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장. 숲의 제물 (2/11)

    

    

    제1장. 숲의 제물

    

    

    

    

    

    북쪽 변경을 지키던 드하임 가문에는 섬뜩한 예언이 내려오고 있었다.

    

    

    

    

    

    ‘드하임이 저지른 죄의 상징이 태어나리라.’

    

    

    

    

    

    드하임 가문의 조상이 북쪽 숲의 신비한 돌을 삼켜 버린 후 받게 된 예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언대로 온몸에 고대 룬문자가 새겨진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이건 저주가 틀림없어!”

    

    노예에게나 새겨지는 문신을 귀족이 타고나다니. 드하임 가문은 룬문자가 새겨진 아이를 저택에 가두고 내보이지 않았다.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아이의 이름은 ‘루나 드하임’. 아무도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아 그녀의 유모가 지어 준 이름이었다.

    

    루나는 생일조차 축하받지 못했다. 그녀의 말벗은 유모뿐이었으며 어두운 지하실에서 없는 사람처럼 숨죽여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아버지, 드하임 백작은 국경 너머 이누트 족과 내통하다가 왕에게 발각됐다. 이누트 족은 북쪽 숲 너머 얼음 땅에 산다던 야만인으로 왕국과 대립하는 세력이었다. 분개한 왕은 반역을 저지른 드하임 가문의 작위를 박탈하고 몰살했다.

    

    지하실에 갇혀 있던 루나가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기사들은 루나의 양팔을 붙들고 기사단장에게 끌고 갔다. 그녀는 질질 끌려가는 와중에 바닥에 쓰러진 처참한 시체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저 사람들이 내 가족이었구나.’

    

    한 번도 지하실에 찾아온 적 없는 가족의 얼굴은 참으로 낯설었다. 덕분에 가족의 죽음이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쳐다보던 기사단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가족의 시체를 보고도 침착하군. 드하임의 핏줄이 아닌가?”

    

    “혹시 몰라 북부 사교계에 수소문해 보았습니다만 저 여자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참 이상하군.”

    

    “하하, 단장님. 설마 귀족 영애가 지하실에 갇혀 있었겠습니까. 벌 받던 노예겠지요.”

    

    오랜 시간 지하에 갇혀 있던 여자라고 기사가 조사한 내용을 보고하였으나 기사단장은 달랐다.

    

    “저런 여자가 노예라고?”

    

    그럴 리가. 누더기를 걸친 것치고는 제법 반반한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전체적으로 색소가 옅은 여인이었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헝클어진 금발 사이로 보이는 단아한 이목구비와 묘한 분위기는 노예가 가지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루나의 얼굴을 살피던 단장의 시선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반듯한 빗장뼈 아래, 탐스럽게 여문 가슴이 해진 누더기 아래로 그 윤곽을 드러냈다. 군데군데 찢어진 누더기 사이로는 루나의 하얀 속살이 비쳤는데 좀 특이한 점이 있었다.

    

    “저건 뭐지? 문신 같은데.”

    

    탐욕스러운 단장의 눈빛이 찢어진 누더기를 더듬었다. 그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면서 루나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보려던 찰나, 기사 하나가 단장의 접근을 막았다.

    

    “조심하십시오, 단장님! 몸에 문신이 있는데 저주 같습니다.”

    

    “저주…… 문신?”

    

    단장은 루나의 속살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화들짝 놀랐다. 평범한 글자도 아니고 고대 룬문자로 쓰인 문신이었다. 미친 마법사와 마녀들이나 쓴다는 룬문자라니. 저것은 필시 저주가 틀림없었다.

    

    “제, 젠장, 하마터면 재수 옴 붙을 뻔했잖아!”

    

    단장이 꽥 소리를 지르자 놀란 루나는 흠칫 몸을 떨며 어깨를 움츠렸다. 단장은 루나에게 뻗었던 손을 더럽다는 듯이 털어 내면서 신경질을 부린 후 퇴장했다.

    

    그 후로 단장을 비롯한 기사들은 루나를 죽이기 꺼렸다. 아니, 손도 대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루나에게 손을 대면 저주가 옮는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저 여자는 어떡할까요, 단장님?”

    

    “황명에 따라 드하임의 핏줄을 모두 처형했으니 저주받은 노예 정도야 근처 노예상에게 팔아넘기면 되겠지.”

    

    그렇게 귀족 가문의 영애는 한순간에 노예로 전락했다. 하지만 루나는 슬프지 않았다. 노예상에게 헐값에 팔려 나가면서도 목숨을 부지했다는 사실에 안도했을 뿐.

    

    루나가 팔려 간 노예 상단은 드하임 영지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곳은 녹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나는 끈질기게 버텼다. 다른 귀족 영애였다면 진즉에 목을 매었을 테지만 루나는 달랐다. 저를 냉대하던 가문에서도 쓰레기 취급당하며 쥐 죽은 듯 살아남았는데 이까짓 게 어려울까.

    

    ‘오히려 지하에 갇혀 있을 때보다는 노예가 된 지금이 나아.’

    

    평생을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살아서인지 곁에 누군가 존재하는 지금이 좋았다. 그것이 노예든 노예상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사람이 눈에 보이면 반가웠고 말을 걸어 주면 더더욱 행복했다. 그래서 수치를 참고 버티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루나가 상단에 거의 적응했을 무렵, 상단주가 돌연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예상들은 루나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저 계집이 상단주님께 저주를 건 거 아냐?”

    

    “내 말이! 상단주가 저 계집을 보통 아꼈어? 계집을 한 번씩 방으로 불러 젖히더니 된통 당한 거라고.”

    

    “뭔가 불길해. 우리도 명줄 끊기기 전에 저 계집을 그냥 풀어 버리자.”

    

    “흠, 그냥 풀어 주긴 아쉬우니 제물로 파는 건 어때?”

    

    “제물?”

    

    “북쪽 숲 근처 마을에서 제사를 지낸다잖아.”

    

    “아아, 마수가 출현한다는 그 숲 말하는 거지? 낄낄, 좋은 생각이네.”

    

    그렇게 노예상들은 루나를 변방 마을의 제물로 팔아 버렸다. 정확히는 ‘숲의 주인’에게 신부로 바쳐지는 역할이었다.

            

       

    루나는 단장을 시작했다. 몸에 문자가 새겨진 루나를 아무도 씻기려 하지 않아서 그녀 스스로 씻고 옷을 입어야 했으나 루나는 만족했다. 죽기 전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호사스러웠다. 목욕을 마치자 젊은 마을 여인 하나가 그녀의 단장을 도와주었다. 그녀는 자신을 데이지라고 소개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이번 제물은 제가 되었을 거예요. 정말 고맙습니다, 흐윽.”

    

    루나의 입술에 붉은 가루를 발라 주던 여인이 울먹이며 말했다.

    

    죽음과 외로움은 늘 곁에 있던 것이라 익숙했지만 누군가의 걱정과 연민은 낯설면서도 포근했다. 루나는 그것만으로도 고마워서 데이지를 향해 방긋 미소 지었다. 그러자 데이지는 더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루나는 여인이 우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단장을 마친 루나는 하얀 면사포를 쓰고 숲 한가운데로 이동했다. 마차를 타고 한참 숲으로 들어가자 주변 나무보다 유독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루나를 그 나무 기둥에 꽁꽁 묶었다.

    

    추운 날씨에 얇은 드레스만 걸쳐서일까. 기껏 붉은 칠을 한 입술은 퍼렇게 질렸고 몸은 달달 떨렸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루나 앞으로 기다란 제단을 펼쳐 놓고 그 위에 각종 고기와 빵, 말린 과일 따위를 올렸다. 제사 준비를 끝낸 마을 촌장이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외쳤다.

    

    “숲의 주인이시여, 저희가 당신께 신부를 바치니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올겨울을 무사히 나게 해 주십시오.”

    

    제사는 짧았다. 마을 사람들은 곧 마수가 올 거라면서 헐레벌떡 떠나 버렸고 이곳엔 루나만 홀로 남아 있었다.

    

    ‘이젠 정말 죽는 건가.’

    

    루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남으세요, 아가씨!’

    

    

    

    

    

    어릴 적 저를 키우다 죽었던 유모가 그런 말을 남겼던 것 같은데. 이제 지쳐 버린 루나는 조용히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눈을 감았다.

    

    ‘오래 기다렸지, 유모? 내가 곧 갈게. 기다려.’

    

    남은 여한이랄 것이 없었다. 복작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잠도 자 보았고 음식도 나눠 먹어 보았다. 누군가와 실랑이도 해 보고 누군가는 저를 위해 울어도 주었다. 죽기 전에 예쁜 옷도 입어 보고 단장도 해 보았으니 이보다 좋을 것도 없었다.

    

    그때 눈밭을 서걱서걱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루나에게 점점 가까워졌다.

    

    마수라기엔 너무 가벼운 발걸음. 궁금할 법도 했지만 루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저 다가올 죽음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발소리는 근처에서 멈췄다. 와그작 쩝쩝. 그것은 제단에 차려진 음식부터 게걸스레 먹어 치웠다. 피부를 타고 소름이 오도도 돋았으나 루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숨을 죽였다.

    

    한참 후 식사를 마친 존재가 루나에게 다가왔다. 동시에 루나를 결박하던 밧줄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이제 잡아먹힐 거야.’

    

    루나는 온몸에 힘을 주고 바들바들 떨었다. 그다음 들려온 소리는 마수의 울부짖음이 아니었다. 인간의 목소리였다.

    

    “가.”

    

    낮고 서늘한 저음. 화들짝 놀란 루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사람인가? 상대가 사람인지 마수인지 식별하는 데는 3초 정도가 걸렸다. 털가죽을 걸친 거대한 덩치,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이 풍기는 분위기는 육식 동물처럼 위압적이었다.

    

    루나는 눈동자를 파르르 떨면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사내는 그 시선을 한참 마주하더니 손을 휘휘 저었다.

    

    “가.”

    

    몸을 돌린 사내는 다시 제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준비한 자루에 남은 음식을 쓸어 담으며 설명을 보탰다.

    

    “마을 안 돼. 잡힌다. 서쪽으로 가. 다른 마을 나온다. 그쪽 길, 마수 없다.”

    

    사내는 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음식을 챙긴 뒤 자루 입구를 가죽끈으로 둘둘 묶는 손길은 능숙했다. 볼일을 마친 사내는 루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해 지면 춥다. 눈 내려. 못 움직인다. 서둘러.”

    

    사내는 가만히 서 있는 루나를 향해 몇 마디를 덧보탠 뒤 숲 어딘가로 사라졌다.

    

    루나는 사라진 사내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른 마을로 가라고?’

    

    하하. 괜스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새로운 곳으로 가 봤자 저주받은 인간이라고 배척받을 것이 뻔한데.

    

    ‘고독 속에 살 바에야 준비된 죽음이 나아.’

    

    이젠 살아남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얼어 죽든, 마수에게 잡아먹히든, 차라리 이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는 게 나으리라.

    

    루나는 무릎을 끌어안고서 눈을 감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마수에게 잡아먹히기보다 얼어 죽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빠르게 찾아왔다. 빛 한 점 없는 숲에 사박사박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루나는 손과 발에 감각이 없는 것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 이 정도면 평온한 죽음이었다.

    

    

    

    

    

    * * *

    

    

    

    

    

    ‘따듯해.’

    

    죽어서 천국에라도 온 걸까. 기분 좋은 온기가 온몸을 감쌌다.

    

    그다음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고요하게 울려 퍼졌고 그 사이로 고소한 음식 냄새가 흘러들었다.

    

    루나는 자신이 꿈꿔 오던 작은 평온을 만끽하면서 저를 감싼 온기를 파고들었다. 자신을 품어 주는 체온이…….

    

    ‘체온?’

    

    루나는 번쩍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단단한 사내의 가슴팍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두툼한 대흉근을 지나 반듯한 쇄골, 단단한 목, 덥수룩한 수염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아무렇게나 길러 헝클어진 검은 머리 사이로 사내의 오뚝한 코와 도톰한 입술이 보였다.

    

    아까 자신을 풀어 주었던 그 사내였다. 그리고 루나는 그 사내의 팔을 베고 있었다.

    

    놀란 루나가 사내의 가슴팍을 밀어 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얻어맞은 것처럼 전신이 욱신대는 바람에 다시 아래로 픽 쓰러져야 했다.

    

    그때 루나가 자신의 팔을 들어 보았다. 손가락부터 팔등까지 약초 물을 먹인 붕대가 둘둘 감겨 있었다. 반대편 팔도 마찬가지였다.

    

    “정신, 차렸군.”

    

    사내는 피곤한 듯 눈을 비빈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늘 긴팔만 입느라 새하얬던 루나와 달리, 햇볕에 탄 사내의 피부는 건강한 색을 띠고 있었다.

    

    사내는 함께 덮고 있던 이불을 들어 루나의 몸을 가려 주었다. 짐승의 털가죽을 이어 붙여 만든 이불이 피부에 닿는 부드러운 촉감은 생생했다.

    

    그제야 루나는 자신이 알몸이었음을 깨달았다.

    

    살려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가 건넨 이불로 몸을 가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알몸을 보인 것보다 온몸에 새겨진 문신을 들켰다는 사실이 더 부끄러웠다. 하지만 루나의 우려와 달리, 사내는 그녀의 문신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얼었다. 그래서 녹였다.”

    

    그는 얼어 죽을 뻔한 루나를 위해 체온을 나눠 주었다는 설명을 짧은 문장으로 표현하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덥수룩한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사심 하나 없이 그저 말갛기만 했다.

    

    “혹시 제 옷은…….”

    

    루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바지만 걸치고 있던 사내는 침대에서 일어나 루나에게 커다란 셔츠를 건넸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의 상체에 완벽하게 자리 잡은 근육이 꿈틀댔다.

    

    “네 옷, 망가졌다.”

    

    드문드문 기워진 낡은 셔츠는 사내의 것이었다. 루나는 화로 앞에 널린 하얀 드레스를 확인했다. 피가 배고 찢어져 넝마가 되어 있었다.

    

    ‘정신을 잃었을 때 들짐승이 달려들었나?’

    

    팔다리에 긁힌 흔적만 있을 뿐 살점은 뜯기지 않은 걸 보면 저 사내의 덕분이겠지. 혹독한 날씨 속에서 먹잇감을 두고 순순히 퇴장할 맹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째서 날 오두막으로 데려온 걸까.’

    

    이상한 문신이 있는 자신이 꺼림칙했을 것이 뻔했다. 루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기피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사내가 건넨 셔츠를 입었다. 품이 큰 셔츠는 루나의 허벅지 절반을 가려 주었고 소매는 한 뼘이 넘게 남았다.

    

    “그…… 셔츠가 너무 크네요. 하하.”

    

    루나가 난처하게 웃자 사내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다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알몸이었을 때는 미동도 없던 사내가 고작 옷 입은 모습에 당황하는 것이 의외였다. 그는 화로에 올려 둔 묽은 수프를 나무 그릇에 떠서 가지고 온 뒤 루나에게 내밀었다.

    

    “먹어. 낫는다.”

    

    먹어야 낫는다는 말인가? 루나는 얼떨결에 수프 그릇을 건네받았다. 루나가 수프를 가만히 쳐다만 보자 사내는 기다란 루나의 소매를 차분히 걷어 주더니 수프를 떠먹여 주기 시작했다.

    당황한 루나는 사내가 내민 수프를 두어 번 받아먹다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유모가 죽은 이후로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는 건 처음이야.’

    

    순간 심장과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대로라면 대성통곡을 할 것 같아서 루나는 사내의 시선을 피한 채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주세요. 제가 스스로 먹을 수 있어요.”

    

    “응.”

    

    사내가 머뭇머뭇 스푼을 넘겼다. 그리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루나의 눈동자를 힐끗 살핀 뒤 조용히 오두막을 나섰다. 곧 창문 너머로 장작 패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설마 나를 배려해 준 건가?’

    

    루나는 뿌연 창문 너머로 비치는 남자의 실루엣을 보면서 수프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참 신기한 수프였다. 어제까지 죽고 싶었던 마음이 따듯한 수프 한 그릇에 날아가 버렸으니 말이다.

    

    ‘특별히 넣은 재료도 없는데 맛있어. 저 사람, 요리를 엄청 잘하는구나.’

    

    고소하면서도 적당히 진한 수프 맛이 입 안을 계속 맴돌았다. 동시에 글썽이던 눈물도 목구멍 아래로 차분히 내려갔다.

    

    안정을 되찾은 루나는 천천히 오두막을 둘러보았다. 따듯한 오후의 햇살이 내리쬐는 낡은 창문, 반듯한 선반과 손때가 탄 화로, 낡았지만 깨끗한 옷과 침구, 벽에 줄 맞춰 걸려 있는 말린 햄과 과일.

    

    사내의 깔끔한 성격이 돋보이는 오두막은 아늑하면서도 포근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루나는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서 가만히 남자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가 장작 패는 소리와 지붕 처마에 쌓인 눈이 후두둑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만이 고요한 실내를 규칙적으로 울렸으나 지루하진 않았다.

    

    한참 뒤, 일을 마친 사내가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장작 한 무더기를 화로 옆에 내려 둔 사내는 루나에게로 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크고 두툼한 손바닥 위로 작고 붉은 열매들이 보였다. 바로 겨울에만 열린다는 달콤한 스노우베리. 이제 막 따 왔는지 탱글탱글 윤기가 도는 열매가 풋풋한 향기를 내뿜었다.

    

    “먹어.”

    

    “당신은요?”

    

    “먹었다. 손 내밀어.”

    

    루나는 무심코 한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두 손을 내밀었다. 사내에게는 한 줌이었던 스노우베리를 받기 위해서는 두 손을 모아 받아야 했다. 사내는 자신의 손과 루나의 작은 손을 번갈아 보다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루나의 손 위로 스노우베리가 쏟아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넘겨주었다.

    

    “감사해요.”

    

    “…….”

    

    루나가 스노우베리를 다리 위에 조심히 내려놓으며 인사했으나 사내는 별다른 대답 없이 그녀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 시선이 난감해서 루나는 닭살이 오돌토돌 솟은 팔을 문질렀다. 방금 사내가 출입문을 열면서 들어온 찬 바람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사내는 몸을 홱 돌리더니 화롯가로 가서 불의 세기를 살폈다. 쌓여 있던 장작을 화로에 던져 넣을 때마다 작아지던 화롯불이 활활 타올라 오두막 전체를 뜨끈하게 데웠다. 아마도 자신이 추위를 탄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그런 그의 넓은 등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또 한 번 눈물샘이 시큰거렸다.

    

    ‘참 상냥한 사람이네.’

    

    오랜만에 느껴 보는 호의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했다. 허락만 떨어진다면 이 따스한 공간에 최대한 머무르고 싶을 만큼. 그래서일까. 저도 모르게 충동적인 질문이 튀어 나갔다.

    

    “저, 죄송하지만 이곳에서 며칠만 지내도 될까요?”

    

    “…….”

    

    사내는 고개만 홱 돌려 루나를 응시했다. 그의 덥수룩한 머리칼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그가 정확히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당황한 것이 틀림없었다.

    

    “고, 공짜로 있진 않을게요. 일을 주세요. 이래 봬도 여러 가지 일을 도울 수 있어요.”

    

    루나는 노예일 적 배웠던 여러 가지 일들을 나열했다. 바느질, 청소, 빨래, 식재료 정리……. 그리고 저의 얼굴을 유독 좋아하던 상단주에게 강제로 수음까지 배웠었으나 그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잠자리만 마련해 주신다면 시키는 건 다 할게요.”

    

    뭐든지 다. 그 말대로 루나는 모든 걸 각오한 기세로 선포했다. 다소 충동적인 결정이었으나 후회되진 않았다. 어차피 죽었을 몸뚱이, 자신에게 작은 온정을 건넨 사내를 위해 쓴다면 너무도 보람차리라.

    

    그런 루나의 말을 가만히 듣던 사내는 다시 화롯불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생각에 잠긴 채로 장작 두어 개를 화로에 넣은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루나가 걸터앉은 침대를 가리키더니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거기, 침대, 네 자리.”

    

    허락은 담백했다. 루나가 감사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자 그는 쑥스러운 듯 입술을 길게 늘였다.

    

    “나는 사냥 간다. 밤에 와. 먼저 자.”

    

    그는 흐릿하게 비치는 창밖의 달을 가리키며 자신의 귀가가 늦다는 걸 한 번 더 강조했다. 그리고 맨몸 위로 가죽끈으로 된 하네스를 가슴과 허리에 두른 뒤, 벽에 걸려 있던 칼 두 자루를 찬 후 오두막을 나섰다.

    

    ‘밖이 추울 텐데 일부러 상의는 안 입고 나가나? 그게 아니라면…….’

    

    루나는 바지만 걸치고 나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자신이 걸친 셔츠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한 벌뿐인 옷을 저에게 양보한 것 같았다.

    

    

    

    

    

    * * *

    

    

    

    

    

    사내는 그가 말한 대로 한밤중에 돌아왔다. 침대 위에 쭈그려 앉아 꾸벅꾸벅 졸던 루나는 문이 열리면서 쌩 들어온 겨울바람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다, 다녀오셨어…… 꺅!”

    

    루나는 말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냅다 튀어나오던 비명을 삼켜야 했다. 온몸에 마수의 피를 뒤집어쓴 사내를 알아보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사내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쓰윽 닦더니 검은 피가 묻어난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는 그대로 다시 오두막을 나가 버렸다.

    

    ‘어떡하지? 내가 너무 놀라는 바람에 나가 버린 걸까?’

    

    당황한 루나가 창밖을 살폈다. 사내는 바깥에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낡고 커다란 양동이에 눈을 가득 쓸어 담은 후 모닥불에 눈을 녹여 목욕물을 만들었다.

    

    데운 물이라지만 한겨울 밤공기가 차가울 텐데 그는 기침 한번 하지 않고 묵묵하게 몸을 닦았다. 그가 닦아 낸 핏물은 작은 줄기를 이루어 하얀 눈밭 위로 검붉게 흘러 다녔다.

    

    상체를 모두 닦은 사내가 이번엔 피 묻은 바지를 훌렁 벗어 내렸다. 화들짝 놀란 루나는 그제야 시선을 돌리고 재빨리 집 안 정리를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피를 씻어 내는 그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작은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심장이 이토록 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감기라도 걸릴 것 같아 불안해서겠지. 루나는 반듯한 이불을 괜스레 탈탈 털어 내면서 얼굴을 붉혔다.

    

    사내의 목욕은 길지 않았다. 빨래까지 마친 사내는 다시 오두막으로 들어왔다. 그때 그의 몸뚱이로 보드라운 것이 와 닿았다. 루나가 털 이불을 들고 와 그의 몸을 감싸 준 것이다.

    

    “바, 밖이 추워요. 어서 두르세요. 감기 걸려요.”

    

    사내는 차마 저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있는 루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붉게 물든 귀 끝이 방금 따 온 스노우베리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그의 시선이 루나가 건넨 털 이불로 천천히 이동했다. 이불을 덮어 주는 그녀의 손은 달달 떨리고 있었다.

    

    “난. 안 걸려. 감기.”

    

    사내는 더듬더듬 대답한 후 털 이불을 다시 루나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나체 상태로 실내를 가로지른 뒤 구석에 놓인 작은 바구니를 뒤적거렸다. 그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촘촘하게 짜인 등 근육이 꿈틀거렸고 미처 닦아 내지 못한 물기는 움푹 팬 척추 기립근을 따라 도르르 흘러내렸다.

    

    완벽한 사내의 몸은 조각상처럼 신성하기도 했으나 까무잡잡한 피부 때문인지 눈에 띄게 거대한 성기 때문인지 외설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사, 사람이 저렇게 클 수도 있나?’

    

    루나는 사내의 다리 사이를 보고서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보았던 남자는 대부분 한 손으로 잡고 남았을 크기였었으나 저건 두 손으로 쥐고도 남을 만큼 길었다.

    

    ‘입에 넣는 것도 벅차겠어.’

    

    사내에게 이곳에 머물기를 부탁하면서 루나는 최악의 최악까지 각오한 상태였다. 사내들이 원하는 건 똑같을 테니 어차피 죽고 나면 썩어 문드러질 몸뚱이를 그에게 내바칠 생각이었다.

    

    저게 들어갈 수 있을까. 루나는 작게 입을 벌렸다 닫기를 반복하면서 턱 근육의 긴장을 풀었다.

    

    하지만 사내는 루나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 없는 사람처럼 중요 부위를 가릴 생각을 딱히 하지 않았다. 그는 바구니 속에서 기다란 면포를 찾아내 치마처럼 허리춤에 둘렀다. 그리고 입을 오물대는 루나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린 뒤 침대를 가리켰다.

    

    “자라.”

    

    “네, 네? 아…… 네.”

    

    이제 준비하라는 건가? 함께 밤을 보내자는 뜻이겠지. 루나는 침대와 그를 번갈아 응시하면서 쭈뼛쭈뼛 침대에 걸터앉았다.

    

    ‘입을 먼저 맞추려나? 아니면 곧장 그걸 들이댈까?’

    

    루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서 사내를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사내는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주저앉는 소리와 함께 일정한 숨소리가 들렸다. 루나는 실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맨바닥에 드러누운 사내는 이불도 덮지 않은 채로 반듯하게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정말 그냥 자는 거야? 아무것도 안 하고?’

    루나는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턱 운동까지 하면서 행위를 준비했던 스스로가 민망하여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런 루나의 눈길에도 사내는 돌처럼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화로의 붉은 불빛이 그의 건장한 몸 위로 일렁거렸다. 근육의 굴곡에 그림자가 드리워서일까. 그의 몸은 낮에 보았던 것보다 짐승처럼 사나워 보였다.

    

    ‘객식구인 내가 바닥에서 자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말을 걸어 볼까 했지만 긴장했는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루나는 사내를 한참 바라보다가 사내가 잠이 든 듯 보이자 침대에 조용히 누웠다. 내일은 자신이 바닥에서 자야겠다고 다짐하면서 털 이불을 목 아래까지 끌어 올렸다.

    

    ‘이렇게 편한 하루를 보내도 되는 건가?’

    

    정말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 걸까. 루나는 사내의 호의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고민하면서 눈을 감았다. 갚지 못할 호의가 빚처럼 쌓여 불편하리라 생각했건만, 신기하게도 기분이 편안했고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루나는 부채를 느끼는 사람답지 않게 수마에 빠져들었다.

    

    

    

    

    

    * * *

    

    

    

    

    

    달가닥달가닥. 나무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에 눈을 떴더니 먼저 일어난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젯밤과 달리 사내는 깔끔한 셔츠와 조금 더러운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가뜩이나 신세 지는 처지에 늦잠까지 자 버리다니. 루나는 재빨리 상체를 일으켜 그에게 인사부터 건넸다.

    

    “안녕하세요, 일어나셨어요?”

    

    오랜만에 맞이한 숙면에 몸이 개운했다. 루나는 기지개를 쭈욱 켜다가 붕대를 칭칭 감아 둔 다친 팔다리를 응시했다. 어떤 약초를 쓴 것인지 신기하게도 호전이 빨랐다. 깊이 잠들었던 것도 이 약초와 관련이 있을까. 루나는 자신의 팔다리를 확인한 후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거기 있어.”

    

    사내는 방금 끓인 스튜를 그릇에 담아 루나에게로 걸어왔다. 그가 그릇을 내밀자 루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스튜를 받은 후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죄송합니다. 더 일찍 일어났어야 했는데.”

    

    “식사, 내가 해. 넌 자. 다쳤어.”

    

    식사는 자신이 차릴 테니 다친 너는 좀 더 쉬라는 말. 짧게 끊어지는 문장에서도 사내의 따스함이 느껴졌기에 루나는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사내의 뒤쪽으로 노란 종이에 돌돌 만 고기와 햄, 밀가루, 옷감 따위가 놓여 있었다.

    

    ‘근처 마을로 가서 장을 봐 온 건가? 마을까지 엄청 멀 텐데. 게다가 이만한 식료품을 마련하려면 돈도 많이 들었을 거야.’

    

    스튜에는 신선한 채소와 고기가 푸짐하게 들어 있었다. 혹시 자신 때문에 무리한 것은 아닌지 걱정하면서 루나는 사내를 힐끔거렸다. 작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하던 사내는 그런 루나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창밖을 턱짓했다.

    

    “마수 사냥. 돈 받는다. 많이.”

    

    “어제 마수 사냥을 다녀오신 거예요?”

    

    “응.”

    

    사내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작은 돌을 꺼내 루나에게 던져 주었다. 루나는 휙 날아온 돌을 허공에서 낚아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붉고 투명한 돌은 에메랄드처럼 반짝거렸다.

    

    “세상에, 예뻐라. 이거 보석이에요?”

    

    “아니. 마수 눈깔.”

    

    “꺅!”

    

    루나는 저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걸 힘껏 던져 버렸다. 날아가는 눈알을 허공에서 가볍게 낚아챈 사내는 놀란 루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어라? 지금……. 루나는 놀란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사내를 응시했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입꼬리가 분명 비쭉 올라가 있었다.

    

    ‘언뜻 보이는 얼굴이 단정해 보였어.’

    

    덥수룩한 머리칼을 정리한다면 분명 지금보다는 훨씬 생활하기도 편하고 남 보기도 좋으리라.

    

    루나는 사내의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해 주고 싶었다. 노예 상단에 있을 적, 팔려 갈 노예의 머리를 다듬는 일을 맡았던 덕분에 머리 손질도 꽤 자신 있었다.

    

    “머리, 답답하진 않으세요? 제가 깔끔하게 잘라 드릴 수 있어요.”

    

    “…….”

    

    루나의 말에 사내는 제 머리칼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스튜를 그릇째 들이켠 그는 말없이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나 방금 실수한 건가?’

    

    루나는 부엌에서 식재료를 정리하는 사내를 지켜보며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소매를 걷어붙인 뒤 물 양동이 앞으로 이동했다. 제가 먹은 그릇을 씻을 생각이었다.

    

    그때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그대로 손목이 잡혔다. 등 뒤로 바싹 다가온 사내가 붕대를 감아 둔 루나의 손이 물에 닿지 않도록 잡아당긴 것이다.

    

    “너, 다쳤다.”

    

    “제가 먹은 거라도 정리하고 싶어서요. 뭐든 하고 싶어요.”

    

    목숨을 빚지고 얹혀살게 된 입장이니 작게라도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짐은 되기 싫었다. 만약 이곳이 노예 상단이었다면 자신은 진즉에 더 잔인한 암시장으로 팔려 나갔을 것이다. 고개를 푹 숙인 루나는 쓸모를 증명할 방법을 찾아내려 노력했다. 사내는 주먹을 꽉 쥔 루나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잡고 있던 손목을 끌어와 테이블에 앉혔다. 그는 선반 구석을 뒤적여 작은 책과 필기구를 꺼내 온 뒤 루나에게 건넸다.

    

    “너, 글자 알아?”

    

    “네? 아, 네. 알고 있어요.”

    

    “나, 가르쳐.”

    

    맞은편에 털썩 앉은 사내는 작은 책을 턱짓했다. ‘어린아이를 위한 대륙 공용어 입문서’. 루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글을 가르치는 것은 자신 있었다. 지하실에 갇혀 살 적에도 산처럼 쌓여 있던 책을 수십 번씩 읽으며 지루한 시간을 버텼었으니까.

    

    “최선을 다할게요!”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생기다니. 루나는 너무도 기뻤다. 웃음이 멈추지 않고 입꼬리에 걸렸다.

    

    사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가만히 루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깊은 숲속에 쌓인 눈 같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을 모아 사람으로 빚어내면 저 여자와 똑같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의 미소도 햇볕이 내리쬔 눈밭처럼 반짝이는 걸지도 몰랐다.

    

    사내가 루나의 얼굴을 제대로 인지한 것은 지금이 두 번째였다. 잠시 머물다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크게 눈여겨보지 않았었건만, 이제는 잊지 못할 얼굴이 된 것만 같아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불편했다. 사내는 커다란 손으로 목덜미를 쓱쓱 긁었다. 괜스레 목덜미가 간지러워지고 숨이 가빠서 억지로 시선을 끌어 내려 책을 응시했다.

    

    “저, 혹시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이름?”

    

    “네. 글을 시작할 때에는 가장 먼저 자기 이름부터 익히거든요.”

    

    “괴물.”

    

    사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괴상한 단어를 언급했다.

    

    “……네?”

    

    “사람들, 그렇게 부른다.”

    

    정확히는 마수 잡는 괴물 사냥꾼, 괴물 숲지기. 마을 사람들은 돈을 받고 마수를 사냥해 주는 사내를 그렇게 불렀다.

    

    사내는 그것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애초에 저를 부를 가족이나 친구가 없어서 이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뿐더러 뭐라고 부르든 알아듣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무덤덤한 사내와 달리, 루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단 이틀만 보아도 알 것이다. 이 사내가 얼마나 성실하고 성품이 따듯한지를. 그런 그를 불쾌한 호칭으로 부르는 마을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이름이 마음에 드나요?”

    

    “안 했다, 생각.”

    

    “주제넘지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이름을 지어 드려도 될까요?”

    

    “응.”

    

    사내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객식구가 된 그녀가 자신을 부를 특별한 호칭이 필요했던 거겠지. 그녀가 머물 때까지만 새 이름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카단’ 어떠세요?”

    

    카단은 루나가 지하실에 갇혀 있을 적에 읽었던 동화 속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주인공은 거대한 불의에 맞서 신성한 숲을 지키는 용감한 전사였다. 불행에 빠진 공주를 구해 결혼하는 해피엔딩 속 용사는 사내처럼 다정하고 따듯한 인물이었다.

    

    “카, 단?”

    

    “네. 용맹한 전사를 뜻해요.”

    

    “응.”

    

    카단. 카단. 사내는 낯선 이름을 작게 중얼거리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단’이 자꾸 ‘든’으로 발음이 되는 게 부끄러워서 몇 번을 더 연습해야 했다.

    

    “카단은 이렇게 써요.”

    

    루나는 대륙 공용어로 종이에 그 이름을 적어 내렸다. 카단이 된 사내는 진지한 표정으로 삐뚤빼뚤 그 글씨를 따라 쓰기 시작했다. 쓴다기보다 그리는 것에 가까운 손짓. 상대적으로 작은 테이블에 앉아 상체를 수그리고 작은 종이에 매달린 모습이 재주를 부리는 곰 같아서 루나는 몰래 미소 지었다.

    

    뚝. 그때 카단의 연필심이 부러졌다. 처음 글자를 쓰느라 긴장했는지 연필을 너무 세게 쥔 모양이다.

    

    “괜찮아요. 처음엔 누구나 다 그래요.”

    

    루나는 주방 선반에 있던 작은 나이프를 가져와 능숙하게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사내는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루나가 건넨 연필을 받아 들었다. 그는 뾰족한 연필심을 보고서 다시 한번 감탄을 흘렸다.

    

    “한번 다시 써 볼까요, 카단?”

    

    “응.”

    

    수줍게 대답한 사내는 ‘카단, 카단’ 하고 느릿하게 중얼거리면서 이름을 써 내려갔다.

    

    루나는 사내가 이름을 모두 적을 때까지 테이블에 턱을 괴고 편안하게 기다렸다. 연필이 종이 위를 사각거리는 소리, 창문으로 비스듬히 내려오는 아침 햇살과 적당한 온기를 전하는 화롯불. 그저 존재만으로 듬직한 사내.

    

    책에서 보았던 ‘평안’이라는 단어가 이런 뜻이었구나. 루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후 눈가를 훔쳤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평화가 너무도 감격스러워서 자꾸만 눈가에 열이 올랐다.

    카단은 부지런한 사내였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는 규칙적인 일상을 살았다. 루나 또한 그를 돕고 싶었으나 카단이 거절했다. 루나는 한 걸음 뒤에서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카단이 장작을 팰 때면 창가에 앉아 그의 도끼질을 구경했다. 작은 수건으로 김 서린 창문을 동그랗게 문지르면 흐릿한 배경 속에서 그만이 또렷하게 맺혔다.

    

    그가 얼음 굴로 지어 둔 창고에서 식자재를 꺼내면, 루나는 그의 털 망토를 돌돌 두르고 마당에 쌓인 눈을 뭉쳐 눈 오리를 만들었다. 손에 두른 붕대가 젖을 때마다 카단은 새 붕대로 갈아 주었다. 그는 손을 너무 차게 두지 말라는 조언만 남길 뿐 그녀가 눈을 가지고 노는 것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가 요리를 시작하면 루나는 나무 식기를 테이블에 놓았고 그가 걸레로 바닥을 닦으면 루나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그가 바구니를 들고 외출하면 루나는 침대에 쪼그려 앉아 그를 기다렸다. 그가 채소와 버섯이 수북한 바구니를 들고 귀가하면 루나는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카단 씨.”

    

    루나의 인사에 카단이 화답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말없이 루나를 잠깐 응시하다가 부엌일을 했다.

    

    하지만 루나는 카단이 인사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낯설어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자신이 인사를 할 때마다, 덥수룩한 머리 아래로 보이는 새까만 눈동자는 평소보다 부드러운 빛을 띠었으니까.

    

    그렇게 열흘이 지났다. 루나는 빠르게 회복했고 드디어 붕대를 풀게 되었다. 루나가 팔에 둘둘 말려 있는 붕대를 풀기 시작하자 카단은 루나에게 칼을 쥐여 준 뒤 오두막을 나가서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며칠 전만 같으면 카단이 직접 붕대를 풀어 줬을 텐데.’

    

    알몸이었던 자신을 끌어안고 잤음에도 저를 여자로 보는 기색이 조금도 없던 사내였다. 그런 그가 언제부터인지 묘하게 자신과 거리를 벌리는 것 같았다.

    

    ‘내가 너무 예민해졌나? 카단이 다 받아 줘서 어리광이 늘었을지도 모르겠네.’

    

    루나는 팔과 다리에 둘둘 만 붕대를 풀었다. 그런데 옆구리 긁힌 상처를 동여맨 붕대 하나가 잘 풀리지 않았다.

    

    ‘매듭이 등 뒤에 있어서 풀기가 불편해.’

    

    한참을 낑낑대던 루나는 카단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예전 같으면 맨살 위로 새겨진 문신을 감추려고 애를 썼겠지만, 카단은 이런 저를 편견 없이 대해 주었기에 그 앞에서 문신을 보일 용기가 났다. 루나는 벗어 둔 셔츠로 가슴 앞을 가린 뒤 창문을 열고 카단을 불렀다.

    

    “저기, 카단!”

    

    쿵, 콰직! 커다란 도끼로 장작을 패던 카단이 땀을 닦으며 루나를 돌아보았다.

    

    “잠시 이쪽으로 와 주실래요?”

    

    루나가 손짓하자 그는 도끼를 대충 던져두고 루나에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셔츠로 가슴만 겨우 가린 모습을 보곤 걸음을 잠시 주춤거렸지만 그녀의 부름을 거절하진 않았다.

    

    “방해해서 정말 죄송해요. 이거 매듭 좀 풀어 줄 수 있으신가요?”

    

    루나는 창문을 등지고 서서 매듭이 있는 부분을 그에게 보였다. 카단은 커다란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풀기를 반복하다가 천천히 손을 올렸다.

    

    긴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는 유독 희고 가늘었다. 그의 시선은 그곳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말라서 도드라진 루나의 척추뼈를 따라 고대어로 새겨진 붉은 문신이 늘어져 있었다.

    

    새하얀 피부와 붉은 문신이 참으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던 때, 손이 움찔 떨렸다. 자꾸만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찡그린 카단은 한 손으로도 간단하게 끊어 낼 매듭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풀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의 시선은 루나의 새하얀 목덜미와 부드럽게 이어지는 어깨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점점 아래로 내려가던 시선은 잘록한 허리선에 머물렀다. 힘을 주면 저 허리가 부러지겠지, 하고 생각하던 때.

    

    “카단? 풀기 힘든가요? 칼이 필요해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게 신경 쓰였는지 루나가 등 뒤에 있던 카단을 부르면서 단검을 건넸다.

    

    “아, 아니.”

    

    깜짝 놀란 카단은 그만 손에 힘을 꽉 주고 말았다. 찌익. 천천히 풀리던 매듭의 모가지가 단번에 똑 떨어져 나갔다. 가슴 아래를 감싸던 붕대는 느슨해지더니 아래로 툭 떨어졌다.

    

    “고마워요, 카단. 덕분에 엄청 개운해요.”

    

    루나는 수줍게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카단은 고장 난 인형처럼 두 팔을 허공에 퍼덕퍼덕거렸다. 카단? 루나가 그의 이상행동을 의아해하자 그는 창문에서 두어 발짝 멀어지며 뒷걸음질 쳤다.

    

    “괜찮아요, 카단?”

    

    루나가 그를 불렀으나 카단은 장작을 패던 장소로 빠르게 돌아갔다. 그의 걸음은 다리가 불편한 사람처럼 엉거주춤했다.

    

    

    

    

    

    * * *

    

    

    

    

    

    그날 오후, 카단은 인근 마을에서 간단하게 장을 봤다. 멀찍이 그 모습을 보던 마을 사람들은 수군대기 시작했다.

    

    “저 괴물이 요즘 우리 마을에 자주 오는 것 같지?”

    

    “그러네. 평소보다 음식을 많이 사 간다던데.”

    

    “게다가 아까는 양장점에 들러서 여자 드레스도 샀다며? 허연 걸로다가.”

    

    “정말? 어디서 몰래 여자를 납치한 거 아냐?”

    

    “윽, 소름 돋아! 숲에 출몰하는 마수보다 저 괴물 사냥꾼이 더 무섭다니까. 저 덩치 좀 봐. 정말이지 괴물이야, 괴물.”

    

    마을 사람이 몸서리를 치자 근처를 지나가던 카단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 마을 사람을 빤히 응시하면서 제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괴물 아니다. 카단이다.”

    

    “지, 지금 저 괴물이 나한테 말을 건 거야?”

    

    마을 사람은 사색이 된 얼굴로 옆 사람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겁에 질린 옆 사람은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카단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면서 제 이름을 한 번 더 반복했다.

    

    “카단이다. 내 이름.”

    

    “호, 혼자서 마수를 때려잡는 게 괴물이지! 그게 어떻게 사람이냐?”

    

    마을 사람은 몸서리를 치며 그를 끝까지 괴물이라고 부른 뒤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카단은 그 모습을 담담하게 쳐다봤다. 그가 ‘괴물’이라고 부른 것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지만 여자가 지어 준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은 서운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도 이름이 있을 텐데.’

    

    문뜩 카단은 그녀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 이름을 물어본 적이 없었다. 저를 쳐다보던 여자의 연노랑 눈동자와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떠올리면서 카단은 서둘러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도착하면 그녀가 ‘안녕하세요, 카단 씨.’ 하고 인사하겠지. 그러면 그녀의 이름을 물어봐야겠다. 그 이름은 분명 그녀의 미소처럼 반짝이는 맛이 날 것이다.

    

    

    

    

    

    * * *

    

    

    

    

    

    “루나라고 불러 주시면 되어요.”

    

    루나는 이름을 말하면서 뺨을 붉혔다. 카단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말캉거릴 것 같은 루나의 뺨을 손가락으로 살짝 만져 보려다가 손을 내렸다. 요즘 그녀와 닿을 때마다 아랫배에 자꾸만 피가 몰려서 곤란했다.

    

    카단은 억지로 루나에게서 시선을 떼어 낸 뒤 그녀의 뒤를 살폈다. 자신이 마을에 다녀온 사이, 그녀가 해진 옷을 손보았는지 반짇고리와 옷들이 바닥에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끼니도 매일 만들어 주시고 청소나 빨래도 혼자서 하시잖아요. 할 일이 없으니 이런 거라도 해 놓을까 해서……. 성가시게 했다면 죄송해요.”

    

    루나는 늘어놓았던 옷가지를 주섬주섬 주워 정리했다. 사내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마을에서 물건을 담아 온 커다란 자루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옷 한 벌을 꺼내 루나에게 말없이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루나는 카단이 건넨 옷을 펼쳐 보았다. 새하얀 무명천으로 만든 단출한 드레스. 루나를 위한 옷이었다.

    

    “입어.”

    

    카단은 짧은 말을 남긴 뒤 커다란 물 양동이 두 개를 들고 오두막을 나섰다. 근처 개울에서 물을 길어 올 모양이었다.

    

    “고, 고마워요, 카단!”

    

    루나는 닫히기 직전의 출입문을 재빨리 붙들고서 그의 등을 향해 크게 외쳤다. 그가 뒤를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넓은 보폭으로 허둥지둥 걸어가는 걸음걸이가 어쩐지 귀여워서 루나는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옷이 예쁘긴 한데…….’

    

    사이즈도 맞고 티 없이 깔끔한 드레스였다. 하지만 입은 사람이 영 별로였다. 구겨진 양철통에 제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어 본 루나가 입술 끝을 길게 늘였다.

    

    ‘옷이 예쁘면 뭐 해? 내가 꼬질꼬질한데.’

    

    그러고 보니 오두막에 오고 나서 붕대를 풀 때까지 한 번도 씻지 못했다. 노예 상단 같으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이 더욱 귀한 겨울엔 한 달에 한 번을 씻어도 감지덕지했으니까. 물론 상단주가 루나를 특별하게 여겼기에 다른 노예보다는 조금 더 청결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범하게 깨끗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카단과 함께야.’

    

    카단은 깔끔한 사내였다. 낡은 옷도 매일 손빨래를 한 탓에 자세히 보면 깨끗했고, 마수 사냥으로 피를 뒤집어쓴 밤에도 언제나 밖에서 깔끔하게 피를 씻어 낸 후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집안일은 어떤가. 벽에 일렬로 늘어진 말린 과일과 육포, 잘 정리된 선반과 반짝이는 마루를 통해 그의 말끔한 성격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씻자. 이젠 붕대도 풀었으니 청결한 몸을 유지해야지.’

    

    루나는 커다란 양철통에 사내가 길어 온 물을 붓고서 그 안에 퐁당 들어갔다. 다리를 굽혀 몸을 쭈그리자 가슴까지 물이 차올랐다. 루나는 마른 천을 가져와 몸을 뽀득뽀득 씻어 내기 시작했다.

    

    ‘으 추워.’

    

    화롯불 바로 옆에서 목욕을 시작했으나 차디찬 물에 몸을 담그니 체온이 빠르게 내려갔다.

    

    ‘감기 걸리기 전에 서둘러 씻어야지.’

    

    그에게 기침병을 옮기기라도 하면 큰일이기에 루나가 손을 바지런히 움직였다.

    

    그때, 오두막 문이 벌컥 열렸다. 동시에 몰아치는 겨울바람이 차가워서 루나는 양팔을 부여잡고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카단이 벌써 돌아왔나? 저리 거칠게 문을 여는 사내가 아니었는데.’

    

    그나저나 출입문에 등을 돌리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루나는 살짝 고개만 돌려 출입문을 향해 인사했다.

    

    “오셨어요, 카……!”

    

    루나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화들짝 놀랐다. 문 앞엔 카단이 아니라 처음 보는 사내가 서 있었다.

    

    “뭐야, 여자를 들였단 소문이 진짜였잖아? 게다가 엄청 반반한데?”

    

    휘유- 휘파람을 분 사내는 들고 있던 작은 꾸러미를 바닥에 툭 던진 뒤 루나에게로 서서히 다가왔다. 카단보다 선이 여린 얼굴은 여인만큼 어여뻤으나 민소매 밖으로 드러난 팔 근육과 흉터들은 포악했다.

    

    “누, 누구세요?”

    

    루나는 최대한 물속으로 몸을 감추며 사내를 경계했다.

    

    “누구긴. 괴물한테서 미인을 구해 줄 용사님이지. 이 몸의 이름은 루스다.”

    

    자신을 루스라 소개한 사내가 손을 뻗어 루나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아랫입술을 천천히 핥으면서 루나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는 눈빛엔 음험한 욕망이 득실거렸다.

    

    “와, 이거 진짜 물건이네. 이상하게 낯이 익기도 하고.”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 루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루나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루나는 빳빳하게 굳었다. 저를 낯익어하는 걸 보니 마을 사람일까. 제물이었던 저를 기억하는지도 몰랐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을 알면 죽이려 들 거야.’

    

    마을 사람들이 떼로 달려와 깊은 숲에 다시 묶어 두면 어쩌지? 날 살려 준 카단에게 그 화살이 날아올 게 뻔한데.

    

    루나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 공포는 차가운 목욕물보다도 싸늘해서 칼로 살을 에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쾅! 그때 둔탁한 것을 내팽개치는 소리와 함께 오두막 문이 또 한 번 활짝 열렸다.

    

    “루스!”

    

    카단이 거친 목소리로 그를 부르면서 루나에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오- 반가워, 괴물. 어디 다녀온 거야?”

    

    루스가 히죽 웃으면서 카단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와중에도 한 번씩 루나의 새하얀 목덜미나 젖은 어깨를 곁눈질하는 시선은 뱀처럼 간사했다. 그런 루스의 앞에 카단이 도착하기까지는 채 2초도 걸리지 않았다.

    

    “뭐야, 표정이 살벌하네?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컥!”

    

    카단은 너스레를 떨던 루스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아 들어 올렸다.

    

    켁, 케헥! 루스는 허공에 발버둥을 치면서 카단의 손을 떼어 내려 애썼다.

    

    “컥, 이것 좀 놓고, 켁!”

    

    “왜 왔어.”

    

    “이, 이걸 놔야, 말을, 하지, 큭!”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루스의 입술은 곧 새파래졌다. 카단은 그대로 쓰레기를 던지듯 루스를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으악! 내 허리!”

    

    쿠당탕!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루스는 허리를 감싸 안고서 데굴데굴 굴렀다. 그사이 카단은 목욕통 안에 쭈그려 있던 루나의 어깨를 커다란 면포로 감싼 뒤 그녀를 일으켰다.

    

    루나는 카단의 등 뒤로 숨어 그의 옷자락을 간절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넓고 따듯한 등에 이마를 대고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안도했다. 카단, 카단. 그럴 때마다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이마를 타고 루나에게 닿았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차갑게 얼었던 전신의 피가 그 심장 소리를 따라 천천히 녹아 흘렀다.

    

    루스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 둘을 지켜보다가 다시 아야야, 하며 엄살을 떨었다.

    

    “윽, 다짜고짜 사람을 내던지면 어떡하냐고!”

    

    “왜 왔어.”

    

    카단은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면서 루스를 경계했다. 허리를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킨 루스가 바닥에 던져두었던 작은 주머니를 주워 카단에게 내밀었다.

    

    “표정 풀어. 이거 주려고 온 거니까. 저번에 네가 준 마수 심장과 눈알이 꽤 괜찮은 값에 팔렸어.”

    

    카단은 그 주머니를 빼앗듯이 낚아챘다. 평소 같으면 내용물을 철저하게 확인했겠으나 지금은 저놈을 내쫓는 게 우선이었다. 저놈 때문에 루나가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런데 괴물, 그 여자 말이야. 마을 여자는 아니던데 어디서 온 여자야? 정말 납치라도 한 거야?”

    

    “아니다.”

    

    “에이, 솔직하게 말해 봐. 납치가 아니면 괴물인 네가 어디서 그렇게 예쁜 여자를 구해?”

    

    “가!”

    

    “에이, 냉정하기는.”

    

    루스가 여우처럼 히죽거리면서 주먹으로 카단의 가슴팍을 퍽 밀었다. 카단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짐승 같은 새끼가 몸도 좋아서는. 작게 중얼거린 루스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카단 뒤로 숨은 루나를 관찰했다.

    

    “나도 구경 좀 하자. 친구 사이에 좋은 건 같이 써야 한다고 말해 줬잖아. 아까 보아하니 이상한 문신도 있는 것 같…….”

    

    “꺼져.”

    

    난생처음 내뱉은 욕설치고 제법 자연스러웠다. 카단이 팔을 뻗어 루스의 시선을 막아버리자 루스는 황당한 얼굴로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너, 너 지금, 나한테 꺼지라고 했어? 와, 말도 못 하는 괴물 주제에 많이 컸네?”

    

    참 나! 최대한 여유롭게 대처하려고 노력했으나 루스의 겁먹은 목소리가 삐끗거렸다.

    

    ‘젠장, 한 번 더 심기를 거슬렀다간 골로 가겠어.’

    

    마음만 먹으면 작은 마을 하나 따위 단번에 처리할 수 있는 카단의 무력과 덩치는 위압적이었다. 나이가 몇인지, 부모가 누군지, 이름조차 모르는 비밀스러운 괴물은 몇 년 전부터 이 오두막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멀리하는 것은 그가 외딴 오두막에 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라는 존재 자체를 두려워했다. 겁 없는 루스만이 그의 오두막을 찾아와 그에게 의뢰금을 건네는 중간상 역할을 하면서 그의 말동무가 되었다. 그런 자신에게 꺼지라고 하다니. 루스는 한편으로 서운해하며 통증이 이는 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래그래, 오늘은 순순히 꺼져 줄게. 하지만 다음엔 꼭 제대로 말해 줘. 그 여자가 누군지.”

    

    “…….”

    

    “괴물이 웬 여자를 납치했다고 마을에 흉흉한 소문이 퍼지고 있어. 나라도 알아야 소문을 잠재울 거 아냐.”

    

    “…….”

    

    “여하튼 난 간다. 다음에 또 멱살 잡지 마라. 안 그러면 나도 네 오두막엔 얼씬도 안 할 거니까.”

    

    아, 그 여자랑 좋은 시간 보내고. 루스는 마지막 말을 장난스럽게 속삭인 뒤 오두막을 나갔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카단의 셔츠를 꼭 잡고 있던 루나는 루스가 완전히 퇴장한 것을 확인한 후 입술을 달싹이다가 사과를 건넸다.

    

    “죄, 죄송해요. 저 때문에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나 봐요.”

    

    카단은 뒤를 돌아 고개 숙인 루나의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작은 머리통이 덜덜 떨고 있었다. 카단은 루나의 어깨에 털 이불을 한 번 더 덮어 준 뒤 그녀가 몸을 담갔던 목욕물에 손을 살짝 넣어 보았다. 물은 조금의 온기도 없이 차가웠다.

    

    미간을 찌푸린 카단은 슬쩍 루나를 쳐다본 후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는 앞마당에 모닥불을 피우고 물을 끓였다. 그리고 바깥에 있던 나무통에 끓은 물을 가득 채운 뒤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카단이 주로 사용하던 목욕통은 그녀가 몸을 담갔던 양철통보다 커다랬다. 그는 찬물을 한 바가지 집어넣어 온도를 맞춘 뒤 루나에게 손짓했다.

    

    “들어가.”

    

    “네? 아뇨, 이제 괜찮아요.”

    

    “너, 떨고 있어. 들어가.”

    

    카단은 잔뜩 졸아 있던 루나를 번쩍 들어 올린 뒤 따듯한 목욕물 안으로 그녀를 내려놓았다. 루나의 몸과 함께 걸치고 있던 이불과 면포까지 목욕물에 젖어 들자, 루나는 화들짝 놀라서 그것을 벗어 던졌다.

    

    “어, 어떡하죠? 이불이 젖어 버렸어요.”

    

    당황한 눈동자가 카단을 올려다보았다. 되레 당황한 건 카단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리고 있었다.

    젖은 이불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물에 젖은 루나의 금빛 머리칼과 가느다란 목, 동그란 어깨에 닿았다. 하얀 피부 위로 맺힌 물방울이 야릇하게 미끄러져 흘렀다.

    

    윽. 카단은 얕게 신음한 후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는 성급한 손짓으로 젖은 이불과 면포를 탁탁 털어 빨랫줄에 그것을 널었다. 짧은 빨랫줄에는 이불 한 채만 겨우 널렸다. 카단은 널지 못한 면포를 손에 들고서 우왕좌왕했다.

    

    “저기, 카단…….”

    

    루나의 시선이 카단의 하반신에 머물렀다. 그의 다리 사이로 부풀어 오른 성기가 선명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언젠가 본 적 있는 우람한 물건은 아기 팔뚝만큼이나 굵었다.

    

    ‘도와주고 싶어.’

    

    루나는 사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때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이 또한 노예 상단에서 배운 것이다.

    

    그렇게 루나는 카단을 마주했다. 붉어진 뺨과 입술이, 몽롱하게 젖은 그녀의 눈동자가 카단을 유혹했다. 더운 침묵을 깨뜨린 것은 카단이었다.

    

    “빠, 빨래.”

    

    “네?”

    

    빨아 달라는 뜻인가. 루나는 입 안에 고인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그다음 나온 말은 루나의 기대와 달랐다.

    

    “빨래, 하러 간다.”

    

    카단은 면포로 다리 사이를 가리더니 엉거주춤 오두막을 나섰다.

    

    “잠시만요, 카단!”

    

    루나가 불렀으나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뒷모습이 점점 더 오두막에서 멀어졌다. 기껏 유혹했는데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사내를 보면서 루나는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별로인가.’

    

    그녀는 입술을 길게 늘이고 수면 위에 비친 제 얼굴을 확인했다. 흔들리는 물결 위로 익숙한 얼굴이 보이다가 볼록한 가슴 위로 새겨진 붉은 문신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맞다. 이게 있었지. 루나는 코 아래까지 목욕물에 담그고 부르륵 숨을 뱉었다.

    

    ‘잠깐 잊고 있었어.’

    

    노예 상단에 있을 적에, 넌 얼굴이 예뻐서 가장 비싼 값에 팔릴 거라는 말을 종종 들었었다. 그래서 순간 카단이 저를 안아 줄 것이라고 자만했던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노예상들도 내 문신을 본 후엔 예쁘단 소리를 하지 않았지. 재수 없다고만 했어.’

    

    저를 편견 없이 대해 준 카단이었으나 긴밀하게 닿는 행위는 께름칙해할지도 몰랐다. 그동안 심신이 편안했다고 이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다니. 사람 마음이 참 간사했다.

    

    ‘청승맞게 굴지 마, 먹이고 재워 주는 것만도 감사해야지. 지금도 이것 봐.’

    

    루나는 딱 알맞게 따듯한 목욕물을 찰랑거렸다. 귀족이었을 때에도 누리지 못했던 호사를 이런 오두막에서 누리는 게 아이러니했다.

    

    ‘정말 친절한 사내라니까.’

    

    루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수면을 천천히 휘저었다. 적당히 뜨끈한 물의 온도는 사내의 체온과도 닮은 것 같았다. 기분 좋은 안정감이 피부 안으로 녹아들었다.

    

    ‘그나저나 카단은 어디로 간 걸까.’

    

    밖은 고요했다. 장작 패는 소리나 눈을 치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깐 숲에 간 것이라면 수북하게 버섯을 캐서 들고 돌아오겠지. 그러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안녕하세요, 카단 씨’ 하고 인사해야지.

    

    루나는 재빠르게 몸을 씻기 시작했다. 카단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가 당황하지 않도록 옷을 제대로 차려입고 있을 생각이었다.

    

    

    

    

    

    * * *

    

    

    

    

    

    하아, 하아.

    

    카단은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 어느새 숲 입구까지 달려온 모양이었다. 추운 날씨와 다르게 그의 체온은 뜨거웠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으나 열은 식을 기미가 없었다. 예까지 달려서인지 루나 때문인지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카단은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댄 뒤 손에 들고 있던 면포를 응시했다. 루나의 젖은 몸을 감싸고 있던 면포에는 그녀의 살 냄새가 배어 있었다.

    

    “하, 후우.”

    

    다시 다리 사이로 피가 몰렸다. 바짝 약이 오른 성기가 바지를 뚫고 나올 기세로 꿈틀댔다. 이걸 루나에게 들켰을까. 그녀가 자신을 경멸하지 않을까. 수만 가지 걱정이 두서없이 떠올랐지만 그 사이를 헤집고 가장 선명했던 것은 루나의 노란 눈동자였다.

    

    카단은 그대로 고개를 꺾어 높다란 나무 사이로 떠오른 달을 바라보았다. 달은 루나의 눈동자와 똑같은 색을 띠고서 밤을 비추고 있었다.

    

    이대로 비가 내리면 저 달이 젖어 보일까. 그렇다면 조금 전 루나의 눈동자와 더 비슷하겠지. 카단은 들고 있던 면포를 코끝에 대었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켜면서 흥분한 물건을 손에 쥐었다.

    

    쿠퍼액이 줄줄 흘러내린 기둥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헉, 허억. 카단은 숨을 거칠게 내뱉으면서 물건을 아래위로 흔들었다. 한 번의 손짓마다 루나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저 붉고 작은 입술에, 눈밭처럼 새하얀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물건을 꽂아 넣고 허리를 흔들고 싶다는 욕망에 심장이 요동쳤다.

    

    

    

    

    

    ‘카단.’

    

    

    

    

    

    그녀가 제 이름을 부를 때면 하얀 치아 사이로 작고 붉은 혀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가 사라진다. 그것이 빚어낸 이름 소리가 너무도 달콤해서 은근한 흥분을 부추기는 걸 그녀는 알까.

    

    “루나.”

    

    루나. 루나. 카단은 아무도 없는 숲에서 그녀의 이름을 조심스레 불렀다. 그녀의 앞에서는 제대로 부르지 못했던 이름이 더러운 행위 중에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 이름을 한번 내뱉을 때마다 잔뜩 성이 난 좆은 고개를 쳐들고 꿈틀거렸다.

    

    “루나, 크윽!”

    

    번들대던 귀두가 갈라진 틈으로 백탁의 액체를 기세 좋게 내뿜었다. 그의 복직근이 뚜렷한 양감을 드러내며 파르르 경련했다.

    

    “하아.”

    

    카단은 길게 숨을 내쉰 뒤 머리를 헤집었다. 깊게 팬 미간엔 후회가 고였다. 미친 게 틀림없었다. 작고 힘없는 여인을 상대로 더러운 행위를 하다니.

    

    카단은 들고 있던 면포로 사정이 끝났음에도 크기가 줄지 않는 물건을 닦았다. 면포에서 풍기던 그녀의 체향에 자신의 냄새가 섞였다. 욕심 많은 좆이 불뚝 튀어나온 핏줄을 과시하며 배꼽 위까지 빳빳하게 크기를 부풀렸다.

    

    ‘빌어먹을.’

    

    언젠가 마을 사람들에게 들었던 욕설이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카단은 다시 물건을 쥐고서 용두질을 반복했다. 루나를 지우지 못한 머릿속은 온통 희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혼탁했다. 아무래도 밤이 지나기 전까지는 오두막으로 돌아가기 그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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