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물론 죽이고 싶을 만큼 밉긴 해요….”
정인은 류동찬을 바라봤다. 그는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방송에 나와 정인을 천하의 사기꾼 거짓말쟁이라고 몰아가던 뻔뻔함은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예전부터 그가 가족에게 끼친 해를 생각하면 죽이고 싶을 만큼 밉다는 것도 진심이었다.
정인이 더 말을 못 하자 할머니가 부하에게 지시해 류동찬의 입을 막은 테이프를 떼게 한다.
“잘못했어. 정인아! 나 한 번만 봐줘라. 두 번 다시 그런 짓 하지 않을게. 내가 미친놈이다. 진짜 뭐가 씌었었나 봐. 혈서라도 쓰라면 쓸게. 앞으로 절대 네 눈에 띄지 않을 테니까, 제발! 응?”
할머니가 고개를 돌려 류동찬의 눈빛을 바라봤다. 류동찬이 찔끔해서는 입을 다물고 불쌍한 표정을 한다. 뚫어지게 쳐다보던 할머니의 시선이 이제 정인에게로 건너왔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떠니?”
“어떻게요…?”
“네 삼촌 저렇게 사기 치고 다니는 것도 병이라면 병이니, 요양 보내자꾸나.”
요양이란 말에 류동찬의 얼굴색이 환해진다. 기껏 해 봤자 어디 정신병원이나 요양원에 가둬 놓겠지. 그러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빠져나오면 된다. 그는 입가가 씰룩이는 걸 감추느라 뺨에 힘을 주었다.
할머니는 말을 이어 갔다.
“드넓은 바다에서 살다 보면 욕심도 내려놓고, 죽기 전엔 정신 좀 차리지 않겠니?”
바다란 말에 정인은 잠시 생각했다. 바다 근처에 있는 요양원을 말하는 건가. 류동찬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안색이 더더욱 밝아진다. 그러나 할머니가 말한 바다는 바닷가 근처가 아니었다.
“내 아는 선장한테 부탁해 놨다.”
정인이 눈을 크게 떴다.
“네?”
“김 선장이라고, 소싯적 우리 집에서 일하던 사람인데 지금은 고기만 잡아.”
지금은 고기만 잡는다? 그럼 예전엔 뭘 잡았단 소리지…? 정인은 궁금했으나 차마 묻지 못하였다.
“가끔 예전 버릇을 못 참고 사람을 고기밥으로 만들기는 하지만, 네 삼촌이 말만 잘 들으면 그럴 일은 없을 게다.”
뒤늦게 알아듣고 류동찬이 빽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냐고 자긴 바다 싫어한다고. 뱃멀미가 심해서 지금까지 배를 탄 적도 없다고! 그 말이 사실이란 건 정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편을 들어 주고 싶진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
“어떠니. 네 생각은.”
할머니가 재차 묻는다. 정인은 류동찬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이글이글 불타던 그의 눈이 애처로워진다. 제발. 정인아. 나 네 삼촌이야. 네 아버지 동생이고 네 할머니의 아들.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라고 말하는 것처럼.
갈등하던 정인의 머릿속에 그동안의 일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차피 저대로 두면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일만 남았다. 그리고 사람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해 주세요. 가능하면… 평생 육지에는 발도 못 붙이게 해 주시면 좋고요.”
류동찬의 얼굴색이 확 변한다. 그가 고함을 치려는 순간 할머니의 비서가 바로 입에 테이프를 붙여 버린다. 할머니의 눈이 정인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주름진 눈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으로 내 마음에 드는구나.”
“…….”
“옷 갈아입고 나와라. 침 맞으러 가야지.”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비서에게 준비시키라고 지시를 내린다. 직원 여럿이 류동찬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몸부림을 치며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뭐라고 소리를 질렀으나 입을 막은 탓에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덕분에 좋은 경험이었어.]
병원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데 김민재에게 연락이 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양욱환은 정신을 차리고 김민재에게 죽여 버린다고 덤볐으나 전날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허리가 작살나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고 한다.
“당분간 몸조심해. 그 새끼 무슨 짓 할지 몰라”
[괜찮아. 어차피 나 당분간 해외 출장이거든.]
김민재가 마음 놓고 일을 저지른 이유가 이거였다. 덕분에 알파끼리도 그게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다면서, 김민재는 너스레를 떨었다. 하준은 문득 머릿속으로 궁금해졌다.
“많이 아파해?”
[죽으려고 하던데. 피까지 흘렸어.]
하준은 정인을 떠올리며 작게 욕을 씹어뱉었다. 김민재보다 하준이 크기로 따지면 훨씬 큰데. 역시 어제 참기를 잘한 건가.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고 뒷자리에 있는 과일 바구니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실에 도착하니 입구에 있던 정장을 입은 남자가 하준을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 노크와 함께 문을 열자 머리와 다리에 붕대를 감은 이한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음주 운전을 하던 트럭에 받혔다는데 상태는 비교적 양호했다.
“생각했던 것보단 멀쩡하네요?”
하준은 과일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 뒀고 이한은 간병인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오셨어요.”
이한은 잘 차려입고 과일 바구니까지 들고 나타난 하준을 바라봤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중환자실이었고, 상태가 나아져 개인 병실로 옮겼는데, 일반실이 아니라 VIP 병실이었다. 거기다 부르지도 않은 간병인과 문 앞을 지키는 든든한 체격의 가드까지 생겼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의아했는데 곧 어머니를 통해 김하준 이야기를 듣게 됐다.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는 없었는데….”
하준은 비싯 웃었다.
“형사님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으면 곤란하잖아요. 갈 때 가더라도 양욱환 그 새끼는 집어 처넣고 가셔야 우리 정인이가 안전하죠.”
하여튼 말본새하고는. 이한이 씁쓸하게 웃는데 하준이 들고 온 가방을 열고 비닐에 담긴 태블릿을 꺼내 이한에게 내밀었다.
“뭡니까?”
“선물이요. 양욱환 집에 있는 걸 내가 잠깐 빌려 왔어요.”
“빌려요?”
“사실은 훔쳤는데, 그러면 증거로 쓰이기 어려울까 봐.”
이한의 눈이 커진다. 이한은 액정이 깨진 태블릿을 앞뒤로 살피었다. 하준은 그것에 대하여 설명을 덧보탰다. 화장실 천장에서 꺼냈는데 망가졌는지 전원이 들어오질 않았다고.
“처음엔 업체에 맡길까 했는데, 아무래도 형사님이 직접 관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가지고 왔습니다.”
이한은 하준을 바라봤다. 분명 전에 찾아가 협조를 구할 때만 해도 냉랭하게 굴던 사람 아니었나.
“이렇게까지 저를 돕는 건… 류정인 씨 때문입니까?”
물론 류정인 때문이지만 이해수에 대한 죄책감이 아예 없다고는 못 하겠다. 그가 죽기 며칠 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연락이 왔는데, 그때 외면한 게 내내 마음에 걸린다. 혹시 이해수는 도움을 요청하려던 건 아닐까.
하준이 침묵하자 이한이 미소를 짓는다.
“아무튼, 고맙습니다. 아, 정인 씨는 잘 지내나요?”
이한이 정인의 안부를 묻자 하준의 눈초리가 삐딱해진다. 하준이 입을 떼려는 순간 외출했던 이한의 어머니가 등장했다. 그녀가 하준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고 하준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태블릿을 눈으로 가리켰다.
“그럼 빨리 회복하시길 바랄게요. 뭐든 나오면 저한테 알려 주세요.”
“네, 그러죠.”
“류정인한테는 따로 연락하지 마시고요.”
따로 연락하지 말라는 말에 이한이 눈을 찡그렸다. 묘하게 경계심이 담겨 있다. 전에 술 취한 류정인을 데려다주면서 느꼈던 것과 비슷하다. 이한은 다소 억울했다. 류정인이 눈에 띄는 미인인 데다 매력 있긴 하나 아무렴 자신이 결혼한 유부남을 상대로 그런 마음을 품겠는가. 아니라고 해명을 하려고 하는데 하준이 홱 돌아서는 바람에 결국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늦은 시간 집에 도착한 하준은 문을 열고 들어서다 거실 소파 위에 가득한 쇼핑백을 발견했다. 재킷을 벗어 두고 쇼핑백을 살피니 옷이며 신발이 들어 있다. 꽤 고가의 브랜드였는데 류정인의 취향은 아니었다.
발소리를 죽여 침실로 들어가자 조명 하나만 켜져 있고 정인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서 집사의 연락에 따르면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온 뒤부터 계속 잠을 잔다고 하였다. 또 열이 나는 걸까, 다가가서 이마를 짚는데 전처럼 이마가 뜨겁다.
할머니는 그 한의사를 신뢰했으나 맞을 때마다 자꾸 열이 나니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 살짝 걱정된다. 이마를 만지는 손길에 정인이 감고 있던 눈을 간신히 뜬다.
“언제… 왔어?”
“지금. 괜찮아?”
정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눈을 비볐다. 손목에 찬 고급 시계가 반짝인다. 처음 보는 것이라 하준의 시선이 거기에 가서 닿았다. 그러자 정인이 시계를 잘 보이도록 디밀었다.
“너희 할머니가 사 주셨어. 네 돈 축내지 말고 할머니 돈 쓰래.”
하준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하려고 하자 정인은 됐다고 손을 저었다. 이제 할머니의 말에 적응이 되었는지 그러려니 하게 됐다. 할머니는 말은 그렇게 하시면서도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한의사의 말에 다음 주에 있을 제사도 참석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준은 침대에 앉아 헝클어진 정인의 앞머리를 넘겨 주었다. 정인은 잠이 잔뜩 묻은 얼굴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더 잘래.”
하준이 일어서려고 하자 정인이 침대를 툭툭 두드린다.
“옆에 잠깐 누웠다 가.”
“씻고 올게.”
“십 분만.”
하준은 정인이 하라는 대로 침대에 올라가 모로 누웠다. 팔을 뻗어 주니 정인이 베고 누워 품으로 파고든다. 보통의 오메가라면 페로몬에 안정을 느낄 테지만 아쉽게도 류정인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대신 하준은 그가 푹 잠들 때까지 손으로 등을 토닥여 주고 어루만져 주었다.
냄비에 올려 둔 라면이 보글보글 끓자 하준은 파와 달걀을 넣었다. 초저녁부터 자기 시작한 정인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일어나더니 배가 고프다고 하였다. 맛있는 걸 만들어 주겠다는 말에 정인은 라면을 찾았다.
그러나 집에 라면이 있을 리 없었다. 왜냐하면, 서 집사는 라면 먹는 걸 유난히도 싫어했고 숨겨 두는 족족 귀신같이 찾아내 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건 하준이 어릴 적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인은 그제야 김하준이 하굣길 분식집에서 왜 그렇게 라면을 맛있게 먹었는지 이해가 됐다. 거실에서 레오를 안고 TV를 보는데 김하준이 다 끓인 라면을 가져온다. 냄새만 맡았을 뿐인데도 벌써 입에 침이 고인다.
정인은 소파 아래로 내려와 테이블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런데 라면도 젓가락도 하나뿐이다. 정인은 젓가락을 든 채로 하준을 바라봤다.
“너는?”
“얼굴 부을까 봐 싫어.”
가만 보면 김하준은 몸 관리를 꽤 열심히 하는 편이었다. 정인이 라면을 먹는 동안 하준은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레오의 간식을 챙겨 줬다. 그리고 틈틈이 정인의 이마를 짚어 열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이제 괜찮아?”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침을 맞으면 꼭 몸살이 난 것처럼 떨리고 열도 나고 기운이 빠진다. 자고 일어나면 한결 낫긴 하였으나 미열은 지속되었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원래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여길 뿐.
라면을 한 젓가락 집은 정인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아까부터 보던 TV 방송을 김하준이 맞은편에 앉으며 가려 버렸다. 뒤늦게 알아챈 하준이 덩달아 돌아본다. TV에서는 어느 배우의 인터뷰가 한창이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
“김현우. 이번에 영화 찍었대.”
하준이 고개를 돌려 TV를 응시했다. 인터뷰를 하며 서글서글하게 웃는 배우는 김현우였는데, 평소 매우 예의 바르고 반듯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업계에서도 평판이 괜찮았다.
“팬인 줄은 몰랐네.”
물을 마시던 정인은 고개를 저었다.
“팬까지는 아니고.”
“그럼?”
정인은 몇 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김현우가 TV 프로그램을 통해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하러 온 게 첫 만남이었는데 그는 신인 배우로 순해 보이는 얼굴에 웃을 때마다 들어가는 보조개가 매력적이었다.
보통 촬영 때만 열심히 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현우는 오히려 카메라가 없을 때 아이들과 더 잘 놀아 주고 그 이후로도 가끔 혼자서 매니저도 없이 찾아왔었다. 그러다 보니 정인과 안면이 텄고, 그게 인연이 되어 자주는 아니지만 무슨 날이 되면 안부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인성과 인기는 비례하지 못하였다. 그는 하는 작품마다 흥행에 실패했고 최근에는 소속사와의 불화를 겪고 있어 매우 힘든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신작이 나왔으니 정인으로서는 당연히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는데 하준이 시야를 또 가린다. 비키라고 손짓을 했으나 소용없었다. 고개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이며 방해를 하길래 정인이 눈초리를 위로 올렸다.
“왜 그래?”
“그만 보고 라면 먹어. 다 불어.”
“저것만 보고.”
“너 내가 끓여 준 라면이 중요해, 아니면 김현우가 중요해?”
정인이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바보 같은 질문 하지 마.”
하준은 진심이었다. 정인이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 다른 놈을 쳐다보고 있으니 아무리 연예인이라고 하더라도 기분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인터뷰가 끝나고 영화가 소개되자 정인은 먹는 것도 잊은 채 집중했다.
탐탁지 않게 바라보던 하준은 결국 참지 못해 리모컨을 들고 TV를 꺼 버렸다. 그러자 정인이 미간을 찡그린다.
“김하준.”
“라면 먹어. 불어.”
“이미 다 먹었어.”
정인이 빈 그릇을 보여 주자 하준은 그것을 챙겨 일어섰다. 정인이 TV를 다시 틀려고 하길래 리모컨을 빼앗아 주머니에 넣고서는 주방으로 걸어갔다. 정인이 뒤쫓아 와서는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는다.
“리모컨 줘.”
어? 두 사람은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정인은 그제야 리모컨이 반대편 주머니에 있는 것을 알아챘다. 그럼 지금 이건 뭐란 말인가. 황급히 쥐고 있던 것을 놓고 손을 빼자 김하준의 눈이 가늘어지며 짓궂은 표정이 된다.
“왜 놀래?”
“왜, 왜 커졌어!”
“나야 모르지.”
“…….”
“눌러 봐. TV는 안 나와도 다른 건 나올걸.”
이 미친놈. 정인은 그의 등을 후려치고서 리모컨을 빼 들고 서둘러 거실로 돌아왔다. 김하준이 웃는 소리가 들리는데 괜히 귀가 뜨겁다. 흘깃 보니 김하준이 그릇을 설거지통에 넣고 냉장고를 열어 무언가를 준비한다. 그런데 리모컨의 전원 버튼이 작동되질 않는다. 여러 차례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들고 김하준이 다가왔다. 그는 리모컨을 살피더니 건전지가 다 닳은 것 같다며 침실로 들어갔다. 레오와 놀아 주며 그를 기다리는데 한참이 되어도 나오질 않는다. 건전지를 찾지 못한 건가. 그때 정인의 머릿속에 무언가 번쩍 떠올랐다.
안고 있던 레오를 내려놓고 정인은 후다닥 침실로 들어갔다. 아니나 달라 눈앞에 우려했던 상황이 펼쳐진다. 머리털이 삐죽 섰다. 침대 옆에 김하준이 서 있었는데 협탁 서랍은 열려 있고 손에는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김하준이 돌아선다. 그의 손에 들린 튜브형 젤은 어젯밤 정인이 서랍에 넣어 둔 것이었다. 보랄 땐 안 보고 이제야 저걸 왜 발견해서 꺼냈는지 원망스럽다. 정인은 독수리가 먹이를 잡아채듯 황급히 가서 그것을 낚아챘다. 김하준의 한쪽 눈썹이 올라간다.
“뭐야?”
그나마 겉에 사용 설명이 제대로 없어 다행이었다.
“이, 이게 왜 거기 있었지.”
“뭔데?”
“샤, 샤워 젤.”
아하. 그렇구나. 샤워 젤이구나. 말끝을 늘이면서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고 눈빛이 휘어진다. 이런. 제기랄. 알아챘구나. 창피해진 정인은 그것을 서랍에 넣어 두고 굳게 닫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거실로 가려는데 김하준은 엉겨 붙으며 그건 언제 샀냐고, 왜 샀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결국 정인은 욕실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한숨을 내쉬며 저걸 내가 왜 샀을까, 후회하는 와중에 김하준이 문을 두드린다.
[안 놀릴게. 문 열어 줘.]
안 놀린다면서 또 웃고 있다. 정인은 매섭게 쏘아붙였다.
“꺼져!”
조용하다. 진짜 꺼졌나. 문을 열자 김하준이 떡하니 버티고 섰다. 놀라서 닫으려 했으나 그의 발이 먼저 안으로 들어왔다. 닫으려고 할수록 김하준도 버틴다. 실랑이도 잠시, 힘으로 이기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했다.
정인은 포기하고 투덜거리며 세면대로 가 칫솔을 빼 들었다. 치약을 짜 양치를 하는 동안 김하준도 옆에 와서 자기 칫솔을 꺼낸다. 거울을 보며 나란히 서서 양치를 하는데 김하준이 미친놈처럼 실실 웃는다. 나중엔 정인도 참지 못해 웃음이 터졌다.
“웃지 마.”
“네가 먼저 웃었어.”
“아니, 네가 먼저야.”
그런데 먼저 양치를 마친 김하준이 뒤로 가더니 옷을 훌러덩 벗는다. 놀란 정인은 칫솔을 제자리에 놓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멈췄다. 그가 벗은 셔츠를 옆에다 두더니 정인의 팔을 잡아당긴다. 팔을 빼자 다시 잡아서는 샤워 부스 쪽으로 데리고 간다.
“너 아프니까 내가 씻겨 줄게.”
정인이 고개를 저었다.
“혼자,”
입술이 먼저 다가왔다. 혀가 밀고 들어오자 알싸한 박하 향이 입 안에 퍼진다. 하준의 손이 잠옷 상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하였다. 느긋한 키스와는 달리 손길은 조급하기만 했다. 벌어진 상의 안으로 손이 밀고 들어와 살을 문지른다. 그 감각에 정인이 발끝을 오므렸다.
입술이 떨어지고 하준은 입고 있던 자신의 바지를 벗더니 정인의 바지도 벗겼다. 잠옷 바지가 그의 손에 끌려 내려가자 정인은 민망함에 괜히 딴 곳을 쳐다봤다.
부스 안으로 들어가 하준은 곧바로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이 쏟아지자 머리부터 긴장이 풀린다. 하준은 정인의 뺨을 부드럽게 손으로 만지며 입술을 부딪쳐 왔다. 움직이다 보니 욕실 벽에 등이 닿고 몸이 급속도로 달아올랐다.
물소리가 멈추고 하준이 입술을 떼어 냈다. 그러고 나서 흘러내린 정인의 앞머리를 다정하게 넘겨 줬다. 이마도 잘생겼네. 그리고 이어서 보디용품을 꺼내었고 그것을 손에 짜서 거품을 냈다.
“돌아서. 씻겨 줄게.”
정인은 순순히 벽 쪽을 향해 돌아섰다. 어깨부터 날갯죽지 그리고 척추를 따라 하준의 손이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아래로 내려간다. 손길이 닿는 곳곳마다 불에 덴 듯 뜨거워진다.
정인은 목과 귀가 빨개져 발끝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꼭 이러고 닦아야 해?”
“부부끼리 어때. 좋잖아.”
“너만 좋은 거 아니야?”
“아니. 너도 좋을걸.”
아래로 내려가던 손이 앞으로 이동했다. 정인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도 모르게 자꾸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고 머릿속은 하얘진다. 손을 떼어 냈더니 김하준이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등 뒤에서 꽉 끌어안는다. 정인의 등과 김하준의 가슴이 빈틈없이 밀착했고 김하준의 심장 뛰는 소리까지 생생하니 전달됐다.
“이 정도는 괜찮지?”
욕망을 머금은 목소리는 욕실의 수증기만큼이나 습했다.
“응….”
잠에서 깬 정인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욕실에 갔다가 자신의 몰골을 보고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머리칼은 헝클어져 엉망이고 눈은 퉁퉁 붓고 몸 여기저기 전염병 환자처럼 붉은 자국이 가득하다.
거기다 평소와 다르게 김하준은 목에도 흔적을 남겼다. 고등학생 때 아무 생각 없이 하던 짓을 서른이 되어 저지르다니. 당시엔 주로 정인이 일을 저질렀고, 김하준은 소녀처럼 얼굴이 빨개져 감추느라 급급했는데 이제 처지가 뒤바뀌었다.
한숨을 내쉬며 셔츠를 걷어 올리자 왼쪽 어깨 아래에 새겨 둔 사자자리 모양의 타투에 잇자국이 선명하다. 김하준은 유독 이곳에 집착하며 괴롭혔는데 그럴 때마다 정인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라도 솔직하게 털어놓을까, 싶어도 엄두가 나질 않는다. 차라리 김하준 것도 몸 어딘가에 새겨 넣는 방법을 고민해 봐야겠다. 옷을 벗고 샤워를 하러 부스 안으로 들어간 정인은 바닥에 나뒹구는 목욕용품들을 발견하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것을 주워 제자리에 두는데 어젯밤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직접적인 행위는 없었으나 김하준은 정인의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때까지 집요하게 괴롭혔다. 물을 틀고 샤워하면서도 자꾸 생각나 결국엔 도망치듯 욕실을 빠져나와야 했다.
옷을 갈아입은 후 거실로 나오는데 주방에서 소리가 들린다. 당연히 서 집사인 줄 알았는데 김하준이 회색 앞치마를 두르고 왔다 갔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예상치 못한 장면에 정인은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출근 안 했어?”
하준이 칼을 든 채로 돌아봤다.
“일어났네? 몸은 어때? 괜찮아?”
자기가 괴롭혀 놓고 괜찮냐고 묻는 건 무슨 뻔뻔함인지 모르겠다. 정인은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날짜가 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싶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하준의 곁으로 다가갔다.
뭘 하고 있나 궁금했는데 각종 채소를 작은 크기로 썰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된장찌개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끓고 있었다.
“볶음밥 괜찮지?”
정인은 잘리다 만 당근 중에 커다란 녀석을 집어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준이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는다.
“왜 웃어?”
“토끼 같아.”
지금은 아니지만 어릴 적 정인은 종종 어른들에게 토끼 같다는 말을 들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게 귀엽다는 칭찬인 것 같아 좋았는데 실제로 처음 토끼를 본 뒤에는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다. 만화 속 그림과는 달리 토끼의 눈이 너무 빨개서 무서웠던 기억밖에 나질 않는다.
하준이 잠깐 칼을 내려놓고 냉장고로 간 사이 정인은 그가 손질하던 채소를 마저 잘라서 다졌다. 고기를 꺼내 온 하준은 옆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감탄했다.
“능숙하네.”
정인은 얼마 전까지 신부 수업이랍시고 요리 선생이 저를 얼마나 갈구어 댔는지를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고작 석 달 정도가 지났을 뿐인데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지는 건 현재 삶이 꽤 만족스러워서일 것이다. 물론, 아직 처리해야 할 골치 아픈 일이 많이 남았지만.
채소를 써는데 하준이 등 뒤에서 허리를 껴안으며 어깨에 뺨을 문지른다. 저보다 큰 사람이 등에 매달려서 아양을 피우니 우스웠다. 그런데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이 슬금슬금 옷 안으로 들어와 가슴을 더듬으며 올라온다.
“나 칼 들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자꾸 더듬길래 노려보자 뺨과 턱에 키스를 쪽쪽 퍼붓는다. 아아, 좀 떨어져. 귀찮아하며 팔꿈치로 밀어낼수록 달라붙는 것도 더더욱 질척해진다.
그때였다.
“두 분 아침부터 오붓해 보이시네요.”
난데없이 들리는 서 집사 목소리에 정인이 기겁하고 돌아봤다. 그녀가 외출복 차림으로 양손에 무언가를 잔뜩 들고 있다. 정인은 몰래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 같은 표정으로 하준을 잽싸게 밀쳐 냈다.
“어, 어 집사님!”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떨어진 하준은 옆으로 가 아무렇지도 않게 찌개에 자른 두부를 넣고 있었다. 서 집사는 웃으며 들고 온 보자기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그녀뿐인 줄 알았는데 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곧이어 할머니의 비서가 나타나 무언가를 잔뜩 옮긴다.
“오늘 어머님 뵈러 간다면서요. 여사님께서 선물 보내셨어요.”
정인이 눈을 크게 떴다. 누구요? 저요? 영문을 몰라 김하준을 보는데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며칠 전 지나가는 말로 엄마 보러 가고 싶다고 했더니 그걸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 고마운 마음과 함께 울컥하여 코끝이 찡해졌다.
“그럼 전 가 볼게요. 두 분은 하던 거 마저 하세요.”
서 집사가 흡족하게 미소 짓더니 돌아서서 가 버린다. 그녀를 마중하고 돌아와 보니 하준이 다진 채소를 볶고 있었다. 정인은 옆에 서서 하준을 올려다봤다. 평소와 달리 내려온 앞머리 때문에 오늘따라 순한 댕댕이 같아 보인다. 예전 김하준 같기도 하고.
“우리 집 가는 거 왜 말 안 했어?”
“너 놀라게 해 주려고.”
“고마워.”
하준이 웃는다.
“고마우면 안아 줘.”
아니나 달라 돌아보며 눈으로 재촉한다. 얼른. 정인이 뒤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김하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키는 그럴 수 있다 쳐도 몸통의 두께나 어깨의 너비가 예전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건 어젯밤에도 분명히 느꼈다.
허리를 끌어안고 김하준의 어깨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마셨다. 페로몬 향이 약하게 풍겨 온다. 거기에 얼굴을 문질렀더니 김하준이 흘깃 돌아본다.
“밥은 나중에 먹고 침실로 갈까?”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침실에서 정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정인은 애석하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떨어졌다. 미안. 전화받고 와서 다시 안아 줄게.
“전화가 중요해, 내가 중요해?”
김하준의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으나 최근 연락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가족을 포함해 소수에 불과했다. 혹여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 마냥 외면할 수는 없었다. 후다닥 침실로 간 정인은 전화를 찾아 확인한 뒤 고개를 갸웃했다. 저장된 번호가 아니다. 낯이 익었으나 누군지는 명확히 떠오르질 않는다.
전화를 받자 상대방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에요, 정인 씨. 잘 지냈죠?]
차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어젯밤 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김현우였다.
***
[김만호 의원 며느리인 류정인 씨에 대한 논란이 아직도 뜨거운데요. 그 와중에 국민 청원까지 등장했어요. 김 의원 측에서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데 이것에 대해서 선거 전에 확실히 밝히고 넘어가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거기다 얼마 전 개인 방송에 출연했던 류동찬 씨가 연락 두절이라는 소문이 돌아요. 그것 때문에 네티즌들 사이에선 말들이 많습니다. 갑자기 사람이 사라진다는 게 말이 됩니까. 김만호 의원 측에서 미리 손을 쓴 거 아니겠어요.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김 의원 부친이 예전에 주먹으로 유명하던 분 아닙니까.]
[하하, 지금 그 발언은 굉장히 위험한 거 아닌가요?]
[저는 목숨 내놨습니다. 제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신고 부탁드립니다. 용의자는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분일 겁니다. 아시죠?]
화면 속 두 남자는 김 회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시시덕댔다. 태블릿을 쥐고 부들부들 떨던 김 회장은 테이블 위에 놓아 둔 신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경쟁하는 의원의 지지율이 비교되어 그래프로 실렸는데 초반 우세했던 김만호의 지지율은 류정인의 사건이 터지기 시작하면서 점점 아래로 향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밀어주던 국회의원들까지 옆에서 안달을 내고 난리다.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김 회장을 공천시켰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면서. 선거에 도움이 되려고 류정인을 이용한 건데 오히려 손해를 보게 생기었다.
파이프 담배를 물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윤 비서가 등장한다. 그 뒤를 젊은 남자가 따랐다. 얼굴이 희고 순하게 생긴 남자는 눈빛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김 회장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는 건 잊지 않았다.
남자가 맞은편 자리에 앉아 양손을 무릎에 모으고 경직된 표정을 했다. 이야기를 나누기도 전에 김 의원이 비서에게 눈짓을 보냈다. 비서는 검은색 서류 가방을 가져와 테이블에 올려 뒀다. 덮개를 열자 오 만원권 지폐 다발이 빼곡하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보고 김만호는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오면서 이야기는 대충 들었을 거네.”
남자는 가방 안 현금에 눈을 떼고 김만호를 바라봤다.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예….”
“알아보니 소속사하고 얽혀서 요즘 매우 힘든 상황이더군.”
“…….”
“책임져야 할 식구들도 많다지?”
남자가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둥글게 말아 쥔다. 하얗던 그의 손등에 파랗게 핏줄이 돋아났다. 김 회장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소파에 등을 기대며 파이프 담배를 물었다.
“듣자 하니 원래 꿈이 감독이었다면서.”
남자는 대답 없이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내 약속하지. 자네가 일만 잘 처리하면 그 꿈 이룰 수 있게 해 주겠네. 물론, 자네 소속사에 물어야 할 위약금 포함하여 자네 식구들이 평생 먹고살 비용도 내가 다 지불할 걸세.”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침을 꿀꺽 삼킨다.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죄인처럼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김 회장을 바라봤다. 두려움과 죄책감이 깔려 있던 눈빛 너머에 욕망이 조금씩 똬리를 틀기 시작하였다.
김 회장은 윤 비서에게 계약서를 가져오게 지시했다. 그리고 그것을 남자의 앞에 놓아 줬다.
“계약 내용은 오면서 들은 그대로일세. 대신 죽을 때까지 함구해야 해. 발설할 시엔 자네 포함 자네 가족의 안전도 보장 못 하네.”
김 회장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남자는 복잡한 얼굴로 길게 심호흡했다. 계약서를 읽던 시선이 마지막 자신의 이름 세 글자에 가서 머물렀다. 김현우. 남자는 죄책감을 떨쳐 내려는 듯 이를 앙다물고 자신의 이름 옆에 사인을 휘갈겼다.
***
집이 가까워져 올수록 하준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어제부터 김현우란 인간이 심기를 매우 거스르고 있었다. 보육원을 자주 방문하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다고 들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왜 오늘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정인의 말에 따르면 오늘은 보육원의 대청소를 하는 날이라 봉사자들뿐 아니라 주변에 사는 친인척들도 모여 일손을 돕는다고 하였다.
“그 자식 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야?”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돼? 눈 높은 나한테도 네가 제일 예쁘고 근사한데 다른 놈들 눈에는 어떻겠어?”
“작작 해.”
정인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하준은 찜찜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배우란 사람들이 얼마나 가면을 쓰고 연기를 잘하는지 여태 겪어 왔다. 그래서 보이는 걸 모두 믿지 않는다. 게다가 정인이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까지 하니 도무지 마음에 안 들었다.
두 사람은 담장 아래에 차를 세워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낯익은 이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정인이 왔네.”
오랜만에 만난 친척 어른들이 너도나도 정인을 반겼다. 결혼하더니 얼굴이 활짝 폈다는 둥, 아기는 언제 가질 거냐는 둥, 그러고 나서 하준을 위아래로 훑더니 감탄을 한다.
“결혼식장에서 본 것보다 인물이 더 훤하네.”
“그러게. 우리 정인이도 어디 가서 빠지는 인물은 아닌데.”
그때 엄마가 뒤뜰에서 나온다.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도 질끈 묶은 그녀의 표정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그 뒤를 민아가 똥강아지처럼 졸졸 쫓아왔다. 오랜만에 본 정인의 손을 잡고 쓰다듬던 그녀는 하준을 보면서는 살짝 긴장한 듯 미소 지었다.
“안녕하셨어요, 어머님.”
“어서 와요. 일하느라 바쁠 텐데. 정인이만 보내지 그랬어요….”
“말씀 놓으세요. 그리고 저도 어머니 보고 싶어서 온 거예요.”
차에서 애처럼 투정을 부리던 게 무색할 정도로 김하준은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뒤에서 누군가 커다란 짐을 옮기다 내려놓고 이곳으로 다가왔다. 수수한 옷차림에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으나 훤칠한 키에 누가 봐도 연예인인 티가 나는 사람이었다.
“정인 씨.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김현우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작업용 장갑을 벗었다. 얼마나 열심히 일한 건지 옷이며 바지에 먼지투성이다.
“오랜만이네요.”
그가 자연스럽게 엄마의 곁으로 가서 서자 엄마는 김현우의 등을 토닥였다.
“현우 씨가 아침 일찍 와서 고생 많았어.”
“아니에요. 제가 뭘 한 게 있나요.”
김현우가 모자를 벗는다. 열심히 했다는 걸 증명하듯 머리가 온통 땀으로 젖었다. 이 땀 좀 보라며 엄마는 마치 아들 챙기듯 한다. 그녀는 이전에도 김현우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젊은 사람이 꽤 괜찮다고. 우리 정인이도 나중에 저런 짝을 만나면 좋겠다고. 그땐 흘려들었는데 이런 상황이 되니 괜히 김하준 눈치가 보인다.
“사람이 이렇게 겸손해요.”
“대신 갈 때 원장님이 반찬 싸 주세요. 저번에 싸 주신 장아찌 진짜 맛있게 먹었어요.”
태연함을 유지하던 하준의 표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눈빛이 질투로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감히 반찬까지 가져다 처먹어? 간신히 참고 있는데 정인이 그에게 하준을 소개한다. 김현우가 정중히 손을 내밀었고 하준은 그 손을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김현웁니다.”
“김하준입니다.”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김현우의 눈 밑이 일그러지자 상황을 눈치챈 정인이 재빨리 손을 떼어 내며 말을 돌렸다.
“우리도 도울게요. 뭐 하면 돼요?”
엄마가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정인이면 몰라도 김하준에게 일을 시키자니 부담스럽다. 사위라고는 하나 편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됐다고 들어가서 쉬라고 하자 김하준은 아니라고 재킷을 벗고 팔을 걷어붙였다. 그의 손목에 시계가 번쩍이는 걸 보고 엄마는 더더욱 난색을 표했다.
“정말 그럴 필요 없는데….”
김하준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성큼성큼 가더니 봉사자들이 나누던 짐들을 번쩍 들어서 옮긴다. 정인의 모친은 혹여 그의 비싼 옷이 상할까 싶어 따라가며 그를 말렸다. 그걸 보며 민아가 정인의 곁으로 와 서더니 눈을 가늘게 늘였다.
“형부 수상해. 오늘따라 왜 저렇게 파이팅이 넘치지?”
정인은 말없이 어색하게 미소만 지었다.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았나.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뒤부터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일을 도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떨어지게 됐고, 하준은 집 안에서 청소를 정인은 아주머니 틈에서 이불을 모아 대야에 밟는 것을 거들었다. 한참을 밟고 있는데 뒤에서 나이 지긋한 봉사자들 몇 명이 쑥덕이는 소리가 들린다.
김 의원 며느리가 저 사람이야? 파트너도 같이 왔어. 계약 결혼이라고 하지 않았나. 베타라는 소문이 있던데. 에이, 원장님 부부가 알파 오메간데 어떻게 베타가 나와. 소문엔 주워다 키운 아들이라고 하던데.
주워다 키운 거 빼면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계약 결혼도 맞고 베타인 것도 맞고. 이젠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익숙해진 건지 그러려니 하는데, 갑자기 꺄아-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어머, 왜 이래. 못 살아 정말.
돌아보니 김하준이 물이 나오는 호스를 들고 어쩔 줄 몰라 한다. 봤더니 조금 전까지 등 뒤에서 수군대던 사람들이 홀딱 젖어 야단법석이다.
“죄송합니다. 물을 잠그려고 했는데 갑자기 나와서요.”
김하준은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니 그들도 더는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하준은 호스를 던지고 바지를 걷은 다음 대야 안으로 들어왔다. 이불을 밟으며 그는 정인을 보고 웃었다. 뭘 하다 왔는지 단정하던 머리도 헝클어지고 뺨에 시커먼 게 묻어 있다. 그래도 여전히 잘생겼지만.
정인은 손을 뻗어 얼룩을 닦아 주고 목소리를 낮췄다.
“너 방금 일부러 그랬지?”
“어.”
“왜 그래. 일 도와주러 온 사람들한테.”
“도와주러 왔으면 돕기만 하지. 왜 헛소릴 지껄여, 짜증 나게.”
틀린 말 하나도 없는데 뭐. 정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하준이 정인의 손을 잡아 깍지를 낀다. 쳐다봤더니 그 손을 앞뒤로 흔들면서 싱글싱글 웃는다. 살짝 의기소침해 있던 정인은 덕분에 웃음이 터졌다.
“뭐 하는 거야?”
“힘들 때 앞뒤로 이렇게 흔들면 기운 난다.”
“거짓말.”
“진짜야. 해 봐. 이렇게 이렇게.”
“힘들어.”
“그럼 다른 데 흔들어 줄까? 바지 살짝 내려 봐.”
그럼 그렇지. 정인이 손을 빼내고 쏘아붙였다.
“죽여 버린다.”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뒤에서 버럭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놈의 영감탱이!”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할머니가 서 있다. 이제 막 낮잠에서 깬 건지 쪽 찐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고 따뜻한 날씨에도 긴팔 분홍색 스웨터를 곱게 걸친 모습이었다. 정인이 먼저 대야 밖으로 나갔고 이어서 하준도 나와 인사를 했다.
“할머니!”
그러나 할머니는 정인을 피하며 하준의 손을 붙들었다.
“영감. 쟤는 누구예요? 어디서 또 새파란 걸 데리고 왔어요?”
그 말에 하준이 웃었다.
“왜? 옥란 씨가 봐도 예뻐?”
“예쁘긴. 얼굴이 완전 박색인데!”
푸흐, 하준이 웃었고 정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할머니는 하준의 등을 때리며 바람 좀 그만 피우라고 야단을 쳤고 하준은 아파 죽는다는 시늉을 하며 나한테는 당신밖에 없다고, 믿어 달라고 하소연했다.
생각보다 김하준은 할머니와 죽이 잘 맞았다. 아이가 생겨도 저럴까. 문득 그런 상상을 하였으나 곧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그것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임을 알아서였다. 할머니를 앉혀 놓고 이불을 헹구고 너는데 누군가 하준을 찾는다.
동네에 사는 아저씨로 먼 친척뻘이었는데 그는 하준에게 창고 지붕 고치는 걸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김하준이 그런 걸 해 봤을 리 없다. 정인이 하겠다고 나서자 하준이 만류하더니 그쪽으로 간다.
“영감 어디 가!”
정인은 뒤따라가려는 할머니를 챙겨 마당으로 향했다. 할머니의 흥미를 돌릴 만한 걸 찾으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는 게 눈에 띈다. 가까이 가서 확인하니 마루에 김현우가 앉아 있다. 손을 붕대로 감싼 모습에 정인의 눈이 커졌다.
“어쩌다 저랬대?”
“창문 닦는데 갑자기 깨졌나 봐요.”
“무슨 난리래. 배우 양반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원장님이 차 키 가지러 갔어요.”
김현우의 옆에는 구급함과 함께 풀어진 붕대와 가위 그리고 핏자국이 선명했다. 정인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데 미닫이문이 열리며 안방에서 엄마가 서둘러 나온다. 옷을 갈아입은 그녀의 손에는 차 키가 들려 있었다.
“현우 씨 얼른 일어나요. 병원 가게.”
김현우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원장님 저 괜찮아요. 놔두면 붙어요.”
“무슨 소리예요. 살이 쩍 벌어졌는데. 가서 꿰매야지.”
“진짜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요. 나중에 고생한다니까.”
엄마는 이런 경우 꽤 고집을 부리는 편이라 반드시 병원에 데려가야 마음을 놓을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정인은 엄마에게 걸어가 손에 들린 차 키를 잡아챘다.
“제가 다녀올게요.”
가지 않겠다고 버티던 김현우가 정인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인은 앞서가며 언덕 위를 응시했다. 차로 가는 도중에 김하준에게 전화했는데 일이 바쁜지 받질 않는다. 신경이 쓰였으나 지금은 다친 사람을 병원으로 옮기는 게 급선무였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거는데 김현우가 다친 손 때문인지 안전띠를 제대로 당기지 못한다. 정인은 대신 벨트를 당겨 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차가 낡은 탓에 벨트가 뻑뻑하여 말을 듣지 않는다. 몸이 김현우를 향해 더 기울었다. 순간 목덜미에 끈적한 숨결이 확 와 닿는다. 소름이 끼쳐 벨트를 놓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방금 그건 착각이었을까. 김현우가 멋쩍은 표정으로 웃는다.
“어떡하죠, 정인 씨. 나 때문에 괜히 일만 늘었네요.”
정인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약국에 간 김현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읍내에 있는 병원에서 손가락을 꿰맸는데 하필 주말이라 환자들이 많았고 덕분에 사람들이 김현우를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해 왔다.
놀랍게도 개중엔 정인을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신데렐라 맞지? 보육원 집 아들. 둘이서 여긴 어쩐 일이래. 남편하고 사이가 나쁘다고 하더니 진짠가. 별별 이야기가 다 들려왔으나 이젠 이골이 나서 그런 것쯤은 웃으며 넘길 여유가 생겼다. 나만 아니면 그만이지, 하는 마음으로.
예상보다 김현우가 늦어지던 찰나 김하준에게 전화가 걸려 온다. 메시지를 남겼는데 이제서야 확인했나 보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자마자 김하준의 고함이 들려왔다. 정인은 휴대폰에서 귀를 멀리했다.
[미쳤어? 네가 왜 걔를 데려다줘? 어디야? 주소 대. 지금 갈 테니까.]
“치료 마쳤어. 금방 갈 거야.”
[아니. 같이 타지도 마. 김현우더러 택시 타라고 해.]
정인이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다친 사람한테 어떻게 그래?”
[걔만 아파? 나도 아파!]
다쳤다는 말에 심장이 쿵 떨어진다. 정인은 놀라서 물었다.
“어디 다쳤어?”
[마음. 네가 다른 놈 옆에 태워서 돌아다니는데 내가 마음이 안 아프고 배겨!]
정인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휴대폰이 마치 하준의 얼굴인 양 한 번 들여다봤다. 그러나 김하준의 지랄은 오래가지 못했다. 멀찍이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자 김하준은 바로 태도를 바꾼다. 예, 어머니. 저 지금 갈게요. 그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목소리를 낮추며 으르렁댔다.
[아무튼, 빨리 와라. 아니면 쫓아간다.]
“커피 사다 줄까?”
커피고 뭐고 필요 없으니 빨리 오기나 하라고 재촉하고 전화를 끊는다. 정인은 끊어진 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어이없는 웃음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바람피우는 마누라 단속하는 것도 아니고 아픈 사람 병원 좀 태워다 줬다고 이 난리라니. 과거 전적이 있어서 그런가. 괜히 찔려서 지난 일을 곱씹고 있는데 보조석 문이 열리면서 김현우가 탄다.
그의 손에는 처방받은 약 봉투가 들려 있었다.
“오래 걸렸죠? 미안해요. 사람들이 꽤 많네요.”
“괜찮아요. 이제 출발할까요?”
정인이 시동을 걸자 김현우가 약 봉투를 뒤적이더니 비타민 음료 두 개를 꺼내 뚜껑을 열고 하나를 정인에게 건넨다. 음료수를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사양하자니 무안할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그것을 받아 반쯤 마셨다. 나머지 하나는 김현우의 몫이었다.
“약사님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정인 씨 것까지 2개 달라고 했어요.”
“고마워요.”
정인은 반쯤 남은 병을 닫아 옆에 넣어 뒀다. 시큼씁쓸한 맛이 혀끝에 감돈다. 차를 출발하여 가는데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게 눈에 띈다. 자신의 모교에 다니는 아이들이다. 그걸 보며 잠시 옛 생각에 빠졌다. 김하준과 다니던 오락실, PC방, 분식집, 노래방….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가 보고 싶다.
추억에 젖어 있는데 김현우의 전화가 울린다. 그는 곤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전화를 무음으로 바꿔 품에 집어 넣었다. 정인이 흘깃 보자 그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대표님이요.”
언론에서는 김현우와 소속사가 갈등을 겪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벗어나고 싶어 하는데 소속사에서 온갖 트집을 잡아 놓아주지 않는다는 소문도 돌았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좋은 배우이고 좋은 사람이다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다.
“잘됐으면 좋겠어요….”
위로의 말을 건네는데 무언가 이상하다. 정인은 눈을 힘주어 감았다 떴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고 몸이 나른해진다. 졸린 건가. 남의 한탄을 들으면서 잠이 오다니. 김현우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사실 이제 많이 지쳤어요. 처음 시작할 때는 내가 최고가 될 줄 알았거든요. 누구나 다 그렇잖아요. 자신만만하고 패기 넘치고. 그런데 10년 가까이 일이 잘 풀리지 않다 보니까 사람이 위축되더라고요. 친했던 사람들은 모두 승승장구해서 유명한 배우가 됐는데, 나는 뭐가 부족해서 아직도 이 자리인가… 질투도 나고… 또 그러다 보니 내가 너무 실망스럽고 초라해지고….”
그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어째서 목소리가 점점 흐릿해지는 걸까. 머리가 멍하다. 혀도 청각도 둔해지고 눈꺼풀은 돌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겁기만 하다.
정신을 차리려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는데도 역부족이다. 정인은 급하게 차를 멈춰 세웠다. 끼이익. 핸들에 이마를 대고 숨을 몰아쉬던 정인이 고개를 들었다. 작년 위내시경을 받느라 마취를 하고 중간에 잠깐 깨어났을 때 꼭 이런 기분이었다. 의식은 있으나 몸은 내 것이 아닌 기분. 혹시 뇌출혈이나 뇌경색 같은 건 아닐까. 와중에도 덜컥 겁이 났다.
정인은 손을 뻗어 옆에 있던 김현우의 팔을 잡았다.
“저, 이, 이상… 해요… 현…우 씨….”
발음이 뭉개지고 의식마저 흐릿해진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김현우를 보는데 그의 표정이야말로 이상하다.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웃고 있는 거 같기도 하고. 눈에 힘을 주었으나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쓴 것처럼 시야가 뱅글뱅글 돌기만 했다.
“괜찮아요? 정인 씨?”
“저 병…병원….”
김현우의 손이 뺨에 닿는다. 정인은 그것을 떨쳐 낼 힘조차 남아 있질 않았다. 김현우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진다. 머리를 의자에 기대며 숨을 몰아쉬자 김현우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병원 데려다줄게요. 움직일 수 있겠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서 내린 김현우가 정인을 부축해 보조석으로 옮겼다. 자리를 바꾸자마자 정인은 몸을 축 늘어트리고 눈을 반쯤 뜬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갈게요. 조금만 견뎌요.”
꿈을 꾸는 듯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남아 있던 의식마저 차츰 희미해졌다. 김현우가 운전대를 잡고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그러나 움직이기 시작한 차는 병원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
하준은 시간을 확인했다. 통화하고 30분 정도가 지났는데 류정인이 오질 않는다. 괜히 전화해서 닦달하면 사고라도 날까 봐 관두었지만 초조한 감정은 숨길 수 없었다. 대놓고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최근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정인을 밖에 내보낼 때마다 가슴을 졸여야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미리 알았으면 자신이 병원에 다녀오든가 했을 텐데. 류정인 입장에선 보육원에 기부도 하고 봉사도 하는 김현우가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사람이겠지만 하준에겐 그렇지 못하였다. 요즘 같은 시기에 정인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사람은 더더욱 경계해야 했다. 그것이 누구라도.
마루에 앉아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데 멀리서 민아가 걸어온다. 다들 쉬는 시간이라며 그녀는 얼음이 둥둥 뜬 커피를 한 잔 가져다줬다.
“형부 커피 드세요.”
고마워. 하준이 그것을 받아 입에 댔다. 믹스커피인데 맛이 오묘하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더니 민아가 곁에 와 앉으며 묻는다.
“맛이 이상해요?”
“음…. 처제가 탔어?”
“엄마가 탄 건데.”
김하준이 엄지를 치킨다.
“퍼얼펙트야. 내 생애 이렇게 맛있는 커피는 처음이야.”
단숨에 들이켜는 하준을 보며 민아는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사실 커피는 엄마가 아니라 자신이 탔다. 일회용 커피가 없길래 자신이 마음대로 넣어서 만든 건데. 부인이 예쁘면 처가 말뚝에도 절을 올린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민아는 그런 하준을 뿌듯하게 보다가 대문을 흘깃 바라봤다. 정인이 올 시간이 넘은 거 같은데 소식이 없다.
“오빠는 어디까지 왔대요?”
하준이 거의 다 비운 컵을 옆에 내려놓고 시간을 확인한다.
“글쎄. 도착할 시간이 지난 거 같은데. 차가 막히나.”
“시골이 막혀 봤자죠…. 제가 전화해 볼까요?”
하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아가 곧바로 정인에게 연락을 한다.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고 이내 하준을 바라봤다.
“왜?”
“전화가 꺼져 있는데….”
하준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민아는 전화를 끊고 나서 김현우의 연락처를 찾더니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상하다…. 왜 둘 다 전화를 안 받지. 전화번호 이게 아닌가.”
민아의 말에 하준의 낯빛이 굳어졌다. 하준은 주머니에 넣은 휴대전화를 꺼내 류정인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민아의 말대로 꺼져 있다는 메시지만 흘러나온다. 초조해지는 마음을 애써 감추고 대문 앞까지 걸어 나가 류정인을 기다렸다. 그렇게 10여 분이 지나도 나타나질 않자 더는 인내심을 발휘하기 힘들어졌다.
마지막 전화를 거는데 민아가 곁으로 와 눈치를 살폈다.
“아직도 꺼져 있어요?”
“응….”
“병원에 사람이 많나….”
생각에 잠겨 있던 하준은 입던 복장 그대로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외투에서 차 키와 지갑을 꺼내 챙겨 나왔다. 눈치챈 민아가 뒤를 쫓았으나 하준이 곧바로 제지하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다.
“금방 다녀올게. 어머니한테는 말씀드리지 마. 괜히 걱정하셔.”
“제가 같이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니야. 별일 없을 거야.”
민아에게 웃어 주고 나서 하준은 차에 올라탔다. 룸미러로 뒤를 보니 민아가 여전히 그곳에 서 있다. 들어가라고 손짓한 뒤 급하게 시동을 걸었다. 그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진다.
좁은 비포장길을 빠른 속도로 달리며 하준은 휴대전화를 꺼내 거치대에 고정하고 나서 위치추적을 시작했다. 류정인의 위치가 10여 분 떨어진 도로에서 멈춰 있다. 달려가는 10분 내내 속이 타들어 갔다.
아무 일 없기를. 그저 오는 길에 전화가 꺼졌을 뿐이기를. 하지만 그 바람은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무너졌다. 위치가 잡힌 곳에 도착하였으나 그곳에는 정인이 끌고 나간 차량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하준은 도로 주변을 둘러봤다. 정인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여전히 꺼져 있다는 메시지만 흘러나온다. 무언가를 빠트려 시내로 되돌아간 건 아닐까. 우연히 둘 다 전화가 꺼졌을 뿐인데 내가 예민하게 구는 건 아닐까.
불안감에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애간장이 끓는다. 다시 전화를 걸다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카센터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입구로 들어서자 손님이 온 줄 알고 작업복을 입은 직원이 나와 인사를 건넨다.
차에서 내린 하준은 가게 주변을 살피다 도롯가에 달린 CCTV를 발견하고 손으로 가리켰다.
“저거 녹화되는 건가요?”
“예? 뭐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직원이 영문 모를 표정으로 묻는데 뒤에서 담배를 문 남자가 나타난다. 복장이나 얼굴로 보아 그가 사장인 듯하였다.
“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CCTV 확인 좀 할게요. 이거 지나가는 차 찍히는 거 맞죠?”
“맞긴 한데….”
남자가 하준을 위아래로 훑는다. 흙이 잔뜩 묻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비싼 수입차를 끌고 온 남자가 다짜고짜 CCTV를 보자고 하니 아무래도 수상한 모양이다. 하준은 재빨리 지갑을 열어 수표 여러 장을 꺼내어 남자에게 건넸다. 엉겁결에 돈을 받아 든 남자가 금액을 확인하고 눈이 커진다.
“바로 볼 수 있습니까? 부탁드려요.”
남자가 입에 문 담배를 질겅질겅 씹더니 돈을 주머니에 집어넣고서는 하준에게 손짓을 한다. 함께 가게로 들어가자 안쪽 구석에 CCTV 화면이 여러 개다. 남자는 그중에 도롯가를 비추는 걸 찾아서 녹화된 것을 재생했다.
“이거 누르면 되감기, 이건 앞으로. 이건 멈춤. 쉽죠?”
“감사합니다.”
버튼을 누르니 녹화된 영상이 거꾸로 되감긴다. 화면에 고정된 하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류정인 어머니의 차는 붉은색이고 한적한 길이라 지나가는 차도 별로 없으니 찾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뒤에서 지켜보던 사장이 말을 걸었다.
“근데 누가 뭘 훔쳐 갔어요?”
하준은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네.
“하여튼 도둑놈들이 문제라니까. 우리 가게도 1월에 차 한 대 도둑맞았잖아요. 여기가 워낙 외진 곳이라 도둑놈 잡기도 힘들어요. 그나마 저걸 달아 놔서 안심이지.”
사장의 푸념을 뒤로한 채 하준은 화면을 멈췄다. 류정인이 탄 차다. 왼쪽에서 나타난 차는 카센터를 30여 분 전에 지나쳤다. 이후 화면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되돌아가진 않은 모양이다.
도로와 이어진 건 정인이 사는 마을이었다. 하준이 차를 몰고 오는 동안 마주치지 못했다면 마을과 카센터 오기 전 어딘가에서 사라졌을 확률이 높다. 화면 속 붉은색 차량을 노려보던 하준은 자리에 앉은 채 휴대전화로 지도를 검색했다.
근처에 있는 가게들을 꼼꼼히 살펴보는데 모텔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도롯가에서 꽤 많이 떨어진 곳이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연락처를 검색했으나 나오질 않는다. 하준은 옆에 서 있던 사장에게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사장님. 이 근처에 궁전모텔이라고 있어요?
사장이라는 남자가 담배 연기를 코로 내뿜는다.
“궁전모텔? 거긴 왜요?”
“아세요?”
“거기 사장이 내 동창인데.”
한줄기 희망이 솟아난다.
“그럼 전화 한 통만 걸어 주실 수 있을까요? 붉은색 35수 8061 차량 왔는지 확인만 해 주세요.”
사장이 내켜 하지 않자 하준은 지갑에서 나머지 수표를 꺼내었다. 그것을 받은 사장이 형광등에 수표를 슬쩍 비춰 본다. 젊은 사람이 돈이 많은가 보네. 그러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잘 있었냐, 어쩌냐, 안부 인사를 하다가 조금 전 들어온 차량이 있는지 묻는다.
“시뻘건 색. 35… 뒤에 뭐라고 했지?”
“35수 8061.”
별걸 다 시킨다는 표정을 하던 사장의 눈이 커진다. 그는 곧 귀에서 전화를 떼고 하준을 바라봤다.
“거기 있다는데?”
하준은 다급하게 사장에게서 전화를 낚아챘다.
“여보세요? 그 사람들 몇 층에 있어요? 지금 가 주실 수 있나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간절하게 부탁한 건 처음일 것 같다. 모텔 사장은 귀찮다는 투로 댁은 누구냐, 왜 그러냐. 혹시 불륜 문제면 난 빼 달라. 난 모르고 손님 받았다. 그만 끊겠다. 한 발 뒤로 빼길래 하준은 급하게 카센터 사장을 바꿔 줬다. 어서 대신 말하라고 눈으로 재촉하자 카센터 사장이 입맛을 다신다.
“춘배야 그러지 말고 좀 올라가 봐. 나도 몰라. 아, 글쎄 모른다니까. 어, 그래. 위급한 상황이면 네가 좀 도와주면 좋고. 사례는 내가 할게, 인마.”
지켜보던 하준이 가게를 빠져나가며 사장에게 외쳤다.
“제가 갈 때까지 시간 좀 벌어 달라고 하세요!”
뛰쳐나온 하준이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뒤로 후진해 차를 빼고 도롯가로 진입하려는데 가게 안에서 카센터 사장이 다급하게 나온다. 끼이- 차를 멈춰 세우고 창문을 내리자 사장은 운전석으로 와서 헐떡이며 말을 꺼냈다.
“누가 죽었다는데?”
하준의 얼굴이 굳어지자 카센터 사장은 눈을 한 번 슥 굴린 뒤 변명처럼 늘어놓았다.
“아니. 다쳤다는 건가. 아, 씨벌. 춘배 이 새끼가 소리를 지르면서 끊는 바람에 내가 자세히,”
하준은 남자의 말을 채 듣지도 않은 채 차를 급하게 출발시켰다. 끼이익, 타이어 갈리는 소리와 함께 도로에 자국이 남는다. 핸들을 쥔 손에 땀이 배어 나오고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짓씹었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
김현우는 도로와 꽤 떨어져 있는 한적한 모텔에 도착해 차를 세워 두고 독한 술을 꺼내 입을 헹군 뒤 정인의 몸에도 술을 적셨다. 류정인이 눈을 감은 채로 몸을 뒤척인다. 김현우는 류정인이 마시다 만 음료수를 힐긋 봤다. 다 마셨어야 했는데.
남은 것을 들고 류정인의 입가에 댔으나 입을 꾹 다물고 미약하게나마 저항을 한다. 김현우는 곧 포기하고 정신이 혼미한 류정인을 끌어내었다. 때마침 근처에 잠복해 있던 수상한 남자가 사진을 찍는다. 김현우는 류정인의 얼굴이 잘 나오도록 부축하였다.
모텔 안으로 들어가자 입구에 작은 창이 하나 있고 그 안으로 사람이 앉아 TV를 보고 있다. 창을 두드리자 머리가 희끗한 남자가 돌아본다. 남자의 앞에는 작은 술상이 놓여 있었다. 뜻밖의 손님에 남자가 자리를 털며 일어섰다.
“어서 오세요.”
“숙박 됩니까?”
남자가 옆의 가격표를 가리킨다. 4만 원이라고 적힌 글자가 보였다. 김현우는 미리 챙겨 둔 류정인의 지갑을 꺼내 카드를 내밀어 모텔비를 계산했다. 주인이 힐긋 보길래 류정인의 허리를 추슬러 끌어안았다.
“자기야. 정신 좀 차려 봐. 응?”
“아이고. 애인이 낮부터 많이 취했는가 보네.”
“예….”
김현우가 멋쩍게 웃자 주인이 카드와 영수증을 건네준다. 사장은 김현우의 얼굴을 유심히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낯이 익네. 아리송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으나 오히려 나중을 생각하면 잘된 일이었다.
김현우는 정인을 끌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모텔 계단을 올랐다. 그러나 아무리 류정인이 날씬하다 해도 늘어지는 성인 남자를 챙기는 건 버거운 일이었다. 힘겹게 2층에 올라가서 키로 문을 여는데 눅눅한 냄새가 확 풍겨 온다.
언제 손님을 받았는지 한눈에 봐도 청소 상태가 영 엉망이다. 비틀거리는 정인을 침대에 눕힌 뒤 김현우는 모자를 벗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목을 축였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는데 류정인이 뒤척이며 신음을 낸다.
김현우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역시 남은 약을 억지로라도 먹였어야 했나.
그는 침대로 가서 류정인을 내려다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정인 씨….”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정말 미안해요.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다 방 한쪽에 놓여 있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걸 발견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곧바로 외면하고 바지를 마저 벗었다.
침대 위로 올라온 김현우는 정인의 상의로 손을 뻗었다. 단추를 하나씩 하나씩 풀자 셔츠가 벌어지며 매끈한 가슴이 드러난다. 흰 피부에 향긋한 오메가의 향이 풍긴다. 소문엔 베타라고 하던데 아니었나.
그 향기에 취하자 김현우는 저도 모르게 몸이 달아올랐다. 손끝으로 그림을 그리듯 정인의 목부터 어깨, 가슴을 따라 훑어 내려가자 몸이 움찔댄다. 보는 것만큼이나 부드러운 감촉이다.
김현우는 따로 챙겨 온 휴대전화를 꺼냈다. 카메라를 켜고 류정인을 화면에 담았다. 손을 아래로 미끄러트려 류정인의 바지를 끌어 내리려는 순간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김현우는 긴장된 표정으로 입구를 쳐다봤다. 잠잠하다. 가만히 있으니 다시 똑똑.
자리에서 일어난 김현우는 정인의 몸을 이불로 덮고 나서 문 앞으로 갔다.
“누구세요?”
[사장입니다. 쉬시는데 미안해요.]
“무슨 일이시죠?”
[그…아무래도 카드가 잘못 긁힌 거 같아서. 좀 봐야겠는데.]
“죄송한데 이따 와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씻느라 옷을 모두 벗고 있어서요.”
[에이, 잠깐이면 돼요. 얼마 긁혔는지 확인만 하면 되니까… 어려운 것도 아니고….]
김현우가 입을 꾹 다물고 문을 노려봤다. 사장은 쉽게 물러날 기세가 아니다. 재차 문을 두드리길래 마지못해 대답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바닥에 벗어 둔 티셔츠를 입고서 류정인의 지갑을 찾는데 주머니에서 빠졌는지 보이질 않는다. 한참을 찾다가 테이블 아래에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그것을 주워 카드 영수증을 보니 4만 원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다. 한숨을 내쉬며 영수증을 들고 막 일어서던 그때였다.
정인의 신음이 들린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순간 이번엔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아…!”
김현우는 등골이 오싹해져 홱 돌아섰다. 방금 전까지 누워 있던 류정인이 머리를 감싸 쥐고 침대에 앉아 있다. 김현우는 영수증을 든 채로 얼음처럼 굳었다가 서둘러 정인의 안색을 살폈다.
“정인 씨… 괜찮아요?”
정인은 머리를 감싸 쥔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아직 약에 취해 있는 건가. 김현우는 천천히 다가가며 목소리를 낮췄다.
“갑자기 쓰러져서 내가 이곳으로 데려왔어요. 많이 놀랐죠?”
김현우는 불안한 눈으로 류정인을 촬영하던 휴대폰을 힐긋 봤다. 관계를 맺는 영상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어느 정도 보상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 살피는데 정인이 떨구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든다.
구겨진 미간 아래로 눈빛이 송곳 같다.
“야.”
야? 그러고 나서 김현우가 피할 새도 없이 정인은 그의 얼굴을 머리로 들이받았다. 빡, 하는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김현우가 뒤로 휘청 물러났다. 악! 코를 감싸 쥔 그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당황한 김현우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정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머리를 한 번 더 만진다.
“아 씨발…. 대가리 깨질 거 같아.”
“잠깐만요. 정인 씨.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정인은 김현우를 노려보다 자신의 풀어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이를 까득 물었다.
“오해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이 개새끼가!”
정인은 그대로 김현우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반격하지 못한 김현우의 몸뚱이가 카펫 위에 넘어지자 그의 몸 위에 올라타 여러 차례 주먹을 휘둘렀다. 빡, 김현우의 고개가 돌아가고 동시에 모텔방 문이 열린다.
“손님?”
정인이 주먹을 움켜쥔 채로 고개를 들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는 피투성이가 된 김현우와 정인을 번갈아 보더니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며 누군가에게 급히 전화를 걸고 있었다.
***
카센터에서 출발해 모텔 앞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건물 앞에다 차를 세워 놓고 내려서 보니 정인이 끌고 나간 차가 떡하니 서 있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 안으로 급하게 들어가니 입구에 사람은 없고 대신 위층이 소란스럽다.
하준은 계단을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실내는 밤처럼 어두컴컴했다. 2층에 다다르자 복도 제일 끝에서 소리가 들린다. 그곳으로 뛰어간 하준은 입구를 들어서다 예상치도 못한 광경에 멈칫했다. 바닥엔 김현우가 티셔츠에 팬티만 걸친 채 얼굴이 피떡이 되어 쓰러져 있었고, 그 앞에서 고함치는 정인을 모텔 주인이 뜯어말리는 중이었다.
“놓으세요. 저 새끼는 맞아야 한다니까요!”
“말로 해, 말로! 사람이 폭력을 쓰면 되나.”
“사장님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하준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 정인을 붙든 사장의 팔을 떼어 냈다. 사장이 눈이 동그래져 하준을 본다. 정인 역시 갑작스러운 하준의 등장에 눈이 커졌다.
“하준아. 너 여기 어떻게…?”
“아까 카센터에서 전화한 분인가? 잘 왔네. 아, 친구 좀 말려 봐요. 내가 죽겠다니까.”
사장은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섰다. 몇 가닥 남아 있지 않은 그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엉망이고 얼굴에는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하준은 정인을 바라봤다. 류정인 역시 셔츠를 다 풀어헤치고 몸싸움을 하느라 목에 생채기가 났다. 거기다 얼마나 사람을 팼는지 손등이 다 까져 피까지 흐르고 있었다.
하준은 착잡한 표정으로 정인의 뺨을 어루만지며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
악을 쓰던 정인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하준은 그런 정인을 품에 끌어안고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늦어서 미안.”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병신같이 굴다가 이런 상황을 만든 건 저인데 왜 김하준이 사과를 하는지 모르겠다. 울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소용없었다. 하준은 정인을 품에서 떼어 내고 조심스레 눈물을 닦아 줬다.
“이제 괜찮아.”
“미안…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 저 새끼가… 씨발….”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이자 하준은 정인을 데리고 침대로 가서 앉힌 다음 풀어진 셔츠를 하나씩 여며 줬다. 눈물을 닦고 괜찮다고 달래 주는데 뒤에서 눈치를 살피던 사장이 하준을 부른다. 돌아보니 그가 김현우를 살피는 중이다.
“119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이 친구 영 정신을 못 차리는데.”
하준은 정인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쓰러져 있는 김현우에게 갔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하준은 발끝으로 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일어나.”
사장이 옆으로 와서 선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하준은 사장을 돌아봤다.
“제가 깨워서 잘 얘기할게요. 사장님은 내려가 보세요.”
사장이 눈치를 살피더니 쩝, 입맛을 다신다.
“그래도 될까?”
“걱정하지 마세요. 소란 피워서 죄송합니다. 부서진 집기는 모두 배상할게요.”
“알았어, 그럼. 나는 내려갈 테니까 싸우지들 말고 잘 해결해.”
“예. 그럴게요.”
한시름 던 주인이 내려가고 난 뒤 하준은 누워 있는 김현우를 발로 건드렸다.
“쇼하지 말고 일어나.”
김현우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뜬다. 김하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가득하다. 하준은 그런 김현우를 아무 감정 없는 눈길로 쳐다만 봤다. 이윽고 김현우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몸을 일으킨다.
그가 일어서려고 바닥을 짚는 순간 하준이 그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놀란 김현우가 저항하려고 몸부림쳤으나 소용없었다. 하준은 그를 개처럼 끌고 욕실로 들어갔다. 이거 놔! 그 소리에 넋을 놓고 앉아 있던 정인이 뒤돌아봤지만 이미 욕실 문이 쾅 닫히던 상황이었다.
“하준아.”
놀라서 일어서는데 약 기운 때문인지 눈앞이 핑 돈다. 정인은 휘청거리며 뛰어가 욕실 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꿈쩍도 하질 않는다. 그때 욕실 안에서 무언가 쿵 하는 소리가 나더니 이어서 누군가의 억눌린 신음이 들려왔다.
정인은 주먹으로 욕실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하준아! 김하준!!! 닫힌 문은 꿈쩍하질 않았고 도저히 안 되겠어서 나중엔 문을 발로 걷어찼다. 쾅! 쾅! 쾅! 갑작스러운 소란에 내려갔던 모텔 사장이 뛰어 올라왔다.
“아니 또 무슨 난리야?”
“사장님 열쇠요. 욕실 열쇠요!”
다급한 정인의 목소리에 사장도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합심해서 문을 잡아당겼다. 그래도 안 되어 나중에는 의자를 하나 집어 들어 욕실 문짝을 내리찍는다. 쾅, 쾅, 쾅, 문짝이 떨어져 나가듯 열렸고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정인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김하준이 샤워기 줄로 김현우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시뻘게진 김현우가 침을 흘리며 눈꺼풀을 파르르 떤다. 정인은 기겁하고 뛰어들어 김하준의 팔을 붙잡았다. 그의 눈에 어린 지독한 살기를 보고 있자니 마치 제 목이 졸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하준아! 김하준!”
악을 쓰며 팔을 당기고 주먹으로 퍽퍽 때리는데도 막무가내로 김현우의 목을 조른다. 기겁한 모텔 사장까지 합심해 하준을 뜯어말렸으나 소용없었다. 하준아 그러지 마. 김하준! 제발. 하준아.
두려운 마음에 눈물이 쏟아진다. 정인은 하준을 끌어안으며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 마. 제발. 하지 마. 그제서야 하준의 팔에 힘이 빠져나간다. 말리던 사장도 놀랐는지 다리가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인이 눈물을 매단 채 고개를 들었다. 기절한 김현우가 벽에 기대 스르르 아래로 미끄러졌고 분이 풀리지 않는지 하준은 샤워기 줄을 꽉 움켜쥔 채 김현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인은 또다시 김현우의 목을 조를까 싶어 다급히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
하준이 참고 있던 숨을 터트리며 손에 쥔 줄을 바닥에 던졌다. 정인은 하준을 마주 보며 얼굴을 확인했다. 눈 주위가 붉어진 그의 모습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하준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가… 그랬대….”
그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몇 번이고 이를 꽉 물었다가 뗐다. 정인은 하준이 하는 말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뚫어지게 응시하니 하준이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구고서 나직하게 읊조렸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시켰대.”
***
간호사가 손등에 난 상처에 약을 바르는 동안 정인은 앞에 앉아 있는 하준을 흘깃 봤다. 기절한 김현우를 구급차에 실어 병원까지 왔는데 다행히 입 안이 터지고 코뼈가 골절된 것 외에는 크게 이상은 없다고 하였다.
난데없이 배우가 실려 오는 바람에 시골 병원이 한참을 술렁였다. 잠깐 정신을 차린 김현우는 자기가 한 짓이 탄로 날까 겁이 났던 건지 괴한에게 폭행당한 걸 김하준과 정인이 구해 줬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둘러댔다.
손등의 상처를 다 치료한 정인은 하준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김하준은 모텔을 나온 뒤로 이상할 만큼 말이 없었다. 택시 탈 곳을 찾는데 뒤따라오던 하준이 멀찍이 떨어져 올 생각을 않는다.
정인은 그리로 가서 하준의 팔을 잡았다.
“가서 옷부터 갈아입자. 엉망이야.”
그런데도 꿈쩍하지 않고 정인을 쳐다보기만 한다. 덜컥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차라리 평소처럼 농담을 하면 나으련만. 정인은 일부러 자신의 손등을 보여 줬다.
“그래도 내 주먹이 아직 쓸 만한가 봐. 너도 봤지? 김현우 얼굴 떡 된 거.”
“…….”
“우리 나온 김에 떡볶이 먹으러 갈래? 예전에 그 분식집 아직도 있더라. 내가 봤어.”
“…….”
“하준아.”
붙잡은 팔을 흔들며 눈을 마주치자 하준이 애써 미소 짓는다.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길래 힘을 주어 팔을 잡아당겼다. 그랬더니 팔을 슥 빼낸다.
“정인아.”
“응?”
“너 집에 먼저 가. 나 서울 올라갈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으나 이상할 만큼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정인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 도무지 혼자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팔을 힘주어 잡았다.
“싫어. 같이 가.”
“…….”
“같이 갈래.”
하준은 고개를 떨군 채 입을 다물었다. 정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다. 자신의 아버지가 말로 모욕을 준 것도 모자라 이런 짓까지 벌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있었던 일도 사실 모두 아버지의 소행은 아니었을까, 의심마저 들 지경이다.
당장 올라가 얼굴을 보고 결판을 내든 인연을 끊든 할 참이었다. 하지만 저를 꼭 붙들고 있는 정인의 손을 쉽사리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마음을 알았는지 정인이 이번엔 손을 꽉 잡는다. 그리고 하준의 곁으로 와서 서더니 얼굴을 올려다봤다.
“이럴 때일수록 같이 있어야지…. 왜 혼자 가려고 하냐.”
“너한테 미안해서… 너무 미안하고 그래서….”
하준이 잇지 못하자 정인이 손을 잡고 팔을 앞뒤로 흔든다. 하준이 쳐다보자 정인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이렇게 흔들면 기운 난다며. 하준의 표정에 변화가 없길래 정인은 일부러 더 세게 흔들었다.
“더 흔들어야 해? 나 팔 떨어지겠다.”
결국, 하준이 웃어 버렸고 정인은 그의 손을 잡은 채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집에 얼른 가자. 씻고 싶어.”
손을 잡은 채 앞서 걷는데 하준이 그대로 잡아당긴다. 정인의 몸이 끌려가 김하준의 품에 안착했다. 벗어나려고 몸을 움직이자 더더욱 세게 껴안는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쳐다보며 수군댔으나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았다. 미안. 김하준의 물기 가득한 목소리만 귓가에 맴돌 뿐이었다.
집에 도착한 정인과 하준은 차를 세워 두고 담 너머로 안을 살펴봤다. 여전히 봉사자들과 주변 이웃들로 집 안이 북적인다. 옷에 피가 묻어 있어 최대한 엄마의 눈을 피해 들어가려고 동태를 살피는데 하필 마당 한가운데 엄마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차라리 옷을 사서 갈아입고 올걸. 후회하는 와중에 뒤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던 정인은 멈칫했다. 동생 민아였다. 그녀는 피 묻은 옷을 입은 정인을 보더니 가뜩이나 큰 눈이 더 커다래졌다.
“오빠! 꼴이 왜 그래?”
“이, 이거 페인트,”
“피지?”
정인이 아니라고 부정할 새도 없이 민아가 엄마를 부르며 뛰어가려고 한다. 정인은 잽싸게 민아를 붙들고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 정인은 버둥거리는 그녀를 끌고 담벼락 아래로 몸을 숨겼다. 조용히 하라고 사정한 뒤 손을 떼어 내자 민아가 셔츠를 확인하며 얼굴이 일그러진다.
“피잖아.”
“작은 사고가 있었어.”
“사고? 무슨 사고?”
“몰라도 돼.”
민아는 뒤를 살펴봤다.
“근데 왜 둘밖에 없어?”
김현우가 보이지 않자 민아의 시선은 하준을 향한다. 정인을 기다리며 하준이 유달리 불안해하던 것도, 급하게 어딜 간 것도 마음에 걸렸는데, 옷에 피를 묻히고 나타났으니 찜찜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급하게 서울 갔어. 촬영이 있대.”
정인의 거짓말에 민아는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빠가 때렸어?”
정인은 인상을 구겼다. 누가 들으면 내가 맨날 사람이나 패고 다니는 줄 알겠다. 하지만 때린 건 사실이라 선뜻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민아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세상에. 아직도 그 버릇을 못 고치고….”
그 말에 정인은 이를 까득 물었다. 아니거든. 모르면서 괜한 소리 하지 마.
“그럼 왜 그런 건데. 이 피는 다 뭐고?”
“별거 아니라니까.”
“어떻게 별거 아니야. 엄마한테 말할래.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잖아.”
“내가 애야? 왜 엄마한테 일러?”
둘이 티격태격하는데 지켜보던 하준이 다가온다. 하준은 망설일 것도 없이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고, 수표를 여러 장 집어 민아의 손에 살포시 쥐여 주었다. 어리둥절하던 민아가 손을 펴 금액을 확인하더니 눈이 커진다. 정인이 기겁하고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였으나 민아가 재빨리 뒤로 감추는 바람에 실패했다.
하준은 정인의 어깨를 잡으며 민아에게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처제. 이건 못 본 거로 해 줄 거지?”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자 민아가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정인이 어이없게 보는데 민아가 집 안을 확인하더니 마치 스파이라도 된 양 눈빛을 반짝인다.
“엄마는 제가 유인할게요. 그 틈에 얼른 두 분이 가서 옷 갈아입으세요.”
하준이 고맙다며 미소를 짓자 민아가 안으로 후다닥 들어간다. 담 너머로 보니 그녀는 엄마에게 접근해 할머니가 뒷마당에서 엄마를 찾는다고 끌고 가는 중이다. 어찌나 연기가 능청스럽고 뻔뻔한지 정인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류민아 저거 순 날강도야.”
“왜. 귀여운데.”
두 사람은 모친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사람들 눈을 피해 서둘러 움직였다. 본채로 갈 수 없어 한참 떨어진 정인의 방까지 가는데 갑자기 엄마가 뒷마당에서 튀어나온다. 그 뒤를 민아가 졸졸 따랐고 정인은 놀라 하준을 끌고 창고 쪽으로 몸을 숨겼다.
“할머니 어디 계신데?”
“이상하다. 분명 여기 있었는데….”
창고에 기대선 정인은 이를 꽉 물었다. 저 바보가 반대편으로 엄마를 데리고 갔어야지. 걱정하는데 하준이 바로 코앞에서 얼굴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다. 그는 정인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이러고 있으니까 어릴 때 생각난다. 땡땡이치고 도망가던 날.”
김하준의 처음이자 마지막 땡땡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둘이 학생주임의 눈을 피해 학교 뒤편으로 도망갔다가 교장 선생님하고 딱 마주치는 바람에 완전히 털렸던. 추억을 되새기며 웃는데 마침 엄마가 민아와 함께 사라진다.
두 사람은 조금 떨어진 별채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정인이 학창 시절 쓰던 방이었는데, 예전 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쓰던 책상, 의자,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찍은 가족사진과 졸업 사진까지.
문을 닫고 들어간 두 사람은 벽에 기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히 왔다.”
“그러게.”
“같이 씻을까?”
정인은 고개를 젓고 먼저 씻으라며 하준의 등을 떠밀었다.
“씻겨 줄게. 너 손 다쳤잖아.”
“이 정도는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어, 나는 괜찮아.”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김하준은 입구에서 버티며 같이 씻자고 한 번 더 애원했다. 잠시 흔들렸으나 여태 욕실에 같이 들어가서 씻기만 하고 나온 적은 거의 없었다. 밖에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데 그건 아닌 듯하여 정인은 김하준을 억지로 욕실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나서 옷장을 열고 하준이 입을 만한 옷을 찾는데 마땅한 게 보이질 않는다. 한참을 뒤적인 끝에 발견한 게 고등학생 때 입던 체육복이었다. 대충 맞을 것도 같은데.
체육복을 접어서 책상 위에 놓은 정인은 의자에 앉아 주머니에서 김현우의 휴대전화를 꺼냈다. 혹시 몰라 김현우의 휴대전화를 압수했는데 거기엔 약에 취한 정인을 찍은 동영상이 있었다. 더 험한 꼴을 당하기 전에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다. 두 번 다시는 남이 주는 건 넙죽넙죽 받아먹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휴대전화를 꽉 움켜쥐었다.
“더 팼어야 했는데….”
하준에게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충격이 꽤 크다. 이렇게까지 김 회장이 몰고 갈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였다. 만약 동영상이 퍼지고 김현우와 류정인이 부적절한 관계라고 소문이 돈다면 김 회장이 얻는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사람들의 동정으로 표를 얻겠다는 건가. 아니면 그걸 핑계로 이참에 정인을 정리해 버리고 싶은 걸까.
도무지 그 시커먼 속을 모르겠다. 정인에 관한 소문을 퍼트린 건 김 회장이 아닐지 몰라도 김 회장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다. 하필 그런 사람이 김하준 아버지라니. 고개를 뒤로 젖히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데 욕실 문이 열린다.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서던 정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하준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낮에 아무 조명도 없이 본 김하준의 나체는 그야말로 감탄을 부를 지경이다. 어린 시절 김하준을 볼 때마다 조각상을 떠올렸는데,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더듬었다.
“뭐, 뭐야? 왜 벗고 나와?”
“가운 없어?”
“없어. 수건으로 좀 가리고 나오든가.”
“수건도 없는데.”
“…….”
황급히 수건을 찾는 동안 하준은 벗은 채로 방을 가로질러 걸어 다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건 둘째고 나체로 왔다 갔다 하니 눈앞이 아찔해진다. 정인은 옆에 있던 옷을 홱 집어 던지며 이거라도 빨리 입으라고 꽥 소리를 질렀다.
“젖은 채로 어떻게 입어?”
“그럼 이불 꺼내 줄게. 그걸로라도 덮고 있어.”
“싫어. 마를 때까지 놔둘래.”
그 말을 무시한 채 정인은 옷장을 열어 얇은 여름 이불 하나를 꺼내 하준의 허리에 둘러 줬다. 가까이서 허리를 감싸는데 알파의 페로몬 향이 짙게 풍겨 온다. 정인은 모른 척 이불을 꼼꼼히 여몄다. 김하준이 불만스러워하거나 말거나.
아니나 달라 투덜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꼭 이래야 해?”
“어.”
그다음 정인은 민아에게 연락해 수건을 넉넉하게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고 씻으러 들어갔다. 그런데 김하준이 따라온다. 그를 겨우 떨구어 낸 정인은 문을 걸어 잠그고 벽에 기대어 서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빌어먹을.
거울 앞에 서서 옷을 벗으니 꼴이 말이 아니다. 얼굴은 무척 피곤해 보였고 손등만 까진 줄 알았는데 몸싸움을 하느라 어깨와 목, 팔에도 생채기가 났다. 탈의한 옷을 한쪽에 쌓아 두고 샤워기를 틀었다.
손을 다쳐 씻는 게 영 불편하다. 그냥 김하준을 데리고 들어올 걸 그랬나. 아니, 그랬다간 무사히 나가지 못할 게 뻔하다. 최대한 물이 안 닿게 요리조리 피하는데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온다. 물을 끄자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찾아온 사람은 민아였다. 평소 같으면 수건이고 뭐고 나 몰라라 했을 텐데 받아먹은 게 있으니 단번에 뛰어온 모양이다. 샤워를 마치고 문을 여는데 김하준이 수건을 들고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다. 흠칫 놀란 정인은 저도 모르게 문 뒤로 숨었다.
“왜 그러고 있어?”
“수건 전해 주려고.”
그러면서 머리가 안으로 들어온다. 왜 숨어? 하준의 머리를 밀어낸 정인은 수건을 빼앗아 욕실 문을 닫았다. 물기를 닦고 옷을 갈아입고 나와 보니 김하준은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감상 중이었다.
“뭐 해?”
하준은 자신이 보던 것을 정인에게 펼쳐 확인시켜 줬다. 사진을 모아 놓은 앨범이다. 가까이 가자 하준이 정인의 어린 시절 모습을 손으로 짚는다.
“완전 귀여워. 이거 너지?”
“응.”
“옆에 이 남자애는 누구야? 되게 못생겼다.”
“민아….”
“아….”
툭하면 어릴 적 사진을 다 불태울 거라고 하는데…. 민아가 들으면 난리를 칠 일이다. 하준은 보던 것을 내려놓고 정인을 의자에 앉혀 머리를 세심하게 말려 주었다.
“처제가 어머니께는 잘 얘기했대. 걱정 말래.”
“다행이다.”
말을 하면서 보니 김하준이 입고 있는 옷의 다리 부분과 소매가 짧다. 어릴 적 체육복을 빌려줬을 땐 얼추 맞았던 거 같은데. 불편하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하준은 소매 부분에 코를 가져다 대며 웃는다.
“여기서 네 페로몬 향 난다. 달콤한 냄새.”
“그럴 리가.”
“진짜야.”
하준은 수건을 내려놓고 이번엔 정인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길래 정인은 목을 움츠리며 웃었다.
“하지 마. 간지러워.”
어깨에 있던 손이 아래로 내려와 팔과 겨드랑이 사이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온다. 뒤에서 꽉 끌어안으며 하준은 코와 입술을 정인의 목에 문질렀다.
“정인아.”
그는 정인을 부르고 나서 말이 없었다. 목소리가 평소처럼 밝은 느낌은 아니었다. 그게 불안하였으나 정인은 내색하지 않았다.
“말해.”
하준은 안고 있던 정인을 놓아주고 의자를 돌려 얼굴을 마주 봤다. 그리고 아직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더니 눈을 지그시 응시한다.
“생각해 봤는데….”
“응.”
“우리 이혼할까?”
어? 정인은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얼굴을 했다. 방금 한 이야기가 믿기지 않을 만큼 김하준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하다.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김하준이 재차 확인시켜 준다.
“이혼하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