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8장. 예물 (9/11)

    

    

    제8장. 예물

    

    

    

    

    

    루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가 아른거리다가 저를 내려다보는 두 얼굴이 보였다. 와슈드와 가르였다.

    

    “정신이 들어요? 몸은 어때요?”

    

    와슈드가 루나가 상체를 세우는 걸 도우며 물었다.

    

    “전 괜찮아요. 오히려 당신이…….”

    

    루나는 가만히 와슈드를 살폈다. 팔과 어깨에 붕대를 둘둘 감은 그녀의 부상이 더 심각했다.

    

    “이 정도는 발키리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와슈드가 씨익 웃으면서 루나의 두 손을 감쌌다. 검날을 세게 쥐는 바람에 루나의 손바닥 부상은 심각했다.

    

    “왜 이런 짓을 하셨습니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루나가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당신처럼 강했더라면 당신도 이렇게 다칠 일이 없었을 텐데요.”

    

    “루나 님은 충분히 강했습니다. 검을 배운 자라도 검날을 잡고 버티긴 어렵거든요.”

    

    그 찰나의 순간이 급소를 가격할 빈틈을 만들어 냈다고 와슈드는 차분히 설명했다.

    

    “전 사실 2황자님을 좋아해요, 루나 님.”

    

    와슈드의 고백은 갑작스러웠다. 루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와슈드를 올려다보았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어요. 태중 약혼자라니까 더욱 각별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2황자님은 처음부터 제게 관심을 주지 않으셨죠. 저의 완벽한 짝사랑이었어요.”

    

    그러던 중 카단이 실종되었고 몇 년 후 장성하여 돌아온 모습을 봤을 때 와슈드는 한 번 더 반했다고 털어놓았다.

    

    “사실 아까 괴한이 루나 님이 숨은 테이블에 칼을 꽂아 넣을 때 저는 루나 님을 지킬지 망설였어요. 그때 제가 뛰어나갔더라면 루나 님이 이렇게 다치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와슈드는 감췄던 속내를 밝히면서 잡고 있던 루나의 손을 천천히 놓았다.

    

    “원망, 안 하시나요?”

    

    “아뇨. 고마워요, 와슈드 님,”

    

    “……네?”

    

    “그래도 절 구해 주셨잖아요.”

    

    루나는 알았다. 와슈드가 조금만 늦었더라도 자신은 괴한에게 붙잡혀 끌려갔을 것이다.

    

    물론 와슈드가 망설이지 않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완벽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와슈드가 가장 마지막에 저를 구해 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루나의 반응이 예상외였던 걸까. 와슈드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가만히 루나를 응시했다.

    

    『대체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길래 표정이 심각한 거야?』

    

    미간을 찌푸린 가르가 미어캣처럼 둘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하여간에 눈치는 개나 주셨지. 와슈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가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1황자님 흉봤는데 귀신같이 아시네요.』

    

    『뭐? 카단이 아니고?』

    

    『예. 카단 님 말고 가르 님이요.』

    

    이제 와슈드는 더이상 카단을 쿠르아로 부르지 않았다.

    

    『나처럼 완벽한 인간을 욕할 게 있어?』

    

    『바로 그런 점이요.』

    

    와슈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였다. 누군가 방문을 황급히 두드리면서 접근을 요청했다. 살기가 느껴지는 인물은 아니었기에 가르가 출입을 허용했다. 방문이 열리자마자 하얗게 질린 루스가 방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루나! 무사해?”

    

    루스는 가르와 와슈드에게 예를 갖출 생각을 하지 못하고 헐레벌떡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가르가 낯선 자의 접근을 막으려 했으나 차마 그러지 못했다. 사내가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걸치다니. 게다가 온몸이 향유로 번들대는 꼴이란!

    

    『이 새끼는 뭐야?』

    

    가르는 루스와의 거리를 벌리면서 뒷걸음질 쳤다. 이상하게 소름이 돋아서 옆에 있던 와슈드를 붙잡아 버렸다.

    

    하지만 와슈드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그녀 또한 가르처럼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뭐 해, 와슈드! 포박해!』

    

    가르가 와슈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와슈드는 가르의 명을 반사적으로 따르면서 루스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팔을 잡아 뒤로 꺾으려는데 향유를 덕지덕지 바른 피부가 너무 미끄러워 그를 붙잡는 데 실패했다. 방금 그 이상하고 좋은 감촉은 뭐지? 와슈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와슈드!』

    

    오만상을 쓴 가르가 와슈드를 독촉했다. 와슈드는 몇 차례 더 도전했으나 루스는 미꾸라지처럼 그녀의 손아귀를 빠져나왔다.

    

    “이봐요, 레이디. 저 수상한 사람 아닙니다.”

    

    루스는 두 팔을 올려 자신이 해가 없음을 강조했다. 반쯤 속이 비치는 옷이 위로 들리면서 루스의 탄탄한 복부가 드러났다. 배꼽 아래로 보이는 레이스 끈은 그가 심상찮은 속옷을 걸쳤음을 상상케 했다. 순간 와슈드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너, 너는 정체가 무엇이냐.”

    

    “예?”

    

    “……요정이야?”

    

    “예에?”

    

    “브릴란 왕국에 요정이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당황한 와슈드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했다. 마음에 없는 말을 내뱉은 것은 아니었다. 루나도 저 사내도 요정처럼 선이 곱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가슴뼈 안쪽이 조여. 심장 질환인가.’

    

    우락부락하고 거친 이누트 사내만 보다가 나긋하고 아름다운 사내를 보니 심장이 미칠 듯 요동쳤다.

    

    와슈드는 심장을 부여잡으면서 뒷걸음질 치다가 루나가 누워 있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와슈드 님, 괜찮아요?”

    

    와슈드 님? 루나가 눈을 부릅뜨고 루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와슈드의 어깨를 흔들었다.

    

    “뭐야, 루나. 저 이누트 여자 이상해.”

    

    루스는 그런 와슈드를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 * *

    

    

    

    

    

    반란군은 수도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시간을 벌려는 수작이었다. 반란군의 주요 전력은 왕성에 들어가 노쇠한 이누트의 황제나 2황자가 끼고돈다는 성녀를 납치할 계획이었다.

    

    “약속된 시간이 됐는데 왜 안 나오는 거야?”

    

    이누트 병사로 변장한 반란군 하나가 성문 뒤쪽 개구멍을 초조하게 서성였다. 게릴라전 상황을 전달하는 연락병도 한 시간째 연락이 없었다.

    

    그때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여기서 누구를 기다리나.”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호의적이었고 공용어에 능숙했다. 이누트 병사는 공용어를 전혀 쓰지 못한다 들었으니 아군이 틀림없었다.

    

    “우리 쪽 사람들이 아직…… 히익!”

    

    반란군은 고개를 돌리다가 숨을 삼켰다. 이누트의 2황자가 제 목 아래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다음 장면은 없었다. 그의 목은 흙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끝이군.』

    

    카단이 긴 숨을 내쉬면서 갑주에 묻은 피를 훌훌 털어 냈다.

    

    『고생하셨습니다.』

    

    드와보가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발등으로 툭 치면서 인사를 올렸다. 그도 카단과 마찬가지로 전신이 반란군의 피로 젖어 있었다.

    

    『귀환을 준비할까요?』

    

    『나 먼저 돌아가도록 하지.』

    

    『예?』

    

    『좀 급해서 말이다.』

    

    카단은 성벽 아래 개구멍을 발로 툭 찼다. 그러자 그 위까지 우르르 벽돌이 무너지면서 사람 하나가 지나갈 만한 구멍이 만들어졌다.

    

    『여긴 나중에 잊지 말고 보수해 두도록.』

    

    카단은 그 말을 남긴 뒤 성안으로 들어갔다. 드와보는 뒤에 있던 병사에게 ‘여기 좀 보수해 놔’라고 명령한 뒤 카단의 뒤를 따랐다. 주군이 다급하게 귀환하는 이유가 너무도 궁금했다.

    『반란군을 신속하게 제압했더군. 고생했구나, 쿠르아.』

    

    황제가 피 묻은 검을 닦으며 카단을 치하했다. 황제의 발밑에는 반란군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한때 이누트 황제는 얼음 땅의 살인귀라 불리었던 통치자였다. 그런 황제를 단순히 노인으로 치부했던 반란군의 최후는 비참했다.

    

    『쿠르아가 아니고 카단입니다.』

    

    『그래, 쿠르아 아니고 카단.』

    

    『먼 길 오셨는데 이런 불상사를 겪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아버지.』

    

    『전혀 죄송해 보이지 않는 표정이다만.』

    

    황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마도 제 둘째 아들놈은 반란 분자를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처음부터 황제의 병력을 이용할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다만 예상과 달랐던 것은 자신의 병력을 공격이 아닌 방어용으로 사용했다는 것이지만.

    

    덕분에 반란군이 상수도에 약을 풀어 미리 아군의 기세를 꺾어 두었음에도 머릿수로 깔끔하게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인사를 올렸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어딜 그리 급히 가느냐.』

    

    『어서 씻고 루나를 만나러 가야 합니다.』

    

    『아비에게는 거지 같은 꼴을 보여도 괜찮고 반려에게는 예쁜 모습만 보이려는 게야?』

    

    『무엇이 잘못됐습니까?』

    

    『저, 저 뻔뻔한!』

    

    쯧쯧, 황제가 혀를 차면서 손사래를 쳤다. 생각해 보니 저를 똑 닮은 것 같아 할 말은 없었다.

    

    카단은 꾸벅 인사를 올린 뒤 곧장 욕실로 향했다.

    

    말라붙은 피를 씻어 내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니 아무도 그가 조금 전까지 전장을 구른 장수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말끔한 매무새로 루나의 방문 앞에 섰다.

    

    그때 마침 방 안에서 나온 와슈드가 카단과 마주쳤다.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 거지?”

    

    “루나 님과 이야기를 잠시 나눴습니다.”

    

    와슈드의 대답에 카단은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표정 없이 차가운 얼굴은 와슈드를 심문하는 것처럼 보였다. 와슈드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두 팔을 허공에 들었다.

    

    “생각해 보면 황자님께선 제게 항상 그런 표정을 지으셨더랬죠.”

    

    “…….”

    

    “제가 더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직접 들어가서 루나 님의 안전을 확인해 보시든가요.”

    

    그 말에 와슈드가 등지고 서 있던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를 비틀어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좋아했었습니다, 카단 황자님.”

    

    와슈드의 고백이 등 뒤에서 들렸다.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카단 황자님보다는 루나 님이 훨씬 좋아졌거든요.”

    

    와슈드는 카단을 향해 고개를 숙인 뒤 빠르게 복도를 따라 퇴장했다.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에 대한 마음을 접는 게 슬퍼서가 아니라 그동안 저런 무심한 사내에게 마음을 기울였던 자신이 불쌍해서였다.

    

    떠올려 보면 지금 카단의 태도는 처음과 똑같았다. 변함없이 무심했다는 말이다.

    

    ‘그런 무신경한 남자는 싫어. 이제는…….’

    

    와슈드는 손을 올려 반대편 어깨를 둘둘 감싼 붕대를 쓰다듬었다. 향유가 묻어 있는 붕대에선 장미 향이 났다.

    

    

    

    

    

    ‘레이디가 부상을 입다니! 많이 아팠겠군요.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이거라도 발라 줄게요. 좋은 향이 나면 하루가 기분 좋아지거든.’

    

    

    

    

    

    와슈드는 조금 전 만났던 요정님을 떠올리면서 뺨을 붉혔다.

    

    ‘이젠 나도 사랑받는 사랑을 해 볼 거야.’

    

    그리고 아름다웠던 요정님을 하렘으로부터 꺼내 쟁취하리라. 와슈드는 콧김을 내뿜으면서 연무장으로 향했다.

    

    

    

    

    

    * * *

    

    

    

    

    

    다정한 손길. 등으로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 제 이름을 읊조리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루나는 기분 좋은 감각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몸을 뒤척였다.

    

    “조금 더 쉬어.”

    

    토닥토닥. 커다란 손이 루나의 어깨를 느릿하게 두드렸다.

    

    “카단?”

    

    루나가 몸을 틀어 등 뒤에 있는 인물을 확인했다. 카단이 빙긋이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형님에게 들었다. 나의 반려께서 아주 용감했다지.”

    

    카단의 말투는 다정했으나 표정엔 수심이 가득했다. 카단은 루나의 다친 손과 팔을 안타깝게 응시하고 있었다.

    

    루나는 그의 눈길을 따라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흰색 붕대 대신 약초 물을 먹인 갈색 붕대가 둘려 있었다. 카단이 직접 붕대를 갈아 준 모양이었다.

    

    “이누트 의원들은 아직 이 약초를 몰라. 북쪽 숲에서만 자라는 귀한 것이거든.”

    

    카단은 루나가 묻지 않아도 설명을 보탰다. 루나는 이런 그의 다정함이 참 좋았다.

    

    “네게 알려 줄 것이 있어.”

    

    카단은 루나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면서 속삭였다. 루나가 ‘말씀하세요, 카단’ 하고 대답하자 카단은 쥐고 있던 반지를 루나의 엄지에 끼워 주었다.

    

    두꺼운 황금 반지는 루나의 엄지에도 맞지 않고 헐렁거렸다. 이게 뭐지? 루나가 가만히 반지를 응시했다. 반지 위에는 과거 브릴란 왕국의 국기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카단? 이거 설마……!”

    

    “나와 결혼해, 줘, 루나.”

    

    카단은 ‘나와 결혼해’라고 명령조로 나갈 뻔한 말을 가까스로 고치면서 루나에게 청혼했다.

    

    순간 루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루나는 고개를 돌려 저를 안고 있는 사내를 응시했다. 연노랑빛 눈동자에는 왈칵 차오른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흐윽, 카단.”

    

    “사실 널 만나자마자 청혼하고 싶었는데 꾹 참은 거다.”

    

    이누트 사내는 여인에게 청혼할 때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것을 선물한다. 카단은 루나에게 바치고 싶었던 선물을 손에 넣지 못하는 바람에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내가 네게 주고 싶었던 가장 큰 선물이 이것이었거든.”

    

    카단은 루나의 엄지에 껴둔 황금 반지를 툭툭 건드렸다. 바로 브릴란 왕이 숨겨 두었던 왕의 인장이었다. 반란군을 이끌었던 왕의 사촌 혈족에게서 찾아온 것으로, 카단은 루나에게 청혼 선물로 이 왕국을 바쳤다.

    

    루나는 반지를 빤히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사실 루나에겐 이런 황금 반지보다는 카단에게 받았던 은색 실반지가 비교할 수 없이 소중했다. 그녀에게 이 황금 반지는 너무도 무겁고 버거운 것이니.

    

    “손가락이 엄청 무거워요, 카단.”

    

    “그래서 거절하고 싶은가.”

    

    카단이 루나의 몸을 꽈악 안으며 물었다. 등으로 느껴지는 그의 몸은 불안한 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참 이상한 남자야.’

    

    이런 반지가 없어도, 그가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어차피 자신은 카단 곁에 남을 것이 뻔했다. 예전에도 그렇게 말했고 행동으로도 그렇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카단은 매번 이렇게 불안해한다. 제까짓 것이 이 왕국보다도 무거운 존재인 것처럼, 언제든 달아나 버릴 변덕스러운 사람인 것처럼.

    

    “제가 당신을 거절할 리 없잖아요.”

    

    루나는 카단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어 올렸다.

    

    “사랑해요, 카단.”

    

    소중하게 감춰 두었던 고백이 생각보다 쉽게 흘러나왔다.

    

    그 말에 카단의 몸이 움찔 떨렸다. 순식간에 오른 그의 체온이 잠옷 너머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딱딱하게 부푼 그의 하반신까지도.

    

    “하, 하하.”

    

    카단은 루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목덜미로 뜨끈한 것이 느껴진다. 꼭 눈물이라도 흘리는 것처럼.

    

    “젠장,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어.”

    

    카단은 작게 구시렁대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 남자가 왜 이렇게까지 반응하나 싶어 루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건 처음이구나.’

    

    어떻게 이 중요한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루나는 얕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살면서 부모에게조차 이런 말을 들어 본 적 없으니 할 줄 몰랐던 것도 당연했다.

    

    “사랑해, 루나.”

    

    카단은 수천 번 되뇌며 가장 아름다운 모양으로 빚어낸 고백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순간 루나의 눈동자에 고여 있던 눈물이 밖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어어, 왜 이러지? 당황한 루나가 재빨리 손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자신이 사랑을 고백할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감정이 조절되지 않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사랑해, 그대를. 영원토록 그대만을 사랑할 거야.”

    

    카단이 고요한 목소리로 루나의 귓가에 고백을 반복했다. 흐윽, 흐어엉- 결국 루나가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카단은 달달 떨리는 루나의 어깨를 차분히 안아 주었다.

    

    “나와 결혼해 줄 거지, 루나?”

    

    카단이 한 번 더 되물었다. 루나는 꺽꺽 울음을 삼키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울지 말고 제대로 말해 줘.”

    

    카단이 눈물로 범벅된 뺨에 입을 맞추면서 그녀를 위로했다. 루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흐윽, 네, 카단. 좋아요. 흐윽, 당신과, 흑, 결혼할래요.”

    

    “고마워, 루나. 그리고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이지만…….”

    

    카단이 잠시 말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난 사기꾼이 아니다.”

    

    “흑,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카단과 사기꾼이라니.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 농담 같은 말에 루나는 까르르 웃어 버렸다. 울음과 웃음을 함께 토해 내는 입술이 ‘흐아하, 히끅’ 따위의 요상한 소리를 냈지만 카단은 그 모든 것이 사랑스러운 듯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루나는 그의 가슴팍에 꼬옥 안겼다. 쿵쿵대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고요하고도 잔잔했던 청혼 때문일까. 카단과 함께라면 평온하고도 행복한 일상이 소소하게 펼쳐지리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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