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14)

 11

긴 침묵이 이어졌다. 예상치도 못하게 튀어나온 이혼 이야기에 정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반대로 김하준의 눈빛은 번뜩인다. 정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하준에게 확인했다.

“방금… 이혼이라고 했어?”

하준은 정인이 제 뜻을 오해했을까 자세를 고쳐 앉으며 정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눈을 바라보며 조금 전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처음부터 우리가 간절히 원해서 한 결혼은 아니었잖아. 넌 돈 때문이었고, 난 복수심이었지.”

복수란 말에 정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정말 복수하려고 결혼한 거였어?”

하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인이 손을 슬그머니 빼려고 한다. 나쁜 새끼. 그러자 하준은 그 손을 다시 꽉 잡고는 입가에 미소를 만들었다.

“물론 시작은 그랬지만 진심은 아니었어. 너를 붙잡고 싶어서 못되게 굴었던 건 인정해.”

“아직도… 내가 미워?”

정인이 조심스럽게 묻자 하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맹세하건대 난 널 미워한 적 없어. 매번 그리워만 했지. 지금도 여전히 널 사랑하고 아껴 주고 싶어.”

그건 정인도 알고 있다. 김하준의 눈빛과 표정이 자신을 얼마나 애틋하게 사랑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갑작스러운 제안에 혼란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결혼을 엎자고?”

“다시 시작하자. 연애부터.”

“연애?”

“응. 제대로 처음부터. 나 너한테 프러포즈도 못 했잖아.”

이 상황에 프러포즈란 말에 설레는 자신이 우스웠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정인은 고심에 빠졌다. 너도나도 이 결혼의 진정성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 시점에서 정인이 증명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때?”

하준이 넌지시 묻는다. 정인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을까…?”

하준은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오늘 일을 생각하면 더 나빠질 건 없다고 봐.”

표정이 슬퍼 보여 정인은 속이 상했다. 김현우에게 분노를 쏟아 내던 하준의 모습이 떠오른다. 놔두면 정말 사람을 죽일 것 같았다. 처음부터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승낙하지 말았어야 했나 후회가 밀려왔다. 

말없이 고개를 떨구자 하준이 뺨을 감싼다.

“나는 너를 보호하는 방법이 내 곁에 두는 거로 생각했거든. 근데 아니야. 지금으로서는 그게 더 너를 괴롭히는 것 같아. 사실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아. 네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내 얄팍한 감정 때문에 밀어붙였던 게 후회돼. 그래서 할 수 있다면 되돌리고 싶어.”

정인은 고개를 들어 하준을 응시했다. 기분이 뒤숭숭해진다. 처음 4개월만 살고 이혼하자고 했을 때는 시간이 빨리 가기만 기다렸는데, 막상 이혼 이야기가 나오니 먹먹해진다. 한편으로는 솔깃하기도 했다. 여기서 더 버텨 봤자 소문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 입에서 제 이름과 이야기가 오르내릴 때마다 속이 불편해질 것이 분명했으니까.

고민하던 그때 휴대전화가 울린다. 낯선 벨 소리에 정인이 주변을 두리번댔다. 책상 위에 올려 둔 김현우의 휴대전화다. 발신자가 일반 유선 번호였는데 한 번 끊기더니 계속하여 울린다. 하준이 받으려고 하기에 정인은 아니라며 자신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잔뜩 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접니다, 김현우.]

정인이 하준을 바라봤다. 그가 달라며 손을 내민다. 정인은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얘기해요.”

[정말 죄송해요. 제,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잠깐 미쳤었나 봐요. 뭐에 씌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는 안 됐는데…흐윽….]

흐느끼는 듯한 울음소리에 정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울면서도 몇 번이고 잘못했다며 사죄를 했다. 어떤 처벌도 받겠다고. 자신이 저지른 일이 명백한 범죄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정인이 말없이 듣고만 있자 하준이 기어코 전화를 채 간다. 

그는 전화 속 김현우의 목소리를 듣더니 눈빛이 살벌해졌다.

“이봐요, 김현우 씨. 그만 처울어요. 뭘 잘했다고 울어요. 씨발 개새끼가.”

정인은 하준을 굳이 말리고 싶지 않았다. 약을 먹이고 상대를 욕보이는 행위는 어떤 이유에서도 용납될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김현우의 울음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고 잠자코 있던 하준의 시선은 정인에게 옮겨졌다. 

그는 정인의 흘러내린 앞머리를 다정스레 넘겨 주며 서늘한 목소리로 김현우에게 물었다.

“그렇게 미안하고 죄스러우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할 수 있겠어요?”

***

태블릿 속 사진엔 정인이 마치 김현우의 품에 안겨 모텔로 이동하는 듯 보였다. 김 회장은 몇 장을 더 넘기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태블릿을 소파에 홱 던졌다. 앞에선 일을 진행했던 남자가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예정대로라면 김현우가 동영상과 사진을 찍어 밖에서 기다리던 남자에게 전해 줘야 했는데, 난데없이 김하준이 들이닥치더니 구급차가 오고 난리가 나는 바람에 남자는 급히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단다. 

현재 김현우는 병원에 입원 상태고 그를 서울로 옮기려 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면회가 아예 불가한 상황이었다. 김 회장은 골치 아픈 듯 이마를 문지르고 나서 남자에게 나가라며 손짓을 했다. 남자가 사라지고 나자 윤 비서가 들어온다.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군.”

“죄송합니다. 김현우는 만나는 즉시 뒤탈 없이 잘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김 회장의 시선은 태블릿으로 옮겨 갔다. 저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쉽게 사그라질 것으로 여겼던 사람들의 관심은 날이 갈수록 더 뜨거워졌고 더불어 류정인에 대한 소문과 김 회장에 대한 억측들까지 난무했다.

적당히 이슈를 만들어 사람들의 호감을 얻고 그걸로 이득을 볼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비슷하던 지지율마저 떨어지고 반대편 당에서는 이걸 빌미로 류정인에 대한 형질 조사까지 요청하고 나오는 상태였다. 

“언론에 연락해서 운이라도 띄워. 적절하게 스토리 짜고. 류정인이 어릴 적 하준이와 알던 사이라는 것도, 둘이 왜 헤어졌는지도 흘려. 무조건 하준이가 피해자인 것처럼 보여야 해.”

상처를 주고 떠나간 사람을 오랫동안 기다린 순정파 김하준. 그런데 그 첫사랑이 이번에도 똑같은 짓을 하고 배신하고 떠났다.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에 딱 좋은 소재다. 사람들은 가슴 따뜻한 것보다 자극적인 치정 사건에 더 열광하니까.

“하준인 지금 어디 있어?”

“류정인 본가에서 머무는 것 같습니다.”

망할 녀석. 김 회장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올 사람이 없는데. 윤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뜻밖의 손님이 나타난다. 갑작스러운 모친의 등장에 김 회장은 황급히 태블릿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쩐 일이세요, 어머니. 연락도 없이.”

“지나가다 들렀다. 애미는 아래층에 없던데. 어디 갔니?”

“모임 갔어요. 들어오라고 할까요?”

“놔둬라. 걔도 숨통 트이고 살아야지. 허구한 날 네 비위 맞추느라 숨이 막힐 텐데.”

노골적인 모친의 비아냥에 김 회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날 가족 모임에서 있었던 하준의 폭로로 인해 모친은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김 회장을 다소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니 어쩌면 잘하던 회사 일을 관두고 정치판에 들어가면서부터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생전 아버지가 정치인들 근처에는 가지도 말고 끼지도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으니 그녀의 마음도 이해는 됐다. 맞은편에 앉은 이순옥이 데리고 온 비서에게 손짓하자 비서가 품에서 은색의 케이스를 꺼낸다. 고급스러운 나비 모양의 자개가 눈에 띄었다.

비서는 케이스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가 주름진 입술로 담배를 물자 비서가 당연하다는 듯 불을 붙여 준다. 후, 연기를 내뿜는 그녀를 보다가 김 회장은 비서에게 나가 보라며 손짓을 했다. 둘만 남게 되자 김 회장은 이순옥에게 갓 우려낸 차를 한 잔 따라 건넸다.

“이제 담배는 끊으세요.”

“네 아버지도 않던 잔소리를 왜 네가 하니.”

“건강 생각하셔야죠.”

“아서라. 살면 얼마나 산다고.”

“어머니 소원이 하준이 자식 안아 보는 거잖아요. 증손주요.”

그 말에 이순옥이 주름진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정인을 데리고 한의원에 다니고 있긴 한데 약을 먹고 침을 맞아도 영 이렇다 할 효과가 나타나질 않으니 걱정이다. 그 마음을 알아챈 김 회장이 은근슬쩍 모친을 떠봤다.

“제가 알아봤는데 베타가 오메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대요. 그 한의사가 몇십 년 전에 딱 한 번 치료한 걸 믿고 어머니 이러시는 거 저 너무 속상해요. 그러다 괜히 실망만 커지실까 봐요.”

이순옥이 주름진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래서?”

김 회장은 모친의 눈치를 살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저 선거 끝나면 둘 결혼 없던 일로 하려고 해요.”

이순옥의 얼굴엔 변화가 없었다.

“이혼시키겠다는 거냐?”

“네.”

“하준이가 그러겠대?”

“그러니 어머니 도움이 필요해요. 그 녀석 어머니가 편들어 주니 더 저러잖아요. 어머니까지 등 돌리면 지도 더는 버티지 못할 거예요. 아시잖아요, 하준이 생각보다 마음 여린 거.”

“만호야.”

다 큰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모친의 얼굴은 묘했다. 야단을 치는 것 같기도 하였고, 아들을 딱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하였으니. 그에 굴하지 않고 김 회장은 모친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했다. 한 번만 도와주세요. 부탁드려요, 어머니. 

이순옥은 담배를 재떨이에 짓이기고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넌 네 아들을 너무 모르는구나.”

그 말에 부탁하던 김 회장이 입을 다물었다.

“너 네 아버지 무서워했지. 그런데 그거 아니? 하준이가 네 아버지 쏙 빼닮은 거.”

“어머니.”

“평생 아들하고 척질 생각 아니면 적당히 해라.”

“그러지 마시고,”

이순옥이 손을 내저었다.

“됐다, 그만 얘기하자.”

김 회장이 재차 모친을 설득하려 하는데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면서 윤 비서가 나타난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평소 그답지 않았다. 그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듯 보였으나 불안한 눈빛은 감추지 못하였다.

“회, 회장님. 지금 급히 뉴스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배우인 김 모 씨의 SNS에 의문의 게시글이 하나 올라왔는데요. 1시간 만에 삭제된 이 글이 지금 온라인상에서 뜨겁게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해당 내용은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들 만큼 충격적입니다. 글을 쓴 김 씨가 사주를 받아 한 일반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내용인데, 더더욱 믿기 힘든 것은 사주한 당사자가 유명 국회의원이며, 한 회사의 대표로도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또한, 불법 촬영을 지시하고 이를 유포하려 했으며, 그 대가로 김 씨에게 일정 금액을 약속했다고 적혀 있었는데요. 현재 배우 김 씨는 SNS를 비공개로 전환하고 소속사와 지인들과는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고 합니다. 이에 누리꾼들은 이 소문이 진짜냐 가짜냐를 두고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한편 피해자로 추측되는 일반인이 사주한 의원의 며느리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파장은 더더욱 커질 것으로 보입니다.]

방송을 시청하는데 휴대전화가 쉴 새 없이 울린다. 하준은 전원을 아예 꺼 버리고 나서 지갑을 꺼냈다. 현금 넣는 곳에 손을 넣자 반명함판 사진 크기의 작은 비닐이 딸려 나온다. 비닐 안에는 하얀색 알약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하준은 곁에 있던 생수를 따서 약을 단숨에 들이켰다. 혹시 몰라 비상으로 넣고 다니던 신경안정제였는데 정인을 무사히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함과 초조함이 지속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약을 먹고 밖으로 나온 하준은 마루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며 기둥에 머리를 기댔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보육원 지붕 위로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이 필름처럼 지나가며 애써 누르고 있던 분노를 들쑤신다. 

김현우는 약속을 지켰다. 김 회장에게 받은 돈도 돌려주겠노라고 했다. 대신 하준은 그의 안전을 보장했다. 마음 같아선 죽여 버리고 싶었으나 자기 잘못을 뉘우쳤고 어쨌든 김 회장을 상대하려면 그를 살살 달래어 같은 편으로 만드는 방법이 더 나을 것 같아서였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소식은 일파만파 퍼졌고 김 회장의 귀에도 들어갔는지 그의 비서에게서 끊임없이 연락이 왔다. 노인네가 노발대발하며 하준을 잡아 오라고 시켰겠지. 나중엔 어머니까지 합세했으나 하준은 이후 모든 연락을 무시했다.

정인에게 이혼 이야기를 꺼냈지만 그걸 말하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가슴이 짓이겨졌는지 모른다. 태연한 척 여유를 부렸어도 사실 온몸의 피가 모두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절대 이혼은 안 된다고. 죽어도 못 놔준다고 말한 게 얼마 전이다. 그런데도 먼저 이혼 얘기를 꺼낸 건 사태가 정말 심각해졌고,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약 기운이 퍼지자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정신을 차리려고 눈에 힘을 주는데 언덕 아래에서 누군가 올라온다. 처음엔 정인인 줄 알았는데, 뒤늦게 보니 정인의 모친이었다. 하준은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는 옷을 단정히 했다. 

신발을 신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김은혜가 다가온다.

“괜찮아요? 몸이 좋지 않다면서요….”

정인이 그렇게 둘러댔나 보다.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사실이니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아니에요, 어머니. 그리고 말씀 놓으세요.”

볼 때마다 거리를 두려는 사람처럼 그녀는 높임말을 사용하였다. 하준은 그녀가 자신을 어려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평범치 않은 시작이었으니, 여느 사위들처럼 살갑게 굴어도 그녀에게는 편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가 손에 들고 온 쟁반을 내려놓고 컵을 하준에게 건넨다.

“마셔요. 직접 말린 차예요. 피곤한 데 좋아요.”

하준이 그것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상큼한 냄새가 풍긴다. 차를 마시는 동안 김은혜는 하준의 옆에 앉아 지는 해만 가만히 쳐다봤다. 무릎 위에 손을 포개어 올려 놨는데, 자꾸만 만지작거리는 걸 보아하니 하준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하준은 차를 마시며 그녀가 말을 하기까지 기다려 줬다.

“고마워요.”

하준이 돌아보자 그녀는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이것저것 다….”

하준은 서둘러 컵을 내려놓았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울컥한다.

“아닙니다. 제가 감사드려야죠. 저렇게 잘생기고 귀한 아드님 저한테 주셨는데요.”

“내가 면목이 없어요. 미안한 것도 많고…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이 얘길 하고 싶었는데, 입이 안 떨어져서… 그래서 못 했네요. 요즘 두 사람 힘든 거 같은데… 내가 뭘 도와줄 방법이 없어서 그게 참 마음이 아파요.”

김은혜의 눈에 슬픔이 묻어난다. 그녀가 비로소 하준을 제대로 쳐다본다. 그리고 다시 한번 고맙다고 인사하더니 쟁반을 챙겨 일어선다. 하준은 울컥 감정이 치밀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을 연 것 같아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따라서 일어서는데 정인이 올라오고 있다. 친척 어른이 잠깐 보자고 하여 본채로 내려가 있었는데 대화가 빨리 끝난 모양이다. 

“엄마 여기 계셨어요?”

“응. 잠깐 이야기 좀 하느라. 내려가서 저녁 준비할 테니 먹고 가.”

“아니에요. 우리 지금 가야 해요.”

“저녁이라도 먹고 가면 좋은데….”

하준이 먹고 가자고 하려는 찰나 정인이 말을 가로챈다.

“다음에 또 내려올게요. 할 일이 많아서요. 할머니하고 어른들한테는 인사하고 왔어요.”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준비하고 있어. 엄마가 반찬 챙겨 둔 거 가지고 올게.”

“힘들게 뭐 하러.”

엄마의 시선이 하준에게로 옮겨졌다.

“아까 보니 나물을 잘 먹길래….”

그러더니 그녀는 웃고 나서 본채 방향으로 서둘러 내려갔다. 엄마가 사라지고 난 뒤 정인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하준을 쳐다봤다. 하준이 싱긋 웃으며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나한테 먼저 말 걸어 주셨어.”

“좋냐?”

“응. 좋지.”

정인은 피식 웃고 나서 안에서 짐을 챙겨 들고 나왔다. 그런데 하준의 상태가 영 이상하다. 눈이 조금 풀린 것 같기도 하고 잠이 오는 표정인 것 같기도 하고. 걱정이 되어 가까이 다가가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어디 아파? 열은 없는데.

“살짝 피곤해.”

“내가 운전할게. 가면서 너는 자.”

“응.”

두 사람이 아래로 내려와 마당을 가로질러 가던 그때 민아가 헐레벌떡 뛰어온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휴대전화를 정인의 눈앞에 내밀었다. 거기에는 김현우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민아는 주위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오빠! 이거 오빠 얘기 아니야?”

정인은 그것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몰라. 김현우는 시키는 대로 글을 올렸고 얼마 가지 않아 그의 글은 삭제가 됐다. 아마 그의 소속사에서 손을 썼거나 일이 커지니 김현우 본인이 지운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글이란 게 지운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벌써 소문은 사방으로 퍼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고, 방송에도 보도됐다.

“댓글에 사람들이 오빠 얘기라는데?”

“어, 그래.”

“뭐야. 그 반응은? 형부. 형부가 말해 봐요. 김 의원이 설마 형부 아버지예요?”

하준은 걱정하는 민아를 다독였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찌라시가 도는 줄 아느냐고. 너무 믿지 말고, 괜히 어머니한테 말해서 걱정 끼쳐 드리지 말라고. 하준이 진지하게 나오니 민아도 그런가 싶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마침 김은혜가 반찬을 싸 들고 나왔다. 

하준이 서둘러 그리로 가 반찬을 건네받았다.

“뭘 이렇게 많이 싸 주셨어요?”

“별거 없어요…. 차 잘 마시길래 그것도 좀 쌌는데….”

“감사합니다. 어머니. 잘 먹을게요. 그리고 다음에 올 때는 꼭 말씀 낮춰 주세요.”

김은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이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타 출발하는데 김은혜가 문 앞에서 손을 흔든다. 정인이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라고 했는데도, 차가 멀리 갈 때까지도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큰 도로로 나와 달리는데 산과 하늘이 맞닿는 경계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정인은 하준을 돌아봤다. 조용하길래 잠든 줄 알았더니 정면을 응시한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어?”

하준이 다소 굳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한테는 말씀을 미리 드릴 걸 그랬어. 기사 나가면 놀라시겠다.”

“아까 내가 말했어.”

하준이 놀라서 보자 정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사실 본채로 내려가 엄마에게 전후 사정을 털어놨다. 혹시 놀랄까 싶어 자극적인 부분들은 최대한 빼고서. 정인은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는데, 예상보다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혹여 물어봤다가 마음이 상할까 싶어 정인에게 묻지도 못하고 속앓이를 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오히려 정인을 걱정하고 안아 주었다. 덕분에 눈물이 쏟아질 뻔하여 간신히 참아야 했다.

이야기를 듣던 하준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미안. 나 때문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인은 하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네 탓 아니야.”

그런데도 하준의 표정이 굳어 있자 정인은 갓길에 차를 멈춰 세웠다. 하준이 의아하게 쳐다보길래 벨트를 풀고 그대로 하준의 양 뺨을 부여잡고는 쪽, 입을 맞췄다. 그러고 나서 보란 듯 눈을 부릅떴다.

“우리 힘내서 잘 버티자.”

하준의 얼굴이 사르르 녹는다. 그는 곧 벨트를 풀고서는 정인의 어깨를 잡아당겨 입술을 포갰다. 혀가 밀고 들어오길래 정인은 황급히 떼어 냈다.

“야야. 힘내라는 거지, 본격적으로 하자는 뜻은 아니었어….”

하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힘 났어.

“그럼 출발해?”

“응.”

정인은 덩달아 웃고 나서 차를 출발시켰다. 하준은 그런 정인을 눈에 한참 담았다가 내비게이션을 바라봤다. 목적지는 집이 아닌 중간 지점에 있는 한 스튜디오를 가리키는 중이었다. 

휴대전화를 꺼내 전원을 켜자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아버지를 포함하여 대부분 기자와 회사 관계자도 있었다. 하준은 그중 누군가의 연락처를 찾아내어 전화를 걸기 시작하였다.

***

스튜디오에 도착한 하준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두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각 언론사에 연락했고 동시에 인터뷰를 진행해 터트릴 작정이었는데 약속했던 시간이 다가올수록 하나둘 취소하기 시작하더니 결국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돌아오는 답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위에서 압력이 내려왔대요.”

이 정도로 힘을 쓸 만한 인물이 누군지 대번 알겠다. 빌어먹을. 하준은 인터뷰하기 위해 갈아입었던 정장 재킷을 벗어 소파에 던지고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소파에 앉아 열을 식히는데 스튜디오 안쪽에서 이서린이 등장한다.

그녀는 하준의 이종사촌이었고, 정신과 의사였으며, 오늘 스튜디오를 빌려준 김영현과는 애인 사이였다. 그녀는 안타까운 얼굴로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와 그것을 하준에게 건넸다. 

“열 내지 마.”

하준은 생수를 받아 들며 쓰게 웃었다.

“아버지한테 한 방 먹었어.”

“예상했잖아. 이 정도에서 끝내시는 게 다행이지.”

이곳에 오기 전 서린은 하준에게 전후 사정을 듣게 됐다. 그녀도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소식을 알고 있어 크게 놀라진 않았으나 대신 배신감은 조금 느꼈다. 사촌 중 자신이 하준과 꽤 각별하다고 여겼는데 아무것도 몰랐으니 말이다. 그러나 하준이 전보다 약을 덜 먹고, 표정도 훨씬 밝아 보여 그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진실이 어떻든 서린은 늘 하준의 편이었다.

“정인 씨는?”

고개를 떨구고 있던 하준이 주위를 둘러봤다. 잠시 바람을 쐬고 오겠다고 나간 정인이 돌아오질 않는다. 일어나 스튜디오 밖으로 나가 보니 그가 구석에 놓인 기다란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앞에는 누군가 피우고 버린 것으로 보이는 꽁초들이 깡통에 수북했다. 하준이 다가가 옆에 앉은 후 담배를 자연스레 낚아챘다. 그리고 제 입에 물고 정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정인이 왁스로 단정하게 정돈한 하준의 머리카락을 내려다봤다.

“왜 나왔어?”

“네가 안 와서.”

“막 들어갈 참이었어.”

하준은 정인의 손을 꼭 쥐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말이 없었다. 오늘 기자들 앞에서 모든 걸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김현우의 말은 사실이며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아버지가 주도하였다고 말이다. 그러나 계획했던 일은 물거품이 됐다. 김현우에 관한 것들 역시 감쪽같이 사라지고 김 회장 측에서 법적으로 강경하게 대응하겠다는 기사만 눈에 띄었다. 

“생각해 봤는데, 꼭 기사로 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침묵 끝에 하준이 꺼낸 말을 정인은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어깨에 기대어 있던 하준이 몸을 바로 세우며 정인을 바라본다. 갈색의 눈동자가 스튜디오 마당 조명에 의해 유독 더 반짝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차피 우리 이야기는 소문처럼 떠돌았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정식으로 기사화된 것보다 온라인에서 괴담처럼 떠도는 게 대부분이었으니. 거기엔 개인 방송을 하는 사람들의 영향도 컸다. 곰곰이 생각하던 하준은 인터넷에 누군가의 이름을 검색했다. 얼마 전 김하준과 류정인이 사실은 계약 결혼이라고 떠들던 방송인이었다. 류동찬을 섭외해 방송하여 파장을 일으켰던. 하준이 신고하는 바람에 그는 일주일 방송정지를 먹었고, 지금은 그 동영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인은 하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뒤늦게 짐작이 갔다.

“우리 삼촌 섭외해서 떠들던 놈이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거지. 재수 없지만 잘 이용하면 쓸모가 있을 거 같아.”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을 보는 하준의 눈빛이 먹잇감을 발견한 짐승처럼 반짝였다.

“어때?”

글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준이 두영에게 연락한다. 그런 하준을 빤히 보다가 정인은 고개를 젖혔다. 도심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스튜디오는 전에 화보를 촬영했던 장소보다 한적하고 아늑했으며 별도 달도 잘 보였다. 

“별이 많다.”

메시지를 보낸 뒤 하준의 시선도 정인을 따라 움직였다.

“응. 달도 엄청 크네.”

정인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저거 보이지? 저건 인공위성일걸.”

“그럼 사자자리는 어디에 있어?”

난데없는 사자자리 이야기에 정인은 뜨끔했다. 여태까지 하준에게 자신의 왼쪽 가슴에 새긴 타투가 아버지를 기리며 새겨 넣은 것이라고 밝히지 못했다. 그러는 와중에 하준이 정인의 다리를 베고 눕더니 맞잡은 손을 가져가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올려 둔다. 

쿵쿵,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박동 소리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느껴져?”

“응.”

“나중에 여기다 네 별자리 새겨 줘.”

그리고 눈을 감고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마치 그 모습을 상상하듯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다. 정인도 덩달아 피식 웃었다. 막다른 길에 몰린 기분인데도 김하준이 있으니 두렵기는커녕 용기가 생긴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정인은 하준의 뺨을 쓰다듬었다.

“들어가자. 사람들 기다리겠다.”

그 손길에 하준이 눈을 떴다.

“키스할까?”

“지금?”

“응. 아무도 없잖아.”

정인이 주변을 살핀 뒤 고개를 숙였으나 입술이 닿기 직전 갑자기 두영이 안에서 뛰쳐나온다. 대표님. 정인은 황급히 떨어졌고, 하준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헐레벌떡 뛰어온 두영이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이 왜 그러세요? 안 좋은 일이 더 생겼어요?”

“방금 네가 만들어 줬어.”

“예?”

“아니야. 됐어. 뭔데 그렇게 뛰어와?”

“연락 닿았어요.”

그가 말하는 게 누군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하준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벌써?”

“제가 누구예요. 마당발 이두영. 아는 사람 총동원해서 바로 작업 들어갔죠.”

“온대?”

두영이 망설이며 정인을 쳐다봤다.

“하긴 하는데, 대신 조건이 있대요.”

조건이란 말에 하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끽해 봤자 돈이나 그런 걸 요구하겠지. 하지만 두영이 말한 조건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것이었다.

“둘이 함께 출연하면 한다고….”

뭐?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하준이 인상을 확 쓴다. 정인은 그것이 자신을 의미하는 말임을 알아챘다.

“저도 같이요?”

“네….”

살벌한 하준의 얼굴을 보며 두영은 긴장하여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래도… 어렵겠죠?”

“말이라고 해. 집어치워. 방송할 새끼가 걔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때 정인이 나섰다. 

“같이 할게요.”

하준이 홱 쳐다보길래 정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혼자보단 둘이 낫잖아?”

정인은 하준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말은 정인이 일반인이니 보호 차원에서 자기가 나서서 인터뷰하겠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혼자 다 덮어쓰고 욕받이가 되겠다는 계획이나 다름없었다.

“같이 해.”

“싫어.”

“해.”

“싫어. 안 돼.”

“혹시 사람들이 너보다 내가 잘생겼다고 할까 봐 그래?”

“장난해? 누가 봐도 네가 훨씬 잘생기고 예뻐. 그것 때문이 아니야.”

그 말에 정인이 저도 모르게 뺨을 씰룩이며 웃었다. 두영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지금 상황에서 저렇게 애정 표현을 하고 싶을까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하준의 저런 팔불출 같은 모습은 처음이다. 한참을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결국 정인의 고집에 못 이겨 하준이 한발 물러섬으로써 결론이 났다.

“안녕하세요. 한국의 줄리언 어산지 박찬입니다.”

남자의 자기소개에 하준은 어이가 없었다. 줄리언 어산지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남 흠집이나 잡아내 돈벌이로 삼는 쓰레기 같은 새끼가. 자기가 불렀으니 차마 싫은 내색은 못 하고 억지로 웃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덕분에 방송정지 먹고 푹 쉬고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하준입니다. 좋았다니 다행이네요. 아예 푹 쉬게 해 드릴 걸 그랬나.”

두 사람의 시선이 불꽃처럼 튀자 정인이 하준을 옆에서 툭 친다. 흐지므아. 이를 꽉 물고 속삭이자 하준은 기세를 한풀 꺾었다. 남자의 시선이 곧 정인에게로 넘어왔다. 정인이 남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류정인입니다. 반갑습니다.”

남자가 손을 내밀었으나 닿기도 전에 하준이 껴들었다.

“인사는 다 된 거 같으니 바로 시작하죠.”

박찬이 그런 하준의 태도에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뒤에서는 그가 데리고 온 직원들이 스튜디오 한쪽에 테이블과 카메라, 마이크 등을 세팅하고 있었다. 

“거의 된 것 같네요. 잠시만요.”

남자가 그들에게 가서 무언가를 지시한다. 하준은 그 모습을 유심히 쳐다봤다. 남자를 인터넷 방송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는 개인 방송을 하는 사람으로 많은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특기가 폭로 전문이라고 하여 연예계나 정치계의 부조리한 일들을 파헤치는 방식으로 채널을 운영했는데, 여태 목숨이 붙어 있는 게 용할 정도로 그 내용도 파격적인 게 많았다. 

두영의 말에 의하면 그는 일반인치고는 상상할 수도 없이 발이 넓고 어마어마한 증거자료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하긴 그러니 숨어 버린 류동찬을 찾아내 방송에 출연시켰겠지. 이야기를 마친 남자가 하준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시작할까요?”

“리허설은 안 합니까?”

“저희는 그런 거 없어요. 날것 그대로 내보냅니다.”

하준이 정인을 쳐다봤다. 정인이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인다. 가자. 두 사람은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가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테이블과 조명이 낯설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이서린과 이두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중이었다.

“1시간 전에 제가 예고드렸죠. 여러분들이 깜짝 놀랄 분들이 나올 거라고요. 제이엔터테인먼트의 김하준 대표님과 그리고 파트너이신 류정인 씨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하준이 화면을 보며 나긋나긋한 접대용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반면 정인은 카메라와 조명 앞에서 몸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전에 화보 촬영하면서도 느낀 거지만 자신은 아무래도 카메라 울렁증이 있는 모양이다. 거기다 위가 살짝살짝 뒤틀렸고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하며 속도 울렁이고 상태가 좋지 않았다.

“지금 시청자 접속 수가 어마어마합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두 분을 직접 뵈니까 실물에서 후광이 비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네요. 채팅창에도 난리가 났어요. 연예인인 줄 알았다, 사진보다 영상으로 보는 게 훨씬 낫다. 이런 칭찬에 대해서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인은 과찬의 말씀이라고 감사하다고 마치 적어 둔 메모를 읽듯 또박또박 말하였고, 하준은 약간은 건성인 투로 감사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라고 씩 웃었다. 올라가는 댓글의 속도가 너무 빨라 정신이 없다. 

긴장하여 자세히 읽지는 못하였으나 얼핏 계약, 소문, 그리고 간간이 김현우 이름 세 글자도 눈에 띄었다. 촬영 초반 분위기는 비교적 화기애애했다. 박찬은 능숙했고 두 사람이 방송에 적응할 수 있도록 편안하게 진행을 이끌어 갔다. 

하지만 질문이 거듭될수록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를 만한 것들이 등장했다. 정인은 혹여 하준이 열이 받아 테이블을 뒤엎고 박찬의 얼굴을 후려갈기면 어쩌나 우려했는데 생각보다 그는 더 노련하게 평정심을 유지하며 대응했다.

“그러니까 두 분은 원래 알고 있었단 말이군요. 고등학생 시절 만나서 연애를 했고, 헤어졌다가 성인이 되어 우연히 만났다는 거죠. 그럼 그때는 서로의 어떤 면에 반해 연애하게 되셨나요? 정인 씨?”

리허설 없이 질문이 즉흥적으로 나오자 정인은 긴장했다. 눈앞에 있는 건 남자가 데리고 온 사람들과 이두영, 이서린이었으나 실제로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방송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숫자는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늘어났다.

“제가 있던 학교로 하준이가 전학을 왔는데…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첫눈에 반했어요. 그래서 기회를 엿보다가 친해졌고, 제가 먼저 사귀자고 했어요.”

그뿐인가. 먼저 만지고 먼저 키스하고 먼저 옷도 벗기고. 돌이켜 보면 당시 류정인은 굉장히 적극적인 아이였다. 정인은 부끄러움과 함께 긴장되어 입술을 꾹 물었다 뗐다.

“듣기만 해도 설레는 첫 만남이네요. 김하준 대표가 보육원에서 봉사하다가 만나 사랑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언론에 보도가 됐는데요, 그럼 그 부분은 사실이 아닌가요?”

어디까지 털어놓아야 할까. 정인이 고민하는 사이 하준이 순서를 가져간다.

“그 부분은 제가 말씀드릴게요. 정인이가 방송은 처음이라 많이 떨고 있네요.”

하준은 다정하게 웃으며 류정인의 등을 쓰다듬고 토닥였다. 더불어 시청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자상하다. 둘이 사이가 좋아 보인다. 응원한다. 초반에만 해도 부정적인 글들이 많이 보였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가운데 쇼하지 말고 제대로 털어놔라. 저거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거짓말하려니 후달리나 보다 라는 글들도 등장했다.

“사실 저희가 재회한 건 제 아버지인 김만호 회장님 덕분입니다. 그 부분에 있어선 이 자리를 빌려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싶어요. 물론 방송을 보고 계신다면 말이죠.”

“소문엔 부자 사이가 나쁘다고 하던데, 꼭 그런 건 아니었군요.”

“아니요. 나빠요. 현재는 아주 안 좋습니다.”

“하하, 그런 얘기 막 하셔도 되나요?”

“안 되나요? 그 얘기 하려고 이 시간에 여기까지 달려오신 거잖아요?”

농담과 진실을 줄타기하듯 내뱉는 하준을 보며 박찬은 웃으며 끄덕였고 하준은 말을 이어 갔다. 아들이 실추시킨 자신의 이미지 회복을 위해 김 회장이 먼저 이 결혼을 추진하였으며 서로 결혼 상대자인 것은 나중에 알았다고.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 그는 비교적 솔직 담백하게 털어놨다. 

앞에 서 있는 서린과 두영은 무척이나 놀란 눈치였다. 많은 사람이 저들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으려나. 정인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테이블 아래 맞잡은 양손에 힘을 주었다. 이상함을 감지한 하준이 흘깃 쳐다보길래 정인은 애써 미소를 보였다. 생방송만 아니면 잠시 화장실에 가서 구토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괜찮아?”

하준이 귓속말로 속삭인다.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는 사이 박찬의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이건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시네요. 김현우 씨에 관한 겁니다. 종일 떠들썩했죠. 오늘 김 의원님 측에서는 법적으로 강경하게 대응하겠다고 나섰어요. 김현우 씨는 연락이 두절된 상태고요. 이 부분에 대해서 하실 말씀 있나요?”

“사실입니다. 김현우 씨에게 직접 들었고, 녹음한 증거도 있습니다.”

너무나 순순히 대답하자 박찬은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괜찮으시겠어요?”

“뭘요?”

“이게 사실이라고 하면 아버지께서 굉장한 타격을 받으실 텐데요.”

“그러라고 말하는 겁니다. 제발 더는 저희 일에 상관 마셨으면 하고 말이죠.”

박찬의 얼굴에 희열이 언뜻 스쳤다. 그는 대어를 낚았다는 표정이다.

“지금 시점에서 이런 질문은 좀 우스운데요. 김하준 대표가 보는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음, 저희 아버진 한 집안의 가장으로, 회사의 경영자로서는 결격 사유가 없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알게 모르게 좋은 일도 많이 하셨고요. 한 번도 고백한 적은 없는데, 한 남자로서는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다만 저는 아버지가 이제라도 정신 차리시고 국회의원이 아니라 그냥 회사를 경영해 나가셨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이번 일로 실망하였으나 아버지를 미워하진 않는다?”

“예.”

“정인 씨도 동의하나요?”

예민한 질문에 정인은 눈앞이 아찔해짐과는 별개로 시야가 정말 흐려짐을 느꼈다. 앞에 서 있는 여러 사람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가 다시 초점이 맞춰지고, 한여름도 아닌데 몸에서는 불이 나는 것 같고. 갈증이 일고 심장은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점점 더 빠르게 뛰고 있었다.

“예… 저도 동의합니다.”

간신히 대답하는데 하준이 돌아본다. 괜찮으냐고 묻기에 정인은 그렇다고 거짓말을 했다. 자신 때문에 모든 걸 망칠 수는 없었다. 

“원래 이번 거는 마지막에 할 질문이었는데요. 계속 채팅창에 올라오고 있어서 지금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형질에 굉장히 예민한 거 아시죠? 그래서 류정인 씨가 베타라는 소문이 있었을 때 다들 궁금해했었죠. 어쩌면 제가 두 분과 인터뷰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이기도 하네요. 삼촌인 류동찬 씨 말로는 정인 씨가 오메가가 아닌 베타라던데…사실입니까?”

예상했던 질문이다. 정인은 망설일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실입니다. 앞에 서 있는 이두영도 그것까지는 몰랐는지 입을 틀어막는 게 보인다. 태연한 척 대답은 하였으나 정인은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결혼 당시에도 김 회장님 포함하여 시댁 식구들은 아무도 몰랐다고 하던데요?”

하준이 망설일 것도 없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도 아버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정인이는 그것 때문에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제가 밀어붙였어요. 저한테 형질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인이가 오메가나 베타 알파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다른 생물체였다고 해도 사랑했을 겁니다. 많은 분을 기만한 거에 대해 이 자리를 빌려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그에 따른 어떤 비난도 감수하겠습니다.”

거짓말이다. 자신이 속였고 김하준은 모든 걸 이후에 알았다. 뜻하지 않은 고백에 정인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곧이어 박찬의 질문이 이어졌으나 인터뷰를 더 진행하기엔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용광로에 내던져진 듯 속은 펄펄 끓었고 숨은 점점 더 가빠졌다. 하준의 시선이 다시 정인에게 돌아온다. 

“정인아?”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댄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김하준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다. 그는 방송임을 잊고 정인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정인은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설마 위경련인가. 결혼식의 악몽을 되풀이하는 건가.

돌아보는 박찬의 얼굴 또한 묘하다. 여유만만하던 그는 갑자기 놀란 표정을 하더니 어? 하고 소리까지 낸다. 왜 저러지? 내 얼굴이 그렇게 이상하나? 저, 저 괜찮아요. 숨을 몰아쉬며 억지로 웃는 와중에 무슨 이유 때문인지 김하준이 페로몬을 확 방출한다. 

순간 배 속에서 알 수 없는 욕망이 치고 올라오며 머리가 아찔해졌다. 이게 뭐야. 실수할 것 같은 기분에 정인은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섰다.

“잠, 잠시만요.”

동시에 다리가 휘청하고 풀리며 김하준이 정인을 받쳐 안았다. 류정인! 몸이 뜨겁다. 불타는 것처럼 뜨겁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눈은 점점 감겨 결국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와중에 김하준의 페로몬 향이 유독 강하게 느껴진다. 이렇게까지 심한 건 처음이다.

대체 왜… 어째서?

정인아. 류정인? 정신 차려 봐. 이두영 구급차! 구급차 불러! 고함이 들리는 와중에 누군가 제 뺨을 만진다. 정인아. 정인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는 분명 김하준의 것이었다.

잠깐 정신을 차렸을 땐 이송 침대에 실려 가고 있었다. 하얀색 천장과 밝은 형광등이 차례대로 지나가던 것과 그리고 그것만큼이나 새하얗게 질려 있던 김하준의 얼굴을 기억한다. 자신의 이름을 어찌나 애타게 부르는지 의식이 멀어지는 가운데서도 괜찮다는 말을 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입은 떨어지지 않았고 다시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곳은 낯선 병실이었다. 눈을 뜬 정인은 하준이 없는 것을 알아채고 주변을 살폈다. 팔에 꽂힌 링거와 손끝에 매달린 장치들, 옆에는 심박 수를 표시하는 기계가 보였다.

쓰러지기 직전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던 심장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몸이 불타던 느낌도 사라졌다. 생전 처음 겪는 증상이었다.

방송은 어찌 됐을까. 김 회장은 소식을 들었을까. 

자신 때문에 모든 게 엉망이 됐다. 계획대로라면 이혼 이야기도 꺼냈어야 했는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아보고 싶어도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정인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휴대전화를 찾았다.

마침 문이 열리면서 하준이 들어온다. 그는 깨어난 정인을 보고 황급히 다가와 안색을 확인했다.

“언제 일어났어?”

“방금.”

“미안. 의사한테 잠깐 다녀왔는데, 그새 깼네.”

“의사가 뭐래? 또 위경련이야?”

하준의 표정이 묘하다. 그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할 말을 고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혹시 큰 병인가.

“뭔데…?”

“기억 안 나?”

“응?”

하준은 정인의 손을 꼭 잡고서 몇 시간 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쓰러지기 직전 정인이 갑자기 다량의 페로몬을 방출했다. 여태 정인을 알고 지냈어도 그렇게 많은 양의 페로몬은 처음이었다. 

하준만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하필 방송 진행을 하던 박찬도 알파라 그것을 느꼈다. 그래서 하준은 자신의 페로몬으로 정인의 페로몬을 덮어 버렸고 무슨 이유에선지 순간 정인이 기절한 것이다. 

하준은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오는 내내 별생각이 다 들었다. 몸에 무슨 이상이 생긴 건 아닐까. 도착하자마자 응급실에서 별별 검사를 다 진행했는데, 다행히 이상 소견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형질 검사까지 요청했고 아침이면 결과가 나온다고 하여 기다리는 중이었다. 전후 사정을 듣던 정인의 눈은 점점 커졌다. 하준의 페로몬에 배 속까지 찌릿해지며 몸이 반응하던 게 착각이 아니란 건가.

“그럼…내 형질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거야?”

하준은 섣부른 대답 대신 잡고 있던 정인의 손등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하지 않도록.

“아직 몰라. 한약 때문에 잠시 그랬을 수도 있고.”

“아….”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

하준도 그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정인이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말은 진심이었으니까. 

“방송은…?”

그 와중에도 정인은 방송 걱정이다. 하준은 쓰게 웃었다. 기절하는 장면까지 나가며 난리가 났는데 김 회장 측에서 압력을 넣었는지 기사 한 줄 올라가지 않았다. 기사는 막았을지 몰라도 김 회장은 지금쯤 똥줄이 타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이미 퍼지기 시작한 영상을 그가 어디까지 막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박찬이 잘 마무리했어. 뺀질거리고 재수 없어도 그건 잘하더라.”

수습 후 병원에 찾아온 박찬은 돌아가지 않고 밖에서 대기하는 중이었다. 그도 정인의 페로몬이 이상하다는 걸 알았으니, 어쩌면 이것이 또 다른 뉴스거리가 될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본가에서 연락은…?”

하준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을 피했다. 전화통에 불이 나는 걸 꺼 둔 상태다. 지금은 정인의 안정이 중요하니 어쩔 수 없었다. 하준의 반응으로 사태를 짐작했는지 정인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다.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그러다 정인은 쏟아지는 졸음에 저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다. 창밖은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 약 때문인지 눈꺼풀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 

지켜보던 하준은 일어서서 정인을 침대에 눕혔다.

“더 자. 아침에 깨워 줄게.”

머리카락을 정돈하여 넘겨 주니 정인이 그 손을 잡아끈다.

“너도 이리 와.”

하준은 멈칫했다. 찰나지만 스튜디오에서 정인의 페로몬을 느끼고서 머리가 아찔해졌다. 만약 사람들이 없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또 그럴까 봐 걱정되어 곁에 눕는 것을 포기하고 의자를 가까이 옮겨 앉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자는 거 보고, 나중에.”

“왜…?”

“안 졸려.”

“그럼 나…먼저… 졸려서….”

말끝을 흐리더니 까만색 눈동자가 눈꺼풀 뒤로 숨어 버렸다. 하준은 그런 정인을 보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꿈을 꾸는지 정인이 한 번씩 인상을 쓸 때마다 까맣고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도톰한 입술은 오늘따라 유독 색이 붉었다. 

보통 알파들이 오메가의 페로몬에 반응하긴 하여도 하준 같은 경우 그것이 조절 가능했다. 하지만 류정인의 페로몬은 여태 자신이 느꼈던 것과 완전히 다른 수준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성을 잃을 만큼 강력했다.

반응을 더 증폭하게 만든 원인은 정인에 대한 애정 때문일까. 하준은 잡고 있던 정인의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 그러자 애써 누르고 있던 욕망이 끓어오른다. 황급히 그 손을 이불 안으로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젠장…. 이래서 잠은 어떻게 자. 차로 가서 자고 싶어도, 정인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되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하준은 창문을 열어 찬 바람을 쐰 뒤 정신을 차리고 소파로 가서 누웠다. 

몸을 돌리자 정인이 마주 보인다. 쥐 죽은 듯 얌전히 자는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하준은 이 긴 어둠이 어서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놔.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래?]

때아닌 호통 소리에 정인은 잠에서 깼다. 앞에 보이는 하얀색 천장은 어젯밤 자신이 병실에서 잠들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얼굴을 비비며 일어나던 정인은 옆을 보다 하준을 발견했다. 그 역시 이제 막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얼굴에 머리까지 헝클어졌다.

“잘 잤어?”

하준의 목소리가 잔뜩 잠겼다. 정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입구를 주시했다. 비켜서라니까. 날카롭고 쉰 목소리가 매우 낯익다. 동시에 벌컥 문이 열리고 나타난 사람은 하준의 할머니였다. 예상치도 못한 그녀의 등장에 정인은 입이 쩍 벌어졌다.

김하준의 할머니가 도깨비같이 성난 얼굴을 하며 등장했고 하준이 고용한 것으로 보이는 덩치 큰 가드가 할머니의 비서를 막아섰다.

“할머니?”

앞을 가로막고 있던 남자가 흠칫하더니 뒤를 돌아본다. 하준은 그에게 나가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다. 비서와 경호원이 사라진 뒤 할머니는 안으로 들어오며 쯧, 혀를 찼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정인이 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자 하준이 바로 말렸다.

“정인아, 그대로 있어. 너 막 움직이면 안 돼.”

정인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할머니는 그런 정인과 하준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잘하는 짓들이다. 둘 다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침 일찍 어쩐 일이세요?”

“몰라서 물어? 아무리 애비가 미워도 그렇지. 인터넷 방송인지 뭔지 나와서 사람들 다 보는데 망신을 줘? 그게 자식이 할 짓이야!”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정인은 찔끔 몸을 떨었다. 보셨구나…. 할머니의 호통에도 하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일어서서 할머니의 팔을 붙잡고 소파에 앉히려고 했다.

“일단 진정하시고 앉아서 말씀하세요. 혈압 올라가요.”

“네 할미 저혈압이다, 이놈아!”

하준이 씩 웃더니 할머니를 기어코 소파에 앉힌 뒤 물을 한 잔 따라 줬다. 하필 할머니의 자리가 정인과 마주 보는 자리라 정인은 침대에 앉아 있으면서도 가시방석이었다. 그걸 알아챘는지 하준이 할머니의 자리를 반대편으로 옮기려고 했다. 

“할머니 거기 앉아 있으면 우리 정인이가 신경 쓰이니까 이리로 앉으세요.”

물론 돌려 말하면 더 좋았겠지만.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확 일그러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준은 기필코 할머니를 반대편으로 모셔다 앉혔다. 정인은 할 수만 있다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 애비하고 어쩔 생각이야? 이대로 척지고 안 보고 살 작정인 거야?”

“저 진짜 참을 만큼 참았어요. 아버지가 먼저 선을 넘으셨고 저도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선을 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하준은 한숨을 내쉬고 나서 김현우에 관한 일을 설명했다. 할머니는 거기까진 알지 못했는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나중엔 주름진 입술을 파르르 떨기까지 했다. 그녀가 이따금씩 정인을 돌아볼 때마다 정인은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아이고, 세상에. 아이고, 조상님. 간간이 한탄 소리가 들려왔고, 정인은 그럴수록 죄책감이 더해졌다.

“그래서. 너희 둘은 앞으로 어쩔 작정인데.”

사납던 기세가 한풀 꺾였으나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냉랭했다. 하준이 이혼 이야기를 꺼내려던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다. 문이 열리고 가운을 입은 나이 지긋한 의사가 차트를 들고 나타났고 셋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침묵했다.

어두운 분위기에 의사는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 회진 시간은 아닌데 알려드릴 소식이 있어서 들렀습니다.”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할머니의 주름진 눈이 있는 대로 커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설명을 막 마친 의사에게 믿기 힘든 얼굴로 되물었다. 

“방, 방금 뭐라고…?”

“류정인 씨 형질이 바뀌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3번 검사를 했는데, 모두 오메가로 판정되었고요. 우성입니다. 더 자세한 건,”

의사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할머니가 세상에나. 아이고 조상님. 하면서 휘청인다. 놀란 하준과 정인은 부리나케 그녀를 부축했다. 할머니는 조금 전까지 화를 내던 것도 잊고 정인의 두 뺨을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이게 무슨 일이니. 아이고, 기특해라.”

세월의 흔적을 가득 품은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진다. 정인 역시 놀라고 벅찬 감정이 들었는데 할머니의 반응이 너무 극적이라 차마 내색을 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계속하여 ‘조상님 감사합니다’를 주문처럼 반복했다. 반면 하준은 어느 정도 예상하였던지라 놀라움보다는 정인의 몸 상태가 걱정됐다. 아니나 달라 이어서 의사의 당부가 이어졌다.

“사실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어서 저희도 뭐라 말씀을 못 드리겠지만… 전과 다르게 몸에 많은 변화가 생길 겁니다. 지금은 자리를 잡아 가는 중이라 안정기까진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갑자기 히트 사이클이 찾아오거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자세한 건 산부인과 담당 선생님이 오후에 이쪽으로 오실 겁니다. 진행할 검사도 직접 말씀해 주실 거고요.”

산부인과란 말에 정인은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임신과 아이였고, 그것은 베타로 판정 난 이후 저와는 절대로 상관없을 거라고 여겼던 것들이다. 김하준과 나를 닮은 아이라…. 어릴 적엔 수없이 상상했었다. 얼마나 예쁠까.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울까. 그제야 실감이 나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랫입술을 꼭 깨물자 하준이 알아챘는지 어깨를 감싼다.

이야기를 마친 의사가 나가고 나서도 할머니는 여전히 정인을 붙들고서 야단법석이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니? 가지고 싶은 건? 아니다, 하준아 밖에 김 비서좀 불러와 봐라.”

하준은 그런 할머니를 말렸다.

“진정하세요. 정인이 힘들어요.”

할머니는 냉큼 정인을 놓아주었다.

“그래, 하루아침에 갑자기 몸이 바뀌었는데 얼마나 고될 거야. 그 양반이 참 용하긴 용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조상님을 찾을 게 아니라 그 양반한테 가서 절을 해야겠구나.”

“그렇게 좋으세요?”

할머니가 소녀처럼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정인은 무뚝뚝하기만 하던 그녀의 미소가 낯설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몸조심해야 한다고 당부를 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깨닫고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네 애비도 이걸 알면 생각이 바뀔 텐데.”

아버지 이야기에 하준의 낯빛이 굳어졌다.

“할머니 아들인데 그렇게 모르세요? 아버지 안 바뀌어요.”

그 말에 할머니는 씁쓸하게 웃었다. 자기가 아들인 김 회장에게 말하지 않았나. 하준이가 네 아들인데 그렇게 속을 모르느냐고. 누구보다 자식을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모르는 게 부모였다. 그건 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가서 만나 보마. 너는 정인이 잘 챙기고 있어.”

그러더니 할머니는 정인의 손을 끌어다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토닥토닥 두드렸다. 고생했다 고생했어. 그러고 나서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리고 미안타. 내 아들이 못난 짓을 해서. 내가 대신 사과하마.”

예상치도 못한 사과에 정인이 할 말을 잃었다. 하준을 쳐다보자 고개를 끄덕인다. 할머니는 계속하여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너한테 고맙다. 우리 하준이… 방황하는 거 마음 잡게 해 줘서 고맙고, 여태 잘 견뎌 줘서, 정말 고맙다. 고맙다, 아가.”

진심을 이야기하는 할머니의 눈빛에는 말하지 못한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눈가가 붉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정인의 손을 놓고서 돌아섰다. 아휴, 주책이다. 왜 눈물이 나려고 하니. 그러더니 간다며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갔다. 정인이 따라나서려고 하자 극구 만류하며 하준만 데리고 나간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난 뒤 홀로 남은 정인은 눈가가 촉촉해져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오메가. 내가 오메가가 됐다고? 어릴 적 오메가라고 믿고 지낼 때는 당연하기만 했던 게 이제 진짜 오메가가 됐다고 하니 신기하기만 하다.

정인은 환자복 상의를 걷고 거울을 통해 제 몸을 봤다. 몸도 얼굴도 변한 건 없었다. 보통 작고 예쁜 오메가가 많은데 거기에 비하면 저는 여전히 베타에 가까웠다. 그러다 문득 의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이따가 산부인과 검사를 받는다고 하였는데 그건 대체 무슨 검사지? 

전에 검진하느라 초음파로 배를 본 적은 있는데…. 그러나 생각이 깊어질수록 애석하게도 다른 곳이 떠올랐다. 정인은 얼굴이 굳어 머리를 가로저었다. 

“설마….”

결국 더 상상하는 것을 포기하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인기척도 없이 김하준이 앞에 서 있다. 아 깜짝이야.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자 하준이 다가와서는 끌어안는다.

“뭐야….”

“아까 할머니 앞이라 내색 못 했어.”

끌어안는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숨 막혀.”

“축하해. 축하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인은 하준을 떼어 냈다. 말은 축하한다고 하면서도 복잡한 얼굴이다. 자신이 오메가가 된 게 좋지 않은 걸까.

“너는, 안 기뻐?”

“좋아.”

“표정은 전혀 아닌데?”

하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좋으면서도 심란했다. 정인이 오메가라고 알고 지내던 어린 시절은 발현 전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갑작스러운 변화를 정인이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그 부분을 솔직히 털어놓자 정인이 웃으며 하준을 끌어안는다.

“그래도 축하해 줘. 나는 기뻐.”

“진심이야?”

“응. 아까 할머니 안 계셨으면 울었을지도 몰라.”

“할머니하고 같이 껴안고 울지 그랬어.”

“그럼 되게 웃겼겠다.”

하준은 품에서 정인을 떼어 내고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그는 정인의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눈을 지그시 맞췄다.

“난 네가 내키지 않는데 나 때문에 오메가가 되려고 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거든.”

“바보냐.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나는 늘 널 닮은 아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래? 나는 너 닮았으면 좋겠는데.”

“머리도?”

“…….”

“왜 대답을 안 해?”

“응?”

“머리도 나 닮으면 좋겠냐고 묻잖아.”

“어, 어어.”

하준이 정인을 놓아주고 서둘러 뒤돌아섰다. 갑, 갑자기 눈에 뭐가 들어갔나. 딴청을 피우는 그를 향해 정인은 등을 후려갈겼다. 솔직하게 말해. 머리는 누구 닮으면 좋겠냐니까. 둘이 아옹다옹하다가 하준이 갑자기 정인의 뺨을 붙잡고 쪽 입을 맞췄다. 

성질을 내던 정인이 어이없이 웃는데 때마침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두영이었다. 두영은 정인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하더니 하준에게 따로 귓속말한다. 듣고 있던 하준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고 정인은 일이 생겼음을 짐작했다.

[오늘 오후 2시죠. 김만호 국회의원이 후보직에서 사퇴한다는 속보가 나갔는데요. 김 의원 측은 건강상의 악화를 이유로 들며 남은 일생은 사업가로 일에 매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번 선택이 최근 벌어진 일들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니냐, 이런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김 의원 측에서는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며 앞으로 어떤 허위사실도 용납하지 않고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며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한편 어젯밤 김 의원의 장남인 김하준 제이엔터테인먼트 대표가 한 인터넷 방송에 나가 아버지를 공개 저격 하였고, 이로 인해 밤새 떠들썩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 김 의원은 아들과 닮은 사람이며 조작된 방송이다, 라고 하여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뉴스를 보고 있던 하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하면 아들과 며느리까지 가짜로 만들 수가 있는지. 한편으로는 길 것 같은 싸움이 예상보다 쉽게 끝나 안도했다. 기사와 방송으로 김 회장의 사퇴 소식이 쏟아져 나왔으나 본가에서는 연락 한 통 오지 않았다.

대신 시골에 있는 정인의 어머니와 민아에게서 연락이 오고 집에 있는 서 집사부터 시작해 주변 사람들의 안부 전화와 문자가 쏟아졌다. 뉴스가 끝나고 정인이 다른 채널을 틀어 또다시 뉴스를 보는데 하준이 리모컨을 빼앗아 꺼 버린다.

“왜?”

“어차피 똑같은 얘기야.”

정인이 켜려고 하자 하준이 일으켜 세우더니 침대로 데리고 간다. 그러고 나서 정인을 눕히고 저도 옆에 와서 눕는다.

“뭐야?”

“우리 둘만 생각하자.”

하준은 정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데 확실히 페로몬의 향이 짙어졌다. 아아, 젠장. 얼굴을 가슴에 대고 문지르니 정인의 몸이 움찔 굳는 게 느껴진다. 

“떨어져. 답답해.”

하준이 고개를 들어 정인을 올려다봤다. 저를 쳐다보는 눈에 욕망이 가득하면서 떨어지라니. 몸을 더 밀착하며 허리를 세게 끌어안자 정인이 아랫입술을 깨문다. 확실히 전과 다르게 반응이 예민해졌다. 하준은 정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빌어먹을. 오메가가 된 건 좋은데, 앞으로가 큰일이다.

***

정인은 하준이 퇴원 절차를 밟는 동안 차량 보조석에 넋이 나간 얼굴로 앉아 있었다. 산부인과 검사라길래 배에 대고 초음파를 보는 건 줄 알았는데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엉덩이로 들어오는 생경한 감각에 정인이 몸을 벌떡 일으키자 간호사와 의사는 진정하라며 도로 눕히고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검사 기기가 워낙 작고 젤을 듬뿍 발라 크게 아픈 건 아니었으나 안으로 밀고 들어올수록 머릿속에선 다른 걱정거리가 떠올랐다. 김하준하고 할 때는 어쩌지. 이렇게 작은 것도 아픈데, 김하준하고 하면 나는 죽는 거 아닐까. 

얼굴이 하얗게 질리자 의사는 괜찮은지를 수차례 확인하였다.

[보이시죠? 여기 아기집이 생기기 시작했네요. 완전히 자리 잡을 때까지 관계는 피하시고요. 갑작스레 몸이 변하는 거라 복통이나 헛구역질이 있을 수 있어요. 미열도 당분간은 계속 진행될 거고요. 혹시 몰라 진통제하고 억제제도 같이 처방해 드릴게요.]

정인은 손에 쥔 약 봉투에서 내용물을 꺼냈다. 하얀색 플라스틱 약통을 열자 타원형의 노르스름한 알약이 나온다. 김하준이 복용하는 억제제와는 다른 모양이다. 억제제를 처방받으니 자신의 형질이 바뀌었다는 게 실감 났다. 

병원에서 나온 정인은 가장 먼저 엄마에게 연락하였고 그녀는 말없이 흐느끼기만 하였다. 10년 전 정인의 형질이 하루아침에 오메가에서 베타로 바뀌었을 때도 침착하려고 애쓰던 그녀였는데, 마음고생이 꽤 심했던 모양이다.

약을 봉투에 다시 집어넣고 창밖을 내다보던 정인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준이 박찬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 발견했다. 박찬은 정인의 형질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여태 돌아가지도 않고 병원에서 버티고 있었단다.

류동찬까지 섭외해 방송에서 뒷담화를 할 때는 얄미워 죽겠더니 그래도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풀려 지금은 고마운 마음도 있었다. 무슨 얘기를 저렇게 심각하게 하는 거지. 시간이 길어지자 지루해졌고 깜빡 잠이 들려고 할 때쯤 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오래 기다렸지. 미안. 잤어?”

정인이 잠을 깨려 눈을 비볐다.

“아니야. 얘기는 다 끝났어?”

“응. 양욱환에 관해서 묻더라고.”

양욱환?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에 정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그러고 보니 양욱환은 어찌 됐을까. 사고를 당한 이한 형사가 깨어났고, 검찰에서는 기소한다고 했는데 신문이나 뉴스에서는 그것에 대해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궁금하던 찰나 하준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검찰에서 불구속 수사 하겠다고 했나 봐.”

정인은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그럴 리가. 이한이 확실한 증거를 찾았다고 하던데. 그러다 양욱환이 해외로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려고? 아니면 도망가라고 시간을 벌어 주려는 건가. 이한의 말처럼 위에서 계속 수사를 중단하라고 압박이 있는 걸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박찬이 그걸 방송에서 터트린대?”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찬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이해수에 관해서 조사를 하였다. 이해수가 마약에 빠져 스폰서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걸 터트리려고 준비할 때쯤 자살했다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여 더 파헤치다 보니 양욱환이란 인물이 나온 것이다. 

그는 사립 탐정까지 고용해 양욱환을 뒷조사했는데, 기막히게도 그날 누군가 집에 침입한 흔적과 함께 기르던 애완용 동물이 죽어 있었단다. 마치 더는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하듯. 그래서 이후로 거처를 옮겨 다녔고 표면적으로 모든 걸 중단하고 손을 뗀 것처럼 보이겠지만 속으로는 이를 갈면서 양욱환에게 한 방 먹일 기회를 엿보는 중이라고 했다.

하준은 곰곰이 생각했다. 어차피 이대로 흐지부지 검찰에서 넘어가면 양욱환은 분명 법망을 빠져나갈 테고 언제든 정인에게 위협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다면 박찬을 이용해 언론을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괜찮을까?”

“자기가 한국의 줄리언 어산지라잖아. 어디까지 가는지 보면 알겠지.”

정인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 출발했고 정인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인터넷에선 여전히 정인과 하준, 김 회장의 이야기로 넘쳐 난다. 그리고 놀랍게도 거기에 정인이 오메가로 발현됐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구라치지 말라고, 형질이 그렇게 쉽게 바뀌는 줄 아냐고. 원래 오메가였는데 발현된 건 아니냐며, 글 쓴 사람을 아무것도 모르는 베타라며 질타하기도 하였다. 자기가 류정인을 고쳤다며 선전하는 사람도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들어가 봤더니 그 한의사는 아니고 무슨 이상한 종교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기도로 베타가 오메가가 됐다는 말에 정인은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졌다. 확 고소해 버릴까 생각했으나 다행히 사람들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이렇듯 한동안은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을 테지만 그래도 커다란 고비가 지나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집에 도착한 정인을 반긴 건 며칠 만에 본 서 집사와 레오였다. 서 집사는 눈물까지 그렁하여 정인을 끌어안고서 정말 고생 많았다며, 축하한다고 인사를 전했다. 어딘가 김하준의 할머니와 닮은 모습이었다. 

정인은 발밑에서 울고 있는 레오를 안아 들었다. 새카만 솜뭉치 같은 녀석은 며칠 만에 부쩍 큰 느낌이다.

“계속 찾았어요. 침실 근처에서 기웃거리는데 짠하더라고요.”

그 말에 정인은 울컥했다. 생각해 보면 녀석은 엄마와 형제들도 하루아침에 잃고 정인과 하준에게만 의지했을 텐데. 미안한 마음에 안고 쓰다듬어 주는데 녀석이 얼굴을 문지르며 아양을 떤다.

“저녁은요?”

“먹고 왔어요. 오늘은 집에 들어가셔도 돼요.”

“그럼요. 두 분이 이제 할 일이 많을 텐데요.”

서 집사는 어째서 흐뭇하고 부끄러운 미소를 짓는 걸까. 그녀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는 걸 보니 손주를 기대하던 할머니가 떠오른다. 정인은 갑자기 부담스러워져 하하, 웃고서는 침실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지친 몸을 담그기 위해 욕조에 물을 받는데 뒤쫓아 온 레오가 욕실 문 앞에서 냐- 냐- 소리를 지른다. 고양이들은 주인이 욕실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봐 걱정한다던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금 나를 걱정해 주고 있는 걸까? 

정인은 웃으며 레오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레오 걱정돼? 나 괜찮아. 봐 봐, 멀쩡하지?”

냐-

“레오야 어쩌면 너 동생 생길지도 몰라.”

냐-

“좋아?”

“네, 좋아요. 엄마.”

툭 끼어드는 사람 목소리에 정인은 화들짝 놀랐다. 언제 왔는지 하준이 침실 앞에서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인은 민망하고 창피해져 황급히 레오를 안고 일어섰다.

“귀신이야? 왜 인기척도 없이 나타나?”

“네가 고양이하고 대화하는 게 신기해서 지켜보고 있었어.”

가까이 다가온 하준은 정인이 안고 있던 레오의 등에 쪽, 가볍게 키스를 하고 정인의 입술에도 쪽, 키스를 날렸다. 입술이 떨어지자 싱긋 웃는 그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올라간다. 그와 동시에 나무 향이 훅 퍼진다. 미세하던 그 향은 점점 농도가 짙어졌다. 정인은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하지 마. 의사가 안 된대!”

“누가 뭐래.”

하준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서는 정인의 허리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켜자 달콤한 냄새가 욕망을 자극한다. 하준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의사에게 주의할 점은 저도 들어 알고 있었으나 피가 끓는 걸 강제로 참으려니 몸에서 사리가 나올 지경이다.

입술을 문지르자 정인이 목을 움츠렸다. 간지러워… 허리를 만지던 손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정인의 엉덩이 쪽으로 가서 닿는다. 페로몬의 양이 늘어나고 정인은 숨이 점점 가빠짐을 느꼈다. 손을 떼어 내려고 하자 하준은 귓가에 속삭였다.

“하고 싶다.”

음습한 목소리에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다. 정인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안 된대.”

“알아. 아는데….”

하준은 갑자기 레오를 욕실 밖으로 옮겨 놓고 문을 닫았다. 냐- 냐- 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온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느라 수증기가 뿌옇게 피어오르고 습도가 올라가며 공기가 끈적해졌다.

하준이 자꾸만 몸을 밀착해 오는 바람에 정인은 뒤로 밀려나다가 벽 앞에서 멈춰 섰다.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넘겨 주던 손이 얼굴을 만지고 목을 쓰다듬고 셔츠 단추를 위에서부터 천천히 풀기 시작하였다. 벌어지는 셔츠 사이로 정인의 흰 살결이 드러나자 하준의 눈초리가 가늘어진다. 입술을 가져다 대길래 정인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음….”

하준은 손을 아래로 미끄러트려 정인의 볼기를 그악스럽게 움켜쥐었다. 갈등이 인다. 지금 상태로 끝까지 참을 수 있다고는 장담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류정인의 페로몬에 아까부터 이성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젠장….”

애틋한 눈빛으로 욕을 하면서 자꾸만 엉덩이를 주무르는 김하준 때문에 정인은 저도 모르게 실소가 터졌다. 더 놔두면 사고를 칠 것 같아 정인은 하준을 슬그머니 떠밀고 욕실 밖으로 쫓아냈다. 나 씻을게. 레오 우니까 좀 봐줘. 

닫히는 문 사이로 잔뜩 찌푸린 하준의 얼굴이 보였으나 정인은 끝끝내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

김 회장은 테이블 위에 놓인 돈 가방을 노려봤다. 가방 안에는 김현우에게 줬던 돈이 들어 있었다. 그는 김 회장에게 받은 돈을 돌려줬고 흔적도 없이 잠적했다. 거기엔 김하준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류정인의 형질에 관한 검사 결과서였는데 놀랍게도 베타에서 오메가로 바뀌었다. 모친이 류정인을 끌고 그 이상한 한의사를 찾아갈 때만 해도 속으로 비웃었는데.

그는 종이를 우악스럽게 구겨 쓰레기통에 던진 뒤 창가로 걸어갔다. 집 앞에서 진을 치던 기자들은 경찰이 오고 나서 사라졌지만, 내일이면 또다시 먹잇감을 물어뜯으려는 하이에나처럼 몰려들 것이다.

오후에 후보 사퇴를 밝혔고, 당에도 탈당하겠다는 것을 알렸다. 간과 쓸개를 빼 줄 것처럼 굴던 사람들은 불똥이 튈까 싶어 연락을 받지 않았고 몇 년을 꿈꿔 오던 것들은 모두 물거품이 된 상황이다. 

파이프 담배를 물고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창밖을 내다보는데 부인인 주혜련이 서재로 들어온다. 그녀는 가지고 온 탕약을 테이블에 놓으면서 남편의 안색을 살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작정이에요?”

“어머닌.”

“주무세요”

모친은 오늘 정인이 있는 병원에 들렀다가 결과서를 들고 왔다. 그녀는 김 회장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아는 눈치였다. 한 번 더 그러면 자식이고 뭐고 안 보고 살겠다며, 어떻게 네 아버지도 안 하던 짓을 네가 하냐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런데도 김 회장은 자신의 욕심이 화를 키웠다는 자책보다는 류정인을 하준과 엮은 것에 대한 후회와 뜻대로 따라 주지 않은 아들에 대한 원망이 컸다. 시간이 흐르면 그것들 또한 희미해질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자식이고 뭐고 꼴도 보기 싫은 게 사실이었다.

“정인이…그만 받아들여요. 형질도 바뀌었다면서요.”

김 회장은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고 주혜련은 남편의 손을 감싸며 다독였다. 

“당신이 그럴수록 하준이 우리한테서 멀어질 거예요. 나는 걔 없으면 못 살아. 지금도 내 전화도 안 받고 피하는데 억장이 무너진다고요.”

주혜련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니 맺힌다. 김 회장은 눈을 지그시 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의 말처럼 자식이 귀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모든 일이 어그러지고 예전처럼 돌아가기엔 하준도 저도 너무 멀리 왔다. 

관계를 회복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아니 애초에 회복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그때 노크와 함께 윤 비서가 등장한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뒤따라 들어오는 남자를 발견하고 주혜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구냐고 남편에게 물었으나 김 회장은 시선을 피했다.

“당신은 나가 있어.”

주혜련이 나가며 남자를 흘깃 쳐다봤다. 창백한 피부에 검은 머리카락. 단정해 보이지만 뱀 같은 느낌을 풍기는 사내다. 어디서 봤던 거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며 사라지자 윤 비서가 남자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남자가 눈꼬리를 휘며 웃는다.

“어서 오시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와이엠 홀딩스 양욱환입니다.”

김 회장은 양욱환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그의 집안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 깡패인 그의 아버지는 작은 회사들을 악랄한 방식으로 빼앗고 여기저기 권력에 줄을 대 몸집을 부풀려 지금의 회사를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고 뒤에선 늘 깡패 자식이란 소리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김 회장은 가끔 사석에서 그와 그의 부친 이야기를 들을 때면 마치 자신을 들여다보는 기분이라 씁쓸했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인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

“재택근무?”

정인이 놀라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다. 잠에서 깨어 나와 보니 출근한 줄 알았던 하준이 주방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게 아닌가. 

“집사님은?”

“휴가 보내 드렸어. 좋아하시던데.”

그의 말에 따르면 오늘부터 재택근무를 한단다. 집 주변엔 기자들이 며칠째 머물렀고 양욱환도 멀쩡히 돌아다니는 상황이니 정인을 혼자 두기가 걱정된다면서. 화상으로 업무를 지시하고 미팅 같은 건 저 대신 다른 임원들을 보내면 된다고 하였으나 정인은 하준이 저 때문에 일도 등한시하게 된 것 같아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괜찮아?”

“왜. 내가 곁에 있는 게 싫어?”

“싫은 건 아닌데….”

싫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다만 회사가 망할까 봐 그게 걱정인 거지. 하준은 그렇게 쉽게 망할 회사가 아니라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탄탄하며 저 말고 인재도 많다고 뜬금없이 회사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러고 나서 하준은 탕약을 가지고 와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마셔.”

정인은 인상을 썼다. 형질은 바뀌었지만, 한약은 반이나 남았다. 안 먹고 몰래 버리자니 할머니께 죄송스러웠고 의사 역시 몸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니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었다.

단숨에 약을 들이켜자 하준이 사탕을 까서 입에 쏙 넣어 준다. 그리고 그걸로 부족했는지 기어코 정인의 입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문질렀다. 입에 든 사탕도 버거운데 김하준의 혀까지 들어오니 정인은 어쩔 줄을 몰랐다. 황급히 떨어지자 하준은 아쉬운 듯 제 입술을 핥으며 정인의 번들거리는 입술을 다정하게 닦아 줬다.

“침 묻었다.”

정인은 입에서 사탕을 굴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아침부터 이러고 싶어?”

응. 하준은 담백하게 대답한 뒤 늦은 아침으로 준비한 국과 밥, 반찬을 테이블 위에 올려 뒀다. 아무리 음식을 필수로 배운다지만 서 집사만큼이나 요리를 만들어 내는 김하준의 실력은 볼 때마다 놀라웠다. 그에 비하면 정인은 아직 한참 부족했다.

“간단하게 토스트 먹어도 되는데.”

“의사가 잘 먹어야 한댔어.”

김하준은 의사 말을 참 잘 들었다. 관계를 피하라는 조언 때문인지 어제도 침대 위에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이리 굴렀다가 저리 굴렀다가 몸부림을 치더니 나중엔 거실서 잔다며 도망갔다.

딱하고 안쓰러워 쳐다보자 하준이 왜 그러냐고 묻는다.

“그냥….”

싱겁긴. 하준은 피식 웃고 나서 젓가락으로 갈치를 정성스레 발라 정인의 밥 위에 올려 뒀다.

“내가 알아서 먹을게.”

“너 생선 가시 못 바르잖아. 기억나? 급식실.”

왜 기억이 안 나겠는가. 어릴 적부터 정인은 생선 가시를 바르는 것에 유독 어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생선을 좋아하는데도 불구하고 급식에 생선이 나오면 대충 살만 파먹거나 안 먹기 일쑤였다. 

그러다 김하준이 전학을 오고 둘이 친해지자 생선 가시를 바르는 일은 김하준의 몫이 됐다. 정인은 그게 좋았다. 누군가가 나를 아껴 주고 보살펴 주는 기분. 부모님은 돌봐야 할 아이들이 많았고, 오롯이 사랑받는 것을 느껴 본 적 없는 정인에게 하준은 그걸 채워 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헤어지고 나서 생선을 먹을 때마다 김하준이 떠올랐고, 나중에는 그게 싫어 일부러 먹지 않게 되었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하준이 웃으며 살점을 밥 위에 올려 준다.

“이젠 실컷 먹어. 그래도 돼.”

정인이 밥을 입에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김하준의 눈에서 꿀이 뚝뚝, 예뻐 죽겠는 표정이다. 밥을 먹으며 오늘 뭘 할 건지 대화를 나누는데 뜬금없이 인터폰이 울린다. 정인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누구지?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혹시 기자는 아닐까. 불안함에 급하게 나가서 확인하니 건물에서 일하는 직원이 택배를 들고 서 있다. 얼마 전 시킨 고양이 물품이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정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로 돌아와 다시 수저를 들었는데 식욕이 당기질 않는다. 여전히 밖은 두 사람의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지속해야 하는 걸까. 티를 내지 않으려 하였으나 마음이 심란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눈치 빠른 하준은 정인을 안심시키고 다독였다. 일이 수월하게 풀릴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 말을 듣고 있으니 마음이 한결 놓이며 도망갔던 식욕도 순식간에 돌아온다. 결국,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식사 후 두 사람은 잠시 휴식을 취하다 하준은 업무를 보기 위해 서재로 들어갔고 정인은 거실에서 인터넷으로 필요한 것들을 주문하고 레오와 놀아 주었다. 넓은 거실 창으로 볕이 따뜻하다. 

정인은 카펫 위에 누워 그 볕을 고스란히 몸으로 만끽했다. 레오가 다가와 팔에 얼굴을 비비길래 배 위에 얹어 두고 흥얼흥얼 노래를 중얼댔다. 더할 나위 없는 편안함에 스르르 잠이 쏟아지고 눈꺼풀이 자꾸만 감긴다. 

하준은 일하는데 저만 태평하게 잠을 자려니 미안하다. 하지만 부단한 노력에도 눈꺼풀은 내려앉았고, 저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정인은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수없이 꾸었던 그 꿈이다. 김하준에게 상처를 안겨 주고 이별을 고하던 그 순간으로. 그러나 꿈은 전과 달랐다. 이상하다. 원래대로면 하준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꿈인데도 떨렸다. 나를 밀어내면 어쩌지. 싫어하면 어쩌지. 

그런데 말없이 바라보던 김하준이 저를 안고서 다독여 준다. 괜찮다고, 네가 뭐라고 해도 나는 상관없다고. 왜 말하지 않고 혼자서 아파했냐고. 꿈인데도 그 품이 너무 따뜻해서 정인은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렸다. 

미안하다고 엉엉 울다가 깼는데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아, 꿈이구나 느낀 순간 얼굴 하나가 불쑥 나타난다. 하준이다. 눈앞에 있으니 감정이 복받쳐 다시 또 눈물이 쏟아지려 한다.

“정인아?”

걱정스러운 듯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괜찮아?”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다. 정인은 일어나 앉으며 하준을 끌어안았다. 미안해. 미안.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갑작스러웠을 텐데도 하준은 정인을 꽉 끌어안으며 등을 쓰다듬고 달래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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