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운전대를 잡은 정인도 보조석에 앉은 하준도 둘 다 말이 없었다. 집으로 가는 방향으로 교통사고가 크게 났다는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왔다. 시간이 흐르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발이 하나둘 날리기 시작하더니 30분이 지났을 때는 함박눈이 되어 펑펑 쏟아졌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하준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해수 장례식장엔 무슨 일로 왔어?”
움직이는 와이퍼를 따라가던 정인의 시선이 하준에게로 옮겨 갔다.
“손님이었어.”
낮에 가게에 왔던 형사를 통해 부검을 마친 이해수의 장례식이 내일까지 치러질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간 건데 거기서 김하준을 마주칠 줄은 몰랐다. 사람들 말로는 이해수가 소속사와의 결별로 힘들어했다고 하던데.
차가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으나 집으로 가는 방향은 여전히 차량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정인은 갈림길을 번갈아 보며 고민하다 하준을 불렀다.
“밥 먹고 들어갈까? 집으로 가려면 한참 걸릴 거 같은데.”
“응.”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쉽게 승낙한다. 제설차들이 오고 가고 근처에서도 사고가 났는지 렉카 차량도 빠르게 움직였다. 정인은 갈림길에서 집과 반대 방향으로 차를 돌리고 20분 정도를 더 가다가 한 식당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정인이 친구들과 몇 번 갔던 곳인데 다행히 손님이 별로 없었다. 주차한 뒤 차에서 내리자 머리 위로 눈이 내려앉는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자 직원이 메뉴판을 가져다줬다.
“뭐 먹을래?”
하준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아무거나.”
정인은 직원에게 삼겹살을 주문했다. 젊은 남자 직원이 정인을 알아보고 오랜만에 왔다며, 친구들과 타투를 하러 가게에 들렀는데 하필 쉬는 날이었다고, 아는 척을 해 왔다. 정인은 웃으며 대꾸를 해 줬고 하준은 그런 정인을 빤히 쳐다봤다.
“술은 어떻게 하실래요?”
정인이 됐다고 하려는데 김하준이 맥주와 소주를 시킨다. 정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정말 알코올 중독 아닐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직원이 사라지자 하준은 테이블을 쳐다보다가 물티슈를 꺼내 닦더니 휴지로 한 번 더 닦았다.
술이 먼저 나오자 하준은 컵에 맥주를 따른 뒤 소주를 섞었다. 그러더니 빈 잔 하나를 집어 정인에게 내민다.
“마실래?”
정인이 기가 찬 표정으로 물었다.
“운전은 누가 하고?”
“대리 불러.”
정인이 대답하지 않자, 하준이 한 컵을 단숨에 비운다. 싫으면 말고. 놔뒀다간 혼자 다 처먹고 취할 기세라 정인은 남은 술을 자신의 잔에 채웠다. 채우고 나서 반 컵 정도 마셨을 뿐인데 빈속이라 명치가 싸하다.
잠시 후 나온 생고기를 하준이 집게로 집어 불판에 올렸다. 정인이 달라고 하는데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능숙하게 고기를 굽더니 가위로 정인이 싫어하는 비계를 오려 내고 살코기만 앞에다 놓아 준다.
정인은 그걸 보고 괜히 울컥해져 술만 더 들이켰다.
“쳐다만 보지 말고 먹어.”
“응.”
대답은 했는데 선뜻 고기에 손이 안 간다. 둘 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술잔을 들었다. 배가 고팠는데 고기보단 술이 더 들어가는 날이었다. 하준의 눈치를 살피던 정인은 죽은 이해수에 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해수 씨 말이야…. 너희 소속사였지?”
“응.”
“원래 어땠어?”
“뭐가?”
“우울증이 있었다고 하길래.”
“우울증? 웃기지 말라 그래. 이해수 때문에 내가 우울증이 걸렸으면 또 몰라.”
정인이 고개를 저었다.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참으로 말도 얄밉게 한다. 그런데 왜 언론에서는 이해수가 우울증 환자인 것처럼 떠들까. 술잔을 비운 하준이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만약 있었다고 해도, 죽긴 왜 죽어. 누구 좋으라고.”
착각일까. 목소리에 조금은 슬픔이 깃든 것도 같다. 그는 술잔을 채우더니 정인에게 안 그래? 하고 묻기까지 한다. 정인은 머릿속에서 어젯밤 본 약통을 떠올렸다. 김하준은 어째서 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불면증이 생겼을까. 어젯밤부터 따라다니던 궁금증이 점점 덩치를 키워 갔다.
“너는 어때?”
하준이 익은 고기를 뒤집어 정인의 앞으로 옮겨 놓더니 빤히 쳐다본다.
“우울증 같은 거 없냐고.”
무슨 멍청한 소릴 하느냐는 표정이다. 정인은 괜히 물어봤구나, 후회가 됐다. 잠이 안 와서 수면제 정도야 복용할 수 있는 건데. 머쓱한 마음을 술을 마시는 것으로 대신했다.
빈 술병이 늘어 가는데도 김하준은 얼굴색 하나 변하질 않는다. 반면 정인은 눈앞이 어질어질해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힘든 지경이 됐다. 더 있다간 실수를 할 것 같아 도저히 안 되겠어서 직원에게 대리 기사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밖으로 나오니 짧은 시간 동안 눈이 많이도 쌓였다. 정인은 불붙인 담배를 물고 눈 쌓인 곳을 왔다 갔다 걸어 다녔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와 함께 발자국이 선명해진다.
계산을 마치고 뒤늦게 나온 하준이 그 모습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바람이 제법 찬데 류정인은 취한 건지 코트도 제대로 잠그지 않았다. 지켜보던 하준은 목에 걸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류정인에게 다가가서 목에 둘러 줬다.
애처럼 이리저리 발자국을 만들던 류정인이 멈춰서 하준을 올려다본다. 술 때문인지 아니면 추워선지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괜히 감기 걸리지 말고, 이거 두르고 있어.”
“괜찮아. 하나도 안 추워. 걱정하지마.”
이미 혀가 꼬였는데 괜찮긴 뭘 괜찮아. 목도리를 풀길래 다시 목에 둘둘 감고서는 무심한 손길로 묶어 버렸다. 코트 단추를 채워 주는데 류정인이 조용하다. 고개를 드니 저를 빤히 바라보며 심술 맞은 표정을 짓는다.
“너 말이야, 일관성 있게 굴어.”
“뭐?”
“이렇게 챙겨 줄 거면 지랄하질 말든가. 지랄할 거면 아예 챙기질 말든가. 씨발 사람 빡치게 이랬다가 저랬다가. 개짜증 나.”
“취했어?”
“아아니.”
마침 차 한 대가 멈춰 서더니 남자가 다가왔다.
“대리 부르셨어요?”
네, 차 키를 남자에게 주고 차로 걸어가는데 류정인은 여전히 발로 눈을 꾹꾹 밟고 있다. 아아, 진짜. 가서 류정인의 팔을 잡아 끌고 와 문을 열고 집어넣었다. 안전띠를 매 주고 나서 앞좌석으로 가는데 그사이 밖으로 또 기어 나온다.
하준은 류정인의 머리를 밀어서 집어넣고 움직이지 못하게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정인은 갑갑하다며 셔츠 단추를 푼다. 그러더니 머리를 좌우로 움직이다가 김하준의 어깨에 툭 기대 오고 숨을 몇 번 크게 내쉬더니 조용해진다.
정면을 응시하던 하준은 고개를 돌려 류정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잘빠진 콧등과 붉은색 입술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단추가 풀려 벌어진 셔츠 안으로 류정인의 속살이 보였다. 속이 부대끼는지 머리를 어깨에 문지르며 으음. 하는 신음 소리 비슷한 걸 낸다.
점점 뻐근해지는 것을 느끼고 하준은 이를 꽉 물었다. 지금 여기서 이러면 김하준 너는 인간도 아니다. 그냥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없는 병신이다, 병신. 그렇게 다짐하며 류정인의 머리를 살며시 밀어서 떼어 냈다.
머리가 반대쪽으로 가더니 창에 쿵 하고 박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불편한지 바로 또 엉겨 붙으며 어깨에 뺨을 대고 문지른다. 2차 가자. 2차.
“2차 같은 소리 하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나 붉은 입술을 우물우물하더니 아이마냥 배시시 웃는다. 하준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아, 신이시여. 배신하고 상처 준 옛 남친으로부터 이 불쌍한 어린양을 구원해 주소서.
머릿속이 어지럽다. 속으로 우울한 상상을 했다. 내일 아침 주가가 폭락하는 상상, 아버지가 국회의원에 똑 떨어지고 전 재산을 날려 먹는 상상, 가장 아끼는 손목시계를 도둑맞는 상상. 무얼 해도 어지러운 머릿속이 가라앉질 않는다.
[나 다른 사람하고 잤어. 그러니까 앞으로 눈에 띄지 마.]
역시 기분 잡치는 데는 특효약이다. 아니나 달라 머릿속이 차갑게 식는다. 기분이 침잠되며 발기고 나발이고 수천 년은 수절할 수 있을 것 같다. 눈동자를 움직여 류정인을 바라봤다.
[너 말이야 일관성 있게 굴어.]
아, 숙취 때문인지 류정인이 인상을 쓴다.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기댄 채 몸을 뒤척인다. 설마 저번처럼 위경련을 일으키진 않겠지. 괜히 마시라고 했나. 걱정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쿨쿨 잘만 잔다.
거기에 안도하는 자신이 싫다. 어째서 마음껏 미워하지도 못하는 걸까. 같이 사는 내내 이 지긋지긋한 감정을 반복할 걸 생각하니 벌써 지치는 기분이다.
머리를 뒤로 기대고서 눈을 감았다. 류정인이 기대서 움직일 때마다 가슴속에서 응어리진 게 꿈틀댄다.
“다 왔습니다.”
눈을 뜨자 어느덧 집이다. 대리비를 주고서는 류정인을 깨웠다. 인사불성이다. 하. 차에서 끌어내서 부축하려 하는데 술에 취해 자꾸만 미끄러진다. 하준은 이를 갈며 정인을 업었다.
계단을 오르면서 욕을 몇 번이나 했다. 마당을 가로질러 가서 집으로 들어가서는 류정인을 침대에 던져 놓은 뒤 숨을 몰아쉬었다. 신발과 코트를 벗겨서 옆에 두고 나니 목이 탄다.
침실에 있는 미니 냉장고에서 생수를 하나 꺼내 들이켰다. 갈증이 해소되던 찰나 등 뒤에서 부스럭 소리가 난다. 돌아보던 하준은 그대로 물을 뿜을 뻔했다. 조금 전까지 얌전히 누워 있던 류정인이 윗옷을 벗고 이제 막 바지를 벗으려 하고 있었다.
“미쳤어?”
굳은 표정으로 묻는데 류정인은 아무렇지 않게 속옷 하나만 입고서 욕실 안으로 들어간다. 하준은 생수병을 들고 나가려고 했다. 그때 화장실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악. 비명 소리가 난다.
놀라 서둘러 들어갔더니 수납장 문이 열려 있고 류정인이 머리를 감싸 쥐고 있다. 양치 컵을 수납장에 넣어 두는데 그걸 꺼내려다 부딪친 듯 보였다. 이마를 문지르더니 그 와중에도 치약을 짜려고 뚜껑을 돌린다. 보다 못한 하준은 들어가서 칫솔을 빼앗고 치약을 짜서 정인에게 건넸다. 그랬는데 이번엔 칫솔을 들고 서서 꾸벅꾸벅 존다.
하준은 이를 갈며 칫솔을 빼앗은 뒤 입으로 가져갔다.
“벌려.”
아, 얌전히 입을 벌리길래 칫솔을 들고 양치질을 시켰다.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입을 벌리고 있는 걸 보니 기가 찬다. 어릴 적 류정인은 친구들과 어울릴 때도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었다.
자꾸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길래 턱을 쥐고서 입 구석구석을 닦였다.
그러다 눈이 저도 모르게 류정인 어깨를 쓸고 가슴으로 내려간다. 피부는 여전히 하얗고 매끈했다. 그 옛날 어른들 눈을 피해 서로 몸을 만지고 더듬으며 나쁜 짓을 하던 감각이 되살아난다.
태연한 척 시선을 옮기다 류정인의 왼쪽 가슴과 어깨 사이에 타투를 발견했다. 별자리였다. 보통 타투하는 사람들은 몸 여기저기 하던데 그러고 보니 류정인은 별자리와 팔에 레터링 단 두 개뿐이었다.
양치를 마친 뒤에는 얼굴을 닦였다. 물이 묻으니 싫었는지 자꾸 도망가려 해 뒤통수를 잡아서 억지로 눌렀다.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 주는데 뭐가 좋은지 흐흐 하고 웃는다. 조금 전 부딪친 이마가 빨갛다.
여전히 잘생겼고, 여전히 예쁘고, 그래서 더 싫고, 더 짜증 나고, 더 밉다. 하준은 정인을 끌고 와 침대에 눕힌 뒤 이불을 덮어 줬다. 아무렇게나 벗어 둔 옷을 정리하려고 집어 드는데 바지에서 무언가 툭 떨어진다.
작은 칩처럼 생긴 검은색 물건이었는데, 앞뒤를 살펴봐도 용도가 가늠이 안 된다. 그걸 원래 있던 바지 주머니에 넣은 뒤 옷을 걸고 돌아서는데 류정인이 기껏 덮어 준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에서 반나체로 뒹군다.
뒤돌아 누웠는데 속옷 하나만 걸친 몸이 적나라하게 시선을 잡아 끌었다. 군살 없이 매끈한 등과 어깨를 따라 시선이 엉덩이와 허벅지로 미끄러졌다. 페로몬과는 다른 살 내음이 짙게 풍겨 와 머리가 아찔해진다. 간신히 버티던 이성이 끊어지기 직전이다.
아아, 씨발. 욕을 내뱉으며 입술을 짓씹었다. 차라리 러트가 오늘 왔으면… 그랬으면 미친 척… 아니다. 됐다. 마른세수를 하고 가려는데 류정인이 웅얼댄다. 김하준… 얼핏 제 이름을 들은 것도 같았다.
“안….”
걸음을 멈춘 하준이 천천히 돌아봤다. 정인이 붉은 입술을 오물거린다. 미안해…. 하준은 어금니를 꽉 물고 가슴을 부풀리며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뭐가 그렇게 미안한데.”
대꾸가 없다. 새근새근 숨소리만 들려온다. 하준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쳐다보다 헛웃음을 흘렸다. 그냥 술김에 한 말일 뿐이다. 뭘 기대한 거야. 문을 닫고 나와 위층으로 올라가는데 걸음이 돌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
아아, 속 쓰려. 물. 누가 물 좀… 손을 위로 뻗었으나 잡히는 건 물이 아니라 휴대전화였다. 가까스로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한 정인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11시에 요리 수업이 있는데 1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침대에서 뛰쳐 내려오다 이불에 발이 걸려 우당탕 넘어졌다. 아윽, 무릎을 쥐고 신음을 내며 절뚝거리다 보니 속옷 차림이다. 옷이 어디로 갔지. 대충 옷을 껴입고 눈도 못 뜨고 나오는데 서 집사가 웃으며 인사한다.
“일어나셨네요? 더 주무셔도 되는데요.”
“서 집사님. 저 수업이요!”
“대표님이 오늘은 쉬게 하라고 하셨어요.”
아, 다행이다. 정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야 자신이 티셔츠도 뒤집어 입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실로 들어온 정인은 윗옷을 탈의하고 침대에 앉아 어젯밤 기억을 더듬었다.
식당에서 나온 것까진 알겠는데 그 뒤로 기억이 가위로 오려 낸 것처럼 싹뚝 끊겼다. 혹여 취중에 말실수라도 한 거 아닐까. 뒤늦게 겁이 나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애써 떠올리려고 해도 머릿속은 페이드아웃된 화면처럼 새카맣다.
그러다 정인은 무언가를 깨닫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제 입었던 옷이 어딨지. 주위를 살피는데 다행히 의자에 걸쳐져 있다. 바지 뒷주머니를 뒤지자 페로몬 감지기가 나온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서 그걸 서랍 안에 넣어 놓고 씻기 위해 욕실로 갔다.
“괜히 술 마셨어….”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한 뒤 뽀송뽀송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자 서 집사가 식사를 하라며 부른다. 식탁에는 맑은 지리탕이 올라왔다. 누가 봐도 해장용 음식이었다. 앉아서 눈치를 보며 수저를 드는데 그녀가 한마디 한다.
“다 큰 성인이니 알아서 하시겠지만, 술은 많이 드시지 마세요.”
정인은 머쓱한 표정으로 네… 하고 대답했다. 뜨거운 국물이 들어가니 속이 좀 풀린다. 얼굴도 같이 풀렸는지 서 집사가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괜찮으냐고 묻는다. 정인은 엄지를 치켰다. 완전 좋아요.
본가 사람들과는 달리 서 집사는 정인을 편하게 대해 줬다. 엄마 같기도 하고, 이모같기도 하고. 그래도 집에 편한 사람 하나는 있어서 다행이구나 싶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밖으로 나와 가볍게 산책을 했다. 날이 따뜻해서 그런지 어젯밤 내린 눈이 많이 녹았다.
그러고 나서는 방에 틀어박혀 종일 뒹굴었다. 영화도 보고, 좋아하는 음악도 실컷 듣고 웹툰도 보고, 다혜가 올려 놓은 작업물도 확인하고 댓글도 달고. 그러다 잠이 쏟아져 침대에 누웠다.
자는 동안은 도망간 삼촌이 꿈에 나왔다. 잡으려고 아무리 쫓아가도 두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꿈은 계속해서 반복됐다. 그러다 희미하게 들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무심결에 전화를 집어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인아! 큰일 났어. 불났어 불! 나 지금 가게로 가는 중이거든. 너도 빨리 와.]
눈을 끔벅이던 정인은 전화를 든 채로 일어나 앉았다.
“무슨 소리야?”
[가게에 불났다고!]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자 다혜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오늘 쉬는 날이라 찜질방에 있는데 나와 보니 부재중 전화가 엄청 와 있었단다. 건물 주인이었는데, 연락했더니 불이 났다는 거다.
잠이 확 깬다. 정인은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8시가 다 되어 간다. 외투를 들고 부랴부랴 밖으로 나오자 서 집사가 돌아본다. 주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어디 가시게요?”
“저 일이 생겨서요. 나갔다 올게요. 식사는 괜찮아요.”
따라오는 서 집사를 뒤로한 채 정인이 밖으로 뛰어나와서 차를 타고 시동을 걸었다. 운전을 하며 다시 다혜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연락이 되질 않는다. 날이 따뜻해 어젯밤 내린 눈이 녹아 도로 상태가 엉망이다.
다행히 집과 가게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다혜의 말을 듣고도 실감이 나질 않았는데 멀리서 시커멓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자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소방차와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차를 멀찍이 대고서 헐레벌떡 뛰어가야 했다.
건물 주인부터 시작해, 근처 상인들도 다 나와 있고, 다혜 역시 양말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슬리퍼 하나만 신고 도착해 있다. 돌아보는 다혜의 얼굴은 거의 울 지경이다. 근처에 있던 건물 주인이 다가왔다.
“정인 씨 왔네. 어휴, 이게 무슨 난리야.”
“어떻게 된 거예요?”
“몰라, 나도. 내가 위층 공방에 있는데 갑자기 펑 소리가 나더니 건물이 흔들렸다니까.”
“다치신 분은 없어요?”
“어, 소리 나자마자 사람들 대피했지.”
순식간에 불이 번진 데다 가게로 들어오는 진입로가 워낙 좁아 소방차가 들어오는 데 애를 먹었단다. 안에 있는 건 거의 다 타 버렸다는 말에 정인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했다. 시커멓게 그을린 가게 안에서는 아직도 남아 있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소방관 한 명이 정인을 제지한다. 지금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4년을 넘게 정을 붙였던 일터가 한순간에 날아갔다. 다혜가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허탈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정인이 그녀를 달래는 사이 소방관 한 명이 다 녹아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것 하나를 들고 나와 경찰에게 보여 준다. 정인이 그쪽으로 갔다.
“뭡니까, 그게?”
“휘발유 통이요. 원래 사용하시던 건가요?”
정인이 고개를 저었다. 휘발유를 쓸 일은 따로 없었다. 경찰과 소방관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다혜와 최초 목격자 그리고 건물 주인과 정인 모두 참고인 조사를 위해 경찰서로 이동했다.
조사라고 해 봤자, 별다른 건 없었다. 주로 전날까지 가게에 머물던 다혜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경찰이 조서를 작성하고 있는데 다른 경찰 하나가 와서는 컴퓨터 화면을 가리키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잠시 후 조사를 하던 경찰이 정인과 다혜에게 그 화면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사람 알아요?”
정인은 그것을 받아 자세히 들여다봤다. 누군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가게 문을 자연스럽게 열고 들어간다. 그러더니 잠시 후 그가 빠져나왔고, 연기가 치솟더니 창문이 깨지며 불길이 치솟는다.
정인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다혜가 어! 이 점퍼! 하고 소리를 지른다.
“아는 분이세요?”
다혜가 끄덕였다.
“우리 고객이에요. 어제도 와서 난리 피우고 갔는데….”
다혜가 기막힌 표정을 했다. 얼마 전 타투를 받았는데 받을 당시에도 마음에 들어 했고, 자기 친구까지 와서 같이 하더니 어제 뜬금없이 찾아와 타투가 마음에 안 든다며 시비를 걸었다. 경찰을 부른다는 말에 돌아갔으나, 나가는 순간까지도 그는 악담을 퍼부었단다.
“그럼 이 새끼가 그런 거예요? 이거 완전 미친 씨발새끼네.”
다혜가 욕을 하자 경찰 둘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다. 이 사람 이름 알아요? 다혜가 휴대전화에 저장해 놓은 것을 경찰에게 넘겨줬다. 그러고 나서 경찰은 그만 돌아가도 좋다고, 기다리면 연락을 주겠다는 말을 한 뒤 돌려보냈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담배를 빼서 물었다. 두 사람 모두 속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게 어디냐고 서로를 위로했다.
정인은 다혜를 바래다준 뒤 집이 아닌 가게로 돌아갔다. 감식반들이 왔었다고 하는데 모두 돌아갔는지 주변은 어둡고 폴리스 라인만 쳐져 있다. 차에서 내려 가게 근처에 가니 탄내가 진동한다.
불을 끄느라 뿌린 물 때문에 벽이며 바닥이 흥건하게 젖었다. 정인은 주변을 한 번 살핀 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 대기실보다 안쪽 작업실의 훼손이 유독 더 심각했다.
그동안 일하고 노력한 흔적들이 까맣게 재가 됐다. 노트북과 작업 샘플을 보관하던 곳은 아예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기억나세요? 아니면 도안이나 사진 남겨 두신 거 있을까요?]
왜 그 순간 며칠 전 본 형사가 떠올랐을까. 정인은 다 녹아 버린 노트북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대로 말할걸.
***.
하준의 표정이 다소 심각해졌다. 류정인의 가게로 추정되는 곳에 불이 났다고 지인이 기사를 보내 줬는데 마지막 줄에 방화로 추정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시간은 자정이 되어 가는데도 류정인은 집으로 돌아오질 않았다. 전화를 걸까 말까 벌써 30분째 망설이고 있는데 마당으로 누군가 가로질러 들어온다. 류정인이었다. 하준은 고민 끝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 중간쯤 갔을 때 문을 열고 들어오던 류정인과 마주쳤다. 그는 하준을 슥 보더니 나 왔어, 한마디 하고 바로 침실로 향했다. 하준은 1층 거실에 앉아 TV를 켰다. 자신의 소속사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한참 뒤에 류정인이 방에서 나온다. 이제 막 씻었는지 옷도 갈아입고 머리에 물기가 남아서는.
눈은 TV를 보고 있으나 신경은 온통 그쪽으로 쏠렸다. 정인은 주방으로 가서 서랍을 열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왜 없지. 이상하다. 거슬릴 정도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길래 하준은 리모컨을 내려놓고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뭘 그렇게 찾아?”
“집에 라면 없어?”
하준은 주방 안쪽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에서 라면을 꺼내 건네자 정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냄비에 물을 붓고 라면을 뜯던 정인은 하준을 돌아봤다.
“너도 먹을래?”
“아니.”
정인은 라면 하나를 뜯어 냄비에 넣고는 면이 퍼질 때까지 끓이더니 불을 껐다. 라면 냄새가 진동한다. 정인이 냄비를 식탁에다 놓고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는 동안 하준은 커피를 내려 그의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김치를 가지고 오던 정인은 하준의 눈치를 살피면서 자리에 앉았다. 의자에 기댄 김하준은 커피는 손도 대지 않은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왜 그가 2층으로 가지 않고 저러고 앉아 있는지 궁금해졌다.
정인은 젓가락으로 라면을 휙휙 풀면서 은근슬쩍 물어봤다.
“내가 어제 실수한 거 없지?”
면발을 입으로 가져가며 묻는데 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하던 찰나 그가 뒷말을 덧붙였다.
“옷을 막 벗더라.”
입으로 들어갔던 면발을 도로 뱉었다. 김하준의 표정을 보니 농담이 아니다. 아, 수치스럽다. 그래서 아침에 눈 떴을 때 속옷만 입고 자고 있었구나.
“덕분에 즐거웠어. 옛 생각도 나고.”
정인은 눈을 흘겼다.
“이상한 짓 한 건 아니지?”
혹시나 해서 물었더니 대놓고 비웃는다.
“내가 아직도 네가 알던 김하준 같아? 아무거나 막 주워 먹던?”
말을 해도 꼭. 주둥이를 때려 주고 싶은 걸 애써 참으며 라면 먹는 것에 집중했다. 여전히 김하준은 그 자리에 앉아서 움직이질 않는다.
“가게 불났다며.”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잖아도 어떻게 알았는지 김 회장한테도 연락이 왔다. 김 회장은 불난 것보다 괜히 구설에 오를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의 심정도 이해는 된다. 돈을 얼마나 줬는데, 그럴 만하지.
“용의자는?”
“잡힐 것 같아. 경찰에서 연락해 준다고 했어.”
“다행이네.”
다행이란 말을 듣는데 기분이 묘하다. 조금은 걱정했던 걸까. 쳐다보는데 커피를 마시며 김하준도 정인을 바라보고 있다. 황급히 시선을 피하고 옆에 있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사이 김하준은 전화가 와 통화를 하더니 위층으로 올라갔다. 정인은 먹은 걸 후다닥 치우고 도망치듯 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온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한 하루다. 양치하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다 티셔츠의 목 부분을 당겨 왼쪽 빗장뼈와 가슴 사이에 있는 타투를 확인했다. 그걸 보며 입술을 잘근 물었다.
봤어도 뭔지 몰랐을 거다. 그렇게 위안을 하며 양치를 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전화가 울린다. 모르는 번호라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엔 받았다.
“여보세요?”
상대가 말이 없다. 그냥 끊으려고 하던 찰나 수화기 너머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정인아, 나야. 잘 지냈어?]
정인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기가 차 할 말을 잃고 있는데 상대방이 넉살을 떤다.
[인마, 너는 결혼하는데 삼촌도 안 부르고. 너무했다.]
그렇게 찾으러 다닐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이제 와서. 열이 훅 오른다.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를 까득 물었다.
“어디야.”
[미안하다. 너한테는 면목이 없다. 형수님한테도 엄마한테도 죄송하다고 전해 줘.]
“씨발. 마음에도 없는 사과는 됐고, 어딘지 말해.”
목소리가 절로 서늘해진다.
[나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
“듣기 싫어. 만나서 얘기해.”
[만나는 건 좋은데, 정인아 나 궁금한 게 있다.]
뒷골이 싸하다.
[너 그때 베타로 판정 난 거 아니었어?]
“뭐?”
[언론에서 너를 오메가라고 하길래, 내가 이상하다, 이상하다, 생각했거든.]
그리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그가 전화 건 목적이 점점 뚜렷해졌다. 용서를 빌기 위해서도 변명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는데 류동찬이 한마디를 기어이 해서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붓는다.
[그 집에선 너 베타인 거 모르지?]
안다고 할 수도 모른다고 할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정인은 입을 꾹 다문 채 정면만 노려봤다. 나지막하게 웃는 류동찬의 목소리에 한몫 잡았다는 희열 비슷한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정인은 꽉 다물고 있던 입을 뗐다.
“일단 만나서 얘기해.”
***
하준은 테이블에 놓인 한약 상자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갑작스럽게 모친인 주혜련이 왜 회사에 방문했나 했는데 한약을 들고 왔다. 그녀는 하준의 안색을 이리저리 살피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요즘도 집에서 술 많이 먹니?”
“아니에요.”
“할머니가 걱정이 많으셔. 바로 김 원장한테서 한약 지어 오셨어.”
“근데 왜 두 개예요?”
“하나는 걔 줘.”
이름도 부르기 싫은 모양이다. 하준은 모친과 할머니가 얼마나 정인을 탐탁지 않아 하는지 알고 있다. 처음엔 그 마음을 이용해 류정인을 괴롭혀 줄 생각이었는데, 막상 저 말고 다른 사람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상상하니 그리 기분이 유쾌하진 않다.
“보기보다 비실비실해 보인다고, 애는 제대로 가질 수 있겠냐고 걱정하시더라.”
아이 이야기에 하준이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며 주혜련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너희… 잠은 따로 자는 거 맞지?”
“아들 부부 관계까지 간섭하고 싶으신 거예요?”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덜컥 애라도 생겨 봐.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녀 역시 이 결혼이 오래갈 거로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준은 거기에 대해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정인이 금요일에 집에 간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참, 이번 주 금요일 본가 못 가요.”
“왜.”
“정인이 할머니 생신이에요. 내려갔다 와야 해요.”
“하필 그날일 게 뭐야. 너희 할머니 또 심통 부리시겠다.”
“원래 저 자주 안 갔잖아요. 결혼했다고 매주 가는 거 솔직히 마음에 안 들어요.”
“하준아.”
“할머니께는 따로 말씀드릴게요. 엄마가 말하면 또 펄펄 뛰실 거 아니에요.”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시집온 지 30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느라 힘들어했다. 게다가 이젠 나이도 있어 한 달에 한 번 있는 제사도 벅찬데 시어머니의 극성에 싫다는 내색 한 번을 못 하고 지내고 있었다.
그녀가 나온 김에 백화점 쇼핑이나 해야겠다며 떠난 뒤에 하준은 테이블에 있는 한약 상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류정인 한약이라면 질색하는데, 이걸 먹을 수가 있으려나. 아니 그보다 둘 사이에 애를 가질 일이 있으려나. 생각하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먼저 터진다.
***
정인은 공터에서 차량 비상등을 켠 채 누군가를 기다렸다. 20분 정도가 지나자 저 멀리서 차 한 대가 서더니 운전석 문이 열리고 류동찬이 나온다. 그가 만나자고 한 장소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한적한 곳이었다.
그대로 차로 들이받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누른 뒤 운전석에서 내렸다. 류동찬이 보자마자 뻔뻔스럽게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야, 너 신수가 훤해졌다.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이 차는 또 뭐야. 그 집에서 뽑아 준 거야? 이게 얼마짜리야?”
도망자 신세라 그런지 꼴이 거지꼴이다. 정인은 부글부글 끓는 속내를 감추고 선글라스를 쓴 채 그에게 차에 타라고 고갯짓을 했다.
“일단 타. 할 말이 있으니까.”
차에 타서도 류동찬은 차량 구석구석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건 얼마나 해? 승차감 죽이는데? 엉덩이를 들썩이더니 정인이 말이 없자 그제야 눈치를 살핀다.
“화 많이 났지? 삼촌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나도 감쪽같이 속았다니까. 내가 얼마나 미안한지 오죽하면 장기라도 팔아서 빚 갚을 생각을 했겠냐.”
“그럼 팔지 그랬어? 이제라도 내가 배 속에서 꺼내 줄까?”
“너는, 꼭 말을 무섭게 하더라.”
구구절절한 변명이 이어진다. 자신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가족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돌아가신 형한테는 면목이 없다는 둥. 듣고 있던 정인은 옆에 있던 피로회복제를 한 병 따서 마셨다. 그리고 남은 한 병을 따서 류동찬에게 건넸다.
류동찬이 아무 의심 없이 받아 마시더니 크, 하고 입가를 닦고서 정인에게 사설을 늘어놓는다. 정인이 그런 류동찬을 노려보며 한마디 했다.
“다 듣기 싫고, 돈 내놔.”
“돈이 어딨어….”
류동찬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정인은 기가 찼다. 그 많은 돈을 하나도 남김없이 썼다고?
“내 꼴을 봐라… 남은 게 있어 보이나….”
하, 정인이 머리를 쓸어 넘기고 의자에 기댔다. 이를 까득 물자 류동찬이 웃으며 은근슬쩍 떠본다.
“너 근데 결혼은 어떻게 된 거야? 그 집에서는 너 베타인 거 몰라?”
“그게 그렇게 중요해? 왜, 협박이라도 해서 나한테 돈 뜯어내게?”
“야, 인마.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사람을 뭐로 보고.”
“뭐로 보긴. 사기꾼 도둑놈으로 보지.”
정인이 시동을 걸자 류동찬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진다.
“왜, 왜 시동을 걸어?”
“경찰서 가야지.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어?”
야, 인마. 잠깐만. 출발하려고 하자 류동찬이 문을 열고 내린다. 황급히 타고 온 차 쪽으로 달아나던 그는 운전석 문을 열기도 전에 비틀거리더니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인이 차를 세워 둔 채 내려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올려다보는 그의 눈이 조금 전과는 다르게 잔뜩 풀려서 몸을 제대로 가누질 못한다.
“정, 정인…아…. 왜 이러지… 나 뇌출혈인가 봐…. 너무 어지럽다….”
뇌출혈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내가 너 때문에 혈압 터지면 또 몰라. 정인은 류동찬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 뒤, 차량으로 끌고 가 뒷좌석에 강제로 쑤셔 넣었다. 문을 쾅 닫자 그가 창에 얼굴을 문대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류동찬은 곧 의식을 잃었다.
***
하준은 테라스에 나와 담배를 물었다. 하늘이 유독 맑아서 그런지 달이 또렷하게 얼굴을 내밀었다. 안쪽에서는 시끌벅적하게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민재의 집에서 간단한 파티가 있었는데 한쪽에서는 요리사들이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한참 바람을 쐬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여자 하나가 나온다. 그녀에게서 달콤한 향이 짙게 풍겨 왔다.
“하준 씨. 왜 안 와? 자기 결혼 축하하러 모인 건데, 주인공이 빠지면 돼?”
말이 축하지, 이곳에서 하준의 결혼을 반기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아니 아예 없을 수도 있겠지. 다들 하준이 아버지 선거의 제물로 이용됐다고 생각하니까. 안으로 들어서자 다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난리다.
다들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누가 누가 스캔들이 났다더라, 이번에 어디 회사가 상장했다더라, 어디가 투자하기 괜찮다더라, 그러다 친구 중 하나가 죽은 이해수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 그는 가족이 모두 법조계에 있었다.
“그 얘기 들었어? 우리 큰형이 그러는데 이해수 타살 가능성도 있다던데.”
“타살?”
“허벅지를 칼로 다 그었대. 한마디로 회를 떴다더라.”
모여 있던 몇몇 사람은 흥미로운 반응이었고, 나머지는 기겁하며 질색했다.
“말도 안 돼. 왜 그런 짓을 해?”
“그것 때문에 말들이 많은가 봐. 완전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는 거지. 아니면 누가 강제로 그랬든가.”
“소름 끼쳐. 하준아, 걔 원래 약 같은 거 하지 않았어?”
시선이 하준에게 모인다.
“죽은 사람 일에 뭐가 그렇게 궁금해?”
차가운 말투에 다들 눈치를 살피며 곧바로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바꾼다. 그러다 뒤늦게 손님이 한 명 더 등장했다. 민재는 그를 반갑게 맞으며 데리고 와서 친구들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양욱환. 와이엠 홀딩스라고 알지? 요즘 떠오르는.”
남자는 새카만 머리를 단정하게 넘겼고, 피부가 창백할 정도로 하얬다. 류정인이 청초한 느낌이라면 남자는 뱀 같은 차가움이었다. 다들 남자가 누군지 대충 알아봤다. 김민재의 아버지가 최근 사업 때문에 조폭 기업하고 손을 잡았는데 그 회장이 양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왜 저런 사람을 여기 끌어들인 거야. 다들 내키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는데 남자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온다.
“안녕하세요.”
생긴 거와는 달리 쑥스러워하는 듯한 미소를 짓는다. 다들 반갑다고, 마음에도 없는 인사와 미소를 짓는 사이 하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자리에 앉은 양욱환의 시선이 따라붙는 거 같았으나 기분 탓이겠거니 여겼다.
화장실로 간 하준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류정인에게 다음 주에 본가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없다. 생색내려고 한 건 아니지만 대답이 없으니 괘씸해진다.
“마음에 안 들어.”
쯧. 혀를 차고 휴대전화를 집어넣고 손을 닦는데 화장실 문이 열리면서 양욱환이 들어온다. 그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예, 예, 들어갈게요. 늦지 않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화를 끊은 그가 하준을 보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엄마요. 걱정이 많으셔서….”
묻지도 않았는데 뭐 어쩌라는 거지. 하준이 대충 아,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마저 씻은 뒤 밖으로 나왔다. 외투를 집어 드니 다들 시선이 쏠린다.
“김하준 어디 가?”
“피곤해. 집에 간다. 재미있게들 놀아.”
뒤에서 야유가 쏟아진다. 결혼하더니 변했어. 우리가 싫어진 거야? 부인하고 사이가 좋은가 봐. 대답 대신 그들에게 손을 흔들고 밖으로 나오는데 민재가 따라 나왔다.
“더 놀다 가지. 너 때문에 기껏 모였는데.”
웃음이 났다. 하루가 멀게 이유를 만들어 모임을 하면서, 지겹지도 않은 걸까. 아마 하준이 이혼하면 그때는 이혼 위로 파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차에 타려던 하준은 잠시 멈춰 서서 민재를 불렀다.
“아까 그 친구 말이야, 믿을 만해?”
민재가 피식 웃었다.
“다 검증했지. 왜. 아버지가 깡패라?”
그렇게 따지면 하준의 할아버지도 원래는 깡패 출신이었다고 한다. 김 회장이 태어나면서 일을 접었으나, 그것 때문에 공천을 받고 선거에 나오기까지 꽤 발목을 잡혔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남자의 눈빛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 이것저것 오픈하지 마.”
“별일이다. 김하준이 내 걱정을 다 하고. 드디어 날 사랑하게 된 거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하준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그대로 차를 돌려 나왔다. 주택가를 빠져나와 집으로 가는데 중간에 치킨 가게가 눈에 띈다. 그냥 지나치려던 하준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정차한 뒤 가게를 돌아봤다.
그리고 곧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됐다. 뭐가 이쁘다고 치킨까지 사다 줘.”
***
침대에서 시체처럼 누워서 잠만 자던 정인은 늦은 시간 잠에서 깨어났다. 저녁도 먹지 않고 굶으면서 잤더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부스스 일어나 눈을 비비는데 시간을 확인하니 10시가 넘었다.
오늘 하루는 정말 길었다. 수면제 탄 음료를 먹고 기절한 삼촌을 보육원과 떨어진 창고에 가둬 놨다. 정신을 차린 그는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고, 계속 그러면 김춘호한테 넘겨 버린다는 협박에 그제야 잠잠해졌다.
엄마는 걱정되는지 풀어 주라고 하였으나 정인은 창틈으로 밥을 주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해 주지 말라고 못 박았다. 그래도 류민아가 있어서 다행이다. 류민아는 혹시 삼촌이 밖으로 도망 나오거든 집에 있는 도끼나 낫으로 공격해도 되냐고 물었다. 눈빛을 보니 진심인 것 같아 조금 무서웠다.
멍한 얼굴로 물을 꺼내 마시는데 벽에 걸린 센서에 표시등이 깜빡인다. 누군가 현관을 통해 들어왔다는 소리다. 고민하던 정인은 밖으로 나왔고 이제 들어오던 하준과 마주쳤다. 그는 한 손에는 상자를 다른 한 손엔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왔어…?”
하준은 대꾸도 하지 않고 테이블에 비닐봉지를 내려놓았다. 딱 봐도 비닐에 든 게 뭔지 알겠다. 치킨 냄새가 여기까지 풍겨 왔다.
“치킨 사 왔어?”
“아니, 누가 줬어.”
정인의 시선은 치킨에서 옆의 상자로 옮겨 갔다.
“저건?”
“그건 네 한약.”
“내 한약?”
“할머니가 지어 주셨대.”
정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한약 싫은데. 그러잖아도 서 집사가 수업 끝나면 공진단인지 뭔지 입에 자꾸 쑤셔 넣어서 죽겠는데.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한약 상자를 바라보다 하준을 돌아봤다.
“그냥 네가 먹어.”
“나는 못 먹어.”
“왜.”
“애 생기는 한약인데 내가 어떻게 먹어.”
정인의 표정이 굳었다. 아, 그런 한약도 있구나. 괜히 뜨끔하고 켕겨서 시선을 피하고 한약 대신 치킨 봉지를 풀었다. 상자를 여니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이다. 군침이 고인다. 먹어도 되느냐고 묻자 그러란다.
앞접시와 물컵을 가지고 와 보니 김하준이 없다. 위층으로 간 건가. 혼자 먹으란 건가. 올라가 볼까. 여러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온다. 손에는 와인과 두 개의 잔이 들려 있다. 정인이 와인을 보며 한마디 했다.
“기왕이면 맥주도 사 오지.”
하준이 퉁명하게 대꾸했다.
“내가 산 거 아니고 누가 준 거라니까.”
“어.”
와인을 따라 맛을 봤는데, 생각보다 달콤하고 나쁘지 않다. 정인은 치킨을 한 입 베어 물고서 TV를 틀었다. 김하준은 옆에 앉아서 와인만 먹는다. 망설이던 끝에 정인은 포크로 치킨 한 조각을 찍어 하준에게 건넸다. 하준은 말도 없이 그걸 받았다.
두 사람 모두 말없이 TV만 봤다. 와인이 생각보다 달아서 목구멍으로 잘 넘어간다. 오락프로를 보다가 영화가 나오길래 거기에 채널을 고정했다. 로맨틱 코미디였는데 생각보다 야한 장면이 자꾸 나오는 바람에 정인은 민망해져 서둘러 채널을 바꿨다.
첫 번째 술을 다 비우고 두 번째 술을 꺼내 올 때까지도 두 사람 사이엔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원래 목적이 TV였던 것처럼 묵묵하게 영화만 시청하고 있는데, 달아서 괜찮을 줄 알았던 술에 점점 취기가 올라온다.
정인은 열이 나는 것 같아 뺨과 목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다 김하준과 눈이 마주쳤다. 서둘러 시선을 피했으나, 얼굴은 더더욱 화끈댔다.
“나한테 할 말 없어?”
와인을 마시던 김하준이 물었다. 정인은 마음을 굳게 먹고 김하준을 똑바로 바라봤다. 여전히 북유럽 왕자님처럼 잘생겼네.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하던 김하준. 내가 결혼하고 싶어 하던 김하준.
“무슨 할 말?”
“뭐든.”
술을 먹으니 솔직해지고 싶다. 사실대로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걸 말했다간, 모든 게 끝이다.
“예전에… 너한테 그런 건 미안해.”
하준은 채근하지 않았다. 정인은 입술을 달싹이다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지난 일은 잊고,”
하준의 눈 밑이 일그러졌다. 정인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남은 시간은 친구로 잘 지내자.”
“…….”
“너하고 나는 이제 한배를 탔으니까. 동업자. 협업자. 뭐 그런 거라고 생각,”
하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이블이 밀리며 와인이 쏟아졌고, 정인은 눈이 커져서 고개를 들었다. 내려다보는 김하준의 얼굴이 얼마나 차가운지 숨이 턱 막힌다. 김하준은 쏟아진 술과 류정인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네가 치워. 나 들어가서 쉴 거야.”
대답하기도 전에 김하준이 돌아선다. 계단을 올라간 그는 2층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정인은 긴 한숨을 토해 내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정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에 취한 건지 몸이 휘청댄다. 그렇게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위만 쳐다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올라가서 말할까. 솔직하게 말하고 지금이라도 제대로 사과할까.
결국, 마음을 고쳐먹고 김하준이 아닌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바뀌는 건 없다. 저는 김하준과 아무것도 해선 안 된다. 약속이 끝나면 떠나야 한다. 그것만 기억하자.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는데 서러움이 울컥 몰려온다. 정인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감정을 추스르려고 노력했다. 그때 갑자기 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정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또다시 쿵쿵, 주먹으로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류정인! 하고 고함이 들린다. 정인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부리나케 눈물을 닦고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여는데 바로 앞에 김하준이 서 있다.
그새 위층에 올라가서 술을 더 마신 건지 숨을 내쉴 때마다 독한 알코올 냄새가 확 풍긴다. 그는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비틀거리며 정인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봤다.
정인은 울었던 걸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려 피했다.
“말해 봐.”
발음이 뭉개지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많이 마셨나 보다. 정인은 용기를 내어 김하준의 눈을 바라봤다. 그 속에 여러 감정이 깃들어 있다.
“나한테, 왜 그랬어.”
하준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고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말해 보라고. 그때 나한테 왜 그랬냐고 묻잖아.”
격앙된 감정과 함께 눈빛은 억울함과 상처로 물들어 갔다. 정인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을 애써 감추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가. 꼬장 부리지 말고.”
“내가 뭘 그렇게 너한테 잘못했니. 응?”
“너 잘못한 거 없어.”
“그럼 왜 그랬는데. 내가 이해해 보려고 했거든. 근데 도저히 이해가 안 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나한테, 네가 나한테…,”
차마 더 말을 하지 못하고 김하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떠올리기도 싫은 듯 이를 까득 물고 얼굴을 세차게 문질렀다. 씨발. 씨발. 나가라고 어깨를 떠밀었으나 김하준은 아예 정인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왔다. 도저히 말을 듣지 않길래 정인은 외투를 챙겨 들었다.
“알았어. 그럼 내가 나갈게.”
하준은 나가려는 정인의 팔을 붙잡고 확 끌어당겼다. 정인은 이를 꽉 물고 견뎠다. 김하준의 상처 입은 눈빛을 가까이 마주하는 건 고문과도 같았다.
“너 왜 이래? 술 취했으면 곱게 자.”
하준이 입술을 달싹였다. 너는, 내가…. 목소리가 떨린다. 그는 더 말을 하지 못하고 앞니로 입술을 짓이기며 깨물었다. 순간 서랍 속에서 드드드, 드드드, 하는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정인은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져 돌아봤다. 아아, 페로몬 감지기.
김하준의 시선이 그쪽으로 고정된 걸 보며 정인은 황급히 앞을 가로막았다.
“나가, 얼른.”
하준의 눈은 여전히 서랍에 고정되어 있다.
“무슨 소리야?”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하준이 그리로 가려고 하자 정인이 서둘러 막아선다.
“가!”
“왜 당황해?”
“내가 무슨 당황을 해?”
“하잖아, 지금.”
“아닌데.”
드드드, 드드드, 망할 소리가 멈추질 않자 김하준이 정인을 밀치고 그리로 간다. 정인이 황급히 쫓아가서 팔을 붙들었으나 소용없었다. 아찔한 상황에 몰리자 정인은 도저히 안 되겠어서 김하준의 뺨을 붙잡고 입술을 찍어 눌렀다.
김하준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입술이 떨어졌고 여전히 진동음이 들린다. 정인이 변명하려고 하자 이번엔 김하준이 입술을 부딪쳐 온다. 어깨를 밀쳐 내기도 전에 그의 팔이 허리를 감고 바싹 끌어당겼다.
벗어나려고 바둥대자 키스가 점점 농밀해진다. 정인은 다리에 힘이 풀리고 의식이 흐릿해짐을 느꼈다.
아, 김하준, 옛날에는 키스 더럽게 못 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잘해. 사람 뒤숭숭하게.
겨우 조여 놨던 나사가 느슨해지는 기분이다. 정인은 저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감았다. 키스 정도야 괜찮지 않을까. 키스 정도야. 생각하는 와중에 김하준의 입술이 떨어져 목으로 옮겨 간다.
잠깐. 잠깐만. 거긴 아니야. 눈을 뜨고 서둘러 떼어 내려고 하는데 이번엔 손이 바지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 겨우 정신을 차린 정인은 온 힘을 다해 김하준을 밀쳐 냈다.
뒤로 주춤 밀려난 김하준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어깨와 흉곽이 눈에 띄게 오르락내리락한다. 거기에 정인은 아주 잠깐 정신이 팔렸다. 김하준 얼굴에는 황망함이 깃들었다. 정인은 침이 잔뜩 묻은 제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 내고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하준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김하준이 티셔츠를 훌러덩 벗어제낀다. 어릴 적 또래보다 몸이 좋긴 했어도 저렇게까지 좋지는 않았는데. 근육이 쫙쫙 갈라져서 지방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하느님. 부디 이 어린양을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머릿속에선 안 된다고 외치는데 눈은 이미 김하준의 몸뚱이를 음탕한 시선으로 훑고 있다.
“야… 왜 옷을 벗고….”
김하준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물러서던 정인은 더는 갈 곳이 없는 걸 확인했다. 김하준의 표정을 보니 오늘 사고를 칠 작정인 게다. 아아, 빌어먹을. 나도 하고 싶다. 나도 하고 싶다고! 근데 어떡해! 내가 오메가가 아닌데!
바로 코앞에 다가온 김하준의 눈에 욕망이 가득하다. 정인은 이를 꽉 물었다. 미안. 내면에서의 아우성과는 달리 주먹이 먼저 날아갔다. 얻어맞은 김하준이 뒤로 쿵, 쓰러지더니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정인은 가까이 가서 코밑에 손을 댔다. 숨결이 느껴진다. 미친 듯 진동하던 페로몬 탐지기도 잠잠해졌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김하준 얼굴을 쳐다봤다.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복잡한 감정이 물밀듯 밀려온다. 손을 뻗어 김하준의 손끝에 조심스럽게 가져다 댔다. 여전히 부드럽다. 그러면 안 되는데 자꾸 욕심이 생긴다.
정인은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나직이 고백했다.
“미안…. 너한테 거짓말했어.”
***
하준은 매점에서 음료수를 하나 산 뒤 미술실로 향했다. 그렇지만 미술실이 가까워질수록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요즘 류정인이 이상하다. 만나는 것도 대화하는 것도 자꾸 피했으며, 연락해도 자느라 못 봤다고 핑계를 댔다.
전과 다르게 쌀쌀맞고 차가워진 태도에 하준은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꼭 그 이유를 물어볼 작정이었다. 다행히 점심시간에 미술실에서 보잔 답장이 왔다.
미술실 앞에 다다른 하준은 몇 번이고 심호흡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니 텅 비어 있고, 정인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 간 건가, 싶어서 돌아나가려는 순간 가림막 뒤쪽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정인아? 하고 부르자 강해찬이 손으로 입술을 훔치며 나온다. 그는 1년 선배로 정인의 집 근처에 살았으며, 하준을 매우 못마땅해했다. 그 이유를 하준도 알고 있었다. 그는 정인을 좋아했다. 정인과 만나기로 한 미술실에서 그를 보는 순간 뒤통수가 싸해지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곧이어 그의 뒤에서 류정인이 셔츠 단추를 잠그며 나온다. 하준은 한 대 맞은 표정으로 정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빨리 왔네.”
이따 보자. 강해찬이 정인의 어깨를 한 번 만지더니 인사를 하고 나간다. 하준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너… 왜 거기서 나와?”
“형하고 잠깐 얘기했어.”
“무슨 얘기?”
하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인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이젤 앞에 앉았다. 류정인! 하고 부르자 올려다보는 시선이 더할 나위 없이 차갑다. 하준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이를 꽉 물었다.
시선을 내리자 정인의 목에 빨간 자국이 보인다. 믿기지 않는다. 저건 언젠가 류정인이 제 목에다 했던 짓과 똑같은 거다. 말을 해야 하는데 호흡이 가빠지고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한다.
“요즘… 나한테 왜 이래?”
입술이 잘게 떨렸다.
“내가 뭘.”
“계속 피하고, 무시하잖아.”
“나도 하나만 묻자. 넌 내가 왜 좋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다. 왜 좋냐니. 멍청한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류정인이 다시 묻는다.
“내가 예쁜 오메가라서?”
물론 예쁜 오메가라서 좋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좋은 이유는 수백 수천 가지는 댈 수 있었다. 빤히 쳐다보던 정인이 앞에 있는 스케치북을 넘기더니 종이 한 장을 부욱, 찢어 낸다. 그리고 그걸 하준에게 내민다. 하준은 거기 그려진 제 얼굴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은 언젠가 정인에게 부탁한 제 초상화였다.
“선물.”
하준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류정인은 무서울 만치 담담하고 차분했다. 그리고 그 예쁜 입술에서 나온 말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끝내자.”
“왜.”
“나 너 싫어. 질렸어, 이제.”
귀가 먹먹해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하준이 입술을 몇 번이고 짓씹었다가 뱉었다. 여기서 왜 그러냐고 몰아치면 류정인이 떠날지 모른다. 아까 그것도 실수였을 거다. 정인도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스스로 합리화시켰다.
“이러지 마 정인아….”
“나 다른 사람 좋아해.”
하준이 상처받은 표정으로 웃었다.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겠어서.
“정인아.”
“강해찬하고 잤어. 아까 봤잖아.”
심장을 송곳으로 후비는 기분이다. 하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이 뜨겁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호흡이 가빠 온다. 이러지 마. 이러지 마, 제발. 어떻게 할까?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말해. 무릎이라도 꿇을게. 나한테 어떻게 네가 이래. 나한테 어떻게…. 뱉지 못한 말이 목 안에 겹겹이 쌓였다.
“너한테 거짓말했어. 좋아한다고 한 것도, 결혼하자고 한 것도 다 거짓말이야.”
“정인아….”
“네가 순진해 보여서 가지고 논 거야. 그러니까, 너도 나한테 더는 마음 갖지 마.”
“류정인!”
***
빌어먹을. 또 그 꿈이다. 하준은 신음하며 뒤척였다. 그러다 보인 건 제 방 천장이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데 온몸이 결리고 무겁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이 바닥에서 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야, 이게. 인상을 쓰고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려 했으나 술이 덜 깨서 멍하기만 하다. 얼굴을 구기고 어젯밤 기억을 간신히 떠올리자 뒤늦게 조각난 파편이 듬성듬성 맞춰진다.
“씨발. 미쳤지.”
벌떡 일어나서 침실을 둘러보는데 류정인이 없다. 이불을 대충 걷어 소파에 올려 두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따라 걷는데 말소리가 들린다. 하준이 등장하자 거실에 있던 직원이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그러더니 눈이 커져서 놀란 표정을 짓는다.
왜 그러나 했는데 주방에서 나오던 서 집사 역시 비슷한 반응이다.
“어머!”
그녀의 비명 같은 소리에 하준은 인상을 찡그리다 한쪽 얼굴에 통증이 느껴짐을 깨닫고 곧장 욕실로 갔다. 가서 거울을 보는데 왼쪽 입가가 터져서 멍이 시퍼렇게 들었다.
하, 이게 뭐야. 어이가 없어 나오는데 류정인이 운동복을 입은 채로 집으로 막 들어온다. 다녀왔습니다. 활기차게 인사를 하던 그는 하준을 보더니 흠칫 놀라며 뒤로 슬그머니 물러섰다. 어색한 분위기에 서 집사가 나서려 하기에 하준이 먼저 류정인을 불렀다.
“따라와. 얘기 좀 하자.”
류정인을 데리고 침실로 향하는데, 서 집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문을 닫은 뒤 하준은 류정인을 벽에 세우고 이를 까득 물었다. 설명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정인은 침을 꿀꺽 삼키고서 애써 미소를 지었다.
“기억 안 나?”
“안 나니까 묻고 있잖아.”
“너 혼자 술 취해서 넘어졌어.”
하준은 입을 꾹 다문 채 류정인을 노려봤다.
“그리고 또.”
“그게 다야. 별일 없었어.”
하준이 말없이 쏘아보자 정인은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니까 술 적당히 마셔. 너 그 정도로 기억 못 하면 알코올성 치매야.”
한마디 하더니 슬그머니 빠져나가 욕실로 들어간다. 하준은 류정인이 사라진 욕실을 노려봤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 류정인이.
자신이 아는 류정인이라면 어제 있었던 일을 먼저 따지며 쏘아붙였을 것이다. 하준은 침실 한쪽에 있는 서랍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서랍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다. 어젯밤 분명 이곳에서 소리가 났고, 그것 때문에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리고 키스를….
[미안. 너한테 거짓말했어.]
그건 꿈이었을까. 아니면 현실이었을까. 욕실로 들어간 류정인은 조용하다. 문 앞에 서서 기다리는데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문득 류정인이 지금 저 안에서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
***
“수업 많이 힘드시죠?”
요리 수업이 끝나고 정인은 서 집사가 준 한약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마치 사약 같다. 마시기 싫어 버티다가 입으로 가져갔는데, 생각보다 더 쓰다. 숨을 참고 먹으니 서 집사가 얼른 사탕 하나를 까서 입에다 넣어 준다. 입에 들어간 딸기 맛 사탕을 혀로 굴리면서 오만상을 찌푸렸다.
“빼놓지 말고 드세요. 몸이 약한 것 같다고 큰 사모님이 걱정이 많으신가 봐요.”
김하준 말로는 임신이 잘 되게 해 주는 한약이라던데. 이런 거 백날 먹어 봤자 무슨 소용인가. 다들 진실을 알면 까무러치겠지. 어젯밤 일은 생각할수록 아찔하다. 김하준이 아무것도 기억 못 해서 다행이지. 근데 그 정도면 진짜 알코올 중독 아닌가.
“서 집사님은 김하준 언제부터 아셨어요?”
서 집사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한다.
“오래됐죠. 대표님 아기 때부터 알았으니까.”
그럼 족히 30년은 된 거네.
“어릴 때는 어땠어요?”
“드디어 대표님에게 관심이 생기신 거군요.”
서 집사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밝아진다. 그녀는 아무래도 이 결혼이 계약이라는 걸 모르나 보다. 괜히 죄를 짓는 기분에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그녀가 하준이 어릴 적 얼마나 총명하고 심성이 고왔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한다. 자신이 알던 10대의 김하준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근데 왜 저렇게 애가. 아니, 사람이 삐뚤어졌죠?”
“어머, 그런가요? 제 눈엔 아직도 같은 사람인데요.”
역시 서 집사는 눈에 뭔가 씌었다. 김하준을 볼 때마다 기특하고 흐뭇하게 쳐다보는 이유가 다 있었구나. 더 말해 봤자 별 소득이 없을 것 같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방으로 들어간 정인은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 숨겨 둔 페로몬 감지기를 꺼내서 확인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다 좋은데 진동 소리가 너무 요란하다. 그래서 바지 주머니에 넣고 울릴 때는 기분까지 묘해졌다.
그래도 김하준이 눈치채지 못해서 다행이다. 정인은 그것을 제자리에 넣어 둔 뒤 침대에 누웠다. 어젯밤 김하준 모습이 떠오른다. 손으로 그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를 문질렀다.
기분이 간질거린다. 풋내 가득하던 김하준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몸을 더듬던 손길이 떠오르자 몸에 열이 훅 오른다. 입술을 만지던 손이 이젠 목을 더듬었다.
정인아. 류정인.
귓가에 음습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느끼고 정인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미쳤다….”
마침 휴대전화로 메시지가 도착한다. 확인하던 정인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안녕하세요, 남부경찰서 이한 형삽니다. 전에 한 번 뵀었죠? 여쭤볼 게 있는데 시간 괜찮으신가요? 연락 바랍니다.]
***
이한을 만난 건 집 근처에 있던 커피숍이었다. 정인은 멀리서 이한이 오는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번째 만남이지만 그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정인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갑자기 연락드려서 놀라셨을 텐데,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두 사람은 자리에 마주 보고 앉았다. 차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이한은 수첩에서 몇 장의 사진을 꺼내 보여 줬다. 총 2명이었는데, 하나는 젊고, 하나는 나이가 꽤 지긋했다. 정인은 둘의 얼굴을 번갈아 살펴봤다.
“혹시 이 중에 그 사진 속 남자가 있나요?”
둘 다 전혀 모르는 얼굴이다. 정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자세히 봐 주시겠어요?”
이한이 한 번 더 정중하게 부탁한다. 하지만 그들 중에 정인이 봤던 사람은 분명 없었다.
“없어요.”
이한의 얼굴에 아쉬움이 묻어난다. 근데 왜 이런 걸 묻는 걸까. 이해수는 자살이라며.
“혹시, 이해수 씨가… 타살인가요?”
사진을 추스르던 형사가 고개를 들어 정인을 본다. 그는 꽤 강직하고 단단해 보이는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첫 만남에선 나이가 꽤 많다고 느꼈는데 지금 보니 아닌 것도 같고.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정인은 망설인 끝에 입을 열었다.
“실은… 그때 저희 가게 오셨잖아요.”
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한테 작업한 사진이 한 장 있었어요.”
이한의 눈이 커진다. 정인은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죄송해요. 무턱대고 보여 드릴 수 없었던 게, 이해수 씨하고 약속한 것도 있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요?”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그 사진 지금 확인 가능합니까?”
“아니요.”
“어째서요…?”
“형사님 오시고 다음 날 불이 나서 모두 타 버렸어요.”
이한이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고 정인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방화래요. 범인은 잡혔고, 경찰에서는 앙심을 품었다고 하더라고요.”
이한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정인은 조금 미안했다. 그때 솔직하게 말할걸. 그리고 이제 와 생각하니 이한이 다녀가고 바로 다음 날 기다렸다는 듯 불이 난 것도 찜찜하다.
고민하던 정인은 휴대전화 옆에 있던 펜을 꺼낸 뒤 화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한이 그 모습을 유심히 쳐다본다. 최대한 기억나는 대로 사진 속 남자의 이목구비를 그려 넣었다.
얼굴이 갸름했고, 다소 차가워 보였으며 머리와 눈동자는 바둑알처럼 새카맸다. 그리고 그것을 이한에게 건넸다.
“대충 그려 봤는데….”
이한이 그 그림을 뚫어지게 보더니 한 장 보내 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정인은 이한의 휴대전화로 그림을 전송했다.
“집에 가서 생각나는 대로 더 자세히 그려 볼게요.”
“감사합니다. 근데, 그림을 참 잘 그리시네요.”
생각지도 못한 칭찬에 정인은 괜히 민망해 목을 긁적였다. 그러던 와중 이한에게 전화가 걸려 온다. 누군지는 모르나,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휴대전화 밖으로 새어 나올 정도였다. 다른 건 몰라도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들어오라는 말은 정확히 들렸다.
통화를 마친 이한은 한숨을 내쉬며 멋쩍게 웃었다.
“팀장님이요. 성격이 아주 불같으세요.”
“아….”
“혹시 다음에 또 도움 요청해도 될까요?”
“네, 괜찮아요. 연락 주세요.”
둘은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선 뒤 바로 헤어졌다. 정인은 지하 주차장으로 혼자 내려갔는데 오래된 건물이라 그런지 천장의 불이 어두웠다.
차를 세워 둔 곳으로 가는데 점멸하던 형광등 하나가 갑자기 팍, 나간다. 저벅, 저벅, 걸음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는데, 걷다 보니 걸음 소리가 나뉘어 들린다.
정인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다.
앞을 보자 건너편 어두운 곳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그쪽을 응시하다가 차로 가서 문을 연 뒤 시동을 걸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얼핏 룸미러로 누군가의 모습이 비친다. 급하게 차를 세우고 돌아봤으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
하준은 휴대전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대표님 할 말이 있어요.]
이해수가 죽기 일주일 전쯤 받은 메시지였다. 그날 따로 연락은 하지 않았었다. 이해수는 술에 취해 가끔 전화로 헛소리를 할 때가 많았는데, 그날도 그런 이유라고만 생각했다. 이미 계약은 해지했고, 더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 줄 이유가 없었으므로.
이제 와 생각하니 조금 후회가 된다. 이해수는 내게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만약 연락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하준은 메시지를 지울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대로 뒀다.
“김 대표!”
마침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배우 하나가 들어온다. 뒤따라온 그녀의 매니저와 두영이 말리려 하였으나 한발 늦었다. 그녀는 원로 배우인 김연정이었는데,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김 대표. 나 윤 감독하고 일 못 하겠어!”
하준은 그녀의 손에 들린 가발을 쳐다보며 자리에 앉으라고 정중히 손짓했다.
“이번엔 또 뭐가 문젠데요?”
자리에 앉은 김연정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금연이에요. 하고 말해도 듣지 않고 뻑뻑 연기를 뿜어 댄다. 하준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어젯밤 마신 술로 아직 숙취가 덜 깼는데도 다시 두통이 몰려오는 기분이다.
“내가 할머니야? 왜 이런 가발까지 써야 하냐고. 이건 처음하고 얘기가 다르잖아!”
김연정은 분한 얼굴로 가발을 허공에 대고 흔들었다. 얼핏 봐도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데다 빠글거린다. 아니나 달라 때마침 감독에게도 연락이 온다. 오늘 아주 날을 잡았구나, 통화하는데 감독의 화난 목소리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그녀가 연기를 잘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까다로운 성미를 맞추는 게 너무 힘들다고, 자기가 제 명에 못 살겠다고 하소연이다. 양쪽에서 까마귀처럼 지절대니 머리가 터질 것 같다.
하준이 감독과의 통화를 마치자 잔뜩 뿔이 난 김연정이 눈을 뾰족하게 뜨고 물었다.
“윤 감독이야? 그이도 나하고 더는 일하기 싫대지?”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잘 달래 드리라고, 그래서 전화한 거예요.”
“거짓말하지 마. 내가 그런 말에 속을 줄 알아?”
하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연정 곁으로 가서 앉았다. 직원에게 차를 한 잔 내 달라고 부탁한 뒤 김연정을 구슬렸다.
“자, 선생님. 들어 보세요. 윤 감독이 처음에 먼저 선생님 캐스팅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일부러 엿을 먹이려고 하겠어요. 아시잖아요? 작년에 박혜영 선생님이 칸에서 상 받은 게 누구 때문이에요?”
김연정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라이벌이나 마찬가지인 박혜영이 상을 받았을 때 누구보다 질투로 활활 불타올랐었다. 김하준은 직원이 가져온 차를 김연정의 앞에 놓아 주며 그녀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윤 감독 유능한 사람이에요. 무조건 믿고 가셔야 해요. 선생님이 저런 가발 백 개를 쓰신다고 해도, 남들은 선생님 머리 신경 안 써요. 연기를 보는 거지.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그 역할 박혜영 선생님도 무척 탐냈던 거 모르셨죠?”
“기분 나쁘게 박혜영 얘기는 왜 자꾸 꺼내?”
“하긴, 선생님 상대가 안 되죠. 비교하긴 레벨이 너무 다르다. 그죠?”
그녀가 눈을 뾰족하게 떴다. 하여튼 능구렁이 같아서는.
하준은 얼른 두영에게 눈짓했다. 두영이 껴들어 가발이 그렇게 하얗지 않다고, 흰색보다 은발 같다며, 요즘은 일부러 흰머리를 기르기도 한다고 거들었다. 김연정의 얼굴은 여전히 똥 씹은 표정이었으나, 기세는 한풀 꺾였다. 뒤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그녀의 매니저 얼굴에 이제야 핏기가 돈다. 그녀는 피우던 담배를 비벼 껐다.
“아무튼 갑자기 쳐들어와서 미안해. 나도 울컥하는 바람에. 김 대표도 내 성질 알잖아.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데, 나이 들수록 그게 더 안 돼.”
“괜찮아요. 화나시면 풀어야죠. 대신 촬영할 때는 제발, 부탁드립니다.”
“알았어. 김 대표도 요즘 심란할 텐데, 내가 괜히 더 신경 쓰이게 했나 보다.”
“아니에요.”
말이 길어질 것 같아 매니저에게 얼른 촬영장으로 데려가라고 신호를 보내는데 그녀가 두 번째 담배를 꺼낸다.
“근데 이해수 걔는 왜 그랬대?”
뜬금없는 이해수 이야기에 하준은 찻잔만 바라봤다. 김연정은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걔도 불쌍해. 식구들이라고 다 걔한테 돈만 달라고 하지, 의지할 곳이 없었을 거야.”
하준도 아는 이야기였다. 그의 가족들이 얼마나 돈, 돈 거리면서 사람을 쥐어짰는지를.
“거기다 애까지 가졌으니,”
그녀가 황급히 말을 멈춘다. 찻잔을 보던 하준의 시선이 김연정에게로 옮겨 갔다. 방금 뭐라고. 그녀가 담배를 급하게 비벼 끄더니 일어섰고 매니저를 부른다. 준석아 얼른 촬영하러 가야지. 김 대표 나 갈게. 나중에 봐.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 미처 꺼지지 않은 담배 연기만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준이 조금 전 들은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 두영을 쳐다봤다. 두영도 뭔가 아는 눈치다.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하는데 두영이 버티고 있다. 하준이 이를 악물고 오라고 했더니 그제서야 와서 맞은편에 앉는다.
“무슨 소리야?”
“그냥… 소문이에요.”
“그 소문을 왜 나만 몰라?”
두영이 곤란한 듯 입술만 잘근잘근 씹다가 뒤통수를 벅벅 긁는다. 아이참, 그냥 소문인데. 하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냐고 물었어. 재촉하자 망설이던 두영이 솔직하게 털어놨다.
“이해수가 임신해서 자살했다고 소문났어요.”
뭐? 어이가 없어 쳐다보는데 두영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더니 예상치도 못한 말을 내뱉는다.
“근데 그 애가 대표님 애라고….”
하준이 입을 벌리고 기막혀하자 두영이 서둘러 말을 덧보탰다.
“소문이에요, 소문. 어떤 인간들이 그런 소문을 내고 다니는 건지. 믿지 마세요. 어차피 이 바닥에서 그런 소문이 한둘인가요.”
하준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씨발. 이마를 감싸 쥐고 소파에 기대는데 두영이 냉수를 가져다주느냐고 묻는다. 됐다고 그만 나가라고 손짓을 한 뒤 혼자 남은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동안 별별 소문을 다 달고 다녔는데 이젠 뭐.
이해수가 애를 가졌고, 그게 내 애? 너무 황당하니 헛웃음밖에 나오질 않는다.
***
정인은 종이 위에 남자의 얼굴을 그렸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눈썹과 눈, 콧대와 콧방울, 입술, 귀의 모양을 여러 번 고치고 수정했다. 점점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근데 왜 형사는 이 남자를 그토록 찾는 걸까. 타살이라면 혹시 이 사람이 이해수를…?
허공에 들고 그림을 보며 남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데 김하준이 들어온다. 정인은 황급히 노트의 앞장을 덮고 뒤로 감췄다.
“왔어?”
인사를 하고 침실로 피하려는데, 2층으로 올라가려던 김하준이 앞을 가로막고 선다.
“왜, 또.”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뭘 숨겨?”
“네 입으로 어제 그랬지. 동업이라고 생각하라고. 그럼 서로 숨기는 건 없어야지.”
“없는데.”
“진짜 없어? 네 가족 다 걸고?”
가족은 왜 건드리는 건데. 심장이 쿵쿵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김하준이 뭘 알아냈나. 대체 뭘….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진짜 없다고 얼버무린 후 도망치듯 침실로 가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아, 이 짓도 못 할 노릇이다.
혹시 몰라 매트 아래에서 페로몬 탐지기를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앉아서 노트를 다시 펼치던 정인은 문득 김하준이라면 사진 속 남자를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어볼까 말까, 고민 끝에 노트를 챙겨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열었다.
아 씨발 깜짝이야! 문을 열던 정인은 기겁하고 뒤로 나자빠졌다. 위층으로 올라간 줄 알았던 김하준이 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그는 정인이 흘린 노트를 주워 들었다.
“뭐야, 이건.”
“너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어? 변태야? 왜 남의 방 앞에서 기웃대?”
“네 방이기 전에 내 집이야.”
김하준이 노트를 넘기더니 묘한 표정을 짓는다. 정인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노트를 보던 김하준의 눈이 정인에게로 옮겨 온다.
“누구? 숨겨 둔 애인?”
정인이 노트를 홱 낚아챘다.
“아니야.”
“그럼?”
“일단 나가서 얘기해. 거실에서.”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준이 방 안으로 한 발 성큼 들어온다. 침실에서 하면 안 되는 얘기야? 어젯밤 기억이 떠올라 정인은 하준의 어깨를 떠밀며 밖으로 쫓아냈다. 겨우 거실로 나온 뒤에야 정인은 노트를 펼쳐 하준에게 건넸다.
“혹시 이 사람 알아?”
하준이 고개를 젓는다. 몰라.
“잘 봐 봐.”
“몰라. 누군데.”
정인은 곰곰이 생각했다. 이 모든 사실을 김하준에게 털어놓을지 말지. 그래도 말하는 게 낫겠지. 내가 오메가가 아니란 사실은 솔직하게 말하지 못해도, 다른 건 숨기고 싶지 않았다.
“이해수 씨 아는 사람.”
굳어진 하준의 얼굴을 보며 정인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해수가 자신의 허벅지에 누군가의 얼굴을 새긴 것부터, 형사가 찾아온 것, 그리고 다음 날 가게에 불이 나서 모두 타 버린 것까지.
듣고 있던 김하준의 눈빛이 달라진다. 그는 그림을 재차 확인했다. 본 적은 없는데 낯은 왜 익을까.
“몰라?”
“응.”
“자세히 봐 봐.”
하준이 고개를 젓는다.
“그럼 네가 한번 알아봐 주면 안 될까? 너는 이해수에 대해서 나보다 잘 알잖아.”
하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해수에 대해서 내가 잘 알고 있는 게 맞을까. 그랬다면 죽기 전 한 번은 더 말을 들어 줬겠지. 정인이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한다. 까만 눈동자에 하준의 모습이 맺힌다.
[미안…. 너한테 거짓말했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류정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리고 류정인은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어쩌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시절,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헤어졌는지도 모르겠다.
고민 끝에 하준은 손을 내밀었다.
“줘. 알아볼 테니까.”
정인의 표정이 비로소 밝아진다. 고마워.
***
하준은 몇 시간 전 누군가에게 건네받은 서류를 열었다. 거기엔 류정인에 대한 신상이 자세히 나와 있었다. 대부분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이다. 류정인. 29세. 오메가. 타투이스트.
한숨을 쉬며 그것을 옆자리에 던져 놨다. 사람을 시켜 류정인의 뒷조사를 했다. 무엇이 알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그냥, 어렴풋하게 류정인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멀리서 지켜보는데 자신의 아버지인 김 회장의 차가 본가를 떠난다. 하준은 김 회장이 사라짐과 동시에 차에서 내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쩐 일이야. 이 시간에?”
갑자기 나타난 아들을 보며 주혜련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하준은 일부러 집 안을 한 번 둘러봤다.
“아버지 집에 계세요?”
“방금 나가셨지. 왜? 아버지 뵈러 온 거야?”
“아니요. 2층 제 방에서 가져갈 물건이 있어서요. 필요한 거 없으니 올라오지 마세요.”
의아하게 바라보는 주혜련을 뒤로한 채 하준은 위층으로 가 자신이 쓰던 방 대신 김 회장의 서재로 이동했다. 김 회장의 책장에는 책뿐 아니라 그가 기업의 총수로서 받았던 상과 트로피, 그리고 전 현 대통령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진열되어 있었다.
하준은 책상 아래 서랍을 하나씩 열었다. 김 회장 역시 류정인에 대해 따로 조사한 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랍과 상자를 열어 샅샅이 뒤져도 류정인에 관한 건 보이지 않는다.
후, 한숨을 내쉬며 서재를 한 번 둘러봤다. 이곳 어딘가에 금고가 있을 텐데. 하준은 책장을 더듬다 끝으로 가서 힘주어 옆으로 밀었다. 혹시나 했는데 그곳에 금고가 나온다. 기쁨도 잠시 자세히 보니 지문인식 장치가 달려 있다.
전에 분명 번호였는데. 금고를 노려보다가 책장을 원위치시켜 놓은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거실 테이블에 다과상이 차려져 있다.
“찾았어?”
“아니요. 집에 뒀나 봐요.”
“차 마시고 가.”
그냥 가려다 하는 수 없이 앉았다. 주혜련이 갓 우려낸 차를 찻잔에 따라 준다. 류정인이 다도 수업이 받기 싫다며 하소연하던 게 떠올라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아니에요.”
“참, 오늘 저녁에 올 거니?”
“봐서요.”
“걔는 시골 내려간다며. 너희 아버지가 윤 비서 편에 선물을 바리바리 해서 보내셨더라.”
하준은 그제야 오늘이 금요일인 걸 떠올렸다. 류정인이 할머니 생신이라고 집에 간다고 했던 날. 류정인이 살던 집. 그곳에 가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찻잔을 집어 드는 하준의 눈이 반짝였다.
***
“오빠 차 좋다.”
민아는 정인이 끌고 온 승용차를 살펴보며 감탄했다. 전에 타고 다니던 낡은 차는 어디 가고 비싼 외제 차를 끌고 왔다. 트렁크를 열자마자 그녀의 입이 쩍 벌어진다. 이게 다 뭐야?
할머니 생신이라고 하니 김 회장이 아침부터 비서 편으로 무언가를 잔뜩 보냈다. 한사코 마다했으나 결국 김 회장한테까지 전화가 와서 어쩔 수 없이 다 싣고 와야 했다. 정인은 김 회장에게 무언가를 받을 때마다 마음의 짐이 쌓이는 기분이라 영 내키지 않았다.
선물을 들고 안으로 옮기는데 김은혜가 나온다. 정인은 오랜만에 만난 엄마와 반갑게 포옹을 했다.
“정인아, 어서 와.”
잘 지낸 거야? 얼굴은 왜 이렇게 야위었어? 밥은 잘 먹고? 힘든 건 없어? 걱정을 한가득 담은 질문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괜찮아요. 잘 지내고 있어요. 들고 온 선물을 보는 그녀의 표정은 마냥 밝지 않았다.
짐은 다 옮겨 놓고 나니 오랜만에 본 아이들이 하나둘 달려왔다. 아이들을 안아 주고 인사를 나눈 뒤 정인은 보육원 뒤쪽 창고로 갔다.
창문 틈으로 들여다보니 류동찬이 이불을 덮고 드러누워 있었다.
“팔자 좋네. 잠도 자고.”
류동찬이 벌떡 일어나더니 정인을 발견하고 창가로 냉큼 다가온다.
“너, 너, 언제 왔어? 이거 안 열어?”
그새 잘 먹고 잘 쉬었는지 류동찬의 얼굴이 오히려 뽀얗게 폈다. 아예 밥도 주지 말고 굶겨 버리라고 했어야 하는 건데. 이를 까득 물자 류동찬이 쇠창살에 얼굴을 가까이 디밀고서 정인을 살살 달랜다.
“정인아. 이러지 말고 말로 하자. 나 좀 풀어줘. 너 이거 감금이야? 이러다 내가 잘못되면 너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정인이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받아쳤다.
“잘됐네. 차라리 죽어.”
류동찬이 억울한 표정으로 따진다.
“너 인마! 자꾸 이럴 거야? 내가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나 네 삼촌이야.”
정인이 서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삼촌이니까, 이 정도에서 끝난 줄 알아. 아니었으면 진짜 내 손으로 죽여 버렸을 거야.”
류동찬이 충격받은 표정을 했고 정인은 쐐기를 박았다.
“돌아가신 아버지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어떻게 사람이 돼서 그런 짓을 해?”
류동찬이 고개를 떨군다.
“내가 나 혼자 잘 먹고 잘살자고 그랬겠니…. 나도 결과가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미안하다.”
“알았어.”
류동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그럼 나가게 해 주는 거야?”
정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알았다고 했지, 언제 풀어준다고 했어?”
하, 류동찬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데 때마침 뒤에서 류민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오빠!”
류민아가 저렇게 부를 때마다 또 무슨 일이 터졌나 싶어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돌아보자 그녀가 팔을 붙들고서 언덕 아래로 잡아끈다. 빨리 와. 빨리.
“왜 이래?”
“지금 큰일 났어. 그 사람 왔어.”
응? 이해하지 못하는데 류민아가 그 사람. 오빠 남편! 이라고 소리를 지른다. 정인은 눈이 있는 대로 커졌다. 김하준이 왜 여길…. 서둘러 내려와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민아의 말대로 김하준이 서 있고 엄마는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으며 할머니는 김하준 옆에 딱 달라붙어서 영감, 어디 갔다 이제 왔느냐고 하는 중이었다.
“어, 정인아.”
엄마가 부르자 김하준이 돌아본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그가 사르르 녹을 것처럼 웃었다.
“자기야, 왜 말도 없이 갔어? 어머님 뵈러 같이 오기로 했잖아.”
정인이 입을 쩍 벌리고 눈을 끔뻑였다. 저 인간이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자기야? 상냥한 말투와 눈웃음은 김하준이 아니다. 가까이 가서 팔을 붙들고 끌어내려고 하니 김하준이 버틴다.
“왜. 여기서 얘기해.”
정인이 이를 꽉 물고 억지로 웃으며 팔을 잡아당겼다.
“즘끈믄 느으바.”
겨우 밖으로 끌어내어 대문을 닫고 담벼락 아래로 끌고 갔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정인이 기가 찬 표정으로 따져 물었다.
“너 여긴 어떻게 왔어?”
김하준은 평소의 그 냉소적인 표정으로 돌아와 손가락으로 자신의 차를 가리켰다. 저거 타고.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네가 여길 왜 와!”
“오면 안 돼? 우리 결혼했잖아.”
미치겠네! 진짜. 너하고 나하고 진짜 부부인 줄 알아? 정인이 머리를 헝클었다. 창고에 삼촌을 가둬 둔 것도 골치인데 김하준까지 나타나다니. 그냥 가라고 등을 떠미니 김하준의 눈빛이 뾰족해진다.
“내가 여기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뭐?”
“수상하잖아. 그저 인사드리러 온 건데, 너는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펄쩍펄쩍 뛰니까.”
정인이 표정을 수습했다. 김하준이 왜 안 하던 행동을 하는 건지는 모르나, 며칠 전부터 묘하게 불길하다. 키스했던 그날을 기점으로 김하준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류정인! 정인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놀란 정인이 홱 돌아봤다. 그건 분명 삼촌의 목소리다. 아! 빌어먹을. 아까 갑자기 민아가 오는 바람에 창문을 닫지 않고 온 게 떠올랐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김하준의 고개가 돌아간다.
“무슨 소리야?”
“신경 꺼. 고라니야.”
“고라니가 류정인! 하고 부른다고?”
“네가 잘못 들은 거야.”
류정인! 정인아! 문 열어 줘! 정인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김하준은 한쪽 눈썹을 치켜들더니 소리가 난 곳으로 가려고 했고 정인은 황급히 그의 팔을 붙들고 잡아당겼다.
“어딜 가?”
“신기하잖아. 말하는 고라니가 있다니까, 가서 구경하게.”
안 된다고 가로막았으나 김하준 역시 물러서질 않는다. 둘은 한참을 실랑이를 벌였다. 김하준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길래 정인은 결국엔 사실을 털어놨다.
“사실은… 우리 삼촌이야.”
삼촌이란 말에 하준이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류정인 삼촌이라면 그 집문서 가지고 튀었다던… .근데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난리지.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담벼락 뒤쪽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그를 본 정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어어. 저 인간 어떻게 나왔어.
그 뒤를 민아가 쫓아서 뛴다. 오빠! 삼촌 도망가! 정인이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하준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논바닥에서 3인의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멀찍이 달아나는 남자를 류정인이 맹렬한 속도로 추격한다. 어릴 적 동물의 왕국에서 보던 장면과 흡사했다. 어린 영양을 쫓는 두 마리의 치타라고 할까? 역시 류정인은 운동신경 하나는 타고난 듯하다.
뛰는 것도 모자라 거의 날아가다시피 하더니 자기 삼촌의 등을 날아 차기로 자빠트렸다. 그러더니 여동생과 합심해서 찍어 누른다. 그걸 보며 하준은 기가 차 헛웃음을 흘렸다.
“하, 개판이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