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하준은 시끌벅적한 식당을 보며 조금 놀랐다. 류정인 할머니의 생신이라고 보육원 식구들뿐 아니라 근처에 사는 친척들까지 모였는데 생각보다 숫자가 더 많았다. 마치 학교 다니던 시절 급식 시간을 연상케 했다.
자신의 식판에 밥을 받은 아이들은 차례대로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큰 아이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는데 어린아이들은 손이 많이 필요했다. 그리고 류정인도 아까부터 직원들과 아이들을 챙기느라 밥을 먹는 건지 마는 건지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때 누군가 옆에서 하준의 팔을 툭툭, 잡아당긴다.
“여보, 얼른 먹어.”
류정인의 할머니였다. 그녀는 치매라고 했는데, 류정인 말로는 가끔 정신이 돌아온단다. 근처에 있던 류정인의 모친이 황급히 와서는 자신의 시어머니를 말렸다. 어머니 그러지 말고 저하고, 저쪽에 가서 드세요.
“아니에요. 제가 할머니 식사 챙겨 드릴게요.”
김은혜가 놀란 얼굴로 보길래 하준이 웃었다.
“걱정하지 마시고 어머니도 식사하세요.”
김은혜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미안해서 어쩌죠. 맞은편 자리로 가는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봤다. 류정인과 많이 닮았다. 어릴 적 류정인이 자신은 엄마를 쏙 빼닮았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옆에 앉은 류정인의 할머니는 젓가락질하면서도 자꾸만 음식을 흘렸다. 그녀에게 반찬을 집어 주고 있는데 누군가 오른쪽 옆으로 와서 앉는다. 아까 류정인과 추격전을 펼치던 삼촌이란 작자였다. 류정인과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난다고 하더니 기껏해야 큰형 정도로 보였다.
“자네 술은 좀 할 줄 아나?”
앞에 앉은 김은혜가 말린다.
“삼촌. 무슨 술이에요.”
“형수님. 좀 봐주세요. 창고에 갇혀 있느라 제가 얼마나 죽을 뻔한 줄 아세요?”
김은혜가 한숨을 쉬며 노려보는데 류동찬이 술을 따라 하준에게 건넨다.
“내가 말이야, 정인이한테 지은 죄가 많아. 그 녀석이 돌아가신 형 대신에 가장 노릇 한 거 나도 알지. 고생한 것도 다 알아. 근데 나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거든. 형수님하고 조카들 더는 고생 안 시키고, 여기 보육원 애들도 더 잘 키우려고 그런 건데. 누가 결과가 이렇게 될 줄 알았겠어. 그래도 그렇지, 삼촌을 그렇게 막 가두고, 발로 차고, 자네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나?”
결국, 자기변명이고 신세 한탄이다. 저 멀리 류정인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자칫하면 다시 뛰어와 자기 삼촌을 두드려 팰 것 같은 기세다. 하준은 피식 웃음이 났다. 옆에 앉은 류동찬은 자신이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내 토로했다.
자기 딴에는 잘해 보려고 한 건데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둥. 그래도 정인이 결혼을 잘해서 다행이라는 둥. 많이 아끼고 보살펴 주라는 둥. 이야기가 길어지자 그는 어느덧 취했는지 말을 하다가도 꾸벅꾸벅 졸았다. 하준이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류동찬이 하준의 팔을 붙잡으며 올려다본다.
“근데… 자네 그거 아나?”
“네?”
“사실, 우리 정인이가, 읍!”
갑자기 나타난 류민아가 류동찬의 입에 떡을 쑤셔 넣는다. 류동찬이 입에 들어간 떡을 우물거리면서 민아를 쳐다보자 그녀는 인상을 험악하게 쓰고 자기 삼촌을 끌어냈다.
“삼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취했으면 어서 가서 자.”
그리고 어디다 내팽개쳐 두고 왔는지 잠시 뒤 돌아와 류동찬 대신 김하준 옆에 붙어서 눈을 반짝거리면서 질문을 한다.
“근데 진짜 형부가 기획사 대표예요?”
형부란 호칭이 귀엽다.
“거기 유명한 배우들 많죠? 김수영도 거기 아니에요? 제가 진짜 팬이거든요.”
“사인받아다 줄까?”
“진짜요?”
류민아가 입을 틀어막으며 기뻐하는데 저 멀리서 류정인이 아이들을 챙기고 다 먹은 그릇들을 정리하느라 바삐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 류정인이 엉덩이 붙이고 제대로 쉬는 걸 보질 못한 것 같다. 지켜보던 하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류정인에게로 다가갔다. 빈 그릇이 담긴 통을 옮기는 걸 도우려고 하자 정인이 쳐다본다.
“뭐 해?”
“보면 몰라. 돕고 있잖아.”
“집에 안 가?”
“술 마셨어. 그리고 너희 할머니가 자고 가라던데.”
정인이 허리를 펴고 기막힌 표정으로 봤고 하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통들을 옮겼다. 정인이 그 뒤를 쫓아가며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잔소리를 퍼부었으나 하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하준도 궁금했다. 자기가 왜 귀한 시간을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를. 직접 와서 확인하면 답답함이 좀 풀릴 거 같았는데, 오히려 더 답답해졌다. 어릴 적 자신이 본 류정인은 그저 철없는 막내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곳에서 본 정인은 어깨가 무거운 가장이었다.
정리를 마치자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아이들도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마침 네다섯 살 아이 하나가 정인에게 와서 잘 자라며 인사를 하고 양팔을 뻗는다. 아이를 번쩍 안아 주고 뺨을 비비던 정인이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웃었다. 결혼 내내 한 번도 볼 수 없던 미소였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아이를 내려놓고 돌아서던 정인이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안 가?”
“자고 간다고 몇 번을 말해.”
“여기 너 잘 데 없어.”
때맞춰 김은혜가 지나가길래 하준이 그녀를 불렀다.
“어머니. 저 자고 가려고 하는데 빈방 없어요?”
김은혜가 당황해서는 정인을 쳐다본다. 정인이 눈으로 신호를 마구 보냈다. 없다 그래요. 절대 안 된다고 해요. 절대, 절대, 절대. 그때 류민아가 불쑥 나타나더니 자고 가시게요? 하고 묻는다. 정인이 눈으로 욕을 했으나 류민아는 모른 척 쌩깠다.
“오빠가 예전에 쓰던 방 비었어요. 여기서 좀 떨어져 있는데, 조용하고 좋아요. 거기 쓰시면 되겠다. 부부니까.”
부부란 말을 힘주어 말한다. 김은혜가 거긴 불도 안 들어오고, 어쩌고 핑계를 대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처제, 방이 어딘데?”
얼씨구, 둘이 쿵짝이 맞는다. 정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김하준과 류민아가 사라지자 김은혜가 와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왜 갑자기 찾아왔어? 정인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저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를 안심시키고 방으로 가 보니 류민아가 이불까지 꺼내 준다. 모친의 말대로 방은 오래 비어 있어서 바닥에 냉기가 감돌았다.
“기다리시면 제가 보일러 얼른 올려 드릴게요. 물은 30분 정도 있다가 쓰세요.”
하, 어이없어 쳐다보는데 류민아가 도망치듯 후다닥 나가 버린다. 방에 둘만 남게 되자 분위기가 한없이 어색해졌다. 그런데 김하준이 일어나 입고 있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한다. 정인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뭐 해?”
씻고 자야지.
“이따가 벗으면 되잖아.”
“갈아입을 옷 줘.”
정인이 후, 한숨을 내쉰 다음 옷장을 뒤적였다. 고등학생 때 입던 옷이 여기 있을 텐데. 옷을 뒤적거리는데 회색 후드티셔츠가 딸려 나온다. 잽싸게 도로 넣으려고 했으나 김하준이 먼저 낚아채 갔다. 그걸 펼쳐 든 김하준의 표정이 묘하다.
“이거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
줘. 정인이 그것을 빼앗아 옷장에 쑤셔 넣었다. 김하준이 선물로 사 줬던 거. 하필 이게 나올 건 뭐람. 품이 좀 큰 티셔츠를 꺼내서 내밀자 김하준이 받지 않고 빤히 쳐다보다가 조금 뒤에 가져간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리자 정인은 밖으로 나왔다. 집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물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종일 정신없이 보냈더니 진땀이 다 나는 것 같다. 담배를 다 피우고 난 뒤에는 안방에 딸린 욕실에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할머니 생신이라고 친척들까지 오는 바람에 방마다 빈자리가 없다. 정인은 하는 수 없이 하준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불은 꺼져 있고 방은 조용하다.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도저히 들어가지 못하고 차로 향했다.
히터를 틀고 좌석을 뒤로 젖히고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런데 자리가 불편하니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도로 밖으로 나와 김하준에게로 돌아갔다. 문을 조심스럽게 여는데 방이 어둡다.
살금살금 들어가 옆에 펴 둔 이부자리에 가만히 누웠다. 류민아가 분명 보일러를 틀었다고 했는데 어째서 방바닥이 이렇게 차갑지. 김하준을 보니 쌔근쌔근 자고 있다. 하긴, 김하준은 추위를 안 타니까.
이불을 목 끝까지 올렸는데도 한기가 느껴진다. 차라리 다시 차에 가서 잘까, 고민하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워?”
김하준이다.
정인은 자는 척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더니 몸 위로 이불 하나가 더 덮인다. 놀라서 돌아봤더니 김하준이 바로 등 뒤에 눕는다.
“뭐 해?”
“나도 추워서 그래. 붙어 자면 덜 춥겠지.”
“떨어져.”
“동업자한테 이상한 짓 안 해. 괜히 오버하지 마.”
김하준의 향이 짙게 풍겨 와 숨을 깊게 들이마시지도 못하겠다. 얼굴을 반쯤 이불 속으로 집어넣고 있는데 김하준이 조금 더 가까이 붙으며 등에 가슴이 닿는다. 정인이 숨을 멈췄다.
“건들면 가만 안 둔다.”
조용하다. 답답해서 움직이고 싶은데 행여 몸이 닿을까 봐 그러지도 못하겠다. 최대한 웅크리고 있으니 김하준 말대로 덜 추운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도통 잠이 오질 않는다.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데 보일러가 그제야 돌아가는지 방바닥이 서서히 따뜻해진다.
“이제 따뜻해졌으니까, 비켜.”
김하준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어깨를 움직여 밀어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러면서도 한 번씩 몸을 건든다. 기분이 이상하다.
“너 안 자지?”
고개를 돌려 확인하고 싶은데 차마 용기가 나질 않았다.
***
눈을 떴을 때 류정인은 곁에 없었다. 밤새워 뒤척이는 거 같더니 아침 일찍 사라졌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하준은 방을 한 번 둘러봤다. 어린 시절 류정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책상에는 몇 권의 책과 앨범 같은 것들이 꽂혀 있었는데 그곳에서 앨범을 하나 꺼냈다. 어릴 적 류정인의 모습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얀 얼굴에 눈이 커다래서 카메라를 보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엄마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걸 보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귀여워….
앨범을 넘길수록 류정인의 시간도 흘러갔다. 교복을 입은 증명사진을 보자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1학년 끝 무렵 둘은 증명사진을 찍으러 사진관에 함께 갔었다. 그리고 사진을 한 장씩 나눠 가졌다. 그리고 그날 시내에 있는 노래방에서 몰래 뽀뽀도 했었는데….
잠시 옛 추억에 젖어 씁쓸하게 웃고 있는데, 다음 장으로 넘기자 어울리던 친구들의 사진이 나온다. 그러나 하준은 앨범을 더 넘기지 못하고 사진 하나에 시선을 고정했다. 류정인과 강해찬…. 뒤로 가자 강해찬의 사진이 몇 장 더 있다.
두 사람이 어릴 적부터 같은 동네에 함께 살았다는 것을 안다. 당시 강해찬은 류정인을 좋아했었다. 그래서 김하준을 늘 못마땅한 시선으로 보던 것도 알고 있다.
굳은 얼굴로 다음 장, 또 다음 장을 넘겼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는데 하준의 사진은 그 어디에도 없다. 분명 같이 찍은 사진이 꽤 여러 장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하준은 앨범을 덮고 그 자리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쩌면 내가 착각하는 게 아닐까. 류정인이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나를 속였다고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건 아닐까.
앨범을 제자리에 꽂아 두고 돌아서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그리고 잠시 뒤 류정인이 운동복 차림으로 들어왔다. 추위에 얼마나 뛰었는지 코끝과 얼굴이 빨갛게 얼어서는.
“일어났네.”
“어디 다녀와?”
“운동하고 왔어.”
겉옷을 벗어 정리한 정인은 시간을 확인했다. 조금 있으면 아침을 먹으러 가야 한다. 그 전에 김하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물론, 본인이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나, 할 얘기가 있는데.”
“말해.”
“여기서 며칠 더 있다가 가면 안 될까?”
정인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삼촌과 이야기를 매듭지을 필요도 있었고, 더 솔직히 말하면 김하준과 떨어져 있고 싶다. 이곳에서 며칠 있다 보면 자꾸만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불가능해.”
고민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딱 자른다.
“어째서?”
“다음 주 화요일이 제사야.”
“아.”
“서 집사한테 들었지?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제사에 목숨 거는 고리타분한 사람인지.”
한 달에 한 번 제사가 있다더니 그게 하필이면…. 서 집사 말로는 가서 직접 음식을 도와야 한다고 했던가. 또한, 친척이 오는데 그 숫자가 어마어마하단다. 정인의 집은 어릴 적부터 제사를 따로 지내지 않았기에 가서 잘 해낼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나도 너희 할머니 생신에 참석했으니, 너도 우리 집 제사에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정인이 눈을 흘겼다. 누가 참석하라고 했나. 자기 멋대로 와 놓고서. 입을 삐죽인 뒤 벗어 둔 옷을 다시 챙겨 입고 나가려는데 김하준이 팔을 붙든다. 돌아보니 그가 빤히 쳐다본다.
“이제라도 솔직하게 말해 봐.”
“뭘.”
“나한테… 그때 왜 그랬어?”
정인은 눈만 깜빡였다. 아…! 김하준이 무슨 말을 하는지 뒤늦게 이해하자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또 그 질문이다. 혹시 혼자 술을 마셨나 싶어 방 안을 둘러봤다. 그러나 어디에도 술병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너한테 차일 이유가 없었거든. 근데, 왜 그렇게 하루아침에 헤어지자고 했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어. 여기서 까놓고 말해. 그럼 나도 더는 이걸로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까.”
정인은 감정을 숨기고 일부러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러고 나서 하준을 정면으로 마주 봤다.
“사람 마음이 변하는데, 이유가 어딨어.”
하준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냥 마음이 옮겨 간 거야. 너한테 가던 내 마음이 강해찬한테 옮겨 간 거라고.”
김하준의 갈색 눈동자가 흔들린다. 정인은 알고 있다. 김하준에게 미묘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걸.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말을 끝맺자 김하준이 잡고 있던 팔을 놓아주며 코웃음을 쳤다.
“난 또 대단한 이유라도 있는 줄 알았네. 술 취해서 거짓말 어쩌고 하길래.”
정인의 얼굴이 굳었다. 그날 밤,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구나. 긴장한 티를 감추려 어색한 웃음을 짓는데 밖에서 류민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빠, 안에 있어? 엄마가 아침 먹으러 내려오래. 형부도 같이 오세요.”
저놈의 형부 소리는 잘도 내뱉는다. 정인이 바깥을 향해 소리 질렀다.
“금방 내려갈게.”
발소리가 들렸고, 정인은 벗어 둔 점퍼를 집어 들었다. 가자. 그러나 김하준은 나갈 채비를 하는 대신 도로 바닥에 앉았다.
“먹고 와. 나는 눈이나 더 붙일래.”
“어제 실컷 잤잖아.”
“그래 보였어?”
하준이 묻는 말에 정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잠을 못 잔 게 저 하나만은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다.
정인이 문을 닫고 나가자 하준은 눈을 감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조용하다. 내면에선 소리 없는 전쟁이 끝없이 펼쳐졌다.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봤다. 낡은 벽지가 세월의 흔적을 말해 주고 있었다. 벽에 걸린 류정인의 졸업 사진이 시선을 끈다. 어릴 적 그 맑던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며 비웃는 것 같았다.
쓴웃음이 난다. 어쩌면 자신이 바라던 것은 애초에 이곳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
서 집사는 한복의 명칭과 입는 법에 대하여 구구절절 설명했다. 정인은 제사 때 한복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얼핏 듣기론 부쳐야 할 전의 양만 해도 어마어마하다는데 편한 운동복도 아니고 이 불편한 한복을 입고 전을 부쳐야 한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한숨만 새어 나온다.
“김하준도 한복 입나요?”
“네. 두 분이 같이 입으실 거예요. 색만 다르고요.”
서 집사의 얼굴에 뿌듯함이 배어 나온다. 정작 김하준은 시골에 다녀온 뒤부터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새로운 배우들을 영입하면서 규모를 늘려 가느라 바쁠 시기라고 서 집사는 서운해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정인은 그가 일부러 피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이편이 훨씬 나은 것도 있지만….
한복 입는 것을 어느 정도 숙지한 뒤 서 집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2층에서 비명이 들려온다. 정인과 서 집사는 동시에 그곳을 바라봤다. 위층을 청소하던 직원이 뛰쳐 내려오며 울상이다.
“집사님, 새요. 새가 들어왔어요!”
서 집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새요?”
“방충망을 잠깐 열었는데, 그 틈으로 글쎄!”
직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서 집사가 올라가려고 하기에 정인이 말렸다. 제가 가서 잡을게요. 시골에서 자라 새나 쥐 같은 걸 잡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씩씩하게 계단으로 올라가 2층에 갔는데 막상 새는 보이지 않는다.
주위를 살펴보던 정인은 하준의 침실 의자에 시커먼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직원이 놀랄 만하다. 작은 새도 아니고, 저렇게 큰 까마귀가 나타났으니. 대체 어디서 날아온 거야.
막상 가까이서 보니 커서 무섭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서는 붙잡으려고 하자 날갯짓을 하며 옆으로 도망간다. 잠깐 방심한 틈을 타 잽싸게 잡자 깍, 소리를 내며 날개를 자꾸 펼치려고 한다.
잡아서 열린 창밖으로 내보내자 푸드득거리며 허공 위로 날아간다. 창을 닫은 후 정인은 욕실에 들어가 손을 닦았다. 수건을 찾으려고 수납장을 열었는데, 그곳에 전에 봤던 그 약통이 있다.
불면증이 심한 걸까. 신경이 쓰여 약을 열어서 확인했다. 전보다 양이 훨씬 줄었다. 약을 원래 위치에 놓아두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김하준의 침실에 들어온 건 이곳에 오고 처음이다.
신혼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자신의 방과는 달리 김하준의 방은 그야말로 삭막하다. 가구도 침구도 모두 무채색으로 따뜻한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한쪽 벽에 걸린 그림마저도 색감이 우중충했다.
분위기를 따뜻하게 바꾸면 잠이 더 잘 오지 않으려나.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 내심 자신이 김하준의 불면증에 대해 신경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인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고, 침대에 앉았다가 그대로 누웠다.
푹신푹신한 자신의 침대와는 달리 매트가 딱딱하다. 시골집 방바닥에서도 잘 자더니 이유가 다 있었다. 누워 있으니 김하준 체취가 느껴진다. 아예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코를 킁킁댔다.
“뭐 해?”
난데없는 목소리에 정인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
대낮에 왜 여기에…
“변태야? 소름 끼치게 왜 남의 베개에 코를 박고 킁킁거려?”
김하준이 침실로 들어오며 서늘하게 일갈한다. 정인은 민망함에 얼른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그게 아니라, 갑자기 새가 들어와서, 내가 대신 잡아 주느라… 변명을 했으나 김하준은 냉랭하다. 시골에서 올라온 뒤 계속 저 상태다.
“내려가.”
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미안. 아래층으로 내려오는데 서 집사가 기다린다.
“새는 잡아서 내보냈어요.”
청소하는 직원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더니 쌩하니 올라간다. 직원도 마음대로 드나드는 2층인데 어째서 나는…. 김하준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지만, 괜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대표님 컨디션이 좋지 않은가 봐요. 제가 약 챙겨 드릴 테니, 들어가서 쉬도록 하세요.”
“어디 아프대요?”
“아픈 건 아니고, 요즘 계속 일 때문에 바쁘셨거든요.”
네. 정인은 서 집사를 뒤로하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입구부터 김하준의 침실과는 분위기가 천지 차이다. 소파에 앉은 정인은 테이블 위에 노트를 발견하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앞장을 펼치자 낯선 남자의 얼굴이 나타난다. 이해수가 가져온 사진 속 그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떠올리려고 애썼다. 몇 번이고 지우고 수정하는 동안 남자의 얼굴은 점점 윤곽이 잡혀 갔다.
***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간 곳은 김 회장의 집이 아닌, 김하준의 할머니 댁이었다. 정인은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큰 한옥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서 집사의 말에 따르면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건축가가 직접 설계한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집 구경도 잠시 한복으로 갈아입고 마루에 앉아 음식을 하기 시작하면서 고통은 시작됐다. 몇 시간 동안 기름 냄새를 맡으니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요즘처럼 먹을 거 많은 세상에서 누가 전을 이렇게 많이 먹는다고.
산적부터 시작해 동그랑땡, 애호박전, 명태전, 깻잎전, 고추전, 육전, 기름으로 부칠 수 있는 건 다 부칠 작정인지 아침부터 했는데도 여전히 남은 재료는 산더미였다.
“음식은 정성이다. 무조건 정성으로 만들어야 조상님도 드시고 만족하는 거지, 불손한 마음으로 만들면 죄 받어.”
김하준의 할머니가 뒤에서 잔소리를 해 댔다. 죽은 귀신이 어떻게 음식을 먹겠는가. 그리고 속으로 불평한다고 해서 해코지를 하면, 그게 조상인가. 악귀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꾹꾹, 눌러 삼키며 열심히 전을 뒤집었다.
한편으로는 김하준의 모친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단아하게 앉아서 힘든 내색 한 번 없이 음식을 했는데, 보통 정인이 생각하는 손 하나 까닥하지 않는 부잣집 사모님과는 꽤 거리가 있었다.
게다가 이 짓을 한 달에 한 번씩 해야 한다고?
시간이 지날수록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프고, 엉치뼈가 저려 왔다. 한복은 답답해, 허리는 아파, 기름 냄새에 머리는 지끈대고,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질 찰나 손님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그럴 때마다 일을 중단하고 일어서서 인사를 하였는데 대부분 처음 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인을 보며 한마디씩 했다. 몸은 이제 괜찮으냐고, 결혼식 때 깜짝 놀랐다며, 그리고 꼭 마지막에 아기는 언제 가질 거냐고 물었다. 정인은 난감한 얼굴로 웃을 뿐 대답하지 못했다.
전 부치기도 바쁜데, 손님들 술상까지 차려서 가져다줘야 하니 쉴 틈이 없었다. 왜 남의 조상 제사에 전도 내가 부치고, 손님 대접도 내가 하고. 돈도 많은 집에서 차라리 도우미를 쓰든가 하지, 이해가 안 됐다.
겨우 할 일을 끝내고 허리를 펴고 쉬려고 하는 순간 김하준이 등장했다. 얄밉게도 자기 혼자 정장이다. 분명 서 집사가 한복을 같이 입으라고 했는데. 하지만 그 누구도 김하준의 옷차림에 대해선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그가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는 사이 정인은 슬그머니 뒤뜰로 가서 품에 숨겨 둔 담배를 꺼냈다. 아우, 죽겠다. 허리를 두드리며 담배를 물고 하늘을 쳐다보는데 달이 밝아도 너무 밝다.
담배 연기와 함께 한숨을 내쉬는데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린다. 다급하게 담배를 비벼 끄는데, 나타난 사람이 다름 아닌 김하준이다. 정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까이 다가온 김하준이 정인을 위아래로 훑는다.
“꼴이, 왜 그래?”
“보면 몰라? 너네 조상님 드실 전 만드느라 좆빠지게 고생해서 그렇지.”
하준이 코웃음을 쳤다. 할머니가 들으면 기절할 말이다. 류정인은 대체 왜 죽은 사람 때문에 산 사람들이 모여서, 그것도 김씨가 아닌 그 배우자들이 개고생해야 하느냐며 따졌다. 그 말엔 하준도 동의했다.
“참아. 어차피 이제 3번 남았어.”
그러고 보니 결혼하고 한 달이 거의 지나갔다. 결혼식을 기점으로 멈춰 버린 것 같던 시간은 어느 순간부터는 순탄하니 흘러가고 있었다. 정인이 굳어 버린 목덜미를 주무르자 하준이 가까이 오더니 어깨에 손을 댄다.
정인이 화들짝 놀라며 그 손을 떼어 냈다.
“뭐 해?”
“우리 조상들 때문에 고생했으니, 내가 주물러 주게.”
“됐어. 병 주고 약 줘? 내가 할 거야.”
하준이 한 발 떨어지더니 비죽였다.
“너무 투덜거리지 마. 어쨌건 그 많은 돈을 받았으면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열이 받아 등을 후려쳤는데 김하준은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발길질하려던 정인은 흠칫 놀라 동작을 멈췄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뒷짐을 지고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실루엣이 딱 김하준네 할머니 같았다.
아니나 달라 저벅저벅 걸어오는데 김하준네 할머니가 맞다. 그녀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고는 정인을 보며 혀를 찼다.
“어디서 배워 먹지 못한 버릇이야. 누가 그렇게 발길질하라고 가르치디.”
정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김하준이 편이라도 들어 주면 좋겠는데, 모른 척하고 그냥 가 버린다. 개새끼. 노려보는데 김하준네 할머니가 일장 연설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김하준이 얼마나 귀하고 귀하게 자랐는지, 태어나서 누구도 손 한 번 댄 적 없이 곱게 키웠는데, 어디 감히 네가 손을 대느냐고….
“죄송합니다….”
저 멀리 걸어가던 김하준이 돌아본다. 정인은 입술을 꾹 다물고 노려봤다. 얼핏 김하준이 웃는 것처럼 보였다.
***
“너 정말 이럴래?”
아침부터 집요하게 구는 이한에게 서 팀장은 성질을 냈다. 이해수 사망 사건을 종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는데, 기어코 들쑤시고 다니더니 낮에는 검사한테 찾아가 영장을 발부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요즘 한창 주가가 오르고 있는 와이엠 홀딩스의 양태환 대표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이해수가 숨지기 몇 시간 전 호텔에서 누군가를 만났는데, 그 호텔을 예약한 사람이 양태환의 비서라는 이유였다.
“아무래도 이상하잖아요. 임신까지 한 사람이 뭐 하러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까.”
죽은 이해수가 부검에서 임신한 사실이 밝혀졌다. 아무리 비밀이라고 해도 소문은 새어 나갔고, 인터넷상에서는 자꾸만 말이 돌았다. 그런데 이해수가 병원에서 임신이라고 진료받은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본인도 몰랐겠지. 그리고 우울증이 있었다잖아.”
“다리에 자해는요? 아무리 미쳤다고 해도 그렇게 칼로 도려내는 게 가능할 거라고 보세요?”
“미치면 뭔 짓을 못 해.”
“팀장님!”
서 팀장이 주변을 살핀다. 어후, 이 고집불통. 이한의 말에 따르면 죽은 이해수의 다리에 타투 작업을 했던 타투이스트가 있는데,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는 거다.
“그 타투이스트, 이번에 우진그룹 아들하고 결혼한 사람이라며.”
“네.”
“너 인마.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그 사람이 증인 선대? 가뜩이나 김만호 회장 선거 출마한다고 난린데, 그 꼴을 두고 볼 것 같아?”
이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류정인에게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으나, 필요하다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팀장은 아무래도 모든 게 다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양쪽 다 들쑤셔 놓고, 아무것도 안 나오면? 너 그냥 옷 벗고 집에 가야 돼.”
“가죠, 뭐.”
“이 새끼가.”
“일단 태아 유전자 샘플 확보해 뒀으니, 그거 검사만 할게요. 영장만 나오게 해 주세요.”
서 팀장이 질린다는 표정을 했다. 이한은 경찰대학을 다닐 당시만 해도 촉망받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팀으로 배정받아 왔을 때 드디어 우리 팀에도 인재가 들어왔다며 기뻐했었다. 그러나 이건 인재가 아니라 화근덩어리다.
“너 촉 너무 믿지 마. 이 바닥에서 몇십 년을 뒹군 네 선배들이 촉이 없어서 범인을 못 잡는 거 같아? 일이란 게 절차가 있는데, 다 무시하고 네 마음대로 할 거면 뭐 하러 형사를 해. 차라리 탐정 사무소를 차리지.”
쏘아붙이고 돌아가는데도 이한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들볶이던 서 팀장이 밖으로 도망가려는데 문 앞에 웬 잘생긴 남자 하나가 기웃댄다. 보기 드물게 외모가 수려해서 쳐다봤더니 뒤에 있던 이한이 먼저 아는 척을 하는 것이었다.
“어 정인 씨?”
정인은 손에 쇼핑백을 들고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셨어요, 형사님.”
“여긴 어쩐 일이에요?”
정인이 주변을 한 번 살피고 나서는 들고 있던 쇼핑백에서 노트를 꺼냈다. 이거요. 이한이 노트를 받아 들고서는 정인을 본다.
“제가 다시 그려 봤거든요. 그때 시간이 없어서 너무 대충 그려 드린 거 같아서요.”
아, 그래요? 그 자리에서 노트를 넘기자마자 이한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진다. 이건…. 이한이 주변을 한 번 살피더니 정인을 데리고 휴게실이 있는 곳으로 옮겨 갔다. 그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노트를 펼치고 정인에게 다시 확인했다.
“이 얼굴 맞아요?”
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정인은 조금 망설였다. 어디까지 솔직하게 말해야 할까. 이해수가 삶이 힘들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게 사실이라면 자기 얘기를 흘리고 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고민하고 있는데 이한이 차를 한 잔 건네 온다. 정인은 그것을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결혼할 사이라고 했어요.”
이한의 눈이 커진다. 이해수의 죽음 어디에도 이 사람이 연관된 흔적은 없었다.
“다른 말은요?”
“깜짝 선물이라고, 놀라게 해 줄 거라고. 그리고 이제는 정착하고 싶다고….”
“…….”
“저한테 비밀은 꼭 지켜 달라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는 바람에….”
정인이 말을 잇지 못하자 이한이 기막힌 표정으로 그림을 봤다.
그림 속 남자는 처음 정인이 그려 줬던 것과 비교하여 훨씬 세밀해졌다. 눈썹 위의 흉터 자국까지 제대로 그려 놨으나, 이것은 자신이 범인이라고 생각하던 양태환이 아니라 그의 동생 양욱환이었다.
***
[저 김만호, 여러분을 위해 참된 일꾼이 되겠습니다. 여러분의 손과 발이 되어 어디든 달려가겠습니다! 저를 믿고 뽑아만 주신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영상 속 김 회장의 모습은 여느 정치인과 다를 바 없었다. 노래와 함께 선거 유세 차량 아래로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 아래쪽에서는 류정인이 기호 1번 김만호라고 적힌 파란색 띠를 두르고 사람들에게 선거용 전단을 나눠 주고 있었다.
류정인은 선거를 도와 달라는 말에 군말 없이 나서 줬다. 그런 류정인을 보며 사람들의 관심은 쏟아졌다. 외모와 인성을 다 갖춘 류정인은 화젯거리로 충분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영상을 보며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찌라시가 돌고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아들 김하준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얼마 전 죽은 이해수가 임신을 했는데, 그게 김하준 애라는 해괴망측한 내용이었다.
소문은 점점 부풀어져 결국에 김 회장 귀에까지 들어오더니 이젠 영상에도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김 회장은 보고 있던 태블릿을 내려놓은 뒤 담배를 하나 꺼냈다.
“미친 것들. 이젠 별 소문을 다 만들어 내는구나.”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김 회장은 김하준을 잘 알았다. 그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인생 막사는 것처럼 보여도 절대 자신의 소속사 연예인과는 추문을 만들지 않았다.
“더 퍼지지 않게 막아. 하준인 어때? 요즘도 집에 안 들어와?”
“예, 주로 한남동 자택에서 머무는 것 같습니다.”
하, 김 회장의 얼굴에 그늘이 짙어진다. 이 망할 놈. 결혼이 아니라 역시 외국으로 보냈어야 했나. 결혼하고 한 달 가까이는 잠잠하더니, 최근엔 아예 집엘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다.
혹여라도 김하준이 베타인 류정인과 엮일까 봐 걱정했는데, 이건 오히려 그 반대가 됐다. 가뜩이나 계약 결혼이네 뭐네 소문이 슬슬 퍼지고 있는데, 이대로라면 선거에도 영향을 끼칠 수가 있다.
“잡지사에 연락 넣어. 둘이 인터뷰하라고 해. 다정하게 찍은 사진도 내보내고, 어떻게 해서든 소문 더 퍼지는 거 막아.”
“예, 회장님. 그리고….”
윤 비서가 말을 하려다 만다. 김 회장이 쳐다보자 그가 꾹 다물고 있던 입을 뗐다.
“죽은 이해수 관련해서 경찰에서 류정인 씨와 접촉한 모양입니다.”
“어째서?”
“죽기 전 이해수 씨가 타투를 했는데,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더 알아봐야겠지만, 더 엮여서 좋을 건 없을 것 같습니다.”
김 회장이 침음을 삼켰다.
“하준인 알고 있어?”
“아직 모르는 것 같습니다.”
“윤 비서 자네가 가서 하준이 만나고 와. 단도리 확실히 하라고 해.”
“예.”
김 회장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해수가 임신한 아이가 김하준 애라고 소문이 난 상황에서 류정인마저 이해수와 연관이 있다라…. 마치 일부러 짜 맞춘 것마냥 일이 그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정인이 달력에 빨간색 펜으로 엑스를 그렸다. 멈춰 버린 것 같던 시간이 그래도 조금씩은 흘러가고 있었다. 민아에게 마침 메시지가 온다. 그녀는 요즘 하루에 한 번 류동찬의 동태를 보고했다.
류동찬은 예상과는 다르게 보육원에서 착실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이미 한 번 뒤통수를 호되게 맞았지 않은가. 답장을 보낸 정인은 방에서 나왔다.
서 집사는 오늘 여유가 있으니 마사지도 받고, 이참에 골프를 좀 배우는 건 어떻겠냐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건 정인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 거울을 보니 길어진 머리가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살짝 다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차를 끌고 밖으로 나온 정인은 자주 가던 카페에 가서 즐겨 먹던 커피도 마시고, 옷가게에서 검은색이 아닌 다른 색 티셔츠도 사고, 단골 미용실에서 머리도 다듬었다. 어느덧 오후가 훌쩍 지나갔다.
친구들을 부를까, 고민하였으나 연락처를 뒤지다가 마음을 접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 신세 한탄을 할 순 없었다. 다혜도 애인을 만나느라 바쁜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혼자 거리에 우두커니 차를 세워 놓고 있다가 결국엔 자주 가는 곱창집으로 향했다. 가게에 들어가니 사장이 오랜만에 본다며 아는 척을 해 온다. 혼자서 곱창 2인분을 시켜 놓고 먹다가 아쉬운 마음이 들어 나중엔 소주도 시켰다.
바삭할 정도로 익은 곱창을 양념에 찍어 먹는데 혼자서 먹어도 맛은 좋다. 소주도 오늘따라 물처럼 술술 넘어간다. 서 집사가 알면 잔소리를 하겠지만, 그건 뭐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최근 정인은 밤이면 혼자 술을 먹는 날이 부쩍 늘었다. 아무래도 그 집터에는 술 귀신이 사는 게 분명하다. 김하준도 모자라 이젠 자신이 알코올 중독이 되게 생겼다. 술을 한 병 가까이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정인 씨? 하고 부른다.
잘못 들었나 싶어 돌아보던 정인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어?”
이한 형사다. 그의 뒤로 여러 명이 더 있었는데, 같이 일하는 동료들인 것 같았다.
“깜짝 놀랐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정인이 소주잔을 들어 보이며 배시시 웃었다.
“곱창에 한잔하러 왔죠.”
이한이 하하, 하고 웃더니 동료들에게 먼저 가 있으라는 신호를 보내고 맞은편에 앉는다. 정인이 술을 한 잔 따르고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왜 거기 앉으세요?”
“괜찮아요? 많이 취한 거 같은데.”
에? 정인이 말도 안 된다며 손을 내저었다. 아무리 술을 못 먹어도 소주 한 병에 취할까. 정인은 집게로 곱창을 집어 이한 형사의 앞접시에 놓아 줬다.
“이왕 앉으신 거 곱창 드세요. 혼자 먹기엔 너무 많아요.”
이한이 난감한 듯 웃자 정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형사님. 곱창 싫어하시는구나.”
“그게 아니라 정인 씨, 큽, 아니에요.”
이한이 입술을 말아 물고 웃음을 참는다. 정인은 눈초리를 가늘게 늘였다. 대체 왜 웃는 거지. 곱창을 준 게 그렇게 웃긴 일인가. 하지만 정인은 알지 못했다. 이한의 접시에 놓아 준 게 곱창이 아닌 익다 못해 새카맣게 타 버린 파라는 걸.
***
하준은 김 회장의 선거유세 동영상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김 회장의 모습이 생소하다 못해 보는 이로 하여금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 실소를 터트리며 그 영상을 모친에게 그대로 전송했다.
아버지 보세요. 얼마나 귀여우신지. 빈정거리는 말도 덧붙여선.
근데 영상 중간에 류정인도 나온다. 그는 선거캠프 직원들과 같은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유인물을 나눠 주고 있었다. 생글생글 선거용 웃음이 카메라에 몇 번이나 잡힌다. 참, 넉살 좋다. 물론 김 회장이 부탁해서 억지로 하는 거겠지만, 어떻게 보면 하준 대신에 정인이 효도를 하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댓글을 보니 김 회장에 대한 글보다 류정인에 대한 얼굴 평가가 주로 많았다. 잘생겼다. 유부남 같지 않다. 미혼이라면 한 번 만나고 싶다. 계약 결혼이라는 말이 있던데 사실인가.
인상을 쓰고 쳐다보는데, 중간중간 하준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바람둥이, 파티광, 난봉꾼, 망나니, 잘생긴 쓰레기는 또 뭔데.
좋은 말은 하나도 없다. 어이가 없어서 웃는데 노크와 함께 윤 비서가 등장한다. 어쩌면 이렇게 때를 맞춰서 왔을까. 아버지 수발들기도 바쁘신 양반이. 휴대전화를 내려놓고서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까닥 인사를 하더니 책상으로 걸어온다. 그리고서 명함 하나를 책상에 올려놨다. M 매거진이라는 글자가 하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바쁘신 거 같으니 회장님 말씀만 전달하고 가겠습니다. 일주일 뒤에 두 분 인터뷰 있을 예정입니다. 그쪽에서 연락할 테니, 준비하시고 약속 장소로 바로 가시면 됩니다.”
하준이 들고 있던 명함을 테이블에 툭 던졌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인터뷰하라고요?”
“전 회장님 말씀만 전할 뿐입니다. 그리고 대표님이 요즘에 집에 거의 들어가지 않고 밖에 머무는 걸 회장님도 알고 계십니다. 부디 더는 쓸데없는 소문을 만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것도 회장님 바람이십니다.”
“하.”
“더불어 류정인 씨가 이해수 사건에 연관되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은 없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 부분은 대표님께서 류정인 씨에게 직접 언질을 주는 게 나을 것 같다고요.”
김하준은 윤 비서를 노려보며 명함을 쭉쭉, 찢어서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윤 비서의 표정엔 일절 변화가 없다. 류정인이 이해수 사건 때문에 경찰서에 들락이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류정인과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라니.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하준은 일어서며 외투를 챙기고 윤 비서를 향해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제가 장단 맞춰 드린 건 결혼까지예요. 더 협상할 생각이시면 아버지한테 다른 걸 가져오라고 하세요. 제 구미가 당길 만한 거로다.”
씩 웃고 나서 그를 지나쳐 밖으로 나왔다. 윤 비서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속으로 온갖 욕은 다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준은 지하 주차장으로 나와 차를 끌고 집으로 향했다. 낮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게, 어째 불안하다.
설마 러트가 또 오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예감에 집으로 서둘러 차를 몰았다. 단지 입구를 막 들어가 대문 옆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는데 저 멀리 류정인의 차가 올라온다.
이 늦은 시간에 어딜 다녀오는 건지 궁금했으나, 얼굴을 마주치고 싶진 않았다. 모른 척 계단을 올라가는데 차가 멈추더니 저기요, 하는 낯선 이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온다.
하준이 뒤를 돌아봤다. 운전석에서 처음 보는 남자가 내렸다. 누구지? 대리 기산가.
“저기, 류정인 씨가 술이 많이 취해서 제가 대신 운전을 하고 왔는데요….”
하준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남자가 보조석으로 가서 문을 여는데 류정인이 거의 인사불성 상태로 늘어져 있다. 남자가 벨트를 풀고 정인 씨? 괜찮아요? 내릴 수 있겠어요? 라고 묻는다.
하준이 계단을 내려가자 남자가 돌아보며 난감한 표정으로 웃더니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넨다. 남부경찰서 강력1팀. 이한? 형사를 류정인이 왜?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류정인이 비틀거리고 내리더니 이한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서 중얼거린다.
제가 꼭, 도와드릴게요. 꼭 돕겠습니다.
표정은 비장한데 목소리는 꽐라가 되어 뭉개진다. 하준은 어이가 없어 노려보다 류정인의 뒷덜미를 확 잡아당겨 이한에게서 떼어 냈다.
“감사합니다. 제가 데리고 갈게요. 그만 가 보셔도 되겠어요.”
이한이 움찔해서 쳐다봤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으나 상대방의 목소리가 얼음장 같았다.
하준은 류정인을 집으로 끌고 들어와 1층 거실 소파에 내팽개쳤다. 완전히 정신을 잃고, 횡설수설이다. 서 집사한테 최근 류정인이 밤에 혼자 종종 맥주를 마신다는 보고를 받을 때도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모, 곱창 추가요!”
얼씨구. 미쳤구나, 아주. 어이없게 쳐다보다 그대로 두고 2층으로 올라왔다. 생수를 따 목을 축이며 열을 식히고 있는데 아래층에서 류정인이 김하준!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차라리 들어오지 말고 밖에서 잘 걸 후회가 됐다.
도로 나갈 작정을 하고 차 키를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왔는데, 류정인이 어느덧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서 마시고 있다. 테이블에 다리를 올린 채 맥주를 마시다 손을 들더니, 어이! 하고 인사를 한다. 가관이다 정말. 다가가서 맥주를 빼앗자 그는 마치 젖병을 빼앗긴 아이처럼 울상을 지었다.
“줘어!”
“취했으면 들어가서 자.”
이를 까득 물며 경고조로 말하는데도 뭐가 좋은지 눈을 접어 생글생글 웃는다. 열이 훅 올라왔다. 아까 그 형사란 놈 앞에서도 취해서 설마 이러고 있던 건 아니겠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류정인이 맥주를 귀신같이 낚아채더니 꿀꺽꿀꺽 마셔 버린다.
그러고 나서 손등으로 입가를 닦고 나른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김하준 이래서 맨날 술을 먹는 거구나. 기분이 날아갈 거 같아. 너무 좋아. 취하니까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하하, 씨발!”
저 정도면 누가 술에 약을 탄 거 같은데.
“차라리 전처럼 옷을 벗어라.”
비꼬려고 한 말인데 끝나기 무섭게 벌떡 일어서더니, 입고 있던 후드티를 바로 벗어 버린다. 안에 반팔을 입었는데, 그것도 벗으려 하기에 하준이 황급히 팔을 붙들었다.
“돌았냐?”
그러자 정인이 김하준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 찌른다.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또 쿡쿡 찌르길래 그 손을 붙잡고 노려봤다.
“너,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되게 반갑다. 그동안 어디서 잤어?”
더 놔뒀다간 아주 제대로 꼬장을 부릴 거 같아서 침실로 끌고 가 재우려고 했다. 그랬더니 손을 뿌리치고 거실을 뛰어다닌다. 잡으려고 하니 잽싸게 도망가고, 잡으려고 하면 또 도망가고. 그리고 뭐가 좋은지 큭큭대고 배를 잡고 웃는다.
슬슬 열이 받기 시작한 하준은 이를 까득 물고 경고했다.
“내일 아침에 눈 떠서 존나 후회하기 싫으면 이리 와라.”
“시른데~ 시른데~.”
하, 뒷목을 잡고 이를 갈았다. 속을 썩일 때마다 김 회장이 왜 뻑하면 소리를 지르다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시늉을 하는지 알 것도 같다. 다시 잡으려고 하는데 또 도망가고, 또 도망가고, 하준은 하는 수 없이 꽤 많은 양의 페로몬을 방출했다.
차라리 이렇게라도 기절시켜서 데려다 눕힐 생각으로. 그런데 류정인은 멀쩡하다. 여전히 미친 망아지처럼 뛰어다녔고, 여전히 팔팔했다. 하준이 눈 밑을 일그러트리며 류정인을 노려봤다. 어떻게 된 거야?
보통 이정도 양의 페로몬이라면 어지간한 오메가라도 다리가 풀려 주저앉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성 알파들은 어릴 적부터 페로몬을 제어하는 연습을 따로 받을 정도였고, 함부로 방출해서도 안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웠었다.
그런데 류정인은 왜 저렇게 멀쩡한 거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가까이 가는데 류정인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이제야 효과가 있는 건가.
“김하준… 나 사실 너한테 말할 것 있어.”
하준이 페로몬을 거둬들였다. 정인이 주춤주춤 다가오더니 울 것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하, 하, 숨을 짧게 몰아쉰다.
“나 너한테 거짓말했어.”
하준은 입을 꾹 다물고 노려봤다. 또 그 얘기다. 이번엔 진실을 말하려나.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류정인이 우물우물한다. 울어? 울려고 하는 거야? 그러자 정인이 얼굴을 종잇장처럼 구기며 한마디씩 내뱉는다.
“나, 실, 실은….”
하준은 인내심을 갖고 정인의 말을 기다렸다.
“토, 토할 것 같아.”
씨발. 그럼 그렇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류정인이 입을 틀어막고 우욱, 소리를 낸다. 결혼식 악몽이 떠오른다. 빌어먹을. 류정인을 끌고 욕실로 데리고 가면서 하준은 내가 이 인간 말을 한 번 더 귀담아들으면 성을 갈 거라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류정인은 몇 번이나 구토하고 횡설수설을 하더니 그대로 바닥에 뻗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하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안아서 침대로 옮기긴 했는데, 아무래도 옷을 벗겨야 할 것 같다.
최대한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티셔츠와 바지를 벗겼다. 순간 바지에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졌다. 그것을 주워 드는 하준의 눈이 살짝 커진다. 전에도 봤던 그 까맣고 동그란 물건이다. 무엇에 쓰는지도 모르는. 도로 넣어 둘까 고민하다 그것을 제 주머니에 챙겼다.
수건을 따뜻한 물에 적신 뒤 얼굴과 팔다리를 닦아 주는데 제아무리 인내심을 발휘하려고 해도 자꾸만 눈이 몸을 더듬는다. 이건 시체다. 나는 지금 시체 닦기 알바를 하는 중이다.
별 이상한 상상을 다 하며 욕구를 짓누른 다음 이불을 덮어 줬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잠든 류정인을 바라봤다.
류정인은 취한 와중에도 예절 수업이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제사 때 김하준에게 발길질했다는 이유로 그는 이제 집이 아닌 할머니 댁에 일주일에 2번씩 가서 예절 수업을 받았다. 가뜩이나 미워하는데 할머니가 얼마나 갈굴지는 안 봐도 훤했다.
잠든 얼굴을 보다 이마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넘겨 줬다.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이 전보다 짧다. 오늘 미용실에도 갔던 건가. 근데 그 형사는 왜 만났지. 이해수 사건 때문에 정인이 형사를 만난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같이 밥을 먹을 정도로 친한 사이인 줄은 몰랐다.
낮에 찾아온 윤 비서는 정인이 이해수 사건에 자꾸 연류되는 걸 염려했다. 혹여라도 선거에 지장이 있을까 봐 그런 줄은 알지만, 그것은 정인이 선택할 문제였다. 한참을 지켜보다 일어서 나가려는데 류정인이 잠꼬대를 한다.
“엄마….”
돌아보자 또다시 엄마…. 하고 부른다. 이불을 손으로 꽉 쥐고 몸을 둥그렇게 말고 옆으로 누운 모습이 마치 엄마를 잃어버려 울고 있는 아이 같다.
하준은 차마 나가지 못하고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다 머리맡에 있는 탁상 달력을 발견했다. 날짜마다 빨간색 엑스가 그려졌다. 하루하루 날짜를 세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보는데 가슴 한쪽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다음 장을 넘기고, 또 다음 장을 넘기자 선거가 끝나는 당일에 글자가 적혀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날.
***
윽, 쓰린 속을 움켜쥐고 일어나던 정인은 침대에서 기어 내려와 욕실로 바로 들어갔다. 속이 쓰리다 못해 아프고 구역질이 올라온다. 그러나 나오는 거라곤 멀건 위액뿐이었다. 입을 헹구고 거울을 보는데 머리는 쥐어뜯긴 것처럼 산발이다.
어젯밤 기억이 끊어진 필름처럼 조각조각 떠올랐는데,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기억이 전혀 나지를 않는다. 내가 대리를 불렀던가. 정신을 차리려 샤워를 하고 나서 밖으로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벌써 낮 12시가 다 되어 간다.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복도를 지나 거실로 향하던 정인은 순간 벽 뒤로 몸을 숨겼다. 김하준이 왜 이 시간에 여기에? 다시 들어가려고 하는데 김하준이 신문을 보며 말을 걸어온다.
“일어났으면 나와. 왜 도망가?”
정인은 하는 수 없이 복도 밖으로 나왔다. 김하준은 신문을 덮고 고개를 돌렸다. 정인은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어제 내가 뭐 실수한 게 있나. 김하준 표정이 완전히 썩어 들어 가는 거 보니 차라리 기억 못 하는 게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출근 안 해?”
“일요일이야.”
“아….”
“너 어제 기억은 해?”
정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설마 그 취중에 차를 직접 끌고 오진 않았을 테고. 대리 불렀나. 곱창집에서 이한 형사를 만난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까맣다. 스읍, 입술을 말아 물며 고심하는 시늉을 하니 김하준이 한숨을 내쉬고 나서 신문을 테이블에 툭, 집어 던진다.
“누가 데려다줬는지 알아?”
“대리?”
“아니. 이해수 사건 맡았던 담당 형사.”
정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창피해.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얼마나 취한 꼴을 보였으면 여기까지 데려다줬을까. 김하준의 표정을 보니 비슷한 이유로 열이 받은 거 같았다. 쪽팔렸구나, 김하준.
“미안….”
“뭐가 미안한데.”
“너 쪽팔리게 해서.”
하준이 입을 꾹 다물고 노려본다. 정인은 다신 안 그러겠다고 약속을 하고 슬그머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속이 너무 아프다. 수프를 데워 먹든, 우유를 먹든, 뭘 먹긴 해야 할 것 같아 냉장고를 뒤적이는데 주머니에 쑤셔 넣은 전화가 울린다. 봤는데, 모르는 번호다.
“여보세요?”
[정인 씨, 저 이한입니다. 통화 괜찮으세요?]
“아, 예 형사님.”
냉장고 속을 살피면서 통화를 하는데, 이한이 속은 괜찮으냐고 묻는다.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댄다. 몇 번이고 사과하는데 이번엔 얼굴보다 뒤통수가 더 따갑다. 돌아보니 김하준이 노려보고 있다가 고개를 홱 돌려 버린다.
이한 형사와 짧은 통화를 마친 뒤 정인은 밥을 하려고 움직였다. 아무래도 쓰린 속을 달래는 데는 해장국을 끓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마침 점심시간이니 김하준의 것도 함께 만들 생각이었다.
정인은 요리를 하면서도 스스로 놀라워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한 달간 수업을 받은 효과인지 음식을 만드는 손놀림이 전과 달리 부쩍 가벼워졌다. 흐뭇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음식을 하는데 어느새 김하준이 옆에 와서 팔짱을 끼고 서 있다.
“좋아 죽겠나 봐?”
빈정거리는 말투에 정인은 눈을 가늘게 늘였다. 쪽팔리게 해서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사과도 했는데, 왜 자꾸 시비를 거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따지면 지는 맨날 술 먹고 늦게 오거나 최근에는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으면서.
“시비 걸지 마. 네 밥은 안 준다.”
정인이 식탁에 완성된 밑반찬과 해장용 국을 떠 놓고 앉았다. 김하준의 것도 차려 놨는데, 싫다고는 안 하고 맞은편에 앉아서 수저를 든다. 국을 떠먹은 김하준이 인상을 찡그렸다. 정인은 한 입 먹고 나서 그 이유를 알았다. 많이 짜다. 술이 덜 깼나.
물을 부을까 고민하는데 김하준이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고 류정인을 빤히 쳐다봤다.
“할 얘기가 있어.”
“뭔데?”
“너 그 형사 돕는 거, 관둬.”
정인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아니라 우리 꼰대가 너한테 바라는 거야. 선거 전까지 조용히 쥐 죽은 듯 지내길 원해.”
“말도 안 돼. 그냥 협조만 하는 거야. 정말 억울하게 죽은 거면, 내가 증인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
“피의자가 누군지 알고?”
정인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지, 나야….”
하준의 눈매가 매서워진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증인을 서겠다고?”
정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한의 말대로, 이해수가 타살이라고 한다면 그를 도울 생각이다. 김 회장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안다. 그렇다고 아예 외면할 수는 없었다.
“너는… 내가 그러길 원해?”
하준이 대답하지 않자 정인은 재차 물었다.
“말해 봐. 내가 다 알고, 다 들었으면서도, 모른 척하길 바라? 단지 너희 아버지 선거를 위해서?”
“선거가 타인의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어. 우리 아버지도 다르지 않아. 죽은 자기 아버지 유언까지 이용해 가면서, 그리고 아들인 나도 이용하면서 어떻게든 이기고 싶어 하잖아. 그러니까 넌 여기서 더 나서지 마. 만약 일이 틀어지면 그땐 꼰대가 너를 계속 예뻐하진 않을 테니까.”
걱정인지 빈정거리는 것인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정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입맛이 싹 달아났다. 깨작거리면서 먹으니 김하준이 일어나서 물을 뜨더니 내민다. 무심결에 받으려고 하자 그 물을 국그릇에 붓는다.
“너무 짜.”
정인이 눈을 흘기고 보란 듯 제 국을 들고 후루룩 마셨다. 근데 정말 짜다. 도저히 못 먹고 밥을 먹는데 이것도 넘어가질 않는다. 젓가락으로 밥알만 세고 있으니 보다 못한 김하준이 일어선다.
“차라리 죽을 먹는 게 낫겠어.”
“귀찮아.”
“끓여 줘?”
잘못 들었나 싶어 쳐다봤다. 더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김하준이 밥솥에서 남은 밥을 퍼내서 물을 붓고 죽을 끓일 준비를 한다. 냉장고를 열어 전복을 꺼내길래 정인은 놀라서 쳐다봤다.
“너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나도 어릴 때 요리 수업 따로 했었어. 다도도 서예도.”
믿기지 않았다. 다도나 서예는 그렇다 치고 요리를 했다니. 김하준네 할머니를 봐선 귀한 손주라고 주방 근처에도 얼씬하지 못하게 할 것 같은데. 정인은 조금 전까지 투닥이던 것도 잊고 하준이 요리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지켜봤다. 전복을 손질하는데 칼을 저보다 훨씬 잘 다룬다.
“할머니 댁에서 수업 받는 건 어때?”
하준이 툭 던지듯 물었고 정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죽을 것 같아.”
“내가 할머니한테 말씀드릴게. 다음 주부터 가지 마.”
정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그게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었어? 김하준 표정을 보니 농담으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진심이야?”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
“밖에서 술 먹지 마. 먹어도 집에서 먹어. 꽐라 돼서 남들한테 추한 꼴 보이지 말고.”
정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가 어제 그렇게 추했어?”
“어. 존나.”
무심하게 툭 뱉는 말이었으나, 걱정이 아주 조금은 섞인 것 같기도 하였다. 하준의 옆에 서 있던 정인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알았어. 약속 지킬게.”
하준이 손질한 전복을 잘게 썰기 시작했다.
“근데, 넌 히트 사이클 언제야?”
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정인이 한 대 맞은 표정으로 어? 하고 되물었다.
“히트 사이클. 보통 오메가들은 규칙적이던데, 너도 그래?”
정인은 입을 벙긋댔다. 갑자기 왜 히트 사이클에 대해 묻는 거지. 침착하려고 했으나, 목이 바싹 타들어 간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들키지 않으려 얼른 시선을 피하고 물을 따라 마셨다.
“뭐, 남들하고 비슷해. 그런 건 왜 물어?”
“약 잘 챙겨 먹어. 괜히 곤란한 상황 만들지 말고.”
정인은 그가 러트 왔을 때를 떠올렸다. 말을 얼버무린 뒤 냉수를 한 모금 마시고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도망치듯 침실로 향했다. 어젯밤 입었던 옷을 찾으니 침대 옆 서랍 위에 정돈되어 있다. 혹시나 해서 뒷주머니에서 페로몬 탐지기를 찾는데 아무리 봐도 없다.
이상하다. 분명 술 마시기 전까지도 여기 있었는데. 바닥에 떨어졌나 살피고 구석구석 찾아도 마찬가지였다. 급하게 밖으로 나오니 김하준이 불 위에 죽을 올려놓고 주걱으로 젓는 중이다.
“김하준. 어제 혹시 내 바지 네가 벗겼어?”
“미리 말하는데, 더러워져서 벗긴 거야.”
“그게 아니라… 바지에 뭐 없었어?”
하준이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어떤 거?
정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러고 나서는 차 키를 가지고 밖으로 나간다. 죽을 끓이던 하준이 정인이 나간 쪽을 보다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어젯밤 류정인의 바지에서 떨어진 그것이었다.
이게 대체 뭔데 저렇게 당황스러워하며 찾는 거지. 도대체 뭐길래…. 궁금증은 점점 더 증폭되어 가는데 나갔던 류정인이 도로 들어온다. 하준은 그것을 잽싸게 주머니에 넣고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
으음. 두영이 동그란 물체를 들고 유심히 살펴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하준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봤다. 이두영은 잡지식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었고, 그래서 조금 기대도 했는데, 실망스럽게도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저도 처음 보는 건데.”
“잘 봐 봐.”
두영이 그것을 사무실 형광등에 비춰 봤다. 이러면 뭐가 보이려나. 하지만 그것은 그냥 새카맣고 동그란 물건이었다.
“크기하고 모양은 카지노에 있는 칩하고 비슷한데, 두께는 그것보단 조금 두껍고….”
“비슷한 것도 본 적 없어?”
“비슷한 건 본 적 있죠.”
“어디서.”
“카페 가면 주잖아요. 커피 시키고 기다릴 때.”
하준이 미간을 잔뜩 구겼다. 그건 진동 벨이고. 크기도 엄연히 다르다. 이리 달라며 빼앗은 뒤 외투를 챙겨서 일어섰다.
“마무리하고 가. 나 퇴근한다.”
“요즘 너무 나태해지신 거 아니에요? 어떻게 저보다 먼저 가세요?”
투덜거리는 두영을 보며 하준이 이죽였다.
“억울하면 나 제끼고 네가 대표해. 그럼 돼.”
지하 주차장으로 가 차를 끌고 밖으로 나오는데 날씨가 맑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 또한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게 30분 정도 차를 몰고 도착한 곳은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그곳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댄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카드 키를 가져다 댔다.
15층에 불이 들어온다. 이곳은 김하준의 소유였고, 어지간한 편의시설은 다 갖추고 있어 혼자 머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15층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어간 뒤 하준은 겉옷을 의자에 걸어 두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먼저 했다.
씻고 나와서는 가운만 입은 채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꺼냈다. 창밖 야경을 보면서 맥주를 마시다 나중엔 술을 더 꺼내 와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비스듬하게 기대앉아 채널을 돌리는데 성인용 영화가 나온다.
하필 영화 주인공이 평소 류정인하고 외모가 흡사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마음과는 달리 눈은 자꾸 거기로 향했다. 그래도 몸은 류정인이 훨씬 예쁘다. 군살 없이 탄탄하고 하얀….
마음이 동한 김하준은 TV를 끄고 소파에 기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욕구를 해소하지 못한 게 얼마나 됐더라. 눈을 감으니 류정인 얼굴이 떠오른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새카맣고 커다란 눈동자에, 오뚝한 콧대, 갸름한 턱선, 흰 피부에, 화를 내면 새초롬해 보이는 입술까지.
저도 모르게 제 아랫입술을 핥으며 손을 바지 쪽으로 가져갔다. 옷을 벗고 누워 있던 류정인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니 발끝에서부터 찌릿거리며 전기가 타고 올라온다.
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페로몬이 방출됐다. 그때였다. 드드드, 드드드, 어디선가 미세한 진동음이 들렸다. 몰입하려 했으나, 그 소리에 정신이 흐트러졌다. 하준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풀어진 바지 버클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자괴감이 몰려온다.
아아, 이 미친놈아. 얼굴을 거칠게 쓸고 난 뒤 주위를 보는데 여전히 진동음이 들린다. 페로몬을 갈무리하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진동 소리가 사라졌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코트를 걸어 둔 의자였다. 전화가 온 건가.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하였으나, 어떤 전화도 메시지도 없었다. 하준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그리고 나머지 주머니를 뒤져 류정인이 가지고 있던 동그란 물체를 꺼냈다.
혹시…? 고심하던 하준은 다시 페로몬을 방출했다. 검은색 물체가 손안에서 진동한다. 페로몬의 양을 늘리자 진동하는 세기가 더 거세졌다. 하준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게 뭐야?
***
정인은 갈색 가죽끈이 달린 손목시계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페로몬 탐지기를 잃어버렸다고 하자 다혜가 최신용이라며 손목에 착용할 수 있는 것을 구해 주었다. 저번처럼 요란하게 진동하는 대신 손목에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찌릿한 느낌만 들기 때문에 티도 거의 나지를 않는단다. 대신 값은 두 배였다.
“대체 어쩌다 잃어버린 거야?”
“말도 마. 술 먹었는데 필름이 완전히 끊겼어. 어디다 흘렸는지 기억도 안 나.”
그나마 김하준 손에 들어가지 않은 게 다행이다. 원래 있던 시계를 풀고 그것을 찼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회의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김 회장과의 약속도 있고, 무엇보다 김하준에게 베타임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카페에서 다혜와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눈 뒤 헤어지고 정인은 백화점에 들렀다. 조금 있으면 류민아의 졸업인데 선물로 뭘 해 줄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봄 코트를 보려고 매장에 들어가 살펴보는데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 아니야? 김만호 동영상에 있던.”
“누구?”
“저기, 옷 고르고 있잖아.”
“진짜네. 실물이 더 잘생겼다.”
“근데, 너 그 소문 들었어? 저 사람 남편이 이해수 임신 시켰다고.”
“야, 작게 말해.”
정인이 옷을 들고 그쪽으로 갔다. 그들이 흠칫 놀라서 쳐다보길래 속삭이듯 말했다. 다 들려요. 하얗게 질리는 그들의 얼굴에 대고 정인은 씩 웃었다.
“없는 말 막 지어내시면 고소당해요.”
그들이 질겁을 하고 사라진다. 정인은 한숨을 내쉬며 매장을 빠져나와 다른 곳으로 갔다. 김하준에 관한 헛소문을 알게 된 건 며칠 됐다. 소문은 점점 크기를 부풀렸고, 이젠 김 회장 영상이나 기사마다 그 일에 관한 댓글이 달렸다.
악의적인 소문에 대해 법적으로 강경하게 조치한다는 기사가 나갔음에도 소문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선물은 나중에 고르고 우선 집으로 돌아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저 멀리 익숙한 모습이 보인다. 김하준의 할머니다.
비서로 보이는 남자가 그녀의 뒤에서 쇼핑백을 들고 따라다녔다. 뒤돌아 갈까 고심하던 사이 눈이 마주쳤다. 도망가기에도 늦었다. 하는 수 없이 정인은 먼저 가서 인사를 건넸다. 김하준의 할머니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인상을 쓴다.
“네가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야.”
“잠깐, 뭐 사러 들렀어요.”
“내 귀한 손주는 돈 버느라 고생하는데, 넌 팔자 좋구나. 이 시간에 돈 쓰러 다니고.”
아아, 그냥 모르는 척 토끼는 건데. 인사를 했으니 갈 줄 알았는데 그녀가 뒤에 있던 비서를 시켜 짐을 정인에게 건네주라고 한다. 정인은 얼결에 짐을 건네받았다.
“노는데 이런 거라도 해야 하지 않겠니.”
그러더니 비서에게 그만 내려가서 기다리라고 지시한다. 할머니의 비서가 사라진 뒤 정인은 쇼핑백을 들고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다. 옷을 사러 매장에 들어가자 매니저 명찰을 단 사람이 황급히 나와서 오셨느냐고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안쪽으로 들어가서 편하게 고르라는 제안에 김하준의 할머니는 됐다고 손짓을 한 번 하더니 옷을 골랐다. 옆에서 멀뚱멀뚱 서 있던 정인에게 그녀가 옷 하나를 꺼내 묻는다.
“너 보기에 이건 어떠니.”
정인이 고개를 저었다. 색이 할머니하고 안 어울리세요. 할머니의 주름진 미간이 일그러졌다. 정인은 옷 중에서 그녀에게 어울릴 만한 색으로 하나 골라서는 몸에 대고 거울을 보게 했다.
이건 어떠세요. 피부색이 밝으셔서 이게 훨씬 더 돋보일 거 같은데. 옆에서 지켜보던 매니저가 끼어든다.
“비서분이 감각 되게 좋으시네요. 이거 저희 매장에서 가장 잘나가는 모델이에요.”
할머니가 매니저의 말을 바로 정정했다.
“비서가 아니라, 우리 손주며느리.”
매니저가 황급히 입을 가렸다. 어머, 세상에. 제가 실수했나 봐요. 정인이 괜찮다며 애써 웃었다. 차라리 비서가 낫겠다 싶어서. 아니, 그렇게 창피하다면서 누군지는 왜 밝히는 건데.
매니저가 자리를 비켜 주고 몇 개를 더 골라 주자 할머니가 정인을 위아래로 훑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없이 자랐어도 네가 눈은 높구나.”
아, 정말 아무리 봐도 예절교육은 내가 아니라 이 노인네가 받아야 하는 것 같은데. 얻어맞으면 맷집만 늘어난다더니 한 달 넘게 노인네한테 막말을 들었더니 면역됐는지 이젠 어지간한 건 타격도 오지 않는다.
그렇게 스카프와 가방까지 고르고 나서 그녀는 카드를 꺼내 계산을 마쳤다. 정인은 짐을 바리바리 들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매장을 몇 개를 돌아도 그녀는 지치질 않았다. 노인네가 체력도 좋지.
그러다 할머니는 정인을 힐긋 한 번 보더니 남성복 판매장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골라 봐.”
“예?”
“짐꾼 했으니 옷 하나는 사 주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워낙 고가의 옷이라 거절하려 했더니 그녀가 기어코 한마디 한다.
“너 하준이하고 인터뷰 있다며. 싸구려 옷 입고 가서 우리 집안 망신시키지 말고, 사 준다고 할 때 하나 받아.”
어쩌면 말을 해도 저렇게 밉게 하시는지. 어지간하면 집에 있는 자신의 할머니를 생각해서 잘해 드리려고 하였으나, 하는 말마다 정말… 정말 얄밉다. 결국, 정인은 마음에도 없는 옷을 덜컥 선물로 받았다. 그것도 매장에서 가장 비싼.
그러고 나서 지하 주차장으로 이동해 할머니의 비서에게 짐들을 넘겨주었다.
“밥은 어떻게. 먹고 들어갈 거니? 안 먹었으면 같이 먹고.”
아직 식사 전이었으나 정인은 웃으며 바로 대답했다.
“예, 친구 만나서 먹었는데,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터질 것 같아요.”
그녀가 쯧쯧, 혀를 차더니 우리 손주는 일하느라 힘든데, 넌 팔자 좋구나. 그 말을 또 했다. 그러고선 가라며 한마디 뱉고 뒷좌석에 올라타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멀어지는 차를 보며 정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들린 쇼핑백을 내려다봤다.
아, 기 빨려. 결국 류민아의 선물은 사지도 못하고 엉뚱하게 제 옷을 선물로 받았다. 가서 환불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그랬다가 나중에 걸리면 더 곤욕을 치를 것 같아 관두었다.
그러고 나서 집으로 가며 김하준에게 연락을 했다. 내일 무슨 촬영도 하고 인터뷰도 해야 한다고 하던데, 왜 먼저 말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무슨 이윤지 며칠째 집에도 들어오질 않았다. 대체 그가 무슨 생각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하준은 종이 한 장을 뚫어지게 들여다봤다. 류정인. 29세, 오메가. 그러고 나서 옆에 있는 검은색 물체를 번갈아 살폈다. 이두영이 알아본 바에 따르면 이것은 페로몬 탐지기라고 한다. 베타 중에 오메가나 알파 흉내를 내고 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사용하기도 한다고.
근데 이걸 왜 류정인이 가지고 있었을까. 한 번이면 이해하겠는데, 어째서 두 번이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서류를 떼어 봤는데 오메가라고 정확히 명시되어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고민하는 사이 두영이 들어온다.
“아직도 계시면 어떡해요? 오후에 촬영 있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하준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 류정인과 인터뷰하기로 했는데, 거기다 보태어 스튜디오에서 커플 화보까지 찍어야 했다. 메이크업하고 다정한 척 연기할 생각을 하니 도무지 가고 싶질 않다.
하준은 탐지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일단 류정인을 만나서 확인해 보면 알겠지. 차를 끌고 목적지로 가는데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더니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스튜디오에 도착해 차를 세우고 내려서 안으로 들어갔다. 류정인이 미리 와 메이크업을 받고 있다는 말에 분장실로 들어가니 두 사람이 달라붙어서 머리를 만지는 중이다.
“왔어?”
류정인이 눈동자를 움직여 하준을 본다.
“응. 차가 조금 막혔어.”
곧이어 담당 스탭이 나타나 하준에게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을 것을 부탁했다. 워낙 둘 다 외모가 출중해 메이크업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갈 거라며.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서로를 보는데 모습이 영 낯설다.
결혼식 예복을 입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정인은 하준이 고른 분홍색 슈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분홍색을 좋아하진 않으나, 김하준이 입으니 그의 북유럽 왕자님 같은 얼굴과 찰떡처럼 잘 어울린다. 속으로 새삼 감탄하고 있는데 김하준이 정인이 매고 있던 나비넥타이를 풀어 준다.
“이쪽이 훨씬 낫네.”
왜 마음대로 푸냐고 항의하려는데, 지나가던 사진작가 또한 훨씬 보기 좋다며 편을 들어 줬다. 사진의 주제는 피로연이라고 했다. 피로연을 마친 뒤 나른해 보이는 두 사람을 연출해야 한다고. 커플 사진이라고 하길래 대충 손잡고 찍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복잡했다.
“두 분 다 인물이 좋으셔서 저희가 욕심부렸어요. 이거 화보 나가면 사람들 난리 날걸요.”
아무래도 화보의 목적은 소문을 수습하기 위함인가 보다. 어색해하는 정인과는 달리 하준은 능숙하게 포즈를 잡았다. 정인의 자세를 잡아 주기도 하고, 표정을 편하게 지을 수 있게 코치도 해 주고.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결과물을 보니 자신이 아닌 것처럼 낯설다. 그래도 멋지게 나오긴 했네. 속으로 감탄을 하고 있는데 김하준이 등 뒤에 딱 붙어서 모니터 속 사진을 감상한다.
“넌 사진이 훨씬 낫다.”
이씨. 뒤를 홱 돌아보던 정인은 하준과 입술이 닿을 뻔해 기겁하고 떨어졌다. 스탭이 와서는 다음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알려 준다. 정인은 도망치듯 탈의실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누구세요?”
“나.”
김하준이다. 셔츠 단추를 풀던 정인은 경계의 눈초리로 문을 노려봤다.
“왜.”
“잠깐 들어가도 돼?”
“아니.”
“할 말 있어.”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코 들어와서 입구를 막고 선다. 정인은 무언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게 또 왜 이래? 전처럼 수작을 부리진 않겠지. 긴장하며 쳐다보고 있는데 기다렸다는 듯 손목시계 안쪽이 찌릿거린다.
강도가 장난이 아니다. 흠칫 놀란 정인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김하준의 페로몬 향이 짙어진다. 신호도 점점 더 거세졌고. 그가 지금 엄청난 양의 페로몬을 방출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 말라고 소리 지르려다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잃어버린 페로몬 감지기를 김하준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정인은 곧바로 다혜가 한 말을 떠올렸다.
[적당히 눈을 까뒤집어 주면 되지 않을까?]
에라, 모르겠다. 눈을 뒤집으며 아아, 소리를 내고 휘청하고 쓰러지니, 김하준이 놀라서 정인을 받쳐 안는다. 정인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숨을 쌕쌕 몰아쉬었다. 따끔거리던 손목의 느낌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정인은 비척거리는 시늉을 하면서 일어나서 벽을 짚었다. 하준은 미안해하면서도 정인을 일으켜 주며 동시에 바지와 셔츠 쪽 주머니를 더듬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의 손이 스르르 떨어져 나가는 것을 알아채고 정인은 인상을 썼다.
“너 미친놈이야? 이런 데서 막, 어? 막 그렇게 하면, 내가 곤란하잖아!”
꽥 소리를 지르자 하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그러더니 얼른 갈아입고 나오라며 밖으로 홱 나간다. 하준이 사라지고 나자 정인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탈의실 벽 한쪽에 머리를 쿵 박았다.
젠장. 김하준 저 새끼, 뭔가 눈치챘구나. 혹시나 했는데 김하준이 가져간 게 분명했다.
***
“정인 씨, 손목시계 잠깐 풀게요.”
옷을 갈아입은 정인의 손목에서 의상팀 스태프가 손목시계를 풀어내려 했다. 의상과 시계의 모양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그냥 CG로 지우면 안 되겠죠? 라고 묻자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정인이 민망하여 웃었다.
“농담이에요.”
시계를 푼 정인은 김하준의 등장에 긴장했다. 눈으로 시계와 김하준을 번갈아 살폈다. 그는 이번엔 흰색 셔츠에 바지만 입었는데 평상시와 달리 머리를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 고등학생 시절 김하준을 떠올리게 하였다.
촬영이 시작되자 사진작가가 김하준을 의자에 앉히더니 류정인에게 그 위에 다리를 벌리고 마주 보고 앉으라고 주문한다. 정인은 다리 대신 입을 벌린 채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사진작가가 등을 떠민다.
“부부인데 어때요.”
“아니, 그래도… 포즈가 너무….”
선정적이잖아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김하준은 태연한 표정으로 어서 앉으라고 눈짓을 보낸다. 결국 정인은 김하준의 무릎에 그와 마주 보는 자세로 앉았다. 옷을 다 입고 있는 상태에서도 열이 훅 오른다.
“팔은 이렇게 두르시고요.”
사진작가가 류정인의 팔을 가져가더니 마치 인형처럼 제멋대로 김하준의 어깨에 척 올려놓는다. 아주 좋아요. 사진작가가 뒤로 물러서며 지금 너무 좋다고 칭찬을 퍼부었다.
“상체를 조금 더 밀착시켜요. 정인 씨! 하늘 쳐다보지 말고, 앞에 있는 하준 씨를 봐야죠. 뒷모습에서도 애정이 느껴져야 합니다.”
혹시 성인용 잡지인가. 자꾸만 몸을 붙이라는 주문에 정인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얕게 한숨을 내쉬다 김하준과 눈이 마주쳤는데 민망해하는 저와는 달리 그의 눈에는 애정이 듬뿍 담겼다. 열여덟, 류정인을 바라보던 그 눈빛이었다. 목 아래가 간질간질한 기분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일어서려고 하자 김하준이 허리를 잡아 누른다.
“아직 안 끝났어. 조금 참아.”
모여 있는 사람들 때문인지 말투도 다정하고 부드럽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진작가가 정인에게 고개와 어깨만 돌려 뒤를 돌아보라고 이야기한다. 정인은 시키는 대로 양손을 김하준의 허벅지에 짚으며 뒤를 돌아봤다.
“그대로 하준 씨가 정인 씨 목에 입술을, 닿을 듯 말 듯! 카메라 노려보면서!”
정인이 저도 모르게 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사진작가가 얼른, 빨리하라며 손짓하자 김하준이 정인의 목과 어깨의 경계에 입술을 가져다 댄다. 숨결이 확 느껴지자 그 부위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거워진다. 정인이 긴장해 입술을 질끈 깨무는데 사진작가가 외친다.
“오케이, 그 표정 좋아요. 정인 씨 지금 너무 섹시해요!”
닥쳐 이 양반아. 눈으로 노려보며 욕을 하는데, 더 좋아하며 카메라 셔터를 마구 누른다. 저 정도면 변태가 아닌가 싶다.
“좋아요! 다음 촬영 갈게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인은 김하준의 다리에서 내려와 바로 섰다. 스태프들이 촬영 소품을 옮기고 준비하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사이 메이크업 담당이 와서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머리를 만져 줬다.
옆에 있던 김하준은 어느새 모니터로 가서 촬영한 사진을 보며 사진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어색해하는 저와 달리 김하준은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촬영에 임하는 것도 모두 능숙했다. 조금 위축이 되어 서 있는데 스태프 하나가 와서 물을 건넨다.
“두 분 진짜 잘 어울리세요. 다들 난리예요. 잡지 나오면 꼭 살게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나니 김하준이 돌아온다. 또다시 촬영이 시작됐는데 이번엔 다행히 아까처럼 자극적인 장면은 없었다. 나란히 서서 손을 잡으라기에 시키는 대로 했더니 김하준이 깍지를 낀다. 그의 긴 손가락이 자신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 들어와 얽혔고, 그 감각은 무릎에 앉았을 때보다 더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몇 컷을 더 찍은 뒤 촬영이 종료되고 정인은 녹초가 되어 사람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터벅터벅 걸어 대기실로 가는데 거기에는 인터뷰를 위한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와 숨을 돌리고 난 뒤에는 잡지사 기자가 인터뷰를 시작했다. 전날 인터뷰할 질문을 미리 숙지한 상태라 답을 외우고 있었다. 대략 어떻게 만났냐, 어떤 모습에 반했냐, 최근에 둘의 공통된 관심사는 무언지, 향후 자녀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기타 등등이었다.
그러나 막상 거짓말을 하려니 입이 자꾸 달라붙는다. 결국 대답은 김하준이 거의 다 했다. 자녀 계획을 묻자 그는 3명 정도 낳고 싶다고 말하였다. 분명 어제 연습할 때는 둘만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대답하기로 했는데.
그렇게 인터뷰까지 마치자 촬영을 맡았던 사진작가가 와서 하준의 어깨를 툭 친다. 꽤 친근해 보이는 행동에 정인이 그를 바라봤다.
“뒤풀이 있는데 같이 가.”
말을 편하게 놓는 걸 보니 서로 아는 사이인 듯싶었다. 그러자 사진작가가 사람 좋게 웃는다.
“실은 저 김하준 학교 선배예요. 과는 달랐는데, 일하면서 알게 됐어요.”
“네에….”
“정인 씨도 같이 가요. 우리 간단히 저녁만 먹고 헤어질 거예요.”
정인은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집에 가서 쉬고 싶은데. 그런데 김하준이 냉큼 승낙한다. 주소 찍어 줘요. 바로 갈게요. 정인이 돌아서서 남들에겐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췄다.
“밖에서 술 먹지 말라며.”
“나하고 먹는 건 괜찮아.”
그러더니 어깨를 감싸고 정인을 바라보며 세상 다정하게 웃는다. 다들 너무 잘 어울린다고, 사이가 정말 좋은 것 같다고, 한마디씩 했다. 정인은 더 대꾸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옷을 갈아입고 우선 차로 향했다. 그리고 김하준이 운전석에 앉자마자 아까 못다 한 말을 쏟아 냈다.
“너 무슨 생각이야?”
“내가 뭘.”
“거길 왜 가. 남들한테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
하준이 비웃는다.
“너만 제대로 연기하면 안 들켜.”
그러더니 뺨을 슥 만진다. 정인이 기겁하고 몸을 뒤로 물리자 하준이 삐딱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이것 봐. 남들 앞에서 이러는데, 안 들키고 배겨?”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김하준은 오늘 나무랄 데 없이 잘했는데, 저 혼자 유난스럽게 김하준을 의식해서 만질 때마다 흠칫흠칫 놀라고 과민하게 반응한 건 사실이니까. 사실은 그가 또 페로몬으로 장난을 칠까 봐 그것 때문에 더 예민해진 것도 있었다.
정인은 자신이 찬 손목시계를 흘깃 봤다. 그래도 이게 있으니 다행이다. 안 되면 아까처럼 쓰러지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차가 당도한 곳은 스튜디오 근처의 한 일식집이었다. 들어가자 기다란 테이블에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다. 두 사람은 사진작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음식을 주문하고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오고 갔는데 대부분 정인은 모르는 일 이야기였다.
그 와중에도 하준은 음식을 덜어 정인에게 챙겨 줬다. 그의 배려가 싫지 않으면서도, 내가 오메가였다면 지금 상황을 조금 더 즐기며 받아들일 수 있었겠지. 자꾸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은 싫었다.
간단할 거라던 식사 자리는 술을 시키면서 점점 떠들썩해졌다. 정인은 사람들이 주는 술을 몇 잔 받아먹고 취기가 올라왔다. 김하준이 말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마시라고 부추기는 바람에 주량을 훌쩍 넘겨 버렸다.
그때 누군가의 등장으로 가게 안의 공기가 확 바뀌었다. 어, 여기! 사진작가가 손을 흔든다. 돌아보던 정인은 마시던 맥주잔을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그 사람이다. 김하준의 집 앞에서 봤던 오메가. 그리고 김하준 러트 때 집으로 찾아온 사람.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뽐내며 그녀가 사람들 사이를 걸어왔다. 당황한 정인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여자가 김하준이 아닌 사진작가 옆에 앉는다. 그러자 김하준이 픽 웃는다.
“어쩐 일이야, 여긴?”
“하준이 너 촬영 있었다며. 오빠 얼굴 볼 겸 너도 보려고 들렀지.”
사진작가가 여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본다. 정인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려 김하준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
“저 사람 애인이야?”
하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
정인이 기겁하여 바라봤다. 그렇다면 친한 선배 형 애인하고, 그렇고 그런…. 정인이 쓰레기 보듯 하자 김하준이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린다. 왜? 차마 대답하지 못하는데 앞에 앉은 여자가 정인을 향해 손을 내민다.
“정인 씨 오랜만이네요. 그때 하준이네 집 갔다가 정신이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했어요. 하준이한테 자리 만들라고 했는데, 쟤가 말을 듣질 않더라고요.”
정인은 그녀가 내민 손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여자 무슨 깡이지. 집에 왔었다는 걸 저렇게 말해도 되나? 술에 취한 와중에도 머릿속으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니면 원래 이 바닥이 다 이런가? 그러고 보니 김하준과 함께 갔던 클럽에서 술 취한 알파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기선 네 것 내 것이 없다던. 한마디로… 동물의 왕국?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데 여자가 정인 씨? 하고 부른다.
“네,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기껏 생각해 낸 답이 처음 뵙겠습니다, 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멍청한 대답이었다. 그러자 여자가 서운한 얼굴을 한다.
“어머, 나 진짜 기억 못 해요? 우리 3번이나 봤잖아요. 두 번은 그렇다 치고, 결혼식 때 내가 대기실에 잠깐 인사도 하러 들렀는데.”
정인이 놀라 입을 벌렸다. 큰일 낼 사람이네! 결혼식도 왔었어? 근데 결혼식은 가족과 친인척들만 초대했는데….
여자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정인 씨 많이 아파서 기억 못 했을 수도 있겠다. 그날 우리 식구들 다 놀랐잖아요.”
우리 식구들…? 아…! 뒤늦게 이해가 된다. 김하준을 보는데 그는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일 듯 말 듯 웃고 있었다. 그제야 김하준이 저를 일부러 속이고 말을 해 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하준이 저 녀석이 아직도 숨겼던 거예요?”
오히려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고, 정인은 애써 웃으며 테이블 밑으로 김하준의 허벅지를 꼬집어 비틀었다. 하지만 찰싹, 소리와 함께 김하준이 손을 때리는 바람에 바로 뗄 수밖에 없었다. 정인은 그녀를 향해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아니에요. 알고 있었어요.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