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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121/121)

120화

“엘리아나!”

율리시스는 돌아오자마자 엘리아나를 찾았다. 엘리아나는 소파에서 책을 읽다가 깜빡 잠든 채였다. 잠들어 있는 엘리아나를 보자마자 율리시스는 발소리를 줄이고 조심조심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선 그녀의 손에 있는 책을 내려놓고 잠든 엘리아나의 모습을 다정히 바라보았다.

두껍지 않은 실내 드레스 차림인 걸 보니, 외출은 전혀 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머리를 한쪽으로 묶어서 내린 모습이 수수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무엇보다도 엘리아나가 늘 꽂고 다니는 머리핀이 마음에 들었다. 웨딩드레스를 만들면서 핀도 보수를 맡겨 다시 색을 칠하고 루비와 에메랄드를 작게 심듯이 넣었다. 엘리아나의 머리카락 색, 눈동자 색과 잘 어울리는 조화였다.

장미. 그 자체 같은 여자.

율리시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살포시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댔다. 종일 관료들과 언쟁하며 쌓인 스트레스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엘리아나에게 이것저것 이야기할 것이 분명 많았는데…….

율리시스는 스르르 감기는 눈을 어찌하지 못했다. 따뜻한 온기와 편안한 감촉이 같이 있으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엘리아나.”

율리시스는 잠이 묻은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 * *

엘리아나가 깨어난 건 날이 거의 다 저물 무렵이었다. 그녀는 자기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로 잠이 든 율리시스를 보았다. 그녀는 머리칼을 쓸어 주면서 그를 불렀다.

“율리시스.”

“…….”

“율리시스. 일어나요.”

불편한 자세에 피곤하진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엘리아나는 그를 살살 흔들었다. 그러나 율리시스는 잠투정을 부리듯이 그녀의 무릎에 뺨을 비볐다.

“율리시스.”

“오늘은… 정말 피곤했어요. 진짜 재무부 사람들 다 싫어. 시드 블랙 경은 너무 꼼꼼하다고요. 그게 좋은 점이지만……. 그렇지만…….”

잠결에 엘리아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털어놓는 율리시스의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엘리아나는 그가 실컷 중얼거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율리시스는 한참을 웅얼웅얼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엘리아나는 그대로 시선을 들어 밖을 보았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된 것인지,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엘리아나는 율리시스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화답하듯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내뱉었다.

“난 오늘 늦잠을 잤어요. 산책했고, 게으름을 실컷 피웠어요. 그래도 된다는 걸 깨달을 수 있는 하루라서 좋았어요.”

“…….”

“그리고 당신이 조금 많이 보고 싶었어요.”

엘리아나의 그 말에 율리시스는 마치 깨어 있기라도 한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좋은 꿈이 찾아온 것이었지, 그녀의 말을 들은 것은 아니었다.

엘리아나는 더 이상 그를 깨우지 않고, 깊은 잠에 빠진 율리시스의 머리칼을 한참이나 쓰다듬었다.

* * *

결혼식 이후 며칠간 푹 쉰 엘리아나는 기력을 차리자마자 왕립 도서관으로 향했다. 왕자비로서의 첫 공식적인 행보라기에는 다소 소소한 일정이었으나, 엘리아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녀는 수레에 가득하도록 책을 빌려서 성으로 돌아왔다. 그러고선 곧장 서재로 향했다.

율리시스는 제대로 된 정무를 처음 해 보는지라 고민이 많은 듯싶었다. 능력이 없는 편이 아니지만, 자신이 내린 결정에 콘테르의 모든 것들이 좌우되는 터라, 그만큼 큰 부담을 느끼는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그런 그에게 좋은 조언을 해 주고 싶었다. 아내이자, 참모로서 해야 할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싶었다. 그녀는 욕심껏 가져온 책들을 늘어놓았다.

따뜻한 차와 과자를 챙겨 온 베니는 고개를 휘휘 젓더니 말을 이었다.

“또 나왔네, 이 버릇. 뭐든 새로운 지식은 흡수부터 하고 보는 거.”

“너무 궁금한 게 많아. 콘테르에 대해서는 겉핥기식으로 안 게 전부니까. 앞으로 익혀야 할 게 많을 거야.”

어쩌면 율리시스의 얘기는 핑계일지도 몰랐다. 엘리아나의 두 눈은 새로운 지식에 대한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살기 위해서 헌터 가문의 도서관으로 향했던 때와는 또 달랐다.

“이럴 때 보면 자작님이랑 똑같다니까.”

콘티노 왕립 대학의 교수가 된 엘리아나의 아버지는 특유의 열정으로 테르어에 관한 책을 집필하고 있었다. 게다가 강의도 인기가 있어서 수업 회차가 더 늘어난 참이었다.

부녀의 학구열은 비슷하게 닮아있었다. 로즈 자작은 몸이 좋지 않을 때도 공부에 있어서만은 눈을 빛냈으니 말이다.

엘리아나는 책을 곧 씹어 먹을 듯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베니는 찻잔에 차를 따라서 옆으로 밀어 주고선 말을 이었다.

“쉬엄쉬엄해. 여기선 아무도 등 떠밀지 않으니까.”

“응. 베니도 같이 공부할래?”

“난 됐어. 이 넓은 성을 관리할 하녀들을 새로 배치하는 것만 해도 머리가 아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엘리아나는 베니가 자신과 다른 방면으로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시녀장으로서 책잡히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로즈 가문이 자작의 작위를 받기 전부터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엘리아나는 그런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는 이미 훌륭한 시녀장이었지만, 로즈 가문의 일원답게 만족을 모르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었다.

엘리아나는 밝게 웃으면서 따뜻한 차로 입을 축였다.

그러고서는 다시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행복한 감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 * *

엘리아나의 공부는 몇 날 며칠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서재에서 깜빡 잠들어 버릴 때도 있어서, 율리시스가 그녀를 안아 들고 침실로 돌아오는 날도 많았다.

엘리아나의 지식이 쌓이는 만큼 율리시스의 불만도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었다. 율리시스는 입궁할 준비도 하지 않고 편안히 잠든 엘리아나의 얼굴을 계속 구경했다. 이런 때가 아니면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엘리아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서운함을 가득 담은 황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엘리아나는 이제는 익숙해진 그 시선에 웃으면서 그의 목을 끌어와 입을 맞췄다.

“율리시스. 잘 잤어요?”

“못 잤어요. 어제도 서재에서 잠든 거 알아요?”

“그런 거 같아요. 침실까지 온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어제는 콘테르의 국경 지역 방어 체계에 관한 책을 읽었거든요. 굉장히 독특했어요. 너무 재밌어서 그만… 하암…….”

“엘리아나는 그런 게 그렇게 재밌어요?”

“재밌죠. 나중에 율리시스가 필요할 때 내가 아는 한에서는 같이 머리를 맞대어 줄 수도 있을 거고요.”

“난 지금 엘리아나가 필요해요.”

엘리아나는 웃으면서 어리광을 피우는 율리시스의 뺨을 만졌다.

“지금 여기 있잖아요.”

“하지만 매일 집에 돌아오자마자 서재에 가서 아내를 찾고 싶진 않단 말이에요. 엘리아나는 나보다 책을 더 사랑하는 것 같아요.”

“무생물에 질투하는 거예요?”

“몰라요.”

율리시스가 삐졌다는 듯이 등을 돌리자, 엘리아나가 웃으면서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오늘은 침실에 있을게요.”

“침실에서 책을 읽고 있을 거죠?”

“어? 어떻게 알았지?”

“칫……. 엘리아나!”

“푸흐흐.”

“우린……. 우린 뜨겁게 불타올라야 할 신혼이라고요.”

“이 정도면 뜨겁지 않아요?”

“아니. 아니. 나는 한참 모자라요!”

율리시스의 정력적인 말에 엘리아나는 뺨을 붉혔다. 그러고선 율리시스의 옷깃을 잡아 쥐었다.

“모자라면 채워야죠.”

엘리아나가 야살스럽게 말을 잇자, 율리시스의 눈동자가 순간 생기로 가득 찼다. 율리시스는 홀린 듯이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아침을 맞이하여 창가에 찾아왔던 새들이 푸드덕푸드덕 소리를 내면서 자리를 비켜 주었다.

* * *

율리시스와 엘리아나가 부부로서 모습을 드러낸 첫 공식 외출은 헬렌과 레이의 결혼식이었다. 개인적인 인연도 있었지만, 오델리 가문과 허트 가문이 외교적으로 중요하기 때문도 있었다. 율리시스와 엘리아나는 푸른색 정장과 드레스를 입고선 결혼식이 열리는 오델리 가문의 연회장으로 향했다.

결혼식은 콘테르와는 형식이 사뭇 달랐지만, 걸리는 시간은 비슷했다. 정해진 결혼식 절차와 선포가 끝나면 피로연이 바로 열렸고, 신랑과 신부는 돌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엘리아나는 제 곁으로 온 헬렌에게 손을 들었다.

“헬렌!”

“엘리아나!”

“축하해요. 이제부턴 오델리 부인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니에요. 벌써……. 저야말로 왕자비 전하라고 불러야 하는데, 입에서 이름이 먼저 튀어나와 버렸어요.”

“좋아요. 헬렌은 내 친구잖아요. 앞으로도 그렇게 불러 줘요.”

“친구……. 고마워요.”

헬렌은 눈시울을 붉혔다. 이미 어딘가에서 한바탕 눈물을 쏟아붓고 온 듯했는데, 또 울먹이려고 하자 옆에 있던 레이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손수건을 쥐고 안절부절못하던 레이는 헬렌의 눈가를 살며시 닦아 주었다.

“울지 말아요, 헬렌 양. 나도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정말 울 것 같은 표정에 엘리아나는 너무 귀엽다는 듯이 율리시스의 팔을 잡고 웃었다.

“정말 너무 잘 어울리는 부부예요.”

“맞아요. 레이 경, 헬렌 양. 결혼을 정말 축하해요.”

“고, 고맙습니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하고요.”

“아 참, 질리언은 어디 있어요?”

“오라버니는 식이 끝나고 바로 부대로 돌아갔어요. 아마 어제 해적 소탕이 끝나서 탈옥의 위험이 있다나 봐요. 엘리아나를 보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뭐가 그리 바쁜지.”

헬렌이 민망하다는 듯이 말했다. 엘리아나는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 주면서 말했다.

“나중에 보면 되죠. 우리도 이렇게 자주 만날 건데요. 질리언은 여러 가지 일로 더 많이 마주치게 될 거고요. 보고 싶었는데 아쉬웠다고는 전해 주세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꼭 전할게요.”

헬렌이 가볍게 인사를 하고선 돌아서자, 율리시스는 엘리아나의 손을 꽉 잡았다.

“음?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아무것도.”

“그렇게 말하니까 더 수상한데요.”

“엘리아나는 절대 몰라도 돼요.”

율리시스는 불안한 듯 그녀를 잡아다 끌어 제 곁에 꼭 붙여 두었다. 엘리아나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뭇 남성들의 시선도, 자신을 보기가 괴로워 일찍 자리를 떠난 질리언의 마음도, 참석하지 못한 제데이아의 사정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율리시스는 영원히 그녀가 모르길 바랐다. 그녀가 원하지 않아도 그녀의 발밑에 충성을 맹세할 수많은 남자들을 말이다.

<계모는 하렘을 좋아해>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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