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왕궁 안의 오두막
원탁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카단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원탁에 둘러앉아 토론하던 귀족들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이번 안건에 무슨 문제라도…….”
“알레크 툴루이 칸 킵차크.”
카단이 아주 긴 이름을 정성스럽게 내뱉었다. 신분이 고귀할수록 이름이 길었으나 지금 카단이 말한 이름은 그의 아버지인 이누트 황제만큼이나 길었다. 먼 나라 황제의 존함인가. 처음 들어 보는 이름에 귀족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카단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다. 혹시 그 먼 나라 황제와 전쟁이라도 치를 생각이신가? 귀족들은 왕이 자리를 비운 회의실에 남아 한참을 떠들면서 망상을 부풀렸다.
카단은 씩씩한 걸음으로 궁을 나섰다. 잘 관리된 후원에 발을 들이자마자 은은한 장미 향이 넘실거렸다. 루나는 장미 나무로 둘러싸인 분수대 앞에서 와슈드와 루스를 초대해 차를 마시고 있었다.
루나의 행복한 미소가 타인에게 향할 때마다 이유 없이 질투가 일면서도 그녀가 행복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뿌듯함이 차올랐다. 걸음을 멈춘 카단은 키가 큰 나무에 삐딱하게 기대어 루나의 미소를 감상했다.
그런 카단에게 은색 티스푼이 매섭게 날아든 것은 얼마 안 가서였다. 카단은 살짝 고개를 기울여 화살처럼 날아오는 티스푼을 피했다. 퉁! 티스푼은 카단이 기대고 있던 나무 기둥에 박혀 일그러졌다. 와슈드가 수상한 시선을 느끼고 공격한 것이다.
“감히 어떤 놈이 이곳을 염탐하느냐!”
와슈드의 목소리가 후원을 쩌렁쩌렁 울렸다.
“자기야, 나 무서워요.”
그 와중에 루스는 와슈드의 치맛자락 뒤로 숨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버터나이프를 꽉 쥔 루나와는 상반된 반응이었다. 카단은 쯧 혀를 차면서 티 테이블로 다가갔다. 카단의 모습이 보이자 와슈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어라…… 전하?”
“과연 발키리는 발키리로군.”
카단이 일그러진 티스푼을 다시 와슈드에게 던진 뒤 루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손이 희게 질리도록 버터나이프를 잡고 있던 루나가 긴장을 풀었다. 카단은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루나의 귓가에 속삭이면서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문질렀다.
“송구합니다. 전하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와슈드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분명 살기가 언뜻 느껴졌었는데 아무래도 실수였던 모양이다.
“루나가 즐거워 보여서 지켜본 것이었다. 무슨 얘기 중이었나.”
“아, 저와 루스의 결혼식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결혼?”
카단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면서 루스를 응시했다. 과거 숲지기로 살 적에 결혼과 연애에 대해 훈수를 두던 루스의 말들이 떠올라서였다. 자신이 루나에게 반지를 선물한다니까 그때 저놈이 뭐라 했더라. 결혼은 인생의 족쇄라 했던가. 루나가 도망갈 수도 있으니 반지부터 선물하고 청혼은 나중에 하라고 조언하던 과거 루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치 빠른 루스는 그런 카단의 생각을 읽은 듯 두 손을 기도하듯이 공손하게 모았다. 과거의 자신을 용서해 달라는 손짓 같았다.
뭐 해, 루스? 와슈드가 부르자 루스는 어깨를 움찔 떨면서 화제를 돌렸다.
“그, 그나저나 전하께선 회의 중이 아니셨습니까. 여기까진 어쩐 일로, 하하.”
“중요한 것이 생각나서 왔다.”
카단이 루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루나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카단의 대답을 기다렸다. 카단은 회의 중 떠올랐던 긴 이름을 읊었다.
“알레크 툴루이 칸 킵차크.”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네요, 카단. 아는 사람인가요?”
“우리 아이의 태명이다.”
이누트 역대 영웅의 이름을 엮어 만든 태명이라고 진지하게 설명하면서 아직은 납작한 루나의 배를 응시했다. 이틀 전 루나의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느꼈던 환희가 지금까지도 생생했다.
잠시 테이블 위로 정적이 맴돌았다. 아이고. 참지 못한 루스가 작게 탄식을 흘렸다.
“전하, 요즘에 누가 태명을 그런 식으로 짓습니까.”
“뭐?”
“태교하실 때마다 ‘알레크 툴루이 칸 킵차크, 엄마 배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거라’, ‘알레크 툴루이 칸 킵차크, 오늘 날씨가 좋아’ 이러시게요?”
이름만 부르다가 날 새겠네. 태중 아기와의 대화가 번거로워진다고 루스가 구시렁대자 와슈드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루스는 자신이 전하의 유일한 친구이자 왕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남자라면서 그녀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
“그렇다면 보통 태명은 어떻게 짓지?”
“버니, 빈, 더키처럼 부르기 쉽게 지어야죠.”
“흐음.”
하지만 너무도 귀한 루나의 아이인데. 카단이 눈썹을 찌푸리자 루나가 잡고 있던 카단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그렇다면 당신이 지어 온 태명 중 가장 짧은 ‘칸’은 어때요?”
“짧은 이름에 담기엔 너의 아이는 너무도 귀해, 루나.”
“저와 당신의 아이죠. 그리고 루스의 말대로 너무 길면 부르기 힘들 거예요.”
루나는 카단의 커다란 손을 끌어와 자신의 아랫배 위에 올렸다. 커다란 손은 어쩐지 긴장해서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당신이 직접 불러 주세요.”
“……알레크 툴루이 칸 킵차크.”
미련을 버리지 못한 카단이 긴 이름을 정성스럽게 읊었다. 루나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마자 재빨리 ‘칸’ 하고 이름을 바꿔 불러야 했지만.
“한 번 더 불러 줘요.”
“칸.”
“정말 듣기 좋아요. 좋은 이름 고마워요.”
쪽. 루나가 고개를 쭉 빼고 카단의 볼에 입을 맞췄다. 칭찬을 받아서인지 짧은 입맞춤 때문인지 카단의 얼굴이 상기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숲지기였을 때도 만만치 않았던 사내가 왕이 되니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거늘. 저런 서툰 모습을 보이는 건 오직 루나 앞에서만이리라.
“고마운 건 나다, 루나.”
카단은 옆자리에 앉아 있던 루나를 와락 껴안았다. 여전히 가느다란 몸은 카단의 한 품에 들어오고도 남았다.
“네 존재만으로도 내 인생이 찬란한데 이런 귀한 아이까지 안겨 주다니.”
“하하, 카단. 잠시만…….”
“사랑해, 루나.”
카단이 루나의 이마와 콧등, 뺨, 입술 위에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루나가 손님들이 있다고 언질을 주었으나 카단은 루나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
와슈드와 루스는 서로 눈빛을 교환한 뒤 소리 없이 테이블에서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아무래도 결혼은 저쪽이 한 번 더 해야 할 기세였다.
* * *
카단은 바지만 걸친 채 왕궁 작업실에서 망치질 중이었다. 상체에 맺힌 땀방울이 완벽하게 갈라진 근육을 타고 흘러내렸다.
“대체 왜 이러십니까, 전하.”
곁에서 지켜보던 드와보가 완벽한 대륙 공용어를 구사하며 구시렁댔다.
“내가 뭘.”
“대체, 이걸, 왜! 전하께서 손수 만드시냐고요. 저 사람은 어쩌고요.”
드와보는 구석에 서 있던 왕궁 목수를 가리켰다. 이누트 인 목수가 죄송하다고 사죄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역시 공용어를 사용했다.
대륙 공용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누트 인은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현재 브릴란 왕국에 정착한 모든 이누트 인은 이제 대륙 공용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보통 정복자는 패전국의 언어와 문화를 없애려 들었으나 카단은 브릴란 왕국민이 공유하던 문화적 가치를 존중했다. 덕분에 왕국민은 새로운 이누트 왕조를 빠르게 받아들였고 카단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렇게 카단은 존경받는 왕이 되었고 루나 또한 사랑받는 왕비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카단은 태어날 아이의 요람을 손수 만들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군.”
카단은 완성한 요람을 보면서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요람을 들고서 정원 구석으로 향했다.
“잠깐만요, 주군. 이거라도 걸치셔야죠!”
드와보가 재킷을 들고 카단의 뒤를 따랐다. 바지만 걸친 왕의 옷차림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누가 본다고 그러나.”
“누가 본다뇨. 여기 쫙 깔린 호위들 눈깔은 옹이구멍입니까? 체통을 지키셔야 합니다.”
드와보가 카단의 어깨에 정복 재킷을 둘러 주었다. 이거라도 걸치셔야 왕의 위엄이…… 어라, 이상하네.
드와보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카단을 위아래로 살폈다.
땀으로 번들대는 근육질 상체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셔츠가 없어서일까.
재킷을 걸쳤음에도 단정해지기보다 거칠고 야성적인 느낌이 더해지는 이유를 드와보는 알 수 없었다.
그사이 카단은 정원에 도착했다. 잘 가꾸어진 정원 구석에는 투박한 오두막 한 채가 있었다. 통나무를 쌓아 만든 오두막은 섬세한 정원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카단이 문을 열고 오두막에 들어서자 반가운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오셨어요, 카단?”
루나가 읽던 책을 내려놓고 카단을 향해 생긋 웃었다. 한 손으로는 임신 6개월이 된 볼록한 배를 쓸어내리는 중이었다.
카단은 그녀의 배를 흐뭇하게 응시하면서 들고 있던 요람을 바닥에 내려 두었다.
“이걸 완성했어.”
“세상에, 아기 요람인가요?”
“맘에 들어?”
“그럼요! 너무 좋아요.”
당신이 못하는 게 대체 뭐람. 루나가 요람을 이리저리 살피며 기뻐했다. 루나가 중얼대는 칭찬이 기분 좋았을까. 카단은 목덜미를 문지르면서 쑥스러워했다.
“저번에 가져다주신 책들 잘 읽었어요. 오늘 읽은 이누트 역사서도 재밌었고요.”
루나가 이누트 어로 된 책을 들어 보였다. 지금 루나는 이누트 어를 제법 유창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
“더 필요하면 말해.”
“안 그래도 드와보에게 역사서 몇 권을 더 부탁했어요.”
“내게 말하지 그랬나.”
카단은 루나가 부탁을 다른 이에게 했다는 것이 서운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드와보가 걸쳐 주었던 재킷을 홱 잡아채 의자 등받이에 대충 올려 두었다.
“당신도 어차피 드와보에게 시킬 거잖아요.”
루나의 대답에 카단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루나가 다른 사내와 친근하게 지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돼. 이럴수록 루나는 날 답답하게 여길 거야.’
루나가 질려서 도망간다면 누구 손해겠는가. 카단은 집착으로 비뚤어지려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주 잠깐 상상했을 뿐인데 등골이 서늘했다.
오두막이 좀 추운가? 카단은 몸을 굽혀 화로를 살핀 뒤 쌓여 있던 장작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훈훈한 열기가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
“먹고 싶은 건?”
카단이 손을 탁탁 털어 내면서 물었다. 루나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간 카단이 해 줬던 수많은 요리가 머릿속을 뱅글뱅글 맴돌았다.
“치즈가 들어간 감자수프요.”
“좋아.”
카단은 정갈하게 정리된 재료를 확인한 후 요리에 들어갔다. 녹인 버터에 감자를 볶는 고소한 냄새가 주변을 맴돌았다.
그사이 루나는 식탁에 스푼과 포크를 준비했다. 얼마 후면 이곳에 아기 식기를 하나 더 놓게 되리라 생각하니 절로 뿌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카단은 치즈가 주욱 늘어지는 고소한 감자수프를 나무 그릇에 담아 루나 앞에 내려 두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빵을 화덕에서 꺼내 한입 크기로 썰어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루나는 쫄깃한 빵 조각을 수프에 콕 찍어 입에 넣었다. 고소하면서도 짭짤한 풍미가 입맛을 돋웠다.
“정말 맛있어요, 카단.”
루나가 활짝 웃으면서 수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임신 초기, 루나는 입덧이 심했다. 마시던 물까지 모두 게워 내는 바람에 안 그래도 연약하던 몸은 점차 말라 갔다. 카단은 초조했다. 하루가 멀다고 의원들을 닦달했으나 마땅한 방도는 찾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루나가 마른 입술을 달싹이면서 처음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말했다.
‘당신이 오두막에서 해 주었던 고기 스튜가 떠올라요.’
그 한마디에 카단은 왕궁 부엌으로 달려가 칼을 잡았다. 그뿐만 아니라 정원에 작은 오두막까지 지어 댔다. 과거의 기억을 생생히 선사해 주고 싶었던 카단의 정성이었다.
그 후 루나는 카단이 지은 오두막에서 살다시피 했다. 신기하게도 이곳에 있으면 입덧을 하지 않았다. 카단이 만들어 준 요리도 깔끔하게 비워 냈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너무 편안했다. 루나는 카단의 보살핌을 받으며 나날이 몸을 회복했고 이제는 보기 좋게 살이 오른 상태였다.
“카단의 요리가 너무 맛있어서 살이 많이 쪘어요.”
그릇을 깨끗하게 비워 낸 루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야. 딱 좋다.”
카단이 뽀얗게 살이 오른 루나의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그의 눈에선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 전에 와슈드가 보내 준 임부복이 맞지 않는걸요.”
“와슈드는 원래 눈썰미가 없어. 네 치수를 잘못 짐작해서 그렇다.”
“제가 직접 치수를 적어서 보내 주었는데요?”
“그럼 숫자를 잘못 봤겠지.”
루나의 얼굴을 만지작대던 카단의 손이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말랑한 루나의 팔뚝을 살짝 쥐어 본 뒤 살이 오른 가슴에 손을 올렸다.
“예뻐, 루나. 미치도록 예쁘다.”
카단이 루나의 가슴을 살살 굴렸다. 루나가 얼굴을 붉히면서 그 손을 제지했다.
“나, 남들이 봐요.”
오두막엔 둘뿐이었으나 밖은 사정이 달랐다. 호위 인력이 오두막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호위병의 듬직한 뒷모습이 어른거렸다.
“안 봐. 저들도 목숨 줄이 소중하다는 걸 알거든.”
“하지만, 어제도…….”
루나가 지난밤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얼굴을 보기 부끄러워 시선을 피한 것인데 팽팽하게 부푼 그의 바지 앞섶이 그녀를 반겼다. 어젯밤, 저 거대한 살덩이가 주었던 쾌락이 전신에 선연했다.
‘임신한 몸으로 음탕한 생각을 하다니!’
루나는 다갈색 나무 바닥 위로 한 번 더 시선을 돌렸다. 엊그제 카단이 손수 왁스칠한 바닥은 윤이 반질반질했다. 이번엔 그가 왁스를 문지를 때마다 그림처럼 꿈틀대던 등 근육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루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런 표정을 지어. 일부러 날 돋우는 건가.”
카단이 루나의 턱을 들어 올렸다. 붉어진 뺨과 눈가가 토끼 같았다.
“아,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루나의 거짓말은 빤히 표가 났다. 아마도 야한 생각 따위를 하다가 둘러댄 것이겠지.
자신이 어수룩한 숲지기였을 적에는 행위에 적극적이었던 여인이 결혼 후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아마도 예법을 강조하는 관리들이 루나의 귓가에 정절, 절개, 품위 따위를 떠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루나, 난 오로지 네가 내 생각만 했으면 해.”
카단은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당장에라도 쌀 것 같아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카단 스스로도 알았다. 배가 불러오는 루나의 몸을 보며 시도 때도 없이 발정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리라.
하지만 카단은 임신 후 변화한 루나의 몸을 너무도 사랑했다. 루나와 헤어졌을 때, 제 아이를 밴 루나의 모습을 닳도록 상상했던 경험이 삐뚤어진 취향을 만들어 낸 것이 분명했다.
“전 언제나 당신만을 생각하는걸요.”
루나가 수줍게 대답했다. 야하게 물든 눈가가 호선을 그리며 말간 눈웃음을 지어내자 카단의 눈빛이 어둡게 번들거렸다.
제기랄. 카단은 다급히 고개를 숙여 루나의 입술을 삼켰다. 그의 혀가 루나의 입 안을 여유 없이 파고들었다.
카단은 루나가 뱉는 숨과 타액을 모조리 삼켜 버렸다.
읏, 으읍, 루나가 할딱거리며 그의 가슴팍을 두드렸으나 아주 잠깐 숨 쉴 틈만 줄 뿐 물러서지 않았다. 카단의 손이 루나의 목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카단을 설득하려면…….’
루나가 제 입천장을 긁고 있는 두툼한 혀를 할짝거리기 시작했다. 입 안에 똬리를 틀고 모든 걸 삼키던 카단의 혀가 움찔거렸다. 그것은 루나의 어설픈 움직임을 만끽하며 힘을 빼고 후퇴했다. 루나는 카단의 치열을 혀끝으로 톡톡 건드린 뒤 그의 입술을 사탕처럼 빨아들였다. 그제야 자신의 목덜미를 틀어쥔 카단의 손이 천천히 풀어졌다. 루나는 살짝 멀어진 입술 사이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
“콜록, 하아.”
“너는 뭐든 빨리 배우던데, 입맞춤만큼은 언제나 처음 같아.”
그녀의 서툰 혀 놀림은 사내의 무언가를 자극하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카단은 그녀와 입을 맞출 때 저도 모르게 그녀를 몰아붙이곤 했다.
카단이 루나의 입가로 흐른 타액을 다정하게 닦아 주었다. 체리 사탕처럼 반들대는 루나의 입술이 맛있어 보여서 쪽쪽 한 번 더 가볍게 입을 맞추는데 어째 그녀의 입술이 부루퉁하게 앞으로 튀어나왔다.
“미안하네요, 잘 늘지 않아서.”
“아니. 그게 너무 좋아서 그래, 루나.”
“저도 노력하는데 이것만큼은 잘 안 느는걸요.”
어디서 배워 와야 하는 건가. 루나가 뒷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조그마한 목소리는 카단에게 천둥소리보다도 더 크게 들렸다. 허옇게 질린 카단이 루나의 두 손을 허겁지겁 붙잡았다.
카단의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가 다시 꾹 다물렸다. 방금 입맞춤을 배우려고 떠올렸던 망할 새끼가 누구냐고 다짜고짜 따지려다가 태중의 아기를 생각하며 거친 말을 삼켰다.
“……네 고귀한 입술을 다른 사내에게 허락할 생각은 마라.”
“그냥 하는 말이었어요.”
“그냥 하는 말도 안 돼. 내가 그 새끼의 목을.”
하아. 카단은 다시 말을 멈추고 듣기 좋은 말로 바꾸었다.
“내가 그자의 입술을 단정하게 박음질로 꿰매 버릴 것이니 그런 생각은 농담으로도 말아.”
“알았어요.”
루나는 카단의 반응을 보고 푸훗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피가 마르는데 대체 뭐가 재밌는 건지. 카단은 허, 하고 머리를 쓸어 올리다가 루나를 따라 미소 지었다.
철혈의 왕으로 불리는 카단이었건만 루나 앞에서만 미소가 헤퍼졌다.
“그러고 보니 카단은 식사했어요?”
“아아, 이제 곧 먹을 예정이다.”
“제가 수프를 떠 드릴게요.”
루나가 화덕을 향해 몸을 돌리자 카단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험한 일은 하지 마.”
“험한 일이 아니라 고작 수프를 뜨는 건데요?”
“그게 험한 일이지.”
카단은 루나를 그대로 안아 들어 침대에 앉혀 두었다.
“카단?”
“식사 준비하는 거다.”
카단은 루나의 목과 쇄골에 입을 맞추면서 그녀의 드레스 단추를 빠르게 풀어냈다. 눈 깜짝할 사이, 루나는 얇은 슬립 한 장만 걸친 모습이 되었다.
카단이 슬립 안으로 손을 뻗어 얇은 팬티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손을 쭉 내리자 하얀 속옷이 다리를 타고 스르륵 벗겨졌다. 키스만으로 흥분했는지 속옷은 투명한 애액으로 젖어 있었다.
“맛있겠네.”
카단은 벗긴 속옷에 입을 맞추고 구석으로 던졌다. 그리고 루나의 다리 사이를 헤집어 들어갔다.
‘식사라는 게 설마……!’
뒤늦게 깨달은 루나가 입을 크게 벌리는 사이, 두 다리가 그의 어깨에 걸쳐지더니 엉덩이가 살짝 들렸다.
곧 카단의 미끈한 혓바닥이 갈라진 둔덕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카단, 잠깐…… 흐읏!”
“이젠 적응할 때가 되지 않았나.”
카단은 피식 웃으면서 루나의 음핵을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렀다. 임신 후 색이 짙어진 음순이 사랑스러워서 주변의 여린 살을 살살 물고 빨기도 했다. 츄읍, 첩첩. 야한 소리가 고요한 오두막을 유독 크게 울렸다.
루나가 창밖으로 보이는 호위들의 뒷모습을 힐끗거리면서 얼굴을 가렸다.
“하으, 카단, 소리가. 너무 커요.”
“루나가 흘리는 양이 너무 많아서 그래. 덕분에 배곯을 일은 없겠지만.”
“카, 카단!”
루나는 카단의 음란한 표현을 나무라면서 허리를 들썩거렸다. 주인의 의지를 벗어난 구멍이 그만 흥분하여 왈칵 애액을 쏟아 내 버린 것이다. 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허리를 뒤로 빼 보았으나 단단한 팔이 허벅지를 꽉 잡고 있어서 도망가기 어려웠다.
“달아.”
카단은 애액을 쏟아 내는 기특한 구멍을 혀의 넓은 부분으로 천천히 핥아 낸 뒤 혀끝을 세워 구멍에 쑤셔 넣었다. 그 말캉하고도 뜨거운 감촉에 루나는 허벅지를 덜덜 떨었다.
카단은 예전처럼 손가락을 쑤시지 않았다. 대신 바지 앞섶을 열고 완전히 발기한 성기를 꺼냈다. 쿠퍼액으로 번들대는 귀두가 루나의 입구에 닿자 루나의 구멍이 뻐끔거리며 그를 반겼다. 귀두는 루나의 구멍을 덧그리듯 주변을 동그랗게 맴돌았다. 그 행위가 이어질수록 기대에 찬 질구가 축축하게 젖어 들고 입구가 이완되었다.
하아. 뜨겁게 한숨을 내쉰 카단이 벌어진 구멍에 귀두를 맞췄다. 꾸욱- 그의 것이 아주 처언천히 루나를 찌르고 들어왔다.
굵고 단단한 좆은 반 정도만 들어가 멈췄다. 귀두 끝이 볼록 튀어나온 점막에 닿았다.
카단은 그대로 허리를 살짝 빼고 박으며 그곳을 빠르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두 다리를 하늘로 들고 팔꿈치로 상체를 받치고 있던 루나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하앗, 읏, 아아, 응, 아읏!”
카단이 허리를 짓칠 때마다 본능적인 교성이 튀어나왔다. 남에게 들킬까 숨죽이던 루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루나는 카단이 선사하는 쾌락을 받아들이며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세게 물면 피 난다.”
카단이 손가락으로 루나의 입술을 문지르면서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루나는 처덕처덕 소리가 나는 접합부를 내려다보았다. 핏줄이 불뚝 튀어나온 좆은 반 정도만 삽입될 뿐 그 이상 들어가는 일이 없었다.
“카단, 더 깊이…… 아앙!”
완전히 삽입해 달라는 루나의 요구에도 카단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틀어 흥분으로 부풀어 오른 지스팟을 더 세게 귀두로 짓눌렀다.
루나의 허벅지가 파르르 떨렸다. 루나의 절정이 가까워 오자 카단은 두 팔로 루나의 어깨 옆을 짚고 그녀에게 몸을 숙였다.
“앗, 아, 흐읏, 앙, 흐읍.”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 안을 탐하며 교성을 삼킨 카단이 고개를 내렸다. 그녀의 음부처럼 색이 진해진 유륜이 보였다. 그 가운데로 발딱 선 유두는 카단의 입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단은 아기라도 된 듯이 루나의 가슴을 첩첩 빨아 대기 시작했다. 임신한 그녀에게서 모유라도 나올 것을 기대했는지 그의 입술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하읏, 앙!”
지스팟의 자극 때문인지 유두를 세게 빨아 대는 고통과 쾌락 때문인지 루나가 짧은 절정을 맞았다.
카단이 입술을 떼면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루나를 응시했다. 통통하게 부어오른 유두가 묘한 충족감을 안겼다.
“흐읏, 카단, 안쪽이 간지러워요.”
루나가 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카단의 좆이 안쪽을 탐닉하며 깊게 빨려 들어갔다.
“젠장, 사내 좆을 아주 빨아들이는군.”
하지만 안 되었다. 카단은 의원의 조언을 떠올렸다.
‘이런 물건으로 깊게 삽입하면 자궁이 자극받게 됩니다. 태아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 꼭 주의하십시오.’
카단은 아래턱을 꽉 물고 유혹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그는 루나의 가슴을 천천히 주무르면서 허리를 뒤로 빼었다.
“카단, 흑.”
“나도 네 안 깊숙이 박아 넣고 싶다. 하지만 루나, 아기를 생각해야지. 응?”
“아기?”
“그래.”
쾌락에 젖어 몽롱하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아기. 그래, 아기. 루나는 배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쾌락에 빠져 그를 졸랐던 사실이 부끄러워진 것이다.
귀엽군. 카단은 피식 웃으며 루나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얕고 빠르게 삽입을 반복하며 루나의 절정을 유도했다.
“하읏, 아, 아아, 하아앙!”
루나의 전신이 파르르 떨리면서 두 번째 절정이 찾아왔다. 루나의 질이 빠르게 수축하면서 카단의 좆을 오물오물 씹으며 조여 댔다.
“큭!”
카단은 끝까지 삽입하지 않은 좆 부분을 손으로 빠르게 문지르면서 그녀의 조임을 만끽했다. 그의 물건이 뱀처럼 꿈틀대며 크게 부풀어 정액을 사출했다.
카단은 몸을 굽혀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괜찮나.”
“흐으, 네.”
지친 루나는 침대에 누워 대답했다. 흐물대는 팔다리가 쉬이 움직이지 않는다.
“배는.”
“아프지 않아요.”
“다행이군.”
카단이 볼록 튀어나온 루나의 배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구석에 있던 물 양동이와 거즈를 가져와 루나의 몸을 깨끗하게 닦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신한 거위 털 이불을 탁탁 털어 루나를 덮어 주었다. 반쯤 떠 있던 루나의 눈꺼풀이 무겁게 감기고 있었다.
“조금 더 자라.”
카단이 루나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면서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눈을 겨우 뜨고 있던 루나는 남편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면서 미소 지었다.
“카단, 아이의 이름은 지었나요?”
“아니. 그건 네가 지어 줬으면 좋겠는데. 생각해 둔 게 있나?”
“흐음, 쿠르아?”
“그건 예전 내 이름이잖아.”
“돌아가신 당신 어머니와 황제께서 지어 주신 좋은 이름이잖아요. 저는 그 이름을 소중하게 쓰고 싶어요.”
“…….”
“그리고 이누트 제국은 이름으로 성별을 구분 짓지 않잖아요. 그런 점이 참 좋아요. 딸이든 아들이든 그 존재만으로도 사랑받는 기분이 들어서.”
루나가 힘겹게 웃으며 카단의 뺨을 쓸었다. 그 손짓에 화답하듯 그가 고개를 숙여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잔잔한 눈동자가 가만히 카단을 응시했다.
“영원히 당신과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 오두막에서?”
“네.”
“왕궁은 어쩌고.”
“그러게요. 하지만 이곳이 너무 좋아요.”
따듯한 화로와 고소한 음식 냄새, 그리고 당신의 체취와 손길이 가득한 이 작은 공간.
루나는 이 모든 것이 너무도 좋았다.
“루나가 원하는 대로 해.”
“당신은 저를 너무 멋대로 둬요.”
“그대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게 나의 낙이라.”
카단은 루나의 눈꺼풀에 쪽쪽 입을 맞췄다. 그사이 눈을 감은 루나는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 * *
“다시 해.”
카단이 무표정한 얼굴로 재상에게 서류를 넘겼다. 이틀을 꼬박 새우며 서류 작업에 몰두했던 재상은 울상을 짓고서 카단을 힐끗거렸다.
“전하, 이 정도 정비 계획이면 충분할 것 같…….”
“내가 두 번 말해야 하나.”
카단의 검은 눈동자가 재상을 똑바로 응시했다. 볼꼴 못 볼 꼴 다 보고 살았다고 자부했던 재상은 히끅, 딸꾹질을 해 버리고 말았다. 매서운 왕의 눈빛에 오금이 저렸다.
“시, 시정하겠습니다.”
재상은 굶주린 호랑이를 피해 도망치는 늙은 여우처럼 재빨리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찰나의 침묵이 집무실을 맴돌았다. 시종들이 숨소리를 죽이며 카단의 눈치를 보던 때 집무실 문이 달칵거렸다. 문 앞을 지키던 시종이 문을 열자마자 작은 존재가 집무실 안으로 두다다 뛰어들었다.
“파파!”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카단의 딸, 쿠르아가 카단을 보면서 활짝 웃었다. 높은 콧대와 살짝 올라간 눈매는 카단을 닮았으나 아름다운 금발과 금빛 눈동자는 루나를 빼닮았다. 활짝 웃을 때는 더더욱. 그래서 카단에게 쿠르아의 웃음은 특별했다. 북부의 설원 같던 카단의 얼굴에 덩달아 미소가 피어났다.
“왔느냐, 쿠르아.”
카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쿠르아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서 제게 달려오는 쿠르아를 꽈악 안았다. 그런 카단의 모습은 당장 초상화에 담아도 손색이 없었다.
곁을 지키던 시종들이 홀린 듯 카단을 응시했다. 처음 보는 광경은 아니었으나 볼 때마다 낯선 주군의 모습에 쉬이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루나의 목소리가 열린 문 너머에서 들렸다.
“쿠르아, 그렇게 뛰면 넘어진다고 했잖니.”
루나가 뒤늦게 숨을 고르면서 집무실로 들어왔다. 쿠르아를 한쪽 팔로 안고 일어선 카단이 루나 앞으로 마중을 나갔다. 그리고 나머지 팔을 뻗어 사랑스러운 반려의 뺨을 조심스레 감쌌다.
“식사는.”
“간단하게 먹었어요.”
“내가 좀 늦었군.”
카단은 직접 식사를 차려 주지 못한 걸 미안해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루나가 두 손을 휘휘 저었다.
“당신 바쁘잖아요. 한 번씩 왕궁 요리사의 음식을 먹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요리사?”
“네. 당신 음식만 먹는다고 왕궁 요리사들이 서운해했대요. 드와보가 그랬어요.”
그쵸, 드와보? 루나가 그렇게 말하면서 드와보를 응시했다.
아니 왕비님, 왜 저한테 그러십니까! 드와보는 입을 벙끗거리면서 카단의 눈치를 살살 살피다가 급한 일이 떠올랐다며 후다닥 집무실을 나섰다.
“드와보가…… 많이 바쁜 모양이에요.”
루나가 그의 뒷모습을 살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단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눈동자는 묘하게 식어 있었다. 요리사 중에 젊고 잘난 놈이 있던가. 혹시 그놈이 루나에게 자신의 요리를 먹어 달라고 속살거린 건 아닌지 당장에 확인하고 싶었으나 어두운 속내를 꾹 눌렀다. 본인도 알았다. 루나의 배 속에 들어가는 모든 것이 제 것이어야 한다는 욕심은 터무니없다는 걸. 그래, 안다. 이것은 비뚤어진 소유욕이겠지. 카단은 루나가 제 곁에 있는 것이 루나 스스로의 선택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숨을 골랐다. 루나에게 선택받아야 할 것은 자신이었다.
“파파?”
쿠르아가 말랑한 손을 뻗어 딱딱하게 굳은 카단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아차. 카단은 다시 눈꼬리를 휘면서 쿠르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래. 무슨 일로 날 찾아왔느냐, 쿠르아.”
“파파에게 보여 줄 게 있어요.”
짜잔! 쿠르아가 커다란 주머니에서 작게 접은 종이를 펼쳐 보았다. 커다란 동그라미 안에 작은 동그라미 두 개와 선 몇 개가 찍찍 그어진 그림이 보였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카단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드와보를 그린 것이냐.”
“역시 파파! 이것 봐요, 엄마. 파파는 제 그림을 알아보잖아요.”
쿠르아가 루나를 향해 그림을 펄럭펄럭 흔들었다. 삐뚤빼뚤한 그림을 들여다보던 루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 얼굴을 그렸다는 것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모양새다.
“카단, 그걸 어떻게 알아본 거죠?”
“딱 봐도 드와보이지 않나.”
“어디가 그렇죠?”
“여기.”
카단은 눈을 표현한 작은 동그라미를 가리켰다. 루나가 인상을 쓰면서 자세히 그림을 들여다보았으나 그것은 그저 울퉁불퉁한 동그라미일 뿐이었다.
“잘, 모르겠는데…….”
루나가 말끝을 흐리자 쿠르아의 표정이 대번에 시무룩해졌다.
“걱정 마라, 쿠르아. 엄마가 선호하는 화풍과 네 화풍이 조금 달라서 그래. 내가 보기에 우리 공주님은 그림에 소질이 다분하군.”
“정말요, 파파?”
“그럼.”
카단은 품 안의 쿠르아를 달래면서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참 잘했어요’ 도장이라며 쿠르아의 그림 위에 왕의 인장을 찍어 주었다.
그것을 묵묵하게 지켜보던 시종장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서류에 저 인장을 받기 위해서 밤낮없이 일을 해 대는 귀족이 수두룩하건만 쿠르아는 단 몇 초 만에 까탈스러운 왕의 안목을 만족시킨 것이다. 시종장의 시선이 인장과 그림을 바삐 오갈 때 저를 부르는 주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종장.”
“예? 예, 전하.”
“공주의 그림을 갤러리에 걸어 놓거라.”
“……알겠습니다.”
시종장은 딱히 토를 달지 않았다. 왕궁 갤러리 한쪽에는 이미 쿠르아의 그림이 가득 걸려 있었으니까.
“천재가 틀림없어.”
카단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면서 쿠르아의 작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저걸 어째. 루나가 갈수록 심해지는 카단의 콩깍지를 걱정할 즈음, 시종 하나가 다급하게 집무실로 들어왔다.
“전하, 지금 딥트 왕국의 왕족과 사신단이 도착했습니다.”
딥트. 카단이 다스리는 브릴란 왕국 남쪽 사막에 있는 나라였다. 현재 브릴란은 이누트 제국의 선진 문물을 타국에 수출하는 무역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예정은 내일이라고 알고 있는데.”
“일정을 서둘렀다고 합니다.”
“하아.”
카단은 너무도 아쉬워하면서 안고 있던 쿠르아를 내려 두었다. 오붓한 시간은 잠시 접어 두어야 했다.
그 무렵, 딥트의 왕과 왕비는 브릴란의 왕궁을 둘러보고 있었다. 여덟 살배기 왕자도 왕비의 손을 꼭 잡고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기존 브릴란의 양식과 이누트의 양식이 조화롭게 섞인 건축물은 새롭고도 아름다웠다.
딥트의 왕은 왕궁 갤러리에 전시된 예술 작품을 극찬했다.
“정말이지 새롭고 파격적입니다!”
딥트의 왕이 팔을 움직일 때마다 통이 넓은 의상이 펄럭거렸다. 머리를 덮은 천을 동그란 끈으로 고정한 복식은 사막 민족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딥트의 왕은 쿠르아가 그린 그림을 가리키며 심오하고 철학적이며 획기적이라고 극찬했다. 왕의 인장이 찍혀 있어서인지 아무도 그 작품이 다섯 살배기의 그림이라고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근엄했던 카단의 입꼬리가 평소와 달리 위로 꿈틀거리자 드와보는 헛웃음을 지으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하여간에 왕이라는 작자들은 모두 바보 같았다.
카단은 갤러리에 티 테이블을 마련했다. 말이 티 테이블이지 만찬이나 다름없었다. 다양한 디저트와 차가 종류별로 마련되었다. 두 왕가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딥트의 왕족은 다양한 다과를 보면서 감탄했다.
“이누트 제국의 찻잎이군요. 맛이 좋습니다.”
딥트 왕이 찻잔을 들었다. 그 옆자리를 차지한 딥트 왕비는 눈만 빼꼼히 내민 니캅을 두르고 있기에 차를 마시지 못했다. 루나가 왕비의 찻잔을 가리키며 입을 뗐다.
“왕비께서는…….”
“딥트의 여인은 성년이 되면 다른 남성 앞에 살결을 보이면 안 됩니다.”
대신 대답한 것은 딥트 왕이었다. 그는 딥트의 문화를 설명하면서 한 번씩 루나를 힐끔거렸다. 처연한 우아함이랄까. 닿고 싶은 신성함이 풍긴달까. 성녀 출신이라던 브릴란의 왕비는 사내의 시선을 끄는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딥트에서 보기 드문 금발과 새하얀 피부는 탐스러운 복숭아 같아서 깨물면 대추야자처럼 달콤한 맛이 나리라.
‘이누트의 황자가 여인을 얻기 위해 브릴란의 왕좌를 빼앗았다는 소문을 들을 땐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직접 보니 이해가 가는군.’
딥트의 왕은 군침을 꿀꺽 삼키면서 루나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살기가 따갑게 피부를 찔러 등허리를 쭈뼛 세워야 했다. 왕족이 모인 자리에 감히 누가 이런 기운을 풍기는 것인가.
살기가 날아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딥트 왕이 딱딱하게 굳었다. 차분히 가라앉은 카단의 눈동자가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딥트의 왕께선 제 반려에게 관심이 많으시군요.”
카단이 미간을 구기면서 불편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아, 그, 브릴란의 왕비를 처음 뵙게 되어 그렇습니다.”
“니캅을 두르지 않은 여성이라 마음껏 감상하셨던 건가.”
카단은 은근하게 말을 줄이면서 찻잔 손잡이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그건 아닙니다만…… 뭐, 다른 사내의 시선에서부터 아내를 보호하고자 딥트는 아내에게 니캅을 씌우지요. 아내란 모름지기 정숙해야 하니까요.”
반대로 말하면 루나가 정숙하지 않은 여성이라 쳐다봤다는 뜻이 되었다. 카단이 그 뜻을 그냥 넘길 리 없었다.
“정숙이라. 그렇군요. 나라가 다르다 보니 문화도 다른 건가.”
“무슨 말씀이신지.”
“브릴란에선 아내에게 천 조각을 씌우는 대신 무례하게 쳐다보는 놈들의 눈깔을 도려내거든요.”
카단은 섬뜩한 말을 내뱉으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주군, 미치셨습니까! 그 뒤에 서 있던 드와보가 다급하게 카단을 말렸으나 카단이 말을 거두는 일은 없었다.
“말씀이, 지나치신 것 아닙니까.”
딥트 왕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댔다. 그가 주먹을 꽉 쥐자 다부진 근육이 옷감 위로 드러났다. 카단보다 덩치는 작아도 그 또한 사막을 정벌하며 이름을 떨친 전사였기에 주변인들은 덜덜 떨기 시작했다.
“글쎄요. 전 그저 브릴란의 문화를 말씀드린 것뿐입니다만.”
분노한 딥트 왕과는 달리 카단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런 카단의 태도에 더 화가 났으나 딥트 왕은 대놓고 화를 내진 못했다.
지금 이 자리는 브릴란의 왕과 우호를 다지고 그를 설득해 교역을 따내야 하는 자리였다. 브릴란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면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손해가 극심했다.
그 상황을 해결한 것은 루나였다. 루나가 딥트의 왕비에게 소곤거리자 딥트 왕비는 눈 아래를 가리고 있던 천을 아래로 내려 얼굴을 드러냈다.
왕비! 딥트 왕이 화들짝 놀랐으나 왕비는 다시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당장 쓰시오. 어디 여자가 얼굴을 드러낸단 말이오!”
“죄송합니다만, 전하. 브릴란에 왔으면 브릴란의 법도를 따라야지요.”
“뭐?”
“그리고 애초에 전하께서 잘못하셨어요. 이 상황을 잘 넘겨야 딥트의 미래도 얻습니다.”
딥트의 왕비는 왕의 귓가에 뒷말을 소곤거렸다. 눈을 부릅뜬 왕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다가 잘못을 인정하고 분노를 삭였다. 딥트 왕비는 루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정말 개운하네요. 이게 얼마 만인지. 좋은 해결책을 주어 고맙습니다, 브랄란의 왕비님.”
“별말씀을요.”
“현명한 왕비님을 두시어 브릴란의 왕께서도 흡족하시겠어요.”
딥트 왕비는 생긋 웃으면서 마련된 다과를 음미했다. 싸늘했던 테이블 위로 두 왕비의 다정한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아슬아슬했던 티타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하마터면 적대국이 될 뻔한 두 나라는 우호의 발판을 마련했다.
왕과 왕비가 퇴장하고 쿠르아가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려던 때였다. 꾸물대던 딥트 왕자가 쿠르아를 불러 세웠다.
“거기, 브릴란의 공주!”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턱을 살짝 든 자세는 고고했으나 발갛게 물든 두 뺨은 어린 티가 났다. 왕비를 닮아 곱상한 얼굴엔 어쩐지 심술이 가득했다.
“나 말이야?”
“그래, 너.”
“왜 불렀는데?”
“너, 그, 상당히 아름……답구나, 흠흠. 이름이 무엇이냐.”
“…….”
“여, 여자가 감히 남자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니!”
“숙녀는 예절을 모르는 남자랑 말하는 거 아냐.”
“가, 감히 내게 그런 말을!”
여덟 살 인생에서 이런 말을 하는 여자는 저 공주가 처음이기에 당황한 딥트 왕자가 팔짝팔짝 뛰었다.
앞서 퇴장했던 카단이 소란을 듣고 다시 쿠르아에게 돌아왔다. 그는 삐딱하게 서서 딥트 왕자를 향해 한숨을 내쉬던 딸을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이지, 쿠르아?”
“딥트의 왕자님이 별로예요. 이상해.”
쿠르아가 제법 큰 소리로 구시렁댔다. 딥트 왕자의 얼굴이 더더욱 새빨개졌다.
“너, 너 그러면 시집 못 가!”
“너랑은 결혼 안 할 테니 걱정 마. 여자가 얼굴 가리고 살아야 하는 나라는 싫어.”
쿠르아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카단은 그런 딸의 모습을 흐뭇하게 응시했다. 반대로 여자에게 거절을 처음 당해 본 딥트 왕자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카단은 그대로 쿠르아를 데리고 출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딥트 왕자가 카단의 재킷 자락을 살짝 잡아 그를 붙들었다.
“브, 브릴란의 왕께서도 제가 별로십니까.”
카단은 딥트 왕자가 붙잡은 재킷 자락을 냉랭하게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건방진 꼬맹이의 손을 당장에 쳐 내고 싶었으나 그래서 저놈이 울기라도 한다면 루나에게 혼이 날 것이 뻔했다. 카단은 시선을 벽 따위로 돌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난 내 딸의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는 편이라.”
“마, 만약에 여자도 얼굴 가리지 않는 평등한 나라를 만든다면 공주와 결혼할 수 있나요?”
“글쎄. 우리 쿠르아는 결혼 안 하고 파파와 평생 살 예정이거든.”
“예에?”
눈을 동그랗게 뜬 왕자가 잡고 있던 카단의 재킷 자락을 놓으며 놀랐다. 그 모습이 통쾌했는지 카단의 입술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나중에 커서 날 이기면 생각해 보지.”
물론 딥트의 이상한 풍습이 사라졌을 때의 이야기지만. 카단은 뒷말을 중얼거리면서 쿠르아를 안고 퇴장했다.
“내, 내 이름은 이스마일이다! 이스마일 빈 라시드 알막툼!”
딥트의 왕자는 멀어져 가는 쿠르아를 향해 자기 이름을 외쳤다. 아빠 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쿠르아는 대답 대신 한쪽 눈을 가늘게 뜨며 베- 하고 혀를 내밀었다.
상대를 놀리는 제스처였으나 이스마일의 얼굴은 오히려 더 붉어졌다. 그런 쿠르아의 모습마저도 이스마일의 눈에는 귀엽게 보인 탓이다.
“다음에 또 놀러 올게. 그때는 더 멋진 나라를 만들어 올 테니 나랑 길게 얘기하자. 알았지?”
이스마일은 작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나아가는 카단을 쫓아가며 말을 이었다. 카단은 더 빠른 속도로 걸어서 앞서가던 루나를 따라잡았다.
“카단? 급하게 어딜 가요?”
“아무래도 성가신 놈이 붙은 것 같아서.”
“네?”
루나는 뒤를 돌았다. 빨개진 얼굴로 간절하게 쿠르아를 응시하는 딥트 왕자가 보였다. 루나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귀여운 왕자님이네요.”
“하, 귀엽긴. 골치 아프지.”
“무슨 말인가요?”
“저 왕자, 왠지 나 같은 놈일 것 같거든. 수련을 꾸준히 해야겠어.”
십수 년 후에 딸을 달라고 찾아오는 숱한 쭉정이들을 물리칠 생각을 하니 카단의 의지가 불타올랐다. 루나는 카단의 튼실한 몸을 보면서 ‘여기서 더 수련한다고요?’ 하고 경악했다.
“가족을 지켜야 하지 않나.”
“지금도 충분히 잘 지켜 주고 있잖아요.”
“글쎄. 오늘 딥트를 지킨 그대에 비하면 덜한 편이지.”
카단은 루나의 임기응변을 떠올리면서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때 루나와 딥트 왕비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딥트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차차 약해졌을 것이다. 브릴란의 적대국이 되는 건 그런 의미였다.
“사랑해, 나의 현명한 부인.”
“저도요.”
“나도 파파와 마마가 좋아!”
쿠르아가 끼어들어 루나와 카단에게 입맞춤을 퍼부었다. 까르르, 가족의 웃음소리가 주변으로 따듯하게 퍼져 나갔다.
<깊은 숲의 카단 씨>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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