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양자(Quantum)
복잡하고 큰 문제일수록 자세히 보면 오히려 작고 가벼울 수 있다. 반대로 작고 가볍다고 무시한 것이 되레 복잡하고 커질 수 있다.
오슬로 프로젝트가 그랬다. 복잡하고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그 안을 들여다보니 정답이 나와 있었다. 횡성 연구소 출장을 규혁에게 승인받은 한단은 방문 전 조백웅과 화상 미팅을 했다.
“C33을 변형한 C33_1 신규 레시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 내로 표준 편차와 일관성 수율이 나올 예정이니 데이터 확인 후 횡성 방문하겠습니다.”
- 아이고, 그렇게까지 수고해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이왕 할 거면, 울트라 바이올렛B에 적합한 레시피를 최대한 구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 정말 황송할 따름입니다. 저흰 협조 차원에서 자문이나 구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직접 도와주시기까지 하니 고마울 뿐입니다.
말뿐 아니라 표정과 눈빛에서도 조백웅은 감동한 기색이 역력했다.
- 그럼 횡성 방문 때 뵙겠습니다, 부 차장님. 참, 이번엔 이규혁 사장님은 오시지 않습니까?
“아, 네……. 사장님은 지금 바쁘셔서요.”
이규혁이라는 단어에 답하는 한단의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고, 눈동자엔 당황한 감정이 들어찼다.
혹여 조백웅에게 들킬까 괜한 걱정으로 얼른 미팅을 끝내고 회의실을 나서는데 마침 사무실에서 나오는 규혁이 보였다.
외근을 나가려는지 슈트 차림에 넥타이까지 한 모습엔 정돈된 과묵함이 보였다. 섣불리 조급해하지 않고 초조해하거나 허둥지둥한 모습과는 거리가 먼 평상시 이규혁, 그대로였다.
먼저 인사해야 하나? 눈 마주치면 할까? 그 짧은 시간에 한단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런데 다행이랄까, 한영이 뒤따라 나오며 규혁을 불렀다.
“사장님, 정말 하실 겁니까?”
“시간 끌어 봤자 불 보듯 뻔해.”
“그래도 이건.”
한영이 말을 끊었다. 한단을 본 것이다. 한영의 시선을 좇아 규혁의 눈길이 한단에게 닿았다. 어정쩡하게 있던 한단이 두 사람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곤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규혁이 세웠다.
“부 차장.”
“네?”
“오후에 시간 괜찮아? 오슬로 건으로.”
“오슬로요?”
“응.”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보곤 시선을 다시 한단에게 향했다. 규혁의 블랙홀처럼 까만 눈동자 속으로 모든 감정과 신경이 흡수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후 5시 정도면 올 테니 그때 봅시다.”
규혁의 시선과 목소리에 한단의 심장이 점점 데워지고 뜨거워졌다. 이유는 있지만 부정할수록 그녀의 귓바퀴는 빨개졌고, 얼굴은 시뻘건 인두처럼 달아올랐다.
“알겠습니다.”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푹 숙여 답하곤 두 사람의 시선에서 비켜섰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규혁이 올라탔다. 한영은 쫓아갈 것처럼 하더니 그만 멈춰 섰다.
문이 닫히고 숫자가 ‘1’을 향해 내려가자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한숨을 쉰 한영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
“그게 말이야…….”
한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던 한영이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신경질적인 표정을 감췄다.
“커피 할래요? 부 차장.”
커피가 아니라 이야기를 하고픈 거라 짐작한 한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탕비실로 발길을 돌렸다.
얼음이 들어간 커피가 두 사람 앞에 놓였다.
“5월이 되려면 일주일은 남았는데 벌써 아이스라니? 계절이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아.”
“이상 기온이래요. 4월 평균 날씨보다 5도 이상 높다고 해요.”
“이상 기온이라…….”
혼잣말처럼 내뱉곤 투명한 유리알 같은 얼음이 들어간 커피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CT가 팔콘사 프로젝트에 브레이크를 걸었어. CT 계측 장비를 카피해 팔콘사 계측 장비로 개발한다고 동종 업계로 소문이 빠르게 번져 나가는 추세야. 독일 출장 갈 때만 해도 팔콘사와 CT가 연맹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자는 건설적인 말들이 오간 것 같은데……. 한 달도 안 돼 손바닥 뒤집듯 팔콘사와 유타페를 싸잡아 특허 도둑으로 몰고 있어.”
“그 이유, 아세요? 전 이해가 안 가요. 만약 팔콘사를 견제하려는 의도라면 고작 계측 장비로 한다는 것도 우습고. 유타페를 견제한다고 해도 CT는 대기업이잖아요. 우린 기껏해야 중소기업이고.”
말하면서 문득 소영의 말이 기억났다.
고양이 탈을 쓴 사자라고 했던.
설마 그것 때문에 CT가 유타페를 밟으려고 하는 걸까? 아예 싹을 자르려고?
마주 앉은 한영을 유심히 보면서 그가 뱉을 말을 기다렸다.
“사장님을 원해.”
“네?”
녹은 얼음 주변으로 자잘한 거품이 갈색 띠를 만들었다.
“이규혁 사장님이 분사로 이직한 것도 못마땅한데 분사한 회사가 잘나가도 너무 잘나가. 반대로 CT 계측 개발은 제자리걸음이고, 기술 개발 부분도 예전만 못하고.”
“그래서요?”
“CT에서 유타페를 합병하거나, 이규혁 사장님만 CT로 다시 불러오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럼 유타페는요? 이규혁 사장님이 없으면.”
유타페는 이규혁으로 대변되는 회사였다. 그가 없는 유타페는 꿈조차 꿀 수 없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한단이 어이없어 하자 한영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억지를 CT가 부리고 있는 거야.”
“갑자기 왜요? 지난 2년 동안 CT나 유타페나 별 탈 없었잖아요.”
“며칠 전에 차국환 사장이 쓰러졌대.”
커피 잔을 입에 대려던 한단의 동작이 멈췄다.
“집에서 쓰러졌나 봐. 다행히 주변에 사람이 있어 곧장 응급실로 갔다고 해. 그때부터 조급해졌나 봐. 연구소에 차강우 수석이 있다고 하던데, 실력이 이규혁 사장만 못하다고 하고. 고명딸인 차수진은 경영 능력이 안 되니까.”
차수진이라는 단어에 한단의 얼굴이 굳어졌다.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뺨의 근육이 경직됐다.
“부장님도 차수진 전무를 아세요?”
“친구 정도 수준으로.”
“친구?”
“대학원 랩실 동기. 철없고 시끄럽고 어떻게 보면 그만큼 솔직하고 직선적이고. 이규혁 사장님께 죽자 살자 매달렸어. 왜 그런 거 있잖아. 장난감 사 달라고 바닥에 데굴데굴 뒹굴며 떼쓰는 거. 딱 그 수준.”
어깨를 들썩이며 커피를 한 번에 다 마신 한영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사장님이 CT에 가신 건 아마도 끝까지 가 보자는 의미일 거야.”
“끝까지……. 어떻게요?”
“어렵겠지만 소송까지 간다는 거지. 사장님도 이번만큼은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야. CT에서 워낙 많이 당해서.”
마지막 말이 이해되지 않아 한단은 눈만 깜박거렸다. 왜냐하면 그녀 자신이 CT에서 규혁과 같은 개발 2팀 직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으니까 말이다.
한영이 그제야 한단의 표정을 읽었는지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말했다.
“차 씨 부녀에게.”
하마터면 ‘어떻게 당했는데요?’라고 반사적으로 물을 뻔했다. 벌어진 입술을 간신히 닫으며 손에 쥔 커피 잔을 바라만 봤다.
“걱정 마. 부 차장도 알겠지만, 사장님 자기 사람은 끝까지 책임질 줄 아는 분이니까.”
한영은 그녀가 실업자 될 걱정을 한다고 생각해 웃으며 안심시키는 말을 한 후 탕비실을 나갔다.
한단은 CT에서 본 이규혁을 생각해 봤다. 유타페에서의 규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적당한 미소를 잃지 않았으며, 직원들의 하찮은 의견이라도 들어 주려 했다.
다만, 두통에 시달리는 모습을 본 건 유타페에서가 처음이었다. CT에선 그런 모습을 볼 정도로 이규혁과 가깝지 않았다.
CT와 소송전을 벌인다면 얼마나 많은 두통약을 앞으로 더 먹을까.
한단의 갈비뼈 아래 숨은 심장이 찌릿하며 조여 왔다. 손에 쥔 잔을 내려놓고 휴대전화를 들었다.
연락처를 찾아 소영의 번호를 터치했다. 몇 번의 연결음 끝에 통화가 됐다.
“나야, 시간 괜찮아? 아니. 한번 만나고 싶어서. 응. 그래. 그럼 약속 장소는 내가 문자로 넣을게. 고마워. 갑자기 만나자고 했는데 거절하지 않아서. 어, 알았어.”
* * *
비서실에서 왔다 갔다 하는 수진은 답답한지 차국환과 규혁이 들어간 사장실 문을 노려만 봤다.
“언제 들어갔어요?”
“네?”
“규혁 씨요.”
되묻는 비서에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하며 양손을 허리에 댔다.
“아, 유타페 사장님요. 들어가신 지 한 시간 정도 됐습니다.”
훅, 숨을 내쉬곤 한 손을 들어 부채질하듯 연신 뺨에 대고 흔들었다.
차국환 앞에 놓인 차는 이미 절반 넘게 비워졌지만 규혁 앞에 놓인 잔은 그대로였다.
겉치레라도 차를 마시라고 권하지 않는 차국환은 이마에 줄을 만들어 심기 불편한 얼굴을 했다.
“자네 생각이 바뀔 줄 알았는데, 정말 해 보자는 거야?”
차국환을 보는 규혁의 눈동자가 까만 바둑돌처럼 냉정하고 차갑게 빛났다.
“생각은 사장님이 바꾸셔야 합니다. 전 해 보자는 게 아니라 올바른 판단을 하려는 겁니다.”
“올바른 판단이라?”
코웃음 치듯 차국환의 가슴이 가볍게 들썩였다.
“난 자네에게 기회를 주려는 거야. 큰물에서 놀 기회.”
“유타페로도 충분합니다.”
“왜 자네 능력을 축소하려 하지?”
“축소가 아니라 제대로 사용하는 겁니다.”
침착한 규혁과 달리 차국환은 벌게진 얼굴을 했다.
“자네 대체 왜 이래? CT에서도 잘했었잖아.”
차국환이 회유 작전을 쓰며 과거의 일을 들먹이려 했다. 그가 열심히 일했던 CT 본부장 시절을 상기시키려 하자 규혁의 목구멍으로 쓰디쓴 침이 넘어갔다.
열심히 일한 규혁에게 차국환과 차수진이 보여 준 건 기만과 거짓이었다. CT에서 규혁이 원한 건 개발과 실험이었다. 원하는 개발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차국환의 제안에 CT에 입성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제한되었다.
‘마음껏’ 하려면 ‘돈’이 되어야 한다. 물론 회사니까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건 맞았다. 하지만 그로 인한 이익을 직원들에게 베풀지 않고 전부 독식하려는 차국환의 끝없는 욕심에 넌더리가 났다.
그 와중에 차수진의 이중적인 행태에 질려 버린 규혁은 주저 없이 CT를 나갔다.
“CT에선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럼 대체 왜 온 거야? 이깟 시시한 이야기나 하자고 온 건가?”
“특허 소송 전에 사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특허 소송이란 말에 차국환이 흠칫한 표정으로 딱딱한 눈길을 보냈다.
“유타페가 카피했다는 CT 계측 장비 말입니다. 그걸 개발한 사람이 저라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특허 출원한 사람도 저고, 특허 등록을 작성한 사람도 접니다. 그러니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저라는 거지요.”
딱딱했던 차국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팔콘사에 특허 도용을 들먹이며 제시했던 CT의 계측 장비가 실은 이규혁이 만들었기에 자신이 가장 잘 안다는 것이다. 그건 역으로 장비 간의 차이점도 규혁이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걸 저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소송을 건다면 누구에게 유리할지 불 보듯 뻔하다는 걸 알려 드립니다. 그래도 하시겠다면 언제든지 소송 거십시오. 지진 않을 테니까요.”
“그걸 누가 모르나?”
절반 정도 남은 찻잔을 한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비스듬히 앉은 차국환의 얼굴에 거만함이 보였다.
“소송 결과는 상관없네. 유타페가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그게 궁금할 뿐인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단적인 차이를 차국환이 말했다. 돈과 인력이 풍부한 CT에선 소송이 1년이 되든 5년이 되든 문제없지만 유타페처럼 막 신생에서 벗어난 업체의 경우 소송 기간이 길면 길수록 모든 면에서 불리했다.
“자네만 마음을 바꾸면 유타페 직원들도 CT 직원으로 흡수 가능해. 자네도 사장이니 직원들 앞날은 생각해 줘야지. 안 그래?”
“제 직원들 앞날을 생각해서라도 더더욱 지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뭐라?”
“다른 건 몰라도 CT만큼은 저도 싫습니다.”
쿵!
차국환이 테이블을 내려쳤다.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차국환을 냉정하게 보던 규혁이 일어나 재킷의 앞 단추를 여미며 짧은 묵례로 예의를 보였다.
사장실 문을 열고 나가는 규혁 앞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수진이 다가왔다.
“할 말 있어.”
“이미 끝난 거 아니었어?”
무시하고 걸어가는데 수진이 다급하게 팔을 잡았다.
“아니야. 있다고.”
걸음을 멈춰 수진을 보는 규혁의 눈동자엔 감정이라곤 없었다.
“더는 못 봐 주겠어. 너 질려.”
“차라리 화를 내.”
그렇다면 감정이 남았다는 건데 규혁이 보여 주는 무감정의 차가움은 수진을 뼛속까지 시리게 했다.
“부탁이야. 시간 좀 내줘.”
붙잡았던 팔을 놓고 흥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수진이 말했다.
“마지막이라 생각해 주면 안 돼?”
규혁이 앞장서 걸었고 수진이 뒤따랐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CT 로비를 지나 건물 옆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아빤 포기하지 않을 거야.”
“포기해 달라고 한 거 아니야. 사실을 말했을 뿐이니까.”
“알아. 차강우 수석도 그랬어. 소송해 봤자 지는 싸움이라고.”
수진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곤 말꼬리를 돌렸다.
“우린 선후배 관계였을 때가 좋았어.”
평소의 도도하고 과장된 표정이 아닌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와 자괴감이 들어간 눈동자를 수진이 보여 주었다.
“나도 알아. 나 좋아하지 않았다는 거. 내가 질리도록 힘들게 하니까 마지못해 날 받아 줬던 것도.”
“다 지난 이야기야. 재미없어.”
답하는 규혁의 목소리에 피곤함이 붙어 끝이 갈라졌다.
“한국 와서 규혁 씨가 여전히 혼자라고 했을 땐 나도 모르게 희망이 생기더라. 근데 회의실에서 처음 당신 본 그날 알았어.”
수진의 말에 규혁의 눈이 약간 커졌다.
“아, 저 남자……. 설레어 하는 눈동자가 저렇구나. 그 여자 바라보는 눈빛을 내가 읽었거든. 나 그런 쪽으로 굉장히 예민해.”
“갑자기 왜 이래?”
“갑자기 아니야. 핀란드 갔다는 말에 게임 끝난 거 알고 있었는데……. 모르겠어. 철이 들었는지 내가 너무 유치해서 못 견디겠더라고.”
“수진아, 그만.”
낮은 목소리로 어린애 타이르듯 규혁이 말했다.
“규혁 씨 한쪽 눈은 내가 망가뜨렸는데, 그 여잔 두 눈을 멀게 해 버렸어.”
찻잔을 내려놓은 수진의 얼굴에 자조적인 웃음이 옅게 그려졌다.
“나 못 도와줘. 아빤 소송하곤 별개로 온갖 네거티브한 방법으로 규혁 씨를 힘들게 할 거야. 알잖아. 우리 아빠 어떤 사람인지. CT에서도 당했잖아.”
“너보고 도와 달라고 한 적 없는데.”
“한 번 정도는 힘들고 어렵다고 말하면 안 돼? 남들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해하는 모습 보여 주면 안 돼?”
“그러면 뭐가 달라져?”
“너무 완벽하니까 반칙이야.”
짧게 한숨을 내쉰 규혁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힘들게 해서 미안해.”
일어선 규혁을 향해 진지한 표정으로 수진이 말했다.
“사과를 제대로 한 적이 없어서 말이야. 나 다시 미국 가려고. 알잖아, 내 주특기. 놀고먹고 생각 없이 사는 거. 이런 거 싫어. 복잡하고 어려운 거.”
한숨까지 쉬며 과하게 자신을 비하하는 수진을 향해 규혁이 안타까운 표정을 했다. 수진은 아버지가 원하는 딸 역할에 지친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규혁 씨가 여전히 좋지만, 그 완벽함엔 맞추기 싫어.”
“차수진, 네가 원하는 대로 행복하게 살아.”
“응, 그러려고.”
평상시 그가 짓는 적당한 미소와 부드러움이 보였다.
카페 안에 흐르는 피아노 선율이 어느새 경쾌한 팝으로 바뀌었다.
* * *
한단이 시계를 보니 오후 5시가 지나갔다. 규혁은 아직 오지 않았는지 사장실이 어두웠다.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규혁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단은 그가 회사를 위해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을 거라 생각하자 마음 한구석이 메케하게 쓰라렸다.
“부 차장님, 2번 사장님 전화예요.”
은영의 말에 하얀 불빛이 반짝이는 2번 버튼을 눌렀다.
“부한단입니다.”
- 부 차장? 미안해요. 미팅을 내일로 연기했으면 하는데.
미팅이 연기된 것에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건 다행스럽다는 것이 아닌 실망감이 들어간 한숨이었다. 혹여 규혁이 들었을까, 한단이 얼른 답했다.
“알겠습니다. 내일 언제로 할까요?”
- 그것도 미안한데, 내일 저녁 6시 이후 어때요? 그래야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서.
“상관없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한단이 가슴 위로 손을 대고 ‘훅’ 하며 긴장된 숨을 토해 냈다.
머리와 심장이 따로 노는 것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 한단의 상황이 그랬다. 심장이 울타리를 넘어가려 자꾸만 두근거리며 요동쳤다. 이규혁이라는 사람 앞에서.
당분간 일이 없으니 오랜만에 함께 저녁 하자며 찬웅과 학준이 분위기를 잡아 갔다. 거기에 은영까지 합세해 별안간 회식 분위기가 마련됐다.
“죄송하지만, 전 선약이 있어서요.”
한단이 갈색 토트백을 메고 사무실 직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우, 부 차장님. 오늘 하루만 안 돼요?”
은영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졸라 보지만 한단이 안 된다는 뜻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사무실을 나와 차를 몰고 간 곳엔 소영이 먼저 와 기다렸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내가 일찍 나왔어. 일하기 싫어서.”
소영이 눈을 찡긋거리며 컵에 물을 따랐다.
“배고프다. 밥부터 먹고 차 마시며 천천히 이야기해.”
보글거리는 김치찌개에 하얀 두부가 듬성듬성 보였다. 각자 개인 접시에 먹을 만큼 덜어 바쁘게 수저를 놀렸다.
중간중간 티슈를 꺼내 이마와 콧등의 땀을 닦는 소영을 보며 한단이 작게 웃었다.
“정말, 시집도 못 가고 갱년기 맞은 건 아닌지 의심이 간다니까.”
“병원 가 봐. 스트레스로 인한 호르몬 불균형일 수도 있어.”
“어떻게 그런 걸 잘 알아?”
“어?”
수저를 든 채 되묻는 한단의 눈이 약간 굳어졌다. 그런 것을 알고 있는 이유는 고모 부용희 때문이었다.
고모부를 향한 의부증은 과도한 스트레스를 만들었고, 고모는 항상 목에 수건을 두르고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곤 했다.
“인터넷에서.”
“그래? 병원에 한번 가 봐?”
심각한 표정을 하며 묻는 소영에게 한단이 고개만 끄덕였다.
저녁을 먹고 나온 둘이 향한 곳은 재즈바였다. 눅진한 색소폰 소리와 경쾌한 피아노 건반 소리가 묘하게 어우러졌다.
기포가 보글거리며 올라오는 스파클링 와인이 한단과 소영 앞에 놓였다.
“우울하지?”
단 네 글자였지만 많은 의미가 포함된 소영의 물음이었다.
“사장님만큼 우울하겠어.”
한단이 답했다. 이규혁만큼 힘들고 어렵겠냐고. 오늘은 또 몇 알의 두통약을 목으로 넘겼을까. 와인 잔 입구를 손가락으로 한 바퀴 빙 훑으며 생각했다. 눈도 많이 아팠을까. 규혁의 눈을 망친 차수진이 미웠다. 그 눈 때문에 규혁이 받은 고통을 그녀도 느껴야 한다고.
“설민혁 책임이 그러더라고. 유타페와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갑자기 홀딩 됐다고. 나도 그래서 알았어.”
“CT 분위기는 어때?”
“우리야 그런 일이 뭐 한둘인가. 어제의 협력 회사가 오늘의 경쟁 업체가 되고, 오늘의 경쟁 업체가 내일엔 하청 업체가 되는, 뭐 그렇잖아.”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답하며 잔을 들어 마셨다. 그렇지. 대기업이 일개 중소기업에 휘둘리진 않을 테니까. 씁쓸한 표정으로 한단도 와인을 마시는데 소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있잖아.”
“어?”
“나 오늘 카페 갔다가 이 본 봤어.”
“카페?”
“응. 점심 먹고 동료들하고 커피나 한잔하자고 들어갔다가 봤어.”
바로 말하지 않고, 한번 숨을 쉬곤 ‘음’ 하며 약간 텀을 두었다.
“거기서 차수진 전무도 봤어.”
차수진이라는 말에 평정심을 가지려 눈과 입술에 힘을 줬다. 얼굴의 신경들이 제멋대로 표정을 만들지 못하게 어금니를 꽉 물어 붙잡았다. 하지만 겉과 다르게 속은 놀랍도록 빠르게 반응했다. 혈관 속 피가 엄청난 속도로 심장을 향해 질주하는 바람에 요동치는 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나는 것 같았다.
“뭐랄까? 왜 있잖아, 이 본 표정. 부드럽게 미소 짓는 그거, CT에서 늘 그랬잖아.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미소로 상대를 바라보며 말하는 거. 딱 그 모습이었어.”
대답 대신 빤히 소영의 입과 눈을 보며 계속 말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게 뭔지 알아? 이 본이야 그렇다 쳐도 차수진 전무 말이야. 뭔가 많이 달랐어.”
“달…… 랐어?”
더듬거리며 반사적으로 묻는 한단에게 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보기엔 달랐어. 도도하고 거만하고 그랬잖아. 좀 싸가지도 없어 보였고. 그런데 오늘은 되게 차분하고 분위기 있다고 해야 하나? 굉장히 엄숙하고 신중한 그런 얼굴? 아무튼 그랬어. 뭔가 두 사람 사이에 중요하고 은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그래?”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내 시나리오는 그래. 이 본은 절대 유타페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차수진과 다시 잘해 보는 거지. 그럼 차국환 사장도 유타페를 함부로 못 할 거 아니야. 안 그래?”
상대의 동의를 구하려는 듯 소영이 눈을 크게 뜨며 한단 앞으로 얼굴을 바짝 댔다.
뭐라 답할 수 없어 머뭇거리며 입술만 달싹이던 한단이 작게 말했다.
“화장실 좀.”
“어? 그래. 현관 입구 옆이야. 다녀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화장실 문 앞으로 걸어간 한단은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숨을 쉬었다.
소영의 개인적인 생각을 듣는 것만으로도 한단의 심장은 뻐근할 만큼 빠르게 뛰었다. 분명 자상이다. 마음 다치지 않게 하자고 숱하게 다독였지만, 규혁에 관한 것을 듣고 보고 말할수록 한단의 마음엔 깊은 자상만 생겼다.
컨디션이 좋지 못하다는 핑계로 소영과 일찍 헤어졌다. 집에 도착한 한단은 생각 많은 얼굴로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거실에서 우두커니 무릎을 모아 앉아 시간을 보냈다.
* * *
침울한 회사 분위기 속에서 단비 같은 소식이 들려 그나마 유타페 직원들에게 웃음을 만들었다. 그건 이찬웅이 담당했던 기술원의 데이터 유출 사고로 인해 소송한 재판에서 유타페가 승소했다는 것이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돌아온 찬웅이 마음의 짐을 던 듯 편안한 얼굴로 말했다.
“손해 배상을 청구하자고 했는데, 그건 사장님께서 반대했어요. 우리 데이터를 기초로 상품화가 안 됐으니까 상대 업체에 손해 배상까진 하지 말자고. 대신 기술원에서도 이번 이슈로 내부 절차와 보안을 더 강화하겠다는 내용은 전달받았습니다.”
“고생 많았어, 이 차장.”
한영이 엄지를 치켜세웠고, 은영이 박수로 응원했다. 찬웅이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 숙여 말했다.
“제가 아니라 사장님이 고생하셨는데요, 뭘. 전 사장님 뒤만 졸졸 쫓아다녔습니다.”
“참, 사장님은 언제 오세요?”
은영이 찬웅에게 물었다.
“사장님은 팔콘사 건으로 신 변호사와 좀 더 미팅하고 온다고 했어요.”
“이번엔 학준이가 고생할 차롄가?”
한영이 말하며 시선을 돌려 보자 학준이 볼멘소리를 냈다.
“전 뒤도 졸졸 못 쫓아다니겠어요. 너무 어려워서요.”
“처음엔 다 그래.”
찬웅이 농담처럼 위로했고, 한단은 그들의 이야기를 뒤로 남긴 채 오슬로 프로젝트를 준비하려 실험실로 향했다.
신규 레시피 C33_1의 일관성 수율 데이터 확보를 위한 실험을 하며 중간중간 사무실로 나와 추출된 데이터를 정리했다. 그렇게 두 번 정도 데이터를 정리하는데 규혁에게 연락이 왔다.
“부한단입니다.”
- 30분 정도면 도착해요. 미팅 준비해요.
“오슬로 건이죠?”
- 응.
“회의실을 잡을까요?”
- 편한 대로. 난 상관없으니까.
통화 시간은 1분도 되지 않았지만 한 시간 넘게 통화한 기분이 들 정도로 기진맥진했다.
30분 후 규혁과 마주할 생각에 신경줄 하나하나가 위로 바짝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규혁이 사무실에 들어올 때는 직원들의 퇴근이 시작된 시각이었다. 그는 사무실을 나가는 직원 한 명 한 명과 눈 맞추며 인사했다.
수고했어요. 고생했어요. 내일 봅시다. 잘 가요.
현재 상황이 녹록지 않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규혁은 미소 지으며 평상시와 똑같은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유타페엔 규혁과 한단만 남았고, 둘은 회의실에 있었다.
벽면 스크린 화면엔 신규 레시피 검토 데이터가 그래프와 숫자로 정렬돼 비쳤다.
“C33_1 레시피 수율 일관성 데이터 검토 결과 50에서 51%는 꾸준하게 나왔습니다. 칩으로 만든다면 49에서 50%까진 문제없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나쁘진 않은 수준이야.”
화면을 보며 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팔꿈치까지 접어 올린 와이셔츠 소매 밖으로 팽팽하게 긴장된 팔의 근육이 보였다.
규혁의 품에 안겼던 산타 마을에서의 밤이 생각나 얼른 시선을 돌려 환하게 빛나는 스크린 화면을 응시했다.
“부 차장.”
“네.”
대답은 했지만 시선은 스크린 화면에 있었다. 한단의 귀로 부드러운 고양이 털이 스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규혁의 음성이 귓가를 간질간질하게 했다.
“한 번 더 오울루에 가는 게 어때?”
“네?”
시선을 틀어 규혁을 보는 듯하더니 이내 눈동자를 떨궜다. 스치듯 바라본 얼굴은, 부드럽고 진중한 눈동자는 조용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규혁 또한 들끓는 감정을 참느라 무던히도 노력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약간 마르고 튼 입술, 규칙성이 없는 호흡, 피곤한 듯 한쪽 눈을 찡그리는 움직임까지 감정의 들볶아짐은 규혁에게 그렇게 나타났다.
언제나 침착하고 과묵하며 함부로 감정을 흘리지 않는 규혁에게도 단둘이 있는 시간만큼은 끓어 넘치는 감정 때문에 힘겨웠다.
“울트라 바이올렛B도 오울루에서 검증할 거야. 알아보니 이번에도 조백웅 수석이 출장을 간다고 해. 비록 계약한 프로젝트는 아니더라도 유타페에서 개발한 MOCVD를 적용한다고 하니까 고객 신뢰 차원에서 가 보라는 거야.”
“그래도 될까요?”
“응.”
회사가 어수선한 와중에 저 혼자 출장을 가는 것이 못내 내키지 않아 작게 되물었다. 계약된 프로젝트도 아니어서 조백웅 말대로 정말 서비스 차원에서 진행하는 부가적인 일이었다.
샐림 쓰리 프로젝트가 예정대로 진행됐다면 못 하겠다고 거절해도 문제 될 일은 아니다.
“데이터 일관성은 그 정도면 충분해. 횡성하고 이야기해서 출장 잡아요.”
“……알겠습니다.”
마우스를 클릭하면서 스크린 속 흩어진 데이터 화면을 하나하나 닫았다. 보지 않아도 시선이 느껴져 한단의 귓바퀴가 타는 듯 붉어졌다.
“생각보다 힘들다.”
훅! 호흡이 멈췄다. 클릭하던 마우스 커서도 멈췄고 꺼져 가던 스크린 화면도 일시 정지됐다.
파르르, 한단의 기다란 속눈썹이 떨렸다.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차마 고개 돌려 규혁을 볼 자신이 없었다. 안 보고 그릴 수 있을 만큼 규혁의 모습은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반듯한 이마, 깊이 있는 검은 눈동자, 날렵한 콧대와 이 모든 걸 부드럽게 아우르는 표정까지, 안 봐도 그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한단은 충분히 느꼈다.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건 자신 때문이었다. 그토록 잘 숨기고 감췄던 감정들이 규혁 앞에선 서툴고 미숙해 밖으로 흘러나올까 겁났다.
“편할 수가 없잖아요. 회사 일……. 그러니까 CT하고 팔콘사 때문에.”
알면서, 그가 왜 힘들다고 했는지 알면서 일부러 힘든 이유를 회사로 돌렸다. 그래야 조금은 덜 어색할 수 있으니까. 멈췄던 마우스 커서를 눌러 마저 화면을 닫았다. 노란 튤립이 있는 모니터 배경화면만이 스크린에 비쳤다.
“회사 일 때문?”
“……갑자기 모든 프로젝트가 중단됐으니까요.”
“지금 동문서답하는 거 알아?”
힐난도 비아냥도 아닌 목소리는 솔직하고 담백하게 진지했다. 분명 규혁의 얼굴도 이와 같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아랫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회의하는 동안 한 번이야. 그 한 번도 눈 맞춘 게 아니라 넥타이를 본 게 고작이야.”
잠시 말을 끊은 규혁의 입에선 안타까움이 밴 숨이 흩어졌다.
숨긴다고 했는데, 감춘다고 했는데 뜸 들이는 밥솥에서 새는 연기처럼 감정의 냄새가 저도 모르게 나왔다고 생각하자 온몸의 미세한 근육마저 빠직빠직 소리를 내며 경직됐다.
“필요를 못 느꼈어요. 회의 목적이 수율 데이터 확인이라 굳이 얼굴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날 보는 게 불편해서가 아니고?”
“……네.”
“좋아. 그럼 이제 똑바로 날 봐.”
규혁의 말에도 한단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시선을 틀지 않았다. 제어되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는 한심한 표정 따윈 보이기 싫었다.
“부한단.”
너무나 부드러웠다. 한단이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이토록 부드럽고 애틋하게 이름을 불러 주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싫어요! 싫다고요. 당신 얼굴 보는 게 힘들다고요. 한단이 속으로 외쳤다.
“회의 끝났으면 나가 보겠습니다.”
테이블 위에 있는 태블릿과 노트북을 챙겨 일어서는데 규혁도 함께 일어났다.
“난 안 끝났어.”
“전 끝났습니다.”
“언제까지 불편해할 거야?”
“불편하지 않아요!”
고개를 든 한단이 규혁과 눈을 맞췄다. 입술을 앙다물고 눈동자에 힘을 줘 감정과 격렬한 사투를 벌였다.
한단을 바라보는 규혁의 눈길 또한 쏟아지는 감정을 억누르느라 질식할 듯 위태로웠다.
“고백 거절했으면, 최소한 얼굴은 볼 수 있잖아. 그래야 나도 착각하지 않지.”
작은 회의실 안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두 사람 사이로 흐르던 공기가 미묘하게 변해 갔다.
“고백은 거절했지만, 한단 씨 마음이 그렇지 못한 거야.”
“제 마음을 사장님이 어떻게 알아요.”
“거짓말 못 하잖아.”
“그런 사장님은 얼마나 잘해서요?”
“그 사장 소리 좀 치워. 지금은 이규혁으로 말하는 거니까.”
한 발짝 다가서면 두 발짝 거리를 두는 한단에게 규혁이 느낀 건 벽이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돌고 돌아 미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문을 열자마자 울타리 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내가 불편한 이유, 알면서도 받아들이기 싫어서 외면하는 거잖아.”
“단정 짓지 말아요.”
“단정이 아니라 사실이야.”
“사실이라고요?”
노트북과 태블릿을 가슴 앞으로 올려 꼭 끌어안았다. 마치 규혁과 경계선을 긋는 것처럼.
“진짜 사실이 뭔지 아세요?”
“…….”
“규혁 씬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 규혁 씨와 함께할 여자는 제가 아니라 CT의 차수진 전무라는 거.”
“부한단, 너.”
뒷말을 잇지 않고 깊은숨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그뿐, 당황하거나 놀랍다거나 곤란하다는 따위의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규혁은 얄미울 정도로 침착했고 완벽할 정도로 감정을 컨트롤했다.
상대에게 허점을 보여 주지 않으려는 규혁이 한단을 화나게 했다.
이규혁이란 남자의 완벽함에 균열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오기가 한단에게 생겼다.
저 남자에게서 원초적인 감정을 끌어내고 싶었다. 당신 또한 나와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정답은 나와 있는데, 괜히 아닌 척 말아요. 유타페 때문이라도 차수진 씨가 필요하단 것쯤은 나도 아니까.”
“또?”
부드러움 속 냉정함이 어떤 것인지 한단은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규혁에게서 또 다른 얼굴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원초적인 감정을 드러낸 얼굴이 아니었다.
냉정하고 차가운, 서늘함과 참담함이 얽힌 눈동자였다.
“장 책임이 또 뭐라고 했지?”
소영을 언급한 규혁을 보며 당황함으로 무너진 표정을 황급히 거둬들이려 애썼다. 그렇다면 그도 카페에서 소영을 봤다는 것이다.
“우리 사이에 차수진이 왜 끼어들어? 당신과 나 사이에 남들 이야기가 왜 중요해?”
저 남자의 화난 얼굴이 이것일까? 평소 온화하고 지적이었던 규혁은 지금 은근 열받았는지 낮은 음성은 차가웠지만 검은 눈동자엔 우울함이 짙게 드리워졌다.
“전 사실을 말하는 거예요.”
“그래?”
규혁이 한단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규혁이 나지막이 말했다.
“사실은 우리가 핀란드에서 함께 밤을 보냈다는 것이고, 내가 당신에게 고백했다는 거야. 다른 건 신경 안 써.”
점점 더 밀착하는 규혁이 고개를 내려 한단의 붉은 입술에 스치듯 입을 맞췄다. 한단의 심장이 풍선을 쥐어짜는 것처럼 확 쪼여 왔다. 규혁의 입술이 닿자 온몸이 빠르게 데워졌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있는 힘을 긁어모아 한단이 비스듬히 얼굴을 돌렸다.
“하…….”
한단의 귓가로 규혁의 탄식 섞인 한숨 소리가 진득한 열기로 들어왔다.
“참아지지 않아. 그래서 힘들다.”
속삭이듯 규혁이 작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먼저 가 볼게요.”
물기 밴 촉촉한 목소리로 한단이 빠르게 말하곤 규혁을 비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회의실엔 규혁 혼자 남았다. 적막함 속에 멀리 발소리가 희미하게 났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차임 소리도 옅게 들렸다.
한단의 입술에 닿았을 때 맡았던 체취는 사라지지 않고 규혁의 폐에 남아 피와 함께 돌고 있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소외당했다고 해서 위로나 동정을 바라지 않는 그녀가 기특했다. 스스로를 약자라 티 내지 않고 외려 동등하게 평가받으려 노력하는 모습에 규혁의 눈길이 끌렸고 마음이 이끌렸다.
차별 없이 평가받기를 원하는 부한단에게 규혁은 존중과 관심을 동시에 줬고, 그건 놀랍게도 울타리 속 그녀를 볼 수 있게 해 줬다. 상처로 얼룩진 부한단이 아닌 넘어지지 않게 버티려는 마음으로 똘똘 뭉친 그녀가 때론 안타깝고 때론 사랑스러웠다.
홀로 굳세게 서 있는 그녀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고 싶고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은 값싼 동정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유타페까지 버려야지만 얻을 수 있다면 당장 그러고 싶을 정도로 규혁의 마음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다시 닫힌 울타리엔 어떠한 열쇠도 맞지 않았다. 머리가 아닌 심장이 아팠다.
* * *
CT와의 계속되는 신경전에 유타페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던 거래처들이 하나둘 나가떨어졌다. 제일 먼저 칸 일렉트로닉은 다른 계측 업체와 프로젝트를 하겠다고 연락했다.
최한영의 어깨가 아래로 살짝 처졌지만 나중에 다시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말로 담당자와 통화를 마무리했다.
탕비실에서 한영과 찬웅, 그리고 한단이 앉아 티타임을 가졌다.
유니언사의 레이저 광계측 프로젝트도 타 업체를 알아보는 중이라고 이찬웅이 살짝 귀띔했다.
“무한정 기다릴 순 없잖아요. 유니언사의 고객 일정도 있으니까요.”
에휴, 한영이 한숨을 쉬었다.
“사장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한영을 보며 찬웅이 묻는데 말을 끝까지 완성치 않았다.
“글쎄, 요즘 나도 사장님 얼굴 보는 게 힘들어서.”
잔에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한영이 말을 계속했다.
“CT에서 빨리 소송을 걸었으면 하는데, 일부러 시간을 끄는 건지 소송은 하지 않고 냄새만 여기저기 풍기니까. 유타페와 겹치는 일부 거래처에 대고 특허 베낀다고 하고, 고객들이 다 떠나서 유타페가 곧 망한다고 소문내고……. 대기업치곤 참 치사하게 굴어서.”
“소문엔 사장님께서 CT 사위가 되면 해결될 거라고 하던데요.”
찬웅의 말에 한단은 마시던 커피가 마치 접착제라도 되는 듯 입술을 멈췄다.
“누가 그래?”
“저도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라서요. CT에 계실 적에 거기 사장 따님하고 약혼했던 사이라고 하던데요.”
한영은 뭐라 말할 것처럼 벌렸던 입을 그냥 다물며 커피만 마셨다.
“개인적 의견이지만, 유타페가 이번 위기를 넘기려면 사장님께서 CT와 협상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협상?”
마시던 커피를 입에서 떼곤 멀뚱히 바라보는 한영에게 찬웅이 말을 이었다.
“사장님이 CT의 사위가 되는 거요. 그게 가장 빠른 해결인 것 같아서요.”
듣고만 있던 한단은 귓바퀴에 누군가 촛불을 댄 것처럼 화끈거렸다. 모두가 그와 차수진의 재결합을 원했다. CT도, 유타페도.
“글쎄. 그 부분은 사생활이라.”
한영이 애매한 목소리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빨리 이런 묘한 분위기가 지나갔으면 해요.”
푸념 섞인 찬웅의 말을 들으니 분위기가 한없이 가라앉을 것 같아 한단이 입을 열었다.
“저, 이따가 말하려고 했는데 그냥 여기서 말할게요.”
‘응, 뭐?’ 하는 표정으로 한영과 찬웅이 동시에 한단을 보았다.
“출장이 잡혔어요.”
“출장?”
“네. 핀란드 오울루에 다시 한번 가야 할 것 같아서요.”
“혹시 불량으로 AS?”
한영이 기겁한 표정으로 물어봤다. 이 시국에 완결된 프로젝트에서 불량이라도 났으면 끝장이라는 걱정이 충분히 들어간 목소리였다.
“아니요. 서비스는 맞는데, 불량이 아니라 그쪽에서 다른 아이템을 우리 MOCVD에 적용한다고 해서 고객 만족 차원에서 가 보라는 사장님의 지시예요.”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숨을 내쉰 한영은 다행이라는 얼굴과 눈동자를 보였다.
“가! 무조건 가. 가서 우리 유타페의 실력을 팍팍 보여 줘.”
“마음이 그래요……. 다들 힘들고 어수선한데 저만 출장으로 쏙 빠지는 것 같아서.”
“아니야. 그렇지 않아.”
한영이 위로처럼 말했고, 찬웅은 부러운 눈으로 한단을 바라보았다.
“좀 힘들어서 그렇지, 시간 지나면 전처럼 좋아질 거야.”
“정말 그럴까요?”
찬웅이 애원조로 되물었고 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우린 비겁하지 않으니까. CT에서 기술을 베꼈네, 특허를 훔쳤네 하고 큰소리치지만, 사장님이 말했잖아. 숫자와 데이터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그럼 지금 사장님께선 숫자와 데이터를 만드시는 거예요?”
이번엔 한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손으로 찻잔을 잡고 아주 신중한 얼굴을 했다.
“만드는 게 아니라 취합하는 거야. 본인이 개발한 CT 장비와 팔콘사의 콘셉트로 개발하려던 장비와의 차이점과 특이점에 대해. 지금이야 CT라는 대기업에 가려져 우리가 보이지 않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알겠지. 그때까지 어떻게든 견뎌야지.”
“그렇죠. 우리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사장님만큼 힘들겠어요.”
찬웅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손안에 든 찻잔은 따뜻한데 한단의 가슴은 서늘하게 시려 왔다. 많이 힘들까? 매일 두통으로 고통스러울까? 규혁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거절했으니 끊어야 하는데 그녀의 마음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뭘 어쩌겠다고 할 순 없다. 이미 상처는 다 줬고, 울타리는 굳게 닫았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한단이 두 사람에게 눈인사한 후 탕비실을 나왔다.
규혁은 며칠째 보이지 않았다. 은영의 말로는 모두 외부 스케줄이라고 했다.
“거래처 스케줄은 CT 말곤 없어요. 그 외 변호사 사무실하고 나머진 사장님 개인 스케줄이라고 했어요. 필요하거나 급하면 휴대전화로 연락하라고.”
그가 부재중이라고 유타페가 돌아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모든 프로젝트가 중단된 회사는 적막할 만큼 조용했고, 시간은 지독하게 고요히 흘렀다.
* * *
반 정도 하얗게 내려앉은 백발의 여자가 환하게 웃으며 들어선 규혁을 안았다.
“바쁜데 오라고 해서 미안하구나.”
“죄송해요.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마음만으로도 충분해.”
바쁜 아들을 알기에 부담 주기 싫어 언제나 마음 편해지라고 다독이며 말하는 어머니였다.
요양원 로비에 마련된 카페에 규혁이 어머니와 마주 앉았다.
“건강은 어떠세요?”
“나야 늘 그렇지.”
“아버진요?”
“언제나 그렇지. 그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사업을 하던 아버진 언제나 바빴다. 지금의 규혁처럼 아버지도 늘 바쁘게 사셨다. 그걸 단 한 번도 불평하거나 원망한 적 없는 어머니였다.
어머닌 아버지라는 사람 그 자체를 이해했고 사랑했다는 걸 규혁도 철들어 알았다.
“얼굴이 상해 보이는구나.”
손을 들어 아들의 뺨에 대면서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약간, 복잡한 일이 있어서요.”
“수진이가 아직도 널 힘들게 하니?”
“아니요. 수진이하곤 그때 끝냈어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얼마 전에 찾아왔던 수진을 생각하며 설마 하는 눈빛을 보이자 규혁이 부드럽게 웃었다.
“널 많이 좋아한다고 하던데.”
“전 따로 있어요, 어머니.”
“그래.”
놀랍다는 표정은 없었다. 너그럽고 푸근한 감정을 보이며 아들에게 강한 신뢰를 보였다.
“차 사장에겐 어미도 말했다.”
“네?”
“더는 너 힘들지 않게 해 달라고.”
“어머니까지 신경 쓰시게 해서 죄송해요.”
“오히려 너한테 더 미안하지. 부모가 되어 버팀목이 되지 못하고 짐이 된 것 같아서.”
7년 넘게 요양원에서 남편을 병시중하며 규혁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은 상황을 어머니는 미안해했다.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 아버지 좀 보러 갈게요.”
“그러렴.”
규혁이 어머니 손을 잡아 일으켰다. 아버지가 계시는 병실로 두 모자가 오붓하니 손을 붙잡고 걸어갔다.
콧줄을 낀 아버진 매우 낯선 얼굴로 누워 있었다. 마르고 말라 뼈와 가죽만 남은 아버진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갔다.
손을 잡아 어루만지며 아버지의 귀에 대고 규혁이 낮게 말했다.
“죄송해요, 아버지.”
그게 다였다. 어머니가 아들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귀엣말을 했다.
토닥거리던 어깨에서 손을 내리고 아들의 손을 잡아 요양원 로비로 걸어 나갔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단다. 시간이 절로 해결해 주는 것도 있으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아들을 배웅하며 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요양원을 나온 규혁이 달리는 차 안에서 CT의 차강우 수석과 연락했다.
“이규혁입니다. 지금 약속 장소로 가는 중입니다. 40분 후면 도착합니다.”
규혁의 차가 멈춘 곳은 시내의 한 호텔이었다. 로비 안에 있는 카페로 들어가니 차강우 수석이 손을 들어 위치를 알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네.”
커피를 미리 주문했는지 규혁이 앉자마자 잔이 올려졌다.
“그래, 생각은 좀 해 보셨습니까?”
차강우가 물었고 규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웃음은 상대를 민망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배려임을 차강우도 알고 있다.
“차국환 사장님은 안 오십니까?”
“네. 저보고 대신.”
약간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규혁도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몇 모금 마시곤 입을 뗐다.
“협상은 없습니다. 유타페와 CT는 합병하지 않습니다. 저 또한 CT로 갈 마음 없습니다.”
“결국.”
“네.”
차강우의 얼굴은 굳어졌지만, 규혁의 미소 섞인 얼굴은 변함없었다.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정석대로 해야죠.”
반 정도 커피를 남긴 채 규혁이 먼저 일어났다.
“원리원칙대로 할 예정입니다. 그 첫 번째는 팔콘사가 되겠죠. 특허 소송을 내든 말든 전 제 방식대로 처리해 나갈 겁니다.”
“쉽진 않을 겁니다.”
“저에겐 뭐든 쉬운 게 없었습니다. 단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돌아서 걸어가는 규혁의 동작엔 흔들림 따윈 없어 보였다. 차강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통화 버튼을 터치해 귀에 갖다 댔다.
“응. 그래. 방금 만났다. 어, 네 말대로 협상은 없다고 해. 쉽지 않을 거라고 본인 입으로도 말하는구나. 그래,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네 아버지 고집을 누가 꺾어. 이젠 정말 자존심 싸움이야. 그래……. 알았다.”
통화를 마친 차강우가 ‘후’ 하며 한숨을 쉬었다.
규혁이 유타페 사무실에 들어온 시간은 밤 9시가 다 되어서였다.
어두운 사무실을 예상했으나 누가 있는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어 살피듯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많이 늦었네요.”
한영이 탕비실에서 찻잔을 들고 나오며 반겼다.
“퇴근 안 했어?”
“안 한 게 아니라 못 했어요.”
“왜?”
사장실로 걸어가며 규혁이 되물었고 한영이 그 뒤를 따라갔다.
슈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치곤 넥타이를 반 뼘 정도 내렸다.
“궁금해서요.”
“뭐가?”
“아시잖아요. 직원들 모두 미치도록 궁금해하지만 눈치만 보고 있어요.”
“그러니까 뭘?”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켜는 규혁의 행동을 한영이 눈동자로 좇았다.
“차수진하고 정말.”
“최 부장.”
한영의 말을 규혁이 끊었다.
“……네.”
“조만간 독일로 출장 갈 거야.”
“독, 독일요?”
한영이 턱을 뒤로 약간 빼며 소리 높여 되물었다.
“응. 팔콘사에.”
“그렇다면 CT하고 협상이 잘.”
“아니, 그 반대야.”
“네에?”
한영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자 손에 든 찻잔에서 커피가 살짝 흘러내렸다.
“협상은 없어. 내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려고. 협상은 CT가 아니라 팔콘사야.”
“어떻게요?”
“있는 사실을 그대로 오픈하고 설득해야지. 힘들더라도 그게 최선이야.”
“잘 안 되면요?”
노트북 화면에서 시선을 떼 한영을 보며 규혁이 빙그레 웃었다.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으려고. 먼저 팔콘사를 설득할 자료를 만들어야 해. 오늘부터.”
“제가 뭐 도와 드릴 건 없습니까?”
“됐어. 사무실 불 끄고 어서 가.”
“아직 끄면 안 됩니다.”
“응?”
“부한단 차장도 있거든요. 오울루 출장으로 이것저것 자료 챙기고 꼼꼼하게 한 번 더 테스트한다고 하루 종일 실험실에 있었어요.”
“오울루 출장이 언제라고 해?”
“내일요.”
“그래.”
규혁의 시선이 다시 노트북으로 향했다. 한영이 “먼저 갑니다”라고 말하곤 사장실을 나갔다.
노트북 옆에 있는 탁상달력으로 시선이 절로 갔다.
‘5월’이라는 글자가 초록 들판에 피어 있는 알록달록한 튤립으로 그려져 있었다.
지금 가면 핀란드 날씨가 별로 춥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라고 여기며 씁쓸한 눈빛을 했다.
실험실에서 나온 한단은 뻣뻣해진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사무실 문을 열다 그만 우뚝 멈췄다. 사장실에서 나오는 환한 불빛과 너무나도 익숙한 실루엣 때문에 그녀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규혁이 사무실에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혹시나 퇴근 시간이 지나 다시 사무실로 오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지만, 자신과 단둘이 유타페 건물에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했다.
업무 책상에 가는 동안 몸속 세포들이 일제히 곤두섰다. 긴장과 떨림 사이 아슬아슬한 경계선의 감정들이 한단에게 생겼다.
오울루 출장은 내일 오후 1시 비행편으로 확정됐다. 이번에는 조백웅과 공항에서 만나 함께 출국하는 것으로 했다.
노트북을 펼쳐 데이터를 한 번 더 정리한 다음, 필요한 자료는 따로 프린트해 토트백에 넣었다.
이번 출장엔 직원들이 면세점 물품 구매를 부탁하지 않았다. 회사 분위기가 밝지 않으니 다들 엄숙할 정도로 조용히 지냈다.
인사할까, 말까? 노트북 파우치를 옆구리에 끼고, 어깨에 멘 가방끈을 잡아 조몰락거리며 환한 사장실을 쳐다봤다.
‘그냥 갈까?’ 생각하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검었던 실루엣이 현실감 있는 모습으로 한단 앞에 나타났다.
어정쩡한 표정과 초점 틀어진 시선으로 보일 듯 말 듯 짧게 고개를 숙였다.
“힘들면 하지 마요.”
비난보단 안타까움이 먼저 다가왔다.
“불편한 얼굴로 숙제처럼 하는 인사……. 받는 나도 힘드니까. 안 해도 돼요.”
하얀색 뚜껑이 있는 물병을 들고 있는 걸 보니 물을 채우러 나온 것 같았다. 규혁이 탕비실로 들어갔다. 미안함과 민망함이 한꺼번에 몰려와 한단의 뺨을 붉게 만들었다.
물만 채우고 나올 것 같았는데 예상보다 한참을 기다려도 규혁은 나오지 않았다.
그가 나오면 이번엔 제대로 눈 맞춰 인사해야지 생각했는데 시간이 더 지나도 탕비실 문은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단은 닫힌 문 앞으로 걸어가 손을 쥐었다 펴며 살짝 망설이더니 이내 숨을 들이마시곤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눈을 감은 채 의자에 앉아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주먹으로 이마를 콩콩 두들기는 규혁이 보였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남자에게 두통은 치명적인 약점을 만들었다. 나약하고 무기력한, 그리고 기진맥진한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순간 울컥하는 감정에 한단의 눈동자가 말갛고 투명하게 변했다.
“저……?”
“응?”
규혁이 대답하며 이마를 두들기던 손을 내려놓고 고개 돌려 문 앞에 선 한단을 보았다.
“……출장 잘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와요.”
다시 고개를 돌린 규혁이 눈을 감았다. 지독한 통증에 그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 무슨 말이라도 더 보태야 하나 갈등했지만 그뿐, 한단은 발길을 돌렸다.
좋아, 사장과 직원 관계 안에서만 움직이는 거야. 그 외의 것엔 신경 끄자, 부한단. 그래야 해.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변하는 숫자를 응시하며 울컥했던 감정을 다스렸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한단이 올라타 ‘1’이라고 쓰인 숫자 버튼을 눌렀다.
1층에서 내려 주차장으로 걸어가는데 헤드라이트 불빛이 유타페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누구지? 지금 이 시각에.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궁금해하는 그때, 차 문이 열리면서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났다.
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짐작이 갔다. 되도록 마주치기 싫어 외면하고 차 문을 여는데 등 뒤로 목소리가 넘어왔다.
“규혁 씨, 있죠?”
티 나지 않도록 작게 한숨을 내쉰 한단이 차 문을 연 채로 반 정도 몸을 돌려 수진을 바라봤다.
“네. 있습니다.”
“미안한데, 가기 전에 출입문 좀 열어 줄래요?”
사장님께 연락하면 되잖아요, 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으나 혀로 뭉갰다.
치사하게 굴긴 싫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출입문 비밀번호를 눌러 열어 줬다.
“고마워요, 부한단 씨.”
한단은 고개만 가볍게 움직이곤 차에 올라탔다.
그래, 괜한 걱정이었어. 나 말고도 걱정해 주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부한단, 오지랖 부리지 말자.
차에 시동을 걸고 기어를 바꿔 핸들을 움직이면서도 신경은 자꾸만 뒤에 있는 유타페 건물로 향했다. 백미러에 시선을 두며 우울한 눈빛을 했다.
한편, 수진은 아무도 없는 조용한 유타페 사무실이 신기한 듯 이리저리 바라보며 들어왔다. 불이 켜진 사장실을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뭐야? 없잖아……. 젠장.”
약간 실망한 얼굴로 돌아서는데 탕비실 문 앞에 선 규혁이 수진의 모든 행동을 보고 있었는지 미간에 살짝 주름을 만들었다.
“여긴 왜?”
“거긴 어디야? 왜 거기서 나와?”
“그러는 넌 어떻게.”
“오다가 부한단 씨 만났어.”
아주 잠깐 규혁의 눈동자가 짜증과 차가움으로 복잡한 색을 하더니 이내 차분해졌다. 사장실로 성큼성큼 걸어가 서랍 안에서 안경을 꺼내 쓰며 노트북 화면을 켰다.
“두 사람, 싸웠어?”
“전에 마지막이라 하지 않았어?”
CT에서의 만남을 되새기며 의자에 앉아 등을 돌렸다. 수진의 등장이 반갑지 않다는 걸 목소리와 행동으로 드러냈다.
“그랬지. 그랬는데 이것 때문에.”
규혁의 책상 위로 수진이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보니까 특허 갱신 자료가 있어서. 초기 특허는 규혁 씨가 본부장 시절에 출원한 게 맞고 그 이후 갱신했더라고. 규혁 씨가 그건 잘 모를 것 같아서. 자리를 옮기고 나서 한 거라. 보니까 최신 자료야.”
“그래서?”
되묻는 목소리가 상당히 시니컬했다.
“빚진 거 갚아야 할 것 같아서.”
규혁의 말투에도 수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들썩이며 상관없단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차국환이 알면 화를 낼 게 분명한 자료였다.
“그런 도움 필요 없어.”
“꼭 그래야 해? 당신 눈, 나 불편해.”
“네가 아니라도 난 똑같이 해.”
노트북 화면만 보며 팔콘사를 설득할 기술 자료를 작성하는 규혁을 향해 결국 수진이 옅게 원망스러운 표정을 만들었다.
“나, 모레 미국 가. 물론 아버진 펄쩍 뛰시지만 여기 있기 싫어. 머리 복잡하게 일하는 것도 싫고. 공항에 배웅 나오지 않을 거지? 나왔으면 정말 좋겠는데.”
“…….”
“참! 이거 두통약이야. 정말 마지막 선물!”
주머니에서 네모나고 각진 얇은 상자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규혁의 시선은 노트북에서 떠나지 않았다.
상대가 알아들을 만큼 아주 깊고 크게 한숨을 내쉰 수진이 알았다는 의미로 크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알았어. 갈게. 종종 한영 씨에게 안부 물을게. 그래도 되지? 선후배로.”
“…….”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공기 속을 헤집었다. 냉정한 얼굴로 그보다 더 냉엄한 눈동자를 한 규혁을 한번 쓰윽 보곤 수진이 사무실을 나갔다.
흐릿하니 엘리베이터 차임 소리가 나자 규혁이 테이블에 있던 서류 봉투와 두통약을 한 번에 잡아 발밑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내리치듯 집어넣었다.
얼굴에 걸쳤던 안경을 벗고, 두 손으로 쓱쓱 마른세수를 했다. 휴대전화를 들고 복잡한 감정을 보이며 문자를 보냈다.
[공항으로 배웅 가도 될까? 불편하면 관두고.]
한단으로부터 답 문자를 받기 전까지 규혁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손은 노트북에 있었지만 정신은 온통 휴대전화에 꽂혔다.
문자를 보낸 지 5분 정도 흘렀을 때 한단에게 답이 왔다.
[불편합니다.]
“미친놈……. 일도 연애도 엉망진창이네.”
퇴근하는 한단을 배웅하지 못한 것에 미련이 남아 출장 가는 길이라도 배웅할까 했지만 역시나 불편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한단은 캐리어를 앞에 두고 휴대전화를 뚫어지게 보며 방금 보낸 문자를 다시금 읽었다.
솔직히 규혁에게 문자가 왔을 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놀라움, 두근거림, 그리고 반대되는 불편함과 어색함, 마지막으로 차수진까지.
규혁은 제3자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했지만 한단은 제3자로 인한 불편함까지 감수하면서 규혁을 만나는 게 싫었다. 불편함과 두근거림. 그 두 가지를 동시에 가져갈 바엔 차라리 안정적이고 마음 편한 걸 가지고 싶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쳐 내도 다가서는 규혁에게 한없이 드는 미안함까지도 불편함으로 치환돼 휴대전화만 말없이 쳐다보았다.
유타페 사무실에 있는 규혁도, 아파트에 있는 한단도 밤늦도록 잠 못 이루기는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