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길
저택은 고요했다. 굴러들어 온 돌 하나쯤 내보낸다 해서 흐트러질 자리도 아니었거니와 피차 수선을 떨며 난장 칠 성미가 아닌 까닭이다. 바타렐을 내보낸 지 닷새, 어림잡아 이쯤이면 충분히 백작이 일을 쳤을 것이었다. 허면 지존께서는 언제쯤 답을 주실는지.
리비아는 퍽 여유롭게 수를 놓으며 시간을 보냈다. 요한이 보았다면 이럴 때에 천 조각이나 붙잡고 있을 여유가 있느냐고 일갈하며 히스테리를 부렸겠지만 함께 응접실을 지키고 있는 것은 미슐레뿐이었다. 이전보다 수배는 음산해진 얼굴로 눈을 내리깐 채 그녀의 뒤에 시립한 사내는 그저 고요했다. 마치 때가 되어 시드는 꽃처럼 조용히, 고통도 번민도 홀로 삼킨 채 고개를 늘어뜨리는 것이 훤히 보였다. 구태여 알은체하지 않더라도 그 역시 자신이 알았음을 깨달았을 테다. 그녀가 흥미를 가진 구석은 그 부분이었다. 헌데 어째서 묻지 않는가. 무엇이 됐든 그 알량한 머리통으로 생각한 것이 있을 텐데.
그는 언제고 자신이 이해하기에는 기이한 구석이 있는 사내였으나 적어도 살을 섞기 전까지는 그가 아는 것이, 행하는 것이, 바라는 것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헌데 지금은 그가 특별히 감추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쯤이라면 배곯은 짐승처럼 어정거려야 옳을 텐데.
“미셸.”
“예, 부인.”
“고요하군요.”
“주인께서 건재하신즉 소란할 이유가 없음을 저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음울할 뿐 경직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당신도 그 안에 속하나 보군요.”
“혹 제게 모자람이 있었다면 꾸짖어 주십시오.”
“그걸 바라나요?”
“예.”
리비아는 설핏 언짢음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꿇어요.”
사내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조아렸다. 다만 테이블로 그녀의 앞이 가로막혀 있었기로 그 우편에 자리했다. 마치 주인의 곁을 지키고 앉은 번견처럼.
그 충직함에는 변심이나 흐림 따위가 조금도 비치지 않건만 무엇이 제 심기를 흩트리는지 손에 잡히지 않음이 언짢다. 그녀는 주저 없이 날것 그대로 이해되지 않는 점을 지적하려 하다 멈추었다. 그 어떤 말을 꺼내도 체면이 상할 만한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전전긍긍하지 않나요? 태연한 꼴이 마음에 들지 않네요.
못 할 말은 아니었지만 내키지도 않았다.
결국 여자는 수를 놓던 천을 내려놓고 손을 비웠다.
“당신 스스로 내가 무엇을 마뜩잖아 하는지 알고 있나요?”
“……예.”
턱을 까딱인다. 미슐레는 바닥에 드리운 그녀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모양을 보며 몸짓을 파악하고 입을 열었다.
“개가 인간의 행색을 하여 심기를 어지럽힌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리비아의 불쾌한 혼란을 명쾌하게 매듭짓는 발언이었다. 개가 인간처럼 굴어서.
그래,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아직 자신을 거스르면 아니 되었다. 인간이 되어 사리를 분별해서도, 스스로 이해득실을 따져서도 안 되는. 순전히 주인인 리비아 모브레이의 목적을 위해 살신성인할 훈련된 번견으로 존재해야 했다. 그것이 리비아가 계획한 모습이므로.
다만 찝찝한 구석이 남아 묘하게 뒷맛을 어지럽혔다. 그는 순전히 육체적 관계를 짚은 걸까? 아니면…….
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언제든 죽이려면 할 수 있다. 다만 그 이상으로 충직하고도 요한과 상호 견제적인 긴장감을 유지하며 제 손아귀에 붙들려 있을 법한 물건이 없을 뿐.
대체재가 없는 필수라니.
이제껏 간과했던 이물이 불현듯 구두 속에서 발을 찌른 듯한 기분이었다. 이전까지의 평온한 분위기는 어느샌가 흔적도 없었다. 미슐레는 묵묵히 입을 닫고 있다가 리비아가 좀 더 상념에 잠기려는 순간에 말문을 텄다.
“저의 연모는 의심하시더라도 충심만큼은 믿어 주십시오.”
“그러마고 대답하고 싶지만 불가능한 이야기군요.”
“당신께서 그 무엇도 믿지 않음은 압니다. 다만 이것은 라시니 몬테필트로에게 주어진 영지와 요한 구르디예프에게 주어진 모브레이의 영달과 같이 제게 하사해 주셨으면 하는 소원입니다.”
그는 전에 없이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차근차근 적막을 갈라놓았다. 마치 고해 성사와도 같은 경건함이 너른 등 위로 내린다.
“저는 차선이 없습니다. 몬테필트로처럼 처신이 좋지도 않고, 구르디예프 경처럼 전능하지도 않고, 백작저로 보낸 그것과 같이 유연한 패가 되지도 못합니다. 그저 부인의 곁에서 지금과 같은 쓰임을 지키는 것 외에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몸이오니, 모쪼록 저를 다른 것들처럼 의심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까지와 같이 그저 자연히 당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섬길 수족으로만 여겨 주시면 저는 이 혼을 유황불에 태워서라도 그 뜻에 부응할 것입니다.”
그는 고요하게 자신의 꿇은 무릎 근처에 자리 잡은 그녀의 섬세한 치맛단에 눈을 둔 채 입을 다물었다. 긴장한 기색이었다. 실제로도 감히 그가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것은 최초였으므로 리비아 역시 적잖이 신경을 썼다. 당신이 아니라면 나는 그 무엇도 되지 못한다는 말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이르면서도 치욕 한 점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그녀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 개의 욕망을 인간이 이해할까. 그러나 욕망을 성토하는 것은 인간의 방식이었다. 리비아 모브레이는 여태껏 그랬듯 인간은 신뢰하지 않는다. 그녀가 신뢰하는 지표는 욕망과 행동뿐이었으므로.
“진정 그것으로 족하나요?”
“저의 쓰임이 두루 넓어져 부인을 더 충실하게 모실 수 있기를 바랐던 적이 있지만 그것은 부인께서 제 육신을 사용해 주신 것으로 충분히 족하였습니다. 그러니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만이 저의 바람입니다. 이 이상의 것을 바랄 만큼 견문이 넓지도 않을뿐더러, 개에게는 불필요한 것이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부인의 곁에 있기 위함인데, 다른 것을 바라 곁을 잃으면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드물게 그녀의 말문이 막혔다. 이해할 수 없는 종류를 맞닥뜨린 인간으로서 지당한 반응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계산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변수가 존재한다는 것은 좌시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리비아의 표정이 냉담해졌다. 미슐레는 역설적이게도 불쾌감을 드러내는 그녀의 낯에서 만족감을 느꼈다. 순수하게 그녀가 자신에게 반응해 준 것이 기뻤다. 자애도 쾌락도 재물도 영광도 아무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포웰의 귀부인이라면 응당 그래야 하기에 상대가 누구이건, 포웰 공작 부인이 누구이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진심 앞에서 몰이해와 언짢음을 느끼고 침묵하는 것은 리비아라는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고, 미슐레 호엔베르크만이 그녀에게서 이끌어 낸 반응이었다. 다른 것들과 달리 유일한 저만의 반응.
지난날 초상 속의 여인처럼 창밖의 풍경을 헤아리던 그녀가 차라리 인간 같은 감정을 가짐으로서 생생해졌다. 그것이 못내 견딜 수 없을 만큼 황홀했다.
물론 그녀에게 말했던 것처럼 어떤 방식으로든지 당신의 곁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히 바라는 일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오래 남고 싶었다면 이런 말을 해선 안 됐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충동을 주워섬기고야 마는 것이 열띤 사랑에 눈먼 자들이지 않은가.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뱃속을 저미는 것 같은 열감에 치를 떨었다.
“그러니 부인, 의심스러우시다면 차라리 저를 죽여 주십시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비이성적인 충동이 그를 허물어뜨렸다. 미슐레는 그녀의 치맛자락에 입 맞추며 뇌까렸다.
“믿어 달라 빌지 않겠습니다. 그 누구도 당신의 결정에 첨언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저의 역할임을 압니다. 그러니 저를 곁에 두고 싶지 않으시다면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버리지 말고 차라리 죽여서 묻어 주십시오. 6피트 아래에서나마 당신의 공간에 속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만한 삶이었다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자처한 굴욕은 차라리 달았다. 그녀에게 입 맞출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족할 만치 열렬한 사모였다. 도대체 자신에게 이런 열의가 있을 수 있긴 했던가 싶을 정도로 맹목적인 감정이 충만했다.
그러나 이 절절한 구애 앞에 가슴 떨려 하기에는 리비아는 너무도 건조한 인간이었다. 악마의 씨로 말미암아 태어났고, 평생을 위압과 지배 속에 살았다. 얼마든지 꾸며 낼 수 있는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진 사랑 따위를 믿고 마음을 내어 주기에는 그녀의 삶이 녹록지 않을뿐더러, 내키지도 않았다. 생존 앞에 무형의 감정 따위는 무의미함을 보고 자란 여자는 예기치 못한 고백에 설레 하기보다도 자신의 예측과 통제 밖의 변수에 날을 세우는 것이 당연했다.
리비아 모브레이는 철저히 이해한 것과 자신의 계산과 예측 속의 것에만 관대한 인간이었다. 그 밖의 것들을 견딜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견디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렇게 정했고, 그러기 위해서 구역질 나는 아비의 욕망에 순종하는 척 공작 부인이라는 지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 것을 외면하는 인간도 못 된다는 것이 그녀의 침묵을 늘린 요인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것에서 눈을 돌리고 방치하게 되면 삿된 싹이 자라기 마련이었다. 철저한 승리에 기반 된 확신이 아니라, 무지에서 비롯된 교만이 사람을 좀먹으면 거꾸러지는 법이다. 그래, 지금 고초를 겪고 있을 그녀의 아버지처럼.
살아남기 위해서는 낱낱이 파헤쳐야 한다. 원치 않는 것이더라도 이해한 뒤에 처분하여야 후일을 도모하기에 수월하니까.
검고 불온한 것들이 그녀의 뱃속을 뒤집어 놓는 것처럼 울렁거린다. 리비아는 입 밖으로 티 나지 않게 이를 사리물며 호흡을 골랐다. 그는 여전히 바닥에 이마를 댄 채 자신의 선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곁눈조차 뜨지 않은 신실함조차 그녀의 예민해진 신경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 부인.
그들의 적막을 가른 것은 시녀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고요하게 용건을 알렸다. 그 건조함에 정신이 든다.
― 폐하의 전령이 부인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 그랬지. 아버지를 마저 죽여야 한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리비아는 목소리를 죽여 빠르게 명령했다.
“내가 돌아와 부르기 전까지 근신하도록 해요. 요구한 포상에 관한 것은 차후 논하죠.”
“예, 부인.”
미슐레는 평이하다 못해 초연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회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이도록 해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군더더기 없이 당장에 교차하듯 쉐리가 연 문으로 미슐레가 나가고 낯선 전령이 들어섰다. 여자는 금세 명정해진 이성으로 미소 지었다.
전령은 아주 긴장된 태도를 고수했다. 다만 그것이 눈앞에 있는 공작 부인을 향한 경외라기보다는 학습된 공포로 인한 위축에 가까운 것이 또렷했다. 서른 남짓 되었을까. 그는 식은땀이 번들거리는 얼굴을 반쯤 숙인 채 조금 재게 말했다.
“폐하께옵서 하문하시기를, ‘아비의 빚을 대신 치를 용의가 있느냐’ 하셨습니다.”
비밀리에 사람까지 보내 가며 할 소리가 이게 다인가 싶었으나 전령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진실로 이것이 전부인 듯했다.
시녀는 언짢은 듯한 기색을 숨기면서도 리비아의 낯을 살폈다. 그녀는 오히려 흥미로워 보였다. 여느 때의 그녀였다. 조금 전 자신이 들어서며 느낀 기류 따위는 오해였다는 듯이.
리비아는 애당초 도발적인 수단으로 그를 긁은 다음, 이런 식으로 곱게 전령을 보낼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못해도 가당찮은 불이익부터 가한 다음 제 발로 걸어 들어오게 할 것으로 예상했건만, 생각보다는 본새가 있으면서도 경우는 없는 모양이었다.
“신하 된 도리로서 폐하께 불편한 점이 있다면 나서서 살피는 것이 옳을 것일진대, 하물며 부친께서 끼친 누인 바에야. 그럼에도 이리 긍휼히 여기사 자비를 베푸신 은덕에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기다렸다는 것처럼 청산유수로 지껄이는 말에 전령은 크게 안심한 듯 화색을 띠었다. 목숨이 걸렸었을까. 풍문으로 들은 만큼 목숨에 가차 없는 자인 것은 확실했다.
“허면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해가 지면 모시러 올 것이니 채비해 주십시오.”
“그러죠.”
전령은 그녀에게 깊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배웅하기 위해 시녀가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도 빨리, 손수 문을 열고 거의 도망치듯 나섰다. 리비아는 제 앞에서 늘 그랬듯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움직이는 이들을 보며 생소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가,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금세 낯을 가다듬기는 하였으나 심기가 어지러운 것은 확연했다.
* * *
리비아는 오랜만에 다시 베일을 드리웠다. 그녀는 해가 저무는 풍경을 2층에서 가만히 지켜보며 저 멀리서부터 한 대의 마차가 정문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무늬도 장식도 없는 그저 까만 마차. 널찍해 뵈긴 했지만 마부도 달랑 한 명뿐인 꼴을 어찌 보아야 할까.
요한은 염려와 언짢음으로 일그러진 낯짝으로 리비아를 그저 노려볼 뿐이었다. 제게 상의도 없이 덥석 궁으로 가겠다니 기가 차는 것은 자연한 일이었다. 달래 줄 맘이 없을 뿐이지.
“방비를 부탁해요.”
“……정녕 가십니까?”
“황명이니 받잡아야 하지 않겠어요?”
“호엔베르크 경이라도 대동하십시오.”
“안 돼요, 잘 보여야 하니까.”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단단히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굳이 황실과 척을 져 좋을 것도 없을뿐더러, 제국에 적을 둔 이상 황제의 말에는 굽힐 줄도 알아야 한다. 반역도가 될 게 아니라면야.
계단을 가로지르는 구두 소리만이 적막한 홀을 갈랐다. 쉐리를 필두로 한 고용인들이 배웅하기 위해 집합해 늘어서 있었다. 그녀는 눈도 두지 않고 그 사이를 유유히 가로질러, 바깥으로 나섰다.
마부가 공손히 모자를 벗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눈썰미가 조금만 있는 자라면 누가 보아도 그가 일반적인 마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근육이 단단히 붙은 몸과 기골이었다. 리비아는 긴장한 기색은커녕 그저 지루한 것처럼 턱을 빼 들고 그것이 문을 열어 자신을 모시기를 기다렸다.
“주인님.”
늘상 따라 나와 그녀를 모시는 것은 미슐레의 역할이었으나, 눈치껏 그 자리를 대신한 집사가 희미하게 염려 띤 눈빛으로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말을 삼켰다. 리비아는 달라진 호칭에 미소를 감추지 않으며 사뿐히 마차에 올라 집사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신하 된 도리로 주인을 뵈러 가는 것뿐이에요, 그리 염려 깊은 얼굴 하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
“그저 늙은이의 주책이지요, 저희는 늘 주인님께서 무사하시기만을 빌고 있습니다.”
“알아요.”
그의 손을 얕게 힘주어 잡았다가 놓아준 리비아가 반듯하게 정면을 보고 앉자, 마부가 문을 닫고 제 자리로 향했다. 마차가 처음부터 속도를 내 달리기 시작하고, 그녀는 커튼을 쳐 창을 가렸다. 아무런 빛도 없이, 그저 이따금 흔들리는 커튼 사이로 달빛이 스밀 때 외에는 제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어둠이었다. 위압감을 조성하는 것은 어찌 고압적인 사내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짓을 하는지, 그녀는 작게나마 실망이라도 할 것 같았다. 미쳤단 소리가 그리도 자자하기에 어떤 괴이한 마중을 보내실는지 고민한 것이 무색할 지경이다.
마차는 꽤 오랜 시간을 달렸다. 리비아는 익숙한 어둠 속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서 평온하게 수를 헤아렸다. 마부조차 한마디 안부 여쭙지 않는 적막 속에서 희미하게 조르주를 떠올렸다.
* * *
도착했다는 말조차 없이 덜컥 멈춰 선 다음 문이 열렸다. 마부의 냉막한 시선과 그녀의 건조한 시선이 맞부딪히고, 찰나간의 불쾌한 탐색 이후에야 그가 에스코트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
리비아는 밀랍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사뿐하게 지면을 밟았다. 마부의 입에서 짧게 신음이 터졌다. 리비아는 태연하게 그의 손을 떨쳐 내고 옷자락을 정돈했다. 평생을 로덴바흐의 영애로 자라 공작가까지 먹어 치운 자신이다. 이깟 우습지도 않은 기 싸움에 겁을 먹을 것을 기대했다면 대단히 유감스러운 수준임이 틀림없었다.
마차는 낯선 곳에 당도해 있었다. 양식을 보아하니 황궁인 것은 맞으나, 자신이 와 본 적 없는 곳인 것을 보아하니 뒷길쯤 되는 모양이었다.
마부는 금세 통증을 갈무리하고 길을 잡기 위해 앞장섰다. 보는 눈조차 없으니 아주 마부 행세는 관둔 모양이었다. 리비아는 자신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은 빠른 걸음을 어렵잖게 뒤따라 걸으며 티 나지 않도록 신경 써서 주변을 살폈다. 변경백의 영애로 자라며 사교계를 주름잡았단들 황실에 여인이 없으니 올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일이 어찌 되든 죽어 나올 생각은 없으니 길을 익혀 두는 것이 나으리라.
궁 내부에도 사람은 전무했다. 뒷길을 이용하는 것도, 이렇게까지 은밀한 것도 경우에 맞는 방식은 아니다. 사안이 사안이니 이해는 하면서도 뻔한 예감이 그녀를 에워쌌다.
“모셔 왔습니다.”
짧게 세 번을 끊어친 노크, 앞뒤 설명조차 없는 보고, 지나치게 작고 평이한 문.
― 들라.
평온하다 못해 나른한 목소리였다. 낮고, 울리는 듯한.
리비아는 베일 끝자락을 가다듬은 뒤 마부였던 자가 열어 준 문 안으로 주저 없이 들어섰다.
“부르심 받잡습니다, 리비아 모브레이입니다. 폐하.”
방 안은 컴컴했다. 희미한 광원 하나가 저 멀리서 타오르고 있었으나 무색할 지경이었다. 화답은 들려오지 않았고,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약한 숨소리만 이따금 귀를 간질였다.
고개를 들란 말도, 알은체도 들려오지 않고 그저 침묵뿐인 그는 노골적으로 그녀를 관찰했다. 반듯하게 숙인 몸, 한 치 흔들림 없는 자세를 유지하는 힘, 긴장하거나 당황한 꼴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낯.
조금쯤 우스워졌다. 그녀는 조금의 절박함도 띠지 않았다. 차를 마시거나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불렀으니 찾았고 만났으니 인사 올린다는 것뿐인 군더더기 없는 무심함.
에피알테스는 천개를 걷었던 손을 내리며 몸을 세워 쿠션에 기대어 앉았다.
“좋은 밤이군, 부인.”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리비아는 그의 무례한 작태에도 낯 한번 붉히지 않고 허리를 폈다.
“예.”
그리고 황제가 기껏 꺼낸 인사를 깔끔하게 잘라먹었다. 대화가 이어질 여지조차 없는 냉랭함이다. 귀부인들의 교본이라는 공작 부인이 할 만한 실수는 아니거니와, 평이하게 어둠에 눈을 적응시키기 위해 느리게 깜빡이고나 있는 얼굴에서도 당황은 비치지 않았다. 명백한 공격성.
해 저문 시각에 황제의 내실로 은밀히 부름받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건조한 태도였다. 에피알테스는 설핏 웃음을 머금고 목을 울렸다.
“익히 들었네, 짐의 여인을 도와주었다지?”
“염두에 두어 주시다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리비아는 빙긋이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아비의 빚으로 저를 부르신 줄로 알았습니다만.”
눈을 지그시 내리깐 채 희미한 빛으로 인해 길어진 그림자를 드리운 그녀는 마치 조소하는 것처럼 보였다. 책잡기에는 흠결 없고, 심기는 묘하게 긁어내리는 태도. 물론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였다면 꽤 효과적인 자세였겠으나 에피알테스 로그즈데일은 어지럽혀진 심기를 해소하는 것에 앞뒤 재지 않는 위인이었다. 그것을 모를 공작 부인이 아니리라, 애당초 로덴바흐 백작이 들쑤셨던 그 장소를 아는 것은 생전의 포웰 공작, 즉 그녀의 남편뿐이었다. 그가 안배한 것을 이제 와 친부를 향해 꺼내 드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물며 광왕이란 평이 자자한 저를 자극하면서까지.
그러니 흥미가 솟았다. 무엇이 그리 아쉽고 욕망이 일어서 좀 더 온건하고 우아한 수를 쓰지 않고 직관적이다 못해 얕은수를 썼는지. 그는 제 하관을 느릿하게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것을 위해 불렀지.”
깜빡, 불빛이 흔들렸다.
“로덴바흐 변경백이 짐의 정원을 해쳤네.”
“그렇군요.”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 꼴을 보라. 마치 기다렸다는 양, 묻지 않아도 자신이 배후에 있음을 시인하는 작태였다. 에피알테스는 농밀한 목소리로 은근하게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허나 그것은 포웰 공작밖에 모르던 일이야. 그에게서 받은 선물이었으니까. 짐작하는 바가 있는가? 짐은 영 자네들의 시시비비에는 관심이 없어 아는 바가 없거든…….”
“제가 그리했습니다.”
리비아가 웃음기 만연한 투로 다정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눈을 들어 올리며…….
그래, 그 녹빛 눈을.
“그에 관해 하문하고자 하심이 아니었습니까?”
저 무저갱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눈을 하고, 관조하듯 고요하게 웃었다. 오싹할 정도로 소름 끼치는 눈이었다. 마치 인간 아닌 것, 들춰선 안 될 것을 알아채고야 만 듯한 섬뜩함이 있었다.
다만 그것에 겁을 먹거나 움츠러들기에는 에피알테스 로그즈데일이라는 사내가 지나치게 건조했고, 딱 그만큼 권태로웠다. 그는 저도 모르게 제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아 축이며 대꾸했다.
“좀 더 군더더기 있는 성격일 줄로 알았는데.”
“일개 범인에 불과한 제게 과분한 관심이십니다. 허나 저의 개인적 습관과 별개로 폐하께서 원하시는 바가 있다면 그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 신하 된 자의 도리라 여겼으므로 넘겨짚었습니다. 죄가 된다면 달게 받지요.”
“글쎄, 그건 조금 더 뒤에 논하는 게 좋을 것 같군, 부인. 나는 그대의 속셈이 알고 싶거든.”
“하문하소서.”
“왜 그랬지?”
그의 질문은 간단했다. 왜 굳이 당신이?
겉으로 드러난 그녀의 행적은 전적으로 집안의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삶이었다. 결혼도, 결혼 생활과 가문의 장악도, 공작의 사후에도 흔들림 없는 평탄함도, 소문이 된 그 방탕함마저도 그녀가 로덴바흐 변경백의 고명딸이라는 태생적으로 탄탄한 지위를 지니지 못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구태여 그를 거꾸러뜨리려 들다니?
물론 로덴바흐 변경백이 사랑받을 만한 위인이 아니기는 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사랑스러운 아버지, 의지하고 단란한 가문을 원하는 인간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진실된 답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적당한 답을 드릴까요?”
시건방지다 못해 위험스러운 태도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몸을 모로 뉘며 대답했다.
“적당한 답부터 듣지.”
“원하시잖습니까. 변경의 군권.”
“짐이?”
“예, 폐하께옵서 신경 쓰고 계시지 않음을 압니다만, 폐하의 치세에서 유일하게 해를 끼칠 만한 것이라면 정통 귀족파를 위시한 변경의 군세일 것입니다. 폐하께옵서 밟아 오셨던 귀족들의 생피가 채 마르지도 않았으니 지속적인 충정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들은 머지않아 자신들의 유력함에 대한 확신을 다지고 반란을 꾀할 것입니다. 포웰 공작의 사후이니 지금 다음 황제로서 옹립될 공산이 가장 큰 것은 로덴바흐 변경백일 것. 그러니…….”
그녀는 건조하고 단조롭게 말을 맺는다.
“그를 치시지요.”
정적이 흘렀다. 다름 아니라 변경백의 딸, 그의 권력으로 가장 수혜를 입는 자의 발언이라기에는 믿을 수 없는 수위였다. 빈말이라기에는 빠져나갈 틈이 없고 삭막하다. 에피알테스는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진실된 답은?”
“그를 죽이고 싶습니다.”
“이건 한술 더 뜨는군, 이유는?”
“한 집안에 맹주가 둘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과격하다 못해 들은 귀를 의심할 만한 수위의 발언이었으나 그녀는 오히려 열렬히 욕망함을 드러내길 숨기지 않았다. 날것 그대로의 욕망, 집착에 가까운 열기.
그에게서 제지의 말이 나오지 않자 그녀는 부연을 덧붙였다.
“그를 위시한 포웰의 방계 수장들의 수급을 충심의 표징으로 바치고자 한 바 또한 있습니다.”
에피알테스는 기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한참 동안 광소를 터뜨리다 돌연 뚝 끊으며 서늘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짐이 폭군이란 소릴 들어 우스웠나? 일개 집안 정리에 짐을 끌어들여?”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언제나 포웰은 황실의 충직한 신하입니다.”
“그대는 뤼드베리잖나.”
“모브레이가 된 지 오래입니다.”
그녀는 황제의 심기를 달랠 생각조차 없는지 희미한 환멸 섞인 투로 읊조렸다.
“모브레이가 되는 순간부터 저는 뤼드베리의 적이었습니다. 폐하.”
그 진실된 목소리를 어찌 몰라볼 수가 있을까? 신뢰나 믿음이라는 개념을 잃은 사람마저 그녀의 말에는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저 깊숙한 곳에서 손톱을 세워 살갗을 긁으며 끄집어낸 원념이 뚝뚝 떨어지며 날것 특유의 비린내를 풍겼다. 에피알테스는 먹이를 목전에 둔 짐승처럼 마른침을 삼키며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친부 살해는 온 영토에 광인이라는 평이 자자한 짐도 차마 해 보지 못한 짓이로다. 완전히 패륜이지 않으냐.”
“폐하의 부친은 선황이시니 도리 없는 일이지요.”
그녀는 다시금 부드러운 미소로 낯가죽을 정돈하고 매끄럽게 답했다. 네가 패륜을 하면 그것은 국가 전복에 준하는 행위가 된다고.
기실 에피알테스가 폭군이란 풍문이 자자해도 멀끔하게 옥좌에 앉아 소름 끼치는 폭정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적법한 선황의 적장자로서 보위에 올랐다는 정통성 덕분이었다. 그보다 좋은 출신과 명분을 가진 황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덕분, 즉 선황의 배려에 힘입은 것.
하여 황제는 여태껏 유일하게 황실의 혈통에 관한 것만큼은 결벽적으로 수호했다. 황후를 들이지 않은 것도, 문란한 생활을 하며 간자 짓을 한 후궁들의 목을 베어 후궁전의 안뜰에서 썩어 문드러지게 할지언정 후사는 배게 하지 않은 것도. 일 머리가 없어 모자란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 연신 충심이란 말로 후궁전에 쭉 사람을 바쳐 오는 로덴바흐의 욕심을 모르지 않았다.
에피알테스는 궁금했다. 기꺼이 천륜을 저버리는 여자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굳이 상자를 흔들어 보기보다 당장에 열어 보는 것을 택한 그가 속삭였다.
“하여 짐이 네게 무엇을 주면 좋겠느냐?”
리비아는 진득하게 입매를 늘여 웃었다.
“공작위의 승계를 윤허하여 주소서.”
다시금 침묵이 내렸다. 황제는 느리게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공작위.”
“예.”
“한 번밖에 없을 절호의 기회인데, 구태여 그것을 청하겠다는 말인가? 어차피 조르주 공의 자식도, 그대보다 가까운 혈통도 없잖나. 지금도 충분히 실권은 장악한 것으로 보았는데.”
“허나 이름이 없지 않습니까.”
“그것이 그리 중한가? 지고의 자리를 노려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상적으로 이리도 큰 사냥감을 지고 왔다면 응당 그녀가 바랄 만한 것은 후의 자리임이 틀림없으리라고 내심 여겼던 그는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광인인지라 마치 이해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 리비아를 넘어뜨려 맨살을 헤집고 뼈를 뜯어서라도 들춰 볼 듯한 섬뜩한 열의가 섞여 있었음이 문제였지만, 그는 결국 곱게 자라 예정된 자리를 걸머쥐고 평온한 폭력을 행사해 온 자였다. 살아남기 위해 체면을 버린 적도, 그 이름 하나가 없어 불안에 떤 적도 없는.
리비아는 단호히, 열렬하게 답했다.
“제게 후의 자리는 필요치 않습니다. 저는 이미 한 번 혼인한 몸이고, 적통을 잇기 위해서라면 저보다 좋은 선택지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이름까지 완전히 얻은 완벽하고도 흠결 없는 공작위와 로덴바흐 백작 일파의 파멸뿐입니다.”
켜켜이 쌓여 굳이 헤아리고 싶지 않을 만큼 해묵은 감정들이 들끓었다. 당연스레 자신을 사용하고, 감내한 대가를 진탕 쓸어 갔던 그 걸귀를 지옥에 파묻을 수만 있다면 유황을 안고도 황홀하게 춤출 수 있으리라. 그녀는 광기 어린 눈을 불태우며 노래하듯 혀를 놀렸다.
“폐하, 저를 기꺼이 이용하십시오. 제가 바라는 것을 내리겠노라고 맹세하신다면 당신의 충실한 신하가 될 것입니다. 이 빠진 개를 거느린 주인은 경외받지 못함을 아실 것입니다. 헌데도 변경 태생의 정통하고도 유력한 개를 정녕 거두지 않으실 셈이십니까?”
황제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소름 끼치게 웃었다. 가히 악마적인 여자였다. 이 음울한 골방에는 인간이 없다. 인륜을 저버린 자가 어찌 인간이길 바랄 수 있을까. 그는 충분한 흥미와 동질감을 느꼈으므로 기꺼이 그녀를 맛볼 셈이었다.
“좋아, 부인. 날 즐겁게 해 주게, 허면 내 기꺼이 목의 값을 헤아려 그대를 공작위에 봉하지.”
그녀는 그제야 깊게 황제를 위한 예를 올렸다. 가신이 주군을 뵐 적에 하듯 무릎을 꿇고, 드레스 자락을 기꺼이 구겼다.
“신의 모든 것이 폐하의 뜻대로일 것입니다.”
고결하기까지 한 야망가의 모습을 보며 에피알테스는 진득하게 웃었다.
“그 몸까지도?”
“예.”
리비아는 단출하게 대꾸했다. 필요에 의해 남을 품는 것은 익숙한 일이다. 무엇보다 삽입을 하는 쪽이 우위라는 알량한 확신에 사로잡혀 있는 황제는 그녀에게도 회가 동하는 먹잇감이었다. 요한이 그랬고, 라시니가 그랬듯이, 그 역시 수고로운 유희에 불과하다. 그러니 동요할 것도 없지. 애당초 그의 여성 편력은 유명한 일이고.
“이리 오게.”
제 남성 편력도 만만찮게 유명하다. 과부의 몸으로 황제를 두고 유희하는 것은 충분한 사치가 아니겠는가. 리비아는 바닥을 떨치고 일어나 기꺼이 침대로 다가갔다. 얕게 안쪽의 실루엣이 비친다. 얇은 천을 여러 번 덧대 늘어뜨린 천개 탓이리라. 그 어둑한 천 사이에서 창백할 정도로 하얀 손이 뻗쳐 나와 그녀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베일이라니. 꼭 부덕한 일을 하는 것 같잖은가. 아니면 과부라는 것을 자각하면 짐이 그대를 해하지 않을 것이라 여긴 건가?”
가까이에서 본 황제는 몹시도 아름다웠다. 신년제 따위에도 좀처럼 낯을 비추지 않아 희미해진 지존의 보랏빛 눈과 길게 늘어진 은빛 머리칼을 눈에 담은 리비아가 눈을 접어 웃었다.
“흡족하시리라 여겼기에.”
“하.”
에피알테스는 코웃음 치듯 웃음을 터뜨렸다. 맞는 말이다. 죽은 신하의 아내를 취한다는 상황은 갖가지 부덕을 저질러 온 그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라 아래가 뻐근하게 달아올랐으니까. 그는 산 사람 같지 않을 정도로 건조하고 아름다운 여자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스쳤다가, 낭창한 허리를 더듬어 쓸어내리며 턱선에 입을 맞췄다.
“뻣뻣하기 짝이 없군, 부인.”
“일개 과부에 불과한 제가 어찌 함부로 지존의 육신을 탐할까요.”
겸양의 말이 이렇게도 조롱처럼 들릴 수가 있을까. 그녀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속삭이며 늘어진 자세로 인해 앞섶이 반쯤 벌어진 황제의 가운 차림을 눈에 담았다. 에피알테스는 그녀를 침대 위로 완전히 끌어 올려 제 무릎 위에 앉힌 뒤 상체를 일으켰다. 긴 머리 타래가 매끄럽게 늘어졌다. 사위가 어두운 와중에도 푸르스름하게까지 느껴질 만큼 차갑게 빛나는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리비아의 머리 장식을 능숙하게 풀어냈다. 그와는 반대되는 검은 머리칼이 굽이치며 흘러내리는 것을 만족스럽게 바라본 에피알테스가 베일을 살짝 들치고 그녀의 입술을 핥았다.
“어쩌면 초야 같기도 하고.”
“뜻대로 여기소서.”
“물론 그럴 셈이지만.”
그리고 물어뜯듯 덤벼든다. 리비아는 휘청 뒤로 꺾일 뻔한 허리에 힘을 주고 황제의 키스를 받아 냈다. 그는 거의 금수에 가까웠다. 노골적으로 자신의 암컷을 대하듯 욕정에 충실한 작태, 입술을 거칠게 문질러 비집으며 혀를 밀어 넣는다. 리비아는 그의 두툼한 혀를 빨아 주며 순순히 입을 벌렸다. 그로서는 우악스러운 교접으로 원시적인 서열을 정립하고 싶은 듯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녀에게는 예상했듯 그저 색다른 여흥으로만 느껴졌다. 하기사, 황제가 아니라면 그 누가 리비아 모브레이를 이렇듯 휘두르겠는가?
조금쯤 즐거워진 것을 숨기지 않고 웃음으로 흘리려니 치죄하듯 혀뿌리가 아리도록 강하게 농락해 온다. 단단한 팔뚝이 허리를 가두듯 받친 채 남은 한 손이 치맛자락을 험하게 들치고 그 속으로 파고들어 리비아의 허벅다리를 꾹 쥐고 활짝 벌리게 했다. 얄따란 가운 아래로 수컷의 육신이 느껴졌다. 리비아와 에피알테스의 다리 사이로는 그저 존재의 의미가 없다시피 한 천만이 남았다.
세게 빨아 올리는 추잡스러운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에피알테스가 미끈미끈하게 젖은 입술로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다 이를 세워 목깃을 물어뜯었다. 레이스와 얇은 금줄 장식이 침대 위로 흩어진다. 리비아는 목을 설핏 빼 들며 살갗으로 스미는 그의 더운 숨을 만끽했다.
“염려되지 않나?”
“무엇이…… 말입니까?”
에피알테스는 여인의 탄력적인 살갗을 음미하며 이를 세워 목줄기를 질근거렸다. 허벅다리를 만지던 그대로 그녀의 실루엣을 희롱하듯 선을 따라 올라 엉덩이를 붙들고 주무르며 입꼬리를 올린다.
“자네는 황제와 붙어먹는 거야.”
“흣…….”
노골적인 통증을 주며 자국을 남긴 에피알테스의 손이 팬티 아래로 파고들어 맨살을 쓰다듬었다. 반사적으로 그녀의 허리가 떨린 것이 즐거운지 낮게 웃음소리를 흘리며 덧붙이는 말들.
“이젠 감출 수 없을 텐데, 옷은 이 꼴이 되었고, 짐은 안은 계집이 누구의 것이 되었는지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곱게 취급하지 않아. 누구나가 다 알게 될 거야, 포웰 공작 부인이 황제와 붙어먹은걸.”
그러고는 완전히 그녀를 무너뜨려 침대 위에 누인다. 검은 옷자락과 머리칼이 어지럽게 흩어진다. 흐드러진 꽃처럼.
에피알테스는 농익은 꽃의 술을 헤집는 것처럼 그녀의 옷을 악의적으로 찢듯이 벗겨 헤쳤다. 하얀 몸뚱이와 색기 없는 속옷들이 드러났다. 코르셋만 있었다면 한 세기 전의 사람이라고 해도 믿길 지경이었다. 습관적으로 제 입술을 핥은 황제가 리비아의 두 무릎을 틀어쥐고 벌리며 그 사이로 제 몸을 묻었다. 노골적으로 샅을 맞대고 체중을 실어 누르며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입술을 문지르고, 핥고, 잘근거리며 즐거워했다.
“신이 두려워하겠습니까?”
“암, 그래야지. 후궁들이 자넬 가만두지 않을 텐데.”
그의 손이 가볍게 명치께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훅을 툭 건드려 풀어냈다. 빳빳하게 곤두선 유실이 드러나자 맞붙은 허리를 은근하게 추어올리며 입에 문다. 리비아는 짧게 웃으며 그의 애무를 좀 더 편히 받기 위해 브래지어를 밀어젖혀 완전히 가슴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퍽 다정한 사이인 것처럼 부드럽게 그의 머리를 두 팔로 안아 제 품에 붙들며 속삭였다.
“아니요, 폐하. 당신의 꽃들이 저를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완연하기에 아름답고, 꼭 그만큼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짓는 여자의 녹빛 눈이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모든 숙녀의 모범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분들 또한 당신의 품에 들기 전까지 사교계를 누비던 몸, 과연 신의 성미와 진가를 모르겠습니까.”
리비아는 유연한 손길로 황제의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찔러 넣은 채 길게 쓸어내리다 가슴을 내밀고 멈춘 그의 애무를 재촉하며 시선을 맞춘 채 말을 맺었다.
“몸에 새겨진 위압은 언제든 발목을 붙듭니다.”
에피알테스는 그 비정하고 오만한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그녀의 가슴을 길게 핥아 올리며 입술을 들었다.
“그런 소리는 삼가는 게 좋지 않겠나? 굳이 짐을 흥분시킬 필요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단단한 살덩이가 그녀의 음부를 짓눌렀다. 리비아는 곤혹스러운 기색을 꾸며 내며 손을 내려 그것을 더듬어 쥐었다.
“유의하지요.”
두툼한 귀두 끝에서 선액이 비어지고 있었다. 리비아는 요도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액을 부추겼다. 에피알테스는 서슴없이 그녀의 손아귀에 좆을 문질러 댔다. 리비아의 뺨에 옅은 색이 어린다. 아무 색 없이 창백하기만 하던 그녀의 살갗에 혈색이 돌게 한 것만으로도 기이한 쾌감이 인다. 마치 제가 피그말리온이 된 듯한 포만감이 들었다. 이런 것이 필경 그녀의 아래에 기꺼이 엎드린 수컷들이 헤어나지 못하게 된 이유 중 하나겠지. 그러나 에피알테스는 피그말리온처럼 자신이 빚어낸 것에 만족하기보다는 타인의 갈라테이아를 무자비하게 농락하고 제 색으로 물들여 앗아 오는 것을 즐기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예고 없이 그녀의 손목을 붙든 그는 속옷 위로 성기를 맞대고 험하게 허리를 놀려 문질러 댔다. 그녀의 속옷이 서로의 애액으로 천천히 젖어 들어 습기를 머금었다. 리비아는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그에게 두 손목을 단단히 붙들려 다리 사이를 희롱당했다. 짜릿한 전율이 등골을 치달린다. 에피알테스는 광기에 준하는 야만성을 머금은 자색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달라붙은 천 위로도 도드라진 클리토리스를 중점적으로 자극했다. 귀두가 클리토리스를 스칠 때마다 맞붙은 살갗이 흠칫거리며 떨렸다. 점점 속도를 올리며 그녀의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짓누르고 몸을 바짝 낮췄다. 그의 단단한 몸뚱이에 짓눌린 가슴에 애달픈 쾌락이 흘렀다. 압박감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열기를 띠기 시작한 살갗에 유두가 짓눌린 채 허릿짓을 따라 쓸릴 때면 입술이 움찔거렸다.
에피알테스는 그런 입술을 다시 한번 거칠게 비집어 탐했다. 두툼한 혀로 입술을 가르고, 경직된 혀를 휘감으며 입을 다물리지 못하게 진탕 휘저었다. 파르라니 떨리는 여인의 속눈썹, 그녀의 입 안에서 고요히 묻히려던 신음을 구태여 헤집어 삼켰다. 응, 읏, 하고 접붙은 입 안에서 신음성이 도드라지기 시작하자 완전히 젖은 그녀의 속옷을 둔덕 옆으로 밀어젖히고, 반쯤 벌어진 음열에 예고 없이 귀두를 욱였다.
“흑……!”
리비아의 몸뚱이가 바짝 경직됐다. 이미 농익어 사내의 맛을 아는 여자의 몸이다. 무자비할 정도로 커다란 성기가 구멍을 헤집자 농탕치듯 우물거리는 구멍이 매끄럽고 게걸스럽게 사내의 좆을 받았다. 에피알테스는 더운 숨을 흘리며 그녀의 하체가 바르르 떨리는 감각을 즐겼다. 이제는 발긋하게 달아오른 낯을 한 귀부인이 눈을 꾹 감고 몸을 떨고 있다. 이 희열과 쾌락을 무엇에 비할까.
“아……!”
귀두가 완전히 질 속에 묻혔을 무렵, 돌연 허리를 띄웠다가, 한순간에 체중을 실어 뿌리까지 처박았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신음했으나 에피알테스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턱을 그러쥐고 붙들었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사내를 받은 채 그 살덩어리를 죄는 여인을 지긋이 눈에 담는 것은 그의 습관이었다. 리비아가 적응할 때까지 고요히 인내한 그는 그녀가 반쯤 감긴 듯 눈을 뜨자 희미하게 뻐끔거리는 그 입술을 핥으며 속삭였다.
“리비아.”
“……예, 폐하.”
“그대가 날 받았어.”
그는 제 것의 존재감을 각인시키듯 느릿하게 허리를 추켜올렸다. 속옷 위로도 맞댄 채 움직였던 그것이지만 뱃속을 가득 메운 다음 움직이는 것은 전혀 무게감이 달랐다. 리비아는 흠칫 떨며 반사적으로 그의 것을 조여 물었다. 에피알테스는 다정하고 진득하게, 마치 연인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의 벌어진 입술 틈을 혀끝으로 문지르며 속삭이다 그대로 혀를 밀어 넣었다. 리비아는 움찔움찔 떨리는 몸을 가다듬으며 그의 혀를 양순하게 받아들인 채 혀를 얽어 봉사했다. 에피알테스는 삽입한 뒤에야 상냥하고 부드럽게 혀를 섞어 주었다.
악질적인 교접이었다. 곧 베어 낼 나무를 배려하지 않듯이, 에피알테스는 철저히 자신을 위해 움직였다.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마음대로 계집을 다루는 습관적인 행태들, 리비아는 속으로 차근차근 그의 습관 같은 것들을 관찰하면서도 쾌락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읏, 흐…….”
“원래 소리를 죽이는 편인가?”
그의 긴 머리칼이 휘장처럼 늘어졌다. 오롯이 그들뿐인 것처럼 동떨어진 감흥이 일었다. 리비아는 파르르 떨리는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대꾸했다.
“글쎄요…….”
에피알테스는 마치 살살 구슬리듯이 그녀의 안쪽을 부드럽게 뭉개듯 짓쳐 댔다. 뱃속이 꾹 뭉친 것처럼 감각이 쏠렸다. 생리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감각, 등골이 오싹거리고 몸을 뒤채고 싶은.
그러나 그의 몸뚱이에 단단히 짓눌려 허리 한 번 들썩이기 쉽지 않았다.
사내는 여전히 점잖을 떠는 리비아를 가늠하듯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가슴팍을 입술로 더듬었다. 희고 서느런 피부, 부드러운 살집이 드러누운 탓에 모양 좋게 흐드러지듯 눌려 있었다. 그것을 어르듯이 혀로 살살 문질러 주다 딱딱해진 유실을 길게 핥아 올리며 웃었다.
“짐은 교성을 지르는 계집이 좋아.”
“그러시군요.”
리비아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래 봤자 네가 어쩔 거냐는 듯이. 자신이 맞추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듯한 태연함. 그 오만한 눈을 핥아 보고 싶었다. 그는 붙들었던 손을 놓아주고선 추어올리듯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며 유두를 입에 물고 농탕질을 쳤다. 그녀의 숨이 짧게 경직됐다가 의식적으로 늘어진다.
세게 빨아들일 때마다 유두가 저릿했다. 욱신거릴 정도로 안달이 난 것을 무자비하게 뭉개듯 핥다가, 유륜째 후비듯 난잡하게 혀를 놀린다. 여자는 흰 다리를 뻗어 그의 허리에 걸쳤다. 흘긋 우습다는 듯이 올려다본 에피알테스가 우악스러운 손으로 제 허리춤에 단단히 감도록 고쳐 만져 주고는 예고 없이 추삽질을 시작했다.
“응……!”
젖은 살 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사위를 메웠다. 그는 리비아의 가슴을 빨며 그녀의 골반을 틀어쥐고는 뿌리까지 처넣은 채 체중으로 꾹꾹 짓누르다가,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는 순간에 허리를 물려 성기를 쭉 빼냈다. 두툼한 귀두가 내벽을 거칠게 훑으며 긁는 감각에 전율하면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이 곧장 다시 처박힌다. 리비아는 고개를 젖히며 황제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피차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 터라 그녀의 손이 두어 번 미끄러졌다. 그러나 손속에 자비 없는 허릿짓이 이어져 고쳐 쥘 수도 없었다. 그의 어깨를, 가끔은 팔뚝을 붙들었다가 결국 미끄러진 손이 갈 곳이란 시트뿐이었다. 뿌리까지 처넣으면 빠듯하게 포르치오를 짓누르는 흉험한 살덩이를 더, 더 깊이 묻으려 사내가 허벅다리에 힘을 주고 찍어 내릴 때면 흐느끼는 소리가 절로 비어졌다.
“흑, 아, 아……!”
에피알테스는 흐드러지기 시작한 여인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눈에 담으며 입매를 늘여 웃었다. 풍만하고 탄력적인 몸뚱이를 제 품에서 망가뜨리고 싶었다. 파괴적인 욕구와 지배욕에 흥분이 치달았다. 그는 리비아의 가슴골에 붉은 자국이 생길 만큼 깊게 빨아들였다가, 그녀의 등 아래로 팔을 밀어 넣고 완전히 제 품에 끌어안아 가두었다. 숨이 막힐 만큼 우악스럽게 안겨 손이 갈 곳을 잃자 자연히 그의 허리께에 감겼다. 방탕하게 늘어진 가운 탓에 가려졌던 두꺼운 흉통을 끌어안기란 쉽지 않아서, 결국 손끝을 세워 옆구리와 등 사이의 모호한 곳에 매달리는 게 고작이었다.
“응, 흐, 윽……!”
그녀의 눈빛이 사그라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저갱의 그것이었던 눈이 흐려지자 관능적이기 짝이 없었다. 이 눈으로 몇 명의 사내를 홀렸을까. 그녀가 황제에게 유린당했음을 알면 얼마나 괴로워 몸부림을 칠까. 등골이 오싹거릴 정도로 희열이 올랐다.
허리춤에 둘렀던 그녀의 다리가 미끄러져 시트를 긁어내렸다. 뻣뻣한 다리로 아무리 뒤꿈치를 세운들 사내의 격렬한 허릿짓을 버틸 리 만무하여 번번이 무용해지는데도 그 의미 없는 몸짓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쾌락을 삭이고 싶은 몸부림, 에피알테스는 촉촉하게 젖은 살갗 위로 도드라지는 그녀의 견갑골과 척추 선을 어루만지며 손을 내려 엉덩이를 쥐어 벌렸다. 애액이 넘쳐 미끈거린 회음이 벌어져 연거푸 사내의 좆이 들락거리는 구멍의 감각이 조금 더 선연해졌다. 리비아 역시 허리를 절로 비틀었다.
“음탕한 계집.”
비난의 말이었으나 포만감 어린 웃음기가 만연했다. 에피알테스는 제 목덜미에 타의적으로든 자의적으로든 얼굴을 묻은 채 흐느끼는 여자의 검은 머리카락에 낯을 비비다 샅에 힘을 주고 그녀의 들뜬 허리를 찍어 내렸다.
“으응……!”
그 충격에 반동처럼 내벽이 조여들었다. 온몸을 뻣뻣하게 경직시킨 여자가 절정으로 풀어진 눈을 반쯤 내리뜬 채 그의 정을 게걸스럽게 쥐어짰다. 에피알테스 역시 부서져라 여인을 끌어안은 채 파르르 몸을 떨었다. 가장 깊은 곳에 뿌리내려 씨물을 토해 내는 쾌락이란 무엇에도 비견할 수가 없는 법이었다. 그는 잠깐 숨을 멈추었다가, 사정이 끝나고서야 포만감 어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아…….”
여운이 뻣뻣했던 몸을 늘어지게 했다. 그는 어느샌가 붙들었던 손에 힘을 빼고 얌전히 품에 갇힌 리비아의 뺨 옆을 입술로 문지르며 귓가에 가까운 그 자리에서 속살댔다.
“주인의 정을 받은 기분은 어떠한가, 공작 부인.”
깊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 목소리를 가다듬을 짧은 시간이 지나, 색정적인 여인의 나른한 대답이 돌아왔다.
“색다른 여흥이군요.”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의 화답이었다. 그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녀를 끌어안았던 팔을 풀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는 수줍거나 순종적인 얼굴이 아니라, 만족스러운 봉사를 받은 것처럼 포만감 어린 얼굴로 나른하게 조소를 머금고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 방만한 대답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처럼 태연하게 말을 덧붙이는 것이다.
“제가 움직이지 않아도 충분한 쾌락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제법 괜찮은 것 같습니다.”
“하.”
에피알테스는 그저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렇게나 태연하게 자신을 애완견마냥 대할 줄은.
사내의 성기가 빠져나간다. 그새 맞물린 것에 익숙해진 내벽이 반사적으로 조이며 매달렸으나 개의치 않고 완전히 뽑아내자 조금 전까지 좆을 받았다는 것이 티가 날 정도로 둥글게 벌어져 벌름거리는 구멍 밖으로 흰 탁액이 울컥 쏟아졌다. 그는 여즉 뻣뻣한 제 성기로 그녀의 음부를 툭툭 치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래서, 만족스러우셨단 말인가?”
리비아가 살짝 고개를 치들며 눈웃음친다.
“예.”
그의 오판이었던 듯했다. 허구한 날 사내를 갈아 치우며 진탕 굴린다기에 얼마나 좆에 환장한 여자일까 했더니, 자신과 같은 포식자였을 줄이야. 나약한 사내들의 봉사를 받으며 그들을 충분히 발라 먹은 뒤 내버린 것이렷다.
조금쯤 즐거운 기분이었다. 그는 리비아를 붙들고 돌려 눕혔다. 그녀는 순순히 그가 돌린 대로 엎드려 누웠다. 다리 사이에 사내의 몸뚱이를 둔 탓에 다리를 오므리지 못해 훤히 드러난 회음부가 음란했다. 만졌던 것으로 가늠한 대로 풍만한 것은 가슴뿐만이 아니었는지 허연 엉덩이가 도드라졌다. 에피알테스는 그녀의 하체 아래에 제 무릎을 밀어 넣고 허벅지로 하체가 들리게끔 자세를 잡은 뒤 둔부를 꽉 틀어쥐고 주무르며 좌우로 벌렸다. 여전히 그의 씨물을 흘리며 뻐끔거리는 구멍이 드러났다. 성기가 욱신거릴 정도로 안달이 나 헛웃음이 난다.
“자네는 수치도 없나?”
“없지는 않습니다만.”
그녀는 나직하게 웃은 뒤 말을 맺었다.
“그저 교접일 뿐이지 않습니까, 수치스러울 만한 일은 아니지요. 하물며 폐하께서 쾌락을 베푸시는데 어찌 그것을 수치라 이를까요?”
말이 번드르르했지만 간추리자면 봉사받는 것을 왜 부끄러워해야 하느냔 이야기였다. 에피알테스는 체액으로 번들거리는 좆 끄트머리를 그녀의 구멍에 문지르며 가빠진 숨을 꾹 삼켰다.
“그것참.”
천천히 구멍 속으로 삼켜지는 성기가, 팽팽하게 벌어진 그 점막이, 그 광경이, 그녀의 말대로 자신이 ‘먹히는’ 쪽인 것처럼 느껴졌다. 허리가 부르르 떨렸다. 이런 흥분은 오랜만이다. 그는 스스로 치든 여인의 둔부를 꽉 틀어쥐고 아래로 짓누르며 성기를 처박았다.
“흐읏……!”
오물거리는 내벽에 쥐어짜이는 것만 같다. 한번 인지하고 나자 먹히는 것이 자신인지 그녀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하기보다 그저 좇고 싶은 쾌락이 그의 신경을 집어삼키고, 피차 무치의 짐승인 처지인지라 사양하지 않았다.
다시금 뿌리째 좆을 욱이자 절정에 이른 직후의 민감해진 몸으로 감당하기에 버거울 정도의 쾌락이 엄습했다. 에피알테스는 고개를 살짝 젖히고 숨을 들이켰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지금만큼은.
사내의 허릿짓이 이어지지 않자, 리비아는 엎드린 채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짝 엉덩이를 띄웠다가 힘껏 내리찍듯 그의 것을 재차 삼키기를 반복하며 바짝 힘을 주어 조였다. 빠져나갈 때에도, 삼켜질 때에도 동일했다.
빠듯하고 좁은 내벽을 가르며 강제로 파고드는 쾌락에 진저리를 친 그가 리비아의 둔부를 쥐어 벌린 채 게걸스럽게 자신을 범하는 구멍을 관음했다. 오싹오싹하게 몸이 달아올랐다. 먹히고 있다. 제국의 주인인 자신이. 수많은 계집을 거느린 이 에피알테스가. 그것이 못내 황홀한 쾌락을 주었다. 그는 호흡을 고르려 애쓰며 난잡하게 젖은 점막이 자신의 기둥을 훑는 것을 지켜보다가 내리찍을 때마다 음탕하게 흔들리는 엉덩이를 주무르며 허리를 추어올렸다.
“아응…….”
달짝지근한 신음이었으나 만족스러운 감상이 뚝뚝 묻어났다. 그는 처음 받는 취급에 헛웃음을 치면서도 그녀의 허릿짓에 맞춰 움직였다. 뒤로 접붙은 채로 그녀가 움직이게 두니 포르치오에 쉽사리 닿았다. 뭉뚝한 귀두가 깊은 안쪽을 찌를 때마다 그녀의 하체가 적극적으로 치대졌다. 에피알테스는 그녀의 둔부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다 가볍게 내리쳤다.
“흐윽……!”
“너무하잖은가, 이 몸뚱이까지도 나의 것이라고 했던 주제에.”
“싫지, 않으실, 텐데요……. 본분에 충실하여, 봉사해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녀는 단순히 앙탈을 부리는 사내를 어르듯 시혜적으로 대꾸하며 그의 것을 빠듯하게 삼켜 완전히 접붙은 채 요염하게 허리를 돌렸다.
“이렇게나 안달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폐하.”
“음…….”
그는 목 안으로 희미한 신음을 울리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가벼운 사정감이 벌써부터 울렁거렸다.
리비아는 그의 사정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자비 없이 쾌락을 추구했다. 난잡한 출납 따위는 개의치 않는 듯, 그의 것을 마치 기구마냥 이용하는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에피알테스는 찡그리듯 웃음을 흘리다 그녀의 몸뚱이를 그대로 찍어 눌렀다.
“흐윽……!”
190이 훌쩍 넘는 거구의 남성이 작정하고 찍어 누르는 압박감은 굉장했다. 무엇보다 안쪽 깊이 그의 것을 물고 있는 와중에 견딜 만한 것은 못 됐다. 그녀가 파르르 떨며 허릿짓을 멈추자 그가 나른한 한숨을 흘리며 검은 머리칼이 흐트러진 사이로 드러난 날렵한 견갑과 등허리에 점점이 입을 맞추었다.
“사내를 다루는 것이 능숙하군.”
“과찬이십니다.”
에피알테스는 그녀의 낭창한 허리선을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마치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듯 경건하고 부드러운 손길. 그러나 본질은 폭군의 그것이다. 그는 젖은 살 위로 손을 미끄러뜨려 그녀의 복부를 더듬었다. 제 것을 깊이 물고, 그 이물의 모양대로 얕게 부푼 배를.
범하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사내는 빠듯한 흥분에 마른침을 삼키면서도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완전히 그 몸 위로 제 몸뚱이를 겹친 채, 부드러운 살집을 틀어쥐고 뭉근하게 안쪽을 짓눌렀다. 흠칫거리며 떨리는 여체가 저를 집어삼키듯 안은 그의 아래에서 바르작거리듯 허리를 흔들자, 기어코 짐승이 흘레붙은 모양대로 그가 허리를 쳐 내리기 시작했다.
“응, 읏!”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묵직한 추삽질이었다. 얕은 절정감이 불티처럼 난잡하게 눈앞을 어지럽힌다. 리비아는 제 팔뚝에 이마를 묻은 채 손끝으로 시트를 긁었다. 에피알테스의 단단한 손이 살집을 이지러뜨리다 유두를 손끝 둥그런 부분으로 후비듯 문질렀다. 개처럼 학학대는 소리가 절로 비어진다. 그 역시 흥분을 감출 생각은 없는지 귓전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신음 섞인 목소리가 울렸다. 그들은 완전히 금수의 교배마냥 서로 사양 없이 허리를 흔들며 접붙은 살을 탐했다.
“흑, 으, 읏.”
“아, 좋은…… 소리로, 우는군.”
“상, 스럽다, 여기시는지요.”
“그것이 좋은 거야.”
그는 희열로 번들거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여자의 귓바퀴를 입술로 물고 진탕 애무했다. 빨고, 이 끝으로 질근거리면서.
“내가 그리 만들고 있다는 것이.”
리비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신음으로 뚝뚝 끊기면서도 또렷한 웃음소리. 그래, 그렇지. 황제는 자신과 꼭 닮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뱃속이 아릴 정도로 들끓었다. 비호해 마지않을 나의 주군이라, 그가 황실의 적통이라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렇잖았다면 분명 동족이란 것을 기꺼워하는 법이 없는 자신이 견디지 못하고 로덴바흐에 이어 그를 뭉갰을 테니까.
사내가 주는 쾌락은 그간의 수고로운 정사에 비하면 안락하기까지 했다. 그저 충실하게 즐기면 될 뿐, 숨을 돌리기엔 최적의 별미였다. 그러니 리비아는 제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물렸던 성기를 힘껏 치받아 욱여넣는 황제의 허릿짓에 순순히 눌려 침대와 사내의 몸뚱이 사이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태로 엄습하는 격뢰 같은 절정에 몸을 떨었다.
“으……, 흣…….”
뚝뚝 끊겨 입 밖으로 나가는 소리는 억눌린 교성에 불과했다. 그들은 숨이 막힐 만큼 완전히 들러붙은 채 동시에 절정을 맞았다. 황제는 사양조차 없이 그녀의 뱃속 깊은 곳에 씨물을 싸지르며 황홀한 얼굴로 힘줄 돋은 손으로 리비아의 허리를 붙들어 맸다. 만족스러운 정사로 인한 독점욕이 고개를 들었다. 후궁으로 들여 매일 밤 불러 귀애하고 싶을 만큼 만족스러운 교합이었다.
찬찬히 여운에 잠겨 물러지지 않았다면 진정 행동에 옮기지 않았을까. 포웰 공작 부인이 아니었다면 여운조차 그를 막을 수야 없었겠으나.
“붉어졌군.”
황제는 한참 만에야 몸을 추슬러 일으키며 그에게 붙들린 탓에 벌건 자욱들이 남은 그녀의 몸뚱이를 눈으로 핥았다. 리비아는 흘긋 곁눈으로 그를 본 다음,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제 가슴에 여실한 손자국을 살폈다. 그러고는 얕게 웃으며,
“만족스러우셨던 모양이지요.”
하고 퍽 자상한 투로 그를 귀여워하듯 지껄였다. 에피알테스는 여전한 그녀의 작태에 실소를 흘리면서도 성기를 빼내고 죄 흘러내려 가까스로 걸쳐져 있던 제 가운을 벗어 아랫도리의 탁액을 훔쳐 냈다. 여자는 헐벗고 찢겨 너덜너덜해진 상복을 벗으며 일어나 앉았다.
“짐이 두렵지도 않은가. 당장 그대 목을 분질러 버릴 수도 있잖아.”
“그리 여기기에는 신이 파악한바, 폐하께오서는 지나칠 정도로 명징한 이성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녀는 무심한 눈으로 천을 떨쳐 내는 제 손끝을 관조하며 덧붙였다.
“대마법사의 봉기를 두려워할 정도로는 말입니다.”
에피알테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와 화합했나?”
“예상치 못하셨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덤비더라도 기껏해야 모브레이라는 성에 대한 집착 같은 것으로 짐을 치러 올 줄 알았지. 자네 자체에 대한 애착 같은 건 전연 없으리라 보았어.”
그는 손을 뻗어 완전한 나신이 된 여인의 허리를 끌어다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리비아는 잠깐 눈썹을 치켜세웠다가, 순순히 그의 무릎 위에 자리해 주었다. 무얼 한들 자연스레 받는 사람, 시혜적인 자로 여겨지고야 말 우아함은 정말이지 신기한 것이라, 에피알테스는 그녀를 집요하게 관찰하며 조금 전까지 한참이나 들쑤셨던 하복부를 뜨뜻한 손바닥으로 느릿느릿 둥글려 문질렀다. 제 씨물을 삼킨 태이니 어쩌면 황손을 잉태할 수도 있으렷다. 그녀가 석녀일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만약 배게 되면 즐거운 난장이 벌어지겠지. 포웰의 피가 섞인 황손이 제위를 이으면 대현자가 황실마저 비호하게 될지도 모르니 실리를 따져도 흡족했다. 아니라면 뭐, 몸을 섞기에 피차 편한 상태로 두면 될 일이다.
에피알테스 로그즈데일이라는 인간은 그런 자였다. 아무래도 좋은 삶을 가장 혐오스러워하는, 예상치 못한 파국이나 상황 따위가 가져다주는 그 순간의 흥분감만 얻을 수 있다면 무엇에든 기꺼이 어울릴 사람.
그리고 그는 여자를 제 동족으로 인정했다.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룰 수만 있다면 무엇을 희생시키는 데에도 거리낌 없는 인간이라니. 그것이 설령 자신의 존엄이라고 해도. 그는 참을 수 없이 유쾌해졌다. 해서 리비아의 뺨에 제 뺨을 가져다 대며 퍽 흡족한 친애를 드러냈다.
“좋아. 눈감아 주마. 로덴바흐 백작으로 그 무례를 씻는 것으로 하지. 포웰은 황명으로 비호받을 것이다.”
적어도 이 계집은 자신을 무료하게 만들지 않으리라. 리비아는 태연하게 제 뺨에 맞댄 황제의 턱을 그러쥐고 치하하듯 입술을 맞댔다 떨어뜨렸다. 사내는 살아생전의 부황께도 받지 못한 무해하고 기특한 생물로서의 대접에 기가 차 헛웃음을 지었다.
“그대, 간을 배 밖에 놓고 다니는 모양이군.”
리비아는 설핏 웃었다.
“오히려 그것은 폐하의 일이 아니온지요.”
“음?”
“제가 어찌 구르디예프 경과 화합했을까요?”
“모르지.”
그는 비인간적일 정도로 무심한 태도로 눈을 깜빡였다.
“짐이 알아야 하나?”
여인의 웃음이 짙어졌다.
“아니요, 제가 있는 한 앞으로도 폐하께옵서 그런 시시콜콜한 일을 살피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거 참 편리한 발언이군, 무심코 그대를 죽이지 않도록 유의해야겠어.”
그는 마냥 즐거워했다. 리비아는 구태여 그의 오만한 무지를 바로잡아 주지 않고 삼켰다. 정히 필요하다면 주인 따위는 갈아 치우면 될 일일뿐더러, 일일이 떠먹여 줄 의리도 없다. 자신이 그렇게까지 인품 좋은 인간이었다면 이런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 여자는 그저 아름다운 황제의 창백한 머리카락을 한 줌 그러쥐고 입 맞춘 뒤 예고 없이 쓰러뜨려 뉘었다.
“결코 신을 죽일 수 없도록 만들어 드리지요.”
무심결에라도 죽이지 못할 것이다. 감히 그런 시건방진 말을 입에 담기조차 꺼려할 몸이 되도록 만들어 줄 마음이 그녀에겐 얼마든지 있었다.
에피알테스는 등골이 오싹오싹할 정도로 위협적인 리비아의 눈을 핥듯이 바라보며 혀를 내밀었다. 불손함에서 느껴지는 생각지도 못한 흥분을 조금 더 맛보고 싶다는 듯이, 리비아는 그것에 응해 공격적으로 입술을 집어삼키고 피차 게걸스럽게 혀를 얽었다.
에피알테스와의 여흥은 이른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리비아는 당연스레 들어와 수발을 들기 시작하는 시녀들의 손에 몸을 맡기고 깨끗하게 몸을 씻고 단장을 받았다. 다만 그것은 에피알테스의 눈앞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물기를 머금은 은발을 길게 늘어뜨린 채 방만하게 바지와 셔츠 정도의 단출한 차림을 하고 턱을 괸 채 리비아의 치장을 관찰했다.
불을 완전히 밝힌 내실에서 보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한층 더 검었다.
“빛을 쬐면 밝아지기 마련인데, 자네 머리칼은 전혀 그런 기미가 없군.”
“그렇습니까.”
큰 감흥 없이 그의 말을 웃으며 받아넘긴 리비아는 솜씨 좋게 틀어 올리는 시녀의 손길을 거울 너머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분명 마차에서 내려 내실까지 오며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을 텐데 흐트러지기 전의 머리 모양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옷이 넝마짝이 되어 어떡한단 말인가. 로브라도 내어 줄까.”
그는 낄낄거리며 시녀가 바친 술잔을 들고 거울 속의 리비아와 시선을 맞췄다.
“마차면 족하겠습니다.”
“헐벗으려고?”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나, 자네도 평판이라는 게 있잖아. 나처럼 미치광이란 소릴 들은 역사는 없을 텐데.”
“무자비한 황제 폐하께서 황명으로 소환하여 욕보이고 내쫓았단 소문이 도는 것이 신의 평판에 무슨 흠이 될까요. 귀족파들이 앞장서서 저를 변호할 텐데.”
에피알테스는 노골적으로 자신을 끌어내리겠다는 협박을 하면서도 고상하기 짝이 없는 여자의 작태에 숨죽여 웃다 까딱 턱짓했다. 시녀 한 명이 그의 몸짓을 알아보고 토르소 하나를 가져와 그녀의 곁에 놓았다.
“하사품일세.”
진녹색 페플로스였다. 어깨와 팔뚝이 드문드문 드러나고 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로 개량한 듯 아래로 내려갈수록 통이 좁은 머메이드 형식으로, 뒷단이 살짝 길게 바닥에 늘어지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하사품에 걸맞게 서부 황실 직속령 바스커체프산 직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그저 기뻐하기에는 광인의 선물다웠다. 재가한 여인마냥 그와의 동침 후에 상복을 벗다니. 헛웃음이 날 정도로 노골적인 희롱을 내포한 하사품.
“감사히 받잡습니다, 폐하. 성은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가늘어진 자색 눈이 그녀를 들여다보았으나 가벼운 화장을 받고 있던 터라 태연히 눈을 감아 모르쇠로 일관하자 금세 떨어져 나갔다. 그는 짧게 혀를 차며 뇌까렸다.
“그대의 화난 낯을 볼 수 있을까 했더니만.”
“벌써부터 보여 드려서는 밑천이 금방 동나게 되는 것을요.”
“길게 보면 그대가 아주 짐의 머리끝에 올라앉아 놀아날 것 같아서.”
“그리 방종한 자로 보였다니, 그야말로 가문의 수치로군요. 이는 반드시 공과로 갚아 내겠습니다.”
시녀들이 자리에서 일어난 여인의 가운을 걷어 간다. 붉은 손자국이 흰 살갗 위를 옭아매고 있음을 여러 사람의 눈앞에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수치 한 점 없이 속옷과 하사받은 드레스를 걸쳤다. 얇고 통이 좁은 드레스가 그녀의 피부처럼 걸쳐져 실루엣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에피알테스는 시녀들이 그녀에게 구두를 신기고 물러나자 그 뒤로 다가가 퍽 다정하게 리비아의 허리에 팔을 둘러 안으며 어깨에 턱을 괴었다. 그녀의 무심한 녹색 눈이 자신을 내려다봄을 느끼고 뻔뻔스레 눈을 휘어 웃으며 손끝으로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역시 상복보다 낫군.”
“폐하.”
“알아, 짐도 정무를 보러 가야 해서 자넬 더 예뻐할 수는 없거든. 다만 어울리기에 귀애해 보았다.”
리비아는 짧게 웃음을 흘리며 제 몸뚱이 위로 흘러내린 그의 긴 은발을 그러쥐고 입가로 가져가 키스했다.
“감읍할 따름입니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진심이었는지 에피알테스는 그녀의 키스를 받고 나자 순순히 떨어졌다.
“마차를 준비해 두었네. 내 침대에 오르고도 제 발로 걸어 나간 계집은 자네가 처음이야.”
그는 채 마르지도 않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자리를 떠났다. 그의 뒤를 따라 시녀들이 일제히 빠져나가며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 두자 그 인파의 걸음 소리가 멀어진 뒤에야 리비아가 움직였다.
“모시겠습니다.”
오는 길을 잡았던 마부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한층 공손한 작태가 우스워 잠깐 그의 머리 가마를 내려다보며 미소 짓던 리비아가 그의 어깨춤을 붙들고 로브를 잡아당겼다. 천 뜯기는 소리와 함께 앞섶을 여몄던 브로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녀는 어렵잖게 빼앗은 그의 로브를 어깨에 두르고 앞장서 걸었다. 새까만 로브로 몸을 휘감고도 머리는 덮지 않은 여인은 들어올 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마부는 성큼성큼 걸어 그녀의 앞에서 길을 잡고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 * *
한참을 달린 마차가 공작저로 들어설 무렵에는 이미 완전히 해가 뜬 아침이었다. 마부가 문을 열자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리비아가 살풋 눈살을 찌푸렸다가 내내 기다린 기색이 역력한 사람들을 보곤 여상스럽게 낯짝을 가다듬었다.
“공작 부인.”
집사와 고용인들이야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틈바구니에 요한이 끼어 있는 것은 퍽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그리 성을 냈던 주제에 아침 이슬을 맞아 가며 바깥에서 서성일 만큼 초조해하는 것이 조금은 우습고 귀여웠으므로, 리비아는 제게 에스코트를 청하는 요한의 손을 붙잡고 바닥을 디뎠다.
“다들 자리로 돌아가도록 해요. 아침부터 이리 수선을 떨어서야.”
그러리라고 예상은 했으나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한 투로 일갈하는 주인의 목소리에 고용인들은 안정을 찾고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인 뒤 물러났다. 그중 버티어 자리에 남은 것은 그녀의 수발을 들어야 할 쉐리와 언짢음이 부글부글 끓어 넘치는 요한뿐이었다. 리비아는 쉐리에게 눈짓으로 물러나라는 뜻을 표하며 요한을 돌아보았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많은 것 같군요, 요한.”
“……조롱하고자 하심인지요?”
“아니요,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그녀의 손끝이 여전히 제 손을 받쳐 쥔 요한의 손목 안쪽을 짧게 두어 번 두드렸다. 남자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가, 바깥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는지 체면을 차리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합리화를 거친 뒤에야 단둘이 그녀의 내실로 이동했다.
한순간에 공간이 일변한 탓에 얕은 어지럼증을 느낀 리비아가 눈을 꾹 감고 상태를 가다듬는 동안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차음 결계를 둘러친 요한이 눈을 치켜뜨고 고개를 돌렸다가, 브로치도 매지 않은 낯선 로브를 걸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곤 천을 움켜쥐었다.
“이게 뭡니까?”
“로브죠.”
“어디에서 난 것이냐고 여쭌 겁니다.”
붙들린 탓에 벌어진 앞섶 사이로 드러난 것은 그녀의 맨살을 드러낸 낯선 드레스였다. 그 유명한 바스커체프산 직물을 알아보지 못할 리도 없었거니와, 애당초 혈혈단신으로 나간 이가 스스로 옷을 갈아입을 리도 없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이런 옷을 그녀가 골랐을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요한으로서는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지나치게 영민한 두뇌는 어렵잖게 상황을 추측해 냈다. 모종의 일로 인해 그녀의 옷이 상할 만한 일이 벌어졌고, 그 결과 황실에서 환복 후에 돌아온 것임을. 포웰 공작 부인을 상대로 그만한 무례를 범할 수 있는 인간은 황제가 유일하다는 사실까지도.
요한은 치를 떨며 눈에 힘을 주었다. 아무리 자신이 공작 부인을 탐탁지 않아 한다고 해도 제가 모브레이를 비호함을 알면서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황실이라 하여 업수이여기고도 무사히 넘어갈 것이라 여겼다면 대단한 오판이다.
유리창이 짧게 진동하고 그의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기이하게 너울거렸다. 리비아는 도리 없는 난처한 애완동물을 보듯 미진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다가 요한의 뺨을 그러쥐었다.
“진정해요, 지금 이렇게 화를 내 봤자 날 위협하는 셈밖에 되지 않으니까.”
옳은 말이었다. 그는 내키지는 않지만 아주 익숙하게 자신의 마력을 가다듬고 억눌렀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분노까지는 다스리지 못했는지 거칠게 씨근거리는 꼴을 바라보며 리비아가 살살 요한의 뺨과 귀로 이어지는 턱선을, 그리고 목덜미를 문질러 주며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지당한 거래를 하고 왔을 뿐이에요. 이로써 로덴바흐를 숙청하는 데에 대한 허가와 나의 승계를 보장받았으니까.”
요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이깟 소리를 달랜다는 명목으로 지껄이는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는 눈을 홉뜬 채 이를 악물었다.
“제가 그리도 못 미더웠습니까?”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열이 오를까. 문란한 여자인 것은 애당초 알고 있었다. 왜? 그는 형언키 어려운 감정들이 목젖까지 치고 올라오는 것에 구역질이 났다. 황당함, 배신감, 분노, 자신이 들먹일 것이 아닌 감정들이 끝없이 들끓었다. 그리고 어떤 순간, 문득 깨달았다.
자신은 그녀가 원치 않는 일을 당한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당혹스러운 결말이다.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여자가, 아니, 사람이라면 응당 원치 않는 일들을 견뎌 가며 살아가기 마련일진대.
그러나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도, 다른 놈들도 숙이며 모신 리비아 모브레이를 황제 따위가. 기껏해야…….
“요한.”
리비아의 부름이 상념을 잘라 냈다. 그러나 요한은 이를 악물고 더듬더듬 갈라진 목소리로 뇌까렸다.
“모브레이의 혈손이라 그들을 끝까지 믿었었다고 해도, 제가 지키는 것은 오롯이 모브레이뿐입니다. 승계도, 제기랄. 제겐 말 한마디 없으셨잖습니까? 둘 다 황제의 허가가 없었어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맞아요.”
“아시면서 왜……!”
“말했잖아요, 제국에 발 딛고 사는 이상 반역을 저지를 수는 없다고.”
그녀는 평이한 투로 말을 이으며 요한의 목덜미를 느리게 문질러 주었다.
“폐하께서 그 재미있는 난장에 훈수를 두지 않으실 리가 없어요. 그 결과가 자신의 손해로 이어지건 아니건 간에요. 나는 가급적 분쟁의 여지없이 깨끗하게 일을 해결하고 싶은 거예요. 이 가문 역시 조르주의 유산이니까.”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이름이었던 까닭이다.
요한은 그녀가 조르주를 들먹일 때까지, 자신이 그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잊고 있던 그를 리비아가 기억하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그리고 아버님께는 반드시 정통한 방법으로 패배를 안겨 드리고 싶어요. 평생을 만만히 여겼던 세상이 한순간에 돌변해 자신을 내쳤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하실는지 궁금하거든요.”
눈을 감고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장식을 빼내는 리비아의 얼굴은 언제나와 같이 우아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피로한 기색이 비쳤다. 요한은 입매를 우그러뜨리고 잠시간 말이 없다가, 그녀가 벗어 낸 로브를 앗아 들었다.
리비아는 그가 도대체 무슨 오해를 했기에 갑작스럽게 저리 침울해진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은 자신의 욕망에 의해 효율적으로 움직였을 뿐인데도 그는 말 몇 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며 길길이 날뛴다. 우습고도 이해할 수 없는 귀여운 꼴. 리비아는 팔을 뻗어 그를 제 품에 안았다.
“모든 일은 내가 정해요. 당신은 내게 충실히 따르고, 이제껏 그래 왔듯 배신하지만 않으면 될 일이에요.”
그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리비아는 머리 장식을 바닥에 대충 던져두고 사내의 등에 남은 한쪽 팔도 둘러 느리게 도닥였다.
“무엇보다, 정녕 내키지 않은 일을 강제했다면 폐하께서 살아 계실 리가 없죠. 내 손수 목을 분질렀을 테니까.”
느릿하게 달싹이던 요한의 입술에서 희미한 투정 비슷한, 힘 빠진 짜증이 터져 나왔다.
“그 와중에 색을 탐할 마음이 드셨습니까?”
“존안이 아름다우셨으니까요. 무엇보다 제가 수고하지 않아도 알아서 기분 좋게 해 주시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어요.”
어이없는 사유였지만 차라리 억울하게 당한 것보다는 나았다. 그래, 이 여자가 무엇이 아쉬워서 휘둘리겠나. 자신이 멋대로 어이없는 착각을 해 버린 잘못일 뿐이다. 요한은 잘록하게 허리띠를 매어 도드라진 그녀의 허리에 어색하게 손을 둘러 보았다. 그녀가 희미하게 소리 죽여 웃는 것에 귓불이 뜨끈해졌다.
“서운했나 보군요.”
“아닙니다.”
“질투 따윈 하지 않는 것처럼 굴더니.”
“아니라지 않습니까.”
“날 싫어하지 않는 건가요?”
그가 화들짝 몸을 떼어 내고 뒤로 물러났다. 흐트러진 단안경이 비뚜름하게 걸쳐져 있었다.
리비아는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치를 떨며 싫어했던 주제에, 이젠 품에 안아 주기만 해도 온순해지는군요.”
리비아는 여상스레 미소 지으며 그의 얼빠진 낯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요한은 새빨개진 얼굴로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는 쏘아붙였다.
“당신이 싫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다만 이제 모브레이의 체면이라는 것이 당신께 달려 있으니 하는 말이지요. 예, 그런 겁니다!”
그는 스스로를 설득하듯 그 논리에 매달렸다. 그래, 그냥 인정한 것뿐이다. 모브레이는 이제 저 여자뿐이라고. 다들 죽어 버렸으니까.
오랜 세월을 살게 되면 자연히 자신을 두고 다른 소중한 이들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많은 상실이 동반되는 불로장생의 삶에 의미라는 것이 얼마나 중하던가. 그래서 개인이 아니라 가문을 골랐다. 꽃이 지더라도 해가 지나면 다시 봉오리를 맺는 것처럼 끊임없이 다음이 예비 되는 것이니까.
그러나 5대 만에 리비아 외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파멸이라는 것은 언제든 찾아오기 마련이지만, 사랑했던 것들이 서로를 물어뜯느라 남아나지 않는다는 건 견디기 어려운 갈등이었다.
여자는 입술을 꾹 깨물고 분을 삭이는 요한의 낯을 바라보았다. 여즉 뻣뻣하게 구는 것이 그의 재미있는 점이기는 하였으되, 뭉개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귀한 것을 흠결 하나 없이 보존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누가 보더라도 애착하는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더럽히고 손때를 묻혀 길들이고 싶은 마음.
요한은 리비아의 고요함에 불길함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읏…….”
음습한 눈이다. 그 눈, 자신을 처음으로 안았을 때 보였던 어두컴컴한 눈.
등골이 오싹거렸다. 또 문란한 생각을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살짝 뒤로 물렸다. 그것을 모를 리비아가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그저 눈매를 접어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러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찌 본인의 면전에 대고 ‘날 희롱할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같은 소리를 지껄일까. 적어도 요한에게는 그럴 만한 낯이 없었다. 그는 한참이나 리비아의 시선을 피하다가 약간 요지에서 비켜난 물음을 던졌다.
“당신은 대체 왜 그렇게 생겨 먹은 겁니까?”
“음?”
“꿇리고, 무력하게 만들고, 바닥을 기게 만드는, 그런 거 말입니다. 도저히 정상적인 취미라고는 할 수 없는 것들.”
그는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당했던 것들을 떠올렸는지 낯을 붉혔다. 리비아는 그의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뺨을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떨쳐 내듯 그러쥐었다.
“글쎄요, 특별히 이유가 있어야 할까요?”
그러고는 퍽 다정하게 그의 입술에 가볍게 제 입술을 얹었다. 여전히 불온한 눈을 하고도 요한의 눈을 들여다보는 그녀에게는 특별한 공격성이 엿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뻣뻣하게 굳어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벌렸다. 리비아는 여전히 그대로 맞대고만 있었다. 무엇을 명령하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눈이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모르겠다. 그는 한참을 그대로 굳어 있다가, 조심스럽게 리비아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묵인되었다. 숨이 떨렸다. 폐부까지 긴장이 퍼져 가슴이 갑갑했다.
“이유조차 없이 고압적인 건 싫은가요?”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후후, 그런가요?”
맞댄 입술 위로 그녀의 웃음이 번졌다. 요한은 치를 떨듯 눈을 꾹 내리감은 채 조심스럽게 리비아의 허리께에 손을 짚고 키스했다. 천천히 비집고 맞물린 입술, 그 사이로 그녀의 입 안을 뻣뻣하고 어색하게 누비는 살덩이. 리비아는 요한의 키스를 부드럽게 이끌어 받아 주면서 목덜미를 느리게 쓸어 주었다. 음탕한 성향과는 아주 거리가 있는 숙맥 같은 입맞춤이 우습고 귀여웠다.
“요한.”
“흣…….”
그의 통 넓은 법복 소매 안으로 여자의 차가운 손끝이 파고들었다. 손목을 부드럽게 쥔 채 맥이 뛰는 안쪽의 연한 살을 어루만지자 몸이 파드득 떨렸다. 리비아는 그의 반응 하나하나를 고요하게 응시하며 입술을 핥아 주었다.
“요한.”
“왜……, 부르시는 겁니까?”
“좋아하는 것 같기에.”
그는 말문이 막힌 듯 눈을 치떴다. 그리 눈을 세모꼴로 떠 봤자 어차피 눈짓뿐인 것을. 남자는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는 손에 그대로 팔뚝을 붙들린 채였다. 리비아는 그의 다리 사이로 무릎을 밀어 넣으며 속삭였다.
“다정하게 대해지고 싶나요?”
“아, 아닙…… 아닙니다.”
“그럼 험하게?”
“방금까지 한 말들을 듣기는 하셨습니까?”
주춤 반보 정도 밀린다. 남자는 의식적으로 힘을 주고 스스로 물러나지 않도록 버티면서 반박할 말을 가쁘게 찾아 댔다. 리비아는 그의 입술에 짧게 쪼듯이 가벼운 키스를 남기며 목덜미를 붙들어 고정했다.
“키스할까요.”
“이미, 했잖습니까.”
“좋아요, 그럼 다시 키스하죠.”
그녀는 선언하듯 깔끔하게 잘라 내며 요한의 입술을 탐했다. 어차피 거리 없이 맞붙어 있던 차였던지라 파고드는 혀를 뿌리치기도 어려웠다.
리비아의 키스는 진득하고, 느리고, 다정했다. 뻣뻣해진 그를 어르듯이 부드럽게 문지르고 강하게 빨아 올리면서도 속도는 느리게, 퍽 상냥한 처사였으나 되레 행위 하나하나를 새기듯 느끼게 되어 버린다. 요한은 뭉개진 신음을 흘리면서도 그녀에게 입술을 내맡겼다.
“으……, 응…….”
달짝지근한 소리. 리비아가 목덜미를 놓아주어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요한의 양순한 태도를 치하하듯 밋밋한 법복을 천천히 풀어 헤쳤다. 손길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혀끝을 질근거리며 얕게 긴장을 가하자 얌전해졌다.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안쪽의 얇은 셔츠 한 장과 바지만을 남기고 치렁치렁한 것들을 죄 벗고야 말았다. 리비아는 요한의 셔츠마저도 단추를 풀면서 타액으로 미끈거리는 입술로 맥이 뛰는 그의 목덜미를 훑었다.
“흣……, 핥지, 마십시오…….”
“그럼? 깨물어 주는 건 좋아해요?”
“아프잖습니까.”
요한은 눅진해진 목소리로 기어들어 가듯 이야기하며 제 앞섶이 훤히 벌어져 맨살이 드러난 것을 떨리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녀의 손끝이 부드럽게 제 허리춤을 더듬고 가슴을 틀어쥐었다. 여인의 그것과는 달리 부드러운 맛이라곤 특별히 있지도 않은 그것이 희롱당할 때마다 열이 훅 끼쳤다.
“아프지 않게 해 줄까요.”
“아흣……!”
반쯤 곤두선 유두를 손끝으로 후비자 날카로운 신음이 비어졌다. 요한은 벌벌 떨리는 입술을 뻐끔거리며 거친 숨을 뱉었다. 리비아의 입술이 그의 쇄골 어림으로 미끄러졌다. 여자는 다정하게 그의 품에 뺨을 기울이며 그저 쾌락을 추구하는 것 외에 쓸모조차 없는 사내의 유두를 집요하게 애무했다. 후비고, 문지르고, 기어이…….
“흐읏…….”
입에 물었다. 그녀의 붉은 립스틱이 그의 목덜미와 쇄골을 이어 가슴에까지 묻어나 번졌다. 요한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파들파들 떨었다. 차라리 전처럼 폭압적인 취급인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정신이 명확한 상태로 하나하나 인지할 수밖에 없는 속도와 지긋함이라니, 자신의 달아 빠진 신음 같은 걸 들어도 수치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리비아는 만족스럽게 눈을 내리깔고 그의 유륜에 살짝 이를 세워 긁으며 두 손으로 요한의 둔부를 틀어쥐었다.
“그만…….”
“싫은가요?”
그녀가 눈만 들어 요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저 밭은 숨을 들썩거릴 뿐 재차 거절하지 못했다. 이미 한번 지독하게 범해졌던 뒷구멍이 벌름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요한의 샅은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욕정으로 눈이 돌 것만 같다. 리비아는 힘주어 그의 엉덩이를 주무르면서 가슴팍에 순흔을 남겼다.
“아……!”
“선택해요, 요한. 그만둘까요?”
드레스가 그의 살갗 위를 스치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요한은 입술을 깨문 채 번민하다 그녀의 어깨를 얕게 쥐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회가 동해서요.”
간결한 대답이었으나 거짓은 없었다. 리비아의 손끝이 앞쪽으로 뻗친다. 이미 뻣뻣하게 옷 위로도 윤곽을 드러낼 만큼 발기한 것이 그녀의 손바닥에 문질러졌다.
“당신이 날 유혹한 거예요. 어찌 아직도 나와 스스럼없이 한 방에 드는 거죠? 하물며 당신이 범해진 방인데.”
“그건……, 식솔들 앞에서 언성을 높일, 수는……, 없으니까…….”
리비아가 낮게 웃으며 그의 어깨 너머, 자신의 침대를 바라보았다. 자연히 그녀의 시선을 따라 요한 역시 등 뒤의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곳을 바라보았다. 안달이 나 절로 허리가 떨린다.
“무자비하게 범해지고, 헤쳐지고, 묶인 채 정복당한 곳에 단둘이 들어온 거잖아요?”
“아흣……!”
요한은 천개가 드리운 침대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아귀에 성기를 붙들려 희롱당했다. 천천히, 뭉개듯이 힘주어 훑는 손길, 그날의 일을 떠올리게 했다. 불현듯 그녀가 자신의 표정을 입에 담으며 취향을 깨우치게 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미 요한은 발정 난 수캐처럼 헐떡거리며 정욕에 눈이 멀어 있었다. 리비아는 반항 없는 그의 버클을 풀어 하의를 끌어 내리며 속삭였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정하게 범해 줄게요.”
“아, 아…….”
“솔직해져요, 요한. 당신과 나뿐이니까. 어차피 커튼이라도 치게 되면 우리조차 어둠에 숨을 수 있잖아요?”
그는 발발 떨며 선액을 찔끔찔끔 흘리는 제 성기를 내려다보았다. 리비아의 흰 손이 골반 어림에서 느리게 배회했다. 자신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기분 좋게 만들어 줄 테지. 요한은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아 축이며 고개를 느리게 단 한 번 끄덕였다.
“옳지, 잘했어요.”
그녀의 손아귀가 불그스름한 살덩이를 움켜쥐었다. 그는 헛숨을 터뜨리며 반사적으로 그 손에 허리를 추어올렸다. 애당초 승패가 당연한 문답이었다. 다시금 다가오는 리비아의 입술에 순응하며 그녀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육신이 제 몸에 맞닿아 눌리는 순간 전율을 닮은 쾌감이 그의 척수를 달구었다.
“아, 아아, 흣…….”
금세 쿨쩍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요한은 허리를 움찔거리면서 제 혀를 강하게 빨아 대는 여자가 움직이기 좋도록 고개를 숙였다. 리비아는 그의 혀끝을 가볍게 질근거리며 귀두 갓 아래를 조금 억세게 문질렀다.
“흐윽!”
“싫어요?”
“아, 닙니다. 아, 욱, 욱씬……거려서……!”
요한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치하하듯 성기를 훑어 준 리비아가 그의 손을 끌어 제 어깨에 가져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페플로스에 달린 브로치를 떼어 냈다. 어깨에서부터 팔뚝까지 이어진 양쪽의 브로치를 떼어 내자 윗부분의 여밈이 완전히 풀려 맨살이 드러났다. 허리끈 위로 천이 늘어지고, 그녀의 가슴이 드러나자 그의 숨이 한층 더 거칠어졌다.
“자, 이리 와요. 요한.”
그녀는 제 허리춤에서 배회하는 그의 뻣뻣한 손을 붙들어 당겼다. 요한은 그 손에 딸려 가 그녀의 가슴을 코앞에서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얼굴을 묻었다. 부드럽고 연한 살, 그녀의 체향에 섞인 이질적이고 낯선 코롱 향이 그의 신경을 긁었다. 요한은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가, 천천히 그녀의 가슴골을 핥으며 자신의 외설적인 행위에 부끄러워했다.
“괜찮아요. 다정하게 해 주기로 했으니까.”
“늘 말만은 그러시잖습니까.”
사내는 조심스럽게 리비아의 허리를 감아 안고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서투른 만큼 제 욕정이 투명하게 드러난다는 걸 알기는 할까. 그는 입술을 가슴팍에 치대며 살갗을 지분거리다가, 혀를 내어 조심스럽게 유륜을 핥고서 잠깐 멈추었다가 한발 늦게 유두를 입에 물었다.
“읏…….”
리비아의 신음이 희미하게 비어졌다. 요한은 그녀의 반응에 흥분했는지 부드럽게 키스하듯이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고쳐 물고, 아프지 않게 혀로 핥으면서, 그러다 격정을 참을 수 없을 때면 강하게 빨아 올리며 빠듯하게 맞닿은 그녀의 몸뚱이에 추삽질하듯 성기를 문질러 댔다. 귀한 천이 그의 선액에 젖어 들며 이리저리 구겨지는데도 여자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불결한 의도로 받은 선물이니 불결한 욕구로 더럽히는 것이 용도에 맞으리라.
요한의 한쪽 손이 조심스럽게 리비아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는 완전히 매몰되어 있었다. 이전의 교접 때도 그랬듯이, 요한은 쾌락에 쉽사리 휩쓸리는 경향이 있었다. 앙칼진 성질머리가 천운일 지경이다. 한 번 휘둘린 이후 이렇게나 유혹 앞에 연약해지는 꼴을 보라. 성질마저 유순했다면 순결을 오래도록 지키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 분명했다.
남자의 입술이 가슴을 꾹 누른 채 미끄러져 어깨에 와 닿았다. 옷의 특성상 동그랗게 벌어지는 그 사이사이로 비쳤던 맨살에 흥분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동그마한 어깨에 입술을 묻고 지분거리면서, 리비아의 치맛단을 움켜쥐고 위로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저 허리끈만 풀면 완전히 천으로 돌아가 전라가 될 구조마저 몰라볼 정도로 눈이 먼 것이 귀여워 얌전히 보아 넘기자 숫제 앓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팬티 위로 엉덩이를 더듬었다.
“부인.”
“네, 요한.”
“하고 싶습니다.”
그는 숨을 꾹 삼키고 파르르 떨며 애걸하듯 속삭였다.
“하고 싶어요.”
리비아는 제 눈앞에 놓인 그의 귓바퀴를 살짝 깨물었다. 파득 떨리는 몸을 놀리듯 느긋하게 말랑한 귀 안쪽을 핥아 올리면서 그의 손 하나를 붙들어 아래로 이끌었다. 그러고는 둔덕 옆으로 속옷을 젖히고, 미끈미끈하게 젖은 둔덕에 그의 손을 대어 주었다.
“하, 하아, 하…….”
그는 리비아의 색정적인 허락에 몸서리치며 그 둔덕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향유라도 부은 듯 미끈거리는 점막을 서툴게 더듬으며 구멍을 찾았다. 자신을 처음으로 집어삼키고, 유일하게 쾌락을 준 그것을.
손끝에 벌름거리는 질구가 닿자 더 이상 흥분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요한은 두 손으로 리비아의 둔덕을 벌려 젖힌 뒤 허리를 놀려 그녀의 사타구니에 제 좆을 들이댔다. 꺼떡거리는 선단이 서툰 체위 탓에 번번이 질구를 찾지 못하고 클리토리스 근방을 스쳤다. 리비아는 낮게 웃으며 살짝 발돋움해 삽입이 편하게 도왔다.
“응…….”
그의 선단이 구멍에 닿았다. 벌름거리는 구멍 안쪽에서 채 처리되지 못한 황제의 탁액이 울컥 흘러나왔다. 직감적으로 제 살덩이를 적신 그것이 그녀의 애액이 아님을 알아차렸으나 이미 멈출 수 없었다. 요한은 여자의 입술을 거칠게 삼키며 힘껏 허리를 추어올렸다.
한순간에 안쪽 깊이 파고든 성기가 우악스러웠다. 리비아는 파르르 떨며 요한의 살덩이를 위아래로 거리낌 없이 애무해 주었다. 그는 바들바들 떨며 허리까지 걷어 올린 그녀의 치맛단이 다시 아래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팔뚝으로 살짝 누르고 둔부를 쥐고 있다가, 말릴 새도 없이 아예 그녀를 받쳐 안아 들었다.
“흐윽……!”
리비아의 입에서 날카로운 교성이 터져 나왔으나 요한은 절박하리만치 집요하게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지 않고 난잡한 소리를 내며 혀를 얽었다. 그녀의 발끝이 뻣뻣하게 곱아들었다. 제 체중으로 완전히 그의 것을 뿌리까지 삼킨 채 접붙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녀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요한의 어깨를 두 손으로 틀어쥐고 허리에 다리를 감아 매달렸다.
“하아, 부인, 리비아, 흣…….”
요한의 표정은 이미 흐물흐물하게 풀어져 있었다. 해선 안 될 일을 욕망에 눈이 멀어 저질러 버리고야 말았다는 그의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당신이, 허락했으니까…….”
그는 그녀의 완전히 매달린 자세 탓에 빈틈없이 맞물린 하체에서 치고 올라오는 쾌락에 몸서리치면서 어깨를 쥔 그녀의 악력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이, 런……, 자세를, 하겠……다곤,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뱃속을 꽉 메운, 조금의 요령도 부리기 어려운 자세라 숨이 턱턱 막혔다. 하물며 요한의 성기는 살짝 끝부분이 휘어 포르치오를 정확히 짓누르곤 했으므로, 그녀는 이것만으로도 반쯤 가 버릴 것만 같았다.
“안 됩니까?”
요한이 애원하듯 물으며 눈매를 누그러뜨리고는 리비아의 다물린 입술과 턱선에 입을 맞춘 뒤 어리광을 부리듯 치댔다.
“다정하게 해 주신다지 않았습니까.”
“흑!”
얕게 움직인 것뿐인데도 깊게 흔들렸다. 리비아는 반사적으로 숨을 멈추었다가, 천천히 고르며 내쉬었다. 요한은 허락을 기다리듯 얌전히 그녀를 받쳐 안은 채 답을 기다렸다. 그 색욕에 사로잡혀 탁해진 눈은 일견 제 것과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리비아는 그 눈가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좋아요, 얌전히 군 포상으로 칠까요.”
“…….”
요한은 그녀의 둔부를 고쳐 쥐었다. 손끝이 회음부를 스친다. 제 것을 삼킨 구멍의 입구를 덧그리며 흥분한 그가 허리를 추어올리기 시작했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녀 역시 흥분한 것이리라. 요한은 처음부터 자제심 없이 추삽질을 시작했다. 퍽퍽거리며 뿌리까지 닿은 채로도 더 깊이 파고들 것처럼 처넣었다. 리비아는 완전히 그의 목에 팔을 둘러 안았다.
내리눌린 몸뚱이와 지점을 짓누르며 쳐올리는 살덩이가 주는 쾌락은 상당했다. 리비아는 낯선 체위가 주는 만족스러운 쾌감에 숨을 들이켜며 그의 것을 의식적으로 조였다. 요한이 짧은 신음을 흘리며 그녀의 머리에 뺨을 기대고, 언뜻 스치는 면면에 입술을 비비며 헐떡거렸다. 그녀는 그의 입술을 핥다 빨아 주었다. 살짝 아플 법도 한데도 그는 자신이 이런 상스러운 체위를 자처하고 그녀에게 봉사할 것을 갈구한 굴욕적이고 음탕한 상황에 흥분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응, 흣, 요한, 조금…… 하앙……!”
“너무, 조이지……, 마십시오, 금방, 갈, 것…… 같아서…….”
“어디서, 이런…… 외설적인 체위를, 배워…… 으응……, 온, 거죠.”
그는 ‘외설적인 체위’라는 말에 몸서리를 치며 낯을 붉혔다. 리비아는 보란 듯이 그의 귓가에 더운 숨과 신음을 섞어 말들을 쏟아 냈다.
“응? 어디서, 배웠……죠? 기대했나요? 나…… 흐윽, 나와, 접붙을, 때에, 쓰려고……, 으흣, 아!”
요한은 그녀의 속삭임에 목을 움츠리며 그녀의 둔부를 쥔 손으로 하체를 들어 올렸다가 제 쪽으로 당기며 한층 박차를 가했다. 리비아는 제 몸뚱이가 타의에 의해 들렸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시 내려앉으며 성기가 박혀 드는 낯선 쾌감에 파드득 몸을 떨며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요한은 제 쾌락에 눈이 멀어 그녀가 절정을 맞아 성기를 힘껏 죄자 오히려 속도를 올려 난잡하게 허릿짓했다. 서툰 이가 주도하니 엇박이었다가, 포르치오를 뭉개듯 쳐올리다가, 반쯤 빠져나갔다가 다시 파고드는 성기 표면이 빠듯한 내벽을 억지로 비집어 여는 쾌락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리비아는 연이은 절정에 헐떡이며 그의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찔러 넣고 움켜쥐었다. 그는 몽롱하게 풀린 눈을 반쯤 내리뜬 채 헐떡거렸다.
“갈 것, 흐, 갈 것 같습니다, 리비아, 리비아, 제발…….”
“제발, 응, 뭐죠…… 흣!”
“안에, 싸게, 해 줘요.”
리비아 모브레이는 느낄 때에 오히려 인상이 부드러워진다. 쾌락에 비례해 제게 애쓰는 수컷을 긍휼하게 여겨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요한은 그 얼굴을 좋아했다. 굴욕을 기꺼이 감수하고, 수치스러운 희롱이 섞이는 교접 중에도 흥분이 식지 않는 것은 그 탓일 것이다.
그는 아예 리비아의 하체를 제 손으로 힘을 주어 꾹 눌러 들썩이지 못하도록 붙든 채 안쪽을 헤집듯 허리를 돌렸다. 내벽이 한순간에 수축했다. 가 버렸을까? 리비아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비켜나 흐릿해지는 순간에, 그는 그녀의 입술을 탐하며 허락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리비아의 뱃속 깊이 제 씨물을 싸질렀다. 작렬하는 쾌감에 이명마저 느낄 것만 같았다. 그녀가 자신을 예뻐했다. 마음대로 움직이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귀환 후의 첫 독대를 허락해 주었다. 그런 자잘한 것들이 뒤엉켜 그의 머릿속을 마비시켰다. 맞닿았던 입술이 얕게 엇갈리며 리비아가 흐느끼듯 하으으, 하고 신음을 흘리는 것이 들렸다. 요한은 제 것을 우악스럽게 조이며 착정당함에 황홀함을 느꼈다.
한참이 지나, 여운이 잦아들 무렵에서야 리비아가 그의 입술을 얕게 빨며 평소의 그 엄하고 단정한 눈으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뻣뻣한 제 성기를 만족시키기보다, 순순히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는 쪽을 택했다. 매끄러운 천이 그녀가 발을 지면에 딛자마자 흘러내려 체액으로 더럽혀진 아랫도리를 가려 주었다. 리비아는 차분하게 치맛자락을 정돈한 뒤 손을 들어 요한의 뺨을 쳤다.
요한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돌아갔다가, 조용히 제자리를 찾았다.
리비아는 여전히 몸이 달아 어쩔 줄 모르는 수캐 같은 눈을 하고서도 얌전을 떠는 요한의 얼굴을 보며 머리채를 틀어쥐었다.
“윽!”
뺨을 친 것과 달리 이번에는 손속에 자비가 없었다. 그녀의 손에 확 딸려 간 요한이 한쪽 무릎을 꿇을 만큼 크게 휘청였다.
“허락 없이 가선 안 된다고 했을 텐데요.”
“죄송……, 합니다.”
“기분 좋았나 보군요.”
손아귀에 힘을 주고 뒤로 당겨 그의 고개가 들리도록 만든 리비아가 짧게 웃음을 흘렸다.
“좋아요, 나도 기분 좋았으니까. 대신 불을 지핀 것에 대한 벌은 주어야겠죠.”
“무엇을 하실 셈이신 겁니까?”
“그게 중요한가요? 내가 무얼 하든 당신은 헐떡이느라 바쁠 텐데.”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뿌연 체액으로 뒤범벅된 성기를 빳빳하게 세운 채 거친 숨을 내쉰다. 아무리 표정을 관리해도 무용한 일이었다. 이런 취급을 당하면서도 성기가 수그러들지 않는 한 그의 천박한 피지배욕은 감출 수 없으니까.
리비아는 천을 가까스로 붙든 채 반쯤 풀어져 흘러내리는 허리끈을 완전히 풀어서는 둘렀던 페플로스를 아예 벗어 버렸다. 요한은 자신이 싸지른 탁액이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숨을 삼켰다. 뒷덜미가 저릿할 정도의 흥분.
“마저 벗겨요, 입으로.”
그녀는 어깨 너머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느리게 뒤로 넘기며 요한에게 명령했다. 정사로 인해 달아오른 탓에 생기를 띠는 살갗과 달리 그녀의 표정은 냉엄하기 짝이 없었다. 요한은 금세 뒤바뀐 상황에 멈칫거리며 리비아를 올려다보았다.
“두 번 명령해야 할까요, 나의 요한?”
등골이 오싹했다. 그녀가 자신을 저렇게 부를 때면 언제나 심한 취급이 뒤따랐으므로. 그러나 요한은 도망치거나 변명하는 것보다 순순히 명령에 따르는 것을 선택했다.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속옷의 허리 부분을 이로 물기 위해 몇 번을 그녀의 살갗 위를 배회하며 문지르다가 가까스로 성공한 다음,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것을 끌어 내렸다. 젖은 천은 생각보다 끌어 내리기가 힘들었고, 이따금 놓칠 때면 요한은 체액이 흘러내린 다리 안쪽에 얼굴을 묻은 채 다시 헛손질하면서 천을 물어야 했다.
남자는 도중에, 그녀의 무릎을 지났을 무렵에 명령의 저의를 이해했다. 이것을 완전히 벗기려면 안면이 완전히 바닥에 닿을 만큼 납죽 엎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악질적인 명령에 가슴이 뛰었다. 머리로는 비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외려 더욱 열성적으로 그녀의 속옷을 벗겨 내는 데에 매진했다.
지면이 가까워진다. 그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지금이라도 그만둘까 싶은 생각이 몇 번이나 그를 사로잡았으나 요한은 제 의지로 지면에 얼굴을 댄 채 그녀의 속옷을 완전히 끌어 내렸다.
리비아는 명령을 완수하고서도 속옷을 문 채로 바닥에 엎드려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남자를 내려다보면서 발을 뺐다. 그러고는 손수 그의 머리채를 잡아 낯짝을 들게 한 뒤, 그가 벗겨 낸 천을 그 입에 처넣어 주었다.
“욱, 웁……!”
“수고했어요, 마음에 든 모양이니 물고 있도록 해요.”
“으븝, 읍!”
모멸적인 취급에 요한이 눈을 치뜨며 소리를 질렀으나 틀어막힌 입에서 제대로 된 말이 성립될 리가 없었다. 그녀는 머리채를 쥔 손에 힘을 주면서 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속눈썹이 스칠 만큼 가까이, 숨이 섞이는 거리에서.
“상스러운 것.”
하고 짧게 뇌까렸다. 요한은 그것만으로도 바르르 떨며 전율했다. 반쯤 갔다고 하는 것이 옳겠지. 리비아는 그의 머리채를 당기며 침대로 그를 끌고 갔다. 요한은 두피의 통증에 반사적으로 네 발로 조급하게 기어 그녀를 따랐다. 그 꼴이 얼마나 천박한지 스스로는 알 수 없으리라.
리비아는 침대 앞에서 손을 팽개치듯 놓았다. 요한은 입이 틀어막혀 두 배로 가빠진 숨을 고르며 어지러워했다. 리비아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그런 그를 가볍게 툭 걷어찼다.
“퍽 편안해 보이는군요, 벌을 받는 입장인데.”
“후우, 후우, 후…….”
요한은 더듬더듬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발치에 앉았다. 어설픈 자세 탓에 다리 사이의, 여전히 빳빳한 성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는 다리를 꼬고 앉아 제 무릎 위에 깍지를 낀 손을 올렸다. 사내는 그리 고압적인 자세 앞에 이리도 비천한 모습으로 무릎 꿇은 것만으로도 흥분했다. 거칠게 오르내리는 몸뚱이와 땀으로 반쯤 젖은 얇은 셔츠를 걸친 채 반라로 괴로워하는 그는 퍽 관능적이었다. 가학심을 부추기는 것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리라.
여자는 손을 뻗어 그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반쯤 풀린 채 황홀해하는 요한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요한 역시 그녀의 번들거리는 눈에 비친 제 얼굴을 본다. 평생을 보아 왔던 낯가죽이 낯설었다. 마치 타인처럼, 그만큼 쾌락에 흐드러진 스스로의 얼굴은 평상시와는 몹시 동떨어져 있었다.
“왜 안에다 싸질렀죠? 아, 물어봤자 답하지는 못하겠군요.”
리비아는 설핏 미소 지으며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그러고는 발을 뻗어 요한의 성기를 짓밟아 카펫에 문질렀다.
“흐으윽……!”
찔끔 탁액이 흘러나왔다. 요한의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오르고 핏대가 섰다. 그러나 사정감을 참느라 고역을 치르는 사내의 사정 따위는 그녀의 알 바가 아니었으므로 리비아는 억센 카펫 위에 그의 좆을 처박아 버린 것과는 별개로 퍽 상냥하게 기둥을 훑어 주며 홀로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미셸조차 하지 않는 실수를, 언제나 당신만이 저지르는군요. 왤까요, 요한? 당신이 덜떨어져서? 아니면 육욕에 눈이 멀어서? 혹은……, 발정이 나서?”
나직한 웃음이 뒤따랐다. 그는 빙글빙글 머릿속이 도는 와중에도 입 안에 물린 천 조각을 재갈 대신 억세게 씹으며 숨을 내쉬었다. 까딱하면 갈 것 같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헐떡이는 그의 눈앞에 하얀 귀부인의 발에 짓밟힌 제 성기가 들어왔다. 아, 이 얼마나 비참하고 모욕적인 대우인가. 그러나 리비아 모브레이는 자신이 유일무이하게 해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어떤 수단을 가져와도 자신이 질 수밖에 없는 상대. 그 사실이 분노를 쾌락으로 뒤집어 그의 뇌를 진탕 들쑤셨다. 리비아는 발을 미끄러뜨려 귀두 부분만을 발끝으로 밟고 살살 문지르기 시작했다. 요한의 잇새에서 짐승이 우는 것과 닮은 흐느낌이 비어져 나왔다.
“당신은 언제나 날 수고롭게 해요. 폐하께 비할 바가 아니죠.”
그녀의 발이 능숙하게 요한의 것을 훑어 댔다. 그러다 체액으로 발이 미끄러워지자 요한의 허벅다리를 짓밟으며 길게 쓸어내린다. 마땅히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인간인 것처럼.
이것이 그녀의 본래 모습이리라. 요한은 문득 깨달았다. 미슐레 호엔베르크나 다른 놈들에게도 가감 없이 이런 짓을 해 왔을 것이다. 자신이 그간 손수 개발당한 것은 나름대로 후한 처사였음을 이제야 알았다. 그것이 못내 분해 눈을 치켜뜨자, 그녀가 언뜻 미소 지으며 발등으로 그의 성기를 후려쳤다.
“후욱…….”
크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굴욕적이었다. 그러나 걷어차이고도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달아오른다. 그녀는 입매를 얕게 비틀어 조소하며 그의 성기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이런 대접을 해도 느끼는군요. 상스러운 나의 요한.”
울컥 화가 치밀었으나 반론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녀의 발이 더럽고 추잡한 것처럼 제 성기를 떠밀 때마다 허리가 움찔움찔 떨렸으니까. 차라리 이런 식으로 욕보일 것이라면 가게 해 주었으면 했다.
벌을 받게 된 계기를 떠올리자 자신이 화를 내는 것이 몹시 부당함을 인지한 요한이 고개를 돌리고 씨근덕거렸다. 안에 싸지 않았어도 결국 이런 꼴이 되었겠지만, 첩이라 들먹이기까지 하고서 아무리 벌이라지만 다른 것들과 동일한 취급을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비아는 그의 퍽 다채로운 표정을 즐겁게 관찰하며 사타구니 안쪽의 연한 살을 발로 느릿느릿 문질러 주었다. 파르르 떨며 몸뚱이를 옹송그린 탓에 그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다리 위에 나부꼈다. 리비아는 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며 속삭였다.
“이제 기분 좋게 해 줄까요.”
그녀의 발끝이 고환을 살짝 눌렀다가 기둥을 타고 기어올랐다. 요한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흠칫거리다가 애가 닳아 그녀의 발바닥에 제 좆을 치대며 허리를 놀렸다. 사뭇 필사적인 꼴이라 제지하지 않고 두자, 그는 리비아의 종아리를 붙들고 좆을 문질러 댔다. 훅훅 내쉬는 거친 숨이 다리에 그대로 닿았다. 리비아는 발끝에 힘을 주고 그의 기둥을 괴롭히며 진득하게 속삭였다.
“가 버려도 좋아요.”
“후욱, 후…….”
“어서.”
요한은 이를 악물며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발로 제 좆을 세게 짓누르며 사정했다. 두 번째 사정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진득한 것이 거리낌 없이 여인의 발을 더럽혔다. 사내는 반쯤 풀린 눈으로 헐떡이며 더욱 힘을 주어 성기를 짓눌렀다. 황홀한 여운에 허리가 들썩거렸다.
전부 이 여자 때문이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그녀가 자신을 이상하게 만든 것이다.
리비아의 손이 그의 입술을 더듬다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매가리 없이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순종했다. 제 타액으로 완전히 젖은 천 조각이 끌려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배곯은 들개처럼 타액이 입술 밖으로 길게 늘어졌다.
“하아, 하…….”
그녀가 끄집어낸 그것을 요한의 성기 위에 성의 없이 떨구었다. 그는 다리 안쪽을 바르르 떨며 허리를 당겨 그녀에게 좀 더 바짝 붙어 앉았다.
“그리 안달하지 말아요. 가여워 보이니까.”
“당신이, 이런, 후우, 이런 식으로 자극하니까, 후…….”
“이런 식이 뭐죠?”
“……내 입으로 말해야 합니까?”
“속옷을 물고 성기를 짓밟히며 존엄을 유린당해 절정을 맞아 버렸다는 말이 부끄러운가요?”
“그런 말이 부끄럽지 않은 것은 부인뿐일 겁니다.”
“언제까지나 순결한 것처럼 수치스러워하는군요. 그런 점이 이런 취급을 초래하는 건데도.”
리비아는 다리를 넓게 벌리며 제 무릎을 툭툭 쳤다. 요한은 완전히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눈치를 살피며 그녀의 음부를 흘긋거렸다. 불그스름한 속살이 탁액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구멍이 뻐끔거릴 때마다 뿌연 점액이 흘러내렸다. 자신이 덧씌운 흔적에 흥분이 올랐다.
그녀는 요한의 집요한 시선에 흥분하며 그의 뺨을 다정스레 어루만졌다. 모욕을 준 다음 이리 부드럽게 대하면 금세 힘을 빼고 따라오는 꼴이 우습다. 그녀는 다른 손으로 제 둔덕을 활짝 벌렸다. 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좀 더 들이밀자 열 오른 음부에 숨결이 닿았다.
“이렇게나 잔뜩 싸지르고는.”
요한의 눈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리비아는 두 손으로 둔덕을 완전히 잡아 벌렸다.
“네? 요한. 이렇게나 싼 다음 벌을 받았다고 해서 토라져서야 되겠어요?”
“…….”
“요한?”
“안…… 됩니다.”
“그렇죠?”
그녀는 은근한 목소리로 사내를 꾀었다.
“제대로 된 벌을 받았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요? 기분이 좋아진 건 당신뿐인데.”
그의 고개가 얕게 끄덕거렸다. 구멍이 느리게 오물거리며 정액을 토해 냈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저것을 쑤시고 싶다. 기분 좋게 만들고 싶어. 그러면 기분이 풀리고, 날 다시 받아 줄 텐데. 이성을 버리고 저 샅에 좆을 처박고 예쁨 받고 싶었다. 부드럽게 안아 줬으면 했다. 요한은 맹목적으로 고개를 끄덕댔다.
“그러면 깨끗하게 해야겠죠?”
“아…….”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체에 다시 피가 쏠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흥분했다. 그가 자신이 이해한 바가 옳은 것이냐는 듯 리비아를 올려다보자 그녀는 가히 자애롭기까지 한 얼굴로 속삭였다.
“빨아요.”
그녀의 입에서 날것 그대로의 말이 나올 때마다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휘둘리게 된다. 요한은 하악거리며 벌벌 떨리는 입술을 벌리고 천천히 혀를 내밀었다. 그녀는 배움이 더딘 이를 이끄는 스승처럼 고요하게 기다렸다. 그는 결국 개처럼 달려들어 그녀의 점막을 게걸스럽게 핥아 댔다.
“으응……, 천천히, 요한.”
훅훅 더운 숨을 몰아쉬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는 리비아의 지시대로 속도를 줄이면서도 흥분한 만큼 혀로 넓게 힘주어 점막을 핥았다. 클리토리스를 밀어젖히듯 핥아 올리자 그녀의 허벅지 안쪽이 단단히 굳었다. 요한은 그녀의 발목과 종아리 어림을 뜨거운 손으로 어루만지며 클리토리스를 입술로 조이며 강하게 빨아 올렸다.
“흣……!”
날카롭게 비어지는 신음. 자신이 옳게 애무했음을 깨달은 요한이 점점 더 열성적으로 혀와 이로 딱딱하게 도드라진 그것을 갉작거리면서 빨아 댔다. 쭙쭙대는 소리와 숨 몰아쉬는 소리가 여실했다.
“아래를 빨아야죠, 깨끗하게 해야 할 곳은 달리 있잖아요?”
가쁜 숨이 섞인 달뜬 지시에 홀린 듯이 고개를 처박았다. 제 것과 제 것이 아닐지도 모르는 정액이 뒤엉킨 구멍을 핥는데도 아무런 저항감이 들지 않았다. 차라리 말 그대로 이것들을 치워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알량한 사명감이 들 지경이었다. 그는 뾰족하게 혀를 세워 질구에 집어넣은 채 안쪽을 헤집으며 이따금 입술로 클리토리스를 스치며 애무했다. 찔꺽거리는 소리, 입을 다물지 못해 날것 그대로 쏟아지는 가쁜 숨소리, 그의 상스러운 몰골에 흥분해 앓는 소리를 흘리는 여자.
행위에 집중할수록 골머리 아픈 이성도 일상도 깡그리 잊혔다. 그저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기분 좋고 예쁨 받는. 평생을 날을 세우며 살아온 그로서는 퍽 중독적인 일이다. 비린 점액이 타액에 섞여 삼켜져도 역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반응 하나하나에 촉각이 곤두설 뿐.
“옳지, 읏……, 그만.”
요한은 미련 섞인 입술로 그녀의 음부를 치대다 느릿하게 떨어져 나갔다. 리비아는 그의 번들거리는 입가를 손수 닦아 주며 치하했다.
“잘했어요.”
“…….”
마치 애완동물이 간단한 재롱을 부릴 때에나 낼 법한 어조였다. 그러나 요한은 기꺼이 그녀의 손에 고개를 묻으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쓰다듬듯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는 것에 안락함을 느꼈다.
“올라와요.”
그의 뺨을 가볍게 두드린 리비아가 어둡게 그늘진 침대 안쪽에 몸을 누이며 명령했다. 요한은 잠깐 사이에 또 벌을 받을까 봐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가 그녀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 순순히 침대 위로 올라가며 걷혀 있던 천개의 매듭을 풀어 등 뒤를 검게 닫았다.
“부끄러운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퉁명스러운 어조였지만 독기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시피 했다. 리비아는 제 곁에 요한을 누인 다음 그의 몸뚱이 위로 기어올라 마주 본 채 몸을 겹쳤다. 습윤해진 피부가 부드럽게 감겼다. 맨살이 닿는 감촉이 주는 안락함보다도 그녀의 몸뚱이가 제 몸 위로 치대는 것이 주는 긴장감이 더 컸던 요한의 몸이 사뭇 뻣뻣했다. 리비아는 그의 뻣뻣한 성기를 제 하복부나 허벅지에 문지르며 아무렇지 않게 속살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몰두했으면서.”
“……더…….”
그가 파르르 입술을 떨며 고개를 돌린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분명 더 수치스러운 일을 하게 될 테니까…….”
치욕보다도 기대감이 더욱 짙게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리비아가 허벅지를 모으고 다리 안쪽의 부드러운 살집 사이에 성기를 가두어 압박감을 주자 목에 핏대가 섰다. 가엾고도 사랑스러운 꼴이었다.
“그렇지만 받고 싶잖아요?”
“읏…….”
“무력하고 굴욕적으로 범해지고 싶지 않나요?”
절로 그녀에게 당했던 것들이 떠오른다. 정원에서든 집무실에서든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겁탈했던 일들, 뒷구멍을 범하며 알을 심었던 행위, 마법조차 쓰지 않고 무력하게 순종할 때면 전에 없는 쾌감들이 그를 눅진하게 녹여 준다.
상상만으로도 흥분감이 치달았다. 뾰족하게 곤두선 유두가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에 짓눌리며 얕은 쾌락을 주었다. 요한은 어느덧 메마른 제 입술을 핥아 축이며 여전히 돌린 고개로 그녀를 차마 곁눈질조차 하지 못하고 얼어 침묵했다.
“귀여운 나의 요한,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군요. 이렇게나 얌전해질 거면서 며칠 예뻐해 주지 않으면 금세 기어오르고.”
그녀가 거칠게 유실을 꼬집어 비틀더니 그 손으로 요한의 입 안을 헤집었다. 아찔한 통증과 뒤섞인 자극에 허리를 들썩이자 입 안을 부드럽게 더듬으며 달래 주는 것까지. 이것을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요한은 침대 시트를 움켜쥔 채 자신을 희롱하는 여자를 받아들였다.
“우윽……!”
“질척거려…….”
웃음기 섞인 목소리, 미끈거리는 입 안을 억지로 헤집고 농탕치는 곧고 가느다란 손가락들, 성기를 가둔 것으로도 모자라 무릎을 교차시켜 아프지 않을 만큼만 조이는 다리, 모든 것이 어둠이 내린 침대 위에서만 주어지는 포상이다. 남자는 혓바닥을 가지고 노는 그녀의 손을 핥느라 돌린 채 있으려던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매달렸다. 리비아는 그의 재롱에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손을 거두고 하체를 들썩였다. 삽입의 전조를 기민하게 알아차린 사내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집어삼켜지는 것을 고대했다. 그녀는 퍽 자애롭게도 더 괴롭히지 않고 꺼떡거리는 성기를 사타구니에 두어 번 치대다 그의 몸뚱이를 제 다리 사이에 가둔 채 허리를 낮췄다. 미끈거리는 구멍이 선단을 훑고, 그대로 체중을 실어 내린 둔부가 그의 몸뚱이 위에 내리찍혔다. 얕은 반동과 고대했던 것보다도 자극적인 삽입이, 사물과 유혹적인 여체 사이에 갇혀 짓눌리는 쾌감이 그를 절정에 이르게 했다. 요한은 벌벌 떨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리비아의 뱃속에 씨물을 싸지르며 황홀경에 젖어 들었다.
“버릇하곤.”
허락도 없이 파정했다는 이유로 벌을 받은 것이 직후의 일이건만 이토록 학습 능력이 없다니. 요한은 쾌락으로 혼곤한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그녀의 자비를 구했다.
“죄송, 흑, 너무…… 좋아서, 하아, 죄송합니다, 벌은, 읏, 그만…….”
“벌은 싫어?”
그녀가 뭉근하게 허리를 돌리며 속삭이자 요한이 절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냥, 이거…… 아, 이게…… 좋아서……!”
“지금은 마저 당신을 범해 줬으면 좋겠어요?”
“네, 아, 아읏, 죄송, 하, 아아, 조이지…….”
“어리광쟁이 요한.”
그녀가 웃음을 흘리며 허리를 바로 세우고 앉아 요한의 경련하는 복부를 더듬었다. 그저 훑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바짝 달아오른다. 그는 몽롱해진 눈을 뜨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허공을 배회하던 시선이 언뜻 그녀를 향할 때마다 번들거리는 눈을 찾았다. 자신을 옭아매는 위압의 근원. 동시에 이 모든 추태를 관조하는 그녀의 눈.
힘없이 헤벌어진 입술이 벙긋거리며 이따금 둔하고 멍청한 신음을 질질 흘렸다. 리비아는 그의 턱끝에 가볍게 입 맞춘 뒤 살짝 허리를 들었다가 쳐 내리며 성기를 꾹 조였다.
“좋아요, 다른 수컷을 품어 준 내 잘못도 있으니 이번은 봐줄게요. 얼마든지 가 버려도 좋아요, 대신 내가 만족할 때까지…….”
아주 느리게 앞뒤로 허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요한은 그녀의 말이 끝맺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올려다봤다. 리비아는 오연하게 미소 지으며 시트를 그러쥔 남자의 두 손을 붙들어 제 손과 가락가락 얽어 쥐었다. 단단히 깍지 껴 매인 손가락에도 습기가 머무른다.
“세워.”
오싹오싹한 전율이 수컷의 등골을 달구었다. 숨이 절로 거칠어진다. 흥분과 동시에 위압감에 짓눌렸다. 그야말로 잡아먹히는 기분이었다. 포식자가 만족할 때까지 그 몸을 내어놓으라는 폭압적인 명령, 남은 것은 그가 화답하는 것뿐이다.
남자는 힘겹게 마른침을 삼키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리비아가 그의 손을 다시 한번 단단히 고쳐 잡은 뒤 허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쩍쩍 젖은 점막이 살덩이를 집어삼킨 채 게걸스러운 소리를 냈다. 두 손을 맞잡은 채 그녀를 지탱하며 삼켜진다. 앞뒤로 재게 추어 대며 짧은 자극을 가하다 이따금 뭉근하게 허리를 돌릴 때마다 그녀의 포르치오를 짓누른 채 둥글리는 것이 느껴졌다. 요한은 충실히 그녀의 도구로 전락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쾌락에 짐승처럼 흐느꼈다.
“흐윽, 리비, 리비아, 아, 아아……, 읏, 응…….”
그저 짓찧기만 해도 신음이 절로 흘러내렸다. 탄력적인 둔부가 그의 몸뚱이 위로 치대는 것도, 기분 좋은 무게감과 함께 그 살집의 감촉을 만끽하게 하는 것도, 빡빡한 내벽이 무자비하게 기둥을 훑으며 움직이는 것도, 무엇 하나 그를 점잖게 굴지 못하게 할 뿐이었다.
여자는 그가 이미 반쯤 가 버린 발정한 낯짝으로 제 이름을 부르며 무력하게 맞닿은 손을 구명줄처럼 붙드는 것에 흥분하며 힘껏 샅을 치댔다. 단단한 몸뚱이와 맞부딪힐 때마다 그 감각이 하복부를 찌르르하게 울린다. 기분 좋은 부분을 적확하게 밀어 올리는 살기둥이 만족스러웠다. 그녀 역시 쾌락으로 흐려진 얼굴을 하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안쪽을 진탕 헤집는 것에 집중했다. 가빠진 숨과 열기로 침대 위가 덥혀져 일말의 갑갑함마저 주는데도 마냥 황홀했다.
자신이 길들인 정결한 수컷이 쾌락을 위해 제 몸을 내어놓고 있다. 그러도록 부수고, 매만지고, 만든 것이 리비아 본인이라는 것이 못내 자극적이었다. 말초부터 빠듯한 정복욕과 소유욕이 그녀를 자극했다.
“흑, 윽, 응, 아, 부인, 천, 천천히……!”
“안, 돼요, 당신이 견뎌.”
요한은 반쯤 풀린 눈을 홉뜬 채 벌벌 떨며 그녀의 몸짓대로 흔들렸다. 탄력적인 두 다리 사이에 갇힌 갑갑함마저 황홀했다. 사정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무자비하게 민감해진 기둥을 조여 물며 위아래로 샅을 쳐 대는 쾌락에 다물지 못한 입에서 타액이 흘렀다. 리비아가 인상을 확 찡그리며 허리를 내린 채 좌우로 뭉개듯 치대며 맞잡은 손을 당겨 그의 상체를 일으켰다.
“으응…….”
그 녹진하게 힘 풀린 입술을 거칠게 집어삼킨다. 요한은 그녀의 몸뚱이로 하여금 자신을 지탱하며 고개를 숙이고 리비아의 혀를 받아들였다. 달아오른 점막을 훑을 때마다 숨이 뚝뚝 끊겼다. 그녀의 손끝이 제 손등을 짓누르고 내벽이 강하게 수축했다. 뱃속에 삼켜진 채 반쯤 물러졌던 성기가 재차 자극에 힘입어 뻣뻣하게 발기하는 것이 느껴졌다. 요한은 과한 쾌락에 반쯤 울음으로 흐려진 낯을 하고 입술 밖에서 그녀와 난잡하게 혀를 얽으며 빌었다.
“응, 그만……, 리비아…….”
“쉬이, 착하지…….”
“으응, 음……, 읏……, 힘들어, 힘듭니다…….”
그녀가 입술로 요한의 혀를 조이며 빨아 준 뒤 경련하듯 고개를 거두는 그의 목뒤를 틀어쥐고 붙들었다. 검게 번들거리는 눈이 휘어진다.
“역시 내 밑에서 울부짖는 건 당신이 가장 어울려요.”
“못 해요, 더는, 못 합니다, 부인, 제발…….”
“괜찮아요, 망가질 것 같아 그런 거라면 부디 참지 말고 무너져도 좋으니까.”
요한의 턱선을 길게 핥아 올린 여자가 그의 귀 뒤의 우묵한 자리에 입술을 묻으며 속삭였다.
“할 수 있죠?”
파르르 떨었다.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그러나 과한 쾌락은 그의 머리를 들뜨게 해 아무렇게나 입을 놀리게 했다. 못 해요, 못 하겠어요, 그만해요…….
물론 그 말들은 죄 그녀의 입 안에서 흩어졌지만.
* * *
요한은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었다. 밤새 희롱당한 살갗 위로 손자국과 순흔이 이리저리 번졌고, 유두와 입술은 불그스름하게 부어 있었다. 리비아는 그를 뒤로하고 첫날 그랬듯 아무렇지 않게 치장했다. 몸을 씻고, 엉망진창이 된 그 진녹색 드레스를 세탁하라 지시하고, 갑갑하기 짝이 없는 상복을 꺼냈다. 시녀의 눈이 잠깐 상복 위를 배회했다. 검지 않은 옷을 입은 것이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고 짧은 시간이었다. 리비아는 그저 미소 지으며 눈짓으로 재촉했다.
그녀는 무언가를 직감한 사람처럼 굴었다. 굳이 잘 찾지 않던 버슬 드레스를 입었고, 액세서리를 두르지 않았다. 검은 장갑은 실크 대신 가죽으로 만든 것을 꼈다.
“요한이 깨어나면 그냥 둬요. 내가 어디로 갔느냐고 하면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고.”
“네, 부인.”
리비아가 방문을 나서자 미슐레가 어두운 낯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상스레 그를 대했다. 그래, 이전처럼. 살을 섞기 전처럼.
쉐리는 그녀를 다이닝 룸으로 모시고, 가벼운 조찬을 올렸다. 정작 그녀가 입에 댄 것은 진하게 우린 홍차뿐이었으나 그들의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그녀가 먼저 말하기 전에 질문할 만큼 건방진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주인님.”
그녀의 잔이 거진 비워질 무렵에서야 집사가 공손하게 찾아왔다. 리비아는 잔을 내려 두고 가볍게 매무새를 다듬었다.
“무슨 일이죠.”
그는 은쟁반에 받쳐 나이프와 편지 하나를 내밀었다. 황실의 인장과 황금빛 봉랍, 황제의 서신이었다. 리비아는 태연히 그것을 집어 들고 봉투를 갈랐다. 그 안에 담긴 단출하고 가벼운 한 장짜리 서신을 꺼내 든 그녀는 아주 한참 동안 읽었다. 한참을, 아주 오래도록.
* * *
에피알테스의 대에 이르러 반절 이상이 숙청당하며 존재 자체가 무색해진 원로원이 오랜만에 소집될 만큼의 큰 소식이었다. 로덴바흐 변경백이 반란을 획책하며 불법적인 수단으로 자금을 끌어모으다 포웰 공작 부인의 밀고로 붙잡혔다고. 실제 그를 잡기 위해 황실이 사전에 점거했던 자금 세탁소에 그의 수족이 들이닥쳤고 이를 체포해 압송, 로덴바흐 백작 역시 지하 감옥에 구금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로덴바흐가 이렇게 무너질 리가 없음을 모두가 알았다. 그러나 그 안하무인이던 황제가 친히 그의 체면을 고려하여 원로원 내에서 처분하자 일렀고, 원로원은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로덴바흐 변경백마저 실각당한 지금 황제에게 밉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반역이라는 대역죄를 선고받은 그를 구명하기 위해 나설 수 있는 인간은 공작 부인뿐이었다. 원로원이나 고위 귀족들이 아무렴 로덴바흐와 끈끈하다 해도 멸문지화를 함께 뒤집어쓰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가 밀고자라니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을까.
회장의 공기가 엄숙했다. 건국 이후 줄곧 중대한 사안을 판가름하기 위해 이용되었던 원로원 회의장은 증인과 판관, 그리고 원로원의 자리 외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석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긴장한 숨소리가 모여 벽을 웅웅 울릴 지경이었다.
“그러잖아도 허한 자리에 머릿수마저 모자라니 영 허전하군.”
여전히 제멋대로 풀어 헤친 매무새였으나 자리가 자리인 만큼 왕홀을 지니고 판관의 자리에 앉은 에피알테스가 비스듬히 팔걸이에 기대며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반역의 화를 입을 뻔한 군주의 모양새는 아니었으나 늘상 저리 광인처럼 굴었던 이이니 무작정 의심할 수도 없었다. 진정 제 목조차 두려워 않는 광기의 화신다웠다.
“개회하지. 로덴바흐 변경백의 대역죄에 관한 사안을 논하는 자리일세.”
에피알테스가 입을 열자 바짝 긴장한 몇 되지 않는 원로원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에피알테스는 상석에 앉아 시건방지게 왕홀을 까딱거리며 명령했다.
“죄인을 끌어내라.”
훅 누린내가 끼쳤다. 찌들고 상해서 도저히 비위가 상해 숨을 들이켜고 싶지 않은 냄새. 이미 심문을 한바탕 당했는지 손발톱이 뽑혀 진물이 흐르는 로덴바흐 변경백이 끌려 나왔다. 원체 거구였던 이이니 그를 끌어내기 위해 기사 여럿이 들러붙어야 했다.
노회한 사내는 여전히 부리부리한 눈으로,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몸을 하고 자신을 둥글게 감싸고 배치된 원로들의 자리, 황제의 면전에 끌려 나와서도 강건했다. 오히려 저를 쫓던 사냥꾼과의 혈투를 벌인 듯한 기백이다.
황제는 불온하게 미소 지으며 저를 노려보는 백작의 눈을 바라보았다.
“반론 있나?”
“저는.”
쇠 끓는 소리와 함께 짧은 기침이 날카롭게 터졌다.
“역적이 아닙니다.”
그는 사뭇 당당했다. 원로원이 쓸려 나가도 살아남은 것이 로덴바흐였고, 아무리 황제라 해도 귀족들의 구심점인 로덴바흐를 쳐 낼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므로.
황제는 이미 많은 민심을 잃었다. 아무리 백성에게는 공정히 군다 한들 영향력을 가진 것은 힘 있는 자들이었으므로 그의 손에 가주를 잃고 명예를 잃은 자들이 그를 위해 일하겠는가. 그러니 로덴바흐 백에게는 믿는 구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이따위 죄인 취급으로 수모를 가한 뒤 재산 일부를 국고로 환수하여 파하겠지.
“이는 모두 제 딸이 씌운 누명이오니, 부디 공명정대한 혜안으로 살펴 주시기를 청하나이다.”
쿵!
노백작의 머리가 돌바닥에 거세게 짓찧었다. 그는 스스로 나서서 고두하며 황제의 면을 높여 주었다. 그러나 에피알테스는 늘 그랬듯 제대로 자신을 알지 못하는 주제에 머리 위에서 놀아나려고 드는 것들을 예뻐할 생각이 없었다. 이제사 노백작을 잡아 체면이라도 차려 보려고 이런 일을 수락했을까. 귀족들이 반발하면 가져다 죽이면 그만이었다. 기사단이 반발하는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는 유일무이한 대륙의 마법사를 움직일 수 있는 키가 있었으므로.
“그렇다고 하니, 증인을 들이게.”
돌이 돌을 갉으며 문이 열렸다. 음울하게 등불 일렁이는 석실 안으로 상복을 두르고 베일을 내린 여인이 고요하게 들어섰다.
“삼가 명 받잡나이다, 포웰이 주인의 앞에 나아왔으니 부디 하명하소서.”
주인. 주인이라 칭하였으렷다.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노백작 역시 골이 아렸다. 주인이라니?
“백작이 이 모든 것을 자네가 씌운 누명이라 하던데.”
“그러합니까.”
“반론을 듣지.”
이질감이 들었다. 단둘이서 짜고 치는 판이라는 직감적인 불길함. 로덴바흐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베일을 짙게 내린 딸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드러난 입술은 태연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흐트러짐 하나 없는 그의 걸작. 가슴이 불온하게 들끓었다. 내내 나지 않던 식은땀이 등줄기에 맺혔다.
“그의 말은 십분 일리가 있습니다.”
“잠깐, 부인께서는…….”
“발언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원로 중 하나가 말허리를 끊자 리비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당장에 받아쳤다. 몸뚱이는 하나 움직이지 않고 고개만 홱 돌린 그 모습은 가히 괴기스럽기까지 해, 말문이 막혔다.
“마저 발언하지.”
에피알테스가 손을 휘휘 저으며 재촉했다.
“저는 이제껏 그의 수족으로 태어나 살고, 백작이 본 가의 주인이자 딸의 지아비인 조르주 공을 독살함을 알면서도 아무런 수도 쓰지 못하였으며, 그의 불온한 야심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무능하여 그를 미리 적출하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죄가 아니랄 수 있겠습니까?”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노백작의 턱이 부르르 떨렸다. 형체 없는 불길함이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암살.”
누구인지 모를 이가 탄식처럼 내뱉었다.
“그렇습니다. 조르주 공은 그의 장인이자 가신인 로덴바흐 백작이 일족을 이간질하여 획책한 암살 계획의 피해자이자, 죽어서라도 이 죄인을 벌하고자 한 숭고한 의지의 사내입니다. 이는 저와 구르디예프 경의 이름에 걸고 맹세하는 진실입니다. 소지품을 반입할 수 없는 원로회의 규율에 의해 증좌를 가져오지는 못하였으나, 포웰의 주인과 대현자의 이름으로 값을 대신하겠습니다.”
적막이 흘렀다. 그저 반역죄가 중한 것이 아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알아차렸다. 이는 해묵은 복수이자, 황제의 손을 빌어 행하는 살인 멸구의 순간이라는 것을.
노회한 백작마저 이를 깨닫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의 목 안에서 짧게 딸의 이름이 그륵거렸다. 그깟 것 하나에 앙심을 품었는가. 그가 죽어 나자빠짐으로 인해 너 역시 더욱 나은 삶을 이루었을 텐데.
리비아는 익숙하게 올라오는 신물을 삼켰다. 그 알량한 야욕, 본인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게걸스러움을 딸과 가문을 위해서라면 악도 서슴지 않겠다는 숭고한 부정인 양 스스로 미혹되어 휘두르는 꼴을 보노라면 늘상 새로운 분노가 일었다. 그저 딸을 팔고, 멀게나마 피붙이이자 주인인 이를 죽여서라도 그 공작의 관, 화사한 중앙의 영토가 가지고 싶어 했던 것뿐인 주제에.
“……좋아, 짐의 이름으로 그 맹세를 보증한다.”
“폐하…….”
반사적인 탄식이 터져 나왔으나 뒷말을 이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광인과 악마가 손을 잡았다. 이에 목을 들이댔다간 백작과 함께 나뒹굴게 생겼다. 어찌 그를 구명해 주겠는가.
다만 원로들 역시 그와 별반 다른 인종들이 아니었으므로, 원망과 분노가 뒤섞인 경멸의 눈으로 리비아를 노려보았다. 어찌 딸자식이 아비를 내치는가, 정녕 천륜을 저버리고 부정을 짓밟는가. 순종하여 덕이 높고 품위 있는 귀부인으로 알고 칭송한 과거의 자신들을 모조리 속이고 농락했다.
결투라는 미명하에 인명을 앗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 귀족들의 삶이다. 이제 와서 살인 멸구가 특별히 치 떨리는 일일 리가 있나. 리비아는 그들의 분노가 그저 추한 두려움에서 기인했음을 모르지 않았다. 제아무리 떠든단들 돌아보지 않을 셈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그녀의 등에 대고 소곤거렸다. 소녀일 시절, 영애이던 시절, 귀부인이 된 지금까지도.
허면 그 소리 벗을 여러 방법 중 남은 것을 행하지 아니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공작의 관, 가주의 자리, 자신을 희생하고 인내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적법하고도 정통한 영광의 보상을.
그러니 리비아는 그저 황제를 바라보며 열망 어린 눈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는 공작의 자리를 삼키려는 야욕이 비협조적인 저의 뜻 아래 막히고 구르디예프 경이 자신을 비호하지 않자 이에 대한 앙심을 품고 포웰을 깎아내리려 있지도 않은 공작의 사생아를 만들려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폐하의 안뜰을 이리도 헤집은 것입니다. 가신이 주인을 해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감히 지존이신 폐하의 분노를 휘두르려 하였으니 이 어찌 능멸이 아닐 것이며, 이 교만이 어찌 반역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 모든 것을 뒤늦게서야 결단한 제게도 책임이 있으니 이를 헤아려 단호히 벌해 주십시오.”
적막이 찾아왔다. 그녀는 가히 좌중을 설득하는 것에 대단한 재능이 있었다. 모든 것을 알고, 단순히 베갯머리송사로 일을 주도한 에피알테스마저 본질을 잠깐 잊고 미혹될 만큼 대단한 연설이었다. 그는 헛웃음을 흘리다 퍽 자애롭게 눈을 내리감고 미소 지었다.
“좋아.”
그는 즉흥적으로 한 가지 여흥을 즐기고자 마음먹었다. 리비아 역시 자신이 모르는 폭탄을 가져다 엎었으니 저도 마땅히 돌려주어야 예의일 테다.
“판결하겠다. 로덴바흐 백작은 가주를 죽인 죄를 물어 사형하고, 그와 뜻을 함께한 방계 역시 모조리 거두겠다. 다만 짐의 자비를 베풀어 가주들의 목으로 식솔의 명은 살려 주마.”
“폐하……!”
로덴바흐 백작이 벌떡 일어나려다 작살난 무릎 탓에 크게 휘청였다. 황제는 그 꼴이 재미있는지 잠깐 소리 죽여 웃더니, ‘아, 내가 어디까지 말했지.’ 하고 혼자 중얼거린 다음에야 말을 이었다.
“하여간, 마땅히 포웰도 화를 입어야 하겠으나……, 여인으로서 힘없던 바를 내 헤아려 공작 부인 역시 사면하겠다. 애당초 가솔과 친정을 하루아침에 잃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대가겠지. 무엇보다 그대에겐 밀고의 공이 있으니까.”
황제는 길게 말한 것만으로도 지친다는 듯 작위적인 한숨을 쉬더니, 이내 잔혹하게 미소 지었다. 아름다운 낯, 그러나 늘 피의 숙청을 불러일으키던 미소였다.
“다만 죽은 이의 넋을 위로는 해야 하니 이곳에서 죄과를 끊는 것이 어떻겠나.”
“……무엇이든 하명하소서.”
그녀가 엄숙하게 대꾸하자 황제는 제 등 뒤에 은밀하게 숨어 호위하던 기사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가, 자신의 허리춤에 묶여 있던 검집을 증인석의 상판에 올려놓고 자리로 돌아갔다. 황제는 갑작스럽게 싸늘해진 좌중을 공들여 찬찬히 살펴본 뒤, 마지막으로 그 검집에 눈을 둔 여인을 내려다보며 희열 어린 미소를 지었다.
“피를 보자.”
바르르 몸이 떨렸다. 이 이상 즐거울 수가 없다. 기세가 등등하던 놈들이 황망해져 자비를 구걸하는 시선이란.
“피는 피로 씻고, 죽음은 죽음으로 씻는 법이 아닌가. 그에 상응하는 목숨, 그래, 포웰의 원수 로덴바흐의 목으로 우리의 가여운 포웰 공을 기리잔 말일세. 허면 내 최소한의 예의와 자비로 이 일을 곱게 봉해 주지.”
따르지 않는다면 이미 실토한 것들과 벌린 일로 아주 곤죽을 만들어 버리겠다는 선고였다. 리비아는 그저 묵묵하게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작은 기어이 광소했다.
“나의 딸.”
그는 광증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뜨고 여인을 노려보았다. 기괴할 정도로 치솟은 입꼬리가 괴기스러웠다. 실핏줄이 터진 눈알이 껌뻑이지 않는다.
“함께 죽겠구나.”
원로들은 거의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로덴바흐 백작만으로도 위험천만한 광인이라 여겨 왔건만 그에 황제와 숨은 악마까지 가세하자 기가 빨리고 숨이 덜덜 떨렸다. 가히 지옥의 입구에 비견할 만한 공포와 끔찍스러움이 그들을 에워쌌다.
여인은 억겁 같은 침묵 후에, 덤덤하게 검을 들었다. 검은 장갑으로 감싼 손이 가녀리다, 그러나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기사의 장검을 쥐어 들고 나아와 로덴바흐 백작이 나동그라진 그 원 안에 섰다.
“명 받잡습니다.”
황제의 눈매가 휘어졌다. 재촉하듯 흡족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리비아는 차분하게 검집에서 칼을 뽑아 늘어뜨렸다. 서느런 날은 일렁이는 주홍빛 불을 끼얹고도 차가웠다. 이곳에서 죄인의 목숨이 스러질 것을 기대하는 눈이 꽂혔다. 원로들 역시 두려운 것과 별개로 그에서 도피하기 위해 이끌어 낸 열망을 곤두세웠다.
저 삿되고 징그러운 여인의 죽음을!
그녀는 언제나 귀부인들의 모범이 되어 왔다. 교본이라는 이름은 헛되지 않았으며, 이제 귀족의 일원으로서 모범이 보일 때가 왔으니 이를 배반할 수는 없는 노릇. 힘을 주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 단칼에 목을 쳐 냈다.
퉁, 퉁, 퉁…….
둔탁하고 텅 빈 소리가 바닥을 두드리며, 경악한 원로들을 지나 판관의 상석으로 오르는 계단에 부딪혀, 다시 뒤로 구르며 벌써 고이기 시작한 제 핏물에 처박혔다. 리비아 모브레이는 황제의 홉뜨인 눈을 마주하고 미소 지었다. 그녀는 이제 악마 같은 여자가 아니라, 진정 외도가 된 셈이었다. 그녀의 검이 베어 낸 것은 로덴바흐 백작, 그래, 제 친부의 목이었으니까.
싸늘한 정적 속에 유일하게 숨을 뱉어 낸 그녀가 홀가분하리만치 평온하게 미소 지었다.
“명을 받잡아 로덴바흐의 목을 바칩니다.”
황제는 말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 생각했던 것과는 전연 다른 방식으로 일어난 일을 찬찬히 되짚어 곱씹어 이해하는 중이었다. 자연히 침묵만이 돌아왔고, 리비아는 왼손에 늘어뜨렸던 검집을 툭 놓았다. 그리고 피 묻은 검을 들고 아버지의 핏물을 가로질러, 광소로 얼룩져 스스로 죽는 것조차 몰랐던 그의 아둔하고 따뜻한 머리를 쥐어 들고 천천히 계단을 지르밟았다. 길게 늘어진 그녀의 치마 끝단이 핏물을 머금고 붓처럼 그 길을 붉게 물들였다. 영광된 자리처럼 그녀가 스스로 그려 만든 길이 새빨갛다.
그녀는 이윽고 황제가 앉은 자리를 앞둔 채 그 한 칸 아래에 무릎을 꿇고 그의 발치에 아버지의 목을 바쳤다. 그리고 두 손으로 피 묻은 검을 들어 올려 그에게 내밀었다.
“이제 신이 바랄 것은 오롯이 폐하의 약속뿐이니, 이에 답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황제는 홀린 듯이 그녀가 올린 검을 보았다. 더운 피를 함뿍 뒤집어쓴 그것은 얕은 김이 오르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게 했다. 그는 손잡이를 쥐고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 날 끝을 수급 앞에 박고, 그녀에게 하문했다.
“어찌 그의 목을 바치나.”
그녀는 고개조차 들지 않고 대꾸했다.
“죄과에 의해 로덴바흐의 목을 바라시기에 따랐을 뿐입니다. 신은 여인의 몸으로, 지엄한 국법에 의해 출가한 외인이니 로덴바흐라 할 수 없고, 이 자리에 있는 로덴바흐이자 가장 가치 있는 목이 그의 것이었으므로 응당 베어 바쳤을 따름입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원로원에서 국법을 들먹인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무엇보다 눈 하나 깜짝 않고 존속을 척살한 살인마의 면전에 대고 비난을 퍼부을 만큼의 강단은 없는 이들뿐이었다. 그럴 만한 인사들은 일찍이 황제의 난장에 죄 쓸려 나갔으니까.
그는 찬찬히 답을 곱씹은 뒤에야, 웃음을 터뜨렸다. 킬킬 나직하게 웃어 대는 소리가 한참을 이어지다가 그 검이 들어 올려졌다.
그러고는 부복한 리비아의 어깨와 머리 위를 가볍게 스치고 지났다. 피 묻은 칼로 행하는 서임.
“그래, 약속한 자비를 주마. 일어나게.”
그는 즐거워 어쩔 줄을 모르며 기괴하게 일그러뜨린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포웰 공.”
그토록 원했던 것들이 드디어 주어졌다. 리비아는 이제껏 느껴 본 적 없는 전율에 몸을 떨면서도 자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일어났다.
“예, 폐하.”
오랫동안 배웠다. 한순간의 기쁨에 흥청거리다간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피 칠갑을 한 아비의 얼굴을 지긋하게 내려다보며 일어난 여인은 차라리 그림자 속에 솟았다고 하는 편이 나을 정도로 무참한 꼴이었다. 하관밖에 드러낸 것이 없는 흰 얼굴까지도 비산한 핏방울이 튀어 있었다. 그녀는 기꺼이 황제가 내민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짐은 역적의 목을 받았고, 뭐…… 그대 이상으로 짐을 즐겁게 할 이도 적어도 이 자리엔 없는 것 같군.”
낄낄 웃음을 흘린 황제가 그녀의 입술이 닿았던 그 손으로 턱끝에 맺힌 핏방울을 훑어 손을 거두며 좌에 포만감 어린 얼굴로 늘어져 기대었다.
“짐의 이름으로 이번 일에 가담한 자들에 대한 징벌과 새로운 포웰 공작의 탄생을 선언함으로써 폐회한다. 그만 물러들 가게.”
쿵, 하고 왕홀로 바닥을 찍자 리비아가 완전히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그녀는 잠깐 황제의 낯을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의 명을 받잡습니다. 징벌이 속행된 뒤 뵈올까요.”
“그래, 뭐…….”
그가 핏물 번진 손끝을 길게 핥으며 그녀를 올려다본다.
“후에 보자고, 포웰 공.”
* * *
피 묻은 검으로 이루어진 승계. 물론 약식이었으나 황제 스스로가 그녀를 포웰 공이라 부른 이상 그 무엇도 리비아 모브레이가 포웰 공작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공표되기까지는 텀이 있다지만 이미 방계들을 저택에 구금하고 병력을 깔아 놓은 듯하였으니 길어 봐야 며칠일까.
저택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녀는 말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채 고요한 그 낯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미슐레 또한 말이 없다.
주인의 마차를 맞이하는 식솔들의 표정에 긴장이 가득했다. 요한 역시 초췌한 낯으로나마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녀는 미슐레의 에스코트를 받아 발을 디디며 식솔들의 경악 어린 시선 속에서 핏물이 엉겨 붙은 베일을 뜯어내 내던졌다.
“폐하께서 나의 승계를 윤허하셨다. 지금부터 포웰 공작은 이 리비아 모브레이임을 알아 두도록.”
포웰 공작이 된 리비아는 두루 쓰던 경어를 집어치우고 서늘한 얼굴로 식솔들에게 통보했다. 요한의 낯짝이 파리한 것을 보니 무엇이 전제되었고, 그녀가 뒤집어쓴 피는 누구의 것인지 눈치를 챈 듯했다. 리비아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그 눈을 피하지 못하고 마주 보았다가, 점점 떨리는 얼굴과 몸뚱이를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리비아는 구태여 그를 쫓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리될 것을 알고 있었고, 찰나에 스친 그 절망의 빛, 그것을 의도한 것도 자신이었으므로.
그녀는 냉엄한 얼굴로 제 방으로 올라갔다. 그 서슬에 아무도 그녀의 뒤를 따르지 못했다. 미슐레 호엔베르크를 제하고는.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 평온한 얼굴, 리비아는 제 방으로 들어서고서야 뒤따른 사람이 부러 낸 인기척을 알아차렸다.
“…….”
피차 말이 없다. 한참 동안 서로를 보던 중 리비아가 여상스럽게 미소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때와 꼭 같군요.”
그래, 누군가의 임종 후에. 꼭 같은 자리에서, 꼭 같은 사람들이 마주 보고 있었다. 미슐레는 고요한 얼굴로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무엇이 되었든 따를 것처럼 평온한.
리비아는 그 얼굴에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랬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미슐레 호엔베르크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을 테니까.
사내는 각 잡힌 모양으로 걸어와 그녀의 손등과 손끝에 입 맞추었다. 그러고는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경건하게 이마를 기울였다.
“각하.”
그녀의 흉곽이 느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는다. 희미하게 손끝이 떨렸다. 제게 붙은 적 없던 이질적인 존칭으로 불리자 새삼스럽게 실감이 났다. 입 밖에 난 뒤에야 깊이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리비아는 기이한 희열과 피로감 속에 미진하게 손끝을 늘어뜨렸다. 미슐레가 고요하게 고개를 들며 그녀에게 청했다.
“시중을 들어 드려도 될는지요.”
“……이번엔 도망가지 않는군요.”
“각하께서 부름 없이 나아온 죄를 묻지 않으시기에.”
“그래요. 시중으로 벌을 대신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그녀가 눈을 내리감으며 대꾸했다.
미슐레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그 검은 장갑을 벗겼다. 애당초 평소처럼 직물로 된 것이 아니라 가죽으로 된 것을 두르신 순간부터 어느 정도 예견한 결과였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자신의 인륜을 희생하는 것과 상통한다. 더운 피가 솟구치고, 손끝에 무언가를 치는 억센 느낌과 함께 뼈가 꺾이는 기괴한 소리 앞에 덩그러니 놓이는 일. 아무리 입으로, 손짓으로, 흉계로, 타인의 손으로 사람을 죽여 왔다고 해도 제 손으로 직접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무게의 일이었다. 스스로 자각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것은 긴 상흔을 남기는 일이었다. 이전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런 용도로 길러져 숱하게 칼을 휘두른 그가 유일하게 알아보고,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미슐레는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허락받은 만큼의 일을 했다. 그녀의 장갑을 벗겨 내고, 희게 질려 얕게 경련하는 손끝을 모른 척하며 일어나 등 뒤를 가로지르는 드레스의 여밈을 차근차근 풀어 내렸다. 함뿍 피를 머금은 천은 불쾌할 정도의 무게가 있었다. 리비아는 하나하나 끌려 내려가는 검은 것들을 바라보다가, 슈미즈 한 장만을 걸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등 뒤에 선 검은 사내와 자신의 머리칼만큼은 여전히 검다. 형체 없는 감상이 미지근하게 그녀의 목에 감긴 기분에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미슐레는 힘을 주기도 전에 리비아가 이끄는 대로 몸을 기울였다.
마른 피 냄새, 습한 쇠의 냄새, 그에 엉긴 희미한 코롱의 향.
둘은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와 닿았다가, 떨어지고, 다시 맞닿으며 점점 무게가 실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만 같은 그녀의 일방적인 농탕질로 변질되었다. 미슐레는 뻐근하게 벅차오르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자신의 쓸모를 인정받은 듯해서, 그녀에게 있어 이 사건과 지금의 순간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첫 살해의 순간에 그녀를 위해 몸을 바친 사내가 있다는 것만큼은.
그것이 못내 기뻐 입술에 피 맛이 번지는데도 황홀하게 혀를 섞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