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4/14)

 외전

하준은 물소리가 나는 욕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정인이 샤워하기 위해 들어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섹스해도 된다는 의사의 허락이 떨어졌지만 당분간 피임은 해야 한다는 말에 하준은 전에 미리 준비해 뒀던 콘돔을 꺼내 침대 옆 협탁에 올려 뒀다. 

기다리는 동안 그는 양손을 바닥에 짚고 팔굽혀 펴기를 여러 번 했다. 몸이라면 자신 있었지만 그래도 공식적인 첫날밤인데 류정인한테 더 예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아니나 달라 셔츠를 올려 확인하니 복근이 선명하다.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욕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옷을 추스르고 태연한 척 침대에 앉아 있으니 욕실 문이 열리며 뿌연 수증기와 함께 정인이 빨갛게 익은 얼굴로 나타나더니 하준의 얼굴을 살펴봤다.

“왜 그렇게 숨을 거칠게 몰아쉬어?”

“아니야. 아무것도. 이리 와, 머리 말려 줄게.”

정인을 소파에 앉혀 놓고 젖은 머리를 말려 주는데 벌어진 가운 사이로 흰 살결이 언뜻언뜻 내비친다. 하준의 시선이 그곳에 머물렀다가 젖은 머리카락으로 옮겨 갔다. 샴푸 향과 미약한 페로몬 향이 뒤엉켜 음심을 자극했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말리던 손이 조심스레 목덜미를 쓸었다. 정인이 간지럽다며 움츠리자 손은 어깨를 쓸어내리며 아래로 내려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은 하준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좋은 냄새 나.”

“머리 말려 준다며.”

끓어오르기 시작한 욕망을 누르는 건 힘든 일이었다. 하준은 들고 있던 수건을 옆에다 던지고 정인의 팔을 이끌고 침대로 걸어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입술을 포개어 물었고 벌어진 사이로 혀를 섞으며 서로의 몸을 더듬느라 분주했다. 

끈을 풀고 손을 가운 안으로 넣어 몸을 더듬자 정인의 피부가 팽팽하게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하준은 어르고 달래듯 손을 천천히 움직이며 키스를 이어 갔다. 잠시 입술이 떨어지고 발갛게 상기된 정인의 얼굴을 보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샜다. 

“긴장돼?”

“아니.”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으나 정인은 떨리는 마음을 감출 순 없었다. 지금까지 물고 빨고 별짓은 다 했지만, 직접적인 삽입은 처음이라 더 그랬다. 의사는 당분간 피임을 하며 과격한 섹스는 금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과격하다는 기준이 어디까지인지는 차마 묻지 못하였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김하준의 눈빛을 보니 그동안 하지 못했던 걸 다 퍼부을 생각인가 본데…. 

“콘돔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준은 침대 위에 있던 콘돔을 들고 흔들었다. 이어서 젤이 있느냐고 묻자 손을 아래로 내려 정인의 엉덩이 부분으로 가져갔다. 동시에 김하준이 페로몬을 내뿜었다. 

순식간에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발끝에서부터 전기가 타고 올라온다. 헉,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떨자 김하준이 손가락으로 애널 입구를 문지른다. 정인은 뒤늦게야 구멍이 축축한 게 젖었다는 걸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 

“이제 젤은 필요 없어.”

목소리가 애널만큼이나 축축하다. 손가락 끝이 살을 헤집으며 구멍을 벌렸다. 아아, 정인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김하준의 말대로 이제 젤은 필요 없을 듯했다. 김하준의 페로몬에 반응하여 시트가 젖을 정도로 흘러나왔고 덕분에 손가락 하나가 무리 없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손가락을 넣고 문질러 주자 찌걱대는 마찰 소리가 민망할 정도로 들려왔다. 배 속이 달구어지는 느낌에 정인이 허리를 들썩이며 하준의 입술을 찾아 키스하고 혀를 있는 힘껏 빨았다. 저도 모르게 으응, 하는 신음을 뱉자 하준의 입꼬리가 유연하게 올라가는 게 보였다.

“너 완전히 흥분했어.”

정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김하준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근사하게 웃는 얼굴이 지독할 정도로 야하게 느껴진다. 흥분하여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자 하준이 짓궂게 웃으며 입술을 뺨에 문질렀다.

“너무 조이지 마. 그러다 내 좆 잘라먹겠어.”

음담패설에 정인은 덩달아 웃었으나 김하준의 손가락이 두 개에서 세 개로 늘어나면서는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으음…!”

“아파?”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프지만 좋다. 더 해 줬으면 좋겠다. 전엔 뻔뻔스럽게도 잘 나오던 말이 목에 턱 걸려 나오질 않는다. 대답하지 않으니 김하준이 이번엔 손목을 돌려 내벽을 긁어 준다. 아찔한 감각에 다리를 세우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턱을 파르르 떨자 하준의 시선이 그 얼굴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으흥… 기분…이상해….”

“좋다는 거지?”

“응….”

신음이 섞인 대답에 하준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에어컨을 틀어 놔서 그런지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몸을 움츠렸더니 눈치 빠른 김하준이 리모컨을 들어 온도를 높인다. 그러고 나서 그는 셔츠를 머리 위로 벗어 던졌다. 

지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근사한 몸이었다. 바쁜 와중에도 운동을 꾸준히 하더니 그만한 이유가 있던 것이다. 비싼 예술품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가 바지 지퍼를 내리고 옆에 있던 콘돔을 집어 앞니로 찢는다.

하준이 콘돔을 정인에게 내밀었다. 네가 씌워 줘. 정인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비닐에서 콘돔을 꺼내니 오일을 바른 것처럼 미끈하다. 김하준이 속옷을 내리자 발기한 성기가 위로 튀어나온다. 

처음 보는 게 아닌데도 기분이 이상했다. 긴장하여 콘돔을 거꾸로 씌우고 헤매니 하준이 자상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

“이렇게 해야지….”

처음인 걸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도 알아…. 볼멘소리를 내며 돌돌 말린 부분을 펼쳐 뿌리까지 내리는데 김하준의 성기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꿈틀 움직인다. 제 것에 비해 크기도 크기지만 모양도 흉악스럽다. 얼굴은 귀공자처럼 생긴 주제에 좆은 그렇지 못했다.

콘돔을 다 씌운 뒤 손으로 한번 쓸어 주니 김하준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는다. 입술이 다시 포개지며 정인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하준의 움직임이 다소 조급해졌다. 그는 기둥을 잡고 귀두를 구멍에 대고 문질렀다. 잠시 뒤 살을 벌리고 들어오는데 손가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버거움이 느껴진다. 숨을 멈추고 몸을 뻣뻣하게 굳히자 하준이 입술을 떼어 내며 표정을 살폈다.

“아파?”

정인은 걱정스러워하는 그 얼굴을 어루만지며 애써 미소 지었다.

“참을 만해.”

하준이 힘을 주어 나머지 삽입을 시도했다. 충분히 젖어 무리 없을 거라고 여긴 건 오산이었다. 뜨거운 불덩어리가 생살을 벌리고 들어오는데 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철없던 시절 김하준한테 어떻게든 한번 하려고 수작을 부리던 게 떠올랐다. 그때 했으면 아마 엉엉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김하준의 입술이 귓가를 문질렀다. 괜찮아. 숨 쉬어. 다치지 않게 할게. 다정한 목소리에 통증이 완화된다. 몸에 힘을 빼니 삽입하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고 결국에 모두 먹어 치워 꽉 맞물린 형태가 됐다. 하준이 정인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 주며 정인의 손을 끌어 그 부분을 만지게 했다.

“다 들어갔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아프면 얘기해.”

그는 허리를 움직이면서 끊임없이 확인하고 애정을 표시했다. 처음엔 아프기만 했는데 마찰할수록 고통과는 또 다른 감각이 배 속을 달구어 갔다.

“으음….”

하아, 류정인. 정인아. 정인이 눈을 감았다. 김하준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정인은 양쪽으로 벌리고 있던 다리를 하준의 허리에 감아올리며 잡아당겼다. 그 행동이 자극됐는지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몸이 위쪽으로 밀리며 퍽, 퍽, 마찰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으흑…하준아…조금, 천, 천천히…아아!”

하준은 귓속에 혀를 넣어 간지럽히면서 손은 아래로 내려 정인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받쳐 안았다. 하반신이 살짝 들리자 삽입이 깊어진다. 그 상태로 하준이 성기를 거의 끝까지 뺐다가 단번에 꽉 하고 쑤셔 넣었다. 어느 부분을 찍은 건지 모르지만 배 속이 찡하고 울리며 온몸이 꼬챙이에 꿰인 듯한 충격을 받았다.

정인이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며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하준의 어깨를 밀었다.

“잠, 잠, 아아!”

“미안. 조절을…하아.”

“기분 이상, 아아!”

“젠장, 못 참겠어.”

퍽, 퍽, 퍽, 허벅지 안쪽이 아려 올 정도로 몸이 위아래로 들썩이며 흔들렸다. 침대 시트가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김하준의 혀가 이젠 다시 입 안을 헤집어 놨다. 정인은 미처 다물지 못한 입술 틈으로 타액을 흘리며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아!”

베타로 발현된 후 두렵기만 했던 섹스는 생각 이상으로 황홀했으며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어 갔다. 절정에 다다르자 김하준은 갈 곳을 잃은 사람처럼 허리를 정신없이 마구 휘둘렀다. 정인의 신음이 그 박자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가 됐고, 나중에는 고개만 젖히고 헉헉거렸다. 

짐승처럼 움직이던 김하준이 어느 순간 정인의 몸을 꽉 끌어안고 숨을 멈췄다. 정인 역시 동시에 정액을 토해 냈다.

“으윽.”

“큭….”

사정했음에도 김하준은 몇 번이고 몸을 위쪽으로 밀어 올렸다. 정액이 콘돔 밖으로 울컥울컥 흘러나오는 기분이었다. 서로의 몸을 꽉 끌어안은 채로 호흡을 고르던 중에 하준은 정인의 뺨에 입술을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내가 성급하게 굴었어.”

정인은 웃음이 났다. 저는 좋기만 했는데 김하준은 그게 또 미안한가 보다. 말이 없자 하준이 고개를 들어 눈치를 살핀다.

“생각했던 것보다….”

하준이 다음 말을 기다리길래 정인은 잠시 뜸을 들였다. 베타로 발현된 뒤 섹스에 대한 거부감이 있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김하준과의 첫 섹스를 상상할 때 기대감과 함께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도 조금 있었다. 그런데 하고 나니, 정말….

“좋았어.”

하준의 얼굴에 안심하는 기색이 내비쳐진다.

“좋았어?”

“응, 또 하고 싶어….”

정인이 땀으로 젖은 하준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배시시 웃었다. 그러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하준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안에서 식어 가던 성기가 꿈틀거리며 다시 커진다. 당황한 정인이 하준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 내 말은, 오늘 하자는 얘긴, 읏.”

하지만 그 말은 채 끝맺지도 못했다. 아래로 내려간 김하준이 정인의 가슴을 깨물었기 때문이다. 혀로 젖꼭지를 밀어 올리더니 나중엔 덥석 물고 턱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있는 힘껏 빨기 시작했다.

아랫배가 뻐근해지며 정인의 뒤가 다시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페로몬이 아닌 김하준의 애무만으로도 몸이 반응한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가슴을 괴롭히던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 이번엔 성기를 머금는다. 

허리를 들썩이며 허벅지를 오므리니 다시 붙들어 있는 대로 벌려 놓는다. 고개를 든 정인은 자신의 성기를 물고 담금질을 하는 김하준을 보자 급격하게 사정감이 몰려왔다. 때마침 김하준이 위를 흘깃 쳐다보는 바람에 눈이 마주쳤고 곧바로 그의 입에다 사정했다.

“읏…!”

움찔대는 정인을 뒤로한 채 김하준은 정인의 성기를 쥐어짜듯 아래에서 위로 쭉 훑어 올렸다. 이미 예민해진 것을 쥐어짜니 미칠 것 같아 그만두라고 손짓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남김없이 짜내 전부 먹어 치운 뒤에야 놓아주었다.

두 번째 사정을 마친 정인의 몸이 축 늘어지며 복부와 가슴만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숨을 고르던 정인은 무심코 김하준을 봤는데 그의 성기는 완전히 발기되어 배 쪽으로 힘껏 뻗어 있었다. 정액으로 번들거리는 녀석은 아까보다 더 위협적인 크기를 뽐냈다. 

“하준아.”

김하준이 쳐다보길래 올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의도를 알아챈 김하준이 무릎으로 움직여 정인의 가슴 위쪽에 다리를 벌린 채 자리를 잡았다. 하준이 옆에 있던 베개를 가져와 정인의 머리 뒤에 하나 더 받쳤다. 그러고 나서 정인의 입술 가까이에 성기를 들이댔다. 

귀두 끝에 묻어 있던 번들거리는 액을 정인의 입술에 문지르니 붉은 입술이 열린다. 그 사이로 붉은 혀가 나와 귀두를 핥았다. 하아, 하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손으로는 정인의 젖은 머리를 다정하게 넘겨 주며 벌어진 입 안으로는 성기를 밀어 넣었다. 귀두를 볼 안쪽 점막에 대고 문지르니 기분이 끝내줬다. 거칠게 박고 싶은 욕망을 애써 누르며 무릎을 세우고 상체를 앞쪽으로 기울여 손으로 침대 헤드를 잡았다. 

“더 움직여도 돼?”

눈으로 허락하자 조금씩 허리를 움직인다. 정인의 뺨이 도토리를 입에 넣는 다람쥐처럼 불거졌다가 줄어든다. 하지만 류정인은 오럴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자 눈가가 금세 빨개졌으니까.

속눈썹이 젖어 들어 갈수록 하준은 자신의 자제력에 한계가 오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성기를 빼내자 정인이 콜록콜록 얕은 기침을 한다. 하준은 정인의 입술 대신 자신의 손으로 번들거리는 기둥을 앞뒤로 문질렀다. 아래에선 정인이 숨을 몰아쉬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혀 내밀어 봐.”

정인은 시키는 대로 순순히 혀를 내밀고 고개를 살짝 들었다. 단단해진 그의 복부와 허벅지를 더듬으며 혀로는 그의 성기를 애무했다. 김하준의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이고 꽉 다문 턱은 점점 더 단단해졌다. 

“후우, 정인아. 나 얼굴에다 한다?”

허락을 맡을 필요가 없는 일인데도 허락을 구하는 게 귀여웠다. 대답 대신 입을 더 벌려 줬더니 억눌린 신음을 내며 입과 얼굴에 왈칵 쏟아 낸다. 하아, 하아, 김하준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그의 몸이 정인의 몸 위로 쓰러지듯 덮쳐 왔다.

“너무 좋아…. 좋아서 죽을 거 같아.”

목덜미에 입술을 문지르며 쏟아 내는 고백이 뜨거웠다. 정인은 나도, 라고 짧게 대답한 뒤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나 하준의 성기는 사정을 마쳤음에도 여전히 정인의 아랫배를 쿡쿡 찔러 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김하준이 입술을 다시 포개어 왔다.

***

가게 안에서 뒷정리를 마친 정인은 시간을 확인했다. 김하준과 오늘 엄마를 보러 가기로 했는데 볼일을 보러 나간 다혜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정인은 가게 안을 둘러봤다. 1년 만에 돌아온 가게는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아직도 다시 일을 시작했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는다. 처음 정인이 일을 한다고 했을 때 김하준의 할머니는 반대가 심했다. 양욱환이 감옥에 들어갔어도 그의 부하들이 있는 이상 또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하준이 며칠을 설득한 끝에 겨우 다시 출근하긴 하였는데, 할머니는 여전히 정인이 나가서 일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했다. 한편으로는 어서 빨리 아이를 갖기를 바라는 눈치였는데, 그건 그것대로 쉽지 않았다.

오메가가 되었으니 아이가 금방 생길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하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속에서는 혹시 모를 불안이 움트고 있었다. 내가 반쪽짜리 오메가는 아닐까, 베타로 돌아간 건 아닐까. 아니 애초에 임신이 가능은 했던 걸까. 

그런 걱정을 눈치 빠른 김하준이 모를 리 없었고, 결국 그가 먼저 아이는 천천히 갖고 싶다며, 지금은 신혼을 즐기자고 이야기하면서 임신에 관한 건 뒤로 미룬 상태였다. 

여러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에 문이 열리며 다혜가 나타났다. 그녀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연신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날씨 장난 아니야. 완전 뜨거워.”

“차 끌고 다녀오지 그랬어?”

“거기 주차할 데가 없잖아.”

다혜는 에어컨 아래로 가 옷을 펄럭이더니 리모컨으로 TV를 틀었다. 정인이 내린 커피에 얼음을 채우는 동안 TV에선 활기찬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떠오르는 신예 스타죠. 류민아 양을 모셨습니다.]

처음엔 이름이 같은 사람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다혜가 어머머, 저게 누구야. 정인아! 하고 불렀을 때는 불안한 예감이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던 정인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TV 화면 속에 2주 전 고향에서 본 류민아가 떡하니 나타난 게 아닌가. 화장하고 머리까지 세팅한 채 수줍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자신이 알던 류민아가 아닌 것 같았다.

“저거…민아 맞지?”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쟤가 왜 저기서 나와?”

[첫 출연인데 기분이 어떠세요?]

[너무 영광이고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에 인터뷰를 보니 오빠가 많이 반대했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많이 반대하시나요?]

[지금은 너무 좋아해요. 형부하고 같이 적극적으로 응원해 주고 있습니다. 이 방송도 보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오빠 보고 있지? 내가 언제나 사랑하는 거 알지?]

[부럽습니다. 굉장히 사이가 좋은 남매네요.]

[네, 어릴 적부터 죽고 못 사는 사이였어요.]

죽고 못 사는… 하아, 그냥 죽여 버릴까. 정인은 황당하여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몇 달 전 류민아는 지방에 있는 대학에 붙었고, 주말이면 서울로 올라와 정인의 집에 머물렀었다. 하준과 제법 친해진 류민아는 틈만 나면 배우를 시켜 달라고 졸랐는데 그때마다 정인은 야단을 쳤었다. 

전엔 그래도 하고 싶다면 밀어 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해수의 일을 겪으면서 상당 부분 마음이 바뀌었다. 그래서 하준에게 부탁을 들어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김하준도 알겠다고 했으면서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체 영화는 언제 촬영하고 언제 개봉까지 한 거야. 나만 감쪽같이 몰랐던 거야? 어이가 없어 휴대전화로 검색을 하니 아니나 달라 김하준의 소속사다. 대신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유명 영화는 아니고 단편 영화였다. 

그런데도 기사에는 민아의 이름이 몇 번 언급됐다. 그게 김하준의 힘인지 민아가 진짜 연기를 잘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정인은 한숨을 내쉬며 김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3번 울리기도 전에 김하준이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

[우리 정인이 왜? 서방님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

어울리지 않는 애교에 정인이 전화기를 한번 슥 째려봤다.

“김하준.”

[응?]

“민아가 왜 TV에 나와?”

정적. 정인은 이를 꽉 물고 두 눈을 꾹 감았다. 전화가 툭 끊어지더니 이어서 영상통화가 걸려 온다. 받자마자 화면 안에 김하준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능청스럽게 웃었다. 차량 내부가 보인다.

[미안. 처제가 말한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이렇게 빨리 터질 줄은 몰랐어.]

“그걸 말이라고 해?”

화가 난 목소리에 하준의 눈썹이 화면에도 보일 만큼 아래로 축 내려갔다.

[자기가 무슨 걱정 하는지 알아. 내가 잘 챙길게. 매니저도 든든한 녀석으로 붙였어. 나 믿지? 옆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못 꼬이게 단속할 테니까 염려 마.]

아 두통이야. 이마를 감싸니 화면이 갑자기 바뀌고 문을 열었다 닫는 소리가 들린다. 걷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툭 끊어졌다. 정인이 인상을 쓰며 화면을 노려보자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면서 김하준이 나타났다.

다혜가 놀라서 쳐다볼 겨를도 없이 김하준이 오랜만이라며 인사를 하고 성큼성큼 정인에게로 다가왔다. 정인이 따지려고 공격 태세를 취하는데 하준이 뒤로 감추고 있던 손을 앞으로 내민다. 난데없이 등장한 붉은색 꽃다발에 정인이 주춤하고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옆에 있던 다혜가 오오, 이상야릇한 표정을 짓더니 슬그머니 안으로 피해 줬다.

“뭐야. 이건.”

“오다 어울릴 것 같아서 샀지.”

거부할 새도 없이 은근슬쩍 정인에게 꽃다발을 안기더니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더니 안쪽에 있던 다혜를 부른다.

“정인이 먼저 퇴근해도 되죠? 제가 달래 줘야 해서요.”

다혜가 닭살 돋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며 얼른 꺼지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예, 예. 그러셔야죠. 솔로 염장 지르지 말고 얼른 가 보세요.”

그만하라며 말릴 틈도 없이 김하준에게 등이 떠밀려 밖으로 쫓겨 나왔다. 근처에 주차해 둔 차에 태우더니 잽싸게 운전석으로 가 안전띠를 매 주면서 뽀뽀를 하려 한다. 정인은 그의 어깨를 잡으며 경고했다.

“뽀뽀할 기분 아니야.”

“미안해, 정말. 근데 처제 재능을 썩히긴 너무 아까웠어.”

재능이란 말에 정인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하긴 따지고 보면 류민아가 엄마한테 이런저런 핑계로 돈 받아 갈 때 연기는 기가 막히게 했었지. 그거도 재능이라면 재능일 거다. 정인이 믿지 못하는 눈치자 하준이 영상을 하나 켜서 보여 준다. 

영화의 한 장면인 듯하였는데 민아가 화장기 없는 모습으로 울먹이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상처받은 자신의 마음을 담담히 고백하는 사람은 자신이 알던 동생이 아닌 듯했다. 짧은 영상이었지만, 아래 댓글에 배우의 이름을 궁금해하는 질문들이 쏟아진다.

“내가 밀어준 거 아니야. 오디션만 보게 해 달라고 해서 해 준 거고 감독이 직접 뽑은 거야.”

그 말은 사실일 거다. 김하준이 밀어줬다면 아예 주연으로 꽂아 줬겠지. 

“벌써 여기저기서 난리야. 눈독 들이는 감독들도 많고.”

정인은 말없이 민아의 다른 영상도 재생했다. 화면 속 민아의 모습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고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인데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내 동생이 이렇게 예뻤나. 입을 꾹 다문 채 화면만 응시하자 하준이 뺨을 만지며 몸을 밀착해 온다.

“걱정 마. 내가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을 테니까.”

“생각보다….”

정인이 말을 멈추고 나서 한숨을 쉬듯 이어 갔다. 연기는 괜찮네. 아주 발 연기일 줄 알았는데…. 그 말에 하준이 피식 웃었다. 짧은 시간 동안 정인은 동생이 출연한 영상과 인터뷰를 하나씩 훑어봤다. 당장 전화해서 난리 치리라 마음먹었는데 화면 속에서 활짝 웃는 모습을 보니 화가 누그러지는 것도 모자라 기분이 먹먹해진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하는 거 보니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나 이제 뽀뽀 받아도 되는 거지?”

쳐다보니 김하준이 벌써 얼굴을 코앞에다 디밀고 있다. 마지못해 뺨에 쪽, 하고 해 줬더니 이어서 입술이 부딪쳐 온다. 뽀뽀라더니 혀부터 집어넣으려 하기에 입을 벌려 주는데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진다. 아무 생각 없이 눈을 뜨던 정인은 앞에 나타난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김하준의 머리를 후려쳤다.

김하준이 윽, 신음하며 머리를 움켜쥐고 떨어져 나갔고 정인은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차에서 내렸다. 졸지에 얻어맞은 김하준 역시 고개를 돌리다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나타난 할머니가 비서를 달고 차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황급히 내려 인사를 하니 할머니가 둘을 위아래로 훑으며 쯧쯧 혀를 찼다.

“대낮에, 남사스러워서 원.”

“할머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

“왜 내가 못 올 데 왔니.”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비서에게 손짓했다. 비서가 들고 있던 커다란 쇼핑백을 정인에게 건넨다. 누구나 다 아는 유명 브랜드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얼결에 받아 들고 안을 들여다보니 리본을 단 검은 상자가 들어 있다.

“백화점 갔다가 하나 샀다.”

“네…?”

“사부인 뵈러 간다며. 선물이니 대신 전해 드려라.”

그런데 상자만 있는 게 아니라 봉투도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정인은 난감한 얼굴을 하고 할머니를 쳐다봤다. 그녀는 종종 정인의 가게 앞에 예고도 없이 찾아와 고가의 옷과 시계 같은 것들을 사 주고 갔는데 그때마다 용돈이라며 현금이 들어간 두툼한 봉투도 늘 함께였다.

“할머니, 봉투는….”

정인이 마다할 새도 없이 하준이 잽싸게 봉투를 꺼내 낚아채더니 재킷 안주머니에 홀랑 집어넣었다.

“할머니 사랑합니다. 잘 쓸게요.”

정인이 하지 말라고 팔을 툭 쳤으나 김하준은 싱글싱글 웃었다. 그러면서 보태어 할머니의 팔짱을 끼고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물려주시지 말고 기왕이면 회사 지분이나 물려 달라고, 그래야 아버지를 쫓아내고 자신이 회사를 차지할 수 있지 않겠냐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소릴 했다. 

망나니 같은 발언을 하는데도 김하준을 쳐다보는 할머니의 눈에서는 아직도 애정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니 더 증손주에 대한 갈망 또한 클 수밖에 없었다.

“너네 아직도 소식은 없냐?”

역시나. 예상했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하준이 미간을 찡그렸다. 할머니. 정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달싹였으나 할머니는 곧 대답을 듣기도 전에 손을 내저었다.

“아니다. 늙은이가 괜한 소릴 했다. 들어가라.”

정인이 살갑게 팔을 붙들었다.

“저희하고 같이 가세요. 모셔다드릴게요.”

할머니가 그 손을 떼어 내며 토닥였다.

“됐어. 젊은 애들 노는데 끼어서 뭣 하게. 간다. 말일에 제사인 거 알지. 정인이 먼저 와라. 남들 눈도 있으니.”

그렇게 할머니는 비서를 데리고 돌아섰다. 제사 이야기에 하준이 신경질을 내려 했고, 정인은 그가 더 말을 하지 못하도록 팔을 잡아챘다. 뒤에서 보니 대나무처럼 꼿꼿하던 허리와 등이 1년 사이 꽤 많이 굽어 있었다. 노인들의 시간은 젊은 사람들보다 더 빠르게 흘러간다는 말이 새삼 와닿았다. 

[레오는 잘 놀고 있어요. 걱정 말고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오가 어제 토한 뒤로 식사를 하지 않아 걱정했는데, 다행히 오늘 병원에 다녀왔고 지금은 괜찮은 모양이다.

녀석은 사춘기가 지나 활동량도 많이 줄더니 이제는 의젓한 어른 고양이가 됐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와 가장 먼저 반겨 주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했고, 우울한 날이면 옆에 누워 고로롱 고로롱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마음을 달래 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서 집사와 통화를 마친 정인은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열었다. 두 사람을 먼저 반긴 건 허리가 잔뜩 굽은 정인의 할머니였다. 그녀는 한여름인데도 작년 겨울 하준이 사다 준 분홍색 스웨터를 입고서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영감!”

그러더니 하준에게 왜 이제 왔느냐며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고 반가운 기색을 비쳤다. 할아버지와 한 군데도 닮은 점이 없는 하준을 왜 할아버지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만날 때마다 하준이 제법 할머니의 장단에 잘 맞추어 주어 정인은 그것이 매우 고마웠다. 

물론 엄마는 그때마다 당황하여 말리느라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어머니, 또 그러신다. 어머니 손주 사위예요.”

이어서 나타난 엄마가 할머니를 말렸으나 하준은 거리낌 없이 할아버지 흉내를 냈다.

“우리 옥란 씨 잘 있었어요? 나 보고 싶지 않았어요?”

“보고 싶었지. 영감 근데 이 애는 누구야? 그새 바람을 피운 거야?”

“아니에요. 몸종 하나 데리고 왔어. 이름이 돌쇠야.”

하준이 정인을 몸종이라고 소개했고 돌쇠라고 지 맘대로 이름까지 붙였다. 정인은 그 말에 미간을 확 구기며 째려봤다. 저번에는 자길 귀찮게 하는 스토커라고 거짓말을 하더니 이젠 몸종이란다. 어이가 없어 쳐다봤더니 할머니가 정인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렇게 비실비실한 몸종을 어디다 쓰누….”

그 말에 하준이 웃음을 참았고 정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할머니 나 정인이.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정인이.”

“아니야 나는 우리 영감이 제일 좋아.”

이런. 하준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고 정인은 결국 자신의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오느라 고생 많았어. 차 막히진 않았고?”

존댓말을 하며 하준에게 거리를 두던 엄마는 이제 하준을 전보다 편하게 맞이했다. 농담도 하고, 은근 정인이 흉을 보기도 했으며, 전보다는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자 보육원에서 지내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뛰어오며 두 사람에게 안겼다.

보육원의 시설들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고 일하는 사람들도 그리고 새로 들어온 원생들도 늘어났다. 거기엔 김하준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게 제일 컸고, 그리고 정인이 유명해지며 후원해 주는 사람이 늘어난 것도 한몫했는데 놀랍게도 처음 후원하겠다고 나선 건 김하준의 아버지 김 회장이었다.

두 부자는 여전히 냉전 중이었지만 김 회장은 그렇게라도 아들과 화해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준은 할머니의 용돈은 서슴없이 받아도 아버지에게 흘러나오는 돈은 털끝만큼도 손대지 않으려 했다. 그것이 나중에 자신을 옭아맬 족쇄가 될 수도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마당을 가로질러 가는데 안방 문이 열리면서 류민아가 튀어나온다. 낮에 TV에서 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무릎 나온 추리닝에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이다.

“오빠, 왔어?”

헤헤, 하고 너스레를 떨며 웃는 걸 보니 이미 김하준과 연락을 주고받았나 보다. 저뿐 아니라 엄마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정인은 뒤늦게 듣고는 묘한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 와 야단을 쳐서 뭣 하겠는가. 어차피 일은 벌어졌고, 민아는 방송에까지 얼굴이 나왔는데.

짐을 풀고 식사하는 내내 대화는 민아의 이야기로 흘러갔다. 일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얼굴은 공부 이야기를 할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우려와 달리 정말 일을 즐기는구나 싶어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고 내로라하는 배우들 사이에서 열심히 하려고 하는 걸 보니 기특하고 대견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 정인은 하준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는 걸 깨달았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속이 좋지 않다며 잠시 바람을 쐬러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나갔는데, 20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결국 걱정이 되어 밖으로 나왔다가 차량 보조석에 앉아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녁 먹은 게 체한 걸까. 운전석 문을 열던 정인은 심장이 쿵 내려앉고 다리가 휘청였다. 

순식간에 김하준의 페로몬에 압도당했다. 김하준은 페로몬 조절을 꽤 잘하는 편에 속했는데 그가 이렇게 무방비하게 노출하는 경우는 딱 하나뿐이었다. 보조석에서 숨을 몰아쉬던 하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돌아봤다.

“들어가 있어.”

그의 옆에 약병과 반쯤 비어 버린 생수병을 보니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겠다. 정인이 운전석에 서둘러 타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인을 바라봤다. 눈빛에 열이 가득하다. 김하준은 러트가 불규칙했고, 약을 먹어도 바로 가라앉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정인과의 섹스로 해소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부모님의 집이었고, 섹스를 나눌 장소 또한 마땅치 않으니 그로서는 이렇게 나와 상황이 나아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손을 뻗어 이마를 만지자 미열이 느껴진다. 손아래 그의 눈동자가 초조한 듯 움직였다. 

“괜찮아. 들어가. 약 먹었으니까 나아질 거야.”

말을 하면서도 눈은 정인의 입술을 핥는다. 정인은 고민 끝에 시동을 걸었다. 차를 움직이는데 김하준이 숨을 몰아쉬며 몸을 바로 세운다. 

“들어가라니까.”

“너 이러고 있는데 어떻게 가. 잠깐만 있어.”

그러고 나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준이하고 드라이브하고 들어갈게요.”

엄마는 더 자세한 것을 묻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정인은 차를 마을 입구가 아닌 뒤쪽으로 움직였다. 좁은 시골길은 가로등조차 찾기 힘들었고 보이는 거라곤 드문드문 떨어진 작은 시골집들이 전부였다. 

차는 산길 아래 인적이 없는 으슥한 곳에 멈췄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자동차 불빛에 비치는 나무들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차를 세운 정인은 시동과 미등 하나만 켜고 나서 김하준을 돌아봤다.

김하준의 가슴이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했으며 잘생긴 미간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정인은 운전석에서 내려 김하준을 보조석에서 끌어내 뒷자리로 옮겼다. 좌석을 최대한 밀어 공간을 확보한 다음에 김하준을 앉혀 두고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 얼굴을 마주 봤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그의 눈빛에 욕망이 가득했다. 정인은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 갔다.

“가끔 이런 것도 나쁘지 않지?”

김하준이 인상을 쓴 채 웃었다. 하지만 그는 더는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정인의 셔츠가 벌어지자 걸신들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입술을 가져다 대더니 다량의 페로몬을 내보냈다.

갑작스레 늘어난 페로몬 양에 정인은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뒤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것을 느꼈다. 입으로는 가슴을 빨며 하준의 손은 정인의 양쪽 볼기를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쭉, 쭉, 소리와 함께 몸이 옆으로 넘어가며 김하준이 위로 올라왔다. 

그는 정인의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린 뒤 자신의 바지 버클에 손을 댔는데 마음이 급했는지 손이 자꾸만 미끄러진다. 평소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서두르지 말라며 머리카락을 만져 주자 김하준의 갈색 눈동자가 위를 향한다. 

“나 방금 바보 같았지?”

그 말에 정인은 웃음이 터졌다.

“아니, 귀여웠어. 근데 페로몬 조절을 좀 해 봐. 나 하기도 전에 죽을 거 같은데….”

“미안…노력해 볼게….”

지익, 지퍼가 내려가고 그가 속옷을 내려 잔뜩 발기한 성기를 꺼내 귀두를 입구에 문질렀다. 이미 흥건하게 젖은 구멍이 오물거리며 귀두를 자극해 온다. 그것만으로도 정인은 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좁은 차 내부는 이제 두 개의 페로몬과 숨소리로 채워졌다.

살을 벌리고 들어온 성기가 급하게 빠져나갔다가 콱, 하고 힘주어 다시 들어왔다. 아! 기둥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정인은 참지 못하고 하준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술을 포갰다. 철썩철썩,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등이 가죽 시트에 마찰하며 소리를 냈다. 

키스 도중 김하준은 정인의 목덜미를 잡아먹을 듯이 깨물고 젖꼭지를 아플 만큼 꼬집고 가슴을 쥐어짰다. 러트가 온 그는 평소보다 난폭하게 굴었는데 그게 좁은 공간에서의 섹스와 맞물리면서 묘하게 자극을 증폭시켰다. 

“아읏, 으응….”

입에서 야릇한 신음을 흘려보내자 김하준이 정인의 오금을 붙잡고 두 다리를 가슴께까지 밀어붙인다. 그것도 모자라 위에서 내리찍듯이 박아 대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퍽, 퍽, 퍽, 엉덩이가 쪼개질 것처럼 강도가 점점 세졌다. 정인의 성기에서 멀건 액이 흘러나왔고, 온몸은 번개에 맞은 것처럼 번쩍번쩍 불꽃이 튀고 턱이 덜덜 떨려 왔다. 

몸이 들썩일 때마다 천장도 함께 흔들렸고 차체도 흔들리며 차가 좌우로 들썩였다. 밖에서 누군가 본다면 무얼 하는지 한눈에 알아챘을 것이다. 부디 구경꾼이 없기를 바라는 와중에 하준이 안쪽 깊숙한 곳을 내리찍는다.

정인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고개를 뒤로 젖히며 파르르 양다리를 떨었다. 숨을 쉬는 걸 잊어버린 사람처럼 컥, 숨을 삼키는데 김하준이 위에서 같은 자리를 집요하게 쑤신다.

“자, 아읏.”

신음을 내지르던 정인의 손이 허공에서 갈 곳을 잃자 하준은 그 손을 잡아 제 목을 끌어안게 하고 상체를 빈틈없이 붙였다. 그리고 팔로 정인의 머리가 차에 찧지 않게 감싸더니 허리 아래만 짐승처럼 움직였다.

“아!”

미처 다물지 못한 입에선 타액이 흘러나오고 신음 대신 이젠 꺽 꺽, 소리만 낼 뿐이었다. 하준은 기계처럼 움직이는 와중에도 흥분으로 얼룩진 정인의 얼굴을 혀로 핥고 눈꺼풀과 콧등 뺨 입술을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웠다. 

“천, 아아! 하, 너무, 빠, 아아!”

정인은 하준의 등을 할퀴며 죽을 것 같다고 애원했다. 미안. 정인아. 김하준의 사과는 말뿐이었다. 그는 아래를 난도질하듯 거칠게 들이박았다. 까득, 이를 무는 소리와 함께 배에 맞닿은 그의 복부가 점점 단단해졌다. 

양팔로 정인의 상체를 꽉 옭아매고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 뿌리 끝까지 박아 넣고 숨을 멈추는 순간 성기가 아래서부터 부풀며 불에 달군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정인은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지르며 버둥댔고 그럴수록 몸을 옥죄는 힘은 점점 더 강해졌다. 

아아! 몇 번의 노팅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정인은 이 고통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쉿…괜찮아… 금방 끝나…착하지….”

머리를 쓰다듬으며 귓가에 달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까지 미친 듯이 박아 대던 놈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정한 어투였다. 고통이 서서히 누그러지자 정인은 겨우 숨통이 트였다. 덜덜 떨리던 두 다리를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언제 흘렸는지 눈꺼풀에 매달린 눈물 때문에 김하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김하준은 갓 태어난 새끼의 양막을 씻겨 내듯 혀로 정인의 얼굴을 핥았다. 뒤늦게 제대로 보이자 김하준의 머리카락이 땀으로 범벅이다. 아니, 머리뿐 아니라 몸도 마찬가지였다. 좁은 차 안에서 껴안고 뒹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하준은 괜히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들어 정인의 얼굴만 만지작댔다. 

“미안…. 조금 참을걸….”

눈물을 짜던 것도 잊고 정인은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금 전 사정을 마친 성기는 러트 때문인지 여전히 위협적인 크기였다. 게다가 김하준은 그것을 뺄 생각은 하지 않고 안에서 자꾸만 문질렀다. 

정인 역시 이대로 끝내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카섹스를 선호하진 않지만, 지금처럼 분위기가 달아오를 때면 차가 아니라 숲에서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운데, 문 열고 할래?”

정인의 말에 하준의 눈이 커졌다. 싫으면 말고, 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준이 정인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시선을 위로 하여 보자 저 멀리 마을의 불빛들이 간간이 보인다. 한 번씩 바람이 불 때마다 스스스, 하고 나무가 음산한 소리를 냈다. 

“끝내주는데?”

너스레를 떨자 하준이 성기를 빼낸다. 안에 싼 정액이 주르르 흘렀고 그것을 어찌할 새도 없이 김하준이 정인의 팔을 붙들어 일으켜 앉혔다. 엎드려 봐. 정인은 순순히 밖을 내다보며 네발 달린 짐승처럼 엎드렸다. 

그때 엉덩이로 김하준의 입술이 닿는다. 돌아보기도 전에 그가 혀를 넣어 구멍을 쑤셨다. 성기와는 다른 쾌감이다. 회음부를 핥고 혀끝으로 구멍을 쑤실 때마다 정인은 나지막한 신음을 터트리며 허리를 움직였다. 

춥, 춥, 예민해진 구멍으로 혀가 들락이는 게 생생하게 느껴진다. 시트에 이마를 댄 채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데 이번엔 훨씬 단단하고 뜨거운 게 와 닿는다. 정인은 하준이 삽입하기 쉽도록 상체를 낮추고 엉덩이를 있는 대로 치켜들었다. 

조금 전 빠져나갔던 불덩어리가 다시 안으로 슥 밀고 들어온다. 고개를 숙이자 남아 있던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게 눈에 들어왔다. 김하준이 정인의 허리를 양손으로 꽉 붙잡고 끝까지 잡아당겨 단숨에 밀어 넣었다. 

조금 전 안을 쑤셔 놨는데도 류정인의 구멍은 씹어 먹을 것처럼 조여 왔다. 뿌리까지 꽉 쑤셔 박은 채로 위아래로 느리게 문질러 주자 정인이 또다시 앓는 소리를 내며 하얀 허벅지가 팽팽하니 긴장하는 게 보인다.

하준은 정인의 몸을 머리부터 훑어 내려왔다. 류정인은 아니라고 했지만 확실히 오메가로 발현하고 나서 몸의 형태가 조금 바뀌었다. 전체적인 몸의 곡선이 부드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피부 또한 전보다 더 매끄러워져 만지는 사람을 애끓게 만들었다. 

몸을 감상하며 엉덩이를 꽉 움켜쥐자 구멍이 함께 조여 온다. 큭, 하준이 짙은 신음을 터트리자 이번엔 정인이 엉덩이를 앞뒤로 움직인다. 자신의 성기가 구멍을 쑤시는 장면이 눈앞에 노골적으로 펼쳐졌다.

“정인아, 후, 조금, 더 빨리.”

정인이 요분질을 하며 뒤를 돌아보고 하준과 눈을 맞췄다. 잔뜩 풀린 얼굴을 보고 있으니 가학심이 생겨난다. 하준은 허리를 양손으로 붙잡아 세게 들이박았다. 으윽, 정인의 몸이 앞으로 쏠리며 그의 어깨가 의자 밖으로 튀어 나갈 것처럼 움직였다. 

다시 한번 세게 박자 이번엔 몸이 더 앞으로 쏠린다. 당황한 정인이 팔을 뻗어 멈추려 했으나 박는 속도가 빨라 말이 입 밖으로 나올 겨를이 없었다. 흘러나오는 신음을 막으려 정인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자 하준이 그 손을 붙들어 뒤로 단단히 고정한다.

“소리 내. 괜찮아.”

정인이 고개를 젓자 하준이 각도를 틀어 정인이 느끼는 부위를 제대로 찍었다. 어윽. 허리를 뒤틀며 신음을 내지르자 또다시 같은 곳을 노려 집요하게 괴롭힌다. 몸이 앞뒤로 흔들리고 눈앞에 보이는 작은 불빛들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누군가 불을 켰는지 잠시 앞마당이 훤해진 집이 보였는데 그것 때문에 더 긴장되면서도 흥분은 곱절로 몰려왔다. 

***

이제 막 잠에서 깬 정인은 부스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밖으로 나오니 벌써 아침 9시가 넘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레오가 정인의 발아래에서 왔다 갔다 움직이며 몸을 비벼 댔다. 녀석을 안아 주는데 주방에서 서 집사가 나온다.

“늦게 일어나셨네요?”

정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김하준은 3일 전 해외로 출장을 떠났고, 집에 혼자 있기 심심하여 어제는 일이 끝나고 다혜와 함께 맥주를 마셨는데 그게 잘못되었는지 속이 계속 좋지를 않다. 

게다가 오늘은 제사가 있는 날이다. 할머니는 다른 건 몰라도 제사엔 꼬박꼬박 참석하기를 원하였고, 그것 때문에 하준과는 몇 번 마찰이 있었다. 손주를 끔찍하게 아끼는 할머니가 유일하게 양보 못 하는 부분이 바로 제사였다. 그래서 정인도 그것에는 뜻을 맞춰 주기로 했다.

“혹시 어디 안 좋으세요?”

차마 솔직하게 술병이 나서 그렇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둘러댄 뒤 정인은 본가에 가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씻고 나와 보니 서 집사는 장을 보기 위해 외출하였고, 레오는 혼자 창가에 앉아 일광욕을 즐기는 중이었다. 

드레스 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한복을 챙겨 나오는데 여전히 속은 메슥거린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레오를 홀로 남겨 두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는데 차로 이동하기 위해 기둥을 지나는 순간 누군가 갑자기 앞에서 튀어나온다. 

놀란 정인이 뒤로 주춤 물러설 새도 없이 남자가 정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얼결에 방어한답시고 돌려찼더니 남자가 뒤로 억 소리를 내며 쓰러진다. 정인은 당황하여 남자를 제압하려고 위에 올라탔다. 

“너 뭐야!”

남자의 몰골을 보니 하얀색 머리카락에 하얀색 수염이 덥수룩한 노인이다. 기이한 외모에 충격을 받아 넋을 놓고 있는데 갑자기 노인이 정인을 밀치고 일어나더니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번쩍번쩍 빛나는 그것은 놀랍게도 황금이었다. 

순간 노인이 사람 머리통만 한 황금을 정인에게 냅다 집어 던진다. 옜다, 받아라. 

놀라 얼떨결에 받고 나서 보니 빛깔이 오묘하고 신기하다. 도무지 시선을 뗄 수 없는 그런 생김새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번쩍 들어 노인을 찾았지만, 그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난 뒤였다. 

이게 대체 뭐지? 궁금하여 이리저리 살피는데 갑자기 황금이 덜덜덜 요동을 쳤고, 배 속으로 쑥 들어간다. 뭐야? 깜짝 놀라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레오의 까만 얼굴이었다. 냐- 레오는 잠을 깨우려는 듯 정인의 콧등을 혀로 핥았다. 

정인은 그제야 조금 전 그 괴상망측한 일이 꿈이라는 걸 알게 됐다. 별 희한한 꿈을 다 꾸네. 복권이나 사 볼까. 대체 왜 이렇게 피곤한 거야. 하품하며 시간을 확인하던 그는 얼굴이 확 굳었다. 적어도 12시까진 할머니 댁에 가야 했는데 벌써 12시가 다 되어 간다.

씻고 나와 침대에 기대앉아 있다가 그대로 잠든 것이다. 미쳤지. 미쳤어. 경악하여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차를 끌고 할머니 댁으로 이동하는데 속은 여전히 좋지 않다. 게다가 물만 계속 마셨더니 배도 고프고, 차까지 막혀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은 늦게 도착할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김하준의 할머니가 전화로 폭풍 잔소리 할 줄 알았는데 아직은 잠잠하다는 거다. 도착 30분 전, 정인은 그 이유를 알았다. 휴대전화가 없었다. 서두르느라 집에 두고 왔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하아. 정말 되는 일이 없구나. 하지만 돌아가기엔 늦었다. 

입구로 들어서던 정인은 마당 앞쪽에 여러 대의 차를 발견했다. 이미 도착한 사람들이 많나 보다. 마음이 급해진다. 서둘러 주차하고 대문 쪽으로 가는데 김하준의 모친인 주혜련이 입구에서 나오다 정인을 발견하고 멈춰 선다.

“어머님,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는데 주혜련이 놀라운 표정을 한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왔어?”

왜 왔느냐는 말에 정인은 의아한 얼굴로 쳐다봤다. 늦었다고 질책하는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그녀의 얼굴이 정말 궁금해서 묻는 듯하였다. 

“아프다며. 하준이가 오늘 너 못 온다고 했는데? 연락 안 했니?”

아… 정인은 뒷주머니를 더듬었다. 휴대전화가 있을 리가 없다. 서 집사가 말한 걸까. 주혜련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괜찮으냐고 묻는데 차마 아프다고 다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나아졌다고, 그래서 온 거라고 거짓말을 둘러대는데 저 멀리 김 회장이 나타난다. 

작년 그 난리를 겪고 나서 그는 대국민 사과를 하고 의원직에서 물러섰고 지금은 회사로 돌아간 상태였는데 김하준과는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인은 그것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미안했는데, 하준은 그동안 묵은 감정들이 터진 것뿐이라고 신경 쓸 것 없다고 단호하게 못 박았다.

“안녕하세요…아버님….”

인사를 하니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까닥 인사를 한다. 그러고 나서 주혜련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저 그럼 옷 갈아입으러 갈게요.”

정인은 슬그머니 둘 사이에서 빠져나와 옷을 갈아입고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김하준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려면 아직 3일이나 남았다. 앉아서 전을 부치는데 친척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그때마다 음식을 준비하다 일어나 인사를 하고 다시 앉아 음식을 돕고. 반갑게 아는 척을 해 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눈초리가 곱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 와중에 어디선가 카랑카랑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가, 너 아프다며?”

정인이 돌아보니 김하준의 할머니가 서 있었다. 정인은 들고 있던 뒤집개를 들고서 일어섰다. 할머니의 시선이 정인을 위아래로 훑는다. 멀쩡해 보였는지 대뜸,

“꾀병 부린 거냐.”

주름진 눈초리가 가늘어진다. 정인은 지금이라도 아픈 척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는데, 그랬다간 당장 병원으로 옮길 것 같아 관두고 대신 헤헤, 하고 웃음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사라진 줄 알았던 체기는 음식 냄새를 접할수록 심해졌고, 특히 생선 냄새를 맡을 즘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만 가면 끝이야. 전해 주고 와요.”

누군가 트레이에 올려 준 게 하필 생선이다.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이었는데도, 오늘따라 왜 이렇게 역한지 모르겠다. 숨을 겨우 참았다. 제사상에 음식을 진열해 놓던 김 회장에게 그걸 전달해 주기 위해 서 있는데 그가 생선을 받는 대신 정인을 흘깃 쳐다본다.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프니.”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정인은 구역질이 올라와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김 회장과 살가운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른이 묻는데 차마 모른 척 입 닫고 있을 순 없었다.

“아닙니다. 괜찮,”

기다렸다는 듯 생선 냄새가 코로 훅 들어간다. 정인은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우욱 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으나 구역질은 멈추지 않았다. 아버님. 이거! 들고 있던 생선을 김 회장에게 건네주고 밖으로 뛰쳐나가려는데 한발 늦었다. 

그에게 생선을 넘겨주기도 전에 구역질이 났고 그릇을 들고 있느라 손이 없는 바람에 입을 틀어막지 못해 김 회장의 한복에 토를 한 것이다. 토사물이라고 해 봤자 멀건 물이 다였으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소란스럽던 마루 안팎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정인이 고개를 들어 김 회장의 얼굴을 봤는데 그는 황당하다 못해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김 회장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고, 여기저기 수군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머, 무슨 일이래. 방금 시아버지 옷에다 토한 거야?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아까부터 좋지 않아 보이던데. 아니면 일부러 그런 건가? 사이 나쁘잖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정인이 사과하려는데 다시 구역질이 올라온다. 죄송합니다, 아버, 우엑. 당황한 나머지 생선 그릇을 김 회장에게 던지다시피 하고 밖으로 뛰쳐나오는데 수십 개의 눈동자가 뒤통수에 달라붙는다. 

아아, 젠장. 망했다. 술을 먹지 말걸. 뒤늦게 후회를 하였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밖으로 나와서도 여전히 구토는 멈추질 않는다. 이젠 물조차 나오지 않아 헉헉거리며 숨만 몰아쉬는데 누군가 정인을 부른다. 돌아보니 김 회장의 처다. 그녀의 얼굴에 걱정스러움이 가득이다.

“너 괜찮니?”

입술을 훔치며 예, 어머니. 하고 대답을 하며 몸을 일으키는데 머리가 핑, 돈다. 순간 세상이 뒤집히며 몸이 옆으로 고꾸라졌다. 어머머, 세상에.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려왔고 시야로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으나 그게 주혜련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는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으니까.

두런두런 말소리에 정인은 의식이 점점 또렷해졌다. 눈을 뜨니 하얀 천장에 긴 형광등이 보인다. 어딘지 말해 주지 않아도 냄새만으로 누워 있는 곳을 알 수 있었다. 눈동자를 굴려 옆을 보니 팔에는 링거와 장치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그 너머로 주혜련과 할머니, 서 집사가 모여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세 사람의 표정이 심각하다. 혹시 술병이 난 게 아니라 큰 병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걱정돼서 잠자코 지켜보는데 돌아서던 서 집사가 가장 먼저 정인을 발견한다. 

“어머, 깨어났네요. 정신 들어요?”

대답하려고 하는데 목소리가 콱 잠겨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녀의 뒤로 이어서 할머니와 주혜련이 다가왔다. 

“괜찮니? 어떻게 된 거야? 몸이 그렇게 안 좋았으면 오질 말았어야지.”

그 말에 서 집사가 바로 나섰다.

“죄송해요, 사모님. 제가 외출하는 바람에 제대로 말을 해 주질 못했어요.”

“서 집사님 탓을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휴, 어머님도 놀라셨죠?”

“말도 마라. 제사고 뭐고 국그릇 집어 던지고 뛰던 거 못 봤냐?”

“저 근데 깜짝 놀랐잖아요. 어머님이 저보다 잘 뛰셔서.”

“너 지금 시애미 놀리냐.”

“그런 건 아니에요. 건강하셔서 좋다는 소리였어요.”

“실없긴. 근데 하준인 왜 이렇게 안 오니. 온다고 한 거 맞아?”

“예, 소식 듣고 바로 비행기 탔대요.”

하준이 온다는 이야기에 정인이 놀란 표정을 하고 물었다.

“혹시…하준이한테도 연락하셨어요?”

“그럼 안 해? 자기 처가 쓰러졌다는데 와 봐야지.”

아, 정인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술 먹고 탈이 난 거 같은데…. 김하준이 오면 무슨 낯짝으로 얼굴을 봐야 할지 모르겠다. 사람들 앞에서 김 회장 옷에 토하고, 쓰러지고, 참 별꼴을 다 보여 줬구나 생각하니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다.

“얼굴이 왜 그러니? 또 아파?”

“아니에요….”

“아프면 말해라. 의사 불러오게.”

“아니에요, 할머니….”

그나저나 검사 결과는 왜 이렇게 안 나오니. 애미야. 가서 김 원장 불러와라. 사람 숨넘어가겠다. 할머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김 회장이다. 그는 언제 갈아입었는지 정장 바지와 셔츠 차림이었다. 

김 회장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의 기분이 지금 어떨지 상상도 할 수 없다. 며느리란 인간이 사람들 앞에서 얼굴에 대고 구토를 했으니 오죽할까. 정인은 그를 볼 낯이 없어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했다. 

그 뒤로 흰 가운을 입은 나이 지긋한 의사가 왔는데 익히 얼굴을 아는 사람이다. 볼 때마다 등 뒤로 다른 의사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더니 오늘은 젊은 의사만 하나 데리고 나타났다.

“정인 씨 어때요? 지금도 많이 어지럽고 구역질이 날 것 같아요?”

의사의 질문에 정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은 괜찮아요. 원장이 젊은 의사에게 차트를 받아서 넘긴다. 병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음, 하고 말을 하지 않자 참다못한 할머니가 먼저 나섰다.

“이봐요, 김 원장. 말을 해요. 답답해 죽겠네.”

“여사님.”

“…응?”

“축하드립니다.”

“무슨 소리야?”

“증손주 보시게 생겼어요.”

바로 알아듣고 할머니의 주름진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손주 며느님이 임신하셨어요. 빈혈이 있어서 당분간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세상에. 할머니가 휘청하고 쓰러지려고 하자 김 회장이 급히 받쳐 안는다. 다들 놀라고 기뻐하며 정인을 동시에 바라봤다. 정인은 얼떨떨한 심정으로 원장이 한 말을 되새겼다. 증손주? 증손주면 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말인가. 뒤늦게 이해가 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니 할머니가 앉지 말고 누우라고 성화다. 

서 집사는 감격하여 거의 울기 직전이었고, 주혜련도 마찬가지였는데 오로지 김 회장만 태연한 표정이다. 이미 들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믿기지 않는지 할머니는 의사를 붙들고 정말이냐고 물었다. 

“아직 초기라 피검사만 했는데, 다음 주 중에 내원하시면 초음파로 확인 가능할 겁니다.”

아… 정말 나 임신한 건가. 도무지 믿기지 않아 팔을 꼬집었다. 이것도 꿈 아니야. 그러고 보니 아침에 꾼 그 꿈 생각이 떠올랐다. 백발노인이 황금 덩어리를 줬고, 그게 배로 쏙 들어갔지. 

설마 태몽이었나. 아무래도 믿기지 않아 멍청한 표정을 하다가 뒤늦게 실감이 나서 울컥 눈물이 차오른다. 김하준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혹시 임신이 어려운 건 아닐까, 혼자 고민했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뺨으로 눈물이 후두둑 흘러내리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린다. 김하준이 나타났는데 얼마나 급히 뛰어왔는지 머리카락은 다 헝클어져 있고 숨은 넘어가기 직전이다. 급히 눈물을 훔쳐 내자 김하준이 굳은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정인아. 너 괜찮아?”

하준은 정인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고 이마를 짚고 하더니 눈이 빨간 걸 보고서는 나머지 식구들을 돌아봤다.

“정인이 왜 이래요? 할머니가 뭐라고 했어요? 아니면 아버지가 뭐라고 했어요?”

여차하면 싸울 기세다. 정인은 황급히 손을 뻗어 김하준의 팔을 붙들고 잡아당겼다.

“하준아.”

그러나 하준은 들은 척도 않고 식구들한테 성질을 냈다.

“그러게 제가 정인이 제사 안 보낸다고 했잖아요. 요즘 세상에 한 달에 한 번씩 제사 지내는 집이 어딨어요? 다음부턴 부르지 마세요. 그냥 저만 참석할게요. 아니면 아버지가 저 없다고 갈군 거 아니에요?”

정인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끼어들어 말리려고 하는데, 보다 못한 할머니가 나서서 하준의 손을 붙들었다.

“하준아.”

김하준도 그제야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는지 정인을 다시 돌아본다. 정인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간신히 참았다. 다들 정인이 말해 주길 바라는 눈치길래 정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축하해. 너 아빠 됐대.”

김하준은 한 대 맞은 얼굴로 눈만 깜짝였다. 어? 하고 다시 되묻더니 돌아서 식구들의 표정을 확인한다. 그리고 의사에게 마지막 확인을 받으려는 듯 응시한다. 김 원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자 하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그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사람처럼 입만 달싹였다. 할머니가 우린 그만 나가자. 둘이 있게 해 줘야지. 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식구들 앞에서 우는 꼴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둘만 남게 되자 비로소 하준은 참았던 감정을 드러냈다.

정인이 웃으며 그 얼굴을 올려다봤다.

“울어?”

“아니. 너무 놀라고… 지금, 하….”

“우는구나?”

“아니야.”

아니라면서 손바닥으로 눈물을 찍어 낸다. 아이는 상관없다고, 괜찮다고 했으면서 내심 속으로 바랐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정인이 양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가까이 다가온 하준의 허리를 껴안으며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며칠 만에 맡는 그의 페로몬 향 때문인지 속이 한결 편안해지는 기분이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꼭 끌어안았더니 김하준이 커다란 손으로 등을 토닥여 준다.

“미안… 내가 곁에 있었어야 했는데….”

얼굴을 보는데 속상한 표정이다. 정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도 실은 술 먹어서 그런 줄 알았어.”

문득 전날 마신 맥주 두 캔이 마음에 걸린다. 괜찮은 걸까. 의사한테 아까 물어보고 싶었는데, 식구들이 있어서 묻지를 못했다. 그러다 환자복 안에 감춰진 자신의 배를 내려다봤다. 김하준의 시선이 같이 따라오길래 잡고 있던 손을 배 위에 살짝 가져다 댔다.

“인사해. 안녕?”

말해 놓고도 부끄러워 머쓱해졌다. 그래 봤자 지금은 보이지도 않을 텐데. 김하준은 곧바로 의자를 끌고 와 앞에 앉더니 배를 유심히 쳐다본다. 그는 정말 아이를 발견한 사람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안녕?’ 하고 인사를 했고 눈을 들어 정인을 향해 싱긋 웃었다.

“나한테 방금 인사했어.”

***

하준은 착잡한 표정으로 욕실 문 앞을 서성였다. 안에서 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물소리가 들려온다. 남들은 입덧도 대신 한다는데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정인이 나오는데 퀭한 얼굴에 물기가 묻어 있다. 

배 속에 자리 잡은 태아를 확인하고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감격하던 것도 잠시 지옥 같은 입덧이 시작됐고 류정인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여 몸무게가 4㎏ 줄어들었다. 링거도 약도 소용이 없었다.

부축하여 침대로 데려가는데 흰자는 시뻘겋게 터지고 눈썹은 축축하게 젖어 엉망이다. 속상하다. 그나마 하준과 붙어 있으면 증세가 덜했는데 그 때문에 김하준은 회사의 업무를 집에서 해야만 했다. 24시간 붙어 있으니 좋으면서도 출산을 할 때까지 입덧이 멈추지 않아 힘들까 봐 걱정됐다.

새 셔츠를 꺼내 와 옷을 갈아입히는데 어깨뼈가 전보다 유독 도드라졌다. 안쓰러운 마음에 쳐다보던 하준은 정인의 가슴께로 시선을 내리다 잠시 멈칫했다. 살이 빠진 것과는 다르게 가슴은 살짝 부풀어 있었는데 젖꼭지의 색도 더 연해져 분홍색에 가까웠다. 

그걸 보는데 마음속에서 눌러 왔던 욕망이 꿈틀댄다. 하준은 기가 차서 스스로 채찍질했다. 세상에. 네가 사람이냐. 입덧하느라 힘든 사람을 눈앞에 두고. 나가 죽어라, 김하준.

“무슨 생각 해?”

어? 저를 올려다보는 새카만 눈동자를 마주하니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뜨끔하다. 정인의 옆에 앉아 파자마 단추를 잠가 주며 하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 생각도 안 했어. 단추를 다 잠가 주고 나니 정인이 배를 문지른다.

“계속 토만 했더니 배고프다.”

“뭐 먹을래? 먹고 싶은 거 있어?”

“사거리에서 파는 치킨 먹고 싶어.”

둘이 데이트하고 종종 들르던 곳이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준이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정인이 자리에서 일어서 바지를 갈아입고 파자마 위에 외투를 걸쳐 여민다.

“같이 가. 바람도 쐴 겸.”

“괜찮아?”

얼마 전 정인은 그 근처에서 파는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하였는데, 막상 도착하기도 전에 속이 좋지 않아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까보다 나아진 거 같아. 집에 있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그러자, 그럼. 둘이 함께 거실로 나오는데 레오가 창문 근처에 앉아 정인에게 아는 체를 해 온다. 가서 쓰다듬어 주니 새카만 눈동자가 괜찮으냐고 묻는 것처럼 반짝였다. 최근에 레오는 김하준과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가 시도 때도 없이 간식을 줘서 그런지 몸집도 커진 것 같았다.

정인은 살이 찌는 건 고양이나 사람이나 좋지 않으니 자제하라고 했으나 둘은 정인의 눈을 피해 간식을 몰래 주고받았다. 레오는 애교로 간식 얻는 법을 터득했고, 하준은 늘 거기에 넘어가 오늘도 역시 일정량이 넘는 간식을 줬던 모양이다. 

뚱냥이가 되면 안 될 텐데…. 

그 걱정도 잠시 밖으로 나와 보니 그새 계절이 바뀌어 날씨가 선선해졌다. 둘은 차로 이동하는 대신 걷는 걸 선택했다. 치킨을 사러 가려면 공원을 가로질러 가야 했는데, 집에만 갇혀 있으니 나무와 꽃 같은 사소한 풍경을 보는 것조차 즐거움이 되어 버렸다.

둘은 가는 내내 아이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까를 고민했다. 레오의 이름을 지을 때만큼이나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아직도 결론은 내지 못하고 있었다. 여아 남아 상관없이 중성적인 이름을 짓자고 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은 문제였다. 

공원에는 산책 나온 가족도 많았는데 그중에 유모차를 타고 있는 아이를 보니 더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질 않는다. 두세 살 된 것 같은 아이는 유모차에서 내려 달라고 떼를 쓰고 울고불고했고 아빠가 안아 주니 또 내려 달라고 울어 젖혔다. 그러다 내려 주니 언제 그랬냐는 듯 쏜살같이 어디론가 통통거리며 뛰어가고, 아빠는 쫓아가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하준과 정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졌다.

“되게 말썽꾸러기네.”

“흉보지 마. 우리 자식은 더 심할지 몰라.”

“나는 떼써도 안 들어줘. 잡초처럼 키울 거야. 강하게.”

풉, 그 말에 정인은 웃음이 터졌다. 레오의 애교에 넘어가 간식을 시도 때도 없이 주는 걸 보면 애한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다. 김하준은 아니라고 반박했으나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었다.

그렇게 치킨집이 저 멀리 나타났을 때쯤 김하준이 어? 하고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인가 싶어 봤더니 장사를 막 끝낸 건지 사장이 나와서 간판을 정리 중이다. 정인이 말릴 새도 없이 김하준은 그곳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가면서 보니 사장을 붙잡고 뭐라고 이야기를 한다. 정인이 도착하자 사장은 기름에 온도를 올리다 말고 조리실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환하게 웃었다.

“임신했다면서요. 축하해요. 다른 것도 아니고, 배 속에 아기가 먹고 싶다는데 내가 만들어 줘야지.”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치킨을 기다리는 동안 치킨집 사장은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 궁금해했다. 아직 성별을 모른다는 말에 두 사람을 닮았으면 인물은 훤하겠다고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치킨을 받아서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뒤 집으로 돌아가는데 냄새가 자꾸 스멀스멀 올라온다.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자 하준이 봉투를 열고 상자에서 닭 다리 하나를 꺼내 정인에게 건넸다.

“먹어.”

정인이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서?”

“먹고 싶을 때 먹어야 해. 집에 가면 또 속이 어떨지 모르니까.”

그래도…. 망설이는데 코앞에다 치킨을 갖다 대고 재촉한다. 얼른. 

아아, 침이 고인다. 

에이, 모르겠다. 

이제 막 튀겨 낸 치킨은 뜨끈뜨끈했다. 한 입 베어 무는데 바삭 소리와 함께 살이 입에서 녹는다. 아아, 감탄하며 온 얼굴로 기쁨을 표현하자 하준이 옆에서 흐뭇하게 웃으며 지켜본다. 저만 먹는 게 미안해 살을 찢어 입에 넣어 줬다.

가을 밤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자 하준이 다정하게 넘겨 주고 혹여나 추울까 싶었는지 외투에 달린 모자까지 꼭꼭 씌워 준다. 아기처럼 챙기는 바람에 닭을 먹다 웃음이 터졌다. 

김하준이 옆에 있어서 다행이다. 

비록 입덧으로 힘들긴 하지만 이 시간이 참으로 소중하고 고맙게 느껴졌다.

***

정인은 육아 서적을 들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집중하지 못했다. 눈은 이미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의 눈빛을 하고 레오와 놀아 주는 김하준을 좇았다. 눈빛을 느낀 하준이 왜 그러냐고 물었으나 도저히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린 뒤 육아 서적을 다시 보는데 글자가 도통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네가 이렇게 책 열심히 읽는 거 처음 봐.”

김하준이 옆에 오더니 머리통에 쪽, 입을 맞춘다. 고개를 돌려 쳐다봤더니 이번엔 입술에 쪽쪽. 정인은 무의식적으로 입을 벌리며 혀를 내밀다가 흠칫 놀라 고개를 뒤로 뺐다.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이상함을 알아챘는지 김하준의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무슨 일 있어?”

정인은 고민했다. 부부 사이에 비밀이 있어선 안 되지만, 아무래도 이걸 직접 입으로 얘기하기엔 살짝 부끄러웠다. 게다가 지금은 임신한 상태 아닌가. 괜히 말했다가 좀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걱정도 스럽고.

“말해 봐. 왜 그러는데.”

근데 김하준이라면 이해해 줄 것 같기도 하다.

“나….”

“응.”

“하고 싶다.”

“응?”

평소엔 눈치도 빠른 게 이럴 땐 왜 못 알아듣는 척해서 쪽팔리게 하는지 모르겠다.

“섹스가 너무 하고 싶어.”

앞에 섹스란 말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는데도 알아들었는지 눈이 커진다. 역시 너무 밝히는 것처럼 보이나. 저번 주 의사는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니 무리하지 말고 부부 관계를 해도 된다고 하였는데, 거기에 김하준은 정인이가 입덧도 심했고 몸도 약해 출산 때까지 할 생각이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옆에서 듣고 있는데 어찌나 황당하던지. 입덧이 심한 건 맞으나 몸이 약하진 않았다. 거기다 입덧할 땐 섹스고 나발이고 다 귀찮고 싫더니 지금은 너무 하고 싶다. 그냥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너무 하고 싶어 죽겠다! 찾아보니 임신 중기 때부터 호르몬의 변화로 성욕이 폭발할 수가 있다는데…. 심지어 적당한 섹스는 태아에게도 좋단다. 그러니 이건 꼭 나를 위해서는 아닌 거다.

뜻밖의 고백에 김하준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너야말로 반응이 왜 그래. 나만 존나 밝히는 거 같잖아….”

정인은 배 속 아이가 들을까 싶어 존나라는 표현을 ‘심하게’라는 단어로 재빨리 정정하였다. 김하준은 여전히 복잡한 얼굴이다. 그의 허벅지를 더듬으며 은밀하게 이야기했다.

“정말 출산 후에 할 거야?”

몸이 움찔, 잠시 고민하더니 단호한 표정을 되찾는다.

“그게 낫지 않을까?”

조금 더 가까이 붙으면서 김하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너도 들었지? 선생님이 조심해서 하는 건 괜찮다고 했어.”

그래도 김하준이 고민하는 눈치길래 조심스럽게 아래로 손을 뻗어 바지 위로 그의 성기를 주물렀다. 잘생긴 눈가가 일그러지더니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그 입술에 입술을 문지르니 성기가 점점 더 단단해졌다. 

정인은 하준을 침대 쪽으로 이끌었다. 침대에 앉아 그의 바지를 풀고 아래로 내리는데 이미 발기해 팬티 밖으로 뚫고 나오기 직전이다. 이래 놓고 잘도 그런 소릴 했구나. 김하준은 성욕이 강한 편이었으나 자제력 또한 엄청났다.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겪어 와서 알지 않은가. 그가 얼마나 인내심이 강한 보살인지.

이대로 뒀다간 출산할 때까지 손만 잡고 잘 수도 있다. 그러기 전에…. 혀로 속옷 위를 핥자 김하준이 이를 까득 무는 소리가 들린다. 침으로 축축하게 적셔 놓다가 눈을 들어 위를 보니 김하준의 눈빛이 욕망으로 이글이글 타오른다.

“하다가 배가 뭉치거나 아프면 바로 얘기해야 해.”

“응.”

“꼭 얘기해. 알았지?”

얼굴이 벌겋게 상기돼서 입으로는 선비 같은 소리를 지껄인다. 알겠다고 한 뒤 그의 성기를 팬티 밖으로 꺼내서 혀끝으로 귀두를 문질렀다. 하아, 머리 위로 짙은 신음이 쏟아져 내렸다. 혀로 뿌리부터 천천히 핥으며 올라오니 귀두 끝에 금세 맑은 액이 송골송골 맺힌다. 그것을 또다시 혀로 핥다가 입을 벌려 성기를 머금었다.

여전히 김하준의 성기는 크기부터 버겁다. 목구멍을 제대로 열지 못해 몸을 움찔 떨자 김하준이 바로 허리를 뒤로 뺐다. 괜찮아? 하고 묻길래 고개를 끄덕이니 정인을 일으켜 세워 침대에 눕히더니 그 위로 올라온다.

하준은 정인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4개월이 넘어가면서 배가 살짝 나오긴 했으나 티는 많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매일 밤 배에 대고 동화책을 읽어 주고, 자장가를 불러 주고, 마사지를 해 주었는데, 갑자기 섹스하려고 하니 기분이 이상하다. 

다시 고민을 거듭하는데 류정인이 보란 듯 셔츠를 걷어 올려 가슴을 내보인다. 가슴은 여전히 부풀고 색도 분홍색에 가까웠다. 

“가슴 빨아 줘.”

그 말에 하준은 하마터면 이성의 끈을 놓칠 뻔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가슴을 움켜쥐니 정인이 으음, 하고 몸을 틀며 신음을 흘린다. 살결은 더 보드라워지고 풍겨 오는 페로몬 향도 더 진해졌다. 가슴 근처에서 머뭇거리는데 정인이 뒤통수를 잡아 그대로 당겼다. 입술에 젖꼭지가 닿자 하준은 혀를 내밀어 아래에서 위로 핥아 줬다. 동시에 정인의 허리가 같이 올라온다.

“아아….”

크게 한입 베어 물고 쭉쭉 빨았더니 신음이 더 커진다. 남성 오메가는 모유 수유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는데, 그건 정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세게 빨자 무언가 투명한 게 나온다. 그것을 핥아 먹은 뒤 조심스럽게 몸을 어루만지며 아래로 내려왔다.

정인이 입고 있던 바지와 속옷을 아래로 끌어 내린 뒤 오금에 손을 넣어 두 다리를 활짝 벌렸다. 구멍은 이미 흥건하게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자기가 먼저 하자고 하더니 막상 벗겨진 채로 누워 있는 게 부끄러운지 정인은 눈을 가리고 있었다.

머리를 아래로 내려 구멍에 입술을 댔다. 춥춥, 혀로 게걸스럽게 핥으며 손으로는 정인의 성기를 부드럽게 쥐고 위아래로 문질러 줬다.

“으읏….”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자꾸 들썩이더니 하준의 손에 사정한다. 손에 묻은 정액을 닦고 콘돔을 들어 포장을 뜯고 성기에 씌웠다. 팽창한 성기가 터질 것처럼 아프다. 콘돔을 다 씌운 다음 그 끝을 정인의 구멍에 대고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아프면 말해.”

다시 한번 상기시키니 정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살을 벌리며 안으로 진입하는데 몇 달 만의 삽입이라 그런지 젖었음에도 조이는 힘이 장난이 아니다. 큭. 미간을 잔뜩 구기며 잠시 뒤로 뺐다가 다시 넣으니 처음보다 그래도 여유 있게 벌어진다. 

구멍이 벌어질 때마다 정인의 입도 같이 벌어졌다. 아아, 성욕이 많아졌다는 그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정인은 삽입만으로도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 정도만 삽입한 상태에서 조심스럽게 허리를 움직였다. 

찔꺽. 찔꺽, 움직이면서도 하준의 눈은 정인의 배에 머물러 있었다. 방금 사정을 마쳤던 정인의 성기가 다시 슬금슬금 고개를 든다. 허리를 둥글게 굴려 내벽 구석구석을 문지르자 정인이 두 손을 뻗는다.

“안아 줘.”

최대한 배가 닿지 않도록 자세를 잡으려는데 아무래도 어렵다. 하준은 성기를 빼내고 정인의 뒤로 가서 누운 뒤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 삽입을 시도했다. 목덜미에 입술을 문지르며 허리를 살짝살짝 움직여 주고 손으로는 가슴을 움켜쥐니 정인의 고개가 뒤로 넘어오며 교성을 지른다.

“아아!”

아파? 혹시나 해서 물었더니 아니라고 계속하라고 손을 뒤로 뻗어 하준의 허리를 잡아당긴다. 다시 시작했더니 그걸로 모자랐는지 엉덩이를 들썩이며 요분질을 친다. 젖꼭지를 손끝으로 꼬집자 구멍이 확 오므라들며 성기를 씹어 댄다. 하준은 있는 힘을 다 끌어모아 자제력을 발휘했다. 조금 더 깊게, 강하게, 넣고 싶은 충동을 누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고개를 돌린 정인이 하준의 입술을 찾았다. 채 닿지 못한 입술 사이로 혀가 문질러지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김하준, 좋아, 아아! 너무, 아!”

아래로 손을 내려 정인의 성기를 붙들고 흔들었다. 혀로 목덜미와 어깨를 게걸스럽게 빨았다. 배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하려니 움직임에 제약이 있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운 섹스였다. 곧바로 두 번째 사정을 하는 정인의 가슴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가녀린 몸이 파르르 떨렸고, 잠시 후 진정되더니 축 늘어진다. 서로 한참을 말없이 숨을 고르다 정인이 먼저 뒤를 돌아봤다.

“거봐, 괜찮잖아.”

라고 말하면서 웃길래 그 얼굴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한참을 끌어안고서 열기가 식기를 기다리는데 정인이 다시 다리 사이를 지분거린다. 하지만 하준은 이번엔 정말 단호하게 거절했고 그것 때문에 류정인은 삐져서 3시간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

콩알만 하던 배 속의 태아는 점점 자라 이목구비를 갖추었다. 산모 수첩 제일 첫 장에는 아이의 태명을 적는 칸이 있었는데 거기엔 ‘나무’라고 적혀 있었다. 황금을 받았던 태몽을 바탕으로 처음엔 황금이라고 지을까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다들 금수저라 황금이냐고 묻는 바람에 오해를 살 것 같아 결국 합의하고 나무라고 결정을 내렸다.

무럭무럭 자라라는 뜻이었는데 태명값을 하는지 아이는 정말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갔다. 초음파 사진을 넘겨 보던 정인은 마지막 아이의 얼굴을 찍은 것에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하였다. 

매번 사진을 찍으려고 할 때마다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이날은 무슨 이유에선지 얼굴을 순순히 보여 줬다. 그날 저녁 잠들 때까지 김하준과 이걸 보면서 얼마나 신기해했는지 모른다. 가족들에게도 보여 줬는데 다들 의견이 분분했다. 김하준을 닮았다는 사람도 있었고, 정인을 닮았다는 사람도 있었고.

그리고 바로 며칠 뒤엔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간다. 수술하는 거라 떨리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여 오늘 아침부터는 괜히 아이 방을 정리하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하준이 따뜻한 차를 한 잔 가져와 옆에 놓아 주더니 초음파 사진을 발견하고는 미소를 짓는다. 옆모습이지만 둘 다 닮은 거 같아 신기했다. 처음 병원에서는 딸이라고 하였는데 한 달 정도 지나 의사는 자신이 잘못 봤다며, 아들이라고 정정해 줬다. 다리 사이에서 없던 게 생겼다고. 

정인과 하준은 성별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적어도 정인은 그러했다. 하준은 딸을 내심 바란 거 같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의사가 아이의 성별을 점지해 준 것도 아닌데, 한달음에 달려와 병원 식구들한테 크게 한턱내더니 그것도 모자라 정인에게 자신이 소유한 건물 중 알짜배기를 골라 선물로 주었다.

정인은 기겁하며 거절했으나, 할머니는 여전히 그 문제로 정인에게 은근히 압박을 가하는 중이었다. 정인이 수첩을 가방에 챙겨 넣는 동안 하준은 로션을 가지고 왔다. 하준의 일과 중 하나가 이 시간이면 꼭 정인의 배를 마사지하는 것이었다.

정인이 단추를 풀자 하준이 로션을 손에 듬뿍 짰다. 김하준의 마사지 덕에 배는 트지 않았으나 막달이 되니 허리통증도 심해지고 앉아 있는 것조차 숨이 차고 버거울 지경이었다. 자신의 모친들도 이 과정을 거쳤을 거라 생각하니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

“우리 나무 이틀 뒤에 만나네. 그때까지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

알아들은 것처럼 갑자기 꿀렁하고 움직인다. 그걸 본 하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처음 배가 움직였을 때 정인은 놀라서 하준을 불렀고, 둘은 또 언제 움직일까 싶어서 한참을 턱을 받치고 기다리기도 했었다. 

지금은 깜짝깜짝 놀랄 만큼 움직임도 활발하여 정인은 나중에 운동을 시켜야 하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었다. 김하준이 페로몬으로 달래 주니 움직이던 배도 거짓말처럼 잠잠해진다. 

마사지를 마친 뒤 정인이 침대에 올라가 앉자 하준이 동화책을 한 권 들고 왔다. 배 속에 있을 때 아빠의 목소리를 다 들을 수 있다고 해서 매일 밤 책을 읽어 주는데, 처음엔 이것도 어색하더니 지금은 어지간한 흉내는 다 낼 수 있는 지경이 됐다. 나중에 아이가 커서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물어봐야지. 혹시 그때 아빠의 목소리를 들었느냐고. 

“옛날 옛적 한 나라에 얼굴이 아주 예쁜 공주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공주의 이름은 류정인이었는데, 정인이는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마음씨도 고왔어요.”

정인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김하준은 동화를 매번 자기 마음대로 바꿔 읽었다. 동화 속에서 정인이는 어느 날은 나무꾼이었다가, 또 어느 날은 욕심 많은 놀부가 되기도 했다. 누워서 김하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슬슬 잠이 온다. 그 와중에도 요의가 몰려왔다. 배가 부르니 화장실 가는 것도 귀찮다.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하준의 시선이 책에서 넘어온다.

“왜? 어디 불편해?”

“화장실.”

같이 가 주려는지 책을 덮길래 아니라고 손을 젓고 그대로 침대 아래로 내려와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미닫이문을 열고 작은 복도를 통과해 욕실 쪽으로 가는데 갑자기 배가 꽉 뭉치는 느낌이 든다. 아아, 정인이 배를 움켜쥐고 벽을 짚었다. 잠시 뭉친 건가 했는데 통증이 평소와 다르다.

숨을 몰아쉬면서 나아지길 기다리는데 순간 아래로 뜨끈한 무언가 주르르 흘러내린다. 정인은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하준아! 하고 부르자마자 김하준이 뛰쳐 들어왔다. 젖은 바지와 하얗게 질려 숨을 몰아쉬는 정인을 보고 김하준도 바로 알아차린 거 같았다. 그는 안으로 들어와 정인을 부축했고, 침대에 앉힌 뒤 상태를 확인했다.

“걸을 수 있겠어?”

정인이 고개를 젓자 바로 전화기를 집어 든다.

“김하준입니다. 저희 집으로 구급차 보내 주세요. 빨리요.”

목소리가 조급해진다. 눈으로는 정인의 상태를 확인하는데 정인은 차마 괜찮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아아, 비명이 나오다 목구멍이 콱 막힌다. 그냥 아픈 정도가 아니라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통증이 말도 못 하게 아프다. 얼굴을 찡그리며 어쩔 줄 몰라 하니 김하준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진다.

“괜찮아. 심호흡해. 따라 해 봐.”

김하준이 배운 대로 알려 주는데 고통 때문에 숨이 짧게 토막 쳐 흘러나왔다. 아픈데 그런 걸 할 여유가 없었다. 다시 한번 걸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 말에 정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너무 아파! 아아. 

“내 머리끄덩이라도 잡을래?”

그 말을 하는 김하준의 표정이 정말 진지해서 정인은 아픈 와중에도 웃음이 터졌다. 웃으면서 우니 하준의 얼굴이 더 심각해진다. 여태 김하준이 지금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처음 본 것 같다. 손을 잡아 주며 호흡을 유도하는데 손에 땀이 진득하니 배어 나온다.

그러다 거짓말처럼 통증이 가라앉았다. 정인은 하준에게 괜찮은데? 라고 말했으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구급대원들이 도착했을 때쯤 통증은 또다시 시작됐고, 처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한 것이었다. 

으악! 목에 핏대가 서고 눈앞이 어질어질하였다. 수술 날짜를 일부러 빨리 잡은 건데 벌써 산통이 시작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보통 오메가들은 수술을 했고, 그래서 날짜를 빨리 잡아 산통을 겪을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오늘…! 

병원이 바로 코앞인데 구급차를 타고 가는 내내 그 시간이 억만년처럼 느껴졌다. 

병원에 도착해 수술실로 옮겨 가는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고통과 함께 두려움이 몰려온다. 살아 나올 수는 있겠지. 옆에 있는 김하준을 보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한다. 수술실 앞에서 들어가기 전 김하준은 손을 꼭 잡고 얼굴을 쓰다듬어 줬다.

“괜찮아. 정인아. 금방 끝나. 나 여기 있을게. 울지 마.”

말을 하려는데 다시 통증이 시작됐고 간호사들이 이동 침대를 다급히 수술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문이 닫히기 전 김하준을 보는데 애써 웃으며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손을 들어 인사를 할 기운도 없었다. 수술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눈으로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팔에 꽂힌 주삿바늘로 약이 들어오며 의식이 점점 멀어지고 의사의 목소리도 아득해졌다.

하준은 초조한 표정으로 수술실 앞에서 왔다 갔다 움직였다.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수술복을 입은 간호사가 뛰어나온다. 아이가 태어난 건가. 하지만 말을 걸 틈도 없이 그녀는 하준을 지나쳤고 잠시 후 수혈팩 여러 개를 가지고 다급히 들어갔다. 

잠시였지만 열리는 문 틈으로 본 광경은 무언가 급박함이 느껴졌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간호사 하나가 황급히 문을 닫았고 하준은 저도 모르게 문손잡이를 붙들려다 손을 거두었다. 지금 안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 거지. 원래 수술하는 데 그렇게 많은 피가 필요한가.

손톱 언저리를 쥐어뜯고 입술을 짓씹었다. 별일 아닐 거야.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없어. 라고 확신하면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애가 타들어 간다. 불안감에 앉지도 못하고 수술실 앞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는데 드디어 문이 열리고 담당 의사가 나온다. 

그가 쓰고 있던 두건과 마스크를 내리는데 표정을 보는 순간 하준은 발밑이 꺼지는 아득함을 느꼈다. 의사는 곤란한 표정이었고, 하준은 그가 괜찮다는 말을 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삑, 삑, 기계음이 아득하게 들렸다. 얼마나 잠들었던 걸까. 아이는 무사히 태어났을까. 한 번씩 정신이 돌아왔을 때 낯선 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던 김하준 얼굴도 봤던 거 같은데. 꿈이었나.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하얀색 천장이었다. 목은 타들어 가는 것처럼 따갑고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고개를 돌리자 링거가 주렁주렁 매달린 게 눈에 띈다. 처음 마주한 건 의사도 아이도 아닌 김하준이었다. 그는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앉아 있었는데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입을 달싹여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짰다. 하준아…. 

감겨 있던 눈꺼풀이 스르르 열리며 갈색 눈동자가 나타난다. 깨어난 정인을 보며 하준이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표정을 보니 죽었다 살아난 사람을 보는 표정이다.

“왜 거기 앉아 있어…?”

자세히 보니 김하준 몰골이 말이 아니다. 머리는 부스스하고 눈은 빨갛게 짓무르고 수염도 까칠하게 자라고.

“울었어?”

김하준의 눈이 빨갛게 붉어진다. 하준은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는데 몇 번이고 입을 달싹일 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정인은 불현듯 무서운 생각이 몰려왔다. 아이는…? 차마 묻지 못하는데 하준이 먼저 말을 꺼낸다.

“기억 안 나? 너 피 많이 흘렸어. 중환자실 있다가… 오늘 회복실로 옮긴 거야.”

말을 하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린다. 정인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우선은 아이의 안부부터 확인했다.

“아이는…?”

“나무는 괜찮아. 건강해. 지금 신생아실에 있어.”

아아, 다행이다. 정인은 안도했고 하준은 정인의 옆으로 와 조심스럽게 손을 붙들고 얼굴을 매만졌다. 수술실 앞에서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는지 믿지도 않는 신을 다 부르면서 기도를 했었다. 제발 무사하게 해 달라고. 제발…. 그런데 류정인이 눈뜨자마자 아이 먼저 찾으니 이해가 가면서도 서운함이 몰려온다. 나는 너 때문에 지옥에 왔다 갔다 했는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눈을 뜨고 이야기하는 것도 기적처럼 느껴진다.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아 이를 꽉 물고선 참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제 괜찮아졌다는 의사의 말처럼 정인은 혈색도 돌아왔고, 눈빛도 맑았다. 중환자실에서 몇 번 눈을 떴는데 저를 알아보지 못한 그때의 심정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아기 직접 봤어?”

류정인은 아무래도 자기 상태보다 아기의 상태가 더 궁금한가 보다. 하준은 휴대전화를 꺼냈고 신생아실에서 간호사가 안고 있는 아이의 사진을 보여 줬다. 정인의 표정이 그제야 밝아진다.

“김하준 닮았네.”

“좋아…?”

“응. 잘생겼다. 아빠 닮아서.”

“실제로 보면 너도 닮았어. 눈썹하고 눈은 너 판박이야.”

“코는?”

“코는 모르겠어. 입술은 나 닮은 거 같아.”

“아픈 덴 없대?”

“응. 키도 다른 애들보다 크대. 손가락 발가락도 다 멀쩡해.”

“다행이다….”

감격스럽다. 직접 봤으면 더 좋겠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태어나 줘서 고마웠다. 벅찬 얼굴로 사진을 들여다보는데 김하준이 휴대전화를 옆으로 치우고 정인의 가슴에 뺨을 대고 끌어안았다. 

“뭐야. 애 아빠 되더니 어리광만 늘었네.”

정인의 농담에도 하준은 웃지 않았다. 얼굴이 수척하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김하준이 느꼈을 두려움이 상상도 가지 않는다. 달래듯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넘겨 주니 김하준의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둘째는 안 낳을 거야.”

눈물을 들킬세라 얼굴을 파묻는다. 어지간히 마음고생을 했나 보다. 짠하고 안쓰러워 등을 토닥이며 달래 주다 배에 시선이 닿았다. 홀쭉해진 배가 낯설다. 아직도 아이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인다. 한편으로는 아이를 빨리 만나고 싶어졌다. 만나서 내가 네 엄마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

공원은 저녁을 먹은 뒤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데이트하는 연인들과 가족들 틈에서 돌 정도 된 아이가 아장아장 공원을 걸었다. 어두운 밤인데도 불구하고 아이의 이목구비와 흰 피부는 눈에 띌 정도였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아이를 보며 모두 한마디씩 던졌다. 너무 예쁘다, 인형같이 생겼어.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하준은 유모차를 끌고 정인과 나란히 그 뒤를 따랐다. 저녁을 먹고 씻은 뒤 아이를 산책시키러 나오는 건 부부의 일상 중 하나였다. 이렇게 해야 그나마 밤에 푹 잘 수 있기 때문에.

아이는 성격이 활달하고 호기심이 많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다 꽃에도 가서 쪼그려 앉고, 나뭇잎을 건드려 보기도 했으며 강아지가 보이면 무서운지 종종걸음으로 뛰어와 아빠인 하준의 다리에 매달렸다. 그렇게 잘 가다가 다리가 꼬여 넘어졌고, 결국 울음이 터져 정인은 아이를 다시 유모차에 태우려고 했다. 

그러자 아이는 발버둥을 치며 타기 싫다고 떼를 썼다. 안아 줬더니 내려놓으라고 난리고, 내려 주자마자 또다시 안으라고 운다. 그 와중에 눈을 비비는 걸 보니 잠이 오는 모양이다. 하준이 다시 안고서 달래 주자 금세 어깨에 뺨을 기대고 스르르 눈이 감긴다.

그걸 본 정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성질이 꼭….”

“엄마야.”

그 말에 정인은 어이가 없었다.

“욕이지?”

“칭찬이야. 너 닮아서 얼마나 예쁜데.”

웃더니 누가 볼세라 정인의 뺨에 쪽 뽀뽀한다. 정인은 못 말린다며 한숨을 쉬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김하준은 우려했던 것보다 더 아이에게 끔찍했다. 아이를 낳으면 잡초처럼 키우겠다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닳을까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옆에서 보면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거기다 조그만 녀석이 눈치는 얼마나 빠른지 아빠가 자기에게 사족을 못 쓴다는 걸 알고 정인이 뭐라고 한마디 하기 무섭게 아빠에게 쪼르르 달려가 다리를 붙들고 구원의 눈빛을 보낸다. 그걸 보는데 웃기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하여 정인은 웃음부터 터지고 말았다. 

그렇게 안고서 공원을 반 바퀴 돌았고 잠든 거 같길래 유모차에 눕혔는데 기다렸다는 듯 눈을 번쩍 뜬다. 혹여 또 울까 싶어 유모차를 앞뒤로 밀어 줬더니 금세 다시 잠이 든다. 우느라 코며 눈가가 빨갛게 짓물렀다. 그러면서도 꿈속에서 무얼 먹는지 도톰한 입술을 연신 뻐끔댔다.

그걸 보며 정인은 하준을 불렀다.

“오늘 저녁은 야식 먹을까?”

“치킨?”

“오케이. 골뱅이 추가.”

“연우 자면 맥주도 한잔하자.”

상상만 해도 즐겁다. 둘은 여느 부부들과 다른 게 없었다. 할머니는 아이를 키워 주는 보모를 따로 두길 원했으나 그건 정인이 원한 게 아니었다. 직접 먹이고 씻기고 이렇게 셋이 오붓하게 산책도 나오고. 가끔 야식도 먹고. 행복이 뭐 별건가. 그런 생각을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연우는 피곤한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이런 날이 흔한 게 아니다. 둘은 쾌재를 부르며 아기 침대에 옮겨 두고 수면 등을 하나 켜 둔 다음 밖으로 나왔다. 나오니 레오가 와서 아는 체를 한다. 정인은 녀석을 안고서 뺨에 얼굴을 문질렀다. 

연우가 태어나고 레오에게 신경을 많이 못 써 주는 것 같아 항상 미안했는데, 안아서 달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발버둥을 치고 주르르 미끄러져 자신이 좋아하는 창가 자리로 간다. 배를 보니 김하준이 또 몰래 간식을 줬나 보다.

마침 하준이 밖에서 배달 온 음식을 받아서 들고 들어온다. 혹여 벨을 누르면 아이가 깰까 봐 하준은 밖에 나가서 기다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음식을 테이블에 펼쳐 놓고 맥주를 두 개 꺼내 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TV 볼륨을 최대한으로 줄여 놓고 맥주를 따서 안주와 함께 먹는데 꿀맛이 따로 없다. 

김하준이 고른 영화는 민아가 주연으로 나온 액션 영화였다. 민아는 배우로 승승장구하여 최근에는 굵직한 영화의 주연을 꿰찼다. 바로 며칠 전에도 아이를 보러 왔었는데 여전히 TV에서 나오는 얼굴은 익숙하질 않았다. 

“연기가 정말 많이 늘었어. 김우찬 감독 알지? 같이 작업하고 싶어 하더라.”

우려와는 달리 민아는 배우로 활동하면서 이렇다 할 스캔들조차 만들지 않았다. 아니, 만들지 못했다고 해야 하나. 거기엔 김하준의 몫이 컸다. 한번은 소문이 좋지 않은 배우 하나가 민아에게 찝쩍거렸는데 그걸 김하준이 먼저 알았고 그 배우를 불러다 대놓고 협박을 했다고 한다. 

그 소문이 퍼진 이후로 민아에게 먼저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고, 민아는 그건 그것대로 불만이 꽤 많았다. 어째서 자신의 연애 사업을 다른 사람도 아닌 형부가 방해하는지를.

“액션도 잘하네….”

“기특해?”

“응.”

웃으니 하준이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와 붙어 앉는다. 왜 그러나 봤더니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서 손을 만지작만지작 손목을 문지르고 은근히 추파를 던진다. 정인은 본능적으로 연우가 잠자는 방을 응시했다. 연우는 갓난아기 때부터 자다 깨서 우는 날이 많았고, 덕분에 둘은 부부 생활을 거의 하지 못하거나 하다가 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나마 최근에서야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단 너 먼저 씻어. 나 연우 보고 거실 욕실에서 씻을게.”

눈빛을 교환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인은 침실로 와서 옷을 벗고 샤워를 마쳤다. 밖으로 나오니 때마침 김하준도 가운을 걸치고 젖은 머리로 들어온다. 이 상황이 웃겨서 웃었더니 하준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린다. 쉿. 연우 깨겠다. 

콩알만 한 게 잠귀가 얼마나 밝은지 멀리서도 엄마 아빠의 목소리를 기가 차게 알아들었다. 정인은 침실의 조명을 어둡게 바꾸고 하준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키스하며 침대로 가서 누우니 김하준이 가운 사이로 얼굴을 들이민다. 간지러워. 

웃음을 흘렸더니 이어서 다리를 벌리고 그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은밀한 곳에 혀가 닿고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정인이 무릎을 세운 채 고개를 들어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 김하준의 넓은 등이 사냥을 하기 직전의 짐승처럼 오르락내리락한다. 

춥춥, 노골적인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배꼽 아래로 홧홧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구멍은 이제 타액과 함께 축축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김하준이 고개를 들어 번들거리는 입술을 손등으로 훔쳤다. 

올라와서 할래? 정인이 일어나자 그가 팔을 잡아 준다. 위치를 바꿔 김하준이 똑바로 눕고 정인이 그 위에 다리를 벌리고 올라앉았다. 가운을 풀고 잔뜩 발기한 김하준의 성기를 엉덩이로 깔고 문질러 주니 미간이 일그러지며 나직한 신음을 흘린다.

“큭….”

하준이 손을 뻗어 정인의 가슴을 더듬다 엄지로 젖꼭지를 문지른다. 정인은 쾌감에 발끝이 저릿해졌다. 엉덩이를 들고 김하준의 성기를 잡아 구멍에 귀두를 갖다 댔다. 

그대로 천천히 주저앉는데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다. 아아, 끝까지 다 넣고 나니 배 아래가 뻐근해진다. 배꼽 아래를 더듬어 만지니 꽉 찬 게 고스란히 느껴진다. 정인은 하준의 가슴을 짚은 채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으음….”

하준의 손이 정인의 엉덩이를 꽉 움켜잡고 비틀었다. 터트릴 것처럼 주무르다 허리를 붙들고 위로 쳐올린다. 으! 하필 가장 안쪽 예민한 곳을 건드렸다. 파르르 떠니 다시 강하게 허리를 튕긴다. 정인은 버티지 못하고 앞으로 몸을 쓰러트렸다. 김하준의 입술을 집어삼키고 혀를 섞는데 밑에서 쳐올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신음을 죽인 가운데 퍽, 퍽 살끼리 부딪치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때 하준이 갑자기 움직임을 뚝 멈췄다. 성기는 구멍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고 그의 눈은 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인 역시 그쪽으로 시선이 옮겨 갔다.

“들었어?”

“깼나…?”

둘 다 긴가민가하여 얼음이 된 채 있는데 기다렸다는 듯 으아앙.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런.”

정인은 침대 아래로 내려와 부랴부랴 가운을 추슬러 입었다. 하준 역시 마찬가지로 옷을 챙겼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밖으로 나와 방으로 가는데 연우가 침대 난간을 짚고 서서 눈물이 범벅이 되어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세상에. 

하준이 급히 연우를 안아 들어 토닥였다. 다독여 주는데도 뭐가 서러운지 목이 찢어져라, 꺽꺽 운다. 손가락을 쭉쭉 빠는 걸 보니 배가 고픈 듯하다. 달래 주며 연우 맘마? 라고 묻는데 울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눈물 콧물을 질질 짜면서 우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워 미치겠다.

정인이 아이를 안고 침실로 들어간 사이 하준은 능숙하게 분유를 탔다. 물의 온도를 확인하고 손등에 한 번 떨군 다음 가져와 보니 정인이 지친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고 연우는 어느덧 잠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잠들었어.”

하준은 한쪽에 분유병을 내려놓고 연우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끙, 하길래 옆으로 누이고 엉덩이를 토닥여 주니 스르르 잠이 든다. 잠투정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이렇게 혼을 빼 놓는다. 통통한 볼에 쪽, 입을 맞추니 입이 삐죽 나온다. 그 모습마저 미치게 사랑스러웠다.

아이가 잠든 모습을 확인하며 정인은 그 옆에 모로 누웠다. 그리고 그 건너에는 하준이 자리를 잡았다. 조명 하나만 켜 둔 채 두 사람은 아이를 사이에 두고 애정이 묻어나는 시선을 교환했다.

“안 되겠다. 서 집사님한테 하루 맡겨 두고, 호텔 가자.”

그 말에 정인은 웃으며 땀으로 젖은 아이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고 가슴을 토닥였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아이의 숨소리에 흐느낌이 아직 섞여 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손만 잡고 자야 할 모양이다.

두 사람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하준은 정인을 향해 속삭였다.

“잘 자.”

아쉬워하는 김하준을 향해 정인은 손을 내밀었다. 하준은 그 손등에 입을 맞추고 제 뺨을 문지른다. 입가에 미소가 생긴다. 사랑해.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했다. 아이의 머리 위로 손을 맞잡은 채 두 사람은 눈을 감았다. 다음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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