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가족
카단은 기절한 루나를 손수 씻겼다. 이누트의 시종들이 크게 놀랐으나 카단은 루나의 몸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깨끗하게 씻긴 루나를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침실로 향했다. 그녀와 같은 침대에서 잠을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카단의 구름은 곧 천둥 번개로 바뀌었다. 텅 비어 있어야 할 침실엔 웬 여자들과 기름칠한 루스가 먼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또 뭐야.』
미간을 찌푸린 카단이 저도 모르게 걸음을 물렸다. 특히 저 루스 놈은 왜 이상한 옷을 입고 저를 기다리는 것인가.
“카, 카단 님 살려 주세요.”
루스가 목숨을 구걸하면서 카단에게 엉금엉금 기어왔다. 야한 란제리를 입고 다가오는 것이 너무도 싫어서 카단은 그가 다가온 만큼 물러서며 거리를 유지했다. 그는 품 안의 루나를 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더 꽉 안았다.
“네가 왜 여기 있나.”
“카단 님께서 절 원하신 거 아니었나요?”
루스가 처연한 얼굴로 카단을 올려다보자 카단은 저도 모르게 이누트 욕을 주절주절 뱉어 버렸다. 본능적인 자기방어 기제였다.
“나가. 모두 당장 나가!”
“하지만 여기서 카단 님을 보필해야 한다고…….”
“목을 베기 전에 꺼져라, 루스.”
카단이 포악한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루스는 밤 시중을 들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자신의 매력이 사내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며 다른 여인들과 함께 조용히 퇴장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카단은 당장 시종을 불러 침대 시트부터 새것으로 바꿨다. 그리고 품 안에 있던 루나를 침대 위로 조심스레 내려 두었다.
새근새근 잠든 루나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다가 조금 전 루스와 여인들의 모습을 상기했다. 만약 루나가 이 상황을 보았더라면 아마도 돌이킬 수 없는 오해를 했을 것이다.
내일은 날이 밝자마자 이 사달을 만든 놈부터 찾아내야겠군. 잔뜩 화가 나 중얼거리던 카단은 옆자리에 누운 루나를 보면서 표정을 풀었다. 오늘 밤은 아주 좋은 꿈을 꿀 것 같았다.
* * *
다음 날, 루나는 전신의 뻐근함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보송한 이불이 살갗을 기분 좋게 스쳤고 푹신한 매트는 포근하게 몸을 지탱했다. 루나는 포근함을 만끽하면서 몸을 요리조리 흔들었다.
곧 단단한 팔이 루나의 허리를 확 끌어당겼다. 등 뒤로 견고한 근육질 몸이 닿았다.
“더 자.”
그가 토닥토닥 루나의 배를 두드렸다. 동시에 머리 위로 종이가 차라락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잠도 못 자고 서류 처리를 하는 것일까.
“카-.”
루나는 그를 부르려다가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어젯밤 내내 교성을 질러서인지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볼품없었다. 카단은 그마저도 사랑스럽다는 듯 루나의 정수리에 입을 맞춘 뒤 협탁 위에 있던 물 잔을 들어 입 안 가득 물을 머금었다. 그리고 루나의 턱을 조심스레 잡아 돌린 뒤 입을 맞췄다.
카단이 입술을 열고 넘겨 준 물은 루나의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넘어갔다. 목을 축이자 루나의 목에서 드디어 사람다운 목소리가 나왔다.
동시에 어제 그와 했던 행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루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난장판이 된 알현실은 정리가 되었을까. 누군가 행위를 알아채지 않았을까. 정신을 잃은 뒤 이곳까지 옮겨 온 것은 카단이겠지?
루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카단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두 잘 정리되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 모습은 황자라기보다 숲지기였던 예전의 카단을 떠오르게 했다.
루나는 카단 쪽으로 몸을 돌려 카단을 마주 보았다. 그의 손엔 대륙 공용어 어학서가 있었다. 아침부터 공부 중이었던 모양이다.
“잠시 읽었다.”
카단은 그걸 부끄러워하면서 들고 있던 책을 협탁 서랍 안으로 쑥 넣어 버렸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공부하던 버릇 때문에 오늘도 무심코 책을 펼쳐 든 것이다.
카단은 전장에서조차 공부를 게을리한 적이 없는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루나에게는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그녀 앞에선 처음부터 모든 게 능숙한 사내처럼 굴고 싶었던 것이다.
“공용어를 잘하게 된 이유가 있었네요. 멋있어요, 카단.”
루나는 살짝 붉어진 카단의 귀 끝을 응시하며 그의 노력을 칭찬했다. 그 한마디가 뭐라고 카단의 귀 전체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은근히 귀여운 사내라니까.’
루나가 기분 좋게 웃으며 상체를 일으키려던 때였다. 멈칫. 루나가 당황하면서 움직임을 멈췄다. 분명 전신은 목욕한 것처럼 보송한데 다리 사이만 소변을 지린 것처럼 질척거렸다.
‘설마, 또?’
알현실의 기억을 떠올린 루나는 재빨리 이불을 걷어 내고 하반신을 살폈다. 다행이면 다행이랄까, 소변은 아니고 어제 카단이 싸지른 정액이 꿀렁꿀렁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얼굴이 새빨개진 루나가 재빨리 다리를 가리려 했다. 그 틈을 놓칠 리 없는 카단이 어느새 루나의 다리를 벌리고 은밀한 곳을 관찰하고 있었다.
“부었군.”
역시. 연약한 루나에게 지난밤의 행위는 무리였을 것이다. 간절히 바랐던 그녀에게 닿자마자 정신을 놓아 버린 스스로가 한심했다.
카단은 침대 협탁에 있던 연고를 가져와 분홍빛으로 부푼 살점 위에 차분히 바르기 시작했다.
그 은근한 손길에 루나는 아랫배로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카단의 손끝이 닿을 때마다 구멍은 체신을 잃고 뻐끔거렸다. 카단은 눈동자만 굴려 루나를 응시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루나가 신음을 참아 내고 있었다.
달아오른 카단의 하반신이 가운 위로 불뚝 튀어나왔다. 안 돼. 그녀는 어제 충분히 무리했어. 카단이 턱을 꾹 물고 충동을 삼키던 때였다. 루나의 구멍이 뻐끔대면서 하얀 정액을 주르르 흘렸다. 어제 자신이 안쪽 깊숙이 실컷 싸질러 놓았던 정액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군. 카단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카단은 손가락에 연고를 듬뿍 퍼서 찬찬히 그 구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애액과 정액이 뒤엉킨 끈적한 액체를 쓸어서 다시 그대로 쑤셔 넣었다.
흐읏! 준비되지 않은 삽입에 루나가 무릎을 오므리고 배에 힘을 주었다.
루나의 구멍이 카단의 손가락을 감질나게 조였다. 젠장, 그의 반듯한 미간이 구겨졌다. 이누트 제국의 어떤 미친놈이 부인에게 집착하다가 정조대까지 채웠다는 뜬소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카단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야말로 그 미친놈 꼴이 나기 전에 자제해야 했다.
하지만 다짐은 잠시일 뿐. 자면서도 흘렸는지 루나의 엉덩이 아래로 축축하게 젖은 시트가 보였다. 흘린 만큼 다시 채워 준다고 하면 루나가 화를 낼까. 그보다는 아예 흐르지 못하도록 막아 버리면 좋겠는데.
그런 그의 흉포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나는 아침부터 제 음부를 빤히 쳐다보는 사내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툭 때렸다.
“그만, 해요.”
“왜.”
“부끄럽고 긴장돼요.”
루나는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려는 카단의 상체를 발을 뻗어 밀어 냈다. 몇 초간 바위처럼 꿈쩍도 안 하던 커다란 몸은 루나의 의견을 수긍한 후 천천히 멀어졌다.
그는 연고와 애액이 범벅된 손가락을 먹음직스럽게 내려다보다가 루나의 따끔한 시선을 받고 나서야 손수건에 손을 후다닥 닦아 냈다.
“바쁘지 않나요, 카단? 일이 많은 것 같던데요.”
“뭐, 그냥.”
카단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사실 쉴 틈 없이 바빴다.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손봐야 했다. 아마 자신이 알현실에서 루나와 격렬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부관들은 어젯밤 잠도 자지 못하고 업무에 열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단은 지금 당장 업무에 치중할 생각은 없었다. 반년을 넘게 루나를 기다린 데다 그녀를 얻기 위해 치른 전쟁이었다. 카단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도 아닌 루나였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서두르세요.”
카단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루나는 분주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단이 고개를 저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올 거다. 일할 사람들.”
“누구요?”
“아버지와 형님.”
“카단의 가족이 이곳에 와요?”
루나의 두 눈이 순진하게 반짝거렸다. 카단은 지금 한 번 더 하겠다고 말하면 루나가 얼결에 허락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다가 조금 늦게 답변했다.
“……왕국을 살피러 오는 거다. 며칠 뒤에 도착할 거야.”
오는 김에 실컷 저 대신 일하라지. 카단은 루나의 눈꺼풀 위로 입을 쪽쪽 맞추면서 그녀의 척추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었다.
“하하, 간지러워요!”
중심을 잃은 루나가 두툼한 대흉근에 손을 올리면서 카단 쪽으로 쓰러졌다. 카단이 그대로 뒤로 눕자 자연스레 그에게 올라탄 모양새가 됐다. 의도한 대로였기에 카단이 흐뭇한 미소를 지을 무렵.
쿵쿵. 누군가 침실 문을 정중하게 두드렸다.
『황자님, 선봉대가 도망친 브릴란 왕을 생포해 귀환했습니다.』
비쭉 위로 솟았던 카단의 입술이 딱딱하게 굳었다.
젠장할. 그는 고개를 꺾으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에 찬 음경이 가운 사이를 뚫고 하늘 높이 위용을 자랑했지만 아무래도 지금 당장 해갈하긴 글렀나 보다.
“잠시 기다려라, 루나.”
카단은 루나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춘 뒤 침실을 나섰다. 혹여 그녀가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봐 한 번 더 뒤를 돌아 루나를 확인하는 모습에선 답지 않은 초조함이 배어 나왔다.
그 아쉬운 퇴장과 함께 시녀들이 세숫물과 갈아입을 옷을 들고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충성스러운 이누트의 시녀들은 주군의 반려가 될 여인의 몸단장을 정성껏 도왔다.
* * *
이누트의 드레스로 단장을 마친 루나는 반질반질한 비단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루나의 팔을 조심스레 붙든 시녀들은 그녀를 어디론가로 안내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공용어를 알지 못하는 이누트의 시녀들이 대답해 주지 못할 걸 알면서도 한 번씩 말을 걸었다. 발길이 무거웠다. 과거 잡혀갔었던 트라우마 때문인지 이대로 카단과 헤어지는 일이 생길까 초조해진 것이다.
천만다행히도 걱정은 기우였다. 들어선 장소에서 저를 맞이하는 카단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와.”
카단이 단장한 루나의 모습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이누트 인보다 덩치가 작은 루나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드레스는 그녀에게 너무도 잘 어울렸다. 뭐, 루나의 뛰어난 미모는 오두막에서 슈미즈 한 장만 걸쳤을 때도 반짝였지만.
“예뻐.”
무뚝뚝하게 흘러나온 칭찬이 루나의 귓가를 간질였다. 루나가 수줍게 미소 짓는데 이상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비릿한 피 냄새. 루나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카단?”
“이쪽으로 와야지, 루나.”
카단은 술래잡기를 하듯 손뼉을 쳐 위치를 알렸다. 루나는 두 팔을 앞으로 더듬거리면서 소리가 나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필사적으로 저를 찾는 루나의 반응이 귀여웠다. 그런데 그녀의 불안한 걸음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그 즉시 카단은 루나에게로 빠르게 다가갔다.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받치자 빳빳하게 굳은 몸이 느껴졌다. 쉬이- 괜찮아. 카단은 루나를 다독이면서 의자까지 에스코트했다.
“잠시 여기 앉아 볼까?”
“무슨 일이에요, 카단?”
루나는 눈을 가리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주변을 맴돌던 피비린내가 점점 더 짙어진다. 작은 손바닥에 식은땀이 났다.
“잠시 확인할 것이 있어서 그렇다. 조금만 참으면 돼. 놀라지 마라.”
카단은 드레스의 네크라인에 손가락을 걸고 길게 늘였다. 앞섶을 조여 둔 리본이 자연스럽게 풀리더니 루나의 동그란 어깨가 밖으로 드러났다.
“카단?”
루나는 갑자기 옷을 벗기는 그의 의도가 궁금했다. 설마 사람들 다 있는 데서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알현실에서의 경험 때문에 그가 이런 공적인 공간을 선호하는 취향으로 바뀐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앞이 보이진 않았지만 한 번씩 들려오는 목소리를 세어 보니 구경꾼이 족히 10명은 되는 것 같았다.
아무리 카단의 뜻을 따른다지만 이건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피 냄새가 나는 공간이라는 것도 찝찝했고.
“여, 여기서는 좀…… 싫어요, 카단.”
“음?”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던 카단은 뒤늦게 루나의 오해를 알아채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내 여인의 머릿속은 예상외로 음탕하군.”
“으, 음탕이라뇨! 그런 표현은 쓰지 마세요. 남들이 들어요”
“듣기는 하지만 그 뜻은 모르니 괜찮아. 네 기대는 잠시 후에 채워 주어도 될까.”
응? 카단의 입술이 동그란 어깨 끝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과거 브릴란의 왕이 이빨로 깨물어 흉터를 남겼던 곳이었다.
곧 그의 입술이 떨어진 자리로 딱딱한 것이 와 닿았다. 지독한 피비린내가 코끝으로 진동했다. 루나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카단?”
“이제 끝났다. 잠시만 기다려 줘.”
카단의 목소리는 봄의 햇살만큼이나 상냥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행위는 그렇지 못했다.
카단은 목이 잘린 왕의 머리를 수박처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주둥이를 벌려 루나의 어깨 흉터와 모양을 비교했다. 왕의 치열과 루나의 흉터 모양은 정확히 일치했다.
카단은 루나의 어깨를 깨끗한 수건으로 벅벅 닦은 뒤, 부대장 드와보에게 들고 있던 목을 휙 던졌다.
『이놈 맞아. 이대로 성벽에 걸어 효시하도록.』
사실 생포한 왕을 당장에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서 얻어 내야 할 정보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왕은 자신이 왕이 아니라며 발뺌을 하면서 천박한 소리를 지껄였다. 왕이 실성한 척 이빨을 보이고 활짝 웃는 순간, 카단은 황금으로 씌워진 독특한 치열을 확인했다. 한눈에 보아도 루나의 흉터와 거의 일치했다.
손이 충동적으로 나간 것은 그때였다. 루나의 어깨에 흉을 남긴 새끼를 가만두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입을 찢어 버렸다. 왕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고 카단은 그가 더 괴로울 수 있도록 천천히 목을 베었다.
루나의 흉터와 이빨 자국을 대조한 것은 그가 진짜 왕인지를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절차였다.
『몸뚱이는 어떻게 할까요?』
『머리 옆에 거꾸로 매달아 놔.』
『알겠습니다, 황자님.』
『아 잠깐. 이걸 깜박했군.』
카단은 허리춤에 있던 단검을 꺼내 드와보에게 다가갔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드와보는 들고 있던 왕의 머리를 꼭 붙잡고서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주군이 단검을 휘두르자마자 눈을 꾹 감아 버렸다. 이누트 제일의 용사가 겁을 먹는 건 단연코 저 괴물 같은 황자 앞에서만이다.
푹! 소리와 함께 들고 있던 왕의 머리가 무거워졌다. 드와보는 실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주군의 단검은 왕의 이마 한가운데에 정확히 꽂혔다.
『이건 무엇입니까, 황자님?』
『유니콘이다.』
『예?』
『과거 브릴란의 왕이 자신을 유니콘이라 불렀다더군. 그래서 그리 만들어 주었다.』
카단은 드와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긴 뒤 의자에 앉아 있던 루나를 그대로 들어 올려 방을 나섰다.
드와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왕의 머리를 가만히 붙잡고 서서 눈을 깜박거렸다.
외국물을 마신 황자님이라 그런가? 참으로 창의적이신 분이다.
* * *
“이제 안대는 벗어도 되나요?”
카단의 품에 안긴 루나는 산뜻한 풀 내음을 맡으며 안대에 손을 올렸다.
“아직.”
카단은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서 목적지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대리석이 아닌 흙바닥을 밟는 소리가 조용히 퍼져 나갔다. 루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산뜻한 공기가 진득한 피비린내를 씻어 내려 기분이 좋았다.
루나는 딱딱한 돌 위에 앉혀졌다. 조르륵 흐르는 물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정원인가 싶어 손을 뒤로 뻗으니 찰박이는 물이 손끝에 닿았다.
“여긴 어디죠?”
루나가 안대를 벗으려 들자 카단이 그 손을 잡아 내리고서 루나에게 속삭였다.
“아직 벗지 말아 봐.”
“하지만 앞이 안 보이는걸요.”
“내가 여기 있는데도 두려운가.”
“아뇨, 그건 아니지만…… 읏!”
루나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상체를 감싸던 드레스가 양쪽으로 활짝 벌어지면서 젖가슴이 출렁이며 공기 중에 드러났다. 아까 리본을 미리 풀어 둔 덕에 살짝만 힘을 줘도 벗겨진 것이다.
카단은 곧장 입을 벌리고 루나의 유두를 빨기 시작했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 첩첩 소리를 내면서 게걸스럽게 빨아 대는 통에 루나는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카단, 흐읏, 여기 야외가 아닌가요?”
“맞아, 우린 정원에 있지. 아까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 짓을 하는 걸 기대하던데.”
카단은 눈을 가리고 있던 루나가 음란한 상상을 했던 것을 지적하면서 유두를 잘근 깨물었다.
“흣, 그런 게 아니라, 카단. 그만 깨물고…… 앙!”
카단은 그대로 입을 크게 벌려 유륜까지 삼킨 뒤 세차게 빨아 대기 시작했다. 힘이 좋은 혀가 루나의 돌기를 쿡쿡 자극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두에서 시작된 찌릿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내려와 아래로 몰려들었다.
루나의 구멍이 새로 갈아입은 속옷을 진득하게 적시며 담고 있던 애액을 뱉어 내고 있었다. 루나가 허리를 살짝 비트는 것만으로도 그걸 귀신같이 눈치챈 카단이 루나의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 다리 사이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루나의 젖은 속옷을 꾸욱 건드렸다.
“여길 축축하게 적신 게 네 것일까, 아니면 나의 씨물일까.”
“아읏, 그런 말, 하지 마요.”
“이런 말을 하려고 열심히 대륙 공용어를 공부했는데 서운하군.”
“어학서에, 흣, 그런 말이 나올 리 없어요, 하앗, 앗, 앙!”
“응용력이 좋다고 해 두지.”
속옷을 열어젖힌 손가락은 부풀기 시작한 음핵을 동글동글 문질렀다.
눈을 가리고 있으니 감각이 더 예민해졌다. 누가 볼 수도 있는 장소에서 소리 내고 싶지 않은데 카단이 주는 자극이 거세어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즉에 나올 걸 그랬어.”
“아읏, 오해, 예요. 하, 앗, 앙, 앙!”
“루나, 너무 소리가 커.”
이러다 진짜 시종이 오겠다면서 카단이 루나의 입을 막고 쉬이- 소리를 냈다. 놀란 그녀의 귓가가 붉게 물들었다. 조금 전 넋을 놓고 질렀던 소리를 떠올리니 수치심이 들었다.
“걱정되면 여기서 그만둘까?”
음핵에서 갈라진 둔덕을 따라 슬그머니 내려간 손끝이 구멍 근처를 배회했다. 입술을 잘근 깨문 루나는 고개를 푹 숙일 뿐이다.
“쑤셔 주고 싶었지만 아쉽군.”
카단이 그대로 손목을 거두는데.
루나가 두 손으로 더듬더듬 그의 손목을 찾아 잡은 뒤 손을 끌어와 스스로 다리 사이에 쑤셔 넣었다.
카단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 지켜만 보는 그가 야속해서 루나는 그의 손목을 잡고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애액으로 젖은 음부가 쯔읏쯔읏 소리를 내면서 손가락을 오물거렸다. 조금 더 빠르고 세게 쑤시고 싶은데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루나는 그의 약지와 중지를 뿌리까지 쑤셔 집어삼켰다. 평소라면 그가 손가락을 구부려 루나의 스팟을 꾹꾹 눌러 댔을 텐데, 지금은 그저 안쪽 주름을 살짝 긁어 댈 뿐 조금도 움직여 주지 않았다.
부족했다. 지난밤을 생각하면 정말로 턱없이 부족했다.
지금 루나는 후원에 위치한 분수대 난간에 앉아 있었다. 삼색의 장미 나무가 화려하게 둘러싼 이곳은 왕궁을 방문한 귀족이 티타임을 즐기던 아름다운 명소였다. 그래서 웬만한 귀족은 짙은 장미 향만 맡아도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신전 일에만 몰두했던 루나는 왕궁의 사교 활동에 한 번도 참여한 적 없었다. 이곳을 추측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임에도 루나는 대담하게 행동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수치심 또한 눈을 가려 버린 것일까, 아니면 이 노골적인 상황에 빠져든 것일까. 루나는 카단의 손가락을 최대한 구멍에 깊이 쑤셔 넣는 것과 동시에 허벅지를 조였다.
“읏, 카단, 이렇게…… 말고요.”
“뭘 원하는데.”
“흐으, 나빠.”
“나빠? 내가?”
“나빠요. 이런 게 있으면서…….”
루나가 그의 하반신이 있을 만한 곳으로 손을 뻗었다. 예상대로 그는 제 앞에 서 있었고 질긴 가죽 벨트가 손끝에 걸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부드러운 실크 바지 위로 미끄러지며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몽둥이처럼 길고 두꺼운 음경이 선명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루나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그의 고간에 입술을 대었다. 눈을 가려서 더 예민해진 입술로 뜨겁게 달아오른 살덩이의 온도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루나는 툭 튀어나온 윤곽을 따라 쪽쪽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다 입가로 딱딱한 바지 호크가 걸렸다. 루나는 이빨로 잘근잘근 깨물면서 작은 호크들을 하나씩 풀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손은 쓰지 않았다. 입으로만 그것을 풀어낼 때마다 그의 숨소리가 눈에 띄게 거칠어진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바지 앞섶이 활짝 벌어졌고 흉포하게 일어난 성기가 루나의 입술을 때리며 퉁 튀어나왔다. 루나는 얼얼한 입술에 침을 바른 뒤 그대로 입을 벌려 뭉툭한 선단을 머금었다. 텁텁한 쿠퍼액이 진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그도 적잖이 흥분한 모양이다.
“후우,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루나.”
“으읍?”
사탕을 빨아 먹듯이 귀두를 쪽쪽 빨던 루나가 대답 대신 콧소리를 흘리며 조금씩 그의 것을 깊게 빨아들였다. 루나의 볼이 홀쭉해지던 때, 카단이 그녀의 양 뺨을 붙잡고 조금 더 깊숙이 허리를 밀어 넣었다.
“나 없을 때…….”
다른 남자 것을 빨아 준 적 있냐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카단은 겨우 그 말을 삼켜 냈다.
그도 그럴 것이 루나의 행동이 예전과 달랐다. 그녀는 솔직하면서도 순진한 구석이 있는 여인이었다. 필사적으로 사내를 유혹하는 몸짓이 고작 다리를 벌리는 것 정도였으니.
그런데 바지 위에 입을 맞추고 입술로 호크를 푸는 발칙한 행동을 하다니. 설마 다른 새끼에게 배웠던 걸까. 그녀를 우롱했다는 왕부터 기사단장, 루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초조함과 짜증, 분노 따위가 치솟았다. 루나의 목젖을 탁탁 건들던 성기가 비좁은 목구멍에 뿌리까지 단번에 쑤셔 박혔다.
“읍!”
준비되지 않은 거친 삽입은 숨통까지 조였다. 카단의 실크 바지를 꽉 쥔 두 손이 하얗게 질려 바들바들 떨렸다. 생리적인 눈물이 안대 밖으로 흘러나왔다. 사내의 좆을 삼킨 것이 오랜만이라 목구멍을 열려고 해도 좀처럼 잘 되지 않았다.
뺨을 타고 방울지는 눈물이 카단의 손가락에 닿자 그가 멈칫거렸다. 젠장. 그는 꽉 쥐고 있던 루나의 작은 머리통을 놓은 뒤 허리를 물렸다. 켈록, 켈록! 잘게 기침한 루나가 숨을 몰아쉬면서 몸을 떨었다.
카단은 루나의 눈물을 닦아 주면서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지금의 행위는 어눌한 숲지기도 당당한 황족답지도 않았다. 얄팍한 질투에 휩싸인 소인배나 다름없었다.
카단은 텅 빈 입을 뻐끔거리다가 다시 다물었다. 황자가 되어 는 건 자존심밖에 없는지 질투에 휩싸였다는 고백이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는다.
카단은 이누트 어로 욕을 몇 마디 지껄이면서 분수로 첨벙 들어갔다. 물은 그의 무릎 아래까지 찰랑거렸다. 카단이 얼굴에 찬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켈록, 카단?”
루나가 물소리가 찰박대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안대 아래로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은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카단은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린 뒤 루나의 몸을 분수 쪽으로 돌려 앉혔다. 루나의 치맛자락과 종아리가 분수 물에 천천히 젖어 들었다.
카단은 루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허벅지까지 물에 푹 잠겼으나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무릎을 꿇는 행위는 카단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황자가 되고 나서는 더더욱. 되돌아보면 남에게 무릎을 꿇는 경우는 이누트 족 전통 무예 준비 자세를 취할 때와 루나의 구멍을 빨 때 정도였다. 지금 이 경우는 후자에 속했고.
카단은 젖은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루나의 두 다리를 어깨에 올렸다. 루나의 다리 사이에 코를 박는 속도는 사냥감에게 달려드는 맹수처럼 재빨랐다. 속옷 위로 느껴지는 그녀만의 농염한 향이 뜨겁게 가슴을 적셨다.
카단은 속옷을 열어젖히고 곧장 음핵을 입술에 물었다. 루나가 카단의 것을 흡입했듯이 카단도 강하게 그녀의 음핵을 빨아들였다. 껍질 안에 숨어 있던 귀여운 돌기가 붉게 부풀어 오르며 애무하기 좋은 크기가 되었다. 카단은 그것을 혀로 살살 굴리면서 애액을 찔끔찔끔 뱉어 내는 구멍 주변을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렀다.
‘갑자기 카단이 부드러워졌어. 그냥 거칠게 넣어 줘도 기분 좋은데.’
그래도 원인 모를 화가 풀린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지금 그가 선사하는 쾌락은 여름의 태풍이 아니라 선선한 봄바람 같았다. 그 아슬아슬한 감각이 나쁘진 않았으나 달아오른 몸은 더 큰 쾌락을 재촉했다.
그때 카단이 길게 갈라진 구멍에 혀를 쑤셔 넣었다. 뾰족하게 세운 혀끝이 천천히 그녀의 주름을 하나하나 핥으며 안을 침범했다. 안쪽에서는 그녀 특유의 체취와 더불어 저의 냄새가 희미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것이 묘한 만족감과 소유욕을 충족시켜서 카단은 더 깊게 혀를 삽입했다.
“하앙!”
질척한 자극이 뇌를 쑤셨다. 루나가 고개를 뒤로 꺾자 잘 묶어 둔 안대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여기는……?’
온통 새하얗게 빛나던 시야로 푸른 하늘과 분수대 상단 조각상이 보였다. 루나는 즉시 시선을 내렸다. 물에 젖은 카단이 다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은 꼴은 너무도 색정적이었다.
젖은 머리칼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그의 기다란 속눈썹에 맺혔다. 찌푸린 눈썹 아래로 곧게 뻗은 눈매가 루나의 음부를 빤히 응시하다가 곧장 루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루나는 그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분수대에 조각된 거장의 작품보다도 완벽한 이목구비를 멍하니 쳐다보던 루나가 시선을 돌렸다.
‘안 돼. 정신 차려야 해.’
이곳이 왕궁 후원이고 누구든 지나갈 수 있는 장소야.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손가락질받아도 괜찮았다. 하지만 카단은, 그는, 존경받아야 할 나라의 주인이 될 몸이었다. 이런 장면을 타인에게 들킨다면 그의 명예에 흠집이 생길 것이다.
루나는 타인의 발소리가 들릴까 봐 예민하게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소용없는 행위였다. 분수대 물이 차르르 아래로 떨어지고 작은 새가 지저귀었으며 바람이 나뭇잎을 사락사락 스쳐 지나갔지만, 그의 혀가 질구를 핥고 빠는 야한 소리만이 귓가에 선명했다. 그에게 영혼을 사로잡힌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 카단이 루나를 응시하면서 손가락 하나를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그것은 정확하게 루나의 스팟을 찾아 짓누르면서 루나를 절정으로 몰아붙였다. 그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물을 찰박찰박 때리는 소리가 음탕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으읏, 하, 앗, 읏, 아앙, 앗!”
루나가 카단의 머리칼을 붙잡아 그의 머리를 떼어 내려고 했다. 지난번처럼 소변도 애액도 아닌 무언가를 싸 버릴까 봐 겁이 났다.
“카단, 잠깐, 하읏, 앙! 안 돼!”
루나가 그를 밀어 내자 카단은 눈썹을 까딱인 뒤 순순히 멀어졌다. 루나는 팔다리를 파르르 떨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싸지 않았다는 안도와 함께 절정의 순간에서 가지 못한 아쉬움이 들었다.
그때 루나의 몸이 분수대 난간에 길게 눕혀졌다. 말을 타듯이 난간에 앉은 카단은 루나의 벌어진 다리를 그대로 제 고간까지 끌고 왔다. 바지 밖으로 튀어나와 꺼떡대던 성기가 그대로 루나의 구멍을 비집고 들어갔다. 눅진하게 풀어진 구멍은 카단의 것을 힘들이지 않고 삼켰다.
“아응-.”
루나가 허리를 바닥에서 살짝 띄우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느릿하고 부드러운 몸짓이 주는 쾌락은 거친 행위에서 얻는 자극과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는 몹시 느리게 움직였다. 커다란 좆이 귀두만 걸칠 때까지 뒤로 빠졌다가 다시 자궁구를 짓누르면서 천천히 뿌리까지 들어왔다. 덕분에 루나의 안쪽은 그의 좆 주변으로 불뚝 튀어나온 핏줄 모양까지 느낄 수 있었다.
“하아앗, 앙, 카단, 더, 흐응, 더.”
감질나는 행위에 입 안이 바싹 말랐던 루나가 스스로 허리를 흔들어 댔다. 그럴 때마다 분수대에 빠진 한쪽 다리가 찰박찰박 수면을 쳐올렸다. 그 어설픈 허리 짓은 카단의 것을 반쯤 삼키고 뱉으며 깔짝거렸다. 카단의 목울대가 마른침을 삼키듯 느릿하게 울렁거렸다. 그는 정원 어딘가로 시선을 홱 돌렸다.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더 해 달라고 하면 어떡해야 할까.”
나무라는 말과 다르게 루나의 안을 찌르던 음경이 크기를 부풀렸다. 아, 아아! 루나가 허벅지를 파르르 떨면서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자궁까지 닿은 귀두가 그 뒤쪽 점막까지 자극하면서 척추를 타고 전기가 흘렀다.
“하앗! 앙, 흐으, 하지만…….”
“누가 보면 어떡하려고.”
카단의 시선은 여전히 정원 어딘가에 닿아 있었다. 그곳을 알짱거리던 시종 하나가 뒤늦게 카단을 발견하고는 부리나케 반대편으로 달아났다.
“응? 루나. 누군가 더 세게 박아 달라고 애원하는 널 보면 어떡하냐고 물었다.”
“흣, 나빠요, 카단. 흐으, 거기를 더…….”
“그놈의 눈을 뽑아 버릴까?”
카단이 루나의 가느다란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 허리를 길게 빼었다가 한 번에 박아 버렸다. 자비로운 성녀님은 누군가의 눈과 사지가 뽑혀 나갈 걱정은 하지 못한 채 이기적인 절정에 달아올랐다.
“흐잇!”
루나가 두 다리를 하늘 위로 쳐들고 파르르 떨었다. 눈이 크게 벌어지고 초점이 멀어졌다. 사슴 같은 눈가를 따라 눈물방울이 또르르 흘렀다. 허공에 뜬 허리가 의도치 않게 위아래로 경련했다.
루나의 것이 정액을 달라고 흉포한 성기를 쥐어짰으나 카단은 턱을 꽉 물면서 그 유혹을 견뎌 냈다. 쾌감의 파도가 한 차례 지나가자마자 그의 허리 짓은 다시 시작됐다.
그가 이 자리에서 두 번 더 파정할 때까지, 루나는 힘없이 흔들리며 셀 수 없는 절정을 맞았다.
아마도 세 번째 절정부터였을 것이다. 쾌락으로 녹아 버린 뇌는 야외에서 카단과 천박한 행위를 한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 * *
지금 루스는 비련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그는 비틀비틀 복도를 걷다가 주먹을 쾅 내리쳤다.
‘끌려온 사내들은 죄다 죽었는데 어째서 나만!’
이 왕궁에 있던 브릴란 남성은 모두 몰살당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남성은 이누트 어를 통역 가능한 외교관과 자신뿐.
외교관은 그 쓸모가 있기에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자신은? 루스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잠자리 날개처럼 반쯤 투명한 무희 의상이 마른 근육질 몸을 은근히 감싸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작은 속옷도 이곳에서 배급받은 것이다.
‘카단 그 자식, 설마 오두막에 있었을 때부터 날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건가.’
삽입이 뭐냐고 순진한 척 물어보던 일들이 뇌리를 스쳤다. 반년 만에 재회했을 때는 어떻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라.
루스는 카단이 분노하던 모습을 단순한 수줍음으로 치부하며 기억을 왜곡하기 시작했다.
젠장, 내 매력이 동성 간에도 치명적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 매력이 산적 같은 카단이 아니라 루나에게 통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쯤 남부에 있는 삼촌 댁에서 알콩달콩 농장을 일구며 살고 있을 텐데.
그때 저 멀리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루나가 보였다.
“루스?”
루나가 그를 반갑게 부르며 쪼르르 달려오다가 어느 순간 속도를 줄이고 걸음을 주춤거렸다. 오랜만에 본 루스는 상당히 낯선 차림을 하고 있었다.
“루스, 무슨 일 있어요? 옷이…….”
루나가 루스의 몸을 위아래로 살폈다. 며칠 입었다고 이 차림에 적응한 루스는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별수 있나. 시종들이 이런 옷만 내게 주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루스의 살갗은 비싼 향유로 번들거렸다. 피부에 좋다길래 때는 요 때다, 하고 실컷 발라 본 것이다.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는데 이 또한 몇 번 발라 보니 익숙해졌다.
“세상에나. 이 옷, 춥지 않나요?”
루나는 루스의 옷감을 만지다가 실수로 그의 가슴 근육에 손이 스쳤다. 잠깐 닿았는데도 미끌미끌한 피부의 감촉이 야살스러웠다.
당황한 루나는 재빨리 손가락을 오므려야 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던 짙은 장미 향이 루나의 손끝에도 묻어 버렸다.
“지, 지금은 어디서 지내요?”
“너는 어떤데. 잘 지내고 있는 거야? 더 핼쑥해 보여.”
“저는 뭐…… 네. 잘 지내요.”
루나는 복숭아처럼 뺨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보수적인 네크라인 위로 드러난 새하얀 목덜미는 붉은 키스 마크와 잇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핼쑥해질 수밖에 없었겠구만.”
대체 얼마나 물고 빨면 저 지경이 되는지. 체력도 좋은 놈이 작정하고 덤비면 저 조그마한 루나가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루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혀를 끌끌 찼다.
“이제 루스도 알려 줘요. 지금 어디서 머물고 있어요?”
“저쪽.”
루스가 본성 옆에 붙어 있는 작은 건물을 가리켰다. 현재 왕궁에 잡혀 들어온 인질은 모두 저곳에 갇혀 있었다. 누구는 저곳을 하렘이라 불렀지만 루스는 감옥이라 불렀다.
“이제까지 살아남은 애들은 다들 이누트 족에 호의적이야. 같이 있다 보니 알겠더라고. 이젠 풀어 줘도 될 텐데 말이지.”
“이제까지 살아남았다는 건 무슨 말인가요?”
루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루스는 관자놀이를 긁어내리면서 곤란해했다. 열에 여섯이 루나의 험담을 하다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는 걸 알면 루나가 많이 힘들어하리라.
“그냥, 뭐, 아픈 애들이 많았어.”
루스는 대충 둘러대면서 루나를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이 짝사랑하던 존재와 이제는 암투를 벌여야 할지도 모르는 일. 비극적인 사랑의 삼각형이 완성되기 전에 이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
“왕궁 생활은 영 별로야. 난 역시 뼛속까지 평민인가 봐.”
비싼 향유를 매일 제 피부에 들이붓는 인간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루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루스의 미소에 루나도 따라 미소 지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루스. 제가 카단에게 잘 말해서 나갈 수 있도록…….”
“내게 무엇을 부탁한다는 거지?”
그때 루나의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카단이 복도 끝에서부터 걸어오고 있었다. 저 먼 거리에서 루나의 목소리를 들었던 모양이다. 아직도 저런 옷을 입고 있군. 카단이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부탁은 내게 직접 하는 게 어떤가, 루스. 그런 모습으로 교태를 부리지 말고.”
폭이 넓은 걸음걸이로 성큼 다가온 카단은 루나와 루스 사이에 끼어들었다. 카단의 두툼한 몸이 루스와 닿을 듯 가까워졌다.
숲지기일 때부터 존재만으로 사람을 짓누르는 놈이었는데 황자가 되니 그 압박감은 실로 대단했다. 묘한 긴장감에 휩싸인 루스는 저도 모르게 카단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런데 너무 긴장해서 그럴까. 오늘따라 유난히 작은 속옷이 여린 살을 조이는 기분이 들어 불편했다.
안절부절못하던 루스가 그만 휘청거렸다. 아주 살짝 움직였을 뿐인데 워낙 가까웠던 카단의 몸에 상체가 찰싹 붙어 버렸다. 카단의 깔끔한 정복 위로 루스가 덕지덕지 바른 향유가 묻어 버렸다.
“떨어져라.”
카단은 예외 없이 그를 강하게 밀어 냈다.
으악! 강력한 힘에 휙 날아간 루스가 벽에 철썩 붙었다. 마치 비련의 주인공 같은 포즈는 지금 입고 있는 의상과도 잘 어울렸다.
살림 지식에 해박한 카단은 기름때를 지우는 방법을 두 가지 정도 떠올리다가 생각을 털어 버렸다. 루스 놈 때문에 정신이 사나워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까지 잊을 뻔했다.
“데리러 왔다, 루나.”
“어디……로 가려고요?”
분수대를 떠올린 루나가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오늘은 알현실?”
“또, 또요?”
“왜. 그곳은 싫은가.”
카단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표정한 척 하지만 가늘어진 눈꼬리엔 장난기가 그득했다.
“차라리 그냥 침실에서…….”
루나가 벽에 요염한 자세로 붙어 있는 루스를 힐끗거렸다. 눈치 빠른 루스라면 지금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두 알아들었을 것이다. 루나는 그것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하지만 다음에 흘러나온 카단의 말은 루나의 예상을 벗어났다.
“아쉽게도 가족을 침실로 맞이할 순 없어서.”
“네?”
“아버지와 형이 이곳에 도착했다.”
* * *
루나는 카단과 알현실로 향했다. 가는 내내 머릿속이 새하얬다. 루나는 이누트 어로 ‘안녕하세요, 저는 루나 드하임입니다’라고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누트 어를 좀 더 열심히 공부할걸.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카단에게 시달리는 일상을 살다 보니 저도 모르게 낭비한 시간이 많았다.
‘그래도 공부하면서 많은 걸 배웠지.’
루나는 이누트 어를 공부하면서 이누트의 문자가 고대 룬문자와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래전 카단이 제 문신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던 일과 비석에 적힌 룬문자를 술술 읽어 낸 일을 뒤늦게 이해할 수 있었다.
루나는 카단의 손을 잡고 알현실 앞에 서 있었다. 카단의 가족이 나를 좋아해 줬으면. 루나는 길게 심호흡하며 기도했다.
그러던 중 잠깐 잊고 있었던 문제가 뇌리를 스쳤다.
“저, 그런데요, 카단.”
“왜 그런가.”
“왕좌 시트, 바꿨어요? 바꿨죠?”
그날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창피해져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아.”
카단은 그런 루나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눈썹을 까딱거리면서 다시 알현실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단?”
“기억이 잘 안 나는군.”
카단의 대답과 동시에 알현실 문이 열렸다. 당황한 루나는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다가 정면을 응시했다.
왕좌까지 펼쳐진 붉은 카펫은 루나가 더럽혔던 것과 색이 똑같았다. 자신이 싸질렀던 왕좌 시트에는 이누트 제국의 황제이자 카단의 아버지, 마제르 2세가 앉아 있었다. 사내답게 뚜렷한 이목구비와 커다란 키는 그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듯하다.
카펫을 밟으며 전진하는 루나의 발걸음이 후들후들 떨렸다. 무려 제국의 황제였다. 그 제국의 황제가 지금 자신이 더럽힌 시트 위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니 온몸의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도 살고자 하는 루나의 입술은 ‘안녕하세요, 저는 루나 드하임입니다’라고 인사말을 연습하고 있었다.
『껄껄, 잘 있었느냐, 쿠르아.』
두 팔을 벌린 황제가 우렁찬 목소리로 둘째 아들을 반겼다. 호탕한 아버지와 달리 카단의 반응은 담담했다.
『‘카단’이라 불러 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고얀 녀석. 부모가 지어 준 이름을 내버리고 반려가 지어 준 이름을 선택할 것이야?』
저놈은 기억을 잃으면서 가족 간의 애틋한 정까지 잃어버린 게 틀림없다니까. 마제르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으나 그의 안면에는 둘째 아들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다.
『아버지라면 어찌하셨겠습니까.』
『당연히 네 어머니가 지어 준 이름을 선택하겠지.』
황제는 사별한 부인을 떠올리면서 슬픈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노인의 까만 눈동자가 루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루나의 얼굴은 사과처럼 새빨갰다. 카펫을 한 번, 왕좌 시트를 한 번 번갈아 힐끗거리다가 그만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아, 지금이구나.’
루나는 한 발을 뒤로 물리고 상체를 앞으로 숙여서 이누트식 인사를 올렸다. 한 발로 중심 잡는 게 어려워 몸이 옆으로 비틀거렸지만 카단이 몰래 등을 잡아 받쳐 주었다. 덕분에 루나는 쓰러지지 않고 준비한 인사를 올릴 수 있었다. 이제 그동안 외교관에게 과외받았던 이누트 어를 뽐낼 차례다.
『안녕하세요, 저는 루나 드하임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 날씨가 참 좋군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저는 잘 지냈습니다, 당신도 잘 지냈나요?』
루나는 책 읽는 듯한 억양으로 숨 쉴 타이밍 없이 주르륵 문장을 뱉어 냈다. 실력 없는 외교관의 형편없는 문장과 말버릇이 그대로 담겨 있는 말투.
이누트 어를 카단에게 배웠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바쁜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선택했던 차선책의 결과였다.
물론 루나는 지금도 외교관을 실력자라 믿고 있었다.
황제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네 반려의 이누트 어가 아직 서툴구나.』
『서툴다니요. 아주 줄줄 외는 게 기특하지 않습니까.』
카단은 흐뭇한 표정으로 루나를 내려다보았다. 루나는 발음을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면서 입꼬리를 비쭉 올렸다가 카펫 위 얼룩을 힐끗거리며 다시 시무룩해졌다. 그것이 귀여워서 카단은 한 번 더 쿡쿡 웃었다.
황제는 둘째 아들의 반응을 보고 기가 찼다. 저 돌멩이 같은 놈이 저렇게 웃을 줄도 알았던가. 기억을 되찾고 가족과 재회했을 때에도 아주 잠깐 반가운 기색을 내다가 흉흉한 기운만 내뿜던 놈이 제 여자 앞에서는 아주 사족을 못 쓴다.
황제는 왕좌에서 일어나 천천히 루나에게로 다가왔다. 루나는 고개를 꺾어 황제를 응시했다. 카단만큼이나 커다란 덩치가 루나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너였구나. 우리에게 이곳으로 나아갈 기회를 준 것이.』
서신을 통해 그간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던 황제가 루나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저게 무슨 뜻이지? 루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신전에서 올리던 의식을 떠올리면서 그 손바닥에 자신의 정수리를 대었다.
『하하하! 그래, 그래. 네가 원한다면 쓰다듬어 주마.』
악수하고자 내민 손이었으나 감히 황제와 악수할 생각을 못 했던 루나는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 행동이 기특했는지 황제는 루나의 정수리를 힘 있게 쓰다듬었다.
어, 어라. 루나가 눈을 깜박거렸다. 잘 빗어 내린 머리가 순식간에 부스스해졌다.
『그만하시죠. 루나 아픕니다.』
카단이 황제의 손을 대충 쳐 내며 제 아비를 노려보았다. 그때 검은 머리를 반으로 묶어 내린 사내가 알현실로 들어왔다.
『아이고- 쿠르아가 여자한테 빠지더니 호로자식이 됐네요, 아버지.』
그는 루나가 있는 곳까지 성큼성큼 걸어와 허리를 숙이고 루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카단보다 우락부락했지만 그와 묘하게 닮은 이목구비. 루나는 한눈에 알았다. 저 사람은 카단의 형이 틀림없었다.
『작네. 너-무 작아.』
카단의 형, 가르는 루나의 몸을 구석구석 살펴보면서 또 한 번 너무 작다고 구시렁댔다. 가르가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로 눈동자만 굴려 카단을 응시했다.
『이런 작은 여자한테 밤마다 박는 거냐? 너 양심 없어?』
『꺼지십시오, 형님.』
카단이 루나의 앞을 막아서며 그르렁거렸다. 이누트 족은 평생 단 한 명의 반려를 맞이한다. 그 반려를 맞이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내와 목숨을 건 혈투도 불사했다.
그리고 카단의 형, 가르는 아직 반려를 맞이하지 않았다.
카단이 그런 가르를 경계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제가 보기에 루나는 누구나 탐이 날 만큼 아름답고 순수하며 고귀한 여성이었으니까.
『까칠한 자식. 나도 궁금해서 그러지. 게이트를 봉인했다던 성녀님이 대체 누군지.』
『…….』
『뭐, 예쁘네. 새하얀 토끼 같은 게 깨물어 보고 싶어.』
저 통통한 뺨에 잇자국이 생기면 재밌을 것 같기도. 가르가 카단과 닮은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루나를 응시했다. ‘예쁘다’란 이누트 어는 카단으로부터 들어 본 적 있기에 루나는 그 말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루나의 두 뺨이 붉어지자 가르의 눈이 커졌다가 호선을 그렸다. 게다가 귀엽기까지 하네. 가르가 눈에 띄게 호기심을 보이자 카단이 커다란 덩치를 부풀렸다. 주먹을 꽉 쥔 그의 손등 위로 툭 튀어나온 핏줄이 꿈틀댔다. 제아무리 형제라도 제 암컷을 탐낸다면 목덜미를 물어뜯어 버릴 생각이었다.
『미친놈, 살기 봐라? 이 형님을 죽이기라도 하시게?』
『필요하다면.』
『머리를 써, 아우님. 네가 그렇게 반응하면 할수록 상대방은 더 호기심이 생기는 법이니까.』
가르가 도발은 그만두라고 에둘러 말했으나 카단의 기세는 여전히 흉악했다.
그래, 이럴 땐 나이 많은 형님이 져 줘야 하는 법. 가르는 저 무식한 살인 병기가 결투 따위를 선언하기 전에 재빨리 한발 물러섰다.
『난 아직 저렇게 작은 몸에 박아 대는 변태가 아니니 안심하셔.』
가르가 삐딱하게 웃으며 카단의 머리를 쓰다듬고자 손을 올렸다. 탁! 카단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르의 손을 세게 쳐 냈다.
『만지지 마십시오, 머리.』
카단은 가르가 머리를 만지는 행위만 거부할 뿐, 변태라는 말은 반박하지 않았다.
루나와 재회한 후 제 관심사는 저 작은 몸을 임신시키는 것밖에 없었으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루나의 저 납작한 배가 산처럼 부풀어 오른 모습을 상상하자 치솟던 분노도 빠른 속도로 잦아들었다.
그사이 가르는 카단의 손자국이 붉게 남은 손목을 황제에게 보이며 엄살을 떨었다.
『으악, 아파! 보셨습니까, 아버지? 이놈이 제 손목을 부러뜨리려 했어요!』
대체 누가 형이고 누가 아우인지. 황제는 나이가 몇인데 형제간 싸움박질이냐며 혀를 끌끌 찼다. 어릴 때 겪지 못했던 형제간의 유치한 다툼을 이제 와 겪을 때마다 참으로 남 보기가 부끄러웠다.
『쿠르아의 머리는 나도 못 만지는 걸 알지 않느냐. 네 동생 그만 약 올리거라, 가르.』
이누트 인은 영혼이 머리에 머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자신이 인정한 상대에게만 머리를 허락했다.
조금 전 루나가 황제의 손 아래로 머리를 들이민 것을 황제가 매우 흡족하게 받아들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참고로 카단은 10살 이후로 가족에게조차 머리를 허락한 적이 없었다. 지금 그의 머리를 만질 수 있는 건 루나가 유일했다.
물론 황제는 카단이 루나에게만 머리를 내어 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마 알았더라면 조금 더 서운했을 것이다.
『둘 다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 쿠르아의 반려가 이누트 어를 못 알아들어서 망정이지 이 대화를 알아들었다면 짐은 심히 부끄러웠을 게야.』
『아버지, 제 이름은 이제 쿠르아가 아니고 카단이라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래, 쿠르아 아니고 카단.』
저 망할 놈의 이름 타령. 급격히 피곤해진 황제는 이마를 매만지며 카단의 요구대로 이름을 고쳐 불렀다.
그때, 알현실 문이 열리면서 손님이 한 명 더 등장했다. 루나보다 머리 하나가 큰 이누트의 여성이었다. 건강한 갈색 피부와 근육이 잡힌 매끈한 몸매가 인상적이다.
『이제 왔냐, 와슈드?』
가르가 여성을 와슈드라고 부르면서 손을 흔들었다. 와슈드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카단과 루나를 힐끔거리며 지나치고는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늦었습니다, 폐하. 오는 길에 귀찮은 것들이 붙어서요.』
『괜찮다, 와슈드. 온 김에 카단의 반려와도 인사를 나누거라.』
『반려요? 벌써 정했답니까?』
와슈드가 고개를 돌려 루나를 응시했다. 와슈드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루나는 단번에 저 여자가 카단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와 제국에서 긴밀한 관계였던 걸까. 루나가 카단을 올려다보자 카단은 와슈드를 소개했다.
“이누트 제국에는 발키리란 여전사 부대가 있다. 발키리를 통솔하는 대장이야.”
“그렇군요.”
루나가 원하는 만큼 자세한 설명은 아니었으나 루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와슈드가 카단에게 다가왔다.
『승리를 축하합니다, 2황자님.』
『고맙다.』
카단은 와슈드가 내민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눴다. 짧은 악수가 끝나자 카단은 담백하게 손을 거뒀다. 와슈드의 시선이 루나에게 닿았다.
“안녕하세요.”
와슈드가 능숙하게 공용어로 인사를 건넸다. 루나의 눈이 커졌다.
“아, 안녕하세요. 공용어를 잘하시네요.”
“황자님께서 공부할 때 조금 배웠습니다.”
와슈드는 카단이 전장에서도 어학서를 쥐고 사는 바람에 그걸 지켜보다가 저도 외워 버렸다는 말을 농담처럼 덧붙였다.
“황자님보다 제가 더 빨리 익혔을 겁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별거 아닙니다. 그나저나 왕국인은 정말 귀엽군요.”
와슈드가 루나의 작은 키와 좁은 어깨, 근육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팔다리를 훑었다. 그녀의 시선이 잠시 루나의 가슴에 머물렀다가 어린애는 아닌가, 하고 이누트 어로 중얼거렸다. 루나는 그 정도의 이누트 어는 알아들을 수 있었기에 얼굴을 붉혔다. 자신을 어린애로 착각할 만큼 와슈드의 가슴은 그녀의 키만큼이나 풍만했다.
“그나저나 황자님이 설명해 주셨나요? 약혼녀가 있다고.”
“네, 네? 약혼녀요?”
루나는 놀란 나머지 카단을 올려다보았다. 카단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신경 쓰지 마라.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긴요, 제가 황자님의 태중 약혼녀 맞잖습니까.”
와슈드는 낄낄 웃으면서 카단의 팔을 툭 쳤다. 친근해 보이는 둘의 관계에 루나는 불안함을 느꼈다.
그때 황제가 와슈드를 불렀다.
『인사는 이 정도로 된 것 같구나, 와슈드. 우선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어. 먼 길을 왔더니 짐이 몹시 피곤해.』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버지.』
카단의 형이 황제의 거동을 도우며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저도 좀 쉬어야겠어요. 내일 인사드리겠습니다.”
와슈드가 그 뒤를 따르며 사라졌다. 그렇게 카단의 가족 모임은 어색하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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