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14)

 06

일식집에서 저녁을 먹고 밖으로 나오는데 보도블록이 움직인다. 옆의 가로수도 휘었고, 전봇대도 따라서 움직이고. 정인은 자신이 취했음을 인지했다. 반면 저만큼 앞서가는 김하준은 오늘따라 술을 한 잔도 입에 대질 않았다.

“정인 씨 괜찮아요? 취한 건 아니죠?”

옆에서 이서린이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김하준의 이종사촌이라고 했다. 김하준이 조금 더 일찍 말해 줬다면 오해할 일도, 김하준에게 러트가 찾아온 날 몰래 숨어서 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의성이 다분했다. 

앞서가는 김하준의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문득 이서린이라면 김하준의 불면증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묻기도 전에 김하준이 멈춰 서더니 돌아서서 다가온다.

“나는 류정인 데리고 이만 들어갈게. 얘 많이 취했어.”

그 말에 반박하듯 정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안 치했어.”

그러자 이서린이 입을 틀어막으며 너무 귀엽다고, 다시 한번 말해 보라고 한다. 정인이 안 치했어요. 안 치했어. 라고 하자 그녀는 물개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술 취해도 무뚝뚝한 남자 형제들만 보다가 복숭아처럼 하얗고 예쁘게 생긴 류정인을 보니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건지 모르겠다며.

“하준아. 정인 씨, 내가 데려갈까?”

이서린의 말에 김하준이 정인의 팔을 끌어당기며 인상을 썼다. 그렇게 이서린의 등을 떠밀어 보낸 뒤에 김하준은 운전석에 앉았다. 저 멀리 이서린이 사진작가 김영현의 팔짱을 끼고 가는 모습이 보인다.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 남들은 저 둘을 가리켜 완벽한 커플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완벽하다는 기준이 형질에 있는 거라면 하준은 그 말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시동을 거는데 류정인이 눈을 감고 몸을 뒤척인다. 으음. 그러다 갑자기 눈을 뜨더니 운전대를 잡은 하준을 보면서 깜짝 놀란다.

“너 술 먹고 운전해?”

“술은 너만 먹었어.”

정인은 아니라고, 너도 먹었다고 없는 말을 박박 우겼다. 하준이 그냥 자라며 의자를 뒤로 젖혔는데 오뚝이처럼 일어나서는 운전하면 안 된다고 팔을 붙잡는다. 아아, 이걸 때려서 기절시킬 수도 없고. 

얌전히 자라고 이번엔 이마를 꾹 누르는데 류정인이 그 손을 잡는다. 문득 하준의 눈에 류정인이 찬 손목시계가 들어왔다. 못 보던 건데, 모양은 그렇다 치고 가죽이 영 싸구려 같았다. 시계를 만지려고 하니 류정인이 팔을 휘젓는다.

“악! 하지 마. 만지지 마.”

하, 가지가지 한다. 하준이 혀를 찬 뒤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옆에서 씩씩대던 류정인은 출발하고 얼마 뒤 의자에 기대 곯아떨어졌다. 잠시 신호를 받아 대기하는 동안 고개를 돌려 류정인을 봤는데 목이 오른쪽으로 완전히 꺾여 자세가 불편해 보인다. 

하준은 손으로 그의 머리를 정가운데로 옮겨 놔 줬다. 그리고 그는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닌 반대편으로 핸들을 꺾었다. 내비게이션 역시 집이 아닌 다른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외곽에 있는 한 병원이었다.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밤에 야간진료를 보는 곳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하준은 뒷좌석에서 모자를 챙겨 눌러쓰고 안경을 착용했다. 그러고 나서 류정인을 보조석에서 내리게 했다.

“민아야, 삼촌 잡아. 빨리!”

술주정하는 류정인을 부축해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데스크에 앉아 있던 간호사가 쳐다본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하준은 일단 정인을 의자에 앉혀 놓고서 간호사에게로 갔다.

“술을 많이 마셨는데, 갑자기 과호흡을 일으켜서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류정인이 옆으로 풀썩 쓰러져 눕는다. 간호사가 아, 하는 탄식을 흘렸다.

“일단 안쪽에 침대 있는데 거기 눕히시겠어요?”

하준이 정인을 부축해 안쪽으로 데리고 가 간이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줬다. 류정인은 잠을 자듯 조용했다. 시간이 5분 정도 흐르자 나이 지긋한 의사가 커튼을 젖히며 등장한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는 눈이 침침한지 눈꺼풀을 힘주어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어디가 아프다고요…?”

“예, 친구가 술 먹다가 갑자기 과호흡이 와서요. 숨을 못 쉬겠다고 해서 데려왔어요.”

“전에도 이런 증상이 있었나요?”

“아니요. 처음입니다.”

“술을 적당히 먹지. 젊은 사람이, 쯧쯧.”

의사가 혼잣말하며 청진기를 댔다가, 류정인의 눈을 까뒤집고 펜 라이트를 비춘다. 류정인이 하지 말라며 손을 쳐 내자 그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냥 술 취한 것 같은데. 옆에서 하준은 과호흡이 맞다고 박박 우겼다. 

의사가 맥박을 체크하더니 외관상 이상이 없다며, 정 걱정되면 수액이나 하나 맞고 가라고 이야기한다. 하준은 나가는 의사를 뒤따라가 목소리를 낮췄다.

“선생님. 죄송한데, 혹시 페로몬 검사 여기서도 되나요?”

“페로몬 검사?”

“예, 친구가 베타인데, 뒤늦게 발현이 된 것 같다고 자꾸 그래서요.”

“발현될 나이는 지난 거 같은데….”

“안 돼요?”

“뭐 안 될 것 없죠.”

의사가 지시를 내리자 간호사가 심드렁한 얼굴로 정인의 팔에서 피를 뽑았다. 바늘이 들어가자 류정인이 미간을 움찔거린다. 혹여라도 깰까 봐 하준은 긴장하며 쳐다봤다. 결과가 나오려면 3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예전엔 며칠씩 걸렸는데, 요즘은 기술이 좋아졌다며. 

더 필요한 건 없느냐는 질문에 하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진료 카드 작성해 주시겠어요?”

하준은 간호사가 내민 종이에 류정인이 아닌 이두영의 인적 사항을 적었다. 두영이 알면 난리를 치겠지만, 뭐 어쩌랴. 다음에 저도 한 번 도와주면 되는 거지. 병원비까지 계산하고 자리로 돌아가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류정인은 수액을 맞으면서 쌔근쌔근 잘도 잔다. 몇 번 몸을 뒤척이긴 했으나 저번처럼 옷을 벗고 뛰어다니는 술주정은 부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옆에는 다른 환자가 방문했다. 

젊은 남자의 등에 업혀 온 노인이었는데, 화장실에 가는데 갑자기 어지러워 주저앉았다며 나 죽는다고 고함을 지른다. 간호사의 태도를 보니 자주 오는 단골손님인 듯하였다. 아무 이상 없다고 수액이나 하나 맞고 가라는 의사의 말에 노인의 반응이 잠잠해졌다. 

3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지긴 처음이다. 그때 수액을 맞고 있던 정인이 으음, 인상을 쓰더니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뜬다. 잔뜩 미간을 찌푸린 그는 쏟아지는 빛에 링거가 꽂힌 손으로 눈을 비비려 했다. 하준이 급하게 잡자 정인이 하준을 쳐다본다.

“어? 김하준….”

그러더니 주위를 한 번 보고 손에 링거도 보고 도무지 영문 모를 표정을 짓는다. 빌어먹을. 하준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술을 더 먹이는 건데. 정인이 일어서려 하기에 하준이 그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누워 있어.”

“여기 병원이야? 내가 왜 여기 있어?”

“기억 안 나? 너 술 먹고 뛰다가 갑자기 쓰러졌어.”

“무슨 소리야. 차에 멀쩡히 탄 거까지 기억하는데.”

“아니,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려서 쓰러졌다고.”

내가?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렸다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에 하준은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인이 기가 막혀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하다 하다 이젠…. 진짜 술 먹지 말아야겠다.

정인이 충격에 휩싸여 있는 동안 하준은 눈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3시간이 넘어가는데도 별다른 얘기가 없으니 점점 초조해졌다. 만약, 혹시라도 만약에, 자신이 의심하는 그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으나 모든 정황이 너무도 뚜렷하지 않은가. 

“이두영 환자 보호자분!”

간호사의 목소리에 하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인이 영문 모를 표정으로 쳐다보길래, 하준이 그를 다독였다.

“혹시 몰라서 다른 사람 이름으로 등록했어. 괜히 소문나서 좋을 거 없잖아.”

“아….”

“여기 가만히 누워 있어. 나오지 마.”

눈빛으로 강하게 이야기하자 정인이 누운 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서도 아직 술이 덜 깼는지 그는 자꾸 주위를 두리번댔다. 하준은 커튼을 치고 나서 간호사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진찰실로 들어가니 의사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검사지를 보고 있다.

“음….”

주름진 그의 입술이 조개처럼 꽉 다물렸다. 하준은 그의 입술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입을 뗀다.

“맞네요, 베타.”

하준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맞아요? 

“예, 맞아요.”

의사가 끄덕이더니 검사지를 내민다. 여기 보이시죠? 우리 병원이 작아도 이런 검사는 틀리지 않는다며, 다행히 친구가 베타라고, 안심해도 되겠다고. 김하준의 귀에는 그저 윙윙대는 소리로 들렸다. 믿기지 않아 결과지를 보고 또 봤다.

“특이하게 오메가 형질이 약간 섞였네요. 이런 경우 오메가라고 할 순 없어요. 하지만 페로몬 향을 느끼거나 하기는 하죠. 그래서 본인이 오메가라고 착각했을 순 있겠네.”

충격받은 얼굴로 앉아 있으니 의사가 검사지를 눈앞에 흔든다. 괜찮아요? 하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그제야 모든 것들이 이해가 됐다. 넋을 놓은 사람처럼 터덜터덜 걸어와 데스크 앞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니 간호사가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하준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정면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류정인이 나한테 한 거짓말이 그러면…. 정신 줄을 놓은 사람처럼 헛웃음이 마구 나왔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류정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커튼을 젖히자 그가 고개를 돌린다.

“왔어? 의사가 뭐래?”

하준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가도 된대?”

그동안 벌어진 일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대체 나한테 왜 그랬냐고 따지던 날, 어째서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말이 없어진 하준을 보며 정인은 눈치를 살피고 이름을 불렀다. 김하준? 하준아.

***

“베타 맞습니다.”

의사의 말에 김은혜가 탄식을 내뱉으며 저도 모르게 아들을 돌아봤다. 정인은 고개를 떨군 채 자신의 발끝만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며칠 전 정인이 집으로 와 어렵게 말을 꺼냈고, 설마 하는 마음으로 벌써 몇 군데나 병원을 옮겨 다니며 검사를 진행했는데 모두 베타로 판정을 받았다. 

“태어났을 때는 오메가의 형질이 더 강했을지 모르나, 자라면서 점차 베타로 바뀐 경웁니다.”

김은혜가 의사를 보며 물었다.

“이런 경우가… 많나요?”

“있긴 한데, 드물죠.”

김은혜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남편이 알파이고 자신이 오메가인데 아들이 베타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걱정은 따로 있었다. 정인이 그 사실을 안 뒤부터 밥도 먹지 않고, 며칠째 물만 먹어도 게워 낼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심 어린 김은혜를 보며 의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아직 어린 친구라 많이 혼란스러울 겁니다. 물론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죠. 혹여 원하시면 심리치료 같은 것도 같이 진행하셔도 됩니다. 확인서가 필요하시면 따로 말씀하시고요. 그리고 가능하면, 성인이 되기 전에 정정 신고 하시는 게 아드님을 위해서도 나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김은혜는 아들을 데리고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그러고 나서 정인의 등을 어루만지며 눈빛으로 위로했다. 김은혜가 수납하러 가려고 하는데 정인이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돌아보자 정인이 입술을 고집스럽게 다문 채 움직이질 않고 있다.

“정인아. 왜?”

“나중에…. 나중에 하면 안 돼요?”

“응?”

“정정 신고요…. 그건 나중에요….”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정인이 울음을 참는 표정으로 우물댔다.

“바뀔 수도 있잖아요….”

목소리 끝이 떨려 오는 아들을 보며 김은혜는 할 말을 잃었다. 여전히 정인은 검사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김은혜는 자신의 옷자락을 잡은 아들의 손을 감싸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럼.”

며칠 제대로 먹지도 못하더니 얼굴이 거칠어졌다. 학교에 가지 말고, 수액을 맞고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에 정인은 고개를 저었다. 김은혜는 하는 수 없이 정인을 보육원 봉고차에 태워 학교 앞에 내려다 줬다.

차에서 내린 정인은 멀어지는 봉고차를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 학교로 들어갔다. 하늘은 눈부시게 파랬고 교문 앞을 지키고 있는 벚나무에서는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눈처럼 휘날렸다.

베타로 판정을 받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하나였다. 그럼 김하준은? 김하준한테는 뭐라고 하지. 갑자기 베타로 바뀐 나를 이해해 줄까? 학교에도 정인이 아는 알파와 베타 커플이 딱 하나 있었으나 그들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늘 둘만 어울려 다녔다.

그래, 남들이 뭐라고 하면 어때. 김하준하고 나만 좋으면 됐지. 김하준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김하준은 착하니까, 자신이 뭐가 됐든 좋아해 줄 것 같았다. 운동장 중간쯤 걸어가니 생각이 정리되는 듯하였다. 우선 솔직하게 말하자. 

교실로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는데 한 친구가 와서 아는 척을 한다.

“야 류정인 너 학교 왜 계속 빠졌어? 박성연 무서워서 도망갔었냐?”

정인이 가라고 손짓했는데도 그는 계속 말을 걸어왔다.

“진짜 무서워서 도망갔던 건 아니지?”

정인이 이를 꽉 물고 그를 노려봤다.

“꺼져, 병신아.”

그가 움찔해서 돌아섰고, 정인은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마침 김하준에게 메시지가 온다. 

[학교? 점심시간에 교실로 갈게.]

결석한 며칠 동안 김하준에게서는 계속 연락이 왔다. 몸살인 것 같다고 둘러대자 병문안을 하러 가도 되느냐고 묻기도 했다. 정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이따 보자고 답장을 보내 놓았다.

4교시 수업이 시작되자 정인은 맨 뒷자리에 앉아 아이들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평소엔 별 관심 없던 아이들의 존재가 그제야 다시 보인다. 저도 모르게 알파와 오메가 베타를 구분 지어 살피고 있었다. 

딱히 서열이 있다거나 편을 가르는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 알파와 오메가끼리 어울리고 베타는 베타끼리 어울리는 경우가 많았다. 정인의 친한 친구들 역시 알파와 오메가가 대부분이었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교과서를 펼쳐 놓고 애써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마침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급식실로 향한다. 정인아 밥 먹으러 가자. 같은 반 친구의 말에 생각이 없다며 그대로 책상에 엎드렸다. 그런데 잠시 뒤 누군가 와서 등을 두드린다. 고개를 든 정인의 눈에 김하준의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이 보였다.

“괜찮아? 아직도 아파?”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니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아프긴. 류정인, 너 학교 나오기 싫어서 구라 친 거지?”

영우가 팔로 목을 감으며 장난을 걸자 하준이 인상을 쓰고 영우의 팔을 떼어 냈다.

“하지 마. 정인이 아프잖아.”

평소라면 웃으면서 장난을 받아쳤을 정인이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누워서 자려고 하니 하준이 그래도 밥은 먹으러 가자며 일으켜 세운다. 하는 수 없이 급식실로 이동해서 식판을 받아 자리에 앉았는데 도저히 밥알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는다. 

언제 얘기하지. 집에 가는 길에? 아니면 점심 끝나기 전에? 머릿속에선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영우는 앞에서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고, 하준은 젓가락으로 밥알만 세고 있는 정인을 걱정스럽게 보다가 제 식판에서 정인이 좋아하는 소시지를 집어 옮겨 줬다. 먹어.

정인은 그런 김하준을 바라봤다. 생각은 점점 더 많아진다. 아니면 조금 더 지켜볼까. 혹여 다시 오메가로 바뀔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헛된 바람인지를 스스로 알고 있었다.

도무지 수저를 들지 못하자 하준이 그런 정인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일어나 매점으로 가서 정인이 좋아하는 딸기우유를 사 왔다.

“밥이 싫으면, 이거라도 먹어.”

빨대까지 꽂아서 주자 맞은편에 앉은 영우가 질색한다.

“진짜 눈꼴 시려서 못 봐 주겠다.”

그때 급식실 안으로 학생 둘이 들어온다. 밥을 먹던 아이 중 몇 명이 그들을 힐긋거리며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둘은 밥을 퍼서 조금 떨어진 곳 구석진 자리로 가서 앉았다. 

정인도 다 아는 얼굴이었는데, 그들은 학교의 유일한 알파와 베타 커플이었다. 밥을 먹던 영우가 그쪽을 보며 목소리를 낮추고 한마디 했다.

“쟤들, 생각보다 오래 사귀네.”

그러더니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주절 떠든다.

“알파하고 베타라니 웃기지 않아?”

꿀꺽, 정인이 우유를 삼키다 말고 영우를 빤히 쳐다봤다. 영우가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짓는다. 마치, 자신이 가장 징그러워하는 바퀴벌레를 볼 때처럼.

“그렇잖아. 남성 알파와 여성 베타도 아니고, 상대가 남자 베타라니. 누가 생각해도 이상한 조합이지.”

보통 알파와 오메가들은 자기들끼리 연애하는 경우가 많았다. 페로몬 때문인 것도 있었고, 그 외 기타 문제들로 베타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간혹 알파와 베타가 사귀는 경우가 있었는데 보통 알파 남성이 베타를 사귄다면 베타 여성이었지, 베타 남성인 경우는 드물었다. 

정인이 잠자코 있자 영우가 기어코 김하준까지 끌어들인다.

“안 그래, 하준아?”

하준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정인은 태연한 척하였으나 손은 식탁 아래로 내려가 손톱에 있는 거스러미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러면서 김하준을 바라봤다. 차마 네 생각은 어떠냐고 묻지 못하고서 눈빛으로만 바라고 또 바랐다. 넌 아니지? 김하준, 넌 이해할 수 있지?

잠시 고민하던 하준이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아무래도.”

예상치도 못한 말에 정인은 칼로 심장을 찔린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다음은 뭔데? 묻지 못한 말이 입 안에 맴돌았다. 정인이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하준이 왜 그러냐며 얼굴을 가까이 살피고 걱정스러워한다. 

정인은 재빨리 시선을 피하고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손끝이 찌릿하다. 거스러미가 뜯겨 나가 피가 난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하준은 정인이 마시던 우유를 가리켰다.

“우유도 별로야? 다른 거 사다 줄까?”

앞에 앉은 영우도 의아한 표정이다. 너 괜찮아? 정말 많이 아픈 거였어? 그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댄다. 기다렸다는 듯 김하준의 페로몬 향이 훅 느껴진다.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더라면…. 

정인은 황급히 식판을 챙겨 들었다. 하준이 같이 일어서서 따라 나오려고 하길래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 머리 아파. 먼저 갈게. 너희 먹고 와.”

막 가려는 순간 뒤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정인은 식판을 든 채 뒤를 돌아봤다. 박성연이 알파와 베타 커플 앞에서 그들을 조롱하고 있었다. 둘 중 누가 위야? 베타하고 하는 건 느낌이 어때? 

박성연 뒤에 있던 무리도 웃고 난리가 났다. 아이들은 박성연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속내는 박성연과 비슷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커플 중 하나가 일어나서 박성연을 노려보자 그가 손가락으로 툭, 툭, 이마를 건드렸다. 

“뭐, 어쩌라고 새끼야. 밥이나 먹어.”

정인은 식판을 한 손에 들고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하준이 상황을 눈치채고 급하게 일어서며 정인을 붙잡으려 했으나, 이미 한발 늦었다. 야 박성연! 이 씨발놈아! 커플을 괴롭히고 있던 박성연이 돌아봤고, 정인은 곧바로 식판을 그의 얼굴에 던져 버린 뒤 덤벼들며 주먹을 날렸다.

***

정인은 자신의 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바늘 자국이 보였다. 검사를 하려고 피를 뽑았다고 하는데, 취해서 바늘이 들어가는 것도 몰랐다. 수액 때문에 술이 빨리 깬 건지 다행히 정신은 점점 멀쩡하게 돌아왔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다. 정인이 도로에서 갑자기 뛰어내렸다는 것도 그렇고, 우연히 들렀다는 병원 또한 집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이다. 아무리 급했다고 해도 거기까지 갈 이유가 뭐가 있었을까. 정인은 찜찜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팔을 재차 확인했다.

“피검사 결과는… 뭐래?”

“알코올중독.”

정인이 인상을 썼다. 알코올중독은 너잖아! 쏘아붙였는데도 김하준은 별다른 말이 없다. 표정이 완전히 굳어서는 정면만 쳐다보는 중이었다. 생각하면 이런 곤란하고 귀찮은 상황을 만들었으니 자신이 미울 만도 하다. 

“미안…. 나 때문에 오늘 힘들었겠네.”

그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많이 화났나. 저도 모르게 또 눈치를 살폈다. 김하준은 차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말이 없더니 안으로 들어와서는 자라며 한마디를 하고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정인은 한숨을 내쉬며 위를 보다가 방으로 들어와 몰래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혹시 이상한 낌새라도 눈치챈 건 아닐까.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은 죄가 많으니 김하준의 표정 하나에도 괜히 뜨끔해서 더 유난이다. 괜시리 씁쓸함이 몰려와 손목에 찬 시계만 만지작댔다.

***

“찾는 분 이름이…?”

하준은 사무실을 둘러봤다. 오후에 시간을 내어 도착한 곳은 어지간한 심부름을 비밀리에 다 들어준다는 곳이었다. 그런데 인테리어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지 내부가 엉망이다. 시선이 곧 앞에 앉은 사장이란 남자에게 향했다. 그는 수첩을 꺼내며 하준의 메모를 적고 있었다.

“강해찬이요.”

정확히 기억나는 건 이름과 나이 그리고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사실뿐이다.

처음엔 류정인이 모두를 속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나중엔 김 회장 또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흘러갔다. 아무리 계약 결혼이긴 하나 자신의 부친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눈에 차지도 않는 류정인을 데리고 와 결혼하라고 한 건 그의 아버지가 존경받는 목회자이기도 하지만, 류정인이 베타여서, 쓰고 버릴 카드로 나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베타라면 애초에 김하준의 관심을 얻지도 못할 테고, 아이를 가져 그걸 무기로 삼을 일도 없을 테니까.

“얼마나 걸립니까?”

심부름센터 사장이 담배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날짜를 가늠한다. 열흘? 하준이 품에서 현금을 꺼내 건넸다. 두툼한 현금 뭉치가 나오자 사장의 안색이 달라진다.

“계약금이요. 일 마치면 잔금 바로 드리죠.”

“오케이. 최대한 빨리 찾겠습니다. 제가 대한민국에서 사람 찾는 데는 1등이거든요.”

그의 넉살에 김하준은 피식 웃어넘겼다. 심부름센터 사장과 이야기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하준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다. 류정인은 자신이 베타라는 사실을 언제 알았을까, 그것이 궁금해졌다. 혹시 11년 전 류정인이 갑자기 변해 버렸던 건 그 이유가 아닐까. 

답을 찾으려면 우선 강해찬을 만나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류정인에게 물어도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발뺌하려 하겠지.

회사로 간 하준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들어가는데 데스크에 있던 비서가 누가 찾아왔었다며, 연락처를 남겼다고 알려 준다. 메모를 보던 김하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류동찬? 류정인의 삼촌이다. 그가 어떻게 이곳에 왔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데 비서가 말을 보탠다.

“안 계시다고 했더니, 긴히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고 꼭 연락 바란다고 하셨어요.”

“언제 왔었는데요?”

“30분 정도 됐습니다.”

하준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메모를 챙겨 사무실로 들어갔다. 메모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를 걸고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누군가 전화를 받는다. 

[어이! 조카사위!]

반가워하는 목소리에 그가 논바닥에서 류정인에게 발로 걷어차이던 장면이 떠올랐다. 하준은 애써 감정을 숨기고 최대한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그를 대했다.

“안녕하세요. 회사에 오셨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어, 내가 바람 쐬러 왔다가 자네 얼굴 보러 잠깐 들렀지.]

“아, 네….”

[회사 좋더라. 나는 연예기획사라고 해서 작은 사무실 같은 건 줄 알았는데, 그렇게 클 줄은 몰랐어. 하긴, 아버지가 대단한 분인데, 아들 사업 정도야 팍팍 밀어줬겠지. 안 그래?]

하준은 피식 웃었다. 류정인이 분명 삼촌에게 보육원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걸 들었는데, 어째서 그가 서울까지 와 내 회사에 들렀을까. 짐작하는 바가 있으나 모른 척하며 창밖을 내다봤다.

“아직 근처에 계시면 잠깐 뵐까요? 저 방금 회사에 들어왔거든요.”

그가 반색한다.

[나야 땡큐지. 그럼 우리 얼굴이나 볼까?]

“네. 오세요. 기다릴게요.”

통화를 마친 김하준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류정인의 할머니 생신날 술에 취한 류동찬이 저를 붙잡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류민아가 급하게 입을 틀어막으며 등을 떠밀었었다. 어쩌면 그 얘기가 류정인의 비밀에 관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오늘 찾아온 건 왜…?

“설마, 아니겠지.”

혼자 추측하면서도 기가 막혀 웃음이 났다. 저 때문에 조카가 팔자에도 없는 빚에 시달리다 자존심도 버리고 결혼을 택했는데, 그 스트레스로 결혼식 날 위경련을 일으켜 쓰러지기까지 했는데. 사람이면 설마….

자리로 돌아와 앉아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문이 열리며 비서가 들어왔고, 그 뒤로 말끔하게 차려입은 류동찬이 손을 들어 인사를 하며 나타났다. 그는 비서에게 차 한 잔을 내 달라고 부탁했다. 말투와 표정에 약간의 거들먹거림이 느껴져 하준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오셨어요?”

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의자에 앉으라며 권하자 그가 앉아서는 사무실을 둘러본다.

“어우, 좋다. 사무실에 돈을 많이 들였네.”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우리 정인이도 여기 온 적 있어?”

하준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하긴. 일하는데 오면 뭐 해. 방해만 되지.”

비서가 차를 내왔으나 그는 차엔 관심도 두지 않고, 하준의 요즘 근황을 물었다. 별일 없는지, 류정인하고 사이는 어떤지. 하고 싶은 말은 일단 뒤로 빼 두고 마음에도 없는 인사치레로 빙빙 돌리는 기분이었다. 

“정인인 잘 지내고 있습니다. 걱정돼서 오신 건가요?”

류동찬이 손을 내저었다.

“걱정은 무슨. 걔는 사막에 떨어트려 놔도 모래 퍼먹고 살 애야. 알면서 그래. 지독하기가 얼마나 지독한데.”

웃으며 말하더니 자기도 아차 싶었는지, 농담. 이라고 한마디 하고 씩 웃는다.

“근데, 자네 회사는… 투자 같은 거 안 하나?”

이제야 본론을 꺼낸다. 하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했다. 투자요?

“요즘 한 우물만 파서는 안 되잖아. 사돈어른이 유명한 사업가시니 자네도 잘 알 거 아닌가. 돈이 되는 사업은 따로 있다는 거. 물론, 그런 걸 빠르게 캐치하는 사람을 옆에 두는 것도 복이지만.”

“저는 지금 제 일에 만족하고 있긴 한데, 삼촌 말씀을 들으니 그것도 일리가 있네요.”

“그렇지? 이래서 사람은 안목이 중요하다니까. 내가 자네를 딱 본 순간, 마음이 통할 것 같았어!”

하준은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었다. 류동찬은 아마 속으로 이 호구를 어떻게 하면 돈을 뜯어낼 수 있을까만 생각할 것이다. 돈 많은 아버지 품에서 곱게 자란 도련님이 류정인이 베타인 것도 모르고 결혼했으니 얼마나 바보 등신처럼 보이겠는가.

“사실 내가 정인이한테 미안한 것도 많고, 그래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 자네도 내 마음 이해하지?”

하준은 긍정하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 그럼요.”

“그래서 말이야, 아는 형님이 추진하는 사업이 있는데…. 이게 외국에선 기가 막히게 먹히나 봐. 근데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투자금이 없잖나. 물론, 그런 사고까지 치고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하준은 인내심을 갖고 그가 말을 끝내기를 기다렸다. 류동찬은 양손을 마주 잡고 간절한 표정으로 하준을 바라봤다.

“정인이하고 형수님한테 속죄하고 싶은데, 자네가 그걸 좀 도와줄 순 없겠나?”

“제가요?”

“그래. 물론, 나를 믿고 투자하는 게 자네로서는 영 찜찜할 수 있어. 이해해. 근데, 이건 진짜 확실한 거거든. 말 그대로 잭팟이지. 그 형님이 나하고 친하니까 이런 기회도 주는 거지, 아니면 벌써 다른 사람들이 채 갔어. 참, 그 형님 이름이 권중식이거든. 사업한다는 사람들은 꽤 안다던데. 자네 들어 본 적 있나?”

하준이 애매하게 웃었다.

“아니요…. 실은 아버지가 전적으로 다 지원해 주셔서, 저도 사업은 잘 모르긴 합니다.”

겸손한 표정을 하고 있자 류동찬이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찬다. 그러더니 기다렸다는 듯 품에서 종이 뭉치 하나를 꺼낸다. 이게 사업계획서거든. 한번 읽어나 봐. 하준이 그것을 집어 들고 펼쳐서 하나씩 넘겼다. 

겉만 보면 꽤 그럴싸했으나 자세히 읽으니 허점이 많았다. 중동에 가서 기름을 파는 꼴이랄까. 진지하게 보고 있으니 앞에서 류동찬의 설명이 이어진다. 그러는 도중에 그의 휴대전화가 계속 울렸다. 하지만 류동찬은 전화를 받지도 않고 바로 넘겨 버리더니 말이 조금 더 빨라졌다.

“자네가 볼 때는 정인이가 나를 미워하는 거 같아도, 사실 그 녀석 속마음은 그게 아니거든. 아마 나 도와줬다는 거 알면, 나중에 자네한테 고마워할 거야.”

하준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러고 나서 사업계획서를 덮어서 옆으로 치워 뒀다.

“제가 이건 더 읽어 보고, 시간을 갖고 답변드려도 될까요?”

“음…, 언제까지?”

“오늘 저녁때까지요.”

류동찬의 눈빛이 반짝인다. 그렇게나 빨리? 땡잡았다는 표정이다. 그는 입이 마르는지 혀로 아랫입술을 연신 핥았다.

“아니면 이따가 그 아는 형님하고 셋이 보는 건 어때?”

“저녁에요?”

“왜. 바빠?”

“아니요. 그건 아닌데… 아무래도 정인이한테 물어도 봐야 하고,”

류정인 이야기에 그가 펄쩍 뛰었다.

“안 돼. 정인이 그때 못 봤어? 나한테 발길질하던 거. 나중에, 나중에 말해! 깜짝 선물로!”

아아, 하준은 고개를 주억였다. 깜짝 선물 좋네요. 알겠다고 대답하자 류동찬의 표정이 밝아진다. 아무래도 류동찬은 김하준이 류정인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물론 예전엔 그랬지. 예전엔…. 잠시 딴생각을 하는데 류동찬의 전화가 또다시 울린다. 

“급하신 전환가 봐요. 우선 받으세요.”

“아냐, 쓸데없는 광고. 대출 전화.”

“네. 그럼 제가 이따가 장소하고 시간 정해서 연락드릴게요. 바로 회의가 있어서 아래층 내려가 봐야 하거든요.”

“아, 회의? 그래, 자네 바쁜 사람인데 내가 시간을 너무 빼앗았네. 그럼 나는 가서 그 형님하고 조금 더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을 테니까, 자네가 꼭 연락을 줘. 믿고 있을게. 알았지?”

“예, 그럴게요.”

류동찬이 만족해 웃으며 일어서려고 하자, 김하준은 그를 불렀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갔고 제일 아래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돌아온 그는 그것을 류동찬에게 건넸다. 뚜껑을 연 류동찬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진다. 그가 놀라서 어버버, 하는 동안 하준이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결혼식 전에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잖아요. 물론, 사정이 있으셔서 그랬지만….”

류동찬이 상자에서 손목시계를 꺼내며 입을 벌린다. 아니, 그래도 이렇게 비싼 걸, 내가 받아도 되나? 입으로 그러면서 시계는 벌써 자신의 손목에 채운다.

“짝퉁은 아니지?”

확인까지 하고.

“예, 그거 구하느라 애먹었어요.”

하하, 류동찬은 좋아 죽겠는지 입이 찢어진다. 그러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큼큼,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이따가 보자며, 꼭 연락 달라고 이야기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준은 그를 사무실 밖까지 배웅한 뒤 문을 닫고 들어왔다.

혼자 남은 김하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빠져나간다.

그는 창으로 걸어가 밖을 내다봤다. 날씨가 잔뜩 흐린 게 아무래도 비가 올 모양이다. 시커메진 하늘을 한참 바라보다 시간을 확인했다. 류동찬이 사라진 지 20여 분이 흘렀다. 이윽고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고, 망설임도 없이 112 버튼을 눌러 귀로 가져다 댔다.

“예, 수고하십니다. 도난 신고 하려고요. 7억짜리 손목시계요.”

***

정인은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불안한 표정으로 방을 왔다 갔다 움직였다. 삼촌이 사라졌다는 류민아의 연락을 받고 류동찬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계속 연락이 닿질 않는다. 씨발. 욕을 하며 통화 버튼을 반복해서 눌렀다. 역시 창고에 그냥 가둬 뒀어야 하는 건데…. 

뒤늦게 후회를 해 봐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얼굴을 감싸 쥐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가 불현듯 김하준이 떠올랐다. 그리고 할머니의 생신날 김하준 옆에 찰싹 붙어서 친한 척하던 류동찬의 모습도.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불안감이 점점 더 몸을 짓눌러 왔다. 

김하준에게 연락해 볼까. 입술을 잘근대며 망설이고 있는데 류동찬의 전화번호가 뜬다. 서둘러 받자마자 류동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인아! 너 빨리 와. 지금,]

하아, 그는 말을 하려다 말고 기가 막힌 듯 거친 숨만 내쉬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따져 물으려고 하는데 낯선 목소리가 먼저 들려온다.

[류정인 씨?]

“네? 누구세요?”

[여기 중부경찰섭니다. 다름이 아니라 류동찬 씨가 물건을 훔치셔서 지금 경찰서에 와 있거든요.]

훔친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요. 형사님 제가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조용히 좀 하세요. 통화 중이잖아요. 저는 정말 억울해요. 야, 이 새끼야! 너 똑바로 말해 봐. 네가 줬잖아. 내가 언제 훔쳤어! 너 이러고도 우리 정인이 얼굴 볼 수 있어!

듣고 있던 정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김하준?

[아무튼 지금 서로 와 주셔야겠어요. 피해자분과도 이야기를 나누셔야 할 것 같아서요.]

“피해자라면….”

[김하준 씨요. 배우자분 되시죠?]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통화를 마쳤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삼촌이 김하준의 물건을 훔쳤다는 건가. 설마….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뒤 외투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고, 주차장으로 가서 부랴부랴 시동을 걸었다. 

초조한 마음에 자꾸만 앞니로 입술을 짓씹자 나중엔 피가 맺힌다. 차를 몰아 경찰서에 도착한 뒤 주차장에 세워 두고 한달음에 찾아서 들어갔다. 저 멀리 익숙한 뒷모습이 둘 보인다. 하나는 류동찬이었고, 하나는 김하준이었다. 

가까이 가자 류동찬이 먼저 정인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손목에 찬 수갑을 보고 정인은 충격을 받아서 할 말을 잃었다. 걸음이 느려진다. 김하준의 얼굴을 보는 게 두렵다. 다행히 김하준과 눈이 마주치기 전에 형사가 정인을 불렀다.

“류정인 씨?”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거기 잠깐 앉으시겠어요.”

정인이 하준과 류동찬 사이 가운데에 앉았다. 형사가 연락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말인즉슨 류동찬이 김하준의 회사에 들렀고, 그의 사무실에서 7억 가까이 하는 손목시계를 훔쳐 달아나 경찰에 잡혀 왔다는 거다.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가 보육원에서 도망쳐 김하준을 찾아간 것도 기가 막힌데, 거기서 김하준의 시계까지 훔쳐? 더 놀라운 건 시계 가격이었다. 시계가 아니라 차를 훔친 거 아닐까, 의심마저 생겼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다가 류동찬을 보는데 그가 분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인다.

“정인아. 나 진짜 억울하다. 내가 훔친 게 아니라, 받은 거라니까!”

그는 정인에게 하소연하고 난 뒤 김하준을 향해 불같이 화를 냈다.

“너 지금이라도 나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해! 아니면 내가 역으로 너 무고죄로 처넣을 거야! 그리고 정인이도 너 용서하지 않을 거고!”

하준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류동찬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함을 질렀다.

“너 이 새끼 내가 조카사위라고 위해 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내가 네 아랫사람이야? 어디서 그런 태도를 보여? 내가 우스워? 우리 정인이가 우습게 보여?”

탕탕, 형사가 서류 뭉치로 책상을 두드리며 짜증 난 표정을 했다. 시끄러워요. 앉으세요, 좀. 류동찬은 얼굴이 벌게져 씩씩거리면서도 정인을 향해서는 어떻게 좀 해 보라는 애원의 눈빛을 보냈다. 

정인은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노려보다가 김하준을 봤다. 김하준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냉랭하다.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창피하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도망치고 싶다. 

류동찬이 김하준을 찾아간 이유를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한몫 잡으려는 수작이었겠지. 그냥 창고에 가둬 두고 굶어 죽게 내버려 둘걸. 차라리 그랬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나는 어째서 이런 사람을 가족으로 두었는가.

부끄럽고 수치심이 몰려와 고개를 떨구는데 형사가 정인을 부른다. 

“일단 두 분이 남도 아니고, 원만하게 사태를 해결하는 건 어떨까 해서 제가 연락을 드렸거든요.”

네…. 정인은 하준의 눈치를 살피다 뒤늦게야 제대로 시선을 마주쳤다.

“김하준. 잠깐 나가서 얘기 좀….”

자리에서 일어서자, 김하준이 따라 일어선다. 정인은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왔고 복도를 따라가다가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멈춰 섰다. 돌아보니 뒤따라온 하준이 저를 빤히 쳐다보며 서 있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입술만 깨물었다가 떼기를 반복했다.

“미안하다…. 내가… 정말 면목이 없다.”

고개가 저절로 떨구어졌다.

“네가 훔쳤어? 왜 네가 사과를 해?”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정인은 고개를 들어 김하준을 바라봤다. 그가 갑자기 정인의 어깨 너머를 향해 손짓을 보냈다. 얼결에 돌아보자 정장을 입고 서류 가방을 든 사내가 꾸벅 인사를 한다. 누구지…?

“내 변호사.”

정인의 눈이 커졌다. 뭐? 하준이 그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고, 정인은 다급하게 하준의 팔을 붙들었다. 하준아, 잠깐만. 돌아보는 김하준의 눈빛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정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자 하준이 변호사에게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한 뒤 정인을 마주 보고 섰다.

“류정인. 솔직히 말해 봐.”

“뭘.”

“저 인간 용서하고 싶어?”

단호한 김하준의 표정에 정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류동찬은 할머니의 아들이며 죽은 아버지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다. 지금은 개망나니이나 어릴 적엔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질 않아 정인을 업어 주기도 하고, 자주 놀아 주던 형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류동찬은… 정인이 베타인 걸 알고 있다. 혹여라도 홧김에 사실을 말해 버리면… 그때는….

김하준이 다시 묻는다.

“정말 용서해 주길 원해?”

그러나 저대로 두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사기를 치거나, 피해를 줄지도 모른다. 류동찬은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으나 정말 미안했다면 애초에 김하준을 찾아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답해.”

정인은 잡고 있던 하준의 팔을 놓아주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넌 집으로 돌아가. 이건 네 삼촌하고 내 문제니까.”

하준은 돌아섰고, 혼자 남은 정인은 벽에 기대어 얼굴을 감싸고 세차게 문질렀다. 화가 나고 쪽팔리고 미안해서…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안으로 들어온 하준의 눈에 류동찬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자신의 변호사가 앉아 있었다. 변호사는 조사가 이루어지고 재판까지 가도, 벌금형에 그칠 확률이 높다고 이야기했다.

자리에 앉자 아니나 달라 류동찬이 죽일 듯이 본다. 조서를 작성하던 형사가 하준에게 물었다.

“류정인 씨하고는 이야기해 보셨어요?”

“예, 했습니다. 둘 다 선처의 뜻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처벌해 주세요.”

야! 류동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김하준은 그를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류동찬이 기가 찬 듯 허리에 손을 올리고 헛웃음을 흘리다 의미심장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너 잘 생각해. 만약에 기자 통해서 이런 얘기 흘러 나가면, 누가 손해일지 잘 생각하라고!”

하준은 그런 류동찬을 무시하듯 형사하고만 대화했다.

“보셨죠? 저 지금 협박당한 거. 이건 따로 고소할게요.”

형사가 류동찬을 향해 짜증 나는 표정으로 앉으라고 손짓을 했는데도 말을 들어 먹질 않았다. 오히려 그는 김하준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미친 새끼! 너 싸이코지? 애초에 이러려고 시계 줬지? 이 정신병자 새끼야!”

“류동찬 씨! 앉아요, 좀!”

“형사님. 저 지금 상당한 모욕감을 느꼈는데, 이것도 고소 가능합니까?”

“김하준 씨도 진정하시고요.”

형사가 지친 얼굴로 말리는데 류동찬이 고함을 치고 뿔난 소처럼 펄펄 뛴다.

“너 류정인 데리고 와! 가서 데리고 오라니까. 걔하고 얘기할 거야. 너하고 할 얘기 없으니까, 류정인 데리고 오라고!”

“왜요. 오면 뭐라고 하게.”

순간 김하준의 눈에 살기가 어린 걸 보고 류동찬이 인상을 확 썼다. 하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고, 류동찬의 코앞으로 걸어갔다. 얼굴이 맞닿은 거리에서 류동찬이 뒤로 물러서려고 하자 김하준이 그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지켜보던 형사가 둘 다 떨어지라고 경고했으나 김하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류동찬을 향해 이를 까득 물며 목소리를 낮췄다.

“왜. 류정인이 베타라고 떠들고 싶어 죽겠어?”

류동찬이 놀라 뒤로 물러서려고 했고 김하준은 그의 어깨를 부서트릴 것처럼 힘주어 잡았다. 윽, 신음과 함께 류동찬이 몸서리를 치자 형사가 떨어지라고 소리를 지른다. 하준은 분노를 누르며 류동찬을 향해 경고했다.

“입만 벙긋해 봐, 씨발. 대한민국에서 당신 이름 석 자 싹 지워 줄 테니까.”

잡고 있던 어깨를 확 놓아 버리자 류동찬이 뒤로 주춤 물러선다. 그의 눈빛에 당혹스러움과 함께 두려운 감정이 생겨났다. 하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옷매무새를 고쳤고 황당해하는 형사를 향해 로봇처럼 웃으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선처할 마음 전혀 없습니다.”

***

시장에 들러 국밥도 먹고, 상인들과 웃으며 담소도 나누고,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가 돌보고, 대부분 그러하듯 김만호도 카메라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연기를 펼쳤다. 영상이 나온 마지막에 당신의 선택은 기호 1번 김만호. 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그리고 환하게 웃는 자신의 얼굴. 그걸 보며 김 회장 또한 흡족하게 웃었다.

“당신 저러고 있으니까 진짜 국회의원 같네요.”

앞에 앉아 차를 마시던 주혜련이 TV 속 남편의 모습을 보며 이야기했다.

“두고 봐. 당신 남편이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김만호가 주먹으로 가슴을 툭툭 치자 주혜련이 웃었다. 두 사람이 선거 이야기와 집안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윤 비서가 나타났다. 주혜련은 찻잔을 들고 서재를 나갔고, 둘만 남게 되자 김 회장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윤 비서를 향해 물었다.

“일은 어떻게 됐어.”

“예. 지금 경찰서에 있습니다.”

“정말 하준이 시계를 훔쳤대?”

“정확한 건 조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김 대표의 일방적인 주장인 건 사실입니다.”

김 회장은 눈을 가늘게 늘였다. 난데없이 오늘 오전 김하준은 심부름센터에 들러 누군가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고, 오후에는 류정인의 삼촌을 절도죄로 고소하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움직이는지 알 수 없었다.

윤 비서가 서류철을 하나 내민다.

“회장님. 그리고 이거….”

그답지 않게 말끝을 흐린다. 서류철을 펼쳐 확인하던 김 회장의 눈이 커졌다가 바로 일그러졌다. 다름 아닌 사진이었는데 지금보다 어린 류정인과 김하준이었다. 분명 결혼시키기 전 조사를 했을 때만 해도 둘의 접점은 따로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둘 역시 서로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꺼낸 적이 없는데…. 그런데 이건….

김하준의 어깨에 팔을 걸친 류정인의 표정도 그렇고 조금은 쑥스러운 듯 웃는 김하준의 얼굴도 그렇고… 뺨을 바싹 붙이고 웃는 둘의 모습은 우정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는 사이였군.”

윤 비서가 입을 쉽게 열지 않자 사진을 보던 김 회장의 눈이 윤 비서에게로 움직였다.

“말해 봐. 뭐가 더 있어.”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복잡한 관계였던 것 같습니다.”

어렵게 말을 꺼낸 그는 자신이 조사한 것들을 이야기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김하준과 류정인이 사귀던 도중 류정인이 병원에서 베타로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김하준이 밥도 먹지 않고,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서 집사가 걱정하던 것도 그 시기와 비슷하다.

그러다 갑자기 서울로 올라오겠다며 마음을 바꾸었고, 그 뒤로는 걷잡을 수 없이 삐뚤어지다 나중엔 자살 소동까지 벌였었다.

어쩌면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 

그는 침음을 삼킨 뒤 담배를 꺼내 물고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릴 적 이후로 본 적 없는 김하준의 웃는 얼굴이다. 아들이기에 그 표정이 얼마나 좋아서 나오는 건지도 알고 있다. 속이 시끄러워진다. 하, 그는 담배를 쥔 손으로 주름진 미간을 문질렀다.

“하준인 알아?”

“며칠 전 외곽에 있는 개인병원에서 류정인 몰래 검사를 했습니다.”

알고도 여태 입을 다물고 있다? 대체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는 어렴풋하게 알 것 같았다. 류정인보다 김하준이 더 좋아했다는 것. 어쩌면 지금까지 미련이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것.

김 회장은 사진을 내려놓은 뒤 담배를 비벼 끄고 윤 비서를 불렀다. 

“류정인 삼촌, 풀어 주라고 해.”

“예?”

“나중에 필요할 때 데려다 써. 돈이라면 가족이라도 팔아먹을 놈이니까.”

아주 잠깐 김 회장의 눈빛에 냉랭함이 스친다. 그는 사진을 뒤집어 서류철에 넣은 뒤 그대로 덮어 버렸다.

외출 후 돌아온 정인의 얼굴색이 좋지 않아 보였는지 서 집사는 남아 있기를 고집하였다. 그런 그녀를 잘 설득하여 돌려보낸 뒤 정인은 거실 소파에 우두커니 혼자 앉아 꽤 긴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눈은 수시로 시계를 확인했다. 

김하준은 왜 오지 않을까. 류동찬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먼저 오지 말고 기다렸어야 했나. 잃어버린 페로몬 감지기는 김하준이 가지고 간 걸까. 그게 무언지 알아챘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며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마침 출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발소리와 함께 반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김하준이 나타났다. 코트를 한 손에 든 그는 무척이나 피곤한 얼굴이었다. 정인은 엉거주춤 일어나 어색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왔어…?”

“응.”

“삼촌은?”

하준은 대답 대신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내 목을 축였다. 정인은 긴장한 채 그 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반쯤 비운 생수를 들고서 2층으로 올라가려 하기에 붙들고서 다시 물었다. 삼촌은?

돌아보는 김하준의 눈빛이 차갑다.

“왜. 네 삼촌이 감옥에서 썩을까 봐 걱정돼?”

정인은 고개를 떨구어 시선을 피했다. 아까 분명 자기 입으로 용서해 주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정말 삼촌이 감옥에 가면 할머니는 어쩌지. 가끔 정신이 돌아오는데 자식이 그렇게 된 걸 알면 어떻게 하지. 

“류정인.”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정인이 눈을 들어 김하준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렇게 뒤통수를 맞고도, 편을 들어 주고 싶어?”

“…….”

고백할까. 이제라도 사실을 털어놓을까. 갈등이 휘몰아친다. 입술을 달싹이자 김하준이 먼저 말을 채 갔다.

“정신 차려. 지금 네 코가 석잔데, 누굴 걱정해.”

정인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전에 하준은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죄지은 것처럼 심장이 또 쿵쿵댄다. 내 입으로 먼저 털어놓을까.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고 사죄해야 하지 않을까. 사정을 얘기하면 김하준도 이해해 주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소름 끼친다고 펄쩍펄쩍 뛰려나.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말을 못 하고 있는데 김하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다. 결국 정인은 아무것도 털어놓지 못한 채 침실로 들어왔다. 눕지도 못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다가 욕실로 들어가 옷을 모두 벗었다.

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찬물을 틀어 놓고 한참을 그 아래 서 있었다. 울고 싶다. 따지고 보면 가장 억울한 사람은 김하준인데 어째서 자꾸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지 모르겠다. 얼굴을 세게 문질러 몇 번이고 눈물을 삭이고 나서는 가운 하나만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다 침대 머리맡에 동전 크기의 새카만 물건 두 개가 놓여 있는 걸 보고 놀라서 눈이 커다래졌다. 얼마 전에 잃어버렸던 페로몬 감지기다. 분명 아까는 없었는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위층을 올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침실에 김하준의 페로몬 향이 미약하게 깔려 있다. 

정인은 감지기를 꽉 움켜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결심을 굳히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 솔직하게 털어놓자. 더는 거짓말을 하지 말자. 

그런데 2층 침실에 김하준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욕실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 아, 씻는구나. 깨달은 순간 문으로 김하준의 긴 다리가 먼저 보였다. 나가려고 뒤로 물러서던 정인은 물에 젖은 그의 알몸을 보고 너무 놀라 손에 쥐고 있던 페로몬 감지기를 떨어트렸다. 

툭, 바닥에 떨어진 두 개의 감지기가 각자 데구루루 굴러간다. 정인은 황급히 그것을 주우려고 몸을 숙이고 움직였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는데 하필 김하준 코앞이다. 무릎을 꿇은 채 놀라서 입을 쩍 벌리고 쳐다보는데 김하준이 묘하게 웃는다.

“입이, 작네?”

뒤늦게 말뜻을 알아듣고 정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김하준이 한 발 성큼 앞으로 다가왔고, 정인은 기겁하고 뒤로 나자빠졌다. 가까이서 봐도 믿기지 않는다. 씨발. 뭐야, 저건. 똑같은 생물인데 어째서 김하준은 저렇게….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데 김하준이 뒤늦게 가운을 걸쳐 입고 나서 정인에게 손을 내민다.

“바닥에 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

손을 잡는 대신 정인은 바닥을 짚고 일어나 뒤로 얼른 물러났다. 김하준의 알몸을 보자 머릿속이 하얘져 이곳에 왜 왔는지조차 떠오르질 않았다. 외면하려 할수록 눈은 자꾸만 김하준한테로 달라붙었다. 

언제 저렇게… 음… 언제… 하아, 씨발. 차라리 속으로 기도하자. 하나님 죄송해요. 이럴 때만 찾아서.

남의 속도 모르고 김하준이 점점 다가왔다.

“여긴 올라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정인은 뒤로 물러섰다.

“어…그랬지.”

“왜 도망가. 죄지었어?”

“네가 자꾸 다가오니까, 그런 거잖아. 오지 말고 거기서 얘기해.”

순간 손목에 찬 시계가 찌릿찌릿거린다. 김하준의 페로몬 향도 짙어졌다. 당황한 정인은 잽싸게 손을 뒤로 숨겼다. 김하준이 혀로 아랫입술을 핥더니 눈썹을 까닥 움직인다. 손목의 통증 강도가 세진다. 이 상황에서 베타라고 고백하려니 말이 튀어나오질 않았다. 

이번에도 눈을 까뒤집고 쓰러지는 척 연기라도 할까. 고민하는데 김하준이 성큼성큼 오더니 뒤로 숨긴 왼쪽 손을 잡아채서 눈앞에 들어 올린다. 그는 시계를 풀려고 했고 정인은 다급하게 막았다.

서로 잡고 잡힌 상태에서 시선이 팽팽하게 오고 갔다. 정인은 목이 졸리는 기분을 느끼며 숨을 크게 몰아쉬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김하준이 손목을 더 꽉 움켜쥐며 경고 비슷하게 속삭인다.

“풀어. 어차피 너 들켰어. 아니라고 발뺌할 생각 마. 병원에서 확인했어.”

우려가 현실이 됐다. 김하준이 잡고 있던 팔을 놓아주자 시계 안쪽으로 찌릿찌릿한 느낌이 점차 사라졌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의심하고 있다고 생각은 했으나 병원에서 확인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 정인은 죄를 지은 사람처럼 김하준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언제부터였어?”

왜 속였냐고 묻는 게 아니라 언제부터였느냐고 묻는다. 정인은 손목을 감싼 채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막상 털어놓기도 전에 들키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미안….”

“언제부터냐고 묻잖아. 예전? 아니면 최근에?”

입이 붙은 것처럼 말이 나오질 않는다. 실은 예전에 알았어. 그래서 너한테 그런 짓을 했어. 베타라고 하면 네가 싫어할까 봐. 내가 상처받을까 봐. 어쩌면 넌 착해서 이해해 줬을지도 모르는데. 그래, 사실은 다 핑계야. 널 좋아한다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대답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였다.

“예전에….”

“나 만나고 있을 때?”

응…. 대답과 동시에 김하준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그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고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감정을 추스르려고 노력했다.

“설마 나한테 그랬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

“…….”

“류정인!”

“…….”

“아니지?”

김하준의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린다. 그걸 보자 후회가 됐다. 차라리 거짓말을 할걸. 끝까지 아니라고 버틸걸. 아니, 적어도 알게 된 시점은 최근이라고 둘러댈걸. 김하준에게 더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김하준이 정인의 양어깨를 꽉 잡고 눈을 맞춘다.

“말해. 아니지?”

목소리에 분노가 섞였다. 아니라고 대답할까. 그럼 김하준은 편해질까. 하지만 또 속인다면 그건 김하준을 기만하는 게 아닐까. 머릿속이 복잡하다. 대답해. 재촉하는 그의 목소리가 차갑다.

갈등하던 정인은 숨을 멈춘 채 고개만 끄덕였다. 김하준이 사실이냐고 또다시 확인했고 정인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응….”

하준은 어이없는 듯 웃음을 터트리다 뒤돌아서서 얼굴을 세차게 문질렀다. 정인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거라곤 미안하다는 사과와….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여전히 비겁한 핑계.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하준이 돌아서서 정인을 노려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뭐? 정인은 휘몰아치는 감정을 애써 꾹꾹 누르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결혼은 없던 일로 해. 돈은… 내가 어떻게든….”

쾅! 하준이 정인의 멱살을 쥐고 그대로 벽에 밀쳤다. 놀란 정인이 쳐다보자 김하준은 이를 꽉 문 채로 말없이 정인을 노려봤다. 그의 눈빛에서 분노와 황망함 슬픔이 온통 뒤섞여 파도처럼 일렁댔다.

“씨발, 너!”

끝내 말을 잇지 못한 하준은 정인의 어깨를 거칠게 잡고서 침실 밖으로 끌어냈다. 내려가. 

“하준아….”

“네 얼굴 더 보고 있으면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으니까. 내려가.”

그는 힘겹게 말을 한마디씩 씹어 뱉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정인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혼자 남은 하준은 침실로 들어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문 앞에 서 있다가 침대로 터덜터덜 걸어와 그대로 주저앉아 고개를 떨구고 눈을 감아 버렸다. 

혹시나 했는데 예감이 맞았다. 나중에 알게 됐다고, 그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거라고, 차라리 그 말을 들었으면 이것보단 속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일방적으로 헤어짐을 통보당한 이유가 베타라서? 고작 그런 이유였어? 물론 류정인 입장에선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린 형질이 충격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말이라도 했어야 한다. 물어라도 봤어야 한다.

내가 그렇게 믿음을 주지 못했나. 류정인한테 나는 고작 그것밖에 안 됐던 건가. 분노와 함께 자책감까지 밀려온다. 그리고 그것은 덮어 버렸던 지난 일을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게 떠올리게 하였다. 

헤어지자고 하던, 다른 사람을 보면서 웃던, 꺼지라고 소리를 지르고 싫어졌다고 악을 쓰던 모습도. 밤마다 생각나서 미칠 것 같았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수면제를 달고 살다가 나중엔 미쳐서 약을 모두 털어 넣기도 했다. 

그렇게 살았는데… 고작… 그런 이유였다니. 차라리 마음이 변해 버렸다고 하면 편했을까. 씨발… 씨발! 하준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 자리에서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목이 콱 메어 오고 심장이 돌로 눌러놓은 것처럼 답답하더니 숨 쉬기가 곤란해진다.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그는 자리에서 비틀거리고 일어나 욕실로 가서 수납장을 열고 약을 꺼냈다. 약통을 여는 손이 미세하게 떨려 뚜껑이 몇 번이나 헛돌았다. 손바닥에 약을 쏟은 뒤 수돗물로 허겁지겁 삼켰다. 하지만 죽을 것 같은 기분은 쉽사리 가라앉질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정인은 넋이 나간 얼굴로 앉아 울고 있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아래로 뚝뚝 떨어져도 닦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통곡해서 울고 싶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지. 나는 끝까지 이기적이었다. 차라리 말하지 말걸. 거짓말을 할걸. 말하고 나면 김하준이 조금은 이해해 줄 거라고 여겼다. 그것 역시도 이기심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흐느끼다가 결국은 침대에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목놓아 엉엉 울어 버렸다.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이대로 잠들어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아침에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갈까.

그렇게 새벽까지 울다 자다 깨기를 반복하던 정인은 해가 뜰 때쯤 다시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러다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결에 눈이 떠졌다. 김하준과 마주칠까 봐 쉽사리 문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누워서 귀를 기울였다. 

서 집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119!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정인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대표님. 대표님! 2층에서 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아래층에 있던 직원들은 안절부절못한다. 정인은 누가 뭐랄 새도 없이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침실에 도착하자 김하준은 잠을 자는 것처럼 누워 있다. 그 옆의 약통과 서 집사의 하얗게 질린 표정을 보고 정인은 심장이 쿵 아래로 내려앉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다가가 김하준의 어깨를 잡아서 흔들었다. 

하준아! 김하준! 소리를 지르는데 미동조차 없다.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며 뺨을 세차게 두드렸다. 야! 김하준! 하준아!!!!

김하준의 미간이 꿈틀 움직인다. 으음. 무겁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열리자마자 서 집사가 하나님 아버지를 찾으며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김하준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일어나 앉더니 서 집사와 류정인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의 눈은 아직도 잠에 잔뜩 취해 있었다.

“둘 다 여긴 왜….”

“약을 대체 얼마나 드신 거예요? 괜찮으세요? 병원 가게 옷 입으세요.”

평소 서 집사답지 않게 빠르고 야단치는 듯한 말투다. 그녀를 향해 멋쩍게 웃던 김하준은 류정인을 향해서는 금세 싸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삭막한 것을 보고서 서 집사는 119에 연락한다며 밖으로 나갔다.

정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빨갛게 손자국이 난 김하준의 뺨을 쳐다보기만 했다.

“너 우냐?”

김하준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고 정인은 그제야 자신이 운다는 사실을 깨닫고 재빨리 손등으로 눈과 뺨을 닦아 냈다. 아니라고 말하는데 목소리가 갈라지고 저도 모르게 어깨가 떨린다.

“왜 울어. 울고 싶은 사람은 난데.”

“안 울어….”

울먹울먹하는 정인을 김하준은 말없이 바라봤다. 류정인은 지금 자기 꼴이 어떤지는 알까. 눈이 퉁퉁 부어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걸 보아 어젯밤 무척이나 울었나 보다. 약을 먹고 잠들기 전까지 하준은 혼자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류정인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 이유에 대해 납득하려고 했으나 여전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 

어제는 죽일 듯이 밉고 원망스럽더니 지금은 또 모르겠다. 우는 걸 보니까 마음이 아프고 눈물도 닦아 주고 싶고. 그런데 밉기는 하고…. 

“그만 울고 내려가.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

정인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고 몸을 돌렸다. 출입구로 걸어가는데 김하준이 류정인. 하고 부른다. 돌아서자 김하준이 어느새 침대에서 내려와 서 있었다.

“생각해 봤는데. 결혼은 약속대로 유지하는 게 낫겠어.”

눈가를 닦던 정인의 손이 멈췄다. 하준은 아무런 표정이 없이 덤덤했다. 속내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얼굴만 보면 그는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어차피 둘 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잖아.”

정인은 고개를 떨군 채 좌우로 저었다. 싫어….

“왜. 쪽팔려서? 아니면 나한테 미안해서?”

정인이 대답하지 않자 김하준이 바로 말을 보탠다.

“너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나한테 상처 준 거 맞아. 미안하게 생각해야 해.”

“응….”

“그럼 남은 시간 동안 갚아. 어떻게 갚을지, 방법은 내가 정할게.”

“…….”

“싫어?”

정인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괜찮아. 복수한다고 하면 받아 주고, 같이 사는 동안 모욕을 퍼부어도 견뎌 낼 생각이었다. 차라리 고백하고 나니 홀가분해졌다. 돌아서는데 눌러 왔던 감정이 터지며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 덕분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

“괜찮으세요?”

서 집사는 걱정 어린 표정을 지으며 정인에게 죽을 건네줬다. 정인이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아침에 그 난리를 겪고 난 뒤부터 위가 뒤틀리는 것처럼 아프고 속이 메슥거렸으며 약을 먹어도 통증은 쉽사리 가라앉질 않았다.

“병원에 가 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러다 또 괜찮아져요.”

정인은 수저로 죽의 윗부분을 긁기만 했다. 저보단 김하준이 걱정이다. 그러고 나서 바로 출근했는데 괜찮은 걸까. 약을 얼마나 먹어야 그 정도로 잠이 들 수 있는 거지. 아침에 서 집사의 행동을 보면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던 거 같은데. 

죽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니 서 집사가 앞에 앉으며 물을 건넨다.

“조금이라도 드세요.”

정인은 수저를 내려놓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그녀에게 물었다.

“김하준이요… 언제부터 약을 먹었는지 집사님은 아시죠?”

서 집사가 음, 하고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다. 정인은 그녀가 무슨 말인가를 해 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대표님께 직접 듣는 게 나을 것 같다며 결국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혹시 나 때문인가. 김하준이 약을 먹게 된 게 혹시 나 때문은 아닐까.

생각에 잠겨 있는데 입구가 소란스럽다. 카랑카랑한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에 정인은 고개를 돌렸다. 서 집사도 금세 알아채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정인이 따라나섰다. 

예상대로 김하준의 할머니인 이순옥 여사가 비서를 데리고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 가만히 서 있자 할머니가 혀를 쯧쯧 찬다.

“넌 어른한테 인사하는 법도 모르니.”

뒤늦게 인사를 하고 나니 그녀가 소파로 가서 앉는다.

“여사님. 어쩐 일이세요? 연락도 없이.”

서 집사의 말에 할머니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내 손주 집에 내가 오는데 따로 연락을 해야 하나.”

서 집사는 당황하는 법 없이 상냥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차 내 드릴까요?”

“차는 됐고, 너.”

할머니가 정인을 쳐다보며 손짓을 했다. 정인이 쭈뼛거리고 다가가자 할머니가 얼굴을 유심히 쳐다본다.

“넌 얼굴이 왜 그래. 하준이 꼬드겨서 예절 수업도 다 빼먹었으면, 활짝 폈어야지.”

더는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된다고 김하준이 먼저 말을 꺼낸 건데도, 할머니는 정인이 꼬드겨서 그렇다고 비꼬았다. 아니라고 변명해도 소용없을 거 같아 입을 다물었더니 그녀가 한마디 한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가서 옷 갈아입고 와.”

“네?”

“그때 보니 네가 옷 고르는 안목이 있더구나. 다음 주 친구들 만나는데 내가 마땅한 옷이 없어. 그러니까 오늘 네가 나하고 같이 백화점에 좀 가야겠다.”

서 집사가 바로 제지했다.

“여사님. 오늘 정인 씨가 몸이 좋지 않아서요. 쇼핑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할머니가 정인을 위아래로 훑으며 못마땅해한다. 넌 어디가 그렇게 맨날 아프니, 라고 비난하는 눈빛이다.

[그럼 남은 시간 동안 갚아. 어떻게 갚을지, 방법은 내가 정할게.]

김하준의 말이 떠올랐다. 뭘 해서 갚든 마음의 빚을 갚아야 한다면 이런 거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분란 일으키지 않고 남은 시간 고분고분 말 잘 들으면서 김하준 식구들 비위라도 맞추는 것. 서 집사가 다시 말리려 하기에 정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도 집에만 있으니 답답하던 참이었어요.”

정인은 순순히 옷을 갈아입고 나와 할머니와 함께 집을 빠져나왔다. 승용차 뒷좌석에 할머니와 단둘이 앉아 있던 정인은 백화점으로 가는 내내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바람은 아직 찼으나 볕은 확실히 따뜻해졌다. 그런데 옆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이상할 만큼 조용하다. 고개를 돌려 봤더니 그녀가 꾸벅꾸벅 졸고 있다. 갑자기 집에 있는 자신의 할머니 생각이 났다. 꼭 점심을 먹고 오후가 되면 마루에 앉아서 이렇게 졸곤 했는데. 

고개가 오른쪽으로 꺾여 있길래 보다 못한 정인은 할머니의 얼굴을 살포시 제자리로 옮겨 놨다. 그랬는데 그녀가 갑자기 주름진 눈을 번쩍 뜬다.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 내자 즉시 정인을 쳐다본다.

“나 잤니?”

“예, 잠깐….”

그녀가 민망한 듯 손으로 뺨을 이리저리 만지고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한 번 흔들었다. 그러더니 요즘 왜 이렇게 잠이 쏟아지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렸다. 백화점에 도착한 뒤 정인은 그녀를 따라 쇼핑을 시작했다. 들르는 매장마다 그녀는 직원 대신에 정인에게 물건을 골라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면서 중간중간 하는 일도 없이 집에서 손주 돈이나 축내는 쓸모도 없는 애 취급을 하였는데, 그 말을 하고는 꼭 뭘 사 주었다. 대체 무슨 속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억지로 사 주는 걸 떠안다 보니 정인의 물건도 꽤 넘쳐 났다. 

그러다 그녀는 분홍색 카디건을 어디서 하나 가지고 와서는 그걸 정인에게 이리저리 대 보더니 입어 보라고 권한다.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는 색은 아니라 억지로 웃으며 입었더니 옆에 있던 직원이 바로 껴든다.

“어쩜. 너무 잘 어울리세요. 피부가 하얘서 파스텔 색상이 잘 받네요.”

“그렇지? 우리 손주도 하얀데 얘는 더 하얗다니까.”

“키도 크시고, 옷 태가 정말 예쁘신데요.”

“말해 뭐 해. 팔다리가 길쭉길쭉하게 뻗었잖아. 우리 손주보단 못하지만, 이 정도면 어디 가서 꿀리진 않아. 결혼식 때도 남들이 다 한마디씩 했어. 손주며느리 잘 봤다고.”

“그럴 만하겠어요. 같이 다니시니 보기 좋아요. 부러워요. 저도 여사님처럼 나중에 그러고 싶어요.”

“말도 마. 내가 싫다고 싫다고 하는데도, 얘가 자꾸 나가자고 하잖아.”

“어머, 세상에.”

참 알다가도 모를 노인네다. 정인은 영혼 없는 얼굴로 웃으며 마네킹처럼 서서 그녀가 골라 주는 옷을 하나씩 입어 보다 눈이 바깥으로 향했다. 그러다 매장 앞에서 통화하던 남자를 발견했다. 옆모습을 보는데 어딘가 낯이 익다. 돌아보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 

놀라 눈을 크게 뜨는 순간 남자가 몸을 돌려 왼쪽으로 사라진다. 정인은 막 입었던 재킷을 벗어 직원에게 건넸다.

“할머니. 저 잠깐만요. 화장실 다녀올게요.”

황당해하는 그녀를 두고 정인은 급히 매장을 빠져나와 남자가 사라진 쪽으로 따라갔다.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멀어서 확실하게 장담할 수는 없으나 남자는 이해수가 들고 왔던 사진 속의 그 사람과 매우 흡사했다. 정인은 화장실로 향하는 남자의 뒤를 쫓아 들어갔다. 

화장실로 들어가자 남자가 전화기를 귀에 댄 채 통화를 하며 손을 씻고 있다. 응? 그랬어? 나야 시간은 괜찮지. 빨리 봤으면 좋겠는데. 응, 다정한 목소리가 마치 연인과의 대화처럼 느껴졌다.

정인은 옆에 서서 물을 틀고 거울을 보는 척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가까이 보니 그 남자가 확실하다. 남자가 거울을 보길래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물을 틀어 놓고 손을 씻는데 어디선가 휴대전화 벨 소리가 들린다. 정인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옆으로 움직였다. 남자의 휴대전화가 분명하다.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 통화하던 중이었는데…? 

의구심을 품고 고개를 들다 거울 속에서 남자의 눈과 마주쳤다.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한 남자가 휴대전화를 든 채 거울로 정인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빛이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남자는 입술만 웃다가 태연하게 전화를 꺼 버린다. 그러더니 페이퍼 타월을 뽑아 손에 묻은 물기를 닦고서는 유유히 화장실을 빠져나간다. 정인은 한 대 맞은 표정으로 그곳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뭐야, 저거. 뒤늦게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폈으나 남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

“지금 난리 났어요. 반응이 엄청 뜨거워요. 대표님도 대표님이지만, 사모님이 아주, 와, 진짜 사람이 이렇게,”

두영이 미처 끝맺지 못한 말을 하준은 알 것도 같다. 사람이 이렇게 야할 수가 있는 건가. 하준은 잡지 화보 속 류정인을 빤히 바라봤다. 제 다리 위에 걸터앉아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었는데, 표정이 이렇게 야해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야했다. 젠장. 하필 사진을 실어도 이걸….

아니나 달라 잡지가 나간 뒤부터 여기저기서 연락이 쏟아졌다. 그렇게 예쁜 줄 몰랐다는 둥, 나중에 밥 한번 먹자는 둥, 아기가 태어나면 정말 예쁠 거라는 둥, 아기 이야기에 하준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그러다 그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일을 부탁했던 심부름센터 사장이었는데 받자마자 그의 화통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사람 찾는 건 자기가 최고라던 사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일주일이 되기도 전에 하준에게 연락했고 강해찬의 주소와 연락처를 알려 줬다. 류정인이 베타인 걸 다 알게 된 마당에 굳이 확인이 필요할까. 만나서 괜히 상처만 후비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러나 생각과는 다르게 하준은 어느새 회사에서 나와 차를 몰고 그가 알려 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하자 카센터가 눈에 띄었다. 근처에 차를 세워 놓고 내리는데 안에서 누군가 나온다. 살이 제법 붙긴 했으나 강해찬이 분명했다.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도롯가로 걸어오길래 하준은 차에서 내려 그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근처에 가자 강해찬이 인상을 구기며 담배 연기를 허공에 뿜는다.

“오랜만에 뵙네요.”

갑작스러운 방문에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누구? 하고 묻는다. 어쩐지 억울했다. 하준이 인상을 쓰자 강해찬이 고개를 갸웃하고 얼굴을 빤히 응시한다.

“어? 그… 맞지?”

하준은 그가 생략한 말을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네. 그 재수 없는 범생이 맞아요.”

강해찬이 놀라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안경을 벗어서 몰라볼 뻔했네. 되게 오랜만이다. 여긴 어쩐 일이야?”

류정인과 자신이 결혼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 둘이 따로 연락하진 않는 건가. 그 사실만으로도 기분은 조금 나아진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뭘.”

“류정인에 관한 거요.”

***

집에 도착하였으나 하준은 도저히 내리지 못하고 문 앞에 차를 세운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설마 했는데, 류정인은 강해찬하고 사귄 게 아니란다. 사귀는 척 연기를 해 달라고 부탁해서, 얼씨구나 응했던 것뿐이라고. 오히려 김하준이 전학 가고 난 뒤 고백했다가 매몰차게 차였단다.

[너 전학 가고 한동안 정신 나간 애 같았어.]

사람들하고 말도 안 하고, 어울리지도 않고, 몇 달을 거의 그렇게 보내더라고.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며, 당시 사이가 좋지 않던 박성연이 시비를 걸어도 그저 맞고 있었다고, 류정인이 류정인이 아닌 것 같았다고. 그러다 아버지까지 돌아가시고 나자 오히려 예전의 류정인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고.

듣는 내내 억장이 무너졌다. 류정인을 원망하며 살아온 세월이 허무할 정도였다. 그는 정인이 베타임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결혼했다는 말에는 놀라는 듯하다가 뒤늦게야 잘됐다며 축하한다는 인사도 건네줬다. 그는 지금 오메가와 결혼하였고, 자식들을 낳았다며 머쓱하게 사진을 보여 주기도 했다.

강해찬과 헤어지고 집으로 오는 내내 류정인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렇게 힘들었으면 차라리 솔직하게 말을 하지. 바보처럼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처지를 바꿔 보자. 그 시절 내가 갑자기 베타가 되었다면 나는 류정인에게 선뜻 고백할 수 있었을까. 

오래 고민할 것도 없었다. 저 역시도 쉽게 말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 과정에서 류정인은 불안함과 혼란스러움을 느꼈을 것이고 결국 이별을 택했다. 

사람을 좋아하는 데 형질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이제 와 따져 봤자 바보 같은 짓이다. 자신 역시도 여태 오메가만 만나 왔지 않은가. 알파는 오메가와 만나야 한다는 제 생각이 은연중에 류정인에게 내비쳐졌을 수도 있다. 그게 류정인의 결정에 한몫했을 수도 있고.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하준은 핸들을 붙잡은 상태로 얼굴을 처박았다.

“씨발….”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아프다. 아침에 본 류정인의 우는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 원망스럽고 안쓰럽고 미안한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며 몸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차에 앉아 있던 그는 몸을 바로 세우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들어가자. 여기서 이러고 있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 그는 차 밖으로 나와 뒷좌석에서 잡지와 커다란 액자를 꺼냈다. 액자는 화보 촬영을 했던 김영현이 직접 선물한 것이었다. 꼭 류정인에게 전해 달라며. 

집으로 들어가자 고요하기만 하다. 거실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려던 하준은 계단 앞에서 멈춰 서서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러다 발길을 정인의 침실 방향으로 틀었다.

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려고 손을 올렸다 내리기를 몇 차례, 똑똑 어렵게 노크한 뒤 반응을 기다렸다. 조용하다. 벌써 자는 건가. 다시 두드리려다 손잡이를 돌려 문을 천천히 열었다. 침실엔 불이 꺼져 어둡고 욕실에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온다. 

그냥 가려다 액자와 잡지는 전해 줘야 할 것 같아서 안으로 들어갔다. 액자를 소파에 올려놓고 나가려는데 욕실에서 류정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준은 멈춰 서서 욕실을 바라봤다.

[어른들 모두 잘해 주세요. 네, 하준이도 저한테 잘해 줘요. 아니요. 아버지 기일에는 저 혼자만 내려갈게요. 네… 같이 못 가요. 일하느라 바빠요. 네… 네 그럴게요.]

통화하는 걸 듣고 있던 하준의 표정이 굳었다. 류정인의 모친은 아무래도 이게 계약 결혼인 걸 모르나 보다. 잘 지내냐고 묻는지 류정인은 정말 잘 지낸다고, 다들 너무 잘해 줘서 좋다고, 거짓말로 둘러댔다. 입을 꾹 다문 채 서 있던 하준은 통화를 마치는 소리에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막상 문 앞에 서니 나가고 싶지 않다. 오늘 얼굴을 피하면 내일은? 또 다음 날은? 남은 시간은 이제 100일도 안 된다. 그 시간을 이렇게 서로 탓만 하고 원망만 하며 보내고 싶진 않았다. 

하준은 소파로 돌아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앞에는 그가 들고 온 잡지가 펼쳐져 있다. 류정인이 샤워하는지 물소리가 한참 들린다. 소파 팔걸이에 올려 둔 하준의 손가락이 피아노를 치듯 움직였다.

물소리가 끊겼고 이어서 문이 열린다. 류정인이 막 씻고 가운을 입은 채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나오고 있었다. 하준을 발견한 정인은 멈칫했다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어… 왔어?”

하준이 응, 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아침에 그렇게 퍼붓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하는 건 아무래도 힘든 일이었다. 정인이 머리를 말리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길래 하준이 잡지를 집어 들어 보였다.

“사진 나왔어. 와서 봐.”

정인이 쭈뼛거리며 오더니 맞은편에 앉는다. 샴푸 냄새가 향긋하다. 벌어진 가운으로 류정인의 매끈한 다리가 보인다. 뺨과 머리에는 아직 닦지 못한 물기가 남아 있었다. 하준은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가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인이 잡지를 살펴보는 동안 하준은 냉장고로 가서 물을 꺼내 마셨다. 잡지를 보는 정인도 물을 마시는 하준도 서로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신경은 온통 서로를 향해 곤두세웠다.

“몸 괜찮아?”

정인이 잡지를 보며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물었다. 하준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난 뒤 응, 이라고 대답했다. 고개를 돌리던 정인은 소파에 못 보던 물건을 발견했다. 겉이 포장되어 있었으나 그것이 액자라는 것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쳐다만 보고 있으니 하준이 다가와서 포장지를 벗겨 낸다. 

“선물. 선배가 주더라.”

사진을 본 정인의 표정엔 곤란함이 가득했다. 촬영을 많이 했는데 그중에서도 하필…. 다리를 벌리고 김하준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라니. 민망하고 기가 차다. 차마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하준이 액자를 들고서는 벽으로 가져가 위치를 정하려 한다.

“여기다 걸까?”

정인은 입을 꾹 다문 채 억지로 웃었다. 그냥 네 방에다 걸면 안 될까? 목구멍까지 말이 나오려 했으나 사는 동안 빚을 갚으라고 했으니 이것도 참고 넘어가야 하는 건가 생각이 들었다.

“좋을 대로.”

“아니면 여기?”

“거기도 괜찮네.”

하준은 아예 침대 머리맡에다 올려 뒀다. 여긴 어때? 정인은 영혼 없이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마음대로 해. 그랬는데 김하준이 액자를 세워 둔 채 팔짱을 끼고 감상하더니 한마디 툭 내뱉는다.

“인물은, 내가 났지?”

긴장하고 있던 정인은 어이없고 기가 찼다. 불현듯 낮에 김하준 할머니가 얼굴은 자기 손주가 낫다며 면전에 대고 까던 게 떠올랐다. 김하준 성격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하준은 돌아서더니 이번엔 정인을 뚫어지게 본다. 그 시선에 괜히 민망해져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성큼성큼 다가와 정인이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낚아채 간다.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자 빼앗은 수건을 정인의 머리 위에 얹고 젖은 머리를 털어 준다. 손길이 무심한 듯 다정했다.

“둬. 내가 말릴게.”

수건을 빼앗으려고 하니 이번엔 힘을 주어 까치집이 될 정도로 마구 문지른다. 정인은 신경질을 내며 수건을 도로 되찾은 뒤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슥슥 빗었다.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아침까지만 해도 무서울 정도로 차갑게 굴더니 지금은 또 분위기가 달라졌다. 

괜히 눈치가 보여 뒤로 물러서며 떨어지려는데 김하준이 팔을 덥석 잡는다.

“오늘, 같이 잘래?”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에 정인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뭐?

“나한테 빚 갚는다며.”

어이가 없어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빚 갚는다고 했지, 잔다고는 안 했어.”

“잊었어? 어떻게 갚을지는 내가 정하기로 했잖아.”

노려보자 하준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뒷말을 잇는다.

“불면증이 심해. 솔직하게 말하면 네 덕분에 생긴 병이야.”

정인의 표정이 굳자 하준이 피식 웃었다.

“존나 미안하지? 그러니까,”

말을 하며 그는 앞으로 다가왔고 고개를 떨구어 정인의 어깨에 자신의 이마를 댔다. 뒤로 물러서려던 정인은 그대로 멈췄다. 김하준에게서 짙은 향이 느껴진다. 하지만 더는 그의 페로몬에 반응할 기계 따위는 없었다. 

하준은 정인의 허리를 감싸고 옴짝달싹 못 하도록 만들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분위기에 정인은 아랫입술을 꽉 말아 물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갈 것만 같다. 김하준의 저의를 모르겠다고 생각한 순간 입고 있던 가운 끈이 슥 풀려 나가고 손이 안으로 들어온다.

놀란 정인은 저도 모르게 김하준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김하준을 밀어내자 그가 정강이를 붙들고 상체를 숙인다. 윽. 정인은 벌게진 얼굴로 가운을 급하게 추슬러 묶으며 성질을 냈다.

“너, 이 미친 새끼! 갑자기 왜 만져!”

버럭 성질을 내는데도 하준은 큭큭대고 웃는다. 정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약을 오래 먹어서 정말 미친 거 아닐까? 부작용 같은 거? 이쯤 되니 슬슬 걱정된다. 김하준? 하고 몸을 숙여 얼굴을 살피려는데 웃고 있던 김하준이 벌떡 상체를 든다. 정인이 놀라서 뒤로 확 물러섰다.

김하준은 능글맞고 뻔뻔하게 웃었다. 하지만 눈빛은 그것과는 반대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

“앞으로는 차라리 이렇게 패. 숨어서 질질 짜지 말고.”

아…. 그 말뜻을 가늠하기도 전에 하준은 옆에 걸어 둔 수건을 정인에게 홱 던졌다. 머리 말려. 진짜 감기 걸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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