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재회
시간은 겨울밤 내리는 함박눈 같았다. 소리 없이 흩날리던 시간은 카단과 함께했던 과거 위로 수북이 쌓였다.
‘카단, 당신은 안녕한가요?’
오늘도 발코니에 선 루나는 환호하는 군중 속에서 멍하니 그를 찾았다.
“성녀님이다!”
“마수 게이트를 봉인하셨던 분이 왕국에 계시니 전쟁도 우리가 이길 수 있어.”
수많은 환대에도 루나의 눈은 텅 비었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 노예 생활을 마다하지 않던 때가 있었건만. 군중의 찬양에도 심장은 고독했다.
‘카단.’
루나는 아무것도 없는 왼손 약지를 보면서 그의 이름을 또 한 번 되뇌었다.
“여어, 위대하신 성녀님!”
그 잠깐의 사색을 방해한 것은 루스였다. 며칠간 심부름을 다녀오느라 자리를 비웠던 그가 발코니 입구에서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루나는 대중에게 인사를 마친 뒤 다시 실내로 들어왔다.
“자꾸 성녀라고 놀리지 말아요.”
“거짓말은 아니잖아?”
“북부엔 잘 다녀왔나요?”
“눈 반짝거리지 마. 이번에도 결과는 똑같으니까. 이번에도 오두막은 텅 비었더라.”
루스는 보름에 한 번 카단의 오두막과 살던 마을을 다녀왔다. 루나가 그에게 의뢰한 심부름이었다.
“……고생했어요.”
루나는 이번에도 그에게 금화 하나를 건넸다.
“인심도 후하셔라.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아, 백작님.”
“다음에도 잘 부탁해요.”
“그게 말이야, 루나. 다음은 힘들 것 같아.”
“네?”
“전쟁 때문에 북쪽 숲 분위기가 좋지 않아. 마을 사람들도 버티지 못하고 모두 피난을 떠났더라고.”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제 북쪽 숲에서는 마수의 울음소리 대신 인간의 비명이 들렸다. 이대로라면 다음은 없을 것이다.
“마을과 숲이 한바탕 전쟁이 터진 것처럼 난리였어. 데이지도 죽은 모양이고.”
“데이지……가요?”
“응. 적군의 우두머리를 자기가 안다고 그쪽 진영 가서 설치다가 죽었다던데. 다들 꼴좋다고 손가락질하더라만.”
데이지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데이지를 차분하고 선량한 여인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딱 며칠만 같이 있어 보면 이기적인 본색이 나타났다. 그녀는 조용히 자기 이득을 챙기는 데에는 탁월한 인간이었다. 자기 것은 아까워하면서 남의 것은 펑펑 쓰는 그런 부류.
사내들 앞에선 살랑살랑한 몸짓으로 마을 여인들을 은근히 헐뜯어 친구가 몇 명 없었다.
그런 데이지가 숲의 제물로 지목되었을 때 마을 사람들 과반이 동의했다. 그게 분했는지 잔머리를 굴려서 노예를 사자고 제안하여 죽음을 피해 갔다고 했다. 카단의 인기가 많아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걔 진짜 보통 아니야. 카단은 관심도 없는데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나 뭐라나. 마을 남자들 죄다 꼬신 자신감에 가득 차서 여우 짓을 어찌나 하던지.”
“루스는 안 넘어갔어요?”
“여우 눈에는 여우가 보인답니다, 레이디.”
여우를 자칭한 루스는 정중한 귀족 인사를 흉내 내면서 설명을 마쳤다.
루나는 데이지의 소식을 듣는 내내 두 손을 깍지 껴 꽉 쥐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후- 차분하게 시선을 돌린 루나는 창밖을 응시했다. 저물어 가는 태양이 오늘따라 피처럼 붉게 느껴졌다.
“강가에서 기다려라. 그러면 적의 시체가 떠내려 올 것이다.”
루나는 혼잣말처럼 옛 속담을 중얼거렸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복수에 대한 속담이에요. 어렸을 적 책에서 봤던 건데 갑자기 그 말이 떠오르네요.”
사실 추측하고 있었다. 자신을 마을에 고발하고, 기사단에 잡히게 한 것이 데이지일 거라고.
분노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단지 분노에 치우치기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데 초점을 맞췄던 것이지.
남몰래 쌓아 놨던 분노와 설움이 울컥 튀어나와 눈물이 핑 돌았다.
‘안 돼. 이럴 때가 아니잖아. 시간이 없어. 카단만을 생각하자.’
카단만. 루나는 끝내 고인 눈물을 밖으로 흘리지 않고 안으로 삼켜 버렸다.
“한 번만 더…… 부탁해요, 루스.”
“이 말은 안 하고 싶었는데, 이젠 포기해, 루나. 벌써 몇 달째 오두막은 비어 있어. 사람의 흔적도 없다고.”
마을 사람들조차 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게다가 군의 동태가 이상했다. 공지된 바는 없었으나 왕국군이 후퇴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느낌이 안 좋아. 이 짓 그만하고 나랑 남쪽으로 가자. 사촌 형이 남부에서 아주 큰 농장을 운영하는데……….”
“루스, 전 여길 떠날 수 없어요.”
루나는 단호하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 루스가 손을 뻗어 루나의 팔을 붙들었다.
“감히 성녀님 몸에 손을 대다니!”
그걸 지켜보던 신관들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루나는 손을 흔들어 신관들을 물렸다.
이제 방 안엔 단둘이 남은 상황. 루스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서 몇 달 전부터 참아 왔던 본심을 토했다.
“그, 처녀만 좋아한다는 변태 왕 때문이야? 왕이 네 발목을 신전에 묶어 놨어?”
“아뇨.”
“넌 작위에 관심 없잖아. 돈에도 큰 관심 없고.”
“…….”
“이러고 있는 거, 힘들잖아, 너.”
“티 났어요?”
“그래, 티 났다. 여기서 손 흔들고 있으면 사람들이 너한테 성녀님, 성녀님 하는데 너 그거 안 좋아하잖아. 단지 유명해지고 싶은 거겠지.”
루스는 루나의 팔을 꽉 쥐다가 천천히 손을 떼었다.
“유명해지면 카단이 알아서 널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한 거잖아.”
루스의 말에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그는 참 눈치가 빨랐다.
그의 말대로 루나는 매일 상상했다. 저를 보기 위해 카단이 이곳을 찾아오는 순간을. 그는 남들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 커다란 사내이니 군중 속에서도 눈에 띌 것이다. 나를 보자마자 단숨에 발코니까지 뛰어오려나. 그가 입을 맞춰 오면 그대로 받아 줘야지.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서 다시 포근하고 아늑하던 보금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그가 만든 침대에 누워서 그의 온기에 파묻혀야지. 저주 같은 문신 때문에 카단이 죽을 거라고 마음 졸이지 말고…… 그저 행복하게, 편안하게 살아야지.
상상은 너무도 달콤했다. 루나는 그만 가까스로 삼켰던 눈물을 흘려 버리고 말았다. 루스가 소맷자락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젠장, 카단 자식이 그렇게 좋아?”
루스의 목소리는 어쩐지 화가 나 있었다. 루나는 흐느끼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흑, 네에. 좋아요, 흐윽.”
“그딴 자식이 뭐가 좋다고 울어! 나라면 너 없어진 즉시 찾아 나섰을 거야.”
“제가 갑자기 사라져서, 흑, 오두막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요.”
“기다려? 그 오두막에 아무도 없다니까!”
루스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면서 목에 핏대를 세웠다.
“네가 성녀가 된 거, 온 왕국 사람들이 다 알아. 네 초상화가 실린 호외가 작은 마을까지도 뿌려지더라. 그런데 그 자식은 안 오잖아.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데도 안 보이잖아!”
루나는 입술을 꾹 물고 흐느꼈다. 루나 또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거라고. 이대로 헤어진 거라고.
“그딴 자식이 뭐가 그렇게 좋아? 물론 여기저기 다 큰 건 인정하는데, 어? 나만큼 섬세하진 않잖아. 그 둔한 놈 때문에 밤마다 우는 거 그만하라고!”
루스는 루나가 카단을 그리워하며 숨죽여 흐느끼는 걸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제 속을 알아주는 상냥함 앞에서 루나는 더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나쁜 새끼.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한테서 자기 흔적을 찾고 있는 줄도 모르고. 멍청한 새끼!”
루스는 두 팔을 벌려 루나를 끌어안았다. 루나의 이마가 루스의 가슴팍에 콩 부딪혔다.
루스는 루나의 등을 차분히 쓰다듬었다. 그녀의 정수리에 입술을 대고 ‘쉬- 괜찮아’라며 다독이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만약 카단 자식이 눈앞에 있었더라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놈에게 결투를 청했을 것이다. 처맞아서 반송장이 될 게 뻔하지만.
“울지 마. 내가 흥분해서 말을 잘못 꺼냈어.”
“흐윽, 흐어엉.”
“그만 울라고, 젠장!”
루스는 제 심장이 너덜너덜해지는 것을 느끼며 목을 꺾어 천장을 응시했다.
‘부디 나처럼 상처받는 날이 오기를 바라, 루스!’
그동안 자신이 울렸던 여자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아른거렸다. 아마도 지금 그 벌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 * *
루스의 예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누가 이누트 족을 야만인이라 했던가. 발전한 문명과 우월한 체격을 가진 이들은 그야말로 강력했다. 베일에 가려져 있었을 뿐.
북쪽 숲에서 접전을 벌이던 왕국군은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왕국군은 전력이 월등하다고 판단했으나 완벽한 오판이었다.
이누트 족은 변방에서 교전하는 척 왕국군의 힘을 빼놓은 뒤 그들이 지칠 때를 노려 단번에 수도까지 밀어붙일 계획이었다. 이건 전쟁이 아니었다. 사냥이었다.
이번 전쟁을 주도한 건 이누트 족 2황자였다. 몇 년 전 브릴란 왕국 변경 근처에서 실종되었다가 기억을 되찾고 귀환한 사내로 아주 잔인하다는 정평이 자자했다.
결국 북쪽 전선은 무너졌다. 그로부터 이누트의 군사가 왕국 수도까지 내려오는 데는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누트 선봉대의 움직임은 왕국군 파발보다도 빨랐다. 수도 방어선은 저항 한번 못 하고 뚫려 버렸고 아수라장이 됐다.
“저, 저런 괴물들을 어떻게 이기냐고!”
그들의 기세는 대단했다. 왕국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귀족들은 사병 한번 써 보지 못하고 항복했다.
이번 전쟁에서 이누트 족은 일반인을 학살하지 않았다. 대신 귀족들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일부 귀족은 하인의 옷을 빼앗아 평민 행세를 하였으나 곧 하인의 고발로 잡혀가 참수형을 당했다.
오늘도 자신이 간택한 처녀와 신나게 놀아 대던 왕은 침략 소식을 듣고 속옷만 겨우 걸친 채 남부로 도망갔다.
그나마 애국심이 있었던 기사단장이 왕궁을 끝까지 지켰으나 쌍검을 구사하는 이누트의 황자에게 30분을 버티지 못하고 생포됐다.
왕성을 점령한 2황자는 피 칠갑이 된 중앙 궁에 들어섰다. 이누트 최고의 무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귀족 사내는 모조리 죽이고 여인들은 생포하여 연회장으로 끌고 오라. 그리고…….』
2황자는 선봉대를 향해 몇 가지 명령을 내리면서 뺨에 튄 피를 스윽 닦았다. 피를 닦아 내는 방향대로 핏자국이 긴 꼬리를 드리우자 아름다웠던 황자의 얼굴이 포악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주군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소수정예인 선봉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곧 커다란 천으로 몸을 가린 백여 명의 여인이 열을 맞춰 연회장 홀에 무릎을 꿇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렸지만 이누트 병사의 험악한 표정을 보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2황자는 발치에 엎드려 있던 기사단장을 발로 세게 차 버렸다. 기사단장이 단상 아래로 데굴데굴 떨어지자 황자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커허억! 쿨럭, 사, 살려…….”
기사단장이 목숨을 구걸했으나 황자는 조금의 미련도 없이 가슴팍을 한쪽 발로 꽈악 짓눌렀다. 크아악! 뼈가 으드득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기사단장의 비명이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겁에 질린 여인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터벅터벅. 황자의 느릿한 걸음 소리가 쥐 죽은 듯 조용한 홀을 울렸다. 그의 걸음걸이는 배부른 표범처럼 우아했다. 그 걸음 뒤로 찍힌 붉은 발자국에선 사냥감의 피비린내가 났지만 말이다.
황자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새카만 눈동자로 똑같은 천을 뒤집어쓴 인질을 훑었다. 몇몇 여인은 매력적인 황자의 눈에 들고자 욕심을 냈다. 하지만 용감한 도전을 하는 이는 없었다. 따갑도록 느껴지는 살기가 두려워 감히 고개를 쳐드는 이가 없었다.
『너도 아니고. 너 또한 아니고.』
낯선 이누트 어가 여인들의 뒤통수로 떨어졌다.
그렇게 30분쯤 시간이 흘렀을 무렵, 그의 기다란 다리가 어느 여인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그는 짐승처럼 흉곽을 크게 부풀려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운 체취가 느껴지자 그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찾았다.』
살짝 허리를 숙인 황자는 우락부락한 손을 뻗어 고개를 푹 숙인 여인의 턱을 잡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오랜만이야, 루나.』
황자는 그녀가 알아듣지 못할 이누트 어를 중얼거렸다.
모든 것을 체념한 루나의 눈동자는 흐릿했으나 황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초점이 명확하게 돌아왔다. 곧 연노랑 눈동자는 좌우로 파르르 흔들린다.
“카, 카단…… 씨?”
카단이었다. 카단이 확실했다. 다만 그는 낡은 셔츠와 바지를 걸친 숲지기가 아니라 이누트 족의 화려한 전투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가 쓰는 외국어도 낯설었다.
‘꿈인가? 아니면 환상?’
예상치 못한 상황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생각이 멈추고 심장이 뛰었다. 삐- 귀에서 이명이 울리고 오직 그의 얼굴만이 생생하게 각인되었다.
『아, 이누트 어는 못 알아듣는 걸 깜박했군.』
카단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래도 덩치가 큰 카단을 보려면 루나가 고개를 꺾어야 했지만 아까보다는 눈을 마주치기가 수월해졌다.
루나는 카단을 보면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안녕하세요, 카단. 수백 번 연습하던 인사를 하고 싶은데 어째서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 루나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카단이었다.
“아기는.”
이번에 흘러나온 건 대륙 공용어였다. 신기하게도 그의 말투는 예전처럼 어눌하지 않았다. 이유는 몰라도 루나만큼이나 유창해졌다.
카단이 외국어를 사용하자 이누트 병사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시선을 교환했다. 이누트 인은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고집하는 폐쇄적인 특성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황자의 태도는 이누트 인답지 않았다. 그의 대륙 공용어를 달가워한 것은 루나뿐이었다.
“아, 아기요?”
대뜸 물어보는 아기 소식에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응. 아기.”
아기를 한 번 더 강조한 카단은 루나에게로 팔을 뻗었다. 루나는 어깨를 흠칫 떨면서 눈을 꾹 감았다. 곧 그의 손바닥이 루나의 아랫배에 닿았다. 그는 루나의 판판한 배를 매만지면서 다른 손으로 손가락을 꼽으며 날짜를 세었다.
“네 배, 이만큼 나왔어야 하는데……. 그런데 없네, 아기.”
카단이 루나의 아랫배 앞을 동그랗게 손짓하면서 수려한 미간을 찌푸렸다.
임신을 말한 거구나. 뒤늦게 그 뜻을 파악하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루나는 아랫입술을 안으로 물면서 시선을 피했다.
“저, 저는 임신한 적이 없어요, 카단 씨.”
“그럴 리가.”
카단의 대답은 확신에 차 단호하기까지 했다. 그는 기억을 더듬듯 고개를 틀어 허공을 응시했다. 완벽한 콧날이 아름다운 옆선을 만들어 냈으나 뺨 위에 묻은 핏자국은 섬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셀 수가 없는데.”
“네?”
“내가 네 배 속에 싸지른 씨물이.”
허공에 박혔던 카단의 시선이 루나에게 돌아왔다. 카단은 지난 밤들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한번 시작된 관계가 쉬이 끝난 적은 없었다. 그녀가 기절하듯 잠이 들어도 허리를 멈추지 못했으니까.
자궁구부터 질 입구까지 가득 정액을 채우고 그것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면 또 한 번 쑤셔 넣기를 반복했다. 행위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더는 그녀가 제 씨를 삼키지 못하는 상태가 오면 그녀의 얼굴에 제 것을 싸지르는 것으로 밤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니 깨기 전에 직접 씻길 수밖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그녀가 그 상태를 알아 버리면 저를 경멸할지도 몰랐으니. 지금도 저거 보라. 고작 씨물 얘기만 했을 뿐인데 얼굴이 새빨개지지 않았나. 가엽게도 당장에 빨아 버리고 싶은 입술 또한 파르르 떨고 있었다.
“뭐, 그건 아무래도 좋다. 그런데, 루나.”
카단이 엄지손가락으로 루나의 통통한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그것이 살살 떠는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질 때마다 그간 참아 왔던 성욕이 폭력적으로 치솟았으나 지금은 가장 중요한 걸 물어야 할 때이니 잠시 참아 내기로 한다.
“왜 도망쳤나.”
“네?”
“그 오두막에서 왜 도망쳤냐고. 그것도 다른 사내와.”
“전 도망간 적 없어요, 카단.”
도망가다니. 오히려 붙잡혀 끌려갔다고 해야 옳았다. 루나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지금 카단은 무언가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래, 루나. 난 널 믿는다. 너의 말과 행동은 내게 절대적인 진실이 되지. 그런데…….”
카단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마침 이누트 병사 하나가 루스의 목덜미를 잡고 연회장으로 질질 끌어오고 있었다.
“난 다른 사내는 믿지 않아서.”
카단의 살기가 루스에게로 향했다. 병사는 루스를 바닥에 내팽개치듯이 내려놓았다. 우당탕! 대리석 바닥을 두어 번 구른 루스가 몸은 바닥에 엎드린 채로 고개만 쳐들었다.
“카, 카단…… 님?”
카단 놈에서 님 자가 절로 나왔다. 눈치 빠른 루스는 카단의 의복과 상황만을 보고서 그의 사정을 단번에 꿰뚫었다. 그가 왜 살기등등하게 저를 노려보는지까지도.
“사, 살려 주세요, 카단 님! 그거 아닙니다! 아니에요!”
루스는 카단이 오해할 만한 내용을 ‘그거’에 압축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옛정을 생각해 달라고 손바닥이 닳도록 빌었다.
하지만 카단의 반응은 여전히 싸늘했다. 그는 루스의 생김새도 말투도 싹싹 비는 저 열 손가락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저 껍데기. 그간 루나 곁에서 얼마나 호의호식했는지 족제비처럼 반지르르했다. 여자나 꼬시며 다니기 좋은 방탕한 생김새였다.
“열흘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을 때 네가 떠났음을 직감했다. 그 후로 많이 고민했지. 나를 버리고 루스를 선택한 네 결정을 어디까지, 또 언제까지 존중해야 하는지.”
무릎을 일으킨 카단은 허리춤에 꽂아 둔 검 한 자루를 꺼내 가볍게 들었다. 마르지 않은 피가 검날을 따라 또르르 흘러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흐이익! 그게 아니라니까요, 카단 님! 오해가!”
“받아들이기 고통스러웠다. 어째서 내가 아니라 루스 놈이었을까. 그게 궁금해서 잠을 못 잤어. 온통 세상이 노랗게 보이더군. 네 눈동자에 갇힌 것처럼 말이지.”
카단은 쥐고 있던 검을 휙휙 돌렸다. 검이 몸의 일부인 것처럼 그 움직임은 가볍고 자연스러웠다.
곧 뱅뱅 돌아가던 검이 멈췄다. 검 끝은 정확하게 루스의 목에 닿았다. 피가 주르륵 흘렀다. 여기서 카단이 조금만 힘을 준다면 루스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어 버릴 것이다.
“그런데 이젠 안 궁금해. 이 새끼를 죽이면 너의 유일한 선택지는 내가 될 테니.”
그때 루나가 벌떡 일어나 카단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카단, 잠시, 잠시만요.”
“하?”
지금 누구 앞에서 누굴 감싸는 건가. 카단은 루나와 루스를 번갈아 보면서 이를 갈았다.
“이러지 말아요. 루스는 죽을 뻔한 절 도와준 사람이에요!”
도와줘? 카단이 한쪽 눈썹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래, 루나를 살려 준 건 고맙지. 하지만 나도 그랬다. 나도 너를 살렸어. 그런데 어째서 내가 아닌 저놈이었나.
카단의 마음속이 술렁거렸다. 칼을 쥔 건 카단이었는데 오히려 자신이 상처받은 것처럼 그의 눈동자가 설움에 울렁였다.
쌍검을 들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수백을 베어 낸 영웅이 여인의 말 한마디에 당장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에요, 카단. 설명할 수 있어요.”
루나가 검을 쥔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개어 올렸다. 그리고 그가 검을 내릴 수 있도록 천천히 아래로 힘을 주었다.
“정말 다 설명할 테니 루스를 죽이지 말아요.”
예전이라면 그가 사람을 죽일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반년 만에 나타난 카단은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한없이 다정하던 숲지기는 타인의 피를 묻힌 폭군이 되어 제 앞에 서 있었다.
“싫다면.”
루나가 말리자 카단은 되레 독이 올랐다. 새카만 연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팽팽하게 차 버린 기분이었다. 루나의 절박하고도 연약한 힘이 손등으로 전해졌으나 카단은 순순히 검을 내리지 않고 버텼다.
내 반지를 버리고 루나가 선택한 사내. 그래, 순순히 보내 줘야지. 루나 곁이 아니라 지옥으로.
“카단 씨, 제발.”
두려움에 찬 루나의 눈동자가 눈물이 뚝뚝 떨어뜨렸다. 누굴 위한 눈물일까. 루스를 위한 눈물이라 생각하니 새까맣던 머릿속이 이젠 시뻘겋게 돌아 버릴 지경이다.
루나는 그런 카단의 심정을 아는 것처럼, 그가 검을 내릴 때까지 기다리는 걸 포기하고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껴안았다. 그의 품으로 파고들 때 카단이 들고 있던 검에 뺨이 스쳤다. 다행히도 날카로운 칼날 대신 넓적한 배마루가 뺨에 닿아 상처는 나지 않았다. 카단이 빠르게 칼날 방향을 바꾼 것이다. 다만 검이 회전하는 바람에 검 끝은 루스의 목을 더 파고들었지만.
“하아.”
카단이 길게 내뱉은 한숨이 루나의 정수리로 뜨겁게 떨어졌다. 그는 고집스럽게 세웠던 검을 바닥에 대충 던져 버렸다. 품에 안긴 루나가 실수로라도 검에 베이는 꼴은 차마 볼 수 없었다.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루나는 카단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고서 감사를 건넸다. 루나의 말캉한 몸이 단단한 갑주 위로 바싹 붙었다. 카단은 그 모습을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짐승처럼 목을 긁는 소리를 냈다.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다. 내가 납득할 수 있게.”
동시에 루나의 몸이 붕 떠올랐다. 카단은 루나의 등과 무릎 아래를 받쳐 안아 들었다. 루나는 그의 단단한 목에 두 팔을 감고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대었다.
“네, 카단. 설명할게요.”
두근두근. 건강하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니 또 한 번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루나의 작은 심장도 그의 속도를 따라 도곤도곤 함께 뛰었다.
‘이제야 내가 아는 카단 같아.’
루나는 두툼한 가슴팍에 이마를 비비면서 말갛게 웃었다. 그가 어떤 음침한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카, 카단 님!”
그때 루스가 용기를 내어 카단을 불렀다. 그의 품에 안긴 루나가 이대로 퇴장하면 앞으로도 영영 루나를 못 볼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카, 카단 님! 그, 루나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거죠?”
카단은 루나를 안고 연회장을 나서려다 잠시 걸음을 멈췄다. 위로 치켜뜬 검은 눈동자엔 짜증이 가득했다.
왕국 땅을 밟을 때 미리 심어 두었던 첩자에게 루나가 귀족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었다.
그런데 왜 평민인 루스는 아직도 루나를 저리 친근하게 부르는 것인가. 저 눈치 빠른 놈이 상황 파악을 못 할 리 없을 테고. 설마 루나와 긴밀한 관계를 지속했었나.
작은 가정은 더 큰 상상을 불러왔고 카단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저 새끼가 무슨 질문을 했더라. 아, 루나를 어디로 데려가냐고 했던가. 카단이 한쪽 입가를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네가 알 바는 아니지.”
지금 루스의 앞에서 루나가 누구의 여자인지 각인시켜 버리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반년 넘게 묵혀 왔던 질투가 사악한 충동이 되어 눈앞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카단은 루나가 머리에 쓰고 있던 커다란 천을 단숨에 벗긴 뒤 바닥에 던져 버렸다.
“카단?”
새하얀 성녀복을 걸친 루나의 모습이 외부로 드러났다. 여름밤의 요정처럼 우아하고도 청순한 모습은 색다른 매력을 풍겼다.
이렇게 달라진 루나의 모습조차도 카단의 질투를 샀다. 저 개자식은 이런 루나의 변화를 바로 옆에서 관찰했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니 한 가지를 깜박해서.”
카단은 그대로 안고 있던 루나를 벽에 밀어붙였다. 윽, 루나가 눈을 살짝 찡그리면서 신음을 흘렸다. 등으로 딱딱한 벽이 느껴졌고 앞으로는 그만큼 단단한 카단의 몸이 있었다. 루나는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매달린 모양새가 되었다. 그때 카단의 손이 치렁치렁한 치마를 들어 올렸다.
“너의 인사, 오랜만에 들어 보고 싶군.”
그가 일정을 마치고 오두막에 돌아올 때면 그녀가 저를 반기며 항상 건네던 인사. 그 한마디가 뭐라고 나무를 패고 장을 보면서도 귀가를 서두를 때가 있었다.
인사라면. 루나가 카단을 힐끗 쳐다본 후 기억을 더듬었다. 한참을 오물대던 작은 입술이 조심스레 단어를 내뱉었다.
“안녕……하세요, 카단? 읍!”
인사가 끝나자마자 카단의 입술이 루나에게로 겹쳐졌다. 배부른 맹수처럼 여유롭던 카단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재회의 입맞춤은 그간의 그리움을 해갈하듯이 길고 깊었다.
오랜만에 하는 입맞춤이라 루나의 움직임은 서툴렀다. 반대로 왕국의 정복자는 두툼한 혀를 찔러 넣고 루나의 입 안을 점령했다. 그의 혀가 예민한 입천장을 자극하고 치열을 따라 집요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이리저리 도망가는 루나의 혀를 붙잡아 빨면서 그녀의 숨을 모조리 삼켜 버렸다.
츄읍, 츕. 질척한 소리가 적막으로 퍼져 나가던 때였다. 우읏, 루나가 카단의 가슴팍을 긁으며 신음했다. 그 달콤한 소리는 사내를 발정시킬 만큼 매력적이었다. 이걸 다른 놈들에게 들려주기 싫었다.
카단이 입술을 살짝 떨어뜨리자 두 입술 사이로 거미줄처럼 기다란 타액이 늘어졌다.
『명령이다. 지금부터 눈과 귀를 닫는다. 여는 자는 목을 베어라.』
분노와 애욕이 뒤섞여 갈라진 목소리가 연회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즉시 이누트 병사들은 손으로 눈과 귀를 막고 카단을 등졌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홀을 가득 메웠던 인질들도 그들의 행동을 따라 했다.
화들짝 놀란 루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손 틈새로 루나를 찾게 되는 건 심장 언저리에 남아 있던 마음 때문이리라. 예정된 패배임에도 불구하고 루스는 속 쓰린 열패감을 느꼈다.
루나의 몸은 여전히 딱딱한 벽과 카단 사이에 빈틈없이 껴 있었다. 바지 위로 불룩 튀어나온 카단의 성기가 벌어진 다리 사이로 느껴졌다. 카단이 허리를 깊숙하게 밀어 넣어 루나에게 하반신을 완전히 맞붙였다. 빳빳하게 굳은 다리가 양옆으로 활짝 벌어졌고 얇은 속옷 위로 그의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와 닿았다.
‘이 자리에서 그걸…… 하려는 건가?’
그것이 난폭하게 크기를 늘릴수록 가느다란 팔다리가 덜덜 떨렸지만 루나는 그를 거부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는 적군의 수장이 아니야. 이누트의 황자가 아니야.’
카단이었다. 저를 구원해 준 오두막의 숲지기였다.
루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물론 군중 앞에서 다리를 벌려야 하는 게 수치스러웠으나 카단이 원한다면 괜찮았다. 참을 수 있다. 어떤 모습의 그라도 받아들이겠노라고 다짐하며 수개월간 신전 발코니에 서서 그를 찾지 않았나.
장갑을 벗어 던진 거친 손이 루나의 허벅지를 쓸면서 올라왔다. 전쟁 중에 다쳤던 걸까. 그녀가 모르는 흉터로 울룩불룩한 손바닥은 예전보다도 거칠어져 있었다.
땀에 젖은 손바닥이 절박하게 루나를 매만졌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하반신을 루나의 둔덕에 원초적으로 문질렀다. 지금의 카단은 사내라기보다 짐승 같았다. 그가 피부로 내뿜는 공격적인 페로몬은 루나의 몸과 정신을 지배하려 들었다.
‘긴장하지 말자.’
루나는 길게 숨을 내쉬어 몸을 이완한 뒤 할 수 있는 한 허벅지를 더 활짝 벌렸다. 그리고 그의 허리에 두 다리를 꽉 감아 그의 몸통을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카단.”
구석에 몰린 것은 루나였으나 오히려 그녀가 카단을 다독거렸다. 단순히 삽입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었다. 당신이 나에게 어떤 행동을 하든 당신이라면 괜찮으니 혹여라도 죄책감을 느끼지 말란 뜻이었다.
두꺼운 손바닥이 하얀 속살을 게걸스럽게 쓸어내리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턱선이 단단해지면서 어금니를 으드득 씹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너는…… 매번.”
날 서 있던 카단의 검은 눈동자가 파르르 요동쳤다. 빌어먹을! 억양이 강한 외국어가 욕처럼 튀어나왔다.
“괜찮다? 내가 이 자리에서 뭘 하는지 알고도 괜찮다고?”
하. 카단은 행위를 멈추고 루나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쓰읍, 하아. 카단은 루나의 체취를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그가 들이마시는 숨에 온기를 빼앗기다가 내쉬는 숨에 온몸이 달아올랐다.
그때 카단의 눈동자가 루나의 어깨 끝을 향했다. 그는 이상한 걸 본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리더니 손가락으로 성녀복 네크라인을 휙 당겨 젖혀 보았다.
그곳엔 왕이 남겼던 이빨 자국이 흉터가 되어 남아 있었다. 간신히 온순해졌던 카단의 눈빛은 또다시 살기로 번뜩거렸다.
카단은 이 흉터가 어찌 생겼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이 흉터를 남긴 이와 지금 자신의 행동이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쳤다.
어쩌면 자리를 피해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우선일지도. 카단은 들고 있던 루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루나가 바짝 졸았던 어깨를 내려놓으며 안도하자 카단은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역시, 내가 무서웠던 거군. 혀를 차올린 카단은 루나를 남겨 둔 채 연회장을 나섰다.
거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카단이 퇴장했으나 눈과 귀를 막고 있던 이누트 병사들이 그걸 알아챈 것은 한참 후였다. 그들은 평소 냉철하던 2황자의 의중을 알 수 없어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왕궁 정원의 어느 벤치.
그곳에 두 팔을 올린 카단은 머리를 뒤로 꺾어 붉은 저녁놀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기서 무얼 하십니까, 황자님.』
이누트 족 선봉대 부대장, 드와보가 다가왔다. 그는 기억을 잃은 카단을 북쪽 숲에서 발견한 뒤 이누트 제국까지 데려왔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카단이 돌아오기 전까지 이누트 제국에서 가장 강한 무인이라 손꼽혔던 인재였다.
강력한 무력과 다르게 그의 취향은 독특했다. 색실로 가닥가닥 땋아 내린 화려한 머리 모양과 작은 리본 장식이 달린 갑주는 인상적이었다. 값비싼 리본들은 그가 몰래몰래 타국에서 수입한 제품이었다. 발음이 거친 이누트 족의 언어도 그가 말하면 조곤조곤 부드럽게 들렸다.
전쟁 중, 수많은 적군이 그가 계집애 같다는 이유 하나로 그에게 가장 먼저 덤벼들었다. 그들의 목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서야 그걸 지켜보던 적군은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지만.
『시킨 건.』
카단은 드와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용건만 물었다. 양손에 사람 한 명씩 질질 끌고 온 드와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씀하신 대로 정보를 가져왔습니다.』
드와보는 수집한 정보라면서 왼손으로 머리채를 잡고 있던 귀족 하나를 카단 앞에 내동댕이쳤다.
“으아악, 사, 살려 주십시오!”
브릴란 왕국의 귀족은 머리를 땅에 박은 채 카단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이게 증거라고?』
『왕국의 성녀, 그러니까 루나 님의 어깨에 누가 상처를 냈는지 알고 있다고 해서요. 죽이려는데 술술 말하더라고요.』
『정리해서 가져왔어야지, 드와보.』
『저희는 대륙 공용어를 모르잖아요. 이놈들 골라내는 것도 외교관에게 물어 겨우 선별한 겁니다. 그러니 심문은 황자님께서 직접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건방이 하늘을 찌르네.』
삐딱하게 앉아 있던 카단은 다리를 뻗어 드와보의 정강이를 차올렸다.
『으아악, 내 다리!』
드와보는 다리를 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마수도 맨손으로 잡는 미친 황자가 오늘은 기어이 저를 죽이려는 모양이다.
카단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허리를 바로 세웠다. 조급한 마음에 부관을 혼냈으나 드와보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너. 루나의 어깨에 누가 상처를 냈는지 알고 있다고 했나.”
카단의 질문을 듣자마자 머리를 처박고 있던 귀족은 예의 바르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암요, 알고 있습니다, 알고 말고요. 왕께서 성녀님의 어깨를 깨물어 상처를 내셨습니다.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왕? 궁을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났다던 그 형편없는 왕 말인가. 카단은 턱 밑을 천천히 쓸었다.
“왜.”
“성녀님에게 정인이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러셨습니다.”
귀족은 ‘왕께선 원래 처녀만 취하시던 분이라 성녀 또한 처녀이길 바랐을 거다, 그래서 분한 나머지 성녀의 어깨를 깨물어 낙인을 만든 거다’라고 설명했다. 그가 평소 스스로를 농담처럼 유니콘이라고 칭한다는 말과 함께.
“하!”
카단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싸늘한 미소가 입가로 퍼져 나갔다. 어어, 저거 위험한 징조인데. 드와보는 슬금슬금 걸음을 물렸다.
“대답을 잘하였으니 네게 상을 내리지.”
카단은 곧장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가, 감사합니다!”
남자 귀족은 살았다고 안도하다가 다시 파리하게 질려 버렸다. 카단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상 따위가 아닌 단검이었다.
“죽은 줄도 모를 만큼 편히 죽여 주마. 그게 네게 내리는 상이다.”
동시에 귀족은 목이 잘린 자신의 몸뚱이를 보게 됐다. 어느새 잘려 버린 목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던 것이다. 카단의 말대로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빠른 죽음을 맞았다.
『으, 하여간에 취향이 참 잔인하시다니까요.』
저렇게 짧은 검으로 사람 목을 자를 수 있는 건 황자님뿐일 거다. 혀를 찬 드와보는 나머지 손에 있던 귀족을 카단 앞으로 휙 던졌다. 그는 동료가 죽는 모습을 보고서 덜덜 떨고 있었다.
『이건 뭐야.』
『시종장이요. 왕의 도주 경로를 알고 있을 겁니다.』
도주 경로라. 카단은 피 묻은 단검을 위로 던지고 받길 반복하면서 가만히 시종장을 응시했다.
“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모릅니다, 몰라요. 시종장은 우선 시치미부터 뗐다.
“그래. 모를 수 있다. 모르면 알려 줘야겠지. 이누트 족이 왜 야만인이라 불리었는지.”
이누트가 야만인이라 불리는 이유는 야만적일 정도로 잔인한 처벌법 때문이었다. 사람의 사지를 찢어 인육을 먹는다, 동물 대신 사람을 사냥한다, 따위의 소문이 퍼져 나간 이유이기도 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시종장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야만인의 처벌을 몇 가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벌써 바지가 축축하게 젖었다.
『으, 더러운 브릴란 인간들.』
드와보가 지린내를 참지 못하고 코를 막았다. 반면 카단은 익숙한 듯 침착하게 시종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검은 눈동자엔 일말의 자비도 들어 있지 않았다.
“르, 르누마르 지역 서, 서쪽 언덕에 와, 왕가의 비밀 거처가 이, 있습니다!”
시종장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왕의 거처를 술술 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카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위치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만약 여기서 저 황자 눈 밖에 난다면 오체가 분시될 때까지 의식을 잃지도 못하고 끔찍한 죽음의 과정을 고스란히 느껴야 할 것이다.
* * *
밤은 빠르게 찾아왔다. 연회장을 지키던 이누트 병사들은 고민에 빠졌다.
『저 여자들을 어떡하지?』
『황자님께서 여자들을 모아 둔 이유가 있겠지.』
『하렘을 만들 계획이셨나?』
이누트 병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누트 인은 반려를 맞이하면 일평생 그 반려만을 바라보며 사는 족속이었다. 하지만 반려를 맞이하기 전까지는 다양한 이성을 만나 보며 자유롭게 반려감을 골랐다. 지배자의 반려 후보를 모아 두는 곳이 하렘이었다.
『저런 여자들을 가지고 무슨 하렘이야? 왕국 여자들은 죄다 쪼끄매서 박지도 못하겠다.』
『그러게. 특히 황자님 건 우리 중에서도 대단하잖아.』
『흐음, 그럼 대충 다섯 정도 골라서 침실에 넣어 둘까?』
『좋아.』
이누트 병사들을 여자들을 추려 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구석에 앉아 쭈그려 있던 루스 앞에서 멈췄다.
『이놈은 뭐야?』
『글쎄, 아까 황자님께서 살려 두시던데 이유는 모르겠어.』
『얼굴이 여자처럼 반반한 걸 보니, 그쪽인가?』
『그러게. 황자님께서는 워낙 사내다우시니…… 양쪽 다 가능하실 수도.』
『우선 이놈도 데려가 보자.』
이누트 병사들은 루스의 양 겨드랑이를 붙잡고 연회장을 나섰다.
“잠깐 이 새끼들아,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루스의 외침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화려한 욕실로 끌려간 뒤 철판 위에 올라가야 할 고기처럼 깨끗하게 씻겨지고 온몸에 오일이 덕지덕지 발라졌다.
“차라리 향신료도 뿌려 주지 그래? 응?”
그렇게 빈정거리던 루스는 곧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이누트 병사가 고간만 겨우 가리는 란제리와 반투명한 무희 복장을 어디선가 구해 온 것이다.
싫어, 못 입어. 못 입는다고!
“날 어쩌려는 거야, 이 개 같은 야만인들아!”
『쟤가 아까부터 뭐라는 거냐?』
『내가 알겠냐? 우선 여자 남자 골고루 준비했으니 황자님을 침실로 모시자.』
『지금 어디 계시는데?』
『아까 성녀라는 여자를 데리고 알현실로 가셨대.』
『좋아. 내가 가 볼게.』
이누트 병사 하나가 알현실로 걸음을 돌렸다.
브릴란 왕궁의 구조는 이누트 제국에 비하면 너무도 간단했다. 병사는 알현실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2층 가장 커다란 방……. 여기다!’
병사는 화려한 조각 위로 금칠이 된 문을 올려다보면서 문을 열어젖히려고 했다.
그때 묵직한 문 건너편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들렸다.
─하읏, 카단!
‘카단?’
그것은 2황자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제아무리 눈치가 없는 자라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예상 가능했다.
한 시간 전.
카단이 자리를 비운 후 연회장은 술렁거렸다.
“어째서 이누트의 황자가 루나 드하임을 감싸는 거죠?”
“저 여자가 간자 짓을 한 거 아닐까요?”
“맞아요. 성녀의 탈을 쓰고 야만인과 내통해서 나라를 팔아먹은 게 틀림없어요!”
“어쩐지 황자를 이미 알고 있더라니. 그래서 왕국이 전쟁에서 진 거야!”
우리 아버지 오빠들을 저 여자가 죽인 거라고! 어떤 영애 하나가 루나를 향해 울부짖기 시작했다. 구석에 앉아 있던 루나는 그 영애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혐오의 대상이 되는 건 익숙했으나 그 상처와 고통은 익숙해지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거 아셔요? 드하임 가문에 저주받은 아이가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요.”
“저주요?”
“네. 죽은 기사단장님께 은밀히 들었답니다. 저 영애의 몸에 이상한 문신이 있었다는 걸요.”
“문신이라니, 끔찍해라!”
“그게 사라지고 성녀 대접을 받았다는데, 모르죠. 화장으로 대충 가려 놓고 거짓말을 했을지!”
“이 사실을 이누트 황자님에게도 알려야 해요!”
저 여자만 황자 눈에 드는 건 참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인질로 잡혀 온 다른 여인들도 하나둘 고개를 끄덕거렸다.
처음부터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패전 소식을 듣자마자 그저 목숨만은 부지하길 바라며 간절히 기도했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간사했다. 그녀들은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완벽한 황자를 보고 나서 욕심이 생겨 버렸다.
어찌 보면 절호의 기회가 맞았다. 지금 황자의 눈에 들기만 한다면 그동안 쌓아 둔 명성이나 인맥 없이도 승자의 곁에 나란히 설 수 있었으니까.
물론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입이 무겁고 현명한 자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소란에 일절 휘말리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정적인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었다.
대륙 공용어를 알지 못해서일까. 이누트의 병사들은 그녀들을 지켜볼 뿐 말리지 않았다.
너도나도 루나 드하임의 부정함을 알리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때.
“거기까지.”
카단의 목소리가 연회장 뒤에서 들렸다.
설마! 놀란 여인들이 뒤를 확인하고는 입을 크게 벌렸다. 열린 문에 몸을 삐딱하게 기댄 카단이 여인들을 두루 살펴보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저기 있었던 거지? 당황한 여인들은 서둘러 커다란 천으로 얼굴을 가리기 바빴다.
『드와보.』
카단이 부대장을 부르자 드와보가 그의 등 뒤에서 빼꼼히 튀어나왔다.
『네, 황자님. 당신의 드와보가 여기 있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가리키는 여자들 솎아내.』
카단은 조금 전까지 루나를 헐뜯던 여인 수십 명을 하나도 빠짐없이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런데 황자님, 방금 그 여잔 아니지 않나요?』
『저 여자도 맞아. 말은 안 했어도 루나가 끔찍하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조하더군.』
『기억력도 끔찍하게 좋으셔라.』
이누트 병사들은 주군의 명령에 따라 여자들을 끌고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반 이상이 빠져나간 연회장은 휑했다.
카단은 구석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 루나 앞으로 이동했다. 그가 한쪽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자 루나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저를 헐뜯는 장면을 들켰는데 어찌 당당할 수 있겠는가.
카단은 루나의 턱을 잡고 아래로 축 처진 고개를 세웠다.
“고개 들어.”
“…….”
“왜 듣고만 있었나.”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상황에서 끼어들어 봤자 분위기만 더 돋우는 꼴이 될 것이다. 루나는 모든 소란이 한풀 꺾인 후 여론을 주도한 자와 이야기를 하려고 때를 기다렸다. 그 전에 카단이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니. 내가 듣기엔 다 틀렸던데.”
카단은 이빨 흉터가 남아 있는 루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더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뜯기지 마. 몸도 마음도.”
카단의 말은 조언이기보다 명령에 가까웠다. 그는 그대로 앉아 있던 루나를 아이처럼 들어 올렸다.
“카, 카단?”
“따라와라.”
따라간다기보다 품에 얹혀 가는 것이 맞았다. 카단은 루나를 들고 알현실로 향했다.
화려한 왕좌가 있는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붉은 카펫을 밟고 왕처럼 입장한 카단은 안고 있던 루나를 그대로 왕좌에 앉혔다. 화들짝 놀란 루나가 엉덩이를 떼려는데 카단이 그대로 루나의 어깨를 꾸욱 눌렀다.
“앉아.”
낮은 목소리는 상대를 굴복시키는 지배력이 있었다. 루나는 저도 모르게 그의 명령을 따라 엉덩이를 다시 붙였다. 당장 일어서고 싶었지만 그의 말이 제 몸을 속박한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루나는 왕좌에 앉은 채로 생각을 차분히 전달했다.
“보는 사람이 없다 해도 여긴 왕좌예요. 이렇게 아무나 앉을 수는 없어요.”
노예였던 여자의 입에선 누구보다도 귀족다운 말이 튀어나왔다. 브릴란의 왕도 귀족도 비루한 목숨을 부지하고자 제 앞에서 비겁하게 도망쳤건만 이 작은 여인이 왕좌의 위엄을 지키고자 애쓰다니.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지. 카단은 삐딱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내가 앉으라면 이 자리는 네 자리가 되는 것이다.”
카단의 말은 견고하고도 위압적이었다.
“많이…… 변했어요, 카단.”
“옛 기억을 찾았거든.”
숲지기로 살기 전 황족이었던 이였다. 그에게선 전에 없던 위압감과 지배력이 느껴졌다.
카단은 왕좌에 앉은 루나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놀란 루나가 그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힘으로 그를 이길 순 없었다. 카단은 커다란 짐승처럼 그녀의 무릎 위에 이마를 부볐다.
“이게 나다. 이런 나는 마음에 안 드나.”
“그럴 리가요.”
루나의 대답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다른 사내와 홀연히 사라졌던 빌어먹을 이유가 무엇인가. 곧장 반문하려던 카단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굳게 다물었다.
루나는 떠난 적 없다고 주장했지만 카단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그녀가 떠난 오두막이 아른거렸다. 밤을 새우고 끼니도 거르며 오직 루나만을 기다렸던 쓸쓸하고 적막한 오두막을.
누구도 의지하고 살지 않던 카단은 난생처음 버림받은 기분을 느꼈다. 그 비참함이 얼마나 커다랬는지 지금 이렇게 루나를 코앞에 두고도 초조했다.
왜 떠났어. 무엇이 마음에 안 들어서 반지까지 놓고 나를 떠났나. 아니면 나보다 루스 놈이 더 좋았나. 그 뱀 같은 놈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지금 내가 이 왕좌를 그대에게 바치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그대는 나를 온전히 선택해 줄 것인가.
수많은 물음이 꼬리를 물었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말수가 적은 사내는 입을 떼지 못했다. 그저 끙끙 앓는 소리만 낼 뿐.
‘카단이 어디 아픈가?’
루나는 카단의 정수리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그러다 머리를 만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내였다는 사실이 떠올라 화들짝 손을 떼어 내려 했다.
그때 카단이 도망가는 루나의 손을 잡고 쓰다듬어 달라는 듯 머리 위로 올려 두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심지가 굵은 머리칼을 보드랍게 쓸어내렸다.
카단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루나의 달콤한 체취가 그의 본능을 자극했다. 당장 이 여인을 물고 씹고 삼켜서 정복적인 포만감을 느끼고 싶었다. 지워지지 않는 증표를, 내 것이라는 낙인을 온몸 구석구석 찍어내고 싶었다.
루나의 무릎에 기대어 있던 카단은 점점 루나의 무릎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는 새하얀 치맛자락을 천천히 들어 올리고 무릎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카단, 할 말이 있어요.”
우선 그간의 일을 설명하고 카단의 오해를 풀어야 했다. 루나는 다리를 오므리려고 힘을 주었다.
하지만 카단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무방비하게 벌어지는 두 다리와 그 사이를 파고드는 사내의 머리, 그 뒤로 펼쳐진 화려한 알현실의 풍경이 원색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카단의 입술이 허벅지 안쪽 부드러운 살을 찬찬히 빨아들였다. 그것이 부끄러워 시선을 돌린 루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가까스로 입술을 열었다.
“당신과 입을 맞추고 잠깐 잠이 들었던 그 날, 눈을 떠 보니 마을 광장이었어요.”
마을 사람들이 오두막을 찾아와 저를 끌고 갔고, 창고에 갇혔던 자신을 루스가 구해 줬다는 설명이 뒤를 이었다. 다리 사이에 머리를 박고 있던 카단이 그대로 눈동자만 위로 치떴다. 정욕에 사로잡힌 검은 눈동자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루스가 당신에게 데려다준다고 했어요. 마을 사람을 피해 마을 뒷길로 가는데 난데없이 기사단을 만났…… 흐, 하앙!”
루나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숨을 할딱거렸다. 지금 루나는 다리를 쩍 벌린 채 신성한 왕좌에 앉아 있었다. 커다란 몸으로 다리 사이를 파고든 카단이 루나의 속옷을 손가락으로 치운 후 그녀의 음부를 느릿하게 핥아 댔다.
“아, 아직 씻지 않았어요. 더러워요, 카단!”
“좋아, 냄새.”
오랜만에 느껴 보는 루나의 체취는 중독적이라 머릿속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뾰족하게 세운 혀끝이 둔덕을 가른 뒤 작은 구멍을 찾아 헤맸다. 혀끝으로 틈이 걸리자마자 그의 혀는 주저 없이 그곳을 세게 찌르고 들어갔다.
루나의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카단은 어쩔 줄 모르는 루나의 얼굴을 힐끗 감상한 뒤 그녀의 두 다리를 제 어깨 위로 올렸다. 루나의 엉덩이가 살짝 위로 들리면서 음부가 활짝 벌어져 빨기 좋았다. 카단은 루나의 안쪽을 집요하게 핥아 대는 것과 동시에 코끝에 닿는 음핵을 비벼 자극했다.
“흐으, 아래가, 읏, 하아.”
“아래? 다른 걸 말해야지, 루나.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중 아니었나.”
“기사, 단을 만나서, 숲으로, 흐응! 비석을 만지니까 문신이, 게이트가, 하아, 사라졌, 으응, 카단.”
“그래서, 츄읍, 마수 게이트가 닫혔나.”
“네에, 하아, 카단, 아래가, 안쪽이 간지러워요. 너무, 읏, 흐응!”
카단은 루나가 흘린 음액을 남김없이 첩첩 삼키면서 혀를 물렸다. 그리고 발딱 선 음핵을 손가락으로 살살 굴리다가 입술로 흡입했다. 하앗, 카단! 그의 어깨에 올렸던 루나의 두 다리가 카단의 목을 조였다.
힘이 겨우 이래서야 위급할 때 사람 하나 죽일 수 있겠나. 카단은 루나의 미약한 힘을 귀여워하며 음핵을 잘근 깨물었다. 흐잇! 왕좌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루나의 허리가 위로 튕겼다. 가느다란 허리가 파르르 경련하면서 짧은 오르가슴을 맞았다. 그녀의 작은 구멍은 불투명한 애액을 토하며 벌름거렸다.
“여기 좀 봐, 루나.”
카단이 왕좌 시트를 턱짓했다. 최고급 붉은 벨벳으로 감싸 둔 푹신한 시트 위로 루나의 애액이 방울방울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앉기도 어려워하던 자리에 이런 자국을 남기다니. 대담해졌군.”
“아, 안 돼. 어떡해, 안 돼. 흐윽.”
“괜찮아, 루나.”
“괜찮지 않아요. 하나뿐인 왕좌를 제가 더럽혀서, 흐윽, 어쩌면 좋아, 흑!”
당황한 루나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눈물마저 시트에 떨어질까 봐 필사적으로 두 손으로 뺨을 훔치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그래, 나의 루나였다. 아주 간절히 기다렸던 루나가 드디어 내 품에, 내 손아귀에 있었다. 빌어먹게 달콤한 향을 풍기면서 아주 은밀한 곳을 내게만 내어 주고 있었다.
이제부터 그녀를 철저히 지킬 생각이었다. 누구든 루나의 털끝 하나 건들지 못하도록. 그녀를 가장 안전한 장소에 두고서 오직 저만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그곳에서 신성하고도 음란한 자궁에 씨물을 가득 뿌려 제 아이를 수태케 할 것이다.
정신없이 음부에 얼굴을 박고 있던 카단이 입술을 삐딱하게 올렸다. 상상만 해도 좆이 꺼떡거렸다.
카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가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왕좌에 반쯤 누운 자세가 되었던 루나는 순순히 카단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애액을 잔뜩 삼킨 그의 입술과 혀에서 달큼한 맛이 났다.
질척한 입맞춤과 제 몸을 쓰다듬는 손길은 지나치게 야했다. 루나는 저도 모르게 구멍을 움찔 조이다가 애액을 왈칵 흘려 버렸다. 아, 안돼. 루나는 수치를 모르는 음부로 손을 내렸다. 애액이 엉덩이골을 따라 흘러내리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닦아 냈다. 입술을 놓아주지 않던 카단이 살짝 입을 뗐다.
“너의 자리라 하지 않았나. 당황하지 마.”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여긴 제 자리가 아니에요. 여긴, 여긴, 아니에요.”
루나의 눈빛은 당장에라도 도망갈 것처럼 불안했다. 어디서 감히 도망갈 생각을. 황족적인 사고방식이 강압적으로 루나를 사로잡으려 들었다.
그 순간 카단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안 돼. 그녀 앞에선 순박한 숲지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그녀에게 사랑받았던 모습이었으니.
“네가 그리 불편하다면 내가 이 자리에 앉겠다. 이러면 되었나.”
카단의 말에 루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단은 음부를 닦아 내던 루나의 손을 잡고 애액이 묻은 손바닥을 혀로 길게 핥았다.
“대신 시트를 실컷 적셔 줘. 내가 힘을 내서 정사를 돌볼 수 있도록.”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 자리에 앉을 때마다 너를 떠올리면 네가 속한 이 나라를 잘 이끌 것 같거든.”
카단은 씨익 웃으며 붉어진 루나의 코끝에 쪽 입을 맞췄다. 동시에 그의 손가락 두 개가 루나의 질구 주변을 부드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벌름거리던 구멍 끝에 손가락이 걸렸고 그것은 천천히 루나의 안쪽을 자극하며 들어왔다. 오랜만에 벌어진 구멍은 카단의 손가락을 강하게 조였다.
“윽.”
“하으, 카단.”
안쪽에서 느껴지는 그의 온기가 너무도 좋았다. 루나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껴안았다. 찌걱찌걱. 음란한 소리가 조용한 알현실에 맴돌았다.
카단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작은 구멍은 침입이 익숙하지 않은 듯 쉬이 벌어지지 않았다.
카단은 가위질을 하듯이 손가락을 벌려서 루나의 질 주름을 자극했다. 히익, 읏, 하아! 루나가 허리를 비틀면서 카단의 어깨를 꽉 잡았다. 카단은 유독 볼록 튀어나온 돌기를 루나의 배 쪽으로 꾸욱 눌렀다. 흐아아아! 눈을 동그랗게 뜬 루나가 몸을 덜덜 떨더니 카단의 몸에 간절하게 매달렸다.
“그, 그만해요, 카단. 거기 이상해. 힛, 안 돼요, 읏!”
“이상해?”
카단은 손목을 살살 돌려 가면서 그 부위를 손끝으로 자극하기 시작했다. 신음인지 흐느낌인지 모를 소리가 들리더니 눈물까지 왈칵 터져 나왔다.
“안 돼, 손 빼 줘요, 이대로, 안 돼, 하아, 아읏, 응, 히익!”
“안 된다고 하면 몰라. 어떤 기분인지 말해 줘야지.”
루나의 격렬한 반응에 카단의 목소리도 점점 낮아졌다. 쿠퍼액을 질질 흘리고 있는 그의 성기가 당장 루나를 쑤시고 싶다고 아우성을 쳤으나 카단은 끈질기게 인내하며 루나의 반응을 기다렸다.
“부끄, 러워. 히익, 카단, 제발, 흣, 쌀 것 같아요.”
“싸.”
“안 돼, 흣, 어떻게, 왕좌에, 흐아, 앗, 그만, 아아, 히이익!”
루나의 허리가 위로 불쑥 들리면서 경련했다. 쪼르르- 구멍이 빠르게 수축하며 손가락을 조였고 그의 손 위로 투명한 물이 소변처럼 쏟아져 내렸다.
붉었던 벨벳 시트는 체액에 푹 젖어 버려 이제는 갈색빛을 띠고 있었다.
“흐윽. 흐어엉.”
맑은 액을 사정한 루나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스스로가 너무도 부끄러워서 쥐구멍이 있다면 숨어 버리고 싶었다.
얼굴이 벌게진 카단은 그런 루나의 모습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관찰했다. 당황한 건 카단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의 귀두에서는 사출한 정액이 끈적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좆을 만지지도 않고 사정해 버린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결한 성녀복을 차려입은 루나가 왕좌에 앉아 두 다리를 벌린 장면과 그녀의 안쪽 주름이 손가락을 쪼아 댈 듯 씹어 대던 촉각, 뇌를 자극하는 달큼한 체취와 교성까지. 오감은 단순한 자극을 넘어서 중독적이었다. 그리고 루나가 분수처럼 체액을 쏟아 낸 순간, 카단 또한 이성을 잃고 절정을 맞이해 버렸다.
루나와 헤어진 후 여자와 닿은 적 없던 사내의 성기는 또다시 빠르게 부풀어 올랐다. 후우, 후우. 카단은 짐승처럼 숨소리를 내면서 루나의 눈물을 길게 핥아 냈다. 그리고 루나의 입술을 벌려 그녀가 토해 낸 울음을 모두 삼켰다.
“울지 마.”
“흐으, 어떡해요.”
하지만 루나는 젖은 시트 위에서 두 다리를 웅크리고서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감정이 쉬이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가 끅끅 울음을 삼키는 소리를 낼 때마다 카단은 심장 한쪽이 지릿지릿 저렸다.
“여길 봐, 루나.”
카단은 루나의 뺨에 입을 맞추면서 갑주 안쪽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가느다란 금속 줄에는 루나의 실반지가 매달려 있었다. 은반지라 군데군데 녹이 슬 법도 하건만 반지는 매일 소중하게 닦아 낸 듯이 새것처럼 반질거렸다. 카단은 그것을 꺼내 루나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크게 벌어진 루나의 눈동자에서 남아 있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이 반지, 잃어버렸던 건데…… 어디서 났어요?”
“웬 마을 여자가 이걸 내게 주더군. 네가 이걸 남기고 루스와 떠났다고 했다.”
데이지의 이름조차 기억 못 한 카단은 그녀를 마을 여자로 지칭하면서 입을 열었다. 멀찍이서 루나가 루스가 함께 도망가는 모습을 직접 확인했으나 처음엔 믿지 않았다는 설명까지도. 어느덧 울음을 멈춘 루나는 카단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적막이 맴도는 오두막에서 널 기다렸다. 난생처음으로 불안이라는 감정을 배웠지.”
어릴 적, 기억을 잃고 숲을 헤매었을 때도 그토록 괴롭지는 않았다.
카단은 매일 밤 루나가 돌아오리라 상상하면서 망가진 출입문만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그렇게 수일이 지나자 삭풍처럼 차가운 현실이 물먹은 창호지처럼 달라붙었다. 그것이 겹겹이 쌓일수록 숨을 쉴 수 없었다. 고통스러운 그리움은 슬픔과 분노가 되어 속에서부터 썩어들었다.
“오두막을 뛰쳐나와서야 알았다. 마수 게이트가 봉인되었더군. 네가 그곳에서 무언가를 했으리라 짐작했지. 그때 이누트 인을 만났어.”
그때 만났던 인물이 그의 부관, 드와보였다. 그는 드와보와 함께 이누트 제국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기억을 되찾았다고 설명했다.
“나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형이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실종된 후 병을 얻어서 돌아가셨고.”
담담한 카단과 달리 루나는 당장 울어 버릴 것처럼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카단은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루나의 얼굴은 천천히 쓸어내렸다.
“곧 왕국이 병사를 움직였다. 난 선봉대장을 자처하면서 아버지께 말씀드렸지. 이 전쟁에서 이기면 브릴란 왕국을 내게 달라고.”
왕국을 손에 넣으면 루나 또한 자연스럽게 제 손으로 떨어지리라. 그에게 전쟁은 루나를 얻기 위한 수단이었고 맹목적인 집착의 행위였다.
전쟁은 예상보다도 쉽게 풀렸다. 나약한 왕국의 병사들은 오만하기까지 해 빈틈이 많았다.
카단은 살육을 즐기진 않았으나 그들을 베는 것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상상 속의 루나가 제 아이를 배고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한 루스 놈의 얄미운 모습이 꿈에 나타나기도 했다.
“난 필사적으로 싸웠어. 너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완벽한 승리를 쟁취했다. 카단은 두 팔로 루나를 꽉 안았다.
“난 이제 널 놓지 못한다. 아니,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는 인간 또한 루나가 유일했으며 모든 것이 무료했던 제게 감정의 색채를 알려 준 것도 루나뿐이었다. 울음이 잦아든 루나가 가만히 그의 등을 마주 안았다.
“도망가고 싶으면 도망가도 돼. 그런데 루나.”
카단은 루나의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넌 돌아오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소유욕으로 지글대는 눈동자가 루나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명령에 가까운 말투는 위압적이었으나 루나는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안 가요, 카단.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그 말은 어두운 속내를 애써 감추고 있던 사내에게 지독한 포만감을 안겨 줬다. 카단은 목을 긁는 소리를 내면서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보였다.
그사이 루나는 반쯤 누워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카단의 어깨 위로 올라갔던 두 다리를 천천히 내리고 왕좌에 똑바로 앉으려는데 엉덩이에 닿는 시트가 온통 축축했다.
세상에! 정신을 차린 루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 밑이 다시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 시트, 꼭, 바꿔, 바꿔 주세요.”
“그래.”
“약속 지켜야 해요.”
“알았다.”
카단이 고개를 끄덕거렸으나 루나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 손가락을 빤히 보던 카단은 제 손가락을 거는 대신 루나의 허리를 붙잡았다. 루나의 몸이 휙 돌아가더니 카단에게 등을 보인 자세가 되었다.
카단은 그대로 루나의 엉덩이에 하반신을 비볐다. 휘청, 중심을 잃은 루나가 엎드려 의자 손잡이를 잡았다. 젖은 치맛자락이 위로 올라가고 카단의 것이 루나의 엉덩이골을 천천히 문질렀다.
“카단, 이제 그만, 요.”
“그만?”
카단이 단단한 성기로 루나의 엉덩이를 탁탁 때리면서 물었다. 조금 전 격심한 절정을 느꼈던 탓인지 루나는 손가락에 힘 하나 주지 못하고 흐물거렸다. 그러다 뒤늦게 깨달았다. 행위는 이루어지지도 않았다는 걸.
카단이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난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나라를 굽어살필 성녀님이 이기적이시군.”
“카단, 말투가…… 흐으!”
카단은 루나의 등에 몸을 겹치고서 검지로 음핵을 빠르게 문질렀다. 동시에 그의 음경은 루나의 허벅지 사이로 들어와 갈라진 둔덕을 천천히 비벼 댔다.
“저, 아까 갔어요. 갔는데, 하읏, 아아!”
여러 차례 자극으로 예민하게 부풀어 있던 음핵은 건들 때마다 아플 지경이었다.
하지만 솔직한 몸은 구멍을 조였다 풀면서 다음번 삽입을 기대했다. 그녀가 흘린 애액이 핏줄이 불거진 좆 기둥에 묻어났다. 흐응, 하, 아아. 루나의 엉덩이가 카단의 하반신에 바짝 붙으며 더 커다란 걸 요구했다.
“카단, 손, 말고…….”
“손 말고 무엇을 원하길래.”
“흑, 못됐어.”
“궁금해서 그렇다. 네가 정확히 무얼 원하는지. 뭘로 쑤셔 줄까.”
“대륙 공용어는 왜 이렇게 잘하는 거예요? 사람이 너무 얄미워졌어요.”
“매일 연습했거든.”
미끈거리는 귀두가 갈라진 둔덕을 따라 느릿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도톰하게 다물렸던 음순이 벌어지고 귀두 끝이 분홍빛 구멍 위에 자리를 잡는다.
“너를 만나면 내 마음을 제대로 전해야 하니까.”
푹! 동시에 뭉툭한 귀두가 예고도 없이 안을 꿰뚫었다. 아무리 안을 풀었다지만 반년 가까이 삽입 경험이 없었던 루나는 크고 단단한 살덩이의 침입이 버거웠다.
헉! 장기가 위로 쓸려 올라가는 압박감이 전신을 맴돌았다. 버티던 두 다리가 위험하게 흔들렸다. 막힌 건 아래쪽인데 이상하게 숨을 쉴 수 없었다.
“좁아.”
제기랄. 카단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땀에 젖은 흉통이 몸집을 부풀렸다. 루나의 점막이 카단의 것을 꽈악 조이면서 고통과 함께 어마어마한 쾌락을 선사했다.
카단은 턱을 꽉 물고 허리를 밀어 넣었다. 단번에 침입한 음경은 좁은 길을 가르고 자궁구까지 닿았다. 그대로 뿌리까지 허리를 박자 그의 까슬까슬한 음모가 벌게진 회음부에 밀착했다. 동시에 아기집을 자극하던 음경이 자궁 뒤쪽까지 미끄러지면서 미지의 공간을 쑤시기 시작했다.
카단은 반쯤 음경을 빼서 끝까지 박기를 반복했다. 빠르고 강하게 쳐 댈 때마다 접합부로 거품과 애액이 흥건했다.
“아! 아읏! 핫! 악!”
고통과 쾌락이 섞인 신음이 알현실을 가득 채웠다. 누가 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나 부끄러움 따위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커다란 꼬챙이에 꿰뚫려 흔들릴 때마다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져 나갔다. 질이 경련하듯 요동치면서 흉포한 좆을 쫄깃하게 조여 댔다. 큿, 사정감을 참아 댄 카단이 이를 악물었다. 첫 번째처럼 어이없이 끝을 보긴 싫었다.
“루나.”
카단이 그녀를 부르며 팔을 뻗었다. 그녀의 뺨으로 손을 뻗자 눈물이 그득한 눈동자가 카단을 응시했다. 젠장. 카단은 그대로 세게 허리를 처박았다.
흐앙! 루나의 몸이 세게 흔들리면서 고여 있던 눈물이 후두둑 아래로 떨어졌다.
“카단, 흣, 학, 아악, 배가, 읏, 앗, 안쪽이, 앗, 찌, 찢어질 것 같아, 하앗!”
그의 물건이 자궁구를 억지로 열어 자궁 안으로 들어올 것만 같아 겁이 났다.
루나가 등 뒤에 있는 카단을 향해 손을 허우적대자 카단은 루나의 상체를 껴안듯 붙잡고 그녀를 반쯤 일으켰다. 삽입 높이를 맞추기 위해서 발끝을 최대한 들어 올렸었는데 상체가 세워지자 몸을 지탱하기가 더더욱 어려웠다. 루나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히잇, 카단, 저, 너, 넘어져요. 너무, 세게, 안이, 흣, 앗, 앗!”
“루나, 큿, 힘 풀어.”
루나의 안쪽은 카단의 정액을 쥐어짤 듯이 조여들었다. 카단은 아래턱을 꽉 물고서 그르릉거렸다.
흥분한 그의 두 손은 위아래로 착실히 흔들리는 커다란 가슴을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유두를 살살 돌리면서 귀두가 입구에 걸릴 때까지 허리를 길게 뒤로 빼냈다. 그리고 자궁까지 단번에 박아 버렸다.
“큿!”
“아아아악!”
루나가 고개를 뒤로 꺾으면서 전신을 벌벌 떨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발끝으로 지탱하던 몸이 무너졌지만 카단이 한 팔로 그녀를 지탱했기에 넘어질 일은 없었다.
카단의 귀두가 그녀의 자궁구를 때리면서 정액을 사출했다. 가쁜 숨소리만이 고요한 가운데 쪼르르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루나?”
카단이 고개를 내려 그녀를 살폈다. 그녀의 다리 사이로 물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붉은 카펫을 흠뻑 적시며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그 광경을 보는데 루나 안에서 아직 빠져나가지 않은 성기가 핏줄을 벌떡 세우며 또 단단해졌다. 카단은 그대로 한 번 더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루나의 몸이 종잇장처럼 흐느적거렸다.
“이런.”
카단은 제 가슴팍에 눕듯이 기댄 루나를 내려다보았다. 과한 자극에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카단은 잠시 무언가를 망설이다가 축 처진 루나를 안고서 알현실 구석에 놓인 서기관용 책상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 * *
‘배 속이 뜨거워.’
제 몸은 파도 위 조각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루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로 땀에 젖은 카단의 얼굴이 들어왔다.
“카단? 하앙!”
그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교성이 튀어나왔다. 내가 왜 이러지? 당황한 루나가 입술을 꾹 물었다. 아직 빠져나가지 않은 뜨거운 살덩이가 부풀어 오른 안쪽을 꾸욱 자극하고 있었다.
“미안해, 루나.”
“대체, 흐읏, 언제, 부터, 하응, 앗, 하으, 앙!”
언제부터 했냐고 물어야 할지, 언제까지 하느냐고 물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루나는 신음을 삼키지 못한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가 저문 창밖은 어두웠고 자신은 알현실 책상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시간이 꽤 흘렀으니 분명 사람들은 카단을 찾아 헤매었을 것이다. 그들이 알현실을 그냥 지나칠 리 없을 텐데 어찌 된 영문일까.
루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책상 위를 더듬었다. 대충 치워져 있던 잉크 통과 서류, 펜들이 책상 아래로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루나가 어찌할 바를 모르자 카단은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근사하게 웃었다.
“루나, 네 구멍이 이제 내 것을 잘 삼켜.”
이것 봐. 카단은 루나의 손을 끌어다 음부 주변을 더듬게 했다. 활짝 벌어진 루나의 구멍은 여전히 빠듯하게 카단을 물고 있었으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카단, 차라리 침실로, 흐읏, 항, 아앗, 흣!”
“그래, 침실로 가야지. 남은 밤은 침실에서 보내야 하니까. 조금만 참아.”
그는 루나의 귀와 목덜미에 입을 맞추면서 허리를 멈추지 않았다. 커다란 살덩이에 익숙해진 안쪽은 딱 기분 좋게 카단을 조이며 그에게 쾌락을 선사했다. 하, 젠장. 미치겠군.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카단은 루나의 상의를 풀어 헤친 뒤 가슴을 츕츕 빨기 시작했다.
“좋아아, 흐읏.”
그가 유두를 빨아들일 때마다 짜릿한 쾌감이 젖줄을 타고 척추로 도달했다. 루나는 허리를 휘면서 그의 입술에 제 가슴을 갖다 댔다. 카단이 루나의 요구에 부응하듯 그녀의 양 가슴을 더 게걸스럽게 빨았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려 유륜까지 머금은 다음 깨물었다. 으읏! 쾌감을 동반한 통증에 루나가 발가락을 오므렸다. 분홍색 꽃판을 따라 카단의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그렇게 가슴을 타고 올라온 카단의 입술이 가느다란 목에 자국을 남겼고 루나의 입술까지 도달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꽂아 넣은 카단이 목마른 여행자처럼 루나의 타액을 모조리 긁어 마셨다. 그의 혀가 여린 점막을 자극할 때마다 루나는 구멍을 조이면서 그를 더 안달 나게 만들었다.
“젠장.”
카단은 잔뜩 부푼 좆을 끝까지 꽂아 넣고서 정액을 사출했다. 함께 절정을 느낀 루나의 허벅지가 파르르 경련했다. 정신을 잃은 동안 얼마나 벌리고 있었는지 두 다리의 감각이 흐릿했다.
“힘들어요, 카다안.”
아흐읏! 루나가 허리를 비틀다가 한 번 더 교성을 내질렀다. 여전히 단단했던 그의 물건이 또 한 번 크기를 부풀려 안을 꽉 채운 것이다.
“조금만 더.”
그렇게 카단은 루나의 안쪽이 정액으로 가득 찰 때까지 행위를 반복했다. 그가 허연 정액이 흘러내리는 구멍을 만족스럽게 확인할 수 있었을 땐 루나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이제 내 곁에만 있는 거야, 루나.”
카단은 실반지를 낀 루나의 왼손 약지에 입을 맞췄다. 수차례 정액을 싸지르며 폭력적인 허리 짓을 반복한 사내의 얼굴이 그 순간만큼은 너무도 다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