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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11)

깊은 숲의 카단 씨 ⓒGOOFY

    프롤로그

    

    

    

    

    

    왕국은 몰랐다. 마수가 출몰하는 북쪽 숲 너머 광활한 대지가 있을 줄은.

    

    그곳의 지배자는 야만인이라 멸시하던 이누트 인이었다. 그들의 우월한 신체와 기술력은 왕국을 압도했다.

    

    브릴란 왕국은 처참히 패배했다. 패색이 짙어지자마자 궁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갔던 왕이 잡혀 오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이누트 제국의 2황자였다. 왕궁을 점령한 그는 얼굴을 쓰윽 닦아 내었다. 손아귀에 묻어 있던 시뻘건 피가 황자의 얼굴에 긴 붉은 칠을 남겼다. 그는 발치에 무릎을 꿇고 벌벌 떨고 있는 브릴란의 기사단장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인질로 바쳐진 여인 수백여 명이 열을 맞춰 꿇어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누트 풍습에 따라 커다란 천으로 온몸을 가리고 있었기에 여인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터벅터벅. 황자의 느릿한 걸음 소리가 쥐 죽은 듯 조용한 홀을 울렸다. 황자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새카만 눈동자로 똑같은 천을 뒤집어쓴 인질을 훑었다.

    

    그러던 중 그의 기다란 다리가 어느 여인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그는 짐승처럼 흉곽을 크게 부풀려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운 체취가 느껴지자 그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찾았다.』

    

    황자는 우락부락한 손을 뻗어 고개를 푹 숙인 여인의 턱을 잡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오랜만이야, 루나.』

    

    황자는 여인을 루나라고 부르며 그녀가 알아듣지 못할 외국어를 중얼거렸다. 여인이 황자의 얼굴을 확인하고서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카, 카단…… 씨?”

    

    저 사내가 이런 모습으로 여기 있을 리 없어. 헛것을 본 거야. 루나라고 불린 여인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면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아, 이누트 어는 못 알아듣는 걸 깜박했군.』

    

    눈을 가늘게 뜬 황자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래도 덩치가 큰 황자를 보려면 고개를 꺾어야 했지만 아까보다는 눈을 마주치기가 수월해졌다.

    

    “아기는.”

    

    이번에 들려온 것은 루나도 알아들을 수 있는 대륙 공용어였다. 황자가 외국어를 사용하자 이누트 병사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시선을 교환했다. 이누트 인은 저들만의 문화와 언어를 고집하는 특성이 있었다. 그랬기에 지금 황자의 태도는 이누트 인답지 않았다. 그의 공용어를 달가워한 것은 루나뿐이었다.

    

    “아, 아기요?”

    

    “응. 아기.”

    

    황자가 대답과 동시에 루나에게로 팔을 뻗었다. 루나는 어깨를 흠칫 떨면서 눈을 꾹 감았다. 곧 그의 손바닥이 루나의 아랫배에 닿았다. 그는 루나의 판판한 배를 매만지면서 다른 손으로 손가락을 꼽으며 날짜를 세었다.

    

    “네 배, 이만큼 나와야 했는데.”

    

    황자가 루나의 배 반 뼘 앞을 손짓하면서 수려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없네. 아기.”

    

    “저, 저는 임신한 적이 없어요, 카단 씨.”

    

    “그럴 리가.”

    

    황자를 기억을 더듬듯 고개를 틀어 허공을 응시했다. 완벽한 콧날이 아름다운 옆선을 만들어 냈으나 뺨 위에 묻은 핏자국은 섬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셀 수가 없는데.”

    

    “네?”

    

    “내가 네 배 속에 싸지른 씨물이.”

    

    황자가 루나의 아랫배를 지그시 누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루나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뭐, 그건 아무래도 좋다. 그런데, 루나.”

    

    아랫배를 쓰다듬던 황자의 손이 천천히 몸을 타고 올라와 그녀의 뺨을 쥐었다.

    

    “왜 도망쳤나. 그 오두막에서.”

    

    보드라운 뺨을 매만지는 손길은 다정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난폭해졌다.

    

    “그것도 다른 사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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