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정인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멈췄나 싶더니 다시 울리기를 반복한다.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나서 손으로 휴대전화를 찾았다. 아침 7시 30분이다. 조금만 더 자고 싶다.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에겐 겨울에 이불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고욕이었다.
5분을 더 이불 안에 파묻혀 있다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욕실로 가서 옷을 벗은 뒤 샤워기를 틀었다. 보일러가 오래돼 작년부터 뜨거운 물이 바로바로 나오질 않는다. 집주인에게 말해도 그때뿐이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얼른 샤워를 마치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훅 떨어진 온도 탓에 몸에서 뿌연 김이 올라왔다. 머리를 말린 뒤에는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검은 반팔 티셔츠를 입고 회색 후드티를 껴입었다. 커튼을 걷고 밖을 보니 눈발이 조금씩 날리기 시작했다. 밤새 눈이 펑펑 내릴 거라던 기상청의 예고가 틀렸는지 바닥이 아직은 멀쩡하다.
옷을 챙겨 입은 다음에는 아침으로 간단히 토스트를 구워 먹었다. 냉장고를 열어 우유를 꺼내다 유통기한이 지난 걸 발견했지만, 대수롭지 않아 하며 컵에 따랐다. 잠이 덜 깨서 그런 건지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는다. 결국은 반 정도만 먹고 밖으로 나왔다.
차를 빼려고 보니 위층 남자가 또 주차를 거지같이 해 놨다. 사이드브레이크까지 잠가 밀 수도 없어 전화를 걸자 10여 분 뒤 남자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느긋하게 내려온다. 가까이 오지 않았는데도 술 냄새가 진동한다. 매번 말은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표정은 그렇질 못했다.
차를 끌고 도롯가로 나오니 연휴라 거리가 한산하다. 남들 다 쉬는 날 일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으나 제법 큰 손님이었기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남아 있던 잠을 깨기 위해 옆에 있던 생수를 따서 한 모금 들이켜고 음악의 볼륨을 높였다.
핸들을 쥔 기다란 손가락이 경쾌한 음악 소리에 맞춰 까닥였다. 눈동자가 힐긋 움직여 시계를 확인했다. 빠듯하다. 첫 알람이 울렸을 때 이불 밖으로 나왔어야 했는데. 뒤늦게 후회하며 속도를 높이는데 외제 차 한 대가 앞으로 쌩하니 치고 나간다. 엄청난 속도에 정인이 쯧 혀를 찼다.
“그러다 죽어요.”
공기를 순환시키려고 차창을 여는 순간 사이드미러로 무언가 툭 날아와 부딪치더니 불꽃이 튄다. 정인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조금 전 앞서 간 그 차에서 날아온 게 분명했다. 재수 없어서 차 안으로 들어와 얼굴에 맞았다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달리던 정인의 차가 신호를 받아 멈춰 섰다. 흰색 외제 차도 바로 옆이다. 고민할 것도 없이 차창을 내리고 상대방을 향해 손짓했다. 잠시 후 옆 차의 창문이 열리더니 두꺼운 금목걸이를 한 남자가 보조석에서 정인을 돌아본다. 쿵쿵거리는 클럽 음악이 차 밖으로 흘러나왔다.
정인이 얼굴을 내밀고 인상을 썼다.
“담배꽁초를 그렇게 막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사고 날 뻔했잖아요.”
바로 사과할 거란 예상과는 달리 상대는 귀찮은 얼굴로 그대로 차창을 닫으려 한다. 정인이 그쪽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요.”
올라가던 차창이 멈추고 남자가 이쪽을 돌아봤다.
“사과 안 하세요?”
“내가 왜요.”
“그쪽이 던진 꽁초 때문에 사고 날 뻔했다니까요.”
“내가 버렸다는 증거 있어요?”
정인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걸 날아가던 비둘기가 피우다 던졌겠냐고. 주위를 한번 보라고 여기에 댁이랑 나 둘밖에 더 있느냐고 따져 묻자 남자가 주위를 대충 보더니 짜증 나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사과하시라고요.”
“뭘 자꾸 사과하래. 그래서? 사고가 났어요? 안 났잖아.”
남자가 눈으로 정인의 차를 살피더니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기어코 한마디를 더 보탰다.
“어디서 주워도 안 가게 생긴 차를 끌고 나와서는.”
그러더니 신호가 바뀌지도 않았는데 쌩하니 출발해 버린다. 정인이 이를 갈며 운전대를 비틀어 잡았다. 아침부터 일진이 사납다. 쫓아가서 확 받아 버릴까. 고민하는 사이 차는 점점 멀어졌다.
됐다, 관두자. 긴 한숨을 내쉬고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차를 출발했다.
그렇게 차는 한참을 더 달려 호텔에 도착했고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에 도착해 약속을 잡은 방 앞에 서서 벨을 눌렀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인상이 험악하게 생긴 남자가 나타났다. 그가 정인을 위아래로 한 번 훑고는 뒤로 물러났다.
안으로 들어서자 침실에서 말소리가 들리더니 회색 가운을 걸친 남자가 누군가와 통화하며 밖으로 나왔다. 이제 막 샤워를 마쳤는지 머리엔 물기가 남아 있었다.
“없애. 뭘 두 번씩 물어.”
최 사장이라는 남자는 말이 사업가지 건달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정인에게 눈으로 인사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정인은 마땅한 곳에 코트를 벗어 걸고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손을 닦았다. 손에 물기를 제거한 뒤 밖으로 나오자 통화를 마친 최 사장이 정인을 보며 산뜻하게 웃는다.
“미안. 오늘 쉬는 날인데 내가 귀찮게 했지?”
“괜찮습니다.”
최 사장은 알게 된 지는 햇수로 3년이 됐는데 정인을 자주 찾는 단골 중 하나였다.
“바로 시작할까요?”
최 사장이 웃더니 피우던 담배를 끄고 나서 가운을 풀었다.
“그러지 뭐. 화끈하게 부탁해.”
정인이 웃었다.
“거실에서 하실래요? 아니면 침실?”
“상관없어. 자기 좋을 대로.”
최 사장이 문 앞에 있던 부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부하가 인사를 한 뒤 방을 빠져나가자 둘만 남게 됐다. 밖과는 다르게 호텔 안의 공기는 유독 후덥지근했다. 정인이 입고 있던 후드티를 머리 위로 벗고 검은색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남자에게 걸어갔다.
***
김 회장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손에는 노트만 한 크기의 태블릿이 들려 있었다. [여배우 K, 모 사업가와 밀회?]란 자극적인 제목 아래 두 남녀가 벌건 대낮에 팔짱을 끼고 호텔에 들어가는 사진이 떡하니 찍혔다. 모자이크 처리 했지만 소문이 퍼지는 건 삽시간이다.
기사에는 작년 가을 이른 나이에 결혼한 여배우 K가 이혼 후 하루 만에 모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와 호텔에서 밀회를 즐긴다는 낯 뜨거운 내용이 적혀 있었다. 김 회장의 목에 핏대가 퍼렇게 돋아났다.
“내가 이 새끼를 그냥!”
윤 비서는 면목이 없는지 고개를 조아리고 눈치를 살폈다.
“송구합니다, 회장님. 기사는 내리도록 조치했습니다.”
탁, 김 회장이 들고 있던 태블릿을 책상에 올려놓고 뒷목을 손으로 잡았다. 놀란 윤 비서가 다가오려고 하자 김 회장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선거가 코앞인데 아들놈이 도와주질 않는다.
“하준이 오라고 해.”
“그게….”
“그게? 뭐.”
“연락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기다렸단 듯 비서실에서 인터폰이 울린다. 윤 비서가 그것을 받았다.
[박 의원님 쪽에서 연락 왔는데, 돌려 드릴까요?]
윤 비서가 새어 나오는 신음을 간신히 삼켰다. 지금 자리에 안 계시다고 말하려는데 김 회장이 전화를 거둬 갔다.
“돌려.”
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쇳소리가 섞인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여당의 실세인 박정찬 의원이었다. 경영을 관두고 정치를 하고 싶다는 김 회장을 선뜻 밀어주겠다고 나선 것도 그였다. 그런 그가 아침부터 연락한 건 아무래도 조금 전 신문 기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무작정 피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접니다, 박 의원님. 안녕하셨습니까.”
[제가 안녕하게 생겼습니까.]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냉랭한 목소리에 김 회장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미간이 옴폭하게 패더니 커다랗고 두툼한 손이 결국엔 이마를 짚는다. 어두운 표정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호탕하기만 했다.
“설마요.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냥 친구 사이랍니다. 제 아들놈이 워낙 구분 없이 친하게 지내다 보니 그런 오해가 생겼나 봅니다. 예, 예. 염려 마세요. 예. 아무렴 그래야죠. 중요한 일을 코앞에 두고 일을 그르치겠습니까. 하하. 그렇지요.”
윤 비서는 입을 굳게 다문 채 그 상황을 지켜봤다. 김 회장은 오랜 경영 생활을 접고 정치판에 들어갔다. 식구들은 다들 말렸지만, 그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렵사리 당내 공천까지 따낸 건 좋았으나 김 회장을 두고 여전히 말들이 많았다. 돌아가신 선대 회장이 건달 출신이라 입방아를 찧는데, 거기다 아들놈까지 쉬지 않고 스캔들을 터트리니 기자들에게 이만한 먹잇감이 없었다.
“조만간 밥이나 한 끼 하시죠. 예. 예. 거기 좋지요. 예.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하하.”
전화를 끊자마자 올라갔던 김 회장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얼어붙는다. 그는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전화기를 그대로 들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퍽! 소리와 함께 전화기가 산산조각이 났다. 윤 비서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김 회장은 양손을 허리에 댄 채 씩씩대며 이를 갈았다.
“김하준 이 새끼 잡아 와. 안 온다고 하면 다리를 부러트려서라도 끌고 와!”
***
“아프세요?”
“아니, 괜찮아.”
최 사장의 옆구리에서 치골로 이어지는 부위에 화려한 문양의 꽃이 그려졌다. 괜찮다는 말과는 달리 바늘의 뾰족한 부분이 살갗을 찌르고 들어가 잉크를 주입할 때마다 남자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왼손으로 잉크와 피를 닦아 내자 그림이 더 선명하게 살아난다.
“정인 씨가 올해 몇이지?”
“스물아홉이요.”
“벌써 그렇게 됐나. 시간 참 빠르네.”
정인은 웃었다. 대학에 다니면서 친해진 선배가 타투하는 걸 배운다기에 거기 따라갔다가 처음 타투를 접했다. 얼마 뒤 선배는 관뒀지만, 정인은 휴학하고 외국으로 가 공부를 한 뒤 돌아와 가게까지 차렸다.
그리고 문을 연 지 얼마 뒤 최 사장이 손님으로 왔다.
“애인은 아직?”
“네.”
“괜찮은 사람 소개해 줄까? 저번에 내 소개 받고 간 사촌 동생 봤지? 걔가 정인 씨 마음에 들어 하던데.”
한 달 전쯤 최 사장의 소개로 사촌 여동생이 발목에 작은 라인 타투를 하려고 왔었다. 배우 지망생이라고 했던가. 오빠와는 달리 성격이 조용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여자였다. 그런 성격으로 어떻게 배우를 할 생각 했는지 신기했다.
“죄송해요. 제가 지금은 누구 만날 상황이 아니라서요.”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하자 최 사장이 웃는다. 그 역시 정인의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정인의 아버지는 교회 목사였는데 정인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데려다 키웠다.
그러다 정인이 열여덟 무렵 아버지가 오토바이에 치여 돌아가셨다. 가해자는 스무 살을 갓 넘긴 청년이었는데, 아픈 부모를 대신해 오토바이로 배달을 하며 생계를 책임졌다고 한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고민 없이 청년을 용서했다. 그리고 아들이 자랄수록 아버지의 길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아가길 원했다. 공부를 관두고 타투를 배운다고 했을 때도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선 게 어머니였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보육 시설에 들어오는 아이들은 늘어 갔고,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에게만 모든 걸 떠넘길 수는 없었다.
“혹시 도움 필요하면 얘기해. 내가 정인 씨한테는 물심양면으로 해 줄 테니까.”
최 사장의 눈빛에 아주 잠깐 욕망이 서린다. 정인은 그것을 적당히 모른 척했다.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나 처음엔 정인 씨 오메가인 줄 알았잖아. 그래서 내가 페로몬 존나 뿜어 댄 건 알아?”
“그러셨어요?”
“베타인 거 알고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 좋은 향기에 감쪽같이 속았다니까.”
베타인 정인에게 왜 그런 향이 나는지는 모른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고, 그래서 어릴 적 오메가 판정을 받고 자라는 내내 의심한 적이 없었다.
색을 입히는 작업을 하는데 외투 주머니에 넣어 둔 전화가 진동으로 울린다. 무시하려고 했으나,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최 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난 뒤 장갑을 벗고 나서 전화를 꺼냈다. 동생인 류민아다.
쉬지 않고 울리는 전화를 보며 받을까 말까 고민했다. 10살 차이 나는 어린 동생은 오메가였는데,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소소하게 말썽을 부렸고, 난데없이 전화가 왔다는 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오빠! 나야. 지금 어디야?]
다급한 목소리가 전화기 밖으로까지 흘러나왔다. 정인이 나지막한 한숨을 흘렸다.
“일하는 중이야. 이따가 전화해”
[지금 일이 중요한 게 아니야.]
“왜. 누가 집문서라도 가지고 튀었어?”
농담으로 던진 말인데 순간 정적이 감돈다. 정인의 눈동자가 좌우로 느리게 움직였다.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진다. 신음과 함께 동생의 허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알았어?]
***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올 만큼 요란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실내에선 파티가 한창이었다. 작은 풀장에서는 수영복만 입은 알파와 오메가들이 뒤엉켰고, 그 안쪽 더 은밀한 곳에서는 서로에 대한 욕망을 불태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김민재는 늘씬한 오메가 하나를 낚아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었다. 페로몬을 내뿜자 오메가의 가느다란 몸이 움찔거린다. 그때 누군가 등을 두드렸다. 하필, 이런 때. 돌아보니 윤 비서가 덩치 큰 성인 남자 두 명을 데리고 등장했다. 그들이 뿜어내는 위압감에 실내의 공기가 사뭇 달라졌다.
“김 대표 어디 있습니까.”
김민재가 곤란한 표정으로 자신의 턱을 쓸었다.
“어떡하죠. 하준이 지금 많이 바빠서요….”
남자의 은테 안경 안쪽으로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뜩였다. 뒤에 서 있던 덩치들이 앞으로 나섰고, 다급함을 느낀 민재는 양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잠깐만요. 제가 금방 데리고 올게요. 기다리세요.
하지만 기다리라는 말을 무시한 채 윤 비서도 그 뒤를 따랐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베타인 윤 비서는 느낄 수 없었으나, 지금쯤 이 안에는 그들이 뿜어내는 페로몬 향으로 가득할 것이다. 일반인인 자신이 맡을 수 없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곳곳에 뒤엉켜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바닥에는 술병이 굴러다녔다. 김민재의 걸음이 복도 끝에서 멈췄다. 노크하고 문을 열자 소파에 앉은 김하준의 옆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는 슬립 하나만 입은 여자가 김하준의 허벅지 양쪽으로 소파를 밟고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손에 샴페인 잔을 든 김하준은 여자를 올려다보며 나풀거리는 검은색 슬립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이 점점 위로 올라가자 윤 비서가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음악을 껐다.
시끄럽던 실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누군가 뿌려 놓은 샴페인 때문에 바닥이 흥건하다. 윤 비서는 신발 밑창에 묻은 샴페인을 카펫에 슥슥 문질렀다. 싸늘해진 분위기에 방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눈치를 보더니 일어나 사라진다.
하준이 갑작스럽게 방문한 불청객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내가 우리 윤 비서님을 초대한 적이 있던가요.”
“회장님께서 모셔 오랍니다.”
“왜.”
“대표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준이 샴페인을 마저 비운 뒤 뻔뻔하게 웃었다. 모르겠는데요.
“억지로라도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저런.”
“회장님 화 많이 나셨습니다.”
“그러게 기사를 잘 막지 그러셨어요. 우리 아버지도 예전만 못하신가 봐요. 아니면 아랫사람이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는 건가.”
빈정거림에 윤 비서가 끙 신음을 흘렸다. 앞에 앉은 남자는 누구나 찬양하는 외모를 가졌으나 성격은 어지간히도 나빴다. 더 큰 문제는 김 회장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란 것이었다.
허구한 날 추문을 만들어 내더니 이번엔 이혼한 지 하루 된 여배우와 스캔들이 났다. 결혼 생활 내내 둘이 불륜 관계가 아니었냐는 추측과 함께, 당 내부에서도 자식 단속을 못 한다는 비난이 흘러나왔다. 덩달아 김 회장은 똥줄이 타들어 갔다.
“회장님께서 일 마치실 때까지만, 조용히 계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 그래서 파티도 집에서 하잖아요. 뭐가 문제죠?”
윤 비서는 대답을 한숨으로 대신했다.
“그만 나가 주실래요?”
“회장님께서 모셔 오라고 했습,”
“그러니까요. 가려면 옷은 입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 꼴로 갈 수는 없잖아요. 김하준이 싱긋 웃으며 양팔을 펼쳐 엉망이 된 셔츠를 보여 줬다. 윤 비서는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다더니 음악 소리가 다시 들린다. 시간을 확인했다. 앞으로 10분. 나오지 않으면 이번엔 정말 끌고라도 갈 생각이다.
그는 김하준을 처음 만난 때를 떠올렸다. 남들은 믿지 않으나 무척이나 총명하고 예의 발랐으며 누가 봐도 예쁜 아이였다. 외아들이라 집안의 사랑을 온통 독차지했는데, 돌아가신 선대 회장은 그가 태어나자 이름을 따서 재단까지 만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부인인 이순옥 여사는 원래 성격이 차가운 사람이었음에도 손주한테만큼은 늘 예외였다. 공식 석상에 어린 김하준을 안고 나타나는 일이 잦았고, 지금도 김하준 일이라면 아들인 김 회장을 야단치면서까지 손주 편을 들었다.
이렇듯 식구들의 사랑을 온통 독차지하고 자란 김하준은 성장할수록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공부뿐 아니라 좋은 인성과 너그러운 성품까지 겸비해 김 회장은 남들에게 아들 잘 키웠다는 소리를 인사처럼 듣고 살았었다.
그러다 열다섯 살에 그의 몸에 이상이 생기며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마쳤고 2년 정도를 김 회장의 고향에서 요양을 보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는 서울로 돌아온 뒤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김 회장은 그런 변화조차도 기쁘게 받아들였다. 드디어 내 아들에게도 사춘기가 왔다며. 새로 다니기 시작한 학교에서 불량스러운 친구들과 어울리고 밖으로 나도는 빈도수가 늘어 가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큰 사고가 터졌다. 날이 갈수록 방황이 심해지더니 무슨 연유인지 나중에는 수면제를 구해 몽땅 털어 넣은 것이다. 그가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소식에 김 회장의 부인은 그 자리에서 졸도했다.
당시 집안 분위기는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뒤늦게 단순한 일탈이 아님을 깨닫고 사람을 시켜 수소문했으나, 마땅한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혹여 예전 학교에서 괴롭힘이 있었을까 싶었으나 그것마저도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김하준의 일탈은 잠잠해졌지만, 두 부자 사이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잠시 옛 생각을 떠올리던 윤 비서가 한숨을 내쉬는데 문이 열리고 김하준이 나온다. 어느새 옷을 싹 갈아입고 멀쩡한 모습이었다.
***
정인은 난장판이 된 마당을 보면서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의자들이 나뒹굴었고, 작년 겨울 마당 한가운데 해 놨던 크리스마스트리의 장식이 엉망으로 떨어졌다. 어머니인 김은혜는 넋이 나가 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그 옆에서는 아이들을 봐 주는 보육 선생님들이 나와 발을 동동 구르는 중이었다.
“정인아!”
“어떻게 된 거예요?”
“우리도 몰라. 다짜고짜 밀고 들어오는데 막아낼 재간이 있어야지.”
보육 선생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김영희가 울먹이며 하소연했다. 정인은 굳은 표정을 지으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주소록에서 삼촌인 류동찬의 번호를 찾아내 통화 버튼을 눌렀으나 바로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이 흘러나온다. 반복하여 걸어도 마찬가지다.
전화기를 꽉 움켜쥐고 나서 마루에 앉아 있는 모친에게로 다가갔다. 많이 놀랐는지 그녀의 손끝이 아직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아들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어떡하니… 어떡해, 정인아. 넋이 나간 그녀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늘 단정하던 긴 머리카락이 헝클어졌고, 옷도 엉망이다. 집에 무단으로 들어온 침입자들을 막으려 작은 체구로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우선 들어가세요. 제가 나가서 찾아볼게요.”
그녀를 부축해 안방에 눕힌 뒤 밖으로 나와 선생님들과 함께 난장판이 된 마당을 정리했다. 똑 부러져 버린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니 이가 갈린다. 이것은 류동찬이 아이들을 위해 사 온 것이었다.
그는 목사였던 아버지의 하나뿐인 남동생이었는데, 어릴 적부터 애물단지였다. 긴 시간 연락을 끊고 살더니 몇 년 전 소망원에 들어왔다. 우려와는 달리 궂은 일도 도맡아 하고, 직장도 성실히 다니길래 안심했는데, 이런 대형 사고를 칠 줄 상상도 못 했다.
망가진 것들을 밖으로 가지고 나오는데 저 멀리 오토바이 한 대가 달려온다. 머리를 샛노랗게 염색한 남자가 앞에 앉았고, 뒷좌석에는 교복을 입은 여학생 하나가 탔다.
달려오던 오토바이가 저만치 멈춰 서더니 뒤에 타고 있던 여학생이 가방을 들고 풀쩍 뛰어내렸다.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그녀는 정인의 동생이었고 올해 열아홉 살이었다. 정인이 그쪽으로 다가가자 오토바이가 도망치듯 쌩하고 가 버린다.
“오빠 언제 왔어? 엄마는?”
“너 쟤하고 어울리지 말라고 했지.”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온 노란 머리는 민아의 친구로 작년에 자퇴했고, 지금은 배달 일을 하고 있었다. 애는 착했으나 될 수 있으면 동생과 어울리지 않길 바라는 게 오빠의 마음이었다.
“지금 그게 문제야? 삼촌은 연락 없어?”
“아직.”
민아는 혀를 차며 노인네처럼 한탄했다.
“아무튼, 대단해. 뒤통수를 때려도 이렇게 세게 때리냐. 엄마가 자기한테 어떻게 해 줬는데. 아빠 돌아가시고 집에 기어들어 올 때부터 의심했어야 하는 건데. 아우! 삼촌만 아니면, 진짜!”
분한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개새끼라고 욕을 한다.
“까불지 말고 들어가 있어.”
“오빠는?”
“시내에 나갔다 올게. 들어가서 엄마 챙겨드려. 많이 힘들어 보이시더라.”
“나도 같이 가!”
정인이 무시하고 차로 걸어갔다. 운전석에 앉아 밖을 보는데 민아가 버티고 서 있다. 들어가라고 손짓을 하자 못마땅한 듯 발로 땅을 쿵쿵 구르고 나서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정인이 한숨을 내쉬고 차를 출발시켰다. 승용차가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을 내달렸다.
***
김 회장의 안색이 서늘했다. 아내인 주혜련은 옆에서 안절부절못하였다. 오늘 남편은 아주 작정한 사람 같았다.
“바쁜 사람을 부르셨으면 말씀을 하세요.”
갑자기 붙들려 온 하준은 긴 다리를 꼰 채 차를 마시며 느긋했다. 김 회장은 사진 여러 장을 테이블 위에 던졌다. 하준이 그것을 훑어봤다. 클럽에서 오메가하고 시시덕대는 것부터 시작해 호텔에 들어가는 모습까지. 상대는 가지각색이다.
“이게 뭐예요?”
뻔뻔한 태도에 김 회장은 기가 찼다. 사람이라면 수치스러워하는 표정이라도 지으라고 하자 하준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한다. 김 회장은 분기탱천해 사진을 빼앗아 바닥에 집어 던졌다.
“노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젠 하다 하다 유부녀까지 건드려?”
“진정하세요. 아버지 또 혈압 올라가요.”
“내 혈압 걱정하는 놈이 이딴 짓을 해?”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김설아는 이혼했다니까요.”
“이혼한 지 고작 하루 지났어!”
사실 하준은 조금 억울했다. 사진 속 오메가들하고는 밥만 먹고 헤어진 경우도 대부분이었고, 김설아도 일 때문에 만난 거였다. 이혼하고 다시 일을 시작하고 싶은데, 마땅히 계약할 소속사가 없다면서 하소연을 하길래.
하지만 김 회장은 언젠가부터 자세한 건 들으려고 하지 않고 화만 냈다. 나이 들면 인내심이 짧아진다더니 갈수록 더했다. 지금도 설명해 봤자 꼬투리만 잡힐 것이다.
“좋아요. 이제 이혼한 지 1년 이상 된 사람만 만날게요.”
얼굴이 일그러지는 김 회장을 뒤로한 채 하준이 시간을 확인했다.
“말씀 끝나신 거죠? 더 없으면 갈게요. 저녁에 약속 있어요.”
“너 언제까지 그따위로 살 거야.”
김 회장의 서늘한 언성에 하준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잊으셨어요? 아버지가 마음대로 살라면서요.”
열다섯, 수술실에서 들어가는 하준을 붙들고 김 회장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프지만 않으면 뭐든 해도 좋다고, 네 마음대로 살라고, 살아만 준다면 뭐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기도했다. 할 수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 제 입을 꿰매 버리고 싶다.
“마음대로 살 거면 적어도 이 애비한테 피해는 주지 마라.”
하준은 빠르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았어요.”
“…….”
“진짜 갑니다.”
일어서자마자 김 회장이 앉으라며 고함을 지른다. 하준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은 아무래도 말이 길어지려나 보다. 얼굴에 슬슬 짜증이 묻어 나왔다.
김 회장이 윤 비서에게 눈짓을 보냈고, 그가 무언가를 꺼내 하준의 앞에 내밀었다. 하준은 그것을 손도 대지 않고 그저 바라만 봤다. 딱 봐도 비행기표다.
“잠잠해질 때까지 외국 나가 있어.”
기가 막혔다.
“선거 끝날 때까지만이야. 머리나 식히다 들어와. 가서 누굴 만나든 상관 안 할 테니.”
“싫어요.”
“내 말 들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저도 두 번 말하기 싫어요. 안 가요.”
분위기가 팽팽해진다. 김 회장은 최후의 협박을 강행했다.
“너 자꾸 이러면, 나 너한테 한 푼도 못 물려준다.”
김하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오히려 웃었다.
“어차피 물려줄 자식은 저뿐이잖아요.”
“기부하면 돼!”
“에이, 퍽이나.”
이 새끼가 정말. 참다못한 김 회장이 재떨이를 집어 들자 그의 부인인 주혜련이 말리고 나섰다. 여보 진정해요. 주혜련은 아들을 향해 얼른 피하라고 눈짓을 보냈고, 하준은 벗어 둔 외투를 챙겼다.
“진짜 갑니다.”
그러더니 모친인 주혜련에게 아버지 화병 안 나시게 잘 챙겨 드리라고 당부 인사까지 하더니 유유히 나간다. 화가 잔뜩 난 김 회장이 저건 자식도 아니라며, 오늘 요절을 내겠다고 골프채를 찾는 바람에 주혜련과 윤 비서는 말리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김하준이 사라지고 거실엔 성난 들소처럼 씩씩대는 김 회장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진정해요. 그렇게 윽박지른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요.”
아내의 만류에도 김 회장의 분노는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 새끼 저거 당장 내 눈앞에서 치워 버릴 테니, 당신도 그런 줄 알아.”
“하준이 이제 성인이에요. 너무 몰아붙이지 말아요. 예전처럼 또 그러면,”
김 회장이 주혜련의 말을 자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예전처럼 뭐! 그게 내 탓이야. 죽으려고 한 게 무슨 훈장이라고, 툭하면 그걸로 애한테 절절매.”
“여보!”
김 회장은 옆에 있던 윤 비서를 불렀다.
“성민아. 전에 말한 그거 알아봐.”
“예?”
“아버지가 생전에 말씀하셨던 그 집 말이다.”
뒤늦게 이해한 주혜련이 기겁했다. 여보! 반면 김 회장의 눈빛은 단호했다.
“한번 찾아나 봐.”
주혜련이 남편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당신 왜 그래요. 어머님도 없던 일로 하자고 하셨잖아요.”
김 회장의 표정을 보니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하다. 기가 막혔다. 21세기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고릿적 약속을 핑계로 아들을 휘두르겠다는 심보 아닌가. 게다가 순순히 받아들일 하준이 아니었다.
***
급한 돈 빌려드립니다. 명함에 적힌 주소를 보고 찾아간 곳은 시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사채업자 사무실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소파에 덩치 여러 명이 앉아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정인에게 몰렸다.
“류동찬 씨 채무 때문에 찾아왔는데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운데 앉아 있던 사내가 짜장면 그릇을 옆으로 치우고 휴지로 입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다른 사내들과 달리 혼자서 눈에 띄는 흰색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포켓에 꽂아 넣은 붉은색 손수건이 강렬했다.
“소망원 아들?”
남자는 단번에 정인이 누구인지를 알아챘다.
“예….”
“금방 왔네. 일단 저쪽으로 앉아요.”
우려와는 달리 남자가 친절하게 정인을 맞이했다. 정인이 자리에 가서 앉자, 차를 마시겠느냐고 묻는다. 됐다고 사양하는데도 남자는 커피믹스를 타서 정인에게 건네준 뒤 명함을 하나 내민다.
명함에는 대표 김춘호라고 적혀 있다. 남자는 짧은 다리를 꼰 채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덩치들이 먹은 짜장면 그릇을 정리하는 동안 그가 서류철을 펼쳤고 그곳에서 계약서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 뒀다.
“자, 여기. 류동찬이가 9개월 전에 사업자금 명목으로 나한테 3억을 빌려 간 거. 보이죠?”
정인이 계약서를 확인했다. 계약서에는 할머니의 이름인 김옥란 세 글자가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이자 또한 법정이자를 받았으니 불법은 아니었다. 할머니의 인감과 신분증을 확인하는 순간 혹시나 했던 기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땅 소유자인 김옥란 씨와 직접 계약한 내용입니다. 정 믿지 못하겠으면 우리 측에서 CCTV를 보여 줄 수도 있고.”
“할머니는 치매 있으세요. 당시 정확한 인지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을 겁니다.”
“그건 나한테 따질 게 아니지. 정 그러면 당신 삼촌을 감방에 처넣든가. 나도 사기죄로 고소할 테니까.”
김춘호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다음 장을 넘기니 이후로도 두 번을 더 빌려 갔다. 채무는 눈처럼 불어나 보육원 땅값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돈놀이하는 사람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냥 내줬을 리가 없다.
정인은 계약서를 내려놓고 나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영산그룹에서 사주받았습니까.”
김춘호가 담배를 쭉 빨며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무슨 소린지를 모르겠네.”
영산그룹에서 보육원 땅을 팔라고 찾아온 게 4년 전이다. 주변 일대를 개발해 골프장을 만든다며 값을 몇 배로 쳐주겠다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유명한 역술가가 꼭 그 자리여야 한다고 했단다.
모친은 고민할 것도 없이 제안을 거절했다. 아이를 두고 간 부모들이 나중에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보육원을 옮기면 그 희망마저 앗아 가는 것이라고 여겼다.
고민 끝에 정인은 입을 열었다.
“한 달 시간을 주세요. 삼촌이 빌려 간 돈은 어떻게든 제가 마련해 보겠습니다.”
김춘호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건 곤란한데. 내가 그쪽을 뭘 믿고.”
“부탁합니다.”
“돈이 나올 구멍은 있고?”
“어떻게든 마련해 볼게요. 대신, 저한테 연락하시고 따로 소망원에 찾아가는 일은 없으셨으면 합니다.”
김춘호는 류정인의 눈빛을 보며 담배를 비벼 껐다. 말은 부탁이라면서 눈빛과 표정은 전혀 기죽지 않는다. 귀공자처럼 생긴 것과는 다르게 강단이 있어 보인다. 적어도 제 삼촌인 류동찬보다는 나은 놈이다. 하지만 절대 돈은 구하지 못할 것이다.
“오케이. 접수.”
흔쾌히 승낙이 떨어지자 정인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근데 오래 못 기다려요. 우리 같은 사람들 알잖아. 처음엔 신사처럼 굴지만, 원하는 걸 얻지 못하면 야수가 되지.”
이를 드러내며 웃자 김춘호의 금색 송곳니가 번쩍였다. 정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어린 시절이었으면 그 돈 못 준다고 치기를 부리고 주먹다짐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자존심 따위가 밥 먹여 주는 게 아니라 돈이 밥을 먹여 준다는 걸.
정인은 김춘호의 사무실을 빠져나온 뒤 차를 끌고 시내를 돌며 삼촌이 있을 만한 곳을 이 잡듯 뒤졌다. 노래방부터 시작해, 술집, 당구장, PC방, 만화방.
워낙 토박이들이 많은 동네라 한 치 건너면 아는 사람인데도 최근에 류동찬을 봤다는 이는 없었다. 그러다 돼지를 키우며 농장을 하던 삼촌의 불알 친구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김 사장인가. 그놈하고 한참 붙어 다니더니 일낼 줄 알았다.”
“김 사장이요?”
남자는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부동산 떴다방 하는 새낀데, 질이 아주 나쁜 놈이야. 사기 전과만 8범이란다. 대한민국 아주 좆같은 나라지? 사기를 8번씩 친 놈이 부동산 사장이랍시고 돌아다니고 말이야.”
“그 사람은 어디 있는데요?”
“몰라. 필리핀으로 튀었다는 얘기가 있던데.”
“저희 삼촌 있는 곳도 진짜 모르세요?”
“아무렴 내가 정인이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냐. 나도 한 달 전쯤 연락한 게 다였다니까…. 아! 그러고 보니 만나던 애인은 하나 있었다.”
“애인이요?”
“우리는 얼굴도 못 봤어. 열 살이나 어리고 지 말로는 애인이라는데, 내가 볼 땐 그 새끼 호구 잡힌 거 같아. 보증까지 서 준 것 같더라.”
기가 찼다. 사채만 끌어다 쓴 게 아니란 말인가. 삼촌 친구라는 것도 잊고, 개새끼라고 욕을 하자 친구도 동의한다며 오히려 맞장구를 쳤다.
“그 사람 어디 사는지 아세요?”
“글쎄.”
정인이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자 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휴대전화를 뒤진다.
“잠깐 기다려 봐. 네 삼촌이 나한테 부탁해서 몇 달 전에 택배시킨 게 있거든. 주소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한참을 뒤진 끝에 삼촌 애인의 자택으로 추정되는 주소를 알아냈다. 정인은 그것을 메모한 뒤 농장에서 나와 주소가 적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시내와 가까운 곳에 있는 다세대 주택이었다.
막상 도착하니 차 댈 곳이 없었고, 그래서 일단은 상가 앞에 차를 세워 두고 골목을 따라 올라가며 주소를 일일이 확인했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가다가 마침내 같은 주소를 발견했다. 정인은 고민할 것도 없이 녹이 다 벗겨진 파란색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B102면 지하인데. 주위를 살피니 좌측으로 계단이 보였고, 반지하 집 세 개가 나왔다. 정인은 계단을 내려가 102호라고 적힌 문 앞에 섰다. 거기엔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었는데, 대부분 술병이었다.
술병을 뒤적이던 정인은 깡통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를 발견했다. 삼촌이 즐겨 피우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살며시 문에 귀를 댔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똑똑, 두드려 봤지만 여전히 조용하다.
조금 더 세게 두드리자 인기척이 들리더니 잠금장치가 돌아간다. 그리고 한 남자가 나왔다. 옷이 큰 건지 몸이 마른 건지 어깨가 다 드러난 티셔츠를 입은 남자는 한눈에 봐도 어렸다. 그는 잠에서 막 깬 듯 눈을 비볐다.
“누구세요?”
정인이 그의 뒤로 집 안을 슬쩍 살폈다. 그러자 상대방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뭐예요?”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정인이 남자와 눈을 맞췄다.
“류정인입니다. 류동찬 씨 조카요.”
“누구?”
알긴 아는 사인지 누구냐고 물으면서도 눈빛으로 반응을 보인다. 정인이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하자 상대방이 버럭 성질을 낸다. 마침 정인의 눈에 현관 앞 운동화가 들어왔다.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집주인의 신발 사이즈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저희 삼촌 여기 계시죠?”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들어가서 확인만 할게요.”
“미쳤어? 다짜고짜 뭐 하는 짓이야.”
상대방이 문을 닫으려고 했고, 정인이 그것을 급하게 잡았다. 그러고 나서 남자의 팔을 치우고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갔다. 남자는 정인의 셔츠를 잡아당기며 나가라고 빽 소리를 질렀다.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닫힌 문 안쪽에서 우당탕 소리가 난다. 급하게 문을 열자 열린 창문이 눈에 들어왔고 황급히 뛰어나가는 누군가의 다리가 보였다.
이런 젠장. 정인이 남자를 밀치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골목 아래로 달려서 도망가는 뒷모습은 분명 류동찬이다.
“야 이 개새끼야!”
삼촌이고 뭐고 욕부터 튀어나왔다. 죽어라 쫓아가는데 류동찬이 골목 사이사이를 다람쥐처럼 빠져나간다. 거리가 점점 좁혀지자 류동찬이 소리를 질렀다. 쫓아오지 마. 미안해 정인아. 잘못했어!
거기 서! 죽이진 않을 테니까 거기 서! 하지만 안타깝게도 큰 도로로 나간 류동찬은 보란 듯 택시를 잡아타고 줄행랑을 쳤다. 차를 따라 달리며 멈추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나 소용없었다. 폐가 터질 것 같았다. 젠장… 담배 좀 끊을걸.
“씨발!”
폭발한 정인은 발로 바닥을 걷어찬 뒤 도롯가에 주저앉아 버렸다.
***
“오빠 누구야? 왜 우리 집 와 있어?”
할머니는 저녁 내내 정인의 옆에 앉아 얼굴을 들여다보며 누구냐고 물었다. 지난주에는 우리 손주 왔느냐며 웃더니 그새 또 얼굴을 잊어버린 것이다. 아니, 기억을 잃었다는 표현이 맞으려나. 피부의 수분이 다 말라 나뭇가지 같은 할머니의 손을 끌어다 정인이 제 얼굴에 댔다.
“정인이. 류정인. 할머니 손주.”
할머니의 잿빛 눈동자가 유독 텅하니 비어 있다. 몹쓸 병은 그녀의 괄괄하던 성격마저 빼앗아 버렸고 그래서 이젠 유순한 아이 같을 때가 많았다. 정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고양이가 마당에 돌아다니자 그것을 쫓아간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정인의 모친이 나타났다.
“왜 나와 있어. 피곤할 텐데, 들어가.”
“몸은 어때요? 병원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병원은 무슨. 엄마 괜찮아. 아깐 너무 놀라서 그랬어.”
그녀가 정인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개고서는 쓰다듬었다. 그런 다음엔 머리도 쓰다듬어 준다. 정인은 모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서는 눈을 감았다. 고단한 삶의 냄새가 묻어나는 것 같다. 곱던 그녀의 얼굴이 하루 새 10년은 더 늙어 버렸다.
“자고서 아침에 바로 서울 가.”
“…….”
“너 할 만큼 했어. 나머진 엄마가 알아서 할 거야.”
따뜻한 손길이 이젠 뺨을 쓰다듬는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류민아가 둘 사이를 갈라놓으며 모친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잖아도 민아는 정인에게 연락했다는 이유로 저녁 내내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엄마 걱정하지마. 나만 믿어. 내가 다 해결할게.”
정인이 민아에게 경고했다.
“넌 사고나 치지 마.”
그 말에 민아가 팩 토라져 쏘아붙였다.
“엄마! 오빠는 말을 꼭 저런 식으로 한다? 자기는 학교 다닐 때 애들 패고 다녔으면서.”
정인이 이를 꽉 물었다. 팬 건 사실이나 그건 불량한 애들이 먼저 건드렸기 때문이다.
“너 중간고사 성적 나오지 않았어?”
민아가 흠칫하며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래, 왜 갑자기 성적 이야기를 꺼내?”
“나왔네. 표정 보니까 또 꼴찌네.”
“아니거든!”
“아니긴. 장담하는데, 동구를 데려다 공부를 시켜도 너보단 잘할걸.”
민아가 입을 삐죽였다. 졸지에 집에서 키우는 개와 비교를 당하니 자존심이 상했다. 열 살 차이가 나는데도 툭하면 애들처럼 싸웠다. 모친이 웃으며 둘을 말리자 민아가정인의 등을 퍽 소리 나게 때리고서는 잽싸게 들어가 버린다.
쫓아가려고 하자 엄마가 정인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지 마. 지도 속상해해.”
엄마는 늘 그랬다. 정인이 사고를 치고 다닐 때도, 늘 정인의 편을 들더니,
“아침에 올라가. 엄마하고 약속했어?”
정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아 있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다. 삼촌을 찾는다고 해서 그 돈이 남아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엄마가 그만 자라며 정인의 어깨를 토닥인 뒤 들어갔다.
그녀는 언젠가부터 정인이 더는 이곳에 신경 쓰지 않기를 바랐다. 아버지가 없다고 하여 네가 아버지 대신일 필요는 없다고, 늘 그렇게 말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없기에 가족과 소망원의 아이들을 더더욱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혼자 남은 정인은 고개를 젖히고 긴 숨을 토해 냈다. 입김이 뿌옇게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바람이 차서 코끝이 시리다. 어두운 하늘만큼이나 앞이 캄캄하다. 해결책이 안 보인다.
돈은 어떻게 마련하지. 월요일에 당장 변호사를 찾아가 볼까. 머릿속으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돌아다닌다. 울적한 기분과는 다르게 오늘따라 밤하늘의 별은 쏟아질 것처럼 많았다.
***
“나 때문에 곤란해진 거 아니야?”
“곤란할 게 뭐가 있어.”
일주일 전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김설아는 아무렇지 않게 하준의 회사를 찾아왔다. 사실 그날 둘이 만난 건 순전히 일 때문이었는데, 장소가 호텔이고, 주인공이 김하준이다 보니 더 난리가 난 것이다.
요즘 하준은 연예인만큼이나 많은 주목을 받고 있었다. 재벌 아들에 우성 알파. 잘나가는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번듯한 외모, 게다가 그의 아버지인 김만호가 경영에서 잠시 물러나 정치판에 뛰어들면서 관심은 나날이 늘어 갔다.
“그 인간 나한테 연락 왔어. 김하준하고 무슨 사이냐고 펄펄 뛰던데.”
김설아가 고소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스캔들이 나가자마자 바람피워 이혼한 전남편이 전화해 지랄해 댔다. 자기가 바람피울 때는 그렇게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 와 무슨 자격으로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재결합하게?”
하준의 물음에 김설아가 인상을 썼다.
“미쳤어? 김 대표가 그랬잖아.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며.”
“잘 생각했어. 믿었던 사람 배신하는 것들은 상종하지 마.”
“꼭 당해 본 사람처럼 말한다?”
기억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곤 하준은 씁쓸하게 웃었다. 마침 휴대전화가 울린다. 이두영이다. 대학 후배인 그는 하준의 직원으로 일을 했는데, 최근 자신의 이상형을 찾았다고 설레발을 치고 다니더니 어제는 하루 휴가를 내고 출근하지 않았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다. 아니나 달라, 전화를 받자마자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제발 살려주세요.]
***
정인은 소파에 늘어진 채 명함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도울 일 있으면 말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줄게.]
며칠 전 본 최 사장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욕망으로 번들거리던 남자의 눈빛이 떠올라 정인은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아아, 씨발. 아무리 돈이 급해도 그건 아니다. 명함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서는 얼굴을 감쌌다.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삼촌은 찾지 못했고, 오히려 그가 더 빚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만 듣게 됐다. 그냥 차라리 감방에 처넣어 버릴까. 가게를 정리하고, 집 전세금을 빼고, 적금을 깨고, 가능한 대출을 받아도 턱도 없이 모자란다.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안쪽에서 기구를 소독하던 다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온다.
“괜찮아?”
정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로 올라온 뒤 잠을 못 잘 정도로 괴로운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다혜는 아침에 사 온 주스와 샌드위치를 건네줬다.
“먹어. 그러다 죽겠어.”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정인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나 어디 가서 굿이라도 할까?”
“너는 아버지가 목사인 애가. 굿 말고, 차라리 네 삼촌을 고소해. 그게 빠르겠다.”
다혜의 말에 정인은 테이블 위에 머리를 쿵 찧었다. 그냥 머리 박고 확 죽어 버릴까. 한숨만 푹푹 내쉬는데 테이블에 올려 둔 전화기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울린다. 그녀는 전화를 챙겨 정인에게 가져다줬다.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다. 여기저기 돈 부탁해 놓은 곳이 많아 일단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형. 안녕하세요. 저 진순데요.]
“누구?”
[박진수요….]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박진수가 누구더라. 곰곰이 생각하던 와중에 오토바이를 탄 노란색 머리를 떠올렸다. 민아를 쫓아다니는 돌대가리. 근데 갑자기 왜…. 등 뒤로 불안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난다. 전화한 이유를 묻기도 전에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갑자기 전화드려서 죄송해요. 다른 게 아니라 민아가 연락이 안 돼서요.]
“무슨 소리야?”
[교복 팔러 서울 간다고 했는데, 전화를 안 받아요.]
뜬금없는 교복 이야기에 정인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교복?”
[그게요…. SNS에서 알게 된 사람이 애들 교복 산다고 해서, 그거 모아서 팔러 갔거든요….]
그의 말에 따르면 누군가 아이들이 입던 교복을 사기로 했고, 민아가 학교를 땡땡이치고 그 사람을 직접 만나러 갔다는 소리다. 그런데 벌써 몇 시간 전부터 연락이 안 된단다. 정인의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사라졌다.
“알았으니까 일단 끊어.”
통화를 마치자마자 류민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질 않는다. 여러 차례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서둘러 위치추적 앱을 켰다. 혹시 몰라 전에 설치해 둔 거였는데, 켜고 나니 얼마 뒤 류민아의 위치가 서울로 뜬다.
정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투를 챙겼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다혜가 걱정스럽게 쳐다본다.
“무슨 일이야?”
“너 스쿠터 끌고 왔지? 잠깐 빌리자.”
다혜의 스쿠터 키를 집어 들고 정인은 총알처럼 밖으로 튀어 나갔다. 시동을 켜는데 손이 헛돌아 간다. 심장이 두근댔다. 워낙 성질이 지랄맞고 야무진 구석도 있어 별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과는 다르게 시동을 켜는 손이 자꾸만 떨려 왔다.
***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하준은 503호라고 적힌 방 호수를 못마땅한 얼굴로 노려봤다. 손을 쓰지 않고 발끝으로 문 아래를 툭툭 소리 나게 두드렸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수건으로 아래만 가린 두영이 반가운 얼굴로 소리 질렀다.
“대표님!”
하준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두영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한심하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최근 만난 사람이 잠든 사이 옷과 시계 현금을 모두 가지고 도망갔단다. 그는 들고 온 쇼핑백을 두영에게 던졌다.
“너 돌았지? 감히, 나한테 옷을 가져오라고 시켜?”
두영은 울상이다.
“죄송해요. 도저히 연락할 데가 없었어요.”
“그러게 평소에 인간관계를 잘하지 그랬어.”
두영은 입을 달싹이다 꾹 다물었다. 친구를 못 만나는 게 누구 때문인데. 허구한 날 일에 치여 사느라 동기뿐 아니라, 식구들 얼굴 못 본 지 오래다. 물론, 거기에 상응하는 금전적인 보상은 뒤따랐지만.
두영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하준은 안으로 들어가 방을 훑었다. 어두운 색의 천 소파와 낡은 테이블, 언제 빨았는지 모를 암막 커튼과 카펫. 그러다 발밑의 피임도구를 발견하고는 얼굴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쯧, 혀를 차고 나서 혹여 구두에 균이라도 묻을까 싶어 출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온 하준은 어두운 복도를 바라봤다. 갑자기 어디선가 앙칼진 비명이 들려온다. 착각인가 싶었는데, 또다시 들린다. 천천히 소리가 난 곳으로 걸어가는데 옷을 갖춰 입고 나온 두영이 뒤를 쫓아온다.
“어디 가세요? 나가는 길은 이쪽인데.”
하준은 대꾸하지 않고 소리가 난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다가온 두영도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기다렸다는 듯 안에서 남자의 고함이 들린다.
“뭐죠. 이 더러운 느낌은?”
두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준이 눈짓을 했다. 두드려 봐. 두영이 왜 하필 자기냐고 불만 어린 표정을 짓다가 압박에 못 이겨 마지못해 노크했다. 소리가 멈춘다. 다시 두드렸으나 쥐 죽은 듯 조용하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두영이 그만 가자고 재촉하자 하준은 가만히 문에 귀를 댄다.
“가서 사람 불러와.”
“꼭…그래야 할까요?”
슷. 눈으로 협박하자 두영이 마지못해서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조용한 가운데 안에서 아주 잠깐 휴대전화 벨이 들려왔다. 하준은 그 틈을 타 조금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조용하더니 문이 열리고 성질 더럽게 생긴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뭐야?”
남자의 눈빛이 위협적이다. 하준은 안쪽을 흘깃 살폈다.
“소리가 나서요.”
“애인하고 좋은 시간 보내는 중이니까 꺼져.”
“안에 계신 여자분도 같은 생각인지 궁금하네요.”
하. 남자가 웃더니 눈에 살기를 드러낸다.
“좋은 말로 할 때 가라.”
문이 닫히려 했고 하준은 그 틈으로 발을 집어넣고 밀고 들어갔다. 예상대로 침대에 쓰러진 여자가 보인다. 가까이 가서 확인하려고 하자 남자가 하준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이 새끼가 돌았나. 어딜 막 들어와!”
하준은 어깨에 닿은 남자의 손을 툭 털어 냈다.
“기절한 거 아닙니까?”
남자가 품에서 접이식 나이프를 꺼내며 실실 웃었다.
“보면 몰라? 자고 있잖아. 왜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들어?”
번뜩이는 칼날을 보면서도 하준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남자의 뒤로 바닥에 나뒹구는 교복을 발견하고 미간이 구겨졌다. 학생인가. 적어도 남자의 나이는 마흔은 훌쩍 넘어 보이는데.
“나가라고, 이 씨발놈아!”
하준은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지포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남자가 칼등으로 하준의 가슴을 툭툭 건드렸다.
“이런 데서 객사하면 부모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 응?”
칼끝을 보며 하준은 피식 웃었다.
“어머닌 몰라도 아버진 존나 좋아하실걸?”
남자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하는 순간 하준이 라이터를 쥔 주먹으로 남자의 턱을 가격했다. 퍽 소리와 함께 남자가 뒤로 물러서며 휘청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돌려찼다. 턱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카펫 위에 쿵 소리를 내며 대자로 실신했다.
눈을 까뒤집은 채 게거품을 물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하준이 싱긋 웃었다.
“거봐요. 자는 거하고 기절한 건 다르잖아.”
대답 없는 남자를 발로 툭 건드리고는 돌아서서 침대 위에 있는 여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조금 전까지 기절해 누워 있더니 어느새 정신을 차렸는지 일어나 앉아 주위를 두리번댄다.
“괜찮아요?”
맞았는지 뺨이 빨갛다. 자세히 보니 나이도 꽤 어리다. 진짜 미성년자인가. 괜찮으냐고 한 번 더 묻자 여자의 얼굴이 공포로 변한다. 하준이 뒤로 물러서며 양손을 들었다.
“오해하지 말아요. 나는 댁 구해 주러 온 거니까.”
여자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벙긋거렸다.
“오, 오…!”
“오? 오, 뭐?”
인기척을 눈치채고 몸을 돌리는 순간 눈앞에 둥그런 물체가 먼저 날아왔다. 본능적으로 상체를 숙여 피하자마자 바로 주먹이 날아와 턱에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하준은 상대의 팔을 비틀어 잡고 멱살을 낚아챘다.
“뭐야, 당신!”
잔뜩 일그러진 상대의 얼굴이 시야로 확 들어온다. 언짢아하던 하준의 눈이 점점 커지고 심장은 발아래로 쿵 떨어졌다.
“어?”
류정인…?
화가 나 다짜고짜 헬멧을 휘두른 정인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손에 쥔 헬멧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굴렀다. 김하준? 둘은 서로의 팔과 멱살을 잡은 채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11년 만의 재회였다.
사람들은 한 번쯤 헤어진 옛 애인을 만나는 상상을 한다.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근사하게 변한 옛 연인의 모습을 보며 후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옆에 있는 사람이 나보다 못하면, 은근히 기쁘기도 할 것이다.
“오랜만이다….”
아주 짧은 순간 정인은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애써 미소를 지었으나 돌아오는 반응은 냉랭했다.
“누구시죠?”
눈빛이며 말투, 표정, 어느 것 하나도 자신이 알던 김하준이 아닌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고, 정인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민망하기도 했으나 우선은 민아를 챙겨야겠기에 뒤를 돌아봤다.
민아는 뺨이 빨갛게 부었고, 놀랐는지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오빠….”
울먹이는 민아의 목소리에 화가 나면서도 심장이 아린다. 괜찮은지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했다. 누가 그딴 짓 해서 너한테 돈 마련하라고 했냐고, 정말 위험해지면 어쩔 뻔했냐고, 내뱉지 못한 말이 켜켜이 쌓인다. 민아는 쓰러진 남자를 보더니 정인의 뒤에 서 있는 김하준을 가리켰다.
“저분이 나 도와주셨어.”
정인은 돌아보지 못했다. 뒤통수가 송곳으로 쑤셔지는 기분이다. 마침 아래층으로 사람을 부르러 갔던 두영이 돌아왔고, 방 안 풍경에 기겁하며 하준의 상태를 확인했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이 사람 왜 이래? 죽인 거 아니죠?”
뒤따라온 모텔 직원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사이 하준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두영이 그 뒤를 따랐다. 하준은 무언가에 잔뜩 화난 사람처럼 성큼성큼 앞만 보고 걸어갔다.
“대표님. 그냥 가시는 거예요?”
뭐가 못마땅한지 대답도 없다. 뒤쫓아가던 두영은 모텔 직원에게 간단히 전후 사정을 설명한 뒤 명함을 건네줬다. 그러고 나서 밖으로 나와 하준의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시동을 건 하준이 출발하지 못하고 앞만 노려보고 앉아 있다.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 아래로 턱이 경직됐고 핸들을 비틀어 쥔 손등에는 핏줄이 파랗게 돋아났다. 두영이 한 번 더 대표님? 하고 부르자마자 갑자기 살벌하게 욕을 하더니 차를 출발시킨다.
눈치를 보던 두영은 큰 도롯가로 나오는 순간 비명을 질렀다.
“대표님!”
우회전해야 하는 차가 좌회전하는 바람에 졸지에 역주행이 됐다. 마주 오는 차가 빠앙- 클랙슨을 울리며 피해 간다. 하준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고 차는 중앙선에서 비스듬하게 멈췄다.
하아, 하아, 놀란 두영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하준을 바라봤다. 도대체 왜 그러세요?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10년 가까이 그를 알았으나 여태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대표님…?”
오던 차들이 멈추고 차창을 열고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도로가 아수라장이 되는데도 그는 차를 돌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
쿵, 쿵, 민아가 위층을 올려다봤다. 벌써 1시간째 소음이 들린다. 거울을 보니 뺨이 아직 붉다. 개새끼. 욕을 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남자는 SNS에서 자신을 독립영화 감독이라고 소개했다. 촬영 때문에 교복이 많이 필요해서 그런다고, 교복을 팔라기에 그런 줄만 알았다.
알고 보니 동종 전과만 여러 개였다. 경찰서에 가서도 얼마나 뻔뻔하게 구는지 하마터면 의자로 내리찍을 뻔했다. 물론 저도 잘한 건 없지만. 바보 같은 짓을 한 게 속상해 시무룩한 표정으로 한참을 앉아 있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방문을 열자 주방이 바로 보인다. 밥솥 위의 추가 요란하게 움직이며 소리를 냈고 집 안에는 고소한 밥 냄새가 진동했다. 장을 보러 간 류정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류정인이 사는 집은 매우 단출했다. 눈에 보이는 제대로 된 살림살이라고는 싱글 침대하고 냉장고, 식탁이 전부였다. 날이 추워 건조대를 안에다 들여 놨는데, 보니까 옷이 전부 검은색이다.
일할 때 잉크가 자주 묻어 어쩔 수 없다지만, 이렇게 맨날 우중충한 색만 입으니 애인이 없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하나뿐인 오빠가 딱하게 느껴진다. 집 안을 둘러보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면서 류정인이 비닐봉지를 잔뜩 들고 들어왔다.
그는 비닐봉지를 식탁에 올려 뒀고 민아는 바로 그것을 뒤졌다. 뭘 많이 사 왔나 했더니 민아가 좋아하는 딸기와 과자가 잔뜩이다. 거기다 약국 봉투도 보인다. 봉투를 열어 본 민아는 코끝이 찡해졌다. 할머니가 자주 먹던 청심환.
“이런 건 왜 사 왔어? 누가 놀랐을까 봐.”
정인이 동그란 뚜껑을 열어 청심환을 꺼내 민아에게 내밀고, 물을 챙겨 줬다. 먹어. 퉁명스러운 말투였으나, 그의 진심이 느껴져 민아는 괜히 울컥했다. 물을 받아 마시는데 눈이 화끈거리더니 목이 멘다.
정인은 말없이 가스레인지를 켜고 프라이팬을 달궜다. 민아는 입 안에 든 청심환을 꼭꼭 씹어 먹으면서 눈물을 삼켰다. 생각할수록 자신이 한심스럽다. 자칫하면 큰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 정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 남자가 아니었다면….
“오빠. 아까 모텔에서 아는 사람이었어?”
정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경을 벗었으나 그건 분명 김하준이었다. 서늘한 눈빛이 잊히질 않는다. 누구시죠? 주방 유리창에 얼굴을 비추어 바라봤다. 내가 그렇게 못 알아볼 정도로 변했나. 아니면 아는 척하기 싫었던 걸까. 왠지 후자가 맞을 것 같다. 기분이 씁쓸해진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옛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프라이팬에 올려 둔 달걀이 먹기 좋게 익어 갔다. 노른자가 터지지 않게 잘 뒤집은 다음 접시에 담아 민아의 앞에 놓아 줬다. 엄마가 만들어 보내 준 반찬을 꺼내 그릇에 담고 일회용 국을 끓여 내놓으니 그럴듯한 한 끼 식사가 완성됐다.
집에 수저와 젓가락이 한 세트뿐이라 그것을 민아에게 주고는 저는 나무젓가락을 뜯어 밥을 떠먹었다. 민아가 수저를 보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수저가 이것뿐이야?”
“어.”
“오빠는 집에 데리고 올 애인도 없어?”
“시끄러워. 밥이나 먹어.”
밥을 몇 수저 떠먹던 민아는 엄마의 반찬을 보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엄마한테는 비밀이야.”
가뜩이나 억장이 무너질 텐데 딸이 이런 사고까지 친 걸 알면 정말 쓰러질지 모른다. 밥을 먹던 민아는 칠이 벗겨진 식탁을 보며 괜히 속이 상했다. 돈 벌어 다 뭐 하냐고 따질 수도 없었다. 그 돈이 대부분 어디로 들어가는지는 민아도 잘 알고 있었다.
“기다려. 내가 소속사하고 계약만 하면, 오빠한테 이 빚 다 갚을게.”
야심 차게 눈빛을 빛내는 민아를 보며 정인은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아는 작년부터 뜬금없이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하더니, 최근엔 연기학원에 다닐까 이야기를 꺼냈었다.
정말 본인이 하겠다고 하면 서울로 데리고 와 보내 줄 수도 있는데, 문제는 민아의 꿈이 3개월 단위로 바뀐다는 거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 지나가겠구나, 하고 여기는 중이었다.
밥을 푹푹 떠먹던 민아가 목이 메는지 물을 찾는다. 정인은 물을 떠서 건네주다 민아의 낡은 휴대전화를 발견했다. 보통 이맘때 아이들이면 부모를 졸라 최신형 휴대전화를 살 법도 한데 그녀가 쓰는 건 꽤 오래된 기종의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정인과 마찬가지로 민아도 조르는 것을 몰랐다.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아이들과 나눠 가져야 한다고 배웠고, 더 욕심내선 안 된다고 배웠다. 그래서 쉽게 포기했고, 쉽게 놓아 버렸다. 신 포도라 여기며 맛조차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누구시죠?]
불현듯 낮에 본 그 얼굴이 떠오른다.
누구냐니. 너무하잖아.
그러다 제가 한 짓이 떠올라 목구멍이 먹먹해졌다.
생각해 보니 그런 말을 들어도 싸다.
***
누구시죠? 누구세요? 누구신데요? 하준이 거울을 보며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내 표정이 어땠더라. 인상을 썼던가. 당황하던 류정인 얼굴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유치하게도 그 얼굴에서 어떻게든 비참함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마음이 복잡해진 하준은 잔에 얼음을 채우고 위스키를 들이부었다. 반을 쉬지도 않고 마시자 목구멍부터 명치까지 싸하다. 하, 아무리 생각해도 멍청한 반응이었다. 누구시죠? 집에 돌아온 내내 그 장면이 무한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쿨하게 반응하지, 토라진 애마냥 누구냐니. 씨발, 쪽팔려. 머릿속에는 11년 전 일이 바로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지나간다. 남은 술을 마저 비워 버리고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찬물을 틀고 고스란히 맞으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쏟아지는 물줄기 사이로 류정인 얼굴이 생각난다. 하나도 변한 게 없다. 그래서 더 화가 난다. 평생 후회하길 바랐는데 낯짝을 보니 잘 먹고 잘살았나 보다.
씨발,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들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찬물을 쐬니 정신이 좀 돌아온다. 가운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와서는 그대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눈을 감자 십여 년 전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르며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몸을 뒤척이며 방향을 바꿨다. 잔뜩 웅크리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받지 않고 버텼는데 끊어질 생각을 않는다. 억지로 몸을 일으켰고 테이블에 올려 둔 전화를 집어 확인했다. 모친인 주혜련이다.
그는 속상한 기색을 감추고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받았다.
“안녕, 엄마.”
[하준아 너 어디야?]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쫓기는 사람 같다.
“왜요?”
[너 지금 당장 출국해. 엄마가 할머니한테 다 말해 놨어. 몸만 나가, 얼른.]
뜬금없이 전화해 출국하라니.
“아버지 검찰 조사 받으세요?”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말고 출국하라며, 당분간 일은 두영이한테 맡기고 서둘러 나가라고 채근한다. 누가 보면 출국이 아니라 도피하라는 줄 알겠다. 평소 느긋한 성격인 그녀답지 않게 말도 빠르다.
[너 여기 있으면 안 돼. 큰일 나.]
“왜 그러는데요. 자세히 알아야 저도 이해를 하죠.”
[너희 아빠가 너!]
그녀가 말을 하면서도 기가 차는지 잠시 멈추고 헛웃는다.
[결혼시킨대!]
하준은 전화기를 귀에 댄 채 도로 누웠다. 김 회장이 결혼하라고 재촉한 건 하루 이틀이 아니다. 결혼이라도 하면 사람이 되지 않겠냐고. 작년부터는 아예 선 자리를 들고 와서 다그치는 바람에 실제로 몇 번 나가기도 했었다.
하준은 웃으며 대꾸했다.
“잘됐네요. 아버지 뜻대로 했다가 확 이혼해 버리지 뭐.”
[농담 아니야. 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 남긴 거 알지?]
뜬금없이 무슨 유언? 심드렁한 표정으로 있던 하준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실을 하나 기억해 냈다. 곧바로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일어나 앉았다.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주혜련의 목소리가 거의 울 듯하다.
[네 아버지가 그 집 찾는다고 난리야!]
***
집으로 가는 내내 민아는 음악을 틀어 놓고 흥얼거렸다. 창문을 열자 찬 바람이 들어온다. 머리를 내밀던 민아는 보육원 근처에 낯선 차가 멈춰 서 있는 걸 보고 고개를 쭉 내밀었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차다.
“오빠, 저기.”
“봤어.”
차를 발견한 정인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혹시 사채업자들이 또 찾아온 걸까. 차를 한쪽에 주차하고 다급하게 내려 보육원 안으로 들어가자 마당에서 놀던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정인에게 매달린다.
“형!”
“정인이 오빠!”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보니 안방 마루 앞에 못 보던 남자가 서 있다. 양복을 입고 군인처럼 정자세로 서 있던 남자의 시선이 정인에게 향한다. 그가 고개를 까닥 숙여 인사를 했고, 정인도 얼결에 같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더니 바로 안방 미닫이문이 열리면서 낯선 남자가 나온다. 안경을 썼고 말랐으며 깐깐한 인상이다. 다행히 사채업자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 남자 역시 정인을 보더니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온다.
그리고 남자의 뒤로 모친인 김은혜가 따라 나온다. 남자는 김은혜에게 다시 뵙겠다는 말을 남겼고, 정인에게 한 번 더 인사하더니 승용차를 타고 사라졌다.
“엄마 저 사람들 누구야?”
민아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묻자 김은혜는 대답 대신에 정인을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에는 할머니가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고, 그 옆으로 딸린 작은 부엌 식탁에는 조금 전 손님이 마시고 간 찻잔이 놓여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까 그 사람들은 누군데. 삼촌 찾아왔어요?”
“할아버지 손님이셔.”
이상한 일이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수십 년이 지났지 않은가.
“할아버지요?”
“어. 엄마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그녀가 식탁에 앉아 심란한 표정을 지으며 냉수를 따라 마셨다. 갑자기 손님이 방문해 혹시 시동생이 사고 친 것 때문인가 걱정했는데 엉뚱하게도 오래전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지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는데, 사연인즉슨 돌아가신 회사의 초대 회장이 자신의 시아버지에게 크게 도움을 받았고 이제라도 그것에 대한 은혜를 갚고자 한다는 이야기였다.
김은혜는 의아했다. 시집오고 10년째 되던 해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남편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어머니라도 정신이 멀쩡하면 묻겠는데 그녀가 오늘은 종일 기억을 잃고 20대로 돌아가 있으니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더더욱 이상한 건….
그녀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정인을 바라봤다.
“왜 그러세요?”
“그 사람이 너에 관해 묻더라.”
“저요?”
“네가 오메가인지 궁금해했어.”
이야기를 꺼내 놓고도 그녀는 아들의 안색을 살폈다. 오메가인 줄 알고 살던 정인이 베타로 판정을 받은 게 열여덟 살 때다. 오메가와 알파 사이에서 베타가 나올 확률은 극히 드물다는데 정인이 그 경우였다.
18년을 자신이 오메가로 알고 살다가 갑자기 바뀌었으니, 그 일로 정인은 꽤 힘들어했었다. 몇 번이고 병원을 찾아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온전히 슬퍼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현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기도 전에 남편이 갑작스레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김은혜는 아직도 가슴이 미어졌다.
“정인아.”
그녀의 눈빛에 아픔이 묻어났으나 오히려 정인은 대수롭지 않아 했다.
“걱정 마세요. 저 이제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담담하게 말하는 동시에 이틀 전에 본 김하준이 떠오른다. 답답해지는 심정을 추스르려 찬물을 따르는데 문이 열리고 할머니가 나타난다. 정인을 보는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온 걸 보니 정신도 함께 찾은 모양이다.
그녀가 정인을 향해 양팔을 뻗었다.
“우리 정인이 언제 왔어.”
몸을 낮추고 한참이나 작은 할머니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자 등을 토닥여 준다. 할미가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며칠 전에 정인이 방문한 사실은 까맣게 잊었나 보다. 정인이 할머니의 얼굴을 감싸며 웃었다.
“우리 김미자 씨 보고 싶어서 왔지요.”
그녀가 정인의 팔을 툭, 때렸다. 할미, 놀리지 마. 내 이름이 왜 김미자야 김옥란이지.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는 걸 보니 정신이 온전한 게 틀림없다. 이때다 싶었는지 김은혜가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일에 관해 물었다. 혹시 아느냐는 질문에 김옥란의 주름진 눈꺼풀이 일그러졌다.
“모르겠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셔요.”
“음….”
한참을 생각하는데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말에 김은혜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께름칙하다. 핏줄도 사기를 치는 마당에 돌아가신 시아버지를 아는 사람이라고 덜컥 집으로 들인 게 뒤늦게 후회가 됐다.
***
“베타?”
윤 비서의 말을 듣던 김 회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이 기억하는 류덕구는 알파고 그의 부인이 오메가다. 슬하에 자식이 둘 있었고, 둘 다 알파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베타를 낳았다?
“태어날 때는 오메가로 판정받았는데 발현 시기에 베타로 확정됐습니다. 드문 케이스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랍니다.”
김 회장이 서류를 다시 살핀다. 서류에는 여전히 오메가라고 표시되어 있다.
“당시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서 정정 신고를 바로 못 했나 봅니다.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오메가로 알고 있답니다.”
음, 김 회장은 생각에 잠겼다. 서류를 한 장 더 넘기던 그의 눈이 살짝 커진다. 양일 고등학교 졸업? 김하준이 요양하며 다니던 그 학교다. 김 회장의 표정을 읽었는지 윤 비서가 바로 설명했다.
“김하준 대표와 같은 반은 아니었습니다. 혹시 모르니 자세한 건 서 집사한테 물어보겠습니다.”
김 회장은 그냥 두라고 했다. 만약에 서로 아는 사이라고 해도 원수지간만 아니면 된다.
“윤 비서야.”
“예, 회장님.”
“이 친구, 어디에서 일한다고 했지?”
“이태원에서 타투샵을 운영 중입니다.”
“타투?”
“문신해 주는 일이요.”
흐음. 김 회장은 골몰히 생각했다. 오메가가 아니라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으나 바꿔 생각하면 더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김하준은 계약 상대자에게 마음 주는 일 따위 없을 것이다.
“하준이 출국 정지해 놨지?”
“예.”
그는 돋보기를 벗고 의자에 기댔다. 눈은 사진 속 류정인을 응시했다. 눈에 띄는 미남이다. 김하준과 붙여 놓으니 꽤 그럴싸한 그림이 나온다. 그는 고개를 들어 윤 비서에게로 시선을 이동했다.
“내일 오후 스케줄 비워 놔. 내가 직접 봐야겠다.”
***
“이해수는 뭐라고 해?”
“난리죠. 대표님이 그럴 줄 몰랐다는 둥, 아침부터 쫓아오겠다는 거 간신히 말렸어요.”
“잘됐네. 쫓아오라고 해. 누가 잘못했는지 이참에 따져 보면 알겠지.”
갓 우려낸 차향을 음미하며 하준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밤새 악몽에 시달리느라 잠도 못 잤는데, 아침부터 배우 하나 때문에 짜증이 났다. 평소에도 골치를 썩이더니 며칠 전에도 크게 사고를 쳐 다른 소속사의 배우에게 배역이 넘어간 것이다.
“적당히 봐서 계약 해지하자. 사유는 충분하니까, 이해수도 더는 뭐라고 하지 못할 거야.”
“진심이세요?”
“그럼 농담일까?”
서늘하게 되묻는 하준을 보며 두영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평소에 한량처럼 굴다가도 가끔 얼음장처럼 차가울 때가 있었다. 모두와 친한 듯 보여도 알게 모르게 선을 그었고 그 선을 넘으면 가차 없이 잘라 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김하준의 얼굴 상태가 영 좋지 않다. 눈도 퀭하고, 잠을 못 잔 티가 역력하다.
“어제 못 주무셨어요?”
“응.”
“왜요?”
“꼰대 때문에 열받아서.”
하준은 찻잔을 내려놓고 그것을 빤히 응시했다. 거짓말이다. 결혼이야 안 한다고 버티면 그만이다. 여태 그랬으니까.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할머니가 절대적으로 자신의 편을 드는 이상 아버지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정작 잠을 못 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좆같은 꿈을 꿨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인데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최근엔 거의 꾼 적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얼굴을 본 게 화근인가 보다.
하준은 앞에 앉아 있는 이두영을 불렀다.
“두영아.”
“예, 대표님.”
“이거 내 친구 얘긴데.”
“네.”
“걔가 길에서 옛날에 헤어진 애인을 만났나 봐. 그런데 헤어진 애인이 먼저 웃으면서 인사를 하더래.”
“그럴 수 있죠….”
“아주 좆같이 헤어졌거든.”
“어떻게요?”
하준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그건 알 거 없고.”
“아.”
“근데 내 친구가 거기다 대고 ‘누구시죠?’라고 했대.”
듣자마자 자신의 일인 양 두영이 인상을 찌푸리고 탄식을 토해 냈다. 아아.
“병신 같지?”
“네.”
“…….”
“그게 끝이에요?”
하준이 노려보는 것도 모르고 두영은 눈치 없이 말을 덧보탰다.
“차라리 쿨하게 인사를 하지. 그게 더 멋있었을 텐데. 그죠?”
“…….”
“진짜 오글거린다. 초딩도 아니고, 누구세요? 어우, 그 친구 자다가 이불 좀 찼겠어요.”
“…….”
“대표님?”
하준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너 안 바쁘냐?”
“네?”
“한가하냐고. 여기서 나하고 노닥거릴 시간이 있어?”
말은 자기가 시켜 놓고 갑자기 시비를 거니 당황스러웠다. 두영이 눈만 끔뻑이고 있는데 하준이 말없이 찻잔을 들고 일어서서 책상으로 가더니 일거리를 잔뜩 가지고 와 두영에게 던져 줬다. 눈앞에 가득 쌓인 파일을 보며 두영이 입을 벌렸다.
“이게 다 뭐예요.”
“작년 매입 매출 보고서. 틀린 게 있더라.”
그럴 리가 없다. 두영이 다른 건 몰라도 일 하나는 철저한 편인데.
“어디가 틀린데요?”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찾아야지.”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자 썩 나가라고 손을 내젓는다. 두영은 어이없는 얼굴로 서류를 주섬주섬 챙겼다. 갱년기인가. 조금 전까지 친구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왜 저러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잔뜩 쌓인 일거리를 들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김하준이 다시 부른다. 야, 이두영. 목소리가 나긋나긋해서 기대하고 봤는데 그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넌 뭐, 안 그럴 거 같냐.”
“네?”
“너는 갑자기 만나면 쿨하게 그게 될 것 같냐고.”
“…….”
“아, 됐어. 나가.”
토라진 애마냥 홱 돌아서는 모습에 두영이 오만상을 찡그렸다. 왜 저래,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