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14)

 03

“대답해, 류정인.”

김하준이 얼굴을 더 가까이 디밀길래 정인은 그의 어깨를 밀쳐 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외투를 걸치고 의상실을 나와 아무거나 보이는 택시를 잡아탔다. 김하준의 향이 아직도 코끝에서 맴돈다. 향이 유독 진해진 건 그가 의도적으로 페로몬을 내뿜었기 때문이다.

정인은 알파의 페로몬에 반응하진 않지만, 향은 맡을 수 있었다. 그것 때문에 병원에서는 몇 번이나 더 검사까지 했었다. 심장이 쿵쿵, 요란하게 박동한다. 뒤늦게야 정인은 자신이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

빌어먹을.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서는 숨을 몰아쉬는데 택시 기사가 괜찮으냐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네, 괜찮아요.”

택시가 큰 도로로 진입해 들어가는데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울렸다. 꺼내어 확인하니 김하준이다. 받을까 말까. 긴장으로 입술을 짓씹다가 전화를 받았다.

[그깟 장난 쳤다고 도망을 가?]

눈치채지 못한 걸까.

“미안. 갑자기 두통이 심해졌어. 옷은 네 마음에 드는 거로 해. 어차피 넌 내가 뭘 고르든 싫어할 거잖아.”

대답이 없다. 끊어졌나 봤더니 아직 연결 중이다. 짧은 한숨 소리와 함께 그러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뚝, 전화가 끊겼고 정인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보통 김하준 같은 우성 알파들은 아무 데서나 페로몬을 내뿜지 않는다. 그래서 더더욱 안일하게 생각했나 보다. 지친 얼굴로 멍하니 창밖만 내다보는데,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게 하나 있다. 

다혜가 말해 준 정보였는데, 알파나 오메가의 페로몬을 감지할 수 있는 감지기가 있다고. 가끔 베타 중에 알파와 오메가를 속이고 만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이용하기도 한다면서. 

다혜의 사촌 오빠가 그것과 관련된 일을 한다고 했었다. 암암리에 거래 중이라 시중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지만, 본인에게 부탁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가는 내내 고민하던 정인은 다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일찍 오셨네요. 예복 맞추러 가신 거 아니에요?”

하준을 보며 두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복을 맞추러 가서 늦는다더니 점심이 지나자 바로 출근을 했다. 게다가 표정이 썩 좋지를 않다. 하긴, 결혼 발표가 나고 나서 김하준의 표정이 좋았던 적이 있던가. 

“사모님은요?”

사모님이란 호칭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김하준의 눈빛이 뾰족해진다. 두영은 찔끔해서 전달할 내용만 책상에 올려놓은 뒤 간략하게 설명을 하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혼자 남은 하준은 정면을 노려보며 류정인이 도망친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디자이너의 말대로 류정인은 옷을 찰떡처럼 잘 소화했다. 문제는 직원이 옷매무새를 정돈해 준다며 류정인의 어깨와 셔츠 깃을 만져 줄 때마다 묘하게 기분이 뒤틀렸다. 아니, 실은 류정인 가게 앞에서 그가 어떤 알파하고 붙어 있는 걸 본 순간부터 그랬다.

복수는 사실 핑계고 아직도 난 류정인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자 기분은 점점 더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래서 사람들을 내보내고 탈의실에 들어갔다.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무언가를 확인하려고 했던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페로몬 하나에 그 정도로 질색하며 뛰쳐나갈 줄은 몰랐다. 

자존심이 상해 이를 꽉 물고서 분노를 삭이는데 전화가 울린다. 친구인 김민재다.

[결혼 전에 실컷 즐겨야지. 내일 밤 어때?]

됐다고, 너희나 실컷 놀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으려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하준의 입가에 미소가 점점 번졌고, 곧바로 김민재에게 약속 장소를 확인했다. 

***

다혜가 동전 크기만 한 검은색 물건을 건네줬다. 그것은 페로몬 감지기로 몸에 착용한 뒤 알파나 오메가의 페로몬을 감지하면 진동으로 알려 준단다. 무척 비싸게 주고 구하긴 했는데, 아쉽게도 실험할 사람이 없었다. 

“근데 페로몬에 노출되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지?”

정인의 질문에 다혜가 곰곰이 생각했다. 보통 알파의 페로몬에 노출되면 오메가는 팔다리에 힘이 풀리고 전류가 흐르는 기분이라고 한다. 히트 사이클 때는 거기에 엄청난 쾌감이 증폭된다고 들었다. 하지만 설명일 뿐 그것은 베타로서의 정인이 느끼기에는 전혀 낯선 것들이었다.

“눈을 까뒤집고 몸을 조금 떨어 주면 어떨까?”

다혜의 말에 정인이 미간을 찡그렸다.

“빙의된 것처럼?”

“아니, 내 말은,”

다혜가 시험을 보인다. 시커멓게 눈 화장을 했는데 하얗게 눈알을 까뒤집으니 무섭다. 역시나 빙의된 것 같다. 정인은 더 알려는 것을 포기했다. 앞으로 김하준이 제게 페로몬 내뿜을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이게 필요한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아니, 부디 많지 않길 바란다. 

“근데 너 괜찮겠어?”

“뭘.”

“그러다 정말 좋아하게 되면 어떻게 해?”

다혜의 물음에 정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혜는 둘이 단순히 동창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럴 일은 없어.”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왔다. 단지, 이번에도 또 속여야 한다는 게 미안하고 죄스러울 뿐. 그의 말대로 돈만 보자. 우리 가족을 살릴 돈이고, 아이들을 지킬 돈. 그것만 생각하자.

심란함을 애써 감추는데 전화가 울린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정인 씨. 나 이해수예요. 기억하려나 모르겠네.]

기억 속에서 남자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는 배우였고 몇 년 전 정인에게서 타투를 받은 적이 있었다. 노출이 안 되는 부위였는데, 그곳에 죽은 여동생의 이름과 부모님의 이름을 새겼다. 

[잘 지냈어요? 내가 너무 오랜만에 연락했죠?]

남자의 목소리는 졸린 것 같기도 했고, 술에 취한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앞에 앉은 다혜가 무슨 일이냐고 입 모양으로 묻는다. 고개를 젓고서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나야, 뭐. 그냥 지내고 있죠. 참, 정인 씨 부탁 하나 해도 돼요?]

“부탁이요?”

[나 타투 하나만 해 줄 수 있나 해서.]

정인이 곤란한 표정으로 미간을 짚었다. 김 회장과 결혼 생활이 끝날 때까지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어쩌죠. 제가 지금은 사정이 생겨서 안 될 것 같아요.”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부탁할게요. 다른 사람한테 받기 싫어서 그래요. 정인 씨도 알잖아. 나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거. 그리고 이번에 내가 원하는 게, 굉장히 비밀스러운 그림이라… 누가 아는 것도 싫고.]

“비밀…이요?”

[하하, 비밀이라고 말하니까 되게 거창하게 들리네. 아무튼 부탁해요. 내가 유명인이다 보니 믿고 맡길 사람이 없어요. 근데 정인 씨는 왠지 믿음이 간달까. 입도 무거울 것 같고.]

정인이 대답하지 않자 이해수가 한 번 더 간절하게 부탁한다. 정인은 눈으로 날짜를 확인한 뒤 고심 끝에 승낙했다. 통화를 마치자 다혜가 궁금한 표정으로 묻는다.

“누구?”

“이해수.”

“우엑, 그 밥맛?”

다혜가 인상을 잔뜩 찡그린다. 그녀의 반응도 이해는 됐다. 이해수가 처음 이곳에 온 날 얼마나 잘난 척을 했는지 다혜도 직접 봤으니까. 하지만 정인의 눈엔 그것이 거만함이 아닌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당시 이해수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장이 되어 엄마와 형제들을 먹여 살린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면서 나중에 자신의 엄마에게 서울에서 가장 비싼 건물을 사 줄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동질감을 느꼈던 걸까. 이후 그가 유명해져 매체에 나오기 시작한 뒤부터는 마음속으로 응원했던 것 같다.

다혜와 지난 이야기를 하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돌아보던 정인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김하준이다. 누가 볼세라 다혜에게 받은 페로몬 감지기를 얼른 뒷주머니에 넣었다.

“여, 여긴 웬일이야?”

하준은 출입구 쪽에 있는 인형의 머리를 툭 쳤다. 인형의 머리가 앞뒤로 까닥이며 움직였다.

“어제 그렇게 도망가 놓고, 소식이 없길래 직접 와 봤어.”

“두통 때문이라고 했잖아. 시비 걸 생각이면 가.”

하준은 정인의 복장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었다.

“퇴근이지?”

“왜.”

“내 친구들이 너 보고 싶대. 인사하러 가자.”

정인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하준을 쳐다봤다. 

“거길 내가 왜 가.”

“가야지. 너 돈 받고 일하는 거잖아.”

“…….”

“가서 내 체면은 세워 줘야 하지 않겠어? 어제처럼 엿 먹이지 말고.”

그러면서 상냥하게 웃는다.

“나와. 기다릴게.”

그는 다혜에게 까닥 인사를 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정인이 하, 한숨을 내쉬고 나서 책상을 짚고 고개를 떨구었다. 다혜가 와서 슬쩍 등 뒤에서 속삭인다. 말하는 것 은근히 재수 없다. 예전에도 저랬어?

아니. 믿기지 않겠지만, 어릴 적엔 천사였어.

마지못해 밖으로 나오니 차를 가게 앞에다 대고 기다리는 중이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이었다. 차에 타서 안전띠를 매자 곧바로 출발한다. 비싼 차라 그런지 승차감 하나는 끝내줬다. 

“가서 인사만 하면 돼?”

“인사도 하고, 놀기도 하고.”

“뭐 하고 노는데?”

“가 보면 알아.”

김하준이 피식 웃었고 정인은 순간 뒷덜미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김하준의 친구라…. 어릴 적 김하준을 생각하면 친구들 또한 모범생일 거 같은데, 지금 김하준을 보면 전혀 예상되질 않는다.

신호에서 차를 잠시 정차했다가 출발하는데 오토바이 한 대가 앞으로 갑자기 치고 나간다. 아, 씨발. 김하준이 욕을 하며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고 본능적으로 팔을 옆으로 뻗었다.

“…….”

정인이 가슴에 닿은 김하준의 손을 내려 봤다. 뒤늦게 김하준이 상황을 파악하고 팔을 거둬 간다. 그리고는 곧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차를 출발한다. 조금 전 상황으로 차 안 공기가 어색해졌다.

가는 내내 둘 다 말이 없었다. 30여 분을 달려 어느 건물 지하로 들어갔는데, 이미 주차된 자동차 대부분이 수억 대를 호가하는 것들이다. 차를 한쪽에 세워 둔 뒤 두 사람은 내려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쿵쿵, 음악 소리가 바깥까지 흘러나오고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그 앞을 검은 정장을 입은 직원 둘이 지키고 있다. 그들은 김하준을 한눈에 알아보고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며 문을 열어 줬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혼을 쏙 빼놓는 음악과 함께 조명이 쏟아져 나온다. 등장과 함께 안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다. 그들은 하준이 데리고 온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하준이 보란 듯 정인의 어깨를 감싸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웃어.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으면 내가 납치한 것 같잖아.”

21세기 신데렐라. 남들은 정인을 가리켜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누군가의 말대로 신데렐라는 원래 귀족이었고, 둘은 어쨌든 사랑하지 않았나. 이건 그저 돈 때문에 맺어진 계약이다.

“샴페인 마실래요?”

낯선 이가 정인에게 샴페인을 건넸다. 정작 데리고 온 김하준은 딴 곳에서 친구하고 심각하게 대화 중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정인을 둘러싸고 관심을 보였다. 언제 만났냐. 김하준이 봉사 활동 하다 알게 됐다는데 사실이냐. 집이 정말 보육원 하냐. 나중에 타투 해 줄 수 있냐, 별 시답지 않은 질문들이 다 쏟아진다. 

“돈 때문에 억지로 결혼하는 거라는 소문이 있던데, 아니죠?”

긴 머리에 이목구비가 예쁜 여자가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정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맞는 말인데 어쩌죠. 속으로는 몇 번이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안타까운 얼굴을 한다.

“나는 돈 안 줘도 되니까 김하준이 결혼하자고 하면 좋겠다.”

“야, 결혼할 상대 앉혀 놓고 너무한 거 아니야?”

자기들끼리 킥킥대고 웃는다. 정인은 못 들은 척 샴페인을 마셨다.

“너 우리 사촌 알지? 걔가 없는 집 애 만나서 결혼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재산을 야금야금 다 빼돌렸더래. 그래서 이혼 소송 거니까, 애들은 필요 없고 돈만 달라고 하더란다.”

“세상에. 애들 불쌍해.”

“그래서 사람은 수준 맞게 만나야 한다니까. 한쪽이 너무 기울면, 사는 내내 피곤해. 아, 미안해요. 정인 씨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에요.”

“맞아요, 그래도 정인 씨 아버지는 유명한 분이시라면서요. 희생과 봉사의 어쩌고 하던데. 뭐였지?”

정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샴페인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누군가 옆으로 지나가며 정인의 팔을 쳤고, 샴페인이 옷으로 쏟아졌다. 미안해요. 돌아보는 남자를 향해 정인이 괜찮다며 대답한 후 옷에 묻은 샴페인을 닦아 내려고 일어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또다시 정인에게 모여든다. 귓속말을 주고받는 그들 사이에서 마치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며 1층에 있는 화장실을 찾아갔는데 문이 잠겼다. 

노크를 하고 기다려도 나오질 않아 결국엔 2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서 불쾌한 소리가 들린다. 얼른 손과 옷만 닦고 나가려는데 문이 열리고 한 쌍의 커플이 옷을 추스르며 나온다. 

돈도 많은 것들이 호텔이나 가지. 정인은 못 본 척 세면대에서 셔츠의 소매 부분을 헹궜다. 비싼 건데 이렇게 빨아도 되나. 꼼꼼하게 헹구고 있는데 누군가 안으로 들어온다. 

핸드 타월을 뜯어 젖은 셔츠를 닦는데 방금 들어온 사람이 문 앞에 기대서서 담배를 물고 정인을 빤히 쳐다보며 웃는다. 술에 취한 건지 눈에 초점마저 흐릿하다.

순간 드드드, 뒷주머니에 넣어 둔 페로몬 감지기가 진동했다. 눈앞에 있는 놈이 작정하고 페로몬을 뿜어 대고 있단 소리다. 개새끼야,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는 안 먹혀. 

지나갈게요. 옆으로 피해 가려는데 남자가 길을 막는다. 키는 정인과 비슷했으나 운동으로 키운 건지 근육이 엄청났다. 정인이 피하려고 하자 이번에도 앞을 막는다. 정인이 고개를 들자 남자가 담배를 문 채 웃었다.

“아아, 씨발. 너 존나 좋은 냄새 난다.”

정인이 불쾌한 얼굴로 대꾸했다.

“죄송한데 좀 비켜 주실래요?”

남자가 한 발 더 다가온다.

“그러지 말고 나하고 놀래?”

“실례지만 같이 온 일행이 있어요.”

“괜찮아. 원래 여기에서는 네 것 내 것이 없거든.”

남자가 한 발 더 다가오며 끈적한 시선으로 정인을 내려다본다. 그러지 말고, 한번 즐기는 건 어때? 빼지 말고, 응? 물러서던 정인의 등 뒤로 벽이 닿았다. 정인이 한숨을 내쉬며 남자를 바라봤다.

“좋은 말로 할 때 비켜요.”

하준은 자신의 친구들이 류정인에게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하고 있었다. 대부분 예의는 밥 말아 먹은 것들이라. 아마 속 좀 긁어 놓겠지. 아니나 달라 민재와 대화를 하면서도 한 번씩 류정인의 반응을 살폈는데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그러고 나서 화장실로 가는 걸 봤는데 돌아올 생각을 않는다. 처음엔 그런 생각을 했다. 집에 간 걸까. 아니면 화장실에 숨어 울고 있는 걸까. 기왕이면 두 번째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래도록 안 보이니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누군가 이런 김하준을 본다면 미친놈이라고 욕할지도 모른다. 밉고 증오스러운데 아직 감정이 남아 있음을 이제는 정확히 알겠다. 어느 게 비중을 더 차지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빌어먹을. 욕을 하며 류정인을 찾으러 가던 하준은 2층 계단 위쪽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위로 올라가니 사람들 틈으로 덩치 큰 남자가 쓰러져 코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지인 중 하나가 다가와서는 조금 전 류정인이 덩치를 두드려 패더니 사라졌다고 알려 주었다.

공기가 차다. 외투가 없으니 춥기는 더럽게 춥다.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언덕을 따라 내려가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류정인.”

정인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걸었다. 발소리가 빨라지고 어깨를 누군가 잡아챘다. 돌아보니 김하준이 서 있다.

“어디 가?”

“보면 몰라? 집에 가잖아.”

“데려다줄게.”

정인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거기서 그 꼴을 당할 때는 보이지도 않더니.

“꼴값 떨지 말고 가서 네 친구 병원이나 데려가.”

팔을 뿌리치고 가려고 하자 하준이 다시 붙든다. 열이 받은 정인은 곧바로 왼쪽 주먹을 뻗었다. 김하준이 피하더니 잽싸게 붙잡는다. 양손을 모두 붙들리자 정인은 하준의 얼굴을 머리로 들이박으려 했고, 하준은 뒤로 물러나며 제지했다.

“그만하지. 이러다 사진 찍히면 너하고 나 둘 다 끝장이야.”

그 말에 정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찍히라, 그래, 씨발! 어차피 너도 나 엿 먹이려고 여기 데리고 온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열받아 씩씩거리는 정인을 보면서도 김하준은 얄밉게 웃었다.

“멋대로 지어내지 마.”

“지어내긴 누가! 네 친구들 모두 나를 돈 때문에 접근한 이상한 애 취급 하던데!”

악을 쓰며 잡힌 팔을 힘껏 뿌리치고 뒤로 물러섰다. 김하준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정인은 허탈했다. 나는 무엇을 바랐던 걸까. 많이 놀랐느냐고, 걱정이라도 해 주길 원했나. 

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갑자기 스스로 한심하고 바보 같아진다. 애초에 이곳에 따라온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결혼식 때까진 보지 말자. 어차피 둘 다 목적은 하나잖아.”

그래도 김하준이 다가오려고 했고 정인은 손으로 경고했다.

“오지 마. 개새끼야! 이번엔 진짜 팰 거야.”

이를 악물고 노려본 다음에 몸을 홱 돌려 골목길을 내려갔다. 김하준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언덕 아래에 다다를 때까지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택시를 타기 위해 돌아서다 김하준이 아직도 그곳에 있는 걸 봤다. 아니, 너무 멀어 김하준이 아닐 수도 있었으나, 왠지 김하준 같았다.

***

“어제 술 드셨어요?”

의자에 앉아 힘들어하는 김하준을 보며 두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한동안 술을 좀 자제하나 싶더니. 한참 떨어져 있는데도 술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 것 같다. 결혼을 바로 코앞에 두고 김하준은 술독에 빠진 사람 같았다. 게다가 어디서 싸웠는지 손등은 다 까져서는.

“약 가져올까요?”

“아니.”

“대체 또 누굴 때리신 거예요?”

“몰라도 돼.”

하준은 두영에게 꿀물이나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두영이 한숨을 쉬고 사라지자 하준은 의자를 젖히고 뒤로 기대서 눈을 감았다. 상처받은 얼굴로 악을 쓰던 류정인의 얼굴이 점점 또렷해진다. 바라던 건데도 실제로 이루어지니 속이 아리다.

덕분에 집으로 돌아가서 혼자 술을 마셨고, 그래도 잠이 오질 않아 수면제도 먹었다. 술과 약을 함께 먹지 말라는 의사의 충고를 요즘은 아주 가볍게 무시하는 중이었다. 

얼마 후면 류정인하고 한집에서 같이 살아야 한다. 과연 잘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보고 있으면 화가 나고 괴롭히고 싶고 짜증만 나는데…. 막상 괴롭히면 또…. 

아아, 씨발 모르겠다. 나도 내 마음이 왜 이러는지.

***

망치질하는 정인을 보며 민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인이 결혼 전까지 집에 머문다고 왔는데, 한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있었다. 집 안팎의 망가진 것들을 수리하고 아이들의 자전거에 바람도 넣고, 이젠 창고의 지붕까지 고치는 중이었다.

“남들은 결혼 전에 마사지도 받고 바쁘다던데, 오빠는 시간이 남아돌아?”

“응, 남아돌아.”

“아니면 팩이라도 할래? 내가 해 줄까?”

“그만 떠들고, 거기서 못 하나만 가져와.”

민아가 공구함에서 못을 하나 꺼내 사다리 위에 올라가 있는 정인에게 넘겼다. 탕, 탕, 탕, 망치가 몇 번 움직이더니 망가져서 덜렁거리던 지붕 한쪽이 순식간에 고쳐졌다. 정인은 더 고칠 곳이 없나 확인한 뒤 아래로 내려왔다. 

가는 곳마다 민아가 쫓아다니며 잔소리다. 

“근데 말이야. 그 사람은 왜 우리 집에 안 와?”

“누구?”

“오빠하고 결혼할 사람.”

“…….”

“이상하잖아. 오빠가 여기 와 있는데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싸운 건 아니지?”

“응….”

“남들은 부자 형부 생겨서 좋겠다고 하는데, 난 전혀 실감이 안 나. 보통 형부 생기면 선물도 사 주고, 용돈도 주고 그런다는데….”

정인이 눈을 흘기자 민아가 찔끔한다.

“내가 뭘 꼭 바라서 그러는 건 아니야.”

“잘 생각했어. 바라지마. 필요한 거 있으면 나나 엄마한테 얘기해.”

민아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실은 용돈이나 선물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남들 다 하는 상견례도 안 하고, 결혼식장에서 얼굴을 보는 게 말이 돼? 뭐 물론 그 사람은 우리가 궁금하진 않을 수도 있지만….” 

정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상견례를 하지 말자고 제안한 건 김 회장이었다. 어차피 4개월 뒤면 끝날 일이니 그러자고 동의했다. 본가에서 김하준의 엄마와 할머니를 떠올리면 차라리 상견례를 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다.

대신 김 회장은 며칠 전 직접 기사를 대동하고 내려와 어마어마한 액수의 후원금을 건넸다. 놀란 모친이 돌려주려고 했으나, 그는 자신의 성의를 마다하지 말라며 기어코 돈을 남겨 두고 갔다. 

돈을 보는 모친의 표정에서 기쁨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심란하고, 복잡하고, 정말 이게 맞는 걸까, 지금이라도 아들을 말려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공구함을 창고에 넣어 두고 돌아서던 정인은 마당 한쪽에 커다란 대추나무를 보고 멈췄다. 그것은 정인이 태어나던 날 아버지가 직접 심은 것이었는데, 그 아래 탯줄도 함께 묻었다고 한다.

천천히 나무 앞으로 가서 섰다. 이젠 제 키보다 훌쩍 커 버린 나무는 보고 있으면 아버지를 생각나게 했다. 만약 살아 계셨다면 뭐라고 했을까.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느냐고 야단치셨을까.

계절 탓인지 오늘따라 나무가 유독 더 추워 보인다. 정인은 나무의 기둥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애잔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이해해 주세요.

***

남들은 결혼식 전날이면 설레서 잠도 오지 않는다는데 정인은 다른 이유로 잠이 오질 않았다. 이젠 정말 무를 수 없게 됐다. 다행히 결혼식은 최대한 간략하게, 그리고 인원도 제한을 두기로 했다. 덕분에 거짓 쇼를 지켜보는 사람의 숫자가 줄었다.

정인은 아침 일찍 샵에 들러 메이크업과 머리를 한 뒤 결혼식이 있을 호텔로 이동했다. 호텔 근처에는 이미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눈을 피해 안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은 뒤에는 대기실에 앉아 손님을 맞았다. 

“오빠 괜찮아? 약 줄까?”

민아의 물음에 정인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전날부터 잠을 통 이루지 못했더니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앉는다. 거기다 한 번씩 명치를 쥐어짜는 통증이 생기더니 식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극심해지고 있었다.

“윽.”

또다시 시작되는 통증에 정인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보다 못한 민아가 어디선가 짜 먹는 위약을 구해 왔는데 그걸 먹어도 잠시뿐 통증은 쉽사리 가라앉질 않았다. 가뜩이나 흰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 귀신 같았다. 

힘겹게 앉아 있는데 친척들이 와서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네 아빠가 좋아하겠다는 둥, 배우자 될 사람 얼굴이 훤하게 잘생겼다는 둥, 자기 일처럼 기쁘다는 둥. 삼촌이 돈을 가지고 잠적했을 때는 나 몰라라 하며 찾아오지 말라던 사람들이었다.

결혼식의 시작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사람들이 식장 안으로 들어가며 주위가 한산해졌다. 정인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이동했다. 멀리서 바이올린 연주가 들려온다. 

문 뒤에서 직원이 한 번 더 정인의 옷과 머리를 확인한 뒤 뒤로 물러난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식장 안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인이 나타나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그리고 그 너머로 김하준이 이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조명이 오로지 둘을 향해 비춰 주니 기분이 이상하다. 김하준과는 클럽에서 헤어지고 따로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인을 향해 다정하게 웃으며 연기를 하는 게 우스웠다.

정인은 연습한 대로 카펫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온다. 가까이 갈수록 옅게 미소 짓고 있는 김하준의 표정이 또렷해진다.

그 얼굴을 보자 갑자기 위의 통증이 더 격렬해졌다. 이를 꽉 물고 애써 미소 짓다가 맨 앞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모친과 눈이 마주쳤다. 단아한 한복을 입은 그녀의 얼굴에 슬픔이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정인은 애써 눈을 피했고 김하준의 앞으로 가서 섰다. 김하준이 손을 내민다. 연습한 대로 그 위에 제 손을 얹었고 계단을 두 개 정도 올라가 주례 앞에 섰다. 바이올린 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사회자의 짧은 설명과 함께 주례를 맡은 국회의원의 주례사가 시작됐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김하준은 둘만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낮췄다.

“화장 누가 했어?”

“왜.”

“얼굴이 시체 같아.”

위가 꽉 조여 온다. 정인은 이를 꽉 물었다.

“닥쳐. 너는 제비 같거든.”

주례사를 읊던 국회의원과 눈이 마주치자 둘 다 입을 다물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김하준 군은 어릴 적부터 총명하였으며 항상 예의 바르고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청년으로 자라나…. 어쩌고저쩌고. 그럼 뭐 하나. 지금은 개새낀데.

곧이어 정인의 소개가 시작된다. 역시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반이었다. 훌륭한 부모 밑에서 자랐으며 얌전하고, 순수하며. 순수라는 말에 김하준이 비웃는다. 정인이 눈을 흘기자 김하준이 뭐 어쩌라고 하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큼큼, 주례가 두 사람에게 눈짓을 보냈다. 두 사람은 표정 관리를 한 채 정면만 바라봤다. 드디어 지루한 주례사가 끝나고 결혼 서약서를 낭독할 차례였다. 김하준이 먼저 서약서를 들고 낭독했다.

“나, 김하준은 류정인을 반려로 맞아 한평생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배우자로서의 본분을 다할 것을 여러분 앞에 서약합니다.”

[약속할게. 나는 너만 좋아할 거야. 너하고 결혼하면 정말 좋은 남편이 될게.]

왜 갑자기 옛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정인은 먹먹해지는 심정을 애써 감춘 채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 자신을 보고 있는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훔쳐 냈고, 정인은 심호흡하며 태연하려고 애썼다. 

그럴수록 위의 통증은 더더욱 심해진다. 이번엔 정인이 결혼 서약서를 낭독할 차례였다. 낭독을 하면서도 차마 김하준의 얼굴을 볼 수 없어 그의 넥타이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럼 이제, 서약을 맹세하는 두 사람의 키스가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정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분명 예식 순서에서 키스는 뺀다고 누누이 말했고,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김하준을 쳐다보자 묘하게 고소해하는 표정이다. 정인이 이를 까득 물었다. 이 새끼…!

김하준이 키스를 하려고 한 발 다가왔고 정인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표정 또한 수습을 못 하고 똥 씹은 표정을 하자 하객들이 웅성댄다. 김하준이 웃으며 협박했다.

“이리 와. 사이 나쁘다고 소문낼 작정이야?”

노려보던 정인이 마지못해 눈을 질끈 감았다. 목에 힘을 줘서 뻣뻣하게 경련이 올 것 같다. 김하준의 향이 훅 끼쳐 온다. 머리가 어지럽고 배 속은 쥐어짜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던 그때 갑자기 구토가 올라왔다. 

우욱,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눈을 뜨고 정면을 보니 어처구니없어하는 김하준 얼굴이 보인다. 수군대는 하객들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임신한 거 아니야? 세상에, 아기 가졌나 봐. 명치의 통증이 더 심해지며 하늘이 노랗게 변한다. 

정인이 배를 움켜잡았다. 아아. 천장이 한 바퀴 빙글 돌더니 몸이 넘어가고 시야가 거꾸로 뒤집힌다. 그 와중에 누군가 저를 받쳐 안았다. 류정인. 정인아. 착각인가. 김하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의식은 점점 멀어지고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희미해지다가 결국엔 정신을 잃었다.

***

힘겹게 눈을 뜨고 눈꺼풀을 깜빡였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말랐다. 분명 결혼식을 하고 있었는데. 꿈을 꿨나.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 흐릿한 인영이 나타났다. 누구?

눈에 힘을 주자 시야가 점차 또렷해진다. 김하준? 그는 뒤통수를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는데, 편한 옷차림이었다. 꿈인가 싶어 손을 꼬집으려고 들어 보니 링거가 꽂혀 있다.

“깨어났어?”

어느새 김하준이 눈을 뜨고 바라본다. 그는 일어나서 가까이 다가왔고, 정인의 상태를 살피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예, 깨어났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예, 연락드릴게요.

그가 전화를 끊자 정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쓰러졌어.”

그러고 보니 속이 좀 편해졌다. 예전에 오메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스트레스로 한 번 위경련이 와 졸도한 적이 있었는데, 설마 결혼식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얼마나 결혼하기 싫었으면 스트레스로 위경련이 왔을까, 딱해라.”

딱하다면서 김하준의 목소리에는 냉기가 뚝뚝 떨어진다. 정인은 미안한 얼굴로 물었다.

“결혼식은?”

“내 덕분에 잘 마무리됐지.”

“어떻게?”

“임신인 것 같다고 둘러댔거든.”

정인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뭐?

“왜 그런 거짓말을 해!”

“임신이라고 안 했어. 인 것 같다고 했지.”

“그거나 그거나!”

“그럼? 신랑 얼굴 보고 역겨워 토하는 거라고 떠들까?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정인이 뜨끔한 표정을 했다.

“그렇게 싫은데, 어떻게 결혼할 생각을 했냐.”

“…….”

“돈이 참 좋아. 그치?”

“…….”

말을 해도 꼭. 기분도 상하고 짜증이 나서 링거를 뽑고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는데 김하준이 팔을 붙들고는 도로 자리에 눕힌다. 

“누워. 의사가 무조건 안정 취하라고 했어.”

“여기가 어딘데.”

“우리 신혼집.”

신혼집이란 말에 정인이 안을 둘러봤다. 커튼이며 이불이며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렸고 한쪽에는 결혼사진이 커다랗게 걸렸다. 

“가족들은?”

“윤 비서가 댁으로 모셔다드렸어.”

걱정할 엄마에게 먼저 전화를 하려고 정인은 휴대전화를 찾았다. 버튼을 누르고 통화를 기다리는데 김하준이 빤히 쳐다본다. 부담스럽다. 신호가 가자마자 엄마가 급하게 전화를 받는다.

[방금 연락받았어. 너 깨어났다고 해서 그러잖아도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괜찮아요. 너무 긴장했나 봐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엄마가 죽 쒀 놓고 왔어. 속 괜찮아지면 그거 먹어. 약도 잘 챙겨 먹고, 응?]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그녀가 울음을 참는 중이라는 걸 알겠다.

“네…. 그럴게요.”

몇 마디를 나눈 뒤 통화를 마쳤다. 조금 전까지 있던 김하준은 보이지 않았다. 정인은 링거 지지대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따라 걸으니 점점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거실은 2층까지 트여 있었고 그 가운데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아래로 벽난로가 있고, 책과 커다란 TV, 침대만큼 크고 편안해 보이는 소파와 각종 미술품들. 

어마어마한 규모의 집 크기에 눈을 떼지 못하는데 주방 쪽에서 김하준이 돌아본다.

“구경 다 했으면 와서 먹어.”

가서 보니 식탁에 죽이 차려져 있다.

“너희 어머니가 끓여 놓고 가셨어.”

정인은 의자를 끌어내 자리에 앉았다. 김하준이 물과 약을 챙겨서 옆에 놓아 준다. 의사가 이거 먼저 먹으래. 입으로는 갈구면서 챙겨 줄 건 다 챙긴다. 사람 짜증 나게. 한편으로는 상황이 이렇게 되어 미안하기도 했다. 

말없이 죽을 먹는데 앞에서 빤히 쳐다보던 김하준이 일어선다. 드륵, 의자 밀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가 냉장고에서 물 하나를 꺼내더니 돌아선다. 

“앞으로 넌 1층에서 지내면 돼.”

“넌?”

“난 2층. 가능하면 서로 부딪치지 말자.”

“응….” 

“내일부터 사람이 와. 불편하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내가 아니라 그 사람한테 얘기해.”

“응….”

무척이나 사무적이고 건조한 말투였다. 마치 부하 직원에게 이야기하는 듯한. 그 말을 끝으로 하준은 2층으로 올라가 사라졌다. 정인은 그 뒷모습을 보다가 수저를 들었다. 엄마의 죽은 항상 맛있었는데, 오늘은 유독 입에서 까끌거린다.

***

민아가 보내 준 영상 속에서 정인은 하준의 얼굴에 대고 헛구역질을 한 뒤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쓰러지는 정인을 하준이 받쳐 안았고, 놀라서 웅성대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함께 화면이 어두워진다.

아아, 휴대전화를 옆에 던져 두고 침대에 누워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결혼식 내내 제 표정이 얼마나 어두웠는지 화면으로 직접 보니 알겠다. 김하준이 성질낼 만도 하다. 하필 그때 위경련이 도져서는…. 비공개 결혼식이라 다행이지, 아니면 대대적으로 개망신을 당할 뻔했다.

그래도 며칠 쉬었더니 속은 훨씬 나아졌다. 김하준은 그 후로 정말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미 출근해서 없고, 저녁에는 퇴근이 늦었다. 가능하면 서로 부딪치지 말자던 것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정인은 며칠째 대부분의 시간을 서 집사와 보냈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김하준의 집에서 일을 했다고 하는데, 온화하고 다정한 성격이라 지내는 데 큰 불편함은 없었다. 정인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알려 주고, 몸이 좋지 않은 정인을 위해 매우 세세하게 신경을 썼다. 

아쉽게도 서 집사는 집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출퇴근을 하였고, 그녀가 없는 시간 동안 정인은 혼자 오롯이 이 큰 집에서 보내야 했다. 

방에서 시간을 보내던 정인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큰 화병에 파스텔 톤 꽃들이 잔뜩 꽂혀 있어 멀리서도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서 집사가 고용한 가사 도우미들이 집 곳곳을 돌아다니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에게 인사를 한 뒤 주방에 가니 서 집사가 요리를 하고 있다. 가서 혹여 도울 게 있느냐고 물었다가 등이 떠밀려 쫓겨났다.

“오늘까진 푹 쉬세요. 내일부터는 바빠질 거예요.”

바빠지다니. 영문을 몰라 쳐다보자 서 집사가 고개를 갸웃한다.

“혹시, 못 들으셨나요?”

“뭘요?”

“내일부터 신부수업을 받아야 하세요.”

정인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잘못 들었나 싶어 네? 하고 묻자 서 집사가 사람 좋게 웃으며 신부수업 네 글자를 또박또박 이야기한다. 아아,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다. 정인이 생각하는 신부수업이라면…

“원래는 결혼 전에 받으셨어야 하는데, 급하게 식이 진행되느라 일정을 후로 잡았답니다. 요리, 다도, 꽃꽂이, 서예 같은 것들을 배우게 돼요. 사모님께서 이미 최고의 분들로 섭외해 놨으니 염려하지 마세요.”

서 집사는 자기가 오히려 더 기쁜 표정이다. 정인은 표정 관리를 못 하고 하, 하하, 하고 헛웃음만 흘렸다. 요리야 그렇다 쳐도 다도, 꽃꽂이, 서예 그런 걸 배워서 어따 써먹을 건데. 

“저는 처음 듣는 얘기라….”

“저런, 대표님이 미리 말을 안 했나 보네요.”

그러게요. 미리 말해 줬으면, 결혼을 조금 더 고심했을 텐데요. 그러면서 서 집사는 다른 건 몰라도 요리는 꼭 배워야 한다고 했다. 워낙 제사가 많은 데다 요리는 김 회장의 부인이 직접 하는 편이라 옆에서 도와야 할 거라는 말에 정인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제사…요?”

“네, 매달 지낸다고 보시면 돼요.”

맙소사.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서 집사가 웃으며 처음엔 힘들겠지만 적응되면 괜찮을 거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준다. 그래, 결혼 생활 고작해야 4개월인데. 정인은 애써 자신을 위로하며 외투를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며칠 만에 찬 바람을 쐬니 정신이 든다. 겨울이라 색이 바래 버린 잔디밭을 천천히 걷다가 마당 한가운데 서서 집을 올려다봤다. 직사각형 모양의 2층 주택은 한 면이 모두 유리창이었고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정인은 결혼 전 술 취한 김하준 대신 운전해서 왔던 곳이 이곳이라는 걸 알게 됐다.

신혼집에 잘도 다른 사람을 들였구나. 아무리 계약 관계라지만 서운한 마음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다. 정인은 마당 한쪽에 나무로 만들어 놓은 2인용 그네에 가서 앉았다. 

발로 땅을 차자 그네가 움직인다. 앞에 보이는 2층 거실에서는 직원이 왔다 갔다 하며 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밤에 이곳에 앉아 있으면 김하준이 보일까, 궁금해졌다. 집도 크고 마당도 큰데 혼자 살던 투룸이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이곳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그 생각을 하면 한숨이 흘러나왔다.

***

바에 앉아 술을 마시던 하준 옆으로 이제 막 가게에 들어온 김민재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코트를 벗어 정리한 그는 바텐더에게 같은 걸로 달라고 주문한 뒤 하준의 안색을 살폈다.

“많이 마셨어?”

“조금”

“신혼인데 이래도 돼?”

김민재가 웃으며 물었다. 김하준의 결혼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대학 때부터 그를 알고 지냈는데, 남들이 보는 김하준은 방탕한 생활을 즐기며 유유자적하게 사는 부잣집 도련님이었고 결혼과는 절대 연관이 없어 보였다.

“정인 씨는 괜찮아? 나 네 결혼식 때 깜짝 놀랐다.”

민재가 웃었고 하준은 그날 일을 떠올리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위경련이 올 정도로 결혼이 하기 싫었을 줄이야. 

“근데 정인 씨 인물 진짜 좋더라. 잘생긴 건 둘째고 그 분위기가… 뭐랄까.”

민재가 적절한 단어를 고르고 있었다. 하준은 비웃었다. 꼴리게 하지. 그래 류정인이 사람 꼴리게 하는 건 저도 알고 있고 다른 놈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 

“참, 석호 얘기 들었냐? 걔가 너 고소한다고 난리다.”

석호는 그날 클럽에서 류정인에게 집적거렸던 놈 이름이다. 하준은 같잖은 표정으로 웃었다.

“잘됐네. 하라 그래.”

“그러지 말고 화해해. 걔는 진짜 몰랐다잖아.”

그날 김하준은 류정인한테 얻어터져 코피가 흐르는 장석호를 앞니가 부러질 때까지 때렸다. 주변 사람들이 말리는데도 듣지도 않고, 완전히 눈이 돌아서는 미친놈처럼 난리를 쳤다. 덕분에 맞은 놈은 지금 고소를 한다고 길길이 날뛰고 있는 중이다. 

둘이 앉아서 한참 대화를 하는데 근처에 있던 오메가 둘이 와서는 혹시 괜찮으면 함께 술을 마시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민재가 거절하려고 하자, 하준이 좋다며 자리를 옮기자고 코트까지 챙기며 일어섰다. 민재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팔을 붙들었다.

“같이 놀게?”

“어.”

“야, 너,”

민재가 말을 하려다 멈추고 바텐더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결혼까지 한 놈이.”

김하준이 피식 웃었다. 무슨 상관이야. 

그러더니 오메가들과 함께 안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대리비를 준 뒤 김하준은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려 집으로 올라갔다. 스산한 바람이 분다. 하준은 집이 아닌 마당을 가로질러 구석에 놓여 있는 그네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담배 하나를 꺼내 물고서 집을 바라봤다. 

1층의 불은 켜져 있었으나 블라인드가 내려져 안이 보이진 않았다. 2층은 어둡다. 하아, 허공에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뒤로 기대 고개를 젖혔다. 조금 전까지 어울려 놀던 오메가의 페로몬 냄새가 흠뻑 뱄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 둘이서 은밀한 시간을 갖기를 원했으나 하준은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다음이란 건 없었다. 연락처도 묻지 않았으니까.

“들어가기 싫다….”

푸념처럼 중얼댔다. 들어가기 싫다. 류정인 얼굴을 보는 건 괴롭다. 이 상태로 120일을 버텨야 한다니 지옥이 따로 없다. 복수하려다 되려 화병으로 죽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회사에 가서 잘까. 

생각할수록 괘씸하고 화가 난다. 그렇게 결혼이 하기 싫었어? 생각해 보면 류정인은 분명 하기 싫다고 뜻을 내비쳤다. 자신이 하자고 우겼지. 상처 주려고 했는데, 오히려 상처는 자신이 받고 있었다.

빌어먹을. 담배를 끄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저벅저벅 걸을 때마다 바싹 마른 잔디가 구두에 밟혀 소리를 낸다. 현관에 카드를 대고 안으로 들어간 뒤 슬리퍼를 갈아 신었다. 

복도를 지날수록 거실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걸어가던 하준은 멈춰 섰다. TV는 켜져 있고 류정인이 소파에 팔을 베고 옆으로 누워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TV에선 철 지난 영화가 한창이었다. 

막상 얼굴을 보니 술기운이 확 달아난다.

“잠이 오는구나, 넌.”

코웃음을 치고 나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TV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2층 거실에다 코트를 벗어 두고 곧장 욕실로 간 그는 집의 온도를 확인했다. 하준은 열이 많고 겨울에도 더운 걸 싫어한다. 반면에 류정인은 한여름에도 에어컨 바람 쐬는 걸 싫어할 정도로 추위에 약했다.

알 게 뭐야. 얼어 죽든 말든.

욕실로 들어가서 옷을 탈의하려다 거울을 봤다. 그래, 생각해 보니 괜히 또 병나면 그것도 골치 아프다. 며칠 전 쓰러진 사람한테 이불 정도야 챙겨 줄 수 있다. 한숨을 내쉬며 셔츠를 잠그고 두터운 담요를 챙겨 계단을 막 내려오던 찰나였다. 

갑자기 류정인이 부스스 일어나더니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켠다. 담요를 가지고 계단 중간쯤 내려갔던 하준은 급하게 계단을 오르다 그만 발이 꼬여 넘어졌다. 쾅, 소리에 정인이 김하준?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하준이 계단에 찍힌 정강이를 붙들고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래층에서 소리가 들리는 거 같더니 이내 잠잠하다. 자리에서 일어난 하준은 침실로 들어와 담요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하, 병신.”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제대로 인지하고서는 자괴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기막힌 듯 웃으며 욕실로 가 옷을 탈의하고 보니 정강이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욱신대고 아프다. 빌어먹을.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

“다시, 다시! 찻잔 받침을 왼쪽 아래에 놓으라고 했잖습니까.”

정인은 오른쪽에 있는 찻잔 받침을 슬그머니 왼쪽으로 밀었다. 이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다도 수업이라고 해서 어디 멀리 가나 했더니 집으로 선생이 왔다. 나이 지긋한 백발의 노인은 한복을 입고 머리에 쪽을 졌는데, 눈매며 입술이 고집스러웠고, 한눈에 봐도 깐깐하기 짝이 없었다.

“몇 번 말했나요. 예열할 때는 어른 찻잔부터 하셔야죠.”

다도 선생은 쉴 새 없이 잔소리 폭격을 쏟아부었다. 티백 하나만 있으면 무엇이든 우려낼 수 있는 세상에서 왜 이런 방식으로 차를 마셔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한참 무릎을 꿇고 있으니 다리가 저리다. 차라리 위경련을 일으켜서 쓰러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게다가 어젯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더니 눈꺼풀은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듣고 있어요? 제가 뭐라고 했죠? 최고의 차는 어떤 차다?”

다도 선생이 정인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잠이 쏟아져 제정신이 아니었던 정인은 저도 모르게 티백…. 이라고 중얼댔다. 다도 선생의 주름진 눈가가 일그러졌고, 정인은 서둘러 수습하려 했으나 총알처럼 빗발치는 그녀의 잔소리를 피하기는 어려웠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정인이 간절한 표정으로 다도 선생을 보며 눈빛으로 애원했다.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돼요? 저 진짜 졸려 죽겠는데…. 그러나 그녀는 바로 외면하고 수업을 진행시켰다. 그렇게 겨우 끝나고 한숨 돌리고 있는데 이번엔 요리 선생이 찾아왔다.

요리라면 그나마 자신이 있었는데, 머리가 멍하니 오늘은 그것마저 따라 주질 않는다. 무 대신 손가락을 자를 뻔하자 요리 선생이 비명을 질렀다. 요리 선생 역시 다도 선생만큼이나 나이가 지긋했는데, 다도 선생이 역정을 내면서 가르치는 스타일이라면 요리 선생은 웃으면서 맥이는 타입이었다. 

둘 다 힘든 건 마찬가지라 정인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탈진해 소파에 널브러져 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 집사가 트레이를 들고 오면서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많이 피곤하시죠?”

그는 정인에게 무언가를 하나 내밀었다. 뚜껑을 열자 황금색 알약이 하나 들었다.

“공진단이에요. 최고급 사향으로 만든 거랍니다.”

쳐다만 보고 있자 얼른 먹으라고 눈짓을 보낸다. 억지로 입에 욱여넣었다.

“천천히 녹여 드세요.”

한약이라면 치를 떨면서 싫어하는데. 녹여 먹으려니 더 죽을 맛이다.

“오늘 일정은 끝난 거죠? 저 이제 쉬어도 되나요?”

서 집사가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저녁에 본가에 가셔야 해요.”

“본가는 왜….”

정인은 뒤늦게 일주일에 한 번씩 본가에 가서 식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결혼 전 김하준은 집에 자주 가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왜 결혼하자마자 일주일에 한 번 가서 식사를 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가기 싫다. 가서 김하준네 할머니하고 엄마의 그 싸늘한 눈초리를 꿋꿋하게 견뎌야 하는 것도 힘들었다. 앓는 소리를 내며 방으로 간 뒤 소파에 드러누워 리모컨으로 TV를 틀었다.

개그 프로가 나오는데 하나도 웃기질 않는다. 채널을 돌리던 중 뉴스가 나오길래 멈췄다. 무표정한 얼굴로 속보를 보던 정인의 눈이 점점 커졌다. 제가 아는 사람 이름이 자막에 나온다. 

나중엔 도무지 믿기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오늘 오후 1시경 유명 배우 이해수씨가 투신한 채 발견됐습니다. 발견 당시 이 씨는 이미 사망 상태였으며 경찰에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수사에 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지인에 따르면 이 씨는 오래전부터 우울증을 앓고 있었으며,]

휴대전화를 꺼내어 확인했다. 포털사이트 1위 검색어에 이해수 사망이 떴다. 기사에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며, 평소 우울증을 앓아 왔었다는 주변 사람들의 진술이 있었다고 한다. 

어이가 없었다. 결혼 전 그를 만나 타투를 해 줬다. 그는 연기를 그만둘지도 모른다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며, 결혼해서 편하게 살고 싶다는 말을 비밀스럽게 털어놨다. 기사를 읽던 정인은 죽은 이해수의 최근 소속사가 제이엔터테인먼트란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더 아래로 내리니 댓글로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평소 사생활이 문란했다는 둥, 약에도 손댔는데 소속사에서 막아 준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둥, 소속사에서도 참다가 터져서 계약을 해지하였고, 그것 때문에 우울증이 심해졌다는 내용이었다.

혼란스럽다. 김하준은 이 소식을 들었을까. 걱정스러워 전화를 걸려다 이내 포기해 버렸다. 김하준 입장에서 생각하니 반갑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

“아뇨. 저희 쪽에서는 입장 발표할 계획이 없습니다. 이미 이해수 씨와는 계약이 해지된 상태고요. 해지된 이후에 발생한 일이라 더 드릴 말씀도 없습니다. 물론 애도를 표합니다. 그럼요. 예, 잘 부탁드립니다.”

전화를 끊은 하준은 지친 표정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오늘 오후 이해수가 사망하였고, 기사가 나가자마자 종일 회사로 연락이 빗발치게 쏟아졌다. 그리고 그 전화는 퇴근 후에도 이어졌다.

하필 몇몇 언론에서 회사와의 불화설을 문제 삼았다. 이해수가 죽은 건 안타깝지만 지금은 그로 인해 처리해야 할 일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하필 이런 와중에 본가에서 저녁 식사라니. 

또다시 울리는 전화의 수신을 차단하고 나서 하준은 피곤한 듯 시트에 기댔다. 10여 분이 더 지나자 차 한 대가 바로 옆으로 와 선다. 뒷문이 열리고 정장을 입은 류정인이 내렸다. 곧바로 서 집사가 따라 내려 류정인의 옷매무새를 챙기고 손에 미리 준비한 선물을 들려 줬다. 

뒤늦게 하준이 차에서 내리자 서 집사가 인사를 건네온다.

“조금 늦었습니다, 대표님.”

류정인이 돌아본다. 며칠 만에 본 류정인의 얼굴이 살짝 야윈 것도 같다. 토할 만큼 싫었으니 야윌 만도 하지. 속으로 빈정거리는데 이상함을 감지한 서 집사가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서 계시니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시네요.” 

하준은 말도 없이 돌아서 위로 올라갔다. 정인이 그 뒤를 따라 걸어갔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돌계단이 나온다. 그것을 밟고 올라가니 넓게 펼쳐진 정원이 나왔다. 집이 넓어 정원을 가로지르는데도 한참이 걸린다. 

정인은 중간에 연못을 보며 한눈을 팔다가 멈춰 선 김하준을 보지 못하고 등에 부딪쳤다. 김하준이 돌아섰고, 정인은 머쓱한 얼굴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들어가서 괜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입 다물고 있을게. 

현관 앞에는 직원이 기다리고 있다.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갈아신은 뒤 안으로 들어서자 김 회장이 가장 먼저 정인을 맞이한다. 그는 정인을 보며 따스하게 미소 지었고, 몸은 나아졌는지, 지내는 건 어떤지 물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부자 사이는 별로 좋지 않은 듯하였다. 김 회장과 김하준은 눈 한 번 맞추지 않고 쌩하니 서로를 지나쳤다. 그리고 김 회장 뒤에서 할머니가 나오는데 눈빛이 정인을 잡아먹을 것처럼 무서웠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정인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위아래 한 번 훑고는 하준을 보며 얼굴색이 확 바뀌어 손부터 잡았다.

“아이고, 우리 하준이. 새신랑 왔네.”

근데 얼굴이 왜 이렇게 야위었어? 결혼하더니 애가 반쪽이 됐네. 힘드니? 낮에 뉴스 봤다. 신경 쓰지 마. 집에 사람을 잘못 들였나, 어째 결혼하자마자 그런 일이 생겼다니. 마치 그것이 제 탓을 하는 것처럼 들려 정인은 점점 불편해졌다. 

다른 건 몰라도 손주분 낯빛이 안 좋은 건 술을 하도 많이 처마셔서 그래요. 알코올 중독 수준으로 처먹는다고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꿀꺽 삼키고서 김 회장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김하준의 어머니가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준비 중이다.

열 사람은 앉고도 남을 식탁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다.

“어서 와요. 오느라 힘들었죠?”

말투는 다정한데 눈빛이 묘하게 차갑다. 그래도 할머니처럼 대놓고 무시하지 않는 게 어디냐 싶다. 

김하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개를 돌리면 얼굴이 가까이 마주칠까 봐 앞에 놓인 음식만 바라봤다. 식사가 시작되고 음식을 먹는데 자리가 불편해서 그런지 맛이 느껴지질 않았다. 게다가 어째서 해산물이 이렇게 많은지. 최대한 피해 가며 집어먹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김 회장이 정인을 부른다.

“요즘 집에서 수업받는다며. 어때? 할 만해?”

질문과 동시에 김하준을 뺀 여섯 개의 눈동자가 일시에 쏠린다. 정인은 물을 한 모금 마셨고 예의 바른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아니, 하기 싫어요. 죽을 것 같아요.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 젊은 사람들은 싫어할 법도 한데. 다행이네.”

그러자 할머니가 한마디 툭 내뱉는다.

“근데 먹는 게 왜 이렇게 깨작거려? 선생이 식사 예절은 제대로 가르치질 못한 모양이지?”

정인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분위기를 망치기는 싫었으나 그래도 사실을 알려야겠기에.

“죄송합니다, 할머니. 실은 제가 해산물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할머니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알레르기?”

“예….”

“하, 어디서 물건을 데려와도 하자 있는 걸 데려와서는.”

정인의 표정이 굳고 김 회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할머니를 달랬다.

“어머니.”

“왜. 내가 틀린 말 했냐. 결혼식장에서 쓰러져서 망신시키길래, 애라도 가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야. 근데 이젠 뭐 알레르기? 애미야. 너 내일 당장 쟤 병원 데려가서 검사받게 해라. 무슨 병이 더 있을 줄 알고!”

“어머니.”

낮에 다도 선생한테 갈굼당해도 멀쩡하던 위가 슬슬 뒤틀린다. 노인네 목소리가 얼마나 쩌렁쩌렁한지 귀가 다 아프다. 김 회장 내외가 말리는데도 할머니는 성질을 버럭버럭 냈다. 근데 김하준은 옆에서 태연하게 밥을 먹는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말려 주는 건 바라지도 않으나 너무 못 본 척하니 할머니보다 김하준이 더 얄미웠다.

***

집에 도착하자마자 정인은 넥타이를 풀고 찬물을 컵에 가득 따라서 들이켰다. 소화제가 어디 있으려나. 저녁으로 먹은 음식이 명치에 걸려 넘어가질 않는다. 2층으로 올라가는 김하준의 발소리가 나길래 물컵을 들고 쫓아가서 불렀다.

“김하준!”

하준이 돌아본다.

“할 말이 있어.”

“해.”

내려오라고 손짓을 했는데 꿈쩍 않는다. 올라가려고 하자, 그제야 내려와서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쳐다본다. 차라리 낮에 다도 선생하고 둘이 있는 게 덜 숨 막히겠다. 김하준이 결혼하고 왜 매일 늦게 오는지 조금 알 것도 같다. 이 기분이 너도 싫은 거겠지.

“나 낮에 수업받잖아…. 그거 꼭 해야 해?”

김하준은 더 해 보라는 표정으로 대답이 없다.

“내가 그걸 굳이 배울 필요가 있나 해서.”

“본론만 말해.”

“너희 할머니한테 말해서… 그만하게 해 주면 안 되겠지?”

“응. 싫어.”

1초의 고민도 없이 단칼에 자르더니 위로 올라가 버린다. 정인이 기막힌 표정으로 쳐다봤다. 이건 뭐 말이 통해야 대화를 하지. 됐다, 관둬라. 더 붙잡고 말해 봐야 입만 아플 것 같았다. 

방으로 들어가 휴대전화로 메시지를 확인하던 정인은 뒤늦게야 다음 주가 할머니의 생신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런데 하필 본가에 가서 식사하는 날과 겹친다. 젠장.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와 김하준을 불렀다. 

망할 집구석이 큰 건지 아니면 김하준이 무시하는 건지 대답이 없다. 전화로 말하려고 했는데도 받질 않는다. 고민하던 끝에 위층으로 올라가니 1층과는 달리 2층은 방마다 문이 없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김하준은 보이지 않았다. 정인은 제일 끝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발견하고 그곳으로 갔고 창가 앞에 서 있는 김하준을 발견했다. 똑똑, 입으로 소리를 내니 그가 돌아본다. 뭘 하나 봤더니 그새 술을 마셨는지 서재 책상에 술병이 올려져 있고 손에는 술잔이 들려 있다. 

“들어가도 돼?”

“왜 올라왔어?”

“미안. 불러도 대답이 없고, 전화했는데 받질 않아서.”

하준은 술잔을 책상에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또 뭔데.”

“다음 주에 할머니 생신이라 집에 가야 해. 가족 모임은 참석 못 할 것 같아.”

“그래서?”

“네가… 대신 말씀드려 줘.”

“직접 해.”

“나 너희 할머니 무서워.”

“아버지한테 말해. 너하고 한패잖아.”

한패란 말에 정인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리고 움직였다. 

“말을 왜 그런 식으로 해?”

“뭘.”

“계속 삐딱하게 굴잖아. 막말로 내가 너한테 결혼하자고 했어? 네가 하자며. 그래 놓고 왜 사사건건 못마땅한 투로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들어? 그럼 넌 한패 아니고? 너도 목적이 있어서 합의한 거잖아. 근데 왜 나만 쓰레기 만드냐고.”

더 해 보라는 표정이길래 정인은 다다다 쏘아 댔다.

“그리고 결혼식에서 쓰러진 게 내 탓이야? 위가 하필 그때 말썽을 부린 걸 나더러 어쩌라고? 아까 식사 자리에서도 그래. 너네 할머니가 나 갈구면 네가 좀 말려 줄 수도 있었잖아. 어떻게 거기서 밥만 처먹을 수가 있어? 솔직히 그건 결혼이 아니라 친구 사이였어도 나서서 거들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래서 결론이 뭐야. 하하 호호, 웃으면서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는 거야?”

술잔을 들더니 남은 술을 비우면서 정인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 눈빛은 대체 무슨 감정인지도 이젠 모르겠다. 어릴 적엔 자신이 김하준을 가장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가장 모르는 사람이 됐다. 정인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저었다.

“됐다, 관두자, 관둬. 내가 알아서 할게.”

돌아서서 나가는데 품에 넣어 둔 페로몬 측정기가 진동한다. 정인이 걸음을 멈추고 인상을 확 구겼다. 이 새끼가, 또. 홱 돌아서서 노려보는데 김하준이 어딘가 이상하다. 양손을 책상에 짚고서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눈이 마주치자 김하준이 이를 까드득 물었다.

“나가.”

음성이 불안하게 떨리고 눈빛이 흔들렸다. 정인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러트다. 실제로 러트가 온 알파를 본 적이 있다. 상황은 다르지만, 증세는 비슷하다. 김하준이 참기 힘든 듯 서랍에서 무언가를 찾아 꺼냈다. 서랍을 헤집느라 거기서 나온 약병 하나가 떨어져 바닥으로 뒹군다. 

도움을 주려 했던 정인은 재빨리 그걸 주웠다. 동시에 김하준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나가란 소리 못 들었어?”

음성이 얼음장처럼 차갑다. 정인은 울컥한 마음에 그대로 돌아서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김하준의 눈빛은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 괜찮을까. 하지만 지금 올라가도 오메가가 아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건 없다. 

그러다 뒤늦게 약을 쥔 채 내려왔다는 걸 깨달았다. 가서 돌려줘야 하는데. 이게 억제제인가.

[향정신성의약품.]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아 재차 확인했다. 어째서 이런 걸….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차마 김하준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그 눈빛을 다시 볼 엄두가 나질 않아서. 

십여 분이 지났는데도 조용하다. 이제 괜찮은 걸까. 거실 소파에 앉아 2층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누군가 벨을 누른다. 정인이 황급히 가서 인터폰으로 얼굴을 확인했다.

“아….”

정인은 갑자기 찾아온 손님이 결혼 전 집 앞에서 봤던 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미모가 뛰어난 오메가.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어 주자 여자가 다급히 들어온다.

“하준인요?”

“위에 있어요.”

정인의 대답을 다 듣지도 않고 여자가 위층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정인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러트가 찾아온 알파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정인이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지금 올라간 오메가라면 가능하다.

가슴이 욱신거리며 명치와 목구멍이 꽉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더는 거기 서 있을 수가 없어 방으로 황급히 들어갔다. 문을 닫고서 정인은 그 앞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김하준 괜찮겠지. 러트나 히트 사이클이 오면 어떤 기분일까. 고통스럽다는데,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상상도 못 하겠다. 

내가 오메가였다면 어땠을까. 김하준 곁에 아직도 남아 있었을까. 생각이 많아지고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진다. 

***

“괜찮아?”

서린은 상처가 생긴 하준의 팔뚝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데이트를 하는 중인데 김하준에게 급하게 연락을 받았다. 러트가 왔는데 진정제를 가져다줄 수 있느냐고. 김하준은 다른 알파들에 비해 러트가 상당히 불규칙적이었다. 그래서 늘 비상약을 챙겨 가지고 다녔는데….

“약은 대체 어디다 둔 거야?”

“차에.”

“근데 왜 나가지 않았어?”

김하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팔에 잇자국이 선명하다. 자세히 보니 참느라 입술을 물어뜯어 피가 맺혔다. 보통 맨정신으로 견디기 힘들 텐데 그 와중에 이성을 잃지 않으려 한 흔적이 선명했다.

약 기운이 도는지 그가 차츰 늘어지며 몸을 웅크렸다.

“그만 가.”

“정인 씨한테는 네가 잘 해명해.”

“무슨 해명.”

“그렇잖아. 러트에 다른 오메가를 집에 들이는 게 보통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지.”

“…….”

“아니면 내가 해명할까?”

“관둬. 어차피 걔는 신경 안 써.”

서린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둘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가뜩이나 김하준의 파트너가 결혼식장에서 쓰러져 친척들 사이에선 말이 많은데. 더 캐물어도 대답을 해 줄 것 같지 않아 옷을 챙겨 일어섰다.

서린이 사라지자 혼자 남은 하준은 꽤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몸에 남은 열기 때문인지 타들어 갈 것처럼 갈증이 인다. 결국 일어나 냉장고로 가서 물을 꺼내 마셨다.

아까부터 아래층이 쥐 죽은 듯 조용하다. 류정인은 뭘 하고 있을까. 그의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당혹스러움과 두려움. 그런 사람에게 무슨 도움을 청할 수 있었을까. 추한 꼴을 보이지 않은 게 차라리 다행이다.

목을 축인 뒤에는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기 위해 서랍을 열어 수면제를 찾았다. 그런데 있어야 할 약이 없다. 빌어먹을. 그제야 류정인이 약병을 주워 가져갔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대로 잠을 자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고민 끝에 하준은 아래층으로 내려왔고 류정인의 침실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노크를 했다. 조용하다. 재차 노크하려는데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류정인이 서 있다. 얇은 점퍼만 걸치고 귀와 코끝이 빨갛게 되어서는.

“어디 갔다 와?”

“밖에…. 산책하러.”

“이 시간에?”

“응….”

정인은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내더니 내밀었다. 이거. 아까 돌려주려고 했는데 상황이 좀 그랬어. 하준이 약병을 받아 들자 정인은 그를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려 했고 하준은 그런 정인을 불러 세웠다.

“다음 주에 집에 다녀와. 할머니한테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까.”

정인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밖에서 찬 바람을 잔뜩 맞았더니 정신이 좀 든다. 김하준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해선 안 된다. 아무것도 바라서는 안 된다. 

“그럴 필요 없어.”

김하준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진다.

“내가 착각했어. 네 말대로 내가 알아서 할 일이었었는데, 깨우쳐 줘서 고마워.”

잘 자. 정인은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혼자 남은 하준은 손에 쥔 약병을 꽉 움켜쥐었다. 노크를 하려고 손을 올렸으나 도저히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

운전대를 잡은 정인은 버스 정류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얼마 전까지 이해수의 사진이 들어간 광고물이 붙어 있었는데, 싹 교체가 됐다. 아직도 그의 죽음이 실감이 나질 않는다. 메인에 보이던 기사도 애도하던 글들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사라졌다.

가게 앞에 차를 주차하고 내리는데 옆 건물 식당 김 사장이 나와서 아는 척을 한다.

“정인 씨 오랜만이야.”

“잘 지내셨어요?”

“나야, 늘 그렇지. 이햐, 차 좋다. 이래서 사람은 결혼을 잘해야 한다니까. 인생 한 방 역전이네.”

그는 정인이 몰고 온 차를 요리조리 탐색했다. 흰색 외제 차는 김 회장이 끌라고 바꿔 줬는데, 아직도 운전할 때마다 남의 차를 모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거절했으나 남의 이목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에 하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김 사장의 시답잖은 농담을 들어 준 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작업실에 있던 다혜가 정인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왔어?”

“뭐 해?”

“사진 업로드.”

그녀는 쥐고 있던 마우스를 놓고 기지개를 켜다가 정인의 얼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얼굴이 이게 뭐야?”

“왜. 활짝 피었어?”

다혜는 고개를 저었다. 놔두면 곰팡이가 필 것 같긴 하다. 그 곱던 피부가 푸석푸석 눈도 퀭하고. 어째서 빚에 시달릴 때보다 상태가 더 나빠진 건지 모르겠다.

“너, 괜찮은…거지?”

“아니.”

정인은 소파에 기대 한껏 늘어졌다. 오전 내내 다도 선생의 잔소리를 들었더니 기가 다 빨린 것 같다. 그러면서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다도를 배워도 정인은 밤에 차를 마실 때마다 티백을 사용했다.

“참, 너 이해수 소식 들었어? 기사 봤지?”

정인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응, 이라고 대답했다. 

“깜짝 놀랐잖아. 절대 그러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건 정인도 같은 생각이다. 물론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알고 있던 이해수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러다 김하준을 떠올렸다. 그가 먹던 약을 검색하니 수면제로 나왔다. 평소 김하준을 보면 전혀 상상이 가질 않는다. 자주 먹는 걸까.

생각에 빠져 있느라 다혜가 한 말을 못 들었다.

“어떠냐니까?”

정인은 몸을 바로 세웠다. 어?

“결혼 생활 할 만해? 그 사람은 너한테 잘해 줘?”

아니. 매일 달력에 날짜를 표시한다. 하루가 일 년처럼 길다. 자고 일어나면 열흘씩 지나갔으면 좋겠다. 물론 결혼이 다 이런 건 아닐 것이다. 

“아무튼 네가 생각하는 그런 생활은 아니야.”

답답한 마음에 커피를 내려 마시려고 일어서는데 문이 열린다.

딸랑,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여기 혹시 사장님 계세요?”

점퍼에 운동복 바지를 입은 젊은 남자는 탐색하듯 가게 안을 살폈다. 정인은 그가 손님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혹여 삼촌이 저 모르게 또 빚을 만든 건 아닐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 찰나였다. 남자가 품에서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보여 준다.

“남부경찰서 이한 형삽니다. 사장님 되세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일단 자리에 좀 앉아도 될까요? 남자가 정중하게 묻더니 소파에 앉아서 수첩을 펼친다.

“그…이해수 씨 아시죠?”

정인이 영문 모르는 표정을 했다. 조금 전까지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형사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아느냐고 물으니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얼마 전에 사망했고 지금 조사 중입니다. 제가 담당 형사고요.”

“조사요?”

“네, 그냥 형식적인 거니까 편하게 대답하시면 돼요.”

“네….”

“이해수 씨가 최근에 여기 들렀던데, 무슨 일 때문에 왔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타투하러 왔었어요.”

“직접 하신 건가요?”

“네.”

“어떤 모양이었나요?”

정인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덤덤하게 묻는 듯하였으나 눈빛은 꿰뚫어 보듯 예리했다. 정인이 쉽게 대답하지 못하자 남자가 손에 쥔 펜을 돌리며 미소 짓는다. 괜찮아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부검하지 않았나요? 그러면 보셨을 텐데요.”

형사의 표정이 묘하게 바뀐다.

“했죠, 했는데.”

형사가 다혜를 보더니 자리를 좀 비켜 주겠느냐고 물었다. 다혜가 안쪽으로 들어가자 형사가 정인을 보며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놓는다. 이걸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표정이다.

“훼손돼서 형태를 알아보기 쉽지 않더라고요.”

정인은 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훼손이요?”

“그러니까, 이해수 씨가 자해를 하고 투신을 한 거죠.”

정인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였다. 절대 작은 문신이 아니다. 어떻게 훼손을 하면 그걸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가 됐지. 

“얼굴…이었어요.”

“얼굴이요? 누구?”

“그것까진 몰라요.”

“본인 얼굴은 아니던가요?”

“네.”

“도안이나 사진 남겨 두신 거 있을까요?”

정인은 맞잡고 있던 양손을 느슨하게 풀었고 남자를 향해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보통 샘플을 남겨 두는데, 이해수 씨가 연예인이다 보니 바로 없앴어요.”

“다른 거 기억나는 것도 없으세요?”

“네.” 

흐음. 형사가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더니 피식 웃고 수첩을 챙겨 일어선다. 뭐, 알겠습니다. 갑자기 방문해서 당황하셨을 텐데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더니 수첩 사이에서 명함 한 장을 건네준다. 거기엔 남자의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이한.

“더 생각나시는 거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형사가 인사를 하더니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다혜가 안쪽에서 슬그머니 나온다.

“뭐야, 갑자기. 갔어?”

“응.”

“존나 놀랐다. 이해수 얘기하는데 난데없이 형사가 찾아오고.”

아우, 소름 돋아. 다혜가 팔을 문질렀다.

“형사가 왜 여기까지 왔지? 자살이라고 하지 않았나?”

“나도 모르겠어. 어떻게 된 일인지.”

정인은 남자가 주고 간 명함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지갑에 넣었다. 그리고 작업실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 사실대로 말했어야 했나. 

***

두영은 검은 셔츠에 검은 넥타이를 착용한 하준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부터 이해수의 장례식이 치러지는데 하준이 그곳에 가서 조문하겠다고 하니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가실 거예요? 근조화환만 보내세요.”

“끝이 나빴다고 도리까지 저버릴 순 없잖아.”

장례식장 근처에 도착하자 입구부터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다. 하준이 걱정하는 두영을 두고 차에서 내렸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하준을 알아본 기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카메라를 디밀었다.

김 대표님. 한 말씀 해 주세요. 불화가 있었다는데 사실입니까? 고인이 된 이해수 씨한테 따로 하실 말씀 없으세요? 하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지나쳤다. 여기서 한마디라도 뱉으면 얼씨구나 하고 물어뜯을 인간들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근조화환이 길게 늘어서 있다. 제일 끝으로 가니 이해수의 빈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사진 속 이해수의 웃는 얼굴이 낯설다. 계약을 해지하기 전 저를 찾아와 악을 쓰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절을 하고 향을 피운 뒤 유가족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안면이 있는 이해수의 모친이 싸늘한 시선을 보내온다. 

이해수가 데뷔하고 얼마 뒤 잘 부탁한다며 회사까지 음식을 싸 들고 찾아온 그녀였다. 그러나 하준은 알고 있다. 이해수가 돈을 그렇게 벌어도 왜 남은 것이 없었는지를. 모친이 무리하게 벌여 놓은 사업과 알파인 형제들의 빚을 갚는 데 돈이 모두 들어갔다는 사실을.

하준이 그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나갈 때였다. 퍽, 등으로 무언가 와서 맞는다. 돌아보니 바닥에 음식을 담은 알루미늄 접시와 반찬이 떨어져 있다.

“이 나쁜 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네가 계약 해지만 안 했어도 우리 해수, 이렇게 가진 않았어! 어디 그 낯짝을 들고 찾아와! 찾아오길!”

사람들의 이목이 모이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이해수의 형제들이 모친을 말린다. 김하준은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보다가 그대로 돌아섰다. 그랬는데 눈앞에 놀랍게도 류정인이 서 있다. 

검정 옷을 입은 류정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조문객의 모습이었다. 뒤에서는 여전히 이해수 모친의 고함과 울부짖음이 들려온다. 우리 해수 억울해서 어떡해. 우리 해수 살려 내! 내 귀한 아들 네가 죽인 거야!

하준은 정인을 모르는 사람인 척 지나쳤다. 장례식장 밖으로 나오는데 유명 배우가 나타난다. 기자들이 우르르 쫓아간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김하준.”

하준은 걸음을 멈췄다.

“어디 가?”

돌아서자 류정인이 뛰어왔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왜 류정인이 이곳에 왔을까. 이해수와는 원래 아는 사이였나.

“조문 끝났으니 집에 가야지.”

정인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서 머뭇댔다. 막상 따라 나오긴 했으나 둘이 있으니 어색하기만 하다. 코끝 시린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장례식장 앞에 진을 치고 있었고 멀리서 하준을 알아본 몇몇 기자가 이쪽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그걸 보던 하준은 정인을 불렀다.

“차 끌고 왔어?”

“응….”

“태워 줘.”

돌아서서 걷는데 김하준의 오른쪽 어깨에 음식 묻은 자국이 선명했다. 정인은 손수건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고민하다 김하준에게로 가는데 김하준이 재킷을 벗더니 그대로 쓰레기통 안에 처넣는다. 

정인은 누가 볼세라 손수건을 도로 뒷주머니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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