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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슬로 프로젝트 2 (4/14)

4. 오슬로 프로젝트 2

예상된 것과 예상치 못한 것이 동시에 생겨 버렸다.

전자는 오슬로 프로젝트의 신규 레시피가 픽스 돼 횡성 연구소 출장이 확정된 것이고, 후자는 출장 당일 칸 일렉트로닉 부사장이 유타페로 예고 없이 방문한 것이다.

신규 레시피 최종 픽스 후 횡성 연구소가 있는 강원도로 출발하기 10분 전, 규혁이 있는 사장실 문을 최한영이 급하게 두드렸다.

“네.”

대답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며 놀란 얼굴의 한영이 숨넘어갈 듯 말했다.

“지금 도착했답니다.”

“뭐?”

“칸 일렉트로닉 부사장이요.”

“뭐?”

한쪽 눈만 올려 떠 ‘뭐’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규혁의 반응에 한영이 급하게 답했다.

“지금 유타페 로비에 칸 일렉트로닉 최 부사장이 도착했다고요. 사장님 뵙겠다고.”

규혁이 인터폰을 눌러 은영을 불렀다.

- 네, 사장님.

“오늘 스케줄에 칸 일렉트로닉이 있나요?”

- 그게 없는데요……. 그냥 오셨어요. 최한영 부장님께서 말씀드릴 텐데요, 사장님.

은영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칸 일렉트로닉의 방문이 제 잘못인 것처럼.

규혁이 답 대신 눈을 감고 짧은 한숨을 쉬었다. 무례한 방문이지만 고객이고, 반도체 부분에선 중견 기업이니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인터폰을 끄고 한영을 보며 말했다.

“횡성 가야 해서 길게 못 해. 첫 부분만 함께할 테니 나머진 최 부장이 해. 이슈 사항이나 결정이 필요한 부분은 남겨 두고.”

“그래도 될까요? 저쪽은 부사장님인데.”

“예고 없이 방문한 건 칸이야.”

상대의 무례함에 짜증 섞인 화가 아닌 냉정함으로 건조하게 말하자 한영이 머쓱한 표정을 했다.

“알겠습니다. VIP 회의실로 모실 테니 오십시오.”

한영이 나가고 머지 않아 규혁이 사장실에서 나왔다. 한단이 규혁을 보며 벌떡 일어나 말했다.

“사장님, 지금 출발하시려고요?”

“잠시만, 부 차장.”

규혁이 한단의 업무 테이블 가까이 걸어갔다.

“중요 고객이 방문해서 출발이 늦어질 것 같은데. 횡성 조 수석에게 레시피 테스트, 오후에 가능한지 확인해 줄 수 있나요?”

“어느 정도 늦어질 것 같으신데요?”

“참석해 봐야 알겠지만 두 시간 정도. 그 이상은 어렵다고 하고 나오려고.”

“알겠습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규혁이 슈트 속 와이셔츠 소매를 매만진 후 VIP 회의실로 발을 옮겼다.

그가 사라지자 데스크에 있던 은영이 쪼르르 한단에게 다가왔다.

“칸의 최 부사장님이 오셨어요. 그것도 기습적으로.”

“그랬어?”

동생에게 하듯 한단이 웃으며 말하곤 휴대전화를 꺼내 조 수석의 연락처를 검색하는데 그만 은영에게 뺏겼다.

“어머! 차장님 휴대전화 바꿨어요? 언제? 언제요?”

호들갑을 떨며 한단의 휴대전화를 요리조리 살핀다.

“전화번호까지 변경해서 바꾼 거면 최신형으로 하시지. 통신사 할인까지 받으면 저렴하게 살 수 있는데.”

“난 이게 좋아.”

은영에게서 휴대전화를 도로 가져와 조백웅 수석의 연락처를 터치했다.

“사장님, 칸 때문에 화나신 거 같던데. 이럴 때 함께 출장 가면 좀 그렇겠어요.”

어린 마음에 질투인지 투정인지 모를 말을 하는 은영에게 한단은 여전히 여유 있는 웃음을 보였다.

통화가 연결되자 앞에 선 은영에게 손가락을 보이며 조용히 하라고 지시했다.

“조 수석님? 안녕하세요. 유타페 부한단입니다.”

- 네, 부 차장님. 출발하셨습니까?

“실은, 그것 때문에 연락드린 겁니다.”

- 왜요? 못 오십니까?

“아니요. 그건 아니고 혹시, 신규 레시피 구동 시연을 오후로 하면 안 될까 해서요.”

- 오후요? 저희야 상관없지만…… 한 번 시연하게 되면 구동 타임만 여섯 시간이 걸리는데.

“괜찮습니다.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출발이 늦어지니까요.”

- 무슨 문제 있습니까? 혹시 픽스 된 레시피에서…….

묻는 조 수석의 목소리에 걱정이 담겨 있었다.

“오슬로와는 관련 없습니다. 갑자기 거래처 고객이 내방하는 바람에 그만.”

- 예, 뭐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우리야 24시간 횡성에 있으니까 아무 때나 구동해도 상관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출발할 때 또 연락하겠습니다.”

조 수석과의 통화가 끝났다. 원래 약속한 시연은 정오였다. 서울에서 오전 9시에 출발해 횡성에 오전 11시 30분 도착을 예상, 픽스 된 레시피를 입력하는 시간까지 넉넉잡아 12시면 충분했다.

구동 타임이 여섯 시간이라 하지만 네 시간 정도 지나면 모니터에 웨이퍼의 수율 그래픽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구동 다섯 시간이 지나면 수율의 80%를 그래픽에서 체크 가능하기에 늦어도 오후 7시엔 모든 시연과 미팅을 끝낼 수 있다.

이것이 오늘 횡성 연구소 출장 계획표였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칸의 방문으로 여차하면 시간이 많이 지연될 수도 있었다.

한단이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다시 켰다. 규혁을 기다리는 동안 신규 레시피 테스트 중에 적어 놓은 몇 가지 아이디어를 특허로 출원하려고 뽑아 둔 파일을 열었다.

출원 전, 규혁의 컨펌을 받으려면 문서 작성부터 꼼꼼히 해야 반려되는 횟수를 줄일 수 있다. 열어 놓은 문서 항목 중 ‘출원자’란에 이름을 썼다. ‘이규혁, 부한단’이라고.

문서를 작성하며 잠깐잠깐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전 11시가 넘어갔다. VIP 회의실 방향으로 시선을 보내는 한단의 눈동자가 살짝 불안했다.

‘혼자라도 갈까?’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업무 테이블 위에 있는 탁상시계를 또 한 번 힐끔거렸다. 만약 12시에도 규혁이 나오지 않으면 혼자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작성한 문서를 저장한 후 노트북을 파우치에 넣었다. 서랍에서 가방을 꺼내는데 복도 저 끝 VIP 회의실 문이 열리며 규혁과 한영, 그리고 칸 일렉트로닉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다.

칸의 최 부사장이 규혁의 손을 잡아 악수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예고 없이 찾아왔는데도 기술적으로 잘 설명해 줘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유타페와 많은 것들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좋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도 칸 일렉트로닉의 좋은 파트너로 남고 싶습니다.”

규혁의 대답에 최 부사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다른 일정 때문에. 나머지는 여기 최한영 부장이 할 겁니다.”

규혁의 말이 끝나자 칸의 최 부사장도 함께 온 직원들에게 말했다.

“나도 그만 갈 테니 실무적인 것은 자네들이 알아서 잘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칸 직원들이 고개 숙여 답했다.

규혁과 최 부사장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악수했고, 한영이 최 부사장을 엘리베이터까지 모시고 갔다.

규혁이 복도와 사무실의 경계에 서서 한단을 향해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한단이 노트북과 태블릿이 들어간 파우치, 그리고 가방을 챙겨 들고 빠르게 걸어 나갔다.

“미안해. 많이 기다렸죠?”

“혼자라도 갈까 생각했습니다.”

“횡성을?”

“네.”

“대단한데. 그 산길을 갈 수 있어?”

“내비게이션이 있으니까요. 어떻게든 가겠죠.”

오슬로 횡성 연구소는 강원도 횡성의 깊은 산골에 위치했다. 보안을 이유로 접근성이 떨어지는 장소를 골라 터를 잡았다고 했다. 규혁의 말대로 산길은 외길인데다 차 한 대만 간신히 올라갈 정도의 폭으로 이어져 있어 자칫 가는 도중 차를 마주하면 피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그럴 땐 요령껏 요리조리 피해야 했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규혁의 차는 이미 시동이 걸려 있었다.

“제가 운전할까요?”

“내 차야. 내가 해야 편해.”

‘나도 잘하는데’라고 속으로 말하곤 조수석 문을 열고 탔다.

“조백웅 수석에게 출발한다고 연락했고?”

“내려오면서 문자 했어요.”

“오케이.”

한단이 안전벨트를 맨 것을 확인한 후, 규혁이 핸들을 돌려 움직였다. 시내를 가로질러 고속도로에 합류했지만 생각보단 원활하게 속도를 내지 못했다. 금요일 오후, 벌써부터 많은 이들이 주말을 즐기러 시외로 빠져나갔다. 그 차들 틈바구니에 규혁과 한단도 함께 있었다. 고속도로 첫 번째 휴게소에서 커피와 감자구이, 추로스를 포장한 후 차에 올라탔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끼려면 점심도 가면서 먹어야 한다.

스트로를 꽂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컵홀더에 고정하고, 무릎 위로 감자구이가 담긴 용기와 추로스가 담긴 종이를 올려놨다.

“뭐 드실래요?”

“어떤 게 먹기 편할까?”

한단의 물음에 규혁이 되물었다. 무릎 위에 있는 간식을 유심히 보는 한단의 표정이 진지했다. 이쑤시개가 꽂힌 감자보단 막대 모양의 추로스가 편하겠지, 생각하며 고개 돌려 운전하는 규혁에게 말했다.

“제 생각엔, 추로스요.”

“좋아. 그걸로.”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추로스 하나를 반 정도 감싸 규혁에게 내밀었다.

“제대로 된 식사도 못 하고. 미안해요, 부 차장.”

추로스를 건네받으며 미안함이 담긴 미소와 함께 규혁이 말했다.

“사장님도 어쩔 수 없었잖아요. 예고 없이 고객이 왔으니.”

“그렇게 이해해 주면 고맙고.”

“화, 안 나세요?”

“응?”

설마 그럴 일이 있겠냐마는 그래도 아침에 했던 은영의 말이 걸려 한단이 물었다.

“칸에서 일방적으로 방문했잖아요. 미리 약속도 잡지 않고. 그래서 화가 나셨다고.”

“누가 그래?”

“아니에요?”

“내가 화를 내면 유타페의 미래가 보장되지 않아.”

뜻밖의 말을 꺼낸 규혁의 옆모습을 한단이 조심스럽게 쳐다봤다. 그런 한단의 시선을 느꼈는지 규혁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며 웃곤 다시 정면을 향했다.

“유타페 직원 여러 명이 힘든 거보단 한 명이 참는 게 더 낫잖아.”

역시나 예상했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규혁의 답변에 안도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저렸다.

내가 사장이라면 어땠을지 생각하다 불쑥 질문을 던졌다.

“참는 게 힘들 때도 있잖아요?”

“틀리지 않아. 하지만 그것 말곤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참는 거야.”

마냥 태연한 규혁의 말을 들으며 이쑤시개에 걸린 감자구이 하나를 입 안에 넣어 오물오물 먹었다.

‘그러니까 맨날 두통을 달고 살죠.’

그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입속에서 으깨진 감자와 함께 삼켜 버렸다. 그러면서 규혁과 이렇게 사소한 이야기를 하는 자신에게 낯섦을 느꼈다.

규혁과 단둘이 출장을 가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업무 이야기도 곧잘 했다. 업무적인 것은 먼지 한 톨이라도 털어서 보고하는 한단이지만, 그걸 벗어나면 무엇 하나 보여 주지도 알려 주지도 않았다. 그건 비단 규혁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친구이자 CT 동기인 장소영에게조차 말하지 못한 것들이 더 많았다.

알감자 두 개 먹었을 뿐인데 목이 뻑뻑해졌다. 커피를 마시려 손을 뻗었다가 규혁과 타이밍이 겹치는 바람에 약속이라도 한 듯 첫 번째 컵 홀더에 있는 컵 위에서 두 사람의 손이 포개졌다. 한단의 손등 위로 규혁의 손바닥이 얹힌 꼴이 되었다.

“먼저 드세요.”

얼른 손을 빼며 한단이 말했다. 손등엔 규혁의 체온이 잔잔히 남아 있어 괜스레 귀가 붉어졌다.

“미리 정했어야 했는데.”

결국 첫 번째 커피는 규혁, 그 뒤에 있는 두 번째 홀더의 커피는 한단 것으로 자연스럽게 결정됐다.

해프닝 같은 행위가 생각지도 못한 어색한 공기를 만들었다. 서로의 시선은 정면으로 고정했고, 가끔 스트로를 물어 커피를 마시는 무언의 동작만 반복했다.

“장소영 책임을 만났어.”

“네?”

어색한 공기를 가르며 규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면에 시선을 뒀던 한단이 ‘장소영’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한테 부 차장 안부를 묻던데.”

규혁의 얼굴은 정면을 향해 있지만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한단의 표정을 살폈다.

“CT 세미나에서 만났거든.”

“아, 참가하셨네요? 세미나에.”

“그렇게 됐어. 시간 되면 유타페에 놀러 오라고 했지. 장 책임에게.”

“다들 잘 계시죠?”

불과 2년 전만 해도 한단 역시 CT 개발 직원이었다. 사교적으로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성격이 아니기에 보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지만 4년을 함께한 같은 팀 직원들은 궁금했다.

“개발 3팀 윤 본 머리카락이 없어진 것 말고는 크게 바뀐 건 없던데.”

고개를 떨구며 웃는 한단의 어깨가 약하게 흔들렸다.

개발 3팀 윤 본부장은 30대 초반부터 이마가 넓어지더니 한단이 그만둘 때쯤 M자 모양으로 탈모가 시작됐다. 대머리 윤 본부장을 상상하자 웃음이 계속 나와 앞니로 속살을 꼭 깨물며 간신히 참아 냈다. 어색한 차 안의 분위기를 바꾸려는 규혁의 마음이 느껴져 한단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스트로를 입 안에서 뺐다.

“새끼 고양이가 많이 컸더라고요.”

쑥스러운 표정과 기분 좋은 눈빛으로 한단이 말했다.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쑥스러움과 걱정했던 새끼 고양이의 안부를 전하는 기분 좋음이 뒤섞인 한단의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나타났다.

붉어진 귓바퀴와 뺨의 홍조, 그리고 약간 바르르 떠는 짙은 속눈썹까지.

부끄러운 듯 내리깐 눈꺼풀마저 붉은 아이섀도를 바른 것처럼 벌게졌다.

“엄마 고양이가 잘 키웠나 보네.”

“네. 엄마 고양이가 참 기특해요. 추운 겨울인데.”

“다음엔 나도 갈까?”

예상하지 못했던 규혁의 질문에 한단은 섣불리 답할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거리감을 좁히는 행위엔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불편하면, 안 갈게.”

규혁이 뱉은 말의 온도가 따뜻했다. 거절당했다는 민망함이나 난처함이 배지 않은 목소리가 한단의 심장 안으로 파고들었다.

“머리 아프면…… 보러 가요.”

“그래, 그럴게.”

대화가 끊긴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아닌 또 다른 밀도의 공기가 생겼다.

그 밀도에는 남들은 결코 모르는 비밀이 들어 있었다.

새끼 고양이, 응급실, 대머리, 그리고 고모부.

그건 오직 이규혁과 부한단, 두 사람만이 아는 비밀의 단어였다.

* * *

출발한 지 세 시간이 넘어서야 횡성 충당리 오슬로 연구 단지에 도착했다.

보안 자체가 철저하다 보니 차가 들어서는 주차장부터 회의실까지 조백웅 수석이 나와 가이드 했다.

방문을 요청한 연구원이 직접 나와 내방 목적과 회의 이유를 작성해 보안실에 제출해야 연구 단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스템이다.

“오슬로의 보안은 변함없이 철통입니다.”

“좋을 때도 있지만 솔직히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산골짜기 연구소에 올 사람도 많지 않은데 말입니다.”

규혁의 말에 조백웅이 웃으며 답했다.

규혁과 조백웅이 앞서고 두 발짝 뒤로 한단이 따랐다.

세 사람은 시연하기로 되어 있는 MOCVD가 설치된 실험실로 향했다.

방진모, 마스크, 방진복, 그리고 방진화까지 완벽하게 차려입고 에어 샤워까지 마친 후 조진웅을 따라 실험실 내부에 들어섰다. 윙 하며 울리는 고속 진동음에 잠시 귀가 먹먹했으나 이내 적응되어 느끼지 못했다.

한단과 규혁, 그리고 조백웅을 포함한 몇몇 연구원들이 MOCVD 장비 구동 조건을 지켜보며 웨이퍼에 증착하는 원소들의 색깔을 모니터했다. 여섯 시간에 걸친 모니터를 마치고 실험실을 나와 방진복을 탈의하자 온몸이 흠뻑 젖은 것처럼 축축했다. 규혁 역시 앞머리가 젖어 이마에 들러붙었지만, 굳이 정리하지 않았다.

방진모 때문에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를 풀어야 했던 한단은 공기조차 통하지 않는 모자로 젖어 버린 머리를 동그랗게 올려 묶었다.

“30분 정도 정리가 필요합니다.”

오슬로 연구원이 태블릿에 있는 로우 데이터를 보이며 말했고, 조백웅이 규혁을 향해 물었다.

“커피라도 할까요? 도착하자마자 실험실에서 여섯 시간이나 갇혀 있었는데 말입니다.”

“되도록 시원한 것으로 하고 싶은데요.”

“우린 1년 내내 아이스입니다.”

조백웅이 호탕하게 웃곤 규혁과 한단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연구소 내 카페테리아는 회사에서 별도 운영하는 시스템이라고 했다. 조백웅이 커피와 함께 간단한 빵을 주문해 가져왔다.

“이번 유타페의 12인치 웨이퍼 증착 MOCVD는 오슬로에서도 꽤 관심도가 높은 프로젝트입니다. 브리믄 시폰이 유독 까다롭게 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화상 미팅 시 오슬로 본사 시폰 수석의 무례함에 가까운 언행을 두고 조 수석이 말했다.

“시폰 수석이 날카롭다는 건 프로젝트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니 이해 바랍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중요하다’라는 말에 경솔하지 않게 미소 지으며 규혁이 감사하다 말했다. 그들이 앉아서 이야기하는 사이, 연구원 한 명이 다가와 데이터 정리가 끝났으니 회의실로 가자고 했다.

“수석님, 회의 준비됐습니다. 오슬로 본사 시폰 수석도 연결됐고요.”

연구원의 말에 조백웅이 남은 빵을 주섬주섬 챙겨 연구원에게 건네며 말했다.

“내 책상, 알지?”

연구원이 한숨을 살짝 쉬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빵을 잡았다.

“몸 생각하세요, 수석님. 저탄고지 모릅니까?”

“잔소리 그만!”

연구원의 얼굴에 손바닥을 보인 조백웅은 규혁과 한단에게 무안한 듯 피식 웃곤 앞장서 걸었다. 회의실 문을 열자 벽면에 환한 스크린이 펼쳐졌고, 분할된 화면 속엔 시폰 수석이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로 무심한 표정을 내비쳤다.

「- 유타페 대표와 함께 직접 진행한 MOCVD 장비 시연 검토 결과는 데이터와 같습니다.」

조백웅이 영어로 회의의 말문을 텄다.

「왼쪽 그래프는 오리지널 레시피 조건의 수율이고, 오른쪽 그래프는 신규 레시피로 제작한 수율입니다.」

조백웅이 마우스를 이리저리 클릭하며 그래프를 화면 양쪽으로 분리해 배치했다.

「신규 레시피는 구동 여섯 시간에 수율은 전체 웨이퍼의 52%로 집계됐습니다.」

시폰 수석의 이마에 줄이 가면서 못마땅한 눈빛을 했다.

「- 보스.」

시폰 수석의 음성이 낮게 깔렸다.

규혁을 향해 보스라 칭하며 말을 이었다.

「실망입니다. 아무리 못해도 최소 수율이 55% 이상은 되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2%의 차이는 언제든 48%도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레시피는 수율 개선이라 볼 수 없습니다.」

시폰의 말에 회의에 참석한 오슬로 직원들이 눈치를 보듯 규혁과 한단을 힐끔거렸다. 한단도 살짝 경직된 얼굴로 스크린 속 시폰을 노려봤다.

‘구동 조건을 마음대로 바꿔서 수율을 올려 달라고 생떼를 쓴 건 당신네잖아. 수율도 요구한 50%는 맞췄는데 뭐가 실망인 거야!’

정말 소리치고 싶었다. 아무리 갑이 오슬로라고 해도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에.

「시폰 수석님.」

신뢰가 깃든 목소리로 규혁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우려, 인정합니다. 2%의 편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유타페에서 제시한 신규 레시피는 유효 테스트와 중복 테스트를 통해 수율의 안전성을 확보한 것입니다. 그 말은 수율 52%가 마지노선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하로는 절대 떨어지지 않습니다.」

확신에 찬 음성에 거만함은 없었다. 침착한 표정으로 정확한 사실만을 전달했다.

「유타페에서 제시한 레시피를 믿지 못하겠다고 하신다면, 이번 유브이 12인치 MOCVD 프로젝트는 파기하겠습니다.」

회의실 안 사람들의 호흡이 일시에 멈췄다. 한단 역시 규혁의 말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놀랐다. 격하고 극적인 결정보다는 부드러운 타협과 협상을 보였던 그가 이번만은 물러서지 않았다. 스크린 속 핀란드 연구소 직원들의 술렁거림이 스피커를 통해 전달됐다.

「- 협박합니까? 보스.」

시폰 수석의 얼굴에서 확실한 짜증이 뚝뚝 떨어졌다.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숫자는 거짓을 모릅니다.」

악의 없는 단호함과 강직함이 규혁의 목소리와 표정과 눈동자에서 흘러나왔다. 헛기침조차 용인하지 않는 침묵이 횡성 회의실뿐 아니라 오슬로 본사에서도 만들어졌다.

시폰 수석과 규혁만이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무언의 줄다리기를 했다.

「- 계약을 파기하면, 유타페가 물어야 할 위약금이 얼마인지 압니까?」

12인치 유브이 장비엔 오슬로의 투자가 포함되었기에 시폰이 금액적인 협박을 했다.

「프로젝트에 투자된 인력과 시간은 또 어떻게 보상할 겁니까?」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회의실 안 사람들의 얼굴도 점점 경직되어 갔다. 한단 역시 불안한 눈동자로 어떤 결과를 끌어내려고 협상 파기까지 운운하는 건지, 규혁의 얼굴만을 응시했다.

「시폰 수석님. 12인치 유브이 장비 개발 계약서를 보시겠습니까? 오슬로와의 프로젝트를 계약할 때, 수율 60%가 약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구동 타임은 아닙니다. 이유는 60%를 목표로 장비를 개발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요.」

살얼음 같은 분위기 속에서 미소를 유지한 채, 두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려 가볍게 맞잡았다.

「파기한다면, 정확히 누구의 책임입니까? 시폰 수석님.」

유타페에서 계약을 파기한다고 해도, 책임은 오슬로에 있다는 걸 명확하게 지적했다.

장비의 개발 목적은 구동 시간이 아닌 수율 60%였으니까 말이다.

오슬로 직원들만큼이나 긴장으로 딱딱한 얼굴을 했던 한단은 마음이 조금 놓였는지 작게 숨을 뱉었다. 화면 속 시폰 수석의 얼굴이 정면으로 규혁을 노려봤다. 하지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두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며 말했다.

「- 좋소. 보스의 의견을 믿어 보죠. 횡성에서 일주일간 구동한 수율 데이터를 나에게 보내요. 만약 그중 하나라도 50% 이하로 나온다면 그 책임을 유타페로 묻겠소. 이번 프로젝트에 오슬로가 투자한 시간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점 잊지 말길 바랍니다.」

시폰 수석의 화면이 블랙아웃으로 전환됐다. 조백웅도 얼떨떨한 표정을 하며 규혁과 한단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회의에 참여한 사람들 역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얼굴로 서로의 시선을 외면했다.

“저 때문에 분위기가 엉망이 된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다만, 레시피는 확실합니다.”

“그렇겠죠. 유타페의 기술력은 저희도 믿습니다.”

조백웅이 부자연스러운 미소로 의례적인 답변을 했다.

“시폰 수석에겐 공개하지 않았지만 변경된 레시피는 추가로 몇 개 더 있습니다. 물론 수율 50% 유효 검토도 마쳤고.”

“그렇습니까?”

되묻는 조백웅의 얼굴이 아까와 다르게 환해졌다.

“그렇다면 백업 레시피도 만들었다는 겁니까?”

“부 차장.”

규혁이 옆에 앉은 한단을 부르며 눈짓을 해 보이자 파우치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연구원 한 명이 빠르게 한단에게 가 무선 잭을 연결했고, 곧이어 스크린으로 화면이 떴다. 손가락으로 패드를 움직여 오슬로 프로젝트 폴더를 열고 2차 레시피 폴더를 찾아 열자 나열된 레시피 파일이 화면 속에 보였다.

“이 레시피 중에서 오늘 한 것은 A3이고, 백업으론 B23, C33 레시피가 있습니다. 둘 다 수율은 52.5%, 51.8%로 유효 테스트도 마쳤습니다.”

‘짝!’ 소리가 나더니 조백웅이 벌떡 일어나 손뼉을 쳤다.

“역시, 역시! 사장님이십니다! 정말 용의주도하고 철두철미하며 완벽합니다!”

회의실에 함께 있던 오슬로 연구원들도 조백웅을 따라 박수를 치며 웃었다. 의외로 시폰 수석이 없는 횡성 회의실은 꽤 화기애애했다.

“마음 같아선 근사한 저녁이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산골이다 보니 밤은 위험합니다. 얼른 내려가세요. 이러다 혹시 눈까지 오면.”

거기까지 말한 조백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서둘러 출발을 권했다.

해는 벌써 떨어졌고, 멀찍멀찍 세워진 가로등과 헤드라이트에서 나오는 불빛에 의지해 앞으로 나갔다. 낮과 다르게 밤의 산길은 무서울 정도로 험했다. 내려간 지 얼마 안 돼 멧돼지와 고라니가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한단이 혼비백산하여 소리를 질렀다.

“괜찮아요.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사색이 돼 놀란 한단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이며 속삭이듯 규혁이 말했다.

횡성 연구소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앞선 두 번은 모두 오전에 도착해 낮에 회의하고 오후에 연구소를 나왔기에 오늘처럼 깜깜한 밤에 차를 몰진 않았다. 산길을 거의 다 내려와서는 또 다른 것이 두 사람을 당황하게 했다.

흰 눈이 펄펄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엔 규혁도 꽤 놀란 눈치였으나 위로하듯 한단에게 말했다.

“고속도로까지 가면 괜찮을 겁니다, 부 차장.”

“그럴까요?”

내리는 눈의 속도와 더디게 굴러가는 차의 속도는 반비례했다. 눈이 세차게 내릴수록 차는 더욱더 느리게 굴러갔다. 고속도로는커녕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에도 가지 못한 채 산길 입구에서 차를 세웠다. 규혁이 차에서 내리자 한단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다급하게 물었다.

“왜요? 사장님!”

“체인을 감아야겠어요.”

트렁크에서 쇠로 된 체인을 꺼내 들고 다시 차 앞으로 걸어왔다. 그 짧은 시간, 규혁의 어깨와 머리로 하얀 눈이 솜처럼 얇게 덮였다. 입고 있던 짙은 감색의 오버코트와 슈트 재킷을 한 번에 벗어 운전석으로 던지고, 넥타이 끝은 와이셔츠 포켓에 구겨 넣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을 조명 삼아 체인을 감자 한단이 문을 열고 나와 규혁 옆에 서서 휴대전화 플래시를 터치했다.

“들어가요, 부 차장. 괜찮으니까.”

“아니요. 뭐 도와 드릴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들어가 있는 게 도와주는 건데.”

한단을 보지 않고 체인을 감아 연결하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러면 제가 불편해서요.”

미안한 마음이 단어 속에 녹아났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규혁은 아무 말 않고 일어나 또 다른 바퀴에 체인을 감았다.

체인을 감는 동안에도 눈은 계속 내렸고, 발목 언저리까지 찼다. 모든 바퀴에 반짝이는 은색 체인이 다 채워졌고, 규혁과 한단도 다시 차로 들어갔다. 규혁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손 여기저기엔 검은 얼룩들이 묻어 있었다.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규혁에게 건네자 “고마워요”라고 답하며 손을 닦았다.

차는 이제 ‘천천히’가 아닌 ‘서서히’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주 느리게 굴러갔다. 이렇게 해서라도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까지 간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으나 그 소원을 불과 5분도 안 돼 무너졌다.

“안 될 것 같은데. 헛바퀴 돌아.”

규혁이 한숨을 쉬었다. ‘어떡해요?’ 하고 속으로 한단이 소리쳤지만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도움이 되지 않을 말을 해서 고생한 규혁의 감정을 상하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규혁이 휴대전화를 꺼내며 한단에게 물었다.

“조백웅 수석 연락처 말해 봐요.”

“제가 할게요.”

한단이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 조백웅 수석의 연락처를 터치했다. 규혁이 손바닥을 보이며 넘기라는 제스처를 보냈고, 한단이 휴대전화를 건넸다.

“이규혁입니다.”

- 아, 사장님. 무슨 일로?

“비상사태여서요.”

- 아직, 산길입니까?

“산 입구까지는 내려왔는데 더는 방법이 보이지 않네요.”

조백웅이 탄식처럼 “아이고, 이를 어째”라는 말만 반복했다.

“다시 올라가기도 무리겠죠?”

- 절대 안 됩니다. 여긴 눈이 더 많이 내려요. 지형 특성상 그렇더라고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방법을 찾아봐야겠네요.”

규혁이 끊으려 하자 조백웅이 급하게 말을 했다.

- 잠시만요! 혹시 지금 있는 곳에서 집이 보입니까?

“집이요?”

창문을 열고 고개를 빼서 한 바퀴 돌아보지만 희뿌옇게 내리는 눈만 보였다.

- 아니면, 반 정도 나무에 기댄 전봇대는요?

“전봇대?”

규혁이 다시 눈에 힘을 주며 밖을 보는데 한단이 소리쳤다.

“저기요! 사장님, 전봇대! 저기 보여요.”

기쁜 마음에 규혁의 어깨를 두드리며 손가락으로 차창 밖 한곳을 가리켰다. 조백웅의 말대로 반 정도 나무에 기댄 전봇대가 보였다.

“네, 보입니다. 한 50미터 앞에.”

- 어쩔 수 없습니다. 사장님, 오늘 같은 밤에 차 몰고 가는 건 위험해요. 전봇대에서 왼쪽으로 한 500미터 정도 걸어가면 집이 한 채 있어요.

“집?”

- 네. 할머니 한 분이 따님하고 식당을 하셨는데 딸은 결혼해 외지로 나가 계속 장사하고 할머니만 혼자 사세요. 가끔 집밥이 그리울 때 직원들과 가서 먹곤 합니다.

대답하지 않고, 조백웅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규혁도 감이 오지 않는다는 표정을 보이면서.

- 할머니께 전화 넣을 테니, 한번 부탁해 봐요. 이쪽 산길, 특히 겨울밤 눈길은 견인차들도 안 옵니다. 그러니 날 밝으면 출발하세요.

“그렇군요. 신경 써 줘서 고맙습니다.”

어떻게 하겠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한단이 물끄러미 규혁을 쳐다봤다. 차 안 조명에 비친 규혁의 표정이 약간 난감한 듯 심각해 보였다.

“조 수석님께서 뭐라고 하셨어요?”

“그게, 외박해야 한다고 해서.”

“네?”

놀라 토끼 눈이 된 한단을 보며 규혁이 안심시키려는 듯 씽긋 미소를 보였다.

“견인차들도 오지 못한대, 여기 산길은. 그러니까 하룻밤 묵어 가라고.”

“여기 어디서요?”

“전봇대 왼쪽으로 걸어가면 집이 있다고 해. 조 수석하고 그 집 주인 안면이 있나 본데.”

버릇처럼 한단이 아랫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 버렸다. 규혁이 다시 기어를 풀고 핸들을 움직였지만 차는 계속 헛바퀴만 돌았다.

“…… 그 집으로 가요, 사장님.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순 없잖아요.”

“괜찮겠어?”

규혁과 한단의 시선이 부딪혔다. 한단이 경험한 이규혁은 신뢰할 수 있으니까 괜찮을 거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서 내려 발을 디디는데 정강이 부분까지 쑥 빠졌다.

“무섭게 오네.”

규혁이 하늘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푹푹 빠지는 발을 한 발 한 발 위로 올렸다 내리며 한단이 혼잣말했다.

“눈사람 만들기 딱 좋은 눈이다.”

그러곤 혹여 규혁이 들었을까 입을 꼭 다물었다. 철없는 말을 했다고 핀잔을 주지 않을까 해서. 파우치만 들고 걷다가 발을 헛디뎌 휘청하자 한단의 가방을 대신 메고 걷던 규혁이 냉큼 팔을 잡았다.

“발목 조심.”

그 후로 조백웅이 말한 집까지 규혁은 한단의 팔을 놓지 않고 걸었다. 대문을 두드리자 할머니가 나와 추운데 얼른 들어오라고 했다.

“군불을 이제 넣어서 바닥이 따땃해지려면 한 시간 정도 걸려. 저녁도 못 했다고 하던데?”

“괜찮습니다.”

규혁과 한단이 동시에 손사래를 쳤지만 할머니는 벌써 부엌을 향해 등을 돌렸다.

“내, 돈 받지 않을게. 백웅이가 아들처럼 아주 살갑고 재미난 말도 어찌나 잘하는지. 그래서 해 주는 거야. 메주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뜨거든. 된장국이 얼매나 맛있는지 몰라.”

달그락 소리와 가스 불 켜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규혁과 한단이 묵을 방은 결혼 전 딸이 사용했던 방이라고 했다. 횡성 연구소 직원들이 집밥을 먹을 때 사용하던 방도 그 방이라고 말하며 할머니가 진갈색의 나무 밥상을 꺼냈다. 방 안으로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급속도로 퍼졌다. 괜찮다고 했지만 막상 냄새를 맡으니 허기가 몰려왔다.

“밥 있으니 더 먹고. 다 먹으면 마루에 내다 둬.”

할머니가 나간 후, 차디찬 바닥에 깔린 방석에 앉아 거품 내며 끓어오르는 된장 뚝배기에 시선만 보냈다. 솔직히 이 상황 자체가 낯설고 어색해 한단은 선뜻 수저를 잡지 못했다. 규혁과 단둘이 밥 먹은 적이 없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때 규혁은 휴대전화를 옆에 두고 도면을 검토하거나 데이터를 분석하며 밥과 액정 사이를 오가기만 했었다.

“먹어. 먹어요, 부 차장.”

“……네.”

규혁이 먼저 수저를 들며 말했다. 휴대전화도 꺼내지 않고. 얼굴은 들지 않고, 밥과 반찬만 보며 한단이 숨 쉬는 것처럼 답했다. 쇠젓가락이 쇠그릇과 한쪽 부분이 누렇게 탄 플라스틱 접시 사이를 조심스럽게 오갔다. 서로의 젓가락이 겹치지 않도록 하나의 반찬을 동시에 집지 않았다. 마치, 커피를 집으려다 서로의 손이 포개진 것을 기억이라도 하듯이.

훈훈하게 데워진 방 안으로 할머니가 옥양목 이불을 건네며 말했다.

“화장실이 쬐게 불편한데, 색시 혼자 보내지 말고.”

벽면에 난 작은 창가에 서서 내리는 눈을 보던 한단은 ‘색시’라는 말에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뜨거운 연기가 나올 것처럼 화끈거렸다.

‘조 수석님이 뭐라 말한 거야?’

입술을 잘근거리며 꼭 물어봐야겠다고 한단이 생각했다. 규혁은 웃기만 했다.

곧 이불 펴는 소리가 들리더니 규혁이 문을 열고 나갔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발바닥에 따뜻함이 느껴질 만큼 방바닥은 데워졌다.

창밖을 바라보던 한단에게 노곤함이 슬슬 밀려올 때쯤 갑자기 규혁이 창에 나타나 잠이 확 달아나 버렸다.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규혁이 두 손을 입가에 대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눈사람.’

나오라는 손짓에 자신이 나갈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 같아 마지못해 밖으로 나갔다.

“봐. 눈 오는 거, 굉장해.”

규혁의 말에 한단도 얼굴을 들어 하늘을 봤다. 까만 하늘에 하얀 눈이 반짝였다.

“밤이라는 게 믿어져? 하늘은 검은데, 땅은 하얘.”

“정말, 그래요.”

겨울의 깊은 밤은 눈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환했다. 둥글둥글 눈을 굴리는 규혁의 표정이 개구쟁이처럼 밝았다. 쭈뼛쭈뼛한 자세로 규혁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한단의 얼굴엔 수줍은 소녀 같은 표정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할머니 방은 불이 꺼져 있었고, 작은 방에서 새어 나온 노란 불빛이 창문 크기만큼 바닥을 비췄다.

장갑도 없이 눈사람을 만든 규혁의 손이 빨갰다. 그게 신경 쓰이고 아파 보여 들어가자고 재촉했다.

“괜찮아.”

규혁이 웃으며 답했지만 한단은 눈을 살짝 찡그리며 대꾸했다.

“전 안 괜찮아요.”

“부한단도 빨간데, 뭐.”

“전 시리지 않거든요.”

“아닌데. 귀도 빨갛고, 볼도 빨갛고, 이마도 빨갛고. 귀야 항상 빨겠지만.”

짓궂음 없는 말투는 상냥하기까지 했다. 아마 규혁의 또 다른 재주를 꼽으라면, 농담을 아주 따뜻하고 다정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규혁이 만든 눈사람에 눈, 코, 입, 그리고 작대기를 팔처럼 꽂고 나서야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데워진 방 안의 공기는 두 사람에게 나른함과 피로감을 동시에 느끼게 해 줬다.

이불을 삼팔선처럼 놓고 마주 앉았다. 창가 벽으론 규혁이 기댔고, 문가 벽으론 한단이 기댔다.

“할머님 덕분에 따뜻하게 잘 수 있어 다행이에요.”

“조백웅 수석 덕분이지.”

“할머님표 된장찌개도 좋았고요.”

“좋았다는 것치곤 적게 먹던데.”

한단은 자신을 화제에 올리고 싶지 않아 규혁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말을 돌렸다.

“오슬로 프로젝트가 잘되었으면 해요.”

“잘되겠지. 열심히 하잖아.”

“사장님도 마찬가지잖아요.”

“나야 당연한 거고.”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대화가 끊어지자 한단이 고민했다. 이런 일, 이런 상황이 너무 낯설고 어렵다. 회사 건물에서 단둘이 있던 때와는 아예 다르다.

“CT 세미나는 어땠어요?”

“…….”

“다들, 잘 지내죠?”

“…….”

“세미나 주제가 뭐였어요?”

“부한단.”

“예?”

규혁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눈을 굴릴 때와 달리 진지하고 진중한 모습이 보였다.

“정말 궁금해?”

어색한 분위기가 불편해 한단이 평소와 달리 말을 이어 가려 노력하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남자의 표정과 눈빛이 그걸 말했다.

속내를 들킨 한단의 시선이 잘 깔린 이불로 내려갔다.

그녀가 무얼 어색해하고 불편해하는지 이해한다는 얼굴로 규혁이 말했다.

“자. 난 괜찮으니까.”

“사장님도 피곤하잖아요. 장거리 운전에, 또 체인까지 감느라.”

그리고 눈사람도. 한단은 마지막 말은 하지 않았다. 눈사람을 생각하자 괜스레 긴장되었다. 규혁의 행동을 돌이켜 보면 ‘알쏭달쏭’, ‘긴가민가’라는 단어만 떠올랐다.

“유타페에서 재주가 하나 생겼어.”

“재주요?”

이불에 시선을 보냈던 한단이 고개를 들고 궁금함이 깃든 눈동자를 보였다.

“앉아서 자는 재주.”

대표이사의 고유 업무 말고도 리더들에게 맡긴 프로젝트를 별도로 검토하고 테스트하느라 곧잘 새벽까지 일했다. 난생처음 한단과 고양이 밥을 주었던 날도 실험실에서 꼬박 밤을 지새운 날 중 하루에 불과했다. 그러다 못 견디게 피곤하면 앉은 채로 눈을 감고 가수면과 수면이 반반 섞인 시간을 보내곤 했다. 눈동자에 깃들었던 궁금함이 미안함과 안타까움으로 바뀌어 갈 때쯤 규혁이 옅게 미소 지었다.

“괜찮으니까 자.”

규혁이 먼저 눈을 감았다. 한단에게 보여 주기 위한 제스처였다. 정말 부담 갖지 말라고, 편안하게 있으라고. 내 생각 말고 자라고.

한단을 배려하는 건지 불은 끄지 않았다.

벽에 기대 눈을 감았지만 규혁은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이불 속에서 얼굴만 내민 한단도 멀뚱멀뚱 눈을 깜박이다 몸을 돌려 규혁을 등졌다. 업무와 관련 없이 한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것에, 그것도 ‘잠’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부분을 빠짐없이 보여 줘야 하는 것에 불편함이 찾아왔다.

상대가 먼저 잠들길 바라며 각자 눈을 감고 숨만 들이쉬었다.

등 뒤에 바로 화로가 있는 것처럼 뜨거웠고, 때론 따가웠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규혁의 존재에 가슴이 짓눌린 듯 숨 쉬는 것도 자연스럽지 못했다.

바스락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바람 소리가 났다.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연거푸 나면서 서늘한 공기가 한단의 이마에 부딪혔다. 살며시 눈 떠 고개를 돌리니 규혁은 없었다.

어디에 갔을까? 생각이 자꾸만 이어지는 걸 막기 위해 벽지 문양을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몸은 피곤하지만 반대로 잠은 오지 않았다. 대신 긴장이란 녀석은 시간과 함께 두께를 더하여 한단의 심장을 방망이질했다.

규혁이 언제 다시 방으로 들어올지 가늠하며 누렇게 변한 벽지에서 시선을 떼 문으로 돌렸다. ‘한참’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맴도는데도 규혁은 돌아오지 않았다.

규혁과 함께 있는 상황이 불편하고 어색하면서도 별개로 지금은 그가 걱정스러웠다.

결국, 한단이 이불 밖으로 몸을 빼내 문을 열고 마루로 나갔다.

눈을 감은 채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앉은 규혁이 보였다.

의아한 표정으로 한단이 규혁을 보며 깨워야 할지 고민하는 와중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이 너무 더워서.”

또렷한 음성에 그가 깨어 있었음을 알았다.

말을 끝낸 규혁이 눈을 떠 문가에 선 한단을 보며 말을 이었다.

“가서 자.”

“마루는 춥잖아요.”

“서늘하긴 해도 춥진 않아. 그러니까 가서 자요. 부 차장.”

이렇게 가서 눕는다고 잠이 올까? 한단은 규혁이 왜 마루로 나왔는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불편해하는 자신을 배려하는 것이다.

“들어가서 주무세요.”

“괜찮아.”

“불편해 보여요.”

“내가 들어가면 부 차장이 불편하잖아.”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바로 대답 못 하고 입술에 힘만 주었다.

규혁이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곤 다시 눈을 감았다.

“이건, 더 불편해요.”

차마 규혁을 바로 보지 못하고 마룻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깐 채 한단이 말했다.

“이래저래 불편한 거라면, 조금 덜 불편한 쪽으로 하고 싶어요.”

웃음인지, 아니면 짙은 한숨인지 모를 소리가 규혁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 말, 이래저래 부한단에게 난 불편한 사람이라는 뜻?”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규혁의 물음에 바닥으로 내렸던 시선을 올렸다.

농담일까, 아니면……. 물음의 진위를 고민하는 사이 규혁이 일어났다.

“미안. 농담이었어.”

멋쩍게 미소 짓곤 규혁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농담’이라는 규혁의 마지막 말이 한단에겐 그리 와 닿지 않았다. 어쩌면 진짜 불편한 얼굴을 보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한단이 따라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서도 규혁은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누워 주무세요.”

“이게 편해.”

한단이 바닥에 앉아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장님이 불편한 게 아닙니다.”

“…….”

“그냥 이 상황이 낯설고 불편한 겁니다.”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규혁에게 괜한 오해를 받지 않을 것 같았다. 설사 규혁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걸 겉으로 나타내고 싶진 않았다. 자신으로 인해 상대가 불편해하는 건 한단 역시 싫었다. 감정을 숨기는 게 능숙하지 못한 스스로를 한심해하며 규혁에게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편하게 주무세요. 여긴 회사가 아니잖아요.”

한단이 이불 한쪽에 규혁이 누울 자리를 마련했다.

자신만 얌체처럼 편하게 자는 건 싫었다. 그 정도로 뻔뻔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저도 누울게요.”

그러면 그도 누워 자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단의 동작을 규혁의 눈동자가 따라갔다. 모로 누워 벽에 기댄 규혁을 빤히 보며 일부러 담담한 표정을 했다. 전혀 불편하지 않다는 듯이.

천천히 팔짱을 풀고 한단과 나란히 있는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규혁 역시 모로 누워 한단과 눈동자의 높이를 맞췄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동자에선 미묘한 차이가 발생했다.

한쪽에서는 설렘과 들뜬 감정이, 다른 한쪽에서는 긴장과 어색함이 흘렀다.

눈을 먼저 감은 이는 한단이었다.

먼저 등을 돌린 이도 한단이었다.

규혁 몰래 긴장으로 흐트러진 호흡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이도 그녀였다.

반대로 규혁은 한단의 뒷머리를 보며 작게 숨을 골랐다.

결국, 도돌이표가 되어 버렸다.

한단은 등 뒤에 아까보다 더 뜨거운 화로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태연한 척 눈을 감았다.

탁!

이번에 불이 꺼졌다.

규혁이 만들어 내는 소리들이 어둠의 시작을 알렸다.

일어났다 앉는 소리, 이불을 걷고 다시 덮는 소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지막이 내쉬는 한숨 비슷한 소리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한단의 귀로 세세하게 들어갔다. 입술을 작게 물어 감긴 눈에 힘주며 횡성의 깊고 어두운 새벽을 보낼 마음의 준비를 다져 나갔다. 마치 큰 시합을 앞둔 격투기 선수처럼 격렬하게 날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불면을 들키지 않으려 했다.

그날 밤, 꿈은 꾸지 않았으나 잠도 편안하게 자지 못했다.

아침 일찍 강원도의 찬물로 얼굴만 씻고, 할머니가 아침을 차려 주신다고 할까 봐 먼저 인사하고 집을 나왔다.

다행히 눈은 새벽에 그쳤고, 해가 뜨려는지 동쪽 하늘이 노랗게 환해져 갔다. 헛바퀴만 돌던 차는 검은 아스팔트 도로 위를 무난하게 달렸다.

아침 식사를 말하는 규혁에게 한단이 답했다.

“간단하게 해결해요.”

마음 같아선 그대로 서울까지 가고 싶었지만 그걸 티 내진 않았다. 불편하지 않게 해 주려는 규혁의 배려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주 앉아 갓 내린 커피와 따끈하게 구운 빵을 먹으면서 휴게소 밖을 보았다. 햇살에 눈이 제법 녹아내렸다.

“녹았네.”

“응?”

한단의 혼잣말을 놓치지 않고 규혁이 되물었다.

“눈이요. 밤새 그렇게 많이 내리더니 햇빛에 몇 시간도 못 버티고 녹아서요.”

그러면서 한단은 어젯밤 규혁이 만든 눈사람을 생각했다.

“눈사람도, 녹았겠죠?”

“아마도. 왜 아쉬워?”

“조금요.”

“기회 되면, 또 만들어 줄게.”

뜻밖의 말에 어떤 표정으로 반응해야 할지 몰라 한단은 시선을 내려뜨렸다. 이번엔 불편함이 아닌 다른 것이 한단의 귀를 붉게 만들었다.

“먹어요, 부 차장. 차 밀리기 전에 서울 가야지.”

한단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고, 휴게소에 온 지 채 10분도 안 돼 두 사람은 다시 차에 올라타 서울로 향해 갔다.

가는 동안 한단의 시선은 내내 창가에 머물렀다. 귓바퀴는 여전히 붉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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