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Prologue
책임 연구원 부한단.
비서의 안내를 받아 이규혁 본부장 집무실 문 앞에 선 한단은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연구소 소속의 계측 부서를 분사(分社)하는 것과 동시에 본부장인 그가 CT 테크놀로지를 관둔다 했다. 본사 잔류와 분사 이직은 해당 부서 직원들의 개인 판단에 맡기겠다는 것이 경영진의 지침이었다.
그러자 직원들은 술렁거렸고, 누군가는 말했다.
“이직하는 놈은 머리에 총 맞은 놈이야. 이왕이면 큰물에서 놀라고, CT에 있는 게 낫지.”
그렇다면 본부장 집무실 앞에 서 있는 한단은 분명 ‘총 맞은 놈’에 속했다.
거대 기업이 주는 혜택엔 복지와 월급은 물론, 가치 브랜드라는 것도 포함됐다.
‘CT’ 직원이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됐다.
‘어머, 공부 좀 했겠는데.’
‘CT 입사 시험이 수능보다 난이도가 더 높다면서요.’
‘CT에서 5년만 일해도 서울에 웬만한 아파트는 살 수 있을 정도로 연봉이 세다고 하던데요.’
문 앞에 선 한단은 눈에 힘을 줘 감았다 떴다. 입 안에 있는 침들을 모아 목으로 꿀꺽 삼키곤 손을 말아 쥐어 노크했다.
“네, 들어와요.”
차분하고 건조한 음성이 문밖으로 새어 나왔다. 손잡이를 돌림과 동시에 가슴을 들썩여 혼자만 알게끔 숨을 몰아쉬었다. 열린 문 사이로 발을 디뎌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직무 테이블 위로 연한 갈색의 종이 박스와 상체를 약간 굽혀 서랍 속 물건을 꺼내는 본부장의 움직임이 보였다. 하얀 와이셔츠에 짙은 감색 넥타이를 매고, 슈트 재킷은 옷걸이가 아닌 의자 등받이에 걸어 놨다.
잘 정돈된 머리칼은 칠한 듯 검었고, 가지런한 눈썹과 오뚝한 콧대에선 수려함과 지적임이 동시에 보였다.
“저, 개발 2팀 부한단입니다.”
다소곳한 자세로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얼굴을 들었다.
본부장은 굽혔던 상체를 펴고 한단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했다.
“부한단…… 선임? 책임?”
본부장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직급을 물었다.
한단이 소속된 CT 개발 2팀에만 백여 명의 직원들이 있고, 본부장이 그들을 일일이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는 걸 안다.
“올해, 책임 됐습니다.”
“아, 그래요. 축하해요.”
또다시 본부장이 한단을 보며 웃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가 아닌 남에게 보여 주는 겉도는 미소란 것을 한단은 모른다. 친밀감 없는 사람을 상대할 때 낯섦과 어색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만든 그만의 표정이라는 걸.
“무슨 일로?”
본부장을 보러 온 목적을 말해야 하는데 목구멍이 까슬까슬하니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아 한단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음……. 차라도?”
뻣뻣하게 서서 말도 못 하고 붉어진 얼굴의 한단에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상대의 긴장감을 조금이나마 풀어 주려 하는 본부장의 작은 배려가 보였다. 시간을 더 끌면 바닥까지 내려간 ‘용기’가 한 줌도 남지 않고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을 달싹여 목소리를 쥐어짜 말했다.
“분사로 이직하고 싶습니다.”
작지만, 분명히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한단이 말했다. 미소가 남았던 본부장의 얼굴이 잠시 굳어지더니 다시 그만의 처세술인 미소가 만들어졌다.
“이유, 물어봐도 될까?”
놀랍다는 반응 따윈 본부장에게 없었다. 침착하게 업무 테이블을 나와 차와 잔이 놓인 창가로 향했다.
한단이 포트의 스위치를 누르는 본부장의 동작을 좇으며 어느 타이밍에 답을 할지 가늠했다.
“계측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본부장님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너무 떨었는지 마지막엔 목소리마저 울림처럼 나왔다.
만약 본부장이 왜 계측에 관심이 많은지 물을 걸 가정해 밤새 준비한 말들을 곱씹으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계측의 정확성과 정밀성, 그리고 광학에 관심이 많아 학부 때도 따로 공부했습니다. CT에 입사해 정밀 계측을 하고자 했으나 전공 업무와 다르다는 이유로 부서 배치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계측 부서가 분사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열망이 다시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분사하는 회사로의 이직을 요청합니다.
그게 준비해 온 마지막 문장이었다.
차를 내리는 동작에 따라 와이셔츠 속 등과 어깨, 그리고 팔의 근육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한단의 시야에 들어왔다.
“앉아요.”
두 손으로 찻잔을 들고 한단에게 소파에 앉기를 권하며 본부장도 앉았다.
감사하다고 작게 말한 후 잔을 받는데 본부장의 손가락에 반지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약지의 밝은 피부색만이 얇은 반지의 흔적을 알렸다.
“연봉은 CT와 같습니다. 단, 그 외 혜택은 없습니다. 근무 조건, 장담 못 합니다. 그래도 나와 하고 싶다면 환영해요.”
이직의 이유를 캐묻지 않고 환영한다는 본부장의 말이 감격스러울 정도로 고마웠다. 짓눌렸던 긴장감과 부담감이 내려갔다. 벌떡 일어난 한단이 깊게 고개를 숙이며 상기된 음성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예?”
“큰 집 두고 단칸방으로 온다고 하니.”
큰 집은 CT를, 단칸방은 계측 부서의 분사를 뜻했다.
본부장이 한 손을 들어 차를 마시며 예의 그 미소를 보였다. 상대를 배려하는 미소, 어색함을 단번에 날려 주는 눈빛이 한단을 향해 있었다. 본부장의 검은색 눈동자와 한단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블랙홀.
순간 한단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였다. 주변 행성과 빛마저 빨아들이는, 검은 우주 공간보다 더 검은 블랙홀. 주변 모든 사물과 공기가 본부장의 눈동자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한단 자신도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아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저는 그만 나가 보겠습니다.”
“차는?”
“아…….”
미처 생각 못 했다는 얼굴로 응접 테이블 위 찻잔을 보며 다시 앉아야 하나 생각하는 그때, 본부장이 말했다.
“기회는 또 있겠죠.”
괜찮다고, 나가도 된다는 의미로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여 말했다.
한단은 문이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열 발자국 정도 걷는 동안에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본부장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 ‘훅’ 하며 숨을 토해 냈다. ‘해냈다’는 생각보다 ‘나왔다’는 것이 더 긴장을 풀게 했다.
띠릭, 울리는 알람 소리에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꺼냈다.
[어떻게 됐어?]
CT 입사 동기이자 대학 친구인 장소영이 문자를 보냈다. 천천히 복도를 걸으며 꾹꾹 화면을 터치하는 한단의 어깨가 약간 좁아졌다.
[환영한대.]
문자를 보내자마자 득달처럼 진동하는 휴대전화를 보며 한단이 희미하게 웃었다.
“여보세요.”
- 어디야?
“지금 막, 본부장실 나와서 사무실로 가려고.”
- 정말, 이 본이 오케이 했단 말이지?
연구소 개발은 총 세 팀으로 운영되었고, 직원들끼리 본부장을 지칭할 땐 앞에 성을 붙였다. 개발 1팀 박 본, 개발 2팀 이 본, 개발 3팀 윤 본으로.
“응.”
- 우와! 웬일? 너처럼 소심쟁이가.
“그러게. 실은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어.”
- 이거 축하해야 해? 말려야 해?
원하던 분사 이직에 축하를, 대기업 CT를 나간다는 말에는 말린다는 표현을 소영이 썼다.
한번 대화가 시작되면 궁금한 것을 다 묻고 답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을 알기에 한단이 먼저 말했다.
“나, 인사팀 가서 퇴직 신청해야 해.”
소영과의 전화를 끊곤 바로 인사팀이 있는 총무 부서로 갔다. 총무실 문 앞에 선 한단의 다리는 이제 후들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긴장감이 아닌 설렘마저 들었다.
손에 힘주어 문을 열자 총무팀 직원이 한단을 보며 말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사직서 용지를 받으러 왔습니다.”
CT 자체 사직서 문서엔 퇴사 이유, 퇴사 목적, 개선할 업무, 사우 관계, 부당한 업무 지시를 받은 적이 있는지 등 각 항목별로 칸칸이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총무실 안쪽 끝자리에서 웬 남자가 고개를 위로 올려 파티션 너머 한단을 보며 물었다.
“사직서 용지를 받기 전에 저와 상담을 했으면 합니다.”
한단이 고개를 비스듬히 옆으로 돌려 보니 인사팀장의 얼굴이 보였다.
상담은 일종의 통과 의례 같은 것이다.
퇴직 전,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기에 한단이 밝은 얼굴을 하며 상담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