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68)

프롤로그

“진희 씨.”

식사를 마친 남자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이름을 불렀다.

몹시도 익숙하지만 제 것은 아닌 이름이었다. 이름 한 번에 미소 한 번, 연재는 남자가 ‘진희’라고 부를 때마다 반사적으로 미소부터 지었다.

“진희 씨 참 잘 웃는 것 같아요.”

“어색해서 저도 모르게.”

그래서 지금 입가에 경련이 일 것 같다.

“웃는 모습 예뻐요.”

쥐고 있던 포크가 미끄러졌다. 찔리는 양심 탓에 손바닥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진희 씨는 취미 있으세요?”

취미라, 그런 걸 가져 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어렸을 적엔 참으로 다양한 취미를 섭렵했는데 지금은 삶이, 밋밋하다 못해 싱거웠다.

“등산 좋아해요.”

물론 어렸을 적 이야기다.

“등산이요? 의왼데요. 진희 씨 외모로 보나 직업으로 보나 독서나 요리 같은 거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그냥 독서라고 할걸, 생각 없이 뱉은 등산이란 말에 혀를 꼬집고 싶었다.

“그런가요? 제가 보기와는 달라서요. 어려서부터 할머니랑 산 타는 걸 즐겼거든요.”

“할머니요? 대가족이신가 보군요. 다복한 가정도 좋죠.”

할머니는 또 왜 나오는데. 서연재 이러다 고사리 꺾고 버섯 따러 다녔다고 할래?

그러나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달려들 듯 물어 온다.

“아, 네 제가 어려서 시골에…….”

“뒷산이 놀이터라 고사리 꺾고, 버섯 따고, 뱀 잡아다 뱀술 담그는 게 취미지.”

이게 무슨 지나가다 밟은 지렁이가 꿈틀하는 소리야?

연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곳에서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연재가 알고 있는 사람 중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딱 한 명이다.

‘그럴 리 없어. 절대, 아닐 거야.’

물론 그 사람이 이곳에 있을 확률은 단 1%도 안 된다.

그래서 연재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코웃음 치며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마침내 시야에 들어온 남자를 본 순간, 연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전, 전…….”

1%의 확률이 99%의 확률을 이기는 순간이었다.

오만하게 서 있는 남자의 머리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켜진 것처럼, 남자는 환하게 빛났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남자는 눈이 부셨다.

차라리 다시 눈을 감는 것이 낫겠어.

“연재, 너 지금 나 두고 선보러 나온 거야?”

오만함과 까칠함이 제대로 버무려진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듯 신기할 만큼 귀에 착 감겼다. 거기다 주변을 압도하는 완벽한 껍데기는 그야말로 찬사를 자아냈다.

완벽해, 아주 훌륭해, 눈과 귀가 순식간에 정화되었어!

그런 류현조가 황송하게도 지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이상한 말을 지껄이면서.

“날 위해 뭐든 다 해 주겠다던 네가 이렇게 쉽게 배신해?”

껌벅, 껌벅.

연재는 눈을 두 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남자가 하는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그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야. 정말 날 배신할 생각이 아니라면.”

아니 그러니까. 어떻게 당신을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우리 둘 사이는…….

“진희 씨, 이게 무슨 말이죠?”

순식간에 존재감을 잃어버린 맞선 상대의 억울한 호소에 연재는 그제야 자신이 맞선 중이란 사실을 상기했다.

고개를 돌려 방금까지 취미를 논하던 맞선 상대를 쳐다봤다.

저도 지금 억울합니다. 제 사전에 이런 시나리오는 없었거든요.

“진희 씨, 설명해 보세요.”

맞선남이 다그쳤고.

“못 알아들었습니까?”

오만한 놈이 대답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둘이 대화하라고. 양쪽에서 부딪치는 시선에 타 죽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현조의 날카로운 시선은 어찌나 강렬한지 눈으로 핥는 것만 같았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죠? 황당해서 할 말을 잃을 지경입니다. 진희 씨,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이글이글 타오르던 현조의 눈이 그제야 연재에게서 떨어져 맞은편 남자에게 닿았다. 뱀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독기가 잔뜩 오른 눈이었다.

“날 사랑한다고 믿었던 여자가 그쪽이랑 맞선을 보고 있는데, 내가 황당할까요? 아니면 이 여자와 웃으며 맞선을 보고 있는 그쪽이 황당할까요?”

“진희 씨! 설명 좀 해 봐요!”

다시 두 남자의 눈이 연재에게 향했다. 네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추궁하는 상황에 가장 미치고 환장하고 싶은 사람은 연재였다.

“이 여자 이름이 이진희가 확실합니까? 내가 알기로는 이 여자 이름은 서연재인데.”

“뭐, 뭐라고? 당신 이진희 아니었어요?”

남자는 이제야 이름이 바뀐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화를 내며 물었다. 연재는 말도 못 하고 어쩔 수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남자의 얼굴이 씹다 뱉은 껌처럼 일그러졌다.

“그렇다는데, 알아들었으면 그만 퇴장하지?”

“뭐, 뭐라고요? 진짭니까? 좋아요.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 우리 둘이서 대화를 해 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렇죠? 진희 씨?”

끝내 현실을 부정하려는 듯 맞선 상대는 진희라는 이름을 놓지 못했다. 그러자 현조가 연재의 등받이에 한 손을 얹고 남자를 강렬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요.”

경고하듯 내뱉는 현조의 서늘한 목소리에 남자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곤혹스러운 것은 연재였다. 등 뒤에서 들리는 묵직한 목소리가 목덜미를 타고 등줄기를 짜릿하게 전율하자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여자, 내 여자라고.”

현조의 일격에 남자는 몹시도 불쾌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어떤 게 진짜지? 이름이 서연재가 맞긴 한 건가?”

말이 짧아졌다. 오만한 상사라도 말을 놓은 적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그의 오만한 싹수가 빛을 발하려나 보다.

“여기엔 사정이 있습니다. 전무님.”

구차한 변명을 위해 운을 띄웠다. 하지만 연재는 자신이 왜? 대체 왜? 이 남자에게 변명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는 원초적인 억울함을 눌러 참는 중이다.

“그 사정이 뭔지 몹시도 궁금해지는군요.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사정이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나도 이 억울함을 납득할 수 있게 설명 좀 부탁합니다, 전무님. 이라고 잘난 얼굴에 퍼부어주 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상사가 까라면 까고, 납득시키라면 납득시켜 드려야 한다.

“서 비서.”

“네. 전무님.”

침이 꼴깍 넘어갔다. 무슨 말을 하려고 또 저렇게 빤히 쳐다보는 걸까.

이미 충분히 뒤통수는 얼얼하고, 더할 나위 없을 만큼 판타스틱했는데.

“결혼, 할 겁니까?”

잠깐, 잠깐, 잠깐! 느낌이 이상하다.

“나랑 하죠. 그 결혼.”

눈을 깜빡이다, 테이블 아래 숨겨 놓은 손등을 꼬집었다.

“어차피 할 결혼, 나랑 하자고. 서 비서.”

전무님이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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