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덕의 늪
장례 이후 포웰 공작가는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일체의 사교 활동도, 편지에 대한 답신도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걸어 잠그고 묵묵히 버텼다. 바깥에서 리비아 모브레이가 나오길 기다리는 걸신들린 개들만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직 젊고 어린, 적령기에 접어든 자식을 가진 귀족들은 촉각을 단단히 곤두세우고 공작 부인이 이 깊은 침묵을 깨기만을 기도했다.
보통 젊고 권세 있는 집안의 주인이 홀로 되면 재가를 노리는 이들이 많이 꼬이기 마련이지만 이토록 절실하지는 않았다. 웬만큼 가계가 급박한 것이 아니고서야 좋아 봤자 후처라는 이름에 목을 매진 않았으니까. 그러나 리비아 모브레이는 다르다. 그녀는 얼마 전 죽은 포웰 공, 모브레이 가문의 주인 조르주가 자신의 정통성을 다지기 위해 고른 칠촌 혈육이라 혈통적으로도 모브레이 사람인 까닭이었다.
결벽적인 세도가로 유명한 포웰 공작가는 일찍이 3대 전 본가의 계승권을 위협할 수 있는 혈족들을 손수 처리했다. 그 이후 선대 공작 부부는 일찍이 타계하였고, 현 공작인 조르주가 원인 불명의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아이를 두지 않은 채 젊은 나이에 죽었으므로 이제 포웰 공작가를 주무를 수 있는 것은 그의 유언으로 모든 것을 상속받은 그의 부인 리비아뿐이었다. 혈통적으로 따져 내려갈 때도 그녀보다 모브레이와 가까운 피도 없는 상황. 예컨대 그녀의 남편이 되면 곧장 새로운 포웰 공작이자 차기 공작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누가 탐을 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리비아 본인이었다. 그녀는 제 앞으로 도착한 온갖 선물들을 분류하느라 바쁜 홀을 스쳐 지나가며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 * *
심혈을 기울여 풀을 깎고 다듬은 숲의 초입에 거대한 천막이 서고 사람들이 끓었다. 사냥 시즌을 맞아 우후죽순 개최되는 조촐한 사냥회에 불과했으나 전보다 젊은 귀족들의 참여율이 높아져 활기가 넘쳤다.
“발밑을 조심하세요, 영애.”
“괜찮답니다, 돌부리가 있더라도 새삼스레 제 발에 챌까 봐요?”
새침하게 턱끝을 들어 올린 리플리 후작 영애가 자신을 에스코트하는 남자의 낯을 일별하곤 산뜻하게 걸음을 옮겼다.
“물론 영애께서 참석하기로 한 사냥회 준비가 소홀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남자, 라시니 몬테필트로가 애교 있게 눈매를 휘어 웃으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흘긋 눈짓했다.
“워낙 사람이 많으니 변수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늘상 레이디의 안전을 심려하는 이 미욱한 사내의 마음을 모쪼록 살펴 주십시오.”
“……그도 그렇군요. 정말이지. 다들 개떼같이 몰려든 꼴하곤…….”
“영애께서 너그러이 보아 넘기십시오, 다들 발등에 불 떨어진 양 허둥거리고는 있지만 다른 분도 아니라 포웰 공작 부인이시지 않습니까. 소란도 환대의 의미라고 생각하면 타당하게까지 느껴집니다.”
“그래 보았자 부인께서는 개의치도 않으실 텐데 말이에요, 흥.”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여느 때와 같이 심기가 편치 못한 그녀를 달래 차양 아래 앉히고 마실 것을 가져오겠다며 양해를 구한 뒤 테이블 쪽에 몰려 있는 사람들 사이로 유연하게 흘러들어 갔다.
“들으셨나요? 공작 부인의 애인 이야기.”
“아하, 그 떠돌이 작가 이야기인가요?”
“그자, 귀족조차 아니라지 않아요?”
“사실이긴 할 것이에요, 다른 게 아니라. 그 말을 처음 팔았던 하녀 계집, 노역형을 받았다더군요. 저희 사위가 이야기한 것이니 확실할 거예요.”
부인들 사이에 경악에 찬 탄성이 흘러나왔다. 라시니 몬테필트로는 곰곰이 시음하는 척 음료를 깔짝거리며 귀를 기울였다.
“그렇다면 시기상…….”
“네에, 장례식 직후죠.”
“발에 채고 채는 것이 작가 아닌가요? 이름도 모를 것이 어떻게 공작가의 장례식에……?”
“이전부터 공작 부인께서 후원하던 자였다고 하더군요.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시름에 잠긴 공작 부인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그 후에 찾아뵀다고 해요.”
“제깟 것이 위로라니요? 말본새가 발칙하군요.”
무리 중 아들을 둔 부인들이 눈에 띄게 불쾌해했다. 누가 보아도 공작 부인의 눈에 들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 귀부인들은 이후로도 줄곧 그 이름 모를 무명작가에 대한 험담을 주고받았다. 남자는 산뜻하고 달지 않은 아이스티를 골라 파트너의 곁으로 돌아가며 자신의 계획을 다시 한번 셈했다.
* * *
커다란 침대를 뒤덮은 캐노피 속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입이라도 틀어막힌 것 같은 볼썽사나운 남자의 신음.
“옳지.”
검은 머리카락을 풀어 내린 여자가 나른하게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뭉근하게 앞뒤로 흔들었다.
“응, 웁…….”
그녀는 한 남자의 얼굴 위에 올라타 있었다. 남자는 반쯤 풀린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몽롱하게 그녀의 둔덕 사이로 감각이 둔해진 혀와 입술을 열심히 놀리고 있었다. 미끌미끌하게 젖은 살덩이들이 치대지며 낯 뜨거운 소리를 냈다. 여자는 그를 마치 도구처럼 편히 다루며 허리를 얕게 돌리다가, 어느 순간 돌연 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부인……?”
“쉬…….”
여자는 두서없이 흘러내린 자신의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며 입술 앞에 검지를 들어 보였다. 그녀의 하얀 몸뚱이만이 희미하게 빛날 만큼 어둑어둑한 캐노피 속에서 낮게 가라앉은 녹안이 무기질적으로 번들거렸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더는 질척거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지치기도 여간 지친 것이 아니었으므로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너른 침대 위를 무릎걸음으로 내려가 캐노피를 걷고 나서는 순간, 볕 아래에서 화사한 색을 덧입는 리비아 모브레이의 몸뚱이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캐노피 자락이 원래대로 침대를 모조리 삼키자 리비아의 낯에 희미한 짜증이 스쳤다. 달아오르기는 했지만 완전하지는 못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지리멸렬하게 이어진 자극은 되레 불쾌했다. 덥혀졌던 몸도, 촉촉하게 땀이 올랐던 살갗도 서서히 식어 가는 것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나무로 둘러싸인 창밖을 내다보았다. 잠깐 곁을 데울 사내들을 본저에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별관으로 거취를 옮긴 참이다. 아마 이 녹음 너머에 있을 본관은 오늘도 소란에 시달리고 있겠지.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식은 홍차를 가볍게 머금고 갖은 단장과 갑갑한 옷가지들에 눌려 있던 몸뚱이를 끄집어내 놓은 나신 그대로의 해방감을 즐겼다. 꾹꾹 조인 옷으로도 상당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가슴은 억누르는 것이 사라지자 한층 더 풍만해 보였다.
물론 그 외의 쾌락은 마땅치 않다. 여즉 침대 위에 누워 늘어져 있을 남자와의 섹스는 단순한 찬탄뿐이었다. 희열도 쾌락도 미적지근한. 그저 저 홀로 취해 헐떡거리는 수컷. 물기가 메마르기 시작한 다리 사이의 감각이 찝찝하다.
리비아는 잔을 내려놓고 자신의 허벅지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희미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주 익숙한, 공작저에 처음 왔던 날부터 쭉 자신을 따라다녔던 그것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그자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예상만큼이나 먹음직스럽고 추잡한 흥분이 눅눅하게 배어 있는 진득한 시선이 노골적으로 머리카락으로 가려지지 않은 몸뚱이를 더듬대듯 핥았다. 얕은 욕망으로 혀를 놀리던 남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절박한 눈길. 리비아는 눈먼 개의 푸른 시선을 만끽하면서 눈치채지 못한 척 입술을 핥았다.
* * *
공작 부인께 꼬리를 친 발칙한 무명의 작가로 들끓었던 사교계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화가, 극작가, 조각가, 배우, 발레리노, 가수, 작곡가, 온갖 남성들이 그녀의 곁에서 화제가 되었다. 대부분이 명확한 인지도가 없거나 단순한 지망생이라는 점이 더욱 여론을 달구었다. 어떻게든 치열한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는커녕 감읍해야 할 후원자인 귀부인께 요망을 떨어 댔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러나 입을 여는 자들도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세기의 미녀로 추앙받는 리비아 모브레이가 여지를 보였을 때 이성을 잃고 바닥을 기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쯤은.
무엇보다 어떻게든 그녀를 사로잡기만 하면 당장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아니,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차기 공작의 친부라는 사실만 있어도 평생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어쩌면 예술가로서의 성공보다 영광스러운 장래일 테다.
장례 직후 적막했던 것이 언제냐는 양 전투적으로 그녀의 곁을 차지하기 위한 수컷들의 전쟁이 연이어 벌어졌고, 사교계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패배한 것들의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남지 않은 채 새 애인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처음 시작될 때에나 짤막하게 ‘결국 그도 버려졌군요’ 하고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리비아가 친정에서부터 데려온 일손들이 아니면 접근조차 불가능한 포웰 별저는 그야말로 그녀의 하렘이었고, 그녀는 포웰의 유일한 주인이며, 여전히 모든 귀부인의 교본으로서 존재한다. 설령 더 이상 막을 수조차 없는 난잡한 성생활로 모두의 입을 오르내리더라도.
기실, 리비아는 이 모든 것이 우스웠다. 자신은 그저 귀부인의 소양으로서 여겨지는 후원 이상의 그 무엇도 한 적이 없었다. 제가 특별히 맘을 고쳐먹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럴 텐데 저들 멋대로 머리를 굴리고 망상의 끝에 달해 눈을 까뒤집고 바닥에 드러눕는 것들이 이다지도 많았다. 재능이 있다면, 그에 걸맞은 작품과 실적이 있다면 응당 대우하겠지만 그녀에게 몸을 바치러 기어든 것들은 그런 예술가로서 능력을 입증할 생각일랑 조금도 없었다. 그저 자발적으로 씨를 대러 온 종마 떼들에 불과했다.
질릴 무렵이면 언제든 새로운 것이 기어들어 온다. 감히 공작가를 집어삼키려고 드는 귀족들보다야 상대하기가 수월하니 가지고 놀기에도 좋았다. 적어도 원하는 입질이 올 때까지는 얼마고 더 칩거할 생각인 그녀로서는 심심치 않게 재롱을 떨러 오는 것들을 내칠 이유가 없었다. 남들이 불편해하건 언짢아하건 살펴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을 어쩌겠는가. 이곳은 이제 오롯이 리비아 모브레이만의 집인데.
제법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중에도 부드러운 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들며 커튼을 흔들었다. 파니에처럼 둥글게 부풀다 쓸려 나가며 가라앉는 천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아래에서 소란한 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부인께서는 휴식 중이십니다, 심란하신 분을 성가시게 하지 마십시오.”
“심란? 그 여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쓰는군. 비켜.”
흘긋 듣기만 해도 무슨 일인지 알 만했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느른하게 턱을 괴며 불청객이 들이닥치길 기다렸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미슐레가 놓칠 리 없겠지만, 상대가 녹록지 않았다.
“심란이라니.”
코웃음을 치며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뇌까린 남자가 테라스의 문턱을 밟으며 사뿐하게 내려앉는다. 그가 부린 바람이 커튼을 산만하게 뒤흔들었으나 리비아는 그저 흐트러진 머리칼을 무던하게 귀 뒤로 넘길 뿐 무례를 책잡지 않았다.
낮게 하나로 묶은 중단발 길이의 붉은 머리칼, 바로 그의 머리 위에 드리운 가지에 매달린 이파리와 꼭 같은 녹색 눈, 황동색 테를 두른 단안경과 초여름에도 계절을 잊은 듯 겹겹이 둘러 입은 품 넓은 마법사 특유의 옷가지들. 무엇보다 포웰의 유일한 주인 앞에서도 목을 빳빳이 드는 그 오연함.
“구르디예프 경.”
“이거 실례, 정말 쉬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부인.”
“미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답니다.”
앉겠어요?
뒷말은 구태여 붙이지 않고 우아하게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자 요한은 제 몸뚱이를 싸매듯 옷자락을 단정히 다듬고는 거절도 승낙도, 하물며 보통 의례적으로 할 만한 인사말도 없이 덜컥 자리를 꿰차고 앉으며 냉랭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부라렸다. 남자의 노골적인 무언 시위는 차라리 귀엽기까지 했다.
“용건이 있다면 가감 없이 말씀하세요.”
“제 말을 들으실 시간은 있으십니까?”
“그럼요, 다른 사람도 아닌 구르디예프 경의 말씀이라면 시간을 쪼개서라도 귀 기울여 들어야지요.”
“주제는 아시니 다행입니다.”
그는 퍽 다정한 어투로 말하는 리비아에게 노골적으로 가시 돋친 말을 꾹꾹 눌러 뱉으며 제 팔짱을 끼고 입매를 비틀었다. 남이 들었더라면 어떻게 포웰 공작 부인에게 감히 이런 말을 지껄일 수 있는지 경악했겠지만, 그의 정체를 안다면 리비아가 그랬듯 입을 다물 수밖에 없으리라.
그의 이름은 요한 바이뎀 구르디예프, 5대 전 공작가에 기용되어 지금껏 20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살며 공작의 고문이자 모브레이의 가장 큰 힘으로 자리매김해 온 마법사였다. 조르주의 죽음으로 가주의 자리가 빈 지금의 포웰이 이토록 굳건할 수 있는 것도 전부 그의 덕이었다. 무엇보다 비단 공작가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마법계 전반에 폭넓게 영향력을 뻗쳐 온 선학으로서도 널리 존경받는 사람이니 리비아라 해도 한 수 접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요한 역시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으므로 체면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그간은 자신의 공방에 틀어박혀 참아 주었으나.
“남편이 죽은 지 보름도 안 되어 새 남자를 들이더니, 이제는 온 나라의 입에 오르내리는 호색한이 되어 계시기에 조르주를 잃은 슬픔에 실성이라도 한 줄 알았지 뭡니까. 제정신으로 제 공방까지 부인의 정도를 모르는 추문이 흘러들어 오는 데에 대한 사죄 한마디 없이 이렇게 한가하게 계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리비아는 그의 신랄한 말본새에도 개의치 않고 그저 조용히 자세를 가다듬은 채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마치 다른 세상처럼, 혹은 그의 존재 따윈 전혀 인지조차 못 하는 것처럼 테이블을 사이에 둔 그들은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남자는 언짢은 것보다도 비위가 상한 듯한 기묘한 경멸을 만면에 내두르고 눈썹을 추켜세웠다.
“이제는 타인의 매도마저 즐거우십니까?”
“아뇨, 설마요. 그저 다른 누구도 아닌 구르디예프 경께서 제게 행실을 바르게 하라는 고루한 조언을 주시기 위해 바쁘신 몸을 이끌고 정반대 방향으로 마주 보고 있는 별저에까지 걸음 해 주실 줄은 몰랐던 까닭이지요. 그저 감사한 마음에 미소 지었을 뿐이랍니다.”
요한은 그녀의 말에 목에 핏대가 올라올 정도로 화가 치밀었으나 길게 말을 섞어 줄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다독이고는 싸늘하게 일갈했다.
“포웰의 체면이 있습니다. 한동안 근신하며 꼬락서니를 다듬으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명령이신가요?”
내내 눈을 감은 채 노래하듯 무게감 없이 대꾸하던 리비아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서늘하게 가라앉은 녹안으로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남자의 하악에 억센 힘이 들어갔다. 서로가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천적 사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듯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서늘함이 서로를 할퀴었다. 그저 채도가 조금 다를 뿐 궤를 함께하는 녹색 눈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없는 평행이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물음을 받은 요한이었다. 그는 비웃음을 참는 듯한 태도로 악의로 비틀린 입을 놀렸다.
“설마. 저는 어디까지나 조언을 드렸을 뿐입니다. 부인께서 이대로 포웰의 체면을 깎아 나간다면 장로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무리 저라도 괜한 일이 벌어져 ‘상심이 깊으신’ 부인께서 상처라도 받으실까 염려되더군요.”
“그렇군요, 제가 적적함에 눈이 멀어 거기까진 차마 고려하지 못하였어요. 적절한 조언 감사합니다, 경.”
리비아는 눈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가 먼저 눈길을 거둔 것만으로도 이겼다는 생각에 저열한 기쁨을 맛본 요한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도 없이 옷자락을 휘감고 사라졌다.
그녀는 조금도 분하지 않았다. 그저 우스웠다. 이런 식으로 치졸하게 아락바락 기어오르는 사내가 우스워 그의 히스테리는 그저 재롱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과연 장로들이 자신의 소식을 듣지 못하여 여즉 가만히 있었겠는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들은 늘상 받아먹는 청탁보다 큰 건수가 생겨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뇌물들을 허겁지겁 뒷주머니에 욱여넣느라 바빠 조용한 것일 테니까.
우습지 않은가, 스스로가 말했듯 요한 구르디예프는 그저 고문일 뿐이다. 명망 있는 마법사이자 그 무시무시한 힘을 경외하여 모두가 어른으로 대접하고 있을 뿐, 엄밀히 따지면 그는 어디까지나 외부인이었다. 자신이 그 힘을 포기하고 나가 달라고 한다면 이곳에 있을 그 어떤 정당성도 남지 않는 그저 타인. 그런 주제에 오만하고 악의에 무지하여 어떤 꼴이 날지도 제대로 셈하지 못하고 이래라저래라 턱을 치들고 다니는 가여운 것.
물론 그를 쳐 낼 이유는 없다. 지금도 공작 부인을 만나게 해 달라며 아우성치는 자들을 추잡하다며 죄 잘라 내고 있는 것도 요한일 테니까.
‘기는 한번 죽여 둬야겠지만.’
리비아는 곧추세웠던 몸뚱이를 느른하게 등받이에 기대며 눈을 내리깔았다.
― 부인.
“들어와요.”
인기척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 미슐레 호엔베르크가 잔뜩 굳은 얼굴로 묵례하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구르디예프 경께서는…….”
“이미 돌아가셨답니다, 워낙에 공사가 다망하신 분이니 오래 붙들지 아니하였어요.”
사뿐히 미소 짓는 얼굴을 보고서도 심란함을 감추지 못한 미슐레의 낯빛이 어두웠다. 금방에라도 누군가를 산 채로 지옥에 집어 처넣을 것만 같은 얼굴이 그저 걱정하는 표정이라는 걸 그녀 외에 그 누가 알아줄까.
미슐레는 그 음산해 보이는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깍듯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아니에요, 구르디예프 경께서 저를 찾아오지 못할 이유는 없죠. 가주의 자리가 비었으니 남은 저희라도 마음을 모아야 공작가를 온전히 이끌지 않겠어요?”
“부인…….”
미슐레는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기색으로 그녀를 애처롭게 불렀다. 그의 머릿속에서 어떤 착각이 벌어지고 있을지는 불 보듯 뻔했지만 구태여 바로잡지 않은 리비아가 제 턱선 언저리를 손으로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겼다.
“미셸.”
“예, 부인.”
“별채에 아직 손님께서 계시던가요?”
“……예, 그렇습니다.”
“저런, 어서 그분을 배웅해 드리도록 말을 전해 주겠어요?”
“예?”
남자는 당혹하여 저도 모르게 반문하고야 말았다. 저와 같은 입장인 고용인들과 그녀 자신을 제외한 사람, 그러니까 손님으로 명명될 만한 사람은 윌리엄 크롬헬밖에 없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아.”
그의 귓불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스스로도 당혹할 만큼 선명하게 얼굴이 빨개졌으나 자각하면 할수록 꼴사나운 모양새가 되었다. 어젯밤 순찰하며 벌어진 문틈 사이로 엿보았던, 바닥을 기는 남자의 나신, 추잡한 숨소리, 헐떡이며 홀로 사정하던 꼬락서니. 그 모든 것을 달뜬 낯과 냉소적인 눈으로 깔아 보던 리비아의,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녀의 진짜 얼굴.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윌리엄 크롬헬이 수캐처럼 헐떡댔던 것까지 생각이 닿자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그는 부디 자신의 표정이 괴상하지 않길 바라며 고개를 살짝 틀어 숙였다.
“미셸?”
“그 가수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셨던 것 같아 의아하여…….”
“아.”
리비아는 그의 조잡한 변명을 다행히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인 듯 여상스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을 본 미슐레는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스스로를 다독였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예뻐했던 건 그의 몸이지, 노래가 아니에요.”
미슐레가 그녀의 말에 놀라 고개를 퍼뜩 들자 여상스러운 미소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리비아가 즐거이 눈매를 휘었다.
“봤구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라는 말도, 변명도, 그 무엇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천치처럼 뻣뻣하게 굳어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리비아 모브레이에게만큼은 이런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면서도, 밤중에 보았던 그 얼굴과도, 평소에 보이는 그림처럼 음전한 얼굴과도 다른, 일견 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순수한 잔혹성이 묻어나는 즐거워 보이는 얼굴에 말문이 절로 막혔다.
“어디까지 봤나요?”
“저, 는…….”
“시침 떼지 말아요, 미슐레. 쭉 날 보고 있었죠?”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축축하게 젖은 주먹을 한층 더 억세게 움켜쥐며 떨리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입에서 애칭이 아니라 이름이 나왔는데도 감히 기만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그녀는 깍지를 낀 제 손가락에 턱을 얹으며 나른하게 속삭였다.
“방을 나서며 문을 닫지 않는 고용인은 없어요.”
벌벌 떨리는 눈이 다시 그녀에게 꽂힌다. 요컨대 자신을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안배했단 말인가. 웃음을 머금은 그녀가 미슐레에게 까딱 손짓했다. 남자는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감히 주인의 부름에 답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는지 재깍 다가와 그녀의 손끝이 시키는 대로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는 걸 아나요?”
“왜…….”
그녀의 얄따란 손끝이 미슐레 호엔베르크의 턱을 들어 올렸다.
리비아는 깊게 팬 눈두덩을 지긋이 바라보다 늘 음영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그의 처진 눈매를 핥듯이 감상했다.
“왜겠어요?”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숨통을 틀어잡힌 힘없는 짐승처럼 매가리 없이 입만 몇 번 달싹거리다 침묵했다. 눈을 피할 수도, 일어날 수도, 감히 변명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절대자였다. 물리적인 힘이 없더라도 누군가에게 짓눌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자신이 이렇게나 무력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기분에 경악하며, 동시에 매료됐다. 그는 멍하게 리비아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잔혹한 말들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그 입술을.
“당신은 늘 나를 보고 있었죠.”
사실이다.
“단순히 모든 귀부인의 교본이라는 완벽한 레이디를 동경해서.”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스스로 욕망을 깨달았을 거예요. 이 눈이…….”
턱을 들어 올리고 있던 손가락이 덩굴처럼 유연하게 뺨을 타고 기어올라 감싸 쥐었다. 미슐레의 눈꼬리를 검지 끝으로 짚은 그녀가 선고처럼 속삭였다.
“내 등이 아니라, 손으로 옮겨 갔을 때.”
아.
전부 알고 계셨구나.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강박이 한순간 쓸려 나갔다. 그 핏기 없는 얼굴을 흘긋 일별한 리비아는 손을 거두었다. 힘없이 그의 고개가 아래로 뚝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입을 멈추지 않았다.
“연이어 깨달았겠죠, 스스로가 가진 열망이 단순한 경애가 아니라 욕정이라는 걸.”
“저, 는…….”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요? 그 눅눅한 눈.”
“죄송, 죄송합니다. 부인, 저, 저는.”
방언처럼 터져 나온 사죄를 그녀가 구태여 막지 않자 그는 꼴사나울 것을 알면서도 더듬더듬 지껄여 나가기 시작했다.
“단언컨대 단 한 번도 구체적인 생각 따윈 한 적이 없었습니다, 깨달은 그 순간부터 쭉 어떻게든 마음을 죽이려고 노력했는데, 가, 각하께서도 계시니. 그게.”
“애당초 날 여자로 본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걸요.”
“아…….”
“당신의 임무는 날 보좌하고 호위하는 것. 신변의 안전에만 신경을 쓰면 될 일이었어요. 과도하고도 의미 없는 감정 따윈 오히려 민폐랍니다.”
“죄송……합니다.”
“물론 그건 인간일 때의 이야기죠.”
리비아는 잠깐 텀을 두고 남자의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다 말을 이었다.
“나는 인간의 죄에는 비정하지만, 개의 죄에는 한없이 관대하답니다.”
개.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저릿하게 조여드는 제 가슴팍을 더듬으며 눈을 올렸다. 그날 밤, 그 남자를 저속한 짐승으로 전락시켰던 잔혹한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피가 죄 낯짝에 몰린 듯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그는 형언할 수 없는 유혹을 붙잡기 위해 더듬더듬 그녀의 복사뼈 언저리를 쥐었다가, 자리를 고치듯 아래로 내려가 구두를 받쳐 들었다. 남자는 망설임 없이, 오히려 완전히 도취한 듯 떨리는 고개를 숙여 끄트머리에 입 맞추었다.
“말귀가 밝아서 좋군요, 나의……”
남자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억세게 그러쥐어 당기는 손길에 순응한다. 딸려 올라가 마주한 비정한 주인의 얼굴에 속절없이 아랫도리를 뻣뻣하게 세우며 헛숨을 들이켰다.
“미셸.”
리비아는 달콤하게 이름을 속삭인 것과 달리 미련 없이 그의 머리채를 놓아주고는 구둣발로 그의 가슴팍을 밀쳐 내며 다리를 꼬았다. 얼떨결에 등 뒤로 손을 짚고 주저앉은 미셸은 압도적인 위압감에 사로잡혀 넋을 잃었다.
“벗어요.”
“예?”
“두 번 말해야 하나요?”
빙그레 미소 지으며 속삭이는 목소리가 일견 싸늘했다.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움찔 떨며 자세를 고쳐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제복 재킷에 손을 댔다. 단추를 풀면서도 이렇게 하란 말이 맞는지 줄곧 의아했으나, 그녀가 입술을 핥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턱을 괴는 것을 보면 정확히 들은 듯했다. 정말로, 희롱당하고 있었다. 자신이.
손끝에 열기가 올랐다. 그녀의 고아한 눈이 제 손길을 따라 몸뚱이를 핥아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아찔한 희열이었다.
남자는 옷가지를 벗어 내리는 손길에 박차를 가해, 하나하나 벗어 옆에 가지런히 개키며 어느덧 일어나 바지를 벗어 내리는 데에 이르렀다. 지퍼를 내리자마자 남사스러울 만큼 툭 하니 불거진 샅이 드러났다. 자신의 추태에 마른침을 삼키며 바지를 벗어 다른 옷가지 위에 올려 두자, 그녀가 턱을 괸 손으로 본인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소리 없이 채근했다. 그는 신발까지 벗은 뒤, 양말과 속옷밖에 남지 않은 모습으로 바르게 서 눈을 질끈 감은 채 그녀의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가리지 말아요.”
미슐레는 저도 모르게 치부를 가리듯 구겨졌던 자세를 의식적으로 바로잡은 뒤 수치심에 바르르 떨었다. 노골적인 욕정을 가진 타인의 눈앞에 맨몸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눈앞의 여자는 첫사랑이자 지금도 마음에 두고 있는 주인이시다. 이 상황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차라리 꿈이라고 하는 편이 현실성 있게 느껴질 정도였다.
리비아는 제 입술을 핥아 축이며 남자의 몸을 감상했다. 어지간한 여성보다도 큼지막한 가슴, 색 좋게 도드라진 유두, 긴장으로 불긋하게 달아오른 목줄기와 이어지는 너르고 다부진 어깨선, 급격하게 좁아져 촘촘한 근육으로 둘러싸인 복부와 군더더기 없는 날씬한 허리, 무엇보다 속옷 위로도 도드라지는 장골과 부피부터가 흉흉한 성기, 옷감 위로는 알기 어려웠던 단단한 근육으로 짜인 두꺼운 허벅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자신을 다스리면서도 명백하게 굴욕에 흥분하는 그의 천성적인 기질이 마음에 들었다. 소질 없는 것들을 굳이 길들여 노는 것에 다소 질려 있던 참이었으므로 그녀는 진정 흡족했다.
“가까이 와요, 미셸.”
그 기꺼움은 절로 목소리에 묻어났다. 이전보다 확연히 누그러진 목소리로 속삭이자 미슐레 역시 눈치를 보면서도 조심스럽게 다가와 섰다. 굳이 말로 시키지 않아도 그는 자연스레 뒷짐을 져 그녀에게 순종했다. 정말로 우수한 먹잇감이 아닐 수 없었다.
여자는 그의 젖가슴을 움켜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뜨뜻하게 열이 오른 살갗에는 이미 긴장 탓인지 촉촉하게 습기가 배어 있었다. 그녀는 품평하듯 그의 가슴을 꾹꾹 힘주어 주무르며 꼬았던 다리를 풀고 무릎을 벌렸다. 좀 더 가까이 다가오라는 눈치를 읽은 미슐레가 눈을 질끈 감은 채 순순히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섰다. 리비아의 들뜬 숨이 몸뚱이 위로 쏟아져 내리는 아찔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젖힌 그는 남의 손을 탈 일이 없던 몸뚱이를 누비는 타인의 손길에 속절없이 달아올라 뒷짐을 진 손으로 제 팔뚝과 손가락을 못살게 굴며 무던하려 애썼다.
“역시 옷 위로 만지는 것과는 다르군요, 마음에 들어요. 만질 것 없던 이전의 수컷들과는 비교할 수 없어요……. 미셸, 다른 여자에게 앞섶을 열었던 적이 있나요?”
“아니, 요……, 어, 없습, 니다…….”
그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더듬더듬 대꾸했다. 리비아는 그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는 듯 유두를 꼬집어 비비며 어쩔 줄 모르는 낯짝을 관음하다가, 답을 마친 그가 입을 굳게 닫자 남은 한 손으로 옆구리를 야살스레 어루만지며 또렷한 복부와 가슴 언저리의 근육 선을 핥아 올렸다.
“부, 부인……!”
“놀랐나요? 충분히 상상했을 줄 알았는데.”
그녀는 샐쭉 눈웃음을 치며 그의 유두를 튕기고는 두 손으로 몸뚱이를 쓸어내리다 남자의 단단한 엉덩이를 틀어쥐었다.
“흣……!”
“내가 수컷들을 어찌 다루는지 그동안 지긋이 지켜봤지 않나요? 조롱당하고, 매도당하고, 바닥을 기면서 말 한마디에 기뻐하며 카펫 위에 좆을 치대며 황홀하게 절정에 달하는 꼴을 지켜보면서 당신이 당하면 어떨지 생각해 보지 않았단 말인가요?”
“그런…….”
“솔직하게 대답해야죠.”
리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엉덩이를 벌리며 남자의 복부에 뺨을 기댄 채 눈을 치뜨고 속삭였다.
“솔직하게 굴지 않으면 다른 곳부터 길들여지게 될 텐데.”
미슐레는 파르르 떨리는 제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거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가, 감히, 상상……은, 모, 못 하, 읏!”
“네에, 계속 말해요.”
“꿈, 에서, 뵈었, 으……!”
“내가 어떻게 했죠?”
“아, 부인, 제발…….”
그는 스스로 주군을 꿈에서나마 욕보인 것을 고백하는 일을 견디지 못하고 애원했으나 리비아는 그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배에 점점이 입 맞추면서 재촉했다.
“착하게 굴어야죠, 미셸. 이건 명령이잖아요.”
흐, 하고 울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희미한 소리가 비어졌으나 오래지 않아 결국 미슐레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제, 제, 성기, 르을, 밟으, 시면서…… 아래를…… 빨게, 하셨습, 니다…….”
“아하?”
우악스레 엉덩이를 만지던 손이 뚝 멈추자 그는 곧 닥칠 불호령을 생각하며 떨었으나, 이어진 것은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리비아가 그의 부푼 성기를 속옷 위로 그러쥔 것이다.
“이걸 밟히는 꿈이었단 말이죠?”
“예, 그렇, 습……!”
“기특한걸.”
그녀는 채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속옷을 끌어 내리며 진득한 미소를 내걸었다. 생각보다 색이 엷은 불그스름한 귀두가 이미 선액에 젖어 미끌미끌하게 빛나고 있었다. 얄팍한 천이 내려가자마자 튕기듯 드러난 성기는 핏줄이 우둘투둘하게 돋아 대단히 흉험하게 보였다. 리비아는 제 입술을 핥으며 재차 물었다.
“순결한 몸이라고 했었나요, 미셸?”
“…….”
그는 차마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를 삐걱삐걱 끄덕였다. 리비아는 너른 마음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그는 거진 숨조차 쉬지 못하고 홉뜨인 눈으로 제 성기를 감아쥔 손을 바라보느라 바빴으니까.
색이 생각보다 엷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성기를 기준으로 했을 때의 일이다. 리비아의 하얀 손가락과는 흑백에 가까울 정도로 대조적인 색을 띠어 대단히 선정적이었다. 그녀는 그의 체액으로 손이 더럽혀지는 것도 마다치 않고 가늠하듯 선단에서부터 뿌리 부근까지 느릿느릿 어루만지며 숨을 골랐다. 이런 음란한 몸뚱이로 순종하는 순결한 수컷이라니, 먹어 치우지 않을 수 없잖은가. 그녀는 기둥을 꾹 틀어쥔 채 손톱을 세워 요도를 지그시 눌렀다.
“너무 기대하지 말아요, 마음이 약해질 것 같으니까.”
“그, 그런 사실 없습니다.”
“울지도 말고. 오늘은 처음이니 말로 다스릴게요. 앞으로 단둘이 있을 땐 내 시선 위에 있지 말아요. 미슐레 호엔베르크.”
“흐, 읏……, 예, 예…….”
그는 꼴사나운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부들부들 떨면서 꿋꿋하게 대답했다. 리비아는 목덜미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그를 즐겁게 바라보며 성기를 내팽개쳤다. 벌써 손끝에 쿰쿰한 냄새가 밴 것만 같았다.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그녀가 손을 뗀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농락당한 채 절정에 다다르지도 못한 성기가 욱신거렸으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를뿐더러 그녀의 마음이 바뀔 것이 훨씬 두려워 끙끙 앓을 뿐이었다. 리비아는 구두 굽으로 그의 무릎을 툭툭 쳤다.
“벌려요. 앞으로 무릎을 꿇을 땐 다리를 벌리고 앉도록.”
“……예.”
“이제 깨끗하게 해 줘요.”
설탕 과자처럼 하얀 귀부인의 손끝이 그의 입술 위에 얹혔다. 어울리지 않는 비릿하고 시큼한 냄새와 매일같이 그녀가 손에 바르는 크림의 향이 뒤섞여 콧속을 찔렀다. 순간 아랫도리가 욱신거릴 정도로 배덕적인 흥분감이 치고 올랐다. 남자는 불안한 눈으로 주인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을 벌렸다. 이것이 옳다는 듯 오연하게 내려다보는 그 비인간적인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척추가 오싹거렸다.
“옳지.”
“하아…….”
벌어진 입술 사이로 두툼한 혀가 기어 나와 그녀의 손끝을 간질였다. 뻣뻣했던 혀가 점차 범위를 늘리며 유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끝의 말랑말랑한 살을 핥다가, 손톱과 첫마디를 둥글리며 입 안으로 끌어들였다. 쪽 하는 소리가 울리자 그는 마치 추잡스럽게 먹이에 고개를 처박은 기분이 되어 귀를 벌겋게 붉혔으나, 그녀의 남은 손이 시야에, 정확히는 스스로 치맛자락을 살금살금 걷어 올리는 것이 보이자 홀린 듯 손가락을 빨기 시작했다. 마치 젖줄이라도 문 것마냥 필사적으로 그녀의 손샅이 입술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입 안에 밀어 넣고 옅은 헛구역질을 삼켜 가며 타액과 살덩이로 열과 성을 다해 닦았다.
“후, 흐웃…….”
그는 눈앞에서 그녀의 스타킹이 보이기 시작하자 눈에 핏발이 설 듯 열렬한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가 손가락을 바꿔 물리는 것도 아랑곳 않고 혀를 놀려 댔다.
“허윽!”
“기다려.”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생에 처음으로, 수음이 아닌 절정을 맞이했다. 그녀의 구둣발에 귀두를 짓밟혀 저도 모르게 그녀의 다리를 만지려 뻗었던 손으로 허공을 더듬으면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뇌가 녹아내릴 듯 강렬한 오르가즘에 젖어 수치도 모른 채 소변처럼 맹렬하게 정액을 싸갈겼다. 카펫은 물론이요. 그녀의 의자 아래까지 넓게 더럽힌 백탁액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그는 간헐적으로 경련하며 더듬더듬 눈을 들어 리비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늘 희었던 뺨을 혈색 좋게 붉힌 채 그날 밤 훔쳐보았던 것보다 훨씬 관능적으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자질이 있음에 감사하세요, 수캐답지 못한 손버릇 때문에 기가 질릴 뻔한 참이었는데…….”
여즉 그의 입 안에서 혓바닥을 가볍게 누르고 있던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질척하게 젖은 섬섬옥수가 남자의 입을 손아귀로 가로질러 하악을 우악스레 틀어쥐었다.
“처지를 알고 있는 이것 덕분에 산 줄 알도록 해요.”
“우, 웃……!”
귀두를 밟은 구둣발에 힘이 보태지자 절로 신음이 비어졌다. 그녀는 배부른 포식자처럼 얕은 한숨을 내뱉으며 다른 한 손으로 무릎까지 걷어 올린 자신의 치마 끝단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가벼운 실내용 드레스 속에는 팬티조차 없었다.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헛숨을 들이켜며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짓밟힌 성기를 바닥에 문지르려 허리를 들썩거렸다.
“이다음도 내가 가르쳐야 할까요?”
“아니, 아닙니다, 부인, 잘, 할 수, 우……, 있…….”
“그건 내가 판단하는 거예요.”
생긋 웃으며 고압적으로 뇌까린 그녀는 턱을 살짝 치켜든 채 제 무릎을 좀 더 넓게 벌리고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그늘진 탓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명백히 하얀 둔덕이 드러났다.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스물아홉 평생 자신을 인간이라고 믿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확신하며 살았던 여생을 그녀의 다리 사이에 팔아넘기고, 굶주린 들개처럼 헉헉거리며 열이 올라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애절하게 올려다보았다. 리비아는 늘 상상만 해 왔던 그의 무너진 모습에 희열을 느끼며 장미가 흐드러지듯 환히 웃었다.
“이리 온, 미셸.”
사방이 컴컴했다. 치마 속에 고개를 처박은 그는 모든 것을 잊고 그저 코앞에 놓인 살결에 취해 헐떡였다.
남자는 덥고 습한 공기를 깊게 들이켜며 떨리는 혀를 내어 둔덕을 핥았다. 털 한 올 없이 미끈한 살집, 하물며 그것이 사모해 왔던 주인의 것이니 더 망설일 겨를이 있을까.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홀린 듯 음열을 혀끝으로 가르며 고개를 처박았다. 이미 타액과는 다른 것으로 미끌미끌하게 젖은 점막을 긴장으로 뻣뻣해진 살덩이가 훑어 내리자 그녀가 좀 더 핥기 좋도록 앉은 자세를 비스듬히 고쳐 주었다.
“하, 아, 후으…….”
쯥 하고 빨아 올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자신이 낸 추잡한 소리에 일순 등줄기를 굳혔다가, 그녀가 묵인하자 천천히 확인하듯 행위를 이었다. 반쯤 발기한 클리토리스를 혓바닥으로 문지르다가 코끝이 음부에 닿는 것도 개의치 않고 아래로 고개를 내려 즙이 비어지는 구멍을 찔렀다. 벌름거리며 혀끝을 간지럽히는 것에 눈이 뒤집힌 미슐레가 본능적으로 질구를 후비듯 열렬히 핥기 시작하자 리비아도 바닥에 편안히 늘어뜨렸던 다리를 움찔거렸다.
대단한 요령은 없었지만 수치도 주저도 없이 그저 명령과 욕망을 따라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또 다른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팔걸이를 꾹 쥐며 나른하게 숨을 내뱉었다. 몸 쓰는 일에 원체 능해 얼마 되지 않아 혀를 놀리는 것에 적응한 남자가 그녀의 질구에 깊이 혀를 밀어 넣었다.
“아……!”
발끝이 절로 곱아들었다. 갑작스러운 신음에 놀란 듯 굳어 버린 그의 머리를 제 치맛자락 위로 쓰다듬자 옳게 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작정하고 혀를 놀리며 울컥울컥 새는 애액을 쭈웁 소리가 나도록 맹렬하게 빨아 댔다. 그녀의 새하얀 치맛자락을 미사보처럼 뒤집어쓴 순결한 기사가 내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적나라하고 저속한 정사의 소음이었다.
리비아는 그의 머리를 꾹 눌러 움직임을 재촉하면서 구멍을 채운 혓바닥을 조였다. 커다란 덩치에 따라 두툼하고 긴 혀가 제법 부피감 있게 안을 메운 것이 흡족했다. 미끄러운 점막을 상대적으로 거친 혓바닥이 훑으며 밀려들었다가 강하게 빨아 올린 뒤 빠져나가는 감각을 만끽하면서 그의 두꺼운 허벅지를 사뿐히 지르밟은 그녀가 얕게 앓는 소리를 내자, 사내가 질벽을 애무하다 빠져나온 혓바닥으로 애교를 부리듯이 회음 언저리에서부터 클리토리스까지 짓누르듯 힘을 주어 길게 핥아 올린 뒤 이를 살짝 세워 클리토리스를 갉작였다.
“흑……, 미셸…….”
순전히 그녀의 쾌락에 집중했기에 가능한 반응이었다. 그는 유순하게 그녀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은 채 살을 맞대는 것만으로 만족하는지 손으로 의자 다리와 팔걸이 어림을 붙잡은 채 순종했다. 숱한 사내들이 제대로 배우지 못해 그녀의 심기를 상하게 한 것과 달리 고분고분한 태도를 일찍이 갖춘 미슐레의 행태에 흡족해진 리비아가 그의 허벅지 위에 올려 두었던 자신의 발을 내려 그의 좆대를 구두코로 훑으며 내려가 고환을 발 아래 두었다. 아프지 않도록 무게를 싣지 않으면서도 명백하게 신발 밑창의 딱딱하고 메마른 감촉이 느껴질 정도로 조절하며 지르밟아 주자 그가 음부에 입을 묻은 채 돼지처럼 울부짖는 듯한 신음을 터뜨렸다.
“왜 그러나요, 미셸? 멱 따인 짐승처럼.”
그녀는 살풋 발을 들어 올렸다가 톡톡 두드리듯 가볍게 다시금 그의 고환을 밟으며 그의 뒤통수를 안듯이 손으로 눌러 제 다리 사이에 품고는 성기를 괴롭히던 두 발을 그의 허벅지 위에 올렸다.
“벗겨 줘요.”
“후읍, 허억, 아, 부인…….”
“네에, 나의 미셸.”
“아아…….”
그는 보통 사람이라면 놀라거나 불쾌해할 상황에서 순전히 전율하며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게걸스럽게 빨아 댔다. 제 머리통 위에 놓인 그녀의 얄따란 손가락이 간헐적으로 움칠 떨리는 감각에 자신이 옳은 봉사를 하고 있다는 확신이 서자 그야말로 광신적으로 애무하면서. 앞을 보지 못한 채 그녀의 구두를 벗기려니 헛손질이 대단했다. 남자는 그녀의 종아리와 얇은 발목에 손이 닿을 때마다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혀와 코끝을 음부에 치댔다. 드디어 구두가 벗겨져 바닥을 나뒹굴자 리비아가 칭찬처럼 그의 손을 떨치지 않고 방관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발을 어루만지다 온몸을 경직시킨 채 파들파들 떨었다.
“어머.”
열락 어린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그녀는 제 발을 받친 그의 손을 짓밟으며 속삭였다.
“가 버렸나요?”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뇌가 녹는 듯하다’는 상투적인 문구를 몸으로 단단히 이해했다. 덥고 습한 다리 사이에서 세상을 등진 채 고개를 처박고 진솔하게 짐승으로서 취급받고 있으니 그간의 고뇌가 모두 헛것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저 그녀의 감촉과 소리에만 온 신경을 쏟으면 되는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행복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가 버, 렸, 웁…….”
“귀여워라.”
“부인…….”
“네에.”
그는 눈앞이 어질어질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에 휩싸인 채 낯설 정도로 매끄러운 스타킹으로 감싸인 발이 부드럽게 제 성기 위에 내리는 감촉에 몸을 떨었다.
“아아…….”
“이런 거로도 좋은가요? 이전의 몇몇 개들은 버티지 못하고 울거나 화를 내곤 하던데.”
“예, 부인, 흐윽……!”
리비아는 그의 순종에 화답하듯 성기를 지르밟은 채 부드럽게 앞뒤로 문질러 주며 허연 손마디가 두드러질 정도로 팔걸이를 힘껏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쾌락에 겨워 뻐끔거리는 입술이 사타구니에 연신 부대끼는데도 개의치 않는 그녀의 사뿐한 손짓을 따라 손아귀 힘을 풀자, 그대로 리비아의 맨 무릎 위로 이끌렸다.
“하악, 웃……!”
“충분히 느껴도 좋아요, 미셸.”
“부인, 부인…… 아……!”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득달같이 달라붙은 그의 손은 땀에 젖어 습하고 덥혀져 색스런 감촉이 들었다. 단단하고 커다란 손가락이 욕망을 숨기지 않고 애무하듯 종아리와 동그마한 무릎을 만지다 허벅지로 기어와 부드러운 살집을 쥐어 벌리더니 게걸스러운 주둥이가 음열을 벗어나 그녀의 서혜부나 허벅지 안쪽 따위를 입술로 문지르고, 혀로 핥고, 감히 이를 세우지는 못해 몇 번이고 격정적으로 입을 맞춰 댔다. 리비아는 그런 수컷의 귀두를 특히 공들여 밟아 문지르다 그의 헐떡임이 가빠지자 미련 없이 발을 떼어 내곤 배를 걷어차 떨어뜨렸다.
“하아, 흣…….”
경위 모를 체액으로 낯짝을 번들번들하게 적신 미슐레가 생리적인 눈물이 고인 파란 눈으로 그녀를 애절하게 올려다보았다. 별반 아프기는커녕 무게감조차 위력적이지 않았을 텐데도 버틸 생각 따윈 하등 없는 듯 그녀의 오금 언저리를 어루만지며 구걸하듯 치맛자락에 입술을 맞췄다.
“허락도 없이 사정하려고 했죠?”
리비아는 제 치맛자락에 매달린 그의 머리채를 잡아 일으키며 속삭였다. 미슐레는 그 산뜻한 손길에 따라 상체를 반듯하게 세운 채 그녀가 일러 주었던 대로 흐트러졌던 자세를 가다듬어 다리를 벌린 채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자신의 순결에 감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미셸. 다행히 내가 무지한 수컷에겐 너그러우니까.”
그녀는 짧게 웃음을 덧붙이며 그의 어깨를 짚고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모아 쥐었다. 미슐레는 얼어붙어 거친 숨을 내쉴 뿐 그 자리에 못 박혀 그녀가 다리를 벌리고, 자신의 다리를 그 사이에 가둔 채 바로 눈앞에 조금 전까지 자신이 핥고 빨았던 음부를 들춰 보여 주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열렬하게 보지 말아요, 지금부터는 빨게 해 줄 순 없으니까.”
“어째서…….”
“그야 이제…….”
미슐레의 눈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가 자세를 낮춘 탓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허벅지 위로 올라앉은 부드러운 살집의 감촉에 머리가 하얗게 비는 것을 느끼며 망연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한참이나 괴롭혀진 뒤 방치되어 쿠퍼액과 정액으로 끝부분이 얼룩덜룩한 귀두가 그녀의 도톰한 둔덕에 닿았다.
“으응……!”
비대하다 싶을 만큼 두꺼운 선단이 그녀의 구멍을 비집으며 천천히 삼켜졌다. 리비아는 제 치맛자락이 마구잡이로 구겨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힘껏 움켜쥐어 들춘 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삼켜 본 수컷 중 이런 크기는 겪어 본 적 없었던 탓에 절로 입술이 벌어졌다. 울뚝불뚝하게 돋아 있던 핏줄이 달아 있던 내벽을 긁는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젖은 점막이 벌어지며 희미하게 질꺽대는 소리가 났지만 가빠진 그들의 숨소리에 묻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미슐레는 결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던 압도적인 쾌락에 겨워 몸을 벌벌 떨면서 자제하지 못한 힘으로 그녀를 다치게 할까 봐 제 무릎을 틀어쥐고 사정감을 참았다. 지나치게 좁고, 움틀거리는, 조금 전까지 자신의 혀로 헤쳤던 구멍이 좆대를 꾸역꾸역 집어삼키는 감각에 이지가 녹아내렸다. 그는 공작에 대한 죄악감을 깜빡 잊고 애절하게 리비아를 불렀다.
“아, 부인, 너무……, 아……!”
“하, 하으, 읏…….”
분명 뿌리까지 삼키지 못했는데도 한계였다. 리비아는 기분 좋은 곳을 온통 메운 성기를 힘껏 죄며 파르르 떨었다. 강렬한 부피감이 주는 포만감을 닮은 쾌락에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말없이 숨을 고르던 그녀는 자못 여유롭게 어깨를 짚었던 손으로 남자의 뺨을 훑으며 귓바퀴 언저리를 지나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그를 깔아 보며 미소 지었다.
“이제 순결을 논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군요, 미셸.”
“아…… 부인, 조이시면, 흣!”
“움직이진 말고.”
그의 열띤 시선이 접합부에 와 닿는 감각을 만끽한 리비아가 미련 없이 모아 쥐었던 치맛자락을 놓아주고는 뱀처럼 유연하게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품에 파고들었다.
“괜찮아요, 아무도 모르니까.”
리비아는 마치 자신들마저 배제한 듯 말했다. 정녕 달고 상냥한 유혹이었다.
“그렇죠?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요.”
쪽, 하고 그의 귓가에 소리 내어 입 맞춘 리비아가 그의 어깨 위에 놓인 제 팔뚝에 뺨을 기대며 뭉근하게 허리를 돌렸다. 느릿하게 달라붙었던 점막이 휘저어지며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넋이 나가 그녀가 무어라 말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작정 고개를 주억거렸다. 산 채로 녹아내리는 듯한 감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는 허락 없이 가지 말라고 말하고서는 비정할 정도로 제멋대로 그의 성기를 농락했다. 덜컥 빠져나갔다가 확 주저앉으며 깊이 삼키고, 쥐어짜듯 자비 없이 조이면서 삼켰다가 빼내기를 반복했다. 허벅지 위로 그녀의 엉덩이가 부딪히고 치맛자락이 팔락거리며 그의 한계를 시험했으나 실망하게 해 내팽개쳐질 수는 없었다. 상황이 어떻든 주군께 봉사하는 것이 기사이므로, 그는 이를 악다문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아, 앙, 흐읏……!”
미슐레는 유일하게 자유로운 눈으로 그녀의 달뜬 얼굴을 샅샅이 핥았다. 늘 고왔던 아미가 일그러지고, 희미하게 색이 지워진 입술은 바쁘게 달싹이며 신음을 뱉었다. 잇새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혀에 시선을 사로잡힌 그는 척추를 달구는 쾌락에 몸서리치며 헐떡거렸다. 제 가슴팍에 뭉그러지는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 싶은 욕망을 꾸역꾸역 삼키면서 살이 닿은 곳에 열이 피는 감각을 견디며,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부인, 아, 제발…….”
그녀를 부르며 형태 없는 구걸을 뇌까리는 것뿐이었다.
“아, 흣! 미셸……, 얌전히…… 응, 있, 어요……!”
“죄송, 하, 합니, 아……!”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진저리를 치듯 고개를 내저으며 헐떡거렸다. 절로 들썩이려는 허리를 몇 번째인지 모르게 의식적으로 내리누르며 그녀의 품에 딸려 들어가듯 몸을 엉성하게 숙인 채 버텼다. 리비아는 퍽퍽거리며 살 치는 소리가 요란할 만큼 힘껏 허리를 내리며 성기를 깊이 삼킨 채 둥글게 돌렸다. 그의 잇새로 우는 듯한 신음이 터져 나오는 것에 웃음을 삼키며 제 드레스 가슴팍의 단추를 풀어 헤쳤다. 곧장 그의 시선이 날아와 박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비아는 손을 멈추지 않고 앞섶을 풀어 헤쳐 가슴을 드러냈다. 아래와 동일하게 속옷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맨가슴이었다. 그녀는 부러 옷을 양옆으로 젖히고 가슴을 끄집어냈다.
남자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그녀의 가슴을 홀린 듯 보고 있었다. 옷을 껴입은 상태로도 상당한 굴곡을 보였지만, 짓누르는 것 없이 드러난 살덩이는 그보다 훨씬 커다랬다. 뾰족하게 도드라진 유두를 바라보며 침을 삼키자 리비아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상이에요, 미셸.”
에두른 허락이 떨어지자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처박았다. 허덕거리는 숨소리가 뭉개져 더운 숨과 함께 살집 사이로 파고들자 달뜬 숨을 내쉰 리비아가 허리를 흔들며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미슐레는 갈증 난 개가 물을 핥듯 그녀의 가슴을 온통 혀와 입술로 문지르고 빨며 애무하면서 뺨과 얼굴을 막무가내로 비벼 댔다. 아래로 풀 수 없는 격정을 해소하듯 다분히 짐승적인 움직임이었으나, 리비아는 오히려 그것이 기꺼워 좀 더 빠르고 얕게 허리를 놀려 댔다.
그 움직임에 따라 가슴이 출렁거리자 남자 역시 달아올라 그녀의 가슴을 크게 베어 물었다. 한입 가득 유륜과 근처의 살집을 문 채 힘껏 빨아 올리며 아랫구멍을 후볐을 때처럼 뭉그러뜨리듯 유두를 혀로 핥아 대자 그녀의 몸뚱이가 파르르 떨렸다.
“응, 하아, 미셸, 아, 미셸……!”
열락에 달뜬 목소리로 불러 주는 애칭이 좋았다. 그녀의 가혹한 취급이나 완전히 해소되지 못한 욕정 따위는 그것에 비하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는 리비아의 열락에 응하듯 그녀의 등허리를 팔뚝으로 받쳐 안고 열성적으로 가슴을 빨았다.
“흐응……!”
내벽이 이전과 비할 수 없을 만큼 억척스럽게 그의 좆대를 쥐어짜며 경련했다. 미끌미끌한 애액이 울컥 터져 나와 남자의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미슐레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절정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오르가즘으로 몽롱해진 리비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 안 살을 깨물어 사정감을 참았다. 아직 싸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지 않은 까닭이었다.
“하아…….”
리비아는 몽롱하게 풀린 눈을 반쯤 내리뜨고 느릿느릿 깜빡이다가, 쾌락이 잦아들고서야 그의 팔을 떼어 내고 천천히 일어나 성기를 끄집어냈다. 그녀의 애액을 한껏 뒤집어쓴 검붉은 선단이 번들번들했다.
여자는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한층 더 흉하게 핏줄이 불거진 성기를 한 손으로 받치듯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용케 참았군요.”
“부인께서, 허하지 않으셨기에…….”
“맞아요, 훌륭한 자세예요. 앞으로도 응당 이리 하도록.”
“예.”
미슐레가 안심한 듯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풋 숙였다. 다음이 있다는 것은 그녀와 ‘그런’ 사이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순수한 환희와 저열한 희열이 뒤엉켰다.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그녀를 지켜본 적도 없는 고만고만한 것들과 자신은 다르다는 우월감.
여자는 그의 속을 훤히 꿰뚫어 보면서도 별말 없이 웃는 낯으로 미슐레를 반쯤 일으켜 무릎으로 서게 하곤 손에 쥔 그의 성기를 자신의 음부에 끼웠다. 정확히는 음열과 허벅지 사이에.
“이제 움직여도 좋아요.”
“읏…….”
“삽입은 안 되지만…… 뭐, 이런 거로도 갈 수 있다면 사정은 해도 좋아요.”
“가, 감사합니다.”
그는 사양도 없이 천천히 허리를 놀려 보았다. 처음인 탓에 어색하고 둔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녀의 살결에 감싸인 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이 대단했다. 리비아 역시 느릿하게 그에게 맞춰 허리를 흔들며 그의 유두를 긁어 주었다.
“흐읏……!”
“말을 타는 감각과 비슷하게 여겨 봐요, 흔든다고 의식하지 말고.”
“이렇, 게…… 말씀이십니까.”
“네, 그렇게…….”
잠깐 평이해졌던 숨결이 점차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리비아는 그의 유두를 괴롭혀 주며 무릎을 세운 채 바짝 몸을 붙이고 목덜미와 빗장뼈 언저리를 핥고 깨물었다. 금세 유연해진 허릿짓으로 음열 사이를 기둥으로 쓸어 대는 그를 기특히 여겨 허벅지를 바짝 붙인 채 턱선에 입술을 묻고 나직하게 신음했다.
“아, 부인, 안고, 시, 싶습……니다, 허락을…….”
“좋아요.”
“흐윽……!”
리비아가 유두를 사납게 잡아당기자 그의 고개가 절로 뒤로 젖혀졌다. 미슐레는 움직임을 잠깐 멈춘 채 숨을 고른 뒤에야 리비아의 등허리를 두 팔로 부드럽게 둘러 안은 채 속도를 붙여 허리를 흔들었다. 젖은 살이 쩍쩍 들러붙는 소리 사이로, 그의 애달픈 부름이 섞여 들었다. 이름이 채 되지 못한 억눌린 신음이거나 부인이라는 단어뿐이었지만 고조되는 허릿짓만 보아도 남자의 절정이 머지않았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리비아는 양손으로 그의 엉덩이를 꽉 틀어쥐고 주무르며 고개를 빼 들고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싸도 좋아요, 미셸.”
“흐, 부인, 하윽……!”
꽉 잠긴 목소리가 울 것처럼 덜덜 떨리는 순간 미슐레가 사정했다. 귀두가 질구 언저리에 걸쳐져 있는 채로 벌벌 떨면서 그녀의 목소리와 손길만으로 절정에 이른 것이다. 그는 자신이 유두와 엉덩이를 희롱당하며 절정했다는 사실에 경악하기는커녕 안도했다. 과욕 부리지 않고 베풀어 주시는 것에 만족할 수 있는 몸뚱이라는 사실에.
“귀여워라……, 퍽 민감하군요.”
쪽쪽 소리를 내며 그의 뺨에 입 맞춘 리비아는 얼빠진 사람처럼 물렁하게 풀린 그의 낯짝을 지긋이 감상했다. 타인에게 하여금 위압감과 공포만 주는 얼굴이 제 손아귀에서 이렇게 형편없이 녹아내린 꼴을 보아하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절정의 여운으로 힘이 빠진 그의 팔을 밀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탁액으로 범벅이 된 자신의 다리 사이를 흘긋 보았다. 한 번 빼낸 뒤임에도 불구하고 양이 대단했다. 손끝으로 끈적하기 짝이 없는 액체를 쓸어 보았다. 반쯤 앞으로 거꾸러졌던 미슐레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홀린 듯 혀를 빼고 헐떡이다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린 정액이 스타킹까지 내려오자 길게 핥아 올려 닦아 냈다.
“어머?”
“하아…….”
리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감로라도 핥는 듯 자신의 정액을 샅샅이 핥아 삼키며 혀로 그녀의 살갗을 닦아 냈다. 그는 굴욕적인 봉사로 등골이 쭈뼛거릴 만큼 흥분하고 있는 자신의 본성을 무리 없이 수용했다. 동시에 절절히 깨달았다. 리비아 모브레이의 앞에서는 어떤 무력을 가지고 있든, 얼마나 강력하든 간에 자신은 한낱 수컷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기도, 원하죠?”
“……예.”
정액으로 더럽혀진 사타구니를 드러내며 조소하는 그녀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다시금 다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혀를 놀리는 순간 자신을 꿰뚫는 황홀한 희열에 벌벌 떨면서.
* * *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그녀의 호의 덕분에 감히 공작 부인의 욕실에서 몸을 씻을 수 있었다. 지나친 호사에 거절하려 하자 ‘찝찝한 냄새가 나는 수컷을 침대에 들일 수는 없잖아요’ 하고 한마디로 일축한 탓에 더 입을 떼지 못하고 얌전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그녀의 전속 시녀가 시중까지 들어 주어 눈이 떨렸음에도 불구하고 시녀는 단출하게 ‘원래 제 주된 임무가 이것이니까요’ 하고 심란한 말로 그를 위로했을 뿐 절대 놓아주지는 않았다.
그는 구겨진 제복까지 세탁을 빌미로 빼앗기고는 커다란 샤워 가운 하나만 걸친 채 밖으로 쭈뼛거리며 걸어 나왔다. 리비아는 진작 다른 욕실에서 씻었는지 새 슬립으로 갈아입은 채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책상 앞에서 서류 더미를 읽고 있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부인.”
“아, 미셸.”
그녀는 콧등에 걸친 안경을 추켜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이리 와요.”
“……예.”
그는 얌전히 그녀에게 다가가 의자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일찍이 그녀가 시켰듯 다리를 벌린 채로. 그 탓에 가운 앞섶이 벌어지며 허벅다리가 드러나 수치스러웠지만 명령받은 것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달아오른 뺨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얌전히 기다렸다.
“예쁘기도 하지.”
“…….”
리비아는 그의 관자놀이 언저리에서부터 귓바퀴와 뺨을 지나 턱까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내려와 숙인 고개를 들도록 턱을 들어 올렸다. 미슐레는 주인의 손을 떨치지 못하고 얇은 슬립 위로 도드라진 그녀의 유두와 훤히 드러난 빗장뼈 따위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랫도리에 재차 피가 몰리는 기분에 눈을 질끈 감자 리비아가 의자를 조금 뒤로 물리고 제 허벅지를 툭툭 쳤다.
“좀 더 가까이.”
“……예.”
남자가 손짓하는 대로 허벅지 위에 턱을 괴자 그녀는 만족스러운지 화사하게 웃었다. 완벽한 개 취급에 오싹오싹해진 그가 몸을 잘게 떨자 그녀가 진득하게 목덜미를 쓰다듬다 가운 옷깃 아래로 손가락을 밀어 넣고 단단한 어깨를 근육 선을 따라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곁방을 내어 줄 테니 앞으로는 이 층에서 생활하도록 해요.”
“그…… 시녀분께서 지내시는 방이지 않습니까?”
“필요해서 찾는 게 아니고서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불편해서요.”
“……따르겠습니다.”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속절없이 달아오른 숨을 삼키며 되도록 평이하게 대꾸했다. 어쩔 수 없이 이미 벌어진 앞자락 사이로 성기가 비집고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 개여서 괜찮은 것인지, 매번 부르기가 귀찮을 정도로 곁에 두고 희롱할 셈이기 때문에 방을 내어 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확한 것은 그 어느 쪽이든 간에 자신은 그저 황홀하다는 것이었다.
리비아는 정말 커다란 애완견을 대하듯 반쯤 마른 그의 머리카락을 느릿느릿 손으로 쓰다듬다 그 머리통 위에 손을 얹어 둔 채 몇 장 남지 않은 서류를 꼼꼼히 읽고, 가주의 인을 찍었다. 그 모든 것에 개의 시선이 따라다니는 것을 느낀 그녀는 짧게 웃으며 슬리퍼를 벗고 맨발로 그의 허벅지 위를 더듬어 가운 아래로 파고들었다.
“흐읏…….”
“보채지 말아요, 미셸. 참을성이 없군요.”
그는 얕게 허리를 들썩거리며 완전히 발기한 성기를 짓밟아 주길 기대했다.
“도대체 그동안은 어찌 참은 건가요? 이렇게 금방 안달이 나선…… 한번 범해진 것만으로 인간의 껍질을 다 팔아 치운 거예요?”
“……죄, 죄송합니다.”
“하기야, 일개 수캐가 수치를 알 리도 만무하죠, 제가 이해할게요.”
미슐레의 턱을 그러쥔 그녀는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아랫입술을 느릿하게 문지르다 천천히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남자는 수치로 얼굴을 붉힌 채면서도 순순히 입술을 벌려 그녀의 손끝을 혀로 간질였다.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핥아 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의 방을 옮기는 건 내일로 미루죠. 일어나요, 미셸.”
여자의 입이 잔혹하게 호선을 그렸다.
“아직 가르칠 게 많아 보이니까.”
* * *
요한 바이뎀 구르디예프, 5대 전 공작 레이븐 첼튼 모브레이가 비 오는 날 밤 불시에 데리고 들어온 마법사에서, 현 마법계를 주름잡는 대현자가 된 남자.
흔히들 고귀한 마법사는 머나먼 지평에서 날과 시를 알 수 없는 시점에, 마치 캔버스 위에 튄 물감처럼 보편적인 인간들과는 달리 이질감이 드는 모습으로 불현듯 나타난다고 일컫는 만큼 지당하고도 기대받은 그대로의 업적을 이루었으나 동시에 마녀의 붉은 머리와 질투의 녹색 눈을 가져 경원시 되는 자이기도 했다. 올해로 260을 넘긴 그는 제대로 나이나 출신을 밝힌 적 없이 유유히 공작가의 개인 별저에 칩거 생활을 하며 지내는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망할…….”
그런 신비하고 대단한 마법사께서는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공방 구석에 처박혀 늘 묶고 다니던 머리카락이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질 만큼 거칠게 머리를 헤집으며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다름 아니라 리비아 모브레이, 현 공작 부인의 사생활 때문이었다.
외부인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되레 의아해할 것이다. 그녀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는 있지만 그것은 고귀한 신분을 가진 젊은 과부들이 흔히 겪는 일이었으며, 그 지위의 특수함을 고려한다면 지당하다 못해 당연한 일이었다. 외려 이러한 소란이 일지 않았다면 그녀 개인에게 어떤 대단한 흠결이 있지는 않은지 의심해 봐야 할 정도로.
무엇보다 귀족들의 성생활이 난잡한 것이야 흔하지는 않았지만 그리 드물지도 않았고, 첩을 여럿 거느린 사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가 이토록 역정을 내는 것은 개인적인 이유와 공적인 이유가 동시에 존재했다. 개인적인 이유는 그가 그 보잘것없는 작위와 알량한 무형의 힘만 믿고 천박하게 구는 머저리들을 세상에서 가장 혐오한다는 것이었고, 공적인 이유는 요한 구르디예프가 바로 공작의 오른팔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레이븐 모브레이가 자신을 공작가의 식구로 받아들인 이래 5대째 공작들의 고문이자 포웰 공작가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일’을 수행하는 힘의 화신으로 살았다.
요컨대 리비아를 그의 처지에서 보면 굴러들어 온 돌이 못 견디게 싫은 짓들만을 보란 듯이 골라 하며 열 손가락에 모조리 거스러미를 만들어 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요한은 남들이 쑥덕이는 말은 좀처럼 듣지 않았다. 그것이 옳건 그르건 자신이 그들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확신과 객관적 판단이 함께하기에 가능한 독선이지만, 그런데도 딱 한 가지, 체면에 대한 것만은 좀처럼 견디지를 못했다.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붉은 머리칼과 대단한 업적을 싸잡아 마녀의 자식일 것이라느니, 악마와 계약을 했을 거라느니 하는 뜬구름 잡는 소문들에 시달리는 만큼 당연한 강박이었다.
게다가 그는 모브레이, 나아가 포웰 공작가라는 이름을 마치 제 새끼처럼 병적으로 싸고돌기까지 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가야만 하는 그에게 있어 모브레이는 유일하게 곁에 남은 가치였다. 사람은 죽지만 가문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 방종맞은 아랫도릴 가만두는 날이 없어!”
그는 중요한 지위에, 심지어 공작가 내에서 수백 년을 지낸 만큼 온갖 곳들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굳이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내부 사람이라면 충분히 캐낼 수 있는 것이 공작 부인의 문란한 생활이었고, 그것을 빌미 삼아 방계, 혹은 외부인들이 물어뜯을까 저어되어 온갖 성질과 협박을 부려 가며 내방 요청을 쳐 내고 외부인이 쑤석댈 수 없도록 마법적인 영역에서까지 힘을 쏟고 있건만, 이 미친 계집은 주의를 주었음에도 말을 듣질 않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제 제 호위 기사와 배를 붙이고 있단 소리까지 들려오니 그가 열이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리비아 모브레이는 약속을 지켰다. 그녀는 저택 밖으로는 일체 나가는 일 없이 조용히 지내고 있고, 갖고 놀던 애인도 내보낸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면 무엇 할까, 호위 기사와의 스캔들이라는 것이 외려 남들에게 오르내리기 좋은 일인데.
차라리 이런 계산을 못할 만치 멍청했더라면 범인들이 으레 그러하겠거니 하고 이해라도 할 텐데, 모든 귀부인의 모범, 소녀들의 교본, 수도 제일의 꽃 따위의 온갖 칭송을 들어 먹는 여자가 이러고 있으니 고의가 아닐 수 없지 않은가.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것들을 용서한 적이 없었다.
문제는 이 부분에서 발생한다. 외부인이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철저히 응징하고 제 뜻대로 되도록 했겠지만, 리비아 모브레이는 ‘모브레이’였다. 동시에 포웰 공작 부인이기도 했고, 조르주 모브레이가 사망한 지금 유일한 모브레이가의 주인인 몸이었다. 자신이 그리 끔찍이 여기는 그 이름들을 모조리 손에 걸머쥔 여자에게 해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물론 알고 있겠지, 그러니 이렇게 믿는 구석이 있는 양 난장을 부리는 것일 테고…….’
요한 구르디예프는 이 사실이 못내 싫고 열이 끓었다. 이름 외엔 그 무엇도 마땅히 가진 것이 없는 주제에 자신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있지 않은가. 그 이름만 없었다면, 하다못해 조르주가……!
요한은 다시 한번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머리를 식히려 노력했다. 아무리 열이 오른다고 해도 이미 죽은, 그것도 진정한 모브레이의 아이에게 탓을 돌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남자는 딱딱한 책상 위에 팔을 괴고 한참이나 고민을 이었다.
* * *
“벗어요. 음, 여기만?”
아침 훈련과 정례 회의 따위의 기사단 내 일과를 마치고 별저로 복귀하여 호위 대상인 그녀에게 돌아온 직후 떨어진 말이었다. 미슐레는 여즉 그날을 잊지 못하고 부끄러워했지만, 동시에 그녀에게 잡다한 수컷들이 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본분을 다하는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순순히 제복 코트와 조끼 따위의 겉옷을 벗어 소파 위에 개켜 두고 셔츠 단추를 풀어 앞섶을 벌렸다. 뾰족하게 도드라진 유두가 설핏 불그스름했다.
“벌써 섰네요. 손으로 조금 만졌던 것뿐인데 벌써 이렇게 안달할 줄은…… 젖이 큰 사내들은 대체로 민감하다는 속설이 있던데 사실이었던 걸까요?”
리비아는 시키지 않아도 자신이 만지기 좋게끔 뒷짐을 지고 얌전히 선 미슐레의 발칙한 순종에 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툭툭 가볍게 그의 가슴을 쳤다.
“잘 모르겠습니다.”
무뚝뚝한 대꾸와 낯짝이었으나 그의 귓바퀴가 온통 불그스름함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는 묵묵하게 고개를 습관적으로 숙였다가, 신장 차이 탓에 외려 그녀에게 제 얼굴을 훤히 보이는 꼴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당신은 어때요, 미셸? 내가 보기에는 이쪽으로도 충분히 느끼는 것 같았는데…….”
리비아는 부드럽게 그의 품에 파고들어 고개를 기댄 채 손끝으로 유륜 테두리를 둥글리듯 어루만졌다.
“흣…….”
“대답.”
“추, 충분히…… 느꼈……습니다.”
“뭘요?”
그녀는 부러 짓궂은 물음을 던지며 순진한 낯을 꾸며 웃었다. 미슐레의 뺨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가슴, 으로…….”
“가슴으로?”
“성감을, 느, 느꼈습니다.”
“그렇군요.”
그녀는 하아아, 하고 더운 숨을 내뱉으며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달짝지근하게 속삭였다.
“다행이에요, 그렇다면 내가 조금만 더 가르치면 가슴만으로도 사정할 수 있게 되겠죠?”
“부, 부인…….”
“으응?”
미슐레는 그녀가 제 가슴팍에 뺨과 입술을 거리낌 없이 묻은 채 눈만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심장이 떨려 뻣뻣해진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자신에게 거부권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하며 눈을 내리깔고 순순히 대답했다.
“노력……, 하겠습니다.”
“좋아요.”
산뜻하게 웃으며 떨어진 리비아는 그의 가슴팍에 남은 자신의 립스틱 자국을 손끝으로 꾹 짓누르며 몸을 바싹 붙였다. 그날 밤을 상기시키듯 가슴이 그의 몸뚱이에 닿자 호흡이 대번에 거칠어지는 것이 우습고도 귀여웠다.
“당신은 젖이 크니까요, 마주 보고 허리를 쳐 댈 적에 가슴을 빨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좀 더 당신이 귀엽게 굴 줄 알게 되면 그때는 내 위에 올라탈 영광을 주겠어요, 미셸.”
“그……, 감사합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여길 수도 있을 법한 일방적인 밀어에도 불구하고 그는 황홀해하며 수줍게 감사를 표했다. 리비아는 그 우스운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유륜에 입 맞춘 뒤 쭙 소리가 나도록 빨아 올리며 엉덩이를 쥐고 제 쪽으로 바짝 당겼다. 그 산만 한 덩치가 아까울 정도로 순순히 몸을 내어놓고 휘둘리는 남자는 꽤 신선한 맛이 있었다.
“아, 흣…….”
미슐레는 여전히 자신의 몸뚱이 따위에 그녀가 욕정을 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으나, 동시에 그 욕망의 대상이 되어 황홀하다는 생각을 했다. 늘 우아하고 고상하던 그녀가 자신을 희롱해 준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
“집중해야죠.”
꽤 매서운 소리가 날 정도로 호되게 그의 엉덩이를 후려친 리비아가 독랄한 얼굴로 유두를 질근거리며 속삭였다.
“젖으로 가지 못하면 가게 될 때까지 손대지 않을 거예요.”
“죄, 죄송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으응, 손으로 만지는 법도 익혀 두도록 해요. 쥐어 봐.”
“……이렇게, 말, 말씀이십니까.”
미슐레는 제 오른쪽 젖꼭지를 꼬집듯 쥔 채 더듬더듬 리비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순종에 기분이 좋아진 듯 혀끝으로 질근댄 유실을 느리게 간지럽혀 주며 다소 뭉개진 발음으로 천천히 속삭였다.
“그래요, 어제 내가 해 줬던 것처럼 해요. 꼬집고, 살살 비벼서…… 그렇지, 애달픈 느낌이 들면 힘껏 꼬집으면서 당겨요.”
“하, 아…….”
“옳지, 다시 반복하면서…… 성기는 신경 쓰지 말아요. 지금 당신이 쓸 수 있는 건 유두밖에 없는걸요.”
“읏, 그렇지만…….”
“민망해서 그러는 건가요, 아니면 할 말이 있는 건가요?”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더운 숨과 함께 신음을 힘겹게 삼키곤 멈추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제 가슴을 여전히 애무하며 대꾸했다.
“그, 다름이 아니라, 구르디예프 경께……, 물론 모브레이가의 안주인이신 부인께서 그분께 휘둘려야 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만, 염려되어…….”
“뭐……, 이해해요, 워낙 예민하신 분이니까.”
그녀는 짤막하게 말을 토해 내고는 이를 세워 그의 유두를 아릴 만큼 질근거리다 쪽 소릴 내며 빨아들인 뒤 떨어져 주었다, 붉은 립스틱이 번져 퍽 색스러워 보이는 가슴에 만족스레 점점이 입 맞추며 자신의 배 언저리에서 묵직함을 자랑하는 그의 사타구니를 압박했다.
“그래도 당신이 걱정할 건 무엇 하나 없답니다. 당신과 그는 상성적으로 훨씬 당신이 유리하지 않나요?”
“그렇기야 합니다만……, 전투, 일 때나…… 해당하는 것이니까요. 그분께서는 공작가의 고문이시고……, 혹 부인의 심기를 어지럽히시진 않을까 하여……!”
리비아는 성의 없이 그의 엉덩이를 후려치며 가슴팍에 이를 세웠다. 미슐레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괜찮아요, 내가 모브레이인 이상 그는 내게 해될 만한 짓을 할 수 없고……. 당신에게 혹 해를 끼칠 성싶다면 그 전에 구르디예프 경의 히스테리를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예, 부인.”
순순히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숙여 보이는 남자의 뺨을 그러쥐고 발돋움을 해 뺨에 입 맞춘 리비아는 그를 침대로 이끌며 창밖을 둘러싼 녹음 너머에 있을 남자를 떠올리며 조소했다.
가엾고 우스운 요한.
* * *
모든 것이 순탄한 오후였다. 말인즉슨, 리비아 모브레이의 예상대로 흘러갔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요한 구르디예프가 다시금 항의 차원에서 별저에 방문한 지금처럼.
“부인.”
“안녕하세요, 구르디예프 경.”
테이블 위에 놓인 꽃병을 바라보고 있던 리비아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문간에 서 있을 남자에게 인사했다. 그러나 답은 돌아오지 않고 한참을 침묵으로 메운다. 예상대로였다.
리비아는 그의 머릿속을 얼추 꿰고 있었다. 온갖 날것 그대로의 가시 박힌 말들을 쏟아 내고 싶어 하면서도 차마 자신이 모브레이라서, 그 지긋지긋한 소리 그대로 포웰의 안주인이라 그 이름에 먹칠을 할까 봐 성질대로 모욕하지도 못한 채 입술이나 질근질근 씹고 있겠지.
“상의드릴 것이 있어 찾아뵀습니다만, 바쁘십니까?”
“아뇨, 설마요. 마침 근신 중이라 적적하던 참이었답니다. 설령 바빴더라도 구르디예프 경이라면 만사를 제쳐 두고 봬야지요.”
만개한 장미꽃의 중앙을 손톱으로 후벼 뭉개며 뒤를 돌아본 그녀가 산뜻하고도 정중하게 덧붙였다.
“서론이 긴 걸 워낙에 싫어하시니, 간단하게 용건만 나누는 게 어떠실는지요? 원하신다면 차라도 대접하겠지만…….”
“괜찮습니다, 부인과 한가하게 차를 들 만한 입장은 아니니까요.”
“어머, 개의치 않으셔도 되어요. 구르디예프 경께서는 우리 가문의 고문이시지 않나요. 가문의 머리가 저밖에 남지 않은 이상 경께서 많은 것들을 도와주셔야 하는걸요. 그리 사양하지 마세요.”
적막해진 방 안에서 요한의 이 갈리는 소리가 살벌하게 방 안을 울렸다. 네깟 것이 나와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처지라고 생각하느냔 말을 이딴 식으로 꺾어 자신이 겸손이라도 떤 듯 지껄이는 꼴에 화가 치밀었다.
‘우리 가문? 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제가 여태껏 난장을 부려 놓은 것을 누가 수습을 하고 다니는지 알기나 하는지 뻔뻔하게 치든 저 고개를 보노라면 복장이 뒤집혔다.
“부인께서는 스스로 체면에 대한 염려가 없으십니까?”
한참 뒤에야 화를 삭이는 데에 성공한 남자가 제 미간을 꾹 짚으며 물었다.
“제 체면……, 인가요?”
“그렇습니다.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나도는 줄은 알고 그리 방종한 생활을 하시는 것인지요?”
“방종하다니요?”
“잡아떼실……!”
“제가 사내 여럿을 한 번에 끼고 뒹굴기를 하였나요, 남편과 첩을 붙여다 관음을 즐겼나요, 계집종들을 침대 가득 불러다 방탕하게 밤을 지새우길 하였나요, 하다못해 부인이나 연인이 있는 자들을 겁박하여 희롱하기라도 했나요? 그 무엇도 하지 않았건만 대뜸 방종하다 하시는 저의를 모르겠어요.”
“무…….”
요한은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넋을 뺐다. 저 생긴 것만은 음전하고 우아한 여자가 무어라 지껄인 것인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성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몸뚱이가 반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요한 구르디예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여태껏 얼마든 속을 긁어도 인상이 일그러질지언정 낯빛이 변하는 인간은 아니었던 것을 떠올리면 얼마나 그가 당황하고 있는지 능히 짐작할 만했다. 리비아는 벌건 꽃물이 희미하게 든 손끝을 바라보다가 완전히 테이블을 등지고 서서 고개를 설핏 모로 기울였다.
“어찌 그러시나요, 구르디예프 경? 편찮으신 곳이 있다면 의원이라도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요한은 도대체 자신이 말을 제대로 듣긴 한 건지, 그저 열이 받아 잘못 들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리비아 역시 더 말을 붙이지 않고 멀끔한 척을 했으므로, 남자는 자신의 동요를 인정하고 수선을 떠는 것보다 못 들은 셈 치기로 했다.
“아닙니다, 부인과 동석하고 있을 때면 으레 있는 일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저런, 제법 오래된 증상이군요. 의원을 하나 붙여 드리지요.”
“필요 없습니다. 그깟 것보다 제 몸은 제가 더 잘 압니다.”
그는 짜증스럽게 대꾸한 뒤 그녀에게 휘말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더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본론을 재차 들먹였다.
“근신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일렀더니 이제는 호위 기사와 난장을 떨고 계시더군요. 말뜻을 못 알아들을 만큼 어린아이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한 가문의 안주인인 이상 좀 더 정숙하게 행동해 주시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말씀대로 하였지 않나요? 저는 이 별저 밖으로 단 한 걸음도 나서지 아니하였는데.”
“제가 정녕 밖으로 나돌지 말기만 하면 된다고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말귀가 어둡지도 않으시면서 시침을 떼시는군요. 하다못해 무명 예술가 따위는 언제든지 처분할 수 있으니 차라리 낫습니다만. 다른 것도 아니라 호엔베르크와 배를 붙이시다니 제정신이십니까? 호사가들이 어느 쪽에 더 열광할지 생각이 미치지 않으시는 겁니까, 부인?”
리비아는 화를 삭이느라 꽉 틀어쥔 그의 손등에 도드라진 핏줄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문가를 바라보았다가, 열린 창문으로 불어닥친 바람이 자신의 머리칼을 뒤흔드는 것을 만끽하며 천천히 대답했다.
“제가 왜 그런 호사가들의 이야기에 신경을 쏟아야 하죠?”
평이한 대답은 홀로 성을 내고 있던 사람이 외려 바보가 된 듯 여겨질 정도였다.
“부인!”
“소리 지르시지 않는 편이 좋을 거예요, 구르디예프 경. 지금 이야기는 제 체면에 대한 것이 아니었나요? 훈계를 하러 오신 분이 스스로 체면을 깎아 먹는다면 그보다 우스운 일이 없지요. 저야 즐거우니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겠지만, 공작의 고문이신 당신의 체면을 염려하여 드리는 말씀이니 모쪼록 언짢게 듣지는 말아 주셨으면 해요.”
“저를 바보 취급하시는 겁니까? 즐겁다고요?”
“허면 경, 모브레이씩이나 되는 제가 일개 호사가들이 아무렇게나 뒤집어 대는 양산형 평판 하나하나에 살얼음 딛는 양 어깨를 떨어 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을 어찌 우스워하지 않을 수 있는지 알려 주시겠어요?”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짜증스럽고 그녀의 말을 수긍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동시에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순전히 자신의 불호를 그녀에게 강권하고 있는 꼴이라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동시에 가장 싫어하는 부류인 리비아 모브레이에게 이런 식으로 정곡을 찔리고 조롱당하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은 마음이 들끓었다.
“뜻이 그러하시다면, 알겠습니다. 다만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파면하는 것이 어떠십니까? 밤새 주인을 지켜야 할 자가 그 곁에 나뒹굴다니 있을 수 없는 직무 태만이잖습니까.”
더는 말을 붙여 봤자 제가 말려들기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요한이 말을 돌렸다. 리비아는 설핏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이었지만 크게 이죽거리지 않았다.
다만 남자가 뒤돌아서려는 순간.
“두려워서 그러시나요?”
“뭐?”
“당신은 미셸을 이길 수 없을 테니까.”
요한은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제가 짚은 것은 그의 직무 태만에 대한 부분입니다만, 말이 왜 그리됩니까?”
리비아는 그의 차분한 척하는 낯짝이 깨진 꼴을 보며 오싹오싹해하며 팔뚝을 문질렀다.
가엾고 우스운 요한.
“그렇지 않나요? 지금만 해도 모브레이의 주인인 저를 존중하기보다는 마치 손아귀에 넣고 아무렇게나 굴릴 수 있는 어린아이의 생떼를 ‘봐주는’ 어른인 척 굴고 계시니까 말이에요. 당신이 이길 수 없는 자를 곁에 두고 다니니 위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일 뿐, 미셸이 떠난 뒤 지금처럼 저희가 충돌했을 때에 당신이 제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지요?”
“저를 도대체 뭐로 보시는 겁니까? 하물며 일개 기사 따위에게 겁을 먹었다고요?”
“아닌가요?”
“아닙니다! 부인이야말로 저를 무엇으로 보시는 겁니까? 요한 구르디예프입니다! 당신이 아랫것인 양 깔아 보더라도 저는……!”
“한 가지 정정할게요, 것인 양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죠.”
“뭐?”
“어디까지나 당신은 그 입으로 말했듯 구르디예프이지 모브레이가 아니니까요. 고문도 대현자도 어디까지나 명예직, 암묵적인 존중뿐이지 않나요. 당신께서 그토록 좋아하시는 객관으로 비춰 보면 구르디예프 경께서는 저보다 아래에 계시죠, 아무리 좋게 보아도 제 위는 아니에요.”
“……정녕 그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죠.”
남자는 직감했다. 그동안 참고 참았지만 저 여자와는 절대로 평화롭게 지낼 수 없겠다고. 무엇보다 자신을 폭력 따위에 의존하는 무뢰한이라고 모욕한 이상 이미 받은 모욕에 대한 값은 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면 말이다.
“허윽……!”
남자가 돌연 비명을 지르며 맥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리비아는 입술을 꼭 깨물고 웃음을 참았다. 가여운 요한, 적어도 정중한 척이나마 하느라 문간에 줄곧 서 있지만 않았어도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미슐레의 수도로 단칼에 기절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부인,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제때 나와 주어 고마워요. 미셸.”
“아닙니다.”
미슐레는 대단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늘 존경으로 대했던 사람이지만 지금만큼은 그런 감정을 가졌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사실, 그는 요한의 말본새를 제대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늘 공작과 공작 부인께 독대를 청해 왔고, 그와 겸상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공작 내외, 혹은 선대 공작 내외나 공작가의 직계 혈손 정도라고 들었다. 그러니 늘 요한이 리비아를 찾을 때면 그는 경의를 표하며 자리를 비켜 왔으므로 이런 식으로 그녀를 욕보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의 오만방자한 말투는 그저 아랫것들 앞에서나 그런 줄로 알았고.
더욱이 그녀에게서 자신을 잘라 내려고 할 줄은 몰랐다. 처벌이나 시정 명령이 내려온다면 수긍했겠지만…….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따를 건가요?”
“예, 부인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구르디예프 경께서 위해를 가하기에 충분한 인물이라고 판단한 이상 두 분만 계시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돌이키지 못할 텐데.”
리비아는 바람 탓에 앞으로 죄 넘어온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홱 넘기며 눈을 휘어 웃었다. 초여름의 화창한 볕이 그녀의 짙은 머리카락을 나뭇빛으로 물들이는 찬란한 풍경 속에서도 기이한 한기가 느껴졌다.
“제게 있어 당신께 쓰이는 것 이상의 영광은 없습니다. 부인.”
리비아는 미진하게 웃으며 사뿐사뿐 다가와 손등을 내밀었다.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그녀가 자신을 내치지 않는 것에 안도하며 공손하게 그녀의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그럼 쉐리를 도와 채비해 주세요, 구르디예프 경께서 다시는 이러지 못하시도록 여러모로 고쳐 드려야 하니까요.”
남자는 재깍 고개를 숙인 뒤 설렁줄을 당겼다. 그는 리비아의 전속 시녀가 무엇을 하기 위해 있는 사람인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명령을 수행한다. 그녀는 그 일사불란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구두코로 요한의 뺨을 톡톡 건드려 보고는 더없이 유쾌해져 웃음을 터뜨렸다.
가엾고 우스운 요한. 자신이 그토록 천시하던 것들로 유린당하면 어떤 얼굴을 할까. 당신이 사랑하는 모브레이와 당신이 경멸하는 리비아로 온통 채워진 후에는 혀라도 깨무는 걸까? 아무래도 좋지만 죽지는 않길 바랄 뿐이었다. 그는 지금도, 물론 앞으로도 유용할 것이기 때문에.
리비아는 창백하게 일그러진 채 바닥에 처박힌 남자의 낯짝을 바라보며 카펫 위로 떨어져 나온 그의 단안경을 사뿐히 짓밟아 으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