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0)

그늘진 병

날이 밝았다. 리비아는 치장 탓에 분주한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나 여전히 천개가 드리워진 침대 안에는 또렷한 인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보지 못할 리가 없을 만큼.

그러나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도, 의아해하지도 않았다. 그런 섣부른 인간은 별저까지 올 수도 없거니와, 그녀들은 애당초 리비아라는 인간을 모시는 데에 가장 최적화된 인재들이었다. 천개를 걷어 두었대도 눈 하나 깜짝 않았으리라. 오히려 시녀들은 웬일로 리비아가 속의 인간을 가려 주는지에나 의아함을 품었다.

“진주가 좋겠어요, 베일은…… 조금 가벼운 거로 하죠.”

이따금 사슬이 흔들리며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으나 리비아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양 태연하게 자신의 치장을 지휘했다. 여전히 검은 옷과 베일이 주인 상복이었으나 이전까지 입던 단출한 실내용 드레스와 달리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외출복이었다.

“부인, 귀빈은 어찌 모실까요?”

“깨어나거든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소란하실 것이니 그때부터 모시도록 해요. 내가 없는 걸 알면 조금 토라지실 테지만 여러분이 달래실 것은 없어요. 늘 그랬듯 정물이려니 하도록 하고……, 깨끗이 다듬어만 두도록.”

“네, 부인. 전부 깨끗이 할까요?”

“음……, 그리해 둬요.”

“알겠습니다.”

그녀들은 사뿐하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손을 쉬는 법이 없었다. 리비아는 눈을 감고 제 눈꺼풀 위를 간지럽히는 붓과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꼬아지는 감각을 즐기며 얕게 미소 지었다.

어느덧 치장이 마무리되자 리비아는 늘 그랬듯 모범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녀들은 으레 할 법한 입방정을 떠는 대신 조용히 정리한 뒤 밀물처럼 물러 나갔다. 리비아는 마지막 시녀가 빠져나가고 문이 닫히자 그 자리를 가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일어나도 돼요.”

“……아무도…….”

“없어요, 당신과 나뿐이랍니다.”

리비아는 사뿐하게 몸을 돌려 침대로 다가가 천개를 확 걷었다. 간밤 내내 수치와 쾌락에 몸서리치며 울어 댔던 남자가 제 머리칼만큼이나 불긋하게 달아오른 눈매를 치뜨며 그녀를 맹렬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바라보지 말아요, 요한. 예뻐해 주고 싶어지잖아요.”

“……미쳤지 아주…….”

그녀는 그저 빙그레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요한은 여전히 사지가 묶인 채 있었으나 기세가 죽질 않았다. 몸을 섞을 때도 한껏 아락바락거리고서야 기가 죽었으니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도로 뻣뻣해지니 우습다 못해 귀엽게 느껴졌다.

“어제야 정신이 없어 넘어갔지만, 정말 내게 이러고도 괜찮을 거라 생각합니까?”

“목이 형편없이 갈라졌네요, 물이라도 드릴까요?”

“됐습니다, 부인의 손은 이제 진저리가 나니까.”

“다행이네요, 한동안 나랑 더 놀아날 수 있을 것 같으니.”

“뭐…….”

“당신 같은 수컷의 묘미란 그 글러 먹은 정신머리를 두들겨 부수는 거니까요.”

“이런 상황에 사람 취급을……!”

요한은 울컥 화가 치솟아 잠긴 목소리로 역정을 냈다. 쇳소리가 섞인 거친 목소리에 살풋 인상을 찡그렸던 리비아는 짧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당연하단 듯이 처음부터 사람을 깔봤던 당신의 죄는 어디로 갔나요, 요한? 정말 당신이 무고한 사람이라면 나 역시 이런 방식으론 꺾지 않았을 거예요. 상식적이고 책잡힐 일 없는 방식이라면 얼마든지 많죠.”

“당신이라고 대단히 다릅니까? 변변찮은 능력도 없는 주제에 그 알량한 작위 하나로 콧대나 세우는 계집이!”

“그럼요, 대단히 다르죠. 변변찮은 재주도 없는 여자에게 붙들려 겁간당하며 앙앙거리신 분께 들으니 감회가 새롭긴 하지만.”

간밤의 일을 노골적으로 조롱하자 얼굴이 확 달아오른 요한이 이를 악물었다. 리비아는 그의 낯짝을 바라보면서 서늘하게 웃음을 거두었다.

“내가 싫어하는 건 당신의 그 얄팍한 인상으로 사람을 재단하는 버르장머리예요. 요한. 당신의 삶에 어떤 인간들만 넘쳐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 같은 것들은 여자와 엮여 본 적도 없는 주제에 남자가 보인 한심한 꼴을 여자들에게까지 전이시켜 깔아 보지 않던가요? 당신이 한 짓도 매한가지죠. 귀부인을 삶에 몇 번이나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손에 꼽을 만할 거라는 건 잘 알아요. 당신이 그들을 몇 년이나 얼마나 깊이 보아 왔는지는 모르니 발언을 삼가겠어요. 그러나 요한, 당신이 가진 한심한 귀족 계집이라는 그 편견이 어디서 어떻게 빚어졌는지 정도는 돌이켜 보는 것이 앞으로의 처신을 위한 현명한 판단이리라고 생각해요.”

“…….”

“어제도 말했듯 적어도 그대로 묶인 채 온 사방 천지에 그 꼴을 보이던가, 뭐…… 실질적으로 신체와 정신에 좀 더 저속하고 잔인한 난장을 부릴 만한 것들에게 흘러 나가던가, 마음대로 해요. 정히 맘에 차지 않는다면 혀라도 깨물어 보는 건 어떤가요?”

요한의 눈은 여전히 매서웠다. 그는 이를 으득 갈며 뇌까렸다.

“리비아 모브레이…….”

“연관 없는 사람이 건방지게 입을 놀릴 여지는 있더라도 그 당사자가 어찌할 수 없는 개인의 수렁이라는 게 있다는 걸 당신도 나름대로 깨우쳐 볼 수도 있겠죠. 수컷 따위에게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만…….”

“그동안.”

남자는 핏발 선 눈을 치뜨며 끝끝내 악을 썼다.

“내가 어떻게 모브레이의 적들을 거꾸러뜨렸는지 모릅니까?”

사뭇 흉흉한 기세였다. 마력을 전부 차단하고도, 사지를 묶여 거동을 옭아매이고도 그에게는 상당한 위압감이 있었다. 살인자의 위압감. 리비아는 짧게 그를 동정했다. 그가 만나 온 사람들은 이깟 것에도 꼬리를 말아 주는 무른 인간들밖에 없었던 게 틀림없다. 유감스럽게도 자신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을뿐더러, 아마 많은 여자에게도 그럴 테다.

“허면 나도 거꾸러뜨려 보세요. 물론 그때가 되면 모브레이는 끝이겠지만.”

그녀는 천개를 걷었을 때만큼이나 사뿐하게 등을 돌려 문가로 걸어갔다.

“당신이 자신하며 길렀으니 당신 손으로 죽여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조금 늦게 돌아올 거예요. 그동안 시녀들이 당신을 보살필 텐데 괜히 난동 부리지 말아요. 험하게 다뤄지기 싫으면.”

문이 닫혔다. 요한은 핏대 선 목으로 쇳소리를 울리며 그녀가 서 있었던 곳을 노려보았다. 분명 아는 것을 까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처럼 불쾌한 간지러움이 뇌리에 남아 신경을 갉작거린다. 동시에,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든 꽃을 화병에 꽂아 두고 외출하는 사람의 태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 못내 분했다. 남자는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지난밤을 곱씹었다.

* * *

공작 사후 처음으로 포웰 공작 부인이 나서는 자리가 그저 사적인 용도일 리 없다. 그녀는 미슐레의 에스코트를 받아 오랜만에 빛을 보는 가문의 마차에 올라 등허리를 세웠다. 편히 풀어져도 될 법한 곳에서마저 몸에 밴 단정함을 보이는 그녀를 새삼스레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남자는 그녀와의 일이 떠올라 얼굴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가 가는 곳은 러스킨 백작 부인의 예술 살롱이었다. 예술에 관한 취향이 놀랍도록 닮은꼴인 데다가 독특한 이용 가치가 있다. 불쾌할 법도 한 사유겠지만 뼛속 깊이 필요에 의해 사람들을 대해 온 그녀도 공작 부인도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므로 아무려면 좋을 것이다.

기실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아직까지도 그녀의 행적이 당혹스러웠다. 그가 보고 배우고 들어왔던 많은 귀부인의 행적과는 기묘한 이질감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공언했듯, 남자에게 있어 제일가는 영광과 보람은 그녀에게 충실히 쓰이는 것이었으므로 침묵했다. 요한 구르디예프를 거꾸러뜨리는 데에 일조한 것 역시 그녀의 호위로서 지당한 일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죄책감은 들지 않았으나 희미한 불편감이 있었다.

과연 자신은 호위 기사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남자를 제압한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던 무수히 많은 애인과 같이 연적을 향한 질투심을 앞세워 위력을 행사한 것일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한다면 어렵잖게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는 굳이 의문을 헤집지 않았다. 허락받지 못한 생각을 벌인 뒤 들키지 않을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했으니까. 설령 언젠가 버려진다고 해도 그것이 제 손으로 만든 불씨여서는 안 됐다. 적어도 철저히 쓰임을 다했다고 스스로 자부할 수는 있어야 구차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미셸.”

“……아, 예.”

“후회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리비아는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입매를 휘었다.

“너무 확신하지는 말아요. 막상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어떤 건지 체감하게 되려면 다소간 시간이라는 게 필요한 법이니까.”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가 제 입술을 깨물었다. 이성적으로는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제 불안감을 뒤흔드는 한마디에 동요해 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그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언젠가의 당신은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죠.”

그는 묵묵히 곁눈으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리비아는 그저 관망하듯 무던한 낯짝이었지만 눈에 또렷한 웃음기가 스며 있었다. 마치 그의 파멸을 기다리는 것처럼.

미슐레는 자신의 이 정체 모를 초조와 불안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에 관해 눈을 돌렸듯 그녀에게 해야 할 말도 어렵잖게 삼켰다. 되도록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녀가 자신을 기억 너머로 묻었을 즈음에서나 해야 할 일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그저 놀잇감으로 보냈던 수컷들과 같은 취급을 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상스러울지언정 추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을 그는 경험적으로 알았다.

“…….”

그는 욕심을 죽이고 말을 삼키는 것만큼은 날붙이를 다루는 것만큼이나 자신이 있는 남자였으므로 마차 안은 고요하게 침묵 속에 잠겼다. 리비아는 마치 혼이라도 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의 그늘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곧 죽을 사람을 거둬 가기라도 할 것처럼 생겨선 필시 상처받았으리라. 그 점이 귀여웠다. 가학적인 관심이 피어오르게 만드는 저 애쓰는 얼굴.

짧게 마차가 덜컹거렸다. 리비아는 차분하게 창틀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려 그의 시선을 끌었다.

“그게 적어도 지금은 아닐 테니 그리 기죽은 티 내지 말아요.”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그녀는 그의 구구절절한 변명을 듣기보다 가까이 불러오는 것을 골랐다. 단 한 번 손가락을 까딱거린 것만으로도 재깍 그녀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다가온 미슐레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날 가르쳤듯 다리 사이를 벌리고. 저 건조하고 절박하게 마른 기색만 없었더라도 교태를 떠는 애첩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눈 감아 봐요.”

“예.”

그는 의아히 여기면서도 순순히 눈을 감았다. 상념과 불안에 휩싸인 채로도 재깍 순종하길 거리끼지 않는 기특한 개에게 리비아는 입술로 치하했다.

“그.”

“눈 뜨라고 하지 않았어요, 미셸.”

“……예.”

남자는 뻣뻣하게 온몸을 굳힌 채 벌게진 얼굴로 뜨지도 못했던 눈에 화풀이하듯 온 힘을 주어 질끈 감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방금 자신의 뺨에 스친 그것이 무엇인지 불경한 상상을 하느라 근심이란 죄 밀려난 줄도 모르고 그저 여자의 손에 얼굴 곳곳을 희롱당하면서.

* * *

러스킨 백작저는 화사한 봄꽃이 만개한 숲속의 정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계절감을 잊은 꽃과 풀들을 관리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금액을 쏟아붓는 저택은 온통 부드러운 상앗빛이 도는 흰 돌을 닦고 깎아 세웠으며, 온갖 아름다운 외모와 목소리와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24시간을 내내 밝게 빛내곤 했다.

“부인, 손을…….”

그러나 그 모든 소란이 뚝 그친 지금, 포웰 공작가의 검은 마차가 멈춰 서고 사신 같은 남자가 정중하게 마차 안의 주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벨벳처럼 부드럽고 우아한 목소리로 대꾸한 여자의 검은 장갑으로 가린 손이 남자의 손 위로 얹히고, 온통 새까만 천으로 몸을 두른 귀부인이 바깥으로 발을 디뎠다. 남녀를 가릴 것 없이 좌중 모두가 술렁거렸다.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던 화가들은 캔버스를 망친 줄도 모르고 붓을 늘어뜨린 채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리비아 모브레이가 행차한 까닭이었다.

“오셨나요, 포웰 공작 부인.”

“오랜만에 뵈는군요, 러스킨 백작 부인.”

“안색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근심이 한결 걷힌 듯하셔서 안심하였어요. 자, 어서 안으로 드시죠.”

밝은 갈색 머리를 깔끔하게 틀어 올린 사십 줄 남짓한 여인만이 태연하게 그녀를 맞아들였다. 고요한 작태가 꼭 닮은 그녀들은 여상스러운 인사를 나누며 걸음을 옮겼다.

마치 죽음의 화신인 양 온통 새까만 리비아가 백작저에 발을 디디자 마치 때를 놓친 꽃들을 걷으러 온 것마냥 느껴졌다. 모르긴 몰라도 뭇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순간이었으리라. 그러나 두 여자는 아무런 신경조차 쓰지 않고 저택 안으로 향했다.

“오랜만의 외출 아니신가요, 오시느라 번잡하지는 않으셨나요?”

“설마요, 나의 벗을 만나러 오는 길이 어찌 번잡하게 느껴지겠어요? 아, 참. 새 꽃을 심으셨다지요? 편지에 동봉해 주셨던 그 꽃을 보고 싶어요.”

“그러실 줄 알고 일찍이 화병에 꽂아 두었답니다. 차라도 한잔하시며 지긋하게 즐겨 주세요.”

“제가 제법 오래간 칩거하긴 했나 보군요, 부인께서 이렇게나 저를 애지중지하시다니요, 당신과 함께라면 그저 정원을 거닐어도 좋았을 거예요.”

리비아는 짧게 웃음소리를 흘리며 부채로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아무리 집안 단속을 잘한다고 해도 외부인이 숨 쉬듯 드나드는 만큼 사방에서 따가운 시선들이 쏟아졌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롯이 미슐레만이 그 시선들을 경계하며 잔뜩 날을 세우고 있을 뿐.

이윽고 응접실에 다다르자 리비아는 부채를 탁 접으며 미슐레에게 웃어 보였다.

“미셸, 문 앞을 지켜 줘요.”

“……예.”

그는 자신을 떼어 두고 러스킨 백작 부인과 단둘이 안으로 들어서는 리비아의 뒷모습을 진득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열린 문 안으로 언뜻 보였던 안은 위험하게 여겨지는 것도 마땅치 않았고, 기척으로도 시녀 하나만이 시중을 들기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응접실은 백작 부인이 말했던 만큼 화사하고 아름다운 꽃이 꽂혀 있었다. 아마 전문가를 쓴 듯 작품성마저 느껴지는 화병이 테이블 정중앙을 차지하고 놓여 있었으나 리비아는 문이 닫힌 즉시 웃음기를 거두고 무료하게 가라앉은 낯으로 자리에 앉았다.

“갑작스러운 기별임에도 불구하고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에요.”

러스킨 백작 부인, 릴리아도 그녀의 맞은편을 꿰차고 앉으며 옷자락을 단정히 했다. 리비아는 그저 대꾸 없이 의자 등받이에 깊게 몸을 묻으며 시녀가 찻잔을 채우는 것을 가만 보고 있다가, 두 잔이 적당히 차오르자 그녀에게 손짓했다.

“나가 보렴.”

“…….”

시녀는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안을 나섰다. 잠시간 열린 문밖으로 미슐레의 재킷 끄트머리가 언뜻 보였으나 리비아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찻잔을 집어 들었다.

“어찌 벗의 청을 거절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내게 부탁을 하는 건 처음이기까지 한데.”

타인의 저택에서 주인과 동석한 채 시녀를 제멋대로 부리는 것은 충분히 결례였으나 상대가 공작 부인씩이나 되면 지당한 것으로 탈바꿈하기 마련이다. 러스킨 백작 부인은 조금쯤 초췌해진 낯으로 대꾸했다.

“후후, 여전히 빈말이 매끄러우십니다.”

그녀는 비죽 웃으며 남편이 죽기 전과 하나 변함없는 공작 부인의 아름다운 낯을 바라보았다. 똑 닮은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자신과 같은 절박함이 없다는 것이 신기하고도 부러웠지만 깊이 생각할수록 추해질 뿐이기에 가볍게 삼킨 뒤 용건을 꺼냈다.

“리플리의 동향이 심상찮아요.”

리비아는 어렵잖게 그 리플리가 어디일지 떠올렸다. 러스킨과 함께 현 사교 살롱의 꽃으로 여겨지는 후작 부인의 살롱. 좀 더 사적이고 은밀한 성향의 그곳은 정치적 인사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러스킨으로서는 그것이 못내 부러웠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렇군요.”

오랫동안 속셈을 알고도 모른 척해 왔던 리비아를 향해 구명을 청할 정도라면 당연 존속의 문제겠지. 그녀의 눈에는 깊은 믿음이 어려 있었다.

당신은 모브레이잖아.

굳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뻔한 그것. 눈을 내리뜬 리비아는 들고 있던 찻잔을 꽃 위로 조용하게 부었다. 마치 물을 주듯. 그것이 뜨거운 홍차가 아니었더라도 갑작스럽기 짝이 없었다. 향긋하고, 조금쯤 역겹게 뒤엉킨 향기가 피어올랐다.

“요컨대,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신 거죠?”

“……후작 부인의 속셈이 무언지 알고 싶어요.”

두 여자는 서로의 욕망을 헤아리듯 잠시간 침묵했다.

“치다꺼리를 부탁드리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것이 무언지만 알게 된다면 제가 처신하겠습니다. 부인께 만약 누를 끼치게 된다면 능력이 닿는 선에서 전부 막아 내겠어요.”

백작 부인은 굳은 얼굴로 그녀를 설득했다. 일개 백작 부인이 막아 주겠다 말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가. 그것도 지고의 포웰 공작 부인에게. 그러나 그것이 황제의 총희가 약속하는 것이라면 무게가 다른 법이었다. 러스킨 백작 부인이 리플리 후작 부인과 비견할 정도로 세를 떨치는 것 또한 모두 황제의 총희라는 이름 아래 가능한 일. 그래, 그 광기의 주인, 제국의 국부, 우리들의 찬란한 영광.

리비아는 어렵잖게 상황을 파악했다. 내치거나 죽어 사라지는 코르티잔이 그리도 빈번하신 폐하시다. 그 평과 피비린내 또한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를 유하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흥미로운 쓸모였다.

그러나 자연히 귀족파와 사이가 좋지 않은 황제에게 있어 ‘쓸모’ 있는 쪽이라면 리플리 후작 부인, 러스킨 백작 부인이 그간은 어떤 재간으로 그를 사로잡아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무용해졌으리라.

황제는 쓸모없는 이를 내치는 것을 거리끼지 않는다. 단순히 총희라는 이름을 잃고, 자리를 후작 부인에게 빼앗기는 것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가장 처참하게 죽임당하고 그녀의 이름은 땅 밑에 묻히겠지. 그러니 그 전에 경쟁자를 꺾어 죽이고 싶은 것이리라.

“그래요…….”

그녀는 천천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빈 잔의 밑바닥, 희미하게 다홍빛 흔적이 남아 있었다.

“좋아요, 내 어찌 곤경에 처한 나의 벗을 저버릴 수 있을까요.”

러스킨 백작 부인이 애써 안심을 삼킨다. 잔혹한 뤼드베리, 로덴바흐의 핏줄, 그녀는 대가를 잊지 않는 사람임을 안다. 무엇이든지 상응하는 값을 치러야 할 테지.

“내가 바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요. 일이 끝난 후, 내 덕이었음을 잊지 않는다면.”

그녀는 그저 고요하게 내리뜬 눈으로 더운물을 맞고 멍든 것마냥 시들어 버린 꽃을 바라보며 선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말하는 경위 속에 한 줄만 차지하면 되는 일이다. 너무 직접적인 것은 흥미를 끌지조차 못할 테니까.

“……기꺼이요, 부인.”

러스킨 백작 부인은 결연히 고개를 끄덕여 확답했다. 잊지 않겠노라고.

* * *

“미셸.”

“부인.”

삼십 분 남짓 지났을까, 응접실 문을 손수 열고 나온 것은 리비아 혼자였다. 그녀는 살짝 비뚤어진 자신의 베일 장식을 고치고는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자, 갈까요. 부인께서는 다음 손님을 맞으셔야 한다고 하니.”

“예, 따르겠습니다.”

그는 묵묵히 리비아의 뒤를 따라 걸었다. 곧은 등허리로 응접실이 늘어선 복도를 지나 홀로 나서니 다시금 무수한 시선이 꽂혀 들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공작 부인을 들먹이며 수런거리는 소리를 듣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오롯이 볕이 내리쬐는 봄의 정원에 홀로 선 죽음이었으므로 감히 그 곁에 파고들 생각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듯하였으나 그녀의 주위를 둘러싼 둥근 인파가 점점 불어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미슐레 호엔베르크의 입매가 단단히 굳었다. 그는 좌중을 고요하게 노려보았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왔다간 주저 없이 벨 듯한 예기였다.

“부인!”

그러나 그런 미슐레를 개의치 않고 저 멀찍이서 빼꼼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손을 들어 올리고 채신머리없이 반가움이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는 소녀가 있었다.

“리플리 후작 영애.”

“부인, 오늘 어찌 걸음 하셨어요?!”

그녀는 분홍빛 눈을 반짝반짝하게 빛내며 한달음에 사람들을 제치고 그녀에게 바짝 다가왔다. 미슐레 역시 그녀에게는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그저 묵묵하게 고개를 한번 숙여 보일 뿐이었다.

등허리까지 늘어뜨린 탐스럽게 굽이치는 갈색 머리칼, 생기 가득한 찰나의 꽃에서나 볼 법한 또렷한 분홍빛 눈을 도드라지도록 동그랗게 뜬 열대여섯 무렵의 소녀는 발그랗게 달아오른 뺨이 사랑스러웠다. 리비아는 늘 그랬듯 미소 짓는 낯을 부채로 가리고 그녀의 흐트러진 옆머리를 고쳐 주었다.

“백작 부인께서 저를 염려하시며 새로운 꽃을 심었노라 편지에 동봉해 보내 주신 것이 몹시 아름다웠거든요. 꽃은 한철이니 저를 기다려 주지 않을 듯하여 올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렇군요……, 부인께서 아름답다 말씀하시니 저도 꼭 그 꽃을 갖고 싶어지는걸요.”

그녀는 몹시도 순진했다. 다분히 정치적인 성향의 부모를 두었으면서도 그 위세에 감싸여 자란 덕에 제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드는 성미의 소유자인 이블린은 유독 리비아를 동경하는 영애였다. 언제나 있는 일, 너무도 지당한 것이어서 특별하지조차 않았으나 제 앞에 선 여인의 속내조차 모른 채 천진한 경애의 눈빛을 보내는 것은 조금쯤 가련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그 가련한 것들이 가장 먼저 꺾이는 곳이 사교계일진대.

리비아는 이따금 추임새를 넣으며 그녀의 조잘거리는 목소리를 흘려 넘겼다. 그리고 마침내 신경을 써도 좋을 만한 쓸모가 나타났다.

“제 일행이에요, 부인. 라시니!”

인파의 가장 앞줄에 서 있던 아름다운 남자가 우미하게 미소 지으며 사뿐하게 다가와 섰다. 찬란한 금발, 밝은 청록색 눈동자와 반듯한 자세가 눈에 확 들었다. 그는 요한에 견주어도 뒤떨어짐이 없겠다 싶을 만큼 수려한 외양으로 매끄럽게 입을 놀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포웰 공작 부인. 라시니 몬테필트로입니다.”

리비아는 미소 짓듯 눈을 내리깔아 그를 훑어보고는 불온한 입을 부채 뒤로 숨긴 채 시선을 맞추었다.

아주 날것의 냄새가 나는 남자였다. 그녀는 고개를 얕게 까딱였다.

“리플리 영애, 이자는?”

“그랑디에 남작의 조카여요. 문학에 조예가 있지요. 제 파트너랍니다. 행여나 부인께서 저어하실까 봐 미리 알려 드리고 싶었어요.”

면전에 대고 공작 부인에게 몸을 바치는 망종으로 빗대어지고도 태연한 남자는 그린 듯한 매끄러운 웃음을 고수하며 자리를 지켰지만 리비아는 그에게 특별히 눈길을 주거나 말을 걸지는 않았다. 리플리 영애가 소개하니 한번 꼴은 보았을 뿐이라는 듯이.

“그렇군요.”

“아, 참. 혹 괜찮으시다면, 부인께서 보셨던 꽃을 제게 알려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럼요, 함께 걸을까요.”

리비아가 선뜻 수락하자 그녀는 환하게 들뜬 채 안쪽 정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블린은 리비아와 나란히 걸으며 종알종알 꽃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열여섯 남짓한 나이의 소녀답게 얼마 전 참석한 다과회에서 봤던 품종인데 백작 부인의 저택에 핀 것이 훨씬 탐스러웠다느니, 자신이 다과회를 연다면 어떤 꽃을 어떻게 조합해서 장식해 둘 거라느니 하는 이야기가 태반이었다. 남들에겐 천상 새침만 떨던 소녀가 이토록 살갑게 구는 것이 신기할 법도 하건만 그녀들의 뒤를 따르는 남자 둘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오롯이 리비아만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요, 부인, 만약에 괜찮으시다면 제가 늦여름쯤 다과회를 열면 참석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니라면 부인께서 나중에 여실 적에 저를 초대해 주셔도 되어요.”

그녀는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두 손으로 가리며 방긋 웃었다. 이리 굴면 리비아가 어여삐 여기리라고 철석같이 믿는 것처럼.

“어느 쪽도 저는 괜찮지만, 아무래도 영애 또래의 아가씨들이 모이는 자리에 제가 나서게 되면 무게가 쏠리게 될 테니 후자가 낫겠군요.”

리비아는 부드럽게 에둘러 그녀에게 귀띔했다. 아무리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해도 사교 모임을 여는 한 그 자리의 주인공은 그녀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 평판이 어그러질지는 불 보듯 뻔했다. 스스로는 자신이 없어 샤프롱조차 아닌 고명한 귀부인을 집안의 인맥에 기대 모셨다는 둥, 가문이 아니라면 별 볼 일 없는 여자라는 둥, 그리고 그에 감정적으로 대응할수록 본데없는 계집이라 그렇다는 소리까지 딸려 나올 가능성이 농후했다. 리비아 모브레이는 적어도 곧 영문도 모른 채 풍파에 휘말릴 소녀에게 조언 한마디 없을 만큼 무정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교본이라 불리우는 포웰 공작 부인다운 자비이므로.

“부인과 함께 나서는 자리라면 굳이 다과회가 아니어도 좋아요!”

그녀는 냉큼 리비아의 말에 따르며 순수한 동경과 애정으로 분홍빛 눈을 빛내면서 환하게 웃었다. 꼭 제 눈 색과 같은 분홍빛 수국을 등지고.

리비아는 찰나에 의식적으로 온기가 도는 미진한 웃음을 내걸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어떤 자리에 데려갈 줄 알고 그리 말하는 건가요?”

이블린은 순간적으로 그녀의 짓궂은 물음에 움찔 몸을 떨었으나 긴장을 애써 떨치고 가슴을 당당히 폈다.

“그야 부인께서 계시는 자리인 만큼 가벼운 곳은 없겠지만, 어디든 괜찮다는 말은 진심이어요! 무, 물론 저도 부인의 체면에 누가 되지 않도록 무진 애쓸 테지만요……, 네?”

“후후, 농이었어요. 그렇게 울먹이지 말아요.”

리비아는 짧게 소리 내어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녀의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하늘하늘한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얕게 흩날리며 빛을 머금는다. 봄꽃처럼 다정한 아름다움, 리비아 모브레이에게는 없는 그것.

새삼스럽게 자신과 다른 계통의 미를 추구하고 싶은 충동이나 동경 따위는 들지 않는다. 지당한 일이었다. 그녀는 다른 누구도 아니라 리비아 모브레이니까. 그저 등 뒤에 와 닿는 저 서늘하고 미끌미끌한 시선이 깊어질수록 이블린 랭글런드의 순수함이 애석해졌을 뿐.

그러나 리비아는 굳이 나서지 않았다. 그저 시침을 뚝 떼고 조급하게 앞장서 걷는 그녀의 뒤를 천천히 따라 걸을 뿐이었다. 소녀가 저리도 신이 난 것을 보면 이미 러스킨 백작 부인과 단둘이 짜고서 열심히 자리를 꾸며 두었을 것이다. 그 자랑하는 정원에 사람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직 리비아를 위해서, 상심이 깊을 자신의 동경을 위해서 정적이나 다름없는 러스킨 백작 부인에게 부탁했겠지. 그것이 얼마나 뼈아픈 실책이 될 줄도 모르고.

그러나 레이디로서 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다.

인간을 과도하게 믿어서는 안 된다, 특히 그것이 귀족이라면. 그보다 더욱 믿어선 안 될 것은 한미한 집안의 사내였다. 말로만 들어서는 결코 체감하지 못하는 부분일 테지만 이블린은 자신의 무지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여전히 물비린내가 나는 시선을 뒤에 거느린 여자는 고요하게 웃을 뿐이었다.

* * *

리플리 후작 영애는 어떤 방면에서는 대단한 재주가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심란하기 짝이 없을 러스킨 백작 부인을 어르고 달래고 꾀어내 세 사람만의 만찬 자리를 당일 오후나절에 따낼 정도의 재주.

리비아는 러스킨 백작 부인이 드물게 별저로 손님들을 쫓아 보내는 시간 동안 백작저의 방을 빌려 가볍게 치장을 고쳤다. 베일 장식을 바꾸고, 장갑을 벗었다. 그녀의 시녀들은 갑작스러운 일정에 당혹하지 않고 미리 준비해 왔던 세 벌의 드레스 중 가장 가벼운 소재의 드레스로 갈아입는 것을 도우며 살짝 지워진 화장을 덧칠했다.

미슐레는 처음으로 그녀의 치장을 지켜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커다란 거울에 자신의 달아오른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바깥에 나가 있겠다는 입바른 말조차 하지 않고 못 박힌 듯 서선 목과 팔 부분이 반쯤 비치는 드레스로 갈아입은 리비아의 등에서 눈을 떼질 못했다. 정면에서야 가슴팍까지는 비침 없는 재질로 둘러쌌지만 등 뒤는 허리 중앙까지 완전히 파여 있어서 그녀의 날카롭게 도드라진 견갑골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미셸.”

“예, 부인.”

남자는 살짝 가라앉은 자신의 목소리를 부끄러워하면서도 재깍 대답했다. 볼썽사납게 그녀의 앞에서 헛기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다른 수가 없었다.

“당신은 먼저 돌아가도록 해요.”

“혹 별도로 명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되물었다. 평소라면 아쉬워할지도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스스로에게도 짚이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이 외로울 테니까요.”

리비아는 고개를 살짝 돌려 미슐레에게 미소 지어 보이곤 눈을 감은 채 화장을 고치는 시녀의 손길을 받았다.

현재로서 포웰 공작가는 무방비 상태다. 요한을 일선에 내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리비아는 아무리 필요에 의해서라지만 백작저에 붙들렸다. 홀로 오래 내버려 두기에는 요한 구르디예프는 지나치게 비상하고 뻣뻣한 사내다. 이 상황에 혹시나 멍청한 혈족이 막무가내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만에 하나를 대비해 수석 시녀를 두고 오기는 했지만 염려할 만한 상황이 기어이 벌어지고야 만다면 필연적으로 무력이 동원될 공산이 컸으므로 미셸을 돌려보내는 것이 가장 최적의 선택이었다.

“부인께서는…….”

그것을 이해함에도 불구하고 미슐레가 즉각 돌아 나가지 못한 것은 오롯이 리비아의 안위 때문이었다. 그녀는 본시 사람을 많이 거느리길 꺼렸으므로 호위는 늘 미슐레 호엔베르크뿐, 현재로서도 그렇다. 공작저에서야 요한 구르디예프의 방비가 있으니 그래도 되었지만 아무리 친분이 두텁다 해도 백작저는 신뢰성이 그에 미치지 못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리비아는 외려 태연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하등 없을 거예요.”

“……예, 따르겠습니다.”

미슐레는 더는 토를 달지 않고 깊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지체 없이 방을 떠났다. 아쉬운 마음을 토로하며 매달린다면 리비아는 분명 내치지 않겠지만 그래서는 다른 남자들과 다를 바 없으니까. 그녀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는 매력보다는 능력이 필요했다. 미슐레 호엔베르크에게 있어 쓸모의 증명은 목숨에 준하는 일이다.

물론, 리비아의 속은 그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요한이 얼마나 강박적인 완벽주의자인지 모르지 않을뿐더러, 수석 시녀인 쉐리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수완이 좋았다. 멍청하게 이 시점에 아락바락 기어오를 멍청이 한둘쯤 다루지 못할 위인이 아니다.

그러나 미슐레 호엔베르크가 공작저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또렷했다.

곁이 비어야만 꼬이는 먹이가 있으므로.

그녀는 얼굴 위를 어루만지던 붓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고혹적이고 아름다운, 더없이 아름다운 포식자가 그 속에 있다.

* * *

백작저의 만찬은 그야말로 화사했다. 정원이 봄빛인 것과는 별개로 제철을 맞은 농어 요리가 올라오고, 부인이 아끼는 와인이 아낌없이 잔을 채웠다. 만찬 석상에는 리비아와 러스킨 백작 부인, 리플리 후작 영애, 그리고 영애의 파트너인 라시니 몬테필트로 넷만이 자리했다.

“모쪼록 충분히 즐겨 주시길.”

호스트인 백작 부인이 나긋나긋하게 말하며 잔을 들어 올렸다. 셋이 따라 잔을 들어 올리며 미소로 화답하고, 입을 축이고, 가벼운 칭찬들이 뒤를 잇는다. 무엇 하나 이상할 것 없는 이상적인 만찬이었다. 단 하나, 천한 것을 빼면.

“여전히 농어 요리를 좋아하는 모양이군요, 부인.”

“그럼요, 공작 부인께서도 해산물을 곧잘 즐기시니 마침 딱 맞는다고 생각했답니다.”

“정말이지, 백작저의 요리장은 늘 훌륭해요. 부인! 어쩜 이렇게 살을 연하고 촉촉하게 쪄 냈을까요?”

라시니는 그저 얌전이나 떨며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물론, 기민하게 리비아를 살피는 것은 잊지 않았다. 누구보다 시선에 민감한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알았으나 알은체하지 않았다. 조금 더, 저것이 자만해야 한다.

백작 부인은 리비아에게 그런 일을 부탁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적의 딸인 이블린의 수선을 나긋나긋하게 웃음으로 받아 주었다. 호스트인 그녀조차 그럴진대, 줄곧 말 한마디 없는 라시니 몬테필트로는 조금쯤 실망을 끼칠 만큼 별 볼 일 없는 태도였다.

기실 라시니는 그리 우둔한 남자가 아니었다. 남작의 조카이므로 상류층에는 속하지만 귀족이라고는 할 수 없는 미묘한 입지임에도 불구하고 그 수려하고 정교한 미모와 문학적 소양, 남자들에게서는 흔히 찾기 어려운 섬세함과 단정한 말투 따위로 여러 영애와 부인들의 예쁨을 받아 나름대로 입지를 굳힌 몸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뽐내려고 발악하지조차 않는 것은, 순전히 공작 부인을 믿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그녀의 방탕한 평판을.

당연히 자신 정도 되는 남자를 곁에 들이지 않을 리 없다는 알량한 믿음, 얼마 전 쫓겨났다는 애인 뒤로 다른 남자를 들였다는 소식이 없었으므로 다소간 심심한 인상을 주더라도 한 번의 기회만 얻을 수 있다면 곧장 적극적으로 리비아의 곁을 차지할 셈이었다. 옆자리를 꿰찰 수만 있다면 미미했던 첫인상도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다는 자만도 뒤따랐다.

그야말로 대단한 오판이었다.

결국 만찬은 영 석연찮게 파했다. 단연 그 일등 공신은 라시니 몬테필트로였으나 그는 반성의 여지는커녕 자신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는 양 평소처럼 고상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이블린으로서는 그의 입담을 높이 사 동석시킨 것인데도 말 한마디 않고 말 그대로 ‘대접받는’ 사람인 양 멀뚱히 있었던 것이 영 마음에 차지 않았던 탓에 싸늘했다. 아무래도 싸우겠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남녀를 본 리비아가 잠깐의 텀을 두고 러스킨 백작 부인을 흘긋 보았다.

“사람들을 되도록 물려 두세요.”

“그리하죠.”

많은 것을 논할 필요는 없었다. 만에 하나 잘라 내기도 처분하기도 좋은 이가 사이에 꼈으니 일은 더욱 손쉬워질 것이다.

* * *

이블린 랭글런드는 만찬 석상에서는 입만 다물고 남처럼 굴던 주제에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에스코트를 명목으로 징글맞게 쫓아오는 남자가 너무도 싫었다. 늘 짜증스러울 때마다 그 얼굴을 보면 그래도 성미가 누그러졌건만 지금은 라시니 몬테필트로가 정말이지 진절머리 나게 싫다. 감당이 안 될 만큼. 자신이 얼마나 잘 보이고 싶었는지, 그를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그는 모르겠지!

“영애.”

마치 귀신처럼 숨 한번 헐떡이지 않고 마치 그녀가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훤하다는 양 걸음 한번 재게 놀리는 일 없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악몽이라면 대단할 정도로.

사실 객관적으로 그리 큰일은 아니었다. 러스킨 백작 부인은 별다른 문제도 없었으니 자신을 탓할 분이 아니시고, 공작 부인께서도 이런 일에서는 너그러운 분이셨다. 타인에게는 기본적인 예의 이상으로 관심이 없는 분이시니까. 라시니 몬테필트로가 입을 열지 않은 것 따위 안중에도 없으실 것이다. 자신이 찾아가 죄송하다 말해 봤자 괜찮다는 말과 함께 기껏해야 앞으로 대동할 사람을 고르는 요령이나 짧게 귀띔해 주셨겠지.

그러나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녀의 상한 기분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라시니 몬테필트로는 요즈음 그녀가 가장 자랑할 만한 액세서리였고, 나름대로 가장 큼직하고 비싼 것이었다. 존경하는 공작 부인과 오랜만에 어울리는 자리에서 부인께서 칩거하시는 동안에 몰라보게 성숙해졌다고 좀 들먹이고 싶었을 뿐이다. 그녀는 늘 칭찬이 고팠고, 오랜만에 뵙는 공작 부인께서 평소처럼 건조하고 인상적이지 못한 자리였다고 기억하시게 해 드리고 싶지 않았다.

“영애.”

“놔요!”

커다란 남자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제법 매섭게 털어 냈는데도 떨어지기는커녕 유유자적 고쳐 쥘 뿐이었다. 고작해야 한 줌도 채 되지 않는 얄따란 소녀의 손목에 질 리가 없었으므로. 그의 표정은 짜증스러운 속내와 달리 평온하다 못해 밉살스럽게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저라고 좋아서 소녀를 쫓았겠는가, 만찬장을 나서자마자 실망이 어쩌니 하며 앞으로 사교계에서 운신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겠다는 소리를 해 대니 쫓은 것이지.

“놓으라고 했어요!”

“진정하십시오, 누가 보면…….”

“라시니 몬테필트로!”

“귀찮을 것 아닙니까.”

“……뭐?”

결코 단 한 번도 그에게서 들어 본 적 없는 말본새였다. 길길이 화를 내던 이블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이 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귀찮게 되지 않겠냐고 여쭸습니다. 그러잖아도 이 근방 예술가들은 죄 모인 곳 아닙니까. 괜스레 날뛰어서 입방아에 오르내리느니 조용히 정리하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지금…… 하! 적반하장도 정도가 있어요!”

남자는 정말로 그녀의 말이 어리둥절하단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고개를 모로 살풋 기울였다.

“적반하장……인가요.”

“그럼 아닌가요? 어떻게 두 부인께서 계시는 자리에서 날 이렇게 욕보일 수가 있죠!”

“욕보이다니요? 저는 결코 그런 적이 없습니다만.”

“당신이 자신하던 눈치는 어디로 간 거죠? 지금 당신 스스로 어떤 용도로 불려 다니는 건지, 왜 선택받은 건지 모른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아뇨, 영애. 욕을 보인다는 건 전혀 다른 일입니다. 특히 이런 시간.”

그가 나긋하게 눈매를 휘었다. 조금 전까지 수려하고 청순했던 낯짝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야살스러웠다.

“이런 장소에서는요.”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소름이 쫙 돋은 이블린이 다른 손으로 제 귀를 감싸 쥐고 질색을 했다. 남자는 그제야 짧게 웃으며 입을 놀렸다. 그의 생각대로 말하자면 수고롭게 굳이 이 시간에 뒤를 따라 나와 지켜보고 있을 만한 사람은 없으리라 여겼기 때문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리비아는 어둠에 몸을 묻은 채 그들의 실랑이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굳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이블린의 표정과 몸짓 정도만 보아도 얼추 돌아가는 상황을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모욕감에 치를 떨고, 분노하고, 기어코 참지 못한 분루를 흘리며 남자의 뺨을 후려갈기고 정강이를 걷어차곤 도망쳤다. 남자는 그저 나뭇가지에 가린 달빛 외엔 빛 한 점 들지 않는 먹먹한 어둠 속에서 제 뺨을 싸쥔 채 혀를 찼다.

“망할…….”

리비아는 짧게나마 고민했다. 저런 것을 부득불 활용해야 할까? 만약 조금이라도 쓸모가 떨어졌거나, 꼬락서니가 덜 되었거나, 연기를 조금만 못했더라도 그는 이 자리에서 사지가 썰려 가장 비참한 곳을 전전하게 될 것이었다. 그녀는 유구하게 저런 부류의 남자를 경멸했다. 아주 끔찍하게.

그러나 동시에, 저런 망종을 짓밟아 부수어 기게 만드는 것 또한 즐겼다.

그녀는 차분하게 걸음 소리를 죽였다. 바람이 가지를 뒤흔드는 소리에 발소리를 섞으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왼손 약지에 낀 결혼반지의 보석 부분을 손바닥 쪽으로 돌려 끼운 채 차분하게 다가가 남자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뭐…….”

살벌한 전류 소리가 적막한 정원을 울리고, 물에서 건져 낸 생선처럼 사지를 경련하며 잔디 위로 고꾸라진 남자의 희미한 앓는 소리가 뒤를 따랐다. 넓고 무성한 정원은 자잘한 소리를 삼키는 데에 능했다.

“누, 구…….”

남자는 통증에 의한 생리적인 눈물로 부옇게 흐려진 눈을 들어 껌뻑였으나 이 컴컴한 정원에서 온통 검은 옷으로 몸을 휘감은 그녀를 식별하기란 어려웠다. 리비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반지를 다시금 고쳐 끼곤 구두코로 그의 옆구리를 지그시 짓밟았다.

“허윽……!”

“작위조차 없는 주제에 후작가의 고명딸에게 난장을 부리다니, 어쩌려고 이러는 거죠? 경솔하긴.”

리비아는 제법 그를 딱하게 바라보며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상대가 여자이기만 하면 천지 분간도 않고, 앞을 보지도 않고, 그저 망나니마냥 같잖지도 않은 무례함을 휘두를 뿐 멀끔한 짓거린 조금도 못 하지.”

“공작…….”

“그래요, 나랍니다. 그랑디에 남작의 조카. 할 말이 있으면 하도록 해요.”

상대를 확인한 라시니는 파들파들 떨리는 입꼬리를 들어 웃었다. 천하의 리비아마저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 같잖은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 그는 꽤 승리감에 도취한 듯한 얼굴로 웃었다.

“와 주실, 줄…… 알았습니다.”

여자가 픽 웃음을 흘렸다. 와 줄 줄 알았다고? 아픈 꼴을 보고도 이리 지껄이는 욕망 충실한 인간은 또 처음이었다. 이런 얕은수로 자신을 갉작인 것들은 수도 없이 많았으나, 정작 제게 물리고도 진심으로 이딴 소리를 지껄인 놈은 없었다.

그녀는 다소 회가 동하여 느릿하게 발을 거뒀다. 라시니 몬테필트로는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는 일그러진 낯으로도 뻔뻔스럽게 키스했다.

“낯짝이 놀랍도록 두꺼운 건지, 자존심이 놀랍도록 없는 건지는 차근차근 알아보면 되겠죠.”

“하하…….”

“축하해요, 라시니 몬테필트로. 시험받을 기회는 생겼군요.”

그녀는 손수 허리를 숙여 그의 목줄기를 움켜쥐었다.

“커흑…….”

그러고는 남자를 질질 끌며 수풀 뒤로 파고들었다. 산책로 곁의 수풀 뒤로, 좀 더 높은 정원수와 벽을 둔 후미진 공간으로.

누운 풀들 외에는 새가 우는 정원에 아무도 남지 않았다.

라시니 몬테필트로는 숨통이 막혀 그 특유의 까마득한 감각에 잠식되어 있다가 놓여나자 컥컥 기침을 뱉으면서도 떨리는 손으로 엉금엉금 일어나 앉았다.

“무엇, 을…… 바라십니까?”

리비아는 무감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바란다? 그에게? 이 리비아 모브레이가?

그녀는 이 대단한 착각을 어떻게 깨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저 좀 더 무르익기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눈물 맺힌 속눈썹을 처연하게 내리깔고 미소 짓는 남자의 얼굴은 그 정도의 가학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충분했다.

“원하시는 취향이 있으시다면 맞추겠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적잖은 부인들이 저를 어여삐 여기셨으니 부인께 모자람은 없을 것입니다.”

“뭐든지? 자신이 꽤 만만하군요.”

그는 여전히 파들파들 떨리는 몸뚱이로도 기어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치 세레나데라도 부를 것처럼, 레이디께 검을 바치는 기사처럼 한쪽 무릎을 세우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리비아 모브레이는 세레나데라곤 질렸고, 검이라고는 단출한 최고의 것 하나면 되었으므로 남자의 세운 무릎을 구둣발로 밟아 땅에 처박았다.

“내 앞에서 건방은 떨지 말도록 해요, 남작의 조카.”

“예, 부인. 편히 라시니라 불러 주십시오.”

라시니 몬테필트로는 하등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이쯤 되면 대단하다고 여겨야 할 지경으로, 그는 태연하게 그녀가 고압적으로 정정해 준 자세 그대로 자신의 이름이나 들먹이고 있었다. 리비아는 재차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제 것이 아닌 수컷 따위에게 베풀 자비란 조금도 없는 여자는 그의 생사를 가늠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랑디에 남작의 조카, 잘 들어요. 당신이 날 만족시킬 수 있다면 당신에게 그럴싸한 영지를 주겠어요.”

“……예?”

“영지가 딸린 자는 조건 없이 준남작위를 받죠. 조건부이기는 하지만 승계도 가능한 유일한 준귀족 작위예요. 물론 주위 영지에 흡수당하지 않는 것이나, 적절한 후계자를 육성하는 것이나, 주위 귀족들과의 교류 따위의 자잘하고 생활적인 부분에서는 당신 스스로 무진 애를 써야겠지만 당신의 그 번지르르한 낯가죽이라면 그 영지를 지참금 삼아 적당한 혼처를 얻어 정식으로 귀족 사회에 편입될 수 있을지도 모르죠.”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경악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리비아 모브레이가 지껄이고 있는 방법을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무식하기 짝이 없을 만큼 엄청난 부가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방식을 실현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신 포도처럼 경시했던 방식일 뿐.

“물론, 꼭 그보다 끔찍한 방식으로 무너질 수도 있겠지만요.”

“하겠습니다.”

그는 거의 눈을 까뒤집을 기세였다. 차라리 광신에 가까울 정도의 열렬한 눈을 한 남자는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절절하게 빌었다.

“제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당신께서 명하신다면 정오의 광장에서 발정한 길짐승 흉내를 내라고 하셔도 기꺼이 하겠습니다.”

욕망에 눈이 먼 얼굴을 가만히 감상하던 리비아가 드레스 주머니 속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손가락만 한 얇은 병 속 희미한 연둣빛 액체가 찰랑거린다. 여자는 그 병을 그의 눈앞에서 느리게 흔들었다. 마치 최면이라도 거는 것처럼 상냥하고 몽롱하게 속삭였다.

“당신이 내일 밤 이 시간까지 항복하지 않는다면 성공인 것으로 간주하겠어요.”

“예.”

그녀는 병을 열고 그의 멱살을 붙들어 몸뚱이를 반쯤 일으켜 세우더니 벌어진 옷깃 사이로 욱여넣고 기울였다.

“읏…….”

차가운 액체가 자연스레 그의 옷 안으로 흘러들다가, 돌연 점성을 갖추고 뭉글거리며 퍽 매섭게 살갗에 파고들었다. 라시니 몬테필트로는 그 소름 끼치는 감각에 기함하면서 반사적으로 몸을 움칠 떨었으나, 자신을 내려다보는 위압적인 시선에 휘말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위가 컴컴한 와중 그녀의 눈만이 형형하게 빛났다. 마치 떫은 선물을 어찌 처분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무감정한 눈은 얼핏 소름이 끼쳤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앞으로 다시없을 커다란 구원의 손길이기도 했다. 남자는 의식적으로 버텼다. 반쯤 녹은 젤리처럼 점액이라기엔 민망한 감촉인 그것이 자신의 사지와 목 위를 제외한 몸통 전체에 발리는 것처럼 넓게 퍼져 들러붙은 채 차근차근 성기로 기어올라 요도와 뒷구멍을 억지로 비집고 슬금슬금 밀려드는 것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눈 한번 깜빡이지 못했다. 생리적인 거부감과 이물감이 도드라지면 도드라질수록 마치 여자의 눈으로 범해지는 것만 같아서.

리비아는 그의 반항이 멎고 젖었던 옷이 이전처럼 멀끔히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미련 없이 멱을 떨쳐 놓아주었다.

“하나, 그 누구에게도 이 일을 발설하지 않을 것.”

남자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리비아 모브레이는 그저 사무적인 투로 뇌까렸다.

“둘, 남에게 들키지 않을 것.”

그녀의 구두가 라시니 몬테필트로의 사타구니를 지긋하게 밟았다.

“셋, 내일 밤 이 시간 이 자리에 자의로 나타날 것.”

“……예, 부인.”

그는 입술을 힘껏 당겨 웃는 것으로 비명을 삼키곤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리비아 역시 빙그레 웃으며 이블린 랭글런드가 후려친 탓에 터져 피가 맺힌 그의 입술을 손톱으로 가볍게 후벼 파면서 덧붙였다.

“넷, 어떤 방식으로든 내 심기를 거스르지 말 것. 이상이에요.”

그녀는 식은땀이 배어나는 와중에도 생글생글 웃고 있는 남자에게서 손을 완전히 거두지 않았다. 피 묻은 검지를 내민 채였다. 라시니는 눈치 좋게 그녀의 손끝을 닦았다. 혀를 쓰지 않고 오롯 입술로만, 마치 사랑해 마지않는 정인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것마냥 점점이 내리는 키스로 핏자국을 지웠다.

“잘해 봐요.”

리비아 모브레이는 빙그레 웃으며 깨끗해진 손으로 정원을 떠났다. 그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완전히 모습이 사라지고서야 바닥에 고꾸라지며 앓는 소리를 냈다. 자리에 남은 것은 악독한 년이 주고 간 고통과 알량한 희망뿐. 그는 히스테릭한 웃음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녀가 버리고 간 병을 틀어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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