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3권) (8/10)

<3권>

복수자의 초상

날이 이르게 밝았다. 공작의 타계 이후 처음으로 본저로 돌아온 리비아가 명한 손님맞이에 분주했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고 정적으로 가라앉은 본저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공작가의 근거지다운 위용을 내건 채 자리를 지켰다.

리비아 모브레이는 오랜만에 베일을 걷었다. 여전히 그녀의 옷은 검은 천뿐이었으나 늘상 꽉 막힌 치장만을 고수하던 것에 비하면 의도가 확실했다. 애도는 끝이 났다. 망자에의 예우는 이만하면 대단히 요란하게 차린 셈이었다. 쉐리는 오랜만에 주인의 머리를 땋고 장식을 달며 기교를 부렸다. 그녀의 치장을 돕는 수족들의 기묘한 희열이 절제한 표정 아래로 일렁임을 모르기란 어려웠다. 리비아가 부리는 측근들은 모조리 친정에서부터 그녀가 직접 뽑아 길들여 온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부러 말하지 않아도 오늘의 내객을 안 순간부터 오래간 별러 왔던 날이 오늘이리라고 알았다.

리비아는 거울 앞에서 지느러미처럼 우아하게 물결치는 버슬 자락을 점검한 뒤 쉐리에게 까딱 손짓했다.

“입술을 좀 더 덧바르는 것이 좋겠군요.”

“예.”

쉐리는 손수 그녀의 입술에 색을 얹으며 열의 어린 눈으로 우러렀다. 언제나 흠 없는 나의 주인, 완벽한 패자.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칭송하지 않더라도 그 눈빛만으로 충분한 충의에 힘입어 치장을 마친 리비아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 * *

점심이 조금 못 된 오전 중, 육중한 마차 한 대가 대로를 가로질러 정문 앞에 당도했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단한 거한이었다. 2m나 조금 못 될까 싶은 장대한 기골, 은회색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겨 정돈한 금안의 우직하고 강퍅한 생김새의 아름다운 노신사였다. 기실 의복 위로도 뚜렷하게 드러나는 대단한 근육들이나, 그저 보고만 있어도 두려울 만큼 두껍고 커다란 흉악한 손 따위를 보노라면 감히 신사라고 말하기가 어려웠으나 그의 흠잡을 곳 없는 예법대로의 움직임에는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마중을 나온 집사를 흘긋 일별했다.

“먼 길을 지나 찾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인님께서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그래, 그야말로 로덴바흐 변경백, 이 가문의 혈족 중 하나, 공작가의 주인 된 여자의 반을 만들어 준 그녀의 부친 되는 남자. 프레더릭 맥닐 뤼드베리였다.

백작은 희미하게 어린 언짢은 기색을 금세 피로로 가장하며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안내하게.”

“예.”

좌중이 고요했다. 마치 별저의 분위기에 옮은 것처럼. 백작은 집사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결점을 하나하나 셈했다. 기껏해야 하나의 수순에 불과했던 조르주에게 지나치게 정을 주기라도 한 것인지 온통 상갓집 분위기가 여실했다. 그의 장례를 치른 지가 언제 적 일인데 여즉 이러고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부친의 내방을 몸소 반기지 않고 아랫것만 내려보내다니, 이 또한 어불성설이었다. 그리도 해이해지지 말라 가르쳤건만 모자란 딸년은 나이를 먹고도 아비를 만족스럽게 할 줄을 몰랐다.

어느새 응접실에 다다르자 익숙한 녹빛이 눈에 띠었다. 형형하고 멀끔한 눈을 한 것을 보아 방종하게 지내지는 않은 듯한데 어찌 자신을 탐탁잖게 하는지.

“격조했습니다, 공작 부인.”

“별말씀을, 어서 앉으시지요. 아버님.”

테이블 위에 차려진 다과는 모자람 없이 아름다웠다. 그는 단단한 걸음걸이로 다가가 딸과 오랜만에 마주 보고 자리에 앉았다. 흠잡을 곳 없이 아름다운 치장을 걸친 그의 과년한 딸은 혼약 이후 장례식을 제하곤 처음 보는데도 뤼드베리의 딸다운 고요하고 음전한 태가 났다.

“다들 나가 보렴.”

리비아는 잠깐의 텀을 지키고는 곧장 제 곁을 지키고 섰던 호위까지 합해 사람을 물렸다. 미슐레만은 그녀의 평소와 다른 말투에 의아함을 느꼈는지 잠깐 멈칫거렸지만 이 자리에서 여쭐 일이 아님을 아는지 순순히 자리를 비켰다. 문이 닫히는 순간이 어째서 억겁처럼 느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미령해 뵈진 않는구나.”

“제 한 몸 챙기지 못할 만큼 미련한 인간은 아닌걸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언제까지 상복을 입고만 있을 테냐, 바깥에도 좀처럼 나서지 않는다 들었다.”

“아버님 앞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저도 이제는 연치 어린 소녀는 아니지 않은가요. 바깥일에 바쁜 입장은 아니니 도리 없는 일이었어요. 집안 관리도 사람이 줄어 손이 더욱 많이 가더군요. 숙녀로서 게을리 살지는 않았다 여겼는데도 시간이 나질 아니하여 그리되었어요.”

그녀는 조곤조곤 아비의 말을 받아 주며 찻잔을 기울였다. 노신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묵묵히 딸을 바라보고 있다가, 제게는 지나치게 조막만 한 잔을 흘긋 일별했다.

“처녀가 아니니 사내 맛을 아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겠으나, 가치 없는 자들을 즐길 때가 아니라는 것쯤은 일러두어야 하겠다.”

“입빠른 자들을 곁에 두셨나요?”

“이 아비의 눈이 닿지 않는다 방만하였더냐?”

“설마요, 본녀가 감히 가르침을 잊었겠습니까.”

희미하게 달각 소리가 나며 잔이 내려앉았다. 부녀는 똑 닮은 눈매를 한 치의 오차 없이 떳떳하게 뜨고 서로를 마주했다. 백작은 기묘한 위화감의 정체를 헤아리기 위해 딸의 녹안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거뭇거뭇한 저 색, 제 어미를 제대로 닮지 못한 유일한 구석이 거슬렸다. 그는 오래가지 않아 스스로가 납득할 만한 사유를 떠올렸다. 제 연통을 사사건건 불사르고 문 한 번 열지 않던 오만한 마법사에 생각이 닿았던 탓이다. 모브레이라는 성 넉 자를 달지 않은 인간에게는 한없이 무자비한 그것의 콧대가 얼마나 높은지는 온 세상이 알고 있는 바이나, 직접 대거리를 해 온 세월이 있는 프레더릭은 너그럽게 딸의 피로감을 이해하기로 했다.

매양 번견처럼 공작가에 목매던 그것이 조르주를 평판이든, 위신이든, 하물며 그 목숨까지 깎아내리기 위해 갖은 수를 썼던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도, 잊었을 리도 없었으므로 뤼드베리의 딸인 리비아를 얼마나 방해를 했을지 상상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장례식 날마저도 앞장서 친족들을 해산시켰던 그 오연한 낯짝에 칼집을 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는 무진 애를 써야 했거늘. 저보다 유연치 못한 딸은 그것과 한 집안 내에서 낯을 붉히며 살았을 테니 지쳤을 법도 했다.

리비아는 평온한 낯으로 노회한 부친의 낯짝을 찬찬히 살폈다. 듣는 이가 없자마자 감히 저를 반기지 아니하였다는 것부터 묻는 저 구제 불능을 어찌하면 좋을까. 있는 만큼의 힘을 즐기는 것은 적당히 필요한 소양이겠으나 주제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대단한 실책이었다. 그녀는 부친의 입이 열릴 때까지 가만 침묵을 지켰다. 어차피 이후로 볼 일 없는 낯이다. 조금쯤은 더 눈에 담아도 좋으리라.

“구르디예프 경께서는 강녕하시던?”

“네, 언제나 그렇듯 평안하시지요.”

“헌데도 그리 둔하게 군단 말이지.”

프레더릭은 습관적으로 한쪽 눈가를 찌푸리며 턱을 쓸었다. 리비아는 느긋하게 자세를 누그러뜨렸다.

“역시 그놈은 도움이 되질 않는군, 제 주제를 안다면 양순하게 가문을 위해 헌신하기나 하면 될 텐데.”

“또 그 이야기를 하셨나요?”

노인의 눈이 희미하게 번들거렸다. 묘하게 짤막한 그녀의 말이 거슬렸으나 오래간 밟아 온 일의 다음 수순에 목마른 그는 크게 책잡지 않았다. 훈육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주제에 난장을 부리니 당연하지 않겠니.”

“그러나 그의 위명에 의지하는 바가 적지 않으니 도리 없는 일이 아닐까요? 현재까지 저희 포웰이 굳건한 바 역시 어느 정도 그의 덕인 것을요.”

“그래, 말 잘하였다. 굳건하지 않으냐, 리비.”

그는 오래간 묵혀 온 히스테리를 근엄하게 입 밖으로 토해 냈다.

“고작해야 그것으로 어찌 만족하겠느냐. 내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 바친 세월이 사십 년이다. 그것은 어찌 가문의 일을 제멋대로 휘두르려 드는지, 주인이 바뀌면 으레 그러려니 흐름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본가가 그를 너무 오냐오냐하며 기른 탓인 게지.”

“허면…….”

“다행히 네가 아직 버티고 있지 않겠니, 리비. 나의 딸.”

그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을 무지렁뱅이를 떠올리듯 경멸로 점철된 낯을 일그러뜨렸다. 리비아는 방계 가문의 인간들이 조르주를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죽여 온 정황 앞에 절망했던 해묵은 마법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 이게 당신이 믿어 온 인간들이에요.

자신 역시 뤼드베리의 딸이었다. 조르주를 죽이는 가장 큰 독, 그들을 위해 흠집을 내어 준 가장 예리한 칼.

그녀는 이가 빠진 것도 모른 채 여즉 버리지 못한 망집에 광적인 열의를 불태우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어리석은 자, 그가 그리 날뛸수록 자신을 향한 요한의 원망은 줄어들 것이다. 몇 되지 않게 부친에게 감사할 일이 생긴 순간에도 리비아는 그저 속으로 조소했을 뿐이었다.

“언제까지 외부인을 곁에 두겠느냐. 적어도 분가를 시키거나, 확실하게 서열을 정립해야 하지 않겠니, 리비.”

“허면 아버님.”

리비아는 늘 그랬듯 눈매를 접으며 미소 지었다.

“어찌 되길 바라시는지요?”

프레더릭의 입매가 얕게 휘어졌다. 아무리 성에 차지 않게 방종해졌대도 계집 중에 제 딸을 따라올 자는 없으리라. 만족스러웠다. 제 손으로 기른 가장 유용한 계집은 여즉 멀끔했다.

“그에게 걸맞은 가장 영광된 짝을 주어야지.”

“……짝이라 하심은?”

“성토한다 하여 들을 이가 아니니 마땅히 자연스러운 진전을 노려 봄이 어떻겠느냐. 대현자쯤 되면 네 짝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지.”

리비아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을 골랐다. 그의 비인간적인 계획에 치를 떨며 인간성에 호소할 만큼 그녀는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사유로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세월이 지나고. 눈치를 볼 본가가 제 바람대로 다 죽어 나자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은 뒤에 남겠다는 저 졸렬한 태도가 변하지 않은 것이 역겨워 문득 속이 뒤틀렸을 뿐.

“그렇지요. 드물지 않게 있어 온 일이니까요.”

“그러니 리비, 내 딸.”

사뭇 다정해진 목소리로.

“행해 주렴, 이 아비를 위해서.”

익숙한 강압을 내뱉는 상냥한 나의 아버지.

그녀는 고개를 모로 설핏 기울이며 결국 삼키지 못한 웃음을 얕게 토해 냈다. 전연 바뀌지 않은 그의 작태를 보고서야 자신의 몰인간성이 어디에서 왔는지 수긍하고야 말았다.

리비아는 웃음을 거두고 희미하게 미소의 흔적이 남은 낯으로 여상하게 뇌까렸다.

“그것은 어렵겠어요.”

“……리비아.”

“아버님, 제가 공작 부인씩이나 되어서도 사내에게 의존하여야 하나요?”

“가장 매끄럽고 탈 없는 방식인 것을 너도 잘 알지 않느냐.”

그는 모자란 소리를 하는 딸을 노려보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그 공작 부인이라는 자리를 어찌 얻었는지 있은 것인가.

그러나 어렸을 적에도 순종은 할지라도 겁내지는 않던 그의 딸은 이제는 세월이 흘러 장성한 탓에 그 매서운 눈길을 그저 우스워하기에 이르렀다. 언제까지 무력하리라 여겼는지는 모르겠으나, 부친이 이 순간에서야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깨닫곤 무언가 대단히 마뜩잖은 기색을 한다는 것이 유감스러웠다.

“물론, 제가 원한다면 이루지 못할 리 없을 것이에요. 그는 모브레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니까. 괴롭더라도 대를 이어 이 가문을 유지해야 한다는 미명하에 밀어붙이면 도리 없겠죠.”

“그래, 그러나 방금 어렵겠다지 않았니, 리비. 사연이 있느냐? 이 아비가 널 위해 무엇인들 못 해 줄까.”

뱉는 말은 다정하여도 그 서슬만큼은 뒤틀린 사이를 증명하듯 날이 퍼랬다. 리비아는 우아하게 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잔을 들었다.

“사연이랄 것은 없어요, 아버님. 그저 도살당할 미래를 모르지 않을 뿐이지요.”

“다시 말해 보렴.”

“다시 한번 짚어 드리겠어요. 제가 요한을 사로잡은 뒤엔 곧 버려질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조르주와의 혼약, 요한의 함락, 그 뒤에는 공작위를 바치고 다시금 아버님께 필요한 혼약을 맺을 미래가 저를 기다리겠죠. 제가 이제 와 다시금 일개 영애가 되어야 할 상황에 순종할 것이라 진정 믿으셨습니까?”

그녀는 허물었던 자세를 바로잡으며 형형한 눈을 치뜨고 나긋나긋하게 갈아붙였다.

“하물며 백작 나부랭이 주제에 공가의 주인이 버선발로 앞장서 반기지 아니하였다고 치를 떠는 꼴을 보세요, 서열의 의미조차 모르는 것이 어디 일의 순서를 알고 도리를 알아 큰일을 논할까요.”

고상하고 유순했던 딸의 말투가 천천히 흘러내린다.

“오랜 세월 가문을 위해 일한 이에게도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경망스러운 자를 누가 어찌 믿겠습니까. 아버님. 적어도 그것이 저는 아닐 것이며, 저의 뜻을 얻지 못하는 한 당신이 모브레이가 될 수 없음을 아십시오. 이 리비아 모브레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본 가를 제 손아귀에 두고 함부로 간섭하려 한 죄는 무겁습니다. 당신이 고작 한 것이라고는 가문의 늙은이들을 선동해 칠촌 조카를 말려 죽이고 안팎으로 소란한 모욕으로 시달리게 한 것뿐이지 않습니까? 그것만으로 마치 공작가가 제 안뜰이 된 양 헤집고자 하다니, 포웰의 이름이 우습습니까?”

“분노에 눈이 멀었구나. 이제 와 그를 연민이라도 하느냐? 말을 삼갈 줄 알라 내 단단히 가르쳤을 텐데.”

“감히 내 앞에 언성 높이지 마라, 백작.”

팔걸이를 한 손으로 빠듯하게 움켜쥐고 상체를 앞으로 내민 리비아가 또박또박 표정 없는 얼굴로 경고했다. 섬뜩한 한기가 등골을 내달렸다. 북부의 전장에서 낙마하여 늪에 진탕 구른 뒤 겨울바람을 맞으며 부대를 찾아 헤맸던 젊은 날의 공포를 문득 반추하고야 말 만큼 치열한 한기가 노신사를 옭아맸다.

“설령 내가 뒤늦은 죄책감의 발로로서 진노했다 한들 그대에게 무슨 권리가 있을 것이며 발언이 남았겠나. 그대가 나의 아비인 것을 감안해 자비를 베풀어 경고하건대, 과욕을 버리도록 해라. 내가 같은 말을 두 번 하게 하는 날이 오면 그대, 그 알량한 작위도 무용해짐을 알아 두도록.”

“…….”

노신사는 황당하게도 모욕적인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었다. 그래, 배신감에.

리비아는 그 얼굴을 보고서는 완전히 기대를 접었다. 사냥개로 써먹기에도 지나치게 늙어 버린 부친은 도저히 수고를 들여 활용할 효용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환멸을 담아 미소했다.

“물러가라. 앞으로는 포웰이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를 염두에 두고 지내는 것이 좋아.”

정신을 차린 프레더릭이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았으나 굴러먹은 세월이 영 헛되지는 않았는지 공저에서 그녀를 적대할 생각은 일찍이 접은 듯했다. 그는 그저 바깥을 염려해 ‘차후 뵙겠습니다, 부인.’ 하고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는 씹어 먹기라도 할 기세로 리비아를 깔아 본 뒤 당장에 공작가를 벗어났을 뿐.

그녀는 인사조차 받아 주지 않고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그저 떠나가는 말발굽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느긋하게 차를 즐겼다. 애당초 손님 따위는 온 적도 없고, 그저 식전 티타임을 즐기는 것처럼.

그 꼴을 창가에 기대어 인지를 흐린 채 지켜보던 요한이 피로에 찌든 낯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충격씩이나 받을 여지가 있었나요?”

“……믿었던 세월이 있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는 힘에 부치는 듯 앓는 것처럼 뇌까리며 고개를 돌렸다. 리비아 모브레이가 으르렁거리는 꼴은 처음 보았다. 그저 늘상 유유자적하게 웃으며 애당초 다른 세상의 존재인 양 미끄러지듯 누비고 다닌 꼴만 보아 왔던 그에게 있어 위엄과 지위를 휘두르는 리비아는 전연 다른 사람처럼 다가왔다. 가슴이 뻐근하게 벅차오르고 온몸에 열이 돌았다. 치렁한 법복 탓에 두드러지지 않아 다행스럽게 여길 만큼 아랫도리가 주제도 모르고 부풀어 올랐다. 요한은 사랑하지는 않았어도 적잖이 믿었던 혈손의 밑바닥을 본 것보다도 이런 상황에서 그녀의 위용에 발정하는 자신에게 받은 충격이 더 컸다.

“생각보다도 훨씬 노골적이죠?”

요한은 대답하지 못했다. 일순 자신을 향한 말인 줄로 알고 화들짝 놀라기에 바빴던 탓이다. 그러나 리비아는 여전히 로덴바흐 백작이 머물렀다 간 흐트러짐 없는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늘 저런 식이었습니까?”

“그럼요, 이것이 얼마나 자연한 일인지 아마 당신은 모를 거예요.”

“…….”

“날 원망하진 않나요?”

요한은 퇴창에 걸터앉아 제 팔짱을 끼고 인상을 찡그렸다.

“부인께서 직접 가담한 정황은 확인치 못했습니다만.”

“그러나 저들이 활개를 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어 준 것은 명확하죠.”

리비아는 굳이 그와 마주 보고 앉지 않았다. 마치 사색에 잠긴 양 눈을 살풋 내리뜬 채 지독히 여유롭게, 어떤 타성에 젖은 양 유연하게 말했다.

“무엇보다 저는 묵인했지 않나요. 공범자라 불리기에 손색없지 않을까요?”

“제가 당신을 적대하기를 원하시는 듯한 발언이군요.”

“설마요, 미리 매듭지어 두고 싶었을 뿐이에요.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이 날 배신하면 그것만큼은 나로서도 전복시킬 수 없는 실책이 될 테니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중인데, 영 마뜩잖았나 보군요.”

“…….”

“아니면 나와의 혼담이 엎어져 서운한가요?”

그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농담이에요, 하고 덧붙이며 짧게 웃음을 흘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백작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차라리 나를 직접적으로 처분하려고 하겠죠. 그의 기색으로 보아 당신과 내가 협력 관계라는 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으니, 날 죽인 다음 모든 정황이 내가 주범인 양 꾸밀 겁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보란 듯이 공표하는 거죠, 세기의 악처가 남편을 죽이고 권력과 색욕을 탐했다고.”

그는 이후에 이어질 말들을 굳이 듣지 않아도 얼추 이해했다. 그녀의 명성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악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질 것이다. 명예와 뒷배를 잃은 과부들이 으레 그러하듯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죽어서도 그 이름을 벗고 싶을 만큼 시달릴 테지.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나아와 말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파헤치고 징벌한 자신을 공작으로 추대해 달라고.

“제가 후일 사실을 알게 되면 어쩔 셈으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저런, 요한. 당신을 제외하곤 모든 혈족이 그 사실을 알아요. 모브레이의 피가 섞인 이들에게 결코 당신이 잔혹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에요. 모브레이를 적대하지만 않으면 당신은 해묵은 계보를 품고 일일이 그 멍청한 자비를 베풀지 않았나요. 구르디예프 경은 더 이상 공경의 대상이 아니에요. 그저 쉽사리 휘두를 수 있는 유용한 도구지. 뒤늦게 알아 봤자 이미 모브레이는 사라졌고, 남은 것이라곤 그들뿐인 와중 당신이 과연 복수를 할 수 있을까요?”

그녀는 몹시 유쾌해 보였다. 해묵고 지리멸렬한 분을 풀듯이 위악적으로 날것 그대로의 사실을 들어 요한을 난자했다.

“만약 당신이 모브레이를 저버리길 택하고 전부 죽인다고 해도, 그 전의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공작이고 싶을걸요. 권력이란 그런 법이죠.”

목숨을 태워서라도 가지고 싶은 것.

요한은 궤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렴풋이 그 마음을 이해했다. 자신이 은연중에 알아 왔던 처지를 외면하고 스스로 세뇌하듯 다잡으면서도 한 줌 남은 삭은 명패를 버리지 못한 것처럼 그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존재를 얽맨 망집은 저마다의 형태로 심저에 똬리를 틀고 있을 테니까.

물론, 그녀에게도 그런 망집이 있을 것이다.

리비아는 그가 이제껏 모르고 살았던 저속한 이야기들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고는 웃음을 머금었다.

“인간들이란…….”

찬찬히 곱씹어 이해를 마치자 새삼스레 구역질이 났다. 이토록 저속하고 졸렬한 것들이 자신이 열과 성을 다해 가꿔 온 모브레이의 그늘 속에서 호의호식했다는 생각만으로도 오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양 끔찍스러웠다. 요한은 치를 떨며 애써 침착하려 했다.

물론, 그도 그녀도 새삼스러운 배신과 환멸에 휘청거릴 만큼 무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요한 역시 그동안 포웰의 앞길을 위해 수많은 이들을 갖은 방법을 동원해 죽이거나 실각시켰고, 리비아가 자신의 삶을 위해 파멸시킨 것들을 헤아리려면 저 하늘의 별조차 모자랄 것이다. 필연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까마득한 업보를 짊어져 왔으므로, 외려 이 이상의 감상은 그들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이 모든 것은 지당 돌아와야 할 만큼의 응보일 뿐이다.

리비아는 식은 찻잔 속 다홍빛 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직접 보니 이제 내 말이 좀 믿기나요?”

“……아무리 저라도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도피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썩 다행이군요. 이제 와서 당신과 협상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면 끔찍스러웠을 테니까.”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의 수혜를 입은 당신을 용서하지는 않을 겁니다.”

“알아요.”

그녀는 자못 산뜻하기까지 한 투로 깔끔하게 대답했다. 애당초 용서를 구할 생각도 없었거니와 피차 이성과 욕망을 철저히 구분하는 부류이니 이제 와서 섞었던 몸과 그에 따른 관계가 없던 것이 되지도 않을 테니까.

남자는 입을 꾹 다물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가 한숨을 토하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사락사락 법복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리비아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뜻대로 하십시오, 언제고 모브레이를 비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접니다.”

“처음 듣는 소리인걸요.”

“……좋을 대로 생각하시지요.”

그는 제 입으로 이제 와 당신을 모브레이로 인정하겠다는 간지러운 소릴 뱉지 못하고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리비아는 눈매를 휘어 웃으며 그의 손끝을 타고 기어올라 손바닥을 스쳐 소매 속에 가려진 서늘한 손목을 그러쥐고 속삭였다.

“로덴바흐 백작은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속 검은 미소로군요.”

“그의 손에 조르주가 죽었으니, 조르주의 유산으로 그를 죽일 셈이에요.”

“……그렇습니까.”

포웰 공작의 소유였던 것을 운용하겠다는 말에도 요한은 자신의 발언을 증명하듯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리비아는 그 만족스러운 반응에 설핏 미소 지으며 그의 손목 안쪽의 연한 살을 부드럽게 쓸어내릴 뿐이었다.

“무엇이 되건, 모브레이는 건재할 거예요. 그것만큼은 약속하죠.”

그녀는 다정함을 가장하여 눈을 맞췄다.

“당신은 그저 날 받아들이기만 하면 돼요.”

몸과 업이 뒤엉킨 지 오래인 이제야 저런 소리를 한다. 요한은 신경질적으로 입매를 비틀었다가 차마 그러마고 답하지 못한 채 일그러진 낯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호엔베르크도 아닌 자신이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하겠다’라는 복종의 말을 입 밖으로 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리비아는 끔찍스럽게 일그러진 그의 눈가를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유감 따위는 그녀가 알 바가 아니었으므로.

* * *

그날 이후 라시니 몬테필트로는 공작 부인을 따르길 잘했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내로라하는 대현자도, 대단한 재능의 천재 기사도 속절없이 범인의 고뇌에 사로잡혀 흥청거리는 꼴이 우습고도 즐거웠던 까닭이다. 애당초 저처럼 별반 바라는 게 없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시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단장했다. 허리선을 날렵하게 잡아 주는 재킷이나, 값비싼 보석을 아낌없이 커팅해 만든 커프스 버튼과 반지, 백금으로 두른 회중시계 따위를 꼼꼼히 챙긴 라시니는 마지막으로 행커치프를 점검하고는 턱을 살짝 빼 들고 거울 속의 자신을 살펴보았다. 아주 만족스럽다. 걸어 다니는 저택 한 채나 다름없는 옷가지를 휘황찬란하게 두른 자신을 그 누가 남작의 조카 따위로 보겠는가? 지금 제 시중을 들어 준 자들마저 신분으로 따지자면 저보다 위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리비아 모브레이의 눈에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형세가 역전된다, 그 누구도 감히 트집 잡을 생각조차 못 한 채.

그녀는 물질적인 것을 아끼는 위인이 아니었다. 적당히 쓸모와 그에 준하는 대가만을 바란다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을 것을. 어리석게도 굳이 소모적인 곳에 마음 쓰는 그들이 자신을 얕잡아 본다는 사실을 맞닥뜨릴 때면 그저 우습고 귀여웠다. 단 한 순간도 타인의 손에 삶을 저당 잡혀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밑바닥에서 기어오른 제게 과연 상대나 되겠는가.

사실, 그들에게 이기든 지든 그건 제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길게 살아남는 것, 그것만이 중했다. 후순위로 밀려나든 어쩌든 결국 그녀의 품 안에만 남을 수 있다면 자신이 바라왔던 소소한 부귀영화쯤은 우습게 이루어질 테니.

그가 계단을 가로질러 홀을 향할 때, 이미 리비아는 그를 기다리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라시니는 애교스럽게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부인을 감히 기다리게 한 죄를 무엇으로 갚으면 좋을지 까마득하군요, 죄송합니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개의치 말아요.”

리비아는 여전히 검지만 장식적인 기교가 도드라지는 드레스를 차려입은 채 장갑으로 감싸인 제 손을 우아하게 내밀었다. 라시니는 눈매를 기운 없이 축 늘어뜨린 채 그녀의 손등 위에 가볍게 제 입술을 내리누르고 마차까지 에스코트했다. 등 뒤로 와 닿는 호엔베르크의 눈길이 따가웠으나 크게 개의치 않고 그녀의 뒤를 따라 마차에 오른 라시니는 방긋방긋 웃기에 바빴다. 미슐레는 끝끝내 마차에 오르지 않았다. 리비아는 공작 부인의 행차에 자연스레 따라올 소란과 시선을 원치 않는 듯했다. 저 홀로라면 모를까 미슐레의 기골은 아무래도 유독 눈에 띄고야 마니까.

그는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에서야 입을 여는 리비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잘 지낸 것 같아 다행스럽군요, 리지.”

“부인께서 이토록 저를 정성껏 다루어 주시는데 성치 못할 이유가 없지요.”

“영지 관리에 꽤나 재미를 붙였다고요.”

“아직 미흡한 몸입니다만, 부인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점을 상기하며 힘내고 있습니다.”

“그거 참.”

리비아가 빙그레 미소로 화답했다.

“다행스럽군요.”

남자는 그제야 그녀가 베일을 두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등줄기에 묘한 오한이 어렸다. 꽤나 큰 변화인데 어째서 몰라봤을까.

“어디로 가는 길인지는 설명 들었겠죠?”

“예, 러스킨 백작 부인의 살롱이라고 안내받았습니다.”

“숙지하고 있다니 다행이군요.”

그는 고개를 살짝 틀며 은근한 투로 속삭이듯 대답했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니까요, 염려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믿음직스럽네요.”

그들은 마주 본 채 다정하게 짧은 웃음을 주고받았다. 리비아는 묘한 권태가 내려앉은 낯으로 창밖을 흘긋 일별했다.

“당신의 정보를 필요로 한 건 러스킨 백작 부인이었어요. 그 정도는 당신도 알아 둬야 하겠죠.”

“두 분 부인께서 경쟁 관계에 있음은 유명한 이야기지요.”

“맞아요, 리플리 후작가는 곧 당신을 신경 쓸 만큼의 여유조차 없어질 거예요. 그래야만 하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언제고 귀부인을 모시는 건 익숙한 일이니까요.”

라시니 몬테필트로는 자꾸만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삼켰다. 제 위에 있던 인간을 거꾸러뜨리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인 까닭으로. 무엇보다 자신은 아는 것을 늘어놓기만 하면 되었다. 공작 부인의 품에서 그저 서로 물어뜯는 꼴이나 구경하면 그만인 일을 어찌 그르칠까. 다른 부인께 가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어진 지금에 와서 눈치 보며 말을 아낄 이유도 없었다.

“부인께서 흡족하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많고 많은 한량 중 굳이 그여야 했던 까닭. 유연하고, 이런 일에 익숙하며, 동시에 만약의 경우 잘라 내는 데에 거리끼지 않아도 될 만한 소모품. 귀부인들의 이면에는 익숙한 저로서도 간담이 서늘해질 비정함이다. 영지 하나쯤 개의치 않을 법도 했다. 일에 실패해 사살당하기라도 하면 다시 거둬 가면 될 일이니까.

리비아는 짤막한 귀띔만으로도 얼추 상황을 알아차린 듯 긴장 어린 그의 얼굴을 흘긋 보고서는 짧게 미소 지었다.

“당신이 그리 말해 주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모쪼록 나의 신뢰를 저버리지 말아 줬으면 해요. 아직은 조금 더 당신을 즐기고 싶으니까.”

눈을 느릿하게 내리감은 그녀의 얼굴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 잠깐 잊었던 이질적인 한기가 그의 숨통을 옭아맨다. 그는 잠깐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거리다 조심스럽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무릎을 꿇고 그녀의 드레스 끝단에 입술을 맞추었다.

“예, 부인.”

둘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랭골드령을 지키고 싶네 팔자를 펴고 싶네 하는 말들은 모조리 무용한 것이었다. 감히 주둥이를 놀리기엔 오래간 억눌린 그녀의 경멸이 두려웠다. 그저 눈 밖에 나는 것만도 두려울진대 저 경멸의 대상이 되면 얼마나 끔찍스러울까. 라시니 몬테필트로는 진창에 굴러먹던 인생을 복기하며 치를 떨었다. 인정도 수치도 없는 이 여자라면 필요에 의해 사람 한둘쯤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망가뜨리는 것 따윈 개의치도 않을 테다. 도망치기에는 너무도 늦었다. 적어도 그녀가 구르디예프 경을 사로잡기 전에 사라졌어야 했을 터.

그러니 반복하건대, 적당한 쓸모와 그에 준하는 대가만을 바라며 납작 엎드려 연명하겠다. 그의 삶의 방식이란 언제나 그러했으므로.

* * *

마차는 저택의 뒷문을 통과했다. 놀랍도록 그 무엇도 없는 적막함만이 남아 과연 이곳이 그 러스킨 백작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하필이면 동승한 사람이 그녀인 탓에 괜스레 위축되긴 했지만 표정을 관리하는 데에 성공한 라시니는 문이 열리자 순순히 내려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다행스럽게도 리비아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리며 맞이하러 나온 집사를 바라보았다.

“백작 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죠.”

라시니는 능숙하게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보폭이나 표정, 이따금 와 닿는 시선 같은 것들을 보노라면 그가 레이디를 모시는 것에 대단히 숙달되어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좀 더 풋풋한 영애들이라면 설레어 했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 그의 파트너는 그런 부드러운 감정이라곤 좀처럼 느끼지 못하는 석상 같은 여인이었다.

갖가지 그림과 조각이 늘어선 회랑을 지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러스킨 백작 부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사는 그들을 안내한 뒤 즉각 사라졌다. 그녀는 초췌하고 예민한 기색이 묻어나는 얼굴로 리비아에게 인사했다.

“오시기를 고대하였어요, 공작 부인.”

“후후, 빈말이라도 고맙군요. 그대를 위한 선물을 준비했어요. 서신으로도 일찍이 말씀드렸지만 내게 묻기는 곤란한 궁금증들이 있겠죠. 그를 빌려줄게요.”

라시니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러스킨 백작 부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아주 여상스러운 작태로 그녀의 손등에 입 맞춘 그가 퍽 간절하고도 다정한 투로 속삭였다.

“격조했습니다, 부인.”

그녀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켠 뒤 리비아를 보았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어요.”

“내가 이런 일에 사양이 없는 사람이라는 건 당신이라면 익히 알고 있겠죠, 이만 난 돌아가 보겠어요. 일이 끝나면 돌려보내 줘요.”

리비아는 사람 하나를 아무렇지 않게 떠넘긴 뒤 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 * *

역설적이게도 가장 긴장 어린 순간 공작저는 활기를 되찾았다. 내내 칩거하던 주인이 본저로 돌아왔으니 자연스런 일이리라. 상복과 작별한 리비아 모브레이는 여전히 손발목을 드러내는 일 없는 옷만을 고집했지만 철 지난 옷을 두 번 입지는 아니하는 성미 탓에 자연스레 새 옷을 맞추게 되었다. 그를 따라 귀금속과 화장품, 구두와 모자, 온갖 리본과 레이스, 길고 짧은 수십 켤레의 장갑을 사들였다. 늘상 있는 일이었으나 공작의 죽음 이후 말 그대로 죽은 고목처럼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에 적응했던 사람들은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듯 허둥거렸다.

영지나 법적 문제 등의 일은 멈춘 적이 없다지만 집 안 기물 관리는 그저 현상 유지만 하였던 것도 예전 일이 되었다. 공작 부인은 늘 그래 왔듯이 하반기를 대비해 도톰한 재질의 커튼과 새 카펫과 침구류를 사들이도록 지시하고, 식기에 앉았을 묵은 때를 벗겨 내도록 했다. 그 누구라도 언제든지 맞을 수 있도록 준비된 여느 때의 포웰 공작저답게.

물론 그 난리를 일으켜 고용인들의 정신을 산만하게 흩트려 버린 리비아는 가장 먼저 방계 가주들의 입김이 닿은 세작들을 깡그리 숙청하기 시작했다. 하녀로, 시종으로, 혹은 저택에 연을 대고 있던 상인이나 관리인 따위의 인간들, 처음부터 알고서 그들을 묵인해 오던 것을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엎어쳐 횡령, 기밀유지위반과 불충 등으로 소리 소문 없이 제명해 갖은 방식으로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들어 퇴출했다. 각 방계 가문에서 대외적으로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변덕에 난색을 표하는 척하며 이제껏 이어져 온 유착을 갑자기 팽개쳐 대는 것에 대해 항의를 해 댔으나 요한의 손에 적극적으로 묵살되었다.

리비아 모브레이는 마치 제 발치에 던져질 장갑을 기다리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사방을 둘러 깎았다. 차라리 도발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그 결과, 자연히 빈자리가 늘어났으니만큼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바빠진 고용인들은 경계가 사뭇 느슨해졌다. 모순적으로 느껴지겠지만 자신도 갑작스레 잘려 나갈 수 있다는 현실적인 위기감과 당장 코앞에 닥친 무시무시한 일감의 향연을 목도하면 일을 성실하게 한다는 것에 모든 신경을 쏟아부어 그 외의 것에는 둔해질 수밖에 없다.

간결하게 정리하자면, 연분홍빛 머리칼을 질끈 묶은 채 앞치마를 바꿔 두르며 이를 갈아붙이는 하녀 따윈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바타렐 코르도니예르는 정말이지 기가 빨려 죽을 맛이었다. 그는 자신과 꼭 닮은, 같은 이름의 고아 하녀의 자리를 뻐꾸기처럼 꿰차고 들어앉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몸이었다. 제아무리 공작 부인이라고 해도 십수 년간 공을 들여 공작가를 갉아먹은 로덴바흐가 이를 갈며 미리 안배해 둔 마지막 수단 따위를 알 턱이 있겠는가.

그는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 바깥으로 걸어 나와 저택 뒤켠으로 몸을 빼며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망할 로덴바흐 백작, 빌어먹을 공작 부인!

원래 그의 계획으로는 이렇게 어설프게 공작저에 스며드는 일 따윈 조금도 안배되어 있지 않았다. 바타렐이라는 이름의 하녀는 어디까지나 만약의 경우 그를 대신해 희생시킬 가짜 꼬리였지 자신이 그녀를 대신하여 허드렛일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는 이를 갈며 자신을 다독였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이번만큼 큰 건도 없으니 이제껏 해 왔듯 조금만 더 인내하면 마침내 자신은 자유가 된다고.

그러나 늘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고야 마는 생물이다. 바타렐 역시 육체의 고됨 앞에 꿋꿋할 수 있을 만큼의 정신을 가졌노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으나 현실의 노동을 겪고 나니 자기 자신을 포근한 잠자리와 9시간 이상의 숙면으로 마구 혼쭐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시간 만인지, 드디어 뻑적지근한 등허리를 폈다. 우드득 소리가 나며 지끈대는 허리를 주먹으로 퉁퉁 두드리고 빗자루를 벽면에 걸쳐 놓았던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느새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쯤 했으니 하녀장이 아무리 미친년이어도 더 이상 시키진 않겠지 싶었다.

“……응?”

스쳐 지나갈 법한 작은 소리였으나 숙달된 간자로서의 감이 이상하다고 외치는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대화하는 소리 같기도 했으나 언뜻언뜻 찢어지듯 솟구치는, 억지로 눌러 삭인 소리였다. 이렇게 으슥한 곳으로 부러 빠져나와 주고받는 대화라면 상대가 누구라도 쓸 만한 것 하나쯤은 들어 있기 마련이었으므로, 그는 종아리 중간 즈음에서 달랑거리는 치맛자락을 오른손으로 모아서 틀어쥐고 구두를 벗어 남은 손에 든 채 소리 죽여 가까이 다가갔다.

“……는……, 상식…… 불가능…….”

어떤 남자의 목소리였다. 곤혹스러움을 짜증으로 무마시킨 듯 마구 엉킨 듯한 소리, 그 사이에 여자의 목소리가 섞여 무어라고 웅성대는 듯했다. 대화가 성립되고 있다는 것까지는 알겠지만 명확하게 내용을 파악할 정도로는 듣기가 어려워 얌전히 구석에 몸을 숨긴 채 살금살금 경계하며 가까이 했다. 치정이나 불륜이라고 해도 대상이 누군지만 안다면 얼마든지 써먹을 구멍이 있지.

그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점차 작은 소리에 익숙해진 그의 청각이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소리마저 시끄럽다고 여길 즈음, 갑작스레 적막을 찢어발기는 울음소리가 났다.

“힉, 아읏……!”

바타렐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색사였단 말인가? 남자가 우는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 조금 특이하긴 했지만 아무리 자신이 양심일랑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이라고 해도 인간끼리 접붙는 소식으로 협잡질을 해 대기엔 무능의 증명처럼 느껴져 영 꺼려지는 면이 있었다. 물론 써먹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흘긋 고개를 내미니 이미 바닥으로 흘러내린 옷가지와 그 너머의 인영이 조금쯤 보였다. 새빨간 머리카락, 그리고 검은 그림자. 적어도 누군지는 알아야 써먹을 궁리를 할 수 있다는 말을 스스로 주지시키듯 되뇌며 눈을 가늘게 뜬 그는 순간 싸늘하게 엄습하는 충격을 느꼈다. 인지보다도 감각이 빠른 그 찰나의 섬뜩함. 채도 낮은 로브 여밈에 달린 저 또렷한 녹색 덩굴 문양 브로치.

바닥이 꺼지는 것처럼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스쳤으나 몸뚱이는 이성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포웰 공작저, 으슥한 곳, 빨간 머리칼의 남자, 덩굴 문양 브로치, 저 모든 조건이 부합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

“아, 부인, 으흑……!”

그 순간 남자의 고개가 홱 뒤로 젖혀지며 황동색 단안경이 짤칵거리는 소리를 냈다. 열락에 달뜬 수려한 낯, 초상으로만 먼발치에서 몇 번이고 꿈에 그렸던 그의 우상.

“정말 그만해 주었으면 하는 건가요, 나의 요한?”

요한 구르디예프.

온몸의 핏기가 싹 가시며 서늘한 오한이 서렸다. 왜? 아니, 저게, 저런 상스러운 낯짝을 한, 후미진 별저로 이어지는 정원에 가려진 복도에서 헐벗겨져 겁탈당하며 황홀해하는 저 사내가 진정.

“흐윽, 하, 아으으…….”

“대답해야죠.”

요한 구르디예프일 수 있나?

멀끔하던 이성이 하나하나 어그러지듯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설마, 아니, 사실, 그런데, 그래도…….

바타렐 코르도니예르는 황망하게 흐트러진 인영을 바쁘게 훑어보았다. 자신의 직감과 정보가 판단한 사실을 부정할 만한 결정적인 무언가를 찾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였으나 그가 불러들인 것은 검은 그림자 주인의 시선뿐이었다. 짙푸르게까지 느껴지는 냉랭한 녹빛, 멀찍이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어떤 불온함이 일렁이듯 본능이 경기를 일으켰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오판을 했었는지, 하다못해 후일을 생각해 어떻게 처신해야 할는지조차 까맣게 잊고 반사적으로 등을 돌려 건물 그림자로 숨어 달려 나갔다. 그의 발끝에 돌부리와 풀잎이 채며 사삭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으나 시선의 주인은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오히려 희미한 일말의 흥미나 생겼을까.

“무, 무슨, 잠깐, 부인, 누가 있었습니까?”

“글쎄요?”

“부인!”

그러나 가슴이 철렁해 굴욕과 불안으로 와글와글 일그러진 낯을 한 요한을 두고 뒤쫓아 삼킬 만큼의 자극은 아니었다. 리비아는 무어라 성토하기 바쁜 그의 입술을 집어삼키며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숨을 헉헉 몰아쉬며 방으로 도망쳐 달려온 바타렐은 문을 걸어 잠그고 창백하게 질린 낯가죽을 손끝으로 할퀴듯 감싸 쥔 채 소리 없는 비명을 마구 질러 댔다. 도대체 자신이 뭘 본 건지, 요한 구르디예프는 무엇과 붙어먹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애당초 그런 곳에서 붙어먹다니 제정신인가? 사창가의 계집들도 천으로 사방을 가린 쪽방에라도 들어가 살을 섞건만 아무리 외진 곳이라고 해도 야외에서, 야외에서!

그는 침대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소리 없이 악을 써 댔다. 자신이 목도한 광경을 복기하면 복기할수록 제가 옳게 이해한 게 맞는지, 어딘가 삼류 찌라시라도 읽고 생생한 꿈으로 꿔 버린 것을 생시라고 기억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흑발에 녹색 눈을 가지고, 부인이라고 불릴 만한 공작저 내의 귀부인이라면 리비아 모브레이뿐이다. 마찬가지로 공작저 내에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무엇보다 대현자의 표징을 달 수 있는 남자라면 요한 구르디예프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흘레붙었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 이상 간결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충분히 그녀의 평판에 흠집을 낼 만한 이야기이기는 하였으나 치명적이지는 않다. 로덴바흐 백작이 아무리 제 딸에게 배신당해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그는 한 가문의 주인이며, 현직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변경백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이깟 스캔들 하나로 만족할 리 없었다. 아니, 저렇게 공공연하게 붙어먹고 있는데 모를 리가 없지.

그가 자신을 써먹기로 했다는 것은 그만큼 작정했다는 것. 공작 부인이 꼼짝없이 그의 손아귀에 잡혀 들어갈 만한 일이라면 반역 모의, 혹은 공작 암살 혐의 따위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스캔들이 어디까지나 공작 부인을 압박하기 위해 쓰일 때의 이야기였다. 고문인 구르디예프 경을 압박하기 위해서 뒤집으면, 그가 가문을 이끄는 데에 협력해 주는 대가로 과부가 된 귀부인을 협박해 겁탈했노라고 써먹으면 된다. 증인으로서 자신이 설 테니 더 이상 간자질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만큼 유용하게 사용된다면 백작과의 계약은 완수했으니…….

다만 이 모든 이야기는 바타렐 코르도니예르가 요한 구르디예프에게 무정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신비를 잃은 마법사의 아들, 가문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이런 짓까지 하고 다니고 있는 그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마법사에게 있어 구르디예프가 얼마나 신격화된 존재인가. 그야말로 전설인 이였다.

바타렐은 당혹함과 동시에 분노와 실망에 휩싸여 엉망진창으로 휘저어진 머리통을 싸쥐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대현자 요한이 한낱 귀부인의 손아귀에서 정부마냥 희롱당하고 있는 꼬락서니라니, 말이나 된단 말인가? 포웰이 정녕 그만큼 몰락했나? 아니면 사실 로덴바흐 백작과 공작 부인이 짜고서 공갈을 치고 있는 건 아닐까? 어떤 식으로 일을 이끌고 싶은 거지? 요한 구르디예프를 실각시키고 싶은 건가?

그럴 수도 있었다. 요한 구르디예프는 그 누구의 편조차 아니다. 모브레이의 정통한 계승자, 그 가주에게만 충성하는 집안의 오랜 어른 같은 존재. 지금의 공작 부인도, 다른 방계들에게도 좋을 게 없다. 그의 꼬장꼬장한 성질머리와 역정 어린 결벽은 세간에도 대단히 유명했다.

그는 숫제 불안과 경악에 차 몸을 떨기 시작했다.

토사구팽이 따로 없지 않은가, 요한 구르디예프를 이제 와서 제거하겠다고? 아니, 아니지. 포웰 공작가의 가장 큰 권력이자 자랑인 그였다, 제거하려고 든다기보다는 협력적으로 만들기 위해서겠지. 그를 흠집 내지 않는 선에서 압박해 뜻대로 움직이게 할 셈인 것이다.

합리적인 추론이다.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그러나 이를 안다고 해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재기하기 위해서 시궁쥐처럼 온 가문의 뒤를 캐고 다닌 자신이다. 운 좋게 띄운 승부수로 로덴바흐 백작을 붙잡지 못했더라면 소리 소문 없이 토막 나 강바닥에서 썩고 있었겠지. 이제 와서 단순히 동경했던 우상을 위해 인생을 던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니, 자신이 내실 탄탄한 집안의 인간이라고 해도 감히 이길 수 있을까? 포웰과 로덴바흐를? 암담한 상대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라니, 단순한 상상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끔찍스러웠다.

극까지 치받았던 감정이 차근차근 가라앉아 이성을 되찾아 갈 무렵이 되니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몸뚱이가 저녁 바람에 싸늘히 식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얕은 오한이 어린 살갗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들자, 이제는 완연하게 해가 진 풍경이 보였다.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난 것이다.

“망할…….”

점호를 빠졌으니 분명 경을 치리라. 룸메이트를 붙잡고 하녀장이 염병이라도 떨었다간 되바라진 그녀가 자신을 가만둘 리 없었다. 험악한 힐난을 들어 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피곤했다. 바타렐은 마음의 준비나 각오 따위를 하기엔 지나치게 지쳐 그저 벌렁 대자로 천장을 보고 드러누워 가슴을 들썩였다.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분노와 불안이 불온하게 술렁거린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대현자 요한의 업적들을 되뇌었다. 역병의 신을 토벌하고 불치로 알려졌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개발했던 젊은 시절의 그, 포웰을 상대로 영지전을 선포했던 다섯 연합군을 단신으로 패퇴시켰던 성숙해진 시절의 그, 황실의 수작에도 공저를 떠나지 않고 꿋꿋하게 버텼던 것이나, 마법사들에게만큼은 누그러진 태도로 조언을 주는 원로한 선배로서의 그도 좋았다. 비단 제국민뿐만이 아니라도 마법사 요한의 행적은 어른들이 잠자리에 든 아이들에게 읽어 주는 책이나 구전 노래로 많은 사람의 동경과 동심을 샀다. 바타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극성으로 대현자 요한을 존경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마법사 가계가 그렇지마는.

그렇게 화려한 이력을 떨치고 죽은 이라고 해도 길이길이 회자되기에 모자람이 없었겠지만 심지어 여즉 살아 있다니, 어찌 벅차지 않을 수 있을까? 하물며 동시대에, 같은 나라에 숨을 쉬며 살고 있는데!

온갖 주접을 속으로 떨어 대던 그는 문득 등줄기를 스치는 낯설지 않은 한기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 무렵이면 특별히 일이 남거나 지시받지 않은 한 하녀들이 퇴근해 돌아올 시간이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유달리 기이하게 느껴졌다. 분명 본능의 경고이리라. 좀 더 바짝 귀를 기울이자 룸메이트는 물론이고 옆방 문이 열리는 얕은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괜한 것을 보아 버린 불안이라고 속을 다독이려는 찰나에 또렷한 금속성이 울리지만 않았더라도 그는 좀 더 나은 몰골을 했을 것이다.

분명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였다. 더도 덜도 말고, 멀지도 않은, 당장 이 방 문이…….

“있군요.”

빙그레 호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입매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는 등 뒤로 손을 짚고 엉거주춤 상체만 들어 올린 채로 굳어 버렸다. 눈을 감히 위로 올릴 수가 없다. 분명…… 분명 그 나락 같은 홍채가 자신을 들여다볼 테니까.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바타렐은 망연하게 문간에 흔들리는 구두를 일별했다. 하녀장의 낯익은 그 구두였다. 그녀는 문을 열어 준 다음, 비켜서서, 여인을 안으로 들이고, 다시 문을 닫고 나가…… 잠갔다.

그 일련의 과정이 얼마나 끔찍스러운지 토로할 곳이라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러기엔 우아한 침입자가 가진 위압감이 어마어마했다. 바타렐은 두려울수록 본능적으로 시선을 두고야 마는 짐승의 섭리에 따라 벌벌 떨리는 눈을 들어 올려 여인의 낯을 마주했다. 분명 그림자 속에 가려졌던 하얀 이목구비와 그 사이로 또렷하게 자신을 꿰어 버렸던 녹안이 그곳에 있었다. 그는 희게 질린 낯으로 목 졸린 듯 속삭여 불렀다.

“공작 부인…….”

그녀는 그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웃어 보였다. 부정도 긍정도 없이. 다만 그 여상스러운 작태와는 별개로 살의가 대단했다. 부채나 식기 정도나 쥘 법한 저 허연 손으로 제 목을 감아쥐고 척추를 끊어 버리지는 않을까 싶은 정도를 벗어난 망상이 아무렇게나 평정을 들쑤셨다. 들킨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쳐들어오다니. 그는 리비아의 기백에 짓눌려 패닉한 채로도 자신의 가설에 대한 신빙성을 더했다. 분명 그녀는 구르디예프 경을 실각시키고 싶은 것이다.

“언제부터 내가 편히 드러누워 맞이할 만한 인간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녕하신가요? 내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줄행랑을 쳐 버리기에 말을 붙이기 위해 수고롭게 걸음 하였는데 실례가 되지는 않았을까 염려되네요.”

“아, 아닙니다, 그게……, 제가 너무 당황해서.”

“그치만 역시 이상하죠…….”

바타렐이 어렵사리 자세를 수습하고 무릎으로 벌떡 매트리스를 딛고 몸뚱이를 일으켰으나 그녀는 별 의미조차 두지 않고 여전히 밀랍 같은 웃음으로 응수했다.

“허튼 것들은 다 솎았는데.”

그는 섬뜩한 소리를 귀에 담은 순간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들키지만 않았더라도! 아니, 적어도 이 여자의 위세에 짓눌리지만 않았더라도 충분히 만회할 수 있었다. 하늘이 자신을 내버린 듯한 절박한 상황에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감각을 느끼면서도 바타렐 코르도니예르는 필사적으로 세 치 혀를 놀렸다.

“죄송합니다, 공작 부인. 제가 간담이 나약하여 감히 웃전을 뵙자 사고가 멎은 탓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바쳐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아랫것의 무례를 부디 선처해 주십시오.”

거진 구르듯 바닥에 내려와 흐트러진 매무새를 가다듬지도 않고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모아 쥐고 고개를 푹 숙인 백발의 미인이 어깨를 떠는 꼴을 다른 누군가가 보았더라면 분명 흔들리고야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리비아 모브레이는 그저 흘긋 눈을 내려 그의 머리 가마를 물끄러미 보고만 서서 목을 울릴 뿐이었다. 침음인지, 단순한 웃음인지, 혹은 가소로움을 삼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의 침묵이 길면 길수록 바타렐의 입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이 침묵이 두려워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 주둥이를 나불거리는 것은 곧장 제 무덤을 발로 차 열고 드러눕는 꼴이다. 그저 납죽 엎드려 떨 수밖에.

그의 노력이 통했을까, 리비아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하긴, 당신이라고 알았겠나요. 그곳이 주인의 밀회 장소라는 걸. 일이 바쁘니 인간 된 도리로 숨 돌릴 구석이라도 찾다 인적 드문 곳에 고개를 들이밀고 보니 우연찮게 그런 것을 목도하고 많이 놀랐겠어요.”

바타렐은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더욱 옹송그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제발, 제발 한마디만 하고 꺼져, 용서하겠다고 해……!

“당신의 죄는 그저 맡은 바 소임에 소홀하게 굴고야 만 나약한 마음뿐일 거예요. 그저 하녀였다면요.”

“…….”

좆됐다.

바타렐은 등줄기를 가로지르는 끔찍스러운 절망감에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언제부터 들켰지? 보통 그런 상황에선 다들 도망가잖아? 뭘 근거로 알아챈 거지? 진작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자신을 굳이 둘 필요가 없다, 아니면 따로 노림수가 있어 그러하던가.

찰나의 순간 맹렬하게 사고를 전개하던 뇌리가 둔탁한 충격에 까맣게 점멸했다. 그는 퉁 하고 바닥에 부딪힌 몸뚱이가 얕게 튕겨 오르는 찰나에 일변한 눈앞의 풍경을 보며 숨을 들이켰다. 싸늘한 조소. 불현듯 그녀가 로덴바흐 백의 외동딸인 것을 떠올렸다. 고귀한 인간 백정의 씨에서는 고귀한 악마가 났다. 바타렐 코르도니예르는 바닥에 내팽개쳐지듯 쓰러진 채 통증을 자각하기보다 이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뒤늦게 이명과 함께 신경을 날카롭게 에이는 통증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속절없이 눈을 떨었다. 생사의 기로를 하루 이틀 넘나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전까지는 그래도 어떻게든 아락바락 덤벼 볼 만한 상대들이었다. 그러나 속물의 눈에는 그저 한 명의 귀부인이 아니라, 그녀가 지고 있는 무시무시한 권력이 함께 비쳤다. 저 여자에겐 섣부르게 덤빌 수 없었다. 되바라진 그의 이성이 필사적으로 평정을 지켰다. 밀회 장면을 하녀 따위에게 보였으니 수치심이 들었나? 아니면 분노? 불안감? 단순한 화풀이용 손찌검이라면 좀 맞아 주고 넙죽 엎드려 소개장 없이 쫓겨나는 것으로 일단락 지으면 될 일이었다. 로덴바흐 백작에게 더럽게 깨지겠지만 이미 건진 게 있으니 어떻게든 입을 잘 놀리면 살기는 살아지겠지.

“한 대 얻어맞고도 울기는커녕 머리나 굴리고 있는 걸 보니 하루 이틀 굴러먹은 건 아닌 것 같군요.”

“오, 오해십니다, 부인, 그것……!”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말허리가 끊길 만큼 무시무시한 아픔이었다. 귀부인의 매끄러운 구두코가 단순히 명치를 한번 밀어젖히듯 찬 것만으로 올 만한 통증이 아니다. 바타렐은 왈칵 헛숨과 함께 타액을 토해 내며 몸을 웅크렸다. 내장이 뒤집히며 신물이 기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속이 맵다. 연장으로 두들겨 맞는 것보다 더한 아픔이었다. 미쳤다 미쳤다 했더니 귀부인의 채신머리라고는 후원에 두고 왔나 싶은 짜증이 왈칵 솟았으나 노래하듯 자상하게 뇌까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스산해 노력조차 부질없이 머리가 희게 비었다.

“내가 오해를 했다니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답니다. 나도 참, 얕보인 모양이군요. 그렇지 않은가요, 바타렐 코르도니예르?”

반사적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자 리비아는 폭행을 행사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좀 더 정리되면 꺼내려고 했더니……, 일이 굴러가려면 이렇게도 되는군요. 나나 당신이나 피차 유감스럽게 되었어요.”

“아윽……!”

“대화를 좀 할까요. 아무리 나라도 사용이 끝나지 않은 말이 백치가 되는 건 원치 않아서 말이에요. 너무 걱정하진 말아요. 쓸모는 지켜 줄 테니까.”

여자는 서늘하게 속삭이며 그의 목을 틀어쥐고 어렵잖게 침대 위로 내팽개쳤다. 바타렐은 제 몸뚱이가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등허리와 머리통은 충격과 통증으로 징징 울렸고, 이성이 멎은 머리로는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함축적인 협박들은 그저 두려웠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그의 생존 본능만큼은 악에 차 오히려 뻣뻣하게 곤두섰다는 점이었다.

“저, 를…… 지켜보신 모양이지요, 부인…….”

“그럼요, 내 안뜰에 놓인 것도 몰라볼까 봐.”

“허면 제가 쓸모가 있다는 것도 아시겠군요. 당신의 눈에 찰는지는 모르겠으나, 부디 거래해 주시면 힘껏 부응하겠습니다.”

그는 점점 사그라드는 통증을 삼키며 부득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리비아는 벽면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듯 늘어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짧게 웃음을 흘렸다.

“살고 싶어 그러나요?”

“제겐 지상 과제니까요.”

“안타깝네요, 좀 더 명석했더라면 좋았을걸.”

리비아는 그의 발목을 움켜쥐고 제 쪽으로 홱 당기며 들어 올렸다. 자연히 치맛자락이 홱 들춰지며 계절상 별다른 속바지를 챙겨 입지 않은 하체가 드러났다. 스타킹과 가터벨트, 그리고 부푼 흰 속옷.

반사적으로 치마폭을 내리눌러 다리 사이를 가리는 청년을 조롱하듯 웃음을 머금은 리비아는 손끝으로 그의 복사뼈를 부드럽게 둥글리듯 어루만졌다.

“계절이 참 야속하죠, 동복 정도만 되었어도 얕은 목울대 정도는 충분히 가려졌을 텐데.”

“이거, 놔!”

사뭇 앙칼지게 고함지른 바타렐이 붙잡힌 발에 힘을 실어 걷어차려 들었으나 발목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그저 리비아의 몸뚱이가 제 쪽으로 살금 기울어 싸구려 매트리스를 무릎으로 짓눌렀을 뿐. 그는 경악에 찬 얼굴로 벌어진 입술을 다물 생각조차 못 하고 벽 쪽으로 몸을 좀 더 바짝 물렸다. 그녀는 흥미가 다한 듯 발목을 미련 없이 놓아주면서 입매를 늘였다.

“놀랄 일은 아니지 않나요? 안심해야죠. 코르도니예르. 당신이 그대로 날 걷어찼다면 죽는 것만 못했을 텐데. 두려움에 눈이 멀어도 정도라는 게 있어요.”

“당신이 이상한 짓을 하니까 그런 거잖아!”

“간자 짓으로 벌어먹는 주제에 이 정도도 예상하지 못했다니 조금 우습네요. 걱정하지 말아요. 볼 것 없는 몸뚱이에 별다른 감흥이 일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더 이상 어리석은 짓을 하지 못하게는 만들어야겠지만.”

그녀는 이런 곳에 앉는다는 것 자체가 별로 내키지 않는 듯 탐탁잖은 기색이었지만 머뭇거리지는 않았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치맛자락을 정돈한 뒤 꿈틀거리며 구석으로 도망가려고 하는 바타렐을 별다른 무게를 느끼지도 못하는 것처럼 가뿐하게 끌어와 무릎 위에 엎어뜨렸다.

“이거……, 놔!”

그는 놀랍도록 악에 받쳐 눈을 치떴다. 몸이 무력해진 것에 하등 상관하지 않는 듯 오히려 독이 올라 아득바득 기어오르는 꼴은 불쾌하긴 했지만 흥미가 일기는 했다. 제 앞에 힘없이 쓰러지는 것들만 보아 왔던 탓에 조금쯤 자극이 될 만한 성미였다. 리비아는 그의 머리채를 한 손으로 휘감아 틀어쥔 채 그의 등허리를 남은 손으로 꾸욱 짓눌렀다. 이런 부류는 자존심을 꺾어 버리면 수치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적극성이 꺾이는 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부러 희롱하듯 그의 허리를 느릿느릿 어루만지며 서늘하게 경고했다.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을 거예요. 내 손에서는 적어도 피가 터질 일은 없겠지만 다른 사람이 개입하는 순간부터 인간의 몰골은 영구히 포기해야 할 테니까.”

“……내가 이제 와서 그런 거에 겁먹을 줄 아나 보죠?”

“실제로 움츠러들었잖아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요. 당신이 반항하지 않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적당한 선에서 멈추고 싶은 마음이거든요. 주인의 안위를 위협한 자가 이대로 몸 성히 나간다면 보는 눈들이 뒤집힐 테니 당신도 내게 적당히 체벌받는 게 낫지 않겠어요?”

“피 보기는 싫으시다? 퍽이나 고귀한 자비시군요.”

“자신의 가치를 과대평가하고 있네요, 바타렐 코르도니예르. 유감스럽게도 일개 몰락 귀족 따위의 유혈이 낭자한 꼴 따윈 그다지 즐거운 유흥거리조차 되지 못해서요. 그런 추하고 이득 없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몸뚱이의 통증이 가라앉자 머리채가 잡힌 것 따위는 개의치 않고 제 몸뚱이를 어루만지는 손을 피하고자 꿈틀거리던 소년의 몸이 뚝 멈추었다. 리비아는 짧게 웃음을 흘리며 몸부림 덕에 오금을 드러낼 정도로 위로 말려 올라간 치마 아래로 부드럽게 손끝을 밀어 넣었다.

“아니면 무능한 마력 보유자라고 덧붙이는 게 나을까요?”

“너…….”

분홍빛 눈에 핏발이 섰다. 리비아는 분노로 퍼들퍼들 떨리는 그의 단단한 허벅지를 느리게 만지작거리며 노래하듯 말했다.

“오해하지 말아요, 특별히 관심이 있던 건 아니니까. 다만 너무 티 나는 가명이지 않나요? 너무 허술해요. 다른 자들이야 몰랐을지 모르겠지만 포웰은 마법사의 비호를 받는 가문. 작위까지 받았던 다른 마법사 가계를 기억해 두지 않을 리 없지 않나요. 이 점은 성숙하기 전에 기반을 잃은 탓에 배우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적어도 쓸모를 증명하는 게 당신이 살아남을 몇 안 되는 길이니 더 이상 얄팍한 밑바닥을 드러낼 법한 행동은 삼가는 게 좋을 거예요.”

“쓸모? 그 잘나신 공작 부인께서 한낱 간자 새끼 치맛자락이나 들추면서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걸 누가 믿겠어? 대가리가 이상해지지 않고서야!”

“물론 당신 자체가 쓸모 있는 건 아니죠, 흔해 빠진 잡범이니까. 다만 그게 로덴바흐 백작의 손을 탔다면 말이 달라지지 않겠어요? 살려만 두면 은닉한 연결 고리 따윈 얼마든지 쉽게 잡아챌 수 있죠.”

“악!”

뒤쪽 허벅지의 연한 살에 날카로운 통증이 번졌다. 리비아 모브레이는 적당히 힘을 조절해 손톱을 세워 그의 살갗을 짓누르며 그의 입이 다물리길 기다렸다가 미련 없이 손을 빼내고 그의 어지러운 치맛자락을 정돈해 주었다.

“어쩌고 싶은지는 잘 생각해 봐요.”

“이런 꼴로 생각씩이나 하라고…….”

“못하고 죽는 것도 나쁘지 않죠.”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났다. 퍽 하고 옷 위로 사람을 치는 소리가 뒤따른 뒤에야, 바타렐 코르도니예르는 자신의 통증이 번진 곳을 인지했다. 미친 귀부인께서 그의 엉덩이를 후려친 것이었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를 벌주는 것처럼!

그녀의 경악하리만치 우악스러운 힘 탓에 아프기도 대단히 아팠지만, 조금 전처럼 머리나 등허리처럼 위험한 곳이 충격을 받은 것보다도 더욱 치명적이었다. 그가 아무리 아름답고 선이 얇은 편에 속한다고 해도 엄연한 성인 남성이다. 그런데 갑작스레 낯도 잘 모르는 여자에게 붙들려 엉덩이나 두들겨 맞고 있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느냔 말이다.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은 도리 없는 일이었다. 그는 끔찍스러운 치욕에 거칠게 몸부림쳤다. 머리카락이 뽑히는 것 따위는 이와 같은 수치 앞에 지극히 사소했다.

“미친 거 아니야! 놔! 놓으라고! 차라리 씨발, 고문관한테 떠넘기기나 해!”

“내게 감히 명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함께 학습하기 바라요.”

다시 한번 통증이 불길처럼 번졌다. 물론 비명과 함께 그의 고통에 일그러진 고함도 함께 터져 나왔으나 리비아는 개의치 않고 손을 놀렸다. 같은 곳을 반복해서 맞아 가며 누적된 통증과 치욕에 발작하듯 난동을 부리던 바타렐은 기어이 바깥에 소리를 쳐 대며 호위들은 무얼 하냐느니, 이 집 부인은 실성했다느니 하는 소리와 함께 욕설을 질러 댔으나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이곳에 사람이라고는 그들 단둘밖에 없는 것처럼.

그녀의 협박대로 인간의 몰골을 유지하지 못하게 만들 자들이 들이닥치지 않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이 같잖고 끔찍스러운 체벌이 너무나 저속했다. 그는 소리를 지르는 데에 체력을 죄다 쏟은 탓에 점점 반항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미친 여자, 귀부인이라면서 뒷골목 건달패보다 손이 매웠다.

“차라리, 개 잡듯……, 해, 잘만 패더니…….”

처음처럼 맞은 줄도 모를 정도로 어안이 벙벙한 일방적인 폭력이 나았다. 자세나 취급이 굴욕적인 것 또한 문제였으나 무엇보다 가장 큰 것은 아무리 아파도 생각할 만큼의 겨를은 있는 것이었다. 제 취급과 금 간 자존심을 곱씹고, 통증을 곱씹고, 자신이 열이 올라 저지른 실책에 대해 곱씹고, 제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기계처럼 같은 곳에 주어지는 고통이 버거웠다. 그는 기어코 왈칵 울음을 터뜨리곤 몸을 떨었다.

“미친년……, 왜……, 네 난장에 날…….”

그는 입술을 사리물고 흐느낌을 어떻게든 억눌러 삼키려고 했으나 그녀에 대한 원망이 입 밖으로 새는 것은 참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요 고된 노동이나 하다가 이딴 취급이나 받다니. 제가 결국 울어 버렸다는 것조차 끔찍스러웠다. 마치 패배를 인정한 것 같잖은가. 심지어 고통 탓에 우는 것인지 굴욕스러워 우는 것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바타렐 코르도니예르는 끅끅 숨을 죽여 울면서 시트를 쥐어뜯었다.

사실 정석적인 방식으로 그를 위협했다면 오히려 머리를 굴리거나 비협조적으로 굴며 꽤 독랄하게 버텼을 것이다. 어차피 자신이 그녀에겐 쓸모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해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방식과 속도로, 생각조차 못 해 본 저속한 희롱과 취급을 받으면 정신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리비아는 그가 울면서 뭉개진 원망을 너절하게 지껄이는 것을 바라보며 머리채를 놓아주었다. 옅게 분홍빛 도는 하얀 머리칼이 실처럼 손가락에 휘감겨 있었다. 그녀는 손을 털어 그것을 떼어 낸 뒤 그의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바타렐이 울면서도 앙칼지게 그녀를 치며 미친년이라고 소리를 질렀으나 유의미한 타격이 되지는 못했다.

“새빨갛군요.”

그녀는 수십 번을 내리치느라 덥혀진 손으로 짚어도 확연히 덥게 느껴질 만큼 피가 몰려 홧홧하게 부어오른 그의 엉덩이 어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여성용 속옷과 가터벨트 따위만 차고 있는 탓에 봉긋한 엉덩이와 허벅지와 이어지며 살이 접히는 그 언저리까지 벌게진 것이 어렵잖게 드러났다.

“네가, 쳐, 쳤잖아.”

그는 끅끅 우는 소리를 내면서도 독이 오른 목소리로 일갈했다.

“아팠나요?”

“이렇게 치, 치고선, 당신이라면 안 아프겠어?!”

“물론 아프라고 쳤으니 아파야겠죠. 당신 맷집이 보기보다 나약해서 다행이에요, 이쯤 해서 포기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정말 피를 볼 때까지 해야 했을 테니까.”

그녀는 전혀 염려라고는 묻어나지 않는 투로 무심하게 뇌까렸다. 그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제 수고를 신경 쓰는 것이 또렷해 기가 차 지랄조차 못 했다. 바타렐은 그저 자꾸만 내리누르려는 의지를 역류해 쏟아지는 울음을 어떻게든 삭이려 노력하며 그녀가 제 가터벨트를 풀고 속옷을 끌어 내리는 것을 무력하게 방조할 수밖에 없었다.

통증 탓에 감각이 예민해져 천이 살갗을 쓸며 끌려 내려가는 것이 지나칠 정도로 또렷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모른 척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걸.

열이 바짝 오른 살에 공기가 닿자 날붙이처럼 따끔거렸다. 여자의 무자비한 손이 둔부의 완만한 선을 따라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그녀는 마치 가여운 것을 어르듯이 다정하고 섬세한 손으로 환부를 살펴 주었다. 희롱이 아니라 다정한 누이의 손길쯤 되는 듯한 이 감상이 더 끔찍스러워 바타렐은 울음을 가까스로 멈추고 짜증을 냈다.

“치워! 당신이 패 놓고 걱정하는 시늉이야?!”

그러나 리비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오히려 좀 더 손끝에 무게를 실어 하체를 어루만졌다. 아직 옷감에 싸인 등허리 언저리에 손을 댔다가, 천천히 미끄러지며 회음부를 스친다. 저 자신도 만질 일 없는 내밀한 속살을 만지는 타인의 손길에 질색을 한 바타렐이 반사적으로 하반신을 엉거주춤 띄웠으나 그녀는 태연했다. 오히려 그가 과민 반응을 하는 듯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렇게까지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것도 재주겠지만 그에 휘둘리는 입장으로서는 죽을 맛이다. 그녀의 손끝이 고환에 스치자 발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길 왜 만져! 미쳤어! 당신 구르디예프 경이 두렵지도 않아?!”

“갑작스럽네요. 이 내가 요한을 두려워하기라도 해야 할 것처럼 말하는군요.”

“정인이잖아!”

“정부겠죠.”

“당신 감히!”

바타렐의 고개가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는 짧게 경고성으로 그의 둔부를 살짝 밀어 올리듯 두드렸다. 누적된 통증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찌릿하게 고통이 일었다. 그는 그 변태적인 행위에 지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으르렁거렸으나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같은 손짓을 반복했다. 야금야금 간질거리는 감각이 올라왔다. 볼기를 받치듯 올려 치는 탓에 고환과 성기에도 얕고 둔한 감각이 이어진 탓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읊조렸다.

“당장 놔, 차라리 아까처럼 개 잡듯 패라고!”

“명령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아!”

그의 분노 따위는 우습지도 않다는 듯 사뿐하게 일갈한 리비아가 제법 아플 정도로 엉덩이를 후려쳤다. 바타렐은 반사적으로 엉덩이에 힘을 바짝 주어 통증을 삭이려 들었다. 그녀는 살짝 들린 그의 허리를 일별하며 손수 자세를 잡아 주었다. 엉덩이를 치들고 엎드린 굴욕적인 모양새로.

점점 더 상상해 본 적 없는 상황으로 치닫자 머리가 빙글빙글 어지럽게 엉켰다. 여자는 자세 탓에 자연히 허공에 덜렁 놓인 그의 성기를 부드럽게 그러쥐고 속삭였다.

“자세를 흩트리지 말도록 해요, 으깨지고 싶지 않으면.”

“미친 거 아냐? 변태 영감들이나 할 법한 짓……, 으을……!”

“내 입에서 저속한 말이 나오게 하지 말아요, 코르도니예르. 난 생각보다 당신에게 관용을 베풀고 있어요. 포웰의 이름을 걸고 맹세컨대, 내 입으로 당신에게 하게 되는 말은 모조리 실현할 생각이에요. 잡배들에게 던져 주든, 짐승 우리에 던지든, 알겠어요? 지금 이 순간 이후로 내가 다시 한번 이런 말을 하게 될 시에는, 정말 인간 구실을 못 하게 만들어 줄 거라는 사실을 똑똑히 머릿속에 새겨 두도록 해요.”

조금쯤 경멸과 얕은 지루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무시무시했다. 고저도 욕설도 없이 단조롭고 우아한 어절마다 섬뜩한 한기가 있었다.

그는 마치 노예처럼 함부로 다뤄지고 있는 것에 대한 비난을 반사적으로 삼켰다. 본능적으로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인내임을 알아차린 탓이었다.

아무리 제가 눈이 뒤집혀지고 있단들 여자는 가장 강대한 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세도가의 주인이다. 차라리 훗날을 도모할 생각이라면 참는 게 맞다. 그는 치를 떨며 울분을 삼켰다.

리비아는 얌전히 고개를 떨군 바타렐의 성기를 놓아주고는 여전히 열 오른 둔부를 힘주어 주물렀다. 말 그대로, 질 나쁜 자들이 어수룩한 소년들을 희롱하듯이 끈적한 손길이었다. 다만 그녀의 겉껍질 덕에 불쾌감과 비등할 정도로 묘한 쾌감이 일었다. 부드럽고 마디마디가 또렷한 섬섬옥수가 살집을 주무르며 쳤다는 감각은 들되 아픔이 주가 되지는 않을 만큼만 손속에 여유를 두어 엉덩이를 희롱해 댔다. 바타렐은 자신의 가빠진 숨이 분노를 삭이는 탓인지, 묘한 흥분을 삭이는 탓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어떻게든 바르게 호흡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그녀가 살을 내리치자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흣 하고 잇새로 신음이 왈칵 샜다. 먼젓번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통증도 아니었다. 아프기는 했지만 그보다도 살이 맞닿는 감촉, 불순하게도 제 성기가 허공에서 덜렁대는 감각이나 타격에 묘하게 자극당하는 회음 언저리에서 올라오는 열띤 간질거림이 괴로웠다. 바타렐은 매번 얻어맞을 때마다 읏, 윽, 하고 짤막한 신음을 터뜨리며 후들거렸다. 외면할 수 없을 만큼 또렷하게 성감이 올라오고 있다는 것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수치스러워 도리 없는 일이었으나 그녀의 협박이 귓전을 맴돌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으읏……!”

“섰군요.”

“……뭐?”

“대단한걸, 이렇게 질색하면서도 체벌만으로 액을 흘리는 이는 처음이에요.”

리비아는 태연하게 그의 귀두 끄트머리를 손끝으로 간질였다. 살의 감촉보다도 먼저 미끌미끌한 무언가가 번지는 느낌이 나자 바타렐은 머릿속의 무언가가 뚝 끊긴 듯 몸뚱이를 홱 일으켰다.

“안 해, 이런 거 안 할 거야!”

“내 말이 우스웠나 보죠.”

“무서워도 싫은 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당신 진짜 미친 거 아니야? 그분을 정…… 정…… 정부 따위로 둔 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분을 두고 왜 날 가지고 노는 건지도 이해 못 하겠어, 이딴 게 즐거워?!”

“그건 스스로 생각해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코르도니예르? 타인의 정사를 훔쳐본 벌로 얻어맞은 주제에 좆대가릴 세운 사람이 모르면 누가 알겠어요.”

“내가 세운 게 아니잖아! 당신이!”

“난 당신을 때린 것밖에 없어요, 저속한 건 오롯이 당신이잖아요? 굴욕을 줄 요량으로 아이 다루듯 체벌을 한 건 사실이지만 나야말로 당황스러울 지경이군요. 왜 세운 거죠?”

그는 말문이 막혀 입을 헤벌린 채 울음 범벅으로 와글와글 일그러진 낯을 수습하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리비아는 희미한 곤혹을 가장하며 눈을 내리떴다.

“사적인 순간을 목격당한 것도, 변태 같은 남자의 의미 모를 발정으로 모욕당한 것도 저인데 어찌 이리 당당하게 화를 내시는지…… 정말 이해가 안 되는군요.”

바타렐은 정신없는 와중 그녀의 진지한 말에 혼란스러워져 눈을 떨었다. 리비아가 그의 살집을 주무른 것 또한 사실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자신이 좆을 세운 것도 맞다, 심지어 그녀에게 맞은 뒤 세우지 않았는가. 못 견디게 억울했지만 동시에 사실이 태반이라 쉬이 반박할 수 없었다. 치열하게 고민하는 동안 그녀의 입매에 희미한 웃음이 스친 것을 발견한 그의 눈에 불이 튀었으나, 리비아가 툭 던진 말 한마디에 다시 속절없이 흔들렸다.

“역시 다른 손을 빌리는 게 좋겠죠, 요한이라던가.”

“미…… 미쳤어?”

“그도 그럴 것이, 요한 또한 당사자 중 하나이지 않은가요?”

“…….”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인데. 그것만은 싫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꼴이 알려지는 것 자체가 싫었지만, 그게 먼발치에서 늘 동경하던 사람이 되는 것만큼은 견딜 수 없이 싫었다. 바타렐은 분홍빛 눈이 눈물로 젖어 반질거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애먼 입술만 질근거리고 있었다. 리비아는 굳이 말을 걸지 않고 한참을 그저 두다가, 나른하게 그의 성기를 치마 위로 그러쥐고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여즉 꼿꼿한 것을 주지시키듯이 가벼운 손놀림. 여자는 느긋하게 그를 꾀었다.

“울지 말아요, 나도 그러고 싶지 않으니.”

“……안 믿어.”

“정말이에요.”

그는 약 올리듯 덧붙인 말에 기어코 눈물을 후드득 떨어뜨리며 원망의 말을 쏟았다.

“당신 말을 내가 어떻게 믿어, 나, 나, 날 막 때리고, 협박하고…….”

“그야 당신은 간자니까요.”

“나도 알아!”

“쉬…… 울지 말고.”

“안 울어!”

리비아는 부드럽게 그의 눈물 젖은 뺨에 입을 맞추었다. 바타렐은 한 발짝 늦게 바짝 얼어붙었다. 그녀는 별반 개의치 않는 듯 혀끝으로 그의 방울진 눈물을 핥아 주며 부드럽게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익숙한 방식으로 낯선 쾌감이 일었다. 옷 위로 하는 것도, 타인의 손인 것도, 이렇게나 불리하게 짓눌린 채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하체에 힘을 주며 허리를 들썩거렸다. 벌벌 떠는 것에 더욱 가까워 토끼처럼 가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리비아는 사뭇 자애로운 얼굴로 그의 머리통을 부드럽게 쓸어 주며 연신 달래 주었다.

“옳지, 착하죠…….”

“치……워, 엇…….”

울음과 신음으로 뒤범벅된 목소리가 뚝뚝 끊겼다. 그는 묘하게 모난 성미가 풀어지는 기분에 휩쓸린 채 점차 부피가 커져 가는 하초의 열에 신경을 쏟았다. 그렇게 거칠지는 않지만 특별히 부드럽지도 않은, 여린 살을 부대끼기엔 마땅치 않은 옷감에 휩싸여 축축하게 젖은 성기를 타인의 손으로 애무받는 것은 상당히 기이하고 죄악감이 드는 일이었다. 그는 점점 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손이라도 자유로웠더라면 얼굴을 파묻었을 테지만, 이 상황에 압도된 듯 몸뚱이를 움직일 수 없었다. 시야 가득 그녀의 몸뚱이뿐이었다. 자신의 치맛자락과 에이프런, 그녀의 드레스가 아무렇게나 구겨졌다. 열이 올라 좁아진 사고는 그녀의 몸매에 쏠렸다. 풍만하고, 낭창한 몸이었다. 그녀는 시선이 한곳에 쏠린 것을 알아차리고는 희미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그의 뒷머리를 만져 주던 손에 힘을 실어 앞쪽으로 짓눌렀다. 바타렐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균형을 잃어 비스듬히 누운 모양새가 되었다.

“놔!”

“쉬…….”

서늘한 옷감에 싸인 살집은 부드러웠다. 그는 결국 소리 없이 울면서 점점 다스리기 힘들 정도로 안달이 난 허리를 비틀었다. 둔한 옷감 아래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이미 불이 붙은 몸으로 놓아주지도 않는 사람의 품에 갇혔으니 이리되는 것은 지당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신음이 점차 달콤한 소리가 섞여 났다. 리비아는 그의 하얀 머리칼에 입술을 묻으며 달랬다.

“울지 말아요, 코르도니예르. 해치려는 게 아니니까…….”

“으읏, 웃…….”

“쉬이…… 치마를 걷어 봐요.”

그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한참을 바짝 굳은 채 벌벌 떨기에 그녀가 손을 거두자, 입술을 고쳐 물며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옷자락을 들쳐 스스로 제 하체를 드러냈다. 붉게 피가 몰려 달아오른 성기는 이미 땀과 제 선액으로 젖어 있었다. 그 꼴을 제 눈으로도 본 그는 말을 잃고 눈을 질끈 감았다. 리비아는 제 앞섶 단추를 톡톡 풀어 내리며 그의 등허리를 쓸어 주었다.

“부끄러워하지 말아요, 지당한 일이니까. 어찌 당신이 거부할 수 있었겠어요. 예정된 쾌락인 줄도 몰랐을 텐데.”

“하, 하나도…… 지당하지 않아.”

“울지 말고.”

그녀는 옷깃을 밀어젖혀 제 가슴을 드러냈다. 바타렐은 뻣뻣해진 몸뚱이를 들썩거렸으나 리비아가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속에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그의 숨이 거칠어졌다. 말마따나 도리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나 애가 닳은 순간에 눈앞에 드러난 여체를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바타렐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이 여자는 가히 악마였다. 몰아넣어 폭력으로 이성을 흩트리고, 빠져나갈 구멍 없는 협박으로 약해진 마음을 충동질해 쾌락에 점점 파묻어 버린 뒤 처음부터 이런 관계였던 듯 자비를 베풀다니. 남의 일이었다면 기가 질려 헛웃음을 쳤을 것이다.

다만 이것은 바타렐 코르도니예르 본인의 일이었고, 그녀의 반라는 본능적인 탐욕을 일깨울 만큼 유혹적이었다.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그러나 여전히 본능적인 거부감이 남아 있었다. 이 여자에게 넘어가선 안 될 것만 같은 예감.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기묘한 확신.

물리칠 수 없는 육욕만이 열렬하게 타오르며 기이한 죄악감을 부채질했다.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기어코 어쩔 줄을 모르게 되는 것이란 얼마나 꼴사나운 일인가?

꺼끌꺼끌해진 숨이 닿았다. 태연하게 오르내리던 흉부가 일순 반사적으로 흠칫 떨린 것을 본 바타렐의 고개가 홱 들렸다. 그녀는 여전히 동요 없는 얼굴로 시선을 마주했다. 다만 몸뚱이만은 인간의 것이다. 기이한 희망이 싹을 텄다. 그는 떨리는 잇새로 더운 숨을 뱉었다. 눅눅하게 물기가 묻어나는 한숨. 리비아는 지그시 그를 바라보다 불현듯 그가 매료된 희망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그 비인간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켜보며 완전히 휘말려 들어갔다. 선고처럼 열린 여자의 입술에서 그조차 깨닫지 못한 날것 그대로의 욕망이 튀어나왔다.

“용서받고 싶죠?”

이길 수 없는, 날것 그대로 명줄 바로 앞에 와 닿은 어떤 강력한 것에서부터 달아나고 싶은 것은 생물의 당연한 섭리다.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완벽한 우위를 점한 포식자를 상대로 엄니도, 바람 같은 다리도 없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간절하고 비굴하게 용서를 비는 것뿐. 그 무엇이든 좋으니 어떤 기적이 자신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면서.

입 밖으로 내뱉기에는 차마 지나치게 저속하고 자존심이 상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눈감아 준 여자가 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빗어 내렸다. 시리도록 단단한 손가락이, 이제는 두려움 외의 무엇으로 희미하게 변질되어 있었다.

바타렐 코르도니예르는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리비아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것만이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구석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시점에서 그 본능을 꺾을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으리라. 그녀는 그를 힐난하지 않고 부드럽게 제 품으로 이끌었다.

“착하게 굴어야지.”

발작적으로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삐걱대며 벌어졌다. 천천히 더운 숨이 쏟아지다 단단하게 도드라진 유두에 닿았다. 그는 마치 제가 애무당하는 듯이 흠칫 놀라 고개를 뺐다가, 혼이 나지 않고서야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에 물었다. 묘한 감흥이 인다. 경험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기분이 이상했다. 콕 집어 무엇이 이상하다거나 기괴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간 해 온 정사와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바타렐은 이런저런 혼란한 상념에 휘둘리며 천천히 입술을 오므렸다.

“옳지.”

그녀의 목소리로 긍정받자 안심이 됐다. 그래, 난 나쁘지 않아. 이 여자가 시켜서, 살아야 하니까 하는 거야. 완전한 책임 회피까지 매듭짓고 나자 더 이상 유혹에 반항할 기력이 남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혀로 그 유두를 건드렸다가, 천천히 핥아 적시며 빨아 대기 시작했다. 기교라곤 눈 씻고 찾으려도 찾을 수 없는 맹목적인 입질이었다. 수월하게 치대기 위해 적신 것이 혀 놀림의 끝이었지만 리비아는 나무라지 않았다. 제 말에 따랐으니 약속한 대로 용서한다는 듯이 그저 자애롭게 눈매를 누그러뜨렸을 뿐.

바타렐은 묘한 희열에 몸을 떨며 그녀의 허리춤을 붙든 팔에 점점 더 힘을 주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꼬락서니 따윈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그녀에게 악착같이 들러붙어 젖을 빨며 상스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쭙쭙거리는 노골적인 소리, 벅찬 숨을 터뜨리느라 놓친 가슴에 다시 들러붙는 끈적거리는 소리 같은 것들. 리비아는 조금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이따금 움찔거리며 그를 다정하게 얼러 주었다. 성년이라기엔 조금 의심스러울 정도로 예쁘장한 남자를 품에 거둔 채 치마를 들치고 젖은 성기를 쥐었다. 바타렐은 차가운 타인의 손이 닿자 부끄러워하며 귀 끝까지 얼굴을 붉히기는 했지만 반항하지 않았다. 모자란 자극으로 날이 선 성감을 빨리 해소하고 싶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거부감이 크게 무뎌졌기 때문이리라.

여자는 그의 성기를 가늠하듯 쥐어 보았다. 저와 엇비슷하거나 조금 클 듯한 키와 달리 성기는 라시니나 다른 이들과 비교해도 뒤처짐이 없는 크기였다. 오히려 분홍빛이 돌아 묘한 가학심이 일기까지 했다. 그녀는 마치 아이를 다루듯 그를 품에 안고 성기를 흔들어 주기 시작했다.

“웃, 하으……!”

“기분 좋은가요? 꼭 아이 같군요.”

그는 리비아의 말에 얼굴을 붉히기는 했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며 머뭇거리다가 제가 세게 빨아 댄 탓에 살짝 부어오른 그녀의 가슴을 보곤 눈치를 살피듯이 혀를 내밀어 핥아 주었을 뿐.

애당초 특별히 대답을 바라고 꺼낸 말도 아니었으므로 리비아는 그의 귀두 갓 아래를 손끝으로 둥글리듯 긁어 주곤 기둥을 역수로 쥔 채 거칠게 훑어 주었다. 바타렐은 몸뚱이를 격정적으로 비틀며 헐떡거렸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 몽롱하게 맥이 풀린 분홍색 눈을 꿈꾸듯 흐리게 뜬 채 할딱거리며 그녀의 가슴을 빨다가, 제 타액으로 젖은 살집에 뺨과 입술을 치대며 어린 짐승처럼 끙끙거렸다.

온통 정욕뿐이었다. 지옥에서 기어올라 온 손아귀처럼 무시무시하게만 느껴지던 여자에게서 얻은 쾌락이라고는 믿을 수조차 없었다. 사실상 그녀가 서큐버스였다고 해도 믿었으리라, 아니, 차라리 그 편이 훨씬 납득하기 좋을 것 같다. 방금까지 있었던 폭력과 강압 따위가 제 머릿속을 스친 잠깐의 불행한 망상이었던 것처럼 머리가 둥실거렸다. 등줄기에 전류가 튀는 것처럼 파드득 떨리는 몸뚱이엔 빼곡하게 열이 올라 살갗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몸뚱이를 좀 만져진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정신 차리기 힘든 쾌락과 다정함을 얻을 수 있다니. 마치 큰누이의 안온한 품에 안긴 것처럼 그저 엉기고 싶은 욕구가 들끓었다.

바타렐은 그녀의 가슴을 더 빨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매달려 허리를 비틀었다. 갈 것 같다. 성기를 만지는 것이라고는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자연스러운 손길이었다. 차라리 부채나 잔 따위를 쥘 법한 손으로, 이렇게나 거침없이 가장 민감한 살덩어리를 희롱해 대다니.

미끌미끌하게 젖은 그녀의 손이 아무 방해 없이 자유롭게 위아래로 미끄러져 노니는 것에 숨을 멈추었다가 울음처럼 토해 내며 바타렐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안…… 돼, 흣……!”

“갈 것 같아요?”

“응……, 아, 흐……, 가, 갈 것……, 가, 응, 으응……!”

눈물이 뺨을 가로질렀다. 그는 완전히 리비아의 허리에 팔을 감고 품에 얼굴을 묻고 안긴 채 흐느끼며 횡설수설 가리는 것 없이 말들을 쏟아 냈다.

“안 돼, 아, 가아…… 이거, 그마……안.”

“왜? 가기 싫어요?”

“히, 응, 아, 아아…… 또, 또 혼, 혼낼…… 흐응……!”

“혼낼까 봐 가기 싫어?”

“으, 으흑, 응, 때, 때리지…… 마앗…….”

눈가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황홀한 낯을 빼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하는 그는 아름다웠다. 어느 신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미동과 견주어도 손색없을 만큼. 리비아는 다정하게 그의 눈가에 입술을 내리며 달짝지근하게 속삭였다.

“얌전히 군다고 약속하면 혼내지 않을게요.”

“응, 응…….”

“그럴 거예요?”

“그럴게, 흣, 마, 말…… 잘 들을…… 테니까……, 우응…….”

다정하게 코끝을 스치나 싶더니 입술을 가로채였다. 바타렐은 반쯤 뜨는 것도 버거운 눈을 깜빡이다 얌전히 눈을 감고 입을 벌려 주었다. 숨이 가빴다. 입술을 빼앗기기 전에도 가빴던 숨이었다. 그는 응, 음, 하고 뭉그러진 소리를 내면서도 어떻게든 숨을 쉬기 위해 노력했지만 공기가 부족할수록 점점 더 머리가 멍해지고, 여자가 전해 주는 감각은 화려하게 살아났다. 허리가 제 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발작적으로 들썩거렸다. 그녀의 혀가 제 혓바닥을 뭉개듯 훑다 강하게 빨아들였다.

단순히 입 속의 살덩이를 빨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리비아가 베푸는 쾌락에 매달려 몸을 한껏 옹송그린 채 경련했다. 시트 위로 무언가 투둑거리며 떨어지는 소리와, 그녀의 희미한 신음 같은 것들이 이명으로 먹먹해진 귓전을 두드렸다. 시간이 갈수록 천천히 감각이 또렷해졌다. 인지할 수 있는 범위로 점점 잦아들어서, 제 살을 치대느라 미지근하게 덥혀진 귀부인의 손을 정액으로 잔뜩 더럽힌 뒤의 질척하고 묘하게 아쉬운 감각을 또렷하게 곱씹었다.

“하, 하아아, 하아, 하…….”

입술이 떨어졌다. 바타렐은 모자랐던 숨을 게걸스럽게 들이켜면서도 그녀의 허리춤에 매달려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오히려 어리광을 부리듯이 풍만한 품에 얼굴을 처박고 상스러운 이유로 가빠진 숨을 여과 없이 토해 냈다. 부드럽고 따뜻한 품에서 농익은 체향이 났다. 그는 홀린 듯이 혀를 내어 리비아의 가슴 둔덕을 핥으며 숨을 골랐다.

그녀는 그런 바타렐을 여전히 품에 안은 채 질척해진 제 손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남은 정액을 짜내려는 듯 뿌리 언저리를 쥐고 위로 쓸어 올리며 사정을 도왔다. 그의 몸은 여전히 바들바들 떨리고 있어서, 꼬락서니가 흐트러져 있지 않았더라면 우는 줄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물론 우는 사람이 이렇게 추접스럽게 여체에 눈이 멀어 살갗을 핥아 댈 리는 없지만.

“코르도니예르.”

“……왜……?”

“탈의 시중은 들어야죠.”

후희에 젖어 여전히 매가리가 없는 그의 목소리에 웃음을 흘리며 리비아가 어르듯 속삭이자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 바타렐이 젖은 가슴을 드러낸 채 희미하게 붉어진 낯을 오연하게 든 그녀를 보곤 고개를 숙였다. 어린애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좀 더 원초적으로 무지한 생물이 된 것에 가까우렷다. 그녀의 애무를 받는 동안 순종 외엔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으니까. 지금도 여전히 잔열처럼 남은 복종감이 치가 떨리게 달았다. 그는 눈을 내리깐 채 조심스럽게 그녀의 옷가지에 손을 댔다.

리비아 모브레이는 이런 상황에서도 수치심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진작 나기부터 귀하게 나 숨 쉬는 것, 눈 감고 뜨는 것 외의 모든 것을 남의 손에 수발들린 여인이니 오죽할까. 아니꼬운 감상을 무의식적으로 뇌까리면서도 한번 사그라든 분노는 쉽게 살아나질 못했다. 그는 달뜬 낯으로 반쯤 풀어 헤쳐진 앞섶을 마저 풀어 내리고, 벗기고, 속옷과 종아리 언저리까지 올라오는 짧은 스타킹만을 남겨 두고 점차 가빠진 숨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희고 아름다운 몸, 이미 어설프게 입을 대 그녀의 몸이 얼마나 황홀한지 아는 그로서는 그저 맞닥뜨리는 것만으로도 열이 피었다. 처음으로 메이드다운 일을 제대로 했다는 생각이 잠깐 뇌리를 스쳤지만 그 어떤 메이드도 고용주의 품에 안겨 우는 것을 업으로 삼지는 않음을 떠올리자 한없이 수치스러웠다.

공포도 혼란도 오롯이 제 몫이다. 자연스레 자신을 살려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올려다보자 여자는 태연하게 탁액으로 질퍽해진 손을 제 속옷 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여자가 자신의 샅을 감싼 천을 들치자 질척이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거센 심박을 가눌 길이 없었다. 여자는 노골적으로 두 다리를 무릎을 세워 활짝 벌린 채 수음하듯 구멍을 풀고 있었다. 벗기지 못한 천 탓에 제가 싸지른 액이 그녀의 살을 적신 것인지, 그녀 역시 흥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숨소리에 온통 매몰된 것만 같았다. 그는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뚫어져라 여자의 벌어진 다리 사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로 젖어 번들거리는 낯을 하곤 어쩔 줄 모르는 기색으로 맹렬하게 바라보는 꼴은 자못 좋은 구경거리여서, 리비아는 퍽 즐겁게 입을 열었다.

“보고 싶어요? 질퍽질퍽해졌을 텐데.”

“안, 안 봐.”

“아주 목을 빼고 있으면서.”

짧게 웃음을 터뜨린 그녀는 야살스럽게 제 입술을 핥으며 속삭였다.

“주인의 몸뚱이라면 속속들이 알고 싶어 해야죠. 그러라고 고용한 건데. 안 그래요?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신의 일은, 목숨을 걸어 완벽하게 해내야 하는 것은 날 기분 좋게 하는 것이잖아요.”

여자의 속삭임은 그야말로 끔찍스러울 정도로 달게 귓가를 희롱했다. 야릇하고 뜨뜻미지근한 것이 귓속으로 파고들어 가 뒷덜미를 훑으며 등골을 뒤흔드는 듯한 감각. 말 몇 마디로 이렇게나 쉽사리 사람을 농락하는 게 과연 인간일까. 홧홧하게 열 오른 몸에 한기가 어렸다가 흩어진다.

“코르도니예르.”

그녀가 그를 불렀다. 마치 이름만 부르면 졸랑졸랑 따라오는 애완견이라도 대하듯 무게도 주어도 없는 산뜻한 부름, 왈칵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 외엔 버틸 만한 재간도 사유도 없었다. 남자는 순순히 그녀에게 기어서 다가갔다. 한 발짝 뗄 때마다 그녀를 흘긋거리며 소리 없이 허락을 구했다. 정중함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순수하게 경외와 정욕만이 자리한 눈.

리비아는 그것을 묵묵히 기다렸다. 어차피 몇 발짝 떨어져 있지도 않았으므로 두세 번 흘긋거리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코끝이 스칠 만큼 가까이 들러붙을 수 있었다. 그녀는 혀를 내어 희게 질릴 만큼 꾹 다물린 그의 입술을 핥았다. 진득하게 붙들린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의중을 알 수 있었다. 삐걱거리며 입술을 벌리자 그녀의 혀가 밀려 들어온다. 거역할 수 없는 고요한 위압감에 순응하며 혀를 얽었다. 눈을 감을 수도, 거부할 수도, 하다못해 반응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마치 속마음까지 범해지는 것처럼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성을 붙들 때면 선명하게 살아나는 그 이질적인 감각은 한없이 그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차라리 아무 생각도 않는 편이 나을 거라는 사실을 알지만 수긍하기는 싫은 성가신 아집.

그녀의 손이 치맛자락을 들친다. 재차 적응되지 않는 대접에 퍼뜩 놀랐으나 혀뿌리가 아릴 정도로 힘껏 혀가 빨리자 앓는 소리가 절로 나며 허리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드문드문 뭉개진 신음을 흘리며 그녀가 잡아당기는 대로 자세를 고치자 부드러운 것이 끄트머리에 부딪혔다. 바타렐은 어지럽게 뒤섞인 이성을 그대로 놓아 버렸다. 제 성기에 닿은 그 천 너머의 살이 지나치게 부드러워서, 축축하고 색정적인 열기가 또렷해서, 오히려 제가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리비아가 속옷을 둔덕 옆으로 젖히는 것이 죄 느껴졌다. 그는 흐으으, 하고 거의 울듯이 신음하며 허리를 움찔거렸다.

한 장 얄팍한 천이 사라지자 한층 더 노골적인 열기가 느껴졌다. 그는 결국 거의 거꾸러지듯 기어 그녀의 벌어진 음열 사이, 그 미끈미끈한 점막을 선단으로 훑었다. 절로 허리가 파르르 떨렸다. 전율이 일었다. 그는 발정이 난 어린 짐승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녀의 손이 허리를 짚어 누르는 대로 샅을 내렸다. 뻐끔거리는 구멍을 천천히 짓누르며 헤쳐 들어가는 감각, 끈적하게 휘감기는 내벽의 감촉에 열이 훅 끼쳤다. 바타렐은 조난자마냥 그녀에게 바짝 안겨 들었다. 어떻게든 좀 더 깊이 파고들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여자는 그런 그의 등을 감싸 안고 넓게 다리를 벌렸다.

“아아, 아아아…….”

헤벌어진 입은 다물릴 줄을 몰랐다. 바타렐은 고개를 내저었다가 경직시키길 반복하며 어설프게 하초에 체중을 실어 샅을 맞부딪혔다. 옷차림과 상반되는 애달픈 수컷의 접붙이에 웃음을 흘린 리비아가 그의 벌겋게 달아오른 귀 끝을 핥아 애무했다. 찔꺽거리는 소리가 느릿느릿하게 소년의 귓전을 범했다. 바타렐은 고개를 뒤채면서 온 신경을 갉아먹는 처절한 열락에 바르작대기에 바빴다.

보이지 않기에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러나 온 감각이 기민하게 반응하며 그의 망상을 부추겼다. 한 번 추어올릴 때마다 음습한 포식자에게 아양을 떠는 것만 같은 어설픈 허릿짓이 주는 쾌락에 매몰되어 간다.

“기분 좋은 모양이군요.”

“흐으윽, 읏, 아으…….”

퍽퍽 살 치는 소리만이 대답처럼 들려왔다. 그는 리비아에게 두 팔과 고개를 단단히 감은 채 필사적으로 추삽질을 해 댔다. 바타렐의 넓고 긴 치맛자락에 가려진 접합부가 얼마나 난잡하게 액을 흘리며 그의 성기를 삼키고 있을지 뻔히 알면서도, 그녀는 굳이 손을 내려 제 둔덕을 벌리고 속살거렸다.

“대답해야죠, 코르도니예르. 이렇게 안달한 듯이 박아 대기만 하면 내가 알 수가 없잖아요. 상냥하게 대해 줘서 기쁜가요? 잔뜩 박게 해 줘서 좋아요?”

“흐윽, 응, 응, 좋, 좋아, 이거…… 좋앗, 아!”

“뭐가 좋은지 똑바로 얘기해야지.”

그녀의 낯짝에 가학적인 희열이 스치고 지나갔다. 바타렐은 그 음습하고 아름다운 악마의 얼굴을 마주하고 스스로 자존심을 짓뭉갠 채 방언처럼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아무렇게나 주워섬겼다.

“고, 공작 부인, 의, 구멍, 좋아요, 아흑, 흘레, 붙는 거어, 좋아……! 상냥, 한, 앙, 기분, 좋아서, 히이, 조이지……!”

“귀엽게 굴어 놓고 조이지 말라니, 너무한 말을 하는군요.”

“흐으응, 으, 부이인…….”

열이 올라 뺨이며 눈가가, 귓바퀴가 온통 발그스름했다. 몽롱하게 풀려 버린 분홍빛 눈과 희미하게 빛나는 백발이 어지럽게 시야를 채웠다. 그는 애교라도 부리는 것마냥 리비아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다가, 그 풍만한 젖에 이끌린 듯 입을 벌리고 유두를 찾아 물었다. 스스로 입을 틀어막은 꼴이었지만 예민한 좆대가리도 음란한 머릿속도 그대로였으므로 눅진눅진해진 혀와 입술로 그녀의 가슴을 힘껏 애무하면서도 온통 달아 빠진 교성이 입 안을 가득 메운 채 간헐적으로 새어 나왔다.

아무리 허리를 흔들고 있다고 해도 그의 황홀경에 젖어 형편없이 녹아내린 낯짝이 증명하듯 범해지는 것은 바타렐 코르도니예르였다. 아무리 위협적으로 알량한 성기를 휘둘러 봤자 그는 어디까지나 리비아 모브레이에게 목숨을 구걸하며 같잖은 재주로 봉사하는 비굴한 잡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피할 수도 없거니와 상냥하고 압도적인 쾌락 앞에서는 외려 자극에 지나지 않았다.

좋아, 이런 거, 잔뜩 하고 싶어, 싸고 싶어, 아프게 하지 마, 기분 좋아.

차마 입 밖으로 뱉을 수 없는 상스럽고 굴욕적인 어리광으로 머릿속이 잔뜩 들어찼다. 바타렐은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듯 찔러 들어오는 여자의 손가락이 퍽 서늘하고 단단하다는 것을 되새기며 거친 허릿짓에 놓친 유두를 혀를 내어 핥아 주었다. 허리를 내렸다가 올린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제대로 제 몸뚱이를 인지하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사정 없이도 단발적이고 자잘한 절정에 온몸이 요란스럽게 경련하는 것이나, 흐물흐물하게 풀린 입술 사이로 타액이 질질 흘러내리는 것 따위, 더욱이 제가 이따금 그녀의 품에 뺨을 비비며 무의식적으로 자비를 구걸하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그는 그저 이 기분 좋은 구멍에 완전히 집어삼켜져서 그저 더 이상 낼 것이 없을 때까지 잔뜩 씨물을 싸지르고 싶을 뿐이었다.

이 여자의 무자비함은 아프게 하지 않는다는 약속 따위로 가려질 만한 것이 아니다. 자신을 악착같이 짓누르고 울부짖건 눈물로 호소하건 완전히 망가지건 간에 비상식적인 쾌락으로 자신을 완전히 망가뜨릴 테지.

그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짜릿했다. 이런 거라면 정원이어도 그 손을 뿌리칠 수 없었겠지, 이런 음란한 품을 내어 주며 달콤하고 폭압적인 목소리로 명령하는 여자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히윽, 응, 고, 공자, 악, 부인, 가요, 가요……!”

“제대로 말해 주지 않으면 모르겠는걸.”

“쌀 것, 가, 같아, 제발……, 제바알……!”

“안에 싸고 싶은 건가요?”

리비아 역시 열이 올라 숨이 다분히 가빠져 있었다. 그녀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아 축이며 바타렐의 턱을 그러쥐고 올려 난잡하게 키스했다. 젖에 매달리느라 힘이 빠진 혀가 경련하면서도 나긋하게 엉겨 왔다. 본시 음탕한 기질이 다분했겠지. 조금 전까지 힘 있게 치받던 허리도 그저 푹 내린 채 안쪽에 좀 더 기어들기 위해 완전히 맞붙은 샅을 짓쳐 대며 파들댈 뿐이었으므로 그의 절정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모르기도 힘들었다. 그녀는 활짝 벌렸던 두 다리로 그를 단단히 옭아맨 채 허리를 퉁겼다. 바타렐이 소리가 되지 못한 날카로운 무언가를 발작적으로 질러 댔지만 그가 꿈꿨듯 리비아 모브레이라는 여자는 자비라는 것이 없는 자였다. 그녀는 그저 그의 목덜미를 틀어쥔 채 코앞에 놓인 제 절정을 좇아 허리를 놀렸다. 찌걱거리며 젖은 점막이 떨어졌다가 들러붙는 상스러운 소리가 요란했다. 바타렐은 반쯤 넘어갈 듯한 눈으로 울부짖으며 민감해진 몸뚱이를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과한 쾌락 앞에 몸부림쳤다.

“하악, 하아아, 제발, 제바알, 가 버려, 가 버리니까……!”

그는 이제 누구에게 무엇을 비는지조차 모른 채 아무렇게나 애걸했다. 리비아는 그 비참하고 색정적인 광경을 타인마냥 관조하며 고개를 치들었다. 유연하게 움직이던 몸뚱이가 바짝 굳고, 질벽이 악착스레 좁혀 들며 주어지는 자극에 이기지 못한 바타렐이 고개와 허리를 뒤로 휘며 바르르 떨었다. 참았던 정을 모조리 헌납하듯 파정하며 으, 아으, 으, 하고 뜨문뜨문 끊어진 신음과 함께 타액을 흘리며 반쯤 눈을 까뒤집고 몸서리쳤다. 제대로 눈을 뜨고 있을 수조차 없었다. 온몸이 한순간에 공처럼 오그라드는 것처럼 사지를 제대로 겨눌 수 없었다. 직감적으로 자신이 떨치지 못할 성질의 무언가라는 것을 느끼면서 혼절했다. 완전한 정적이었다.

* * *

- 공금 by Jira

사무치는 한기가 잠을 깨웠다. 그는 자신의 등허리가 뻐근하게 배기는 감각을 필두로 둔부와 머리의 통증에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뺨을 치댔다. 정신이 들었으되 맑지는 않은 채로도 감춰지지 않는 퀴퀴하고 불쾌한 습기에 이곳이 지하 감옥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간자질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쯤 되면 익숙하다 못해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느껴지는 법이다.

바타렐은 흐린 눈을 껌뻑이며 제대로 잡히지 않는 초점을 애써 다잡았다.

공작 부인은 약속을 지켰다. 간자다운 대접을 해 주겠다더니, 팔다리에 족쇄가 단단히 매여 있었다.

“…….”

“헉.”

사위가 캄캄해 어둠에 적응한 눈으로도 철창 밖을 살피기 어려운 와중, 소리 없는 기척이 나 고개를 들자 퍼런 것이 보였다. 살심 어린 광인의 눈. 철창이 저것과 제 사이를 가르고 있다는 것이 안심될 지경이었다. 바타렐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러나 벽에 등을 붙였다.

본능적으로 위압감에 짓눌려 질겁하긴 했지만 저자가 아무래도 미슐레 호엔베르크인 듯했다. 저런 소름 끼치는 눈깔이 아무리 공작저라고 해도 둘씩이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타당한 판단이었다.

“바타렐 코르도니예르.”

“……네, 기사님.”

“신체적 이상 징후를 느낀다면 속히 보고하라.”

그는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는 주둥이를 앞에 두고 울컥 화가 치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당장 눈 뜨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일을 당했는데 몸이 성할 것 같은가?

공작 부인과의 행위들이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손찌검 나부랭이에 울면서 교태 어린 신음을 질러 댔던 자신의 추태가 아직도 생생해 귓바퀴가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진저리를 치느라 창살 밖의 사내가 가히 광기라고밖엔 할 수 없는 얼굴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역시 이럴 땐 입을 다물어야겠지. 금방 풀려날 것도 괜히 긁어 일을 키울 필요는 없으니까.

“달리 없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사내는 뒤돌아선 듯 어렴풋하게 등이겠거니 싶은 윤곽만을 드러낸 채 있었다.

바타렐은 조심스럽게 묵직한 사슬을 건드려 본 뒤 비명을 지르는 몸뚱이를 간신히 움직여 무릎을 세워 품에 모아 안고 턱을 괬다.

공작 부인이 자신을 오래 살려 둘 리는 도통 없었다. 어차피 죽일 놈이라 미련 없이 함부로 유린하고 내버린 걸까? 여태껏 해 왔던 것들을 생각하노라면 다른 사람이 오거나 좀 더 구체적인 무언가가 집행되기 전에 간수를 꼬드겨 보는 것이 옳았겠지만 상대가 호엔베르크 경이어서야 의미가 없었다. 공작 부인의 충견은 위명이 자자하신 외골수가 아닌가. 괜스레 입을 열었다간 그대로 작살날 공산이 컸다. 그렇다고 배 한번 맞췄다고 그 냉혈한이 자신을 살려 줄 것 같지도 않고.

결국 제자리걸음이었다. 도망칠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 만들고 어찌 채운 것인지 수갑도 족갑도 전혀 균열이나 이음매 하나 없었다. 마치 거대한 철 덩어리를 통째로 깎아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그 속에 원래 자신의 팔다리가 있었던 것처럼 완전히 한 몸이 되어 있는 것을 직접 만져 확인하기까지 하면 생각을 꺾지 않기란 힘들다.

역시 남는 건 심문당할 적에 최대한 틈을 타 교섭을 시도하는 수밖에.

때마침 저 멀리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유령처럼 미동도 없던 호엔베르크의 발끝까지 희미한 주황 빛이 번졌다. 등불을 들고 저 멀리서 돌바닥 위로 옷자락을 질질 끌며 걸어오는 누군가를 확인한 사내가 반사적으로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오셨습니까.”

“표정 한번 괴악하군, 누군 좋아서 맞닥뜨린 줄 아는 모양이지.”

차라리 어둠 속에서 사내와 단둘이 있는 편이 나았을 뻔했다. 삽시간에 얼어붙은 공기와, 그런 꼴을 보아 버린 우상을 동시에 목전에 두는 것보다는 무얼 해도 나았으리라.

일렁이는 불꽃의 어둠이 그 눈 속에서 호흡한다. 바타렐은 따끔, 하고 가슴 한 켠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늘 꿈에 그렸던 그의 우상은 아주 경멸스러운 것을 깔아 보는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저것인가.”

“예.”

그의 녹색 눈이 가볍게 바타렐의 몰골을 일별한다. 가슴이 꾹 죄어 온다. 굴이 있다면 처박혀도 좋으니 숨고 싶은 기분은 이미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꼴하곤…….”

요한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빈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덜그럭거리며 끔찍스러운 쇳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녹아내리고 문이 홱 열렸다. 그의 마법에서는 한여름 물오른 장미처럼 독할 정도로 쌉싸름한 향이 났다. 등불의 주황빛 색을 머금은 그의 묵직한 법의에 순간 눈을 두었다가 고개를 들자 이미 그는 코앞에 와 있었다.

흠칫 몸을 떨자 그는 정말이지, 동화책 속에서나 접해 왔던, 혹은 마법사들의 저서 따위에 자랑하듯 나열되어 있던 사담 속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냉막함과 그저 순수한 경멸로 손을 뻗어 바타렐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윽……!”

머리카락이 형편없이 손아귀에 엉겨들어 아팠다. 아예 그는 이 머리통을 가만둘 생각일랑 조금도 없는 것처럼 힘주어 움킨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풀이를 하실 셈이십니까.”

고저 없는 호엔베르크의 목소리가 잡음이 낀 것처럼 갈라진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시야가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본능적인 무력감과 공포가 물씬 차올라 핏기가 가시는 것을 자신도 알 수 있었다.

“네놈도 다른 잡스러운 것들 앞에 그 꼴을 보여 보지 그래. 그러잖아도 언짢아 돌겠으니 그 입 닥쳐.”

아, 알고 계셨구나.

바타렐은 한없이 우그러드는 속을 잡아 뜯으며 귀를 찢을 듯 날카롭게 아우성치는 이명 속에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근육에서 돋치기 시작한 가시가 온몸의 모공을 찢어발기는 듯한 겪어 본 적 없는 괴이하고 공포스러운 고통이 엄습했던 까닭이다. 그 잔악하고 고귀한 마귀께서 범속한 응징이나 할 리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으며 몸부림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온몸의 신경이 파고든 타인의 마력으로 헤집혀 타들어 가듯 고통스럽다. 그는 의식조차 잃지 못하게 하는 요한의 무자비한 고문 속에서 드문드문 안전장치, 사용, 리비아, 따위의 단어들을 주워들었으나 머리에 남길 수는 없었다. 그저 아프고, 그가 무언가를 찾기 위해 헤집는다는 것을 깨닫고, 무언가 머리를 거치지 않고 단말마를 찢어발기듯 외치고…….

조금쯤 절망하고, 아주 많이 로덴바흐 백작을 원망했다.

* * *

밤낮없이 시달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제대로 정신을 놓지도 못한 채 고통과 느껴 본 적 없는 기이한 감각에 사지를 뒤틀며 몸부림치던 바타렐이 겨우 놓여났다. 얼굴이 온통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 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울퉁불퉁한 돌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하다못해 이게 그 끔찍스러운 처치보다는 낫다는 안도감에 사지를 늘어뜨렸다.

“끝났습니까?”

“그래, 부인을 모셔 오지.”

사람이 목청을 찢으며 몸부림치는 꼴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 않고 평이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소름이 끼칠 법도 했지만 그런 상식적인 사고가 가능한 사람은 이 중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일말의 자비도 교섭도 없는 일방적인 유린은 처음이었다. 그는 산발을 한 채 끅끅 소리 죽여 울었다. 도망치고 싶다, 아니, 아예 사라지고 싶다.

“이런.”

잠깐 정신을 놓았을까. 아릿한 통증과 함께 몸뚱이가 타의에 의해 들어 올려졌다. 목을 빼 들고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릿한 눈으로 허공을 배회하며 바짝 긴장했던 바타렐은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자마자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울지 말아요, 생각보다 양호한걸.”

“공작, 부, 부인…….”

원래 목소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잔뜩 쉬어 버린 목을 억지로 긁어 부르자 여전히 온기 없이 서늘한 눈이 설핏 휘었다.

“어때요, 아직도 간자 취급이 나은가요?”

아, 정말이지 끔찍스러운 여자다. 바타렐은 입을 헤벌렸다가 파르라니 떨었다. 차라리 간지 취급을 하라던 악쓰는 소리를 아직 잊어 주지 않고 들먹이는 성품을 보라. 이 여자는 더할 나위 없이 최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석상 같은 기사보다도, 무자비하고 끔찍스러운 고통을 휘두르는 저 마법사보다도 강력한 자. 유일한 구명줄.

남자는 바닥을 긁어 대느라 피가 터지고 손톱이 너덜너덜해진 손으로 그녀의 치맛자락을 틀어쥐었다.

“아프, 지, 아, 않게, 해 달, 라고, 해, 했는데.”

“내가 그리하겠다고 했던가요?”

몰인정한 소리가 주저 없이 그의 희망을 후벼 팠다. 리비아는 그의 머리채를 놓아주고 축 늘어져 발발 떨리는 몸뚱이를 품에 받쳐 안았다. 바타렐은 거의 그녀를 제 손아귀에 꿰 놓을 것처럼 억척스레 들러붙어 억억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사이사이 살려 줘, 아파, 싫어, 무서워, 엉망진창으로 시달려 공포와 고통으로 눅진하게 뒤엉킨 머리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말들을 절박하게 늘어놓는 것을 감미롭게 흘려들으며 그의 등을 쓸어 주었다. 차갑게 굳은 그의 등 위에서만큼은 리비아의 손길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울지 말아요, 당신을 꺼내 주기 위해 온 거니까.”

“아프게, 하, 할 거야?”

“아뇨, 당신이 날 위해 일하겠다고 약조하면 다시는.”

“할게.”

비이성적일 정도로 명료하고 즉각적인 대꾸였다. 리비아는 그를 내려다보며 짙게 미소 지었다.

여자의 말은 간단했다. 제가 주는 것을 가지고 로덴바흐 백작을 찾아가 이중 간자라는 사실을 끝끝내 들키지 않고 살아서 나오기만 하면 그 이후로부터는 당신은 내가 비호하리라고.

바타렐은 넋이 나간 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를 감싼 로브를 움켜쥐고 다리를 질질 끌며 움직였다. 살고 싶었다. 이왕이면 로덴바흐 백작을 제가 거꾸러졌던 그 끔찍스러운 자리에 처박고 밟아 오르고 싶었다. 그 또렷한 욕망이 엉망이 된 몸뚱이를 움직일 수 있게 했다.

“이게 전부인가?”

“…….”

로덴바흐 백작은 못마땅한 얼굴로 넋 나간 부랑자 같은 낯짝으로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계집과 나란히 두어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예쁘장한 외양과 대거리로는 어디를 가도 지지 않을 것만 같던 뻔뻔스러운 배포가 마음에 들었던 몇 되지 않는 구석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장점을 찾아볼 수조차 없게 망가진 이가 대답조차 않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속이 뒤틀리면서도 한구석에 희미한 만족감이 있었다. 자신이 심은 간자를 이렇게나 빨리 알아차리고 처치에 자비를 두지 않은, 자신의 가르침이 단단히 몸에 밴 딸이 만족스러움과 동시에 사내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아쉬웠고, 사내로 태어나지 못하였어도 계집으로서 제일가는 길을 안배해 준 부정을 몰라보고 아비를 내친 철없는 딸이 같잖고 화가 났다. 적어도 이제는 빌러 오겠지, 하고 기다렸더니 별 기대도 하지 않았던 간자 놈이 딸의 멱을 따 버릴 비수를 물어 오는 것이 한발 빨랐다니. 이 자료의 신빙성은 차지하더라도 그것이 못내 언짢기도 했다. 감히 한낱 잡졸이 제 딸을 제친 것이 어찌 흡족할까.

그러나 리비아 모브레이는 끝끝내 빌지 않을 것이다. 오연하게 고개를 빼 들고 제 목을 치러 올 날에 맞설지언정 그 높은 머리를 바닥에 박을 재간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여자다. 자신이 심었고, 자신이 길렀고, 그렇게 다듬었다.

상념이 길었다. 백작은 신경을 다시 서류에 돌렸다. 어떤 인간을 수소문해 관찰해 온 듯한 얄팍한 일지. 첫 시작은 오 년 전쯤. 불온한 이탈자가 있기에 그 뒤를 밟게끔 시킨 것이 시작이었다. 여자와 노파 하나, 그리고 곧 아이 하나가 늘었다. 남자아이였다.

직감적으로 그 뒤로 이어질 내용을 알 수 있었다. 뒤로 넘기며 꼼꼼히 눈알을 굴려도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조르주 모브레이의 사생아임을 증명하는 정황들이 빼곡했다.

이것이 참일지 아닐지 분간하는 것은 무의미할 지경이었다. 설령 거짓이라고 한들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면 뛰어들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승산이 없으므로.

무엇보다 제법 잔뼈가 굵어 귀족들을 상대로 오히려 거래를 하고 다니는 저놈이 이렇듯 만신창이가 되어 왔다는 것은, 적어도 이것을 보았거나 손에 넣은 시점에서 리비아와의 거래는 불가능했으리라는 점을 암시했다. 반드시 없애야 할 대상으로 낙인찍혔으리라. 그러니 토사구팽을 당할지언정 제게 투신하는 편이 훨씬 이롭다 판단했겠지. 하기사, 구르디예프 경의 성질머리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가여운 리비아, 어리석은 나의 딸.

사생아라고 해도 이 소년이 정말 실존하는 인간이라면, 이 정황이 실로 사실이라면 그녀는 이제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만도 못한 꼴이었다. 진정한 모브레이의 혈손인 조르주의 직계 자손이다. 모브레이에 돌아 제정신이 아닌 그 마법사가 알게 된다면 당장 이 소년을 비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테지.

허면 친정의 신임도, 마법사의 뒷배도 잃은 미망인 하나쯤 내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른 귀부인들이 멍청하여 황제의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늘어져 겨우 비참하게 명줄을 붙였겠는가. 다른 수가 없었던 게지. 그 영락한 꼴들을 쭉 지켜보면서도 저는 다르리라 생각하였을까.

백작은 일지 끄트머리의 희미하게 손때가 묻은 부분을 어루만졌다. 가엾고 어리석은 것, 이 종잇장을 매만지며 무슨 생각을 하였더냐? 적자를 품지 못한 네 태를 쥐어뜯고 싶었느냐? 아니면 곧 죽을 주제에 바깥에 씨를 뿌리고 다니는 어리석은 부군 곁에 밀어 넣은 아비를 탓하였느냐?

어느 쪽이라고 해도, 곧 무의미해질 일들이었다. 백작은 넋이 나간 바타렐을 붙들고 선 수족에게 눈짓하여 그를 끌어냈다. 저것의 처분은 후에 해도 좋다.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이 소년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므로.

* * *

남루한 골목을 지나며 로브를 단단히 여민 일행의 목소리에 볼멘소리가 섞였다. 애당초 수하라고는 하나 대귀족의 아랫사람, 저들 역시 작위 있는 집안에서 자란 귀한 몸이시다. 이런 상황,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기실 직접 현장까지 나올 일조차 없는 베테랑들이 아닌가. 이만한 경력에 이런 뒷골목 어드메에 처박힌 빈민들의 땅을 쑤시고 다니고 싶어 출세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다만 예닐곱 명의 일행을 선두에서 지휘하며 앞장서 걷고 있던 백발의 노인이 꼿꼿하고 성마른 눈으로 뒤를 노려보자 석연찮던 태도들이 금세 반듯해졌다. 아무리 그들이라고 해도 로덴바흐 백작가의 총집사까지 직접 행차한 일에 더 이상 토를 달 급은 되지 못했으므로.

정확한 지시 사항을 아는 것은 집사 한 명뿐이었다. 그는 충분히 뒤엣것들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주인과 가문의 명운이 달린 이런 중한 일에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덜걱대는 것들을 향해 짜증 한 번 내지 않을 만큼 느긋한 성미는 되지 못했다. 그는 점점 더 인적이 드물고 좁아지는 길을 지나며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가, 이윽고 진정 이곳의 안뜰이라 할 수 있을 법한, 창 하나 열린 곳 없는 갑갑한 곳에 발을 디디고서야 품속에서 위치가 적힌 쪽지를 확인했다. 이곳에서마저 가장 안쪽, 왼쪽 모퉁이 두 번째 집의 반지하. 칼집에서 날이 빠져나오며 소름 끼치는 쇳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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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사향을 머금은 휘장이 겹겹이 늘어져 빛 한 점 들지 않는 넓은 침실에, 홀로 호흡하는 남자가 있었다. 눈꺼풀이 고장 난 인형처럼 흐트러짐 하나 없이 요요히 빛나는 자색 눈동자는 권태로 인한 탁기가 드리워져 묘한 이질감을 자아냈다. 그는 저 멀리서 다급하게 웅성거리는 소리와 걸음이 느껴지자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헐벗은 몸뚱이 위로 차게 미끈거리는 은색 머리칼이 늘어진다.

― 폐하, 기침하셨사옵니까.

“…….”

그는 대답하지 않고 잠깐 곁에 누운 귀부인의 살갗을 매만지며 눈을 기울이다 멈추고, 한번 깜빡이고는, 조용히 열리는 문틈을 주시했다. 굳은 낯을 한 초로의 사내가 소리 없이 침실로 파고들어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변고가 있음에 찾아뵈었나이다, 주인의 침수 방해한 대죄를 꾸짖어 주소서.”

“됐다.”

황제의 목소리는 그의 평판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우아하고 감미로웠다. 다만 그 성정까지 반전을 기대할 수는 없음을 사내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제 의무에 충실하여 국정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게끔 처신하고자 할 뿐, 시간을 헛되이 할애하게 한다면 제가 뱉은 말을 진실로 이루어 줄 분이셨다.

“염치 불고하고 아뢰나이다. 알프트리움 4구획에 피습이 있었습니다.”

“……음?”

“인원은 많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전력의 손실이 있기는 하였으나 당시 수송 담당 인원이 도착하여 현장을 제압, 습격자를 포획하였습니다.”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던 황제가 천천히 세워진 베개에 몸을 모로 기대고 늘어졌다. 4구획에 인위적인 습격이 발생할 리가 없다. 가능성이 한없이 낮다. 애당초 그런 빈민가 구석을 손댈 만한 인간이라고는 비단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소란을 피우지 않고 정확히 그 구역에 찾아갔다면 어느 정도 정보를 습득한 것임에 틀림없으나, 헛다리를 짚은 자일까. 아니면 역심? 어느 쪽으로 보다 미욱하기 짝이 없는 데다가 합리적이지 못했다. 그는 명정해진 머리로 상황을 가늠하며 말했다.

“신원 확인은?”

“예. 로덴바흐 변경백의 집사입니다.”

“로덴바흐?”

“예, 그렇습니다.”

매가리 없이 되물은 그는 다소 어리둥절해져 눈을 깜빡였다. 로덴바흐가 왜 나오지? 굳이? 가능성을 점쳐 꼽은 대상들과도 아무 연관은커녕 대척에 선 놈이 아닌가?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할 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하물며 귀족파라고는 해도 굳이 파벌을 따지자면 친황실 성향인 변경백이 자신의 작업장을 굳이? 어떤 목적으로든 그것을 이용하려고 들었다면 좀 더 고상한 방법을 택할 위인이었다. 제국 내 즉결압송권을 가진 변경백이 직접 자신의 수족을 보내다니, 노골적인 시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 행위다. 그럴 깜냥이 있을 만한 위인은 아니라 판단하였는데……. 그의 감상이 크게 어그러진 것이 아니라면 백작의 본의라고 보는 것보다 차라리 오류라고 보는 것이…….

“아.”

황제는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그래, 그런 것도 같다. 하고 중얼거린 그는 고개를 권태롭게 늘어뜨린 채 짧게 웃었다.

“백작의 딸이 포웰이었나?”

“예, 그렇습니다. 폐하.”

“집사라는 자는 살려서 뜰에 두어라, 흐음. 포웰에게는…….”

입가가 희미하게 호선을 그리고, 불온한 금수의 희락이 번들대는 혀로 속삭인다.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먹이를 뜯지 않으면 그 또한 예의가 아니리라.

“짐이 아비의 잘못을 대신 갚아 줄 용의가 있을는지 하문하였노라 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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