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발각되는 비밀
다음 날 오전. 카단과 루나는 북쪽 숲으로 들어갔다.
루나는 펭귄처럼 뒤뚱뒤뚱 걸어야 했다. 카단이 오두막에 있던 털가죽을 모조리 가져와서 그녀의 몸에 둘둘 감는 바람에 지금 루나는 동그란 털 뭉치로 보일 지경이었다. 재킷 한 장만 가볍게 걸친 카단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예상대로 루나는 숲속에서 마수를 만났다. 그중 몇몇은 카단을 보고서도 덤벼들지 않았다. 그것들은 기죽은 강아지처럼 꼬리를 내리고 빠르게 도망쳤다.
“마수는 원래 사람을 보면 도망치나요?”
“살고 싶어서 그런다.”
카단은 애매한 대답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카단이 그냥 가니까 괜찮은 거겠지? 루나는 마수가 도망친 방향을 보면서 카단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
그리고 험악하게 생긴 마수 하나가 카단에게 덤벼드는 걸 보고 나서야 카단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까 그 마수들은 카단에게 죽기 싫어서 도망친 거였구나.’
온몸에 뾰족한 가시를 달고 있던 마수는 카단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몸이 두 동강이 나서 눈밭을 굴렀다. 덕분에 카단의 몸에는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이런 거 말고 큰 걸 조심해라.”
커다란 마수를 토끼 잡듯이 쉽게 물리친 카단이 주의를 시켰다. 차마 사체를 쳐다보지 못했던 루나는 마수가 살아 있던 모습을 떠올렸다. 저 정도면 엄청 큰 거 아닌가?
“이것보다 더 큰 마수가 있나요?”
“많다.”
많다고? 루나의 어깨가 바짝 움츠러들었다. 카단은 피식 웃으며 루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 준다.”
카단은 루나의 손을 잡고 천천히 숲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자연스럽게 루나와 보폭을 맞췄다. 덕분에 루나는 힘들이지 않고 카단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카단의 말대로 거대한 마수가 앞을 막았다. 그것의 이마에는 성인의 다리 한 짝만 한 뿔이 달려 있었고 생김새는 늑대와 비슷했다. 오두막만큼이나 커다란 덩치가 루나의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침을 뚝뚝 흘리던 마수는 루나를 가만히 보다가 다시 카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애초에 루나는 공격 대상이 아닌 것처럼 마수는 카단에게 더 관심을 보였다.
“조, 조심해요, 카단!”
한눈에도 저 마수가 강한 개체임을 알 수 있었다. 루나는 카단의 넓은 등에 바짝 붙어서 바들바들 떨었다.
하지만 카단은 초식 동물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여유가 흘러넘쳤다.
“여기 잠깐 서 있어. 10을 세면 온다.”
그 말과 동시에 카단은 앞으로 빠르게 튀어 나갔다. 마수는 턱 아래까지 입을 징그럽게 찢고서 카단에게 팔을 휘둘렀다.
10, 9, 8, 6, 5…… 거기까지 세었을 때였다. 양손에 칼을 쥔 카단은 단 세 합 만에 마수의 몸뚱이를 반으로 갈라놓았다. 마수의 내장이 하얀 눈밭 위로 너절하게 흩어졌다. 카단의 몸은 피범벅이었으나 그가 흘린 피는 한 방울도 없었다.
‘강한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말도 안 되게 강한 줄은 몰랐어.’
경이로움을 넘어서 그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눈을 감지 못 하고 카단을 지켜보던 루나는 뒤늦게 눈을 감고 앞이 정리되기를 기다렸다. 카단은 반 토막이 난 시체를 발로 툭툭 차서 대충 치워냈다. 그리고 재킷에 묻은 피를 툴툴 털어 낸 뒤 눈을 꼭 감고 있던 루나에게 차분히 다가갔다.
“가자, 루나.”
카단이 피투성이인 손을 내밀다가 바지에 피를 쓱쓱 닦아 낸 후 다시 깨끗해진 손을 내밀었다. 살짝 실눈을 뜬 루나의 시야로 카단의 커다란 손이 들어왔다.
‘어차피 장갑을 껴서 피가 좀 묻어도 괜찮은데.’
루나는 그의 소소한 배려에 고마워하며 벙어리장갑을 낀 채로 커다란 손을 잡았다. 마수를 자비 없이 베어 내던 억센 손은 보드랍고 포근한 손이 되어 있었다.
“저,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요.”
입술을 꼬물대던 루나가 천천히 말을 꺼내자 카단은 다정한 눈빛으로 루나를 내려다보았다. 마수를 찢어발기던 사냥꾼의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카단이 꼭 이 숲의 주인 같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어떤 마수가 나타나더라도 당신이 이길 것 같아서요.”
“맞아. 난 강하지.”
카단은 저만 믿으라는 듯 주먹으로 심장을 툭툭 두드렸다. 마수의 피를 뒤집어쓴 모습은 언뜻 보면 포악했으나 루나를 응시하는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당신은 정말 한결같아.’
고개를 떨군 루나는 두꺼운 장갑 안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당신이 정말 숲의 주인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애초에 자신은 숲의 주인을 위한 신부로 바쳐진 제물이었다. 그러니 그 주인의 옆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루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단은 벙어리장갑을 낀 작은 손을 꼭 잡고 씩씩하게 나아갔다.
숲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단단하게 언 땅이 나와서 루나가 불안하게 걸었다. 카단의 단단한 팔이 루나의 등을 지탱해 주더니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루나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카단의 넓은 등에 업혀 있었다. 당황한 루나보다 먼저 입을 뗀 것은 카단이었다.
“걱정 마라. 이래야 더 빨리 갈 수 있다.”
깃털 같은 루나를 업고 가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두껍게 입은 루나는 털 뭉치 같아서 몰랑몰랑하게 느껴지는 감각이 좋았다.
그렇게 울퉁불퉁한 숲길을 넘자 드넓은 평지가 나왔다. 그 한가운데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있었다. 께름칙한 기운이 풍기는 구멍은 마수를 소환하는 게이트였다. 바로 그 옆으로 커다란 비석이 우뚝 서 있었다. 그 비석에 새겨져 있는 룬문자는 루나의 문신과 흡사했다.
“카단 씨의 말대로예요!”
카단의 등에서 내려온 루나가 비석을 향해 깡충깡충 뛰어갔다. 그 모습이 다람쥐 같아서 입꼬리를 올린 카단은 그녀의 등을 향해 가벼운 경고를 남겼다.
“조심해라, 루나. 비석 앞에 있는 구멍, 마수가 기어 나오는 구멍이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 북쪽 숲에 마수가 출몰하는 이유가 바로 저 구멍 때문이라는 걸 카단은 알고 있었다. 밤이면 저 구멍에서 마수들이 슬금슬금 기어 나왔으니까.
“저, 정말이에요?”
겁에 질린 루나는 다시 몸을 돌려 카단에게 쪼르르 뛰어왔다. 작은 몸이 카단에게 푹 안기자 그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털 뭉치 같은 루나를 들어 안았다.
카단은 비석 앞까지 걸어갔다. 비석에 새겨진 룬 문신을 빤히 보던 카단이 ‘역시 이상하다’고 중얼거렸다.
“뭐가 이상한데요?”
“똑같다.”
“네?”
“네 몸에 있는 것과 같다.”
“그래요? 글자 모양이 비슷한 건 알겠는데…….”
“내용이 똑같다. 완전히.”
“내용, 이라뇨? 카단, 혹시 룬문자를 읽을 줄 알아요?”
루나의 물음에 카단은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스로도 왜 이 문자를 읽을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문자를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그 뜻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그래서 루나의 몸에 있는 문신을 처음 보았을 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 땅의 고귀한 생명을 위하여 불순한 악을 봉인하고 주변을 정화하노라’라고 새겨진 문신은 그 뜻 자체로도 성스러웠으니까.
카단은 대륙 공용어를 더듬거리면서 룬문자를 해석했다. 루나에게 공용어를 틈틈이 배웠음에도 ‘고귀한’이나 ‘불순한’ 등의 어려운 단어를 풀어내는 건 어려웠으나 루나는 그 뜻을 대강 알아들었다.
카단의 품에서 내려온 루나는 비석 가까이 걸어가 카단의 해석을 되뇌며 룬문자를 확인했다.
‘악을 봉인하고 주변을 정화하다니. 그럼 저주가 아닌 건가?’
이내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대다가 결국 눈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주가 아니었는데, 정말 좋은 뜻인데……!”
그런데 어째서 자신은 저주받은 아이로 불렸어야 했을까. 왜 주변 사람들은 제 곁에서 죽어 버렸을까.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고여 왔던 설움이 뜨거운 눈물로 흘러나왔다. 그 눈물이 뺨을 지나 흐를 즈음 추위에 얼어 하얀 서리로 변했다.
그런 루나를 묵묵하게 지켜보던 카단은 그녀를 다시 안아 올렸다.
“돌아가자. 가서 쉬자.”
벙어리장갑으로 눈물을 닦는 루나를 보는데 심장이 아려 미칠 것 같았다. 카단은 어서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이 장소는 루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렇게 돌아가려던 카단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수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카단은 고개를 홱 돌려 뒤를 살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길쭉한 전나무 사이로 수상한 그림자가 움직였다. 마수는 아니었다. 저것은 사람의 것이다.
깊은 숲에서 사람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걸 수상하게 여긴 카단은 허리띠에 꽂아 둔 단검을 뽑아 괴한을 향해 던졌다. 빠르게 날아간 단검은 괴한의 팔을 스치고 날아가 나무 기둥에 퉁! 소리를 내면서 박혔다. 보통은 겁에 질려 달아날 법도 하건만 오히려 괴한은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혹시 쿠르아 님? 쿠르아 님 아니세요?』
카단만큼이나 덩치가 커다란 괴한은 처음 보는 의복을 입고 있었다. 그가 읊는 외국어 또한 처음 듣는 종류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자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 거지?’
카단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상대를 경계했다.
“꺼져.”
『저, 기억 못 하시겠어요?』
“꺼지라고.”
카단은 괴한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그는 한 손으로 루나를 안은 후 다른 손으로는 검을 쥐었다. 원래대로라면 루나를 내려놓고 쌍검을 써야 했지만 루나를 함부로 내려놓을 수 없었다.
검을 맞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괴한은 상위 마수보다 강했다. 성가신 적수였다.
“꺼지라고 했다.”
카단은 흉흉한 살기를 뿜으며 괴한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위협적인 검풍이 괴한의 옷을 살짝 베어 내자 놀란 괴한은 그대로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저는 당신을 해칠 생각이 없습니다.』
괴한은 그대로 걸음을 물리면서 살의가 없음을 강조했다.
『지금은 놀라신 것 같으니 다음에 다시 인사드리지요.』
괴한은 조금 전 등장했던 전나무 숲으로 들어가더니 종적을 감췄다. 카단은 그가 사라진 방향을 한참 응시하다가 긴장한 어깨를 털썩 내려 두었다.
“방금 그 사람은 누구죠?”
카단의 품에 매달려 있던 루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집채만 한 마수를 마주할 때도 여유롭던 사내가 조금 전 괴한을 대할 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모른다. 하지만 위험해.”
우선 돌아가자. 카단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는 오두막에 도착할 때까지 루나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
* * *
오두막으로 돌아온 놀란 가슴을 추슬렀다. 카단은 루나에게 둘러 준 털 망토를 벗기고 그녀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것을 도왔다.
“목욕물을 데울 테니…….”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을 하려는데 루나가 와락 그의 품에 안겼다.
“루나?”
카단이 루나를 마주 안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루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저는 왜, 왜 미움받았던 걸까요.”
지금 루나는 저주받은 아이라고 천대받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북받치는 설움이 파도처럼 넘실대며 목구멍 위로 올라왔다. 흐윽. 루나는 참지 않고 그 설움을 조용히 토해 냈다.
카단은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가슴을 내어 주었다. 루나는 단단하고 너른 품을 파고들었다. 주인을 닮아 다정한 심장 소리가 그런 루나를 토닥이며 달래 주었다.
며칠간 루나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일이 잦아졌다.
카단은 그런 루나에게 쓸데없이 말을 걸지 않았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면 조용히 다가가 어깨를 안아 주고 그녀가 잠을 못 이루면 침대로 올라가 그녀의 등을 다독거렸다.
눈치 없는 몸이 한 번씩 발기할 때면 루나는 스스로 슈미즈를 벗고 카단 위에 망설임 없이 올라탔다. 서툰 허리 짓으로 카단의 음경을 삽입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으나 카단은 인내했다. 그녀가 뿌리 끝까지 삼키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카단이 알아서 움직였다.
그때마다 루나는 카단의 어깨를 깨물고 엉엉 울었다. 그리고 몇 번의 절정을 맞이한 후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것이 루나가 슬픔을 토해 내는 방식이었다.
카단은 오늘도 옆자리에 누워 잠이 든 루나를 가만히 내려다본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천천히 쓸었다. 루나가 남긴 귀여운 잇자국이 벌써 흐려지는 게 아쉬웠다. 루나의 슬픔이 남긴 자국이었지만 카단은 그것이 참 마음에 들었다.
카단은 주변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루나가 깨어나서 먹을 수 있도록 따뜻한 수프를 만들었다. 집안일을 마친 그의 이마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으나 그는 쉬지도 않고 사냥 준비를 시작했다. 숲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스노우베리도 따고 멧돼지를 잡아 와 구워 먹을 생각이다.
‘오늘도 귀찮은 놈이 따라붙으면 본때를 보여 줘야겠군.’
마수 게이트에서 만났던 괴한은 카단이 사냥을 나갈 때마다 귀신같이 제 앞으로 나타났다. 어제도 사냥을 나갔다가 이민족 복장을 한 사내와 마주쳤었다.
‘절 너무 경계하지 마세요. 제가 쿠르아 님의 집까지 찾아가면 절 더 경계하실 게 뻔해서 이렇게 숲속에서 기다리는 거라고요. 당신을 해칠 생각은 요만큼도 없습니다.’
상대는 그 말처럼 살기를 풍기지 않았다. 오히려 저를 알은체하며 반가운 기색만 내비칠 뿐.
‘정체가 뭔지 모르겠군.’
모든 게 수상했다. 저와 자꾸 대화를 시도하려는 미친놈도 그랬지만 자연스럽게 외국어를 알아듣는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억을 잃어버린 것과 관계있을까.’
사냥 준비를 마친 카단은 그 미친놈을 만나면 직접 물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조용히 오두막을 나섰다.
상념에 잠긴 채로 분주하게 걸음을 놀리느라 카단은 멀리서 누군가 이곳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촤악! 얼음장 같은 물이 얼굴로 쏟아졌다. 읏, 차가워! 루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서 콜록콜록 기침했다. 코로 물이 들어가는 바람에 눈물이 찔끔 흘렀다.
‘여긴 어디지?’
정신을 차린 루나가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자신은 마을 광장 한가운데 쓰러져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저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제물로 팔려 온 주제에 어떻게 살아남은 거죠?”
“지난번 찰스네 어미가 죽은 것도 숲의 주인이 분노해서 아닐까요?”
“올겨울 추위가 유독 심한 것도 그래요. 다 저 여자 때문이에요.”
“지난주엔 마수까지 마을 인근으로 내려왔던 것도요. 여덟 명이나 다친 것도 저 여자 탓이겠죠.”
“어머, 저길 봐요. 일어났네, 일어났어.”
마을 사람들이 루나를 보고 수군거리기 바빴다. 멍한 머리는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분명 오두막에서 자고 있었는데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물에 젖은 슈미즈가 겨울바람에 얼기 시작했다. 전신이 오들오들 떨렸다. 몸을 동그랗게 만 루나가 겁에 질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간 카단의 곁에서 너무 편안하게 생활해서일까. 이런 경멸의 시선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자, 자, 진정하시오!”
인파들 사이로 마을 촌장이 걸어 나와 지팡이로 땅을 내려쳤다. 소란스럽던 주변이 차츰 조용해졌다.
“올겨울, 우리 마을에 불운이 몰아친 것은 제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 저 노예 때문이라오!”
“맞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입을 모아 촌장의 주장에 동의했다.
“식량 창고가 약탈당한 것도 제물 때문에 부정 탄 것이지. 안 그렇소!”
“맞아요!”
“그래서 촌장의 이름으로 저 발칙한 제물을 벌하려 하오. 듣자 하니 저주받은 몸이라던데…….”
촌장의 기분 나쁜 시선이 루나의 젖은 슈미즈를 훑었다. 젖은 슈미즈 천이 속살을 비추며 루나의 문신을 은근히 드러냈다.
마을 촌장은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저 저주만 없었더라도 당장에 첩으로 삼았을 만큼 탐스러운 미인이었다.
역겨운 시선을 느낀 루나가 두 팔로 몸을 적극적으로 가렸다. 그것이 고까워서 촌장은 흥, 콧방귀를 뀌었다.
“마침 마수 토벌을 위해 왕궁 기사단이 근처에 머물고 있어 신고하였소.”
“옳습니다!”
“잘하셨어요, 촌장님!”
마을 주민들이 촌장에게 호응했다.
“전 죄가 없어요. 이 문신도 저주가 아니에요! 오히려 좋은 뜻이 담긴…….”
“닥쳐라!”
파랗게 질린 루나가 마을 주민들에게 호소했으나 촌장이 말허리를 끊었다.
촌장을 비롯한 모두가 그녀를 악운을 몰고 오는 존재로 취급했다.
루나는 그대로 주민들에게 끌려가 허름한 창고에 내던져졌다. 곡물 낱알과 지푸라기가 나뒹구는 흙바닥은 더러웠다.
“여기서 죽을 날이나 기다려라.”
촌장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창고 문을 닫았다. 그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좁은 문틈으로 촌장과 그 옆에 서 있던 마을 여인이 보였다. 촌장은 누런 이를 드러내면서 여인을 치하하고 있었다.
“수고했구나, 데이지. 저 발칙한 노예를 잡을 수 있었던 건 다 네 덕분이다.”
‘데이지라니?’
루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끼이익, 쾅! 소름 끼치는 경첩 소리와 함께 창고 문이 완전히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