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잠에서 깬 정인은 기지개를 켜다 머리맡에 있는 액자를 보고 흠칫 놀랐다. 잡아먹을 듯 쳐다보고 있는 김하준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친 것이다. 다른 데 치울까, 고민했으나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지 못했다.
밤새 뒤척였더니 눈꺼풀이 무겁기만 하다. 얼굴을 문지르며 밖으로 나오는데 김하준이 거실에 있다. 돌아서 다시 들어갈까 하는데 서 집사가 먼저 정인을 발견하고 크게 부른다.
“일어나셨네요?”
하는 수 없이 돌아서서 인사를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러다 거실에 있는 김하준과 눈이 마주치고는 어색해서 먼저 피했다. 어젯밤 김하준이 왜 그랬는지 이유를 모르겠으나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 확실해 보였다. 그게 저한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씻고 나오세요. 대표님도 식사 전이세요.”
보통 김하준은 정인이 나오기 전 간단한 식사를 하고 출근한다. 정인도 그것을 알기에 김하준을 피해 따로 아침을 먹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곳에서 지내는 내내 그렇게 해 왔는데, 그걸 깨고 아침을 같이 먹겠다?
하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가 씻은 뒤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나와 보니 식탁에 빵과 버터, 커피와 과일이 놓여 있다. 잘 먹겠습니다. 인사를 한 뒤 빵에 버터를 바르고 있는데 서 집사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다.
“오늘 정말 뜻깊은 날이네요. 제 눈으로 두 분이 함께 아침 식사 하는 걸 보게 되다니.”
빵을 입에 욱여넣는데 하준이 커피를 정인에게 밀어 준다. 목 메겠다. 이거 마시면서 먹어. 그 행동에 서 집사가 양손을 모으고 엄마 미소를 짓는다. 정인은 서 집사도 부담스럽고 갑자기 친근하게 구는 김하준은 더 부담스러워 어지간하면 빨리 일어설 참이었다.
“저녁에 시간 비워 둬. 갈 데가 있어.”
“어딜?”
묻고 나서 커피잔을 입으로 막 가져갈 찰나였다.
“혼인신고 해야지.”
밥 먹으러 가자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말투에 하마터면 커피를 김하준의 얼굴에 뿜을 뻔했다. 입을 벌리고 쳐다보는데 그가 냅킨을 집어 입가를 닦아 주려고 한다. 정인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뒤로 뺐다.
“뭘… 하러 가?”
“혼인신고.”
“야, 우리가 무슨 혼인신고를 해. 앞으로 두 달밖에 안,”
정인은 급히 말을 멈추고 서 집사를 봤다. 그녀는 이 사실을 모르는 것 같기에 더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분명 결혼 전에 혼인신고는 없을 거라고 김하준 측에서 먼저 못을 박지 않았던가.
김하준의 표정을 보니 진심인 듯하다. 어쩌려고 이래? 눈빛을 보냈으나 김하준은 커피만 느긋하게 마실 뿐 거기에 대해선 일절 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커피를 다 마신 하준이 2층으로 올라가기에 정인은 먹던 빵을 내려놓고 부리나케 그 뒤를 쫓아 올라갔다. 똑똑 문 대신 벽을 두드린 뒤 안으로 들어가자 넥타이를 매던 김하준이 돌아본다.
정인은 아래층으로 목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김하준. 너 왜 그래?”
“내가 뭘.”
“사람이 일관성 있게 굴어.”
잘해 줬다 상처 줬다 또 잘해 줬다가. 밀당하는 것도 아니고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그거 알아?”
“뭘.”
“나는 11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정인이 표정을 굳혔다.
“왜 이래… 무섭게….”
“잘해 주면 무서워? 막 대해 줘야 좋아하는 타입이었어?”
정인은 할 말을 잃었다. 따지고 보면 김하준은 어릴 적 늘 다정하게 굴었다. 정인이 아무리 이상한 짓을 하여도 성질을 내거나 타박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가끔 김하준을 시험하고 싶은 못된 마음에 어디까지 참을까 싶어 도발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미련할 정도로 착했고, 결국엔 정인도 미안해서 더 잘해 줬었다.
따지고 보면 다 지난 옛날 이야기다.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잠시 딴생각을 하는데 김하준이 손을 뻗는다. 정인이 흠칫해서 쳐다보자 그가 입가를 슥슥 털어 줬다. 빵 묻었어. 정인은 민망함에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고 슬그머니 뒤로 떨어졌다. 하준은 웃으며 넥타이를 맸다.
“혼인신고는 장난이었어. 하지만 저녁에 만나서 갈 데가 있는 건 사실이야.”
“어딜…?”
“후원회 파티.”
“거길… 내가 왜 가?”
“부부동반.”
“…….”
“갚는다며, 빚.”
하, 정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넥타이를 다 매고 재킷을 걸쳐 입은 하준이 가까이 다가와 어떠냐고 묻는다. 진회색 슈트에 깔끔하게 넘긴 머리까지 너무나 완벽하게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마치 출근을 하기 전 남편이 아내에게 묻는 듯하여 정인은 괜히 귓불이 뜨거워졌다.
“괜찮아….”
“괜찮기만 해?”
“…….”
분위기가 또 야릇해진다. 자칫하면 김하준의 나머지 다리도 걷어찰 것 같아 정인은 그를 외면하고 홱 돌아섰다. 출근 잘해. 말을 하고 후다닥 도망치듯 아래층으로 도로 내려와 버렸다.
***
“세상에. 인물이 훤하네요.”
서 집사의 감탄도 들리지 않았다. 파티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종일 식욕이 없었다. 결혼 전 김하준과 친구들을 만나러 갔을 때가 떠올랐다. 설마 그런 데는 아니겠지…. 갑자기 위가 또 조여 온다. 인상을 쓰자 서 집사가 안색을 살폈다. 괜찮으세요?
“네….”
머리 손질까지 마치고서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약속 장소까지 차를 몰고 가는 내내 넥타이가 목을 조르는 것같이 갑갑했다. 살짝 손가락을 넣어 잡아당기고 나서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긴장이 돼 거울로 얼굴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김하준과 연관된 사람들을 만나는 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누군가 똑똑, 차장을 두드렸다. 김하준이다. 문을 열고 내리는 정인을 보며 하준이 싱긋 웃었다.
“근사하네.”
“미안. 차가 막혔어.”
그는 느슨해진 정인의 넥타이를 당겨 똑바로 만들었다.
“괜찮아. 들어가자.”
그러면서 자신의 팔을 가리킨다. 정인이 쳐다만 보고 있자 하준이 팔을 끌어다 팔짱을 끼게 한다. 엉겁결에 팔짱을 끼고 김하준을 따라가는데 입구에 벌써 사람들이 많이 와 있다. 파티의 규모는 생각보다 컸다. 사람들이 다가와 인사를 하는데 누가 누군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그들이 하는 대화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듣고 있던 정인은 그저 웃음으로 일관했다. 어서 빨리 시간이 가길 기다리면서. 그러다 보니 지루해졌고 슬그머니 자리를 벗어나 샴페인을 한 잔 마시며 접시에 디저트를 골라 담았다.
마음이 뒤숭숭해서 식사도 걸렀더니 허기가 진다. 디저트를 집어서 먹고 있다가 저를 흘깃대는 사람들의 시선과 마주쳤다. 너무 처먹기만 해서 그런가…? 그러나 정인은 곧 그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정략결혼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러게. 여기까지 데리고 왔네.]
[인물 반반하다.]
[빚 갚아 주는 조건으로 결혼한 거라며.]
[헛소문 아니었나?]
매너하곤. 좀 멀찍이 가서 떠들든가. 한숨을 내쉬며 샴페인 한 잔을 모두 비우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짚는다. 돌아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다.
“오랜만에 뵙네요. 저 모르시겠어요? 하준이 친구.”
아, 네… 안녕하세요. 기억은 나지 않으나 정중히 인사를 했다. 알파인 남자는 화보에 나온 사진을 봤다며, 너무 매혹적이라 유부남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대시했을 거라고 실없는 농담을 해 댔다.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눈으로 김하준을 찾았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연예인이 따로 없군. 와서 네 친구도 데려가. 텔레파시를 보냈으나 알아챌 리가 없다. 속도 모르고 눈앞의 남자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재미나게 떠들어 댔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쳐 주던 정인의 눈이 누군가를 발견하고 점점 커졌다. 어어? 그놈이다. 백화점에서 봤던, 이해수의 연인. 이 정도로 마주치면 저놈하고 나는 인연이거나 악연이거나 둘 중 하나인 거다. 근데 대체 여기 왜 있는 걸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가 파티장을 빠져나간다. 앞에 있는 남자에게 실례한다고 말한 뒤 정인은 하준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고, 잠깐만 나갔다 온다는 손짓을 했다. 김하준이 고개를 끄덕였고 정인은 밖으로 나와 남자를 쫓아갔다.
건물은 생각보다 미로처럼 되어 있었다. 남자는 건물 뒤편으로 나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통화 중이다.
“어떻게 됐어? 뭐? 하, 씨발, 넌 그것도 하나 처리하지 못해서 짭새가 회사까지 오게 만들어?”
짭새…? 혹시 이한? 우선 녹음이라도 하려고 휴대폰을 켰다. 남자는 음산한 목소리로 상대방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번엔 확실하게 처리해. 괜히 뒤탈 생기면 그땐 너한테도 책임 물을 거야. 알았어? 그런데 남자의 목소리가 차츰 줄어들더니 조용해진다.
귀를 기울였다. 조심스러운 발소리. 정신이 번쩍 든다. 눈치를 챘다는 것을 알았으나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면 어림도 없었다. 오른쪽에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있길래 그리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저 멀리서 김하준이 걸어온다.
빌어먹을. 정인은 눈으로 손짓으로 마구 신호를 보냈다. 오지 마. 여기로 오지 마. 오지 말라니까. 그런데 김하준이 잠깐 눈동자만 움직여 정인을 응시하더니 바깥쪽으로 나갔다. 나 알죠? 미안한데, 불 좀 빌립시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조금 전 험악하던 목소리가 아니라, 세상 신사적인 말투다. 대화하는 소리와 라이터가 켜지는 소리가 매우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정인은 재빨리 몸을 돌려 계단 아래쪽으로 숨죽여 내려갔다. 위에서 두런두런 이야기가 들리더니 걸음 소리가 멀어진다. 갔나. 나가지도 못하고 계단 안쪽에 처박혀 있는데 위쪽에서 김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류정인.”
정인이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계단 위에서 얼굴을 굳히고 있는 김하준이 보였다. 그가 나오라며 손짓을 보냈다.
“어떻게 된 거야?”
하준의 물음에 정인은 조금 전 남자가 사라진 곳을 한 번 쳐다봤다. 그러고 나서 목소리를 낮춰 하준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얼굴만.”
“저 사람… 이해수 씨가 나한테 줬던 사진 속 남자야.”
자세한 이야기를 듣던 하준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그러고 보니 전에 정인이 노트에 그려서 보여 준 남자와 외모가 꽤 흡사한 것 같았다. 자신이 알기로 양욱환이라는 남자는 그럴싸한 회사를 가지고 있으나 아버지가 유명한 기업형 조폭이다. 이해수가 만난 스폰서들에 대해 보고를 받았지만, 양욱환에 관한 건 따로 없었다.
“확실해?”
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수가 줬던 사진에서 분명 봤다고.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어진 가운데 하준이 정인의 등에 자연스럽게 손을 가져다 댔다. 일단 들어가자. 그러자 정인이 흠칫해서는 떨어진다. 하준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유난스럽게 굴지 마. 우리 부부야.”
“누, 누가 뭐래?”
“지금 기겁하면서 떨어졌잖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스킨십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니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예전엔 먼저 들이댔으면서….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는데 귀신같이 듣고는 언제 그랬느냐고 따진다.
“기억 안 나? 키스도 네가 먼저 했거든.”
하준이 쏘아붙이자 정인이 눈을 슬그머니 피했다.
“순진한 애 꼬드겨서 틈만 나면 여기저기 주물렀으면서.”
그 말에 정인이 홱 째려봤다. 누가 보면 자신이 혼자 좋아서 강제로 한 줄 오해하겠다. 지도 신나서 물고 빨고 했으면서. 그리고 뭐 순진한 애? 김하준을 위아래로 훑으면서 비웃듯 하자 김하준이 그 눈빛을 알아채고 이를 까득 문다.
“그때는 순진했다. 인정할 건 인정해.”
인정. 됐지? 건성으로 대답하고 가려는데 앞에서 예쁘게 생긴 외국인 오메가가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그럴 리 없겠지만 정인은 아주 잠깐 자신이 아는 사람인가 싶었다. 그런데 여자가 정인을 지나쳐 하준에게 가더니 영어로 인사를 하며 뺨에 쪽쪽, 입술을 찍는다.
잘 지냈냐, 오랜만에 보니 좋다. 보고 싶었다. 그런 내용이었다. 웃으며 인사를 나누길래 정인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파티장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여기가 외국이야. 아무 데서나 뺨에 뽀뽀하게?
순간 질투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해 속을 달래려고 샴페인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래, 김하준과 나는 이제 아무 사이 아니다. 계약 관계니까 김하준이 눈앞에서 다른 사람하고 뭘 해도 화낼 필요가 없는 거다.
그러나 마음과는 다르게 정인의 시선은 자꾸 출입구에 가서 머물렀다. 그 외국인은 누구였을까. 만나던 사람. 아니면 그냥 아는 지인? 그러는 와중에 누군가 옆으로 와서 바싹 붙어 섰다. 비키려고 돌아보던 정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해수의 남자가 정중하게 미소 짓더니 정인의 앞에 있던 샴페인 잔을 하나 집어 간다. 정인은 슬그머니 옆으로 멀어졌다. 그랬는데 남자가 떠나질 않고 바로 옆에 계속 서 있다. 다른 곳으로 갈까 고민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샴페인, 맛 좋네요.”
예상치도 못하게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아까 전화 통화를 하며 들었던 그 서슬 퍼렇던 말투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인이 잔을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처음 뵙는 분 같은데, 혹시 파트너하고 같이 오신 건가요?”
남자는 백화점 화장실에서 마주친 걸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였다. 아니면 그런 척하는 거든가.
“김하준 대표하고 같이 왔어요.”
골몰히 생각하던 남자가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 신데렐라? 맞죠? 다소 무례할 수 있는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듯 이야기했다. 정인 역시 감정을 숨기고 미소로 일관했다.
“네, 남들이 그렇게 부르더라고요.”
“뭐 어때요. 둘이 좋아해서 결혼하면 된 거죠. 안 그래요?”
미소를 띤 채 출입구를 응시했다. 김하준 빨리 와라, 좀. 이 새끼 어디 가서 진짜 헛짓거리하는 거 아니야. 아무리 가짜로 한 결혼이라지만 설마…. 아까 한 생각과는 다르게 슬슬 거슬리기 시작했다. 돌아오지 않는 김하준도. 그리고 앞에 이 남자도.
“결혼 전에는 무슨 일 하셨어요?”
남자가 물었다. 알면서 묻는 걸까.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걸까. 만약 남자가 이해수의 살인범으로 판단되어 체포되고 구속수사를 받게 된다면 정인이 증인으로 채택될 확률도 있었다.
“타투요.”
남자가 눈을 크게 뜬다. 타투요?
“네, 이태원에서 했었어요.”
남자가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다.
“주로 어떤 손님이 오나요?”
“다양하게 와요.”
“연예인도?”
뚫어지게 자신을 향하는 눈빛은 속을 긁어낸 것처럼 텅 비어 있다. 사람의 것이 아닌 것처럼. 마치 박제된 동물의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는 느낌이다. 그 눈을 빤히 보며 정인이 끄덕였다. 네, 연예인도 와요.
“어떤 연예인 봤어요?”
정인은 곤란한 듯 웃으며 손님에 관한 건 함부로 말해 줄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렇구나, 남자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친다. 어렴풋하게 정인은 남자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백화점에서 만난 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혹시 나에 대해 뒷조사를 하나. 미행을 붙였나. 별별 생각이 다 들던 찰나 김하준이 들어온다.
“실례할게요. 제 파트너가 와서요.”
“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만나요.”
정중한 남자의 인사에 어딘가 서늘함이 묻어났다. 정인은 미소를 지은 뒤 김하준에게로 다가갔다.
“아무것도 하지 마.”
집으로 오는 내내 정인은 그 수상한 남자에 대해 김하준에게 이야기했다. 김하준을 통해 그의 이름이 양욱환이라는 걸 알았고, 아버지가 기업형 조직폭력배로 지금은 정·재계 연줄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도련님처럼 말끔해 보이는 인상과 조폭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으나, 통화할 때 무심코 내뱉던 말과 표현들은 그것을 묘하게 납득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나더러 증인 서 달라고 하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수사 선상에 올랐다고 해서 다 범인일 수는 없어. 그렇게 따지면 나도 조사를 받았는데, 나도 범인인 거야?”
“하지만 이한 형사가,”
“언제 봤다고 그 형사를 그렇게 신뢰해?”
하준은 못마땅한 투로 물었고, 정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경찰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거야. 그러니 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들이 할 일이야.”
정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준의 말에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자신이 나서서 뭘 알아낸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더 말해 봤자 투닥거리기만 할 것 같아 입을 다물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풍경이 빠르게 지나간다.
그러다 문득 며칠 뒤가 제사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창에 머리를 쿵 찧었다.
“너 내가 싫은 소리 했다고, 지금 시위해?”
정인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하준을 돌아봤다.
“그게 아니야. 며칠 뒤에 있을 제사가 갑자기 떠올랐어.”
김하준은 몰랐다는 얼굴이다. 어째서 그 집 장손인 김하준도 신경 쓰지 않는 제사를 자신이 기억해야 하는 걸까. 그러다 김하준이 집안에서 대단한 영향력이 있다는 걸 상기하고는 표정을 바꾸어 넌지시 물었다.
“나… 제사 빠지게 해 주면 안 될까?”
하준은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못 해.”
비 맞은 강아지처럼 정인의 눈썹이 아래로 축 내려갔다. 입술을 우물거리며 창에 다시 머리를 대는데 김하준이 흘깃 쳐다본다. 시무룩해하는 류정인을 보고 하준은 골몰히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제사 안 가게 되면, 나한테 뭐 해 줄 건데?”
정인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돌아봤다. 그러자 하준이 얄밉게 웃는다.
“내가 혹할 만한 걸 제시해 봐. 그럼 생각해 볼게.”
기가 차서 나오는 대로 말을 쏟아 냈다.
“야 막말로 니네 조상이거든. 음식을 해도 너가 해야 맞는 거야. 남의 손 빌려서 할 게 아니라. 음식도 존나 많이 해서 먹지도 않고. 그거 다 낭비야. 알아?”
“그 말 우리 할머니한테 가서 고대로 해라.”
“너도 솔직히 그게 옳다고 생각해? 내가 아무 상관도 없는 너네 집 가서 좆빠지게 음식 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양반집이었길래 제사를 달마다 지내? 그것도 며느리들 종처럼 부려 가면서?”
김하준의 할머니는 만날 때마다 돌아가신 김하준의 할아버지 집안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야기했다. 몇 대 조상님은 무슨 일을 하셨고, 또 몇 대는 무슨 일을 하셨고, 그리고 꼭 다음에 만나면 그걸 되물었었다. 산 사람 신경 쓰기도 바쁜 세상인데 죽은 사람까지 기억하고 챙겨야 하는 건가. 듣고 있던 김하준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뗀다.
“류정인. 비밀 하나 알려 줄까?”
비밀이란 말에 정인이 솔깃해져 하준을 바라봤다.
“우리 원래 양반집 아니야. 나도 우연히 알게 된 건데, 족보 샀다더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정인이 입을 쩍 벌렸다.
“정말?”
“그러니까 나중에 제사 지내다 열받으면 터트려 버려. 우리 할머니하고 꼰대가 쪽팔려서 다신 제사 이야기 못 꺼내게.”
정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제사가 없어지기 전에 내가 먼저 없어질 거 같은데? 라고 말하자 하준이 웃었다. 됐다고, 관두라고 손을 젓고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그래 앞으로 두 달만 더 참자.
그랬는데 기다렸다는 듯 김하준의 모친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다. 김하준이 전화를 받았다. 네, 네, 아니에요. 지금 외출했다가 집으로 가고 있어요. 정인은 그런 김하준을 뒤로한 채 창밖만 내다봤다.
“정인이는 이번 제사 못 갈 거 같아요. 몸이 좋지 않아서요. 할머니께는 제가 따로 말씀드릴게요.”
밖을 내다보던 정인이 고개를 홱 돌려 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김하준이 손가락을 세워 입술을 가린다. 쉿. 통화를 마친 그를 보며 정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걸 보며 하준이 능글맞게 웃었다.
“만족해?”
정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답했다.
“응. 재회하고 네가 이렇게 예뻐 보인 건 처음이야.”
그 말에 하준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아랫입술을 핥는다.
“그럼 이제 잘 생각해 봐.”
정인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뭘.
“기브 앤 테이크.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그러더니 눈을 아래로 내려 정인의 가슴과 더 아래를 훑었다가 위로 올리며 픽 웃는다. 그 끈적한 시선에 정인은 잔뜩 굳었으나 하준의 얼굴에선 가는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
파티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더니 집에 도착해서는 폭우가 되어 내렸다. 봄비치고는 그 기세가 제법 사나웠다. 정인은 샤워를 마친 뒤 휴대전화에 녹음된 양욱환의 통화 내용을 반복하여 재생했다.
짭새 어쩌고, 이야기하며 확실하게 처리하라는 말에 이한 형사가 떠올라 내심 마음에 걸린다. 이한에게 녹음된 걸 보낸 뒤 오늘 있었던 일을 메시지로 간략하게 적어 보냈다. 그러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고요한 집 안에 빗소리만 들려왔다. 정인은 주방으로 갔고, 라면을 끓이기 위해 물을 올렸다. 파티에서 느끼한 것만 집어 먹었더니 칼칼한 국물이 먹고 싶어졌다. 라면을 끓이는 도중 위층에서 김하준이 와인을 들고 내려왔다.
와인과 김하준을 번갈아 쳐다본 후 정인이 물었다.
“라면 먹을래?”
“아니.”
그러더니 잔 두 개를 챙기고 냉장고에서 안주로 먹을 만한 걸 찾는다. 치즈와 과일을 꺼내 온 그는 그것을 와인 옆에 보기 좋게 세팅해 뒀다. 라면이 끓자 정인은 불을 끄고 냄비째 식탁으로 옮겨 왔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맛있는 냄새와 함께 피어오른다.
젓가락을 든 정인은 먹기 전 김하준에게 재차 확인했다.
“줄까?”
“싫어. 얼굴 부어.”
정인은 인상을 찡그렸다. 부으면 얼마나 붓는다고. 생각보다 김하준은 몸 관리를 꽤 열심히 하는 편이었다. 서 집사의 말에 따르면 매일 거르지 않고 운동을 하고 인스턴트식품은 가급적 입에 대질 않는단다.
그럼 뭐 하나 술을 저렇게 처먹는데. 와인을 물처럼 마시는 김하준을 보며 정인은 고개를 흔들며 라면을 젓가락으로 풀어 후루룩 입으로 집어넣었다. 속이 풀리는 동시에 살 것 같다. 지켜보던 김하준이 피식 웃으며 와인을 한 잔 따라서 건네준다.
“입가심으로 마셔.”
이미 샴페인을 꽤 많이 마신 탓에 와인까지 더하면 취할 것 같은데. 됐다고 사양하는데도 기어코 마시라고 권한다. 어쩐지 불안하다. 김하준이 또다시 엉뚱한 소리를 하기 전에 빨리 방으로 도망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엔 빗소리에 잘못 들었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김하준 역시 행동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운 채 집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들었어?”
“응. 무슨 소리지?”
아주 작은 소리는 규칙적이었고, 굉장히 신경에 거슬렸다. 라면을 얼추 다 먹은 정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소리의 근원지를 파악하기로 했다. 하준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여기저기 살폈다. 그러다 두 사람은 소리가 나는 곳이 집 안이 아니라 밖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주방과 연결된 테라스 문을 열고 나가자 소리가 확실히 커졌다. 정인이 테라스를 살펴보는데 박스를 쌓아 둔 곳에서 무언가 튀어나온다. 하마터면 발로 밟을 뻔하여 정인은 흠칫 놀라 뒤로 휘청댔다. 그러자 하준이 정인의 어깨를 받쳐 안았다.
“괜찮아?”
하필 귓가에 입술을 바싹 대고 묻는 바람에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민망해진 정인은 하준을 밀어내며 몸을 바로 세웠다. 하준이 정인의 어깨 너머를 쳐다보며 눈을 가늘게 늘였다.
“저게 뭐야?”
그들 앞에 나타난 건 검은색 털 뭉치였다. 분명 고양인데 왜 병아리처럼 뺙 뺙 소리를 내는 거지. 크기가 아주 작았는데 녀석은 겁도 없이 정인의 다리로 와서 엉겨 붙었다. 당황한 정인이 발을 뒤로 빼며 물러섰는데도 기어코 와서 달라붙는다.
“얘, 왜 이래?”
정인은 갑자기 나타난 고양이 새끼를 피해 요리조리 도망 다녔다. 하준이 주위를 둘러봤다. 혹여 어미가 있나 싶어서. 그러나 밤이고 비까지 쏟아지자 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데스크 불을 켜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스위치가 먹통이다. 주위를 살피던 하준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새카만 물체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미일까. 그런데 왜 저렇게 누워 있는 거지. 하준은 새끼 때문에 정신이 없는 정인을 뒤로한 채 우산 하나를 챙겨 들고 그쪽으로 간다.
성큼성큼 걸어가 확인하던 하준의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 검은 물체는 고양이였는데, 새끼 고양이의 어미인지는 모르겠으나 비에 잔뜩 젖어 있었고, 여기저기 누군가 일부러 훼손한 것 같은 흔적이 눈에 띄었다.
“씨발… 누가 이런 짓을….”
그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사방이 어두컴컴한 가운데 번개가 번쩍하고 내리쳤다. 순간 시야가 밝아지며 눈앞에 고양이 사체가 더 있는 것을 확인했다. 모두 살아 있는 새끼 고양이와 같은 검은색이었다.
하준의 뺨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렸다. 시커먼 나무들 사이에서 예상치도 못한 게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시야가 너무 어두워 자세히 보이지 않자 하준은 몸을 돌렸고 정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때까지도 정인은 고양이를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슨 일이야?”
“일단 들어가.”
영문도 모른 채 떠밀려 가던 정인이 뒤를 가리켰다.
“얘는 어쩌고?”
새끼 고양이는 물에 흠뻑 젖은 채 여전히 정인의 다리에 붙으려 했다. 하준은 녀석을 손으로 들고서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잠근 뒤 하준은 수건을 가져와 젖은 고양이를 닦아 줬다. 크기로 보아 갓 태어난 건 아닌 듯하였다. 배가 홀쭉하지 않은 건 몇 시간 전까지 어미의 젖을 먹고 있었다는 뜻일 게다.
정인이 곤란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아 줘도 돼? 어미가 찾으러 오면 어쩌지?”
하준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뗐다.
“어미는, 죽었어.”
정인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뭐?
“누가 죽이고 던져 놓은 것 같더라.”
놀라 할 말을 잃은 정인을 뒤로한 채 하준이 여기 가만히 있으라고 한 뒤 창고에서 야구 배트와 랜턴을 하나 챙겨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정인이 안고 있던 고양이를 내려놓고 따라가려고 하자 두말할 것도 없이 제지한다. 나오지 마.
그러고 나서 그는 밖으로 나와 랜턴을 켜고 마당 곳곳을 돌아가며 살폈다. 불빛을 훤하게 비추자 참혹한 현장이 세세히 드러난다. 어미와 새끼까지 죽은 고양이가 총 다섯 마리다. 하준은 이를 꽉 문 채 욕을 씹어뱉었다. 혹여 숨이 붙어 있는 게 있나 고양이를 확인했으나 모두 난자당한 채 죽어 있었다.
집 주변을 샅샅이 뒤졌으나 별다른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 있다고 해도 이 빗물에 쓸려 갔을 게 뻔하다. 심란해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정인은 무릎을 꿇은 채 고양이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녀석은 정인의 다리에 찰싹 붙어서 계속 울음소리를 냈다. 하준은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고, 상황을 설명했다. 곧 출동하겠다는 말에 통화를 마친 뒤 그는 정인을 불렀다.
“나 위에 올라가서 CCTV 확인 좀 할게.”
정인이 고양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나도 같이 가. 녀석은 안아 주자 울음을 멈추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걸 보자 정인은 딱해져 마음이 아팠다. 어떤 미친놈이 고양이한테 해코지를 한 걸까.
노트북을 켜고 CCTV 화면에 접속하던 하준의 표정이 대번 일그러졌다. 뒷마당에 설치해 둔 CCTV 화면이 온통 암흑이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돌려 봐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고양이를 죽여 담장 너머로 던진 것이 아니라, 직접 넘어와 CCTV를 망가트리고 고양이를 죽여서 전시해 놓은 것 같았다.
생각만으로도 뒷골이 서늘해진다. 씨발… 하준은 저도 모르게 욕을 한 뒤 화면을 끄고 나서 정인을 바라봤다. 정인의 표정 역시 어둡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
“경찰에 연락했으니까, 와 보면 알겠지.”
그런데 정인의 품에 안겨 있던 고양이가 입을 벌리고 다시 빽빽 울어 젖힌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달래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배가 고픈가. 하지만 집에는 사람이 먹을 것 외엔 고양이에게 줄 만한 게 딱히 없었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고양이까지 쉴 새 없이 울어 대니 머리에 지진이 날 지경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하준은 외투를 챙겨 들었다.
“옆집에 고양이 기르거든. 가서 먹일 만한 걸 얻어 올 테니까. 여기 있어.”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기 전 그는 아무한테도 문을 열어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렇게 하준이 떠나고 난 뒤에도 고양이는 지치지 않고 울어 댔다. 배가 고파서인지 아니면 엄마가 없어져서인지 모르겠으나, 작은 몸을 바들바들 떠는 걸 보니 측은하기만 하다.
그때였다.
불쌍한 어린 짐승을 달래고 있는데 난데없이 전등이 팍! 하고 나가 버린다. 놀란 정인이 주위를 둘러봤다. 김하준? 하고 불렀으나 대답이 들릴 리 만무하다. 고양이를 내려놓고 더듬더듬 불을 켜려고 움직였다. 마침 뒤꿈치로 무언가 툭 걸린다. 김하준? 돌아보려는 찰나 목에 천 같은 게 닿더니 순식간에 압박이 가해진다.
몸이 눕혀지고 목이 졸려 오기 시작했다. 손을 넣어 그것을 풀려고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번개가 번쩍이자 거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마치 괴물처럼 보였다. 벗어나려고 발을 버둥거릴수록 숨 쉬는 게 더 어려워졌다. 빽빽거리던 고양이 소리가 귓가에서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다.
의식이 흐릿해지는 가운데 김하준 생각이 났다. 이대로 두면 다음은 김하준 차례가 될지도 모른다. 씨발. 그 꼴은 내가 못 보겠다. 정인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며 바닥을 발로 힘주어 밀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목을 조르던 사람이 주춤, 당황한 게 느껴진다.
그대로 온몸을 이용해 상대방을 뒤로 밀다가 어딘가에 쿵! 부딪쳤고, 충격에 둘 다 바닥을 나뒹굴었다. 넘어지자마자 머리 위로 무언가 쏟아진다. 와장창 소리와 동시에 후다닥 발소리가 들린다.
비틀거리고 일어선 정인은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숨을 헐떡였다. 머리가 뜨겁다. 놈을 쫓으려고 하였으나 제대로 서 있는 것도 버거웠다. 그 순간 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왜 불을 끄고 있어, 어쩌고 하는 소리와 함께 탁, 실내가 환해진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시야가 가려졌다.
“류정인!”
찢어질 듯한 김하준의 고함에 손으로 눈을 닦았다. 그게 피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분명 몸이 똑바로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바닥이 가까워졌다. 정인아! 비명 같은 김하준의 목소리만 귓가에 윙윙대고 의식은 점점 아득해졌다.
***
삐, 삐, 삐. 규칙적인 기계 소리와 함께 나지막한 말소리가 들렸다. 무거워진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시야로 새하얀 천장이 들어왔다. 출입구 앞에선 김하준이 등을 보이고 서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그는 피곤한 듯 연신 얼굴을 문질렀다.
“아니에요. 기사만 막아 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정인은 양손의 감각이 이상함을 느끼고 팔을 들었다. 양손 모두 붕대가 감긴 걸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손도 다쳤던가. 골몰히 생각하느라 눈에 힘을 주자 이마 위쪽이 당기며 미세한 통증이 생겨난다. 이윽고 통화를 마친 하준이 정인이 깨어난 걸 확인하고 서둘러 다가왔다.
“괜찮아?”
안색을 살피는 눈동자에 걱정이 한가득이다. 이상했다. 결혼식에서 쓰러져 눈을 떴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다.
“어떻게 된 거야?”
“넘어지면서 머리를 찧었는지 가벼운 뇌진탕 증세가 있었대.”
정인은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다. 김하준의 말에 따르면 장식장이 넘어가며 안에 있던 것들이 머리 위로 쏟아져 이마 위쪽이 찢어지고, 깨진 유리에 손바닥도 베였단다. 그러니 당분간 손은 쓰면 안 된다고 하였다.
“범인은?”
“경찰에서 조사 중이야.”
오늘 봄을 맞아 단지 내 조경과 대청소를 하는 날이었고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평소보다 많았다고 들었다. 특정 지을 만한 용의자가 없는 상황에서 그들까지 모두 조사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라고 했다. 범인은 CCTV를 망가트리거나 교묘하게 피하여 갔다. 덕분에 집으로 감식반까지 와서 어떻게든 흔적을 찾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고양인?”
정인은 그 와중에도 남겨진 고양이가 걱정됐다. 서 집사가 데려가 맡아 주고 있다는 하준의 말에 안도하며 마음을 놓았다.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데 서서히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더 자.”
눈치 빠른 하준이 옆에 앉아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 주었다. 눈을 감았다. 잠은 파도처럼 밀려오는데 의식은 또렷하다. 어둠 속에서 범인에게 목이 졸리던 기억이 떠올라 오한이 느껴진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떴다. 김하준이 바로 옆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잠이 안 와?”
정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허탈하게 웃었다.
“아까, 존나 무서웠어. 목 졸릴 때….”
하준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침대 위로 올라왔고, 옆에 모로 누운 뒤 팔을 뻗어 정인의 상체를 조심스럽게 감싼다. 정인이 멋쩍은 표정으로 웃었다.
“안아 달란 소리는 아니었어.”
“응.”
하준은 아기를 재우듯 정인의 가슴을 토닥토닥 가볍게 두드렸다. 이제 눈 감아 봐. 시키는 대로 했더니 아까처럼 무섭지만은 않다. 김하준이 누구나 다 아는 자장가를 흥얼댔다. 목소리가 듣기 좋다. 문득 김하준에게 아이가 있다면 좋은 아빠가 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정인은 심각한 얼굴로 앞에 놓인 환자복을 쳐다봤다. 몸에 큰 이상은 없어 내일이면 퇴원해도 좋다고 했으나 문제는 양손을 다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거였다. 이런 상황이면 보통 병간호를 해 주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그게 하필이면….
“이리 와. 벗겨 줄게.”
하준이 오라고 하였으나 정인은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간병인을 불러 달라고 하자 김하준은 단번에 묵살했다. 가까이 다가온 김하준이 환자복을 벗기려 하기에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마땅히 도망칠 곳도 없었다.
결국은 붙들려 단추가 하나씩 풀어졌다. 긴장한 정인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그 소리가 유독 컸는지 김하준이 흘깃 쳐다본다. 민망하여 헛기침을 하고 애써 변명했다.
“목에 뭐가 걸려서 그래.”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응….”
김하준은 벌어진 환자복 사이를 한 번 훑더니 인상을 구기고 혀를 찼다. 영문을 모르던 정인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그 이유를 알았다. 범인과 실랑이를 벌이느라 성한 데가 없이 온통 멍투성이다.
“파스 붙여야겠다.”
환자복을 어깨 뒤로 넘기자 상체가 완전히 드러났다. 얼른 옷을 입혀 달라고 팔부터 내밀었더니 순순히 옷을 입혀 주고 단추까지 잠가 준다. 목 아래에서 움직이는 손길에 괜히 긴장하여 입술만 씹어 댔다.
“당분간은 먹고 입고 씻는 건 내가 해 줄 거야. 퇴원해서도 마찬가지고.”
예상치도 못한 말에 정인이 입을 벌렸다.
“그럴 필요 없어. 차라리 간병인,”
또다시 꺼낸 간병인 이야기를 하준은 칼같이 잘라 냈다.
“표면적으로 우린 부부야. 가뜩이나 이 일이 새어 나가면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릴 텐데. 간병인보다는 내가 나서서 하는 편이 남들 눈에도 좋아 보이지 않겠어?”
결론은 남들 눈을 의식해서 하는 짓이란 얘기다. 말은 그럴싸했으나, 전혀 내키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힌 뒤 하준은 식사를 챙겼다. 수저로 밥을 떠서 디밀자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정인은 하는 수 없이 입을 벌렸다.
세세하게 챙겨 주고 입도 닦아 주고, 완전 아기가 따로 없다. 정인은 깁스한 양손을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하필 다쳐도 양쪽 다 다쳐서는….
“퇴원하면 당분간 다른 곳에 머물 거야.”
위험에 노출된 이상 그곳에 계속 머무르는 건 힘들다고 했다. 경찰에서 조사하고 범인을 잡을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고. 정인은 문득 파티장에서 본 그 남자가 떠올랐다.
“혹시 그 남자 아닐까?”
“누구?”
“양욱환.”
반찬을 집어 밥 위에 올리던 김하준의 표정이 잠시 굳는다. 글쎄…. 그는 아직 아무것도 장담할 순 없다고 하였다. 강도일 수도 있고. 하준의 말에 정인은 수긍할 수 없어 그를 의심하노라고 대놓고 말했다.
하준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그것이 정인은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기절하기 전 보았던 김하준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생각하면 지금의 태도는 너무나 평온해 보인다. 물론 정인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그렇다는 걸 알지만 말이다.
밥을 먹여 준 뒤 하준은 양치질과 세수까지 시켜 줬다. 그러고 나서 정인을 도로 침대에 눕혔는데 물을 많이 마신 탓인지 아니면 수액 때문인지 요의가 느껴졌다. 어떻게든 참으려 했으나 아랫배가 터지기 직전이라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김하준 없을 때 몰래 화장실을 이용하고 싶었는데 그는 정인이 눈을 뜬 이후로 한 발짝도 병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자꾸 흘깃거리고 쳐다보자 눈치를 챈 김하준이 묻는다.
“왜? 시킬 거 있어?”
정인은 주스를 하나 사다 줄 수 있느냐고 넌지시 물어봤다. 김하준은 보란 듯 냉장고를 열어 주스를 고르라고 했다. 거기엔 과일이며 뭐며 없는 게 없었다. 망할…. 다른 걸 부탁하려고 해도 마땅한 게 떠오르질 않는다.
그대로 뒀다간 침대에 쌀 것 같아 정인은 하는 수 없이 아래로 내려왔다. 하준이 같이 일어서길래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화장실 가서… 소변 보고 올게.”
“같이 가.”
아무렇지 않게 같이 들어가자고 하는 바람에 정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니라고, 혼자 볼일을 볼 수 있다고 하였으나 김하준은 등을 떠밀며 기어코 따라 들어온다. 말은 필요 없다고 하였으나 손이 붕대로 감겨 바지를 내리는 것조차 힘겨웠다. 졸지에 김하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됐다.
김하준이 바지를 내리려 하기에 정인은 그를 다급히 불렀다.
“너, 너! 눈 감아.”
“눈 감고 어떻게 잡아 줘?”
잡아 줘? 뭘? 정인이 의아하게 쳐다보니 하준이 눈짓으로 가랑이 사이를 슥 가리킨다. 정인이 기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잡아 줘도 돼! 버럭 소리를 지르니 하준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그렇게 작아?
“씨발…!”
정인이 눈을 부라리며 욕을 하자 하준이 한발 물러서 알았다고 하더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바지를 내려 준다. 아아, 수치스럽다. 수치스러워 뒈져 버릴 것 같다. 게다가 긴장했는지 소변도 쉽게 나오지 않는다.
정인이 울상을 하고 내려다보고 있는데 김하준이 도와주느냐고 재차 묻는다. 닥치라고 쏘아붙인 뒤 힘을 주는데 쪼르르, 예상과는 달리 양이 참새 오줌이다. 동시에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하준은 잠든 정인의 얼굴을 살피다 이마에 덧댄 거즈를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했다가 양손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손이 살짝 베였을 뿐인데 붕대로 감아 버렸다. 당분간 쓸데없는 짓도 행동도 못 하게. 아마 사실을 안다면 길길이 날뛸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류정인이 눈앞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걸 본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병원으로 옮기고 검사를 하고 기다리는 내내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류정인이 밉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원망스럽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좋아하는 마음은 여전히 크고 그 무게는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다. 그러니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반드시 먼저 찾아내야 한다.
하준 역시 양욱환이 의심스럽다.
정인의 말에 동조하지 않은 건 그가 더는 이 일로 위험해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가급적이면 상처를 핑계로 집에 가둬 둘 작정이었다. 이를 악물고 손에 든 휴대전화를 힘주어 쥐는데 때마침 전화가 걸려 온다. 작은 진동 소리에 류정인의 미간이 꿈틀 움직인다.
하준은 서둘러 전화를 들고 복도로 나왔다.
“여보세요?”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김민재였다.
[괜찮아?]
“뭐가?”
[기사 터졌어. 정인 씨 많이 다친 거야?]
하준의 인상이 사나워졌다. 빌어먹을. 급히 전화를 끊고 기사를 검색했다. 실시간 검색어에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아버지 이름이 올라갔다. 기사에도 온통 도배됐다. 병원에 도착해 소식을 들은 김 회장과 통화를 했고, 그는 기사가 나가지 않도록 조치를 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대체 어째서…?
***
절대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김하준은 간병인에게 정인을 부탁해 놓고 아침 일찍 외출했다. 그사이 모친과 동생이 찾아왔다. 걱정될까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오고 나서야 정인은 자신이 습격을 받았다는 기사가 나갔다는 걸 알게 됐다.
더 놀라운 건 그 기사가 나간 직후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이상한 말이 떠돈다는 거다. 지금 선거에 김 회장과 지지율에서 앞뒤를 다투는 반대편 장 의원이 이번 일을 사주했다는 이야기다. 괴담 같은 소문은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삭제되기 무섭게 반복해서 올라오는 중이었다.
“걱정 많이 하셨죠?”
정인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가뜩이나 아들을 결혼시켜 놓고 속 편할 날이 없을 텐데. 김은혜는 눈이 그렁그렁해져 정인의 이마와 양손을 번갈아 쳐다봤다.
“정말 괜찮아?”
“많이 다친 건 아니에요. 당분간 손은 쓰기 힘들겠지만.”
“누가 그랬는진 아직 모르고?”
“네, 비가 워낙 많이 온 데다 CCTV도 고장 내서 찾는 데 쉽지 않은가 봐요.”
김은혜는 한숨을 내쉬었고 류민아는 무거운 분위기를 어떻게든 무마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지. 오빠. 엄마가 오면서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모르지? 나는 차가 날아가는 줄 알았다니까.”
정인이 웃었고, 모친은 하지 말라며 눈짓을 했다. 류민아는 입을 삐죽 한 번 내밀고 병실을 구경했다. 이런 게 VIP 병실이구나. TV에서만 봤지 실제론 처음 봤다며 냉장고를 열어 주스를 꺼내 온다.
민아가 음료수의 뚜껑을 비트는 순간 똑똑,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의사나 간호사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등장한 사람은 놀랍게도 김하준 할머니였다. 얼굴을 알아본 모친이 화들짝 놀라며 주스를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작스러운 할머니의 등장에 정인은 긴장했다. 괜히 모친과 동생 앞에서 그녀가 쓴소리하며 상처를 주지 않을까 싶어 표정이 저도 모르게 굳었다. 놀란 세 사람이 오셨느냐고 묻기도 전에 할머니가 안으로 들어와서 사람 좋게 웃는다.
“결혼식 이후로 두 번째 뵙네요. 김하준 할미 되는 사람입니다.”
“예,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저는 정인이 엄마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인사가 오고 가는 와중에도 정인은 할머니를 유심히 주시했다. 저러다 또 갑자기 독설을 쏟아 내는 건 아닐까. 손이 이런데 말릴 수도 없고. 대화를 마친 그녀의 시선이 정인에게로 와서 꽂힌다. 주름진 미간이 일그러지고 눈빛이 흉흉했다.
[이래서 사람이 잘 들어와야 한다니까. 네가 들어오고 나서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구나.]
라고 말하거나.
[우리 하준이 대신 네가 다쳐서 다행이구나.]
라고 한다면.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진짜 그러면 이번엔 참지 않을 것이다. 마음먹은 순간 그녀가 붕대 감긴 정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더니 이를 간다.
“어떤 육시럴 놈이 남의 귀한 손주며느리를…!”
그녀의 눈빛이 얼마나 흉흉한지 정인은 손을 붙들린 채 그대로 굳었다.
“걱정 마라. 내가 잡아다 아주 사지를 찢어 놓을 테니.”
정인이 입을 벌렸다. 엄마도 동생도 놀란 듯하였다. 몸가짐과 언행을 항상 바르게 해야 한다고 예절 수업 때 그렇게 강조를 하시던 분 입에서 사지를 찢어 놓겠다는 말이 나오다니. 얼핏 김하준의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깡패였단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할머니에겐 꼼짝도 못 했다고.
“아침에 청장하고 통화했다. 어떻게든 잡아 놓으라고 했으니 너는 걱정할 거 없어.”
청장이면…혹시…경찰청장? 그러더니 할머니는 모친인 김은혜의 손을 옮겨 잡고 애끓어 했다.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냐고, 귀한 아드님 주셨는데, 이런 일이 생겨서 어찌하냐고. 김은혜는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적어도 정인이 결혼해서 괄시받고 사는 건 아니구나, 조금은 안심하는 눈치였다.
정인 또한 김하준의 할머니가 생각보다 아주 최악은 아닌 것 같아 속으로 놀라워하고 있었다.
“얼른 아이를 가져야 할 텐데, 몸이 약해서 큰일이네요.”
아이 이야기에 정인과 모친의 표정이 굳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한다고, 아이를 키우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고, 사돈께서 잘 타일러 주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차라리 김하준의 할머니도 모든 걸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괜히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
정인은 커다란 창 앞에 앉아 한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새로운 거처는 김하준의 다른 집이라고 했는데, 아래에 모든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는 데다 외부인이 손쉽게 드나들 수 없는 구조였다.
그리고 엄마와 동생은 정인이 퇴원하는 것을 본 후 집으로 돌아갔다. 떠나기 전 엄마는 류동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자신의 시동생인 건 사실이나, 죄를 지었고, 반성도 하지 않고 계속 사고를 치고 다니니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나오면 조금은 바뀌지 않겠냐고. 그러니 하준을 원망하거나 너 자신을 책망하지 말라고.
티를 내지 않았어도 사실 마음이 계속 무거웠는데, 그녀의 말에 조금은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 들었다. 한참 밖을 내다보던 정인은 슬슬 배가 고파짐을 느꼈다. 김하준이 오기 전 뭘 좀 먹을까 싶어 일어서려고 하다가 몸의 중심이 옆으로 무너졌다.
저도 모르게 오른팔로 바닥을 짚었다. 통증을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멀쩡하다. 손에 억지로 힘을 주어도 마찬가지다. 혹시나 싶어 왼쪽을 똑같이 했는데 그곳엔 미세한 통증이 있었다. 이상하다.
의구심을 품은 채 양손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현관에서 김하준이 들어온다.
“피곤한데 왜 움직여? 누워 있지.”
김하준은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식탁 위에 올려 두고 외투를 벗어 한쪽에 걸었다. 그러고 나서 도시락을 꺼낸다.
“장어덮밥 좋아하지?”
정인은 대답 대신 김하준에게로 가서 양손을 내밀었다.
“이거 풀어 봐.”
김하준의 한쪽 눈썹이 까닥 올라간다. 왜. 정인은 오른손을 흔들었다. 풀어 보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다. 아침에 의사가 상처에 드레싱을 하는데 왼손만 해 주었다. 그것도 상처가 얼마나 작은지 이걸로 왜 붕대를 칭칭 감아 놓았나 싶을 정도였다. 의사 말로는 속 상처가 깊다는데 그런 것치고는 통증이 너무 미미했다. 의심을 않으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오른손은 멀쩡한 것 같아서 그래.”
“기분 탓이야.”
정인이 더 말하기도 전에 하준이 어서 밥이나 먹으라며 어깨를 잡아 앉힌다. 그가 사 온 건 장어덮밥이었는데, 장어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게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 정도였다. 이틀 동안 밍밍한 병원 밥을 먹었더니 식욕이 확 당긴다.
김하준이 바로 옆자리에 앉더니 젓가락으로 장어 하나를 집어서 류정인의 입가에 대 준다.
“아, 해 봐.”
병원에 있을 때는 그래도 환자란 생각에 덜 민망했는데, 집에서 이러고 있으니 굉장히 창피하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장어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입에 침이 고이고 정인은 저도 모르게 입을 아아, 하고 벌렸다. 그 틈새로 하준이 장어를 집어넣었다.
몇 번 씹지도 않고 정인이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하준이 피식 웃는다. 정인은 장어를 좋아했는데,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장어는 처음이다. 장어 살이 얼마나 쫀득하고 부드러운지 입에서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유명한 집이야. 예약해 놨다가 받아 왔어.”
꿀꺽, 삼키기 무섭게 하준이 입에 또 대 준다. 정인은 어미에게 모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처럼 입을 쫑긋쫑긋 잘도 벌렸다. 민망함도 잊고 정인은 주는 족족 밥과 장어를 받아먹었다. 그러다 혼자만 너무 돼지처럼 먹는 것 같아 민망해졌다.
“너도… 먹어.”
그러자 김하준이 눈을 지그시 맞추고 싱긋 웃는다.
“나는 너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
어이가 없다. 결혼 내내 괴롭힐 것처럼 퍼붓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 사람이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가 바뀌어도 되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 이게 김하준 모습인 거다. 다정하고, 자상하고. 하지만 여전히 적응은 어렵다. 차라리 지랄하는 게 속이 편할 것 같기도 하고.
그는 정인의 팔을 흘깃 보고 말을 이어 갔다.
“네가 팔을 못 쓰니까 좋다. 내가 다 챙겨 줄 수 있어서.”
어쩐지 그 말에 소름이 끼쳐 정인이 질겁을 하고 옆으로 떨어지려고 했다. 그러자 하준이 잡아채서는 의자를 소리 나게 끌고 코앞으로 데려온다. 그러더니 다정하게 밥 위에 장어를 올려놓으며 웃었다.
“먹어.”
이거 공포 영화에서 많이 본 장면 같은데. 팔다리 부러트려 놓고, 밥 먹여 주며 좋아하던 거. 찜찜함도 잠시 정인은 종일 궁금했던 게 떠올랐다. 실은 아침부터 김하준이 본가에 다녀온 게 마음에 걸렸다. 왜 정인이 다치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 걸까. 덕분에 저녁에 상대편 후보자는 어떤 음해 세력이 자신을 모함하고 있다며, 결단코 그런 일은 벌어져서도 벌어질 수도 없다고 입장 발표까지 했다.
양욱환을 의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경찰에서는 연락 왔어?”
하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아침에… 집엔 왜 간 거야?”
하준은 고민했다. 정인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아니면 말하지 말아야 할까. 그러나 또다시 사실들을 숨긴다면 과거와 같은 일이 반복될지도 모른다. 고민하던 하준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어제 단지 조경을 하러 왔던 사람 중 하나가 상대편의 캠프 관계자란다. 비록 아르바이트생이지만 소문을 만들 조건으로는 충분했다.
물론 시작이 어디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으로 김 회장이 얻을 이익을 생각하면 제일 처음 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본가로 가 따져 물었는데 김 회장은 펄쩍 뛰며 아니라고 했다. 아무렴 자신이 선거에 미쳤어도 아들 내외에게 해를 끼치겠느냐고.
그러면서도 상황을 이용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가져가는 것을 추궁하자 그것에 대해선 부정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던 정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어쩐지 자신이 장기판의 말이 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
붕대를 풀고 난 뒤 정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수상해 김하준에게 붕대를 풀어 달라고 몇 차례 요구하였으나 계속 무시당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앞니로 물어뜯으려고 하니 그제야 마지못해 풀어 준다.
예감이 들어맞았다.
멀쩡한 오른손을 보며 정인은 눈을 가자미처럼 뜨고 김하준을 노려봤다.
“벌써 다 나았네?”
뻔뻔하게 웃는 김하준을 향해 정인은 그의 손에 들린 붕대를 빼앗아 얼굴에 집어 던졌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머물 침실로 가는데 당연한 듯 김하준이 쫓아온다. 그것도 모자라 자연스럽게 침실 소파에 기대어 책을 펼친다. 정인은 그를 보며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나 씻을 거야.”
“응.”
“씻을 거라니까.”
“알아. 방금 말했잖아.”
“근데 왜 안 나가?”
“나가긴 어딜 나가. 침실은 이거 하난데.”
정인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분명 낮에 이곳이 내 방이라고 했는데. 김하준의 표정을 보니 농담이 아니다. 혹시나 해 밖으로 나와 맞은편으로 갔다. 거기엔 서재가 있었다. 다른 방으로 가니 거기엔 운동기구가 있고, 또 다른 방에는 영화를 볼 수 있게 프로젝터와 소파가 설치되어 있었다.
세상에. 이 넓은 집에 침실이 딱 하나라니.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되돌아오니 소파에 있던 김하준은 어느새 침대로 자리를 옮겨 독서 중이었다.
“김하준.”
“응.”
“너… 다른 집 없어?”
“무슨 집?”
“여기 말고… 다른 집 없냐고….”
하준이 책장을 넘기며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인과는 다르게 그는 이 상황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표정이다.
“없어.”
입을 꾹 다물고 서 있자 하준이 책에서 눈을 떼고 바라본다.
“아무 짓 안 해. 오버하지 마.”
“누가 뭐래…?”
괜히 혼자 지레짐작으로 유난을 떠는 것 같아 더는 따지질 못했다. 정인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얼굴에 긴장감이 잔뜩 묻어 있다. 억지로 웃었으나 근육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그래, 쫄지 말자. 병원에서도 같이 잤잖아. 그나마 주로 사용하는 오른손이 멀쩡해 다행이었다. 여차하면 패 버려야지. 정인은 옷을 탈의하고 샤워를 하기 위해 부스 안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물을 틀어 놓고 이마와 팔에 닿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쓰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힘겨운 샤워를 겨우 마치고 물기를 닦은 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침실엔 은은한 주황색 조명이 켜져 있고 독서를 하던 김하준은 이제 침대 안쪽에 쥐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자는지 확인하려 살피는데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정인은 소파를 바라봤다. 하필 소파도 작은 거다. 거실에 큰 소파가 있는데 거기 가서 잘까.
정인은 추위에 약했다. 봄이지만 아직 밤에는 쌀쌀했고, 집도 서늘한 편이었다. 따로 덮을 만한 이불이 있나 침실 구석구석을 살폈으나 마땅한 게 보이지 않는다. 나중엔 외투를 덮고 잘 요량으로 베개를 슬그머니 빼내는데 잠든 줄 알았던 김하준이 베개를 턱 붙잡는다.
놀란 정인이 흠칫했다. 김하준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정인이 가져가려던 베개를 원위치시킨 다음 툭툭 두드렸다.
“그냥 자.”
“이불 더 없어?”
“없어.”
정인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는 침대로 올라가는 대신 자신의 짐 가방을 열어 로션을 찾아냈다. 우선 다른 일을 하며 김하준이 잠들기를 기다릴 작정이었다. 로션 뚜껑을 여는데 역시나 쉽질 않다. 앞니로 물고 돌리려고 했더니 보다 못한 김하준이 침대에서 내려와 로션을 낚아챈다.
김하준은 로션을 자신의 손에 듬뿍 덜었고 그대로 정인의 얼굴에 문지르려고 했다. 정인이 얼굴을 피하자 오라며 눈짓을 한다. 마지못해 가져다 댔더니 처덕처덕 바른다. 거기다 앞머리까지 5대5 가르마로 이상하게 만들었다. 하지 말라며 팔을 치자 로션 묻은 손으로 더 꽉꽉 누른다.
“하지 마. 죽는다.”
인상을 쓰며 쏘아붙이는데도 능글대고 웃는다.
“왜 잘 어울리는데?”
하지 말라고 팔을 저었으나 한쪽 팔로 김하준을 당해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김하준은 정인의 양 뺨을 눌러 호떡처럼 만들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이내 붕어처럼 볼록해진 정인의 입술을 보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침을 꼴깍 삼키고는 표정을 굳혔다.
슬그머니 입술을 가져다 대려고 하자 정인이 이마를 밀어냈다.
“하지 마.”
머쓱해진 하준은 아랫입술을 한 번 빨고 얼굴을 놓아준 뒤 돌아섰다.
“자자.”
김하준의 목덜미와 귓불이 빨갛게 물드는 걸 봤지만 정인은 모른 척하며 침대로 향했다. 김하준이 침실의 조명을 조금 더 어둡게 바꾸고 나서 침대로 올라온다. 정인은 그를 외면한 채 몸을 돌려 누웠다. 침대 사이즈가 커 부딪칠 일은 없었으나 같은 곳에 누워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게다가 눈을 꼭 감으니 움직이는 기척과 숨소리가 유독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러다 침대 아래로 떨어지겠어.”
정인이 눈을 떴다. 바닥이 바로 내려다보인다. 저도 모르게 침대 바깥쪽으로 꾸물꾸물 기어 왔나 보다. 가만히 있었더니 뒤에서 김하준이 옷자락을 잡아당긴다.
“반대로 누워. 팔 불편하잖아.”
“괜찮아….”
“말 좀 들어라.”
어깨를 잡아당기는 힘에 몸이 뒤집혀 바로 누웠다. 고개를 돌리자 김하준의 얼굴이 보인다. 어둡지만 희미한 불빛으로 인해 그가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민망해져 고개를 바로 한 채 눈을 감았다. 하준이 팔로 어깨를 감싸 안고 바싹 옆으로 붙는다. 그냥 뒀더니 나중엔 귀와 어깨 사이로 얼굴을 밀착했다. 정인이 목을 움츠리며 팔꿈치로 하준을 밀었다.
“떨어져.”
“너한테서 좋은 냄새 나.”
“거짓말. 머리도 못 감았어.”
“아니, 그거 말고, 예전부터 나던 거.”
곧이어 그는 숨을 깊게, 더 깊게 들이마시며 마치 정인의 모든 향을 집어삼킬 기세로 코를 목덜미에 문질렀다. 상체를 감싼 팔에 힘이 실리는 게 느껴진다. 힐긋 눈동자를 움직여 보니 꼭 감은 김하준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리고 그의 턱이 딱딱하게 경직되는 걸 알아챘다.
정인은 긴장했다. 어째서 자신에게 오메가 특유의 향이 나는지는 모르겠으나 갑자기 예전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침잠했다. 한편으로는 대놓고 욕정을 내비치는 김하준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좋은 말로 할 때, 떨어져.”
낮은 경고에도 김하준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김하준의 호흡에만 집중하느라 그의 손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뒤늦게 인지했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그의 손이 바지 안에서 움직이는 걸 확인하고 정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 미친 새끼!”
정인이 일어나 앉으려고 하자 그가 어깨를 눌러 다시 눕힌 뒤 귓가에 속삭인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 잠깐만. 잠, 후,”
목소리가 욕망에 휩싸여 음습하다. 당황한 정인은 머리를 움직여 하준의 얼굴을 들이받으려 했다. 그러자 하준이 그대로 정인의 뒤통수를 끌어다 입술을 삼켜 버린다. 김하준이 페로몬을 지독하게 내뿜는다는 것을 짙어진 향을 통해 알았다. 그는 자신의 바지 속에서 손을 바삐 움직이며 정인의 입술을 탐욕스럽게 핥아 댔다.
정인도 생불이 아닌지라 몸이 달아오르긴 마찬가지였다. 입 안으로 들어온 김하준의 혀가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예전엔 존나 못해서 사람을 빡치게 하더니, 이젠 능수능란하다. 기분이 묘하면서도 나쁘진 않다. 잠시 입술이 떨어지자 하준이 뺨을 핥다가 목을 타고 내려가며 자연스럽게 몸 위로 올라온다.
정인이 멀쩡한 나머지 손으로 하준의 어깨를 잡아 제지했다.
“그, 그만.”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김하준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묻는다. 안 돼? 키스까진 좋았으나 김하준이 뭘 하려는지 정확히 인지하자 덜컥 겁이 났다. 어린 시절 막연하게 생각했던 그 행위는 바뀌어 버린 형질로 인해 이젠 공포가 됐다. 고개를 세차게 젓자 김하준이 재차 확인한다. 진짜 안 돼?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정인의 어깨에 이마를 박으며 끙, 신음 소리를 냈다.
“젠장.”
“내려와, 무거워.”
“안고 자는 건 괜찮지?”
“…….”
“괜찮지?”
“응….”
하준은 도로 옆에 자리를 잡았고 정인의 상체를 껴안았다. 빌어먹을. 작게 욕을 하는 소리를 듣고도 정인은 모른 척했다. 한편으로는 김하준과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방금, 그거. 나한테 미안해서 참아 준 거야?”
정인이 고개를 돌려 김하준을 바라봤다. 그가 한 뼘 거리에서 두 눈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 상처 주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던 사람이 아닌 듯하다. 11년 전 자신이 좋아하던 그 모습이다.
대답하지 않자 이번에도 입술이 포개진다. 끈적한 키스가 아닌 가볍게 대고 문지르며 강아지처럼 혀로 핥는다.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럽고 다정한 키스였다. 잠시 후 입술이 떨어지자 하준이 손으로 정인의 뺨을 어루만진다.
“나는, 아직도 널 좋아해.”
예상치 못한 말에 정인의 눈이 커졌다. 마치 첫사랑에게 하듯 풋내 나는 고백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예전 같으면 응당 나도 그렇다고 해 줬을 텐데. 정인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마음을 헤아리듯 하준은 대답을 종용하지 않고 그저 정인을 안아 주며 어깨에 뺨을 문질렀다. 잘 자.
***
“정말 괜찮은 거예요?”
정인은 검은색 새끼 고양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보금자리로 아침 일찍 서 집사가 왔는데 새끼 고양이도 데리고 왔다. 어미를 잃은 고양이는 정인을 보자마자 마치 주인을 찾은 것마냥 달라붙었다. 서 집사는 그 반응에 신기해했다.
“자길 구해 준 사람을 알아보나 봐요. 어쩜, 영특하기도 하지.”
정인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말을 걸었다. 밥은 먹었어? 잘 잔 거야? 녀석은 알아들을 리가 없는데도 물을 때마다 마치 대답하듯 냐- 소리를 낸다. 이렇게 어리고 약한데 하루아침에 혼자 된 것이 딱하였다.
그러는 동안 출근 준비를 마친 김하준이 나온다. 녀석은 김하준을 보자 반가운 듯 쪼르르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정인은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다. 남의 속도 모르고 김하준이 고양이를 안고서 싱긋 웃으며 물었다.
“이름을 뭐라고 불러 줘야 할까?”
시선은 고양이가 아닌 정인에게 날아와 박혔다. 정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조금 키우고 싶은 마음이 있긴 했는데, 저도 더부살이를 하는 마당에 고양이까지 키운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었다. 하준이 고양이를 정인에게 넘겨주며 인사했다.
“아빠 출근하고 올게, 엄마랑 놀고 있어.”
그 말에 정인이 인상을 쓰자 기습적으로 뺨에 쪽, 키스를 날리고 이따 보자며 배웅할 새도 없이 사라진다. 정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 집사의 눈치를 살피는데 그녀가 뿌듯하게 웃었다.
“사고 난 건 속상하지만, 두 분 사이가 부쩍 가까워진 것 같아 너무 기쁘네요.”
하하, 정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당신의 고용인, 그러니까 김 회장을 생각하면 마냥 기뻐할 일이 아닐 텐데요. 그 말이 목 아래까지 올라왔다. 서 집사가 음식을 준비하러 간 동안 고양이와 놀고 있는데 전화가 울린다. 김 회장이다.
기다렸다는 듯 오는 연락에 숨통이 훅 조여 오는 것 같았다.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자 고양이가 바라보며 냐- 하고 운다. 무슨 일 있어? 라고 묻는 듯하여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인은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
“혐의점이 없어요. 알리바이도 확실하고요.”
“그럼 아직 못 찾은 겁니까?”
“예. 조사 중인데, 당일에 워낙 비가 많이 온 데다 범인이 교묘하게 CCTV 사각지대로만 움직였어요.”
“단지 안에 사는 사람일 확률은요?”
하준의 질문에 형사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준이 사는 곳은 일명 젊은 부자들이 많이 거주했는데 그들을 조사하는 데는 아무래도 절차와 시간이 꽤 소요됐다.
“저희가 근처에 사시는 분들 개인용 CCTV 확보해서 확인하고 있거든요. 자세한 사항 나오면 즉시 알려 드릴게요.”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넷상에서 용의자일 것이라고 사람들이 추측하던 장 의원의 선거단원은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그것에 관해선 언론에서도 크게 다루지 않았다. 얼굴은 모르지만, 용의자였던 사람은 하루 동안 지옥과 천국을 오갔을 것이다. 그런 소문을 퍼트린 게 누굴지 대충 짐작은 된다.
하준은 형사에게 연락 달라는 말을 남긴 뒤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차를 주차해 놓은 곳으로 가는데 저 멀리서 키 큰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검은색 가죽점퍼를 걸친 그는 전에 만난 이한 형사였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이한이 특유의 서글서글함으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네, 오랜만입니다.”
그러나 하준은 그가 전혀 반갑지 않았다.
“정인 씨 괜찮나요? 소식 듣고 깜짝 놀라서 계속 연락했는데, 받질 않으시더라고요.”
아, 그래요? 하준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한은 담당 형사에게 이것저것 들었는지 대충 상황을 알고 있었다. 아니, 생각보다는 더 자세히 알고 있어 하준은 그것 또한 못마땅했다.
“이해수 사건 용의자는 밝혀졌습니까?”
이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요.
“안타깝네요.”
“네, 본인이 소환조사에 응하질 않으니 저희로서도 방법이 없네요.”
보아하니 확실한 증거도 없는 듯하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짐작하건대 사건은 쉽사리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한 형사는 류정인에게 더 매달릴지 모른다. 하준은 죽은 이해수가 안타깝기는 하였으나, 정인이 더는 위험에 빠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한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형사님이 제 파트너의 도움이 필요한 건 알겠는데, 확실하게 범인을 잡은 게 아니면 되도록 연락은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단호한 태도에 이한이 입술을 꾹 말아 문다.
“이번 일로 저도 찜찜한 게 많아서요. 혹시 압니까. 그 사건 저지른 놈이 증인을 없애려고 벌인 일일지도요.”
이한은 부정하지 않았다. 아마 그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머쓱하게 웃는 이한을 향해 하준이 고개를 까닥, 인사했다. 그럼. 그를 지나쳐 차를 향해 걸어가는데 뒤에서 이한이 부른다.
“김하준 대표님.”
돌아보자 그가 앞으로 다가왔다.
“그거 아세요? 죽은 이해수 씨 다이어리에 대표님을 참 좋은 사람이라고 적었더라고요.”
하준의 표정이 오히려 냉랭해졌고 이한은 아차 싶었다. 상대방의 얄팍한 동정심을 자극해 보려고 했으나, 씨알도 안 먹힌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뭡니까.”
김하준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이한이 웃음으로 매듭지었다.
“힘드시겠지만, 앞으로 협조 부탁드린다고요.”
그 말에 하준은 대답 대신 말을 돌렸다.
“이야기 끝났으면 그만 가 봐도 될까요? 저도 바쁜 일이 있어서.”
“네, 그러셔야죠.”
돌아서서 가는 하준을 보며 이한은 웃음기를 거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다, 어려워. 위에선 더 나서지 말라고 압력을 넣는데 자신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
차가 멈추자 기사가 내려 뒷문을 열어 준다. 김 회장의 본가를 올려다보자 한숨부터 터져 나왔다. 기사를 보낼 테니 잠깐 집으로 오라는 연락에 정인은 거절할 명분을 찾지 못하였다. 막말로 김 회장은 돈을 주고 저를 고용한 고용주 아닌가.
들어가기 전 옷 상태를 한 번 더 점검하는데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가 진동한다. 김하준이다. 정인은 고심 끝에 전화를 끄고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김 회장과 이야기를 마치고 나온 뒤에 통화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비서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자 김 회장의 부인이 나오며 정인을 맞이한다.
“왔니?”
“안녕하세요.”
“몸은 어때? 괜찮아?”
뜻밖에도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 있다. 정인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습니다. 그녀는 붕대 감긴 팔과 이마에 붙은 거즈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아픈 애를 집까지 부르고 그러신다니.”
은근히 김 회장에 대한 책망이 담겨 있다. 정인이 어색하게 웃으니 올라가 보라며 위를 가리킨다. 정인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위층으로 향했다. 고풍스러운 1층과 마찬가지로 2층 역시 한옥을 떠올리게 하는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다. 복도를 지나자 비서가 마지막 방에서 문을 두드린다.
곧 문이 열리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수백 권의 책들이 꽂힌 커다란 책장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김 회장이 적갈색 마호가니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적고 있다가 고개를 든다. 정인이 인사하자 그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쓰고 있던 돋보기를 벗으며 일어섰다.
“왔군. 거기 앉아.”
정인이 자리에 앉자 비서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해 준다. 정인이 올 것을 알았는지 갓 우려낸 듯한 차가 앞에 놓여 있다. 찻잔에 머물던 정인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여 신문에 가 닿았다. 정인의 사건 기사가 실렸는데, 사건의 피해자는 정인인데 대신 김 회장의 얼굴이 크게 나왔다.
“이번에 많이 놀랐지? 그래도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정인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가족 모임이 아닌 김 회장과 단둘이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불편했으나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고 불을 붙였다.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자 이마에 주름이 짙어진다. 김하준과 묘하게 닮은 듯 다른 얼굴이었다. 정인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테이블 언저리만 쳐다봤다.
“요즘 하준이하고 사이는 어때? 서 집사 말로는 둘이 꽤 친해졌다고 하던데.”
서 집사가 어디까지 말했는지 모르겠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하준이가 알았다며. 베타인 거.”
정인이 흠칫 몸을 굳혔다. 김 회장의 첫째 조건이 누구한테도 베타임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인의 표정이 잔뜩 굳어지자 김 회장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그 녀석은 베타한테는 관심 없어. 그래서 자네를 택한 이유도 있고.”
알고 있던 사실인데도 그 말이 칼날처럼 훅 날아와 비수로 꽂힌다. 입이 바싹 마르고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목을 축이려 차를 마시고 싶었으나 긴장한 것을 들킬까 염려되어 관두었다.
“힘들겠지만 남은 시간만 잘 버텨 주게.”
정인은 입을 달싹였다. 김하준과 저의 예전 관계에 대하여 지금이라도 밝혀야 하지 않을까. 그러다 문득 김 회장이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다면 답이 나온다. 이렇게 지내다 때가 되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란 얘기다.
“참, 오늘 부른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김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갔고, 무언가를 들고 와 건넸다. 종이를 받아 든 정인의 낯빛이 조금 전보다 더 굳어졌다. 기사 전문이었는데, 이번 사고로 정인이 유산되었다는 내용이다. 놀랍게도 보도 날짜는 내일 아침이었다.
당황하여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사람들 말이야, 자극적인 걸 참 좋아해. 이 기사가 나가면, 범인의 유무나 진실 따위엔 관심이 없어질 테지.”
정인은 손에 쥔 종이와 김 회장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가 도와주게. 속내를 까발리는 것 같아 창피하네만, 어떻게든 난 이 선거에서 이기고 싶어.”
거짓으로 사람들의 동정심을 이용해 표를 얻겠다는 소린가. 나중에라도 사실이 밝혀지면 김 회장도 김 회장이지만 정인의 입장은 뭐가 되는 건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
“이건… 거짓말이잖아요.”
“말했잖나. 진실은 중요한 게 아니야. 누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느냐, 누가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느냐, 그게 중요한 거지.”
인터넷에선 아직 사고의 배후에 장 의원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신문 기사가 나가면 거기다 기름을 붓는 꼴이 될 것이다. 정인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손에서 기사를 놓지 못하였다. 이런 거짓말까지 하면서 선거를 치러야 하나. 만약 나중에 모든 사실이 밝혀지면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문득 김 회장이 발을 빼고 저 혼자 덤터기를 쓰는 그림이 그려진다. 설마 하면서도 그가 지금 하는 일들을 보면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안 된다고 말하자. 솔직하게 김하준과의 관계를 털어놓자. 말을 하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린다. 소리에 놀라 돌아보던 정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나타난 김하준은 제 아버지한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정인에게 곧바로 다가왔다.
“넌 애비한테 인사도 안 하냐?”
“아픈 애를 왜 부르셨어요? 뭘 작당하시려고요.”
늘 있는 일인 듯 김 회장은 태연했다. 하준은 당황해하는 정인의 멀쩡한 팔을 붙들어 일으켜 세웠다. 뒤늦게 김 회장의 처가 쫓아 올라와 뒤에서 상황을 주시했다. 하준이 정인을 보며 속상한 기색을 내비쳤다.
“자기야. 스트레스받게 여긴 왜 왔어. 집에서 쉬지.”
나긋나긋한 말투와 들어 본 적 없는 호칭에 정인의 얼굴이 아연실색하게 변했다. 놀라긴 김 회장 부부도 마찬가진지 표정이 굳는다. 정인이 붙잡힌 팔을 빼내려고 하는데 김하준이 힘을 주며 이를 악물고 웃는다.
“집에 가자.”
입은 웃는데 눈빛이 흉흉하다. 앞에 있는 김 회장보다 이젠 김하준이 더 무섭다. 빨리 가자며 정인을 끌고 나가려던 하준이 뒤늦게 책상에 놓인 종이를 발견하곤 멈칫한다. 정인이 알아채고 뒤집어 놓으려 했으나, 김하준이 한발 빨랐다.
종이를 낚아챈 그의 눈빛이 달라졌고 김 회장은 여전히 느긋했다.
“잔소리할 생각 마라. 이건 류정인과 내 계약에 관한 일이다.”
하준은 망설일 것도 없이 종이를 찢어 테이블에 던지고 거침없이 쏘아붙였다.
“그렇게 쇼가 하고 싶으면 차라리 아버지가 임신했다고 거짓말을 하세요.”
여유롭던 김 회장이 발끈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야, 인마! 고함치는 김 회장을 향해 하준은 얄미운 표정으로 비웃었다.
“장담하는데 하루아침에 인기 스타가 되실걸요.”
“류정인은 나와 계약하고 돈을 받아 갔다. 그때 본인 입으로 그랬어. 어떤 일도 감수하겠다고. 직접 물어봐.”
정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김 회장에게 돈을 받으며 계약서를 썼고 분명 거기에 명시된 내용이니 할 말이 없었다.
“본인도 몰랐을 거예요. 이렇게 더럽고 추접스러운 일인지.”
더럽고 추접스럽다는 표현에 김 회장의 얼굴이 무섭게 변했다.
“약속을 어길 작정이냐!”
김하준은 테이블로 다가가 메모지를 김 회장 앞으로 밀었다. 익숙한 장면이다. 가게로 찾아와 자신에게 종이를 내밀며 원하는 금액을 적으라던 김 회장의 모습과 오버랩됐다.
하준이 한 손으로 책상을 짚으며 김 회장을 전투적인 태세로 바라봤다.
“계약 파기 바랍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금액 적으세요. 드릴게요.”
툭. 김 회장은 하준의 앞에 사진 한 장을 던져 놓았다. 그걸 본 하준의 표정이 굳었다. 류정인을 먼저 내보내고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더니…. 사진 속 교복을 입은 정인과 자신은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사진 속 정인의 얼굴에 고정했던 시선을 김 회장에게로 옮겼다.
“어린 시절 네가 그렇게 멍청한 선택을 했던 게, 설마 류정인 때문이었니.”
하준은 입을 꾹 다물고 제 아버지를 쏘아봤다. 김 회장은 하준이 죽으려고 약 먹었던 걸 두고두고 멍청한 짓이라고 이야기했다. 분에 넘치도록 다 가진 놈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 거라고.
이제 모든 사실을 알았으니 김 회장은 아들을 조금은 이해할까. 아니면 더 비난할까. 장담하건대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그렇게 정신 나간 놈처럼 살았어? 고작 베타 하나 때문에!”
“잊으셨어요? 아버지가 고작이라고 말씀하신 그 애가 지금은 아버지 며느리예요.”
“아니, 애초에 둘이 그런 사이였는 줄 알았다면 이 결혼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거다.”
하준은 속으로 실소했다. 물론 저도 처음엔 김 회장의 선택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지금은 되려 감사하다. 어쨌든 류정인과 재회하게 해 줬고 결혼까지 하게 됐지 않은가.
“하나만 묻자. 넌 아직도 그 애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거냐.”
물어보는 김 회장의 표정에서 다소 초조함마저 엿보였다. 김 회장은 질문하고 난 뒤에 조금 전 하준이 내밀었던 빈 종이를 힐긋 바라봤다. 하준이 이런 식으로 찾아와 저를 도발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말해 봐라.”
하준이 꾹 다문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렇다고 하면, 이 모든 계약은 없던 일로 해 주실 거예요?”
김 회장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계약 파기하고 제 배우자로 온전히 인정해 주실 수 있으세요?”
하준의 물음에 김 회장이 인상을 굳히고 대답하지 않았다. 우려했던 상황이 발생했다. 처음 자신의 계획은 류정인을 적당히 이용해 먹고 계약이 끝나 김하준이 이혼하면 꽤 괜찮은 집안의 오메가를 골라 제대로 혼인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김하준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얘기다.
“설령 내가 허락한다고 쳐. 그럼 너 사람들한테 뭐라고 말할 거니. 사실은 베타였다고? 별별 소문이 다 돌 텐데, 너 그거 감당할 수 있겠어?”
“전 괜찮아요. 아시잖아요? 제가 소문 무서웠으면 그렇게 살았겠어요? 문제는 아버지죠. 보세요. 지금도 선거에 지장 있을까 봐 벌벌 떠시잖아요.”
아들의 노골적인 힐난에 김 회장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러자 하준이 그런 김 회장을 측은한, 또는 달래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차피 남들한테는 한낱 가십거리예요. 금방 잊혀진다고요. 그러니 아버지만 포기하시면 돼요.”
“그래, 나는 그렇다 쳐. 네 할머니 생각은 안 하니. 노인네가 증손주 하나 볼 생각으로 여생을 사는데 기대를 저버릴 작정인 거냐.”
웃음이 났다. 김 회장은 자신의 뜻이 먹히질 않으면 꼭 돌아가신 할아버지나 살아 있는 할머니를 팔았다.
“무슨 대단한 집안이라고 대 잇는 것에 그렇게 집착하세요?”
김 회장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조상님들이 들으면 까무러치실 얘길 하는구나. 너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몰라서 그래?”
하준이 입술을 깨물었다 떼며 미간을 구겼다. 그래도 아버지니까, 이건 체면을 생각해서 평생 모른척해 주려고 했는데.
“족보 산 거 다 알아요.”
“…….”
“원래 노비였다면서요. 엄마도 모르시죠?”
김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누가 그래! 그의 양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니 사실인가 보다. 하준은 힘겨운 표정으로 뺨을 문질렀다. 김 회장은 계속해서 어떤 놈이 그런 소릴 하느냐고 고래고래 악을 쓴다.
어린 시절 술에 만취한 할아버지가 저를 붙들고 지나가는 말처럼 했는데, 그걸 이십여 년이 흐른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노비라고 제사 지내지 말란 법은 없으나, 김 회장이 돈 주고 산 족보를 내세울 때마다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기분임은 어쩔 수 없었다.
노발대발하는 김 회장을 뒤로하고 하준이 사진을 챙겨 일어섰다.
“아무튼 더는 정인이 불러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아들을 노려보는 김 회장의 눈빛이 사납다. 하준은 재차 그에게 부탁하고 난 뒤 밖으로 나왔다. 쿵, 닫힌 문 안쪽으로 무언가 맞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으나 노인네가 성질부리는 거니 그런가 보다 했다.
내려오는데 주혜련이 아래층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서 있다.
“아버지하고 또 싸웠니?”
“아니에요.”
“정인이는 먼저 나갔다. 표정이 안 좋더라. 아버지가 뭐라고 했대?”
하준이 멈칫했다. 그 애라고 부르던 호칭이 어느새 이름으로 바뀌었다. 엄마의 표정을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듯하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할머니한테도 엄마한테도 털어놓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엄마….”
그러나 하준이 입을 떼는 순간 위층에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왜 안 가고 아직도 거기 있어? 김 회장이다. 하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혜련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봤으나 더 말했다간 김 회장이 노발대발할지도 모른다.
“아니에요.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저 가요.”
심란한 마음과는 달리 창밖은 완연한 봄이었다. 길가에는 개나리가 노랗게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회색이던 도시가 점점 연둣빛으로 물들어 가는 중이었다. 그것들을 감상하던 정인은 고개를 돌려 김하준을 바라봤다. 그는 집에서 나온 뒤부터 별다른 말이 없었다.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던 김 회장은 정인을 먼저 내보내고 나서 하준과 단둘이 대화를 나눴다. 둘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나 썩 좋지 않은 김하준의 표정을 보니 그리 달가운 시간은 아니었나 보다. 차에서 기다리는 동안 김하준이 김 회장의 화를 돋우어 쓰러지게 만드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도 됐다.
건널목에서 차가 멈추고 그사이 하준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넨다.
“선물.”
그걸 본 정인의 눈이 커졌다. 하준과 어릴 적 찍은 사진이다. 이걸 왜 하준이 가지고 있을까 궁금해할 새도 없이 하준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버지가 다 알았어. 예전에 우리가 어떤 사이였는지.”
뭐? 놀라서 김하준을 한 번, 그리고 사진을 한 번.
“아버지한테 받은 돈 내가 돌려줄게. 계약도 없던 일로 할 거야.”
“하준아.”
“할머니한테도 엄마한테도 다 털어놓을게. 그러니까 넌 아버지 연락 오면 다음부터는 받지 마. 오란다고 덥석 가지도 말고.”
“김하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이 된다.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만약 둘이 다시 시작한다면 막말로 저는 잃을 게 없었다. 하지만 김하준은… 그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득해진다. 걱정하는 마음을 알았는지 하준이 붕대 감긴 손을 조심스럽게 붙들고 눈을 응시한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마.”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정인은 반대편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복잡하게 엉킨다. 김하준 곁에 있고 싶다. 저 역시 김하준을 좋아한다. 떠나고 싶지 않은 이유는 하나뿐인데, 떠나야 할 이유는 수십 가지다. 뭐가 옳은 선택인지 모르겠으나, 마음이 가는 대로 하자는 생각이 자꾸만 커지는 건 사실이다.
입술을 꾹 다물고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데 다혜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하였다.
[가게 공사 끝났어.]
그녀가 보내 준 건 화재로 탔던 가게를 수리한 모습이었다. 전과 다른 분위기의 매장 사진이 여러 개 도착했다. 한눈에 봐도 훨씬 좋다. 불나면 대박 난다는데 진짜 그랬으면 좋겠다는 다혜의 말에도 정인은 웃지 못하였다.
김하준이 슬쩍 넘겨본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정인은 사진을 하준이 볼 수 있도록 했다.
“매장. 공사 다 끝났나 봐.”
“구경 갈까?”
갑작스러운 제안에 정인의 눈이 커졌다. 지금? 하고 묻자 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안 돼?”
안 될 것 없지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하준이 차를 돌렸다. 실행력 하나는 끝내준다. 어릴 적 김하준은 뭘 할 때 한참 고민하고 생각하고 그랬는데, 지금 김하준은 거칠 게 없어 보인다. 그래서 가끔 이게 정말 내가 알던 김하준이 맞나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어? 저기 벚꽃 폈다.”
하준이 손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가정집 담 안쪽으로 매화나무가 있었는데, 그걸 벚꽃이라고 우겼다.
“매환데….”
“벚꽃이잖아.”
“그냥 봐도 매화야….”
그런가? 하더니 뭐 어떠냐고 환하게 웃는다. 잔뜩 움츠러들었던 정인의 마음이 그 미소로 조금은 여유를 찾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하준은 고교 시절 정문 앞에 있던 커다란 벚나무를 떠올리고 그것에 관해 이야기했다. 어느 봄날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때마침 바람이 불고 기다리고 있던 정인의 머리 위로 꽃잎이 떨어지는 그 장면이 유독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순간 얼마나 화사하게 웃던지 심장이 멎는지 알았다고.
“덕분에 사는 내내 봄이 싫었어. 특히 벚나무 근처는 가지도 않았지.”
정인이 미안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여 창밖만 내다봤다.
“근데 올해는 다를 것 같아.”
그의 말속에 희망이 스며든다. 정인은 고개를 돌려 다시 하준을 바라봤다. 신호를 받은 차가 멈추고 그가 갑자기 얼굴을 불쑥 들이민다. 놀란 정인이 뒤로 물러나는데 김하준의 손이 이마로 가 닿는다.
“거즈 떨어졌다. 집에 가서 새걸로 붙이자.”
아, 놀래라. 무안해하며 귀 끝이 빨개지는데 그 틈에 김하준의 입술이 뺨에 쪽,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가 떨어져 나간다. 기다렸다는 듯 신호가 바뀌었고 차가 출발했다. 둘 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굴었으나 결국 정인은 목까지 붉어져 덥다는 핑계를 대며 창문을 열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