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페르미온(Fermion)
밤 9시가 넘었는데도 유타페 사무실은 환한 불빛을 그대로 유지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규혁은 아직 퇴근 못 한 직원이 있는지 살피듯 사무실을 훑곤 사장실로 들어갔다.
횡성 출장 전, 기습으로 방문했던 칸 일렉트로닉이 이번엔 정식 미팅을 요청해 왔다. 칸의 최 부사장과 저녁까지 함께 하고 온 터라 많이 늦은 감은 있었다.
근래 외부 거래처와 미팅이 잦다 보니 내부 업무를 챙길 시간이 부족했다. 구체적으로 프로젝트가 결정되면 리더를 선정해 실무를 맡기면 되지만, 그 전까지의 일은 대부분 규혁이 처리했다.
유타페가 추구하는 선행 기술, 그 기술의 난이도와 핵심적으로 추구하는 비즈니스의 방향을 프레젠테이션 하며 상대가 요청하는 기술과 눈높이를 맞추는 작업은 대부분 규혁의 손에서 이뤄졌다.
최 부사장과 식사하는 동안에도 향후 기술 방향이나 글로벌한 반도체 개발 현황 이야기를 나누느라 식사가 아닌 미팅의 연속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노트북을 열고 각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을 업데이트한 메일을 클릭했다. 파일이 열릴 동안 규혁이 커피를 마시려 탕비실로 향했다. 피곤함으로 뻑뻑해진 눈을 감아 힘주곤 커피가 내려진 컵의 손잡이를 잡았다. 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탕비실에서 나와 사무실을 가로질러 가다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단과 마주쳤다.
“안녕.”
“안녕하세요.”
“우습다. 그치?”
“네?”
커피를 손에 든 규혁이 소리 없이 미소만 보였다.
“다 늦은 밤에 처음처럼 인사하는 게.”
그러고 보니 아침에 출근해 은영에게 하루 스케줄을 보고받은 이후로 김학준과 함께 팔콘사 종합 기술 회의에 참석했고, 점심은 유니언사 부사장과, 그리고 오후엔 칸 미팅으로 하루 종일 밖으로만 나돌았다.
규혁의 말에 한단은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만 끄덕였을 뿐 함께 웃진 않았다.
다만 뺨을 약간 꿈틀거리며 웃으려고 한 것 같았지만 규혁의 눈에는 그저 경련처럼 보였을 뿐이다.
“왜 못 했어? 퇴근.”
혹시 그녀가 부담을 느낄까 봐 규혁이 화제를 바꿨다. 경련이 일던 뺨이 원래대로 돌아온 한단이 손에 든 태블릿을 눈길로 가리켰다.
“횡성에 전달한 레시피를 다시 점검했습니다.”
“또?”
실수 없이 꼼꼼하게 일하려는 완벽함을 규혁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어느 면에선 그와도 맞아떨어졌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점검할 필요 있느냐는 눈빛을 보이자 한단의 귀로 혈류가 빠르게 돌면서 붉어졌다.
“쓰고 있는 출장 보고서에 미진한 부분이 보여서요. 보충하려고 테스트한 것뿐입니다.”
그녀의 대답에 자신이 너무 딱딱하게 보였다고 생각한 규혁이 느슨한 표정을 지으며 말꼬리를 돌렸다.
“부 차장, 저녁은 먹고 하는 겁니까?”
“…….”
“안 먹었어요?”
대답 없는 한단의 눈이 여전히 태블릿에 멈춰 있었다. 느슨했던 표정은 사라지고 어느새 규혁은 ‘걱정’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만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표 나지 않게 숨을 내쉬며 한단과 마주 보려 고개를 아래로 낮추고 말했다.
“먹고 싶은 야식 있어요?”
“없습니다.”
“배 안 고파요?”
“네.”
주저 없이 답하는 한단에게 규혁은 익숙한 울타리를 느꼈다. 한 발짝도 더는 들어오지 못하게 입구를 꽉 닫고 서 있는 그녀의 정수리 위로 규혁의 짧고 깊은 탄식 같은 숨 덩어리가 떨어졌다.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고집스럽게 규혁과 마주하지 않았던 한단의 시선이 태블릿에서 떨어졌다. 놀란 표정, 당황한 눈빛을 보이지 않으려고 감정을 누르는 그녀가 규혁의 눈에 환히 보였다.
“횡성에서 말이야.”
인사처럼 커피 잔을 위로 살짝 들어 올리곤 규혁이 사장실로 걸어갔다. 그녀가 무슨 표정을 어떻게 지어 보일지 궁금했지만 틈도 주지 않으려는 한단에게 저도 모르게 실망스러워하는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기 싫었다.
업무 테이블에 앉은 규혁이 노트북 화면을 보며 안경을 꺼내 썼다. 담당자들이 올린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체크하는데 진도가 더디 나갔다.
시선은 화면에 있지만 마음이 없었다. 몇 분 정도 멍하니 노트북 화면을 보던 규혁이 안경을 벗곤 한 손의 엄지와 검지를 벌려 감은 눈을 꾹꾹 눌렀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눈을 감은 채 규혁이 답했고, 소리로만 문이 열리는 걸 감지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귀로 들어왔지만 규혁의 눈은 여전히 감긴 상태였다. 그 모습에 잠시 머뭇거리던 한단이 조용히 물었다.
“어디 불편하세요?”
“응.”
감긴 눈을 느리게 뜨며 규혁이 답했다.
“두통약 드려요?”
“아니.”
“그럼?”
“부한단 때문에.”
“예?”
이번엔 외면하지 않고 한단의 표정을 똑바로 바라봤다. 놀라지 않은 얼굴을 유지하려는, 평범함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규혁이 의자에서 일어나 문가에 서 있는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했다.
“굶고 일하는 직원이 마음에 안 들어서.”
“아까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은영 씨가 준 스낵바로 요기는 했어요.”
“그랬어.”
답하는 목소리와 달리 규혁의 눈빛에는 못 믿겠단 기색이 역력했다. 분명 이런 자신을 불편해해 처음부터 밥 먹었다고 할걸, 후회하고 있을 한단의 생각이 훤히 읽혔다. 횡성에서처럼 불편해하는 감정의 냄새가 맡아졌다.
속는 셈 치고 믿어 주기로 한 규혁이 한단을 앞장서 나가며 약간 목소리를 높였다.
“가. 주차장까지 가 줄 테니.”
“괜찮습니다.”
“난 안 괜찮아.”
규혁과 함께 주차장으로 간 한단이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차창을 반 정도 열어 인사했다.
“조심히 가요. 수고했어요.”
“사장님도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엔 사장과 직원의 목소리였고, 표정이었으며, 대화였다.
그녀의 차가 어둠 속으로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규혁이 다시 사무실로 올라왔을 땐 밤 10시가 넘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 있는 커피는 차게 식은 후였다.
탕비실로 가 따뜻한 커피로 바꿔 온 규혁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사랑에 빠졌을 때, 그게 사랑인 것을 아는 방법이 있을까요?”
오랜 시간 병상에서 투병하는 아버지 곁을 지키며 정성으로 돌보는 어머니에게 규혁이 했던 질문이었다. 수진의 이해 못 할 행동에 넌더리가 났던 규혁은 사랑에 빠진 자신을 이해해 달라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난감해했다.
그래서 사랑 하나로 지치지 않고 아버지를 돌보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사랑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말이다.
어머니는 웃었다. 빙그레, 입꼬리를 위로 부드럽게 올리며 말했다.
“혁아, 너 학교 다닐 때 국제 박람회 갔다 온 거 기억나니?”
“그럼요. 교장 선생님 추천으로 4박 5일 일본에 갔잖아요.”
“그때, 며칠 동안 잠 못 자며 설렌다고 말했잖아. 종일 박람회 생각만 난다고.”
“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픈지 몰랐을 정도였으니까요.”
규혁이 쓴웃음처럼 얇게 웃었다.
“사랑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두 손을 깍지 껴 뒷머리에 대고 빙글빙글 의자를 돌렸다. 그게 사랑이라면 자신은 지금 사랑에 빠진 게 아닐까, 규혁이 생각했다.
그녀 생각에 잠도 안 오고, 설레기도 하고, 가끔은 신경질이 나기도 하니까.
손을 내려 서랍을 열었다. 처음 유타페에서 함께 일할 동료들을 뽑을 때, 최종으로 합격한 직원들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가 가지런하게 철해진 파일이 들어 있었다.
데스크에서 일하는 은영이 이미 전산화했기에 필요 없는 자료지만 규혁은 서랍에 보관했다.
파일을 꺼내 겉장을 펼쳤다.
마지막으로 뽑은 은영의 이력서가 맨 위에 보였다. 규혁이 엄지와 검지로 종이를 잡아 위로 올리며 직원들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넘겼다.
오래된 직원일수록 마지막에 가깝게 있었다. 파일의 가장 마지막 장은 부한단의 이력서가 차지했다. 이력서에 붙인 사진을 보며 CT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차국환 사장의 배려 같은 호의로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CT에 입성했을 땐 많은 이들의 막힘없는 수군거림을 질투 섞인 경계심이라 생각하며 흘려보냈다.
그 당시 차수진과는 공식적인 사이였기에 ‘예비 사위니까, 후광이 있으니까’ 하는 말들을 무시하며 결과를 보여 주는 것으로 그들을 제압해 나갔다.
그렇게 CT에서 자리를 잡고 업무 성과를 올릴 때, 규혁은 공채 면접관으로 한단을 처음 만났다. 부한단이 규혁에게 약간의 특별함으로 남게 된 것이 바로 그 면접 때였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에 백 명 가까운 지원자들을 봐야 했다. 그러니 입사 원서를 세세히 볼 시간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보게 된 부한단의 가족관계 증명서에는 오직 한 사람만 표기되어 있었다. 게다가 자기소개서를 훑는 눈에 들어온 단어는 ‘입양, 파양, 홀로서기’였다
그때 규혁의 눈에 아랫입술을 작게 깨물곤 목과 귀까지 벌게져 테이블의 모서리에 시선을 둔 한단이 보였다.
귓바퀴부터 시작해 뺨까지 벌겋게 익어 가는 피부를 보며 그녀가 경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특이하군요. 전공이 산업 공학인데 부전공은 광(光)공학이라…….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섣부른 짐작일 수도 있겠지만, 그때 한단의 눈동자에 차오른 감정은 고마움과 감사함이었다. 왠지 주눅 들어 있는 듯한 조금 전과 달리 눈동자로 서서히 자신감이 차올랐다.
“대학 2학년 때 나노 광전자학을 들었습니다. 그때 빛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전자와 전공과 빛과 에너지, 그리고 파장에 따른 색의 변화, 또 에너지밴드 갭에 따른 전압 차와 밴드 갭 조절로 만들어지는 빛의 세기, 색상 등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상외로 당차게 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목소리 끝이 갈라져 그녀가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면접이 끝났다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끄덕인 규혁에게 용수철처럼 일어나 ‘감사합니다’를 외치던 한단을 보며 ‘감사’의 또 다른 의미를 알게 되었다. 아마도 다른 회사 면접에선 여러 사적인 질문을 받았으리라 충분히 짐작이 갔다.
시간이 지나 비서가 건네준 최종 합격자 명단을 보며 눈으로 그녀의 이름을 찾았다.
서류 접수 번호 7329. 부한단. 그때, 규혁은 아마도 웃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위에 분사로 이직하겠다고 본부장실로 찾아왔던 부한단이 겹쳐졌다.
이직 의사를 밝히던 그때에도 한단은 승낙하는 자신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처음 면접을 볼 때처럼 떨림을 안고서.
그때의 감사는 어떤 의미였을까. 규혁이 서류를 덮곤 불 꺼진 사무실의 어두운 공간을 바라보았다.
때론 침착함이 너무 깊어 동작마저 조용한 부한단이 규혁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CT에서 일할 땐 직원들이 많아 일일이 살필 겨를이 없었다. 유타페로 독립한 후에도 일로 바쁘긴 마찬가지였지만 부하 직원들을 곁에 가까이 두고 살필 수 있다는 장점이 생겼다.
유타페의 시스템이 완전히 갖춰지기 전, 잔일과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 그 안에서 한단은 힘들다는 불만이나 어렵다는 투정 한 번 없이 맡은 일에 충실했다.
한 명 두 명 직원들이 늘어 가고 회사가 커지고 조직도 안정화됐지만 한단은 변함없었다. 빈틈없이 꼼꼼하게, 그리고 철두철미했다. 마치 규혁에게 책잡히기 싫은 사람처럼 일을 해 나갔다.
그럴 때마다 자꾸만 시선이 갔다. 다른 직원들 등 뒤로, 혹은 사무실 책상 너머로 그녀에게 시선이 향했다.
그렇게 부한단을 보는 사이 호기심은 관심으로 넘어갔다.
행여 자신의 시선을 부한단이 읽을까 애써 회사 직원과 동일한 깊이의 눈동자를 가장했지만, 감정을 추스르지 못할 때가 점점 많아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 한구석에 짙어지는 영역이 점점 더 넓어졌고, 그럴수록 한단에게 보여 주는 말투와 표정, 그리고 행동에 감정이 배어났다.
그렇게 누적된 관심은 특별함으로 바뀌었다.
특별함엔 동료나 직원 따위의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슈트 재킷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이쯤이면 그녀가 집에 도착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전화할까, 아니면 메시지를 보낼까. 별것 아닌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도 쉽게 판단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사랑에 빠졌을 때, 그게 사랑인 줄 아는 방법이 무엇인지 말이다.
바로 이런 거 아닐까.
너무 작은 것도 궁금하고 자꾸 생각나고 고민하게 만드는 것.
규혁에게 부한단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가슴 설레고, 잠 못 자게 만들고, 자꾸만 떠올리게 하는.
액정을 터치해 메시지를 입력했다.
[잘 자.]
하지만 보내진 못했다.
* * *
오후 들어 우중충한 회색으로 변한 하늘에서 기어코 눈발이 날렸다. 눈송이가 제법 큰 걸 보면 쉽게 그칠 눈은 아니었다.
팔콘사 한국지사장과 약속된 미팅을 마치고 유타페로 올 예정이었으나 중간에 CT 차국환 사장이 직접 전화해 괜찮다면 지금 만나자고 했다.
팔콘사 미팅 후 공식적인 약속은 없었지만 오늘 저녁엔 유타페 직원들과 축하 회식이 잡혀 있었다.
거절하려 했지만 유타페 자본금과 새로운 광학 장비 비즈니스 때문이라는 말에 거절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차국환 사장과의 면담에 응해 CT에서 미팅을 마치고 나오니 눈이 너무 내려 차도를 제외한 세상은 하얗게 이불을 덮어쓴 모양이 되었다.
은영이 회식 장소와 시간을 문자로 보내 주었다. 샐림 투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축하하는 자리이니 꼭 참석해야 한다는 당부가 함께였다.
규혁은 사장으로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꼭 참석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주차장을 연상하게 할 만큼 꽉 막힌 도로에서 겨우 빠져나온 규혁이 회식 장소에 도착한 건 저녁 8시가 지나서였다.
“와!”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문을 열고 들어선 규혁을 맞이했다.
한영이 방석을 깔고 자리를 마련하며 말했다.
“일단 잔부터 받으세요.”
한영이 작은 술잔에 데워진 청주를 부었다.
“받기만 할게. 차 가져왔어.”
규혁이 웃으며 말하자 마주 앉은 학준이 냉큼 대꾸했다.
“그럼 마시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평소 술을 좋아하기로 사내에 소문이 자자한 학준이 규혁의 잔을 제 앞으로 가져갔다.
“그럼 음료라도 하세요. 허전하잖아요.”
그렇게 규혁 앞의 잔을 음료로 채운 한영이 주위를 보며 말했다.
“자, 자. 사장님도 오셨으니 본격적으로 마시고 먹어 봅시다.”
유니언사에 납품한 샐림 투 장비가 문제없이 성공적인 테스트를 받고 정식 승인 허가가 떨어진 날이기도 했다. 담당 리더였던 한영은 상기된 얼굴로 건배를 외쳤고 모두가 한영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잊지 않고 해 줬다.
“고생했어. 최 부장.”
“감사합니다, 사장님. 절반은 사장님 덕분이죠, 뭐.”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야.”
규혁이 대꾸하자 한영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어넘겼다.
바쁜 와중에도 프로젝트가 성공할 때마다 자기 일처럼 축하해 주는 직원들을 보며 테이블 가장자리에 앉아 조용한 동작으로 뜨끈한 어묵 국물을 수저로 떠 마시는 한단을 보았다.
술을 못한다는 건 규혁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CT에서는 몰랐으나 유타페로 이직하고 첫 회식 때 그녀가 말했으니까. 그래도 예의상 맥주는 받았는지 그녀 앞에 김빠진 노란 액체가 가득 있었다.
옆에 앉은 은영의 수다에 잠깐 미소를 지어 보이고, 마주 앉은 찬웅의 말에 고개도 끄덕이며 분위기에 튀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규혁이 주변에 앉은 직원들 잔에 술을 따라 주려는데 휴대전화가 지속해서 울렸다. 액정을 확인하니 중요 거래처였다.
“잠시만.”
규혁이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가게 밖으로 나가 통화했다. 눈발은 약해져 내리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고, 군데군데 블레이드 제설차가 노란 비상등을 깜빡이며 눈을 치웠다.
“예. 알고 있습니다. 아직 사무실 도착 전이라서요. 그 부분은 확인하는 대로 메일로 보내도록 하죠. 아니요……. 예. 맞습니다. 우리 회사 방침도 동일합니다.”
규혁이 시선을 내려 자신의 구두 앞코를 보며 통화에 집중했다. 긴 통화는 액정이 열에 달궈져 뜨뜻해지고 손등이 차가운 바람에 시릴 때쯤 끝났다.
뒤돌아 가게로 가는데 문이 열리면서 토트백을 어깨에 메고 나오는 한단과 마주쳤다.
“벌써 가려고?”
“네. 곧 2차 간다고 해서요.”
마치 ‘거래처와 미팅 있습니다’라고 보고하는 업무적인 얼굴의 한단을 규혁이 응시했다.
앞뒤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운전하는 차처럼 부한단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경계를 만들고 선을 그었다.
CT에선 조직이라는 틀에 갇혀 매분 매초마저 단위를 나눌 정도로 엄청난 업무량에 시달렸던 반면 유타페에선 자유로운 개발 사고(思考)과 함께 직원을 책임지는 대표로서 밀접하게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유대감은 가지고 싶었다.
특히나 부한단은 자신과 함께 일하고 싶다며 CT에서 이직한 직원이기도 했으니까 규혁에겐 ‘특수한’이란 단어가 부여된 직장 동료이자 부하였다.
그리고 이젠 다른 의미를 첨가해 바라보는 사람이기도 했다.
“차는?”
“두고 왔어요. 눈이 많이 내려서. 택시 타면 됩니다.”
한단의 눈동자가 큰 도로 쪽을 향했다. 규혁도 그녀의 시선을 좇아 도로를 봤다. 차들과 사람들이 엉켜 있는 도로는 여전히 혼잡했다.
“택시 잡기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휴대전화로 확인해 보고 있어요.”
“태워다 줄게.”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려 규혁을 보는 한단의 눈동자에 작은 놀라움이 드리웠다.
“어차피 나도 가야 해.”
“괜찮습니다.”
“추운데.”
“별로 안 추워요.”
“뭐가 안 추워. 얼굴이 다 빨간데.”
민망한지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는 한단의 입매가 고집스럽게 변해 갔다.
“사장님도 피곤하실 텐데, 괜히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부 차장. 정말 불편한 게 뭔지 알아요?”
약간 정색한 목소리는 그렇지만 부드러움은 잃지 않았다.
“멋대로 짐작하는 거.”
“예?”
“내가 불편할 거란 생각.”
말을 잇는 규혁의 눈동자는 깊게 흔들렸고, 받아들이는 한단의 눈동자에는 설명하기 힘든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부 차장을 이대로 보내면 내가 더 불편할 거란 생각은 안 들어?”
한단의 얼굴은 점점 얼어 갔다. 추워서 그런지, 아니면 규혁의 말이 당황스러워 그런지 이유는 확실치 않았다. 마침 가게를 나온 주인에게 자동차 열쇠를 받은 규혁이 말했다.
“갑시다. 부 차장.”
“괜찮…….”
“할 말 있어.”
한단의 말허리를 끊었다. 의문이 가득한 눈동자를 의도적으로 피한 채 그녀의 팔을 살짝 잡고 걸으며 웃음 섞인 목소리를 냈다.
“내가 할 말 있다고. 그러니까 가요.”
“무슨?”
“가면서 말할게. 더는 참아지지 않아서.”
두 번째 말은 독백처럼 뱉었다. 한단을 조수석에 태우고 앞으로 빙 돌아 운전석에 탄 규혁이 시동과 함께 히터를 틀었다. 따뜻한 바람이 다리 아래로 불었다.
핸들을 돌려 눈으로 뒤덮인 골목을 나와 사람과 주차된 차들을 요령 있게 피했다. 제설 작업이 제법 진행된 도로에서 한단의 아파트 근처까진 막힘없이 달려갔다. 차는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오면서 속도를 현저히 낮췄다. 가면서 말한다던 규혁은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단도 묻진 않았다.
어떻게 말을 풀어 나가야 할지 정리하느라 규혁은 내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불편하지 않다면, 잠깐 카페 어때?”
차를 세운 규혁이 낮은 음성으로 한단에게 물었다. 입술을 지그시 감쳐물곤 쉽게 답하지 않는 그녀에게선 답답함이 아닌 신중함이 느껴졌다.
“차 안이 덜 불편해?”
두 번째 질문에 겨우 한단이 답했다.
“카페, 가요.”
멈췄던 차의 시동이 다시 걸렸고, 느릿하게 이동한 차는 아파트 근처 카페 앞에 멈췄다. 늦은 시간이지만 카페 안에는 사람들이 제법 남아 있었다. 빈 곳에 자리를 잡고 차를 주문했다. 차가 나오기 전까지 약속이나 한 듯 대화를 미뤘다.
한단은 재촉하지 않았고, 규혁은 차분하면서 단단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앞으로 하얗게 김이 올라오는 찻잔이 내려졌고, 누구랄 것도 없이 둘 다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눈치 못 챘어?”
규혁이 뱉은 첫말에 한단은 긍정도 부정도 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거기에 약간 용기를 얻은 규혁이 바로 말을 이었다.
“나, 고백하려고. 부한단에게.”
내리깔았던 한단의 시선이 천천히 올려졌다. 이번엔 규혁이 시선을 내려 찻잔을 잡아 입에 댔다. 진짜 하고픈 말을 꺼내고 나니 타는 듯한 갈증이 예상치 못하게 밀려왔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규혁은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잠시 텀을 뒀다. 그리고 규혁 역시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가늠했다.
5분 정도 흘렀지만 한단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대답도 없었다. 고민할 시간이 더 필요한지, 아니면 고민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건지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어 결국 규혁이 시선을 들었다.
한단의 눈길은 찻잔도, 테이블도, 그렇다고 규혁도 아닌 애매한 곳에서 흔들렸다.
“이유, 안 물어봐?”
흔들렸던 눈동자가 고정되면서 규혁을 보며 작게 입술을 움직였다.
“이유가 뭔데요? 사장님.”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따라 묻는 한단의 얼굴에선 감정이 무방비 상태로 흘러나왔다. 살짝 불규칙한 호흡, 약하게 떨리는 속눈썹,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뺨이 한단의 상태를 보여 줬다.
“내 마음이 이유야.”
“네?”
“사소한 거에 마음이 가. 작은 것도 궁금하고. 하찮은 일에 신경이 쓰여.”
“그게 무슨…….”
“부한단에게 설렌다고.”
희미하게 규혁이 웃었다.
“왜……. 왜?”
더듬거리며 한단이 되물었고, 규혁은 조용히 답했다.
“특별하게 보여. 볼 때마다 가슴이 뛰고.”
“전, 특별하지 않아요.”
한단의 귓바퀴와 뺨이 같은 색으로 물들어 갔다. 그녀가 상당히 혼란스러울 것이라 짐작한 규혁이 차를 마저 다 마시곤 말했다.
“나에겐 특별해. 이런 말, 당황스럽고 불편할 거란 거 알아.”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진지한 얼굴과 목소리로 말을 계속 이었다.
“좋아해 줬으면 해. 사장이 아니라 그냥 이규혁이라는 사람으로.”
“한 번도 사장님을 다르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오늘부터 다르게 생각해 봐.”
또다시 입술을 작게 깨물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한단에게 규혁이 고개를 약하게 끄덕였다.
“깊게 생각해 줘. 빨리 답해 달라고 조르지 않을 테니까.”
그쳤다고 생각했던 눈이 다시 휘날렸다. 검은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바람과 함께 춤추듯 내려왔고, 카페에서 나온 두 사람은 하늘을 한번 쳐다보곤 차에 올라탔다.
규혁과 헤어져 귀가한 한단은 방금까지 꿈속을 헤매다 나온 것처럼 멍하니 한참을 거실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게 꿈이 아니라는 걸 문자 알림 소리가 대신 알려 줬다. 한단이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액정에 뜬 메시지를 읽었다.
[잘 자.]
규혁이 보낸 문자를 물끄러미 보던 한단이 낮게 읊조리듯 뱉었다.
“바람일 수도 있어요. 지나가는 감정의 바람.”
‘좋아한다’라는 말처럼 가볍고 불안하고 변덕스러운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조금 더 세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곧 피비린내가 맡아졌다.
자신을 입양한 그들도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곧잘 내뱉었다. 예뻐 죽겠다고, 너무 사랑스럽다고 했던 감정의 무게는 결코 무겁지 않았다. 너무 쉽게 파양을 결정한 그들에게서 ‘사랑한다’와 ‘좋아한다’는 감정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혼잣말하며 눈 내리는 창밖을 응시했다.
그러면서 마음 한쪽으로 규혁의 고백이 무겁게 자리 잡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