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노트북을 켜 메일을 확인하던 하준은 소파에 기운 없이 앉아 있는 정인을 흘깃 쳐다봤다. 피부가 흰 탓인지 잠깐 울었을 뿐인데도 눈가가 빨갛게 짓물렀다. 누가 들으면 변태라고 할지 몰라도 그 모습이 애틋하면서도 자꾸 나쁜 마음을 부추긴다.
하준은 노트북을 옆으로 치우고 난 뒤 정인에게 다가갔다.
“드라이브 갈까?”
마주 보며 바닥에 앉자마자 근처에 있던 레오까지 합세해 얼굴을 비비며 응석을 피운다. 그런 레오를 쓰다듬어 주고 나서 하준은 다시 물었다.
“아니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
정인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럼 다혜 씨한테 갈까? 오늘 가게 문 열었나?”
갑작스러운 제안에 정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갑자기 거긴 왜…? 그러자 하준이 자신의 셔츠를 끌어 내려 왼쪽 빗장뼈 아래를 가리킨다.
“여기다 네 별자리 새기고 싶어.”
정인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이제라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낫겠지…? 기대에 찬 김하준의 눈빛을 보니 입이 쉽게 떨어지질 않는다. 정인은 우물우물하다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하준아, 사실 내가 새긴 타투….”
말끝을 흐리며 눈치를 보자 하준이 피식 웃는다.
“아버지 별자리라며.”
놀라서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하준은 솔직하게 털어놨다. 민아가 말해 줬고 덕분에 정인의 가슴에 새긴 별자리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리기 위한 것이란 것도 알게 됐다고.
정인은 미안하고 민망하여 입술을 슬그머니 깨물었다.
“미안. 말하려고 했는데, 네가 너무 좋아해서….”
하준은 웃음이 났다. 이후에 몇 번 타투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안절부절못하는 정인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모른다. 되도록 모른 척하려고 했는데, 한결 후련한 표정을 보니 그냥 솔직하게 말할 걸 후회가 됐다.
하준은 정인의 손을 끌어와 만지작대며 따스하게 눈을 맞췄다.
“상관없어. 대신 너희 아버지만큼 나도 사랑해 줘.”
정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준이 가까이 다가와 꼭 끌어안는다. 따뜻한 품에 안겨 있으니 불안감이 사라진다. 그래서 정인은 아까 꾼 꿈에 관해서 설명했다. 꿈인데도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는지 모른다고.
“너한테 다 말할걸… 그럼 이렇게 멀리 돌아오지 않았어도 됐잖아….”
정인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어리는 걸 보고 하준은 다정하게 닦아 주며 웃었다.
“우리가 10년 전부터 사귀었다면, 지금은 헤어졌을지도 몰라.”
“왜?”
“네가 나한테 질려서.”
정인은 어이가 없었다.
“반대 아니야?”
“들어 봐, 정인아. 사실 내가 질투도 많고, 집착도 심해. 넌 몰랐겠지만.”
정인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했다. 집착이란 단어는 김하준과 어울리지 않았다. 질투야 살짝 했을지 몰라도.
“기억나? 너 좋다고 쫓아다니던 애 중에 유도하던 선배 있었잖아.”
기억을 더듬던 정인은 한 살 위 유도부였던 선배를 떠올렸다. 중학교 선배였고 김하준이 전학 오기 전부터 정인을 좋다고 쫓아다녔는데, 얼굴이 꽤 봐 줄 만하여 당시에도 인기가 많았었다. 문제는 돌대가리라 몇 마디 대화하고 나면 홀딱 깬다는 거였지.
“이름이… 김정우였나?”
“응. 너한테 먹을 거 주고, 맨날 교실 근처에서 어슬렁대고. 물론 그땐 우리가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 내색하진 않았지만, 너무 싫더라. 그래서 하루는 내가 아무도 모르게 엄청 찌질한 짓을 했어.”
“찌질한 짓?”
김하준이 할 찌질한 짓이란 게 뭘까. 곰곰이 생각해도 모르겠다. 김하준은 뜸을 들였고 궁금해진 정인은 그의 팔을 흔들면서 말해 달라고 보챘다. 그러자 하준이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 간다.
“사물함에 죽은 쥐하고 협박 편지 넣어 뒀어.”
“뭐?”
“그 선배가 쥐를 정말 무서워한다고 들었거든.”
처음 듣는 이야기다. 믿기지 않아 농담하지 말라고 했더니 김하준의 표정이 진지하다. 당시의 김하준을 생각하면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근데 돌이켜 보면 김하준이 전학 오고 나서 얼마 뒤부터 선배가 정인을 데면데면하게 대하더니 나중엔 아예 모른 척했다.
설마 협박이 먹혔던 건가.
“편지에는 뭐라고 썼는데?”
“류정인한테 한 번 더 찝쩍거리면 입 속에 쥐를 넣어 줄 거라고 적었어. 빨간색 볼펜으로 써서 존나 위협적으로 느꼈을걸.”
조금 전까지 훌쩍거리던 것도 잊고 정인은 킥킥대고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김하준이 그런 짓을 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샌님 같은 얼굴로 뒤에서는 잘도 모략을 꾸미고 있었구나.
“차라리 싸우지 그랬어?”
“그건 좀…. 너도 알잖아. 팔뚝이 내 허벅지만 했다니까.”
하준은 엄살을 떨며 질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인은 성인이 된 김하준을 보며 여러 차례 이질감을 느끼곤 했었는데, 변해 버린 게 꼭 제 탓인 것처럼 느껴져 속상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보니 순둥이로 돌아온 것 같기도 하고. 정인은 하준의 뺨을 양손으로 쥐고서 웃음을 겨우 참았다.
“귀여워.”
하준이 뻔뻔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귀여우면 뽀뽀해 주든가.”
정인은 망설일 것도 없이 입술을 가져다 대고 문질렀다. 그 틈에 하준이 입을 벌리고 혀를 집어넣는다. 장난처럼 시작된 키스가 점점 더 농밀해지며 두 사람은 소파에 몸을 포개고 엉켜 뒹굴었다.
하준의 손이 옷 안으로 들어와 정인의 피부를 더듬자 정인은 입술을 떼어 내고 황급히 막았다.
“뽀뽀만.”
“너 요즘 나보다 레오를 더 많이 만져 주는 거 알아?”
기가 막혀 웃자 하준이 이를 세워 정인의 여린 피부를 아프지 않게 괴롭힌다. 말했지? 내가 질투가 심하다고. 간지러워서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집요하게 장난을 친다. 그의 손과 입술이 닿는 곳마다 열이 가득 퍼지는 기분이었다. 김하준의 페로몬까지 더해져 몸이 순식간에 달아오르는데 누군가 인터폰을 누른다.
두 사람은 동시에 멈췄고 현관을 바라봤다.
“택배 더 시킨 거 있어?”
“어. 레오 방울 시키긴 했는데….”
정인의 몸에서 내려온 하준은 인터폰을 확인하고는 안색이 굳어졌다. 가만히 있자 정인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곁으로 와 선다. 거기엔 택배를 가져다주는 직원이 아니라 낯익은 얼굴 하나가 있었다.
집 안에는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갑작스러운 김 회장의 방문에 하준은 사람을 불러 쫓아내야 하나 잠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말이나 들어 보잔 심정으로 일단 안으로 들였다. 그러나 곧 불편해하는 정인을 보니 괜한 짓을 했나 후회가 밀려왔다.
“정인아. 들어가 있어.”
정인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김 회장이 말을 꺼냈다.
“왜.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그러니.”
김 회장은 담배를 꺼내 물었고 하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선 금연이에요. 나가서 피우시든가 아니면 돌아가세요.”
“말본새하고는.”
김 회장은 담배를 구겨 버리고 정인을 빤히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정인은 그를 외면했다. 김현우까지 매수해 자신에게 해를 가하려고 한 걸 생각하면 김하준의 아버지고 뭐고 한바탕 퍼붓고 싶어진다.
김 회장은 시선을 거두고 윤 비서에게 지시해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뭐예요, 이게?”
“계약서다. 류정인이 나하고 계약한.”
하준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계약했으니 제대로 이행하라고 찾아온 건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김 회장이 한숨을 내쉰다.
“파기하마.”
하준은 김 회장을 노려봤다. 고집스럽게 다문 입은 그 말을 끝으로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준은 자리에 앉았고 계약서를 집어 살폈다. 돈을 받는 대가로 류정인은 각 항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 하준의 시선이 멈췄다.
이혼 요구 시 즉시 이행한다.
저도 모르게 정인을 바라봤다. 정인은 고개를 떨구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하준은 무심한 표정으로 서류를 덮어 버렸다.
“무슨 꿍꿍이세요?”
“파기할 테니, 알아서들 해. 더는 네놈한테 신경 안 쓴다.”
“진심이세요? 뒤에서 또 이상한 짓 꾸미려고 그러는 건 아니고요?”
태연하던 김 회장의 눈빛이 송곳처럼 뾰족해졌다.
“망할 놈. 누가 할 소릴. 네놈한테 맞은 뒤통수가 아직도 얼얼하다.”
하준 역시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것 가지고 아프셨어요? 정인이한테 한 짓은 어땠는데요. 저 더 할 수 있었는데, 할머니 때문에 참은 거예요.”
“참아? 그런 놈이 사람들 앞에서 이 애비 망신을 줘?”
“아버지도 정인이한테 상처 주셨잖아요! 그리고 전 적어도 아버지한테 기업을 이끌 기회는 드렸어요. 제가 알고 있는 거! 가지고 있는 거! 다 터트렸으면 아버지 그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아세요?”
서슬 퍼런 아들의 협박에 김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 이 새끼야!”
서로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대고 분위기는 점점 살벌해진다. 정인은 하준의 손을 붙들며 그만하라고 말렸다. 한마디 더 하려던 하준이 그대로 입을 다물고 심호흡을 한다.
“알았으니까 가세요. 아버지 얼굴 보고 싶지 않습니다.”
“난 뭐 네가 보고 싶어서 여기 온 줄 알아?”
“그러니까 가시라고요.”
두 사람의 시선이 팽팽하게 부딪치던 와중에 김 회장이 먼저 홱 돌아서 나간다. 윤 비서가 엉겁결에 따라 나가며 흘깃 돌아봤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그런데 서너 발짝 가던 김 회장이 우뚝 멈춰 서더니 갑자기 되돌아온다. 하준은 그가 또 무슨 말로 속을 뒤집으려나 싶어 노려보기만 했다.
김 회장이 손을 내밀자 윤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 가방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낸다. 하준의 시선이 그 봉투에 닿았다. 김 회장은 아들을 마뜩잖게 쳐다보며 혀를 찼다.
“모자란 놈. 사방에 적을 만드는 것도 모자라, 애비까지 찾아오게 만들고.”
김 회장은 그걸 테이블에 툭 던졌다.
“당분간 집에 오지 마라. 어차피 오지도 않을 테지만.”
여전히 노려보는 하준에게 김 회장은 꼿꼿한 표정으로 일갈했다.
“그래도 네 엄마 전화는 받아. 네 엄마 병나면 그땐 나도 안 참는다.”
***
[이게 지금 어마어마한 사건이에요. 정치인 법조인부터 시작해서 얽히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 말입니다. 제가 고인이 된 이해수 씨에 관해 파헤치다가 양 씨에 대해 알게 됐는데, 처음엔 그냥 스폰서 중에 하나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이해수 씨가 사망하고 자살로 종결되려던 사건을, 어느 형사 한 분이 지독하게 파헤쳐요.]
[그분은 왜 의구심을 품은 걸까요?]
[제가 인맥을 동원해 알아본 바로는 이렇습니다. 이해수 씨 허벅지에 원래 타투가 있었는데 그게 사망하면서 감쪽같이 도려졌대요. 경찰에서는 본인이 직접 도려내고 자살했다, 이렇게 결론 냈는데, 이 형사분께서 그걸 그냥 넘기지 않았던 겁니다. 사실 아무리 죽기 직전이라고 해도 자기 살을 직접 도려낸다는 게 말이 됩니까?]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얘기네요.]
[그렇죠. 더 기막힌 건 뭔지 아세요? 그 타투를 새겨 준 사람이 바로 얼마 전 제가 게스트로 모신 김하준 씨의 파트너 류정인 씨입니다.]
정인은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움찔했다. 이미 합의가 된 것임에도 이름이 언급되니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방송하기 전 박찬은 폭로 내용을 미리 알려 줬고 하준은 정인의 이름을 빼고 관련이 없는 것으로 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하지만 정인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재판이 열리게 되면 자신이 증인으로 참석하게 될 테니까.
박찬의 옆에서 듣고 있던 남자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젓는다.
[심상치 않은데요. 우연치고는 너무 기가 막혀요.]
[맞아요. 그리고 이후로 이상한 일은 자꾸 일어나게 됩니다. 류정인 씨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이 계속 돌고, 심지어 강도 사건 있었던 거 아시죠? 그래서 두 부부가 거처까지 옮겼어요. 저 또한 조사 과정에서 비슷한 일을 겪었고, 그건 지난번에 여러분께 말씀드렸습니다.]
[거기다 담당 형사분도 사고를 당했다면서요.]
[네 아주 큰 사고였습니다. 상대가 음주 운전 트럭이었는데, 웃긴 건 이 트럭 운전수가 몇 년 전까지 양 씨 모친 집에서 일하던 유 모 씨의 아들인 걸로 밝혀졌어요. 물론 이름을 바꿔서 알아내는 데는 한참 걸렸습니다.]
[그럼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왜 여태 구속이 안 된 거죠?]
[그러니까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게. 제가 저번에 이 사건에 대해 최초 보도 해 드렸잖아요. 그때 기사 한 줄 나가지 않았고, 사람들 반응도 시큰둥했어요. 설마 회사 대표가 그런 짓을 했겠냐. 저 새끼 이번엔 구라다. 저러다 털려 봐야 정신을 차린다. 뭐 그런 말들이 많았죠. 여론도 안 좋았고요. 그리고 이건 처음 밝히는데 방송 이후로 이름 대면 알 만한 높은 분들한테 제가 은근히 압력도 받았습니다.]
[그게 누군데요?]
[하하. 그건 말 못 합니다. 여기서 까면 다 죽자는 거죠.]
[그런데 갑자기 검찰이 나섰다?]
[네. 말로는 그동안 물증이 없었는데 확실한 증거가 나왔다. 그러고 나서 오늘 아침에 구속영장이 발부됐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면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죠.]
[아직은 정의가 살아 있는 걸까요?]
[그건 재판 과정을 지켜보면 알겠죠?]
영상을 보는데 채팅창의 속도가 알아볼 수도 없이 빠르게 올라간다. 양욱환의 실명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졌고 중간중간 정인과 하준의 이름도 있었다. 정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봤다.
남부경찰서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보였다. 하준은 복귀한 이한 형사를 만나러 가 꽤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정인은 머릿속으로 김 회장을 떠올렸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건이 이렇게 진행된 데는 그의 역할이 컸다. 그가 던져 주고 간 서류에는 놀랍게도 양욱환이 그동안 저지른 비리와 청부 폭력, 살인 등에 대한 세세한 것들이 녹취와 문서로 담겨 있었다. 김 회장이 그것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모르나 모두 사실로 밝혀지면 양욱환은 당분간 빛을 보지 못하고 감옥에서 썩게 될 것이다.
건물을 주시하던 정인은 이한과 김하준이 같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본 이한은 얼굴에 상처를 그리고 손엔 붕대를 감고 있으면서도 전보다 훨씬 편안한 표정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이한이 웃으며 인사했다.
“정인 씨, 오랜만이네요. 하준 씨 혼자 온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이 악수하려고 손을 내미는데 하준이 슬그머니 가로막는다. 정인도 이한도 서로 벙찐 표정으로 하준을 쳐다봤다. 그것도 모자라 하준은 정인의 손을 잡아서 아래로 내렸다.
“정인이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이해 부탁드려요.”
악수하고 그거하고 무슨 상관이야. 눈으로 질책하니 김하준이 어깨를 으쓱인다.
“두 분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 같아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해수 씨도 아마 기뻐할 겁니다.”
그 말에 하준도 조금은 마음의 짐을 던 기분이었다. 정인에게 내색하진 않았으나 사망하기 며칠 전 이해수의 전화를 외면했던 게 내내 마음속에 걸렸었다. 당시 귀 기울여 이야기를 들어 줬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그때 안에서 형사 하나가 이한을 부르며 손짓한다. 이한은 두 사람에게 조만간 다시 보자는 인사를 한 뒤 그쪽으로 뛰어갔다. 무슨 사건이 터진 건지 승용차에 형사들이 우르르 타더니 사이렌을 울리며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지켜보던 하준은 정인의 이마를 짚어 열을 확인했다. 여전히 미열은 계속됐다. 병원에서 걱정하던 히트 사이클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딱히 몸 상태가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거기다 어젯밤에는 속이 좋지 않아 식사도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집에 갈까? 많이 피곤하지?”
정인은 고개를 저었다. 날씨도 좋으니 집보단 다른 곳에 가고 싶었다.
“그럼 바람 쐬러 갈까? 어디 가고 싶어?”
곰곰이 생각하던 정인은 하준의 목 아래를 응시하다 한 군데를 떠올렸다.
“샵 갈래?”
오늘 다혜는 쉬는 날이었고 그러니 가게에서 직접 하준에게 타투를 새겨 주고 싶었다. 다만 걱정이 있다면 하준이 뾰족한 걸 싫어한다는 게 문제겠지만.
“너 괜찮겠어?”
“응. 많이 나아졌어. 너야말로 괜찮아? 아플 수도 있는데.”
하준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해 주는 건 뭐든 괜찮아.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고 곧이어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롯가로 진입했다. 짙은 초록색으로 물든 가로수길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상쾌해진다. 창문을 열자 다소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올여름은 무척이나 더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정인 씨, 이게 얼마 만이야.”
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내린 하준은 예상치도 못하게 나타난 최 사장을 보며 눈빛이 사나워졌다. 대체 왜 류정인의 가게에 올 때마다 저 인간을 마주치는 건지 모르겠다. 누가 봐도 정인에게 호의가 있어 보이는 남자는 오늘은 검은 양복 대신 편한 운동복 차림이었다.
“안녕하세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근처에서 라운딩하고 들어가는 길에 잠깐 커피 사러 들렀지.”
그러고 나서 최 사장은 뒤에 있는 김하준을 쳐다봤다.
“그때 그 기사님이네? 덕분에 차 바꿨어요. 야무지게 박아 놔서 고쳐 쓰기 싫더라고.”
최 사장이 삑, 리모컨을 누르자 근처에 있던 고급 차량에 불이 번쩍 들어온다. 하준이 픽 비웃으며 네, 그러세요. 차 좋네요. 주인 닮아서 뺀질뺀질한 게. 라고 대답했다. 지켜보던 정인은 서둘러 하준이 자신의 파트너임을 설명하려 하였으나 말을 떼기도 전에 최 사장이 선수를 친다.
“정인 씨 형질 바뀌었다며. 소식 듣고 깜짝 놀랐잖아.”
“아… 보셨어요?”
“다행이야. 베타일 때도 매력 있었는데 이제 형질까지 바뀌었으니 파트너가 애 좀 끓겠어.”
최 사장이 정인을 향해서는 다정하게 웃고 김하준을 향해서는 다소 삐딱하게 미소를 짓는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는 걸 보고 정인은 당혹스러웠다. 뒀다간 하준이 또 남의 차를 박살 낼 것 같아 대충 인사를 하고서는 가게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하준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인상 펴.”
“이번에는 그냥 얼굴을 박아 버릴걸.”
정인은 웃으며 하준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이고, 착하다. 우리 하준이. 하준의 눈초리가 올라가길래 잽싸게 작업대 쪽으로 데려갔다. 작업하기 위해 노트북을 켜고 도안을 찾아내는데 하준이 뒤에서 껴안으며 목덜미에 코를 묻는다.
숨을 들이마시자 상큼한 과일 향이 풍겨 온다. 하준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정인의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더듬었다. 정인이 웃으며 몸을 움직인다.
“간지러워.”
“침대도 있는데, 타투 말고 우리 다른 거 할까?”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손을 떼어 낸 뒤 정인은 기계를 확인했다. 위잉 소리와 함께 기계 끝에 달린 바늘이 움직인다. 그걸 들고 돌아서며 하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팔 줘.”
“왜?”
“얼마나 아픈지 궁금하다며.”
하준은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내밀었고 정인은 팔 안쪽을 소독한 뒤 잉크를 주입하지 않은 상태로 기계를 작동시켰다. 뾰족한 바늘 끝이 움직이며 살갗을 찌르자 당황한 하준은 얼굴이 빨개져 황급히 손을 거뒀다.
“잠깐, 잠깐만!”
정인이 한쪽 눈썹을 치켰다. 타투는 위치에 따라 고통의 크기가 다르고 그것 또한 사람마다 제각각이었다. 예상치 못했는지 하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생각보다… 아픈데?”
정인은 웃음을 참았다. 김하준이 하려고 하는 위치는 이것보다 더 아프다. 그 말을 했더니 어지간하면 티를 내지 않던 김하준의 동공이 흔들린다.
“많이?”
“사람마다 달라서. 일단 누워 봐. 옷 벗고.”
정인이 눈짓을 하자 하준이 단추를 하나둘씩 풀어 셔츠를 벗는다. 탄탄하고 붓으로 그린 것처럼 보이는 근육들을 감상하며 정인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김하준이 바지까지 벗으려 하기에 제지하고 나서 작업용 베드에 눕혔다.
잉크를 주입하고 타투 부위를 알코올 솜으로 닦는 동안 하준의 눈동자는 정인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정인아. 나 떨려. 손잡아 줘.”
“손잡고 어떻게 작업을 해?”
“그럼 다른 데라도.”
하준의 손이 다리 사이로 들어오자 정인은 탁, 쳐 내고 옆으로 가서 섰다. 김하준의 긴장된 표정을 보니 새롭다. 어떤 경우에도 뻔뻔하고 태연하게 굴더니 바늘은 또 무서운가 보다. 하준이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굴리는데 정인이 스위치를 켰다. 윙 소리와 함께 움직이는 바늘을 가슴 위에 대려고 하니 하준이 다급히 정인을 부른다.
“왜 또?”
“뽀뽀해 줘. 그럼 참을 수 있을 거 같아.”
기가 막혀 쳐다보니 어서 해 달라고 보챈다. 마지못해 쪽, 쪽, 입술을 누르자 김하준은 흡족한 표정으로 양 주먹을 움켜쥐고 입술을 꾹 깨문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 정인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아야 했다.
“아직이야?”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3분의 1밖에 작업을 못 했는데 김하준은 자꾸만 보채고 엄살을 부린다. 처음엔 정말 아파서 그런가 싶었는데 갈수록 요구하는 게 늘어나는 걸 보니 그게 아니었다.
“나 이거 다 끝나면 뭐 해 줄 거야?”
“뭘 해 줘?”
“애들도 주사 잘 맞으면 엄마가 선물 주잖아. 사탕도 사 주고, 장난감도 사 주고.”
기가 막혀 쳐다봤다. 누가 보면 억지로 하게 만든 줄 알겠다. 대답하지 않자 김하준은 손을 뻗어 정인의 허리를 만지작댔다.
“이따가 선물 주면 안 돼?”
작업을 중단하고 그 손을 찰싹 쳐 냈다. 하준이 올려다보며 웃길래 정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틈만 나면 수작을 거는 것도 모자라 이번엔 페로몬을 노골적으로 뿜어낸다. 전과 다르게 그것에 반응하며 몸이 움찔 떨렸다.
“그만.”
눈으로 경고를 보내자 하준은 페로몬과 함께 손도 거두어 갔다. 김하준의 페로몬에 몸이 반응하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이러다 덜컥 히트 사이클이 찾아오면 어쩌지. 김하준은 자신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사실 김하준이 곁에 있어서 더 걱정이다.
작업이 끝나고 난 뒤 정인은 그 부위에 연고를 얇게 펴 발랐다.
“원래 연고도 발라?”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은 꾸준히 발라야 한다고 하자 눈빛을 반짝이며 묻는다.
“네가 직접 발라 줄 거야?”
“응.”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은밀한 데 새길걸.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정인은 모른 척 돌아섰다. 셔츠를 챙겨 주자 하준은 팔만 꿰고 정인에게 다가왔다.
“아파서 못 입겠어. 단추 채워 줘.”
말도 안 되는 투정이었지만 정인은 기꺼이 단추를 손으로 채워 줬다. 정인의 손끝을 내려다보며 김하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쪽, 기습적으로 입술이 부딪쳤다가 떨어졌고 마지막 단추까지 채웠을 때는 김하준의 손은 정인의 허리 위에 얹어져 있었다.
“속은 어때?”
“살짝 울렁거려.”
“집에 갈까?”
“아니, 커피 사서 산책하러 가자. 오늘 날씨 좋아.”
“괜찮겠어?”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는 사람과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것은 늘 꿈꾸던 것이었다. 같이 식사하고 차 마시고 산책하고. 만약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면 셋이 되겠지. 아니면 넷이 될 수도 있고.
생각해 보니 다섯도 괜찮은 거 같은데…. 머릿속에서 아이의 숫자는 계속 늘어나 축구팀을 만들 기세였다. 그걸 알 리 없는 하준은 정인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좋다.”
진심이 느껴지는 그 한마디에 코끝이 찡해졌다. 좋다. 살면서 보낸 날 중에 이렇게 행복한 날이 얼마나 됐던가. 20대의 대부분은 일에 빠져 지냈고, 누군가를 만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아니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기적처럼 김하준이 다시 나타났으니 이젠 절대로 놓치지 않을 테다.
이번엔 정인이 먼저 입술을 겹쳐 물었다. 입술 사이를 가르고 혀를 집어넣고 예민한 점막과 치아를 훑었다. 허리에 있던 김하준의 손이 옷 속으로 파고들어 몸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키스가 농밀해지고 손이 바지 안으로 미끄러지는 찰나였다.
“정인아. 작업 다 끝, 어머나!”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방문에 정인은 황급히 하준을 밀쳐 냈다. 그러다 타투를 새긴 자리를 건드렸고 하준은 고통에 인상을 찡그려야 했다. 놀란 다혜가 입을 틀어막고 눈을 또르르 굴려 눈치를 살핀다.
“나 갈까? 하던 거 마저 할래?”
정인이 말을 하기도 전에 하준이 나섰다. 그럴래요? 정인이 그런 하준을 툭 치고는 먼저 밖으로 내보냈다. 다혜에게 가게를 잠시 쓰겠다고, 바쁘지 않으면 얼굴이나 보게 잠깐 들르라고 했는데, 하필 그게 둘이 엉겨 붙어 물고 빨고 할 때일 줄은 몰랐다.
“다행이다. 사이 좋아 보여서.”
다혜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제 정인이 제대로 짝을 만난 것 같아 한시름 덜었다며. 내색은 안 했어도 들끓는 소문에 속상했던 모양이다.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가 많았으나 두 사람은 하준이 마음에 걸려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다.
다혜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와 걷는데 볕이 생각보다 뜨겁다. 차로 다가가 문을 여니 김하준이 운전석에서 누군가와 통화 중이다. 감독 이야기와 제작사 이야기가 들린다. 하준은 정인을 흘깃 보더니 서둘러 통화를 마쳤다.
“왜 벌써 나와?”
“너 혼자 두기 싫어서.”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준이 감격한 표정을 하더니 입술을 들이민다. 정인은 뒤로 물러나며 머리를 밀었다.
“틈만 나면.”
하준이 싱긋 웃으며 시동을 걸었다.
“그럼 출발할까?”
“일 때문에 바쁜 거 아니야?”
“급한 건 해결했어. 나머진 집에서 마무리 지으면 돼.”
비좁은 골목을 빠져나온 차는 도롯가를 20여 분 정도 달려 카페 거리에 도착했다. 서행하며 들어서니 입구에 아담한 크기의 카페 하나가 눈에 띈다. 둘이 자주 가는 곳으로 커피와 디저트가 유명했는데 평소보다 사람이 많아 오늘은 앉을 자리조차 없었다.
“다음에 올까?”
“아니. 먹고 싶은 건 바로 먹어 줘야지.”
하준은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안전띠를 풀었다.
“다녀올게.”
“같이 가.”
“여기 있어. 너 힘든데 서서 기다리게 하기 싫어.”
하준은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더니 운전석에서 내려 카페 쪽으로 걸어갔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이 훤칠하다. 카페 밖 테라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하준을 따라 움직인다. 하준이 사라진 뒤 그들이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동안은 비슷한 일이 반복될 것이다. 하준을 기다리며 정인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뉴스를 검색하니 양욱환에 관한 기사가 일제히 올라왔다.
기분이 이상하다. 며칠 전 김 회장이 건네주고 간 서류에는 양욱환의 비리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김 회장이 그것을 어떻게 구했는지는 모르나 왜 하준에게 주고 갔는지는 안다. 죽이네 살리네 해도 결국 벼랑 끝에서 그는 아들의 손을 붙잡았다. 물론 그럼에도 하준은 아버지와 화해할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심란한 마음을 애써 누르는데 누군가 똑똑 창문을 두드린다. 낯선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창문을 내리자 여자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한데 차 좀 앞으로 빼 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가 이곳에 정차하고 짐을 내려야 해서요.”
아. 백미러로 뒤를 보니 작은 트럭 한 대가 짐을 싣고 서 있다. 카페에 간 하준이 돌아오려면 한참 먼 듯하였다. 정인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여자가 트럭을 향해 손짓하고 정인에게 고맙다며 인사를 한다.
차 앞쪽으로 가로질러 가 운전석 손잡이를 막 잡는 순간이었다. 뒤쪽에서 끼이- 타이어 긁히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서던 정인의 코앞에 검은 차량이 멈춰 섰고,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이 문이 열리며 순식간에 서너 명의 남자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손쓸 새도 없이 남자들은 먹잇감을 낚아채듯 정인의 팔다리를 붙잡고 입을 틀어막은 채 차로 끌고 들어갔다. 황급히 문고리를 잡고 버텼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정인은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쳤다.
발로 차고 팔꿈치로 뒤에 있던 남자의 얼굴을 가격했다. 예상치 못한 발악에 남자들의 얼굴이 험악해지고 붙잡은 손아귀 힘도 우악스러워진다. 소싯적 주먹깨나 썼지만 건장한 사내 여러 명을 물리치는 것은 어려웠다.
얼굴에 축축한 무언가 닿고 코로 알코올 냄새가 훅 밀고 들어온다. 머리가 띵해진 정인은 본능적으로 숨을 참았다. 문이 닫히기 직전 카페에서 나오는 김하준이 보였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내팽개치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드드륵, 탁. 문이 닫히자마자 차가 쏜살같이 출발했고 코앞까지 다가온 김하준의 모습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정인은 일부러 몸을 축 늘어트리고 의식을 잃은 것처럼 위장했다. 입을 틀어막고 있던 거즈가 떨어져 나갔고 방지턱을 급하게 넘느라 덜컥하며 몸이 솟구쳤다.
“기절했는데요.”
“일단 묶어.”
그들은 정인의 손을 꽁꽁 묶어 결박하여 봉고차 뒷자리로 밀어 넣었다.
“뒤에 일행이 따라붙습니다. 어떡하죠?”
“뭘 어떡해! 따돌려!”
끼익, 차가 옆으로 휘청한다. 알피엠 올라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류정인 잡았습니다. 그쪽으로 바로 데려가겠습니다. 남자는 깍듯했다. 그사이 밖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굉음과 함께 차체가 요동친다.
“저 새끼. 죽고 싶어 환장했나.”
그들이 말한 새끼가 누군지 짐작이 됐다. 정인은 팔에 힘을 주고 어떻게든 테이프를 끊어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때 차가 갈지자로 휘청인다. 쿵, 차량 옆 부분에 머리를 박은 정인은 입 안으로 신음을 삼켰다.
“뒷 차에 연락해서 막아.”
곧이어 무전 소리가 들려왔다. 따라붙지 못하게 막든가. 아니면 받아 버리라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떻게든 벗어나려 이를 악물고 팔에 힘을 주는 동시에 차체가 쿵, 소리를 내며 충격에 덜컹인다.
“저 미친 새끼!”
“속도 더 올려!”
연속으로 차가 흔들리자 거친 욕설이 난무했다. 가누기 힘들던 몸뚱어리는 여러 번의 충격으로 의자 아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살짝 눈을 뜨고 보니 앞자리에 앉은 누군가의 발목이 얼핏 보인다. 그리고 좌석 아래 번뜩이는 칼날.
차가 방향을 틀 때마다 타이어가 바닥을 긁으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다들 정신이 없는 틈을 타 정인은 조심스레 손을 앞으로 뻗어 좌석 아래 붙어 있는 칼을 빼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 위에 묶인 손을 올려놓고 앞뒤로 문지르니 테이프가 점점 벌어진다.
“씨발. 끈질기네. 막내야. 왼쪽으로 꺾어서 골목으로 들어가!”
급하게 코너를 도느라 차가 뒤집힐 것처럼 휘청댔다. 한시가 급해진 정인은 있는 힘을 다해 칼날에 대고 테이프를 문질렀다. 등줄기에 땀이 배어나고 움직이느라 팔은 떨어져 나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툭, 순간 테이프가 완전히 끊어지며 양손은 자유를 얻었다. 살았다. 안도감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옆통수가 서늘하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을 때 의자 위쪽으로 여러 개의 눈동자가 험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송곳 같은 시선에 정인은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빌어먹을. 남자 하나가 정인의 멱살을 낚아채 끌어 올렸다. 이 생쥐 같은 새끼가! 그 순간 차 옆쪽을 무언가 쿵, 소리를 내며 들이받았고 차체가 기울었다.
방향을 잃은 차는 멈추지 못하고 술 취한 사람처럼 좌우로 휘청였다. 정인은 멱살을 잡은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머리로 들이받았다. 남자의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고 코에서는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형님! 차가 늘어났어요! 김하준 혼자가 아닙니다!”
운전석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게 무슨 뜻인지 파악할 새도 없었다. 또 다른 남자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정인을 끌어내려 했다. 정인은 놈을 향해 야무지게 주먹을 휘둘렀다. 빡! 소리를 시작으로 다른 놈들까지 가세한다. 차 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놈들을 향해 발길질하며 어떻게든 버티던 정인은 창밖을 보다가 하준의 차를 발견했다. 김하준의 차가 맹렬한 속도로 옆으로 붙는다. 이때다 싶었는지 승합차가 김하준의 차를 쾅 들이받았다.
하준의 차는 좌우로 요동쳤고 속도를 늦추는가 싶더니 금세 무서운 기세로 따라붙는다. 밀어 버려! 그냥 밀어! 누군가 소리쳤다. 그걸 보니 정신이 번쩍 든다. 더 놔뒀다간 김하준도 같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걸 미처 생각지 못했다.
정인은 버티는 것을 관두고 의자를 타고 앞으로 넘어갔다. 놈들이 정인을 포박하려 팔을 붙들고 다리를 붙드는 걸 뿌리치고 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머리채를 단숨에 휘어잡았다. 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핸들이 풀리며 차가 이리저리 움직인다.
놔! 놔, 이 개새끼야! 양쪽에서 팔을 붙들고 떼어 내려고 난리다. 세워! 차 세워! 씨발! 비명과 고함이 난무하는 가운데 목 아래로 서늘한 감각이 훅 치고 들어온다.
“뒈지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어.”
정인은 눈동자를 굴려 옆에 있던 남자를 봤다. 남자는 칼을 정인의 목 아래 겨누고 이를 빠득 갈았다. 여차하면 찔러 죽일 기세다. 그러나 어차피 끌려가도 죽는다. 정인은 눈을 번뜩이며 운전사의 머리채를 더욱 거칠게 잡았다.
당황한 놈들이 욕을 하며 정인을 제지했다. 목 아래 칼이 아슬아슬하게 걸린 상황에서 운전석에서 조금 전과는 다른 비명이 들린다. 고개를 든 정인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앞에 전봇대가 정면으로 다가온다.
운전사가 급하게 핸들을 꺾자 차는 균형을 잃고 옆으로 기울며 바닥에서 바퀴가 떨어졌다. 정인은 재빨리 손을 놓고 의자를 붙들며 몸을 낮췄다. 동시에 차가 뒤집히며 안에 있던 남자들과 마구잡이로 뒤엉켰다.
끼이익, 뒤집힌 차 윗부분이 아스팔트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귀를 찢을 듯 들려왔다. 귓속이 윙윙거리고 눈앞에 뵈는 게 없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유리창이 박살 나고 차체는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곳곳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정인은 자신이 어떤 덩치를 깔아뭉개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씨발…. 야, 어떻게 된 거야. 꿈틀거리고 몸을 움직이는 모습들이 마치 작은 통 속에 갇힌 애벌레처럼 보였다.
정인은 틈을 비집고 문 쪽으로 간신히 기어갔다. 누군가 다리를 붙든다. 정인은 본능적으로 반대편 발로 상대방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러나 벗어나기 무섭게 또다시 발목을 붙들린다.
“놔!”
“2호 차! 2호 차에 연락해!”
놈들에게 다른 패거리가 있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차량 앞으로 여러 개의 발이 우르르 몰려왔다. 빌어먹을. 불길함이 점점 증폭하는 사이 그들은 도구를 이용해 문짝을 빠르게 뜯어낸다.
두꺼운 철문이 뜯겨 나가고 벌어진 문틈 사이로 누군가 허리를 굽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멎었다. 김하준이다. 하준은 손을 넣어 정인의 팔을 붙들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겨우 밖으로 나온 정인의 얼굴 위로 햇볕이 쏟아져 들어온다.
하준은 굳은 표정으로 정인의 얼굴과 몸 곳곳을 만지고 확인했다.
“괜찮아? 다친 데 없어?”
목소리 끝이 떨리는 게 느껴진다. 곧바로 남자 하나가 뒤집힌 차 안에서 기어 나온다. 하준은 그의 손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구둣발로 짓눌렀다. 남자가 신음을 내며 올려다보자 하준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리꽂혔다.
곧이어 뒤로 검은 차가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덩치 큰 남자들은 칼과 몽둥이를 각자 손에 들고 험악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걸 본 정인은 하얗게 질려 하준의 손을 잡고 제 뒤로 숨겼다. 그런데 다가온 남자들이 놀랍게도 하준에게 인사를 한다.
“괜찮으십니까?”
“예. 나머지 차는 어떻게 됐습니까.”
“잡았습니다. 통화 목록 확인했고, 애들 풀어서 그쪽으로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겁니다.”
정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동안 하준은 남자에게 부탁했다.
“여기 수습해 주세요. 저는 정인이 데리고 병원 좀 갈게요.”
“혼자 가셔도 괜찮겠습니까? 아니면 저희 애들을,”
“아니에요. 누가 그랬는지 확인이 먼접니다.”
하준의 시선이 발아래 깔려 있는 남자에게 향한다. 하준의 구두는 아직도 남자의 손을 짓뭉개는 중이었다.
“어떻게든 입 열게 해야 합니다.”
죽여서라도 말이죠. 김하준의 그런 얼굴을 정인은 처음 본 듯하였다. 살기 어린 눈을 마주하니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잡고 있던 손을 꽉 움켜쥐자 그제야 돌아보며 김하준 같은 미소를 짓는다.
정인은 왼팔의 깁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평생 입을 환자복을 김하준 만나고 나서 다 입은 것 같다. 의사를 만나러 간 하준을 기다리는데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린다.
곁에 있던 간호사가 문을 열자 김하준의 할머니가 들어왔다. 그런데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은색의 안경을 쓴 남자도 함께였는데 그는 장 실장으로 통했고 키는 작았지만 단단한 체구에 눈빛이 매서워 한번 보면 절대 잊힐 인상이 아니었다.
“괜찮니?”
정인은 침대에서 내려와 바로 앉았다.
“예….”
할머니는 깁스한 정인의 팔을 보며 혀를 찼다. 주름진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녀는 곁에 남자를 불러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장 실장. 똑같이 가서 분질러 놔. 아니, 다리까지 분질러. 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정인은 그것까지는 모른 체했다.
장 실장이라는 남자는 과거 김하준의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부터 험한 일을 도맡아 처리하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의 부하들이 왜 그 시간에 거기 나타났는지는 하준에게 들어 알게 됐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당분간은 24시간 따라다니게 된 것도.
미리 말해 줬으면 끌려가면서 김하준 걱정은 덜 했을 텐데.
“네가 우리 집 오고 나서 조용할 날이 하루도 없구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인이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자 할머니가 큼, 헛기침을 한다.
“그렇다고 탓하는 건 아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야.”
“네….”
“전에는 뻔뻔하게 굴더니 그 한마디 했다고 왜 죄지은 것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어?”
“…….”
“너 그놈들 때려 줬다며.”
정인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자 할머니가 흐뭇한 표정을 한다.
“잘했다. 우리 집안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도무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라 하고 있는데 김하준이 나타난다. 하준은 불편하게 앉아 있는 정인을 보더니 인상을 쓰고 도로 침대 위에 올려놓고 이불을 다정하게 덮어 줬다. 정인은 할머니의 눈치가 보였는데 그 광경마저도 그녀는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가 뭐라고 해.”
“타박상이 심하대요. CT 찍은 건 이상 없고, 팔에 금만 갔대요.”
“다행이구나.”
“그래서 말인데… 잠잠해질 때까지 거처를 옮길까 해요. 좀 조용한 곳으로요.”
할머니는 입을 힘주어 다물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마땅한 곳이 하나 있다며. 네 할아버지가 자주 애용하던 곳인데 거기 있으면 누구도 못 찾을 거라고 장담하였다. 대체 어디길래. 의구심이 들었으나 그건 나중의 일이었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하준에게 은근슬쩍 김 회장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나 해서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인데, 네 애비는 이 일과 관련이 없다.”
“알고 있어요….”
“그쪽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넌 정인이 병간호나 잘해. 네 할아버지 있을 때는 눈도 못 마주치던 것들이 감히 내 손주를 건드려? 요즘 것들은 말만 깡패지, 예의가 없어. 기어오르지 못하게 목을 한번 밟아 줘야겠다.”
여든이 가까운 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더 험악한 욕을 하려다 멈추었고 장 실장을 데리고 사라졌다. 둘만 남게 되자 하준은 정인의 침대 옆에 앉아서 뺨을 만지고 머리카락을 정돈해 줬다. 정인의 뺨과 목에는 긁힌 자국이 곳곳에 남았고 그걸 보는 하준의 눈빛엔 속상함이 가득했다.
“미안…. 나 만나고 툭하면 병원 신세네.”
미안해하는 하준에게 정인은 웃으며 얼굴을 쓰다듬었다. 지금 보니 김하준의 팔과 이마에도 푸르스름한 멍이 생겨 엉망이다.
집에 도착한 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두고 내리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할머니의 비서였는데 정인을 납치한 놈 중 두 명이 입을 열었고 일을 지시한 게 양욱환이라는 것을 실토했다고. 놈들을 곧 검찰에 넘길 예정이며 블랙박스에 녹화된 영상과 주변 CCTV도 확보해 재판에서 중요한 증거로 쓰일 것 같다고 전해 주었다.
하준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인에게 내색하진 않았으나 납치되어 끌려갈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상상도 못 한다. 발밑이 허물어져 내리고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것 같았다. 죽을힘을 다해 놈들을 쫓아가며 들이박고 막으면서도 류정인이 혹시 잘못될까 봐 애간장이 끓었다.
“무슨 생각 해?”
가만히 서 있는 하준의 팔을 정인이 붙든다. 하준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고 나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서 집사보다 먼저 레오가 달려온다. 저 정도면 고양이가 아니라 강아지 아닐까.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뒤따라온 서 집사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저녁을 준비하는 중이었는지 앞치마를 맸고 안쪽에선 맛있는 음식 냄새가 풍겨 왔다. 그녀는 소식을 들었다며 정인의 다친 팔을 보고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많이 놀라셨죠?”
“아니에요. 팔만 조금 다쳤고, 멀쩡해요.”
“천만다행이에요. 대표님이 곁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참, 여사님께 이야기 들었어요. 내일 일찍 출발하신다면서요.”
“네. 저희가 없는 동안 레오 잘 부탁드려요.”
정인은 안고 있는 레오를 쳐다봤다. 녀석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것에 비하면 제대로 예뻐해 줄 시간이 없는 게 안타까웠다. 마음 같아선 데려가고 싶은데, 그럴 만한 곳이 아니라고 하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 지낼 곳에 관하여 정인은 제대로 들은 게 없었다. 그건 김하준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 말에 따르면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으며 둘이 지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데 대체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
서 집사가 저녁을 마저 준비하는 동안 두 사람은 침실로 와서 간단한 짐을 챙기기 시작하였다. 대충 옷만 챙기는 정인과는 달리 김하준은 마치 해외여행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이것저것 다양하게 챙겼다. 수영복을 보여 주며 어떤 게 나은지 묻길래 정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수영장이 있어?”
“당연히 있지 않을까?”
당연히 수영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더 놀라울 따름이다. 결국 수영복 두 개를 다 챙긴 하준은 이어서 작은 크기의 상자 여러 개를 담았다. 정인은 상자의 정체가 궁금해져 살펴보다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말았다. 피임 도구와 성인용 젤이었다.
“이걸 왜 챙겨?”
가방에서 빼려고 하니 하준이 도로 집어넣는다.
“혹시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제발 생겼으면 하고 기대하는 얼굴이다. 정인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씻기 위해 욕실로 가서 옷을 벗는데 왼쪽 팔의 깁스 때문에 쉽질 않다. 뒤돌아서니 언제 왔는지 김하준이 코앞에 와 있다. 그는 정인이 옷 벗는 걸 도왔다.
“들어가자. 씻겨 줄게.”
말려도 고집부릴 걸 알기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상의를 벗고 거울 앞에 선 정인은 자신의 몸을 보고 한숨이 먼저 흘러나왔다. 뒤따라온 김하준의 표정도 어두워진다. 몸싸움하느라 곳곳에 멍이 잔뜩 들어 본래의 피부색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평소 같으면 몸을 만지며 추근댔을 텐데, 김하준은 굳은 표정으로 정인을 씻기는 일에만 몰두했다. 혹여 멍든 곳을 건드렸을 때는 몇 번이고 괜찮으냐고 확인까지 하면서. 씻고 나온 뒤 하준은 정인을 의자에 앉히고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 줬다.
그동안 정인은 거울 속에 비친 김하준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자 김하준은 멋쩍게 웃었고 머리를 다 말린 다음엔 정인의 옆에 앉아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줬다.
김하준의 페로몬 향이 짙어진다. 몸이 반응하는 건지 남아 있던 긴장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그것은 자극이 아닌 안정을 주기 위함이었다. 정인은 하준의 뺨을 어루만지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나 괜찮아. 자꾸 그런 얼굴 하지 마.”
“응.”
“우리 가서 실컷 놀자. 신혼여행이라고 생각하고.”
하준의 입꼬리가 그제야 올라간다. 정인은 그의 콧등과 입술에 차례대로 입을 맞췄다. 위로이자 고마움의 뜻이었다.
***
장 실장이라는 남자는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었다. 트렁크에 짐을 실으며 정인은 레오와 서 집사에게 번갈아 인사를 건넸다.
“간 김에 푹 쉬다 와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지친 마음을 읽은 듯 그녀가 다독인다.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동행하는 사람은 정인과 하준 그리고 장 실장과 그의 수하까지 총 넷이었다. 도심을 벗어난 차는 고속도로로 진입하여 2시간 정도를 가다가 한적한 시골 도로로 빠져 쉼 없이 달렸다. 낯선 농촌의 풍경을 바라보던 하준은 앞자리에 있던 장 실장을 향해 물었다.
“이런 데 별장이 있었습니까?”
하준이 묻자 장 실장이 룸미러를 통해 뒤를 흘깃 봤다.
“별장은 아닙니다.”
그 한마디가 끝이었다. 할머니에게 듣기로는 할아버지가 회사를 하기 전, 그러니까 조직에 몸담고 있을 때 종종 머물던 곳이라고 했다. 거기 숨어 있으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고,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다고. 대체 어떤 곳이길래….
궁금증이 겹겹이 쌓여 가는 가운데 차는 도로가 아닌 산길을 타고 올라갔다. 산길은 구불구불했으며 바닥 상태가 엉망이었다. 굴곡진 길을 따라 몸이 들썩였다. 한참을 올라가던 차는 두 갈래 길중에서 왼쪽으로 꺾어졌다. 여태 온 것보다 더 험한 곳이었다.
나중엔 머리까지 울리는 기분이었다. 정인은 주변을 둘러봤다. 근처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 하준에게 보라고 손짓을 했는데 김하준은 고라니가 아닌 정면을 보면서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시선을 쫓아가던 정인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길은 끝났고 눈앞에는 울창한 숲이 전부다.
차를 멈춰 세운 뒤 장 실장이 돌아봤다.
“여기서부턴 걸어가셔야 합니다.”
“네?”
장 실장은 차에서 내렸고 수하를 통해 짐 가방을 들게 했다. 정인과 하준이 내리자 그는 차의 시동을 끄고는 앞장서 걸었다.
“잠깐만요.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제대로 온 거 맞아요?”
“조금만 걸어 올라가시면 됩니다. 오래전 비밀리에 지어 놓은 곳이라 차로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비밀리에 지어 놓은 곳. 이 산기슭에 대체 뭘 지어 놨단 말인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준은 고개를 젖혀 울창한 나무숲을 올려다봤다. 하늘 끝까지 솟아 있는 나무를 보니 가슴이 탁 트인다. 나쁘진 않네.
발밑이 미끄러워 정인의 팔을 붙들어 주는데 얼마 가지 않아 무언가 모습을 드러낸다. 얼핏 지붕 끝이 보일 때까지만 해도 설마 했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호화스러운 걸 좋아한 편은 아니지만 숨어 지낼 정도의 저택이라면 그래도 상당한 크기에, 수영장도 딸려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건….
“저게…뭡니까?”
때마침 바람이 불고 풍경 소리가 두 사람을 반기듯 울린다. 딸랑 딸랑 맑은 소리와 함께 회색 옷을 입은 승려가 나오면서 두 사람을 향해 합장한다. 오셨습니까. 장 실장이 그를 아는 듯 고개를 숙였다.
하준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고 정인은 신기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절의 크기가 아담했다. 저 멀리 비질을 하는 다른 승려가 눈에 띄었는데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자신을 여웅이라고 소개한 승려를 따라가다 하준이 장 실장에게 소리 죽여 물었다.
“잘못 찾아온 거 아니죠?”
장 실장이 보기 드물게 미소를 띠었다.
“아닙니다. 회장님께서도 좋아하셨던 곳입니다. 대표님도 머물다 보면 좋아지실 겁니다.”
끙, 하준이 신음을 삼켰다. 옆에서 걷는 정인은 들뜬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댔다. 아버지가 목사이다 보니 절에 올 일이 거의 없었지만 돌아가신 아버진 부처님 오신 날이면 교회 한쪽에 경축 카드도 함께 걸어 둘 만큼 타 종교를 포용할 줄 아는 분이셨다.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니 숲의 향이 밀려들어 온다.
“두 분은 여기 머무르시면 됩니다. 생전 조부님께서 사용하시던 방입니다.”
승려가 알려 준 건 절 끝에 있는 방이었는데, 문 앞에는 두 사람이 신을 것으로 보이는 흰색 고무신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승려가 문을 열자 깨끗하게 정돈된 안이 보인다. 물론 침대는 없지만. 이미 기대를 저버린 하준은 영혼 없는 표정으로 아주 좋네요. 하고 대답했다.
“외부인이 출입하긴 힘든 곳입니다. 안심하고 머물다 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정인이 공손히 인사를 했다. 승려가 가고 난 뒤 장 실장의 수하가 캐리어를 안쪽으로 옮겨 줬다. 방도 작아서 캐리어 둘 곳도 마땅치 않아 보였다. 곰곰이 생각하던 하준은 전화를 꺼내 할머니에게 연락하려 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며. 그런데 전화가 터지질 않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하준은 뒷목을 잡기 일보 직전이었다.
“혹시 여기… 전화 안 터집니까?”
장 실장이 절 뒤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근데 조심하셔야 합니다. 낭떠러지라, 예전에 아우 하나가 전화하러 갔다가 굴러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한숨을 내쉬던 하준은 뒤를 돌아보다 짐을 풀고 있는 정인을 발견했다. 이곳이 썩 마음에 드는 눈치다. 하준은 한풀 꺾여 휴대전화를 도로 집어넣었다. 괜찮은 척했으나 날마다 뉴스와 인터넷 방송을 확인하던 정인이었다. 이곳에 있으면 그런 것들로부터 잠시나마 멀어질 수 있겠지. 복잡하던 마음이 다소 누그러진다.
장 실장이 스님과 이야기를 하러 간 사이 하준은 방으로 들어왔다. 막상 들어와 보니 생각보다 더 작다. 하준은 짐을 푸는 정인의 옆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할머니한테 완전히 속았어.”
정인이 돌아보며 웃었다.
“난 좋아.”
“진심이야?”
정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준은 피식 웃었다. 류정인이 좋으면 그걸로 됐다. 물론 다른 건 힘들겠지만. 그러면서도 하준은 캐리어 한쪽에 놓여 있는 피임 도구를 보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사찰의 취침은 9시부터였다. 평소라면 하루 동안 일을 마치고 가장 활발하게 움직일 시간이다. 정인은 이불을 깔면서도 과연 잠이 올까 걱정이 되었다. 이불은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크기였다.
그것을 두 개 깔고 나서 사이를 조금 떼어 놓자 김하준이 손으로 당겨 붙여 놓는다. 그리고 먼저 눕더니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쳤다. 이리 와 얼른. 정인은 이불을 잡아당겨 거리를 벌렸다. 아무래도 김하준과 붙어 자는 건 위험하다.
“여기선 제발 경건하게 생활하자.”
“앞서가지 마. 내가 뭐 하자고 한 건 아니잖아.”
“의사도 당분간 안 된다고 했어.”
하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의사 이야기에 그는 더 보채지 않고 순순히 잡고 있던 이불을 놓아줬다. 그래 봤자 한 뼘 정도 떨어진 거리였는데 그것마저도 아쉬운지 자꾸만 이불을 잡아당겼고 잠들기 직전엔 본인이 원하는 대로 했다.
“나 더운데 벗고 자도 돼?”
아직 봄이고 산속의 밤은 쌀쌀했다. 그런데 벗고 자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쏘아붙였더니 부스럭댄다. 기어코 벗고 자려나 싶어 고개를 홱 돌렸더니 김하준이 곁으로 가까이 와서 코앞에서 얼굴을 마주한다.
“장난 안 칠게. 자.”
그의 손이 정인의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었다. 정인은 그 손을 꼭 잡고서 눈을 감았다. 잘 자. 조용한 가운데 정체 모를 새소리가 들려왔고 쉽게 잠들지 못할 거라는 걱정과는 달리 첫날의 긴장과 오는 내내 여독 때문인지 금세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꿈속에서 정인은 또다시 납치를 당했는데 어디선가 김하준이 나타나 정인을 구해 줬다. 그런데 김하준의 차림새가 어딘가 이상하다. 히어로물에서 볼 법한 쫄쫄이에 망토를 입었는데 머리까지 1대9 가르마를 반듯하게 타서 느끼함마저 흘렀다. 하하하하하- 거기다 과장된 웃음까지.
하하하- 귓가에 웃음소리가 맴도는 가운데 눈이 떠졌다. 시야가 어두컴컴했다. 방금 그것이 꿈이란 걸 깨달은 정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옆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난다. 고개를 돌리던 정인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하였다. 누군가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처음엔 귀신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김하준이었다.
“뭐, 뭐야, 너! 언제 일어났어?”
반쯤 몸을 일으킨 채 물으니 김하준이 잠긴 목소리로 대답한다.
“방금.”
“깜짝 놀랐잖아. 왜 그러고 있어?”
“잠이 안 와. 너무 일찍 잠들었나 봐.”
정인이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새벽 3시다. 김하준이 평소에 6시간 정도 자는 걸 생각하면 지금 일어나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정인 역시 하준을 발견했을 때부터 잠이 싹 달아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인은 기지개를 늘어지게 켰다. 밖은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렸다. 휴대전화를 켜자 김하준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그는 벽에 기대 나른한 표정을 하고 웃고 있었다.
“잠도 다 깼는데 뭐 하지?”
“글쎄.”
“나가서 산책할까?”
정인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이곳은 산이 깊다. 본가 근처에 있던 산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장 실장이란 남자도 떠나기 전 한밤중엔 돌아다니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아니면 영화?”
“영화?”
“태블릿에 영화 몇 개 받아 온 게 있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대답하기도 전에 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찾았고 그 안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전원을 켜자 그의 얼굴 위로 음영이 두드러진다. 꿈속에서 본 김하준의 1대9 가르마가 떠올라 정인은 피식 웃고 말았다.
“왜 웃어?”
“꿈꿨는데, 네가 쫄쫄이에 망토를 두르고 나를 구하러 왔어.”
“멋있었겠는데?”
음…. 정인은 입술을 꾹 다물고 웃음을 참았다. 그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그러나 딱히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했고 곧 영화 고르는 것에 집중했다. 앉을 의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둘은 벽을 등받이로 삼아서 나란히 기댔다.
“어떤 거 볼래?”
영화 목록을 살펴보던 정인은 잠시 멈칫했다. 영화라고 하기에 이건 제목이 너무….
“설마 이걸… 같이 보자고 받아 온 거야?”
“응. 왜 그렇게 혐오스럽게 쳐다봐?”
“너 제정신이야?”
“잊었어? 나한테 이런 거 가르쳐 준 게 누구였는지.”
정인은 할 말을 잃었다. 어린 시절 순진한 김하준을 꼬셔 야한 영상을 보여 준 적이 몇 번 있었다. 얼굴이 빨개지는 김하준을 놀려 먹다가 분위기에 끌려 키스도 하고 서로 손으로 장난도 치고 그랬는데. 갑자기 떠오른 옛 기억에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그래도 사찰에서 이런 거는 좀 아니지 않아?”
“부처님도 이해하실걸.”
“웃기지 마.”
“그럼 내가 아침에 가서 물어볼게. 스님한테.”
놔두면 김하준은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입도 벙긋하지 말라고 경고하자 하준이 이어폰을 정인의 귀에 꽂아 준다. 영상 하나를 제멋대로 재생시키는데 틀자마자 화면에 살색이 난무하며 귓가로 신음이 쏟아져 들어왔다.
“야.”
따지려고 하니 하준이 검지를 제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조용히 해. 스님들 다 깨겠다. 정인은 마지못해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화면 안에서는 오메가와 알파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베타가 되고 나선 이런 영상을 한 번도 접한 적이 없어 생경하고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러다 김하준을 흘깃 봤는데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의사가 하면 안 된대.”
빈틈을 보일세라 정인이 단칼에 잘랐다.
“그냥 봤어. 예뻐서.”
그런데 정인도 사람인지라 화면을 보고 있자니 몸이 슬슬 달아오른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김하준이 어깨에 기대 온다. 노골적으로 페로몬 향을 짙게 풍기는데 뱃속에서 욕망이 함께 꿈틀거린다.
김하준은 정인의 손을 잡고 손끝을 만지작거리고 문질렀다. 마치 지문을 확인하듯 끈적하게. 꽤 오랫동안. 뺨에 닿은 그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김하준은 영상을 열심히 시청 중이었으나 정인은 그런 건 이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순간 정인은 영상을 끄고 귀에 있던 이어폰을 뺀 뒤 바로 하준의 입술로 돌진했다. 입술을 포개어 물고 문지르니 김하준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엉켜 비벼졌다.
혀 밑을 시작으로 뿌리에서부터 핥아 올리자 정인은 몸을 움찔 떨며 다리에 힘을 줬다. 하준이 정인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아당겨 제 허벅지 위에 앉힌다. 입술이 잠시 떨어지고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다정한 얼굴과는 달리 엉덩이를 감싸 쥔 김하준의 손에는 힘이 실렸다. 하준은 정인의 셔츠를 끌어 올려 끝부분을 정인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물고 있어 봐.”
정인이 입으로 그것을 물자 하준은 곧바로 정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다. 정인은 옷을 입에 문 채로 신음을 삼켰다. 그때 문밖에서 저벅저벅 발소리와 함께 작은 불빛이 스치고 지나간다. 스님들은 새벽 일찍 일어난다고 하던데, 설마 이 시간에….
정인이 그만두라고 하준의 어깨를 밀어내는데 도통 물러나질 않는다. 쪽쪽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물고 있던 옷을 뱉고서 김하준의 어깨를 세게 떠밀어 떼어 냈다. 번들거리는 눈빛이 정인을 응시한다. 왜? 하고 입 모양으로 묻길래 정인은 밖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스님들 일어,”
몸이 휙 뒤집히며 졸지에 바닥에 눕혀졌다. 위에서 저를 바라보는 김하준의 눈빛이 이글거린다. 말리려고 입을 벌리자마자 먹혀 버린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혀가 마음대로 입 속을 헤집으니 머리가 아득해진다. 김하준의 계략에 말려 들어간 기분이다.
행위가 거듭될수록 그의 욕망이 무섭게 느껴진다. 깜깜한 시야로 불꽃이 번쩍이는 착각이 일었다. 하준은 숨을 몰아쉬는 정인의 귓가에 대고 음습하게 속삭였다. 흉내만, 흉내만 낼게. 응?
***
“밤새 잘 주무셨나요?”
정인은 멍한 얼굴로 애써 웃었다. 새벽에 잠들었다가 눈을 떠 보니 아침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김하준은 어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대충 씻고 밖으로 나와 마루에 앉아 있는데, 어제 자신을 마중 나왔던 스님이 인사를 건네 온다. 인자한 눈빛을 보니 죄책감이 밀려온다. 아아, 부처님. 죄송합니다.
마음속으로 사죄를 하고 나니 저 멀리서 김하준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운동복 차림이다. 그는 정인과 함께 있던 스님에게 합장으로 인사를 하고 산뜻하게 웃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스님.”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예. 아아주 좋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만상을 찌푸리고 당장 돌아갈 것처럼 굴던 사람이었는데, 하루 사이 태도가 달라지니 스님도 의아한 모양이다. 하지만 더 묻진 않고 꾸벅 인사를 하더니 그대로 갈 길을 간다. 스님이 떠나고 난 뒤 정인은 하준을 바라봤다.
“어디 다녀와?”
“산책. 저 아래 계곡 있는데, 물이 진짜 깨끗해. 예쁜 꽃도 많고. 이따가 둘이 갈래?”
데이트 신청을 하는 사춘기 소년 같은 표정이다. 그 얼굴에 정인의 가슴이 덩달아 설렜다.
“응.”
마침 바람이 불어와 머리 위 풍경을 흔들어 놓았다. 맑은 쇳소리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젖히고 그것을 바라봤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이내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하준은 사찰 뒤 절벽 앞에서 휴대전화를 높이 치켜들었다. 사찰에 머문 지 일주일 만에 외부로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신호가 잘 잡히질 않는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와중에 부하 하나가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져 다쳤다던 장 실장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렇게 한참을 실랑이 벌이다 마침내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서 집사의 놀라고 반가운 얼굴이 화면에 나왔다. 어머, 세상에. 대표님 어쩐 일이세요. 잘 지내고 계신 거죠?
“저희는 잘 지내요. 집사님하고 레오도 잘 지내죠?”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화면이 움직이더니 이번엔 레오가 나타난다. 밥을 먹고 있던 레오는 고개를 돌려 냐- 하고 소리를 냈다. 마치 인사를 건네듯. 정인과 하준은 그것을 보며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잘 먹고, 잘 놀고, 있어요. 저희는… 걱정 마시고… 두 분 잘, 지내세요.]
말이 끊기고 화면이 자꾸 멈춘다. 하준은 조금 더 손을 높이 들어 전화가 터지는 위치를 찾았다. 저도 모르게 벼랑 앞까지 걸어가니 정인이 뒤에서 옷을 잡아당긴다.
“그러다 떨어져.”
서 집사와 통화를 마친 다음에는 정인의 엄마와 민아에게 연락했다. 영상통화가 어색한지 엄마는 화면이 아닌 영상 아래쪽을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밥은 잘 챙겨 먹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늘 그렇듯 그녀는 자식 걱정뿐이었다.
반면 민아는 개인 방송을 하는 것처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꼴값을 떨었다. 온갖 예쁜 포즈를 다 잡고 머리를 가만두지 못하고 계속 만지며 언제 자신을 데뷔시켜 줄 건지 하준에게 묻기까지 했다. 보다 못한 정인이 중간고사를 잘 치렀냐고 묻자 전화는 바로 끊겼다.
그리고 하준의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녀는 안마 의자에 누워 TV를 시청 중이라고 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니 거기서 푹 쉬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고 두 사람을 안심시켰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과 간단한 통화를 마치고 나니 산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예쁘게 물든 하늘과 멀리 보이는 작은 마을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넋 놓고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 정인의 뒤로 하준이 와 허리를 껴안았다.
“멋지다.”
정인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려와는 달리 숲에서의 고립된 생활은 시간이 지나자 꽤 익숙해졌다. 물론 고기 한 점 없이 나물과 함께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은 늘 아쉬웠지만. 서울로 돌아가면 시원한 맥주와 치킨을 가장 먼저 먹기로 두 사람은 약속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심란했다. 이곳에 온 뒤부터 미열과 구토, 복통 등의 증상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걱정하던 히트 사이클도 금세 나타나지 않았고 몸도 점차 안정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갑자기 멈춰 버린 증상에 몸이 가벼워진 건 좋았지만, 다시 베타가 된 건 아닐까, 조금 걱정스러웠다. 이미 한 번 겪었지 않은가. 어이없이 하루아침에 뒤바뀌어 버린 상황을. 혹시 침을 맞고 약을 먹어야만 유지되는 건 아닐까. 계속 그 한의원에 갔어야 하나.
하준에게 말은 하지 않았으나 정인은 혼자 별별 상상을 다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김하준이 앞니로 귓불을 깨문다. 아. 통증에 돌아보자 그는 눈을 흘겼다.
“내가 이렇게 찰싹 붙어 있는데, 왜 딴생각해?”
“아닌데.”
“했어. 방금 느꼈어.”
“귀신이냐…?”
아! 귀신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하준은 며칠 전 본 귀신 이야기를 했다. 잠깐 밖에 나왔다가 숲에서 무언가 휙 지나가는 하얀 물체를 본 것 같다며. 말도 안 된다고 하였으나 며칠째 이야기를 하는 걸 봐선 뭔갈 보긴 본 모양이다. 아니면 지나가던 고라니일 수도 있고.
“근데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하준이 물었고 정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뭔데?
“이렇게 한 달만 더 버티면 나도 스님이 될 것 같다는 거야.”
어이가 없어 웃었더니 한숨을 내쉬며 더 달라붙는다. 정인은 하준을 떼어 내고 나서 뒤를 돌아봤다. 웃으며 가볍게 입을 맞추고 자리를 뜨려고 하니 어깨를 낚아채서 입술을 단번에 집어삼키고 그것도 모자라 쪽쪽 빤다.
그때였다. 흠, 하는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에 둘은 놀라서 황급히 떨어졌다. 사찰 바로 옆에서 나이 든 주지승이 온화하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며칠 전부터 밖에서 손이라도 잡을라치면 그가 어김없이 나타났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죄송합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급히 사과하고 주지승의 눈을 피해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자마자 하준은 정인을 벽에 몰아붙이고 허겁지겁 입술을 탐했다. 달콤한 페로몬 향기가 방 안에 퍼진다. 자고로 하지 말라는 짓은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었다.
***
“잘 지냈어?”
두영은 오랜만에 나타난 하준을 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김하준이 회사에 있을 때는 저 인간 맨날 놀러 나오나 싶었는데, 막상 대신하여 일을 맡게 되니 신경 써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대표님 왜 이제 나오셨어요. 저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요.”
두영이 끌어안으려 하기에 하준은 질색하고 비켜섰다. 안지는 말고. 그러자 두영이 서운한 표정으로 왜 전화도 받지 않았느냐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고 따진다. 갑작스레 두영이 대표 대행을 하게 되면서 업계엔 별별 소문이 나돌았다. 처음엔 김하준 대표가 실종된 거란 얘기가 퍼지더니 나중엔 소문이 부풀어져 사망설까지.
“몇 번 말해. 전화를 안 받은 게 아니라 못 받은 거라고 했잖아.”
재킷을 벗은 하준은 책상에 앉았다.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한쪽에 쌓여 있는 서류들을 하나씩 살펴보는데 두영이 가까이 와서 설명을 보탠다.
“우선 급한 것만 추렸어요. 나머진 메일로 보냈으니 확인하시면 돼요.”
“응. 고마워.”
그답지 않은 다정한 말투와 표정에 두영은 낯빛이 어두워졌다.
“왜 그러세요?”
“뭐가.”
“안 그러셨잖아요.”
“그러니까 뭐가.”
평소라면 일단 갈구고 시작하는 게 김하준이다. 그런데 선뜻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상큼하게 미소까지 지어 보이지 않았나. 그러고 보니 눈빛이나 분위기가 전보다 훨씬 편안해 보인다. 남들은 김하준을 가진 게 많다고 부러워했지만, 두영이 오래 지켜본 그는 늘 무언가 결핍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이것이, 사랑의 힘인가요?”
감탄을 하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하준이 보던 서류를 앞에 툭 던지며 인상을 쓴다.
“개소리하지 말고, 이거 다시 해 와. 너 이씨. 이거 서류 이딴 식으로 할 거야?”
그럼 그렇지. 사람이 쉽게 변하나. 두영이 입을 씰룩이며 서류를 주워 드는데 노크와 함께 누군가 등장한다. 김민재다. 김하준이 오늘 출근한다는 소식이 그의 귀까지 흘러 들어갔나 보다.
“어? 살아 있었네?”
그는 혼자가 아니라 옆에 낯선 외국인을 달고 왔다. 두영이 서류를 챙겨 나간 뒤 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걸어갔다. 그리고 궁금해하기도 전에 김민재가 함께 온 남자를 소개했다.
“인사해. 이쪽은 우리 자기.”
외국인이 어색한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하준이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리고 김민재를 쳐다봤다. 같이 온 남자는 알파다. 김민재가 알파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너 죽었다는 소문 듣고 확인하러 왔지. 멀쩡하네.”
아쉬운 듯 쯧 혀를 차는 거 보니 또 돈내기를 했나 보다.
“미안하다. 살아 있어서.”
그러면서 하준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재차 확인했다.
“정말 사귀는 거야?”
김민재는 응큼하게 웃었다.
“양욱환 한번 따먹고 나니까 입맛이 싹 바뀌더라.”
“…….”
“고맙다. 너 때문에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어.”
표정을 보니 진심이다. 김민재는 정인의 안부에 관해서도 물었다.
“정인 씨는 잘 지내?”
“응.”
“대체 어디 숨어 있던 거야?”
“알 것 없어.”
“넌 내가 친군데도 못 믿어?”
“응.”
“너무하네.”
김민재가 키득거리고 웃는다. 사실 정인은 하준과 함께 돌아왔다. 두 사람은 새 보금자리를 얻었고 당분간은 그곳에서 지낼 예정이었다. 처음 계획과는 달리 빨리 돌아온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정인의 건강 때문이었다.
사찰에 머물며 정인의 발현 증상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하준과 달리 정인은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그래서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검사를 했고 오늘 할머니와 함께 결과를 들으러 간다고 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다름 아닌 스님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준과 정인이 손만 잡아도 어디선가 나타나 헛기침을 해 댔다. 부처님이 연애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닐 텐데. 덕분에 둘은 진도를 뺄 수가 없었고 정인보다는 하준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서울행을 결심했다.
그리고 돌아온 첫날인 어제는 기념으로 치킨과 맥주도 시켜 먹었고 키스도 마음껏 했다.
“저녁에 넷이 식사할까? 정인 씨도 부를래?”
하준은 정인에 관한 생각을 잠시 접어 두고 김민재를 바라봤다.
“커플끼리 어때?”
김민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가 도착한다. 잠깐만. 하준은 김민재와 그의 애인을 남겨 두고 자리로 돌아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아니나 달라 류정인이다.
[검사 결과 나왔는데 이상 없대. 지금 한의원 들렀다가 집에 가는 중. 언제 와? 벌써 보고 싶어.]
글자에서 류정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팔불출처럼 미소가 번졌다. 지금 퇴근할게. 메시지를 보내고 재킷과 차 키를 챙기는데 김민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뭐야, 어디 가?”
“퇴근한다. 알아서 가.”
“손님이 왔는데 너무한 거 아니야?”
“미안. 다음에.”
김하준. 뒤통수로 김민재의 목소리가 날아왔으나 하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
한약을 바라보며 정인은 도무지 얼굴을 펴질 못했다. 옆에 있던 서 집사가 사탕을 들고 어서요. 하고 재촉했기에 하는 수 없이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으, 오만상을 찌푸리자 서 집사가 사탕을 챙겨 준다.
달콤한 사탕을 입에서 굴려도 쓴맛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서 집사가 그릇을 치우러 사라진 사이 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보니 김하준이 막 들어오는 중이다. 정인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어쩐 일이야?”
“보고 싶다며.”
기가 막혔다. 오랜만의 출근이라 일이 많을 텐데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이렇게 달려오다니. 기쁨보단 회사가 망하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하준이 와서 다짜고짜 껴안아 준다.
“어머, 대표님 벌써 오셨네요?”
주방에 있던 서 집사가 나오며 반색하자 정인은 하준을 슬그머니 떼어 냈다. 하준은 한술 더 떠 서 집사에게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정인이 보고 싶어서 일찍 왔어요.”
“저런. 이해해요. 매일 함께 보내다 떨어져 있으려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이참에 정인이를 회사에 데려다 놓을까 봐요. 그럼 하루 종일 볼 수 있잖아요.”
“그러지 말고 아예 호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건 어떠세요?”
“정인이가 그렇게 작진 않아서요.”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듣고 있으려니 기가 막힌다. 서 집사는 하준의 이런 행동들이 무척이나 뿌듯한 눈치였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놀고 있던 레오가 다가왔다. 레오는 안 본 사이 꽤 자라 있었는데 동글동글하던 얼굴이 다소 날카롭게 변해 어린이에서 사춘기 청소년이 된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변한 건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냐- 하준이 가서 안자마자 녀석은 몸부림을 치더니 흐르는 액체처럼 쑥 빠져나가 그대로 도망쳤다. 그 모습을 보며 하준이 속상한 표정을 짓자 서 집사가 한마디 거들었다.
“이맘때쯤 고양이들도 사춘기가 온대요. 수의사 말로는 레오는 수컷이라 영역 표시를 하려고 한다고 들었어요. 실제로 여기저기 소변을 묻혀 놓기도 했고요.”
그 말에 하준은 사춘기 아이를 둔 부모의 마음이 이해됐다. 보기만 해도 좋다고 안기더니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에 서운한 감정마저 들려고 한다. 나중에 자식을 낳고 키워도 이런 기분이겠지.
하지만 분명한 것은 레오가 하준에겐 예민하게 굴어도 정인에게는 여전히 살갑게 군다는 거다. 지금도 언제 그랬냐는 듯 정인의 다리 위에 올라가 손을 핥아 주고 얌전히 있지 않은가. 사춘기가 와 성격이 변하는 것과 차별은 분명 다른데, 이것은 엄연한 차별이었다.
“그럼 전 저녁 준비할게요. 오늘 식사는 보양식이에요. 사모님이 두 분 온다고 음식을 잔뜩 보내셨어요.”
음식을 보냈다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하준의 어머니였다. 하준은 여전히 김 회장과 데면데면했고 따로 연락하진 않았다. 할머니의 말로는 아버지인 김 회장도 이번 일로 많이 반성했고 미안해한다고 했으나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쉽게 용서가 되질 않는 것도 있었다.
서 집사가 저녁 준비를 하러 간 뒤 하준은 소파에 앉아 있는 정인에게 갔다. 그리고 정인의 다리 위에서 놀고 있는 레오의 얼굴을 건드렸다.
“레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응?”
계속하여 얼굴을 건드리니 앞발이 날아온다. 전 같으면 까슬까슬한 혀로 핥아 줬을 텐데. 둘의 신경전을 웃으며 보고 있던 정인은 무심코 테이블 위에 있는 작은 탁상 달력에 시선이 멈췄다.
불현듯 다음 주에 있을 재판에 대해 떠올렸다. 양욱환은 구속되었고 재판 날짜가 잡혔는데 증인 자격으로 정인과 하준이 출석하게 되었다. 막상 판사와 검사 앞에서 증언한다고 하니 벌써 긴장됐다.
“다음 주에 재판인 거 알지?”
“응.”
“떨려. 잘할 수 있을까.”
“본 대로 겪은 대로 말하면 돼. 긴장할 거 없어.”
“근데 오늘 뉴스 보니까 양욱환 변호사 정말 바뀌었더라.”
양욱환은 구속되자마자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대형 로펌을 선임했고 잘나가는 변호사들로 변호인단을 꾸렸다. 그런데 오늘 낮 그들이 사임을 발표했다. 더 놀라운 건 이미 그 전에 정인은 이 사실을 하준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고. 이것도 아마 그것의 일부는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재판에 관해 이야기하는 동안 레오는 정인의 무릎에서 바닥으로 점프해 유유히 창 쪽으로 걸어갔다. 어느덧 산과 하늘이 맞물리는 경계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 앞에 나른하게 엎드려 있는 레오의 뒷모습을 보는데 하준이 정인의 어깨에 기대며 손을 꼭 잡아 온다.
“무슨 일이든 걱정하지마. 이제부터 네 옆에는 내가 있으니까.”
그 말에 정인이 심각함을 지우고 웃었다.
“사실은 네가 제일 위험한 거 아니야?”
하준은 응석을 부리듯 정인의 어깨에 뺨을 문질렀다.
“그래서 말인데….”
“응?”
“의사가 해도 된대?”
그럼 그렇지. 왜 이렇게 아까부터 질척거리나 했더니. 정인은 괜히 주방 쪽을 한번 살폈다. 서 집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자 하준이 고개를 들어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고 올려다본다. 또 안 된대?
정인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의사는 아직 안 된다고 몇 주 뒤 다시 검사를 받자고 하였는데 김하준의 애끓는 표정을 보아하니 안타깝고 말하기가 더 미안해진다. 눈치 빠른 하준은 정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어차피 우리한테 시간은 많으니까. 참는 김에 더 참아 볼게. 대신 나 머리 한 번만 쓰다듬어 줘. 레오한테 해 줬던 것처럼.
정인은 웃으며 하준의 머리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었다. 마침 창 앞에 있던 레오가 둘을 바라보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
[며칠 전 와이엠 홀딩스 양욱환 씨에 대한 1심 재판이 있었는데요. 양 씨에 대해 법원은 살인 교사와 납치, 폭행, 협박, 횡령 등의 혐의로 35년 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재판이 끝난 뒤 양 씨의 변호인단 측은 형량이 무겁다며 항소의 뜻을 밝혔습니다. 이에 다음 날 청와대 게시판엔 양 씨에 대한 엄벌을 촉구하는 청원이 올라왔고 3일 만에 수만 명을 넘어서며 앞으로 재판의 향방에 대해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병원에서 나온 정인은 라디오의 볼륨을 낮추었다. 눈앞으로 진녹색의 가로수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정신없이 보내는 동안 여름은 성큼 다가왔다. 재판이 끝난 지 며칠이 지났지만, 언론의 관심은 여전히 뜨거웠다. 검사는 양욱환의 변호인단이 죽은 이해수를 데려오지 않는 이상 2심 재판에서 형량이 줄어드는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했다.
도심을 달리던 정인의 승용차가 김하준의 회사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주차장에 차를 멈춰 세운 정인은 옆자리에 놓여 있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요즘 김하준은 젊은 나이에 치매라도 걸린 건지 툭하면 서류를 빼놓고 출근해 정인을 회사로 오게 만들었다.
처음엔 실수인가 했는데 그 횟수가 늘어나니 이젠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든다. 서류를 챙겨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로비에 있던 경비원이 알아보고서 다가온다. 오셨습니까. 젊은 경비원은 정인이 올 것을 미리 알았던 것처럼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한달음에 달려왔다.
입구를 통과하는데 정인을 발견하고 몇몇 사람들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 온다. 그들 중엔 아버지뻘인 사람도 있었다. 회사에 오면 불편한 이유가 이거였다. 정인은 그들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한 뒤 도망치듯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복도를 따라 걸어가자 김하준의 비서가 나와 정인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노크와 함께 들어간 방에는 김하준이 있었는데 그는 일하던 중이었는지 책상에서 막 일어서며 환하게 웃었다.
“왔어?”
비서가 사라지고 난 뒤 정인은 서류를 내밀며 투덜댔다.
“너는 어떻게 매번 서류를 빼먹어? 그 정도면 치매 아니야?”
하준은 서류엔 관심이 없는 듯 받아서 한쪽으로 치우고 바로 정인의 곁으로 바싹 붙어 앉았다.
“병원은?”
이럴 줄 알았다. 서류는 핑계고 그는 오늘 정인이 병원에 간 것에 대해 결과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눈을 흘기고 침묵하니 하준이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더 기다려야 한대?”
말해 줄까, 말까. 거짓말을 하고 여기까지 부른 게 얄미우니 말해 주지 말까, 잠시 생각도 해 봤지만 애타게 쳐다보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짠한 마음이 들어 결국 의사가 한 이야기를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해도 된대.”
김하준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간다.
“대신 당분간 피임은 하고.”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문 앞으로 갔다. 뭘 하려는 건가 봤더니 달칵, 문을 잠근다. 그걸 본 정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뭐 해? 후다닥 다가온 김하준이 다짜고짜 정인을 소파에 눕힌다. 정인은 그의 팔을 붙잡고 말렸다.
“잠, 잠깐. 집에 가서.”
“알았어. 응.”
알았다면서 옷 속으로 손은 왜 집어 넣는 건데. 누가 오면 어떻게 해. 올 리가 없어.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거든.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눈을 흘기니 이번엔 입술이 내려앉는다.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이는 말에 정인은 가슴이 설레 저도 모르게 얼굴이 풀어졌다.
예쁘다. 너무 예뻐, 우리 정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