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임피던스(impedance) (7/14)

7. 임피던스(impedance)

소파에 앉아 규혁을 기다리는 한단의 얼굴엔 비장함마저 서렸다. 며칠간 규혁에게 고백할 수 없는 현실적 이유를 적고, 또 적었다.

적으면서도 규혁이 궁금해할 만한 꼬투리가 있을까, 보고 또 보며 대본 연습하듯 읽어 나갔다.

기다리는 내내 두 손을 움켜잡았다 풀며 긴장감을 털어 내려 애썼다.

진동하며 휴대전화가 존재감을 알렸다. 덥석 잡아 액정을 확인하는 한단의 눈동자가 긴장과 떨림으로 커졌다. 심호흡한 후, 통화 버튼을 눌러 귀에 가져다 댔다.

“네, 사장님.”

- 5분 후에 내려와요.

“네.”

통화를 마치고 파우더 룸으로 가서 거울을 보며 옷과 머리와 얼굴을 매만졌다. 열 번도 더 봤던 얼굴과 옷과 머리였다.

“부한단, 용기 내. 할 수 있어. 거절할 수 있어.”

주문 외듯 거울 속 스스로에게 말하며 가방 속 립스틱을 꺼내 다시 덧발랐다.

어스름한 저녁, 아파트 공동 현관을 나서자 자동차가 보조 등을 깜빡이며 서 있었다. 규혁이 운전석에서 나오려 하자 한단이 빠르게 걸어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여기까지 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오고 싶어서. 어디로 갈까?”

오고 싶었다는 말이 한단의 귀와 심장을 예상치 못하게 콕콕 찔렀다. 저녁을 먹기엔 좀 이른 감이 있지만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 나가기 위해 한단이 먼저 물었다.

“저녁, 하실래요?”

한쪽 손으로 기어를 옮기며 규혁이 빙그레 웃었다.

“물어봐 줘서 고마운데.”

“예?”

“아침, 점심 전부 굶었거든.”

핸들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밥 먹으러 어디로 갈까?”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건 채 정면만 보며 말하는 규혁에게 한단이 속으로 말했다.

‘왜요? 왜 굶어요? 여태 뭐 하느라 굶었어요?’

전에는 몰랐던 사소한 것들이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 굶든 말든, 자든 말든, 회사에서 날밤을 새우든 말든 한단과 아무 상관 없던 것들이 신경을 긁어 댔다.

갓길에 잠시 차를 세운 규혁이 고개 돌려 한단을 보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있어?”

“몇 번 가 본 식당이 있어요. 알려 드릴게요.”

한단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고 규혁이 핸들을 돌려 차를 움직였다.

저녁 식사가 첫 끼라는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규혁은 느긋하게 저녁을 먹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휴대전화 액정을 펼쳐 도면이나 자료를 검토하지 않고 온전히 식사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옮긴 곳은 근처 카페였다. 오늘 커피를 많이 마셨다며 규혁은 차를 시켰다.

서로 마주 앉은 테이블 위로 하얀 김을 내보내는 찻잔이 놓였다.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시각, 규혁은 유타페에 있었다. 기술원에서 타 경쟁사로 넘긴 데이터를 회수함과 동시에 유타페의 기술을 도용한 타 경쟁사의 특허 출원을 어떻게 제재할지를 늦도록 고민했다.

물론 한영과 찬웅, 그리고 신 변호사까지 머리를 맞댔고 함께 고민했지만 규혁만큼이나 늦게까지 하진 못했다. 토요일 점심이 지나도록 사장실에서 기술원 문제뿐 아니라 칸이 요청해 한영이 제작한 MOCVD 프레젠테이션도 검토했고, 한단이 보고한 오슬로 프로젝트의 수율 데이터도 챙겼으며, 학준이 담당한 팔콘사의 프로젝트 개발 계획서도 점검했다.

그렇게 일하면서도 한단이 고백을 거절하는 이유를 미리 고민하고 생각했다. 머리 아프도록 말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사장님하곤 안 돼요.”

조심스럽지만 최대한 담담하게 한단이 말했다.

“고백하자마자 차는 건가? 그럼 말해 줘. 안 되는 이유.”

“유타페에서 일하는 게 힘들 것 같아서요. 전 일하고 싶어요. 다른 데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일에만 신경을 쓰고 싶어요. 사장님이 부담스러워요.”

“나와 연애하는 게 일하는 데 방해돼? 내가 혼동하게 할까 봐?”

“사장님하고 전, 어울리지 않아요.”

“무엇 때문에?”

“제가 싫습니다.”

“부담돼서? 어울리지 않아서?”

“둘 다요.”

규혁이 팔짱을 끼곤 상체를 뒤로 밀어 의자에 등을 기댔다. 화가 났다거나 짜증이 난 얼굴은 아니었다. 물론 목소리도 상당히 침착하고 진중했다. 거절한 미안함에 한단의 시선은 찻잔에 머물러 규혁을 보지 않았다.

“부한단. 나 봐.”

“…….”

“얼굴 좀 보자고. 한번 말했던 거 같은데. 대화를 할 때는 상대를 보는 거라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곤 힘들게 고개를 들었다. 규혁과 눈이 마주친 순간 심장이 버둥거렸다. 갈비뼈가 아플 만큼 심장이 발버둥 쳤다.

“왜 부담돼? 왜 싫어? 왜 안 어울려? 이유는 없고 결과만 말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냥…… 싫어요.”

“이규혁이 싫은 거야? 사장이라서 싫은 거야?”

“…….”

“난, 설레. 부한단 생각하면 설렌다고. 아침은 먹었는지, 고양이 밥은 줬는지, 퇴근은 잘했는지. 잠은 잘 잤는지. 몸은 안 아픈지…… 다 궁금하고 설렌다고.”

“…….”

“하나부터 열까지, 먼지처럼 사소한 거까지 신경 쓰여서 미칠 지경이야.”

듣고만 있던 한단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고, 귓바퀴가 붉게 변해 갔다.

‘먼지처럼 사소한’이라는 말에 자신의 과거, 그러니까 현우와 고모와 장례식이 포함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몸에 긴장감이 밀려왔고, 며칠을 연습하고 외웠던 거절의 말들이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했다.

“전 지금이 좋습니다. 사장님과 직원 사이가요.”

온몸으로 울타리의 빈틈을 막았다. 더 높고, 더 두꺼워진 울타리의 아주 작은 빈틈마저도.

“더 기다릴 수 있어.”

부드러웠다. 답답하다고 성마르게 조급해하지 않았다. 한단에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을 때도 격정적이기보단 담백한 목소리와 은은하고 깊이 있는 눈길만을 보여 줬다.

“지칠 거예요.”

“안 지쳐.”

한단이 규혁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봤다.

‘거짓말. 당신도 사랑에 실패했잖아요. 지쳐서 그런 게 아니에요?’

CT에서 봤던 차수진이 떠오르며 규혁이 그녀와 파혼한 사실을 기억해 냈다. 정말 좋아했다면, 사랑했다면 차수진과의 관계에서도 지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 같은 긴장감이 한단의 눈에 들어차 있었다. 반대로 규혁의 눈동자는 긴장감마저 빨아들이는 블랙홀을 연상시키는 검은색만을 띠었다.

“실망할 거예요.”

숨소리처럼 작은 소리로 한단이 입을 열었다. 자괴감이 들어간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과거의 부한단을 알게 된다면 실망스러움에 반감이 생겨 싫어할 수도 있으니 이쯤에서 그만두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래서 싫어요.”

규혁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팔짱을 풀어 두 손을 맞잡아 한단과 가까이 마주했다.

“CT에서, 그리고 유타페에서도 봤어. 뭘 얼마나 실망할 거라고 생각해?”

규혁은 한단이 말한 ‘실망’이 그녀의 과거를 뜻한다는 것을 안다. 그걸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준다는 것도.

“겉모습이에요.”

“그 겉모습만 사랑할게.”

“……?”

긴장감 가득했던 한단의 눈동자가 커졌고, 경직된 표정이 살짝 이완되어 갔다.

“나에게 보여 주고 싶은 면만 보여 줘. 보여 주기 싫은 건 보여 주지 마. 말하지 않아도 돼.”

규혁의 표정엔 부드러움과 단단함이 반반 들어 있었다. 그리고 한단에게 말하는 음성엔 깊은 신뢰감도 배어났다.

“한단 씨가 원하는 부분만 볼게. 싫어하는 건 보지도, 말하지도, 듣지도 않을게.”

심장이 싸해지면서 코끝이 찡해졌다. 남자가 주는 애틋한 감정에 몸 전체 신경이 마비될 것처럼 떨렸다.

“저,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요. 사장님.”

“나도 그래.”

“아니요. 아니에요. 사장님은…… 대단하시잖아요.”

“내가?”

“CT에서도 그랬고, 유타페도 사장님이 아니었다면 어림없었을 거예요.”

칭찬 같은 말에 규혁은 외려 자조 섞인 미소만 지었다. 그 모습에 혹여 말실수했을까 한단은 조심스러워졌다.

“남자로선 형편없어. 이규혁은.”

“왜, 그런 생각을…….”

“봐. 쩔쩔매잖아. 부한단에게 거절당할까 봐.”

“…….”

“좋아한다는 걸 알고 나서 끙끙대며 고민만 했어. 언제 고백할지 손가락으로 날짜만 세고. 말 못 하고 머리 터져라 생각만 했어. 이게 나야. 볼품없지.”

한단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있는 커피 잔으로 옮겨 갔다.

“주차장에서 거절당했을 때, 밤새 고민한 게 있어.”

잠시 말을 끊은 규혁의 뺨이 약간 위로 올라갔고 눈동자엔 감정이 넘쳐났다.

“이것저것 제안이라도 할까, 하고.”

“제안요?”

“응. 3개월만 연애하자고 해 볼까, 아니면 열 번만 데이트하자고 해 볼까. 그도 아니면 함께 여행 가자고 해 볼까……. 정말이지 살면서 가장 고민을 많이 한 며칠이었어.”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바쁘신데 제가 복잡하게 만들어서.”

“이런 건 복잡해도 돼. 오히려 간단하면 더 힘들어. 마음이.”

“네?”

“복잡하면, 그래도 내 생각은 하는구나, 진지하게 고민하는구나 싶으니까.”

이야기하는 동안 규혁의 눈길은 그녀를 벗어나지 않았다. 세상에 그녀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오직 부한단만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느끼해 해 줬다.

한단과 마주한 거리만큼의 공기 안엔 규혁의 감정들도 녹아 있어 그녀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규혁의 감정이 얼마나 들끓어 넘치고 있는지.

‘받아도 될까?’

팽배했던 긴장의 신경 줄 하나가 튕기면서 속삭였다. 규혁과의 관계에 대해서 처음으로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다.

‘내가 보여 주고 싶은 면만 보여 주면 된다고 했으니까. 어두운 면을 보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받아도 되지 않을까?’

항상 앞만 보고 조심히 살피면서 마음을 다치지 않으려 스스로를 죄어 나갔던 걸 한단도 인정했다. 그러다 보니 연애나 사랑이라는 것이 가장 조심해야 할 감정이었다는 것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사무치도록 외롭고 죽을 만큼 아플 땐 누군가에게 기대 위로받고도 싶었다. 그럴 땐 곁에 위로해 줄 사람이 있는 그들이 눈물 날 만큼 부러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고백을 받아들여도 이규혁이라는 남잔 어둡고 불편한 과거를 묻어 둔다고 했으니까 자신만 조심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규혁이란 남자에게 욕심을 내지 않는다면, 기대를 걸지 않는다면 마음 다칠 일은 없을 거라 가정해 본다.

“부담스러운 거 싫어요. 불편한 것도……. 그것만 아니라면……. 유타페의 부한단만을 본다면…… 생각해 볼게요.”

거절을 다짐했던 한단의 결심이 한 발짝 뒤로 후퇴했다.

“약속해. 어렵고, 힘들고, 불편하게 하지 않을게.”

부담스럽다고, 불편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 고백을 거부할 수 있는 여지를 한단에게 남겨 줬다.

“그리고 비밀로 했으면 해요……. 사장님하고 저.”

한단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파양당하고 고모부 손에 이끌려 집을 나온 후 한단이 깨달은 건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상처받지 않으려면 스스로를 단단하게 움켜쥐고 지켜야 한다고.

“지킬게.”

규혁이 답했고, 보일 듯 말 듯 한단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렇게 카페를 나온 두 사람은 차를 몰아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

다소 상기된 얼굴의 한단과 달리 규혁은 전체적으로 신중하고 침착해 보였다.

‘거절’을 ‘생각’으로 바꾼 한단에게 다소 경박하게 보일까 봐 기쁜 감정을 차분함으로 눌렀다.

“조심해서 가세요.”

“응.”

짧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몸을 돌렸던 한단이 다시 규혁에게 돌아서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눈빛을 보였다.

규혁이 살짝 눈을 크게 뜨며 ‘왜? 말해도 괜찮아’라고 표정으로 말했다.

“또, 회사로 들어가실 거예요?”

사무실에서 자주 밤샘한다는 한영의 말이 생각나 한단이 물었다.

바로 대답하지 않은 채 방금까지 유지했던 차분한 표정을 단번에 날리며 규혁이 웃었다. 소리만으로도 기분 좋은 웃음이라는 걸 한단도 알 수 있듯이.

“그거, 내 걱정 해 준 거지?”

상기된 얼굴이 아닌 아주 빨개진 얼굴로 한단이 민망함과 부끄러움 사이의 애매한 표정을 했다. 그러곤 변명처럼 대꾸했다.

“피곤하지 않으세요? 회사에서 자주 밤샘하신다고 하던데.”

규혁이 웃자 그의 눈가가 엷게 주름졌다.

“가지 말라고 하면, 오늘은 안 갈게.”

입가에도 웃음을 만들며 부드럽게 말했다. 한단은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혹시, 기술원 건으로 그러세요?”

“…….”

“잘 해결될 거예요. 필요하면 저도.”

“부한단.”

나직이 부르는 목소리가 상당히 다정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다정하게 이름을 불린 적이 있었을까, 생각할 정도로 은은하고 다정했다.

“이규혁으로 한단 씨를 만난 거야, 사장이 아니라. 여기에 난 이규혁으로 온 거야.”

타이르는 목소리도, 서운해하는 눈빛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자 하는 얼굴로 말했다.

“아, 네……. 그렇다면 죄송해요. 전 그냥.”

“죄송까지야. 오히려 난 좋은데.”

규혁의 얼굴 전체로 선한 미소가 번졌다. 한단이 무안해할까 봐 먼저 환한 웃음을 보였다.

“벌써부터 날 걱정해 주고.”

“……네.”

“알아서 요령껏 쉬니까 걱정 마.”

“……네.”

한단도 규혁과 눈 맞추며 아주 연하게 미소를 보였다.

“들어가.”

“먼저 가세요.”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아니요. 저 때문에 왔으니까 제가 배웅할게요.”

“발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래. 먼저 가는 게.”

배웅하겠다고 고집 부려도 규혁이 먼저 가지 않을 것 같아 한단이 돌아섰다. 피곤할 텐데 자신 때문에 더 피곤하게 만들면 안 된다고.

아파트 공동 현관을 지나 2층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 도착해 거실 불을 켜고 베란다로 나갔다. 아래를 보니 기다렸다는 듯 규혁이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규혁의 차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도로에 합류하며 멀어져 갔다. 한단은 오랫동안 베란다에 서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 * *

낯설지 않은 CT 로비에서 한단은 설민혁을 기다렸다. CT의 샐림 쓰리 프로젝트 개발과 관련하여 실무 미팅을 하기 위해서였다.

“죄송해요. 중간에 윤 본부장님 호출을 받아서요.”

뛰어왔는지 목에 걸린 사원증이 좌우로 흔들거렸다.

“괜찮아요.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

한단이 웃으며 대꾸하자 민혁도 미소 짓곤 회의실로 앞장서 걸었다. 회의실에 도착해 보니 또 한 명의 여직원이 앉아 둘을 맞이했다.

“백선주 사원이에요. 이번 공채 신입인데 제가 사수로 됐습니다.”

컴퓨터 전원을 켜고 스크린 화면을 펼치며 민혁이 설명했다. 백선주가 한단에게 인사하는데 상당히 긴장하고 경직된 표정이었다.

“긴장 푸세요.”

한단이 웃으며 작게 말해 주자 선주가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시작할까요?”

민혁의 말에 한단과 선주가 스크린 화면으로 시선을 틀었다.

“그럼 이번 샐림 쓰리의 듀티 전류 가동에 관한 메커니즘과 설비 계획에 대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한단이 태블릿을 열고 준비한 자료를 화면에 펼쳤다.

“우리 CT에서 요청하는 듀티는 측정 시간은 1분으로, 사이클은 듀티 25%로 했으면 합니다.”

듣고 있던 한단의 눈이 커지자 민혁도 짐짓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요? 문제가 있나요?”

“제가 잘못 듣지 않았다면, 1분에 듀티 25%가 맞죠?”

“네, 맞습니다.”

“샐림 쓰리는 생산 현장에서 사용할 계측 장비 맞습니까?”

“네. 그런데요?”

“생산성은 검토하지 않았나요?”

“예?”

“생산 적용 계측 장비의 측정 시간이 개당 1분이라면 생산성이 상당히 떨어집니다. 물론 정확성은 올라가겠지만요. 그 부분에 관해 제조 부서에선 아무런 이의가 없었나 봐요?”

생산성을 말하자 민혁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한 눈빛을 했다.

“아, 맞네요. 그 부분을…… 놓쳤어요. 정확성하고 신뢰도만 따지다 보니…….”

“설 책임님이 개발이다 보니 초점이 그쪽에 맞춰져서 그럴 수 있다고 봐요.”

한단이 빙그레 웃으며 위로 같은 말을 건넸다.

“어떻게 하죠? 좋은 방법 없을까요?”

민혁이 한단을 보며 슬쩍 푸념 섞인 목소리를 냈다.

“개인적으론 샐림 쓰리를 진행하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게 생산 장비를 설계하면서 제조 부서 인원이 빠진 거였어요. 다음 회의 때 제조 부서에 담당자를 지정해 달라는 게 어떨까요?”

“고민해 볼게요. 이번 프로젝트는 연구소 주관으로 하는 거라 솔직히 제조는 모르고 있거든요.”

“그렇군요.”

“네.”

회의는 진전되지 않았다. 한단의 말에 민혁은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윤 본부장에게 전화 좀 걸겠다고 나갔고, 회의실엔 선주만 있었다.

“저, 이거 드시고 하세요.”

선주가 작은 소리로 건넨 건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 두 개였다.

“어머, 고마워요. 초콜릿 좋아하나 봐요?”

“아니요.”

“그럼?”

“오늘이 밸런타인데이라서 준비했거든요.”

살짝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깔며 선주가 답했다.

“아, 밸런타인데이……. 그렇구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한단은 규혁을 생각했다.

생각해 본다고 했지, 연애한다고 답을 주진 않은 채 어정쩡한 대치 상태로 시간만 보냈다.

잠시 후, 회의실 문이 열리면서 민혁이 들어왔다.

“본부장님께 말씀드렸어요. 내부적으로 제조 부서와 먼저 협의하고 나서 샐림 쓰리 스펙을 다시 정해 주겠다고 하시네요.”

“그러면 더는 회의할 것이 없다고 보면 되겠습니까?”

“네.”

약간 홀가분한 듯한 민혁의 얼굴을 보며 한단이 태블릿과 초콜릿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벽면을 밝혔던 스크린 화면이 꺼지고, 모두가 일어나 회의실을 나가려는 찰나 또다시 문이 열렸다.

“여기 있었네요.”

설민혁이 긴장한 얼굴을 하며 예고 없이 들어온 차수진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유타페에서 회의하러 오셨다고 해서.”

회의실을 둘러보는 수진의 얼굴에 실망스러운 눈빛이 옅게 서렸다. 한단은 그녀가 규혁을 만나기 위해 왔다는 걸 눈빛을 보며 직감했다.

“오늘은 실무 미팅입니다, 전무님.”

“실무 미팅에 기술적인 부분도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유타페 사장님은 참석하지 않나 봐요?”

민혁의 말에 대꾸하면서 시선은 한단을 향해 틀었다.

“사장님은 본부장급 미팅에만 참석하십니다.”

“아, 본부장급.”

한단의 대답에 수진이 느릿하게 말을 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유타페로 가시죠?”

“네.”

씽긋 웃는 수진의 얼굴이 상당히 매력적이고 아름다웠다.

“그럼, 부탁 좀 들어줄래요?”

말과 함께 수진이 등 뒤로 감춘 것을 꺼내 건넸다. 딱 봐도 포장이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이거, 규혁 씨에게 전해 줬으면 해요.”

한단은 수진이 내민 선물을 받지 않고 보기만 했다. 수진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한단과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며칠 전부터 전화했는데 바쁘다고 하더라고요. 만나기 어렵다고 해서.”

“…….”

“어린애 같지만 그냥 지나치기도 뭐해서. 부탁해요.”

선물에 시선을 뒀던 한단이 고개를 들어 수진을 보며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딱히 기분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묘하게 신경질 같은 감정이 일어났다. 한단이 입으로만 짓는 가면 같은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곤 회의실을 나갔다.

유타페에 도착해 한단의 눈이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사장실이었다. 불이 꺼졌다는 것은 그가 없다는 뜻이다.

“은영 씨, 사장님 외근 중?”

“최 부장님하고 칸 일렉트로닉에 가셨어요. 오늘 프로젝트 첫 기술 미팅 하는 날이거든요.”

은영의 말을 귀로 들으며 눈은 업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선물을 주시했다. 수진이 ‘규혁 씨’라고 호칭하는 소리에 한단은 미간이 구겨질 뻔했다. 너무 애틋하고 다정하게 불러서 말이다. 진짜 연인인 것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은영 씨. 잠시 이리로 와 줄래?”

“왜요?”

발랄한 음성으로 다가온 은영에게 한단이 선물을 건넸다.

“이거 사장님 오시면 전해 줄래?”

“뭔데요?”

은영이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눈으로 덥석 잡은 선물을 이리저리 돌려 본다.

“CT의 차수진 전무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꼭 전해.”

한단이 가방을 서랍에 넣으며 말하는데 목소리가 딱딱했다.

“난 오슬로 건으로 실험실에 가 있을게.”

은영을 보지 않고 사무실을 가로질러 실험실로 향했다.

“뭐야? 꼭 화난 사람처럼.”

은영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한단이 건넨 선물 상자를 슬쩍슬쩍 흔들었다.

실험실에서 오슬로 프로젝트의 최종 마무리 단계인 유브이 MOCVD 레시피별 중복 재현 테스트를 했다. 오슬로에 제안했던 레시피뿐 아니라 백업으로 작성한 레시피의 안정성을 재검토하는 거였다.

장비에 붙어 있는 모니터를 보며 뻣뻣해진 목을 이리저리 기울였다. 실험에 집중하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사귄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야?’

그게 더 기분 나빴다. 질투하는 사람처럼 규혁이 신경 쓰이고, 차수진도 신경 쓰였다. 알게 모르게 불쾌한 감정도 솟아나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모니터 화면에 나오는 로우 데이터를 태블릿으로 옮긴 후, 분석을 위해 사무실로 향했다.

업무 테이블에 태블릿을 내려놓는데 붉은색 벨벳으로 포장된 초콜릿 한 개가 보였다. 뭐지? 순간 한단의 눈이 커지려고 할 때 은영이 쪼르르 다가왔다.

“아까 그 초콜릿요! CT 차수진 전무님.”

한단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쳐다만 보자 은영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사장님, 방금 오셨거든요. 저보고 직원들에게 나눠 주라고 하셨어요. 본인은 초콜릿 싫어한다고.”

은영의 말에 묘한 감정을 감추며 한단이 물었다.

“사장님, 초콜릿 싫어하신대?”

“분명 그랬어요. 드시지 않는다고. 근데요, 차장님.”

무언가 굉장히 중요한 것을 말하는 것처럼 은영이 속삭이듯 말했다.

“이 초콜릿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아세요?”

“뭔데?”

“브랜디. 술이요.”

“…….”

“그것도 아주 최고급이라고 했어요, 김학준 과장님이. 뭐라 그러더라……. 스페셜 에디션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엄청 비싼 술이래요.”

평소 고급 양주를 샘플로 모으는 것이 취미인 김학준을 한단이 힐끔 바라보곤 의자에 앉았다. 은영이 가 버리자 한단은 서랍 속 가방 안에서 손바닥만 한 초콜릿 상자를 꺼냈다. 그러곤 시선을 위로 올려 불 켜진 사장실을 쳐다봤다.

CT에서 나와 유타페로 오는 도중 한단이 산 초콜릿이었다. 어떤 걸 사야 할지 몰라 직원에게 물어보며 고르고 골랐다.

‘왜 샀을까? 주지도 못할 거면서.’

한숨과 함께 다시 가방에 넣으며 벨벳에 싸인 초콜릿도 서랍 안으로 던지듯 넣어 버렸다.

봄으로 넘어간 계절의 나른한 오후가 되자 ‘춘곤증’이라는 것이 사무실을 떠다녔다. 데스크에 앉은 은영도 졸음이 몰려오는지 감기려는 눈을 부라렸고, 브랜디가 든 초콜릿을 먹은 학준은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내 한단에게도 찾아왔는지 회로도를 보는 눈이 뻑뻑해지고 하품이 저절로 나오려 했다. 얼른 도리질하며 가방 안에 두었던 초콜릿을 꺼내 그중 한 개를 입 안에 넣고 오물거렸다. 두 번째 초콜릿을 집는데 누군가의 손이 쓰윽 나타나 초콜릿 하나를 가져갔다. 나른한 춘곤증이 확 깨지며 갑자기 나타난 손에 시선이 갔다.

“맛있게 먹네.”

규혁이 웃으며 초콜릿을 입 안으로 던져 넣었다.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나?

“CT에서 실무 미팅 했다고.”

“오늘 중으로 보고서 올리겠습니다.”

“그전에 이야기 먼저 합시다. 방금 윤 본이 연락했어.”

초콜릿을 하나 더 집어 입으로 가져가며 규혁이 사장실로 들어갔다. 한단이 태블릿을 들고 일어나 조심스럽게 은영과 학준에게 시선을 보냈다. 둘 다 졸음과 사투를 벌이느라 정신없었다. 한단은 테이블 위에 있는 초콜릿 상자도 마저 챙겨 사장실로 들어갔다.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맞춘 규혁이 말했다.

“거기 앉아요.”

의자를 찾는데 업무 테이블과 마주한 위치가 아닌 규혁과 사선으로 붙어 앉는 위치에 의자가 있었다. 살짝 난감한 눈빛을 하며 의자의 위치를 마주 보게 변경할까 하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이걸 좀 봐요. 듀티 사이클에 따른 생산성 시뮬레이션 한 데이터.”

규혁이 노트북 모니터를 90도로 돌렸을 때, 한단은 의자의 위치를 바꿀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모니터 화면을 보려면 그 위치에 앉아야 했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으며 무릎 위로 태블릿과 초콜릿 상자를 가지런히 올려놨다. 화면을 자세히 보려 몸을 살짝 기울이자 한단의 무릎과 규혁의 무릎이 맞닿았고, 한단의 어깨도 규혁의 팔뚝에 스치듯 기댔다. 규혁의 기다란 손가락이 모니터 화면을 가리켰다.

“듀티 전류와 사이클, 주파수에 따른 측정 시간을 시뮬레이션 한 겁니다. 윤 본이 생산성은 장비당 한 시간에 1만 개 측정으로 했으면 한다고.”

“그렇다면 장비 스펙을 설정하는 게 어렵진 않겠네요. 목표 생산성이 나왔으니까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문제는 정확성이야. 1만 개 측정에서 오류가 얼마나 발생하느냐, 그리고 오류를 어떻게 잡느냐가 관건이고.”

대답 대신 한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닿은 무릎에서 온기가 느껴질 때쯤 자신의 어깨가 규혁의 팔뚝에 기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반 정도 걷어 올린 셔츠 밖의 팔꿈치부터 손목까지 팽팽한 근육으로 잘 연결된 팔이 보였다. 한단은 저도 모르게 드는 성적(性的) 긴장감에 기울였던 몸을 세웠다.

“시뮬레이션 데이터 주시면 설계시 참조하겠습니다.”

“샐림 쓰리 진척도는?”

“메인 보드 회로도 설계가 이번 주 중에 들어갑니다.”

“듀티만 빼고?”

“네. 듀티를 제외한 전류, 전압, 저항과 광계측까지만 우선 설계합니다.”

규혁이 모니터 화면에 시선을 두고 검지와 엄지손가락으로 턱을 쥐며 작게 문질렀다. 화면 속 시뮬레이션을 보며 머릿속으로 계산이나 연산을 하고 있을 거라 한단이 추측했다. 더 이상 말이 없는 규혁을 보며 일어서야 할지 더 앉아 있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무릎 위에 있는 초콜릿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거 나 주려고 샀어?”

“예?”

시선을 옆으로 틀며 되묻자 규혁이 싱긋 웃었다. 눈가 양옆으로 근사한 주름이 만들어졌고, 올라간 입꼬리가 가늘게 선을 이뤘다.

“밸런타인데이라…… 서요.”

부끄럽고 민망해지기 싫어 거짓말할 수도 있었다.

‘아니요, 다른 사람에게 받았습니다’ 또는 ‘직원들 나눠 주려고요’라고.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규혁의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보다 솔직하자고 마음먹었다.

차수진에게 받은 초콜릿 때문에 언짢았던 건 사실이니까 말이다.

“내 거네.”

“초콜릿, 싫어한다고.”

“누가?”

규혁이 한단의 무릎 위에 있던 초콜릿 상자를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또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가 먹었다.

차수진에게 받은 초콜릿은 왜 안 먹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괜히 어색해질까 다른 말을 꺼냈다.

“맛, 괜찮아요? 카카오 함량이 60%라 초콜릿 맛이 좋다고 해서요.”

“부 차장은?”

“음……. 모르겠어요. 초콜릿을 자주 먹지 않아서 그런가.”

혼잣말처럼 한쪽 눈을 찡그리며 답하자 규혁이 작게 소리 내 웃었다. 그 모습에 이야기가 끝난 듯싶어 의자에서 엉덩이를 반쯤 들며 한단이 물었다.

“저…… 그만 나가도 될까요?”

“다 먹고 가.”

테이블에 있는 초콜릿을 보니 대여섯 개 정도 남아 있었다.

차수진의 초콜릿이 못내 궁금했지만, 맞물린 입술에 힘주며 참았다.

‘유타페의 부한단’으로 봐 달라고 해 놓고선 규혁의 과거를 궁금해하는 스스로가 모순적이라는 생각에 도로 의자에 앉아 초콜릿 하나를 집었다. 묻고 싶은 질문을 초콜릿과 함께 혀로 녹였다.

“참, 핀란드 출장을 갈 것 같아.”

“확정이에요?”

초콜릿을 입 안 한쪽 구석으로 몰아넣고 묻느라 한단의 한쪽 뺨이 볼록 나왔다. 그 모습이 귀엽고 예쁜지 규혁이 또 한 번 웃었다.

“응. 오슬로 본사 연구소에서도 12인치 유브이 장비 검토가 있을 거야. 횡성에선 조백웅 수석으로 결정됐는데, 유타페에서도 가야 할 것 같아서.”

“간다면, 사장님께서…….”

“칸하고 기술원 건 이슈 때문에 부 차장이 가면 어떨까 하는데.”

“제가요?”

“오슬로 담당이잖아.”

“하지만 브리믄 수석은 사장님을 원할 거예요.”

오만하고 거만한 브리믄 수석을 생각하자 몸서리가 쳐지는지 한단이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규혁이 한단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리며 말했다.

“괜찮아. 검증은 다 했잖아.”

규혁의 손길을 의식하자 한단의 어깨가 전기에 감전된 듯 찌르르했다. 온몸이 화로가 된 듯 뜨거워져 갔고, 호흡마저 심하게 뛰는 심장 때문에 조금씩 어그러졌다. 이런 변화를 규혁이 눈치챌까 조바심이 생겼고 초조함으로 손바닥에 땀이 배어날 즈음 규혁이 말했다.

“토요일, 시간 돼?”

“…….”

“초콜릿에 보답하고 싶은데.”

“……괜찮아요. 안 해도.”

“그럼 솔직하게 말할게.”

“…….”

“초콜릿은 핑계고. 부한단하고 밥 먹고 차 마시고 싶어서.”

“…….”

“그것도 아직?”

‘그것도 아직 안 되는 사이야, 우리?’라는 말을 규혁이 짧게 줄였다. 안타까움이 충분히 배어 있는 음성이 한단의 귀로 흘러들어 갔다.

매사에 이성적이던 평소의 모습과 달리 그녀를 향한 마음이 조절되지 않는 규혁이 보였다.

“초콜릿, 고마워.”

그녀가 마음 편하도록 규혁이 말꼬리를 돌렸다. 애써 미소를 보이며 나가 봐도 괜찮다고 덧붙여 말했다. 의자에서 일어난 한단이 곁눈으로 규혁을 바라보았다. 모니터를 보며 자판을 두드려 뭔가를 작성하는 규혁의 반듯한 어깨와 등이 듬직해 보였다.

‘한 번 정도 만나는 건 괜찮지 않을까.’

꽉 맞물린 어금니와 태블릿을 움켜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고백에 제대로 된 답을 주려면 남자 이규혁을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토요일, 언제요?”

모기만큼 작은 소리로 한단이 물었고, 그녀의 시선은 테이블 위 두세 개 정도 남은 초콜릿에 있었다. 의자 돌아가는 소리가 ‘휙’ 하고 날 정도로 규혁이 급하게 몸을 돌렸으나 대답은 한 박자 정도 텀을 두고 돌아왔다.

“원하는 시간, 아무 때나.”

“……전화할게요.”

한단은 자리로 가는 동안 두근거리는 심장을 들킬까 태블릿을 가슴께로 올렸다. 의자에 앉으며 소리 나지 않게 긴장 섞인 깊은숨을 밖으로 배출했다. 그러곤 손등을 뺨으로 가져가 화끈거리는 피부를 진정시키며 또다시 깊게 숨을 들이켰다.

* * *

여의도 윤중로가 사람들로 가득 찼다. 벚꽃이 피기엔 이른 날이었지만 따뜻한 날씨는 사람들을 밖으로 몰아냈다.

함께 밥 먹고 차 마시고 싶다는 규혁에게 한단은 문자로 약속 장소와 시간을 알려 줬다. 장소는 괜찮았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토요일 오전, 약속 시간을 늦춰도 괜찮겠느냐는 규혁의 연락에 한단은 알겠다고 선선히 답했다.

오후에 만나 늦은 점심을 먹고 커피는 테이크아웃으로 받아 천천히 걸으면서 마셨다.

“꽃 피면 참 예쁠 것 같아요.”

“그때 또 오지, 뭐.”

길가 양옆으로 늘어선 나무를 보며 한단이 말했고, 규혁이 답했다. 또 오자는 말에 한단은 상기된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며 눈동자를 아래로 내렸다. 규혁의 옥스퍼드화 앞코가 맵시 있는 슈트 바지 밖으로 규칙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생각보다 춥지 않아 좋아요.”

“그래도 조심해. 감기 걸리기 좋은 날이야.”

일상적이고 잔잔한 대화만이 오고 갔다. 해가 기울어지면서 아쉬움에 만든 노을이 장관을 이룰 때쯤 규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잠시만.”

한단에게 양해의 눈빛을 한 후 몸을 약간 돌려 휴대전화를 귀에 댔다. 규혁의 낮은 음성이 귀에 흐르다 멈추다 했다. 한단은 일부러 시선을 반대로 하며 노을 진 하늘과 이제 막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자동차 무리를 눈에 담았다.

“……아니요. 어렵습니다. 안 됩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네……. 네, 알고 있습니다……. 거짓을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한단의 시선이 규혁에게로 서서히 옮겨 갔다. 저 남자 입에서 나오는 낯선 말들이 호기심을 일으켰다. 자신이 아는 이규혁은 부정적이고 어려운 말들을 하지 않았다. 프로젝트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고 난이도 높은 수준의 메커니즘을 요구해도 안 된다, 어렵다, 힘들다, 못 한다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방법을 찾아보겠다, 해결안을 마련하겠다, 메커니즘을 분석하겠다와 같은 말로 신뢰감을 줬다.

그런데 지금 규혁의 입에선 단호함마저 보일 정도로 부정적인 말들이 쏟아졌다.

“통화, 오래 못 합니다. 그만 끊겠습니다.”

“저 때문이라면 더 통화해도 되는데요.”

휴대전화를 슈트 주머니에 넣은 규혁의 행동을 눈동자로 좇으며 한단이 말했다. 규혁은 대답 대신 미소를 보였다.

“혹시 중요한 일 있으세요?”

슈트에 넥타이까지 매고 나온 규혁을 보자마자 들었던 궁금함을 이제야 물었다.

“응?”

커피를 마시다 말고 고개 돌려 되묻자 한단이 다시 물었다.

“중요한 일 있으신 거 아닌가 해서요. 옷도 그렇고, 방금 전화도 그렇고요.”

손가락으로 슈트 재킷과 주머니에 들어간 휴대전화를 콕콕 가리켰다. 규혁이 고개 내려 자신의 옷차림을 훑어보며 말했다.

“거래처에서 만나자고 해서.”

“토요일인데도 그런 거래처가 있어요?”

“있어. CT라고.”

“아하…….”

숨소리처럼 작게 대답하곤 앞만 보며 사람들 속에 섞여 걸었다. 다 마신 컵의 끝부분을 이로 잘근거리며 어깨에 멘 가방끈을 매만졌다.

“괜찮아. 말해 봐.”

“예?”

뜬금없는 규혁의 말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규혁 역시 다 마신 커피 컵을 만지작거리며 걸었다.

“얼굴에 쓰여 있어. 궁금하다고.”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하진 않아도 상대가 알아차릴 만큼 서투르지도 않다고 생각했는데 규혁 앞에선 표가 날 정도로 새어 나왔다.

뜻대로 조절되지 않는 감정이 틈을 만들어 얼굴로, 눈빛으로,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그, 초콜릿요. 왜 안 먹었어요?”

한단이 말한 초콜릿이 무엇인지 규혁도 알고 있다. 바로 답하기보단 몇 걸음 더 걸어가 가로등 밑에 있는 쓰레기통에 컵을 버린 후, 손을 내밀었다.

“줘. 그것도 버리게.”

“아니요. 제가 버릴게요.”

한단은 냉큼 걸어가 쓰레기통에 버린 후, 손을 탁탁 털곤 가방끈을 잡았다.

“불순물이 너무 많아.”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걷는 모습엔 세련됨과 여유로움이 조화를 이뤘다.

“가방, 들어 줘?”

“아니요. 무겁지도 않아요.”

답하면서 규혁의 옆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 규혁의 시선은 하늘도 사람도 아닌 그 중간을 향했다. 한단의 보폭을 맞춰 걷는 속도를 조절하곤 했다.

“초콜릿이 순수하지 않아서.”

“안 먹는 이유치곤, 어렵네요.”

불순물과 순수가 무얼 의미하는지 생각했다. 단순히 초콜릿 안에 들어간 고급 브랜디를 말하는 것인지, 그걸 준 차수진을 빗대는 것인지 한단은 아리송하기만 했다.

“쉽게 말하면, 먹기 싫어서.”

건조하기보단 담백한 음성이었다. 규혁의 말에 미안함이 몰려와 한단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했다. 그에겐 아픈 과거일 수 있는데 어리석게 그것을 캐물었다는 생각에 당혹스러워진 한단의 얼굴이 경직됐다.

미안하다고, 그런 의도로 물어본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잘 깔린 보도블록만 보며 걷는데 규혁이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멈춰 선 규혁 때문에 한단도 멈췄다. 한 발짝 뒤에 선 규혁을 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미안해요. 괜히 물어봐서.”

“괜찮다고 했는데. 그거 관심 있다는 뜻 아니야? 이규혁에게.”

“…….”

“난 좋은데, 뭘. 미안해하지 마.”

두근거리는 심장이 호흡마저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 같아 의식하면서 숨을 쉬어야 할 정도로 한단은 떨렸다.

그가 뱉는 말의 온기가 한단을 가슴 떨리게 했다.

노을 졌던 하늘이 군청색으로 변하고, 따뜻함이 묻어났던 바람이 차게 느껴질 때 한단과 규혁은 윤중로를 떠났다.

규혁의 차가 한단의 아파트 앞에 도착한 때는 저녁 8시가 넘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시간 내줘서 고마워.”

한단은 자신이 들어갈 때까지 그가 가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그래서 뒤돌아 먼저 공동 현관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갔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현관문을 열고 거실을 지나 베란다에서 손을 흔들자 규혁의 차가 작별 인사를 하듯 아파트 주차장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도로로 빠져나갔다.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배웅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운전하는 규혁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욕심 같아선 더 오래 있고 싶었지만 그녀가 부담을 느낄까 봐 잡지 못했다. 이렇게 시작하자고, 욕심난다고 멋대로 휘둘리지 말자고 다짐하며 한산한 도로를 막힘없이 달렸다.

규혁은 안다. 욕심의 끝이 얼마나 추악한지. 욕심은 집착을 불렀고, 집착은 추악함을 만들었다.

한단에게 고백에 대한 답은 듣지 못했지만 서서히 다가가 울타리의 빗장을 풀고 싶었다.

* * *

아침 출근은 유타페가 아닌 CT로 했다. 샐림 쓰리의 메인 보드 회로도가 완성되어 담당자끼리 리뷰가 필요했다.

설민혁, 백선주와 함께 스크린 화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메일로 보내 주신 회로도는 내부에서 검토했습니다. 듀티 전류에 관한 보드 설계는 아직 여유가 있으니 그 외의 것은 미리 발주를 내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정식 승인 메일을 요청합니다.”

“윤 본부장께는 받았고, 기획실 승인만 남았어요. 늦어도 이번 주 중으로 보내 드릴게요.”

민혁이 앞에 놓인 커피를 마시며 답했다.

“기획실요?”

한단이 되물으며 민혁의 눈을 응시했다.

“샐림 쓰리 프로젝트는 연구소에서 주관하지만, 기획실에서도 관리합니다. 유타페를 지정한 부서가 기획실이었어요.”

“연구소가 아니고요?”

“기분 나쁘게 들리겠지만, 연구소에선 부정적인 분위기였어요. 유타페가 분사한 회사지만 타 반도체 업체와 거래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거든요.”

“기술 유출 때문에요?”

한단의 물음에 민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부분을 많이 걱정했는데, 솔직히 이번 프로젝트 하면서 확실히 레전드는 레전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는 눈빛을 했다.

“이규혁 사장님요. 본부장 때 했던 것들이 지금도 활용되고 있거든요. 특히 측정 센서라든가, 광학 부분 계측 장비는 정말 탁월하게 만드셨으니까요.”

“아, 네.”

“부한단 차장님도 일을 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장소영 책임에게.”

한단이 대답 대신 미소만 보였고, 회의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민혁과 선주가 로비까지 한단을 배웅하려 함께 나왔다. 두 사람에게 인사한 후 로비를 가로질러 가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 두 명과 차수진이 나왔다.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수진에게 먼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고, 수진은 웃으며 그에 응했다.

검은색 치마 정장에 검은색 구두, 깔끔하게 올린 머리까지 차수진은 도도하고 당당해 보였다.

차수진 옆에 이규혁을 세워 놓자 너무 잘 어울린다는 말이 새삼스럽지 않을 정도였다.

혹여 차수진이 자신을 알아볼까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다. 지난번처럼 ‘규혁 씨’라 부르며 차수진의 존재를 이규혁에게 전달시킬까 봐 그게 싫었다. 저절로 입술은 앙다물어졌고, 걸음이 빨라졌다.

신경질적인 기분이 배꼽부터 부글부글 끓었다. 더 싫은 건 이런 기분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질투 아니야. 이건 그냥 기분 나빠서 그래.’

시동을 걸어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유타페로 지정한 후 주차장 밖으로 나갔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마침 회의실 문이 열리면서 이찬웅이 나왔다. 기술원의 기술 유출 건으로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살도 빠졌고 얼굴색도 나빴다.

“괜찮아요?”

걸어오는 찬웅을 보며 한단이 물었다. 찬웅이 희미하게 웃으며 회의실을 가리켰다. 회의실엔 신 변호사와 규혁이 있었다.

“이제 끝이 보여요. 이번 달 안으로 기술원과 유타페 데이터를 가지고 특허 출원 중이었던 업체들 다 고소하기로 했어요.”

“결국 그렇게 됐네요.”

“네. 사장님이 그렇게 하라고……. 이번만큼은 사장님도 단단히 화가 났거든요.”

“아무튼 고생했어요.”

위로의 말에 찬웅이 고맙다는 눈빛을 보이곤 탕비실로 들어갔다. 한단이 제자리로 가려는데 회의실 문이 또다시 열렸다.

“부 차장, 잠시 이리 올 수 있어요?”

문가에 반쯤 몸을 내밀며 서 있는 규혁이 보였다.

“네.”

대답하며 빠른 걸음으로 회의실로 들어가니 신 변호사가 웃으며 눈인사했다. 한단도 고개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오슬로 프로젝트 특허는 다 완료했습니다, 부 차장님.”

“수고하셨습니다, 변호사님.”

“그리고 아까 잠시 사장님하고 말했는데 샐림 쓰리 듀티 전류 관련 메커니즘 회로도를 특허 출원하려 한다고요?”

“네. 기획서는 작성 중입니다.”

신 변호사와 한단이 마주 앉고, 규혁이 한단 옆에 앉아 듣고만 있었다.

“급하지 않은 것이면 꼼꼼히 작성해서 주세요. 부 차장님이야 워낙 꼼꼼하고 섬세하시니 걱정은 없습니다만.”

신 변호사가 사람 좋은 웃음을 하며 농담처럼 말했다.

“샐림 쓰리는 CT 프로젝트입니다. 특허에 민감할 수도 있습니다. 유타페가 분사이기 때문에 자회사라는 개념으로 생각하기도 하거든요.”

“그래요? 음……. 그럼 샐림 쓰리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더 알아보도록 하지요.”

규혁의 말에 신 변호사의 얼굴에 묻어났던 웃음이 진지함으로 바뀌었다.

“부 차장도 샐림 쓰리 진행하면서 특허에 관해선 CT 개발자와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자칫하면 다 개발하고도 CT에서 먼저 특허 출원을 말할 수 있으니.”

“계약서에 특허 부분은 없나요? 오슬로 프로젝트처럼. 기술 레시피 특허는 유타페가 하고, 완제품 장비 특허는 CT가 하는 것으로.”

“그 부분은 내가 따로 말해 줄게요.”

한단을 보던 규혁의 시선이 신 변호사로 향했다.

“기술원 건은 제가 말한 대로 진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소송 관련해서는 저보다 더 유능한 변호사를 섭외하도록 해 보겠습니다.”

신 변호사가 가방을 챙겨 일어났고, 규혁과 악수한 후 회의실을 나갔다. 한단도 회의실을 나가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났다.

“부 차장은 더 있어요.”

그렇게 말한 규혁은 신 변호사가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바라본 후 회의실 문을 닫고 의자에 도로 앉았다.

서로의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가 생각보다 아슬아슬한 기분을 만들었다. 규혁이 고개 돌려 한단의 옆모습을 보며 말했다.

“샐림 쓰리 메인 보드가 정식 승인 났어요.”

“벌써요?”

CT에서 회의하고 온 지 고작 한 시간이 지났을까. 그런데 벌써 승인이 나다니? 놀란 얼굴로 고개를 확 돌렸다. 너무 가까이 보이는 규혁의 얼굴에 또 한 번 놀란 눈빛을 보였다.

“방금, CT 기획실에서 연락받았어.”

기획실이라는 말에 차수진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승인의 기쁨보단 규혁이 차수진과 통화했을지가 더 궁금했다. 티 내지 않으려 딱딱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자재 발주 내겠습니다.”

“그리고.”

규혁의 손이 한단의 의자 등받이를 잡았고, 상체를 약간 뒤로 보냈다. 그도 한단과 너무 가까이 얼굴을 마주한다고 여긴 것일까.

“샐림 쓰리 특허는 CT와 특허 계약을 별도로 해야 해요.”

“왜요?”

“신 변호사에게도 말했지만, CT와의 관계가 오슬로와는 달라서. 유타페가 분사로 독립된 회사는 맞지만 CT의 자본금으로 설립되었기에 그 부분이 문제가 될 소지가 있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한단의 물음에 규혁이 웃었다. 그가 왜 웃는지 몰라 약간 어리둥절한 눈빛을 보이자 규혁이 말을 이었다.

“그건 사장이 걱정할 일이야. 부 차장은 개발을 우선으로 하고 특허는 준비만 해 놔. 나머진 내가 알아서 결정할 테니.”

그 말에 한단이 살짝 무안 섞인 눈빛을 보이자 규혁이 이번엔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말의 주제를 돌렸다.

“오슬로 말이야. 아무래도 부 차장이 가야 할 것 같아.”

“결정하신 거예요?”

“응. 내가 가려고 했는데 기술원 이슈도 그렇고, 이제 막 시작하는 칸 프로젝트와 팔콘사 프로젝트도 챙겨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핀란드죠? 노르웨이가 아니라.”

“맞아.”

알겠다고 답하고 일어나야 하는데 발이 의자 다리에 묶인 것처럼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궁금함이 한단을 괴롭혔다.

‘차수진 전무님이 직접 연락했나요? 제 생각이지만 차수진 씨는 사장님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규혁 씨는요?’

마지막 ‘규혁 씨는요’가 결국 한단을 주저앉혔다. 실제로 그렇게 이름을 부르면 어떨지 상상하며 몇 번이고 속으로 불러 보는데 입이 멋대로 열렸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순간 당황한 한단은 머리를 굴려 상황을 모면할 방법을 찾아냈다. 지금 여기에서 차수진을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 절대로.

“말해.”

규혁은 한단의 옆모습을 뜯어보듯 자세히 보며 답했다. 시선이 와 닿은 볼이 불에 덴 듯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마주 보며 말해야 하는데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규혁의 숨소리에 실린 감정이, 그가 뿜어내는 눈빛이 어떠한지 충분히 느낄 만큼 진하게 풍겼다. 심장이 갈비뼈를 아프게 때린다고 느낄 때쯤 규혁의 손가락이 한단의 목선을 훑었다. 선잠에서 퍼뜩 깬 아이 같은 눈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규혁이 손가락을 떼며 말했다.

“머리카락.”

그가 막 떼어 낸 기다란 머리카락을 눈앞에 보여 줬다. 한단이 하나로 묶은 머리를 손으로 정리하곤 입을 열었다.

“왜 오슬로예요? 처음 프로젝트 할 때부터 궁금했는데…… 묻지 못했어요.”

다행히 위기를 넘겼다는 생각에 긴장감 가득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정작 묻고 싶은 말은 목구멍 아래 배로 밀어 넣었다.

“오슬로는 노르웨이 수도잖아요. 핀란드는 헬싱키이고. 그런데 왜 오슬로인지.”

“나도 처음엔 의아했는데, 오슬로 사장이 노르웨이 사람이야.”

의자 등받이를 잡았던 손을 들어 뒷머리를 한두 번 쓰다듬곤 다시 의자 등받이를 잡았다.

“핀란드는 IT가 활발하니까. 오슬로가 있는 곳이 오울루라는 곳이야. 유럽의 실리콘밸리지.”

한단은 대답 대신 규혁의 눈을 보며 관심 있게 듣고 있다는 제스처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믄 시폰 수석도 노르웨이 사람이라고 해.”

“네. 이제 이해했어요.”

“또 묻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바쁘지 않으세요? 근무 시간인데.”

“바빠.”

바쁘다는 말을 느긋한 얼굴로 자상하게 했다. 한단의 시선이 넥타이 없는 와이셔츠의 우윳빛 단추로 내려갔다.

“들어가면 언제 또 볼지 모르니까.”

윤중로에서의 만남 이후 아직 이렇다 하게 진행된 건 표면적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바쁜 사람은 항상 이규혁이었지만, 만남을 주도하는 키는 부한단이 가지고 있었다.

“볼 수 있을 때 많이 보려고.”

입꼬리와 함께 남자의 광대뼈도 뺨 위로 살짝 올라가면서 전체적으로 매력적인 웃음을 나타냈다.

“오울루 출장……. 며칠 정도로 하면 될까요?”

“횡성 조백웅 수석과 논의해. 그쪽 일정 알아보고 잡으면 될 거 같은데.”

한단 역시 더 있다간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조용히 말했다.

“저 일하러 가야 해요. 샐림 쓰리 발주서도 챙겨야 하고요.”

한단이 의자에서 일어났고, 규혁의 입에서 한숨 섞인 호흡 소리가 났다.

끝내 묻지 못한 질문을 속으로만 생각하며 뒤돌아섰다.

규혁의 따뜻함과 다정함이 좋으면서도 자꾸만 차수진을 떠오르게 했다. CT의 이규혁이 아닌 유타페의 이규혁을 바라봐야 페어플레이가 되는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한단은 한심스러워지려 했다.

회의실을 나가는 한단에게 아쉬웠지만 그걸 표현하진 않았다. 업무와 혼동시키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은 이규혁 본인이었으니까.

규혁도 회의실을 나가려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액정을 보는 눈빛이 냉정하게 변했다.

“이규혁입니다.”

- 날세, 차국환. 그래, 생각해 봤나?

“죄송하지만, 제 생각은 바뀌지 않습니다.”

- 사람이 너무 고지식해도 안 돼. 자네도 사업하는 사람이잖나?

“제가 지금 회의 중이라서요.”

- 알았네. 조만간 또 보세.

통화가 끊겨 검게 변한 액정을 보며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애매한 숨을 토해 냈다. 차수진의 CT 복귀와 함께 차국환의 집요한 요구가 들어왔다.

한단과 만나기로 했던 날도 느닷없는 차국환의 요청에 규혁은 아침부터 CT에 붙잡혀 있었다.

“CT 경쟁사와는 거래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연구소에서도 말이 많아.”

“기술 유출을 우려하는 거라면 프로젝트 계약서에 별도 특허 부분을 쓰면 됩니다.”

“난 자네가 다시 왔으면 해.”

기술 유출은 어쩜 핑계일 수 있다. 차국환이 진짜 하고픈 말은 수진일 것이다.

“수진이에겐 자네가 필요해.”

“이미 끝난 말입니다.”

“이미 끝난 사이라고 해도 곁에서 그 앨 보좌해 줄 순 있지 않을까?”

“그럴 순 없습니다.”

“그렇다면 CT와의 합병은 어떻게 생각하나? 직책은 CT 부사장도 좋고, 유타페를 계열사로 해서 사장도 그대로 유지하면 어떤가?”

“생각 없습니다.”

차국환에게 중요한 선약이 있다고 말하곤 쓰디쓴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차수진이 CT를 물려받으려면 단순히 차국환의 핏줄이라는 이유로는 부족하다는 걸 규혁도 알고 있다.

CT의 대표가 되기 위해 임원들을 설득할 실적이나 탁월한 업무 능력을 보여 줘야 한다. 처음부터 차수진에게 자신은 그런 용도였음을 알지만 개의치 않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최선을 다했다. 그렇다면 차수진도 그랬어야 했다. 규혁에게 성실하게 말했어야 했다. 기만하지 말고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 줘야 했다.

손안에 든 휴대전화가 울렸다. 액정을 보는 규혁의 미간이 주름으로 짙어졌다.

[차 전무]

받지 않고 주머니 속으로 휴대전화를 넣으며 회의실을 나갔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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