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은행을 나온 정인은 길가 벤치에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기존 거래하던 은행부터 시작해 여러 군데를 다 다녀 봤는데, 더는 나올 대출이 없었다. 이젠 어디로 가서 뭘 더 알아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망연자실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일어나 차로 향했다. 발걸음이 바위를 매단 것처럼 무겁고 몸도 마음도 춥기만 하다. 시동을 켠 다음에도 선뜻 출발하지 못하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여유를 주겠다던 사채업자들은 고새 마음이 바뀌었는지 어제부터 독촉을 시작했고, 삼촌은 완전히 잠수 상태였다. 지인이 소개해 준 변호사의 도움이라도 받으려 오후에는 그곳으로 갈 예정이었다. 덕분에 오늘 예약은 모두 취소가 됐다.
그렇게 한참을 넋 놓고 앉아 있다가 차를 출발시켰다. 가게에 도착해 앞에다 차를 세워 놓는데 가게 앞에 누군가 서 있다. 자세히 보니 보육원에 찾아왔던 그 남자다. 차에서 내리자 그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 온다.
“여긴 무슨 일 때문에…?”
“제가 모시는 분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할아버지의 지인이라던 그분? 엄마는 사기일까 봐 걱정하던데, 사기는 아니었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눈앞에 뒷짐을 진 낯선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마침 다혜가 안쪽에서 차를 들고 나왔다. 동시에 노인이 돌아봤는데, 어딘가 낯이 익다.
다혜가 차를 내려놓자 노인이 자연스레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인도 외투를 벗어 걸고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비서라는 남자를 쳐다봤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하다. 할아버지와 인연이 있다고 했나. 근데 어째서 여기에….
꾸벅 인사를 하자 노인이 비서에게 자리를 물릴 것을 부탁한다. 다혜와 그의 비서, 경호원이 가게를 빠져나간 뒤 두 사람만 남게 됐다. 찻잔의 가운데를 바라보던 노인이 눈을 들어 정인을 응시했다.
“만나서 반갑네. 며칠 전 자네 집에 내가 사람을 보냈는데, 어머님께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군.”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노인이 가게를 한 번 훑어봤다.
“여기 가겟세가 얼마나 하나.”
정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보자마자 가겟세가 얼마냐고 묻는 건 무슨 예의인지 모르겠다. 대답하지 않자, 노인이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정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는다.
“가게를 내놔도 자네 삼촌 빚을 갚기엔 턱없이 부족할 것 같구만.”
빚 이야기에 정인의 표정이 굳었다.
“영산그룹에서 리조트를 짓자고 마음먹었으니, 쉽게 물러나진 않을 테고. 그렇다고 자네 어머니 성격에 쉽게 보육원을 옮길 사람 같지도 않던데….”
정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노인은 정인의 집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갑자기 경계심이 생겼다. 여기 찾아온 이유가 무언지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냥 나가 줬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어르신께서는 저한테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노인이 차를 마시고 내려놓더니 메모지와 함께 볼펜을 정인에게 건넨다. 정인의 시선이 그곳에 잠시 머물렀다가 노인의 주름 가득한 얼굴로 향했다. 여전히 낯이 익다. 어째서일까.
“내가 자네 시간을 사지. 여기에 원하는 액수를 적게. 어떤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아들놈이 하나 있는데, 꽤 근사한 알파야. 근데 자꾸 속을 썩여. 덕분에 내가 아주 곤란해졌네.”
정인은 그제야 남자를 기억해 내고 눈이 커졌다. 언론에서 본 적이 있다. 유명한 기업가이자, 최근에는 정치 뉴스에서 자주 보이던 김만호. 놀랄 새도 없이 그가 이어서 한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놈하고 결혼해서 4개월만 살아 주게.”
“예?”
“조건은 선거가 끝날 때까지.”
정인은 기막힌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어머니께 정인이 오메가냐고 물었다던 이유를 알겠다.
“농담…하시는 거죠?”
“진심이네만.”
정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뗐다.
“어르신. 송구하지만, 전… 오메가가 아닙니다.”
“알고 있네.”
이쯤 되니 정말 장난인가 싶어진다. 그러면서도 눈앞에 놓인 흰 종이와 남자의 제안을 들으니 갈등이 생긴다. 드르륵, 드르륵, 때마침 사채업자에게 전화가 걸려 온다. 정인은 수신을 거부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한테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들었다시피 우리 아버지가 자네 할아버지와 인연이 있네. 남들 다 외면할 때 혼자 도와주셨다더군. 돌아가시기 전 그게 마음에 걸리셨던지 유언을 하나 남기셨어. 나중에 찾아내어 아이가 있거든 서로 짝을 맺어 주라고.”
어디서 많이 들은 익숙한 이야기다. 뭐, 그렇다 치고. 어째서 약속의 이행 시점이 선거를 앞둔 지금일까.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남자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려고 하는 게 아니다. 약속은 핑계고 그저 정인이 필요할 뿐이다.
“어떤가, 자네 생각은?”
정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계약 결혼이라니. 상상도 못 해 본 일이다. 갚아야 할 돈이 수십억. 대출받고 전셋집을 내놓고 가게를 내놔도 턱없이 모자라다. 다시 전화가 울린다. 이번에도 사채업자다.
받지 않으니 곧바로 메시지가 온다. ‘류정인 씨 전화 받지 않으면 보육원으로 찾아갑니다. 피차 얼굴 붉힐 일은 만들지 맙시다.’ 험상궂게 생긴 김춘호의 얼굴이 눈앞에 있는 듯 훤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자 김 회장이 종이를 조금 더 정인에게 밀어 준다.
“얼마든 좋아. 자네가 생각하는 액수를 적어.”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사람을 뭐로 보고 그러시는 거냐고 대꾸할 수도 없었다. 지금은 돈이 간절하게 필요하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계약 결혼을 하는 것 또한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앉아 있는 정인을 김 회장이 지그시 바라봤다. 무엇 때문인지 베타인데도 오메가처럼 좋은 향기가 난다. 김하준보다 작긴 했으나 키도 꽤 큰 편이었고 어디 내놔도 빠질 인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부친이 헌신과 봉사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인물 아닌가.
“아드님도… 찬성한 일입니까.”
“그럴 리가. 망나니라고 하지 않았나.”
“근데 어떻게….”
“걱정 말게. 할 걸세. 내가 그렇게 만들 거고.”
자식한테 묻지도 않고 결혼시키려는 아버지도 이상하지만, 아들도 오죽 골치를 썩이는구나 싶었다.
“단, 조건이 있네. 자네가 베타인 건 우리 둘만 알았으면 좋겠는데.”
놀란 정인이 고개를 들었다. 예?
“어머님이 아직 살아 계시고 집사람은 자네가 베타인 걸 알면 어떻게든 반대할 걸세.”
“…….”
“4개월만 참으면 자네가 상상하지도 못할 돈이 생겨. 자네가 책임져야 할 가족들, 그리고 보육원 아이들. 그들만 생각하게.”
“하지만….”
“이 추운 겨울에 그들을 거리로 내몰 생각인가.”
위하는 말인 듯하였으나 자세히 들으면 거의 협박에 가까웠다. 정인은 입을 다물었다. 21세기에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계약 결혼이라니. 게다가 정인은 선천적으로 알파 사내와 잘 맞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자, 김 회장이 종이를 정인에게 더 밀어 준다.
“시간을 줄 테니 곰곰이 생각해 봐. 내 비서가 명함을 남길 걸세. 생각이 정리되면 그쪽으로 연락을 주면 고맙겠네.”
김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정인이 고개를 들고 그를 다급하게 불렀다. 막상 불렀는데 입은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제 부탁이 뻔뻔하게 들리실 줄 압니다. 근데, 결혼 말고, 그냥 돈만 빌려주시는 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어떻게든 갚겠습니다.”
내려다보는 김 회장의 눈빛은 단호했다.
“돌아가신 아버님의 유언은 딱 하나야. 자녀의 혼인.”
정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혜를 왜 꼭 혼인으로 갚아야 하는지는 모르나, 그냥 도와줄 것 같지는 않았다. 김 회장이 밖으로 나가자 그의 비서가 정인에게 명함을 주고 사라졌다.
그들이 떠나자마자 다혜가 들어왔고 테이블에 놓인 명함을 확인하고는 눈이 휘둥그렇게 커져 호들갑을 떨었다.
“우진 그룹? 내가 아는 그 우진 그룹 맞아? 우리나라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그 우진?”
어떻게 된 일이냐고 꼬치꼬치 캐물었으나 도무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 사채업자 김춘호에게 전화가 걸려 온다. 흰 종이와 휴대전화를 번갈아 보는 정인의 눈빛이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
김 회장은 서재에 머물며 창밖을 내다봤다. 대한이 지났지만, 여전히 추위는 매섭고 오늘따라 날씨가 더 을씨년스러웠다. 돌아선 김 회장은 자리에 앉아 습관처럼 담배를 찾아 물었다. 앞에서는 윤 비서가 서서 김 회장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흠은 없고?”
김 회장은 류정인에 대해 따로 더 알아볼 것을 지시했다. 과거에 책잡힐 만한 짓을 하진 않았는지. 큰 결격 사유는 없는지.
윤 비서의 말에 따르면 그는 평일엔 가게에서 일하고 쉬는 날에도 어김없이 보육원 일을 도왔으며 그동안 번 것도 대부분 보육원으로 들어갔단다. 같은 나이인데도 김하준과 비교가 된다.
“류정인 돈줄 틀어막아. 돈 빌렸다는 그 사채업자한테 연락했지?”
“예, 회장님.”
“더 압박하라고 해. 궁지에 몰리면 뭐든 물겠지.”
“예.”
“그리고 하준이 그놈은….”
김하준 이름 석 자만 말해도 골이 지끈거린다. 망할 녀석. 부인인 주혜련이 결혼에 대해 슬쩍 흘린 거 같은데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다. 더 괘씸하다. 자신을 아예 무시하겠다는 작정 아닌가.
“그놈이 구미 당길 만한 걸 찾아봐.”
윤 비서가 대답하려고 하는데 문이 벌컥 열리면서 김하준이 들어온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걸 보아하니 출금 금지당한 걸 이제야 알았나 보다. 뒤따라온 주혜련이 아들을 붙잡아 말리려 했으나, 하준은 버럭 성질부터 냈다.
“진짜 이러실 거예요?”
김 회장이 담배를 비벼 끄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뭘.
“어떻게 비행기도 못 타게 만들어요? 내가 죄인이에요?”
하준은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소속사 배우가 해외에서 촬영하다가 다쳤고, 현지 병원에 입원했다며 연락이 왔다. 서둘러 출국하려고 공항으로 갔는데 어이없게도 출국 정지라니. 뭔가 착오가 있는 것 아니냐고 따지다가 김 회장을 떠올렸다.
“저한테 복수하시는 거예요?”
“너는 내 발목 잡는 것도 모자라 자르려고 하잖냐.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렇게 화를 내.”
“알았어요. 알았어. 이제부터 안 그럴 테니까. 당장 조치 취하세요. 저 바로 나가야 해요.”
“네 엄마한테 들어서 알 게다. 오늘 그 애 만났어.”
화가 훅 치밀었다. 난데없이 출국을 정지했나 했더니 이유가 다 있었다.
“아버지!”
언성을 높이자 김 회장이 아들을 똑바로 직시한다. 가뜩이나 고집스럽게 보이는 그의 입매가 더 심하게 뒤틀렸다.
“잔말 말고 결혼해.”
“노망나셨어요?”
“4개월만 살아. 그때 가서 이혼하든 뭘 하든 상관 안 해. 대신 결혼만 해. 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줄 테니.”
하준은 기막힌 표정으로 김 회장을 노려봤다. 노인네가 드디어 노망이 났나 보다. 그깟 선거 때문에 아들 인생을 팔아 치울 작정을 하다니.
“그렇게 하고 싶으면 아버지가 한 번 더 가시면 되겠네요.”
이 자식이 그걸 말이라고. 김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주혜련이 부리나케 남편을 뜯어말렸다. 하준은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상대방도 아버지가 무슨 꿍꿍인지 알고 있어요?”
“알다마다.”
기가 찼다.
“그런데도 하겠대요?”
만약 그렇다면 그 인간도 정상은 아니다. 선거에 미친 늙은 노인네와 쿵짝이 맞아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한다니. 마침 윤 비서의 전화가 울린다. 돌아서 짧은 통화를 한 뒤 그가 김 회장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순간 김 회장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진다. 하준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무래도 그 애는 너하고 결혼할 생각인 것 같구나.”
***
끊어진 전화를 보며 정인은 허망한 표정으로 웃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러나 무를 수도 없었다. 며칠간의 말미를 주겠다던 사채업자들이 갑자기 말을 바꿨으며 돈을 빌려주기로 했던 지인들도 하나같이 연락 두절이었다.
양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나서 침대에 가서 모로 누웠다. 쥐 죽은 듯 조용한 밤이다. 엄마에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다. 당장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를 만나고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다. 계약 결혼이라….
연애도 연애지만 결혼은 전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4개월…. 오늘따라 유독 더 춥게만 느껴진다. 시린 발끝을 이불 안으로 집어넣고 나서 몸을 쉼 없이 뒤척였다. 잠이 오질 않는다. 어떤 게 옳은 선택인지 모르겠으나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알파와 결혼이라….”
자꾸만 며칠 전 본 김하준이 떠오른다. 차라리 지금처럼 힘들 때 봐서 다행이다. 아니라면 꽤 상처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밤새 그 얼굴을 반복해서 떠올리느라 하얗게 지새웠을지도 모르겠다.
정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끝난 인연이다.
***
“진짜 안 가실 거예요?”
두영이 오전 내내 책상에 앉아 요지부동인 하준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1시간 전에도 윤 비서가 연락해 시간에 맞춰 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몇 번이고 신신당부했었다.
“쓸데없는 참견 말고 네 일이나 해.”
정말 갈 생각이 없는 걸까.
“우선 만나만 보세요. 마음에 안 들면 그때 가서 결정하시면 되잖아요.”
“싫어. 꼰대 장단에 맞춰 줄 생각 없어.”
“혹시 알아요. 끝내주는 미인이 나올지.”
하준이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싱긋 웃는다.
“그럼 네가 만나고 올래?”
예? 농담인 줄 알았는데 눈빛이 반짝인다. 두영은 뒷골이 서늘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말투가 급격하게 다정해졌다.
“잘됐다. 네가 갔다 와.”
“농담하지 마세요.”
“가서 앉아 있기만 해. 아니, 진상 짓 좀 떨고 와. 상대가 진절머리 칠 정도로.”
그런 거라면 대표님이 잘하시잖아요. 나오는 말을 꿀꺽 삼켰다. 표정을 보니 진심이다. 도망가려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옆으로 와 앉더니 손목에 찬 시계를 풀어 두영에게 안겨 준다.
두영이 기겁하고 돌려주려 하자 이번엔 붙들어 억지로 쥐여 줬다.
“어차피 나 저녁에 약속 있어. 거기 갈 시간 없으니까, 네가 대신 다녀와라.”
금요일 밤 저녁 약속이란 건 뻔했다. 늘 그렇듯 지인들을 불러 모아 시끌벅적한 파티를 할 생각이다.
“회장님한테 저 죽어요.”
“나한테 죽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
그건 맞는 소리다. 김 회장한테는 김하준이 시켜서 어쩔 수 없었다고 울먹이며 하소연하면 되지만 김하준에겐 그 어떤 변명도 통할 리가 없다. 한번 사람을 괴롭히면 집요해지는 구석이 있으니까.
손에 쥔 시계를 바라봤다. 12개의 다이아몬드가 영롱한 빛을 내며 반짝였다. 적어도 수입차 한 대 값을 될 듯하다. 돈이 많으니 이런 걸 척척 내주는구나. 얄미운데 존나 부럽다. 한숨을 내쉬자 김하준이 손을 다정하게 감싼다.
두영은 소름이 끼쳐 얼른 떼어 내고 떨어져 앉았다.
“다녀올 거지?”
자상하게 묻는 김하준 얼굴을 보니 차마 더 거절은 못 하겠다.
“가서 앉아 있기만 할 거예요.”
“알았어.”
투덜대면서도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김 회장이 억지로 결혼을 시키려는 걸까. 또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김 회장이 알면 둘 다 죽을 거 같은데. 다녀오겠다고 말하자 김하준은 주먹을 쥐고 파이팅을 외쳤다. 얄미웠다.
그렇게 회사를 나와 차를 끌고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맞선 장소로 종종 이용하는 호텔 커피숍이었는데, 전에도 두어 번 온 적이 있었다. 먼저 도착한 두영은 안쪽에 자리를 잡고 주변을 살폈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10분 정도가 남았다. 혼자 앉은 사람들이 몇 명 보인다. 저들 중에 있을까. 마침 커피숍 입구에 누군가 나타났다. 그는 직원과 짧은 대화를 하더니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왔다.
키가 크고 검은색 슈트를 빼입은 남자는 한눈에 봐도 외모가 출중했다. 지켜보다 안내한 직원을 불러 확인했는데 김하준의 맞선 상대가 맞다. 두영은 감탄하며 남자의 동태를 살폈다.
창가에 앉은 남자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긴장한 얼굴로 넥타이를 고쳐 맸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피부가 하얗다 못해 투명하다. 옆선은 마치 그림 같았고 회사에 소속된 배우들과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 외모였다.
물을 마시는 남자의 얼굴에 초조함이 엿보인다. 얼굴을 뚫어지게 보던 두영이 불현듯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왜 낯이 익지.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하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얼굴 확인. 진짜 미남이에요.]
메시지를 확인한 김하준은 예상대로 답장이 없다. 두영을 보내 놓고 전혀 신경을 안 쓴다는 증거다. 지금쯤이면 파티에 입을 옷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두영은 주위에 혹시 김 회장이 심어 놨을지 모를 심복이 있나 한 번 살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의 얼굴을 가까이 확인하고 싶어 근처로 다가갔다. 그러나 두영은 바로 코앞에서 눈이 동그랗게 커져 발길을 홱 돌려야 했다. 제자리로 가는데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와서 박힌다.
후다닥 도망치듯 원래 자리에 앉아서는 몸을 낮췄다.
“맙소사…!”
왜 낯이 익었는지 뒤늦게 기억이 났다. 얼마 전 모텔방에서 봤던 그 남자다. 하준에게 주먹을 휘둘렀던. 짧은 만남이었으나 워낙 외모가 출중해 쉽게 잊힐 얼굴은 아니었다.
이걸 인연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악연이라고 해야 하나.
휴대전화를 꺼내서 카메라를 켠 뒤 조심스럽게 남자의 옆모습을 찍었다. 김하준에게 바로 전송하려는 순간 누군가 휴대전화를 홱 채 간다. 놀라서 전송 버튼을 눌렀고, 고개를 들다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조금 전까지 창가에 앉아 있던 남자가 눈앞에 서서 두영의 휴대전화를 쥔 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손을 허공에 띄운 채 두영은 입을 달싹였다.
“왜 남의 사진을 함부로 찍으세요?”
서늘한 음성과 눈빛이다. 두영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고민했다. 약속은 약속이니 급한 대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만나 뵙기로 한 김하준입니다.”
뻔뻔스럽게 웃는데 남자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한다. 얼굴을 기억하나. 아니다. 당시 모자를 쓴 데다 아주 잠깐 마주친 거라 알 리가 없다.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남자는 손을 잡는 대신 고개를 끄덕,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류정인입니다.”
***
으음. 소파에 누워 자던 하준은 계속되는 숙취에 머리를 움켜쥐고 일어나 앉았다. 아무래도 어젯밤 파티에서 술을 너무 마셨나 보다. 머리는 빙빙 돌고, 속은 메슥댔다.
갈색의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헝클어졌고, 셔츠 여기저기엔 입술 자국과 화장품 가루가 묻어 있었다. 사람들이 떠난 집엔 술병과 남은 음식들이 나뒹굴었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하준은 냉장고로 가 생수를 하나 꺼내 벌컥벌컥 들이켜고서는 샤워를 하기 위해 셔츠를 벗었다.
온몸에 오메가들의 냄새가 진동한다. 휴대전화를 찾아 전원을 켜자마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는 생수를 입에 댄 채 메시지를 눈으로 확인했다. 가족들, 그리고 일 때문에 온 연락과 이두영에게 온 여러 개의 문자.
두영에게 온 메시지를 맨 마지막부터 거꾸로 읽으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야기는 잘 마쳤어요. 그쪽에서 먼저 이 결혼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저도 그러자고 했어요. 월요일에 뵐게요. 술 조금만 드세요.]
피식. 하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기특하네, 이두영.
[아직도 파티 중이세요? 저는 그분하고 밥 먹으러 왔어요. 성격이 좋아요. 대표님이 안 만나시면 제가 만나 볼까요?]
그래 네가 만나면 되겠다. 웃으며 화면을 내리자 사진 한 장이 나온다. 멀리서 찍은 사진 아래로 잘생겼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우스웠다. 잘생겨 봤자지. 아무 생각 없이 사진을 클릭해 확대하던 하준은 그대로 굳었다.
잘못 봤나 싶어 사진을 더 확대해서 자세히 들여다봤다.
[놀라셨죠? 저도 깜짝 놀랐잖아요. 다행히 저 못 알아보는 것 같아요. 이름이 류정인이래요. 혹시 모르니 외워는 두세요. 다시 연락드릴게요.]
하준은 한 대 맞은 표정으로 사진 속 류정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어째서 네가 거기에….
갑자기 술이 확 깨며 동시에 퍼즐이 하나둘 맞춰진다. 할아버지의 고향. 그리고 류정인 또한 그곳 토박이다. 자신이 기억하는 바로는 류정인의 아버지는 목사로 보육원을 운영했다. 사귈 때도 농담처럼 동생이 백 명은 될 거라고 말했었다.
그제야 아버지가 왜 그토록 류정인하고 결혼시키지 못해 안달인지 이해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서둘러 두영에게 연락했으나, 받질 않는다.
***
김 회장은 태블릿 속 사진을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김하준이 순순히 맞선 장소에 나가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으나 이번에도 그럴 줄은 몰랐다. 그동안 이두영이 대타로 나갔어도 모른 척했건만 끝까지….
게다가 한 시간 전 류정인에게 연락이 왔다. 그는 무엇 때문인지 거절 의사를 밝혔다. 의외였다. 류정인에게 가장 큰 약점은 그가 보살펴야 할 가족과 부모 잃은 아이들이다. 지금도 그들을 지키기 위해 사방으로 돈을 구하러 뛰어다니고 있으면서 왜 자존심을 내세우는 걸까.
그는 태블릿을 한쪽에 내려놓고 피곤한 듯 얼굴을 쓸었다.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구나.”
윤 비서가 태블릿을 회수했고 안경을 추켜올렸다.
“사채업자 김춘호에게 연락 넣었습니다. 오늘 류정인 씨 가게로 찾아갈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열한 방식이다. 처음 사채업자는 류정인에게 한 달의 말미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 회장의 사주 덕분에 그 기간을 반으로 줄였다. 그들은 사람 피 말리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었기에 어떤 짓으로 류정인을 괴롭힐지도 짐작이 됐다.
“다치게 하진 마라.”
“예, 회장님.”
“하준인.”
“아침에 박 기사를 찾았답니다.”
“어째서.”
“며칠 전에 갔던 이태원 가게가 어디 있는지 위치를 확인하려고요. 그래서 제가 알려 주라고 했습니다.”
듣고 있던 김 회장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싫다고 맞선 장소에도 안 나온 놈이 거긴 왜. 의아한 마음이 들었고, 한편으로는 조금 기대가 됐다. 혹여 마음이 바뀐 건 아닐까.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걸까. 자식 놈이지만 도저히 속을 모르겠다.
***
욱, 욱, 변기를 붙잡고 구토하던 정인은 입과 얼굴을 닦고 밖으로 나왔다. 눈앞이 빙빙 돈다. 식탁 위에는 어젯밤 먹다 남은 소주와 과자가 놓여 있었다. 오랜만의 술이라 그런지 고작 반병에 만신창이가 됐다.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 걸터앉자 맞선에 나가느라 입은 정장이 눈앞에 걸려 있다.
[안녕하세요, 김하준입니다.]
하.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을까. 김만호 의원의 아들이 김하준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학창 시절 김하준의 아버지가 사업을 하는 건 알았으나 그 정도로 잘사는지는 몰랐다.
[망나니 아들놈이 있네.]
상대가 나라는 걸 미리 알았을까. 혹시 그래서 대타를 내보낸 걸까.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참한 꼴은 직접 보이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긴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전화가 울린다. 최 사장이다. 물끄러미 보던 정인은 휴대전화를 집었다.
그가 아침부터 무슨 일일까. 전화를 받자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인 씨.]
“예, 사장님.”
[정인 씨 무슨 일 있어?]
“네?”
[가게 빼 달라고 했다며.]
아. 정인은 건물 주인이 최 사장과 친한 사이임을 떠올렸다.
“아니에요….”
[돈 문제야?]
정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섭섭하네. 나하고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 부탁 정도야 할 수 있잖아.]
정인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떨구었다. 침대 머리맡에 올려 둔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렸다. 최 사장이 꽤 큰손이라는 건 알고 있으나, 돈을 빌리는 대가로 남자가 무엇을 요구할지 짐작할 수 없었다.
[점심에 잠깐 볼까? 그때 그 호텔 알지?]
지금으로선 뾰족한 수가 없다. 돈 나올 구멍도 없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네, 잠깐 찾아뵐게요….”
잘 생각했어. 최 사장이 작은 소리를 내어 웃는다. 시간과 약속을 정한 뒤 정인은 전화를 끊고 탈진한 듯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쿵쿵, 쿵쿵, 위층에서 소음과 함께 말다툼 소리가 들려온다. 커플이 사는 것 같은데 하루가 멀게 다투는 중이었다.
두 눈을 꼭 감자 김하준 얼굴이 떠오른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그럴수록 가슴이 답답해져 더는 누워 있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목이 졸리는 것 같은 기분에 창을 열고 찬 바람을 맞으니 그제야 숨통이 트인다.
***
김하준은 차에 앉아 앞에 가게만 노려봤다. ‘렛미인’이라고 적힌 작은 가게 간판이 보였고, 아직 문을 열지 않았는지 셔터가 내려가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11시다.
아침에 메시지를 확인하고 바로 이두영에게 연락했으나 류정인에 대해 자세한 건 모른다고 했다. 그러다 아버지의 운전기사에게 연락해 며칠 전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김 회장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혹시 둘의 과거를 아는 걸까. 짐작하건대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 시절 하준은 워낙 조심성이 많았으니까.
밖을 주시하는데, 웬 여자 하나가 스쿠터를 타고 와서 가게 앞에 주차한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셔터를 올린 뒤 문을 열고서는 안으로 들어갔다. 류정인도 곧 나타나겠지. 좌석에 등을 기대고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왜 이곳에 있지, 라는 생각을 했다. 만나서 뭘 어쩌자는 건데. 순간 괜히 왔다는 후회가 든다. 돌아가려고 시동을 걸고 차를 뒤로 빼는데 검은 차 두 대가 가게 앞에 멈춰 선다.
류정인? 하지만 멈춘 차에서 내린 건 류정인이 아니라 건장한 사내들이었다. 흰색 정장을 입은 사내부터 알록달록한 티셔츠까지, 보기에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
분위기가 살벌하다. 덩치들이 몰려 들어가고 두 명은 입구를 막고 서더니, 5분 뒤 손님 하나가 들어갔다가 도망치듯 바로 나온다. 하준은 출발을 미룬 채 가게 밖에서 상황을 주시했다.
***
열이 받은 다혜는 소파에 앉아 진을 치고 있는 덩치들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봤다. 출근하자마자 낯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는데, 행색이 딱 봐도 건달이었다. 덕분에 예약하고 온 첫 번째 손님은 다음에 오겠다며 도망치듯 되돌아갔다.
“몇 번을 말해요. 정인이 없어요. 며칠 쉴 거예요.”
흰 정장을 입은 남자가 다리를 꼬고 빙긋 웃더니 칼을 꺼냈다.
“곧 올 거야. 내가 연락했거든.”
다혜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인은 점심에 예약이 있다고 했다. 이곳에 와 봐야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것 같아 오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내려고 하는데 부하 중 하나가 휴대전화를 빼앗는다.
내놓으라고 소리를 지르는 순간 가게 문이 벌컥 열리면서 류정인이 뛰어 들어왔다. 정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앉아 있는 김춘호를 노려봤다. 김춘호는 마치 제집인 양 테이블에 발을 올리고 칼로 손톱을 손질 중이었다.
그는 들고 있던 칼을 흔들면서 정인을 반갑게 맞이했다.
“왔네. 류정인 씨.”
정인이 가게를 가득 채우고 앉아 있는 덩치들을 둘러본 뒤 김춘호를 바라봤다.
“날짜가 아직 남은 거로 아는데요.”
“그랬지. 근데, 내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이러다 정인 씨가 가게라도 정리하고 튀면 어떻게 해. 그럼 나만 손해 아닌가?”
김춘호의 능글맞은 태도에 정인은 이를 꽉 물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나 그는 한 달이던 날짜를 자꾸만 앞당기며 재촉했다. 정인을 압박이라도 하려는 듯.
변호사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으나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계약 무효 소송을 할 수는 있으나 입증할 방법이 어렵고 재판 기간도 길어진다고. 어쨌든 빌려 간 돈은 갚아야 하니 차라리 돈 빌려준 사람을 잘 설득하란다.
“영업하는 가겝니다. 오늘은 돌아가 주세요.”
김춘호가 가지고 놀던 칼을 테이블에 툭 던져 놨다.
“어쩌지. 그건 힘들겠는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조른다고 돈 나오지 않아요. 저도 노력하고 있어요. 안 갚겠다는 거 아니잖아요. 갚을 테니까, 시간만 더 주세요.”
김춘호의 표정은 단호했다. 부탁한다고 해서 움직일 것 같지가 않다. 정인은 한숨을 내쉬며 다혜에게 다음 예약 손님을 취소하라고 이야기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입구에 매달아 놓은 종소리가 울린다. 손님을 돌려보내려고 그쪽으로 걸어가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등장했다.
몇 걸음 떼던 정인은 그대로 돌처럼 굳었고, 들어오던 김하준 역시 입구에 멈춰 가만히 서 있었다. 다혜가 나서며 지금 영업 안 해요. 나중에 다시 오세요 하고 말했으나 김하준은 개의치 않고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그는 여유롭게 가게 곳곳을 훑었다. 정인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돌아봤다. 김하준이 왜 여기에…. 김하준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맞은편에 있는 김춘호를 건방진 시선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너네 사장?”
정인이 대답하지 않자 김춘호가 웃었다.
“누구? 재미있는 친구네.”
분위기가 심상찮다. 정인은 김춘호에게 그만 나가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자 김춘호는 담배를 꺼내 물고 김하준을 위아래로 훑는다. 입고 있는 옷부터 시작해 구두, 시계, 모두 비싼 거다. 가짜가 아니라면 남자는 재벌이나 그 비슷한 수준일 게 분명했다. 게다가 류정인과 기류가 묘하다.
그는 일어서며 정인을 향해 능구렁이처럼 웃었다.
“잘 물어 봐. 돈 나올 구멍이 생길 것도 같으니까.”
김춘호는 부하들을 이끌고 가게를 떠났다. 덩치들이 사라지자 가게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한숨을 내쉰 정인은 갑자기 등장한 김하준을 바라봤다. 김하준은 모텔에서 봤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정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
정인은 다혜에게 잠시 자리를 피해 달라고 부탁했다. 둘만 남게 되자 분위기는 더 적막하고 어색했다. 차를 주느냐고 묻고서 정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동안 하준은 가게 안을 살폈다.
동양풍의 인테리어가 이색적이었다. 여기저기에 타투 도안과 직접 그린 그림. 그리고 더 안쪽으로는 간이침대와 시술을 하는 기계가 있었다. 어릴 적 그림을 꽤 잘 그리긴 했으나 이런 직업을 갖게 될 줄은 몰랐다.
하준은 정인의 뒤통수를 보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오는 내내 궁금했다. 류정인은 왜 결혼을 없던 일로 하자고 했을까. 막상 얼굴을 보니 알 것 같기도 하다.
돌아선 정인이 다가와 커피를 내밀었다.
“마셔.”
찻잔에 머물던 시선이 류정인의 얼굴로 향했다.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던 얼굴이 그대로다. 차라리 팍삭 늙거나 몰라보게 변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 결혼 상대 나인 거 알았지?”
하준의 물음에 정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어제 일을 떠올렸다. 처음엔 맞선 상대의 이름이 김하준이라고 해서 놀랐고, 얼굴이 낯익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모텔에서 김하준과 함께 있었던 사람임을 깨닫고는 더더욱 놀랐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으나, 대화를 나눌수록 그가 김하준을 대신하여 나왔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우연치고는 기가 막혔다. 살면서 한 번은 만나지 않을까 했는데 11년 만에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찻잔에 손도 대질 않자 정인이 한마디 한다.
“안 마실 거면 가.”
정인은 그 말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하준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그 뒷모습을 노려봤다. 난 왜 여기까지 왔을까. 병신처럼 뭘 바라고. 어쩌면 확인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할 만큼 구차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보면 위안이 될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상처받은 것에 대한 보상 심리. 복수심. 증오심.
덕분에 옛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가. 너 싫어졌어. 그러니까, 눈에 띄지 마. 재수 없어.]
“내 말 못 들었어? 가라고 했잖아.”
[내 말 못 알아들었어? 나 다른 사람 좋아해. 병신 같은 너보다 걔가 더 좋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아는 척하지 마.]
왜 그랬을까, 나한테. 그때 넌 나한테 왜 그런 상처를 줬을까. 어떻게 하루아침에 마음이 돌아섰을까. 왜 그렇게까지 모질게 대했을까. 대체 왜 나한테….
류정인은 마치 하준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하준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무시하면 그만인데 그게 안 된다. 상처 주고 싶다. 류정인을 아프게 하고 싶다. 복수하고 싶다.
“돈이 궁했으면 자존심은 챙기지 말았어야지. 왜. 나라고 하니까 창피했어?”
물건을 정리하던 정인이 멈추고서 고개를 돌린다. 그의 눈동자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상처 입히고 싶다. 악몽 같던 시절을 선물한 너에게 이제라도 복수하고 싶다. 나쁜 마음이 물밀듯 밀려왔다.
“나가.”
나는 예전의 김하준이 아니다. 류정인 말 한마디에 설레고, 들뜨고 잠 못 들던 김하준이 아니다. 가란다고 가고, 나가란다고 나가는. 그런 병신 같은 김하준이 아니다. 저 예쁜 얼굴이 한껏 일그러지는 꼴을 직접 보고 싶다.
하준은 성큼성큼 다가가 정인의 팔을 붙들었다.
“결혼하자.”
정인의 눈동자가 커진다. 뭐?
“결혼해.”
정인이 붙잡힌 팔을 뿌리치며 하준을 노려봤다.
“제정신이야?”
“너 돈 필요하잖아.”
류정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하준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난 네 이런 표정이 보고 싶었어.
“얼굴도 모르는 놈하고 결혼할 만큼 궁핍하잖아, 너.”
대놓고 무시하자 정인의 아랫입술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나하고 결혼해서 네가 얻을 게 뭔데?”
하준은 대답 대신 삐딱하게 미소 지었다. 네가 받을 고통? 대놓고 말하진 않았으나 얼굴에 티가 났을 것이다. 순식간에 류정인 얼굴이 확 굳어진 걸 보면. 그는 당장 꺼지라며 하준의 어깨를 밀쳐 냈다. 뒤로 물러서던 하준이 명함 케이스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고 그것을 테이블에 올려 뒀다.
“생각 바뀌면 연락해.”
정인은 이를 갈았다.
“꺼져.”
“잘 생각해. 자존심만 챙긴다고, 네 사정이 나아지진 않아.”
저게 끝까지. 정인은 참지 못하고 옆에 있던 휴지를 집어 던졌다. 날아간 휴지가 얼굴 옆을 비껴갔는데도 하준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피식 웃더니 나가 버린다. 졸지에 혼자 남겨진 정인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김하준이 여기 찾아올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제 눈을 의심했다. 그러면서도 아주 잠깐이지만 반가웠다. 하지만 그것은 곧 여러 감정으로 바뀌었다.
맥이 풀려 앉아 있는데 다혜가 들어왔다.
“괜찮아?”
조심스럽게 묻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못 볼 꼴 보여서 미안해.”
“됐어. 우리 사이에 뭘.”
돌아서던 그녀가 테이블에 놓인 명함을 발견하고는 집어 든다. 김하준?
“아까 그 사람이야?”
“응….”
“무슨 사인데?”
둘 사이를 일컫는 말이 무엇일까. 겨우겨우 고민 끝에 생각해서 꺼낸 말은 이거였다.
“동창”
명함을 보던 그녀가 눈을 크게 뜬다.
“이 사람 제이엔터테인먼트 대표야?”
말이 없자 와서 명함을 눈앞에 내밀어 준다. 고급스러운 검정 종이 위에 대표 김하준 글자가 또렷하다. 꽤 유명한 기획산데 거기의 대표라니. 성공했네, 김하준. 아니다, 예전 김하준을 생각하면 뭘 해도 성공할 놈이었다. 성실하고 똑똑하고.
그런데도 화려한 배우들 틈에 있는 김하준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안 된다. 만약 직업을 가졌다면, 연구원이나, 선생님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넋이 나가 있는데 전화가 울린다. 류민아다. 받자마자 류민아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엄마가, 병원에, 나머진 울음에 섞여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다.
***
차량 계기판의 속도가 점점 높아졌다. 끓어오르는 감정이 도무지 주체가 되질 않았다. 한쪽에 차를 세워 둔 뒤 하준은 생수를 꺼내 단번에 들이켰다. 조금 전 본 류정인 얼굴이 자꾸 떠올라 고소하면서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김하준은 바로 아버지인 김 회장에게 연락했다.
[애비 속을 뒤집어 놓고 어쩐 일이야.]
퉁명스러운 노인네의 목소리에 하준은 고민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결혼할게요. 날짜는 최대한 빨리 잡아 주세요.”
조용하다. 혹시 끊겼나 싶어 봤는데 아니다.
[무슨 꿍꿍이냐.]
“하라면서요. 대신 저한테 줄 유산 미리 땡겨 받을 겁니다.”
[너, 이 새끼….]
“싫으시면 없던 일로 하고요.”
허. 기막혀하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서 들려왔다. 김하준은 다 마신 생수 통을 옆 좌석에 던졌다. 목을 축였는데도 갈증이 나서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일단 집으로 와. 와서 얘기해.]
김 회장의 목소리가 느슨해졌다. 통화는 끊겼으나 하준은 좀처럼 출발하지 못했다. 진짜 류정인이네. 내 결혼 상대가 진짜 류정인이었어. 철없던 시절 약속한 결혼이 현실이 됐다. 헛웃음이 났다. 류정인이 저 꼴로 사는 걸 보니 묘하게 희열이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억울했다. 뭐가 억울한지 몰라도 자꾸만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
어떻게 운전을 했는지 모른다. 차를 세워 두고 정인은 급하게 응급실로 들어갔다. 평일인데도 응급실은 응급환자와 보호자들로 북적였다. 입구와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민아가 정인을 발견하고는 일어선다. 가까이 가자 침대에 누워 있는 김은혜가 보였다. 그녀는 팔에 링거를 매단 채 잠들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데… 길에서 쓰러졌다고 연락받았어.”
“왜.”
“왜긴 왜야. 밥도 굶고 계속 삼촌 찾으러 다녔으니까 그렇지.”
정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며칠 만에 보는 김은혜의 얼굴이 수척하다. 그동안 못 잤는지 눈꺼풀 아래는 쑥 들어가고 입술은 마르고 갈라져 피가 맺혔다. 몰골이 말이 아닌데 앙상한 팔에 바늘까지 꽂혀 있으니 애처로울 지경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담당 의사를 만나러 갔다. 머리에 씨티도 찍고 혈액검사를 했는데 다행히 별다른 이상은 없단다. 스트레스와 과로로 일시적인 어지럼증 현상이 나타난 것 같다며, 집에서 푹 쉬라는 권유를 받았다.
정인이 다시 돌아왔을 때 김은혜는 여전히 자는 중이었다. 나쁜 꿈을 꾸는 걸까. 자는 동안에도 미간이 일그러지고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속이 상하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떨구었다.
“오빠…괜찮아?”
민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아니, 사실은 괜찮지 않아. 죽을 만큼 힘들다. 어째서 하루아침에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삼촌을 사방으로 수소문해 찾고 있으나 그를 잡는다고 해서 돈이 남아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결혼하자.]
[잘 생각해. 자존심만 챙긴다고, 네 사정이 나아지진 않아.]
차가운 눈빛. 멸시하는 말투. 그건 언젠가 자신이 김하준에게 보였던 것과 같은 얼굴이다. 그때 너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그 죄를 이제야 받는 걸까. 얼굴을 파묻고 있는데 머리카락을 만지는 따스한 손길이 느껴진다. 고개를 드는 정인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이제 막 눈을 뜬 모친의 얼굴에 스러질 것 같은 미소가 번진다.
“언제 왔어?”
목이 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정인아. 왜 그래? 말이 없자 그녀가 다시 정인을 부른다. 정인은 입술은 꽉 깨물고서 가까스로 감정을 추슬렀다. 그다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들어 김은혜를 향해 미소 지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
“진심이세요?”
두영은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했다. 뜬금없이 맞선 상대자의 주소를 아느냐고 전화로 묻길래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난데없이 결혼이라니. 분명 며칠 전 맞선자리에 나가기 싫다고 저를 대타로 내보내지 않았었나.
물론 상대가 잘생기고, 매력적이긴 했으나, 김하준 주변에 그런 사람은 많았다. 그리고 김하준은 누구나 다 아는 비혼 주의다.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꿔 먹은 이유가 아무래도 수상쩍다.
“저는 대표님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그 말에 하준이 피식 웃었다. 내 속을 나도 모르겠는데 남이야 오죽할까. 어제 류정인과 헤어진 뒤 하준은 아버지인 김 회장을 찾아가 이야기를 끝냈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에 김 회장은 기뻐하면서도 변호사를 통해 계약서를 작성하고 공증까지 하겠다고 하니 씁쓸해하는 것 같았다.
반면 어머니인 주혜련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한집에서 결혼을 두고 이렇게 극명하게 반응이 갈리는 게 우스웠다. 눈물이 글썽글썽한 어머니를 다독이고 나서 집으로 돌아온 다음 하준은 많은 생각을 했다.
과연 잘하는 짓일까. 복수는 핑계고 나는 아직 류정인한테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아예 아니라고 부정은 못 하겠다. 그러나 원망하는 것도 사실이다. 여전히 두 개의 감정이 마음속에서 충돌 중이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이해수가 나타난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두영은 경악스러운 표정을 했고 한발 뒤늦게 쫓아온 데스크 직원이 팔을 붙들며 말리는데도 그는 막무가내로 사무실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러더니 들고 온 서류를 책상에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대표님. 어떻게 나한테 이래요!”
두영이 벌떡 일어나 이해수를 말렸다.
“해수 씨, 잠깐. 잠깐만. 진정해요.”
김하준은 그가 던진 서류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것은 이틀 전 등기로 보낸 계약 해지에 관한 내용이다. 배우로서 품위를 손상했고 회사의 이미지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으니 그 일로 계약을 파기한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물건이야? 사람이 도리가 있지. 어떻게 이런 걸 보낼 수가 있어?”
하. 도리라…. 하준은 삐딱하게 웃으며 조금 전 이해수가 한 말을 곱씹었다.
이해수가 처음 배우로 데뷔한 게 스물다섯이다. 당시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가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언제나 당찼으며, 포부가 컸고,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그러나 운이란 녀석은 늘 비껴가기 일쑤였고, 열심히 하는 것과는 다르게 성적은 계속해서 바닥이었다. 점점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여도 회사에선 오히려 두둔하며 언젠가 좋은 날이 있을 거라고 다독였다.
그랬는데 작년부터는 술과 약에 손을 대더니 성격이 점점 신경질적이고 예민하게 변해 갔다. 툭하면 스케줄을 펑크 내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함부로 대해 떨어져 나간 매니저만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계속 참아 주길 바라는 건가.
하준은 양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서서 이해수를 차갑게 바라봤다.
“이봐요. 이해수 씨. 도리가 뭔지 몰라요?”
“뭐라고요?”
“당신이 나 몰래 한 행동은 도리에 맞는 건가 해서.”
이해수의 눈썹이 꿈틀댔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요.”
“스폰, 받았죠?”
꽉 다문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짓씹으면서도 이해수는 김하준이 한 말에 대해 반박을 하지 못했다. 처음 계약할 때 스폰받는 것에 대해서 김하준은 단호한 태도였다. 보통 소속사에서 권하기도 하는데, 김하준은 계약서에 따로 명시할 정도로 싫어했었다.
“더 설명해요? 아니면 내가 증거 사진하고 녹취록까지 까야 하나.”
“…….”
“우리 추잡해지지 맙시다.”
얼음장 같은 음성에 이해수가 부들부들 떨며 노려보다 입술을 깨물고 홱 돌아서서 가 버린다.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내리찧는 그의 구둣발 소리가 사무실 밖으로 사라졌고, 이두영은 한숨을 내쉰 뒤 그가 던진 서류들을 모아 정리했다. 고분고분하게 나가지 않을 거란 것을 알고 있었으나 여기까지 찾아와 막무가내로 굴 줄은 몰랐다.
그는 눈치를 보며 정리한 서류를 김하준의 책상에 올려 뒀다. 하준은 방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했다. 이곳에서 별별 사람을 다 겪다 보니 이 정도는 그에게 일도 아니었다.
하준은 정리해 놓은 서류를 흘깃 보고 외투를 챙겨 일어났다.
“오후에 이 감독하고 약속 있지?”
“예.”
“1시간만 미뤄.”
“어디 가세요?”
“파트너한테.”
두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누구요?
“내 파트너, 류정인.”
이름을 씹어 먹을 것처럼 말한다. 두영은 어이가 없었다. 어느 누가 자기 배우자 될 사람 이름을 말하면서 저런 표정을 지어. 아버지 원수면 또 몰라.
***
정인은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사이에 얼굴이 완전 맛이 갔다. 엄마가 퇴원하는 걸 보고 잠깐 눈을 붙였다가 새벽에 집에 도착했는데, 그 후로 쭉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혜에게 오후에 가겠다고 말해 놨으나 마음이 편칠 않았다. 가뜩이나 요즘 다혜도 마음이 심란할 텐데.
결국 정인은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연신 비비며 차를 몰고 가게로 향했다. 가게 앞에 차를 세우는데 다혜가 소리를 듣고 뛰어나온다. 그러더니 차에서 내린 정인을 붙들고 큰일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야, 그 사람 왔어. 어제 그 사람!”
사채업자? 표정을 보니 그건 아니다. 안으로 들어선 정인은 그제야 이유를 알았다. 김하준이 소파에 앉아 있고 커다란 꽃바구니가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바구니에 붉은색 장미가 얼마나 많은지 근처에 가지도 않았는데 냄새가 진동하는 기분이었다.
정인이 노려보고 서 있자 김하준이 눈짓을 한다.
“와서 앉아. 할 말 있어서 온 거야.”
정인은 마지못해 그곳으로 가 앉았다. 다혜가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 주자 김하준이 꽃을 가리켰다.
“선물. 빈손으로 오기는 뭐해서.”
태도가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말투도, 행동도 친절해졌다. 정인은 눈을 가늘게 늘이며 김하준을 응시했다.
“왜 왔어.”
“아버지한테 이야기했어. 너하고 결혼한다고.”
당당한 태도에 기가 찼다.
“장난해? 난 너하고 결혼할 마음 없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가 울린다. 사채업자 김춘호다. 하준이 받으라고 눈짓을 했고 정인은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여보세요?
[납니다. 류정인 씨. 아침부터 전화해서 미안해요. 좋은 소식은 빨리 알려야 할 것 같아서.]
키득대고 웃는 목소리에 정인은 멈칫했다. 혹시 류동찬이 잡혔나. 하지만 그가 꺼낸 이야기는 예상 밖의 것이었다.
[입금 다 받았어요. 가압류 풀 거고, 서류는 정리해서 돈 주신 분한테 보냈어요. 다신 찾아가는 일 없을 겁니다.]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김하준이 꽃바구니에서 장미 하나를 쑥 뽑아 들고는 이리저리 살펴본다. 급하게 전화를 끊은 뒤 다가가자 하준이 꽃을 든 채로 다리를 꼬고 쳐다보며 여유 있게 웃는다.
“통화 끝났어?”
“뭐야, 너.”
“보통 이런 경우에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하지 않나.”
순간 허탈감이 몰려온다. 다 끝났어? 며칠을 잠 못 자고 뛰어다니고 어머니까지 쓰러지게 만든 돈이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든 것이 해결됐다. 입을 다물고 있자 김하준이 천천히 일어서더니 꽃을 정인에게 건네준다. 정인은 꽃과 김하준의 얼굴을 번갈아 노려봤다.
“이제 마음이 바뀌었어?”
“…….”
“아직도 싫어? 왜? 상대가 나라서?”
정곡을 찌르는 말에 심장이 욱신댔다. 그래, 김하준이 아니었다면 하겠다고 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가 김하준이고,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과 결혼하자고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 도무지 용납이 안 된다.
“편하게 생각해. 너하고 나 사이에 별것 없었잖아.”
“…….”
“키스 몇 번, 그게 다였지.”
“…….”
“설마, 아직도 내가 그때의 김하준처럼 보여?”
대답하지 않자 웃으며 앞으로 다가왔고 정인의 손에 장미를 쥐여 준다. 그러고 나서 몸을 밀착해 입술을 귓가로 가져갔다. 오랜만에 맡은 김하준의 향 때문에 머리가 핑 돌 지경이다. 비틀거리는 정인의 허리를 하준이 감쌌다.
정인아. 다정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말들은 장미의 가시만큼이나 아팠다.
“몸을 팔라는 것도 아니잖아. 물론, 네가 원하면 계약서에 그 부분은 따로 명시해 둘 수도 있어.”
“…….”
“너 좋아하잖아.”
장미를 쥔 정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 놈하고 막 뒹구는 거.”
장미의 가지가 손에서 우득, 부러졌다. 어깨를 밀쳐 내자 짓궂게 웃는 김하준의 얼굴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어젯밤 많은 생각을 했다. 김하준이 갑자기 결혼하자고 한 이유에 대해. 혹시나 했던 마음을 그는 무참히도 짓밟았다.
“나한테, 복수가 하고 싶어?”
정인의 물음에 하준이 피식 웃었다.
“그런 건 마음이 남아 있을 때 이야기 아닌가.”
“그럼.”
하준의 눈이 아래를 향했다가 위로 올라온다.
“너하고 결혼하는 대신, 아버지한테 유산 미리 받기로 했어.”
“…….”
“어마어마한 액수지. 네가 상상도 못 할 만큼.”
“…….”
“결국 우리 둘 다 돈 때문인 거야. 그러니 어렵게 생각하지 마.”
“…….”
“그런 표정으로 날 바라보지도 말고.”
내가 어떤 표정으로 바라봤는데. 속내를 들킨 기분에 정인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김하준은 뒤로 물러서며 매너 좋은 사람처럼 웃었다. 그럼 연락 기다릴게.
가게 안에서 그가 사라졌고 혼자 남은 정인은 기운이 쏙 빠지는 느낌에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앞에는 그가 남기고 간 꽃바구니가 놓여 있다. 붉은 장미. 그걸 보는 정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진다.
류정인. 정인아.
다정하게 저를 부르는 김하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인다.
***
여름이라 정수리가 타들어 갈 것처럼 볕이 뜨거웠다. 냇가에서는 아이들이 고기를 잡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는데, 한 아이가 물에 빠지자 주위에서는 깔깔대고 난리가 났다. 커다란 나무 밑에 앉아 더위를 피하던 정인은 셔츠의 아랫부분을 잡고 연신 펄럭이다가 그 광경을 보고 웃음이 터졌다.
그러면서도 한 번씩 뒤를 돌아봤다. 김하준이 온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늦는 걸까. 시간을 확인하고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누군가 정인의 어깨를 짚는다. 봤더니 강해찬이다. 그는 같은 동네에 살았고 한 살이 많았으며 정인과는 어릴 적부터 형제처럼 자랐다.
“여기서 뭐 해. 물에 안 들어가?”
“하준이 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어.”
“그 범생이?”
묘하게 비꼬는 투였기에 정인은 눈을 흘겼다. 김하준이 범생이인 것도 맞고 저와 안 어울리는 것도 맞다. 그래서 사람들은 둘이 붙어 다니는 걸 신기하게 생각했다. 아아, 덥다. 강해찬이 정인의 어깨에 기대려 했고, 머리가 닿기도 전에 정인이 일어서며 피했다. 그가 몸을 휘청이다 땅을 짚고 간신히 버텼다.
“치사하다, 인마. 형한테 어깨도 못 밀려줘.”
“내 어깨는 김하준 거야. 눈독 들이지 마.”
“어릴 적엔 나 좋다고, 나하고 결혼한다고 했잖아.”
정인이 눈을 부라렸다. 다섯 살 때 한 이야기를 언제까지 울궈먹을 작정인지 모르겠다.
“경고하는데, 김하준한테 그런 말 입도 벙긋하지 마.”
강해찬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고 정인은 돌아보다 저 멀리 김하준이 나타난 걸 발견하고는 후다닥 언덕 위로 뛰어 올라갔다. 하준아! 반가워하는 정인과는 다르게 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돌리며 가방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뭐야? 뭔데?”
고개를 쭉 빼고 어깨 너머로 보려고 하자 필사적으로 막는다.
“아무것도 아니야. 책이야, 책.”
미처 닫히지 못한 책가방에서 붉은 장미가 얼굴을 삐죽 내미는 바람에, 거짓말이 탄로 났다. 어어! 정인이 소리를 지르자 하준이 부끄러워하며 슬그머니 꽃을 집어넣고 지퍼를 닫는다.
“꽃 샀어?”
하준의 귀가 빨개졌다. 민망한지 목덜미를 긁적이며.
“어…. 둘만 만나는 줄 알고….”
세상에. 귀여워! 정인의 입꼬리가 양쪽으로 올라갔다. 수업 끝나고 냇가에서 놀자고 했는데, 둘이 만나는 줄 알았나 보다. 껴안아 주고 싶어 손이 주체가 안 된다. 돌아보니 아이들은 물고기를 잡느라 난리고 강해찬은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정인은 하준의 손을 잡아끌고 근처에 있는 빈집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곳은 살던 집주인이 심장마비로 죽은 뒤 계속 비어 있었다. 귀신이 나온다고 하여 아이들은 잘 오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낡은 대문을 열고 들어간 정인은 하준을 끌고 구석으로 가서 가방을 열어 봤다. 빨간색 장미가 나온다. 예쁘다. 함박웃음을 지으니 하준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음에 들어?”
“어, 장미 제일 좋아해.”
“다행이다.”
사실 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보육원 마당 곳곳에 심어 놓은 꽃들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었다. 처음엔 김하준의 기분을 맞추려고 한 말이었으나, 신기하게도 볼수록 정말 예뻤다.
코에 대고 냄새를 맡는데 밖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인은 하준을 끌고 집의 뒤쪽으로 갔다. 집주인은 없어도 꽃과 앵두가 여기저기 피었다. 앵두를 하나 따서 입에 넣자 하준이 쳐다본다.
정인은 가까이 가서 김하준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당황한 김하준이 뒤로 물러서길래 떨어지지 않고 밀어붙였다. 벌어진 입술로 앵두를 밀어 넣자 김하준이 어찌할 줄 모른다.
“맛있지?”
입술을 떼 내고 묻자 하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목덜미와 귀가 앵두만큼이나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정인이 제 입술을 혀로 핥았다. 키스는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더 달콤하다.
“더 할래?”
긴장했는지 김하준의 울대가 움직인다. 정인이 또다시 입술을 포개자 하준이 이번엔 입을 벌린다. 거기에 듣고 본 대로 입을 벌리고 혀를 비볐다. 달다. 앵두 때문인지, 아니면 김하준 입술에 꿀이라도 발라 놓은 건지.
숨을 헐떡이며 몸을 밀착시켰다. 하준의 등이 떠밀려 벽에 닿았다. 고개를 돌리다 코가 부딪치고 입술에 이가 닿기도 했으나 그럴수록 욕망은 더더욱 두 사람을 휘감았다.
쪽, 입술이 떨어지고, 두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마주 봤다. 정인이 하준의 손을 잡고서 제 왼쪽 가슴 위에 댔다. 쿵쿵, 심장의 박동이 손바닥에 고스란히 느껴진다.
“존나 빨리 뛰고 있어. 너 때문에 죽을 거 같아.”
그 말을 하며 류정인은 환하게 웃었다. 붉게 달아오른 뺨은 마치 잘 익은 복숭아 같다. 하준은 땀에 젖은 정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애틋한 시선을 보냈다.
“예쁘다…. 정인아.”
이번엔 하준이 먼저 입술을 가져다 댔다. 부드럽고, 달콤하고. 담 너머에서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인아, 하준아! 그러나 두 사람은 숨을 죽인 채 키스에 몰두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
커다란 꽃바구니는 2인용 식탁을 다 차지할 만큼 컸다. 정인은 의자에 앉아 그걸 바라보며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아니, 그 귀엽고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왜 그렇게 삐뚤어졌지?
볼수록 사람이 바뀌어도 너무 바뀌어서 혹시 김하준의 쌍둥이는 아닐까 그런 엉뚱한 상상마저 해 봤다. 김하준한테 한 짓을 복수하러 나타난 쌍둥이.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 달라도 그렇게 달라지나.
[너 좋아하잖아.]
[아무나하고 막 뒹구는 거.]
이제 와 무슨 해명이 필요할까. 사실은 다 거짓말이었다고, 베타인 걸 숨기고 싶었다고, 갑자기 뒤집힌 내 정체성이 혼란스러웠고, 네가 밀어낼까 봐 미리 겁먹어서 그랬다고.
다 핑계다…. 그래도 말은 했어야 한다. 사정이 이러이러하니 너를 만나지 못하게 됐다고 솔직히 털어놨어야 한다. 그다음 일은 김하준이 결정할 것이었다. 상처받고 싶지 않다고 해서 먼저 상처 줄 필요는 없었다.
정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댔다.
“씨발, 내가 죄인이다.”
허리를 세운 뒤 이번엔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바라봤다. 그러게 평생 안 보고 살면 좋았잖아. 왜 이제야 만나서. 왜 하필 결혼은 하자고 하는 건데. 거기다 이번에도 김하준을 속여야 한다.
[결국 우리 둘 다 돈 때문인 거야. 그러니 어렵게 생각하지마.]
그대로 머리가 식탁으로 쿵 떨어졌다. 장미 향이 후각을 자극한다. 몇 시간째 고민하는데도 해답은 나오지 않고 두통만 생기는 것 같다. 머리를 쥐어뜯는데 기다렸다는 듯 휴대전화가 울렸다. 류민아다. 이젠 류민아 번호만 봐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청심환이라도 하나 먹고 받아야 하나.
엎드린 채 전화를 귀에 가져다 대자 빽 소리를 지른다.
[오빠 결혼해???]
정인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뭐?
[저번에 그 사람들! 오빠가 그 집 아들하고 결혼한다고 찾아왔어!]
***
보육원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뛰어와 안아 달라고 난리다. 아이들을 안아 주다가 정인은 마루에 산처럼 쌓여 있는 선물 상자와 커다란 과일 바구니를 발견했다. 이게 대체 다 뭐야? 기막힌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보육원 선생님들이 나와서 축하한다고 난리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문이 열리고 김 회장의 비서가 나왔다. 이어서 김은혜가 나왔는데 표정을 보니 이미 모든 사실을 전해 들은 것 같았다. 윤 비서가 인사를 한 뒤 떠나고 나서 정인은 김은혜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요?”
“민아가 산책시켜 드린다고 모시고 나갔어.”
식탁 위에 있는 서류철을 발견하고 정인은 그것을 펼쳤다. 채무를 다 갚았다는 확인서와 함께 삼촌이 가져다 맡긴 땅문서가 들어 있었다.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아까 그 사람 말이 사실이야? 결혼 이야기는 또 뭐고.”
조심스럽게 묻는 김은혜의 눈빛에 당혹스러움과 함께 속상한 기색이 내비쳐졌다. 비서란 사람이 찾아와 이야기하는데 기가 막혔다. 그 많던 빚을 김 회장이라는 사람이 다 갚아 준 것도 놀라운데, 그 집 아들과 정인을 혼인시키자는 이야기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 비서의 말에 따르면 결혼 당사자들은 이미 이야기를 마쳤다고 했다. 설마 했는데, 정인을 보니 그 말이 사실인 양 담담하다.
“정인아.”
그녀는 정인의 손을 붙들었다. 속으로 낳은 자식이니 눈빛만 봐도 안다.
“아니지?”
정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곳에 와 아이들을 보고, 엄마를 만나니 집에서 내내 고민하던 게 우스울 만큼 결정이 쉽게 내려진다.
“차라리 보육원 정리하자.”
예상치도 못한 말에 정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이들 갈 곳 알아볼게. 정리되면… 그때 데려오자.”
“엄마.”
꽉 붙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김은혜의 눈가가 빨개졌다.
“나는 싫어. 네가 그렇게 팔려 가듯이…원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그건 싫어.”
정인은 숨을 삼켰다. 목이 콱 조인다.
“그동안 너희 아빠하고 한 약속 지키느라 버텼는데, 이젠 네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내가 왜 내 자식 인생 팔아 가면서까지 그래야 해. 남들이 욕해도 좋아. 그러니까, 없던 일로 하자. 응?”
김은혜는 정인을 끌어안으며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미안하다고, 그런 결심까지 하게 만들어 미안하다고. 정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우리 엄마는 이토록 착한 사람이라 나를 괴롭게 할까. 차라리 결혼해서 집에 보탬이라도 되라고 등을 떠밀었더라면.
“할래요….”
등을 토닥이는 손이 멈춘다. 정인은 김은혜를 놓아준 뒤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 줬다. 주름진 그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생전 울지 않던 사람이었기에 지금 심정이 어떤지는 충분히 알겠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정인은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결혼할 거예요. 내가 그러고 싶어요.”
***
김만호 회장의 아들 김하준. 봉사와 희생으로 유명한 류중헌 목사의 아들과 혼인 발표. 머리기사를 보며 김 회장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어려워질 줄 알았던 일들이 순순히 풀리며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기사가 나가자마자 여기저기서 축하 전화가 오고 난리가 났다.
“기사 나가고 반응이 예상보다 더 뜨겁습니다.”
“망할 녀석. 그렇게 속을 썩이더니.”
김 회장은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반면 집안은 초상집 분위기다. 제주도에 머물고 있던 어머니가 부랴부랴 올라왔고, 아내는 하준의 결혼을 극구 반대하며 앓아누웠다. 두 사람의 극렬한 반대에도 김 회장은 최대한 서둘러 결혼식 날짜를 잡았고 덕분에 주위에선 손주가 생긴 게 아니냐는 농담까지 들었다.
기사를 보는 그의 눈빛에 야심이 가득했다.
“최대한 류정인 배경을 부각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알 수 있게 말이야.”
***
“신나셨네, 신나셨어.”
하준이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을 옆 좌석에 툭 던졌다. 기사가 나가자마자 전화가 쉴 틈 없이 울린다. 나중엔 걸려 오는 족족 수신을 차단했다. 기자부터 시작해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들까지 난리가 났다.
예전부터 알고 지낸 한 후배는 한밤중에 전화하더니 그렇게 근본도 없는 애하고 결혼할 줄 알았으면 자기가 고백했을 거라고 엉엉 울었다. 그래서 하준은 걔가 아니라도 너하고는 결혼 안 했을 거라고 쏘아붙인 뒤 끊었다.
결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데도 기쁨보다는 복잡한 마음이 더 컸다. 남들에겐 미래를 함께하는 시작일지 모르나 김하준은 어떻게 하면 류정인을 상처입힐까, 전전긍긍하는 사람 같았다.
차에서 기다리는데 마침 저 멀리 류정인이 나타난다. 연애한다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 둘은 마음에도 없는 데이트를 하러 나왔다. 하준은 차에서 내렸고, 류정인에게 다가갔다. 오버코트에 후드티를 입고 나타난 류정인은 얼핏 봐서는 대학생 새내기처럼 보였다.
“늦었네.”
“오는데 차가 퍼졌어.”
“그 똥차, 안 버렸어?”
정인의 눈초리가 올라갔고 하준은 바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한테 돈 더 받았을 거 아니야? 설마 빚만 갚아 달라고 했어?”
“…….”
“어리석긴. 기왕 받는 거 왕창 뜯어내지.”
정인은 그런 하준을 완전히 무시하고 미리 예약해 둔 식당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준 역시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우고 그 뒤를 따라갔다. 입구에서 예약 확인을 한 뒤 두 사람은 직원의 안내를 받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자 뒤에서 떨어져 걷던 김하준이 성큼성큼 걸어가 정인의 어깨를 감쌌다. 정인의 몸이 움찔 떨리는 걸 느끼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남들이 봐. 연기하려면 제대로 해.”
훅, 끼치는 숨결이 뜨거워 정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나직하게 웃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괴롭힌다. 비웃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눈치 없이 뛰는 심장이 얄미웠다.
자리를 잡고 메뉴를 주문한 뒤에도 두 사람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정인은 창밖을 내다봤다. 야경이 참 예쁘다. 그동안 김하준은 와인을 시키더니 말도 없이 홀짝홀짝 잔을 비워 갔다.
음식은 아직 반도 안 나온 것 같은데 한 병을 더 주문하려고 한다. 정인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따져 물었다.
“술 마시러 왔어?”
“어.”
말을 말자. 말을.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는데 안심이 아니라 쇠심줄 같다. 로봇처럼 음식을 씹다가 김하준을 힐긋 봤다.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도 얼굴색 하나 변하질 않는다. 어릴 적 친구들과 모여 술도 마시고 담배도 몰래 피웠으나 김하준은 늘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었다.
“너 알코올 중독자 같아.”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김하준이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피식 웃는다. 좋게 봐 줘서 고마워. 받아치는 것도 능구렁이 아저씨 같고, 예전의 순한 양 같던 김하준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답답한 식사 자리가 끝나고 난 뒤 두 사람은 식당을 빠져나왔다. 나오기 전 김하준은 류정인의 코트를 손수 입혀 주었으며 정인을 향해 따뜻하게 웃어 주기도 했다. 정인은 차마 거기에 장단을 맞춰 줄 수가 없어 어색하게 서 있었다.
지금쯤이면 김 회장이 고용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고 있을 것이다.
“잘 가.”
이쯤 하면 됐겠지 싶어 돌아서는데 김하준이 부른다. 류정인. 몸을 돌리자 뭔가가 허공에 날아온다. 엉겁결에 받아서 확인했더니 차 키다. 눈이 커져서 쳐다보자 김하준이 차를 주차해 놓은 곳으로 걸어가며 손짓을 했다.
정인은 어이가 없었다. 쫓아가니 김하준이 자연스럽게 보조석에 올라탄다. 정인이 키를 들고 장승처럼 서 있자 얼굴을 찌푸린다.
“운전해. 나 취해서 힘들어.”
“대리 불러서 가면 되잖아.”
“네가 해 주면 사진 찍으시는 분들이 더 기뻐하지 않을까?”
하. 김하준은 문을 쾅 닫더니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눕는다. 정인은 어이가 없어 쳐다보다가 마지못해 운전석에 앉았다. 문을 닫고서 야, 하고 살벌하게 불렀는데도 잠잠하다. 자는 척을 하는 건지 정말 자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거 하나는 알겠다.
11년 동안 사람을 열받게 하는 스킬이 존나게 많이 늘었다는 걸.
“집 주소.”
“내비에 있어.”
술기운에 잠꼬대하듯 중얼중얼 대답한다. 정인은 심호흡하고 나서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낯설어 가는 동안 사고라도 날까 신경이 곤두섰는데, 김하준은 옆에서 천하태평으로 퍼자고 있다. 와인을 무슨 물 마시듯 처먹더니, 그럴 줄 알았다.
가는 내내 속으로 온갖 욕을 다 하면서도 차가 한 번씩 멈출 때마다 옆 좌석을 힐긋힐긋 돌아봤다. 어릴 땐 선이 갸름하고 예쁘게 생겼던 거 같은데,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무척 남자다워졌다.
1시간을 달리는 내내 김하준은 한 번도 깨어나질 않았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자 언덕이 나왔고, 언덕 위로 올라가니 주택이 모여 있는 단지가 나타났다. 입구에서 경비원이 얼굴을 확인하길래, 대신 김하준을 보여 줬다.
그의 집 앞에 다다른 뒤 차를 멈춰 세웠다. 동네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시동을 끈 정인은 김하준을 돌아봤다. 그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자는 중이었다.
“김하준.”
불렀으나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손을 뻗어 어깨를 흔들던 찰나 누군가 똑똑, 차창을 두드린다. 창을 내리자 눈이 부시게 화사한 미인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입김을 내뿜으며 서 있다.
“하준이 술 많이 마셨나 봐요?”
한눈에 봐도 우성 오메가다. 예쁜 입으로 김하준의 이름을 너무도 익숙하게 말한다. 그러더니 보조석으로 가 문을 열고 김하준의 벨트를 풀어 준다. 으음, 잠들어 있던 김하준이 일어났고, 여자의 얼굴을 보더니 잠에서 막 깬 와중에도 웃는다.
“어? 와 있었네?”
여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김하준이 차에서 내리더니 뺨에 쪽, 키스를 한다. 못 말려. 술을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타박하는 여자의 행동이 꽤 익숙해 보였다.
운전석에 멍하니 앉아 있던 정인은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왔다. 여자는 김하준을 대문 앞에 앉혀 놓더니 지갑을 가지고 왔다.
“5만 원 맞죠?”
아. 대리 기사라고 생각하는구나. 도무지 할 말을 찾지 못해 고민했다. 김하준과 결혼할 사람이란 말이 밖으로 나오질 않고 목구멍에서 빙빙 맴돈다. 말이 없자 여자가 5만 원을 꺼내 준 뒤 수고하라며 인사와 함께 김하준에게로 되돌아간다.
그녀는 앉아 있는 김하준을 부축하면서 끙끙대고 계단을 올랐다. 정인은 손에 쥔 5만 원을 보며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입이 써진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다가 터덜터덜 걸어 내려와 정문을 통과했다.
빌어먹을 동네가 도롯가와 멀어서 택시 잡기도 힘들다. 걷다 보니 생각할수록 기가 차고 어이가 없다. 그러다 정인은 두 사람 기사에 적혀 있는 댓글을 기억해 냈다.
[이 사람 김설아하고 스캔들 난 사람 맞지? 사생활 진짜 문란하다던데.]
금방 삭제되었으나 비슷한 댓글이 여러 개였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쓴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코끝이 시려 코트를 턱 밑까지 잠그고 얼굴을 파묻었다. 겨우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하는데 거리의 불빛들이 유독 찬란하니 예쁘다.
집으로 데려다 달란 말에 무엇을 기대한 걸까. 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어쩌면 김하준이 바란 건 돈 말고도 이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더러운 기분을 느끼는 것.
“다 왔습니다.”
눈을 뜨자 택시는 어느덧 집 앞에 도착했다. 대리비로 받은 돈을 택시비로 주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밟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현관문을 열고 불을 켠 뒤 온기가 없는 집에 들어섰다.
비싼 밥을 먹었는데 명치가 꽉 막히는 기분이 든다. 결국은 소화제를 두 알이나 먹었다.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확인하는데 친구들에게 온 메시지가 셀 수도 없다.
[신데렐라 된 기분이 어때?]
[신데렐라는 원래부터 귀족이었잖아. 류정인은 해당 없음.]
[사람 인생 진짜 모른다니까. 인생역전 아니야?]
[저 새끼는 말을 해도. 정인아 우리 모른 척 하지마.]
[축하한다. 류정인. 잘 살아라. 결혼식 때 우리도 불러.]
졸업할 때까지도 류정인을 오메가로 알고 있었으니, 아무도 결혼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는다. 돈 이야기를 꺼낼 때도 나 몰라라 했던 친구들이 너도나도 나타나 먼저 친한 척을 해 댔다.
씁쓸해져 휴대전화를 식탁에 내려놓고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하나 꺼냈다. 영문 모를 갈증에 맥주 한 캔을 다 비우고 나서 침대로 가 누웠다. 오래된 형광등은 빛이 바래 점점 소멸 중이다.
맥주 한 캔에 몸이 노곤해진다. 아까 본 장면이 자꾸 둥둥 떠다닌다. 머리를 흔들어 그것들을 모두 떨어냈다. 생각하지 말자. 휘둘리지 말자. 예전의 김하준이 아니다. 그냥 앞으로 닥칠 일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자. 그게 최선이다.
***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셨어? 너 그러다 진짜 큰일 나, 이젠 알코올 중독 치료까지 받을 작정이야? 이어지는 잔소리 폭탄에 김하준이 그만하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녀의 이름은 이서린이었고 하준과는 이종사촌이며 정신과 의사였다. 하준의 정신과적 이력 때문에 한 번씩 집을 방문하였는데, 오랜만에 본 김하준의 상태가 영 좋질 못한 거 보니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다.
친척들 사이에선 김 회장이 하준을 거의 강제로 결혼시킨다는 소문이 비밀스럽게 떠돌았는데, 그것과 연관이 있는 걸까.
“아까 그 사람은 누구야. 대리 기사 같지는 않던데.”
재킷을 벗던 김하준이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나하고 결혼할 사람.”
서린은 경악한 표정을 했다.
“네 배우자 될 사람한테 내가 대리비를 준 거야?”
김하준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2층으로 올라간다. 서린이 따라가며 소리를 질렀다.
“제정신이야? 전화해서 당장 해명해!”
하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4개월짜리 결혼이다. 그는 서재로 가서 비밀공간을 열어 독한 양주를 하나 꺼냈다. 한 번씩 모친이 집에 들러 술을 모두 치워 버리는 바람에 이렇게 숨겨 놓아야 했다.
이 정도면 알코올 중독이 맞나.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책상에 올려놓고 술병을 그대로 입에 대고 마시자 목구멍이 타들어 갈 것처럼 뜨거워진다. 입가에 흐르는 술을 손등으로 훔친 뒤 두 눈을 감았다.
류정인 표정이 어땠더라. 얼결에 대리 기사 취급을 받고 당황해서 쳐다보던 그 얼굴을 생각하자 자꾸 웃음이 난다. 취기가 오르고 눈꺼풀이 자꾸 무겁게 가라앉는다. 아득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류정인 얼굴은 더더욱 생생해진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응?
***
가게를 정리하던 정인은 탁상 달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하루하루가 유독 더 빠르게 지나갔다. 모든 준비는 김 회장 쪽에서 일사천리로 진행했는데 엊그제는 김하준의 집에 가서 밥도 먹었다.
그곳에서 김하준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만났고, 그들이 자신을 얼마나 못마땅해하는지도 알게 됐다. 특히 할머니는 무안할 정도로 싫은 티를 팍팍 냈는데, 거기에 대해 김하준은 일절 편을 들어 주거나 하지 않았다.
장담하건대 둘이 이혼한다고 하면 김하준네 집에서는 잔치가 벌어질 거다.
정인이 결혼을 한 동안은 다혜가 혼자 가게를 맡아 주기로 했다. 필요한 개인 짐들을 챙기고 차에다 싣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난다. 돌아보니 최 사장이 서 있었다. 코트를 입은 그가 담배를 쥔 손으로 정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정인 씨, 안녕.”
“안녕하세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근처 지나가는데, 보이길래 잠깐 차를 세웠지.”
“네….”
“결혼한다며. 축하해.”
“감사합니다.”
“근데 사람들은 정인 씨가 오메가라고 알고 있던데.”
정인의 표정이 굳었다. 정인이 베타인 걸 아는 사람은 가족 포함하여 그리 많지 않다. 속이려고 속인 게 아니라 몸에서 나는 특유의 향 때문에 대부분 오메가라고 믿고 있었고, 구구절절 설명하기 힘들어 따로 해명하지는 않았었다.
거기다 서류상으로도 오메가라고 되어 있다. 베타로 발현한 뒤 아버지가 급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시며 정정 신고가 미뤄진 게 지금까지 왔다.
“그렇게… 됐습니다.”
최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어때. 잘 살면 되는 거지.”
그가 싱긋 웃었고 정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무튼 축하해. 초대는 못 받아도 축의금은 따로 보낼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데 차 한 대가 뒤쪽에 멈춰 서더니 차창이 열리고 김하준이 얼굴을 내민다.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최 사장은 기회가 되면 또 보자고 인사를 한 뒤 사라졌다. 정인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 외투를 챙겨 입고 나왔다. 오늘 김하준과 결혼식 의상과 피로연 의상을 고르러 가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보조석 문을 열고 타자마자 차가 출발한다. 가는 내내 둘 다 말이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정인은 가는 동안 단골손님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당분간은 자기 대신 다혜가 혼자 맡아서 해 줄 거라는 내용이었다.
중간쯤 가자 김하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그건 누구? 손님?”
정인이 고개를 돌렸다.
“누구?”
“너하고 있던 그 알파.”
“아아. 고객.”
대답해 주고 나니 아무 반응이 없다. 정인이 왜? 하고 묻자 그냥. 이라고 짧게 대답이 돌아왔다. 대화가 끊기고 차 안은 정적이 감돌았다. 정인 역시 하준에게 궁금한 게 있었다. 며칠 전 집 앞에서 대리비를 주던 사람이 누군지. 하지만 그걸 물었다간 괜히 갈굼만 당할 것 같아 관두었다.
차가 의상실 앞에 도착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두 사람을 맞이한다. 그의 안내를 받으며 의상실 안으로 들어가자 유명 배우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1층 응접실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직원이 차를 내왔고 잠시 뒤 의상디자이너라는 사람이 나와서 두 사람을 반겼다.
정인은 남자를 각종 매체에서 본 적이 있다.
“김 대표님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뉴욕에서 뵙고 처음인 것 같네요.”
“보시다시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잘 지냈죠. 여긴, 소문으로만 듣던 그 파트너분?”
디자이너의 시선이 정인을 향한다. 반가워요. 사람 좋게 웃으며 손을 내밀길래 그 손을 잡았다. 그런데 갑자기 손등에 쪽, 키스를 하려고 한다. 정인이 기겁하고 손을 뺀 뒤 어색하게 웃었다. 예, 반갑습니다.
“그럼 두 분 위층으로 올라가셔서 의상 한번 보실게요.”
직원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서 옷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디자이너가 마네킹을 세워 놓고 옷에 관한 설명을 시작했다. 그중 반 이상은 알아듣지 못하겠는 단어다. 점점 지루하고 따분해져 하품이 나오려고 하였다. 옷만 입어 보면 되는 거 아니었어?
반대로 김하준은 꽤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오랜 설명이 끝나고 정인이 먼저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입고 있던 옷을 탈의하고 셔츠와 바지를 입고 나오자 직원이 조끼와 재킷 입는 것을 도와준다.
홀로 나가기 전 거울을 봤는데, 옷이 날개란 말이 무슨 뜻인 줄 알겠다. 마네킹보다 내가 더 나은 것도 같은데? 순간 어쭙잖은 자신감에 가득 찼다. 다 입은 채로 커튼을 젖히자 김하준이 의자에 다리를 꼰 채로 앉아서 위아래로 훑는다.
그 시선에 정인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김하준이 고개를 젓는다.
“다른 거요.”
정인이 미간을 찡그렸다.
“왜. 난 괜찮은데.”
“다른 거요.”
김하준은 정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직원에게만 의견을 건넸다. 뭐가 이상하다든가, 뭐가 아쉽다든가, 그런 건 하나도 없이. 정인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입고 나오는 족족 김하준은 다른 걸 찾았다. 옆에 있던 디자이너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그가 기어코 한마디를 한다.
“김 대표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여쭤도 될까요?”
하준이 턱을 쓸었다.
“옷은 좋아요. 굉장히 좋은데,”
그는 아쉬운 표정으로 디자이너를 바라봤다.
“모델이 받쳐 주질 못하니까, 그게 아쉽네요.”
아, 디자이너가 당황한 표정으로 정인을 본다. 보통 이런 얘기를 대놓고 면전에 하면 둘이 싸우고 난리가 날 텐데, 상대방 얼굴을 보니 상처는커녕 저 새끼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디자이너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려 미소를 유지한 채 손을 허공에서 움직였다.
“제가 볼 땐 여기에 오시는 어느 분보다 핏이 좋으신걸요.”
“글쎄요….”
비웃듯 피식 웃는 바람에 정인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었다. 두고 봐라, 네가 옷 입을 때 내가 뭐라고 할지.
“그럼 다른 거 입어 볼게요.”
디자이너에게 미소를 짓고 나서 탈의실로 들어가는데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전화가 울린다. 확인하니 건물 주인이다. 내일 전기 공사 때문에 오후에 잠깐 정전이 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건물주인은 정인이 우진 그룹 아들과 결혼한다는 걸 신문을 통해 봤다며, 축하한다고, 앞으로 애기 낳고 잘 살라고 덕담을 해 줬다. 하는 일 때문에 오해했는데, 그렇게 훌륭한 아버지를 둔 줄 몰랐다며.
김 회장이 왜 그렇게 자신의 아버지 얘기를 언론에 흘렸는지 이해가 됐다. 생각보다 길어진 통화를 마치고 나서 옷을 벗으려고 보니 단추가 앞이 아니라 뒤에 달렸다. 손을 뒤로 뻗었으나 단추를 풀기가 쉽질 않다.
결국은 직원을 부르려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 앞에 직원 대신 김하준이 서 있다. 놀라서 흠칫 뒤로 물러났다가 그의 어깨 너머로 직원을 찾았다.
“없어. 너 기다리다 다 밥 먹으러 갔어.”
거짓말. 통화한 게 5분 정도다.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김하준이 안으로 들어온다.
“왜.”
“단추 풀어야 하잖아.”
정인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내가 알아서 할 거야.”
하준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돌아서라며 손짓을 한다.
“돌아서. 나 배고파.”
정인이 마지못해 돌아서자 김하준이 하나씩 단추를 풀어 준다. 살에 손끝이 닿는 것도 아닌데 괜히 긴장되어 목이 뻣뻣해졌다. 김하준의 향이 점점 더 짙어진다. 단추가 풀리고 벌어지는 게 느껴진다. 정인이 황급히 돌아섰다.
“이제 됐어, 나가.”
생각보다 김하준이 바싹 붙어 있던 바람에 가슴이 거의 밀착하기 직전이다. 정인이 고개를 돌리자 김하준이 빤히 보다가 한 발 더 다가선다. 숨결이 맞닿은 거리에서 김하준은 탐색하듯 시선을 움직였다.
“이상하지.”
딴 곳을 쳐다보던 정인이 천천히 김하준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묘하게 이글거렸다.
“너 말이야.”
정인은 뒤늦게 무언가를 알아채고 얼굴색이 확 바뀌었다. 김하준이 혀를 입에서 굴리며 먹잇감을 물기 직전의 표정을 해 보였다.
“내가 아까부터 페로몬을 존나 뿜어 대고 있는데도, 어째서 반응이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