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절망의 끝에서
차가운 창고에 웅크린 루나는 생각했다. 애초에 제 삶은 바싹 마른 낙엽처럼 팔랑팔랑 떨어지는 중이었을 거라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인생이 가여웠는지 카단은 새벽녘 바람처럼 제게 잔잔히 불어왔다. 그와 함께한 추억은 메마른 이파리에 맺힌 이슬 같았다. 그 보석처럼 반짝이는 이슬을 안고서 지금 루나는 죽음의 바닥에 몸을 누이고 있었다.
‘이대로 얼어 죽든지, 기사에게 목이 잘려 죽든지.’
그러고 보면 숲의 제물로 바쳐졌을 때도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카단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를 곱씹을수록 오래전부터 벗 삼아 온 죽음이 두려워졌다. 생에 대한 미련이 젖은 옷자락처럼 차갑고도 무겁게 심장에 달라붙었다. 차라리 카단을 모르고 죽었어야 했다. 그렇다면 쓸데없는 욕심 따위가 생기지 않았을 텐데.
‘카단은 내가 없어진 걸 알고 있을까?’
아마도 곧 알게 되겠지. 해가 조금 더 기울면 카단이 돌아올 시간이다. 루나는 자신이 말도 없이 사라져서 놀랄 카단을 떠올리며 무릎을 꼭 끌어안았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해 주고 싶어.’
루나는 메마른 바닥을 향해 ‘잘 있어요, 카단’ 하고 중얼거렸다. 곧 뜨거운 눈물이 북받쳐 흘러내렸다.
눈물이 번진 시야로 왼손이 아른거렸다. 실반지가 있어야 할 약지가 허전했다.
누군가 돈이 될 거라 생각해 가져간 걸까. 그에게 받은 증표도, 그와 함께할 내일도, 그의 온기가 맴도는 따스한 공간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작렬하는 태양에 증발한 새벽이슬처럼 모두가 아스라이 사라졌다. 남은 건 바닥에 떨어진 바싹 마른 몸뚱이뿐이었다.
‘아니야, 하나가 남았어. 바로 이 슈미즈.’
루나는 젖은 슈미즈 자락을 꼭 쥐었다. 차게 젖은 옷은 체온을 앗아 가고 있었으나 카단에게 받은 것이 하나라도 남았다는 사실이 그저 반가웠다. 남은 시간 동안 이 슈미즈를 보면서 그를 추억할 수 있으니까.
덜컥, 덜커덩!
그때 창고 바닥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루나는 황급히 눈물을 닦고 바닥을 살폈다.
‘혹시 카단이 나를 구하러 온 걸까?’
가능성은 작았지만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생의 의지가 꿈틀거렸다. 카단, 당신인가요? 그를 확인하고 싶은데 울음에 잠긴 목에서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곧 흙바닥이 요란하게 흔들렸고 흙 아래 감춰져 있던 작은 철문이 위로 삐거덕 열렸다.
잘게 이는 흙먼지 속에서 얼굴을 빼꼼히 내민 인물은 카단이 아니었다. 루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응시했다. 언젠가 오두막에서 마주친 적 있는 루스란 인물이었다.
“안녕, 오랜만이네?”
“당신은!”
루나는 저도 모르게 슈미즈 앞섶을 꼭 쥐고 엉덩이를 슬금슬금 물렸다. 루스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루나에게 다급히 손짓했다.
“잡담 나눌 시간은 없어서. 탈출, 도와줄게. 이쪽으로 와.”
“당신이 어째서, 저를 돕죠?”
“흐음, 카단 놈이 끔찍하게 아끼는 여자와 뜨거운 밤을 보내고 싶어서?”
루스가 슈미즈 차림의 루나를 힐끗거렸다. 젖은 천 아래로 우윳빛 피부와 붉은 문신이 아른거렸다. 마른 주제에 볼륨 있는 젖가슴이나 그 가운데 볼록 튀어나온 분홍빛 유두가 등불 아래로 은근히 아른거렸다. ‘카단의 여자만 아니었어도’ 하는 생각이 순간 스쳐 지나갔지만 루스는 목숨 아까운 줄 아는 영리한 사내였다.
노골적인 시선을 느낀 루나가 두 팔로 상체를 가리며 루스를 노려보았다. 순해 보이는 여자가 눈을 매섭게 치켜뜨자 제법 기운이 사납다.
카단 옆에 있더니 저런 표정도 닮아 가는 건가. 그 모습이 꼭 화난 사슴 같아서 루스는 피식 웃어 버렸다.
“농담이야, 농담. 무서운 표정 하지 말고 얼른 이쪽으로 와. 정말 급하니까.”
“……알았, 어요.”
“오? 믿어 주는 거야?”
급하다던 때는 언제고 루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루나를 향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뇨.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예요.”
우선 루나는 루스를 따르기로 했다. 저 간사한 사내의 말이 거짓이라도 상관없었다. 아주 적은 확률이라도 카단을 만날 가능성을 따르는 것이다. 이곳에서 왕궁 기사들의 심판을 무력하게 기다리느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이 낫지 않을까.
루나는 루스를 따라 바닥 아래 비밀 통로로 들어갔다. 지하 통로는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좁고 어두웠다. 어깨가 흙벽에 스칠 때마다 자잘한 흙 알갱이가 어깨로 우수수 떨어져 흙냄새가 진동했다. 희박한 산소와 답답한 풍경에 숨이 막혔으나 루스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그는 커다란 키 때문에 어깨와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길을 겨우 터서 걸어가고 있었다.
“제기랄, 굴을 왜 이따위로 작게 파 둔 거야?”
루스가 적막을 깨고 중얼거렸다.
“그거 알아? 네가 갇혀 있던 창고, 마을 사람들이 식량을 보관하는 곳이야.”
루나는 쓸데없는 소리에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에 흘러나온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도둑이 들어 식량을 죄다 가져갔지. 네가 잡혀 온 이유가 아마도 이것 때문일걸?”
“그게 무슨 소리죠?”
“내 생각엔 촌장네가 식량을 몰래 빼돌리고 도둑질을 당했다며 발뺌한 것 같아. 아마 맞을 거야. 내가 좀 눈치가 빠르거든.”
그러다 마을 주민의 반발이 심해지니 촌장은 그걸 잠재우고자 루나 핑계를 대는 것 같다고 설명을 보탰다. 다급해진 촌장은 숲의 제물이 제 역할을 못 하는 바람에 불운이 닥쳤다고 여론을 조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비밀스럽던 네 존재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게 참 이상하지만 말이야.”
루스는 루나가 숲의 제물이었는지 몰랐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를 올리던 날, 제물이었던 루나는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몸단장을 도운 이와 촌장 정도가 루나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할 것이다.
“너 오두막에 있는 거 누구한테 들킨 적 있어?”
루스의 질문에 루나는 최근 오두막을 방문했던 여인들을 떠올렸다. 그중 자신의 얼굴을 보았던 여인이라면…….
‘이름이 데이지라고 했었나.’
자신이 제물로 팔려 왔을 때 치장을 도왔던 인물도 데이지였고 카단에게 관심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오두막을 찾아온 것도 데이지였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데이지는 제물이 될 나를 동정하며 눈물을 글썽였었어. 그랬던 사람이 나를 고발했다고?’
루나는 고개를 흔들어 의심을 털어 냈다. 복잡한 생각은 잠시 뒤로 미뤘다. 지금은 탈출이 우선이었다.
* * *
“루나?”
오두막으로 돌아온 카단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흐트러진 이불, 바닥을 굴러다니는 의자, 더러워진 바닥. 텅 빈 오두막은 낯선 이가 다녀간 것처럼 어수선했다.
‘루나가 말없이 외출한 적이 있던가.’
카단이 힘을 주자 양팔 근육이 뚜렷하게 튀어나왔다. 그때 누군가 똑똑 오두막을 두드렸다.
“루나?”
카단이 한달음에 달려가 문을 벌컥 열었다. 그 자리에는 루나가 아닌 데이지가 서 있었다. 카단의 흉흉한 기세에 데이지는 어깨를 흠칫 떨면서 그에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카단 님. 전해 드릴 물건이 있어서요.”
“물건?”
“네, 그 이상한 문신이 있던 여자가 부탁한 건데…….”
“루나가?”
“네네, 루나 그 여자요.”
데이지는 루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카단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바닥엔 루나가 끼고 있었던 실반지가 올라가 있었다. 험악하게 얼굴을 구긴 카단이 반지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이거, 어디서 났나.”
루나는 작은 물건도 소중히 다루는 여자였다. 손을 씻을 때도 이 반지를 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반지를 저 데이지란 여자가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 루나가 이곳을 떠나면서 제게 전해 줬어요. 이건 이제 필요 없다고…….”
“거짓말이다!”
쾅! 흥분한 카단이 오두막 문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견고하던 나무 문이 와지끈 부러지면서 옆으로 기울어 버렸다. 화들짝 놀란 데이지는 뒷걸음질 치며 벌벌 떨었다.
“저, 정말이에요! 마을 남자랑 도망갔다고요!”
“남자?”
“네, 루스란 녀석이요. 저희 마을의 유명한 난봉꾼인데 루나가 마음에 들었는지…… 잠시만요, 카단 님!”
카단이 씩씩대면서 마을로 곧장 달려갈 준비를 하자 데이지가 그를 말렸다.
“지금 마을을 찾아가도 밀회 중인 둘을 만나지 못할 거예요. 제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요. 이쪽으로 오세요.”
데이지는 카단을 야트막한 언덕으로 안내했다. 마을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장소는 마을로부터 적당히 떨어져 있었다. 데이지는 마을 외곽에 있는 어느 헛간을 가리켰다.
“아마 그 둘이 저 헛간에서 나올 거예요. 저런 은밀한 곳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무슨 짓. 그 말에 카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혹여 루나가 루스에게 나쁜 일을 당하는 건 아닐까. 카단이 당장 뛰쳐 가려고 하자 데이지가 그를 붙들었다.
“저기 보세요!”
곧 그녀의 말대로 헛간 문이 열렸고 루스가 주변을 살피면서 조심스레 나오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엔 루나가 있었다. 순순히 그를 따르는 걸 보니 협박을 당하거나 억지로 붙잡힌 것 같지는 않았다.
그에 안심한 카단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루스는 루나의 손을 꼭 붙잡고 숲길을 따라 마을 밖으로 빠져나갔다. 둘의 모습은 키가 큰 나무들 사이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보는 동안, 카단은 눈 한번을 깜빡이지 않았다.
안도감 다음 그를 덮친 것은 질투와 분노였다.
어째서 루나가 루스 놈과 함께인 걸까.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았으나 그렇다고 헛것을 본 것 또한 아니었다. 제 손에 있는 반지도 루나 것이 맞았고.
카단은 주먹을 힘껏 쥐고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저와의 증표를 떨쳐 버리고 다른 남자의 손을 잡았다는 사실 자체가 심장에 대못이 되어 박혔다. 시커먼 분노와 새빨간 질투가 어지러이 뒤섞여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다.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제 말이 맞죠, 카단 님? 저 루나라는 여자, 참 간사해요. 앞으로는 카단 님만 바라보는 척하다가 뒤로는 다른 남자를 만나다니요.”
데이지의 핀잔에도 카단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저기, 카단 님?”
불안했던 데이지가 카단의 눈치를 살폈다. 잔뜩 구겨진 얼굴과 눈물이 글썽이는 눈동자. 분노가 치솟았으나 차마 연인을 잊지 못하는 사내의 모습은 한 편의 그림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화내는 것도 근사해. 저런 남자에게 사랑받고 안기는 건 어떤 기분일까?’
데이지는 두 손을 모아 꼭 쥐었다. 지금 당장 제 온기를 나누어 그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해 주고 싶었다. 루나가 남긴 빈자리를 지금 당장 차지하고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제물이 되는 건데!’
루나가 아니라 자신이 숲의 제물이 되었으면 그를 먼저 만나게 되었을 테다. 저 단단하고 커다란 몸에 안겨 교성을 내지르는 것도 자신이었을 거다. 테이블에 엎드려 카단에게 박혔던 것도 자신이었을 거란 말이다.
데이지는 뭉근하게 열이 오르는 아랫배에 힘을 주고 허벅지를 오므렸다. 그날, 창문으로 봤던 카단의 욕정 어린 얼굴이, 다른 사내와 비교도 안 될 성기가, 근육으로 짜인 완벽한 신체와 강한 허리 짓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망상에 젖은 데이지가 손톱을 잘근 깨물었다.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땐 카단은 이미 오두막을 향해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카단 님!”
데이지가 카단을 불렀으나 카단은 멈추지 않았다. 데이지는 그의 뒤를 허겁지겁 따랐다. 상처받은 저 사내를 위로할 존재는 자신밖에 없었다.
“같이 가요! 제가 카단 님의 슬픈 마음을 위로해 드릴…….”
“죽기 싫으면 꺼져.”
카단은 데이지의 말을 매섭게 끊어 냈다. 무시무시한 살기가 풍기자 데이지는 몸을 움츠렸다.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이 이상 그를 따라갔다가는 그 말대로 죽임을 당할 것 같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카단은 홀로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그 후로 카단이 마을에 방문하는 일은 없었다.
* * *
루나는 좁은 지하 통로를 힘겹게 빠져나왔다. 통로는 마을 외곽 헛간과 연결되어 있었다. 루스가 먼저 헛간 밖의 동태를 살핀 후 그곳을 빠져나왔다.
“굼뜨게 있지 말고 얼른 뛰어!”
루스는 주저하는 루나의 손을 잡고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을 뒤 오솔길로 나가 북쪽으로 곧장 올라가면 카단의 오두막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 잡고 있던 루나의 손이 아귀를 스르륵 빠져나갔다. 루스가 숨을 헉헉 몰아쉬면서 뒤를 돌았다. 이를 악물고 따라오던 루나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루나, 어라광 부릴 때 아냐. 얼른 일어나서…… 너 안색이 왜 그래?”
루나의 얼굴이 파리했다. 추운 날씨에 맨발과 젖은 옷차림으로 뛰어다닌 것이 무리수였다.
루나는 잠시 죽음을 떠올렸다. 이대로 눈을 감아 평온해지고 싶다가도 카단을 떠올리면 악착같이 살아남고 싶었다.
“제기랄, 하필 이럴 때……. 야, 너. 벗어.”
“네?”
“그러고 뛰면 최소 동상이야. 살려고 도망가는데 얼어 뒈질 일 있냐? 그거 벗고 이거 입어.”
루스는 코트를 벗어 루나에게 내밀었다. 옷을 받아 든 루나가 루스를 힐끗 올려다보고서 등을 돌렸다. 슈미즈를 벗으면 알몸이기에 그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다.
루나는 젖은 옷을 겨우 벗은 뒤 코트를 걸쳤다. 덜덜 떨리는 손 때문에 옷자락을 잡는 것도 힘들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옷을 갈아입으니 전신을 에워싸던 한기가 한풀 꺾였다.
“볼 것도 없는 주제에 유난 떨기는.”
루스는 신고 있던 양말까지 벗어다 루나에게 주었다. 가죽 부츠만큼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여기까지가 그가 베푸는 최선의 배려였다. 루나는 머뭇대다가 루스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이제야 고맙냐?”
루스는 루나가 잘못 채운 코트 단추를 다시 채워 주면서 구시렁댔다. 코트를 여밀 때마다 그 사이로 루나의 알몸이 살짝살짝 비쳤다. 루스의 하반신은 주인의 의지를 배신하고 발딱 몸을 세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내 몸은 참 건강하기도 하지.’
카단의 여자만 아니었더라면 어떻게든 꼬신 뒤 이 숲에서 밤을 보냈을 것이다. 참자. 참아야 해. 루스는 카단의 화난 얼굴 따위를 떠올리면서 겨우겨우 본능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그-”
“루스.”
“-루스 씨.”
“말해 봐.”
코트 단추를 제대로 채운 루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목도리도 양보해 줄까 하다가 코트를 벗어 줬으니 이건 자신이 차는 것으로 타협했다.
“지금 당신이 저를 도와주는 거요. 알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루스는 알긴 누가 알겠냐면서 콧방귀를 뀌다가 ‘아 맞다’ 하고 옆머리를 긁었다.
“데이지는 알 수도 있겠네.”
“데이지……가요?”
“응. 아까 그 헛간 열쇠를 데이지가 관리해. 그래서 빌려 달라고 부탁 좀 했지.”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루나의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움직이는데 다시 루스가 루나의 손목을 채어 잡았다.
“미안하지만 이젠 정말 시간이 없어서. 빨리 가자고.”
루스는 다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루나 또한 힘을 내서 그 뒤를 따랐다.
도착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오솔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카단의 오두막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얼어붙은 두 다리가 돌덩이 같았지만 루나는 저를 기다릴 카단을 떠올리면서 악착같이 뛰었다.
‘오두막으로 돌아가면 카단이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아 줄 거야.’
추위로 부르튼 내 팔다리를 보고 목욕물을 따듯하게 데워 주려나. 약초 물에 몸을 담그면 지금의 고통은 씻은 듯 사라지겠지. 그렇게 언 몸을 녹이고 있으면 화덕에선 고소한 스튜 냄새가 흘러나올 테고…….
그저 상상만 했을 뿐인데도 눈물이 어른거렸다. 루나는 턱까지 차는 숨을 내뱉으며 다리를 놀렸다. 겨울 숲은 분명 차가웠건만 루나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렇게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 북쪽 숲 경계까지 도착했을 즈음.
“거기 누구냐!”
낮은 수풀에서 철갑옷을 입은 기사가 튀어나왔다. 기사는 곧장 들고 있던 검을 루스의 목에 겨눴다. 어, 어어? 루스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걸음을 멈췄다.
“뉘신지 모르겠지만 저희가 갈 길이 바빠서요, 하하.”
루스가 능청스럽게 상황을 넘기려 했으나 다른 기사들이 하나둘 숲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젠장. 루스는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루나를 등 뒤로 감췄다.
“마을 사람들인가?”
기사들은 루나와 루스를 반원 형태로 에워쌌다. 루스는 기사들을 향해 한껏 선량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기사님들. 근처에 오셨다는 말은 들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뵙네요. 저희는 바로 이 아랫마을에서 왔습니다.”
“그래? 그런 것치고는 행색이 이상한데. 특히 이 여자.”
기사가 낄낄거리면서 코트 아래로 드러난 루나의 맨다리를 가리켰다.
“둘이 재미 좀 보다가 들켜서 달아나기라도 한 거야? 응?”
“아주아주 수상해, 낄낄!”
기사들은 루나에게 치근덕대기 시작했다. 루스는 억지로 올린 입꼬리를 부들부들 떨면서 기사들을 만류했다.
“오해가 있으십니다. 저는 지금 배달 중이거든요.”
“배달?”
“네. 이 여자가 요 앞 숲지기의 연인인데 데려다주고 있었습니다.”
“푸하하하, 이봐, 친구. 헐벗은 여자와 헐레벌떡 도망가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배달이라고?”
“사연이 좀 있어서요. 이만 보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숲지기 놈 성질이 불같아서 이 여자가 사라진 걸 알면 무섭게 화를 내거든요.”
“이 미천한 평민이 뭐라는 거야. 숲지기는 무섭고 우린 안 무서워?”
기사들은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면서 루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의 목 아래를 겨누던 칼끝이 이번엔 루나의 코트로 향했다. 루스가 그 칼을 몸으로 막으면서 눈웃음을 지었다.
“하하. 기사님들, 우리 조금만 신사적으로 가는 것이……, 컥!”
기사가 군홧발로 루스의 배를 퍽 차 버렸다. 뒤로 휙 날아간 루스는 그대로 눈밭을 데굴데굴 굴렀다.
“하여간에 무식한 평민들은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방해꾼을 처치한 기사가 칼끝으로 루나의 코트 자락을 들어 올렸다. 추위에 부르튼 다리가 여실 없이 드러났다.
“와 씨, 속치마도 안 입었어? 구미가 싹 당기네.”
붉게 물든 무릎과 새하얀 허벅지가 찬 공기에 드러나는 순간, 다른 기사가 그의 등을 탁탁 두드렸다.
“야야, 잠깐. 저 허벅지에 있는 문신 뭐야?”
“문신? 윽, 진짜네. 뭐야 저거!”
“기분 나쁘게도 생겼군. 그런데 저 글자, 방금 본 거랑 똑같지 않아?”
기사들이 수군대면서 루나의 문신을 흘끗거렸다. 그때 무리 뒤에서 기사단장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길래 이리도 소란스럽나.”
“단장님, 마을에서 도망치던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기사는 루나의 다리에 이상한 문신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한 후 두 걸음 뒤로 자리를 비켰다.
“문신?”
기사단장은 거만한 걸음걸이로 루나에게 다가왔다. 턱수염이 수북한 기사단장은 루나의 허벅지를 가만히 응시했다.
“룬문자군.”
“방금 봤던 고대 문자 말씀이십니까?”
“그래. 마수 게이트에 있던 그 봉인석 문자. 그것과 똑같다.”
기사단장은 몇 개월 전부터 왕명에 따라 마수 게이트를 조사하고 있었다. 매일 문헌 조사를 하다 보니 이제 글자 몇 개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단장은 한쪽 무릎을 굽혀 루나의 허벅지를 가만히 응시했다. 추측건대 이 문신은 여자의 골반을 지나 배와 가슴까지 새겨져 있을 것이다. 왜냐고? 방금 숲에서 보고 온 비석을 떠올리면 문장이 그 정도로 길게 쓰여 있을 테니까.
군침이 돌았다. 단장은 문신을 샅샅이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이 자리에서 여자의 옷을 훌렁 벗길까 고민하다가 혀를 끌끌 찼다.
‘무리수를 두기엔 아직 이르지. 그런데 잠깐.’
그때 아주 오래된 기억이 단장의 머리를 스쳤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단장이 루나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하하! 단장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면서 기사들을 응시했다.
“하늘도 우리 편인가 보군. 마수가 소환되는 게이트를 찾자마자 이 여자가 나타나니 말이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기억나나? 이 영지의 주인이었던 드하임 변경백 가문 말이다.”
“아아, 네. 기억납니다. 반역죄로 멸문되었던 가문이지요.”
“그래. 그 드하임 저택을 불태우고 나니 땅 아래에서 웬 자루가 발견되더군. 그 안에서 드하임의 저주가 적힌 오래된 고서를 찾았지.”
그것은 드하임 가문의 비밀이 담겨 있는 고서였다.
예로부터 드하임 가문은 변경을 지켜 온 가문이었다. 그들은 북쪽 숲 너머 이누트 족을 경계했으나 그들의 막강한 힘이 곧 왕국을 넘어설 것임을 예측했다.
충심이 깊었던 드하임의 조상은 북쪽 숲의 신성한 돌을 삼켜 버렸다. 그 바람에 봉인되었던 마수 게이트가 열렸고 숲엔 마수가 들끓기 시작했다. 숲 주변에 살던 많은 왕국민이 마수에게 목숨을 잃었으나 왕국에겐 이득이었다. 그 숲은 이누트 족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그때 한 예언자가 드하임 영지를 찾아와 예언을 남겼다.
‘신성한 돌을 삼킨 죄는 저주가 되리라. 그 죄의 낙인이 찍힌 아이가 태어나면 죄인의 가문은 몰락하고 모든 것이 본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서에 적힌 예언이었다.
“그땐 낙인이니, 저주니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마수 게이트를 수사하다 보니 연결되는 점이 있었어.”
기사단장은 손을 들어 루나의 턱을 들어 올렸다.
“오랜만이군, 드하임 영애.”
단장이 알은척을 하자 루나가 눈을 크게 떴다. 드하임 저택에 피바람이 불던 날, 드하임을 몰살시키던 기사단장이 이 남자였다. 자신을 노예 상단에 팔아넘긴 바로 그 남자 말이다.
“영애의 미모가 워낙 탁월해서 몇 년이 지나도 쉬이 잊히지 않더군. 그 기분 나쁜 문신도 말이야.”
더러운 건틀렛이 루나의 허벅지 문신을 쓸어내렸다. 차가운 금속 표면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만지지 마!”
루나가 다리를 차올려 그 음흉한 손을 떼어 냈다. 그러자 루나를 둘러싼 기사들은 검 끝을 겨누며 루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괜찮으니 검을 내려. 귀족 영애를 이리 모시면 안 되지.”
기사단장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루나에게 얼굴을 바짝 대었다. 둘의 얼굴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가까워지자 루나는 역겨움에 숨을 참았다. 기사단장이 루나의 허벅지 문신을 꽉 쥐었다.
“그날, 이 문신 때문에 영애를 노예로 오해하긴 했었다만은…… 덕분에 영애를 죽이지 않았지. 천운이었어.”
“절 놔주세요!”
“아주 중요한 사건의 열쇠인데 놔줄 수 있을 리가. 영애가 어쩌다 이 마을에 정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우리와 함께 가야 하네. 예언대로 모든 걸 제자리에 돌려놔야지?”
기사단장이 루나를 포박하라고 턱짓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저주 따위가 옮을까 주춤거렸다.
“한심한 새끼들.”
혀를 찬 기사단장이 직접 루나를 포박했다. 그녀를 속박하는 기분은 제법 짜릿했기에 겁을 낸 부하들을 혼내진 않았다.
기사단장은 루나를 자신의 말에 태우고 말 머리를 돌렸다. 그들은 다시 마수 게이트로 향했다.
북쪽 숲 정중앙에서 하얀빛이 솟구쳤다. 비석을 빙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이 루나를 향해 감탄했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저, 저주받은 여자가 아니라 성녀였어! 이건 기적이야!”
기적은 루나의 몸이 비석에 닿자마자 일어났다. 루나의 문신이 붉은빛을 내면서 빛났고 평범한 돌이었던 비석 또한 루비처럼 새빨갛게 변했다. 그러자 마수 게이트가 새하얀 빛에 휩싸이더니 점점 닫히기 시작했다. 게이트의 소멸과 동시에 루나의 문신 또한 깨끗하게 사라졌다. 보석같이 붉었던 비석도 다시 회색 바위로 돌아왔다.
“성녀님께 인사드립니다.”
기사들은 일제히 루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셀 수 없는 목숨을 앗아 간 마수들의 게이트를 봉인하다니. 그들은 루나를 향해 연신 성녀라고 부르짖었다. 루나를 음탕하게 바라보던 기사들은 하늘을 향해 곧장 회개하기도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루나도 이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기사단장에게 개처럼 끌려와 이 비석에 딱 붙자마자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온몸에 피로감이 들고 빈혈이 일듯 눈앞이 흐릿했다.
‘안 돼. 정신 차려. 카단에게 가야 해.’
루나는 꺼져 가는 정신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면서 제게로 다가오는 기사단장을 노려보았다. 단장은 루나의 양 손목을 결박하던 줄을 검으로 끊어 주었다.
“고서에 나온 내용이 진짜였을 줄이야. 그동안 이런저런 오해로 고생이 많았겠군, 드하임의 영애.”
기사단장이 온화하게 웃으며 루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결박 자국이 남은 손목을 툴툴 털던 루나는 단장의 손을 빤히 내려다만 볼뿐 잡지 않았다.
“혹 내가 영애를 노예로 팔아 버려서 마음이 상했었나? 그 옛날 나의 불찰을 용서해 주길 바라네.”
“원하신다면 해 드릴게요, 용서.”
“오.”
“그러니 이제 절 오두막으로 보내 주세요.”
루나가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했다. 오두막? 안 되지, 안 돼. 기사단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게 커다란 업적을 세우고도 작은 마을에 머물 생각인가?”
“제겐 업적 같은 거 필요 없습니다.”
루나는 이를 악물고서 몸을 틀었다. 이렇게 된 거 혼자서라도 오두막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악스러운 손이 루나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꺅! 루나는 기사단장 코앞으로 질질 끌려왔다.
“가라고 허락하지 않았다. 난 영애가 오늘 보인 기적을 전하께 보고해야 해. 그러려면 영애도 함께여야겠지.”
기사단장은 루나의 어깨를 붙잡은 뒤 강제로 말에 태웠다. 루나가 단장을 뿌리치려 했으나 강한 힘에 눌려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기사 하나가 정신을 잃고 끌려온 루스를 턱짓했다.
“단장님, 그럼 이놈은 어떻게 할까요?”
“아아, 그놈이 있었지.”
흐음, 어떻게 처리할까. 단장은 턱을 쓸면서 루나를 힐끗거렸다. 루나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걸 확인하자마자 단장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놈을 가지고 협박한다면 루나를 좀 더 쉽게 다룰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우선 데리고 가자. 그놈도 제법 쓸모가 있을 것 같군.”
* * *
카단은 오두막에서 루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촛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실내로 카단의 형형한 눈동자만이 맹수처럼 번들거렸다.
카단은 루나가 루스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장면을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그때마다 심장이 만 갈래로 찢어지고 온몸이 바스러질 것 같았다.
“루나.”
카단은 손바닥에 올려 둔 실반지를 꽉 쥐었다. 벌써 며칠이 지났다. 하지만 루스의 손을 잡고 사라진 루나는 소식이 없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카단의 눈동자가 반쯤 부서진 출입문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루스 놈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서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카단은 비틀대는 걸음으로 오두막을 나섰다. 며칠간 잠도 못 자고 식사도 하지 못한 카단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정말 떠난 것이냐.”
카단은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면서 숲속으로 들어갔다. 이 광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려면 마수라도 베어 내야 했다. 안 그러면 당장 마을로 내려가 루스 놈을 포함한 모든 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것 같았다.
카단은 굶주린 짐승처럼 숨을 크게 내쉬며 숲길을 걸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평소와 달리 마수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냥을 나간 게 언제였지?’
아마 사흘 전인가. 순간 흐릿하던 카단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돌아왔다.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카단은 마수 게이트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루나의 문신과 똑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던 비석을 확인하러 가는 것이다.
카단은 쉬지 않고 달렸다. 식음을 전폐하고 잠을 이루지 못해 피로한 상태였으나 타고난 체력 덕에 목적지까지 어렵지 않게 도착했다.
“루나!”
카단은 루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비석을 향해 뛰었다. 비석 옆에 있어야 할 크고 검은 게이트는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이걸 없앤 게 루나, 너였나.”
카단은 비석을 만지면서 중얼거렸다.
“네가 루스와 이곳에 왔었던 것이냔 말이다.”
빌어먹을. 카단이 비석을 쾅 때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루나?”
카단은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멍하니 걸었다. 루나, 루나. 손에 힘이 풀렸고 그가 쥐고 있던 검은 바닥으로 스르륵 떨어졌다.
그때 나무가 빼곡한 숲에서 괴한이 튀어나왔다. 카단과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바로 그 이누트 인이었다. 그는 카단의 목덜미를 재빨리 후려쳤다. 평소라면 절대 당하지 않을 공격이었으나 괴한을 루나로 착각한 카단에겐 빈틈이 많았다.
하지만 한 방에 쓰러질 카단이 아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카단이 눈을 부릅뜨고 괴한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너, 내 눈에 띄면 분명 죽인다 했다.”
카단이 이누트 인의 목을 조르며 경고했다. 켁, 케헥! 이누트 인이 괴로워하며 발버둥 치던 때, 숨어 있던 다른 이누트 인이 기다란 원통을 후 불었다. 그 원통에서 날아든 침이 카단의 목덜미에 정확하게 꽂혔다. 그 침에는 거대한 맹수를 잡을 때 쓰는 수면제가 묻어 있었다. 약효는 빠르게 퍼졌고 카단의 몸이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너희…… 누구.”
혀가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카단은 흐릿해진 시야로 상대를 끝까지 노려보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다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쿵 쓰러졌다.
『죄송합니다, 쿠르아 님. 이 방법밖에 없었어요.』
두 명의 이누트 인은 카단을 낯선 이름으로 불렀다. 그들은 쓰러진 카단을 들고서 반대편 숲속으로 사라졌다.
* * *
루나는 왕을 알현해야 하는 의무 때문에 수도로 끌려왔다. 수도란 곳은 북쪽 영지와 비교할 수 없이 넓고 풍족한 곳이었다.
오늘도 루나는 멍하니 창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려한 수도의 풍경에도 연노란색 눈동자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오늘은 약속된 입궁 날이었다. 이날을 위해 기사단장은 루나에게 가정교사를 붙이고 예법과 몸가짐을 가르쳤다.
모든 걸 빠른 속도로 습득한 루나는 현재 어엿한 귀족의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주인님의 마차가 현관에 도착했습니다, 영애님.”
기사단장이 붙여 준 하녀가 루나를 1층으로 안내했다. 커다란 갈색 마차가 루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갈수록 귀족다워지는군, 영애.”
마차 문을 연 기사단장이 흐뭇한 미소를 띠고서 루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루나는 그 에스코트를 무시하며 스스로 마차에 올랐다. 괘씸한 행동이었으나 그런 성격조차 단장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단장은 아름답게 치장한 루나를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정말이지 탐이 나는 외모야.’
문신이 사라진 피부는 티 없이 새하얬고 아름다운 금발은 우아했다. 사슴처럼 청초한 이목구비와 처연하면서도 순수한 분위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매혹적이라 사내들의 이목을 끌어당겼다.
부인을 사별한 지도 어언 5년. 여러 귀부인과 욕정을 해결하면서 딱히 외로움을 느낀 적 없던 기사단장은 루나야말로 두 번째 후작 부인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제 침실에 있는 상상을 하기만 해도 아래가 터질 듯이 부푸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잠시 후 마차는 왕성에 도착했다.
기사단장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볼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켰다. 기사단장이 향한 곳은 연회장 옆에 있는 파우더룸이었다. 연회에 참여하던 귀부인들이 은밀하게 이용하는 장소였다.
“어머나, 단장님?”
카미유 자작 부인이 푹 파인 가슴골을 흔들며 단장을 반겼다. 단장은 화장대 위에 있는 동그란 환약을 힐끗거렸다. 부인의 눈이 반쯤 풀려 있는 걸 보니 미약을 복용한 채로 아무 남자나 기다린 모양이었다.
“잘 지내고 있었나 보군.”
단장은 곧장 자작 부인에게 입을 맞추며 한 손으로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힘껏 주물렀다.
“읏, 하, 북쪽 숲으로 출정을 나가셨다고 들었는데요, 하응!”
“다녀왔지. 아주 큰 일을 하고 왔어.”
“멋지셔라. 지금은 저를 위해 큰일을 해 주실 거죠?”
자작 부인은 남은 환약 한 알을 입 안에 털어 넣은 뒤 치맛자락을 훌렁 들어 올렸다. 몇 겹의 속옷을 내리니 먹음직스럽게 갈라진 음부가 나타났다. 이미 발딱 선 음핵은 사내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장이 음핵을 손바닥으로 찰싹 때리자 자작 부인은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지르며 애액을 왈칵왈칵 토해 냈다.
“더, 더 때려 줘요!”
찰싹! 찰싹! 두꺼운 손바닥이 부인의 음부를 때릴 때마다 비밀스러운 부위부터 허벅지 안쪽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북쪽 숲의 찬 바람에 붉게 부르텄던 루나의 속살이 떠올랐다.
“젠장.”
단장은 다급하게 지퍼를 내리고 성기를 꺼냈다. 루나 때문에 발기했던 검붉은 좆이 개처럼 엎드린 자작 부인의 음순을 갈랐다. 그것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안쪽으로 단번에 꽂혀 들었다.
“하앙, 읏, 너무 좋아아앙!”
자작 부인이 엎드린 채로 교성을 내질렀다. 단장은 손바닥으로 부인의 엉덩이를 짝, 짝 내리치며 빠르게 허리를 흔들었다. 커다란 손자국이 도장처럼 찍혔다.
“큭, 루나, 루나!”
단장은 눈을 감고서 루나의 이름을 불렀다. 루나에게 박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싶어서. 어차피 약에 취한 자작 부인은 아무런 기억도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상상에는 한계가 있었다. 루나라면 이렇게 헐거울 리가 없다. 그 작은 몸은 분명 제 좆을 자를 듯이 조여 댈 것이다. 부족하다. 너무도 부족하다.
“음탕한 암퇘지처럼 굴지 말고 구멍 좀 조여 봐!”
단장이 자작 부인의 머리채를 뒤로 잡아당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좆을 끝까지 박은 그는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수련으로 다져진 두꺼운 허벅지가 근육의 모양대로 뚜렷하게 갈라졌다.
앙! 자작 부인이 교성을 내질렀다. 자궁까지 깊게 찔러 대는 자세와 귓가를 따끔하게 찌르는 수염의 감촉. 거친 게 좋아. 아픈 거 기분 좋아! 자작 부인은 허리를 부르르 떨면서 침을 질질 흘렸다.
“음? 안쪽에 다른 놈 정액이 남아 있는 것 같은데.”
단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남의 것으로 불쾌하게 미끈대는 안쪽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어쩐지 헐겁더라니. 나 오기 전에 벌써 다른 새끼들이랑 붙어먹어 본 보지 맛이군. 더 조여!”
짜악! 매서운 손길이 자작 부인의 엉덩이로 내리꽂혔다. 자작 부인은 허리를 뒤로 꺾으며 환희에 찬 신음을 질렀다.
“아흣, 남자 시종 하나랑, 뷔센 후작이랑, 같이 했어요, 하, 아앙!”
“몸이 깨끗하길래 오늘은 내가 처음일 줄 알았건만, 후. 부지런도 하시지.”
“그 남자 시종에게, 깨끗이, 씻기라고 했죠, 하읏, 혀로요. 아앗!”
“젠장할, 어쩐지 아까부터 침 냄새가 나더라니!”
“더 깊게 찔러 줘요. 단장님 거 두꺼워서 좋아앙!”
단장은 허리를 돌리면서 빠르게 추삽질했다. 자작 부인은 손으로 음핵을 빠르게 자극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음핵이 부풀어 오르자 손가락은 아래로 미끄러져 좆이 드나드는 제 구멍을 함께 쑤시기 시작했다. 검붉은 좆과 자작 부인의 손가락 세 개가 빠듯하게 늘어난 구멍을 정신없이 헤집었다.
“이제 좀 조이네.”
단장의 허리 짓이 더 거칠어졌다. 손가락과 질 점막이 성기에 비벼지는 기분은 제법 새로웠다.
큭! 단장은 자작 부인의 질 안에 정액을 울컥울컥 사정하기 시작했다.
“루나, 큿, 루나.”
단장은 마지막 한 방울을 짜낼 때까지도 루나의 이름을 불렀다. 처연하고 순진해 보이는 미녀의 얼굴에 제 정액이 엉망으로 튀어 있는 장면을 상상하니 성기가 재차 흥분하며 부풀어 올랐다.
“제기랄, 이제 곧 알현실로 가야 하는데.”
“흐응, 한 번 더 안에 싸 줘요, 단장님, 임신해 버리게.”
“지금 임신하면 자작 부인의 애가 누구 앤지 아무도 모를걸? 시종의 얼굴을 닮아 버리면 자작이 퍽이나 좋아하겠군.”
“하앙, 그것도 흥분돼!”
“시간이 없으니 아래 구멍은 안 되겠다. 여기로 빨아 봐.”
단장은 자작 부인의 입가에 검붉은 좆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자작 부인은 기쁜 듯이 커다란 입술을 벌려 좆을 단번에 물었다.
자극적인 상황에서도 단장은 벽시계를 힐끔거렸다. 5분 안에 사정하고 대충 바지만 추스르면 시간 안에 알현실까지 도착할 수 있겠지.
단장은 자작 부인의 얼굴 위로 루나를 떠올리면서 그녀의 뒤통수를 두 손으로 잡고 추삽질을 반복했다. 진짜 루나가 제 물건을 빨아 주면 젠장, 2분 안에라도 쌀 수 있어.
* * *
그로부터 30분 후.
루나는 약속 시간보다 늦게 알현실로 들어가야 했다. 뒤늦게 뛰어온 단장의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다. 아무래도 급한 일을 시간 안에 제대로 못 끝낸 모양인지 옷매무새가 어수선했다.
“기요트 멕헴 기사단장과 루나 드하임 영애가 입장합니다!”
시종은 단장이 옷을 정리할 여유도 없이 곧장 알현실 문을 열어젖히고 크게 외쳤다.
알현실은 알현실이라기보다 연회장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술잔을 옮기느라 분주한 시종들 사이로 취기 오른 귀족들이 비틀거렸다.
왕의 무릎에 앉아 있던 여인 하나가 벌떡 일어나 제자리로 돌아갔다. 젊고 방탕한 왕은 처녀만 수집하는 기이한 성벽이 있는 자였다. 그의 곁에서 화려한 깃털 부채를 흔드는 여자도, 방금까지 무릎에 앉아 있던 여자도 모두 처녀였다.
“영원히 빛나는 고귀한 태양께 인사를 올립니다.”
삐딱하게 앉아 술 냄새를 풍기던 왕은 루나를 흥미롭게 응시했다. 그리고 대뜸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처녀인가?”
“네?”
“보통 책에는 그렇게 나오잖나. 남자를 모르는 여자만이 성스러운 힘을 발휘한다고.”
하하! 왕이 주변을 압도하는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려다. 왕의 눈치를 보던 주변인들 또한 하나둘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그때 술에 취한 귀족 하나가 그만 왕보다도 크게 웃어 버렸다. 왕이 눈짓하자 병사들이 그 귀족을 끌려 나갔다.
왕은 간사한 자였다. 웃음소리조차 저를 뛰어넘는 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하.”
루나의 작은 목소리가 실내를 장악한 웃음 속에서 고요하게 섞여들었다. 안 들릴 법도 하건만 평소 작은 소리도 신경 쓰고 살았던 왕은 그 대답을 듣고 단번에 정색했다. 동시에 실내를 가득 채우던 웃음소리가 귀신처럼 뚝 그쳤다.
“사랑하는 사람이라. 그놈을 짐이 죽이면 어찌 되느냐. 넌 다시 처녀가 되느냐?”
루나의 대답을 괘씸하게 생각했던 왕은 그녀를 옥에 가둬 버릴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왕국의 숙원 사업인 마수 게이트를 봉인한 장본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리가 아닌가.
“농담이었다. 설마 짐이 처녀가 아니라고 죽일까. 그대는 참 재미가 없군.”
“송구, 합니다.”
하얗게 질린 루나는 고개를 숙였다. 왕이 풍기는 악독한 권력의 냄새가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술 냄새보다도 지독해서 숨이 막혔다.
“그나저나 단장은 입궁하고서도 아랫도리가 바빴나 보오.”
가뜩이나 짜증 난 왕의 시야로 지퍼가 열린 기사단장의 바지가 걸렸다. 흠칫 놀란 단장은 미처 올리지 못한 지퍼를 조용히 끌어 올렸다.
“죄송합니다.”
“뭐, 됐어. 지루하니 본론부터 말하지.”
왕이 가볍게 손을 흔들자 시종이 금 쟁반에 독한 술과 약을 가져왔다. 약을 꿀꺽 삼킨 왕은 술잔을 살살 흔들면서 마수 게이트를 봉인한 속뜻을 넌지시 밝혔다.
“북쪽 숲의 게이트를 봉인했으니 이제 북쪽으로 진군할 것이다.”
“진군이라 하심은…….”
“드디어 이누트 족의 땅을 밟을 수 있게 됐단 소리지.”
이누트 족의 땅은 북쪽 숲 너머에 있었다. 그 대지 아래에는 불 때는 데 사용하는 공기가 숨겨져 있는데, 그것은 석탄보다도 가볍고 효율이 높아서 귀한 자원으로 손꼽혔다.
왕은 오래전부터 그 땅을 탐냈다. 하지만 북쪽 숲에서 출몰하는 마수 때문에 군사 이동 자체가 어려워 침략이 쉽지 않았다.
“드디어 짐의 이름을 역사에 새길 순간이 왔다. 생고기나 먹고 있을 야만인에게 위대한 브릴란 왕국의 힘을 보여 줘야겠지. 당장 전쟁을 준비하라, 기요트 단장!”
“예! 전하.”
“아아, 그리고 잊을 뻔했군.”
왕은 술잔을 내려 두고 왕좌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그리고 발뒤축에 무게를 싣고 거들먹거리는 걸음으로 루나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왕이 손가락으로 루나의 턱을 들어 올렸다. 사슴 같은 눈매와 오뚝한 코, 체리처럼 탐스러운 입술은 단정하면서도 처연한 매력을 뽐냈다.
“예쁘네.”
“저, 전하.”
“그대는 유니콘이라는 짐승을 아나.”
유니콘. 처녀의 무릎을 베고 잔다는 전설 속 동물. 처녀가 아닌 여자를 만나면 배를 뚫어 죽이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짐이 바로 그 유니콘이다. 남이 손댄 건 안 먹는 체질이긴 한데……. 겁먹은 모습을 보니 처녀라 생각해도 될 것 같구나. 넌 좀 구미가 당겨.”
왕은 이빨을 보이며 활짝 웃었다. 그의 이빨에는 금으로 만든 치아 장식이 화려하게 달려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왕을 보면서 루나는 시선을 슬쩍 돌렸다. 그러자 루나의 목선이 길게 드러났다. 눈을 게슴츠레 뜬 왕은 고개를 숙여 루나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그리고 하얀 목덜미를 혀로 싸악 핥은 뒤 드레스 위로 드러난 어깨 위로 이빨을 박아 넣었다.
“악!”
루나가 작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살점이 떨어져 나가 고통스러웠다. 맹수에게 물린 것처럼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큭, 크크큭, 푸하하하!”
루나의 어깨를 물고 있던 왕이 웃음을 터트리며 상체를 바로 세웠다. 보드라우면서도 쫀득한 살맛이 혀에 감겼다. 어깨를 깨물어 피를 보았을 뿐인데 그녀의 처녀를 꿰뚫는 희열이 느껴졌다.
실크 바지 위로 흥분한 페니스가 드러났으나 왕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왕은 피로 흥건한 입가를 대충 닦아 내면서 대중을 향해 외쳤다.
“이 여인에게도 짐이 상을 내릴 생각이다. 다들 무엇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나.”
왕의 미친 행태에 감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꿀이라도 처먹은 것처럼 말을 못 하는군. 왕은 그들을 한심하게 생각하면서 스스로 답을 내었다.
“그럼 이건 어떤가. 드하임 백작가의 작위 복권.”
멸문한 가문의 작위를 되돌리는 것은 매우 드문 일. 왕은 루나에게 어마어마한 혜택을 주겠다며 눈을 반짝거렸다. 하지만 신분 따위에 얽매이지 않았던 루나는 특별한 기대도 실망도 비치지 않았다.
“오호라. 성에 차지 않은 건가.”
불만스러운 왕의 눈썹이 매섭게 꿈틀거렸다. 보다 못한 기사단장이 루나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그…….”
루나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왕은 어깨가 아니라 저 입술을 물어뜯을 걸 하고 후회했다. 아니지, 이미 누군가 사용한 입술을 차지하는 건 짜증 나는 일. 저것을 다른 사내와 맞붙이고 관전하는 게 더 재미있겠군. 왕의 위험한 속내가 스멀스멀 피어나려던 순간.
“위대한 뜻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루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바닥에 엎드렸다. 기쁘지 않은 표정을 들키면 카단과 재회하기도 전에 왕에게 죽어 버릴 것 같아서 이렇게라도 얼굴을 가린 것이다.
왕은 눈꺼풀을 두어 번 깜박이다가 씨익 웃었다. 절색의 미인이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꼴이 마음에 들었다. 변덕스러운 왕은 조금 전까지 떠올렸던 위험한 생각을 하얗게 잊어버렸다.
“다음에 다시 태어나거든 너의 처음은 내게 바치도록 하라, 드하임의 영애, 아니, 이젠 드하임 백작이군.”
하하하! 왕은 주변 귀족을 훑으면서 크게 웃었다. 그러다 고개를 휙 돌려 루나를 내려다보았다. 왕의 얼굴엔 웃음기 하나 없었다.
“그리고 날 두 번 인내하게 만든 건 올해 들어 그대가 처음임을 잊지 말라. 피가 흐르는 내 잇자국이 마음에 들어서이니.”
* * *
루나는 드하임의 영지를 되찾았으나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왕명에 따라 ‘성녀’ 역할을 수행해야 해서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한 번씩 신전 예배 때 얼굴을 비치고 대중에게 손을 흔들어 주면 끝.
덕분에 많은 공물을 받고 부족함 없이 생활했지만 지금 루나는 카단의 오두막에서 살 때보다 더 피폐하고 허기졌다.
오늘도 루나는 하얀 예복을 입고 신전 2층 발코니에 섰다. 저 아래 사람들을 쓱 훑어보는 눈빛은 누군가를 찾듯이 간절했다.
두어 달 전부터 시작된 전쟁에 왕국민은 잔뜩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를 다독이는 것이 지금 루나의 역할이었다.
말이 성녀이지 숲의 제물과 똑같았다. 전쟁의 결과가 좋지 않다면 가장 먼저 자신의 목이 달아나리라는 것을 루나는 알았다.
‘문신이 사라져도 내 인생은 똑같네요, 카단.’
타인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는 액받이가 되어 대중 앞에 놓였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이렇게 살아 있음에도 카단과 재회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지친 루나를 더욱 공허하게 만들었다.
그런 루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기사단장이었다. 그는 청혼을 명목으로 밤마다 루나를 찾아와 그녀를 압박했다.
“내 부인이 되어라, 루나 드하임.”
“저에겐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돌아가세요.”
“대체 언제까지 거절할 셈이지? 이 정도면 사내답게 기다렸잖아!”
“기다리라고 한 적 없어요. 앞으로도 계속 당신을 거절할 거고요. 제발 그만해요!”
“제발 그만해요? 귀족이 되었더니 벌써 잊었나. 온몸에 저주 같은 문신이 있었던 시절을 말이야.”
“…….”
“멕헴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준다면 고개 숙여 감사해야지! 하찮은 노예로 더럽게 굴러다녔던 주제에 감히 나를 조롱해?”
기사단장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루나의 두 손을 압박했다. 대중 앞에선 엄숙하고 정중하던 단장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단장은 루나를 벽에 밀어붙인 뒤 그녀의 뺨과 목덜미를 허겁지겁 핥아 내렸다.
“하아, 역시.”
맛있었다. 카미유 자작 부인과는 비교도 안 될 달콤한 살성에 단장은 하반신을 부르르 떨었다.
루나, 루나. 단장은 루나의 가슴을 조급하게 움켜쥐면서 이름을 불렀다. 루나의 저항에도 단장의 혀는 목선을 타고 내려와 어깨에 닿았다.
이제는 흉터가 된 이빨 자국이 단장의 시야에 들어왔다. 움찔, 단장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왕이 남긴 낙인. 루나의 거절과 저항도 무시했던 단장은 그깟 이빨 자국 하나에 행위를 멈췄다.
그때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깨어난 루스가 단장에게 달려들었다.
“떨어져, 이 자식아!”
“큭, 넌 누구냐!”
“성녀님 심부름꾼이다. 그러는 넌 어디서 온 강간마냐, 새끼야!”
“평민 주제에 감히 기사단장에게 덤벼? 죽고 싶어 환장했군!”
퍽! 단장의 단단한 주먹이 루스의 명치로 곧장 꽂혔다. 루스는 커헉, 신음하면서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루스!”
“드하임 백작. 저 평민 새끼가 당신의 정인인가?”
그는 루스의 광대뼈를 발로 퍽 차 버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루스의 고개가 빠르게 옆으로 돌아가자 루나가 그 앞을 막아섰다.
“맞든 아니든 그게 단장님과 무슨 상관입니까. 소란이 더 커지기 전에 가세요!”
루나는 눈에 힘을 주고 신전 출입문을 가리켰다. 밤중 소란에 잠에서 깨어난 신관들이 복도로 나와 단장을 기웃거렸다.
“젠장!”
후드로 얼굴을 가린 단장은 도망치듯 신전을 나섰다. 루나는 꽁지를 빼고 도망가는 단장을 확인한 뒤 끙끙대는 루스를 응시했다.
“괜찮아요?”
루나는 귀족이 되었음에도 루스에게만큼은 예전처럼 말을 높였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에게 한결같이 구는 건 카단과 함께했던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해서니까. 루스도 그런 의도를 알기에 여전히 반말을 쓰며 맞장구를 쳤다.
“안 괜찮아. 후, 카단에게 맞았을 때보다는 덜 아프지만.”
“카단이 당신을 때린 적 있어요?”
“딱 두 번 있었어. 그중 한 번이 너 때문이었던 것 같아.”
“저 때문이라뇨?”
“카단 그놈이 칼을 차고 마을에 내려온 날이었는데…….”
루스는 명치를 문지르면서 옛이야기를 풀었다. 유쾌한 내용은 아니었으나 루나는 그것조차도 반갑다는 듯이 해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