직도 팀장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보안이 생명인 기밀문서야. 뭘 믿고 남의 손에 맡기겠어.”

정욱은 그제야 현조의 행동을 이해했다. 비서가 처음인 현조에겐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전무님이 가장 믿어야 할 사람이 바로 비섭니다. 전무님의 수족과 같은 존재이자 일정 관리와 계획, 나아가 미리 준비하는 것까지 비서의 임무죠. 외부 누출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비서의 기본 소양이니까요. 그러니까 밖에 있는 전무님 비서를 믿어야 합니다.”

현조는 그제야 비서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연재의 이해할 수 없는 질문들까지 전부 한꺼번에 이해가 됐다.

“이제 점점 더 바빠지실 겁니다.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할 텐데, 비서의 도움 없이는 힘들어.”

답답한지 급기야 정욱의 말이 짧아졌다. 듣고 있던 현조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전무로 출근한 지 일주일, 첫날 연재에게 귀찮게 굴지 말라고 했던 말 때문에 혼자서 일을 다 하려다 보니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외부에서 찾아오는 손님도 많았고, 결재해야 할 서류는 산더미처럼 올라왔다. 팀장 시절에 하던 업무량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혼자 할 수 있는 일과, 심사숙고하고 책임져야 하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는 중이었다.

“전무님의 능력을 극대화시켜 줄 사람이 바로 비서입니다.”

비서라는 직업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던 게 맞았다. 거기다 임원이라는 직책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현조는 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기고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승진 후, 일주일 동안 피곤이 쌓이다 못해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다.

‘전무님 어제도 야근하신 거예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 정말 괜찮으세요?’

서연재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사적인 관심이라고 오해했다. 괜히 불편해서 거리를 더 두고 싶었고, 원래부터 혼자 일하는 타입이라서 더욱 멀리했다.

거기다 연재의 사과는 연재를 더욱 오해하도록 만들었다. 관심을 다르게 표현이라 생각하니 찜찜함은 더했다.

물론 그 후로 연재는 단 한 번도 사적인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연재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 것은 자신이었다.

‘젠장. 착각이었나.’

오해는 갈등을 낳고, 갈등은 불신을 낳았다. 그 오해부터 싹 없애 버려야 할 때였다.

“더 지체하시면 미팅에 늦으실 겁니다.”

“그래, 가야지.”

사실 오늘 미팅에 동행해야 할 사람은 정욱이 아닌 제 모친 선화였다.

전무로 승진한 후 가장 첫 번째 임무였고, 수출 계약이 달린 중요한 문제였다.

“가시죠.”

하지만 그는 앞으로도 선화가 아닌, 선화의 대행 정욱과 함께해야 했다. 그것은 선화의 건강이 문제가 아닌, 마음의 문제였다.

그것을 알기에 현조는 마음이 무거웠다.

***

“오해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사과하죠.”

호텔에서 미팅을 끝내고 복귀한 현조가 비서 데스크 앞에 서서 한 말이었다. 연재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저 오만하게 빛나는 남자의 입에서 사과가 나오다니. 해가 서쪽에서 떴나.

“계속 그렇게 보기만 할 건가?”

몸에 밴 습관이 이렇게 무서운 거다. 쳐다봐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 또 쳐다보고 있는 건지.

“앞으로 더 최선을 다해 전무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연재가 활짝 웃으며 현조에게 대답했다. 그동안의 설움이 한꺼번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좋습니다. 잘 부탁해요.”

현조가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돌렸다.

일주일간 쌓였던 서운함이 눈 녹듯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지내 왔는데. 무엇을 하든 차단당하는 기분에 소외감마저 느꼈었는데.

서러운 날들이여, 이제 안녕이다. 눈물이 핑 돌 만큼 좋았다.

“울어요?”

“아닙니다.”

연준이 했던 말 따위는 깨끗하게 잊자. 이제 이 남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비서로서 커리어를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앞으로의 날들이 기대되어서 벌써 짜릿했다.

“미리 말하지만, 난 비서가 처음입니다.”

처음이라는 그의 말에 욕심이 생겼다. 이 남자의 처음을 멋지게 남기고 싶다는 그런 욕심이었다.

“조만간 저녁 한번 같이 하도록 하죠.”

“회식 말씀이세요?”

“서 비서 좋아하는 곳으로 생각해 둬요.”

“네, 전무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 퇴근하도록 하고.”

벽시계를 보니 7시였다.

오늘도 혼자 야근할 생각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현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필요할 땐 부탁하도록 하죠.”

“네, 전무님.”

연재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현조가 말했다.

“가기 전에 커피 한잔 내려 주면 고맙고.”

이제야 거리가 조금 좁혀진 기분이다.

앞으로도 오늘을 잊지는 못할 것이라고 연재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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