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최근 있었던 사건 사고 때문일까요. 김만호 의원의 지지율이 소폭 하락했습니다. 반면 장 의원은 상승세를 보이며 언론에선 우위를 예측하기 힘들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는데요,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서 중요한 건 며느리가 오메가냐 베타냐가 아닙니다. 국민을 속였다는 게 문제죠. 김 의원은 전부터 아들에 관한 루머로 꽤 시달렸는데요. 존경받던 목회자의 집안과 혼인을 통해 이미지를 쇄신했고, 지지율도 올라간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거기에 대해 확실하게 입장 표명을 하거나, 증거를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만약 이게 진실로 밝혀진다면 굉장한 파장이 있을 것 같은데요.]
[당연합니다. 근데 소문엔 김 의원도 몰랐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베타였다고 하더라. 이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요. 물론 본인이 밝히기 전까지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게 쉽진 않겠지만 말이죠.]
정인은 손톱을 뜯으며 화면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어느덧 다가온 서 집사가 채널을 바꾸더니 앞에 흰 그릇을 놓아둔다.
“사람들 이야기 신경 쓰실 것 없어요.”
그릇에 담긴 건 탕약이었다. 한의원에서 준 약재를 직접 서 집사가 달였는데 덕분에 아침부터 집 안에 한약 냄새가 가득했다.
“단번에 쭉 들이켜세요.”
입을 대지도 않았는데 쓴 내가 훅 난다. 인상을 쓰자 그녀가 어서 마시라고 눈짓을 하더니 사탕을 준비한다. 정인은 숨을 참은 채로 꿀꺽꿀꺽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사약을 먹는 기분이 이런 걸까. 전에 먹던 한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고약한 맛이다.
서 집사가 주는 사탕을 받아 입에 넣었는데 단맛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진저리를 치니 서 집사가 기특한 표정으로 웃는다.
“원래 몸에 좋은 약이 쓰다고 하잖아요.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챙겨 드셔야 해요.”
정인은 사탕을 문 채 씁쓸하게 웃었다. 김하준네 할머니는 손주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이 약을 지어 줬을 텐데…. 방송에서 저렇게 떠드는데 하루라도 빨리 사실을 털어놔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모든 사실을 밝혔을 때 벌어질 여파가 두렵기도 하다.
서 집사가 빈 그릇을 들고 사라지자 정인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김하준이 망가트리고 새것을 사 주었는데 입력된 번호는 김하준과 엄마 그리고 동생인 민아 세 사람이 전부였다. 그러고 보니 이한 형사가 연락을 달라고 남겼었는데.
서 집사가 주방에서 일하는 동안 정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들어갔다. 더는 연락하지 말라는 하준의 협박이 마음에 걸렸으나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선에서는 돕고 싶었다. 고민 끝에 그는 남부 경찰서 강력계로 연락을 해 이한을 찾았다.
[누구시죠?]
전화를 받은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말에 정인은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이해수 사건의 증인? 아니면 그냥 아는 사람…. 아무래도 두 번째가 설명하기엔 더 쉬울 것 같았다.
“아는 동생이에요. 휴대폰 번호가 지워져서 부득이하게 경찰서로 연락드렸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정인은 망설이다 대답했다.
“류정인이라고 합니다.”
아, 상대가 알 수 없는 탄식을 하더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수화기를 막고 누군가에게 말을 전하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정인이 누구인지 아는 눈치였다. 잠시 뒤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류정인 씨. 이한 형사 새벽에 교통사고 나서 지금 중환자실에 있습니다. 의식은 없고요.”
놀란 정인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예? 분명 엊그제 꼭 할 말이 있다며 메시지를 남겼는데.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심장이 빠르게 뛴다. 정신을 차리고 병원의 위치를 물어본 뒤 서둘러 통화를 마쳤다. 옷을 갈아입고 차 키를 들고 나오는데 서 집사가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어디 가시게요?”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그녀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정인이 침을 맞고 돌아온 뒤부터 미열이 있으니 신경을 써 달라고 김하준이 출근을 하며 신신당부를 했었다.
“나중에 가면 안 될까요?”
“오래 안 걸려요. 진짜 급한 일이라 그래요. 네?”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며 부탁을 하는 바람에 서 집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시간을 확인했다.
“그럼 김 비서 데려가세요. 지금 부르면 10분이면 도착해요.”
때마침 인터폰이 울린다. 아침부터 누굴까. 혹시 김하준의 할머니가 또 찾아온 건 아닐까. 확인하던 서 집사의 얼굴이 싸하게 굳는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표정을 보고 정인은 본능적으로 할머니가 아님을 알아챘다.
“사모님이세요.”
그녀가 사모님이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김하준의 어머니였다. 정인은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문이 열리면서 김하준의 어머니가 비서도 없이 혼자 등장했다. 공손히 인사를 하는 서 집사를 지나쳐 그녀가 정인에게로 걸어왔다. 한껏 치장한 그녀는 본가에서 볼 때와는 사뭇 달랐다.
정인이 긴장한 표정으로 서서 고개를 숙였다.
“오셨어요.”
그녀가 차가운 눈길로 정인을 훑었다.
“어디 가려던 참이었니?”
“예, 잠깐… 나갈 일이 있어서요.”
“급한 일 아니면 일단 앉아. 너한테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정인은 마지못해 소파로 가서 앉고 주혜련이 그 맞은편에 앉았다. 서 집사가 차를 내오는 동안 주혜련은 말없이 집 안을 둘러봤다. 그 시간이 숨이 막히도록 길게 느껴졌다. 서 집사가 가져온 차를 두 사람의 앞에 놓아 줬으나 누구도 찻잔엔 손을 가져가지 않았다.
주혜련은 서 집사에게 자신의 차 키를 건네줬다.
“집사님. 제가 차에 쇼핑백 하나 놓고 온 게 있는데 가져다줄래요?”
“네?”
서 집사가 정인을 본다.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이윽고 그녀는 기색을 감추고 옅게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그럴게요, 사모님.
물러나는 그녀를 주혜련이 불러 세웠다.
“하준이한테 나 여기 온 건 비밀로 해 주세요.”
부탁이었으나 묘하게 위압감이 느껴졌다. 서 집사가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녀가 사라지고 난 뒤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주혜련은 말을 하는 대신 침실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잠은. 같이 자니?”
짧은 질문이었으나 말 속에는 여러 뜻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그녀가 찻잔을 든다. 나이에 비해 하얗고 매끈한 손가락은 굳은살이 잔뜩 박인 자신의 모친과는 달리 고생한 흔적이 없어 보인다.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낀 보석 반지가 유독 반짝였다. 찻잔을 내려놓은 뒤 그녀는 그 반지를 반대편 손으로 만지작댔다. 하기 힘든 말을 꺼내려는 듯.
“회장님한테 다 들었다. 나만 몰랐더구나.”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알고 있던 사실인데도 직접 마주하니 더 죄를 짓는 기분이다. 정인이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그녀의 한숨이 무겁게 느껴졌다.
“죄송할 거 없다. 이제라도 너는 네 갈 길 가고 하준인 하준이대로 살면 돼.”
찻잔을 보던 정인의 시선이 위로 올라가 주혜련에게 향한다. 그녀의 눈빛엔 분노와 안타까움, 연민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정인은 차마 그 눈을 더 마주하지 못하였다.
“하준이 약 먹는 거 너도 알지?”
“네….”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정신적으로 불안해질 때가 많은 애야. 그래서 난 그 애가 결혼한다면 충분히 보듬어 줄 상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
“근데 너는 아니야. 하준이한테 이미 한 번 상처 줬잖니.”
정인은 무릎 위에 올려 쥔 두 손을 꽉 말아 쥐었다. 그것까지 알아 버렸구나. 죄책감과 처참한 심정에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었다. 이제 그러지 않을 거예요. 두 번 다시 김하준한테 상처 주는 일 없을 거예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사이 그녀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회장님이 무슨 약속을 했는지 몰라도 막판에 가면 궁지에 몰리는 건 너야. 그럼 하준이도 다치게 될 테고.”
그녀가 내민 건 통장이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지나간다.
“선거 끝나기 전에 떠나. 부탁이다.”
목구멍이 뜨거워진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이젠 김하준 곁에 있을 거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정인이 선뜻 원하는 답을 내놓지 않자 주혜련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다.
정인은 겨우 감정을 추스르며 통장을 그녀에게 밀었다.
“죄송합니다.”
“그게 하준이를 위한 네 결정이니?”
뜻밖의 질문에 숨이 턱 막힌다. 사실이 탄로 나고 김 회장이 선거에서 떨어지고 모든 것들이 엉망이 된다면 김하준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때 난 김하준 곁에서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동시에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던, 도망치면 죽어 버릴 거라던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대답을 못 하자 그녀는 말없이 통장 대신 자신의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정인의 거절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간다. 오늘 나 만난 거 하준이한텐 말하지 마. 모자 사이 갈라놓을 게 아니라면 말이다.”
정인이 인사를 하려고 하자 그녀는 외면한 채 입구 쪽으로 돌아섰다. 황급히 그 뒤를 따라가는데 동시에 문이 열리고 서 집사가 나타났다. 예상대로 서 집사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계속 너만 찾는다니까.]
“미친놈아! 그러게 왜 애한테 술을 처먹여!”
[난들 김하준이 이렇게 처먹을 줄 알았냐. 아무튼 빨리 와. 아니면 여기다 놓고 간다.]
전화를 끊은 뒤 정인은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김하준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2주가 흘렀다. 마주칠 때마다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던 김하준은 최근엔 아예 학교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영우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냇가에서 놀았고 김하준도 합세해 술을 먹었다고. 김하준이 어디 술을 먹을 놈인가. 억지로 떠먹인 거 아니냐고 다그쳤더니 자기가 스스로 병나발을 불었단다.
정인은 하는 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옵빠 어디 가!”
아이들과 놀던 민아가 총총거리고 뛰어온다. 열 살 차이 나는 민아는 양 갈래로 머리를 묶고 왕방울만 한 눈을 끔뻑이며 같이 놀아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였다. 아니나 달라 줄넘기를 들고 와 보여 준다고 하길래 이따 놀자며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자전거를 끌고 다급히 집을 나섰다.
아이들이 모여 있는 냇가는 집과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종종 모여 고기를 구워 먹거나 어른들 눈을 피해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자전거를 끌고 둑을 따라 달리다 보니 산등성이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다. 그리고 멀리 아이들이 무리 지어 오는 게 보인다.
정인은 눈으로 하준을 찾았다.
“김하준은?”
영우가 손으로 뒤쪽을 가리킨다. 봤더니 둑 아래에 키 큰 사람 하나가 완전히 뻗어 있었다. 정인이 열받은 표정을 지었다.
“야! 그렇다고 애를 내팽개치고 오면 어떻게 해!”
영우가 진저리를 쳤다.
“말이 통해야 데리고 오지! 계속 너만 찾았다니까.”
“…….”
“김하준 저러는 거 처음 본다. 둘이 얼마나 싸웠길래 저래?”
“몰라, 씨발. 말 시키지 마.”
정인은 씩씩대며 그들을 지나쳤다. 자전거를 한쪽에 세워 두고 아래로 내려가니 여기저기 술병이 널브러져 있고 김하준은 돗자리 위에 완전 대자로 뻗어서는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정인은 그 옆에 철퍼덕 주저앉아 김하준을 유심히 봤다.
늘 끼고 다니던 안경은 어딜 갔는지 사라지고 없다. 마주치면 외면하고 도망가기 바빴으니 얼굴을 자세히 보는 게 몇 주 만인지 모르겠다. 뺨을 보니 전보다 야윈 것 같아 속이 상한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같이 공부를 하고 이곳에 와서 수영도 하고 둘만의 비밀스러운 장소에 가서 나쁜 짓도 하고… 그랬을 텐데….
자신이 오메가가 아니란 이유로 모든 게 틀어졌다. 그냥 말할까, 수없이 고민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알파와 베타 커플을 보며 부정하던 모습이 떠올라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정인은 긴 한숨을 내쉬며 완전히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누군가 머리카락을 만진다. 고개를 들자 눈앞에 김하준이 있다. 갈색 눈동자가 일렁이는 듯하였다. 서로 시선을 맞춘 채 숨 막히는 시간이 흘렀고 먼저 입을 연 건 김하준이었다.
“꿈인가….”
얼굴은 멀쩡해 보이는데 목소리는 취기가 가득해 잠꼬대처럼 웅얼댄다. 정인은 황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곧이어 바닥을 짚고 김하준이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현실과 꿈을 구별이라도 하려는 듯. 그러고 나서 정인을 보며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웃는다.
“꿈, 아니었네.”
애잔한 눈빛을 보며 정인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일부러 모질게 쏘아붙였다.
“너 미쳤냐?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지랄이야.”
“정인아….”
“나 갈 테니까, 집에 알아서 가. 한 번만 더 술 처먹고 부르면 가만 안 둔다.”
돌아서는 정인의 손목을 하준이 붙들었다.
“정인아. 얘기 좀 해….”
그 손을 따라 정인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저물어 가는 해를 배경으로 김하준의 얼굴이 유독 슬퍼 보인다. 눈이 토끼처럼 빨개진 김하준은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정인이 잡힌 손을 야멸차게 빼내고 그런 김하준을 마주 봤다.
“너 자존심도 없어? 내가 다른 놈 좋다고 하고 걔랑 잤다고 하는데도 이러고 싶어?”
“정인아….”
“씨발. 이름 그만 불러! 그 정도로 했으면 좀 알아먹지. 너는 내가 밉지도 않아? 차라리 욕을 하고 원망을 해. 이딴 식으로 사람 엿 먹이지 말고!”
소리를 치는 정인에게 하준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밀쳐 낼 새도 없이 정인의 팔을 붙잡더니 어깨에 이마를 툭 떨구고는 신음과 흐느낌을 동시에 터트렸다. 처음 보는 김하준의 모습에 정인은 얼어붙어 꼼짝도 하질 못했다. 울음을 참느라 김하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정인아.”
“씨발, 너는 진짜….”
“아무것도… 안 바랄게… 만나 달라고도 안 할게….”
“…….”
“얼굴만 볼 수 있게 해 줘….”
다른 사람 만나도 돼. 자고 싶으면 자. 다 괜찮으니까 얼굴만 볼 수 있게 해 줘.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인은 심장이 반으로 쪼개지는 기분이 들어 더는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후드득, 눈물이 저도 모르게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숨 쉬는 게 버거워졌다.
있는 힘을 다해 김하준을 밀쳐 내고 팔을 뿌리친 뒤 언덕을 올라가는데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쉴 새 없이 흐른다. 자전거고 뭐고 내팽개치고 정인은 그대로 내달렸다. 한참을 달리다 뒤를 돌아봤을 때 김하준은 아직도 그곳에 서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어렴풋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정인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서 집사가 부른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이한 형사가 입원한 병원이었다. 김하준의 어머니를 만나고 기운이 빠진 탓인지 아니면 어제부터 나는 미열 때문인지 컨디션이 엉망이다. 덕분에 기억하기 싫은 꿈까지 꾸고.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차에서 내린 정인은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가족이 아닌 이유로 면회를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무턱대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허탈한 마음으로 걸어가는데 누군가 뒤에서 정인을 부른다.
“류정인 씨?”
돌아보니 키 작은 남자가 하나 서 있다.
“안녕하세요. 저 이 형사 선뱁니다. 같은 팀에 근무하고 있어요. 저번에 고깃집에서 잠깐 봤는데, 기억하세요?”
“아.”
기억은 못 하겠으나 선배란 말에 엉겁결에 인사를 나눴다. 할 말이 있으니 시간을 내어 달라는 말에 정인은 그를 따라 병원 앞 벤치로 갔다. 그는 담배를 물고 근처 자판기에서 음료를 하나 뽑아 왔고 그것을 정인에게 건네줬다.
“서에서 연락받았어요. 여기 오신다고 하길래, 잠깐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네….”
남자는 이한의 상태에 대해 자세히 알려 줬다. 밤에 둘이 잠복근무를 마치고 편의점 앞에 차를 세워 두고 물을 사러 간 사이에 음주 운전 트럭이 와서 받았다고. 그래서 이한이 많이 다쳤고, 다행히 위기를 넘긴 상태라고.
말을 하면서도 그는 속이 타는지 계속해서 줄담배를 피워 댔다.
“이 형사님이 저한테 연락하셨던데… 무엇 때문이었는지 혹시 아세요?”
남자가 담배 쥔 손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아마 이해수 사건 때문일 거예요. 결정적인 증거가 나왔고, 다음 주에 피의자 기소할 수 있을 거라고 했거든요.”
아, 그랬구나. 범인을 잡을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과 함께 그에게 일어난 사고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요즘 들어 주변에 이상한 일이 자꾸 생기는 게 어쩌면 서로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게 의심일 뿐 증거는 없었다. 마침 남자의 전화가 울린다. 그럼 다음에 보자는 인사를 남긴 채 남자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인은 자신을 기다리던 운전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걱정하는 사람처럼 내내 이쪽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막상 집으로 돌아가려니 내키질 않는다. 정인은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형사가 주고 간 음료수만 만지작댔다.
[근데 너는 아니야. 하준이한테 이미 한 번 상처 줬잖니.]
[선거 끝나기 전에 떠나. 부탁이다.]
고개를 떨군 채 김하준 어머니가 한 말을 곱씹고 있는데 발소리가 들린다. 아까 그 형사가 돌아온 걸까,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누군가 옆에 털썩 앉더니 어깨에 팔을 걸친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다 눈이 커졌다.
“어!”
어느새 나타난 김하준이 옆에 앉아서는 정인의 귓불을 슥 만진다.
“왜 놀래. 죄지은 거 있어?”
“어떻게 왔어?”
“차 끌고.”
정인이 자신을 태우고 온 기사를 봤다. 조금 전까지 근처에 있던 그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고개를 빼고 기사를 찾았더니 김하준이 일어나 앞에 와서 선다.
“참 말 안 들어. 연락하지 말라고 전화까지 빼앗았더니 여기 와서 죽치고 있네.”
“다쳤다는데 어떻게 모른 척해.”
“나한테 상처 줬을때는 존나 잘 쌩깠잖아.”
옛날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끄집어내는 바람에 정인은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그 얘긴 하지 않기로 했잖아. 그러자 하준이 손을 내민다. 일어나. 해를 등지고 있는 그의 모습이 오면서 꿈에서 본 모습과 오버랩되어 코끝이 찡해졌다.
감정을 누르느라 이상한 표정을 했더니 손을 잡아서 일으켜 세운다.
“나온 김에 데이트하러 가자.”
자연스레 깍지를 끼길래 정인이 얼른 풀고서 하준을 마주 봤다.
“그 전에 너한테 할 말 있어.”
“뭐. 우리 엄마가 통장 주고 간 거?”
정인이 입을 벌리며 쳐다보자 하준이 어깨를 으쓱인다. 표정이 너무 태연해 방금 한 말을 잘못 들었나 싶었다.
“어떻게 알았어?”
“서 집사님이 말해 주던데.”
분명 하준의 어머니가 서 집사한테 비밀로 해 달라고 협박하듯 말하고 갔는데. 그래도 되는 건가. 저 때문에 괜히 피해를 입는 건 아닐까. 걱정에 걱정을 거듭하는데 김하준의 손이 다가와 뺨을 어루만지다 갑자기 이마에 손가락을 딱 튕긴다.
아! 정인이 맞은 이마를 붙잡고 쏘아보자 하준이 이를 꽉 물고 협박조로 이야기했다.
“이번에 도망가면 나 죽어 버린다고 했다.”
정인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생각 안 했어!”
“그래. 잘했어. 아무 생각 하지 마. 넌 생각 없이 사는 게 어울려.”
“뭐?”
“데이트 가자. 맛집 알아 놨어.”
하는 수 없이 끌려가는데 생각해 보니 억울하다.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이냐고. 그거 욕 아니냐고 따졌으나 김하준은 끝까지 대답해 주지 않았다.
하준과 함께 간 식당은 서울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고 프라이빗룸으로 이동한 정인은 문을 열고 들어가다 그대로 멈칫했다. 안에 먼저 도착한 손님이 있었는데, 김하준의 부모님이었다. 그들 역시 정인의 등장을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표정이 굳는다. 특히나 아침에 정인에게 통장을 주고 간 주혜련의 낯빛은 말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거니? 혼자 온다더니….”
“깜짝 놀라게 해 드리려고 비밀로 했어요.”
정인이 엉거주춤하게 서 있자 하준이 등에 손을 가져다 대며 자리로 안내한다. 김 회장은 마뜩잖은 기색을 순식간에 지워 내고 인자한 어른을 가장했다.
“잘됐구나. 오래간만에 가족끼리 모여 식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각자 자리에 앉았는데 숨이 턱 막힌다. 안내한 직원이 주문을 받으려는데 하준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한 분 더 오실 거예요.”
한 분 더 온다는 말에 정인은 하준을 쳐다봤다. 누구? 설마…. 자신이 생각하는 그분은 아니겠지. 했는데 아니나 달라 문이 열리고 김하준의 할머니 이순옥 여사가 등장한다. 평소 달고 다니던 비서도 없이.
예상치도 못한 등장에 김 회장 부부와 정인은 당혹스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 오셨어요.”
“표정들이 왜 그래. 늙은이는 끼면 안 되는 자리였니.”
주혜련이 애써 미소를 만들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직원이 주문을 받고 사라지자 각자 서로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주혜련은 혹여 정인이 자신과의 일을 아들에게 말했을까 봐 걱정했고, 김 회장은 자신의 어머니가 진실을 알까 봐, 그리고 정인은 하준을 뺀 나머지 사람들이 너무나도 불편해서.
“약은 먹을 만하디?”
할머니가 묻는 말에 정인은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잘 챙겨 먹고 침도 꾸준히 맞아라.”
할머니는 어제 본 그 노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침으로 앉은뱅이도 걸을 수 있게 만들었다고, 못 고치는 병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마치 신처럼 떠받드는 모습에 정인은 그나마 있던 믿음마저 사라지려고 했다.
할머니와 대화를 하며 앞을 보는데 저를 보는 김하준 부모님의 눈빛도 곱질 않다. 음식을 먹지도 않았는데 얹히는 기분이다. 할 수 있다면 그대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 하준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주혜련에게 건넨다.
흘깃 보던 정인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뻔했다. 주혜련 역시 놀랐는지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다.
“엄마. 통장 돌려 드릴게요. 아무리 예뻐도 정인이한테 이런 거 주지 마세요. 애 부담스러워해요.”
싱긋 웃는 김하준과는 달리 주혜련의 뺨이 파르르 떨린다. 할머니가 고개를 쭉 빼고 보면서 그게 뭐냐고 묻자 주혜련은 황급히 통장을 클러치백에 숨겼다.
“뭔데 감춰? 내가 보면 안 되는 거니?”
“제가… 정인이 용돈 쓰라고 줬어요.”
그러자 할머니가 코웃음을 친다.
“집에서 놀면서 우리 하준이가 번 돈으로 호강은 다 누리는데, 뭐가 부족하다고 너까지 나서서 돈을 주니. 그런 돈 있으면 이 시어미나 주지 그랬니.”
썩어 들어가는 부모님의 표정을 보면서 하준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이상야릇하게 웃었다. 그러나 정인은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김하준 부모님이야 둘째 치고 김하준의 할머니를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까. 만약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다면… 후폭풍이 두렵다.
자칫 잘못하여 노인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되기도 했고.
김하준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자리를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툭 치며 시선을 보냈다. 지금이라도 말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눈으로 묻는데 마침 노크와 함께 직원이 준비된 식사를 가지고 등장한다.
“먹자.”
할머니의 말에 다들 수저를 들었으나 마치 사형 직전 마지막 식사를 하는 표정들이었다. 정인 역시 음식을 삼킬 수가 없어 물만 계속 들이켰고, 그러다 김하준의 할머니와 눈이 딱 마주쳐 핀잔을 들었다.
“음식을 왜 그렇게 깨작깨작 먹어. 그래서 애를 제대로 낳을 수나 있겠어.”
음식이 목구멍에 턱 걸린다. 정인은 입에 있던 음식을 억지로 꿀꺽 삼키고 나서 김 회장을 쳐다봤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고자 하였으나 김 회장이 정인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눈빛에 힘을 주고 고개를 젓는다.
하는 수 없이 포기하는데 옆에 앉은 김하준이 손을 잡는다. 쳐다봤더니 고개를 까닥한다. 말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조금은 용기가 생겼다.
“할머니, 사실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스테이크를 썰던 김하준의 할머니가 정인을 흘깃 봤다. 동시에 김 회장 부부의 움직임이 영화의 한 장면을 정지시켜 놓은 것처럼 멈췄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정인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 오메가 아니에요. 사실은… 베타예요.”
폭탄과도 같은 선언에 할머니의 눈썹이 삐죽 올라가고 동시에 김 회장 부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김 회장이 서늘한 눈빛을 하며 더는 말하지 말라고 정인에게 경고했다.
“여기서 할 얘긴 아닌 거 같구나. 그만하고 음식 먹으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준이 툭 끼어들었다.
“두세요. 할머니도 아실 건 아셔야죠.”
“김하준.”
“정인아. 이참에 아버지가 너 불러다 협박한 것도 말해.”
“김하준!”
“제 이름 김하준인 거 여기서 모르는 사람 없으니까 그만 부르세요.”
참다못한 김 회장이 양 주먹을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 이 새끼!”
그러자 김하준의 할머니가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접시에 챙 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놓는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고 다들 입을 다물었다. 정인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처분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앉아 있었다.
김하준의 할머니가 냅킨으로 입을 슥슥 닦더니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미간을 찡그렸다.
“애비. 네가 꾸민 짓이라며.”
김 회장의 표정이 확 굳는다.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
“네가 싫다는 애들 붙잡고 꼬드겨서 이 결혼 추진한 거라며.”
김 회장의 얼굴에 놀람과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뭐? 죽은 네 아버지 은혜를 갚아?”
“어머니,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할머니는 언짢은 기색을 가감 없이 내비쳤다.
“너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어떻게 속일 게 없어서 나를 감쪽같이 속여. 선거에 아무리 목을 매도 그렇지, 아들 하나 있는 걸 이런 식으로 이용해?”
“어머니!”
“이럴 줄 알았으면 선거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회사나 똑바로 경영해! 그리고, 하준 애미. 너!”
듣고 있던 주혜련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머님. 저는 진짜 몰랐어요. 저도 최근에,”
“조용히 해. 너도 그러는 거 아니야. 어떻게 며느리한테 돈 갖다 주면서 먹고 떨어지란 소릴 하니.”
“아니에요.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
“시끄럽다. 나라고 손주며느리가 마음에 차는 줄 아니. 우리 하준이보다 인물 학벌 뭐 하나 나은 게 없는데 나라고 예쁘겠어. 그래도 난 내색 한 번 한 적 없었다. 손주 놈이 좋아하니까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어. 근데 넌 네 아들인데, 그게 왜 안 돼? 나도 한번 널 갈궈 봐?”
정인이 한 대 맞은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할머니의 단어 선택은 디스인지 애정인지 파악이 어려웠다. 주혜련이 자기 입장을 항변했으나 할머니의 노여움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정신없어하는데 김하준 할머니의 송곳 같은 시선이 이젠 정인에게 날아온다. 뜨끔한 정인이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떨구었다.
“너!”
한마디 하려고 고함을 치는 순간 하준이 정인의 어깨를 감쌌다.
“할머니. 우리 정인이는 잘못 없어요. 이 결혼도 하기 싫다는 거 아버지가 협박하고 내가 졸라서 한 거라니까. 그지, 자기야?”
이…! 더 말하려던 할머니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기세를 수그러트린다. 김하준은 잽싸게 할머니의 곁으로 의자를 붙이고는 어깨를 주무르며 되지도 않는 아양을 떨었다.
“고정하세요. 우리 할머니 혈압 올라가면 큰일 나요. 이쯤 하셨으니 아버지도 잘못한 거 알 거예요.”
정인은 저도 모르게 김 회장을 슥 쳐다봤다. 늘 기세 당당하고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들던 김 회장의 안색이 어둡다 못해 흙빛이다. 물컵을 쥐고 부들부들 떨며 참는 모습을 보니 왜 김하준이 자기 할머니만 꼬시면 아버지고 뭐고 다 무찌를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흉흉한 분위기에 정인은 차라리 결혼식처럼 기절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는데 할머니가 물컵을 내려놓고 하준의 손을 거둬 낸다.
“너도 잘한 건 없어. 애초에 네가 허락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다.”
“알아요. 그래서 제가 저번에 가서 무릎 꿇고 빌었잖아요.”
어떻게 할머니가 다 알았나 의아했는데, 김하준이 할머니한테 무릎 꿇고 빌었다는 말에 정인은 놀라서 쳐다봤다.
“무릎까지 꿇을 일은 아니었어. 어디 가서 그러지 마. 이 할미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남들도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어.”
“네. 그럴게요. 잘못했어요.”
다정하게 웃는 김하준을 보니 여우가 사람으로 탈바꿈하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잠시 생각이 든다. 할머니는 김 회장 부부와 정인을 차례대로 바라보며 경고했다.
“앞으로 이 일에 관해서는 모두 함구해. 한 번 더 난리 피우고, 식구들끼리 얼굴 붉히는 일 생기면 그땐 나도 정말 안 참는다.”
“…….”
“왜 대답이 없어?”
무섭게 쏘아붙이는 할머니를 향해 하준을 뺀 세 사람은 야단을 맞는 학생처럼 고개를 숙였다.
“네….”
***
“괜찮아?”
걱정스럽게 묻는 하준을 보며 정인은 눈을 흘겼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미안. 미리 말했으면 네가 말렸을 거 같아서.”
틀린 말은 아니라 더는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식사 자리는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분위기가 얼마나 무겁고 살벌한지 결국, 식당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명치가 콱 막힌 것처럼 통증이 생겨났다. 식은땀이 나는 걸 참느라 나중엔 눈앞이 빙빙 돌 지경이었다. 차를 타고 주차장을 빠져나온 김하준은 서둘러 약국에 들렀다.
“차라리 병원 갈까?”
“그 정도는 아니야.”
정인은 하준이 건네준 알약과 생수를 삼키고 짜 먹는 위염약도 빨아 먹었다.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 없다는데 스트레스만 받으면 이놈의 위가 말썽이다. 몸에 기운이 빠져 의자를 뒤로 살짝 젖히고 눕는데 김하준이 출발할 생각을 않는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몸을 가까이 붙여 왔다.
“내가 배 좀 문질러 줘?”
하준은 슬그머니 정인의 배에 손을 가져다 대고 둥글게 문질렀다. 하준이 손은 약손. 우리 정인이 아프지 마라. 어릴 적 할머니가 해 줬을 법한 노래를 잘도 알고 있다. 문지르자 좀 나은 것 같아 가만히 있었더니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손길도 끈적해진다.
정인은 몸을 일으켜 앉으며 그 손을 탁, 쳤다. 김하준이 서운한 표정으로 왜에- 하고 투정을 부렸다. 요즘 김하준은 틈만 나면 스킨십 이상의 것을 바라는 눈치였다. 의자를 바로 하고 앉는데 정면에 공원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글귀가 보인다.
“여기 공원 있어?”
“응. 왜?”
“산책할까? 걸으면 좀 나을 것도 같은데.”
하준은 두 번 물을 것도 없이 차를 그쪽으로 움직였다. 평일 낮인데도 주차장에 차들이 제법 있다. 내려서 산책길을 따라 걸으니 하준이 손을 잡아 준다. 풀 냄새에 뒤틀리던 속도 한결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한참 걷다 보니 커다란 벚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져 있다. 최근 몇 년은 일에 치여 벚꽃을 구경하러 갈 시간이 없었다. 피고 지는 기간이 짧은 것도 있지만, 같이 갈 사람이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정인은 기분이 좋아져 머리 위 꽃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예쁘다.”
화사하게 웃는 모습에 하준도 덩달아 미소 지었다.
“그러게. 예쁘네.”
그때 앞쪽에서 걸어오던 커플 한 쌍이 정인과 하준을 발견하고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주고받는다. 신경을 쓰지 않는 하준과는 달리 정인은 그렇지 못하였다. 잠시 후 찰칵 작은 소리가 들렸고, 정인이 뒤를 돌아봤을 때는 커플 중 남자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하준이 말릴 새도 없이 정인이 먼저 가서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기, 방금 사진 몰래 찍으셨죠?”
“네?”
당황하는 남자를 향해 정인이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휴대폰.”
하준이 뒤따라와 그 모습을 지켜봤다. 남자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삭제하려 했다.
“죄송해요…. 유명한 사람 처음 봐서.”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남자를 보며 정인이 웃었다.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그러면 저희가 찍어 드릴 텐데.”
커플의 눈이 동시에 커진다. 그래도 돼요?
“대신 잘 찍어 주세요.”
정인이 하준의 팔을 잡아끌고 벚나무 아래에 위치를 잡았다. 하준이 작게 웃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제 팬 서비스까지 해?”
정인이 조용히 하라고 말한 뒤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었다. 그러자 하준이 정인의 어깨를 끌어당겨 감싼다. 졸지에 사진사가 되어 버린 남자가 정성껏 몇 장의 사진을 찍어 줬고, 정인은 그중 잘 나온 사진을 골라 자신의 폰으로 보내 달라며 너스레까지 떨었다. 커플에게 인사를 한 뒤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왜 찍어 줬어? 저 사람들 이상한 데 사진 올리고, 자기들끼리 씹을지도 모르는데.”
정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그럴 거면 너하고 나하고 잘 나온 사진이 낫잖아. 저 사람도 미안해서 막 심하게 씹지는 못할걸.”
하준이 일부러 감탄하는 표정을 지으며 놀렸다.
“우리 정인이 사람 됐네. 어릴 적 같았으면 다짜고짜 한 대 팼을 텐데.”
“너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살아봐. 성질도 죽고, 남 비위 맞추는 법도 늘고 그래. 눈치도 많이 보게 되고….”
정인이 푸념하자 하준은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헝클어 놨다. 그리고 햇살이 내려앉은 정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정말 고생 많았다고. 앞으로는 내가 호강만 시켜 준다고. 나만 믿으라고. 전 같으면 그 말에 불신의 시선을 보냈을 텐데, 오늘 김하준의 모습을 보니 믿음이 간다. 하지만 그 말을 하면 김하준이 또 잘난 척을 할 것 같아 관두었다.
***
집으로 돌아온 정인은 간단히 샤워를 마친 뒤 밖으로 나왔다. 주방에서 소리가 나길래 보니 김하준이 음식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그러고 보니 집에 왔을 때 서 집사가 보이질 않았다. 하준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오늘 일찍 퇴근하였다고 했다. 대신 레오가 두 사람을 반기며 좋아라 했다.
레오와 한참을 놀아 주던 정인은 주방으로 가서 하준을 불렀다.
“집사님 괜찮을까?”
야채를 썰던 하준이 돌아봤다. 흰 셔츠를 입고 회색 앞치마를 한 모습이 은근히 섹시하다. 손에 묻은 물기를 앞치마에 닦는데 소매를 걷어 올려 팔에 힘줄이 꿈틀댄다. 생긴 건 도련님처럼 생겨서 몸은 참…. 침을 꿀꺽 삼키던 정인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너희 어머니 화 많이 나셨겠지?”
그 말에 하준이 웃었다.
“걱정 마. 할머니 눈치 보느라 어머니도 함부로 못 하실 거야.”
“그럼 다행인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준이 흰색 사기그릇을 가지고 와서 식탁에 올려놓는다. 정인은 검은색 비슷한 탕약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꽤 떨어져 있는데도 한약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 것 같다. 하준이 알아서 사탕까지 챙겨서는 앞으로 와 기다린다.
“마셔. 사탕 까 줄게.”
“으….”
“먹기 싫으면 버릴까?”
정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걸 먹고 형질이 바뀔 수 있을까. 망설이는 정인을 보며 하준은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 한의사가 예전에 비슷한 경우를 치료한 적이 있었대. 아주 오래전이긴 한데.”
정인이 놀란 눈을 하고 하준을 바라봤다. 사실 오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늘 했었다. 그를 닮은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다는 바람. 그리고 자신이 오메가면 지금보단 떳떳하게 김하준 곁에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김하준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할머니야 증손주 볼 욕심에 그렇다고 치지만 하준은 어떤지.
“하준아.”
“응?”
“너는 내가… 오메가였으면 좋겠어?”
하준이 사탕을 든 채로 가만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빈말이라도 아니라고 해 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분명 저번엔 베타여도 상관없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어릴 적 기억이 떠올라 정인은 약간 상처받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유가 뭔데.”
“오메가면 할 때 덜 아프지 않을까?”
예상치 못한 답에 정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럼 매일 할 수 있잖아.”
정인은 며칠 전 관계 직전까지 갔다가 아프다고 결국 포기한 게 생각나 귀가 새빨개졌다.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그게 다야?”
“응.”
“다른 이유는 없고?”
“있어야 해?”
“넌 머릿속에 그것밖에 생각이 없어?”
“응.”
너무나 단순한 대답에 정인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탕약을 빼앗아 단숨에 들이켰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짓자 하준이 잽싸게 사탕을 까서 자기 입에 넣더니 그대로 입을 맞추고 정인의 입에 넘겨준다. 혀를 같이 넣어서 사탕을 핥길래 떨어지라며 어깨를 밀어냈다.
“무슨 짓이야?”
“이러면 덜 쓰지?”
“…….”
“이제 약 먹을 때마다 사탕은 내가 먹여 줄게. 그럼 존나 달 거야.”
싱긋 웃길래 정인은 바보냐고 한마디 하고서 돌아서려고 했다. 그러자 김하준이 양팔을 몸 옆으로 짚어 정인을 가두더니 눈을 빤히 응시한다.
“사실 난 네가 뭐라도 상관없어.”
눈빛에 진심이 가득하다. 정인은 쓴맛을 없애려 입에 문 사탕을 굴리면서 물었다.
“알파였다고 해도?”
“응.”
“아주 못생겼다고 하면?”
“지금도 잘생긴 건 아니야.”
정인의 눈초리가 올라가자 하준은 사탕을 빠느라 볼록해진 정인의 뺨을 부드럽게 만지며 쪽, 키스한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다시 입을 맞추고 벌어진 틈으로 혀를 넣는다. 그리고 조금 전 주었던 그 사탕을 거두어 간다.
졸지에 사탕을 빼앗긴 정인이 황당해하며 물었다.
“왜 네가 먹어?”
하준은 한탄하듯 내뱉었다.
“그러게 사탕을 왜 그렇게 빨아? 사람 마음 뒤숭숭하게.”
“네 머릿속이 음탕한 거겠지.”
“그런가.”
부정하지 않더니 하준은 정인의 허리를 감싸 끌어안고서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뺨을 문질렀다. 아양 떠는 강아지처럼 느껴져 머리카락을 만졌더니 팔에 힘이 들어간다. 정인아. 류정인. 이름을 부르며 속삭이자 피부에 숨결이 확 닿는다. 아찔한 기분에 목을 움츠리자 하준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정인의 둔부를 움켜쥔다.
놀라서 제지하려고 하자 터트릴 듯 주무르며 짙은 한숨을 내쉰다.
“젠장. 우성 알파면 뭐 해. 이럴 때 페로몬을 써먹지도 못하는 거. 차라리 나도 그냥 베타였으면 좋겠어. 아니면 내가 그 약 먹고 오메가가 될까? 그럼 네가 나한테 하면 되잖아.”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지만, 얼마나 하고 싶으면 저럴까 싶어 정인은 미안해졌다. 오늘 밤에는 다시 시도해 볼까, 하다가도 그 고통이 떠오르니 머리털이 쭈뼛 선다. 좋아하면 희생할 수 있다는데 하준의 크기를 떠올리면 선뜻 허락하는 게 쉽지 않았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정인은 하준의 어깨를 밀어 거리를 두었다.
“배고파, 밥, 밥 먹자.”
하준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외면한 채 정인은 도망치듯 주방을 빠져나와 거실로 가서 레오에게 아는 척을 했다. 장난감으로 레오와 놀아 주다 고개를 드니 주방에서 김하준이 빤히 쳐다보고 서 있다. 눈빛을 이글이글 불태우면서.
“왜 저래 진짜….”
애써 외면하고 등을 돌리고 앉았으나 뒤통수가 너무도 따가운 건 어쩔 수 없었다.
***
다행이네요. 네, 네, 조만간 찾아뵙는다고 전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통화를 마친 정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한 형사가 의식을 회복했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동시에 김하준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은 늦을 거 같으니 먼저 자라는. 모임이 있어 그곳에 가 봐야 한다는 거였다. 토요일 밤에 모임이 있는 것까진 이해하겠는데, 왜 집에서 꼼짝 말고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휴대전화를 들고 이것저것 확인하다 동영상을 하나 발견하고 표정이 굳었다. 무척이나 많은 구독자 수를 보유한 인터넷 방송이었는데 제목이 심상치 않다. 류정인 삼촌 전격 인터뷰? 놀라서 영상을 재생하자 방송을 진행하는 사람들 옆으로 이상한 가면을 쓴 사내 하나가 눈에 띈다.
은색 깃털이 달린 가면 아래로 하관이 보였는데 입과 턱 모양이 자신의 삼촌과 매우 흡사하다. 그는 김하준의 시계를 훔치긴 했으나 초범이고 여러 가지 정황들이 더해져 기소유예 판결을 받고 풀려났었다. 소식이 없길래 정신을 좀 차렸나 했는데 이런 식으로 또 뒤통수를 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릴 적에는 분명 오메가였거든요. 근데 크면서 베타로 발현된 거죠. 상황을 보니 김 의원은 몰랐던 거 같아요. 제가 정인이 만나서 물어봤을 때 절대 말하지 말라고, 돈을 주겠다고 사정하더니 제가 말을 듣지 않자 저를 감금하고 나중에는 누명까지 씌우지 않겠어요. 하지만 우리나라 법이 어디 그렇게 만만한가요?]
[그럼 류정인 씨가 의도적으로 속였다 이 말인가요?]
[제 추측엔 그렇습니다.]
[김만호 의원도 당한 거다?]
[그 아들까지 부자가 모조리 당한 거죠.]
[어찌 보면 김만호 의원과 그 아들도 피해자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정인은 화가 나서 이를 까득 물고 화면 속 삼촌의 모습을 노려봤다. 그는 비겁하게도 자신을 고소한 김하준이나 김 의원은 무서워서 건드리지 못하고 정인만 후려치는 중이었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삼촌은 연락처도 바꾸었다고 한다.
영상 아래 댓글들도 난리다.
[이 정도면 검사해서 증명해야 하지 않나. 조용해서 더 수상함.]
[나 같으면 억울해서라도 공개하겠다.]
[친구의 친구한테 들었는데 김하준도 속았대. 사기 결혼 맞음.]
[집에 괴한 침입한 것도 자작이라는 소문이 있음. 관심을 그쪽으로 돌리려고 머리 썼다고 함.]
[집이 보육원 하는 건 맞아? 류정인 때문에 거기 후원도 늘었다는데, 조사해야 하는 거 아님?]
정인은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문질렀다. 피곤하다. 차라리 종일 진상 고객을 상대하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사람들의 의심은 날이 갈수록 증폭되는데 이대로 괜찮은 걸까.
차라리 김하준 할머니한테 밝힌 것처럼 터트려 버릴까. 그러면 김 회장은? 아니 김하준은? 그냥 내가 혼자 다 꾸민 거라고. 모두를 속였다고 해 버릴까. 고민이 거듭될수록 결론은 나질 않고 머리만 더 깨질 것처럼 아파 온다.
“씨발….”
결국, 정인은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진 후 그대로 드러누웠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결혼 생활이 다 이런 건가. 아니면 애초에 잘못된 결혼이었을까. 이 상황에서 며칠째 먹은 한약이 말썽인지 자꾸 오한이 들었다가 더웠다가 몸까지 난리다.
***
화면 속에서 신나게 떠드는 류동찬을 보며 하준의 미간이 점점 일그러졌다. 앞에 앉아 눈치를 살피던 두영이 넌지시 이야기했다.
“방송 정지 신청 넣었어요.”
“잘했어.”
“차라리 다 까시는 게 어때요? 오메가라고 증명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하준의 시선이 두영에게로 옮겨 간다. 그의 말대로 정인이 오메가면 증명만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걸 못 하니 이러고 있는 거지. 한숨을 내쉬며 화면 속 류동찬의 얼굴을 다시 봤다. 이 인간 고소를 할 게 아니라 어디 배에 태워서 내보냈어야 하는 건데. 평생 땅에 발도 못 붙이게.
하준은 정인에게 연락하려다 관두었다. 괜히 심란만 하겠지. 대신 사람을 시켜 류동찬의 행방을 찾게 했다. 잡아다가 다시는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든 바늘로 꿰매 버리든 할 작정이다.
“결혼하시면 좀 잠잠할 줄 알았는데 여전히 핫하시네요.”
“부러워? 너도 핫하게 만들어 줘?”
“사양할게요.”
두영이 애써 웃으며 거절하는데 비서실에서 연락이 온다. 손님이 찾아왔다는 말에 하준이 시간을 확인했다. 두영도 알아채고서는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어디서 찾았어요? 감쪽같이 사라져서 가족들하고도 연락 안 한다고 하던데.”
하준은 대답 대신 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그리고 한 번 더 입단속을 시켰다. 두영은 도무지 하준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오늘 김하준을 찾아온 손님은 이선우라는 배우인데 그는 몇 년 전까지 영화와 드라마에서 서브 주인공으로 얼굴을 드러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선우가 브라운관에서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다. 자살 시도했다더라. 약을 먹었다더라. 정신병원에 끌려갔다더라. 별별 괴상한 소문이 다 돌았으나 그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사람들 기억 속에서도 잊혀 갔다.
그런 이선우를 김하준은 왜 찾아내 한국으로 불러들였을까. 대체 무슨 이유로? 너무도 궁금하였으나 본인이 말을 해 주지 않으니 더는 캐물을 수 없었다.
두영이 의구심을 가득 품은 채 사라졌고 잠시 후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짙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들어온다.
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미소를 보이자 상대가 방을 한 번 둘러보더니 하준의 맞은편 자리로 가서 앉는다. 조심스럽게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고 마스크를 내리자 얼굴이 드러났다. 잡티 없는 흰 피부는 여전했으나 이목구비는 자신이 알던 이선우와 사뭇 달랐다. 빤히 쳐다보자 이선우가 생각을 읽었는지 어색하게 웃는다.
“성형했어요… 이름도 바꿨고요.”
“아. 그랬군요. 보기 좋네요.”
“감사합니다.”
“차 한잔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이선우는 뭔가 쫓기는 사람처럼 표정이 불안해 보였고 눈동자를 가만히 두질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준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물었으나 이선우는 정확한 대답을 피하고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사람 보내셔서 놀랐어요. 사실 가족도 지인들도 제 거처에 대해선 모르거든요. 그래서 올까 말까 고민 많이 했는데….”
그는 말끝을 흐렸다. 벗은 선글라스를 만지작대는 손길에 초조함이 묻어난다. 서로 마음에도 없는 안부를 주고받는 건 의미가 없어 보였다. 하준은 옆에 있던 태블릿을 켜고 거기서 사진 한 장을 보여 줬다. 양욱환의 사진이었다. 그것을 보자 이선우의 눈빛이 불안하게 떨린다. 선글라스를 부러트릴 듯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아시죠? 양욱환.”
이선우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준은 담배를 하나 꺼내 그에게 건넸다. 불을 붙여 주자 이선우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입에 물고 한 모금 깊게 들이마신다. 한 개비를 다 피우도록 그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하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실 말씀… 없으세요?”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고, 태블릿 속 양욱환의 사진을 노려봤다. 눈빛에서 두려움과 원망이 느껴진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말없이 끼고 있던 왼쪽 장갑을 벗었다. 하준의 눈이 살짝 커진다. 얼핏 손처럼 보였으나 그것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의수였다. 이선우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만지며 입술을 짓씹었다.
“강제로 약을 시켰어요….”
“양욱환이?”
이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기억을 떠올리는 게 괴로운지 종종 눈 밑을 일그러트렸다.
“그때는 사랑인 줄 알았어요. 나중엔 해외에 촬영 갈 때마다 약을 구해다 줬어요. 계속 부탁을 들어주다 도저히 아닌 것 같아서 거절했더니, 갑자기 때리기 시작했어요. 목을 조르고….”
그는 참혹한 표정을 지으며 힘겹게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먼저 관계를 끝내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집으로 초대하더군요.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싶다고. 그러고 나서….”
감정을 주체 못 하고 눈이 빨개지는 그에게 하준은 손수건을 건넸다. 그는 건네받은 손수건을 움켜쥐고 심호흡을 한 번 하였다.
“부하를 시켜 내 손을 잘랐어요. 한 번 더 자길 거역하면 다음엔 팔을 자르고 그다음엔 다리를 잘라 평생 병신으로 살게 하겠다고 협박했어요. 피가 쏟아지는 걸 보다가 까무러쳤는데… 눈을 떠 보니 병원이었어요. 사람들이 내가 자해를 했대요.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랬다간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할 것 같아 무서웠어요. 어차피 아무도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 치료가 끝난 뒤엔 정신병원에 감금됐고, 나는 졸지에 정신병자가 되어 있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가족이 나 몰래 양욱환한테 돈을 받고 팔았더군요.”
이선우의 뺨으로 참았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그는 하준이 건네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나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매일 두려움에 떨었다고, 그러다 그곳을 간신히 빠져나왔고 가진 돈을 모두 털어 신분을 세탁해 외국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돈 한 푼 없이 외국으로 가서 몸 파는 일을 하며 제일 먼저 수술로 얼굴을 바꿨다고. 혹시라도 양욱환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두려워서.
지난 일을 회고하는 그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두 번째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거의 다 피운 담배를 떨리는 손으로 재떨이에 비벼 끄며 그는 하준을 응시했다.
“제가 만약… 증인을 서게 되면… 그 사람 처벌할 순 있는 건가요?”
“처벌은 법원에서 할 일이고, 전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할 생각입니다.”
“만약 무죄로 풀려나면요. 그땐…어쩌시게요?”
하준은 고개를 잠시 뒤로 젖혔다. 흠. 만약 양욱환을 감옥에 처넣지 못하고 증거 불충분으로 그가 풀려난다면 아마도 가장 위험해지는 건 류정인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준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이선우를 쳐다봤다. 말투는 평이했으나 눈빛엔 살의가 가득해서.
“약속하죠. 그땐 내가 먼저 양욱환을 죽일 겁니다.”
***
모자를 깊게 눌러쓴 류동찬은 현금 인출기에서 통장을 빼내어 거기에 찍힌 금액을 확인했다. 동그라미의 개수를 세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인터넷 방송에서 류정인이 베타인 것을 폭로하는 대가로 받은 금액이었다.
재차 금액을 확인한 그는 통장을 품에 넣으며 택시를 타기 위해 정류장 쪽으로 이동했다. 이제 이곳을 뜨는 일만 남았다. 외국이든 어디든 갈 테다. 가서 이 지긋지긋한 곳엔 다시는 발길도 들여놓지 않을 테다.
정류장에 서서 택시를 기다리는데 평일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차가 보이질 않는다.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때 오라는 택시는 안 오고 검은색 봉고차 한 대가 와서 선다.
“뭐야, 씨발. 왜 여기다 차를 대?”
혼잣말로 욕을 하는데 뒷문이 열리면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내 여럿이 보인다. 그는 순간 위험을 직감하고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시도하기도 전에 그들에게 붙들려 입을 틀어막히고 몸이 끌려갔다.
마지막 안간힘을 짜내 문을 붙들고 버티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안으로 끌려 들어갔고 순식간에 드르륵, 탁 문이 닫혔다. 양옆으로 덩치 좋은 두 남자가 류동찬의 팔을 붙잡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당신들 뭐야! 씨발! 이거 안 놔! 누구 사주 받고 이래!”
발버둥을 치자 맞은편 남자가 테이프를 이용해 발을 결박하고 입에도 테이프를 붙여 더는 고함을 지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계속 몸을 들썩이자 품에서 긴 회칼을 꺼내며 가만히 있으라고 경고한다.
번쩍이는 칼날을 본 뒤 류동찬은 더 반항하지 못하고 쥐 죽은 듯 조용히 있었다. 눈동자를 굴리며 상황 파악을 하려고 하는데 뒷자리에 탄 덩치들 말고 앞의 운전석에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가진 뒤통수가 보인다.
저 사람이 우두머리일까. 마침 앞좌석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남자가 전화를 받더니 이윽고 뒤를 돌아봤다.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안경을 벗으며 류동찬의 얼굴을 빤히 응시한다. 눈빛이 칼날처럼 매섭고 냉정했다.
“예, 지금 찾았습니다.”
상대방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자신을 잡아 오라고 사주한 사람이 분명하다. 류동찬은 입을 틀어막힌 채로 읍읍, 소리를 질렀다.
“바로 처리할까요?”
처리한단 말에 류동찬은 사색이 되어 굳었다. 앞에 앉은 사내들의 표정엔 미동조차 없다. 남자가 지시를 기다리는지 대답이 없다. 손발이 달달 떨리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숨을 멈추고 있는데 남자가 말문을 연다.
“예, 여사님. 그럼 그리로 데려가겠습니다.”
***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하준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층 더 아래로 내려갔다. 어두운 조명의 복도를 따라 걸으니 곳곳에 검은 정장에 무전기를 든 사내들이 보인다.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하준을 향해 다가와 안내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대표님. 오랜만에 찾아 주셨네요.”
“예. 많이 바빴습니다.”
남자가 문을 열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세련된 조명과 바에 앉아 술을 마시는 손님들.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그들 중 대다수는 하준과 안면이 있었다. 그들과 눈인사를 주고받는데 오메가 하나가 다가와서는 샴페인 잔을 든 채로 하준의 팔짱을 낀다.
“오빠, 웬일이야? 결혼하고 파티에 발길 딱 끊더니?”
하준이 그 손을 거둬 내며 싱긋 웃었다.
“민재는?”
“안에 먼저 와 있지. 근데 뉴페이스 왔더라. 처음 보는 사람이던데.”
그녀가 말한 뉴페이스가 누군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2층으로 올라가 제일 안쪽으로 향하니 문 하나가 나오고 가드 둘이 지키고 서 있다. 그들은 하준을 발견하고는 바로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가득하다.
오랜만에 본 친구들이 하준을 향해 반가운 기색을 내비쳤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 양욱환이 앉아 있다. 얼마 전 파티에서 봤을 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하준이 그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민재가 술을 따라 주려는데 예쁘게 생긴 오메가 하나가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하준에게 대신 술을 따라 준다. 얼굴이 하얗고 눈동자가 새카만 남자는 어딘가 낯이 익었다. 뺨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걸 보아하니 꽤 어려 보인다. 기껏해야 스무 살 남짓?
“대표님 말씀 많이 들었어요.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서 영광이에요.”
그는 지그시 시선을 맞추며 눈을 휘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민재가 설명을 덧보탰다.
“여긴 신인 배우. 김한솔.”
아. 뒤늦게 남자를 기억해 냈다. 주인공은 아니었으나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비중이 제법 컸는데 얼마나 연기가 거지 같았는지 보면서도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하준이 술을 입으로 가져가자 옆에서 김한솔이 손으로 안주를 집어 준다.
“안주도 같이 드세요.”
대꾸하지 않자 그가 하준의 팔을 잡고 살짝 흔든다.
“얼른요. 저 손 민망해요.”
하준이 그의 손을 떼어 낸 뒤 물티슈를 집어 그 부위를 슥슥 닦았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키득대며 야유를 보낸다. 하준이 물티슈를 앞에 툭 던져 놓고 술잔을 집어 들었다. 옆에 앉은 김한솔의 얼굴이 새빨개지길래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며 진심을 다해 충고했다.
“나 같으면 이런 데 드나들 시간에 연기 연습을 할 텐데.”
하. 김한솔의 눈매가 뾰족해지더니 기분이 상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그사이 민재가 옆으로 와서 한마디 한다.
“야 애 울겠다. 아직 어려.”
“그러니까. 어린 게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서는.”
민재가 하준을 위아래로 훑었다.
“내가 알던 김하준 어디 갔어?”
“죽었어.”
어이없어하며 웃는 민재를 뒤로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양욱환이 눈에 들어온다. 눈이 마주치자 양욱환이 도발하듯 먼저 잔을 든다. 그가 단숨에 술잔을 비웠고, 이어서 하준이 잔을 비워 냈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회포를 풀다 보니 어느덧 자리가 양욱환의 옆으로 바뀌었다. 다들 한껏 풀어져 웃고 떠드는 사이 은밀하게 누군가 약을 가져왔다. 부작용도 없고 뒤탈도 적다는 말에 너도나도 술에 약을 섞는다.
하준은 아무 거리낌 없이 약을 받아 자신의 잔에 넣은 뒤 옆에 있던 양욱환에게도 건넸다. 그가 받지 않길래 대신 그의 잔에 약을 떨구었다. 하얀 기포가 잠시 생기더니 약이 순식간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준은 약이 든 잔을 양욱환에게 내밀었다.
“마셔요. 짠.”
“괜찮으세요? 지금도 많이 마신 거 같은데?”
“이 정도쯤이야.”
이미 취해 보이는데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는지 양욱환이 피식 웃더니 잔을 부딪치고 술을 넘긴다. 그 모습을 본 하준 역시 술잔을 단숨에 비워 냈다. 그때 양욱환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술을 따라 준다.
“파트너분은 잘 계세요? 파티에서 보니 사이가 무척 좋아 보이시던데.”
“잘 지내진 못해요. 요즘 꽤 골치 아픈 일이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라서요.”
“골치 아픈 일?”
하준이 술을 한 모금 들이켠 다음 담배를 물고 불을 당겼다. 후, 연기를 뿜어내며 양욱환을 보는데 양욱환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순진한 표정이다. 하준이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마치 비밀을 털어놓으려는 듯. 양욱환이 가까이 오는데 하준이 그만 그의 잔을 팔로 건드렸고, 그의 셔츠와 바지에 술을 쏟았다.
“아!”
하준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손에 있던 담배를 자신의 잔에다 버렸다.
“미안해요. 어쩌지.”
물티슈로 닦아 주려고 하는데 양욱환이 손을 내젓는다.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 화장실로 가서 닦으면 됩니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고 하준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생수를 하나 따서 단숨에 들이켰다.
옆을 보니 민재가 아까 하준에게 찝쩍대던 신인 배우와 열렬히 키스를 나누는 중이다. 하준은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그리로 가서 손잡이를 조심스레 돌려 안으로 들어갔는데 세면대 앞에 양욱환이 보이지 않는다.
발소리를 죽이며 뒷주머니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마취약을 넣은 주사기가 만져진다. 닫힌 화장실 문은 모두 3개. 첫 번째 문을 열고, 두 번째 문을 조심스럽게 여는데 갑자기 무언가 날아온다.
팔로 막으며 뒤로 물러서자 시야로 화병을 들고 서 있는 양욱환이 보였다. 화장실 입구에 장식용으로 놓아둔 것이 왜 그의 손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뻔뻔하게 웃는 표정을 보아하니 하준이 올 것을 알았던 눈치다.
“깜짝 놀랐네. 난 또 누가 날 죽이러 온 줄 알았잖아요. 인기척 좀 내지 그러셨어요.”
“누가 죽이러 쫓아올 정도로 평소에 나쁜 짓을 많이 하나 봐요?”
하준이 뒤로 물러서며 넥타이를 풀었다. 술이 아닌 약 기운이 퍼지는지 시야가 어른대고 피가 끓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것은 앞에 있는 양욱환도 마찬가지일 게다.
“넥타이는 왜 풀어요? 여기서 나하고 한 번 하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비열하고 저급한 얼굴이다. 하준이 조금 전 푼 넥타이를 손에 감자 그는 비웃으며 화병을 옆에 던져 버리고는 여유롭게 손짓을 했다.
“덤벼. 너 같은 도련님이 싸움을 해 본 적이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하준은 양욱환의 공격을 피해 그를 거세게 끌어안았다.
“씨발. 진짜 한 번 하자는 거였어?”
양욱환이 이를 갈았고 하준은 그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힘을 주었다. 이딴 새끼를 끌어안고 있는 게 엿같았지만, 지금으로선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음 같아선 얼굴이 뭉개져 없어질 정도로 패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계획이 틀어진다.
“말을 하지. 난 알파여도 상관없는데, 응?”
“기다려. 너하고 붙어먹을 놈은 따로 있으니까.”
하준은 말을 끝맺기 무섭게 양욱환의 목 뒤로 주삿바늘을 꽂아 넣었다. 한발 늦게 알아챈 양욱환이 온 힘을 다해 뿌리치자 주사기가 날아갔다. 그러나 이미 약효가 나타나기 시작해 동공이 풀리고 다리가 휘청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이…씹, 너, 너… 너!”
하준이 떨어진 주사기를 주워 들고 남은 양을 확인한 뒤 가까이 다가갔다. 양욱환은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였으나 퍼지는 약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앉은 채로 점점 무너졌다. 하준이 남은 약을 투여할 동안 그는 크게 저항하지 못했고 눈꺼풀의 깜박이는 속도도 점차 느려지고 있었다.
하준이 잔뜩 풀린 그의 눈앞에 빈 주사기를 흔들었다.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이야.”
그때 화장실 문이 열리더니 김민재가 나타난다. 그는 엉망이 된 화장실을 보며 혀를 차더니 쓰러져 있던 양욱환을 발견하고서는 다가갔다. 축 늘어진 모습이 시체와 다름없었다. 그는 우선 양욱환의 코밑에 손을 가져다 대고 상태를 확인하였다.
“죽인 건 아니지?”
“그러고 싶은데 참았어.”
양욱환이 잠꼬대를 하듯 미간을 찡그리고 신음을 낸다. 그걸 본 김민재가 작게 안도했다. 하준이 주사기를 품에 챙겨 넣은 다음 양욱환의 팔을 붙들고 일으켜 세웠다. 몸이 늘어지니 무게가 상당하다. 김민재가 옆에서 도왔다.
밖으로 데리고 나오니 무리 중 누군가 축 늘어진 양욱환을 발견하고는 왜 그러냐고 묻는다. 많이 취했다고 대답하자 다들 대수롭지 않아 하는 분위기였다. 문 앞을 지키던 가드에게 화장실 뒷정리를 부탁하고 나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층 위로 올라가니 직원이 기다린다.
직원의 안내를 받은 두 사람은 양욱환을 데리고 그가 타고 온 차로 향했다. 가는 동안 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리더니 서둘러 다가왔다. 그는 양욱환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자신이 챙기겠노라고 나섰다.
“대표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하준이 비틀거리며 취한 사람처럼 발음을 뭉갰다.
“아니 아니, 집에 가서 한잔 더 하기로 했어.”
네? 운전기사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하준이 양욱환의 귓가에 대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자기야. 말해 봐. 자기 직원이 내 말을 안 들어준다?”
양욱환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기사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려고 시도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민재가 짜증을 내며 윽박을 질렀다.
“당신 나 몰라? 우리 몇 번 봤잖아.”
기사가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넣으며 머뭇댔다.
“예, 그렇기는 한데….”
“됐고, 일단 문부터 열어. 우리가 언제까지 여기 서 있어야 해?”
공격적인 말투에 기사는 마지못해 뒷문을 열었다. 양욱환을 안으로 밀어 넣은 하준이 잽싸게 옆자리에 올라탔고, 민재가 보조석에 타서는 기사를 재촉했다. 빨리 가. 빨리. 우리 가서 할 일이 아주 많아.
출발하려고 준비하던 기사가 뒤를 흘깃 넘겨 본다. 그 시선을 느끼고 하준은 양욱환의 머리를 일부러 제 어깨 위에 올려 뒀다. 그러고 나서 저도 취한 듯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곧이어 차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고 기사가 운전하는 동안 민재는 옆에서 창문을 열고 담배를 꺼냈다. 하지만 그게 담배가 아니라는 건 곧 냄새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한참을 달리던 차가 어느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 멈추자 하준과 민재는 양욱환을 끌어내 양쪽에 서서 팔 하나씩을 어깨에 걸치고 그를 부축했다.
“욱환이네 집 몇 호였지?”
민재의 질문에 기사가 한발 앞으로 나선다.
“제가 같이 올라가겠습니다.”
민재가 눈을 부라렸다.
“씨발, 넷이 하자고?”
기사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린다.
“하고 싶으면 따라오든가. 당신 사장이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기사는 고민할 것도 없이 즉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양욱환이 사는 호수를 알려 준다. 하준과 민재는 그렇게 양욱환을 부축하며 엘리베이터로 갔다. 이동하는 중간중간 김민재는 CCTV를 의식했는지 술 취한 연기를 곧잘 했다. 그러면서 하준에게 이참에 자기를 데려다 배우로 키우라고 농담까지 던졌다.
2101호라고 적힌 문 앞에 선 두 사람은 양욱환의 소지품을 뒤져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카드 키를 발견했다. 그것으로 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엔 침실을 찾아 그를 침대 위에 던져 놨다.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민재가 침실에 있는 미니 냉장고에서 생수를 두 개 꺼내 하나를 하준에게 건넸다. 하준은 갑갑한 목을 축이고 나서 재킷을 벗었다. 그동안 김민재는 양욱환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의 앞에 손을 가져다 흔들었다.
“이거 약 효과 얼마나 가?”
“길면 3시간 정도.”
민재가 양욱환을 감시하는 동안 하준은 침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따라 걸으니 양옆으로 그림들이 여러 개 걸려 있다. CCTV가 있는지 집 안을 둘러본 다음 하준은 장갑을 끼고 방 이곳저곳을 뒤졌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1시간을 넘게 찾아도 쓸 만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서재로 보이는 곳에 도착했는데 서랍이 모두 잠겨 있어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어려웠다.
“젠장….”
책장과 그 안쪽까지 살펴도 별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하긴, 중요한 걸 이런 데다 숨겨 둘 리가 없지. 밖으로 나온 하준은 한숨을 내쉬고 침실로 돌아갔다. 그런데 민재가 상의와 하의를 모두 탈의한 채 침대에 누워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양욱환이 옷을 모두 벗은 채다.
민재가 하준을 보며 물었다.
“찾았어?”
“아니.”
침실 안을 살피던 하준은 서랍을 열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발에 미끄덩한 물체가 밟히길래 뭔가 했는데, 피임 도구였다. 그것도 사용한 흔적이 역력한. 한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를 완벽하게 세팅까지 해 놨다. 어이가 없어 쳐다봤더니 김민재가 씩 웃는다.
“내가 원래 철두철미하잖아.”
한 번만 더 철두철미했다간 양욱환이랑 잠도 자겠다. 라고 생각한 찰나 그가 이불 안에서 손을 움직인다. 양욱환이 신음을 내길래 하준이 기막힌 표정으로 쳐다보며 하지 말라고 눈빛으로 경고했다. 그 반응이 재미있는지 김민재가 능글맞게 웃었다.
“이 새끼 고추 작다.”
“쓸데없는 짓 해서 깨우지 마.”
“장난친 거야. 내가 알파하고 할 리가 없잖아.”
서랍과 장식장, 침대 아래까지 모두 샅샅이 뒤졌으나 도움이 될 만한 건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은 흐르고, 원하는 건 얻지 못했고. 마음이 초조해져 가는데 양욱환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이고 팔을 움직인다. 그러다 눈을 뜨려는지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2시간도 채 안 된 것 같은데. 하준과 민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선을 맞췄다.
하준이 눈짓을 하자 민재가 질색하며 고개를 흔든다. 하준이 제발, 하는 표정을 짓자 민재가 입으로 욕을 내뱉었다. 때마침 양욱환의 눈꺼풀이 열린다. 순간 김민재가 몸을 날려 양욱환의 위에 올라타서는 키스를 퍼붓고 그의 시야를 완전히 가려 버렸다.
이제 막 깼는데도 자극을 받았는지 양욱환도 손을 뻗어 김민재를 끌어안고 둘이 뒹군다. 그사이 하준은 재빨리 안쪽으로 들어갔다. 욕실에 딸린 사우나부터 시작해 구석구석을 다 뒤졌으나 물건을 숨길 만한 장소는 딱히 나오지 않았다.
그만 포기해야 하나. 돌아서던 와중에 천장 위 작은 환풍구가 시선을 잡는다. 설마 하는 마음과 혹시라도 하는 마음이 교차했다. 하준은 욕조를 밟고 올라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환풍구를 밀었다.
꼼짝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우려와 달리 쉽게 틈이 벌어진다. 휴대폰을 이용해 벌어진 틈새를 확인했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다고 여겼는데 자세히 보니 검은 물체가 하나 나타난다. 팔을 안으로 집어넣어 그것을 꺼내자 먼지가 함께 떨어진다.
하준은 환풍구를 원위치시켜 놓고 아래로 내려와 검은 비닐봉지를 열었다. 그것은 태블릿이었는데 비교적 새 제품인 데 반해 액정은 파손되어 금이 갔고 전원은 아예 꺼져 있었다. 전원을 켜려고 하자 망가졌는지 아니면 배터리가 없는지 화면이 작동하질 않는다.
태블릿을 챙겨 서둘러 나오던 하준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멈칫했다. 김민재가 도와준 건 의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저게 진짜 목적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싶을 만큼 그는 열정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래 깔려서 비명 비슷한 신음을 지르던 양욱환이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김민재가 그의 머리채를 잡아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그러고서 눈짓으로 얼른 나가라며 하준에게 신호를 보낸다. 얼굴을 보니 자괴감은커녕 흥분으로 가득하다.
하준은 재킷을 벗어 태블릿을 감춘 뒤 양욱환의 집을 빠져나왔다. 건물 곳곳에 CCTV가 있지만, 나중에 문제 될 건 없었다. 셋이 술 한잔하러 왔다가 먼저 나왔고, 둘은 남아서 관계를 맺은 것뿐이니까.
하준은 택시를 잡아탄 뒤 재킷 안에 감춰 둔 태블릿을 꺼내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걸 왜 숨겨 둔 걸까. 대체 이 안에 뭐가 있길래. 궁금증이 커져만 가는 가운데 정인에게서 연락이 온다.
[언제 와?]
하준은 휴대전화에 찍힌 글자를 내려다보며 침묵했다. 아까 술에 타서 먹은 약 기운이 남았는지 아직도 배 속이 뜨겁다. 이대로 갔다간 내가 참을 수 있을까.
젠장. 짙은 한숨을 내쉬는데 두 번째 메시지가 온다.
[보고싶어. 빨리와.]
***
하준은 집에 도착하기 전 많은 고민을 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류정인에게 털어놓아야 하는가 아닌가에 대하여. 둘 사이에 비밀은 절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정인의 낯빛을 보자 괜히 말을 했나 후회가 밀려왔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정인은 착잡한 표정으로 태블릿을 가져가 충전기에 연결하고 전원을 켰다. 그러나 하준의 설명대로 망가졌는지 작동을 하지 않는다. 정인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어렸다.
“이게 대체 뭘까.”
“내일 수리할 만한 곳을 찾아볼게. 안에 자료도 복구하고.”
“경찰에 넘기는 게 낫지 않을까?”
“누구? 이한 형사?”
정인은 고민했다. 사고를 당하고 겨우 의식을 차린 사람에게 이걸 가져다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전에 이한이 말하길 도움 될 만한 증거물이 있거든 절대 다른 사람에게는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다. 윗선에서 수사 종결하라고 압박하는 것도 께름칙하고, 혹여 양욱환과 연관된 사람들이 내부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정인은 한숨을 내쉬며 태블릿을 원래대로 봉투에 넣었다. 그러다 문득 근처에 앉은 하준의 페로몬 향이 평소와 다르게 짙다는 걸 깨달았다. 그답지 않게 초조해하는 표정도 그렇고 눈 주변도 살짝 붉은 빛이 도는 거 같기도 하고.
불현듯 그가 러트 왔던 날이 떠올라 걱정이 됐다.
“너 괜찮아?”
“왜?”
“페로몬 향이 강해져서.”
하준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열이 오르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새카만 눈동자로 저를 응시하는 류정인의 얼굴을 보니 누를 수 없는 욕망이 자꾸만 피어난다. 시선은 어느덧 정인의 얼굴과 벌어진 티셔츠 안쪽으로 보이는 흰 살결을 훑고 있었다.
“아픈 거 아니야?”
정인이 다가와 이마를 만지려 하기에 하준은 황급히 떨어졌다. 오늘 일을 치르면 멈추기 힘들 것 같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약을 한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욕망을 누르기 위해 아까 본 김민재와 양욱환의 모습을 떠올렸다. 욕망도 모자라 입맛도 뚝 떨어지는 기분이다.
그래도 남아 있는 열을 식히기 위해 하준은 주방으로 가 잔에 얼음을 채우고 찬물을 부었다. 물을 마시며 밖으로 나오는데 정인이 보이지 않는다. 둘러보던 하준은 멈칫했다. 정인이 바닥에 고양이 자세로 엎드려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뭐 해…?”
“공. 레오가 발로 건드렸는데 안으로 굴러갔어.”
옆에서 레오가 울고 있었는데 녀석이 물고 다니던 방울 달린 작은 공이 보이질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소파 아래로 굴러간 듯하였다. 소파 아래로 팔을 집어넣고 움직이느라 정인의 셔츠가 말려 올라가며 허리가 드러난다. 속살이 눈처럼 희다.
하준은 뜨거워지는 속을 달래느라 들고 있던 컵에서 얼음 하나를 꺼내 어금니가 부서져라 씹었다. 그러면서도 눈은 정인의 뒤통수부터 시작해 천천히 아래로 훑고 내려갔다. 상상 속에서 이미 저는 류정인 위에 올라탄 뒤다.
입이 바싹바싹 말라 가는 와중에 정인이 공을 꺼내서 일어선다.
“찾았다!”
그것을 레오에게 준 뒤 하준을 돌아봤다.
“레오가 이걸 제일 좋아해.”
엎드려 공을 빼내느라 힘들었는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됐다. 하준은 무식할 정도로 얼음만 우적우적 씹었고 남의 속도 모르는 류정인은 갑자기 바싹 다가오더니 가슴이 부풀 정도로 숨을 들이마셨다.
“하준아. 그 한약 정말 효과 있나 봐. 그래서 네 페로몬도 더 강하게 느껴지는 거 아닐까?”
하준은 신경질적으로 얼음을 씹으며 억지로 웃었다. 그럴 리가. 그건 그냥 내가 존나게 지금 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하자고 할까. 오늘이 기회인가. 저번에도 시도하다 아프다고 해서 포기했는데 오늘은 될까. 약을 먹었는데 자제할 수 있을까. 도중에 멈추지 못하면 어쩌지.
머릿속으로 강을 건널까 말까 갈등하는 사이 레오가 하준의 다리에 매달려서 발톱을 세운다. 마치 이 새끼야 정신 차려. 라고 하는 것처럼. 그래. 첫날밤이 얼마나 중요한데. 이렇게 약 기운을 빌려서 얼렁뚱땅 치르고 싶진 않아.
하준은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욕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나 씻을게. 먼저 자.”
“어?”
“오래 걸릴 거야. 몸이 뻐근해서 욕조에 담그려고.”
사실은 다른 데가 뻐근한 거지만 그 사정까지 알게 하고 싶진 않았다. 정인이 더 물을 새도 없이 하준은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욕조에 물을 받으며 걸터앉아 있는데 한숨만 푹푹 나오고 배 속이 들끓는다.
물을 받을 동안 하준은 옷을 다 벗고 샤워 부스로 들어가 찬물을 틀었다. 차라리 밖에서 자고 올걸. 후회하며 아래를 보는데 아들 녀석은 화가 난 듯 벌떡 일어서서 하늘을 노려보고 있다. 후, 하는 수 없이 손에 거품을 내 앞뒤로 문지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조금 전 정인의 모습을 상상하며.
하준이 씻으러 들어간 사이 정인은 침대에 앉아 오른손에 쥔 것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것은 성인용 젤이었는데 효과가 아주 뛰어나 통증을 완화해 준다고 하여 구입한 것이었다.
부부 관계를 자주 하라는 한의사 말을 100%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는가.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으니 조금은 기대해도 되겠지.
그런데 막상 사용하려니 긴장되고 망설여진다. 오메가의 몸과 베타의 몸은 분명 다르다. 하다가 김하준이 정신이 나가 안에다 노팅까지 한다면…. 상상을 하자마자 몸서리가 쳐진다. 그냥 시도했을 때도 아파서 뒤질 것 같았는데.
한편으로는 김하준을 위해 그 정도 고통도 감수하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래. 설마 하다가 죽기야 하겠어? 고심 끝에 정인은 협탁 위에 젤을 올려놨다. 김하준이 나오면 곧바로 발견할 수 있게 각도까지 맞춰서.
설렘 반 두려움 반인 마음으로 입고 있던 상의의 단추까지 살짝 풀어헤친 다음 침대에 다소곳하게 누워 김하준을 기다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은 조금씩 풀려 간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고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는 1시간 가까이 지난 시점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여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쪽으로 들어가 욕실을 열자 수증기만 남아 있고 김하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침실 밖으로 나왔는데 소파에 커다란 물체가 누워 있다. 불을 켜지 않고도 그게 김하준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불도 없이 바지 하나만 걸치고 상의를 탈의한 채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기가 막힌다. 그리고 아래에는 레오가 전용 방석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뭐야….”
살짝 분해진다. 큰마음 먹고 오늘은 하려고 했는데. 흔들어 깨우려다 관두고 대신 얇은 이불을 가져와 몸 위에 덮어 줬다. 세상모르고 자는 걸 보니 밉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다. 그래, 술을 많이 마셨으니 피곤할 만도 하지.
침실로 돌아온 정인은 협탁 위에 올려 둔 젤을 보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고 서랍을 열어 그 안에 던져 놨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풀어 놓은 셔츠 단추도 잠그고서 침대에 누웠는데 괜히 민망해진다. 수치스러움에 결국 이불을 뒤집어쓰며 발길질을 해야 했다.
***
“괜찮으세요?”
한약을 앞에 놓고 멍하니 앉아 있는 정인을 보며 서 집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두 분 싸우셨어요?”
“아니요. 왜요?”
“대표님이 소파에서 주무셨길래요.”
정인은 고개를 저었다. 어젯밤 정인은 꽤 오랜 시간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대체 왜. 젤을 못 봤나. 아니면 너무 피곤했나. 그것도 아니면 혹시…? 생각해 보니 집에 오고부터 묘하게 피했던 것 같다.
상상은 엉뚱한 방향으로 내달린다. 다른 데서 이미 풀고 온 건 아닐까? 그럴 리 없다고 하면서도 머릿속에서 김하준을 향해 달리던 수많은 댓글이 지나간다. 문란한, 난봉꾼, 바람둥이, 또 뭐였더라.
정인은 그제야 김하준이 자신이 알던 열여덟 김하준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렸다. 게다가 어제는 술도 먹고 사람들하고 어울리지 않았는가. 양욱환의 집에 가기 위한 목적이었다고는 하지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미간이 저절로 일그러진다.
“이 새끼 혹시…!”
“네?”
의아하게 쳐다보는 서 집사를 보며 정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김하준이 그럴 리는 없다. 얼마나 나를 좋아하는데. 근데 어제는 왜 그랬지. 왜 손도 대지 않고 잠도 따로 잤지. 갑자기 아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나? 머릿속에서는 같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복되고 있었다.
아, 짜증 나. 그만 생각하자. 진짜 피곤했나 보지. 못 해서 안달 난 것도 아니고.
마음을 비우고 앞에 놓인 탕약을 먹는데 인터폰이 울린다.
“여사님 오셨나 봐요.”
서 집사가 자리에서 일어서 현관 쪽으로 걸어간다. 정인은 잔소리를 들을까 싶어 탕약을 단숨에 들이켜고 빈 그릇을 얼른 치웠다. 써도 너무 쓰다. 사탕 껍질을 벗기는데 김하준 할머니가 등장한다. 덕분에 사탕은 먹지 못하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할 준비를 하는데, 오늘은 김하준 할머니만 있는 게 아니다. 침을 맞으러 가는 날인데 뒤에 여러 명을 달고 왔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 머리에 복면 같은 걸 쓴 누군가 서 있다. 자세히 보니 팔이 뒤로 묶인 상태다. 그 광경은 단두대로 끌려가는 죄수와 흡사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장면이다. 의아해하며 쳐다보는데 할머니가 가볍게 손짓을 한다. 그것에 맞춰 덩치들이 복면 쓴 남자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인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순간 할머니가 검은 헝겊을 벗겨 냈다. 정인은 이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류동찬이다. 인터넷 방송에서 저를 욕하며 이 결혼이 모두 류정인의 자작극이라고 떠들던. 류동찬은 입에 테이프를 붙인 채 읍읍 소리를 질렀다.
놀라 얼음처럼 굳어 있는데 할머니가 소파에 앉으며 서 집사를 부른다. 서 집사 역시 놀랐는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대답을 한다.
“여기 차 한잔 줘. 따뜻한 걸로.”
“예 여사님.”
할머니가 입을 벌린 채 서 있는 정인을 보며 혀를 찼다.
“왜 그러고 서 있니? 앉아.”
정인이 류동찬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더듬었다.
“어? 어, 어떻게!”
“함부로 입 나불거리길래 내가 데려왔다.”
류동찬이 정인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제발 도와 달라고 신호를 보낸다. 꽁꽁 묶여서 바닥에서 버둥대는 모습을 보니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엉거주춤 자리에 앉으면서도 시선은 류동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할머니는 서 집사가 가져온 차를 찻잔에 받쳐 우아하게 한 모금 들이켠 다음 정인을 불렀다.
“어떻게 할까?”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정인이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가 답답하다는 듯 찻잔을 내려놓으며 류동찬을 흘깃 돌아봤다.
“죽여? 살려?”
눈빛을 보니 진짜 죽이고도 남을 기세다. 그 말을 들었는지 류동찬이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버둥거리며 난리를 친다. 정인 역시 당황하고 놀라 할 말을 잃자 할머니가 다시 찻잔을 들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한다.
“미련 떨지 말고 잘 생각해. 저런 놈 가족이라고 봐줄 거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