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절연체(insulant) (9/14)

9. 절연체(insulant)

한국의 4월은 핀란드의 4월과는 확실히 달랐다. 따뜻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바람도 공기도 온화했다.

한단은 2주 만에 귀국했고, 규혁은 여전히 독일에 있었다. 독일에 머무는 동안 사장 이규혁이 아닌 남자 이규혁으로서 그녀에게 안부를 물었고, 자신의 안부를 전했으며, 보고 싶다는 말을 끝에 달았다.

하지만 한단은 보고 싶다는 말에 입술을 살짝 깨물거나, 입 안 점막을 잘근거리며 답하지 않았다. 다만, 로바니에미 야간열차에서 봤던 문자가 떠올랐을 뿐이었다.

한단이 귀국하고 사흘 후에 드디어 유타페로 규혁이 출근했다. 예기치 못하게 출장이 길어졌다며, 그간 수고 많았다는 말로 직원들에게 인사를 대신했다.

항상 그렇듯이 그는 바빴다. 사장실에 앉자마자 전화기를 어깨와 목 사이에 끼우고 통화하면서 노트북 키보드를 치고, 태블릿을 켜서 회로도를 스캔하듯 쳐다봤다.

기술원 소송 건으로 이찬웅과 신 변호사 사무실로 가기 위해 슈트를 입고 나온 규혁이 말했다.

“은영 씨, 이번 주 스케줄 정리해서 보내고, 다음 주 거래처별 기술 미팅은 시간대로 정리해서 보내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규혁이 비어 있는 한단의 자리를 힐끗 보곤 이찬웅과 함께 복도로 나갔다.

유타페 회의실에선 샐림 쓰리 메인 보드 시제품을 가지고 한단이 업체 엔지니어와 미팅을 하고 있었다.

“도면에서 중요 포인트라고 하는 동박은 기존보다 0.05㎜ 더 두껍게 했습니다. 그래야 듀티 펄스를 줘도 오차가 적을 거라 봅니다.”

“잘하셨어요. 그런데 이쪽 회로 패턴이 조금 산만해요. 도면과 차이가 나네요.”

“공간이 협소해 이게 최선이었어요.”

업체의 말에 한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메인 보드 기판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건 시제품이니까 버전 2.0으로 새로 도면을 드릴게요. 아무래도 회로 패턴을 단순하게 설계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신뢰성에서도 문제가 없을 것 같고요.”

“알겠습니다. 변경된 버전으로 도면 주시면 재제작하겠습니다.”

미팅을 끝낸 한단이 시제품과 도면을 챙겨 사무실로 돌아갔다.

오후의 나른함을 달래고자 탕비실에서 커피를 가지고 나오는데 하마터면 쏟을 뻔했다.

유타페 사무실로 당당히 들어서는 CT의 차수진이 보였기 때문이다.

“누구세요?”

데스크에 있던 은영이 얼른 일어나 물었다.

“유타페 맞죠?”

“네. 그런데요.”

긴장된 얼굴로 은영이 바라보는데 수진이 활짝 웃으며 여유 있게 말했다.

“규혁 씨 있어요?”

“네? 사장님요?”

“맞아요.”

“누구신지…… 요?”

사장님을 규혁 씨라 부르는 방문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은영이 되물었다.

“CT의 차수진이라고 하면 알아요.”

수진이 유타페 사무실을 한 바퀴 둘러보다 탕비실에서 나온 한단과 눈을 마주쳤다.

“부한단 씨? 샐림 쓰리 담당자 맞죠?”

“……네.”

“반가워요.”

대체 이 여자가 갑자기 왜 나타난 거지. 한단이 황당하게 쳐다보는 그때 최한영이 들어섰다.

“안 계셔. 내 말, 그렇게 못 믿어?”

“넌 믿지. 하지만 내 눈으로 봐야 할 것 같아서. 할 말도 있고.”

한영과 수진의 대화를 듣자니 친분이 있어 보이는 말투와 표정이었다.

튀지 않는 검은색 오피스룩을 입었지만 화려함은 쉽게 감춰지지 않았다.

수진이 팔짱 낀 채 한영을 놀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차 한잔 권하지 않네. CT도 엄연한 유타페 거래처인데.”

시선은 한영에게 있지만 말은 자신을 염두에 두고 한 것 같아 한단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커피 드시겠어요?”

“주면 고맙겠어요.”

한단의 물음에 한영에게 있던 수진의 시선이 돌려졌다. 입꼬리를 올려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 이야기 좀 해요.”

“사장님하고 할 말 있다며.”

한단에게 이야기하자는 수진을 향해 한영이 약간 큰 소리로 말했다.

“규혁 씨하곤 다른 이야기. 부한단 씨하고는 샐림 쓰리 관련해서. 괜찮죠?”

“샐림 쓰리 창구는 설민혁 책임으로 일원화했습니다. 업무 이야기라면 설민혁 책임을 통해 듣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 있나요? 내가 왔는데.”

“업무 혼선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업무 효율성을 생각하면 별로네요.”

수진의 목소리가 요란하고 당돌한 음성으로 뻗어 가는 편이라면, 한단의 목소리는 잔잔하지만 곧은 음성으로 진중하게 나왔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회의실로 갑시다.”

사무실 분위기가 흐려질까 우려한 한영이 목소리를 낮게 깔아 두 사람에게 말했다.

방금 한단이 업체 엔지니어와 미팅을 끝낸 회의실로 들어가고 얼마 안 있어 은영이 커피를 전달했다.

막상 커피를 운운했던 수진은 잔에 손을 대지 않았고, 한영만 홀짝거리며 물었다.

“여기 온다는 거 사장님도 알고 계셔?”

대답하지 않고 입꼬리만 올린 수진의 시선은 한단을 향했다.

“핀란드 다녀왔다면서요?”

“네?”

의아해하는 한단의 표정을 보며 수진이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설민혁 책임에게 들었어요.”

한영은 수진이 자신의 물음엔 답하지 않고 일부러 딴청을 피우는 것 같아 못마땅한 눈길로 쳐다봤다.

“사장님 오늘 못 올 수도 있어. 다음에 약속 잡아요, 차수진 전무님.”

“약속, 잡아 줄까?”

그제야 시선을 틀어 한영을 보는데 수진의 표정이 약간 심각해 보였다. 그건 규혁이 자신을 만나 줄까, 하는 반문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이런다고…….”

한영이 답답한 얼굴로 말하려는 그때,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나더니 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장님, 칸 일렉트로닉 강민구 소장님 전화 왔습니다. 회의 중이시라고 할까요?”

“아니야, 은영 씨.”

한영이 고개 돌려 문 쪽으로 소리치곤 의자에서 일어나 수진에게 말했다.

“사장님 피곤하게 하지 마. 유타페 일만으로도 머리 쪼개질 정도로 바쁜 분이니까.”

“충고, 고마워.”

진지한 한영의 말을 여유 있게 받아치며 마주 앉은 한단에게 말꼬리를 돌렸다.

“핀란드는 어땠어요? 좋았어요?”

“죄송하지만, 업무 이야기가 아니면 저도…….”

“규혁 씨도 핀란드 갔던 걸로 알고 있는데.”

심장 어딘가에 바늘이 꽂힌 듯 따끔거렸다. 저절로 굳어진 한단의 얼굴이 재밌는 구경거리처럼 보였는지 수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수진의 짓궂은 표정은 상대를 얕잡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촉이 맞았다는 의미였다.

“규혁 씨랑 핀란드에서 만났어요?”

“…….”

“우린 독일에서 만났어요. 반도체 포럼도 있고, 이런저런 일도 있고.”

“죄송하지만, 샐림 쓰리 이야기가 아니면 일어나겠습니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한단을 보지 않고 수진이 말했다.

“샐림 쓰리가 성공적으로 개발될 수 있도록 힘써 줘요.”

수진이 시선을 올려 서 있는 한단과 눈을 마주했다. 방금 보였던 짓궂음은 없고 CT 차수진 전무의 위엄이 엿보였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부한단 씨.”

한단이 나가고 회의실에 혼자 남은 수진이 그제야 식어 버린 커피 잔을 들었다.

한영을 통해 규혁의 출장 소식을 알게 된 수진은 순전히 규혁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독일로 떠났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독일에 규혁은 없었다. 뒤늦게 규혁이 핀란드에 가 있다는 걸 알았고, 핀란드에 부한단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수진의 퍼즐이 예리하게 움직였다. 여자만의 직감과 촉으로 단순히 일 때문에 핀란드로 갔다는 규혁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듣지 못했다.

핀란드에서 독일로 넘어온 규혁의 표정과 눈빛은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수진이 휴대전화를 들어 규혁의 번호를 터치했다. 신호는 가지만 받질 않았고 결국 음성으로 넘어갔다.

내쉬는 한숨엔 감정이 섞여 있었고, 던지듯 가방에 휴대전화를 넣는 동작엔 신경질이 들어갔다.

그렇게 10여 분 정도 혼자 회의실에 있던 수진이 결국 유타페 건물을 빠져나갔다.

실험실에 가기 위해 사무실을 나온 한단은 문이 열린 채 비워진 회의실을 보며, 문자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신했다. 수진과 규혁 사이를 아예 몰랐던 것도 아닌데 퇴근할 때까지 한단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파혼한 옛 약혼녀가 보낸 문자에 대해 따질 만큼 여전히 뻔뻔하지도 못했다.

함께 잤다고 규혁의 여자가 된 것처럼 굴기도 싫었다. 질투에 눈먼 여자가 앞뒤 생각 없이 화부터 내는 천박함을 경멸했다.

평생 의부증을 달고 산 고모. 모진 말로 날카로운 독을 퍼붓는 고모의 악랄함에 치가 떨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해 따뜻한 카모마일 차를 마시며 긴장 속에서 보낸 하루를 마감했다.

그 긴장 속엔 느닷없이 방문한 차수진도 포함됐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는데 한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액정엔 ‘사장님’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떴다.

“여보세요.”

- 집?

“네.”

- 퇴근하려는데, 잠시 얼굴 볼 수 있을까?

귀에 댄 휴대전화를 내려 시간을 확인했다. 밤 11시가 조금 못 되었다.

“많이 늦었어요.”

- 피곤해?

“……네.”

수화기 저편에서 아쉬움이 들어간 규혁의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만 끊을게요.”

- 혹시, 차수진 때문에 그래?

수진이 유타페에 방문한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분명 한영이 말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물곤 가만히 휴대전화만 귀에 댔다.

- 그렇다면 더 만나야 하고.

“차 전무님은 샐림 쓰리 때문에 오신 거였어요.”

수진과 나눴던 대화의 묘한 분위기는 싹둑 잘랐다. 그런 것까지 규혁에게 일일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선입견에 사로잡힐까 두려움도 있었다.

차수진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중요한 걸 미처 보지 못하는 실수를 저지를까 봐.

“성공적으로 샐림 쓰리를 개발해 달라고 했어요.”

3초 정도 무음이 생겼다.

- 미안해요. 엘리베이터 안이라 통화가 원활하지 않네. 피곤할 테니 푹 쉬어요.

“네. 들어가세요.”

- 내일 봅시다. 부 차장.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나타난 차수진 때문이다.

규혁과 수진이 한때 약혼한 사이였다는 걸 한단도 알고 있었다. CT에서 규혁이 본부장으로 일했을 때 한단은 책임연구원으로 있었으니까 말이다.

파혼했다면 두 사람에게 애정은 없어야 한다. 그런데 차수진에게 한단이 받은 느낌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규혁에게 애정 있는 관심을 보였다.

검게 변한 액정을 보며 한단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음 다치지 않게 조심하자. 부한단.’

* * *

출근하는 직원들로 유타페 사무실이 복작거렸다.

기술원 재판이 순조로운지 이찬웅의 얼굴은 전보다 약간 밝았지만,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던 김학준의 얼굴은 살짝 근심으로 가라앉았다.

역시 일찍 출근한 규혁은 실험실에 있다 사무실로 들어서며 한단을 찾았다.

“부한단 차장님, 샐림 쓰리 때문에 PCB 업체로 출근했습니다.”

은영이 일어나 보고했다,

“그래요? 언제 온다는 말은 없고?”

“네. 연락해서 물어볼까요?”

“아니, 됐어요. 김학준 과장.”

규혁이 고개 돌려 학준을 불렀다.

“네, 사장님.”

“팔콘사 프로젝트 미팅합시다.”

“네.”

규혁이 사장실로 들어가고 뒤이어 학준이 태블릿과 업무 수첩을 들고 가 문을 닫았다.

팔콘사에 이어 칸 프로젝트 관련 회의 후 차기 계측 프로젝트를 제안한 유니온사의 연구소장 미팅을 요청받았기에 규혁이 외근 준비를 했다.

“사장님, 저녁엔 칸 일렉트로닉 최 부사장님과 식사 약속 있는 거 아시죠?”

넥타이를 고쳐 매고 슈트 재킷을 입는 규혁을 보며 한영이 말했다.

“저녁 8시, 스카이 프라자 호텔 20층 엘르 레스토랑입니다.”

“알아.”

“12인치 MOCVD 개발에 관해 본격적으로 말할 것 같습니다.”

“신 변호사와 특허 이야기는 했고?”

“오슬로와 별개로 하지만 그쪽에 공지는 해야 한다고 합니다. 나중을 생각해서.”

감색 더블브레스트를 입은 규혁이 단추를 여미며 말했다.

“오슬로와 연관된 부분은 부 차장하고 이야기해 보자고.”

“알겠습니다.”

“은영 씨.”

사장실을 나오며 부르자 웃음 가득한 얼굴로 은영이 발딱 일어났다.

“네, 사장님.”

“부한단 차장 연락 왔습니까.”

“사무실 복귀가 정확하지 않다고, 업체에서 바로 퇴근할 수도 있다고 연락 왔습니다. PCB를 재제작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하면서요.”

“알았어요.”

항상 보여 주는 적당한 미소를 지으며 규혁이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오실 겁니까?”

한영이 규혁을 따라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가며 물었고, 규혁은 “글쎄”라고 애매하게 답한 후 엘리베이터를 탔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탄 규혁이 작게 한숨 쉬며 한단에게 연락했다.

한영에게 듣기론, 차수진이 샐림 쓰리에 관해 한단과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지만 규혁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회의실만 안내하고 칸 프로젝트 때문에 나왔어요. 부 차장이 샐림 쓰리 보드 제작으로 PCB 업체 갔다고 하니 맞겠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확실히 개운하진 않았다.

신호는 가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PCB 제작 제조 라인에 들어가면 통화가 힘들다는 걸 알고 있다. 제조 라인에 있을 거라 예상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국 한단에게 문자를 보낸 후 차를 몰아 유타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유니온사 연구소장인 송형석은 작달막한 키와 통통한 체구로, 꼭 만화 속 박사가 현실로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유니온사에 스카우트됐으며, 전문 분야인 레이저 공학 외에 계측 부분에도 식견이 넓었다.

유니온사와 했던 샐림 투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이번엔 레이저 단층 광학 장비 개발을 논의하자고 한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의학용 측정 장비입니다.”

“최한영 부장을 통해 개발 콘셉트는 들었습니다.”

“아무튼 유타페의 실력을 믿어 보겠습니다.”

“프로젝트가 결정되면 알려 주십시오. 유타페에서도 개발 담당자를 지정하겠습니다.”

식사하는 동안 독일 반도체 포럼으로 화제가 넘어갔다. 각 회사별 신제품 정보, 향후 반도체 시장의 변화 등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눴다.

레스토랑을 나와 규혁이 향한 곳은 유타페였다.

규혁은 독일에서 차국환, 차수진 부녀를 만났다. 또한 CT 주관 하에 독일 팔콘사와 CT, 그리고 유타페의 삼자 회의를 진행했다.

엄밀히 따지면 팔콘사와 CT는 경쟁 업체지만 팔콘사의 부품을 CT에서 일부 수입해 사용했다. 직접 생산하기엔 수지가 맞지 않는 부품들은 경쟁 업체에서 조달받았다. 동종 업계끼리 경쟁하면서도 때론 상생과 공존을 통해 서로를 견제하곤 했다.

규모만 본다면 팔콘사보단 CT가 두 배 이상 컸다. 그렇다고 기술력도 두 배 이상 좋다는 건 아니다. 어느 면에선 팔콘사의 기술력이 CT를 압도하곤 했으니까 말이다.

회의는 차국환의 주도로 진행됐다. 팔콘사와 CT가 협력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자는 슬로건 아래 특허와 기술의 공정성을 위해 개발은 유타페가 담당하는 것으로 하자는 의견이었다.

“유타페의 실력을 높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회의 마지막에 규혁이 한 말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유타페 사무실이 있는 복도로 나오는데 실험실 문이 열리면서 하얀 불빛이 바닥에 깔렸다.

PCB 보드를 옆구리에 끼우고, 한 손엔 태블릿을 든 한단이 나왔다.

복도에 선 규혁을 아직 보지 못한 듯 PCB 보드가 떨어지지 않게 추스르고는 마저 걸음을 옮겼다.

“퇴근 전?”

“어?”

깜짝 놀란 얼굴을 하며 천천히 걸어오는 규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PCB 업체는 잘 갔다 왔고?”

“네.”

PCB가 갈색인 걸 보니 완성품이 아닌 동박 패턴만 입힌 제품을 가져온 듯했다.

“완성되기 전에 패턴 검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변명처럼 한단이 작게 말했고, 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 결과는?”

“듀티 조건이 결정되지 않았지만, 임의로 펄스 구동한 결과 나쁘진 않았습니다.”

사무적인 한단의 말투는 건조했다. 그 건조함엔 경계심마저 보이는 것 같아 규혁의 신경이 또다시 편치 못했다. 1분 정도 말없이 한단을 보며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을 했으나 그녀 역시 침묵했다.

“나한테 할 말 없어?”

“네?”

“전화, 문자 안 돼. 얼굴도 보여 주지 않아. 나에게, 화났어?”

부드럽다.

따져 묻는 법이 없다. 목소리는 차분했고, 얼굴은 신중했으며, 눈동자는 담백했다.

한단이 바라본 이규혁이란 남잔 그랬다.

바쁘다고 허둥대지 않았고, 급하다고 채근하지 않았으며, 원한다고 조르는 법도 없었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그게 그 사람의 전부일까? 마냥 부드럽고 따뜻하며 항상 너그러울까. 자신이 아는 얼굴 아래의 또 다른 얼굴을 꺼내고 싶었다.

자신에게 보여 주지 않은 규혁의 모습을, 아니, 자신은 볼 수 없었던 저 남자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로바니에미에서 봤던 수진의 문자에 어떤 표정과 눈빛을 했었는지, 그때도 지금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얼굴을 했을까? 공적인 관계에서 보여 주는 신뢰 깊은 행동 말고, 사적이고 은밀한 관계에서 보여 주는 또 다른 뒷면은 어떨지. 과연 다를까? 다르다면 지금 모습과 얼마나 차이가 날까? 완벽한 현재를 구축한 남자의 과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신의 지난 사랑은 어땠나요?’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한단의 가슴에 휘몰아쳤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부한단을 봐 달라고 해 놓곤 정작 자신은 과거의 이규혁을 꺼내며 혼란스러워했다.

머리엔 회오리바람이, 심장엔 광풍이 불어 한단의 마음을 지저분하게 흔들어 놨지만 정작 앞에 서 있는 규혁은 잠잠했다.

“없어요. 전화는 제조 현장에 있어 받지 못했고, 문자는 나중에 보내기가 그래서 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핀란드와의 시차 때문에 며칠 동안 피곤했어요.”

“지금은?”

대답 대신 규혁의 눈동자를 쳐다봤다. ‘지금은’이라는 말의 의미가 정확하게 해석되지 않았다. 피곤함을 말하는지, 시간이 있는지 물어보는 건지 명확하지 않은 물음에 얼른 답이 나오지 않아 망설이다 말했다.

“동박 패턴 사이 공차를 수정해야 합니다. 안정성 있게.”

사무실에 가서 도면 펼치고 회로도를 수정해야 한다는 걸 돌려 말했다. 즉, 일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얼마나 걸려?”

“……모르겠어요. 해 봐야…….”

‘해 봐야 알아요’를 흐릿하게 뭉개는데 규혁이 낮게 말했다.

“거짓말.”

한단의 옆구리에 끼워진 PCB 보드를 규혁이 잡아 꺼냈다.

“5분. 수정하는 데 걸리는 시간, 길게 잡아야 10분이잖아. 아니야?”

“…….”

“10분 줄게. 기다리지, 뭐.”

그대로 사무실로 간 규혁이 한단의 책상 위에 PCB 보드를 올려놓고 사장실로 들어갔다.

규혁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패턴과 패턴 사이 공차를 수정하는 것은 고작 6분 만에 끝났다.

고개 돌려 사장실 유리창에 비치는 규혁의 실루엣을 보며 한단이 일어났다.

똑, 똑.

예의상 노크를 한 후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노트북 화면을 보는 규혁의 얼굴에 안경이 씌워졌다.

업무 책상 위에 놓인 프린트물에는 대학 마크가 찍혀 있었다.

“독일 세미나에서 우연히 본 자료인데 대학 논문이더라고. 듀티 펄스 주기에 따른 신뢰성을 굉장히 세밀하게 나눠서 검토한 자료야. 참고하면 괜찮을 것 같아서.”

프린트 버튼을 클릭했는지 ‘쉬익’ 소리가 나면서 빠르게 인쇄된 종이가 나왔다.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놓곤 한단에게 앉으라고 했다.

“오랜만이지. 가까이 마주 보는 게.”

겨우 일주일 정도 지났을 뿐인데 규혁은 오랜만이라는 말로 애틋함을 표현했다.

그녀가 입은 블라우스 속 은밀하고 매끄러운 살결의 감촉을 규혁은 잊지 않았다.

한단이 허락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를 안고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걱정도 되고, 생각도 나고 그랬어.”

“제 걱정 하지 마세요.”

날카로움이 감춰진 말이었다. 규혁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한층 더 한단과의 거리를 좁혔다.

“무슨 일, 있었어?”

물음보단 확신이 들어간 말이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는 듯 규혁의 얼굴 또한 부드러움보단 걱정에 가까웠다.

한단의 시선은 규혁의 진갈색 구두 중앙에 있는 매듭에 있었다.

리본 모양으로 맨 매듭의 양 끝 길이가 똑같았다. 정확한 손놀림으로 섬세하게 끈을 매는 규혁의 모습이 그려졌다.

“부한단.”

“아무 일도 없습니다.”

“나 좀 봐 줘.”

명령이 아닌 부탁처럼 규혁이 말했다.

“핀란드에선 적어도 이러진 않았어.”

그랬다. 핀란드에선, 오울루와 산타 마을에선 적어도 이러진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됐을까. 로바니에미 야간열차에서부터 맴돌던 문자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혀로 굴리기만 했다.

“사장님, 이게 저예요. 제 진짜 모습이에요. 핀란드는…… 아닙니다.”

“그것도 부한단, 당신 모습이야. 유타페든 핀란드든 간에 내게 부한단은 한 명이야. 진짜고 가짜고 의미 없어.”

규혁의 얼굴을 보던 한단의 눈동자는 잘 매진 넥타이의 딤플로 내려갔다. 입술을 안으로 살짝 말아 침을 적신 후 말을 꺼냈다.

“솔직히 말해, 부담스러워요. 사장님이…… 이러시는 거.”

“우리가 자서?”

“……모든 게 다요.”

“구체적으로 말해 주면 안 될까?”

한단의 눈길이 딤플에서 규혁의 얼굴로 다시 올라갔다. 모든 게 다라는 말엔 차수진도 포함됐다는 걸 끝내 말하지 못했다.

“혼란스럽습니다.”

“내가 귀찮게 했어?”

한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규혁을 귀찮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거니와 실제 그는 상대를 귀찮게 하지도 않았다.

“사장님은 아니라고 했지만, 전…… 다릅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핀란드에서의 일은 그냥 묻어 뒀으면 합니다.”

무리하게 다가서면 분명 멀리 도망갈 거다. 아주 멀리. 규혁은 한단이 말한 부담의 뜻을 이해했다. 자신의 여자인 것처럼 여기지 말아 달라는 의미와 같다는 걸.

한단도 느낄 만큼 규혁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뿐, 당황하거나 놀랍다거나 곤란하다는 따위의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블랙홀 같은 검은 눈동자는 묵직하니 신중했고, 묻는 음성 또한 차분했다.

“좋아. 한단 씨 말, 이해해 볼게.”

자칫 어색해질까, 규혁은 얄미울 정도로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퇴근 안 해?”

“할 겁니다.”

“배웅해 줄게.”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건, 유타페 부한단에게도 했던 건데.”

규혁의 배려와 부드러움에 되레 한단의 감정은 어수선해져 갔다.

한단이 차를 몰고 떠날 때까지 규혁은 가만히 서서 바라봤다. 그녀의 차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사이드 미러 속에서 멀어지는 규혁을 보며 한단은 끝내 말하지 못한 그 무언가를 대신해 찾은 말이 고작 핀란드와 유타페의 부한단이었다.

차수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말하지 못한 건 부족해서였다는 핑계를 스스로 만들었다.

확신한다고 하더라도 증명할 방법이 정당하지 않기에 규혁에게 말하기 싫었다고 자기를 합리화했다.

사이드 미러엔 아무것도 비치지 않고 어둠 속 가로등만 규칙적으로 지나갔다.

* * *

완성품인 초록색 PCB 시제품 보드를 엠보싱 비닐에 포장해 CT 회의실로 들어서자 설민혁 책임이 받아 들었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인턴에서 정식 직원이 된 백선주도 이번 샐림 쓰리 프로젝트 담당자로 지정되어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PCB 패턴을 일부 수정했고, 동박의 폭은 듀티 전류를 고려해 기존보다 0.05mm 넓혔어요. 그것 때문에 패턴 간의 공차 범위도 수정했고요.”

“변경한 도면은 받아서 검토했습니다. 윤 본부장님께서도 큰 문제 없다고 하셨으니까 주신 시제품으로 내부 검토해서 결과 알려 드릴게요.”

민혁이 옆에 앉은 선주에게 PCB 보드를 건네고, 벽면에 펼쳐진 스크린 화면을 가리켰다.

“듀티 전류에 관한 기준을 세 가지로 추렸습니다. 이 중에 최종 하나를 선택할 예정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유타페에서 세 가지 모두 제작해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듀티 전류별 스펙을 공문으로 보내 주시면 근거로 메인 보드와 장비 제작을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부 차장님께서 가격 견적도 내시나요?”

“네.”

“듀티 스펙 공문을 보내면 바로 견적을 주실 수 있으세요? 기획실에 개발비를 미리 알려 줘야 결재할 때 편하거든요.”

민혁이 웃으며 이유를 말하자 한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아, 역시. 부 차장님하고 일하는 거, 너무 좋아요. 뭐든 정확하시니까요.”

회의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마무리됐고, 한단은 민혁과 선주의 배웅을 받으며 CT 중앙 로비를 걸어갔다. 두 사람과 헤어지고 휴대전화를 꺼내 오랜만에 소영과 통화했다.

- 어휴! 계집애, 무슨 전화를 백만 년 만에 하냐?

“미안해, 그렇게 됐어. 해외 출장 다녀오느라……. 어때? 어제 말한 점심.”

- 그렇지 않아도 네 전화 기다리느라 목이 다 빠졌다. 기다려!

“알았어.”

로비 한편에 서서 통화를 마치고 소영을 기다리는 그때, 저편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말끔한 슈트 차림의 규혁이 나왔다.

규혁이 CT에 온 것을 몰랐던 한단이 약간 놀란 얼굴로 알은체를 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뒤이어 차국환과 차수진, 그리고 비서 몇 명이 나왔다.

차국환의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수진의 돌발 행동에 한단의 얼굴이 눈에 띄게 경직됐다.

“여전히 잘 어울리죠?”

재빠른 동작으로 규혁의 팔에 팔짱을 낀 수진의 목소리엔 애교와 농담이 반반 들어갔다.

곁에 있던 사람들의 유쾌한 웃음이 양념처럼 쏟아졌다.

“그럼.”

고개를 끄덕이며 차국환이 맞장구를 치니 아니라 부정하는 게 어색해지는 분위기였다.

규혁 또한 수진의 손을 잡아 억지로 뺀다면 괜히 이상하고 더 곤란해질 상황이라 생각했는지 참고 넘어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얼른 발길을 돌려 그들이 보기 전에 피해야 하는데 한단의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멀뚱히 서서 수진이 규혁과 얼마나 어울리는지만 가늠할 뿐이었다.

“뭘 그렇게 빤히 봐?”

한단의 어깨를 툭 치며 팔짱을 끼는 소영 덕분에 최면처럼 고정된 눈길이 풀어졌다.

“아니야.”

“아니긴, 저기 이 본 와서 그렇구나.”

소영이 턱으로 규혁과 차국환 부녀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혹여 규혁에게 들킬까 몸을 휙 돌린 한단이 빠르게 말했다.

“점심 먹으러 가자. 나 아침도 굶었더니 배고파.”

“이하동문이오.”

장난스럽게 답한 소영이 한단과 함께 CT 로비를 나와 햇살이 내리쬐는 보도블록을 걸었다.

새로 오픈한 베트남 쌀국숫집이 괜찮다는 소영의 말에 쌀국수와 곁들여 먹을 짜조라는 튀김도 시켰다.

“핀란드에 갔었다고?”

“응. 오슬로라는 반도체 업체야. 유럽에선 꽤 실력 있는 업체고.”

“알아, 그 업체. 거기 쉬퐁인지 씨퐁인지 하는 수석이 엄청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하던데.”

“알고 있구나.”

“오슬로가 UV 자외선 살균과 멸균 쪽으론 꽤 알아주는 업체잖아.”

뽀얀 육수와 넓적한 국수면, 그 위에 초록색 고수를 고명으로 올린 쌀국수가 나왔다.

둘 다 호록호록 소리 내며 나무젓가락을 열심히 움직였다. 후식으로 연유가 섞인 베트남식 아이스 밀크 커피가 나왔다.

“샐림 쓰리 프로젝트는 잘돼 가?”

“아직까진.”

“소문인데, 그 프로젝트 말이야. 이 본 때문에 하는 거라더라.”

“사장님 때문에?”

“뭐, 돌아가는 소문이 그래.”

어깨를 으쓱이며 별 중요하지 않다는 표정으로 소영이 아이스커피 속 얼음 한 개를 입에 넣어 깨뜨렸다.

“차수진 전무가 2년 만에 한국에 온 것도 이 본 때문이라고 하고, 차국환 사장이 이 본처럼 일 잘하는 사람이 곁에 없으니까, 뭔가 만날 핑계가 있어야 하잖아. 그래서 프로젝트 하는 거라고.”

“그렇다면 너무 빈약한데? 샐림 쓰리 말고 다른 프로젝트도 했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소영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곤 어깨를 움츠려 한단만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낮췄다.

“이건 나도 비서에게 들은 이야기야.”

“비서?”

“사장님 비서. 걔가 내 고등학교 후배잖아.”

“그래…….”

“지난 독일 반도체 포럼에서 차국환 사장이 이 본을 불렀대. 그리고 필요도 없는 차수진 전무도 함께 불렀대.”

“왜?”

“왜라니? 오늘 로비에서 보면 몰라? 그림이 딱 나오는데. 어떻게든 두 사람을 다시 붙이려고 하는 거지.”

“붙이려고…….”

소영은 또다시 얼음 하나를 건져 입에 넣으며 아그작 씹었다.

“아휴, 여름도 아닌데 더위를 왜 이렇게 타는지 몰라. 벌써 갱년기인가?”

그러곤 앞에 앉은 한단을 보며 말을 이었다.

“부한단, 그 정색한 얼굴은 뭐니?”

저절로 얼굴이 굳어졌나 보다. 요즘 들어 전처럼 감정을 숨기는 게 쉽지 않다고 생각하며 한단이 물었다.

“설마. 그런다고 파혼한 사이가 다시 잘될까?”

“두 사람 어떻게 헤어졌는지 모르잖아. 소문만 무성했지. 차수진이 변심했다. 이규혁에게 다른 여자 생겼다. 아니다, 차수진이 바람피웠다. 알고 보니 이규혁이 돈 보고 좋아했더라.”

소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얼마나 뒤에서 말들이 많았어? 이유야 어쨌든 오늘 보니 나쁘게 헤어진 거 같진 않더라. 두 사람 팔짱까지 끼고 서 있는 걸 보면. 뭐랄까. 화보에 나올 법한 모델 부부?”

“나, 그만 가야 할 것 같아. 오후에 세미나 하거든.”

“이 본은 아직도 잉글리시 세미나 하니?”

CT 본부장 시절 개발 2팀은 타 팀과 다르게 매달 한 번씩 직원들끼리 돌아가며 세미나를 했다. 유타페에서 하는 방식과 동일하게 말이다.

답 대신 입꼬리만 올리곤 한단이 일어났다. 쌀국숫집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가는 길목까지 소영이 따라갔다.

“점심 고마워, 소영아.”

“고맙긴. 다음에 또 보자.”

손 들어 인사하고 한단이 차를 몰아 CT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 *

차국환과 차수진, 그리고 규혁이 함께 앉아 식사하는 장소는 언젠가 차강우 수석과 규혁이 함께 점심을 했던 레스토랑이었다.

“여기 양갈비 특선 괜찮다고 차 수석이 말해서 말이야.”

“정말 그런 거 같아요. 양 특유의 비린내도 별로 없고.”

수진이 맞장구치며 디저트로 나온 초콜릿 무스를 수저로 한술 떠 입으로 가져갔다. 규혁과 수진이 나란히 앉고 맞은편엔 차국환 혼자 앉았다.

“그래, 내가 제안한 프로젝트는 생각해 봤나?”

독일 팔콘사와의 기술 협의를 말하는 것이다. TV나 전광판 디스플레이에 적용하는 발광 부품은 초록, 빨강, 청색 이 세 가지 빛으로 흰색부터 검은색까지 구현하고 있다. 초록과 빨강은 반도체 유기물 구조가 청색보다 효율적이어서 수명이나 신뢰성이 높은 반면 청색을 구현하는 질화물 반도체는 그 반대의 구조로 인해 수명과 효율이 절반도 미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팔콘사와 CT는 청색 반도체의 수명과 효율을 기존보다 높여 최소한 초록과 빨강의 70%까지 올리는 기술 개발을 협의했다. 그러기 위해선 청색의 반도체 기판이 필요했고, 신규 MOCVD 개발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그 개발을 유타페에서 하는 것을 차국환이 제안한 것이다. 물론 굉장히 좋은 조건이고, 성공한다면 자부심을 가질 만한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거기엔 함정이 있었다. 독일 출장 후 규혁이 고민하는 것이 그 부분이었다. MOCVD는 정교한 장비로, 구동하는 모든 조건이 특허와 연결돼 있다. 그만큼 민감한 부분이기도 했다. 최한영이 담당하는 칸 일렉트로닉의 MOCVD를 조심스럽게 진행하는 이유도 바로 이 기술 특허 때문이었다.

“여러모로 깊게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특히 특허와 기술 중복성을 체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타페가 곤란해집니다.”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자네 뒤에 CT가 있지 않나? CT가 보유한 특허만도 무시 못 할 텐데. 너무 계산하지 말게. 그러다 발도 못 떼고 흐지부지될까 걱정이네.”

느긋하니 잔을 들어 마시는 차국환을 보며 수진이 따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 여기 와서도 일 얘기 해야 해요?”

“그랬나?”

“그러지 말고, 아빠 다음 주 생신 때 규혁 씨 초대해 줄 거죠?”

“나야 오면 좋지. 항상 아들처럼 생각하니까. 자네 어머님도 여전하시지?”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진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상태로 요양원에 누워 계신 지 7년이 넘어갔다. 지칠 만도 한데 규혁의 어머니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네. 건강하게 지내십니다.”

“잘해 드리게. 요즘 같은 세상에 남편 병시중을 7년 넘게 하는 아내도 흔치 않으니까.”

“또 말이 이상하게 흘러가네. 아빠, 지루해지려고 해요.”

“아, 미안. 나이가 드니 사람이 재미없어져서.”

툭탁거리며 대화하는 차국환에게 위엄 있는 대기업 사장의 얼굴은 없었다. 딸 차수진에게 한없이 약한 아버지만 보였다.

“죄송하지만 그만 일어나야겠습니다. 회의가 있어서요.”

“거봐, 아빠 때문이야. 규혁 씨랑 말도 못 했잖아, 나는.”

두 발을 동동거리며 일부러 과하게 투정 부리는 수진을 보며 차국환이 말했다.

“10분만 있어 줘. 부탁하네. 난 먼저 일어날 테니.”

늘 똑같다. 약혼 기간에도 수진의 잘못으로 규혁이 화가 나 있으면 아버지 차국환을 이용해 자리를 만들었고, 그 자리의 마지막은 언제나 수진의 몫이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금도 규혁을 만날 핑계를 찾지 못한 수진은 CT 사장인 아버지를 이용했다.

그럼 못 이긴 척 차국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규혁을 불러냈다. 하다못해 불필요한 프로젝트까지 운운하며 그를 만났다.

차국환이 나가고 레스토랑엔 규혁과 수진만이 남았다.

규혁은 정면을 응시했고, 수진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규혁에게 시선을 보냈다.

“잘 지냈어? 독일에서 보니까 규혁 씨 상당히 멋지더라고. 물론 알았는데 내가 잠시 잊고 있었나 봐.”

“차수진.”

“응? 말해. 곁에 있으니까.”

수진은 규혁에게 상체를 바짝 밀착해 팔부터 어깨까지 손가락 걸음으로 올라갔다.

매혹적이고 유혹적인, 그리고 꽤 관능적인 눈길과 표정도 함께 보였다.

“여자 있어, 나.”

“뭐?”

정면을 향했던 규혁이 시선을 돌려 수진과 마주했다. 붉은색의 아랫입술을 감쳐문 수진의 얼굴에 파르르하니 사나움이 몰려왔다.

“이런 짓, 그만해. 화나려고 하니까.”

‘여자 있어’라는 말의 의미를 알면서도 확인 사살이라도 해야 할 것처럼 수진이 되물었다.

“그 말, 사랑에 빠졌다는 거야?”

“알면 됐어.”

건조하게 대꾸하며 끓어오르는 화를 지그시 누르기 위해 주먹만 접었다 펴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누군지 물어봐도 돼?”

남의 말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수진의 성격이 튀어나왔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자신의 용건이 먼저였다.

대답할 가치를 못 느낀 규혁이 입을 열지 않자 수진의 입술 끝이 신경질적으로 씰룩댔다.

“부한단이라고 했지?”

기어코 답을 들어야겠다고 끈질기게 매달리는 수진을 보는 규혁의 눈빛에는 경멸이나 모욕은 없었다. 그저 유리알처럼 차갑고 냉랭할 뿐.

질릴 대로 질린 그 행동을 낮은 한숨으로 털어 내며 규혁이 먼저 자릴 떴다.

오늘, 규혁의 CT 방문은 독일 포럼과 팔콘사 관련한 차국환의 요청이었다. 회의를 끝낸 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순간 시야에 잡힌 한단을 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가 CT를 방문한 줄은 규혁도 몰랐다. 빠르게 걸어가 말이라도 걸려고 생각하는 그때 수진의 손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제발 그녀가 보지 못했기를 바라며 함께 나온 차국환과 비서들에게 둘러싸였고, 그들에게서 벗어났을 땐 이미 그 자리에 한단은 없었다.

차에 올라탄 규혁이 애꿎은 핸들만 탁 치며 눈을 감았다. 두통이 몰려와 주머니에서 꺼낸 약을 입에 털어 넣고서야 차를 몰아 나갈 수 있었다.

오후 6시부터 시작된 세미나는 이찬웅의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듣는 이의 귀가 흐물흐물해질 정도였다. 빛의 파장과 세기만으로 몸속 질병 유무 확인과 치료까지 할 수 있다는 요지의 프랑스 대학 논문이었다.

의료 분야가 낯설고 신선하다 보니 질문이 별로 없었고, 한다고 해도 겉핥기식 질문만 있었다.

「말씀하신 몸속 질병이 어떤 건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까요?」

「종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암도 포함됩니까?」

「최종 목적은 암이고, 그걸 치료하는 것 또한 이 개발의 마지막일 거라 봅니다.」

맨 뒤에서 두 손을 깍지 껴 뒷머리에 대고, 기다란 두 다리를 쭉 펴 발목을 엇갈린 채 앉아 있던 규혁이 말했다.

「그렇다면, 빛으로 병도 치료한다는 건데 그 빛의 파장에 대해서도 나와 있습니까?」

「그 부분은 약간 논란이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통과하려면 파장이 길어야 합니다. 레드와 그린은 파장이 길지만 세기가 약해 인체를 통과하지 못합니다. 아시다시피 그런 파장은 의료용으로 쓰기 어렵다는 게 문제죠.」

「그럼 유브이 파장은요? 살균과 멸균에 탁월하니 조만간 의료용으로 사용되지 않을까요?」

한단이 빠르게 되묻자 찬웅이 어깨를 살짝 올리며 답했다.

「단(短)파장이잖아요. 사람의 몸을 통과하기엔 길이가 짧아요.」

대답한 찬웅이 모여 앉은 직원들을 쭉 둘러보며 마무리 멘트를 했다.

「만약 논문대로 개발된다면 획기적인 제품은 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이 쉽지 않지만요. 하지만 불가능하지 않기에 이번 세미나 주제로 선택해 발표한 것입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자 모두가 손뼉 치며 수고했음을 표했다. 회의를 끝으로 퇴근도 시작됐다. 한 명 두 명 짝지어 퇴근하는 사람, 부득이하게 야근하는 사람으로 나눠 흩어졌다.

규혁은 야근하는 사람으로, 한단은 퇴근하는 사람으로 돼 버린 듯 발걸음 방향이 달랐다.

집에 도착해 늦은 저녁을 먹고, 따뜻한 모과차로 힘들었던 하루를 정리하는 한단에게 전화가 왔다. 액정에 ‘사장님’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혔다.

입술을 앙다물며 휴대전화를 노려봤다. 혼란스러운 감정은 어느 정도 정리 수순을 밟아 가는 참이었다. 그 정리를 하는 데 기준이 되는 건 바로 한단 자신이기에 할 수 있었다.

‘마음 다치지 않게 자신을 지킬 것. 그러려면 상처받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파양 이후 가슴속에 깊이 새긴 그 말은 한단에게 많은 부분에서 도움을 줬다.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라도 그걸 기준으로 정리하면 쉽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부한단입니다.”

- 아파트 앞인데.

“나갈게요.”

짧게 답하곤 카디건을 걸치고 아파트 공동 현관문을 나와 규혁의 차로 다가갔다.

운전석 문이 열렸고 규혁이 차에서 내렸다. 낮에 입었던 차콜 그레이 슈트 안엔 버튼다운 와이셔츠가 넥타이 없이 단추 한 개 정도 풀린 상태였다.

“차라도 마실까?”

“아니요. 방금 마셨어요.”

규혁과 시선을 맞추지 않고 약간 내리깐 채 두 손을 카디건 주머니에 넣으며 답했다.

“서서 이야기하기엔 좀 길어. 괜찮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한단도 짐작이 갔다. 아마 규혁이 CT 로비에서 자신을 봤을 거란 생각에 한단이 시선을 들었다.

“어디서든 상관없어요. 차 안도 괜찮고.”

“카페 갈까? 그때 갔던 그곳.”

말없이 서 있는 한단을 보며 규혁이 차 문을 열었다. 조심스럽게 한단이 걸어가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갔다. 잠시 후, 차는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 카페로 향했다.

초록색 티백 밖으로 진한 물이 잉크처럼 퍼져 나갔다. 분명 핀란드에선 이렇지 않았는데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어색한 기운이 눅눅하니 올라왔다.

“오늘 CT에 왔었어?”

“네.”

“알았다면, 나도 참석했을 텐데.”

“바쁘시잖아요. 그것 말고도.”

샐림 쓰리 회의에 본인도 참석했을 거란 규혁의 말에 한단이 작게 답했다.

“변명, 해도 될까?”

차를 마시는 한단을 향해 규혁이 낮은 음성으로 말을 내놓았다.

“오해했을 거라고 봐. 충분히. 하지만 차수진하고는 끝났어. 이미 2년 전에. 아무 사이도 아니고, 아무 감정 없어.”

수진이 했던 돌발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 차분하게 전했다. 너무 침착한 그가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헤어졌다면서 옛 약혼녀와 팔짱 낀 걸 침착하게 말할 수 있다니?’

차라리 당황스럽고 곤란한 표정으로 횡설수설 이야기했더라면 조금은 위안을 얻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마음을 다치지 않으려면, 상처받지 않으려면 그 반대로 하면 된다. 상처받기 전에, 다치기 전에 내가 먼저 상대를 쓰러뜨리면 된다고.

“혼란스러웠던 것을 정리할 수 있었어요. 다행히도.”

반 정도 비워진 한단의 찻잔이 테이블 위로 내려갔다.

한 모금도 줄어들지 않은 규혁의 찻잔은 어느새 진한 녹색으로 변해 있었다.

“사장님께 말하지 못한 게 있어요.”

“응?”

“그때요. 그 야간열차 안에서.”

핀란드 로바니에미의 야간열차를 말하는 한단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보고 싶다고, 변함없다는 문자를 봤어요.”

소리 나지 않게 한숨을 쉬는 규혁의 가슴이 슬쩍 들렸다 내려앉았다. 한단의 시선이 규혁의 눈동자를 향했다. 의외로 고요하고 신중한 얼굴엔 미세한 감정의 변화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체 저 남자의 얼굴엔 신경 세포가 있을까? 화를 내고 감정을 폭발시켜 뺨의 근육을 일그러뜨릴 순 없을까? 규혁을 향한 못된 오기가 그때 생겼다.

“그리고 낮에 사장님과 차수진 전무님을 봤을 때, 결정했어요.”

결정이라는 단어에 불길함이 들러붙었음을 규혁이 직감했다.

“그 문자도 차수진 전무님이 보낸 거죠?”

“괴팍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야. 좋게 말하면 짓궂고 나쁘게 말하면 제멋대로인.”

그래, 이규혁이란 사람은 그렇지. 함께 맞장구치며 욕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객관적으로 말하는. 차라리 차수진을 나쁘게 말해 줬다면 좀 나았으려나. 한단의 마음 한구석이 젖은 빵 조각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부한단. 주위 말고 나만 보면 안 될까?”

“어떻게요? 사장님하고 저 두 사람만 사는 게 아니잖아요. 여긴 오울루나 산타 마을이 아니에요. 우리를 아는 유타페가 있는 한국이라고요.”

“그게 무슨 상관인데? 남들 눈치 보며 사랑해? 남들 생각하며 연애해?”

물론 아니다. 아닌 건 안다. 하지만 이미 차수진 한 명으로도 한단의 신경은 유난히 곤두섰다. 아무리 의식적으로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도 마음은 감정적으로 움직였다.

감당할 수 있는 범위만 생각하며, 실점 없이 직접 통제하고 파악할 수 있는 삶을 살았던 한단에게 이규혁과 차수진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밖이다.

“사장님께서 알고 계셔야 할 것이 있어요. 함께 잤다고 고백에 답한 건 아니에요.”

카페에 온 이후 처음으로 규혁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변해 갔다.

“발가벗고 섹스했다고 해서 연인이 됐다는 건 아니라고요.”

“그럼, 왜 나랑 잤지?”

음성엔 화가 없다. 그렇다고 건조하지도 않았다. 이유를 물어보는 것뿐 무례하게 비난하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냥, 자고 싶었어요. 섹스가 어떤지 궁금해서.”

“내가 아는 부한단은 그렇지 않아.”

“사장님이 날 다 알아요? 날 얼마나 안다고!”

“그만.”

짧게 말한 규혁의 눈빛에 실망이라는 감정은 없었다. 한단을 향한 안타까움만이 잠시 새어 나왔을 뿐이다.

궁금하다고, 호기심이 생긴다고 앞뒤 생각 없이 무턱대고 행동하진 않았다. 그건 자신이 지켜본 부한단의 가장 큰 장점이라는 걸 규혁도 알고 있다.

“이런 오해 생길까 봐, 그래서 왔어. 한 번 더 말하지만, 난 지난 과거에 미련 없어.”

“…….”

“고백에 답변 주지 않았으니, 기다릴게. 내 고백은 변하지 않았어.”

미지근하게 식어 버린 찻잔을 들어 규혁이 마셨다.

남자의 짙은 속눈썹이 가만히 내려앉았다.

한단을 향했던 시선은 말이 끝난 것과 동시에 거둬졌다.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내려간 눈썹이 살짝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멈췄다.

“내 말은 이게 다야.”

눈꺼풀이 올라갔고, 가지런한 눈썹 밑 신중함이 들어찬 눈동자만이 보였다.

상대가 무례한 결례를 한다손 치더라도 맞대어 화내거나 싸우지 않았다.

그건 일을 더 악화시키는 지름길이라는 걸 규혁도 알고 있으니까.

다만, 이 상황이 예전의 수진을 떠오르게 했다.

상대를 배려하기보단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일방적으로 애정을 갈구했던 수진과 자신이 어쩜 같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피곤해요. 집에 가고 싶어요.”

깊고 조용한 눈동자로 감정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는 규혁에게서 한단이 시선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오히려 흥분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고모 부용희의 천박함을 증오하면서 자신 역시 천박함을 입에 담았다.

핀란드에서 나눈 사랑을 섹스라는 단어로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최악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대체 저 남자에게서 뭘 꺼내고 싶었을까. 감춰진 얼굴? 부드러움 뒤에 있는 사악한 분노?

이규혁 또한 다른 수컷들과 같다고, 당신 역시 한 꺼풀 벗겨 놓으면 나와 다르지 않을 거라고. 그렇다면 최소한 자신이 느끼는 감정적 거리감을 좁힐 순 있지 않을까 하고.

누구에게나 있는 경박함과 상스러움이 이규혁이란 남자에게 어떻게 발현될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하지만 조용한 동작으로 차를 마시는 남자를 보며 완벽한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그런 모습이 과연 있기나 할까,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고요했기 때문이다.

한단이 먼저 일어났고, 뒤이어 규혁이 따라 일어나 카페를 나갔다.

아파트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한단을 따라 규혁도 운전석에서 내렸다.

“기다릴게, 얼마든지. 잘 자.”

화가 풀릴 때까지 기다린다는 건지, 오해가 풀릴 때까지 기다린다는 건지, 아니면 고백의 답변을 기다린다는 건지. 기다리는 목적은 불분명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규혁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파트 공동 현관으로 멀어지는 한단을 보며 규혁은 계속 답을 찾아 헤맸다.

상대에게 사랑을 얻으려는 마음은 수진과 자신이 같을 수 있으나, 결정적으로 엇갈리는 것이 있다고.

기다림이 그 차이였다.

수진에게 기다림은 초조함과 조급함, 불안함과 동의어였다.

끊임없이 확인받아야 했고, 확인해야 했고,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지치지 않고 몰아세웠다.

그러나 규혁에게 기다림은 배려와도 같았다.

이해해 줄 때까지, 받아 줄 때까지 그저 곁에서 지켜볼 뿐이라고. 그녀가 다가와 기댈 때까지 말이다.

* * *

‘대치 국면’ 또는 ‘교착 상태’라는 말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한단이 생각했다.

규혁과 한단의 사이는 사장과 직원 사이에서 진전된 것이 없었다. 그 두 사람에게 핀란드에서의 사랑은 이제 잊힌 기억의 한 조각도 못 됐다.

두 사람 사이가 진전되지 못했던 건 한단의 의지가 규혁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규혁은 언제라도 손을 잡아 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한단의 손은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CT 설민혁으로부터 총 3종의 듀티 펄스 조건을 전달받은 한단이 인가전류별 시간을 검토하는데 한영이 다가왔다.

“부 차장, 지금 시간 돼요?”

“네, 됩니다.”

“좋아. 그럼 5분 후에 사장님하고 미팅하려고 하는데 참석 가능해요?”

“사장님요?”

“응, 칸 프로젝트 때문에 오슬로 진행 이력과 특허 관련해서 참고 좀 해야 해서.”

“알겠습니다. 필요한 자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가지고 들어갈게요.”

“오케이. 땡큐.”

한 손을 들어 고맙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한영을 본 후, 고개 돌려 사장실을 쳐다봤다. 자리에 없는지 어두컴컴한 유리창이 보였다.

한단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나왔다. 전화기를 들어 입력된 버튼을 누르자 상대방이 받았는지 통화가 시작됐다.

“안녕하세요. 유타페 부한단입니다.”

- 안녕하세요. 백선주입니다.

“설민혁 책임 있습니까?”

- 잠시 자릴 비워서요. 전할 말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듀티 프리 조건은 잘 전달받았습니다. 그런데 생산성을 고려한 타임 조건이 애매해서요.”

- 아, 잠시만요.

한 손으로 송화기를 막고 설민혁을 부르는 백선주의 음성이 들렸다.

- 네, 부 차장님. 설민혁입니다. 잠시 윤 본부장님께 불려 가서요.

“듀티 프리 조건 중 타임 조건 때문에요.”

-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불려 갔어요. 혹시 내일이라도 CT 방문 가능합니까?

“네, 가능합니다. 언제 갈까요?”

태블릿을 켜고 업무 일정 열람표를 터치한 한단이 태블릿 펜으로 시간과 장소를 입력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뵐게요.”

전화를 끊자 한영이 사장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조금 전까지 어두웠던 사장실이 환했고 방금 왔는지 슈트 재킷을 벗는 규혁의 실루엣이 보였다.

규혁과 한영이 비스듬한 위치에 있고, 한단은 규혁과 마주한 위치에 앉았다.

“칸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조명용이라 파장이 다릅니다. 생산성을 고려해 12인치나 그 이상인 12.5 또는 13인치 가능 대용량 MOCVD 개발을 희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영이 칸 프로젝트 미팅 회의록을 태블릿 화면으로 보여 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시간과 경비, 그리고 일정상 가장 가능성 있는 건 12인치예요. 오슬로 프로젝트도 성공했으니까요. 문젠 특허인데, 신 변호사는 파장대와 시장이 서로 분리된다면 오슬로에서 특별히 반대하진 않을 거라 합니다.”

미색이 약간 들어간 클래식한 와이셔츠에 아주 가는 줄무늬 넥타이를 매고, 소매는 두 번 접어 팔꿈치를 가린 채 회의록에 시선을 둔 규혁이 입을 열었다.

“부 차장은 오슬로 특허와 적용 시장에 대해 조백웅 수석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차주 중으로 화상 미팅 잡도록 해요.”

“네. 언제로 할까요?”

“일정은 은영 씨에게 확인해서 잡아요.”

“알겠습니다.”

“최 부장은 칸 프로젝트 MOCVD에 대해선 차주까지 1차 회신 해 준다고 말하고, 그 외 프로젝트는 어때?”

“생산 계측 장비 프로젝트는 기존 샐림 원에서 변형한 것으로 할 겁니다. 도면과 스펙은 칸에 승인받았고, 시제품이 다음 달 안으로 제작 들어갑니다.”

“좋아.”

규혁의 입에서 나온 ‘좋아’는 더 이상 이슈가 없다는 뜻으로, 회의를 마무리해도 좋다는 의미이다. 한영과 한단이 짧게 서로 쳐다보며 동시에 일어났다.

“부 차장은 잠시 남아요. 샐림 쓰리 건으로 할 말이 있으니.”

규혁이 태블릿을 한영에게 건네며 사장실에 들어온 한단과 처음으로 눈을 맞췄다.

일어섰던 한단이 다시 의자에 앉았고, 한영은 그대로 사장실 밖으로 나갔다.

“듀티 조건을 입수했다고?”

“네, 오늘 전달받았습니다. 총 세 가지 조건인데, 타임 설정이 애매해 내일 미팅할 예정입니다.”

“내일 언제?”

“오전 10시. 대회의실입니다.”

“같이 가.”

같이 가자는 말에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안간힘을 썼던 한단의 감정이 흙벽 무너지듯 슬금슬금 내려앉았다.

“실무 개발 미팅입니다. 굳이 사장님까지.”

“그래야 얼굴 볼 수 있잖아.”

사장 이규혁이 아닌 남자 이규혁의 표정과 말투, 눈빛으로 한단을 향했다. 단지 그뿐인데 한단의 심장에 뜨겁게 피가 돌았다.

그날 이후, 그러니까 카페에서 대화한 이후 규혁은 한단에게 꽤 오랫동안 시간을 줬다. 그는 말했던 대로 기다렸다. 끈질기게 꾸준히 한단을 기다렸다.

가끔 그 기다림이 목까지 차오르면 규혁은 심장이 조여 왔다. 너무 조여 와 숨 쉬기조차 어려워 지금처럼 말로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다.

“내일 아침 9시에 출발하는 걸로.”

“말했잖아요. 지칠 거라고.”

“지치기 싫어. 싫어서 그래. 그러니까 얼굴이라도 보여 줘.”

“……말씀 끝났으면 그만 나가 보겠습니다.”

차마 눈을 마주치기가 겁나 한단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마음을 다치지 않으려 애쓰는데 오히려 마음은 만신창이처럼 다친 듯 홧홧했다.

깊게 심호흡을 하며 탕비실로 뛰어가 숨어 버렸다.

퇴근을 앞두고 한단이 은영과 이야기했다. 다음 주 규혁의 스케줄을 확인해 오슬로 화상 미팅을 잡기 위해서였다.

“내일요? 안 될걸요.”

은영이 모니터를 보며 액셀로 정리된 ‘사장님 주요 일정 및 일별 스케줄’ 파일을 펼쳤다.

“내일 오전 9시부터 회의가 있어요. 9시에 유니언사 신규 레이저 광계측 기술 PT가 있고, 점심엔 기술원 관련 신 변호사님과 식사 및 미팅, 오후 3시부터 팔콘사 한국 지사장님과 미팅하고 저녁 식사까지. 그런데 내일 CT에 가신다고요?”

“응.”

“에이, 설마. 이번 주까지 돌발적인 미팅 참석 어려워요. 내일모레는 제조 현장 가시는 날이라 종일 사무실에 없으세요.”

계측 장비와 MOCVD를 만드는 업체는 유타페가 별도 지정한 OEM 회사였다. 지방에 있지만 한 달에 한두 번 규혁이 직접 방문해 현장을 점검했다.

“수요일엔 가능할지 몰라요. CT 차강우 수석님하고 식사 약속이 있으니까요.”

마우스 화살표가 화면 이곳저곳을 움직였다. 규혁의 스케줄은 유명 아이돌급 살인 스케줄이라고 할 만큼 꽉 차 있었다.

“알았어. 은영 씨가 내일 스케줄 사장님께 한 번 더 주지해 줘.”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숫자보다 더 정확하신 분이잖아요, 사장님은.”

“그래도, 혹시 잊어버릴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내일 CT 간다고 했지, 라는 말을 눈빛으로 대신 전했다. 은영이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한구석이 슬쩍 놓이면서도 그만큼의 아쉬움이 저도 모르게 생겼다. 토트백을 어깨에 메고 은영과 함께 퇴근하면서 말했다.

“지하철역까지 바래다줄게.”

“정말요? 고마워요, 차장님.”

은영이 애교스러운 음성으로 말하며 냉큼 한단에게 팔짱을 꼈다.

계절이 따뜻해짐에 따라 해는 점점 꼬리를 길게 내려놓았다. 붉은 노을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창밖으로 한단과 은영이 정답게 이야기하며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다정해 보였다.

똑. 똑.

“들어와.”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응.”

한단의 차가 주차장을 나서 도로로 멀어져 갔다. 규혁이 뒤돌아 한영을 보며 말했다.

“내일 유니언사 회의 말이야.”

“네. 레이저 광계측 기술 PT로 알고 있습니다.”

“나 대신 최 부장이 가야겠어.”

“네? 제가요?”

“오전 9시로 잡았는데, 혹시 스케줄 있어?”

“오전엔 없습니다. 오후에 칸 관련 실무 화상 미팅만 있고요.”

“좋아. 그럼 최 부장이 가.”

“그래도 될까요? 저쪽에선 사장님을 원할 텐데요.”

“최 부장도 업무 범위를 조금씩 넓혀. 언제까지 나만 얼굴마담 역할을 할 순 없잖아. 회사도 커 가는데.”

“정말, 가도 될까요?”

약간 얼떨떨한 눈빛으로 되묻는데 규혁이 적당한 미소를 하며 의자에 앉았다.

“돼. 그리고 유니언사 레이저 광계측 프로젝트는 이찬웅에게 지정해. 기술원 이슈로 프로젝트 홀딩 됐으니 당분간 한가할 거야.”

“알겠습니다.”

한영이 묵례하자 규혁이 나가도 괜찮다는 손짓을 했다. 시선은 노트북에 있지만 생각은 한단의 뒷모습에 머물렀다.

“지칠 거예요.”

가늘게 떨리던 목소리가 귀에 겉돌았다.

“사랑이, 어떻게 지쳐……. 부한단.”

처음엔 관심이었다. 늘 조심하며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사는 그녀를 호기심으로 눈여겨본 것뿐인데, 관심은 규혁에게 씨앗을 뿌렸다.

따뜻한 침대에서 그녀를 안고 숨결 이는 곳곳에 키스하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얼마나 곱씹고 뱉었는지 모른다.

발가벗은 육체를 보고 사랑을 나눴다고 해서 그녀와 가까워졌다고 착각한 건 어쩜 이규혁 자신이란 생각이 들었다.

* * *

데스크에 있던 은영이 눈을 크게 뜨며 한단과 함께 나가는 규혁을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은영 씨, 오늘 유니언사 미팅은 최한영 부장이 대신 가요. 대신 오후 일정은 그대로이니 그렇게 알아요.”

“네, 알겠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규혁의 차로 이동하기로 했다. 10시 미팅이니 시간은 충분했고, 출근 시간 이후라 도로 흐름도 원활했다.

서로 대화 없이 정면으로 시선을 두었다. 차 안의 공기가 삭막하게 건조해져 갔다. 이대로 가다간 서로의 호흡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적막 속에 빠질 것 같았다.

핸들을 잡은 규혁의 한 손이 센터페시아로 가더니 오디오 버튼을 터치했다.

셀틱 풍으로 편집된 OST가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삭막한 공기만 맴돌던 차 안에 촉촉한 물기처럼 음악이 떠다녔다.

그런데 CT 건물을 그대로 지나친 규혁이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 앞에 차를 세웠다.

“아침에 커피를 못 마셔서.”

“제가 사 올까요?”

“아니.”

짧게 답한 규혁은 그러나 바로 나가지 않고 물끄러미 정면에 있는 카페 창을 보며 말했다.

“실은, 함께 마시고 싶어서.”

“전…… 아침에 마셨어요.”

뭐든 거부부터 하고 보는 한단이 답답했지만, 그렇다고 화를 내는 건 싫었다. 정면을 향했던 규혁이 시선을 틀었다.

“커피 말고 다른 거 마시면 안 돼? 나와 마주하는 것도 안 돼?”

아랫입술을 작게 깨물며 초록빛의 원형 카페 로고를 유심히 뜯어보던 한단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오전 근무 시작 시각이어서 그런지 카페는 한가했다. 규혁과 한단 앞으로 커피와 차가 김을 쏟으며 나란히 마주했다.

규혁의 시선이 7월 한여름 태양처럼 뜨겁게 정수리를 쏘는 것 같아 얼굴이 홧홧해져 갔다.

한단은 잔에만 눈동자를 굳힌 채 조금씩 뜨거운 차를 식혀 마셨다.

“아직도 혼란스러워?”

“…….”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 주면 해결할 수 있어?”

“사장님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죠.”

“부한단.”

“사장님. 제 문제예요.”

“뭐?”

“제 문제라고요. 제 마음이 도저히 안 돼요.”

“물어봐도 돼? 왜 안 되는지.”

“불편해요.”

“내가?”

“네.”

되돌아왔다. 불편함이라는 말은 사랑을 고백했을 때 한단이 내뱉은 말이었다.

“사장님이 불편해요.”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 모든 것이 처음으로 되돌아간 상황이 규혁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불편한 이유가 이번엔 뭐야? 또 사장이야? 그렇다면 내가 유타페를 버리면 돼?”

생각지 못한 규혁의 물음에 한단의 눈이 커졌다.

“다 불편해요. 사장님도, CT도.”

차수진을 CT라는 말로 바꿔 말했다. 통제 범위를 벗어난 모든 것이 힘들고 불편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것도 불편해요.”

커진 눈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굳어진 표정이 고집스럽게 보였다.

“이것?”

“부한단 차장과 여자 부한단을 마음대로 부르는 것도요.”

지금은 업무차 CT에 가는 것이므로 부한단 차장으로 자신을 봐야 하는데 카페에서 그렇지 않은 태도를 꼬집어 말했다.

규혁이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는 듯 어깨가 슬쩍 올라갔다 내려왔다.

“기회조차 주지 않잖아. 이젠 얼굴조차 보지 않으려고 하니까.”

“거봐요. 지치잖아요.”

“부한단에겐 안 지쳐. 그 고집스러움이 어려울 뿐이야.”

“이게 저예요. 고집불통에 갇혀 사는 사람이 저라고요.”

겹겹이 쌓인 울타리가 선명하게 규혁의 눈에 들어왔다. 그걸 열 수 있을 거라 장담했는데 비웃듯 견고하게 쌓여 올라갔다.

“이제 가야 해요. 5분 있으면 회의 시작합니다, 사장님.”

규혁을 바라보는 한단의 눈동자엔 아무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하다못해 예전 사장과 부하 직원 사이에 보였던 신뢰감 같은 인간적인 면도 없었다.

한단의 재촉 같은 말에 마지못해 규혁이 일어났다. 그리고 예정대로 CT 회의 참석을 위해 둘은 카페를 떠났다.

예상치 못한 규혁의 등장에 윤 본부장도 부랴부랴 참석해 회의 구색을 갖췄다. 듀티 프리 조건에 대한 논의와 함께 얼마 전 독일 포럼에서 정보를 얻은 조건까지 내놓는 규혁에게 윤 본부장이 말했다.

“역시, 이규혁 사장님이십니다. 한 가지를 말하면 두세 가지 대책을 준비해 오니까요.”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정보입니다.”

“고기 맛도 씹어 본 사람이 안다고, 기술도 알아야 정보가 됩니다. 모르면 그냥 그래프가 적힌 휴지 조각이지요.”

“유타페에서 걱정하신 듀티 프리 타임 설정은 오늘 주신 신뢰성 그래프를 기준으로 최적화해 전달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설민혁이 회의록에 기재하며 말했고, 예정된 시간에 회의는 끝났다.

“참, 이규혁 사장님은 잠시 남아 차 사장님 좀 뵀으면 하는데요.”

“오늘은 약속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바로 다른 미팅을 가야 해서요.”

“오호……. 어쩌죠? 사장님께서 이규혁 사장님 오시면 팔콘사 관련해 전달 사항이 있다고 꼭 모셔 오라고 하셨는데.”

“죄송합니다. 그 건에 대해선 제가 따로 차국환 사장님께 연락하겠습니다.”

규혁이 먼저 일어나자 한단이 뒤따라 일어났고, 윤 본부장과 설민혁, 백선주가 차례로 일어나 회의실 밖으로 나가려는데 문이 열리면서 차국환이 들어왔다.

“아직 회의 중인가?”

“아닙니다, 사장님. 그렇지 않아도 사장님께서 뵙고 싶어 하신다는 말을 막 전달한 참이었습니다.”

“그래? 그럼 때맞춰 잘 왔군.”

차국환이 규혁을 향해 웃으며 걸어갔다.

“바쁜 거 알아. 오래 잡지 않을게. 여기서 이야기함세. 잠시 모두 나가 주겠나?”

주변을 휘둘러보는 차국환에게 짧게 묵례한 윤 본부장이 회의실 밖으로 사람들을 몰아 나갔다.

로비로 나온 한단에게 설민혁이 물었다.

“차라도 하시면서 기다리실래요?”

“아니요. 괜찮아요. 알아서 기다릴 테니 올라가세요.”

“그럼 다음 회의 때 봬요.”

한단이 선주와 민혁에게 인사하곤 로비 안에 있는 카페테리아로 방향을 돌리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불러 세웠다.

“부한단 씨?”

소리의 끝엔 수진이 서 있었다. 마치 한단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규혁 씨 기다리죠? 방금 아버지가 회의실로 들어가는 걸 봤어요.”

또각또각, 킬힐이 바닥을 치며 튕기는 소리가 났다.

“괜찮다면, 기다리는 동안 차 한잔할래요?”

“죄송하지만, 전무님하고 할 이야기 없는데요.”

알 수 없는 경계심이 한단에게서 나왔다. 경계심은 질투와 함께 쌍을 이뤄 한단의 신경을 갉아 놨다.

“난 있는데. 그럼 내 이야기만 들어요. 어때요? 그건 괜찮죠?”

어쩜 이렇게 막무가내일 수 있을까? 상대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행동에 어이없어 할 때 수진이 덥석 팔을 잡았다.

“가요.”

그러고는 그대로 한단을 끌고 카페테리아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스커피 두 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한단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일방적 처사였다.

“보니까 CT에서 규혁 씨랑 같은 개발 2팀이었던데. CT 공채 면접도 규혁 씨가 했고. 맞죠?”

뭔가 대단한 것을 알아낸 것처럼 수진이 호들갑스럽게 말을 꺼냈다.

“CT에서 유타페로 이직도 1호이고. 그게 참 어려운데. 대기업에서 신생 업체로 이직하는 것이. 왜 이직했는지 물어봐도 돼요?”

“꼭 대답해 줘야 해요?”

“물론, 아니죠. 대한민국은 자유 나라니까. 해 주기 싫음 안 해도 돼요. 난 그냥 궁금해서요.”

입매를 빙글거리며 웃던 수진이 스트로를 입에 대고 아이스커피를 맛나게 마셨다.

“있잖아요. 난 규혁 씨에게 갚을 빚이 있어요.”

방금 보였던 빙글거림은 없고, 진지한 눈동자를 한 수진이 말을 이었다.

“그 사람 눈, 한쪽을 내가 망가뜨려 버렸거든요.”

언젠가 한영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대학원 랩실 후배가 벌인 실수를 대신 막아 주다 레이저에 눈이 쪼였다고. 그래서 실명에 가깝게 눈을 다쳤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까 그 후배가 바로 앞에 앉은 차수진이라는 말이다. 덤덤하게 수진을 마주했던 한단의 얼굴에 옅은 놀라움의 감정이 새겨졌다.

“나, 규혁 씨 사랑해요. 전에도 했는데…… 그땐 그걸 몰라봤던 거죠. 그래서 그 사람을 아주 힘들고 아프게 했거든요. 이번엔 만회하려고.”

호흡이 멈췄다. 심장이 빠직 소리를 내며 굳었다. 마음을 다치지 말자고 다짐했고,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규혁에게 먼저 모진 말을 던졌다.

그런데 정작 수진의 한마디에 한단은 마음을 다쳤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규혁 씨…… 좋아해요? 아니면, 규혁 씨가 부한단 씨 좋아해요?”

결국 본론은 저 말이었으리라 생각하며 한단은 간신히 힘을 짜내 무너지지 않으려 냉정함을 내세웠다.

수진은 이미 핀란드에서 규혁과 한단이 만난 걸 알았고, 규혁의 입으로 여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부한단을 떠올렸다.

사실이든 아니든 일단 신경에 거슬리는 것들은 모두 쳐 내야 한다고 생각할 때, CT 로비에 서 있는 한단이 보여 다짜고짜 다가선 것이다.

“기분, 상당히 나쁘네요. 무례하고요. 아무리 CT가 유타페의 큰 거래처이지만 남의 사생활을 함부로 말하시다니.”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난 당신이 CT 직원이었다는 말에 왠지 동질감이 느껴져서요. 그리고 규혁 씨를 당신도 아니까. 그래서 솔직하게 말한 거예요.”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말했잖아요. 규혁 씨와 다시 시작한다고. 나, 그 남자 포기 못 하거든요. 똑똑하고 능력 있고 또 예의 바르게 부드럽고. 아무리 살펴봐도 그런 사람이 없더라고요.”

한단이 일어났다.

“두 분이 다시 시작하든 다시 사랑하든 저와 상관없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로비 밖으로 나갔다. 도로로 빠르게 걸어가 택시를 잡아탔다.

여유 있던 수진의 눈꼬리가 다시금 사납게 올라갔다.

스트로를 입 안에 넣고 잘근잘근 씹으며 회의실 문을 막 열고 나오는 차국환과 규혁에게 시선을 보냈다.

차국환과 헤어진 규혁이 휴대전화를 들어 통화하는 모습을 수진이 멀리서 봤다. 살짝 당황한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누군가를 찾는 모습에 수진이 카페테리아에서 걸어 나갔다.

“방금 택시 타고 가던데. 부한단 씨.”

휴대전화를 귀에 댄 규혁이 수진을 보며 미간을 작게 구겼다.

“그렇게 티 내지 마. 속상해. 내 마음 알잖아.”

“뭐라고 했어?”

“그냥, 당신 좋아한다고. 다시 시작하겠다고.”

가벼운 미소를 보이며 수진이 맑은 음성으로 말했다.

“역시. 내가 촉은 좋다니까. 부한단 맞네. 당신 심장을 낚아챈 여자가.”

“차수진, 이건 경고야. 두 번 다시 그 사람 앞에 나타나지 마. 다른 거 다 버리고 하나만 가지라면 난 그 사람이야.”

미소는 굳어져 수진의 얼굴을 추하게 일그러뜨렸다. 바람 소리를 내며 규혁이 수진을 지나쳐 로비 밖으로 나갔다.

실수다. 또 실수다. 규혁이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부한단까지 그녀가 끌어들일 거란 생각은 못 했다.

차수진은 자신과 관련 있으니까 절대 부한단은 건드리지 않을 거라고.

너무 방심했다.

혹시나 상처 입고 아파하지 않을까 애가 탔다. 연결되지 않는 휴대전화를 차에 던지다시피 넣고 운전석에 털썩 앉았다.

잠시 후, 휴대전화가 울렸다. 액정을 보니 김학준이었다.

“응.”

- 사장님, 어디십니까?

“신 변호사 사무실로 가려고.”

- 팔콘사 건, 혹시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알아. 방금 CT 차국환 사장에게 들었어.”

- 그럼 어떻게?

“오후에 팔콘사 지사장하고 만나기로 했으니 좀 더 알아보지.”

- 알겠습니다.

깊게 한숨을 몰아쉰 규혁이 시동을 켜고 핸들을 돌려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유타페로 복귀한 한단은 사무실이 아닌 실험실로 향했다. 샐림 쓰리 듀티 조건을 테스트하기 위해 오실로스코프 장비 전원을 켜고 PCB 보드를 테이블 위로 올려놨다.

부품 하나하나에 접지 침을 대며 흐트러진 마음을 잡으려 노력했다. 더는 혼란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규혁의 고백을 거절할 명분이 확실히 있으니까. 이규혁과 차수진 사이에서 핑퐁처럼 흔들리긴 싫으니 이대로 끝내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생각할수록 앙다문 입술에 힘이 가해져 핏기없이 하얗게 변해 갔다.

점심도, 저녁도 굶고 실험실에 처박혀 테스트를 하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몰랐다.

고개 돌려 옆을 보니 은영이 점심때 가져다 놓은 샌드위치가 말라 있었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황당하고 어이없는 웃음만 흘러나왔다.

휴대전화를 살펴보니 규혁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와 꼭 샌드위치 먹으라는 은영의 문자만 있었다. 시간은 어느새 밤 9시가 되어 갔다.

테스트한 데이터를 태블릿에 옮기고 오실로스코프 장비의 전원을 꼈다.

테이블 위를 지저분하게 채운 반도체 부품과 PCB 보드를 하나하나 정리한 후, 실험실 불을 끄고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불이 훤하게 켜졌다는 건 아직 퇴근하지 않은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다. 무의식적으로 규혁이 있는 사장실로 눈이 옮겨 갔다.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이는 걸 봐서 아마도 회의 중일 거라 예상했다.

한단이 노트북을 펼치고 업무 보고를 업데이트한 후, 혹시 규혁과 마주치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퇴근하려 일어서는데 사장실 문이 열리며 김학준이 나왔다.

“어? 부 차장님 퇴근 전?”

“지금 막 가려고.”

의자를 넣고 테이블 밖으로 나가는 한단을 규혁이 불렀다.

“부한단 차장. 잠시 미팅합시다.”

퇴근하려던 학준도 규혁과 한단을 번갈아 보더니 왠지 자신이 빠져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고개 숙여 말했다.

“그럼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김 과장, 차 가져왔어요?”

한단이 얼른 물었다. 며칠 전 학준의 차가 출근길에 퍼져 공업사로 갔단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 수리 중입니다.”

“그럼 내가 바래다줄게요. 기다려요.”

규혁과의 미팅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학준을 볼모처럼 잡아 두려 했다.

“택시 타고 가. 처리해 줄 테니.”

학준은 보지 않고 한단만 보며 규혁이 나직하게 말했다.

순간 뜨악한 얼굴의 학준이 두 사람에게 따로따로 고개 숙여 다시 인사하곤 부리나케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CT로 가던 차 안의 적막감보다 훨씬 더 무겁고 두터운 침묵이 유타페 사무실에 들어찼다.

규혁의 시선은 한단에게 있고, 한단의 시선은 학준이 나간 사무실 문에 있었다.

외면하는 한단에게 규혁이 다가갔다.

“힘들어. 어렵고. 그런데 지치진 않으려고. 지쳐 포기하면 많이 후회될 것 같아서.”

담백한 목소리엔 규혁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은 감정이 올곧게 묻어났다.

“그러니까, 도망만 가지 마.”

가까이, 아주 가까이에서 귀에 속삭이듯 나직한 음성에 한단의 눈동자가 물기로 투명해져 갔다.

이미 상처는 받았고 마음은 다쳤다.

인정할 수밖에는 없는 상황이라는 걸 한단도 직감했다. 하지만 상처가 더 벌어지기 전에, 다친 마음이 손쓸 수 없이 망가지기 전에 추슬러야 한다.

“고백, 거절합니다.”

“부…… 한단.”

“미처 못 한 말이 있어요. 확실치 않아서 말하지 않았어요. 전에 유타페를 방문한 차수진 전무를 만났을 때, 그때도 대충 눈치챘어요. 사장님께 미련 남은 모습을. 그런데 오늘 확실히 알았어요.”

“당신에겐 내가 중요해. 남들이 뭐가 중요해? 수진이가 날 좋아하든 사랑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아니요! 몇 번을 말해요? 나와 사장님,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고요. 차수진 전무가 내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사장님을 사랑한대요. 포기 못 한대요.”

사무실 문을 향했던 한단의 시선이 곁에 선 규혁에게 갔다. 물기 밴 눈동자엔 화가 가득 찼다.

“지긋지긋해요. 불편해요! 전 힘들다고요! 사장님이, 차수진 전무가 내겐 너무 벅차다고요. 그냥 편하게 지내고 싶어요. 나 혼자서 지금까지 살아온 거처럼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않고 조용하게 하루하루 긴장 없이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고모 부용희의 정신적 학대, 사촌 현우의 삐뚤어진 욕망의 대상이었던 한단에겐 하루하루가 숨 막히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거길 벗어난 한단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입양과 파양,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 그 하나가 결격 사유처럼 한단을 물고 늘어졌다.

그래서 규혁의 면접 질문이 한단의 가슴에 오랫동안 보석처럼 남아 있었는지 모른다.

그 보석을 쫓아 유타페까지 오고 말았으니 말이다.

“이제, 그만했으면 해요.”

감긴 규혁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규혁을 지나쳐 사무실을 나가 엘리베이터 앞에 선 한단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흘렀다.

울지 않으려 입술을 앙다물고 눈에 힘을 주려 해도 눈물을 막을 순 없었다. 그저 저기 서 있는 이규혁에게만 보이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으로 빠르게 건물을 벗어났다.

어느새 시간이 새벽 2시를 알렸다. 어둠에 잠긴 건물에서 오직 유타페의 사장실만 환한 불빛을 만들었다.

눈이 피곤한 듯 안경을 벗은 규혁이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업무 테이블 위로 도면과 회로도, 그리고 반도체 부품 스펙 문서가 흩어져 있었다.

팔콘사와의 신규 프로젝트 관련 건으로 검토할 서류가 아직 절반 이상 남았는데 도저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팔콘사와는 부품 계측이 아닌 완성된 제품을 측정하는 장비 개발 프로젝트였다. 유타페에서 개발하는 대부분이 소자 부품 계측인 데 반해 팔콘사 프로젝트는 한 발 더 나가 완제품의 계측 장비를 개발하는 것이다.

유타페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베이스론 부족했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고 정보를 익혀야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CT가 특허를 운운했다.

그것도 유타페가 아니라 거래처인 팔콘사에 완제품 계측 장비 콘셉트를 두고 CT의 계측 장비와 유사하다고 말해 버린 것이다.

CT와 팔콘사는 이미 같은 업종의 경쟁 업체이기에 민감한 부분이 될 소지가 충분했다.

잡고 있던 만년필을 테이블 위로 던지다시피 내려놓곤 일어나 티 테이블로 가 물 한 잔을 가득 따라 마셨다.

목이 타는 갈증이 아닌 마음이 타는 갈증은 물로 해결이 안 되는 줄 알지만 딱히 방법이 없으니까. 다 마신 후 ‘후훅’ 하고 깊게 숨을 내쉬며 창밖에 펼쳐진 까만 먹물 같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기엔 규혁은 언제나 바빴다. 사춘기 반항을 배우기도 전에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어 가세가 어려웠고, 대학생의 풋풋함을 누리기엔 현실의 팍팍함이 먼저였다.

타고난 머리와 끈기는 다행히도 규혁에게 가능성을 열어 줬고, 대학원 땐 출원한 특허 로열티로 학비는 물론이고 쓰러진 아버지 대신 집안을 부양해야 했다.

그리고 그때, 차수진이 후배로 들어와 규혁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하며 가장 약하고 깨지기 쉬운 곳부터 정복해 나갔다.

규혁에게 있어 사랑이란, 수진의 가볍고 시끄러우며 요란하고 자극적인 감정의 변덕스러움이 다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수진을 알면 알수록 감정은 식어 갔고, 애정의 깊이는 얕아져만 갔다.

하지만 부한단은 달랐다.

알면 알수록 그녀를 이해했고, 이해는 감정을 흔들었으며, 감정은 사랑을 만들었다.

낯가리는 얼굴, 수줍음 가득한 미소, 붉어진 귓바퀴, 물기 머금은 눈동자가 규혁의 눈에 머물다 사라지지 않고 심장으로 내려갔다.

이른 아침, 새끼 고양이를 걱정하는 그녀에게서 감정의 순수함을 엿보고, 횡성에선 한단을 향한 감정이 단순한 호기심이나 관심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사랑은 그렇게 규혁 안에 감정이 살아 있음을 알려 줬다. 제어하기 힘든 무언가는 부한단을 향해 끝없이 뻗어 나갔다.

여유롭지 못하고 바쁜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오히려 유타페 사장으로서 규혁은 더 긴장했고 고된 업무를 소화해 냈다.

바쁜 육체와 다르게 시선은 언제나 부한단을 향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림자처럼 감정 없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그녀가 실은 얼마나 다채로운 감정을 가졌는지 핀란드에서 규혁은 볼 수 있었다.

불과 몇 걸음밖에 걷지 않았는데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인 것처럼 규혁에게 부한단은 첫사랑이 돼 버렸다.

* * *

아침부터 어수선했다. 분위기가 시끄럽진 않았지만 어색한 공기가 사무실을 떠돌았다.

항상 밝게 웃으며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는 은영조차 주변을 살피는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사장실에서 한영과 학준은 벌써 한 시간 넘게 규혁과 회의 중이었다. 한단이 약속된 CT 정기 미팅을 위해 외근을 나가려는데 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 차장님, 3번 내선요. CT라는데요.”

도로 의자에 앉은 한단이 수화기를 들었다.

“네, 부한단입니다.”

- 설민혁입니다. 오늘 회의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막 나가려는 참이었어요.”

- 그럼 다행이네요. 실은 회의를 연기해야 할 것 같아서요.

“연기요?”

한단이 약간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해 보였다. 그런데 수화기 저편 설민혁도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 샐림 쓰리 프로젝트 건에 대해 홀딩(Holding)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홀딩요?”

이번엔 놀란 목소리로 빠르게 되묻자 설민혁이 말했다.

- 저도 잘 모르겠어요. 윤 본부장님께서 일단 홀딩하라고 지시했고, 차후에 재개되면 다시 말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부 차장님도 모르셨어요?

“네, 전혀요.”

수화기를 든 한단이 시선을 틀어 사장실을 바라보았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는 눈치였다.

“알겠습니다, 설 책임님. 저도 무슨 일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사무실 안을 살펴보는데 이찬웅과 눈이 마주쳤다. 찬웅이 먼저 눈짓을 하며 탕비실을 턱으로 가리켰다.

한단이 일어나 탕비실로 갔고 곧 찬웅이 뒤따라갔다.

커피 머신에 캡슐을 넣으며 찬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CT가 팔콘사로 특허 시비를 걸었대요.”

“특허 시비?”

“네. 김 과장이 하는 말을 옆에서 들었는데, 팔콘사하곤 패널 측정 계측 프로젝트를 하기로 했대요. 콘셉트 도면하고 회로도가 오갔는데 CT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그게 CT에서 사용하는 장비와 동일하다고 하면서 특허까지 운운했다고 해요.”

“그래서요?”

“팔콘사가 발칵 뒤집혔지요. 문젠 팔콘사뿐 아니라.”

말을 이으려던 찬웅이 탕비실 문이 열리자 입을 닫았다.

“왜 저만 빼세요?”

찬웅과 한단을 번갈아 본 은영이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빼긴 누가. 우리 사무실의 가장 핵심 인원인데. 자, 커피 마셔.”

찬웅이 일부러 과하게 웃으며 은영에게 막 추출한 커피를 건넸다.

“무슨 말 했어요?”

“그냥, 이래저래……. 사무실 분위기가 좀 그래서.”

찬웅이 두 번째 잔을 꺼내 한단에게 건넸고, 은영은 커피를 마시며 푸념 섞인 음성을 냈다.

“오늘 사장님 스케줄 전부 취소됐어요. 이유도 모르겠고.”

마지막 잔을 꺼내 홀짝거리는 찬웅이 두 사람에게 앉으라고 손짓하며 물었다.

“오늘 하루만 취소야?”

“그것도 모르겠어요. 사장님께서 취소하라는 것도 있고, 고객 쪽에서 취소한 부분도 있고.”

“고객 쪽에서?”

은영이 찬웅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원래 칸하고 팔콘사 미팅, 그리고 CT하고는 식사 일정이 잡혀 있었는데 칸하고 팔콘사에서 취소 요청이 왔고, CT는 사장님께서 취소하셨어요.”

“역시 그랬구나.”

찬웅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 아침 유니온사에서 레이저 광계측 프로젝트 홀딩 요청 받았거든요.”

“차장님도?”

“그럼, 부 차장님도?”

“네. 오늘 CT에 가서 미팅하기로 했는데 홀딩 됐어요. 물론 프로젝트도 마찬가지고.”

셋 다 무거운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는데 탕비실 문이 열렸다. 세 사람 모두 한곳으로 시선을 모았다.

“은영 씨, 사장님이 찾아.”

한영이 안으로 들어와 커피 머신에 캡슐을 넣었다. 은영이 탕비실을 나갔고 한단과 찬웅은 그대로 앉아 한영의 행동만 보고 있었다. 혹여 무슨 말이라도 해 줄까 기다리는 눈치였다.

“당분간 모든 프로젝트가 홀딩 될 것 같아.”

드디어 한영의 입에서 말이 나왔고, 커피 잔을 들고 테이블로 가 두 사람을 마주하며 앉았다.

“팔콘사 계측 프로젝트가 CT 계측 장비를 베껴서 했다는 의혹을 받았어. 그것 때문에 팔콘사에서 사장님께 엄청난 클레임을 요청했고. 사장님은 아니라는 객관적인 증거를 만들려고 하는데.”

거기까지만 말한 후, 한영이 후후 불며 커피를 마셨다. 흥분된 감정으로 중구난방 말하지 않으려 일부러 커피를 마시며 감정을 정리했다.

“CT에서도 사장님을 압박하고 있고.”

“어떻게요?”

“CT가 도용당했다고 주장하는 장비가 실은 사장님께서 CT 본부장일 때 제작한 장비야. 콘셉트도 유사하고 계측 방식이나 프로그램도 동일하다면서 특허에 위반돼 소송을 걸겠다고.”

“사장님은 뭐라고 하세요?”

눈을 동그랗게 뜬 찬웅이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장비 외관 콘셉트가 유사하다는 건 인정하셔. 하지만 외관 디자인을 특허로 출원하진 않으셨으니까 문젠 없데. CT가 주장하는 계측 프로그램이 동일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거지. 계측 방식은 노멀(Normal)한 방법이니까 그게 특허에 위반된다고 말하는 건 억지라는 거야.”

“하지만 CT에서 특허를 운운했다면, 노멀한 방식도 등록했다는 거 아닌가요?”

“문젠 그 노멀한 방식이 특허의 이유가 아니라는 거지. CT에서 본부장으로 계실 때 장비를 개발하고 등록한 특허 내용은 계측하는 방식이 아니라 측정 포인트야.”

“그렇다면 팔콘사에 설명하면 되잖아요.”

찬웅도 답답한지 목소리를 높였다.

“이 차장. 사회라는 게 녹록하지 않아. 그렇게 쉬웠으면 사장님도 머리 싸매고 고민하지 않지. 회사라는 게 내실도 좋지만 겉모습도 좋아야 하거든.”

대화를 듣고만 있던 한단은 한영의 말을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작게 끄덕이기만 했다.

“유타페가 타사 특허를 도용했다는 소문 하나만으로도 신뢰도에 치명타야. 유타페를 폭탄으로 보는 거지. 그러니 진짜든 아니든 그들에겐 의미 없어. 빠르게 손절하는 게 유리할 수 있으니까.”

기술과 특허 부분에 치명타를 당한 유타페를 동정하거나 편들어 주는 거래처는 없을 것이다.

사회는 냉정하다. 특히 대기업 CT가 유타페의 기술을 특허로 문제 삼은 상황에 동종 업체인 팔콘사나 칸 일렉트로닉, 유니언사 등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유타페 장비를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불똥이 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장님은 지금 어떠세요?”

처음으로 한단이 입을 열었다. 잔을 내려놓은 한영이 팔짱을 껴 가슴께로 올리곤 말했다.

“골치 아프시겠지. CT에서 무언가 딜(Deal)이 온 것 같은데…… 말이 없으시네.”

한영이 천장으로 시선을 올리며 본인이 말한 딜에 관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단 역시 딜이란 말에 신경이 모였다. 대체 무슨 딜을 말하는 건지……. 한영에게 되묻고 싶은 걸 참으려 잔에 남은 커피를 모조리 마셨다.

더는 말이 없었고 커피를 다 마신 순서대로 탕비실을 나갔다.

늦은 오후가 됐지만 사무실 분위기는 밝아지지 않았다. 웃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탕비실만 왔다 갔다 할 뿐이다. 프로젝트가 모두 홀딩 됐기에 실험실에 가도 할 일이 없었다.

모든 것이 정지된 화면처럼 멈췄고 시간만 움직이는 영상처럼 흘렀다.

한단 역시 종료된 프로젝트 데이터를 꺼내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간간이 고개 돌려 사장실을 보지만 굳게 닫힌 문 너머 실루엣으로 보이는 규혁은 책상에 앉아만 있었다.

점심도, 저녁도 하지 않은 채 규혁은 사장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 되자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조용히 자리를 정리하고 나갔다. 한단도 토트백을 어깨에 메고 일어서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액정엔 ‘조백웅 수석’이 반짝였다.

오랜만이라 어색하면서도 반가운 마음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 혹시 퇴근하셨나 해서 휴대전화로 했습니다. 오슬로 조백웅입니다.

“괜찮아요. 정말 오랜만입니다, 수석님.”

- 통화 가능한가요?

“네.”

- 이규혁 사장님께 먼저 말씀드리기보단 담당자인 부 차장님께 말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요.

무슨 말을 하려고 뜸을 들이나 싶어 더럭 겁부터 났다. 혹시 팔콘사 이슈가 거기까지 번진 걸까.

- 울트라 바이올렛B, 그러니까 자외선 파장 영역을 바꾸려고요. 그러다 보니 12인치 MOCVD 수율이 또 내부적으로 이슈가 됐습니다.

종료된 오슬로 12인치 유브이 MOCVD 장비는 울트라 바이올렛A에 적합하게 설계된 장비였다. A보다 파장이 낮고 살균력이 강한 울트라 바이올렛B를 생산하려는 오슬로 내부 계획에 따라 유타페에서 개발한 장비를 적용한 결과 수율이 48~49% 수준으로 집계됐다는 이야기였다.

“조 수석님 말씀은 이해했지만, 12인치 MOCVD 장비는 울트라 바이올렛A에 적합한 설계이기에…….”

유타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수화기 저편 조백웅의 웃음소리가 먼저 났다.

- 하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탁 좀 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전에 백업 레시피 중 C33이 그나마 일관성 있는 수율을 보여서요. 그걸 검토하려고 하는데 혹시 횡성 방문 가능합니까?

대답이 아닌 시선이 먼저 규혁에게로 갔다.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규혁의 모습을 보며 한단이 말했다.

“지금은 퇴근 시간이라서요. 내일 사장님께 보고하고 알려 드릴게요.”

- 하하하. 감사합니다. 기다리겠습니다.

호탕한 웃음으로 조백웅이 통화를 마무리했다.

귀에 댔던 휴대전화를 내려 물끄러미 쳐다봤다. 샐림 쓰리가 홀딩 됐기에 할 일이 없다. 당장 횡성에 간다고 업무에 지장을 받을 것도 없다.

내일이 아니라 지금 말할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 사장실로 눈길을 보내는데 문이 열렸다.

실루엣으로만 보였던 규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초췌하고 피곤한 얼굴일 거라 짐작했는데 의외로 생각에 잠긴 듯한 부드러운 눈동자와 진중하면서 담담한 표정엔 흔들림 없는 신념 같은 것이 보였다.

“모두 퇴근?”

“네.”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규혁이 은영의 데스크로 걸어가 테이블 서랍을 열었다.

무얼 찾는 듯 왔다 갔다 하는 규혁의 손등이 보였다.

가만히 서 있는 한단의 시선을 느꼈는지 규혁이 말했다.

“두통약이 떨어져서. 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

“골치 아프시겠지요.”

한영의 말이 떠올랐다. 그가 지금 어떤 상황에 부닥쳤는지 두통약 하나로 설명은 충분했다.

‘찾아 드려요?’

마음속으로 묻지만 소리는 내지 못하고 괜히 입술만 물었다.

“일 없으면 퇴근해요, 부 차장.”

여전히 시선은 서랍 속에 머물며 규혁이 말했다.

“당분간 일이 없을 것 같으니.”

실망스럽거나 체념 섞인 말이 아닌 침착함과 단단한 신뢰감이 묻어났다. 위로하는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모른 척해야 할까? 갈등이 심해질수록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서랍을 닫은 규혁이 한단에게 시선을 보냈다.

“없네.”

짧은 말을 뱉곤 한단을 지나쳐 사장실로 들어갔다. 규혁이 곁을 스쳐 지날 땐 한단의 신경은 털을 바짝 곤두세운 고양이처럼 예민했다.

또다시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규혁에게 저절로 시선이 돌아갔다. 사무실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반대로 한단의 발은 사무실 가장 안쪽, 사장실로 향했다.

똑, 똑.

“네.”

규혁의 음성을 듣고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의자에 앉은 규혁은 눈을 감고 주먹을 그러쥐어 이마를 꾹꾹 눌렀다.

“왜?”

“오슬로 건 때문에요.”

“응?”

갑작스럽게 오슬로가 언급되자 규혁이 감았던 눈을 떠 한단을 바라보았다.

“조백웅 수석이 횡성 방문을 요청하셨습니다. 백업 레시피 검토를 도와 달라고 해서요.”

“단지 그것뿐?”

“네. 그것뿐입니다.”

규혁의 물음에 팔콘사 이슈가 포함된 것 같아 한단이 건조한 목소리로 아니라는 의미의 답을 했다.

“오슬로는 부 차장이 처리해요.”

이젠 한쪽 눈마저 아픈지 이마를 누르던 손이 아픈 눈으로 내려왔다.

“약…… 사다 드릴…….”

머뭇거리던 한단의 입술이 작게 움직이며 말하는데 업무 테이블 위 전화기에서 요란한 소리가 터졌다.

규혁이 수화기를 잡고 버튼을 눌렀다.

“네. 이규혁입니다. 아, 신 변호사님. 그렇지 않아도 전화 기다렸습니다. 제가 말한 팔콘사 프로젝트에 관해 몇 가지 요청사항, 확인하셨습니까? 네. 그리고 CT에서 제가 개발한 계측 장비 특허 번호는 메일로 보냈습니다.”

수화기의 위치가 어깨와 목 사이로 내려갔다. 눈을 누르던 손은 어느새 노트북 마우스 패드에 있었고, 눈의 통증을 완화하려 서랍 안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심상치 않은 통화 내용에 한단이 뒷걸음질로 사장실을 나왔다. 실루엣으로 보이는 규혁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노트북과 도면, 태블릿과 서류 사이를 종횡무진 다녔다.

테이블에 있던 토트백을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고개 숙여 구두 앞코에 시선을 맞췄다. 규혁을 볼 때마다, 그를 의식할 때마다 마음속 무언가가 차츰차츰 무너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끝난 사이인데도 한단의 감정은 바람에 휘날리는 연처럼 헤매고 있었다.

통화가 끝났을 땐 적막뿐인 사장실 공기만이 규혁의 주위를 맴돌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신 변호사에게 다시 전화하겠다고 말할걸. 그러면 한단을 조금이라도 붙잡고 있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과 미련보단 안타까움과 후회가 규혁을 힘들게 했다.

표정과 태도에서, 아니 온몸에서 부한단을 향한 감정들이 뚝뚝 떨어져 나왔다.

불편하다고 말하는 그녀가 조금 덜 불편했으면 하는 마음에 감정을 숨기려 어금니를 꽉 깨물었더니 이가 얼얼할 지경이다.

어지러이 흩어진 서류 더미를 한쪽으로 밀어 놓고 하늘색 설계 도면을 막 펼치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액정을 본 규혁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머니.”

- 바쁘니?

“조금요.”

- 한영이가 그러는데 요즘 집에 통 못 들어간다고.

“못 들어갈 정도는 아니고. 옷 갈아입으러 낮에 잠깐씩 들러요.”

낮은 목소리엔 규혁 특유의 부드러움과 편안함이 녹아 있어 어머니를 안심시키려 했다.

“아버지는요?”

- 늘 그렇지.

“무슨 일 있으세요?”

평소 휴대전화로 전화를 하지 않는 어머니에게 규혁이 물었다.

- 차 사장이 다녀갔어.

“차국환 사장 말입니까?”

- 그래. 널 설득해 달라고 하더구나.

“……걱정 마세요, 어머니. 네, 알겠습니다. 네.”

수화기를 귀에 댄 규혁이 눈을 감고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이번엔 피곤하고 지친 표정이 규혁의 얼굴에서 역력하게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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