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웨딩드레스 열 벌이 도착했다. 한번 입으려면 하녀 여러 명이 달려들어야 할 정도로 드레스는 모두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엘리아나의 명성에 걸맞게 값비싼 장식들이 아낌없이 달려 있었다. 오히려 과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아무래도 의복사는 드레스에 관해서는 자신이 더 월등함을 엘리아나에게 뽐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의기양양한 표정에 베니는 눈썹을 찌푸리며 속삭였다.
“저 오만한 표정은 뭐야?”
“그러게. 자신감인가?”
엘리아나는 피식 웃고선 드레스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의복사는 화려한 장식에 눈이 돌아가는 다른 영애들과는 달리 여상한 표정으로 드레스를 보는 엘리아나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백 개가 넘는 진주를 붙인 드레스도 있었고, 몇십 겹의 얇은 고급 망사를 덧대어 치마 겹을 부풀린 드레스도 있었다. 프릴과 리본을 손수 같은 크기로 수십 개를 만들어서 이어 붙인 드레스까지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나 엘리아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드레스들을 꼼꼼히 체크해 보더니, 목과 팔을 얇은 레이스와 금사로 꾸민 드레스를 골랐다.
“그것보다는 보석이 달린 이 드레스나, 이 진주 드레스가 어떠신지요?”
“아니요. 이 드레스가 마음에 들어요. 레이스를 하나하나 손으로 만들어 냈을 텐데, 실력이 대단해요. 진주라면 이 레이스의 끝에 몇 개를 옮겨 달면 좋을 것 같고요.”
“하지만 이 드레스는…….”
“다른 것에 비해서 너무 수수할 수도 있다는 거죠?”
엘리아나는 의복사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말했다. 의복사는 뜨끔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엘리아나는 드레스의 치마 겹을 다시 고쳐 잡으면서 말했다.
“콘테르에서 외국인 왕자비를 맞이하는 건 실로 오랜만이에요. 그 자리는 항상 내국인 귀족 집안 영애의 몫이었죠. 이번에도 히아신스 아테르의 몫이라고 생각했을 테고요. 그래서 사람들은 더 깐깐하게 볼 거예요. 진주나 보석이 촘촘히 박힌 드레스는 세금을 낭비했다고 볼 것이고, 프릴이나 치마 겹이 지나친 드레스는 나를 너무 어리게 보게 만들 가능성이 있어요.”
“아하…….”
“이 드레스는 간소해 보이지만, 레이스에 대해서 아는 영애들이라면 얼마나 손이 많이 들어간 작품인지 알아볼 것이에요. 거기에 왕실에서 하사해 주신 보석들을 적당히 쓰면 수수해 보이지 않을 테고요. 일단 지금 이대로 입고 나와서 얘기를 다시 하죠.”
엘리아나는 의복에 관한 주도권을 완전히 쥐고 있었다. 의복사는 그저 감탄했다. 원래도 의뢰인이 다른 의견을 내면 그에 완전히 맞추는 편이긴 했지만, 이건 완전 업계 관계자나 다름이 없었다.
엘리아나는 베니와 하녀 두 명을 데리고 가서 탈의를 마치고 들어왔다. 엘리아나가 치수를 미리 알려 준 터라, 수선할 곳은 많지 않아 보였다.
납작하기만 했던 드레스는 엘리아나의 육감적인 몸 선을 따라서 아름다운 곡선을 그려 냈다. 그 위로 수놓아진 금색과 흰색 레이스들은 그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다웠다. 엘리아나는 보석들이 들어갔으면 하는 자리를 잡아서 보여 주었다.
“여기, 여기, 여기, 여기. 이렇게 들어가면 좋을 것 같아요. 소매는 지금 약간 짧은 편이니 조금 늘리되, 손목 쪽으로 갈수록 통이 넓어지는 하늘하늘한 재질이면 좋겠어요.”
“네, 네.”
엘리아나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있던 의복사는 급하게 그녀의 말을 받아 적었다. 엘리아나는 전신 거울로 드레스의 뒤태와 옆태, 앞까지 모조리 확인하고선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나머지 드레스들도 수정 보완해서 해외 순방이나, 중요한 행사 때 입을 드레스로 쓰겠어요. 모든 디자인이 너무 아름답네요. 역시 콘테르에서 제일가는 의복사다워요.”
엘리아나는 진심으로 칭찬했다. 하지만 의복사의 표정은 쉬이 펴지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 대륙에 화려한 모자 아이템을 유행시킨 장본인이지 않던가. 그녀는 타고난 감도 좋았지만, 의복을 정치적으로 활용할 줄도 알았다. 귀족 영애들이 가장 잘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였다. 아름다운 것이면 끝이다, 라고 생각해 왔던 의복사의 생각을 깨는 것이기도 했다.
엘리아나는 그런 충격을 주고 싶진 않았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의복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그녀의 꼼꼼한 수정 사항을 수첩에 빼곡하게 적어 내려갔다.
* * *
“그 오만하던 얼굴이 팍 찌푸려지는 순간에 오는 쾌감이란!”
“정말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너무 기를 죽였나?”
“아니야. 정신 바짝 차리고 갔을 거야. 다음엔 드레스를 더 꼼꼼히 만들어 오겠다고 하니까 봐야지.”
“그래도 진심으로 열 벌 모두 아름다웠어.”
“응. 조금 과해서 그랬지. 아, 엘리. 이제 진짜 곧이구나. 뭔가 저번에는 결혼이 아니었던 것 같아. 이제야 네가 정말 결혼을 하는구나 싶어.”
“나도 이제야 결혼이란 걸 실감해. 전에는 어떻게 하면 우리 가족이 굶주리지 않을까만 생각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이제는 무슨 생각이 들어?”
베니가 궁금하다는 듯이 눈을 빛내자, 엘리아나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행복하다는 생각. 아주 낯설지만, 분명하게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거면 됐지! 결혼이 별건가!”
“우리 베니도 얼른 시집 보내야 하는데.”
“난 결혼을 빨리할 생각 없어. 연애를 실컷 해 보고 할 테야.”
“투리스와?”
“그렇게 머리 큰 남자랑은 싫다고! 그 옆에 길쭉한 남자라면 모를까!”
베니의 말에 엘리아나가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베니는 저녁 데이트를 나가는 엘리아나를 위해서 짙은 청색 드레스를 단단히 여며 주고 있었다. 콘테르는 콘티노보다 훨씬 날이 추운 지역이었다. 베니는 케이프를 둘러 주고선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챙겨 주었다.
“너무 추우면 돌아와. 로맨틱함도 얼어 죽을 날씨야.”
“야외에 있을 것도 아닌데, 뭘.”
“그래도 말이야. 콘테르 사람들의 체온은 다른 거 같다고.”
베니는 바깥은 생각만 해도 춥다는 듯이 몸을 떨었다. 엘리아나는 웃으면서 밖으로 나섰다. 이제는 익숙해진 백마의 머리가 보이더니 뒤이어 커다랗고 푸른 마차가 나타났다. 금색 테두리로 단정하게 장식된 모양이었다.
“레이디.”
율리시스는 첫 연회 때 엘리아나를 구해 갔던 것처럼 마차를 활짝 열면서 나타났다. 엘리아나는 그런 율리시스의 손을 잡고 올랐다.
“오늘도 눈이 부시게 아름답네요.”
“아침에도 만났잖아요.”
“저녁의 아름다움은 또 다른 것 같아서요.”
“율리시스의 말은 항상 달콤해서, 얼마나 많은 영애의 마음을 설레게 했을지 궁금해지곤 해요.”
“전혀요. 엘리아나를 향한 마음만이 진짜라고요.”
율리시스가 어깨를 으쓱하자, 엘리아나는 마주 웃었다. 두 사람이 오늘 가는 곳은 노튼 공작이 정기적으로 여는 가면무도회였다. 그야말로 젊은 귀족들의 사교 파티장이었는데, 작위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는 자리였다. 사람들은 각자가 원하는 대로 춤을 추고, 술을 마시거나 미술품을 구경하고 음악을 즐기기도 했다.
결혼식 이후로는 행동이 자유롭지 못할 왕자비 내외를 위해서 노튼 공작이 초대해 준 자리였다.
“사실은 내 친구들이 엘리아나를 만나고 싶어 해요. 장난꾸러기들이죠.”
“나도 만나고 싶어요. 율리시스의 화려한 연애사도 한번 엿들어 보고요.”
“아, 잠깐.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요. 그리고 정말 저는 결백해요. 그 녀석들은 없는 얘기도 지어 낼 놈들이라고요!”
율리시스는 정말 억울한 듯싶었다. 엘리아나는 그런 율리시스의 모습에 더 흥미가 생겼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펄쩍 뛰니까 더 궁금해지는데요?”
“아 정말 아니에요. 엘리아나. 아니, 이 마차를 돌려야겠어요. 애덤 자식이 웬일로 좋은 일을 하나 했더니…….”
엘리아나는 무도회장으로 가는 내내 성을 내는 율리시스를 보면서 소리 내 웃었다. 그와 함께라면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숨기지 않고, 꾸미지 않아도 되는 순간들이 엘리아나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했다.
* * *
파티장에 도착하는 참석자들은 모두 똑같은 가면을 받았다. 엘리아나와 율리시스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언제나 그랬듯이 첫 곡에 서로의 손을 잡고 춤을 췄다. 경쾌한 무곡이었다. 애덤 노튼 공작은 엘리아나를 알아보고선 두 번째 춤을 요청했지만, 율리시스에 의해 저지당하고 말았다.
“벌써 이렇게 빡빡해서야……. 그러다가 영애께서 질려서 도망가면 어떡하려고?”
“뭐야?”
율리시스는 장난스레 노튼 공작을 주먹으로 공격했고, 노튼 공작은 제대로 받아치는 척 한참을 실랑이했다. 누가 봐도 열 살 어린애들 싸움 같은 모습에 엘리아나는 내내 웃었다.
파티장에 있는 사람들은 누가 누구인지 대충 아는 듯했으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편하게 대해 주었다. 애덤 노튼에 의해서 한차례 검증된 사람들이라 그런지 엘리아나도 마음을 놓고 즐길 수 있었다.
엘리아나는 두 사람이 싸우는 틈에 투리스에게 두 번째 춤을 추자고 이끌었다. 투리스는 춤을 좋아한다면서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춤을 췄는데, 함께 추는 엘리아나도 덩달아 즐거워지는 춤사위였다.
엘리아나는 투리스에 이어 이름을 모르는 가면의 사나이와 춤을 춘 뒤에야 율리시스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율리시스는 가면 밑으로 입술이 뾰로통하게 나와 있는 상태였다.
엘리아나는 샴페인으로 목을 축였다.
“내가 빡빡하면 뭐 하겠어요. 엘리아나가 이렇게 자유로운데.”
“이러라고 나를 데리고 온 거 아니었어요?”
“맞긴 하지만, 이렇게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 할 줄은 몰랐죠. 앞으론 여긴 오지 말아야겠어요.”
“당신, 생각보다 보수적이군요.”
“아니!”
“그건 아니랍니다, 영애. 이 녀석은 오는 여자도 반기지 않고, 가는 여자는 잡지도 않는데……. 유독 영애에게선 눈을 떼지 못하더군요. 어쩌다 이렇게 팔불출이 된 건지…….”
율리시스가 입술을 삐죽거리자, 엘리아나가 그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래도 나의 첫 춤은 언제나 그대의 것이었잖아요. 올리버.”
엘리아나의 한마디에 율리시스의 표정이 사르르 녹아 내렸다. 노튼 공작은 엘리아나의 허리를 감싸 안고선 어깨에 얼굴을 비비는 율리시스를 보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네 번째 무곡이 시작되고 있었다. 노튼 공작은 모르는 영애의 손을 잡았고, 엘리아나는 뒤에서 자신을 완전히 감싸고 있는 율리시스 품에 머리를 기댔다.
속삭이는 목소리 사이로 행복이 잘게 부서져서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