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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3 (14/14)

에필로그 3

세면대에서 손을 씻은 후, 페이퍼 타월을 한 장 빼 닦으며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거울 속 자신을 보고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부한단입니다. 아니야. 만나서 반갑습니다. 부한단입니다. 아니야. 이것도 아니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다시 거울을 보며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부한단입니다. 아니야. 그래, 그냥 ‘안녕하세요’로 하자. 할 수 있어. 부한단, 떨지 말고 평소대로 하는 거야. 평소대로. 너무 긴장하지 말고.”

헤어숍에서 손질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한 번 더 훑던 한단은 화장실 잠금 고리 푸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한번 움츠리곤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호텔 로비에 있는 카페 입구에서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하는데 그녀 뒤에 누군가 다가와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많이 기다렸어?”

상체를 살짝 틀어 규혁을 본 한단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방금 왔어요. 회의는 잘 끝났어요?”

“응. 마무리는 이 차장에게 맡겼어.”

찬웅과 함께 기술원 미팅에 참석했던 규혁은 다행히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감색 슈트와 그보다 연한 네이비색 넥타이를 맨 규혁이 한단의 손을 끌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앉아 있어요.”

규혁은 의자를 빼내 한단에게 앉으라고 권한 후, 다시 카페 밖으로 나갔다. 규혁의 뒷모습에 시선을 보내며 긴장으로 조여드는 가슴을 앞으로 내밀어 깊게 호흡했다.

“여기, 앉아도 될까요?”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연한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곱게 올린 여자가 한단을 보며 의자를 잡았다.

“네?”

“혁이랑 길이 어긋난 거 같아서요.”

‘혁’이란 말에 한단은 앞에 선 그녀가 규혁의 모친임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벌떡 일어나 두 손으로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셔도 괜찮다는 제스처를 했다.

“늦지 않게 온다고 서둘렀는데, 그만 휴대전화를 놔두고 왔어요.”

“아! 제가 규혁 씨에게 전화할게요.”

“그래 주면 고맙지요.”

“말씀 놓으셔도 됩니다.”

한단이 휴대전화를 꺼내 규혁의 연락처를 터치했다. 통화가 연결되자 한 손으로 송화기 쪽을 가리고 방금 어머니께서 도착하셨다고 말했다.

“차 시킬까요?”

“혁이 오면 같이 해요.”

“아, 네…….”

한단은 어떻게 자신을 알아봤을지 궁금함이 몰려왔지만, 인사가 먼저라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저…… 늦었지만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부한단입니다.”

“연습한 거랑 다르네요.”

“네?”

“아까 거울 보면서 열심히 연습하시던데.”

순간 세면대 앞에서 이것저것 인사 연습을 했건 걸 떠올린 한단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갔다.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죠?”

“아, 네……. 예.”

더듬거리며 답하는데 입속에서 시뻘건 열기가 쏟아지는 것처럼 민망함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규혁의 모친은 한단이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조차 순수하게 보였는지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 하기에 이름만이라도 알려 달라고 아들 녀석에게 졸랐답니다.”

오랜 병상 생활을 했던 남편을 보내고 건강이 나빠졌다는 말을 규혁에게 들었다. 하지만 직접 마주하며 미소 짓는 얼굴은 다행히도 걱정할 만큼 아파 보이진 않았다.

“맞게 찾으셨네요.”

마침 규혁이 그들 사이로 다가오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휴대전화를 깜빡했어.”

아들을 향해 손을 올리자 규혁이 따뜻하게 잡아 줬다.

“별말씀을요. 잘 찾으셨으니 다행이에요.”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모자의 대화를 들으며 한단은 규혁이 누굴 닮아 배려가 깊고 부드러운지 대충 짐작이 갔다.

얼굴은 모친을 닮지 않았지만, 성격과 부드러운 음성은 많이 닮아 있었다.

카페를 나와 호텔 지하 1층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함께 가 식사를 주문했다.

규혁과 한단은 스테이크를, 규혁의 모친은 가벼운 음식으로 먹고 싶다고 해 닭 가슴살 샐러드와 오일 파스타를 주문했다.

날씨 이야기, 며칠 전 있었던 규혁의 미식축구 이야기와 한단이 해 준 음식 이야기를 들으며 때론 웃고, 때론 감탄하는 규혁의 모친은 말하기보단 듣기에 치중한 얼굴을 했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규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웬만하면 나중에 다시 하겠다는 말로 끊을 텐데, 그는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곤 레스토랑 밖으로 전화를 받기 위해 나갔다.

규혁이 사라지고 두 사람만 남게 돼 어색해지면 안 될 것 같아 한단이 먼저 말했다.

“저…… 편찮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젠 괜찮으신가요?”

“그래요. 제가 좀 아팠어요.”

규혁의 모친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한단에게 인자한 눈빛을 했다.

“혁이 아빠 보내고 나서 마음이 허하니 갑자기 몸이 아파지더라고요. 그래도 혁이가 곁에 있어 줘서 그나마 덜 아팠던 것 같네요.”

“다시 건강해지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다행이라 말하는 한단의 눈동자가 진솔하게 빛났다.

“겉보기와 달리 여리고 정이 많은 녀석이에요. 늘 밝게 웃는 것처럼 보이지만, 외로움도 곧잘 타곤 하죠.”

“규혁 씨가요?”

모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고집도 세고.”

“그건 맞는 거 같아요. 고집 은근히 세요.”

맞장구치듯 한단이 살짝 웃으며 대꾸했다.

“그걸 흔히 똥고집이라고 하지요. 일 잘하고 똑똑해 보이지만, 여러 가지로 모자라고 비어 있는 구석도 많은 녀석이니 한단 씨가 옆에서 잘 이끌어 줬으면 해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아들을 저격하는 모친을 보며 웃어야 할지 그저 놀란 표정을 해야 할지 몰라 보고만 있는데 규혁이 돌아왔다.

“무슨 얘기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어머니와 한단을 번갈아 보며 묻는 규혁의 얼굴엔 미소가 배어 있었다.

규혁의 물음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벌리고선 “아, 어”만 작게 뱉는데 그의 모친이 답했다.

“내 아들 잘 부탁한다는 이야기. 한단 씨라면 널 충분히 사랑해 줄 것 같구나.”

“말씀드렸잖아요. 속 깊고 마음 따뜻한 사람이라고.”

무언가 뜨뜻하고 묵직한 것이 올라와 눈이 시렸다. 평범하지 않은 과거로 인해 동등하게 평가받기보단 아웃사이더로 취급받았던 적이 더 많았다.

남들보다 열 배 이상 더 노력하고 두각을 보여야만 동등한 시선으로 봐 줬던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늘 그래 왔으니까.

그런데 처음 본 규혁의 모친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아들을 향한 눈빛, 아들에게 보이는 표정만으로도 모든 걸 꿰뚫었다.

한단이 자신의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깊이와 폭을 말이다.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와 함께 차를 타고 규혁의 집으로 향했다.

규혁은 하룻밤 주무시고 가시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싫다고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내 집이 편해. 걱정 마. 바로 옆에 네 이모가 사니까.”

결국 모친의 고집에 규혁이 차를 일산 방향으로 틀었다. 한단은 백미러로 눈 감고 앉은 규혁의 모친을 보며 레스토랑에서 들었던 ‘똥고집’이 생각났다.

어머니나 아들이나 고집 세긴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입 안의 점막을 살짝 깨물며 참았다.

어머니를 모셔다 드리고 규혁이 향한 곳은 한단이 사는 아파트였다.

피곤한지, 아니면 두통이 생겼는지 규혁이 방에 있는 침대 위로 풀썩 엎드려 눈을 감았다.

한단이 침대에 걸터앉아 규혁의 머리칼을 손으로 부드럽게 훑었다.

“머리 아파요?”

“조금.”

“왜요? 회사에 일 생겼어요?”

식사 도중 전화를 받으러 나간 걸 상기하며 한단이 물었다.

한쪽 눈만 뜬 규혁이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한단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좋아서.”

“응?”

“모든 게 다 좋아서. 어머니 건강도, 그리고 당신을 알아봐 주신 마음도 좋아서.”

“좋은데 왜 머리가 아파요?”

침대에 걸터앉았던 한단이 몸을 가로누우며 규혁과 마주 봤다.

머리칼을 훑던 손을 내려 규혁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며 아주 작은 심각함을 내비쳤다.

“두통약 줘요?”

“아니. 견딜 만해.”

“맨날 견딜 만하대? 약 먹으면 아프지 않을 텐데.”

속상한 얼굴로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자 규혁이 웃으며 이마에 댄 한단의 손을 잡아 내렸다.

“부한단 손이 약손인가 봐. 머리 만져 주니까 두통이 사라졌어.”

“어유! 유치해.”

한단이 어깨를 흔들며 대꾸하자 규혁이 와락 껴안았다.

“유치해도 어쩔 수 없어. 데리고 살아야지. 안 그래?”

“역시, 어머니 말씀이 맞았어.”

“우리 엄마? 뭐라고 했는데?”

“비밀!”

일부러 약 올리는 것처럼 한단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규혁이 마저 한쪽 눈까지 다 뜨곤 상체를 일으켜 한단 위로 올라왔다.

“그 비밀, 오래 못 갈 텐데.”

“절대 안 될걸요!”

“과연, 그럴까?”

규혁이 한단의 입술에 진하게 키스하더니 그녀의 옷을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한단도 지지 않겠다는 뜻인지 규혁의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옷들이 침대 아래로 두서없이 떨어졌고, 반듯하게 정리된 시트가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한단의 매끈한 다리가 규혁의 허리를 단단히 감쌌고, 가느다란 목과 하얀 어깨 위로 규혁이 키스하며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나른하고 불규칙하게 움직이던 육체가 결합함과 동시에 규칙적인 리듬을 탔다. 봉긋하게 솟아올랐던 한단의 젖가슴이 규혁의 탄탄한 가슴에 눌려 부드럽게 뭉개졌고, 가는 허리를 잡아 그녀 안으로 그를 깊게 밀어 넣으며 격한 호흡을 뱉어 냈다.

절정으로 치솟는 육체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한 두 사람의 입에서 외마디처럼 격렬한 단음절의 소리가 차례로 토해졌다.

뜨거움은 축축하게 땀으로 변해 육체를 식혀 주며 쾌락의 여운을 마음껏 느끼게 해 줬다.

한단을 안은 채 모로 누운 규혁이 턱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살며시 눌렀다.

머리칼의 느낌이 좋은지 규혁의 입술 양쪽 끝이 위로 살짝 휘어졌다.

“어머니가 그랬다고?”

“네.”

규혁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은 채 한단이 웃음 섞인 대답을 했다.

“맞아.”

“에?”

그 말에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 들어 규혁의 눈을 바라보았다.

“맞다고. 모자라고 비어 있는 놈 맞아. 그러니까 부한단, 당신이 채워 줘.”

규혁도 얼굴을 내려 한단과 눈을 맞췄다.

“어떻게 채워 줄까요?”

“지금처럼만 해 주면 돼.”

규혁만 알아들을 만큼 한단이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가슴에 얼굴을 갖다 댔다.

“많이 사랑해 줄게요.”

미소 짓는 규혁의 눈가 양옆으로 미세한 주름이 생겼다. 한단이 듬직하고 단단한 등을 껴안으며 어루만지자 규혁이 눈을 감았다.

울타리가 사라진 한단의 마음속에 또 다른 울타리가 생겨나고 있다. 이규혁이라는 남자가 만들어 준 울타리.

마음 다치지 않게, 상처받지 않게 꼭꼭 잠가 놓았지만 번번이 다가와 문을 열게 만든 남자가 실은 그녀를 끊임없이 기다려 줬다는 것도, 마음을 헤아려 줬다는 것도 알게 됐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이규혁, 이 남자가 유일하다는 것을 한단은 가슴으로 실감했다.

한단의 귀에 규혁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때론 강하고, 때론 약하게. 하지만 박동의 리듬은 규칙적이었다.

한단은 그가 만든 울타리 안에서 가장 편하고 행복한 잠을 잘 수 있었다.

〈END〉

빨리 대답하라고 조르지 않을 테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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