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1권) (1/10)

<1권>

부고

놀랍도록 화창한 초여름, 포웰령의 공작이 세상을 등졌다. 향년 서른다섯이었다.

계절이 바뀌어 감에 따라 유독 색이 짙어진 잎사귀들이 빛을 머금어 푸르게 빛날 때 공작저는 마치 그 자체로 커다란 무덤인 양 고요했다.

“포웰 공작께서는 살아생전 하해와 같은 자비와 사랑으로 영지민을 굽어살피셨고…….”

거창하고 엄숙한 제문 읊는 소리 뒤로 뭇 사람의 시선이 바쁘게 기어 다녔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등을 곧게 편 채 그저 고개만을 떨군 귀부인이 있다. 온통 칠흑 같은 차림새, 특히 머리에 쓰고 있는 베일 아래로 내놓은 살갗이라고는 뺨 반절과 턱뿐인 여자였다. 베일을 겹겹이 짙게 드리웠으나 턱선을 타고 미끄러지는 눈물과 꼭 쥔 손아귀에서 형편없이 구겨진 손수건으로도 그녀의 애통함이 얼마나 클지 짐작할 만했다.

이렇듯 엄중히 드리워진 죽음 가운데서도 섞여 들지 않고 소리 죽여 떠드는 것은 오롯 조문객뿐이었다.

‘정말 전무할까요?’

‘있다손 쳐도 이젠 너무 늦었지 않겠습니까?’

‘공작 각하의 유언에도 부인께 전부 상속한다고 적혀 있잖아요.’

그들은 서로 쑥덕거리며 셈하기에 바빴다. 일찍이 로덴바흐 변경백의 장녀로 태어나 대귀족 포웰 공작가의 안주인이 된 서른두 살의 과부 리비아 마르셸 모브레이는 놀랍도록 아름답기로 유명했고, 이제는 그 어마어마한 공작가의 모든 유산을 상속받게 될 상속녀로서 더더욱 유명해질 예정이었다.

물론 그 당사자는 자신의 앞날 따위엔 하등 관심이 없는 양 땅속으로 가라앉는 남편의 관을 바라보며 울음 섞인 헛숨을 토해 낼 뿐이었지만.

* * *

대부분 조문객들이 돌아간 뒤, 기울어지는 노을이 그 마지막 빛을 을씨년스럽게 저택 위로 드리웠다. 고용인들은 떠나는 손님들의 마차를 배웅한 뒤 즉시 남은 손님들을 위해 바삐 뛰어다녔다. 빈객이라기엔 지나치게 저속한 이들이었으나 포웰 공작가의 대접이 형편없더란 평판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때문에 이제는 누구의 부인도 아니게 된 공작 부인은 방에 홀로 남아 시녀 하나 두지 않고 스스로 치장을 내리고 있었다. 몇 겹을 덧씌워 도톰하게 둘렀던 베일과 머리핀이 떨어져 나가자 새까맣게 굽이치는 머리카락이 출렁거리며 엉덩이 아래까지 길게 늘어졌다. 그녀는 침잠한 듯 어두운 녹색 눈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목 끝까지 기어올라 꼭꼭 살갗을 감춘 천은 값비싸고 아름다웠지만, 꼭 그만큼 고루했다.

그녀가 목뒤로 손을 뻗어 목걸이의 잠금쇠를 풀기 위해 갉작거리고 있을 무렵 절도 있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부인, 늦어져 송구합니다.”

“……괜찮아요, 미셸.”

푸르스름한 색이 도는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였다. 우묵하게 팬 눈우물 탓에 그늘이 드리우자 스산하기 짝이 없는 거구의 남자는 굳건하게 제자리에 시립해 눈짓으로만 그녀의 용태를 살폈다.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남편이 죽고 난 뒤나 그 전이나 다름없이 공작 부인의 호위 기사로서 맡은 바 소임에만 충실한 남자였다. 문득 그 점이 우습고도 갸륵하여 부인, 아니, 리비아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한숨을 쉬었다.

“미셸.”

“예.”

“풀어 주겠어요?”

“아……, 예.”

기사는 사양하는 법이 없었다. 간결한 리비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장 각 잡힌 걸음으로 다가와 그녀가 한참이나 매만지느라 흐트러진 목걸이를 손쉽게 풀어내 화장대 위에 올려놓았다. 어차피 시녀가 돌아오면 정리해 넣을 것을 한사코 허투루 두지 않고 제 딴에 최고로 단정히 내려놓는 꼴이 웃겼다. 그녀는 웃음을 감추지 않고 설핏 흘리며 고개를 든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걸 말한 게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조차 모른 채 곧장 사죄했다. 리비아는 그의 올곧다 못해 둔해 빠진 성품을 알면서도 굳이 얄궂게 굴었다.

“목걸이 정도는 나도 풀 수 있답니다.”

“……죄송합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려면 내가 스스로 하지 못하는 것이어야 마땅하지 않겠어요?”

여자는 젖혔던 고개를 느릿느릿 바로 세우며 갑갑한 천으로 둘러싸인 자신의 목덜미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그 손짓을 따라 내리깔린 남자의 눈이 따라 구르는 것을 모른 체 시침을 떼며 미진하게 웃어 보인다. 우아하게 곡선을 그리는 눈매를 따라 팔랑거리는 풍성한 속눈썹 아래 잠겨 있던 녹안이 불온하게 빛났다. 남자는 마치 그 빛에 홀린 양 얼굴을 벌겋게 붉혔다.

“시녀분이 마땅히…….”

“그녀는 여기 없는걸요.”

언제나 있는 일이다. 리비아는 미슐레 호엔베르크가 얼마나 수줍음을 타는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종종 수동적으로, 주어진 일 외의 영역에서 실수하면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사람이었다. 여자완 거리가 멀고, 그저 우직하게 교과서적인 기사로서의 본분에 정진하는.

배우자가 있는 주군을 향한 배덕한 연심을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흰 손이 그의 가슴을 찔렀다. 미슐레는 그저 그녀의 손끝이 제 왼 가슴 언저리에 닿았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얼어붙어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녀의 손끝은 첫 마디, 두 마디, 이윽고 손바닥으로 번졌다. 뻣뻣하기 짝이 없는 제복 위로 마치 희롱하듯 두툼한 가슴을 꽉 그러쥐었다가 그대로 유연하게 미끄러져 받치듯 쥔 채 유륜이 있을 곳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부, 부인.”

“네, 미셸.”

가까스로 트였던 입이 곧장 다물렸다. 리비아가 그의 가슴에 손을 댄 채 몸을 바짝 붙여 온 탓이다. 사내의 눈이 정처 없이 떨렸다. 숨을 들이켜기 위해 의식적으로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뱅뱅 돌았다. 제게 일어난 일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조차 없는 혼란 속에서도 제 가슴을 쥔 손과 제복 위로 천천히 맞닿아 오는 말랑한 여성의 살집, 흠모하는 레이디의 잔향이 턱끝에 치달은 것만은 생생히 느껴졌다.

“부, 인…….”

그는 자신의 입으로 무슨 소리를 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모든 것이 그녀에게로 쏠려서 단말마처럼 그녀를 불렀다는 것조차 모른 채 꼴사납게 얼굴을 붉혔다. 리비아는 설핏 뒤꿈치를 들어 그의 턱끝에 입 맞출 듯 입술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어째서 말을 멈추죠?”

“아…….”

“마치 흥분하기라도 한 것처럼.”

유혹하듯 은근하게 낮춘 목소리가 찌른 사실에 미슐레 호엔베르크는 경기를 일으키듯 놀라 파드득 몸을 떨었다. 경악에 크게 뜨인 푸른 눈을 바라보던 리비아가 그의 턱끝에 아주 가볍게 입을 맞추곤 언제 그를 가까이 했었냐는 것처럼 두 걸음 떨어져 여상스레 미소 지었다.

“장난이에요.”

리비아는 가엾게도 경악한 얼굴로 울 것처럼 번들거리는 눈을 홉뜬 채 얼어붙은 거구의 사내를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늘였다. 그는 자신이 떨어지고도, 그 본심을 모른 척하겠다는 은근한 선고를 주었음에도 아직 인지 밖의 일인지 뻣뻣한 시선으로 방 안을 정처 없이 헤매다 뒤늦게 숨을 들이켰다. 새끼 영양처럼 가련한 꼴에 은근하게 달아올랐으나 급할 것은 그 무엇도 없었으므로 얌전히 그를 놓아주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바깥에서 정갈한 노크 소리가 들리자 방 안의 달짝지근한 분위기가 산산이 깨어졌다. 미슐레는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다 걸린 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 했으나 리비아는 빙그레 웃으며 제 목뒤로 손을 뻗어 뒷목 언저리의 드레스 단추를 풀며 축객령을 내렸다.

“나가 봐도 좋아요, 미셸.”

미슐레는 반사적으로 그녀에게 예를 취하곤 등 돌려 곧장 도망치듯 문을 열어젖혔다. 문 앞에 시녀가 서 있었음에도 비키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를 피해 가며 뛰쳐나갔다. 시녀는 잠깐 열렸다가 소리도 없이 닫힌 문과, 복도를 잰걸음으로 달려 나가는 사내의 등을 바라보다 눈을 내리깔고 부인의 방으로 들어섰다.

* * *

남자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저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고서야 걸음을 멈추고 눈물이 고인 눈을 깜빡이며 그녀의 손에 닿았던 가슴께를 더듬었다. 살갗에 낙인이라도 새긴 양 홧홧했다. 그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변함없이 주변이 적막하다는 것을 깨닫고서야 긴 숨을 뱉었다.

공작 부인의 의중을 알 수가 없다. 왜 날 만지셨지? 혹시 들켰을까? 추궁하려고 하셨던 걸까?

미슐레는 제 입을 틀어막고 헐떡거렸다. 조금만 더 인내가 얇았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었다. 정숙지 못하게 감히 음심을 품은 데다가, 주인이자 자신의 검을 바친 레이디를 상대로 감히 위력을 행사할 충동을 느끼다니 스스로가 한심하고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등 뒤에서나마 바라볼 수 있는 행복마저 빼앗기고 내쫓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뇌리를 스치자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이 그의 숨통을 죄었다.

그는 한참을 그늘진 복도 구석에서 자신의 부푼 샅이 가라앉길 빌며 입을 틀어막은 채 숨죽여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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