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징크 블렌드(Zinc blende)
5월의 핀란드 날씨는 한국의 따뜻한 봄과 같았다. 횡성 연구소 조백웅과 함께 오는 출장이었지만 비행기 편명만 같을 뿐 좌석은 떨어져 있어 한단은 그나마 마음 편하게 긴 시간 비행할 수 있었다.
내성적인 한단에게 친밀하지 않은 사람과 오랜 시간 함께 붙어 있는 것만큼 곤혹스러운 것도 없었다.
오울루에 있는 오슬로 연구소가 낯설지 않게 다가온 것은 고작 한 달여 만에 다시 온 이유도 있겠지만, 그녀를 따뜻하게 맞아 준 연구원들이 있어서였다.
계약된 프로젝트로 일할 때와 고객 신뢰 차원에서 서비스 개념으로 일할 때의 온도 차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지난 출장에서는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던 브리믄 시폰 수석이 연구소에 들어서는 한단에게 악수를 청하며 반겼기 때문이다.
일주일 일정으로 온 출장이지만 설혹 실패한다고 해도 성공할 때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는 테스트였기에 부담 없이 일했다.
숙소도 같고,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것도 같았다. 연구소도 같고 실험실도 같았다. 하지만 마음은 달랐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규혁의 허리를 잡고 탔을 때가 생각났고, 숙소에서 혼자 사우나를 하다가 규혁과 함께 한 사우나가 기억났으며, 레스토랑에서 식사할 땐 마주 앉아 먹던 규혁이 눈에 선했다.
그럴 때마다 한단의 눈이 말갛게 젖어 들었고, 가슴 한복판으로 무거운 공기가 누르는 듯 답답함이 몰려왔다.
타국에서 일주일은 금방 흘렀다. 웬일로 마지막 날엔 시폰 수석이 한단, 조백웅과 함께 식사도 했다.
시폰 수석은 규혁이 함께 오지 못한 것에 은근 아쉬움을 나타내며 조만간 만나길 희망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한단은 의례적인 감사의 말로 들으며 사장님께 꼭 전하겠다고 답했다.
이번에도 조백웅은 한단보다 며칠 더 머무르다 한국으로 들어갈 거라 말하며 귀국을 준비하는 한단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오슬로가 유타페에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몇 시 비행기로 가시죠?”
“내일 저녁 비행기요.”
“잠시만요.”
조백웅이 등에 멘 백팩을 벗어 가슴팍으로 가져와 지퍼를 열고 뭔가를 꺼냈다.
“뭐예요?”
“선물요.”
“네?”
노르웨이 국기로 포장된 손바닥 크기의 사각형 박스 두 개를 한단에게 건넸다.
“한 개는 부한단 차장님 거고, 나머진 이규혁 사장님께 전해 달라고. 시폰 수석이 직접 준비했대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조백웅에게 받은 선물을 보며 머뭇거리듯 입술만 달싹였다.
“원래 북유럽 사람들이 무뚝뚝하고 차가워 보일 수 있지만 알고 보면 고마워할 줄도 알고 정도 많아요. 저번에 이규혁 사장님 덕분에 칩 수율 개선도 있었고, 이번엔 울트라 바이올렛B로 출장 와 준 것도 있고 해서 시폰 수석이 준비한 거 같아요. 내 생각이지만.”
조백웅이 한쪽 눈을 장난스럽게 찡긋거리곤 백팩을 다시 등에 멨다.
“아시죠? 시폰 수석이 노르웨이 사람인 거.”
“네. 오슬로 사장님도 그렇고요.”
“뭔진 모르지만, 기념으로 가져가요.”
“감사하다는 말 꼭 전해 주세요.”
“오케이. 나중에 한국에서 봅시다.”
“네, 조 수석님도 건강하게 마무리 잘하세요.”
조백웅이 엄지와 검지를 붙여 ‘오케이’를 해 보인 후 호텔 로비를 나갔다.
선물을 들고 호텔 방으로 들어간 한단은 옷장에 넣었던 캐리어를 꺼냈다. 지퍼를 열어 옷과 세면용품 사이에 공간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자기 몫의 선물을 풀었다.
하얀 머그잔 가운데 절규하는 사람 그림이 코믹하게 희화화된 컵이었다.
피식. 한단이 입꼬리를 양쪽으로 올렸다. 뭉크가 노르웨이 사람이었나, 생각하며 다시 포장해 가방 안으로 넣는데 매시 포켓이 딱딱했다.
뭐지? 아무것도 넣지 않았는데. 갸웃하며 지퍼를 열어 매시 포켓으로 손을 넣었다.
약간 딱딱한 마분지 정도 두께의 카드보단 조금 큰 사이즈 종이가 나왔다.
‘북극권(Arctic Circle)’이라는 글씨와 함께 순록이 멋지게 자리를 차지했다.
올라갔던 입꼬리가 내려갔고, 꾹꾹 눌렸던 무언가가 일시에 터져 버렸다.
순록의 근사한 뿔 그림 위로 툭툭 투명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입술을 앙다물어 참으려 해도 한번 터진 눈물은 줄줄 새어 나왔다.
슬픈 게 아니야. 아파서도 아니야. 그냥 나오는 거야. 마음이 시켜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꺼이꺼이 소리마저 내며 우는 한단의 귓가로 규혁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유타페에서 북극권을 넘은 사람은 우리 둘뿐일걸.”
어디 그것뿐일까. 산타 마을에 간 것도, 함께 밤을 보낸 것도, 횡성에서 눈사람을 만든 것도 모두 규혁과 자신 둘만 했던 일이었다.
불과 몇 달 동안 규혁과 함께 했던 것들이 너무 많았다. 아무리 정을 떼려고 해도,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한단에게 악착같이 달라붙어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침대에 꼬꾸라지듯 상체를 엎드리며 두 손으로 북극권 허가증을 꽉 잡곤 한단이 울었다.
다음 날 아침, 붉어진 눈가와 부은 얼굴은 모자를 최대한 푹 눌러써 가리고 공항으로 가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 도착은 아침 8시였다. 차를 몰고 집이 아닌 회사로 향했다. 출장 자체가 아무리 사장의 지시라고 해도 직원들에게 미안했다.
기내에서 산 초콜릿과 미니 향수를 선물로 나눠 준 다음 퇴근할 계획으로 유타페로 들어섰다.
출근 시간이 지난 터라 주차장에 차들이 가득했고, 사무실엔 다행히 직원들 대부분이 자리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한단을 보며 반은 놀라운 얼굴로, 반은 밝은 미소로 반겼다. 회사 분위기는 침울하다고 해도 그녀에게 보인 반응은 어둡지 않았다.
제일 먼저 은영이 뛰다시피 다가와 한단의 팔을 잡으며 격하게 반응했다.
“차장님, 공항에서 바로 오신 거예요?”
“응.”
“많이 피곤해 보여요.”
그 말에 한단이 한 손으로 뺨을 어루만졌다. 얼굴 부기와 눈가의 붉은색이 조금 남아 그저 피곤한 얼굴처럼 보였다.
“고생했습니다, 부 차장님.”
김학준이 일어나 한단에게 다가가며 웃었다.
“은영 씨. 이거.”
“뭐예요?”
“그냥 오기 뭐해서. 향수하고 초콜릿. 사람 수대로 챙겼으니까 나눠 줄래?”
“뭘 이런 걸. 고맙습니다.”
은영이 꾸벅 인사하곤 돌아다니며 차례로 전달했다.
한단은 자신의 책상으로 가 앉으며 스치듯 불 꺼진 사장실을 바라보았다.
트렁크 속 캐리어 가방에 두고 온 머그잔이 생각나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망설이는 그때 은영이 다가왔다.
“다 나눠 줬어요. 안 받은 사람은 최한영 부장님하고 사장님뿐이에요.”
“어디 가셨어. 두 분 모두?”
묻는 한단에게 은영이 바로 답하지 않고 남은 향수와 초콜릿 상자를 매만지며 입술만 달싹였다.
“왜, 무슨 일 있었어?”
“그게요…….”
“괜찮아. 말해 봐.”
“지금 사장님 상중이에요.”
“뭐?”
“부친상요. 사장님 아버지 돌아가셨거든요.”
정말 예상하지 못한 소식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묻고 싶은데 입 안의 혀가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단어부터 내뱉어야 할지 순서조차 혼란스러웠다.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데, 왜 나에겐 연락하지 않았어, 사장님은 어떠셔…… 등등. 생각은 머릿속에서만 빙빙 맴돌았다.
“우리도 못 갔어요.”
학준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은영 대신 말했다. 한단이 시선을 돌려 놀란 눈으로 쳐다보며 계속 말해 달라는 표정을 했다.
“부 차장님 출국하고 이틀 지나 최한영 부장님께 전달받았어요. 유타페 직원 모두 문상 가려고 했는데 사장님께서 가족하고만 장례 치르고 싶다고 해서요. 대신 최 부장님만 대표로 갔어요.”
“많이 편찮으셨대요?”
“저희도 자세한 건 몰라요. 사장님이 워낙 그런 쪽으론 말씀하지 않으셨으니까요. 발인은 그저께 끝났고, 지금은 혼자 계신 어머님을 위로한다고 들었어요.”
학준의 말을 듣고 이해했다는 의미로 한단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장례 치르고도 당분간 사장님은 못 볼 거예요.”
이번엔 은영이 말했다. 학준과 한단의 시선이 동시에 은영에게 향했다.
“사장님, 곧 독일 출장 가시거든요. 원래는 어제가 출국이었는데 연기된 거라. 오늘 아침에 비행 스케줄 다시 잡아서 사장님께 보내 드렸어요.”
“통화는 못 했어?”
한단이 물었고 은영이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만 까딱거렸다.
“독일 팔콘사 갈 겁니다. CT 때문에 홀딩 된 프로젝트를 설득하려고요. 그거 준비하느라 며칠 밤도 지새우신 거 같은데, 부친상까지 겹쳐져서.”
학준이 말을 흐렸다.
한단이 고개 돌려 사장실을 보며 규혁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그려 봤다. 그 남자에게서 슬프고 아픈, 그리고 침울한 표정은 어떻게 나올까.
혹시나 출장 전, 지독한 통증으로 무기력하고 기진맥진했던 모습과 닮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심장이 조금씩 죄어 왔다.
규혁의 부재를 듣고 난 후, 몸이 꺼질 듯한 피곤함이 뒤늦게 찾아와 한단을 괴롭혔다.
적응 안 된 시차, 유타페에 오기까지 잔뜩 날이 섰던 신경들이 피로감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업무는 내일부터 할게요.”
도저히 더 있기가 힘든지 사무실 밖으로 나가면서 한단이 말했다.
“그렇게 하세요. 오늘은 푹 쉬고요.”
학준이 대답했고, 은영이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며 손을 흔들었다.
닫힌 엘리베이터 문에 반사된 자신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독 생소하게 보였다.
핀란드 출장 전이나 후나 표면적으로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유타페는 그 자리에 있었고, 프로젝트는 여전히 홀딩 상태고, 직원들 역시 그대로이다.
하지만 한단의 마음은 그 반대인 것처럼 들쑥날쑥하게 요동치고 흔들거렸다.
* * *
프로젝트가 홀딩 된 가운데 이찬웅에게 기술원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재판과 소송을 하면서 껄끄러워졌을 것 같았는데 다행히 기술적인 면에선 유타페의 능력을 알아봤는지 새로운 국책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고 했다.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리는 찬웅이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송 때문에 그전 프로젝트가 이미 물 건너갔잖아요. 그래서 앞으론 기술원하고 일 못 하겠다고 포기했거든요. 그런데 기술원 내부에서 회의한 결과 우리 유타페가 타 업체들과 비교해서 점수가 높았대요.”
“무슨 점수요?”
학준이 물었는데 답은 한단이 했다.
“기술원 자체 평가 점수가 있어. 일정 이상 되어야 국책 프로젝트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
한단도 규혁과 함께 기술 관련 프로젝트를 검토한 경험을 가지고 설명했다.
“네, 맞아요. 거기서 유타페 점수가 제일 좋았대요.”
“그런데, 지금 우리 회사 사정에 대해 알곤 있나요?”
학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CT와 유타페 간의 특허 이슈를 말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쪽 분야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을 거야.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이번 기술원 프로젝트는 계측 분야가 아니야.”
“그럼요?”
“솔직히 어려울 수도 있지만, 최 부장님이 같이 해 보자고 해서 하는 건데…….”
머리를 긁적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찬웅이 한단과 학준을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의료용 광학 장비 개발에 대해 세미나 발표한 거 기억나죠?”
“어!”
“네!”
한단과 학준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국책 프로젝트는 광신호 증폭 시스템인데, 호흡기 감염이나 바이러스 접촉에 의한 감염을 현장에서 즉시 검사하여 감염 유무를 측정하는 시스템 개발이에요. 대학 병원하고 기술원, 유타페가 함께 참여하기로 한 프로젝트예요.”
“축하해요.”
“정말 다행입니다, 이 차장님.”
한단과 학준의 덕담에 찬웅이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좋아했다.
“빨리 사장님께도 말씀드려야 하는데.”
“사장님은 모르세요?”
찬웅의 말에 학준이 되물었다.
“나랑 통화한 적은 없으니까. 모르지, 뭐. 부장님이 말씀드렸는지도.”
그러고 보니 규혁은 열흘 가까이 유타페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직원 누구와도 통화한 적 없었다. 은영에게도 문자나 메일로 필요한 것만 간단명료하게 보냈고, 그나마 최한영과 아주 짧은 시간 통화하는 것이 다였다.
“독일 출국도 아직 하지 않으셨는데.”
“여태?”
학준의 말에 이번엔 찬웅이 되물었다.
“네, 팔콘사 도착하면 저에게 연락해 주기로 하셨거든요. 미팅에 필요한 자료를 저에게도 주셨어요. 몇 가지 보충해야 할 부분도 포함해서.”
방금까지 밝게 찬웅을 응원하던 학준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왜?”
“사장님이 안 계시니까……. 이상해요. 어색하고. 주인공은 없고 조연들만 있는 것 같아서.”
찬웅이 한 손을 들어 학준의 어깨를 격려 차원에서 두드렸다.
“……먼저 일어날게요.”
왠지 자리를 피해 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한단이 잔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분명 자신이 나가면 찬웅이 선배와 상사로서 뭐라 위로해 줄 것이라 생각하며 한단도 사무실이 아닌 비어 있는 회의실을 찾아 들어갔다.
손에 든 머그잔은 시폰 수석에게 선물로 받은 잔이었다. 물끄러미 잔을 보며 아직 규혁에게 주지 못한 걸 기억했다.
규혁이 없는 유타페가 한단에게도 낯설긴 마찬가지였다. 가장 중요한 부품이 빠진 채 전원만 켜져 어설프게 작동하는 기계 같았다.
테이블 위로 엎드리자 금속의 매끄러운 감촉이 뺨을 차갑게 만들었다. 규혁이 불편하다고 하면서도 그가 없는 것 역시 편하지 않았다. 배꼽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올라와 입 밖으로 나왔다.
규혁을 생각하면 심장 크기만큼의 아픔이 똑같이 박동하며 울었다. 아무리 울타리를 쌓아도 규혁만 생각하면 어느샌가 허물어지려 했다.
더는 아무 사이 아니라고 머리가 말해도 심장에서 받아들이지 못했다.
심장은 속수무책이었다.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바로 지금처럼.
* * *
당장 급한 일이 없다고 게으름을 부리진 않았다. 알아서 자신이 해야 할 것들을 찾았다. 평소 궁금했던 실험을 하는가 하면, 업무 시간에 얽매여 바쁘게 준비했던 세미나를 공들여 준비했다.
이번 세미나 담당은 은영이었고, 은영은 여기저기 직원들에게 미리 물어 가며 이번만큼은 철저하게 준비하겠다는 열의를 보였다.
한단 역시 홀딩 된 샐림 쓰리를 손에서 놓지 않고 듀티 프리에 관해 규혁이 줬던 논문 자료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부 차장님! 2번 전화요. 오슬로 조백웅 수석이라고 합니다.”
은영의 말에 손만 움직여 수화기를 들었다.
“네, 부한단입니다.”
- 부 차장님! 이규혁 사장님께 전달받았지요?
“네?”
이규혁이라는 말에 한단이 움찔거리며 놀란 표정을 했다.
- 아하, 아직 연락 못 받으셨구나! 내일요! 내일 브리믄 시폰 수석이 유타페에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뭐라고요? 시폰 수석이요?”
순간 사무실 직원들이 일제히 한단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제야 자신의 목소리가 컸다고 느꼈는지 어깨를 움츠려 얼굴을 내렸다.
“그게 사실인가요?”
- 실은 제가 한국에 올 때 시폰 수석하고 함께 왔거든요. 횡성 연구소 상황도 파악할 겸 오고 싶다고 해서 모시고 왔는데 유타페도 가고 싶다고 하네요.
“저희 사장님하고도 이야기가 됐다는 거죠?”
- 네. 어제 통화했습니다. 왜요? 혹시 무슨 일 있습니까?
조백웅 수석은 규혁의 부친상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다.
“아니요. 확인차 물어본 것뿐입니다. 내일 몇 시에 내방하실 예정인지요?”
- 오전 11시에 방문해 함께 점심까지 하기로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연락 부탁합니다.”
조백웅과의 통화가 끝났다.
갑자기 굉장히 바빠진 것 같은 기분에 벌떡 일어난 한단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직원들 중에서 최한영을 보며 말했다.
“오슬로의 연구소장인 시폰 수석이 내일 우리 회사를 방문한다고 합니다.”
최한영도 뭔가에 홀린 듯 스르르 일어나더니 빠른 걸음으로 한단에게 다가갔다.
“그 유브이 12인치 MOCVD 프로젝트 말이지?”
“네.”
“와우!”
사무실 저쪽에서 누군가 주먹을 위로 올리며 환호했다.
“왠지 뭔가 살아나려는 분위기 같지 않습니까?”
이번엔 찬웅이 일어나 흥분된 표정으로 말했고, 한영이 한단을 보며 물었다.
“언제 온대요?”
“내일 오전 11시요.”
“사장님은?”
“어제 통화했대요. 그러니까 아시겠죠.”
“은영 씨!”
한영이 은영을 불렀다.
“네, 부장님.”
“퇴근 전에 ‘웰컴 투 유타페’라는 환영 문구 프린트해서 현관과 사무실 입구에 붙여요.”
“고객은 어디로 할까요?”
“오슬로 브리믄 시폰 수석이야. 알파벳 영문은 내가 따로 알려 줄게.”
한단이 은영에게 말했고, 한영은 한 손을 들어 한단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칭찬의 말을 건넸다.
“부 차장. 고마워.”
고맙다는 세 글자에 많은 의미가 들어가 있음을 한단도 알고 있다.
CT와 기술 이슈로 시끄러운 가운데 자외선 살균 업체로 유명한 오슬로 연구소장의 방문은 획기적인 이벤트에 속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 한단과 한영만 남아 오슬로 수석과의 미팅을 위해 회사 PT 자료를 함께 손보고 있는데 사무실 문이 열렸다.
그 순간, 한단의 호흡이 일시에 정지된 것처럼 멈췄다. 하지만 반대로 그녀 안의 심장은 빠르게 피를 흡수하며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두근거렸다.
“괜찮으십니까?”
한영이 일어나 규혁에게 걱정 반, 반가움 반을 담아 물었다.
“내일 오슬로에서 시폰 수석이 온다고 들었습니다.”
“알아.”
검은색 슈트를 입고 온 규혁은 생각했던 것보다 덜 피곤한 얼굴로, 덜 침울한 눈동자로 사장실로 들어갔다.
한영이 뒤따라 들어가는 걸 한단은 가만히 보기만 했다. 자리에 도로 앉아 자료를 보는데 눈앞이 하얬다. 단 한 글자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고, 모든 신경은 사장실로 집중됐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열린 문 사이로 나왔지만 그마저 확실하지 않았다. 신경 세포는 사장실로 갔지만 한단의 마음이 규혁에게 가 있어 박자가 자꾸만 어긋나 모든 게 선명치 않았다.
노트북을 보는 시선도, 사장실로 향한 청력도 흐릿했다.
규혁이 유타페 사무실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한단의 몸은 예열을 마친 화로처럼 발갛게 달아올라 귀와 뺨, 하물며 목덜미에서까지 뜨거움이 느껴졌다.
“부한단 차장.”
한영이 사장실을 나서면서 불렀다.
“들어가 봐요. 오슬로 건으로 사장님께서 할 말이 있다고 하니까.”
엄지로 사장실을 가리키며 한영이 자리로 돌아왔다.
“PT 자료는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하죠.”
한단이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곤 태블릿을 들고 규혁이 있는 사장실로 들어갔다.
한 걸음씩 뗄 때마다 그녀의 심장이 너무 떨려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의자에 앉은 규혁은 펼친 노트북을 보며 규칙적인 마우스 클릭 소리를 만들었다.
“메일함이 다 차서.”
그간의 부재를 메일함이 대신 알려 줬다.
의자에 앉아야 할지, 그냥 서 있어야 할지 잠시 생각하며 딸깍딸깍 마우스 소리를 위안 삼았다. 그가 아직 자신을 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덜 떨리게 했다.
규혁과 눈이 마주친다면 어떤 표정으로 바라봐야 할지, 무슨 말로 위로를 건네야 할지 미처 결정하지 못했다.
“잠시, 앉아 있어요.”
규혁의 말에 조심스럽게, 최대한 소리 나지 않도록 한단이 의자를 끌어와 살며시 앉았다.
두 팔을 일직선으로 뻗어 두 손으로 잡은 태블릿을 무릎 위에 올렸다.
한단의 눈에 검은색 슈트 재킷의 웰트 포켓에 꽂힌 흰색 근조 리본이 보였다. 그걸 본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입술을 살짝 적신 후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규칙적이던 마우스 클릭 소리가 멈췄고, 한단의 시선도 정지된 규혁의 손가락에 머물렀다.
직접 보지 않아도 그가 상체를 돌려 자신과 마주 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너무 늦게, 알게 돼서…… 뭐라 위로의 말씀을…….”
“위로, 괜찮아요. 하지 않아도.”
규혁의 목소린 어둡거나 침통하지 않았다. 평소의 그 부드러움을 가진 말투로 차분하게 뱉었다.
“오랜 시간 병상에 계셨기에 마음의 준비는 항상 하고 있었으니까.”
손가락에 머물렀던 시선을 들어 자신을 보는 규혁을 바라봤다. 위로하려는 한단을 보며 옅은 미소를 보냈다.
처음으로 듣는 가족 이야기에 한단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처음 쓰러지셨을 땐 몸은 불편하셔도 얼굴은 알아보셨는데, 두 번째 쓰러지셨을 땐 그마저도 없었어요. 숨만 쉬고 내쉴 뿐. 아버지와 함께한 기억이 많지 않아 그게 조금 안타까울 뿐이지.”
사업으로 바쁜 아버진 아들과 지낸 시간이 별로 없었다. 쓰러지고 나서야 비로소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아버지. 반 정도 돌아간 입술은 삐뚤어져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아 대화는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눈짓과 눈빛으로 감정을 표현하려 애쓰는 모습은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쓰러졌을 땐 아버지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오로지 숨만 쉬며 세상에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그래서 난, 아이에게 많이 해 주려고. 많이 놀아 주고 많이 안아 주고 많이 쓰다듬어 주고 싶어. 그 아이가 아쉽지 않게. 나처럼 후회하지 않게.”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엔 한숨도 함께 들어 있어 아버지를 향한 아쉬움이 진하게 배어났다.
아, 그렇구나. 완벽하다고 생각한 그도 채우지 못한 빈 곳이, 허전한 곳이 있는 사람이었어.
그렇게 생각하자 배꼽 아래에서부터 뜨뜻한 기운이 목구멍으로 천천히 올라왔다.
“그래도 어머니가 계셔서 그걸로 충분히 위로되니까. 괜찮아요. 한단 씨. 난 괜찮아.”
부드러운 미소와 눈빛을 짓는 규혁은 오히려 한단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도 없는, 입양과 파양을 겪은 그녀에게 건네는 규혁만의 위로 같았다.
부한단 당신이 나보다 더 힘들었잖아. 더 고통스럽고 많이 아팠잖아. 그러니까 날 위로하지 마. 나보단 당신이 더 대단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야. 당차고 단단한 사람이라고.
똑, 똑.
열린 문에 비딱하니 기댄 한영이 한 손으로 노크했다.
“PT 자료 다 됐습니다. 저도 필요합니까? 회의에.”
“아니. 됐어. 최 부장은 퇴근해도 돼. 자료는 나에게 넘기고.”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한영이 한단에게 시선을 옮겼다.
“저는 사장님께 오슬로 출장 보고를 해야 해서요. 먼저 퇴근하세요.”
한단의 말에 한영이 손을 들어 장난스럽게 거수경례하며 말했다.
“그럼, 먼저 갑니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 사무실 유리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한영이 사무실 밖으로 완전히 나갔다는 의미다.
“오슬로 출장 관련해 업무 보고는 올렸습니다. 사장님이 계시지 않아 메일로 보내 드렸는데 혹시 궁금하신 것이…….”
“없어요. 아주 잘했는데, 뭘.”
한단의 말을 가볍게 끊은 규혁은 칭찬 섞인 말로 대꾸했다.
“시폰 수석이 유타페로 오게 할 정도로.”
“아니요. 저 때문이 아니라 사장님 때문에 오시는 거겠죠. 제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이어지는 규혁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라 고개 숙여 무릎 위에 있는 태블릿에 시선을 가뒀다.
“부한단, 당신 잘해. 잘하고 있는 거야. 일도, 그 나머지도 모두 다, 아주 열심히 치열하게,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고 있잖아.”
누군가에게 이런 칭찬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한단의 정수리가 뜨거워졌다. 그저 과거에서 벗어나고자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히 걸었을 뿐인데.
“그래서 반했나 봐, 내가.”
목구멍을 지나친 뜨거운 기운이 얼굴로 올라와 태블릿을 응시하는 한단의 눈동자를 왈칵 시리게 했다.
귀에선 윙윙 이명 같은 소리가 들렸고, 심장은 가슴을 때리며 밖으로 나오려고 펄떡였다.
“……사장님도 좋은 분이세요.”
“그래?”
턱을 아래로 약간 내리며 규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남자가 아닌 사장으로서 여전히 한단에게 자신은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
한단은 그가 왜 편한 길을 놔두고 힘들게 어려운 길로 가는지 그게 궁금했다. 차수진과 재결합한다면 편할 텐데 말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그가 편법이나 요령 피우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의 선택을 납득했다.
묻고 싶지만 꺼내지 못한 채 태블릿과 규혁의 검은색 구두만 번갈아 시선에 담았다.
“하실 말씀 없으시다면 저도 그만.”
“퇴근해요. 주차장까지 바래다줄게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불편하다면, 사장 이규혁의 배려라고 생각해요. 남자는 집어치우고.”
규혁이 먼저 일어나 문가로 걸어가 한단을 기다렸다.
천천히 일어선 한단의 마음이 무거웠다. 그가 이제는 완전히 포기했다고 생각하니 되레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게 가시에 찔린 기분마저 들었다.
“오늘만은…… 사장님도 힘드실 텐데…….”
“그래야 내가 편해. 잘 가는 모습 봐야 마음 놓이고.”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며 규혁이 낮게 말했다.
“내일 뵙겠습니다.”
차에 올라타기 전에 한단이 고개 숙여 인사했고 규혁이 손을 흔들었다. 어둠 속에서 멀어지는 규혁을 백미러로 훔쳐보니 가시 박힌 마음이 온몸을 통증으로 휘감았다.
다음 날, 시폰 수석과 조백웅 수석이 유타페를 방문한 시각은 11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생각보다 차가 너무 막혔어요. 보니까 중간에 사고가 났더라고요.”
마련된 회의실로 들어서며 조백웅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규혁과 한단, 그리고 한영은 미리 기다리고 있던 터라 시폰 수석, 조백웅과 번갈아 악수를 나눴다.
오늘 규혁은 진한 네이비색 싱글브레스트를 입고 웰트 포켓엔 근조 리본이 아닌 흰색 포켓스퀘어를 매치했다.
인사를 끝낸 그들이 각자 이름이 적혀 있는 의자에 앉았고, 은영이 기다렸다는 듯 들어와 커피와 다과가 담긴 접시를 사람 수만큼 앞에 놓았다.
「유타페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흔쾌히 수락해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합니다.」
규혁의 인사에 감사의 말을 전하는 시폰 수석의 얼굴엔 어린아이 같은 수줍음이 보였다.
곧이어 회의실 불이 꺼지고, 벽면으로 스크린 화면이 펼쳐졌다.
초록의 레이저 포인트가 움직이며 유타페 회사에 대한 PT가 시작됐다.
발표는 한영이 하였고, 중간중간 시폰 수석의 물음에 규혁이 답하는 식이었다.
발표가 끝나고 회의실 조명이 다시 밝아졌다. 시폰 수석과 조백웅이 나란히 앉았고 마주 보는 위치에 규혁을 중심으로 좌우로 한영과 한단이 앉았다.
「굿 잡!」
시폰 수석이 엄지를 위로 올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한영이 고개 숙여 영어로 말했고, 조백웅은 한단에게 수고 많았다고 입 모양을 냈다.
「궁금하신 점이나 문의하실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규혁의 말에 시폰 수석이 아래로 눈을 내리깔더니 잠시 침묵했다. 그러곤 시선을 들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독일 팔콘사와 진행하려 했던 계측 장비에 문제가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CT와 유타페는 어떤 관계입니까?」
정말 엔지니어답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한단이 생각했다. 에두르지 않고 직접적으로 묻는 시폰 수석을 보며 오히려 함께 있는 조백웅이 난감한 눈빛으로 양해를 구한다는 듯 한국말로 덧붙였다.
“혹시 알고 계실지는 모르지만, 오슬로와 칸 일렉트로닉은 얼마 전에 기술 미팅이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오슬로는 자외선 살균 업체로 반도체 소자를 직접 생산도 하지만 수입도 합니다. 일전에 칸에선 미국 반도체 회사를 전격 인수했지요?”
“네.”
한영이 답했다. 칸 일렉트로닉은 본인 담당이기에 무척이나 관심이 있는 얼굴을 했다.
“칸에서 인수한 반도체 회사에서 오슬로가 일부 소자를 수입해 썼습니다.”
규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폰 수석의 물음을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칸 일렉트로닉은 이번 팔콘사와 CT 간의 기술 이슈로 인해 한영이 담당하는 계측과 MOCVD 장비 개발 프로젝트를 홀딩 했고, 그 사연을 오슬로에 전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칸이 오슬로의 12인치 MOCVD와 동일한 MOCVD 개발을 의뢰한 것도 알고 있겠네요?”
한영의 물음에 조백웅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시폰 수석에게 영어로 물었다.
시폰 수석이 “OH! YES, YES. I Know!”라며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손바닥을 보이고는 규혁에게 재차 질문했다.
「하지만 유타페에 의뢰한 내용은 오슬로와 약간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칸은 이번에 인수한 반도체 회사에 자외선이 아닌 일반 파장으로 소자 개발을 한다고.」
「맞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오슬로의 양해를 구할 예정이었습니다.」
규혁의 대답에 시폰 수석이 고개를 끄덕여 이해했다는 눈짓을 보냈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칸과 오슬로의 시장 영역은 다릅니다. 다만 두 회사 간의 기술 미팅은 칸이 인수한 미국 반도체 회사가 향후 오슬로로 소자 공급이 어렵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한 회의였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직접 울트라 바이올렛B를 제작해야 했고요.」
한단도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얼굴을 했다. 그래서 급하게 울트라 바이올렛B 소자를 제작했고 수율 관련해서 유타페에 조언을 구했던 것이다.
「부한단 엔지니어 덕분에 울트라 바이올렛B가 성공적으로 생산될 수 있어 감사할 뿐입니다.」
시폰 수석이 한단에게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살짝 숙여 고마움을 나타냈다.
「자, 그럼 유타페 CEO가 답할 차례입니다. 팔콘사와 CT 간의 이슈에 대해. 이 부분에 의혹이 없어야 유타페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시폰 수석의 말에 규혁이 짧게 대답하곤 한영의 귀에 대고 뭐라 속삭이듯 말했다.
한영이 고개를 끄덕이곤 일어나 회의실을 나갔고, 몇 분 안 돼 한영이 아닌 김학준이 들어왔다.
테이블 가운데 있는 노트북을 끌어간 학준이 회사 공용 네트워크에 들어가 ‘팔콘사’라는 폴더를 열어 파일을 찾아 클릭했다.
스크린 화면으로 두 개의 도면이 나타났고, 각 도면에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으며, 모든 설명은 영문이었다.
초록색 레이저 포인트가 움직이며 규혁의 설명이 시작됐다.
「왼쪽은 CT의 광계측 장비이고, 오른쪽은 팔콘사 프로젝트로 진행했던 계측 장비입니다. 개발자는 둘 다 접니다.」
그 말에 시폰 수석의 눈이 살짝 커지며 놀란 표정을 옅게 만들었다.
「여기 초록으로 표시된 것이 CT에서 출원한 특허 번호이고, 이쪽 붉은색이 팔콘사와 CT 장비 간의 차이점을 말하는 겁니다.」
규혁의 설명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명료했다. 옆에서 듣던 한단도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요약정리가 확실했다.
자료만 봐도 기술 카피나 특허 카피라는 말이 쏙 들어갈 만큼 규혁은 명료하게 작성된 자료를 숨김없이 다 보여 줬다.
「이 자료 그대로 팔콘사에 오픈할 겁니까?」
「네. 문제없음을 확신하니까요.」
「그렇다면 CT에서 왜 당신을 괴롭히려 하는 겁니까?」
시폰 수석이 손가락으로 규혁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그 질문에 긴장한 사람은 한단이었다. 그는 뭐라고 답할까? 차마 시선을 옆으로 돌리지 못하고 테이블 위의 커피 잔만 응시했다.
차수진과의 재결합을 원하는 차국환의 협박이라고 말할까? 아니면 이규혁을 다시 CT 본부장으로 앉히려는 계략이라고 할까? 한단은 조마조마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명쾌하고 경쾌하게 적당한 미소를 머금고 규혁이 답했다.
시폰 수석도 규혁의 답이 의외라는 표정을 하곤 말했다.
「개인적인 추측으론 CT에서 유타페를 견제하려는 것 아닐까요? 아니면 반대로 당신을 원한다거나.」
「글쎄요? 유타페를 견제하기엔 CT는 거대 기업입니다. 그리고 저는 원한다고 해서 가지 않습니다. CT는 이제 저와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에 규혁이 악센트를 주며 힘 있게 말했다.
시폰 수석이 아리송하다는 의미로 턱을 엄지와 검지로 잡고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재미있군요. 거대 기업이 유타페와 힘겨루기를 한다는 것이. 그만큼 당신 회사의 기술력이 탐난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더는 질문이 없다는 의미로 시폰 수석이 어깨를 들썩이며 조백웅 쪽으로 얼굴을 기울여 작게 속삭였다.
정오가 지난 지 30분이 되어서 회의실 문이 열렸다. 예정대로 함께 점심을 하기 위해 유타페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규혁이 빠졌다. 한영과 한단만이 예약된 식당으로 향했다.
“사장님은 저녁에 독일로 출국해요. 그전에 잠시 어머님께 들른다고 먼저 가셨고.”
차를 몰아 식당으로 가며 한단에게 말했다.
“네”라고 흐리게 말하며 초점 없이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봤다.
오슬로 측 방문으로 긴장했던 마음은 회의가 잘 끝났는데도 풀어지지 않았고, 곧 떠난다는 규혁이 신경 쓰여 되레 예민해져만 갔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든지 규혁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뱅뱅 맴돌기만 했다.
“부장님.”
“왜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뭘요?”
“CT에서 왜 그러는지……. 정말 사장님이 탐나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차수진 전무님이 아직도 사장님을…….”
“차수진 전무는 떠났어요.”
“네?”
차창을 보던 한단이 운전하는 한영에게 시선을 보냈다. 한영도 힐끔 한단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완전히 바이바이. 다신 한국에 오지 않겠대요. 원래 아버지 회사에도 관심 없던 친구였어요. 복잡한 거보단 심플한 걸 좋아했으니까. 그리고…… 아무리 매달려도 돌아서지 않으니까.”
마지막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다. 한영의 말에 놀란 감정을 숨기려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오슬로의 방문 이벤트가 끝난 유타페는 다시 조용한 시간으로 되돌아왔다. 찬웅이 담당하는 의료용 프로젝트를 제외하곤 아직 이렇다 할 프로젝트를 하는 인원은 없었다.
이럴 때 바빠서 알아보지 못했던 연구나 논문, 최신 기술 특허를 주제로 함께 토의하고 스터디 하자는 한영의 의견에 직원들이 호응해 줬다.
매일 두세 시간씩 회의실에 앉아 하나의 주제로 스터디를 하며 실력을 다져 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은영의 세미나 발표 날이 돌아왔다. 빙 둘러앉은 직원들을 보며 준비한 세미나를 시작하려는 그때, 기술원 미팅을 끝내고 시간 맞춰 들어선 찬웅이 회의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약간 흥분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번쩍 들어 올렸다.
“봤어요?”
“응?”
“왜?”
갑작스러운 찬웅의 등장에도 놀랐지만, 대체 뭘 보고 저러는지 직원들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기사요, 기사! 오슬로 브리믄 시폰 수석이 인터뷰한 기사!”
찬웅이 크게 소리쳤고, 마침 세미나를 발표하려 노트북을 켠 은영이 얼른 인터넷 사이트로 가서 기사를 찾았다.
정면의 스크린 화면에 오슬로 시폰 수석의 인터뷰 사진과 함께 내용이 나타났다.
‘유럽 살균 업계의 제왕인 오슬로 연구소장 한국 방문기’라는 제목이 큼지막하게 기술 IT 면에 있었다.
모두가 숨죽여 기사 내용을 눈으로, 또는 입 모양으로 훑어 내려갔다. 한단 역시 빠르게 기사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지하철로 오면서 무심코 인터넷 뉴스를 보는데, 마침 기사가 뜬 거예요.”
찬웅이 빈 의자에 앉으며 기사 내용 일부를 읽었다.
“……그러므로 우리 오슬로는 한국의 유타페를 기술 파트너로 여기며 향후 자외선 살균에 필요한 소자 개발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예정입니다. 뿐만 아니라 계측 장비에 관해서도 탁월한 기술력을 가진 유타페와 파트너십을 가지고 개발할 계획입니다.”
한단이 휴대전화를 들고 회의실을 뛰쳐나갔다. 재빠르게 횡성 연구소 조백웅의 연락처를 찾아 눌렀다.
“안녕하세요. 유타페 부한단입니다.”
- 기사 보셨지요?
약간 흥분된 한단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지만 조백웅은 이미 안다는 듯 느긋하게 되물었다.
“네. 실은 그것 때문에……. 정말 시폰 수석님 인터뷰한 게 그러니까…….”
갑자기 차오른 벅찬 감정에 두서없는 말을 띄엄띄엄하자 수화기 저쪽에서 조백웅이 웃었다.
- 기사 다 맞아요. 인터뷰 내내 옆에 있었으니까요. 시폰 수석의 유타페 신뢰는 대단합니다. 물론 그 중심엔 이규혁 사장님의 실력도 포함돼 있고요. 아! 부 차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 합니다.”
답하는 한단의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 감사는요. 있는 그대로를 말한 것뿐입니다. 유타페 실력, 대단합니다. 저도 인정했어요.
장난처럼 진심을 말한 조백웅에게 그저 감사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통화를 끝냈다.
그도 알고 있을까? 그도 독일에서 이 기사를 읽었을까? 규혁을 생각하는데 심장이 찌릿하더니 요동치며 뛰었다. 설렘과 아픔이 똑같이 느껴졌다.
씁쓸함이 한단의 얼굴에 생길 때쯤 회의실에서 ‘와’ 하는 함성 소리가 났다.
회의실로 돌아가니 그토록 머릿속에서 뱅뱅 머물기만 했던 규혁의 얼굴이 스크린 화면 속에서 생생히 보였다.
“최 부장님이 화상 연결하셨어요. 사장님은 방금 팔콘사와 미팅을 끝내셨다고 했고요.”
은영이 신난 얼굴로 회의실에 온 한단에게 말했다.
학준이 궁금한 것이 많은 얼굴로 모니터 속 규혁에게 물었다.
“그리고 사장님, 팔콘사는 어떻습니까?”
은근 기대가 서린 목소리는 약간 들떠 있었다.
- 이제 시작이니 너무 조급해 말아요, 김 과장. 아직 이렇다 할 반응은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2차 기술 미팅을 또 하기로 했으니까 희망 품어 보자고.
“알겠습니다, 사장님. 필요하신 자료나 보충할 자료가 있다면 24시간 대기할 테니 콜 하십시오!”
시차 때문인지 약간의 피로감이 묻은 규혁의 얼굴을 한단이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시폰 수석의 인터뷰 소식으로 특유의 적당한 미소를 보였던 규혁의 눈동자가 누군가를 찾아냈다.
- 부한단 차장, 고생 많았어요. 이번 시폰 수석 건은 부 차장이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하면 돼요.
뜻하지 않은 칭찬에 한단의 귀와 목이 벌겋게 상기되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노트북 속 규혁을 말갛게 바라보았다.
직원들도 맨 뒤에 서 있는 한단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 아닙니다. 사장님께서 많이…… 도와주셔서…….”
그 뒤로 말문이 콱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대신 눈동자만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규혁이 가르쳐 주고 일러 준 방향으로 간 것 말곤 없는데,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리는 그에게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다른 감정까지 복잡하게 섞이며 올라왔다.
“사장님, 파이팅 하십시오!”
그때 누군가 화면 속 규혁에게 격려처럼 큰 소리로 말했고 뒤이어 다른 직원들도 한마디씩 응원의 인사를 했다.
- 모두 고마워요. 열심히 해 볼게요.
성공하겠다는 말이 아닌 열심히 하겠다는 말로 규혁이 화상 통화를 마무리했다. 확실치 않은 성공보단 노력하겠다는 말이 가슴에 더 깊게 와 닿았다.
스크린 화면은 다시 세미나 자료로 바뀌었고, 흥분한 감정의 잔상을 다들 얼굴에 남긴 채 은영이 주관하는 세미나에 집중했다.
* * *
잠결에 들리는 알람 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6월 초 새벽은 쌀쌀해 이불을 턱까지 끌어 올린 한단은 소리 나는 방향으로 손을 뻗어 침대 옆 협탁을 더듬거렸다.
휴대전화는 소리와 진동을 동시에 울렸다. 감은 눈을 뜨지 않고 화면을 터치해 알람을 껐다고 생각했는데 돌연 목소리가 나왔다.
- 부한단?
감겼던 눈이 번쩍 떠졌다. 알람 소리가 아니라 전화벨 소리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 여보세요?
휴대전화를 귀에 갖다 대며 상체를 일으켰다.
- 내 소리, 들려요?
“……네.”
한단의 대답에 수화기 저쪽에서 다행이라는 의미의 한숨이 작게 들렸다.
한단의 눈이 커졌고,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어 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5시 10분.
아직 해가 뜨지 않았지만 어둠이 지나간 하늘은 푸른색이었다.
- 자는데 깨웠지? 이른 새벽에 미안해요.
“……아니요. 근데 무슨 일로?”
한단이 손을 들어 뺨을 덮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 10분 후면 도착할 것 같은데, 잠시 얼굴 볼 수 있어?
“도착요? 여기로요?”
- 응. 줄 게 있어서……. 꼭 주고 싶어서.
참으로 애틋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한단은 세수만 한 후 청바지와 면 티로 갈아입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아파트 공동 현관의 투명한 유리문 밖에 진한 그레이색의 슈트를 입은 규혁이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방금 독일 출장에서 돌아온 것이 확실했다.
한단이 휴대전화를 보니 겨우 5분 지났다. 어쩌면 규혁은 미리 도착해 전화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이른 새벽에 자신을 보자고 한 걸까? 그런데 궁금함은 설렘으로 바뀌어 한단의 가슴을 짙게 헤집었다.
공동 현관문이 열리고 한단이 나오자 규혁이 그녀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새벽부터…… 미안해요.”
“……공항에서 오셨어요?”
“음. 인천에서 왔어.”
“……무슨 일로?”
“주고 싶은 게 있어서.”
규혁이 캐리어 가방의 지퍼를 열어 뭔가를 꺼내 건넸다.
빨간 모자를 쓴 아가씨가 방긋 웃는 마트료시카 인형이었다. 인형 속에 인형이 있는 러시아 민속 인형.
“러시아를 경유해 왔거든. 모스크바공항에서 이걸 봤는데 부한단, 당신 생각나서.”
규혁의 손에 잡힌 마트료시카를 가만히 쳐다보며 입술을 오므려 적시기만 했다.
“가까이 다가간 줄 알았는데 늘 안전거리를 유지하려는 당신이 느껴져. 마음 다치지 않게 울타리를 세우고 그 안에만 숨으려고 하는 모습……. 언젠간 나오겠지. 언젠가 내 손을 잡겠지 했는데, 자꾸만 당신은 안으로 숨어. 이 인형처럼…….”
그가 건네는 인형을 받지 못하고 있는 한단의 손을 잡아 인형을 쥐여 주었다.
“지치지 않으려고,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어. 그런데 날 불편해하는 부한단을 보니 더는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유타페에서 보는 것에 이젠 만족하려고.”
자신을 불편해하는 한단이 유타페를 그만두고 모습조차 보이지 않을까 겁났다. 그녀를 아예 보지 못하는 것이 더 괴롭기에 규혁은 전처럼 직원과 사장 사이로 되돌아가려 마음먹었다.
“갈게. 당분간 회사에 나갈 수 없을 거야.”
그 말에 한단이 고개 들어 마주 선 규혁을 쳐다봤다.
놀란 눈으로, 긴장된 표정을 하며. ‘왜요?’라는 물음이 담긴 눈빛을 보였다.
“이번엔, 잠시 어머니 곁에 있어야 할 것 같아……. 내가 없는 동안 최 부장이 잘할 거야.”
“…….”
“그만 갈게.”
항상 한단의 뒷모습을 봐 주던, 한단이 먼저 떠나는 걸 봐야 마음 편하다고 했던 규혁이 이번엔 먼저 등을 돌렸다.
듬직하고 신뢰 깊은 뒷모습은 여전했으나 한단의 눈엔 그 모습이 전에 봤던 무기력하고 기진맥진한 모습과 겹쳐 보였다.
이윽고 시야에서 규혁의 모습이 사라지고 한단에겐 그가 건네준 인형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시선을 내려 물끄러미 보는데 마트료시카에서 규혁의 체취가 희미하게 맡아졌다.
순간, 우직하며 무언가 한단의 내부에서 균열과 파열이 일어났다.
겁쟁이! 겁쟁이. 또 주저했어. 또 그를 밀어냈다고. 다가오려는 그를 밀어내기만 했어.
사실은 아니면서. 그 사람이 보고 싶어 맨날 생각해 놓고선.
가장 힘들고 가장 아픈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규혁, 바로 그 사람인데.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도 아프고, 회사 일이 어려운데도 날 생각해 여기까지 왔는데, 난 내 과거와 내 아픔만 생각하며 주저하길 반복했어. 내 상처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였어. 정작 크고 작은 상처는 내가 그 사람에게 다 줬는데.
달아오르는 열로 얼굴이 벌겠고 숨이 찰 만큼 호흡도 거칠었다. 규혁의 흔적을 찾아 새벽의 찬 공기를 헤치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자 눈물이 말갛게 솟아났고,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목구멍이 울렁댔다.
그렇게 뛰고 또 뛰는데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노선표가 붙은 유리창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은 규혁이 보였다.
숨소리마저 작게 뱉으며 조심스럽게 걸어가 규혁의 얼굴을 뜯어보듯 훑었다. 감은 눈에 작게 힘을 주는 걸 보면 두통 때문에 그가 힘겨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독한 통증을 잠재우려는 듯 가만히 앉아 숨만 내쉬는 규혁을 보며 한단의 눈가가 발갛게 변해 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규혁과 채 열 걸음도 안 되는 간격이 됐을 때, 그가 눈을 떴다.
아직 이른 새벽, 주변엔 사람이 보이지 않았고, 오직 두 사람만이 거리에 있었다.
생각지 못한 한단의 모습에 놀란 얼굴을 감추지 않은 규혁이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저도, 줄 게 있어…… 서요.”
한단의 음성이 불규칙하게 떨리고 갈라졌다.
“무얼?”
“전에 오슬로 출장 갔을 때, 그때 줬던 북극권 증서하고 또, 시폰 수석이…… 전해 달라던 컵도 있어요. 뭉크의 그림이 그려진 컵인데……. 전해 줘야 했는데……. 제가 그만 깜박하고, 만났을 때 드려야 했는데……. 그만……. 제가 그만…….”
정리 안 된 말들을 한단이 더듬거리며 마구 쏟아 내자 규혁이 부드럽게 끊었다.
“괜찮아요. 나중에 줘도 돼.”
“아니요. 아니! 지금 줘야 해요. 지금요……. 왜냐하면, 왜냐하면……. 당신을 붙잡아야 하니까요!”
결국 한단은 목이 메어 왔고, 투명하고 맑은 눈에서 유리알 같은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규혁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여 주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지만, 결국 보일 수밖에 없었다.
“가 버리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붙잡고 싶은데……. 그것 말곤 생각나는 게 없어서…….”
우는 모습을 규혁이 보는 게 민망해 한단이 두 눈을 꼭 감고 말했다.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어서…… 왔어요.”
순간 깊은숨을 들이쉰 규혁이 두 팔 벌려 한단을 꽉 안으며 속삭였다.
“나도,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아서……. 당신 주변에 더 머물다가 가려고 했어.”
규혁이 한단의 목과 어깨에 코를 묻으며 그녀의 체취를 폐로 힘껏 들이켰다.
“참으려고 했는데, 너무 새벽이라 당신 깨우기 싫었는데, 당신 얼굴 안 보면 내가 미칠 것 같아서. 그래서 왔던 거야. 당신이 너무 그립고 그리워서.”
규혁의 말을 들으며 한단이 눈을 떠 듬직한 어깨선과 맞물린 곧은 등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부한단, 나 그렇게 대단하고 완벽한 놈 아니야.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뛰어난 놈도, 능력 있는 놈도 아니야. 모자라고 겁도 많고 망설임도 많은, 그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해.”
울음 속에서 한단이 작게 웃었다.
“그런데 당신한테만큼은 멋지게 보이고 싶었어. 부한단, 당신에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잘난 놈으로 보이고 싶었어.”
“규혁 씨는 그 어떤 사람보다 멋지고 잘난 사람이에요. 제 눈에는.”
한단이 속삭였다.
훗! 규혁의 웃음소리가 한단의 어깨에서 목으로 전달되어 귀로 올라왔다.
“사랑해. 부한단.”
규혁만이 알 수 있게 한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요.”
쌀쌀한 새벽바람이 한단의 발개진 뺨을 시원하게 적시며 지나갔다.
‘그 남자가 반했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