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14)

 08

정인은 가게 앞에 서서 바뀐 간판을 바라봤다. 불에 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던 가게는 말끔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2달 전까지 자신이 매일 출근을 하던 곳인데도 이젠 낯설게 느껴진다. 

뒤늦게 차에서 내린 하준은 트렁크를 여는 중이었다. 그는 화분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오는 길에 정성 들여 화분을 하나 골랐다. 꽃가게 주인 말로는 공기정화에 좋은 식물이라고 했다. 

하준이 트렁크에 얼굴을 들이밀고 화분을 꺼내는 동안 누군가 저 멀리서 정인을 향해 걸어왔다.

“오랜만이네, 정인 씨.”

정인이 놀란 얼굴을 했다. 최 사장이다. 그가 왜 이 시간에 여기 있는지는 모르나 오랜만에 고객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최 사장님.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잘 지냈지. 소식 들었어. 가게 불났었다며. 속상했겠네.”

그는 새로 단장한 가게 외관을 훑어보더니 바뀐 게 훨씬 낫다고 말해 주었다.

“결혼 생활은 어때? 할 만해?”

“네, 뭐….”

최 사장은 정인이 타고 온 차를 한 번 훑고 나서 혀를 찼다.

“좋은 차 타고 다니면서 얼굴이 왜 그래. 말랐네.”

“하하, 아니에요. 마르긴요.”

“꺼칠한데. 어디 아파? 아니면 파트너가 못해 줘?”

하하. 난감하게 웃던 정인이 눈동자를 움직여 김하준을 봤다. 이제 막 화분을 꺼낸 그는 트렁크를 닫고 있었다. 마치 최 사장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처럼. 

“아니에요. 얼마나 잘해 주는데요.”

“에이, 거짓말.”

정인은 말을 돌렸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자기네 건물주 만나러 왔지. 근데 여기서 딱 마주치네. 아무래도 우리가 인연인가.”

정인은 그가 자신이 세 들어 있는 건물 주인과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화분을 한 손으로 받쳐 든 김하준은 최 사장의 뒤에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상황이 이상해진 것 같아 재빨리 김하준을 소개하려고 했다.

“저쪽은,”

정인의 손짓을 따라가던 최 사장의 시선이 화분을 들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 있는 하준에게 닿았다.

“누구? 기사?”

정인이 입을 벌린 채 뻐끔댔다. 알고 그러나 싶을 정도로 최 사장의 얼굴에 짓궂은 기색이 역력하다. 아니라고 정정하려고 하는 순간 하준이 들고 있던 화분을 정인에게 건네주며 공손하게 이야기했다.

“사모님 먼저 들어가 계세요. 저는 차 다시 댈게요.”

사모님이란 호칭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이미 차를 제대로 주차했는데 어째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요즘 기사는 얼굴 보고 뽑나 봐. 훤칠하네.”

최 사장의 말에 정인이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저 사람, 어? 어어! 야!”

시동을 켠 김하준의 흰색 차량이 갑자기 뒤로 급발진한다. 놀란 정인이 앞으로 뛰쳐나가며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한발 늦었다. 쿵! 소리와 함께 뒤에 있던 최 사장의 차 앞 범퍼와 김하준의 뒷 범퍼가 거칠게 키스했다. 

건너편 편의점 앞에서 음료를 마시던 최 사장의 부하들이 현장을 목격하고 황급히 뛰어오는 동안 최 사장의 범퍼가 기다렸다는 듯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진다. 정인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다가 최 사장을 돌아봤다. 

정인은 알고 있다. 그가 자신의 차에 얼마나 남다른 애착이 있으며 소중히 아끼는지를. 여유롭던 최 사장의 눈빛이 흉흉하게 변하더니 어금니를 꽉 무는 게 한눈에 보인다. 김하준이 운전석에서 내리며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사장님 이를 어쩌죠? 너무 죄송합니다. 제가 운전이 미숙해서 큰 실수를 했네요.”

미안하다면서 눈빛에 진심이라고는 1도 담겨 있지 않았다. 최 사장이 하, 하고 어이없어하며 웃자 김하준이 다가오더니 정인의 품에서 화분을 도로 가져간다.

“청구하실 거면 하세요. 물론 그렇게 쪼잔한 분 같아 보이진 않지만.”

최 사장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살벌하게 웃었다.

“우리 기사님, 돈 많은가 보네.”

“저런 똥차 수리값은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연락 주세요.”

대신 류정인 씨 말고, 저한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최 사장에게 건넸다. 김하준입니다. 최 사장이 명함을 받지 않고 빤히 보자 그의 양복 재킷 주머니에 팁처럼 툭 넣어 준다. 최 사장의 얼굴이 얼마나 험악하게 일그러지는지 정인은 김하준을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살펴 가세요, 그럼.”

하준은 정인의 등을 힘주어 떠밀며 가게 안으로 몰아넣었다. 뒤에 있던 최 사장의 헛웃음 소리가 들렸다. 정인이 돌아보며 죄송하다고, 다음에 연락드린다고 말을 끝맺기도 전에 김하준이 문을 닫아 버렸다. 가게 안으로 들어온 정인은 다시 나가려다 김하준에게 붙들리고는 인상을 썼다.

“야, 너 왜 그래.”

“뭐가.”

“일부러 박았지?”

김하준이 뻔뻔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실수였어.”

“왜 남의 차를 박아?”

“운전 미숙이라고 했잖아.”

거짓말하지 말라며 아옹다옹하는데 안쪽에서 다혜가 얼굴을 내밀다 눈을 크게 뜬다. 정인아! 오랜만에 온 정인을 보고 반가워 양팔을 벌리다 옆에 있는 김하준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흠칫 물러났다.

“어… 같이 오셨구나.”

“네, 오랜만입니다.”

하준이 생긋 웃으며 들고 있던 화분을 건넸다. 여기, 선물이요. 다혜가 그것을 받아 들며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정인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사이가 나쁜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우선 앉으실래요? 차 가져다 드릴게요.”

“아닙니다. 가게 구경하고 있을 테니 두 분 대화 나누세요.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울 텐데.”

뜻하지 않은 배려에 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끌어안지는 말고.”

“아….”

다혜가 억지로 웃으며 정인의 팔을 슬그머니 잡아끌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동안 하준은 가게 안을 둘러봤다. 전보다 훨씬 깔끔해진 느낌이다. 벽에 붙어 있는 도안들을 보던 하준은 그중 눈에 띄는 하나를 발견하고는 가까이 가서 살폈다. 별자리였다. 

그러고 보니 류정인의 왼쪽 가슴에서 비슷한 걸 봤다. 자세히 보려고 해도 그때마다 손으로 가리든가 피해 버려서 확실하진 않지만. 그걸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데 전화벨 소리가 들린다. 안에서 류정인이 전화를 받으며 나온다. 

네, 엄마. 아니에요, 지금 밖에 나왔어요. 그는 하준에게 통화하고 온다며 손짓을 하고 가게를 빠져나갔다. 하준은 열린 문틈으로 밖을 슬쩍 내다봤다. 혹시 그 늙은 건달 놈이 아직 있는 건 아닐까 확인하기 위해서. 

전에 잠깐 마주쳤을 때도 느낀 거지만 놈은 확실히 류정인에게 딴마음을 품고 있다. 뿜어내는 페로몬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아까 그 표정은 하준이 누구인지 뻔히 알면서 도발하려고 작정한 듯 보였다.

역시 차가 아니라 사람을 쳐 버렸어야 했나. 뒤늦은 후회를 하는 동안 다혜가 차를 가지고 밖으로 나온다. 그녀는 차를 내려놓고 도안 앞에 서 있던 하준을 보며 슬쩍 묻는다. 

“하나 하시게요?”

농담처럼 건넨 말에 김하준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몸에 그림을 그리는 걸 딱히 좋아하진 않으나 류정인이 해 준다고 하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픈가요?”

“부위마다 다른데 어디다 하실 거예요?”

곰곰이 생각하던 하준이 정인을 떠올리며 왼쪽 가슴 위쪽을 가리켰다. 여기? 그러자 다혜가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거긴 꽤 아픈데. 

“하준 씨 별자리 뭔지 아세요?”

“몰라요.”

“생일이 언젠데요.”

“8월 11일.”

“아 그럼 사자자리네요.”

“사자자리요?”

다혜가 하준의 앞에 있는 사진을 가리켰다.

“그거잖아요. 사자자리.”

하준이 미간을 좁혀 앞에 있는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럴 리가. 아무리 봐도 이건 류정인 가슴에 있던 그림하고 너무 비슷한데. 12월생인 류정인의 별자리가 한여름인 저와 같을 리가 없다. 

퍼즐을 맞춰 가던 하준의 눈이 번쩍 커졌다. 혹시…? 그는 사진을 툭, 떼어 내고 잠시만 빌릴게요. 하더니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왔다. 마침 통화를 마친 류정인이 입구로 걸어오고 있었다. 

“차 마시지 왜 나왔, 어?”

하준은 그를 급하게 끌고 차 뒷자리로 밀어 넣더니 차 문을 닫고 정인의 셔츠 단추를 막무가내로 풀려고 했다. 당황한 정인이 하준의 얼굴을 밀어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쳤냐. 왜 이래!”

“확인할 게 있어.”

“떨어져. 팬다.”

“잠깐. 30초면 돼.”

“셋 센다. 하나, 둘.”

“잠깐이면 된다니까.”

티격태격하다가 정인을 의자에 드러눕히고 하준이 그 위에 올라타 셔츠를 마저 벗겼다. 왼쪽 가슴 위쪽에 타투가 드러난다. 하준은 들고 있던 사진과 정인의 가슴에 새겨진 타투를 눈으로 빠르게 비교했다. 

똑같다. 

정인이 하준의 어깨를 확 밀쳐 내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덕분에 하준의 머리가 차량 윗부분에 쿵 하고 부딪쳤다. 아, 머리를 붙잡고 아파하는 그를 보며 정인이 미안하면서도 어이가 없어 따졌다.

“미쳤냐? 오늘 진짜 왜 그래?”

“너….”

하준이 사진을 정인에게 보여 줬다. 그걸 본 정인의 눈이 가느다랬다가 점점 커진다. 김하준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들어 가는 걸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 아니야.”

“나 묻지도 않았어.”

“네가 생각한 거 절대 아니야. 이건,”

“정인아….”

“아니라고.”

“류정인.”

더 말할 것도 없이 하준이 정인을 와락 끌어안고 후우, 하고 숨을 몰아 내쉬었다. 그는 류정인. 정인아. 하고 몇 번이고 이름을 불렀다. 정인이 몸을 빼려고 버둥거릴수록 껴안는 힘은 더더욱 강해졌다.

“고마워.”

“아니, 그게 아니라,”

“다 알아. 네가 어떤 마음으로 그걸 새겼을지.”

정인은 대답 대신 하준의 어깨에 얼굴을 올리고 난감한 표정을 했다. 물론 김하준을 잊은 적은 없다. 살면서 내내 가슴에 품고, 그리웠으니까. 하지만 타투는 정말 김하준 때문이 아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새겼던 건데. 하필 김하준과 별자리가 같아서는…. 해명할까 하다 관두고 미안한 마음에 하준의 등을 쓰다듬어 줬다. 사실대로 말하려고 해도 너무 감동한 상태라 털어놓기가 쉽지 않다. 

“미안…. 하준아.”

껴안는 힘이 더 세진다.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아무것도 모르고 심술부려서 미안.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에 정인은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입술을 말아 감춰야 했다. 김하준은 많이 달라진 것 같지만, 그래도 아직은 어릴 적 귀여운 구석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다혜와 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하준은 차에서 정인을 기다려 줬다. 밖으로 나오니 김하준 차 뒤 범퍼가 찌그러진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괜히 최 사장한테 성질을 부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창문을 열자 의자를 젖히고 누워 있던 김하준이 자세를 바로 한다.

“이야기 다 끝났어?”

“어. 근데 나 택시 타고 갈게.”

김하준 회사와 집이 반대 방향이라 그게 나을 것 같았다. 날씨가 좋으니 가는 동안 바람도 쐬고 공원도 거닐 계획이었다.

“타. 데려다줄게.”

“괜찮아. 너 바쁘잖아.”

“한가하니까 걱정 말고 타. 날씨도 좋은데 드라이브나 가자.”

마음이 통한 건가. 차에 올라타자 하준은 몸을 기울여 안전띠를 매 주려고 손을 뻗었다.

“내가 할게.”

“손 다쳐서 불편하잖아.”

그는 안전띠를 채운 뒤에 시동을 걸었다. 차 안의 공기가 묘하다. 정인은 분위기를 환기하려 창문을 열었다. 하늘도 유독 파랗고, 햇볕은 적당히 따뜻한 날이었다. 차를 타고 가면서 하준은 다혜에 관해 궁금했는지 이것저것 물어 왔다. 언제부터 친했는지, 어쩌다 친해졌는지.

“대학 입학하고 바로 친해졌어.”

“설마 옛 애인이나 그런 건… 아니지?”

혹시나 하는 김하준을 보며 정인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다혜와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어도 서로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다혜에게 애인이 생길 때마다 그 자랑과 하소연을 함께 들어 줘야 하는 사이였지.

“그런 거 아니야.”

마침 차가 신호를 받아 멈추고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장난을 치며 우르르 몰려간다. 하교 시간은 아닌데. 땡땡일까.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이들이 길을 다 건널 때까지 눈으로 좇았다. 

“좋을 때다.”

하준이 한 말에 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우리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서로에게 주었던 애정과 상처가 한꺼번에 수면 위로 올라오자 둘 다 말이 없어졌다. 어색함 속에서 차는 어느덧 외곽순환도로로 빠지고 있었고 분위기를 바꾸려는지 하준은 음악을 틀었다. 날씨와 딱 어울리는 팝이었다.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는 동안 차는 쌩쌩 달렸다. 한참을 가다가 정인은 차가 본가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알아챘다.

“왜 여기로 가?”

“우리 다니던 학교 가 볼래? 들렀다가 저녁은 어머님한테 가서 얻어먹고.”

“우리 엄마?”

“응.”

좋아하실까? 실은 아까 가게에서 잠깐 엄마와 통화를 하였다. 그녀는 아들 걱정에 한숨을 자꾸 내쉬었다. 다쳐서 입원해 있는 동안 엄마와 민아가 병문안을 왔고, 그날 민아에게 대충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김하준의 안 좋은 소문들에 대해 엄마가 어디선가 들었다고. 죽은 이해수의 뱃속 아이가 김하준의 아이라는 것까지. 물론 믿는 것은 아니나 그것으로 인해 정인이 힘들어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달릴수록 차창 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하나둘 나타난다. 차를 몰고 시내 안으로 들어가자 낯익은 건물들이 곳곳에 보인다. 어릴 적 친구들과 자주 가던 노래방과 PC방은 사라졌으나 햄버거 가게와 서점은 남아 있었다. 

하교 시간인지 곳곳에 교복을 입은 무리가 눈에 띈다. 정인이 그 아이들을 가리켰다.

“우리 학교다.”

“그러네.”

“지금 봐도 교복 촌스럽다.”

“응.”

학교 다닐 때 교복이 마음에 안 든다며 정인은 꼭 사복을 함께 입었고, 김하준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교복을 말끔하게 갖춰 입었었다. 김 회장이 가지고 있던 사진 속에서도 둘의 교복 입은 모습은 극과 극이었다. 

그 생각을 하며 웃다가 골목 안쪽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그걸 보며 정인이 혀를 찼다.

“어린 새끼들이 폐 썩는지도 모르고. 나 때는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치?”

하준이 피식 웃었다.

“옛날에 그런 속담이 있어.”

“하지 마.”

“알았어.”

시내를 한 바퀴 돌고 가려는데 앞쪽으로 차가 길게 늘어서 있다. 왜 이렇게 막히나 하고 봤더니 하필이면 장이 서는 날이라 시장 입구가 북새통이다. 아, 젠장. 돌아갈걸. 뒤늦은 후회를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던 차는 정체 구간을 빠져나와 학교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양쪽으로 늘어선 나무를 따라서 올라가다 학교와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주차하고 나서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정거장에 모여 버스를 기다리는 걸 보며 정인은 옛 생각에 잠겼다. 늘 이곳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그때마다 하준은 옆에서 묵묵히 기다려 줬다. 그러나 막상 버스가 도착하면 사람이 많다는 핑계를 대고 타지 않았고, 그렇게 몇 대의 버스를 더 떠나보낸 뒤에야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헤어졌었다.

정거장을 지나쳐 걷던 하준은 정인의 손을 붙잡았다. 정인이 쳐다보자 하준이 눈썹을 까딱 올리며 웃었다.

“예전엔 네가 먼저 잡았잖아.”

툭하면 김하준한테 찝쩍대던 혈기 왕성하던 열여덟을 떠올리니 조금 민망하면서도 웃음이 났다. 저 멀리 정문이 보였고 학교가 가까워질수록 정인은 기분이 착잡해졌다. 김하준에게는 말하지 못했으나 성인이 되고 난 뒤에는 학교 근처도 오지 않았었다. 

가까워질수록 학교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색을 칠한 것인지 외관은 전과 달라져 있었으나 대부분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때 팥죽색 생활한복을 입고 파마머리를 한 남자가 교문 밖으로 나온다. 

놀란 정인은 저도 모르게 커다란 트럭 뒤로 몸을 재빨리 숨겼다. 하준이 돌아보자 정인이 얼른 숨으라고 손짓을 한다. 

“왜.”

“학주잖아.”

하준이 다시 정문을 봤다. 한 손에 몽둥이를 들고 주변을 살피던 남자가 안으로 사라졌다. 하준은 어렴풋하게 과거에서 남자를 기억해 냈다. 윤리 선생인 그는 학생주임도 함께 맡고 있었는데 엄하기로 유명하였다. 하준은 크게 혼난 적이 없으나 당시 사고를 자주 치던 류정인은 그에게 끌려가 엉덩이를 맞는 날이 허다했다.

“들어갔어.”

정인은 트럭 밖으로 나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왜 10년이 지났는데도 학생주임을 피하는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씨발…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니까. 어떻게 몸이 저절로 반응하지.”

하준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교문 가까이 간 두 사람은 학생주임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아무렇지 않게 정문을 통과하려고 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작은 창을 열고 경비가 얼굴을 내밀어 묻는다. 정인이 대답을 하려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세월이 흘러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변했으나 코 옆에 큰 점이 있는 남자는 예전부터 학교를 지키던 사람이 분명했다. 정인이 아는 척을 하기도 전에 경비가 먼저 정인을 가리키며 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너 꼴통!”

반가움으로 물들던 정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꼴통이라니…. 옆에서 김하준이 큽, 하고 비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정인은 애써 미소로 대답했다.

“안녕하셨어요?”

“히야, 너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얼굴이 그대로네.”

“네, 아저씨도 그대로시네요. 잘 지내셨죠?”

“나야 잘 지내지. 근데 너 요즘은 사고 안 치고 다니냐. 예전엔 말을 그렇게 지지리 안 듣고 싸움박질만 하더니. 어휴, 너희 아버지가 그래서 학교에 많이 왔었지.”

듣고 싶지 않은 과거 이야기에 정인이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는 하준을 보더니 안경을 추켜올리고 유심히 본다. 하준은 중간에 전학 갔고, 지금은 안경을 쓰지 않았으니 못 알아볼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그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눈썰미가 좋았다.

“너는, 맞지? 꼴통하고 세트로 다니던 착한 애.”

하준이 멋쩍게 웃었고 정인의 눈초리는 올라갔다. 누군 꼴통이고 누군 왜 착한 애지.

“잠깐 들어가서 구경해도 돼요?”

정인이 다소 퉁명스럽게 묻자 경비가 끄덕인다.

“원래 외부인 출입 안 되는데, 너희는 내가 얼굴 아니까 들여보내 준다. 여기 방명록에 이름은 적고 가.”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난 뒤 돌아서는데 경비가 무언가 깨달은 듯 아! 하고 소리를 지른다.

“너 예전에 여기 몇 번 왔었지?”

처음엔 그것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았다. 저요? 하고 묻자 경비가 손사래를 친다. 아니, 꼴통 너 말고. 나이 든 경비는 하준을 가리켰다. 

“맞지? 졸업하고 몇 번 봤는데.”

하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잘못 보셨을 거예요. 경비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래? 이상하다. 너 저기 벤치에 앉아서 우는 거 내가 몇 번이나,”

수고하세요. 하준은 황급히 인사를 하고 정인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붙잡힌 팔을 보던 정인은 하준의 뒤통수를 보다 그의 귀가 조금 붉게 달아오른 것을 알아챘다. 어쩐지 고등학교 시절 그 김하준을 보는 듯하였다. 한편으로는 울었다는 경비 아저씨의 말이 가슴을 후빈다. 눈썰미 좋은 그가 하준을 잘못 봤을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정인은 잡힌 팔을 슬그머니 빼내고 걸음을 빨리해 보폭을 맞췄다.

“전에 온 적 있어?”

하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 안 놀릴게.”

“아니.”

“정말 울었어?”

김하준이 미세하게 움찔한다. 그가 왜 이곳에 와서 벤치에 앉아 울다가 갔는지 더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미안하고 속상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느려지는 하준의 걸음을 따라잡으며 정인은 이번엔 먼저 손을 잡았다.

“미안….”

하준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실은 전학 가고 난 뒤에도 이 동네를 몇 번이나 찾아왔었다. 혹시 길에서 마주치진 않을까, 그럼 우연인 척 인사를 건넬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막상 류정인과 비슷한 사람이라도 나타나면 도망치듯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원망과 미움은 커졌고 마음은 점점 더 황폐해졌다. 옆에 서 있던 정인이 마음을 알아챘는지 앞서 나가 하준과 마주 선다. 천천히 뒤로 걸으며 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뗐다.

“똑같은 말 듣기 싫겠지만, 진심으로 미안해.”

해를 등지고 있는 류정인의 얼굴에 속상함과 미안함이 가득하다. 하준은 걸음을 멈추고 붙잡은 손을 잡아당겼다. 품 안으로 들어온 정인을 끌어안자 좋은 향이 훅 느껴진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속삭였다. 

사과하지 마…. 이제 괜찮아. 다 괜찮아졌어.

***

집으로 가는 길에 하준은 꽃가게에 들러 정인의 어머니에게 줄 꽃다발을 샀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당에 모여 놀던 아이들이 정인을 반긴다. 그중 꼬마 몇 명은 우르르 달려와 정인에게 안아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정인이 안아 주려고 하자 하준이 그의 다친 팔을 흘깃 보고 앞으로 나섰다.

“내가 안아 줄까?”

하준은 몸을 굽히고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물었다.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여자아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두 번째 만남인데도 아이는 하준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하준은 정인에게 꽃다발을 건넨 뒤 아이를 안았다.

아이를 안고 빙글빙글 돌려 주자 곧이어 다른 아이들까지 나타나 합세했다. 흙을 만지고 노느라 엉망이 된 아이들을 보고 정인은 손을 먼저 씻겨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저야 상관없지만 김하준은 아이들을 많이 겪어 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김하준은 자신의 옷에 흙이 묻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높이 올라간 아이가 고개를 젖히고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데 뒤늦게 나온 엄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황급히 다가왔다.

“왔니?”

하준이 아이를 내려놓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셨어요?”

미리 온다고 언질을 줬음에도 김은혜의 얼굴에서는 어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 네. 잘 왔어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어머니.”

하준은 정인에게 꽃다발을 받아 그것을 김은혜에게 건넸다.

“급하게 오는 바람에 선물을 따로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꽃 좋아하신다길래….”

엉겁결에 꽃다발을 받은 김은혜의 표정이 상기된다. 붉은색 장미는 그녀가 특히나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걸 아는 남편은 생전 담장 아래 꽤 많은 장미를 심었고 덕분에 5월이 지나면 집 주변에는 장미 향이 그윽했다. 

“고마워요. 예쁘네요.”

하준은 장미에 코를 대고 향을 맡는 그녀의 모습이 어딘가 정인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곧이어 보육원에 있던 선생들이 하나둘 나타나 인사를 건넨다. 정인이 괜찮니? 많이 놀랐겠다. 다들 뉴스를 통해 그 사건을 접했는지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 왔다.

정인은 애써 웃으며 이젠 괜찮다고 대답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문이 열리면서 할머니가 등장한다. 노란색 스웨터를 입고 머리를 곱게 빗은 그녀가 정인을 발견하더니 오빠라고 부르며 표정이 환해진다. 오늘은 아무래도 과거 여행을 하는 모양이다.

“옥란 씨, 나 왔어요.”

정인이 씩 웃으니 할머니가 신발을 갈아 신고서 뛰어온다. 오랜만에 본 할머니가 반가워 안아 주려고 하자 그녀는 정인을 홱 지나쳐 빠른 속도로 하준에게 갔다. 그러더니 하준을 덥석 껴안았다.

“영감! 어디 갔다 왔어.”

저번에도 그러더니 할머니는 하준을 볼 때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라고 여기는 듯하다. 엄마가 난감해하며 할머니를 떼어 내려고 하자 하준은 그냥 두시라며 눈짓을 했다. 할머니는 왜 이제야 왔느냐고, 옆 동네 꽃분이 년이 그렇게 좋았냐고, 그래도 내 생전에 첩 꼴은 못 본다고, 할아버지의 과거를 까발렸다.

당황한 엄마가 말리는데도 할머니는 예전 할아버지가 바람피웠던 여자들 이름을 줄줄이 꺼냈다. 뒀다간 할아버지의 모든 치부를 까발릴 것 같아 정인은 할머니를 겨우 달래고 설득해 떼어 낼 수 있었다.

김하준이 온다고 일부러 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저녁은 삼계탕이었다. 그러나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김하준은 할머니와 류민아에게 포위돼 정신이 없었다. 보다 못한 엄마가 안에다 따로 상을 차려 줄 걸 그랬다고 후회했으나 그럼에도 김하준은 서글서글하게 잘 어울렸다. 

그는 전에 이곳에 왔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그때는 류정인에 대한 의심을 품고,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방문했다면 지금은 원래 이 집 식구인 양 편안해 보였다.

멀찍이 떨어져서 아이들을 챙기던 정인이 다가가자 민아가 환하게 웃으며 돌아봤다.

“오빠! 나 형부가 오디션 보러 오래.”

그 말에 정인은 인상을 굳혔다. 그러잖아도 연예인 된다고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간 애를…. 전에는 민아가 하고 싶다면 내버려 둘 작정이었는데, 이해수가 죽고 세세한 것들을 알게 되니 이젠 누가 시켜 준다고 해도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인은 단호한 표정으로 하준에게 이야기했다.

“너 애 바람 넣지 마.”

김하준은 할머니에게 닭고기를 발라 주며 웃는다.

“하고 싶다잖아.”

“안 돼. 끈기 없어서.”

그 말에 민아가 억울한 표정으로 하준에게 일러바친다.

“들으셨죠, 형부. 오빠가 항상 이런 식으로 저를 무시해요. 툭하면 공부 못한다고 무시하고, 학교에서 사고 쳤다고 무시하고, 자기도 학교 다닐 때 애들 때리고 다녔으면서, 악!”

정인이 민아의 귀를 비틀어 잡았다. 이를 악물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네 자리 가서 먹으라고 말했더니 민아가 빨개진 귀를 붙잡고 씩씩대고 째려본다. 그러더니 홱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정인이 이번엔 할머니의 곁으로 가 팔을 붙잡았다.

“할머니도 가요. 저하고 같이 먹어요. 응? 아이 예쁘다, 우리 할머니.”

그러자 할머니가 정인의 팔을 뿌리쳤다. 

“못생긴 오빠 싫어. 저리 가. 나는 우리 잘생긴 영감하고 먹을 거야.”

아아, 할머니. 물론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말씀하신 거겠지만 충격이다. 손주를 볼 때마다 잘생긴 오빠라고 노래를 부를 땐 언제고. 이젠 김하준이 있으니 저는 찬밥인가 보다. 김하준이 웃음을 참는 게 보이기에 정인은 민아가 앉았던 의자를 끌어내 자리를 잡았다.

“바꿔서 앉아. 내가 할머니 챙길게.”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 할머니들하고 잘 어울려. 우리 할머니 봤지? 나라면 껌뻑 죽는 거.”

김하준의 할머니가 떠올랐다. 그녀가 김하준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안 봐도 안다. 말끝마다 우리 하준이, 귀한 내 손주를 귀가 닳도록 읊어 댔으니까. 그 귀한 손주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상상만 했는데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할머니를 챙기던 하준은 이젠 몸을 돌려 정인의 앞접시에 닭 다리를 놓아 준다.

“먹어, 얼른.”

고기를 보던 시선이 하준에게 옮겨 갔다.

“나는 내가 알아서 해. 걱정하지 마.”

“알아서 먹긴. 계속 정신없이 움직이던데.”

그 말에 정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보통의 아이들은 수저와 젓가락을 쓸 줄 알면 흘려도 혼자 밥을 먹도록 놔뒀으나 더 어린 아이들은 아직 어른의 손길이 필요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챙기다 보면 제대로 된 식사는 늦을 때가 많았다.

“고생했어.”

난데없는 김하준의 말에 닭고기를 쳐다보던 정인이 고개를 돌렸다. 응?

“생각해 보니 네가 어린 나이에 많은 걸 감당했겠구나 싶어서.”

무심하게 흘리듯 내뱉은 말에 정인은 울컥 코끝이 아려 왔다. 자세히 말하지 않았으나 김하준이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됐다. 괜히 민망해 김하준이 준 닭 다리를 입에 욱여넣었다. 그러자 하준이 웃으며 물컵을 앞에다 밀어 준다.

“천천히 먹어. 체하지 말고.”

“응….”

“근데 우리 이따가 어디서 자?”

닭 다리를 뜯던 정인이 멈칫했다. 기분 탓인가 말의 뉘앙스가 어쩐지 묘하다. 

“전에… 거기서 자야 하지 않을까?”

얼버무리며 말했더니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다행이다. 멀리 떨어져서 소리는 안 들리겠네.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닭고기가 턱 걸리는 기분이다. 급하게 물을 마시고 인상을 썼다.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거냐고 따질 새도 없이 엄마가 다가온다. 많이 먹으라고, 차린 게 없어서 미안하다는 말에 김하준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싱긋 웃는다. 

“괜찮습니다, 어머니. 먹을 게 많은데요.”

정인은 어두워진 천장을 바라보며 두 눈을 깜빡였다. 옆에선 도롱도롱 나지막하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할머니가 어느새 곯아떨어졌고, 그 옆에는 김하준이 누워 있다. 결국, 할머니는 하준을 데리고 잔다고 고집을 부렸고 그래서 하준과 정인이 할머니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눕는 모양새가 됐다.

“자?”

하준의 물음에 정인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감았다. 모른 척하고 누워 있으니 김하준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나 그쪽으로 넘어간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심스레 발 내딛는 소리, 그리고 이어 정인의 이불이 젖혀지며 김하준이 안으로 들어온다. 으음, 정인이 자는 척 반대편으로 돌아누우려고 하자 김하준이 어깨를 잡아당겨서 얼굴을 보게 한다.

“안 자는 거 다 알아.”

정인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김하준의 눈동자는 먹이를 노리는 짐승의 것처럼 반짝였다. 정인이 붕대 감긴 왼팔을 들어 확인시켰다.

“나 팔 아파.”

“응. 누가 뭐래.”

“이상한 짓 하지 마.”

“…….”

“왜 말이 없어?”

“스물아홉 먹은 성인한테 이상한 짓이 뭘까, 고민하는 중이었어.”

하준은 자신의 베개를 두고 정인의 베개로 넘어와 얼굴과 몸을 더 가까이 밀착한다. 김하준의 향이 짙어진다. 

“페로몬 내보내지 마.”

하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보였다. 알았어. 그는 입술을 조심스럽게 가져다 댔다. 정인이 가만히 있자 이번엔 좌우로 문지른다. 부드러운 감촉에 김하준의 향이 더해져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번엔 입술에 혀가 닿는 게 느껴진다. 입 벌려 봐.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하다. 정인은 침을 꼴깍 삼키고 하준의 가슴을 밀어냈다.

“할머니 깨.”

하준이 자신의 가슴을 밀어내는 손을 잡더니 아래로 내렸다. 제지하려는 동작인 줄 알았는데 곧 손에 닿는 감각에 정인의 눈 밑이 일그러졌다. 작년에 민아가 밭에서 고구마를 캐다가 엄청 크고 긴 게 나왔다며 쥐여 주던 게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황급히 떼려고 하자 김하준이 정인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다 댄다.

“아니면, 차에 갈래?”

“…….”

“바람 쐬고 오자.”

***

“잠깐, 잠깐만 정인아. 쉬었다 가자. 응?”

뒤따라오던 하준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숙였다. 입고 있던 교복 상의에는 땀이 흠뻑 배어났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사방이 어둡다. 보이는 거라곤 하늘에 뜬 커다란 보름달과 랜턴을 들고 앞장서서 걷는 류정인뿐이었다.

하준이 멈춰 서자 정인이 돌아서며 랜턴을 비춘다. 갑자기 시야로 쏟아진 빛에 하준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정인이 아차 싶었는지 랜턴을 옆으로 치우며 얼른 오라고 손짓을 한다. 힘내. 조금만 더 가면 돼. 

하준은 하는 수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둘이 한밤중 이 산에 온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서 정인은 하준에게 기막힌 장소를 알고 있다며 함께 가자고 했다. 아버지와 어릴 적부터 놀던 곳인데, 너에게 보여 주고 싶다고. 그런데 하필 밤에 가야 한단다. 

그나마 달이 크고 밝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곳곳에 있는 커다란 나무들의 형상은 마치 귀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준은 귀신을 믿는 건 아니나 한밤중에 산속에서 있을 만큼 담력이 좋진 않았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져 주위를 둘러보는데 앞서가던 정인이 걸음을 멈춘다.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탁, 정인은 랜턴의 스위치를 끄고 조심스럽게 풀을 헤치고 걸어갔다. 그때 풀숲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물체가 허공에 날아오른다. 그리고 그 옆으로 하나둘 숫자가 늘어 갔다. 

“어…?”

하준이 놀라 멈춰 선 사이 정인은 풀 위에 앉은 반딧불 하나를 손안에 조심스럽게 담아서 가져왔다.

“손 내밀어 봐.”

하준이 손을 내밀자 그 위에 올려 준다. 등에서 빛을 내던 작은 벌레가 푸드득 날갯짓을 몇 번 하더니 날아올라 다른 곳으로 사라진다. 하준은 무서움도 잊고 그것을 넋을 놓고 쳐다봤다.

“반딧불이 있네?”

“처음 봤지?”

“응.”

“어릴 때는 더 많았는데 지금은 줄었어.”

“신기하다.”

하준은 주위를 둘러봤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자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어둠 속에서 길잡이가 되어 주던 커다란 달도,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의 별도, 무섭기만 하던 나무들도 이젠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정인이 랜턴을 켜고 하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온 김에 계곡도 구경하고 가자.”

하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계곡?

“여기 앞에 계곡 있거든. 물이 엄청 시원해.”

말릴 새도 없이 정인이 불을 켜고 앞장선다. 지나갈 때마다 반딧불이 옆으로 날아오르며 장관을 이루었다. 하준은 숲속 풍경을 구경하면서 정인의 뒤를 쫓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계곡에 도착했다. 

어두울 거라는 걱정과는 달리 수면에 달빛이 반사되어 반짝인다. 마치 옛날 드라마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인다. 정인은 운동화와 양말을 벗더니, 교복 바지를 종아리까지 접어 올렸다. 그러고는 계곡으로 첨벙첨벙 걸어간다. 새카만 물속으로 정인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에 하준은 황급히 정인을 쫓아갔다.

“그만 들어가.”

“발만 담글 거야. 그리고 물이 종아리까지밖에 안 와.”

올여름은 비도 오지 않고 날이 가물어서 그렇다고, 정인은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준은 랜턴으로 계곡을 비추어 봤다. 정인의 말대로 물이 얕음을 알고는 내심 안도했다.

“너도 들어와, 엄청 시원해.”

머뭇거리던 하준은 정인과 마찬가지로 운동화와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은 뒤 물에 발을 담갔다. 그런데 발을 채 넣기도 전에 머리가 삐죽 선다. 시원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 얼음장이다. 여태 산을 오르며 흘렸던 땀이 순식간에 식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진짜 차가워.”

걸을 때마다 첨벙 소리가 난다. 정인이 오라고 손짓하더니 랜턴을 건네준다. 하준이 랜턴을 들고 있는 사이 정인은 물속에 있는 작은 돌을 들췄다. 돌 아래 숨어 있던 가재 한 마리가 빠른 속도로 도망치는 걸 정인이 잡아챘다.

그리고 그것을 하준의 얼굴에 디밀었다. 놀란 하준이 뒤로 주춤 물러서다 미끄러져 그만 넘어졌고 정인은 미안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하준이 복수라도 하듯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덕분에 정인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됐다. 물에 젖은 채 큭큭대고 웃던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빤히 마주 봤다. 말이 없어지고 물 흐르는 소리만 귀를 자극했다.

“키스할래?”

정적을 깨고 정인이 묻자 하준이 침을 꿀꺽 삼켰다.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정인이 다급히 입술을 포갰다. 몸이 점점 기울자 하준이 팔을 뒤로 집어 중심을 잡았다. 다급해진 정인은 하준을 덮치듯 뺨을 붙잡고 몸을 포개 왔다. 졸졸졸, 계곡물 흐르는 소리에 두 사람의 거친 호흡이 뒤섞였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쯤 정인은 입술을 먼저 떼어 내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준아.”

“응?”

“우리 나중에, 여기 또 오자.”

하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인이 웃으며 일어서더니 손을 내민다.

“이리 와. 갈 데가 있어.”

하준이 쳐다만 보자 정인이 내민 손을 흔들며 보챈다. 얼른. 하준은 그 손을 잡고 물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정인은 물 밖으로 나와 하준을 데리고 수풀로 들어갔다. 근처 나무에 앉아 쉬던 새들이 푸드득 날아오르고 달은 어느덧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하준은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드라이브였지, 정말 드라이브를 하자고 할 줄은 몰랐다.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상상했는데. 어이가 없어 혼자 웃고 있는데 옆에서는 류정인이 길을 잘 보고 가라고 잔소리를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얼마 못 가 차를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공사 중이란 글자가 선명하다. 옆에 표지판을 자세히 보니 공사로 인하여 당분간 이곳을 출입할 수 없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것을 본 정인의 얼굴에 실망감이 어리고 반대로 하준의 낯빛은 밝아졌다.

“잘됐다. 집에 가자.”

“아쉽다.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동네를 한 바퀴 돌자고 했지, 구체적인 목적지가 있는 줄은 몰랐다. 하준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딜?”

“산.”

산이란 말에 하준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 시간에? 농담이지?”

“기억나? 예전에 반딧불 봤던 그 계곡 말이야.”

기억을 더듬던 하준이 아, 하는 표정을 짓는다. 살면서 가끔 그곳을 떠올릴 때가 있었다. 그날 그 숲의 냄새, 물소리, 반짝이던 작은 반딧불. 물에 젖은 얼굴로 환하게 웃던 류정인, 그리고….

“우리가 키스했던 거기?”

“응….”

“그럼 여기서 걸어서 올라가 볼까? 차 뒤에 캠핑용 돗자리도 있거든.”

캠핑용 돗자리란 말에 정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돗자리는 왜? 하준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진다. 

“바닥은 딱딱하니까.”

“가서 도시락 까먹을 것도 아닌데, 돗자리가 왜 필요해?”

“너 등 아플 수도 있잖아.”

수수께끼 같은 대화가 이어진 끝에 정인은 김하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렴풋하게 짐작했다. 열일곱 살에 그런 건 겁도 없고 철이 없어서였지만 지금 이 나이에 거기 가서 홀딱 벗고 그 짓을 했다간….

“너는 애가 왜 그렇게 썩었냐?”

그 말에 하준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썩어? 내가?”

정인은 푸념하듯 투덜댔다.

“예전엔 존나 순수했는데. 손만 만져도 부끄러워서 도망가고….”

그 말에 하준이 반박했다.

“이 나이에 손 만졌다고 부끄러워서 도망가면 그건 병신이야.”

“내가 야한 말만 해도 귀가 빨개졌는데.”

“지금은 다른 데가 빨개져. 볼래?”

“꺼져.”

아옹다옹하던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고 한 곳을 바라봤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추는 풀숲에서 무언가 움직인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풀숲에서 커다란 고라니가 튀어나오더니 이쪽을 본다. 그리고 그 뒤로 아주 작은 크기의 새끼 고라니가 모습을 나타낸다. 앙증맞은 크기에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웃음이 터졌다.

“귀엽다. 완전 새끼네.”

못 박힌 듯 서 있던 어미가 천천히 우측으로 움직이자 새끼도 그 뒤를 쫓아간다. 하준이 고라니가 가는 방향을 따라 몸을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정인이 앉아 있는 자리까지 넘어왔다. 

“뭐 해?”

“고라니 보고 있어.”

“가만히 있어도 보이잖아.”

“이게 더 잘 보여서 그래.”

정인에게 완전히 기대다시피 하더니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가까이 마주 본다. 정인이 눈초리를 가늘게 늘이며 슬그머니 머리를 뒤로 움직이려 하자 잽싸게 뒤통수를 움켜쥐고 입술을 가져다 댄다. 

“틈만 나면….”

입술이 완전히 먹혀 버려 말을 끝맺지 못하였다. 하준이 운전석에서 보조석으로 몸을 구기듯 넘어왔다. 키스가 점점 거칠어지고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젖혀지며 정인의 몸도 같이 넘어간다. 정인이 입술을 떼면서 물었다.

“왜 눕혀?”

“너 편하라고.”

“웃기,”

이번에도 입술을 틀어막더니 거칠게 키스한다. 그렇게 격정적인 키스가 한참 이어지다 입술이 떨어졌다. 정인은 숨을 몰아쉬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선루프를 통해 본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그걸 보자 십여 년 전 그 계곡에서의 기억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잠시 옛 생각에 젖어 있는데 하준이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기억나? 그날 계곡에서 말이야.”

하준은 정인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네가, 나를 이렇게, 만졌잖아.”

손이 점점 위로 올라와 셔츠 안으로 들어왔고 피부에 직접 닿는다. 오랜만의 자극으로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다. 

“이 정도는 허락할 거지?”

대답이 없자 정인의 입술을 혀로 핥으며 어르고 달랜다. 너를 만질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손길이 훑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참을 수 없는 감각에 정인은 몸을 움츠리고 눈을 꼭 감았다.

“응? 허락해 줘.”

정인아. 류정인. 목소리에 애틋함이 묻어 있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김하준의 짙은 눈동자가 저를 빤히 응시하고 있다. 시선을 맞춘 채로 정인이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김하준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리고 그의 손은 기다렸다는 듯 더 은밀한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

계속해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와 소음에 정인은 몸을 뒤척이다 눈을 떴다. 밖이 훤하다. 새벽에 차에서 잠깐 눈을 붙였는데 어느덧 아침이었다.

덮고 있던 담요를 치우고 일어나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공사 현장에 작업복을 입은 인부들이 오가고 굴착기까지 등장했다. 옆을 보니 김하준은 고요히 잠든 상태다. 정인은 하준의 어깨를 잡아 흔들어 깨웠다. 하준아. 김하준. 

으음. 꽉 닫혀 있던 눈꺼풀이 올라가고 갈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정인을 보며 싱긋 웃었다.

“잘 잤어?”

자다 깼는데도 얼굴에 부스스함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것을 감탄할 새도 없이 누군가 똑똑, 창문을 두드렸다. 작업복을 입은 남자였는데 짙은 선팅으로 안이 보이지 않는지 기웃대며 확인 중이다. 정인이 창문을 내리려고 하자 하준이 손을 붙잡는다. 그의 시선이 정인의 얼굴이 아닌 목에 가서 고정됐다.

“내가 내릴게.”

곤란하게 웃는 김하준을 보니 어쩐지 불안하다. 방금 표정은 뭐지? 나 자다가 침 흘렸나? 입가를 닦던 정인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 정도면 멀쩡… 어? 시선이 입술을 따라 목과 그 아래로 내려간다. 

목이 울긋불긋 난리가 났다. 당황하여 셔츠를 아래로 잡아당기자 더 많은 자국이 선명하다.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쳐다보고 있는데 운전석에 김하준이 탄다.

“차가 계속 서 있으니 걱정됐나 봐.”

거울을 보던 정인이 하준을 홱 노려봤다. 

“야 이거 뭐야!”

하준이 일부러 눈을 가느다랗게 늘였다.

“뭔데? 잘 안 보여.”

정인이 셔츠를 잡아당기며 디밀었다.

“이게 안 보여? 이게!”

류정인이 보란 듯 셔츠를 자꾸 내리자 하준의 눈초리가 음험해졌다. 사람들만 아니었으면 조금 더 물고 빨고 할 텐데.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했다. 남자하고는 경험이 없는 류정인이기에 진도를 함부로 빼는 게 어려웠다. 그래서 나름 배려한다고 한 건데. 어젯밤 역시 맛 좋은 과일을 눈앞에 두고 냄새만 맡다가 돌아선 기분이다.

“이래서 집에 어떻게 가?”

“기뻐하실걸. 우린 부부잖아.”

노려보는 정인을 외면한 채 하준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집으로 가는 동안 정인은 목을 가릴 만한 게 있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겨울이었으면 차라리 나았을걸. 글로브박스를 연 정인은 그곳에서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약병 하나를 발견했다. 전에 먹던 신경안정제 같은 걸까. 표정이 심각해지자 하준이 슥 쳐다본다.

“그건 넣어 둬.”

“이건…뭐야?”

“러트 억제제.”

아, 정인은 하준이 러트가 왔던 당시를 떠올리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약병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뒤 생각이 많아졌다. 함께 지내는 동안 김하준에게 러트가 오면 어쩌지. 히트 사이클만큼이나 고통스럽고 욕망을 참기 힘들다고 하던데. 그때마다 김하준은 약을 먹어야 하나. 자신이 오메가였다면 어떻게든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러트는 자주 와?”

“불규칙해. 그래서 약을 꼭 챙겨 다녀.”

“많이… 힘들어?”

“약이 잘 나와서 괜찮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러트 시작하면 곁에는 오지 마.”

정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저를 위해 하는 말임을 아는데도 가슴이 욱신거리고 시리다. 여전히 내가 오메가였다면, 이란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딱! 하준이 멍하니 있던 정인의 눈앞에 손가락을 튕겼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던 복잡한 생각들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김하준이 피식 웃는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내가 추한 꼴 보이는 게 싫어서 그래.”

“추하지 않았어….”

하준이 쳐다보며 웃었다.

“그럼? 조금 섹시했어?”

정인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하준이 근처에 숙박업소 같은 건 없느냐고 묻는다. 그 말뜻을 이해하고 정인은 그의 팔을 툭 치고 운전이나 똑바로 하라고 쏘아붙였다. 그렇게 둘이 아옹다옹하는 사이에 어느덧 차는 집 근처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런데 대문 앞에 민아가 서성대고 있다. 평소대로라면 그녀는 자야 할 시간이다. 의아함도 잠시 정인은 셔츠를 최대한 끌어 올리고 목을 움츠렸다. 걸렸다간 류민아한테 10년은 놀림받을 게 분명하다. 게다가 아직 미성년자인 동생한테 보이기에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차가 멈추고 내리기도 전에 민아가 호다닥 뛰어왔다. 

“오빠! 어디 갔었어!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안절부절못하며 다그치는 민아의 표정을 보니 어쩐지 불길함이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온다. 민아가 저러면 꼭 집에 무슨 일이 터졌다는 뜻이다. 왜? 라고 물으니 민아가 하준을 한 번 쳐다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정인을 끌고 간다.

“큰일 났어.”

“큰일?”

민아가 휴대 전화를 꺼내 화면을 켰다. 개인 방송 채널이었는데, 구독자 수가 꽤 많았다. 그러더니 영상을 정인에게 보여 준다.

[어제 새벽이죠. 김 모 의원 며느리 A씨가 베타라는 이야기가 한 사이트에 올라왔는데요. 그 글은 바로 삭제됐지만, 지금 온라인상에서는 화제가 되어 급속도로 퍼지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이 뭐였죠?]

[그러니까 이 A라는 분이 오메가였다가 베타가 된 아주 희귀한 경우라는 겁니다. 서류상으로도 오메가라고 되어 있고요. 글 쓴 사람 말에 의하면 김 모 의원과 아들도 이 사실을 알았으나, 선거를 위해 이용했다. 이거죠.]

손이 덜덜 떨리고 숨이 턱 막힌다. 머릿속이 하얘져 나머지 부분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뒤늦게 멀리 떨어져 있던 하준이 휴대 전화를 낚아채 간다. 영상을 보는 그의 표정 역시 무섭게 굳었다.

***

[만약 사실이라면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죠. 한 나라의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사기를 친 것이지 않습니까. 김 의원 측에서 이 일에 대해 어떤 입장 발표를 할지가 상당히 주목됩니다.]

태블릿을 쥔 김 회장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삼류 인터넷 방송에서 영양가 없이 떠드는 말이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것을 집어 던져 박살 냈다. 앞에 서 있는 윤 비서는 죄인인 양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어떻게든 수습하겠습니다.”

“언론은?”

“아직은 조용합니다.”

“이 일에 관해 한 글자도 새어 나가지 못하게 막아. 그리고 유포한 놈 무조건 찾아내.”

“예, 알겠습니다.”

김 회장은 담배를 빼 물고 불을 붙였다. 연기를 내뿜은 그는 피곤한 듯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류정인이 유산됐다는 기사를 내보낼까 말까 고민했으나 결국은 김하준의 강경한 태도에 한 발 물러섰다. 그런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일이 터진 것이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든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 머리를 굴리는데 서재 문이 벌컥 열리면서 주혜련이 나타났다. 벌겋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보니 왜 급하게 올라왔는지 안 봐도 알겠다.

“여보. 이게 무슨 일이에요? 내 친구 진숙이 알죠? 진숙이가 이런 걸 보내 줬는데, 기가 막혀서 원….”

그녀는 휴대전화를 김 회장에게 디밀었다. 조금 전 김 회장이 보던 그 인터넷 방송이었다. 김 회장은 그녀의 손을 물리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신경 쓸 거 없어.”

“당신도 봤어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어떤 망할 놈인지 몰라도 잡아서 혼내야죠. 아무리 말 지어낼 게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멀쩡한 오메가를 베타라고 우길 수가 있어요?”

김 회장은 담배를 쥔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주혜련과 자신의 모친이 반대할까 봐 정인이 오메가라고 속였고 이혼할 때까지도 모르게 할 작정이었다. 

김 회장은 담배를 비벼 끄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내려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준이한테 연락해 봤어요? 아니다, 내가 할게요.”

주혜련이 전화를 걸려고 하자 김 회장이 말리고 나섰다. 그런데도 주혜련은 전화를 놓지 않았다. 김 회장이 윤 비서를 쳐다봤다. 윤 비서가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사모님에게 말해야 하지 않겠냐는 뜻이다.

“걔, 베타 맞아.”

주혜련이 멈칫하고 인상을 찡그리며 남편을 돌아봤다.

“뭐라고요?”

“류정인 베타야. 그러니 그렇게 난리 칠 것 없어.”

주혜련의 입이 벌어진다. 이윽고 그녀는 잘못 들었나 싶어 몇 번이나 김 회장에게 확인했다. 윤 비서와 남편의 얼굴을 번갈아 보니 농담이 아닌 모양이다. 그녀는 허탈한 표정으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에….”

“어머님 모르게 해. 당신도 괜히 나서서 일 크게 벌이지 말고.”

주혜련이 기막힌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봤다.

“당신 어떻게…!”

김 회장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말했으면 결혼을 반대했을 테지.”

왜 류정인을 고집했는지, 며느리가 아닌 손님처럼 대했는지 그제야 이해가 됐다. 애초부터 이용하려는 목적이었던 거다.

“하준이도 알아요?”

“알아.”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 묻는 거예요!”

김 회장이 침묵하자 주혜련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김하준은 알파다. 김하준이 베타를 만나는 건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아들을 남편이 선거에 이용해 먹으려고 베타와 결혼을 시켰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치솟는 심정이다. 그녀는 이를 꽉 물고 김 회장을 노려봤다.

“당신 제정신 아니에요. 어떻게 이런 일을 꾸며요? 아니, 적어도 나한테는 말을 했어야죠.”

“어차피 우리 집에서 나갈 앤데 뭐 하러. 당신도 마음에 차지 않아 했잖아.”

주혜련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 역시 이 결혼이 오래가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아니 그러길 바랐다. 그런데 아들인 하준의 태도가 변하고 시어머니인 이순옥도 은근 손주며느리를 마음에 들어 하니 최근엔 저도 류정인이 마냥 밉게만 보이진 않았었다.

“대체 어쩌려고….”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주혜련을 뒤로한 채 김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가 쪽으로 걸어간 그는 하늘을 보며 입을 고집스럽게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닐지 모른다. 류정인은 똑똑하고 셈이 빠르다. 그리고 김하준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저 때문에 죽으려고 했다는 걸 알면 죄책감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 그걸 이용하면….

순간 초조해 보이던 김 회장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

서울에 도착한 뒤 하준은 바로 출근했고 집에는 서 집사와 새끼 고양이, 그리고 정인만 남게 되었다. 하준이 없는 집에서 정인은 자신에 관한 영상들을 찾아 확인했다. 사실과 다른 댓글들이 달리고 온갖 추측성 소문이 난무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후가 되자 영상들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예상치도 못한 유명 배우의 마약 스캔들이 터졌다. 평소 행실이 바르고 이미지가 좋던 배우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굉장히 충격을 받았고 언론은 종일 떠들썩했다. 

이슈를 이슈로 덮는다는 게 이런 뜻일까. 사람들의 관심은 삽시간에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갑자기 터진 배우의 스캔들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뉴스를 보며 거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 발 아래에서 검은색 고양이가 빽빽 소리를 내며 울어 댄다. 정인이 손을 뻗었다. 녀석은 아직 채 여물지도 않은 이빨로 정인의 손가락을 꾹, 꾹 깨문다. 

그것도 이빨이라고 피부가 따끔거린다. 자꾸만 손을 물기에 정인은 고양이용품점에서 산 깃털이 달린 작은 막대를 녀석의 앞에 흔들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앞발로 잡으려고 바둥대는 모습이 앙증맞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더니 서 집사가 차를 들고 오며 한마디 한다.

“사람을 얼마나 잘 따르는지 몰라요.”

그녀가 가지고 나온 차를 정인의 앞에 놓아 준다. 머그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드세요. 심신을 안정시키는 데 좋은 차예요.”

서 집사도 영상에 대해 알고 있을까. 아니, 처음부터 정인이 베타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괜히 여러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 같아 미안해진다. 당시에는 보육원을 지킬 생각밖에 없어서 나중에 어떤 결과를 불러오게 될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찻잔을 조심스럽게 드는데 기다렸다는 듯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다. 혹시 하준인가 싶어 받았는데 의외의 인물이었다.

[안녕하세요, 스타 뉴스의 김영민 기잡니다. 류정인 씨 맞으시죠?]

하마터면 들고 있던 컵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 당황하며 아무 대답도 못 하는데 서 집사가 전화를 자연스럽게 거두어 간다. 상대방의 목소리를 확인한 그녀가 웃으면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잘못 거셨습니다.”

전화를 끊은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고양이와 놀아 줬다.

“이름은 아직 없죠? 뭐로 짓는 게 나을까요? 검은색이니까, 까미? 너무 흔한가요?”

정인은 찻잔을 든 채로 멍하니 답을 못 했다. 머릿속에선 조금 전 기자의 목소리가 떠나질 않는다. 어떻게 번호를 알았을까. 그런 정인을 보며 서 집사가 따뜻한 미소를 보냈다.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사람들 관심이란 게 한순간이에요. 다른 흥밋거리 생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변하기 마련이죠.”

정인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서 집사님은… 알고 계셨죠? 저 베타인 거.”

“그건 모르겠고, 대표님이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알아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예전이란 말에 정인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예전이요?”

“대표님 요양하러 내려가 있을 때 회장님하고 사모님 대신 제가 같이 있었거든요.”

아…. 정인은 뒤늦게 서 집사의 존재를 떠올렸다. 하준이 이모하고 같이 지낸다고 했는데, 그게 서 집사였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대표님이 직접 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전 다 알고 있었어요.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감추기엔 어렸잖아요. 그리고 서울로 와서 힘들어했을 때도, 그게 놓지 못한 인연 때문임을 알았죠.”

김하준에게 상처를 준 과거의 제 모습이 떠올라 서 집사를 마주 보기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하준이 얼마나 많이 방황하고 힘들어했는지는 끝까지 함구했다. 대신에 정인의 손을 잡으며 따스한 눈빛을 보내어 왔다.

“그러니 이번엔….”

“…….”

“대표님 손 놓지 말아요…. 어렵게 만났으니까, 잘 지켜 냈으면 좋겠어요.”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김하준을 지킬 수 있을까. 그럴 자격이 있을까. 힘이 있을까. 모르겠다. 만약 이대로 계속 간다면 김 회장도 김 회장이지만 김하준 역시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기는 어렵다. 

문득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김하준에게 다시 상처를 주는 방법이겠지만 지금은 그것 외엔 뾰족한 수가 없다고 느껴진다.

저녁이 되어도 김하준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사이 정인은 몇 번이나 전화를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며 불안해했다. 혹시 또 김 회장에게 가서 협박한 건 아닐까. 부자지간에 심하게 다툰 건 아닐까. 아니면 기자들에게 붙들려 시달리는 건 아닐까. 

결국, 보다 못한 서 집사가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들어가 보니 입욕제를 풀었는지 욕조 위로 거품이 잔뜩 솟아 마치 구름을 욱여넣은 것처럼 보인다. 서 집사가 나가고 난 뒤 우두커니 서 있던 정인은 옷을 모두 탈의하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향긋한 냄새가 풍겨 온다. 김하준이 쓰는 것과 같은 향이다. 다친 팔을 밖으로 빼내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생각이 차츰 정리된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있는데 메시지가 도착했다. 확인하니 이한 형사였다.

[정인 씨 바쁠 텐데 미안해요. 부탁이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시간 나실 때 전화 주세요.]

그의 부탁이라면 이해수와 연관된 일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해수에 관한 기사나 영상은 이제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서 집사 말대로 이 사건도 며칠이 지나면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날지도 모른다. 부디 그랬으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묵직한 발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며칠 전의 사고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몸이 긴장했다.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입구를 노려보는데 김하준이 나타난다. 정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어?”

하준이 들어오며 정인을 훑고는 물었다. 정인은 그제야 자신이 모두 벗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손짓을 했다.

“멈춰. 더 들어오지 마.”

하준이 아랑곳하지 않고 들어와서는 정인의 다친 팔이 물에 젖었는지를 확인하고 욕조에 걸터앉는다. 그의 시선이 풍성한 거품에 닿았다가 위로 올라와 정인의 얼굴을 응시했다.

“기자 전화 왔었다며.”

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받았어.”

“잘했네. 며칠 그러고 나면 또 잠잠해질 거야.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

서 집사와 똑같은 말을 한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불안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결정이 바보 같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 피해를 김하준이 고스란히 받게 될까 봐 그게 무섭다. 정인은 눈으로 김하준의 상태를 점검했다. 혹여 어디 가서 몸싸움이라도 한 건 아닐까 싶어서.

“회사 갔다 온 거야?”

“응, 일 끝내고 본가에 들렀다가 오는 길이야.”

본가에 갔다는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데 하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다.

“아버지 짓은 아니래. 다행이지?”

정인은 대답할 수 없었다. 하준에겐 미안하지만, 자신을 불러 유산되었다고 거짓말을 하라고 부추기던 걸 생각하면, 그가 한 짓이 아예 아니라고 장담하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엄마가 모두 아셨어. 덕분에 아버지보다 엄마한테 시달렸지.”

정인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자 하준이 그러지 말라며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댄다. 손에서 미약하게 담배 향이 난다. 스트레스받을 때만 담배를 피운다던 김하준 말이 스치고 지나간다. 

“할머니는?”

“아직 모르셔.”

그럼 이제 어떻게 해? 라는 말이 목에 턱 걸린다. 그동안 하준은 거품을 손으로 걷어 그것을 정인의 머리 위에 올려놨다. 새카만 머리 위에 하얀 구름처럼 올라간 거품을 보며 그는 아이처럼 짓궂게 웃었다. 

“그러고 있으니까 꼭 산 할아버지 같다.”

정인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노래 몰라? 산 할아버지 구름 모자 썼네? 어쩌고 하는.”

“…….”

“진짜 모르나 보네. 가만있어 봐 내가 들려줄게.”

휴대전화를 꺼내기에 정인이 그 손을 잡았다. 

“하준아.”

하준의 눈빛은 유독 지쳐 보인다. 별일 없었다고, 아무렇지 않았다고 말했으나 그가 종일 얼마나 시달리고 고군분투했을지는 안 봐도 알겠다. 정인은 입술을 달싹였다. 말보다 울음이 먼저 쏟아질 것 같아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준아….”

이름을 부를수록 눈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금세 고인다. 정인은 차마 말을 내뱉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코끝에 거품이 닿는다. 감정을 추스르느라 숨을 몰아쉬는데 하준의 커다란 손이 뺨에 닿고 얼굴을 들게 만든다.

곧 입술이 다가온다. 손끝에서 묻어 있던 담배 향이 입술에서도 난다. 입으로 들어온 혀가 부드럽게 움직이며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갔다. 키스가 격해지니 고개가 점점 뒤로 젖혀지고 숨 쉬기가 힘들어진다. 겨우 떼어 내자 하준이 붉게 달아오른 정인의 입술을 엄지로 문지르며 웃었다.

“부탁 같은 거 하지 마. 못 들어줘.”

“…….”

“이혼할 마음도 없고, 놓아줄 마음도 없어.”

“그렇지만….”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손이 물속에 들어와 몸을 더듬는다. 정인의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손을 치우려고 하니 또다시 입술을 집어삼킨다. 그리고 괘씸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며 떨어지더니 나직하게 속삭인다. 

이번에도 도망가면 진짜 콱 죽어 버릴 거라고. 귀신이 돼서 네 옆에서 평생 쫓아다닐 테니까 그런 줄 알라고. 

웃음이 묻었으나 분명한 협박조였다.

노트에 글자를 적던 정인의 얼굴에 고심의 흔적이 역력했다. 고양이의 이름 짓는 게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다니. 얼굴을 자세히 보면 무언가 떠오르지 않을까. 하준과 놀고 있는 녀석을 살피는데 앞발을 들고 버둥거리던 고양이가 뒤로 발라당 넘어가는 개인기를 선보인다. 정인은 고개를 저으며 마지막 이름마저 볼펜으로 슥슥 그어 버렸다.

“도저히 생각이 안 떠올라.”

“부르기 쉬운 거로 해. 아니면 너하고 내 이름 한 글자씩 따서 지을까?”

김하준과 류정인. 머릿속에서 글자를 조합하였지만 떠오르는 글자라고는 하류, 하인, 그런 것들뿐이다. 평소 책이라도 많이 읽어 둘걸. 후회하며 씁쓸하게 고양이를 쳐다보다가 펜을 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까망이는…너무 흔하지? 아니면 초코?”

“둘 다 괜찮아.”

김하준은 아까부터 다 괜찮단다. 그럼 김만호라고 짓겠다고 도발을 하자 그러라고 맞장구를 친다.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고양이한테 선뜻 내주다니. 김 회장이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도 하기 싫다.

자신의 얄팍한 상상력을 탓하며 자괴감을 느끼고 있는데 김하준이 오더니 옆에 앉아 정인이 적어 둔 이름을 눈으로 훑는다. 까미, 까망이, 탄이, 콩이, 초코, 기타 등등 검은색을 떠올리기 쉬운 단어들 사이에 테오, 레오, 유진, 같은 것들이 적혀 있다. 

그중 몇은 예전에 정인이 아이를 낳게 되면 지어 주겠노라고 언급한 이름이었다. 정인이 같은 촌스러운 이름은 절대 짓지 않겠다고 하면서. 하준은 손을 뻗어 적힌 이름 중 레오를 가리켰다. 이거 괜찮은데. 부르기도 쉽고. 

“그래? 너무 사람 이름 같지 않을까?”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키우지 뭐.”

그 말에 정인은 종이에 커다랗게 레오라고 적은 뒤 고양이의 얼굴 옆에다 가져다 댔다. 고양이의 새카만 눈동자가 정인을 향하더니 곧 마음에 든다는 듯 냐옹. 소리를 낸다. 정인이 웃으며 하준을 돌아봤다.

“마음에 드나 봐.”

“응. 방금 좋다고 했어.”

하준은 고양이를 안아 무릎 위에 올려 뒀다. 녀석이 파고들면서 자꾸 소리를 낸다. 아무래도 배가 고픈 모양이다. 하준은 고양이를 정인에게 넘겨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밥 가져올게.

하준이 없는 동안 정인은 휴대전화를 꺼내었다. 그러고 나서 김하준과 자신에 관한 것들을 검색했다. 아침에 본 그 영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알람이 울린다.

타투 작업을 올려놓는 홍보용 SNS였는데 새로운 게시물이 올라왔다고 뜬 것이다. 무심코 들어가서 보던 정인은 사진을 아래로 내리다 멈칫했다. 게시물 아래 누군가 글을 달았는데 이름이 어딘가 낯이 익다. 

양욱환…. 양욱환…? 

이름을 중얼대던 정인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즐거운 작업이었습니다. 다음에도 잘 부탁드려요. 다혜 씨.]

재빨리 남자의 SNS로 넘어가서 확인하니 조금 전 다혜가 올렸던 사진과 똑같은 사진이 올라와 있고, 그 아래 남자가 가게에서 다혜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도 있다. 놀랍게도 업로드 날짜가 한참 전이다.

“이 사람이 어째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남자의 사진을 하나씩 훑어봤다. 얼굴을 보니 자신이 알던 그 남자가 맞다. 이해수의 전 남자친구. 며칠 전 파티에서 마주쳤던 그 남자. 그날 양욱환은 자신에게 결혼 전 무슨 일을 하였는지, 가게는 어디 있는지, 주로 어떤 손님이 오는지 궁금해했었다. 

그런데 이미 가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니…. 이 음흉스러운 새끼.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서둘러 다혜에게 연락하는데 받질 않는다. 휴대전화를 든 채로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하준이 고양이의 밥을 챙겨서 가지고 들어왔다.

“왜 그래?”

“잠깐만.”

정인은 하준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다혜에게 여러 차례 연락을 시도했다. 한번, 두 번, 세 번, 아무리 걸어도 받질 않더니 한참 지나서야 다혜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조금은 나른한 목소리에 정인은 안도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다혜, 너 어디야.”

[집이지 어디야. 막 잠들려고 하는데 자꾸 전화가 와서 깼어. 무슨 일 있어?]

정인은 뒤를 돌아봤다. 하준이 이쪽을 보며 의아해하는 표정이다. 정인은 한숨을 내쉬며 아무 일도 아니라고, 일단 내일 가게로 갈 테니 만나서 이야기하자며 통화를 마쳤다. 자리로 와 보니 고양이는 그릇에 얼굴을 파묻고 밥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슨 일 생겼어?”

걱정스럽게 묻는 하준을 보며 정인은 고민했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양욱환은 이해수를 죽인 범인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사고들도 왠지 찜찜했다.

정인은 하준에게 자신이 확인한 것을 보여 주며 짤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사진을 보던 하준의 눈초리가 서늘하게 변한다.

“네가 봐도 이상하지?”

화면을 노려보던 하준은 휴대전화를 휙 낚아채더니 그것을 그대로 소파 뒤로 홱 던졌다. 왜 그러냐고 물을 새도 없었다. 놀란 정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동시에 휴대전화가 대리석 바닥에 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후다닥 그곳으로 뛰어간 정인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화면이 켜지질 않는다. 전원이 완전히 나간 화면은 레오의 털만큼이나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정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씩씩거리면서 하준에게로 걸어갔다.

“김하준! 너 이 새끼!”

그러자 하준이 고양이의 귀를 살포시 막으며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레오. 방금 엄마가 아빠한테 이 새끼라고 한 거 들었지? 못됐다. 그치?”

정인은 휴대전화를 김하준의 얼굴에 디밀었다.

“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하준이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댔다.

“쉿. 애 놀래.”

“돌았어?”

“잘됐잖아. 이참에 번호 바꿔. 너희 가족 말고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마.”

정인이 인상을 쓰자 하준이 입만 웃는다. 

“괜히 그놈 잡겠다고 사고 치지 말고, 집에 얌전히 있어. 이한 형사인지 뭔지 그놈도 만나지 말고.”

정인이 기막힌 표정으로 하준을 바라봤다.

“그러다 다혜가 위험해지면?”

“거기엔 내가 사람 따로 보낼게.”

“아니. 그래도 내가 가 봐야지. 내 친군데.”

“걱정하지 마. 너보다 존나 튼튼하고 믿을 만한 사람으로 보낼게. 됐지?”

하준의 말에 파르르 하던 정인의 표정이 차츰 누그러졌다. 사람을 보내 준다니 그럼 더할 나위 없이 고맙긴 한데. 정인은 부서진 자신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다혜에게 그 인간과 더는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런데 갑자기 김하준이 고양이를 눈앞에다 디민다.

“밥 다 먹었다. 레오는 엄마 붙들고 있어. 도망 못 가게. 아빠는 씻고 나올게.”

아무래도 김하준은 엄마 아빠 놀이에 진심인 듯하였다. 그러더니 말릴 새도 없이 옷을 탈의한다. 붓으로 그린 것처럼 갈라진 몸의 근육들을 보며 정인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는데 김하준이 피식 웃는다. 정인은 속내를 들킨 기분에 표정을 바꿔 소리쳤다.

“안에서 벗어도 되잖아!”

“내 집이야.”

결국, 그는 속옷 하나까지 눈앞에서 다 벗은 뒤에야 욕실로 들어갔다. 정인은 허물처럼 벗겨진 옷과 김하준이 사라진 욕실 입구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

“회사 갔다가 운동하고 집에 가고, 아, 며칠 전에 타투 한다고 이태원에 들른 것 빼고는 집하고 회사가 전부입니다.”

앞에 앉은 남자는 검은색 벙거지와 검은색 항공 점퍼를 입고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온통 새카만 옷차림의 남자를 보며 하준은 집에 있는 고양이를 떠올렸다. 하준은 남자에게 건네받은 사진을 처음부터 하나씩 넘겨 봤다. 

정장을 차려입은 양욱환 옆에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비서가 하나 있다. 이우진이라고 했나. 안경을 낀 깡마른 남자는 매섭게 생겼고 항상 주위를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계속 사람 붙여 주세요. 옆에 비서란 남자에 대해서 좀 더 알아봐 주시고요.”

“예, 걱정하지 마세요. 소문 안 나게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대화를 모두 마칠 때쯤 노크와 함께 두영이 김민재와 함께 나타났다. 남자가 인사를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지나쳐 나갔다. 두영의 어깨까지밖에 오지 않는 작은 키였지만 남자가 뿜어내는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었다. 

두영은 자리에 앉으며 남자가 사라진 입구를 한 번 흘깃 쳐다봤다.

“저 사람 누군데 매일 와요?”

“말 부풀리지 마. 딱 두 번 왔어.”

뒤따라온 민재가 인상을 찡그렸다.

“방금 나간 남자 눈 봤어? 한쪽이 없다?”

그 말에 두영이 헉하는 표정으로 하준을 쳐다봤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이시는 거냐고 묻는데 하준이 대꾸하는 대신 민재를 본다.

“어쩐 일이야?”

“어제 그 난리가 났는데, 연락도 안 되고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하준이 피식 웃으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걱정이 아니라 내기 걸었겠지. 김하준 파트너가 베타인가 아닌가.”

민재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왜 그런 놈 취급 해?”

“그런 놈 맞잖아. 얼마 걸었어?”

곤란한 듯 뺨을 문지르던 김민재가 피식 웃는다. 아무튼 눈치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류정인이 베타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제법 확실한 증거까지 나돌고 있었다. 하준 역시 그걸 모르는 게 아니었기에 오늘 민재의 방문이 무얼 의미하는지 대충 짐작은 됐다.

“하여튼 친구라는 새끼들이. 의리라고는.”

하준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김민재가 슬그머니 떠본다.

“나한테만 말해 봐. 비밀 지킬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준이 가까이 오라며 손짓을 했다. 은근히 기대감에 들뜬 김민재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자 하준이 그의 귓가에 대고 목소리를 낮췄다.

“주말에 파티할래?”

예상치 못한 제안에 김민재가 눈 밑을 일그러트렸다. 김하준이 은밀하게 말하는 파티가 무슨 뜻인 줄 알기에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결혼 생활은 제법 충실히 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그럼 그렇지. 입가에 미소를 지으니 하준이 뒷말을 잇는다.

“손님은 많이 필요 없어. 아, 걔도 불러.”

“걔? 누구?”

“네 친구 있잖아. 양욱환이라고 했나.”

김민재가 한쪽 눈썹을 치키며 되물었다. 양욱환? 

의아하게 쳐다보자 하준이 입가에 미소를 만든다. 눈빛은 흉흉하게 빛내면서. 

“이참에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 줄 선물도 있고.”

***

“넌 어른 보고 인사할 줄 모르니.”

김하준이 출근하고 몇 시간 뒤 뜻밖의 손님이 등장했다. 당당하게 나타난 김하준 할머니를 보며 정인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김하준 어머니는 모든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할머니는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고 들었다.

황급히 인사를 하고 나니 서 집사가 안쪽에서 나온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서 집사는 표정이 평온했다. 

“여사님.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은. 내 손주 집에 오는데, 무슨 연락을 해.”

할머니의 뒤를 듬직한 비서가 따랐다. 비서는 양손에 황금색 보자기로 싼 무언가를 들고 있었고, 그것을 거실 한쪽에 내려놓았다. 무슨 물건인지 궁금해하기도 전에 할머니가 답을 알려 주었다.

“최고급 야생 삼이야. 애들 챙겨 줘.”

“네, 그럴게요. 차는 뭘로 드시겠어요?”

“차는 됐고. 너. 가서 옷 갈아입고 나와라.”

서 집사와 대화를 나누던 할머니의 시선이 정인에게 날아온다. 허리를 세우고 꼿꼿하게 앉아 있던 정인이 움찔했다. 제발 이대로 가시기를 속으로 간절히 바랐으나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 집사를 쳐다보며 도와달라고 눈으로 신호를 보내자 그녀가 조금 더 앞으로 나선다.

“여사님. 정인 씨가 아직 몸이 다 낫질 않아서요. 외출은 힘들 것 같아요.”

그 말을 뒷받침하듯 정인은 할머니가 잘 볼 수 있도록 붕대 감긴 팔을 앞으로 내보이며 최대한 가련하고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자비란 없었다.

“다리로 걷지 팔로 걸어? 차 타고 움직일 거니까 걱정하지 마.”

기어코 끌고 가려는 심산인가 보다. 서 집사도 더는 말리지 못했고, 정인은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할머니가 에구머니나! 하고 소리를 지른다. 놀란 정인이 돌아보자 그녀가 다리를 바닥에서 띄운 채 밑을 보고 있다. 그 아래 레오가 있었다.

“이게 뭐니?”

정인은 얼른 가서 고양이를 안으려고 했다. 혹여라도 놀란 할머니가 고양이를 발로 차거나 던져 버리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정인의 손이 닿기도 전에 할머니가 먼저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잔뜩 찌푸려져 있던 그녀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입가에 미소가 생겨난다.

“세상에. 너 누구니. 어디서 왔어.”

대답하듯 냥- 소리를 내자 할머니가 정인을 돌아본다.

“키우는 거니?”

“네….”

예상외로 그녀는 고양이를 무척이나 예뻐했다. 이름이 뭔지, 왜 혼자 남게 됐는지 사연을 듣더니 딱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며 쓰다듬어 줬다. 

그 모습을 보며 정인은 서 집사를 한 번 바라봤다. 지금이라도 이야기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바람과는 달리 서 집사는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해도 김하준이 직접 하는 게 나은 방법임을 그녀도 알았을 것이다. 

마지못해 안으로 들어간 정인은 옷을 갈아입고 나와 할머니와 함께 차로 이동했다. 전에도 그러더니 그녀는 차를 타자마자 졸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나중엔 머리가 정인의 어깨에 닿는다. 정인은 할머니가 조금 더 편히 잠들 수 있도록 어깨를 낮추었다. 

도심을 벗어난 차는 어느새 한적한 외곽으로 빠졌는데, 갈수록 사람들의 발길도 뜸했고 오가는 차도 별로 없었다. 목적지 인근에 도착했다는 안내가 나오자 할머니가 끙, 소리와 함께 눈을 뜬다.

“다 왔니?”

“예, 도착했습니다.”

허름한 한의원 간판 앞에 차를 멈춰 세우고 비서가 부리나케 내려 문을 열어 준다. 할머니는 한의원 안으로 들어갔고 정인도 그 뒤를 따랐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약 냄새가 짙게 풍긴다. 

거기에는 나이 지긋한 노인이 작두로 무언가를 썰고 있었고 옆에는 한눈에 봐도 낡은 붉은색 라디오가 켜져 있었다. 두 사람을 발견한 노인이 주름진 얼굴로 웃으며 일어섰다.

“아이고 이 여사님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뵙네요.”

“그러게요. 회장님 돌아가시고 얼마 만이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두 사람이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정인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할머니가 왜 이곳에 데리고 왔는지 조금 짐작이 됐다. 한약 싫은데…. 저번에 준 아기 생긴다는 한약도 몰래 버렸는데… 그 생각을 하는데 할머니가 노인에게 정인을 소개해 준다.

“여긴 제가 말씀드린 우리 손주며느리.”

안녕하세요. 정인이 꾸벅 인사를 하자 노인이 돋보기를 아래로 내리며 정인을 유심히 살핀다.

“인물이 훤하네요.”

“말해 뭐 합니까. 우리 손주 녀석이 지 할아버지를 닮았는지 눈이 높아요.”

“하긴 이 여사님이 젊을 때 한 미모 하셨지요.”

두 사람이 담소를 나누는 사이 정인은 실내를 둘러봤다.

“근데 얘가 키만 컸지 몸이 약해요. 게다가 얼마 전에 큰 사고도 있었고. 자식도 낳아야 하는데, 제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자식 이야기에 정인은 긴장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던 한의사가 이리 오라며 손짓을 한다. 의자에 앉으라길래 시키는 대로 했더니 손을 가져가서 손목 있는 곳을 짚는다.

심장이 작게, 요동쳤다. 설마 이런 걸로 내가 베타임을 알진 않겠지. 긴장하여 가만히 앉아 있는데 이번엔 노인이 정인의 눈을 까뒤집고 혀를 길게 내밀라고 하더니 이리저리 살핀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재차 맥을 짚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정인은 침을 꼴깍 삼키며 눈을 아래로 깔았다.

“왜요? 많이 안 좋습니까?”

노인은 할머니의 물음엔 대꾸도 하질 않더니 시선을 정인에게 옮겨 왔다.

“자네 부부 관계는 자주 하나?”

놀란 정인이 고개를 들었다. 이 노인네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당황해 눈을 끔뻑이고 대꾸를 못 하는데 노인이 미간을 찡그린다. 안 해? 정인이 입을 달싹이며 할머니의 눈치를 봤다. 솔직하게 말하면 할머니가 난리 날 거 같은데….

“하긴…하는데요….”

“그래?”

하더니 더 말이 없다. 긴장하여 쳐다보는데 할머니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같은 질문을 한다.

“많이 안 좋아요?”

“일단 맥이 다 막혀서 엉망입니다. 당분간 여기 와서 침 치료 하고 약을 지어 줄 테니 꾸준히 먹여 보세요. 그리고,”

큼. 노인이 헛기침하더니 안경 너머로 정인을 지그시 바라본다. 정인은 잽싸게 눈을 피했다.

“부부 관계는 자주 하는 게 좋아.”

노인네가 음양의 조화 어쩌고저쩌고하는데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사이비다. 자신이 베타인 걸 안다면 부부 관계 이야기는 애초에 꺼내지도 않았을 텐데.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면 맥만 짚어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자네, 왜 그런 의심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나.”

정인은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뜨끔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럼 안으로 들어가게.”

할머니를 쳐다보니 얼른 들어가라고 눈으로 재촉이다. 정인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으로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가니 옷을 갈아입으라고 준다.

그것을 갈아입고 누워 있으니 노인이 둘둘 말린 가죽을 꺼낸다. 저게 뭘까, 잠시 생각하는데 거기서 바늘을 꺼내는 것을 보고 정인의 안색이 심각하게 변했다. 저거 소독은 한 걸까. 그나저나 침이 왜 저렇게 길고 크지? 급소 잘못 찌르면 마비 오는 거 아니야. 그 와중에도 한약 냄새가 코를 찌른다. 

할머니는 밖으로 나가며 잘 좀 부탁한다고 몇 번이고 인사를 했다. 침은 다행히 걱정한 것보단 아프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놓는 것도 모자라 배를 걷고 배꼽을 중심으로 아래와 위에도 놓더니 뜸을 가지고 온다며 돌아선다.

그사이 정인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고슴도치가 따로 없다.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해.”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귀신같은 노인네다. 정인은 천장을 쳐다보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늘이라도 당장 가서 김하준한테 할머니에게 밝히자고 해야지. 이대로 가다간 제 명에 못 살 것 같았다. 

***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김하준 목소리가 들린 거 같기도 하고. 잠시 후 이마에 찬 기운이 느껴진다. 정인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눈앞에 김하준이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본다. 괜찮아?

정인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저녁이 훌쩍 지났다. 침을 맞고 온 뒤로 자꾸 덥고 열이 나는 것 같아 얇은 반팔과 반바지로 갈아입고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아무래도 이거 부작용 아닐까. 

서 집사에게 전후 사정을 들었는지 하준은 노인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라고. 살아 있는 화타라고 불린다나 어쩐다나. 하지만 정인의 눈엔 그저 사이비 같았다.

“네가 싫다면 할머니한테 내가 말할게. 다음부터는 가지 마.”

과연 그게 가능할까. 며칠 뒤 김하준의 할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찾아와 정인을 끌고 그곳으로 갈 것이다. 정인은 팔다리를 걷어서 침 맞은 곳을 보여 주며 하소연했다.

“이것 봐. 침이 얼마나 컸는지 너는 몰라. 자국 보이지?”

하얗게 드러난 다리를 빤히 보던 하준의 머리가 내려간다. 자세히 보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허벅지에 축축한 혀가 닿는다. 화들짝 놀란 정인이 하준의 머리를 밀어내며 질색을 했다. 

“야.”

하준이 제 아랫입술을 핥으며 야릇하게 웃었다.

“약 발라 줄게.”

정인이 닫힌 문 쪽을 바라봤다.

“서 집사님 아직 계셔.”

“응. 알아. 키스만. 응?”

침대로 올라오길래 내려가라고 발로 어깨를 떠밀었다가 그대로 붙들렸다. 그는 붙잡힌 발목에 쪽쪽, 입을 맞추더니 혀로 길게 종아리를 핥으며 올라온다. 발을 빼려고 힘을 줬으나 워낙 악력이 강해 쉽지 않았다.

“놓으라니까.”

자꾸 힘을 주어 도망치려고 하자 다리를 잡아당긴다. 몸이 아래로 끌려가는 동시에 김하준이 셔츠 안으로 얼굴을 집어넣는다. 맨살에 입술이 닿자 간지러움과 함께 그가 뿜어 대는 숨결에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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