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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118/121)

117화

엘리아나가 머무는 성의 모든 것은 완벽했다. 매일 아침 요란스럽게 등장하는 한 남자를 제외하고선 말이다.

“엘리아나!”

1층에서부터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드레스의 끈을 묶던 베니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시계가 따로 필요 없겠어. 어떻게 매일 똑같은 시간에 나타난담? 엘리는 너무 행복하겠어?”

엘리아나는 못 말린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율리시스는 몹시 바빴다. 왕자로서 해야 할 일도 두 배로 늘었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침저녁으로 꼭 엘리아나를 찾아왔다.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말이다.

엘리아나는 두꺼운 녹색 드레스를 입고선 방을 나섰다. 계단을 올라오던 율리시스는 엘리아나를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미소 지으면서 뛰어 올라왔다.

“또 회의를 빼먹고 이쪽으로 달려온 건 아니겠죠?”

“빼먹지 않고 미뤘다면 덜 혼나나요.”

“율리시스.”

“오늘은 작약이에요.”

엘리아나는 품 안 가득 들어오는 꽃다발을 받아 들고선 꽃향기를 맡았다. 매일같이 율리시스가 들고 오는 덕분에 별장의 곳곳은 예쁜 꽃들로 가득했다.

“예쁘네요. 고마워요. 하지만 이걸로 혼나는 걸 미룰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정원 한 바퀴만 같이 돌고 갈게요. 진짜 딱 한 바퀴.”

“베니, 이걸 꽃병에 꽂아 주겠어? 율리시스와 정원을 돌고 금방 올게.”

“응. 따뜻한 아침을 준비해 둘게. 왕자님께서도 식사하시고 가실 테니, 함께 준비할게요.”

베니는 이제 익숙하다는 듯이 꽃을 받아 들고선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엘리아나는 율리시스의 팔에 손을 올리고선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매일같이 오는 게 피곤하지도 않아요?”

“엘리아나를 못 보는 게 더 피곤해요.”

“그런 말은 느끼해요.”

“진심이에요!”

“믿으려고 노력해 볼게요.”

“엘리아나. 내가 하는 모든 말은 진실이라고요. 정말! 저번에 이곳에 3일이나 못 왔을 때 내가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봤잖아요.”

율리시스는 억울하다는 듯이 열변을 토해 냈다. 엘리아나는 그때를 떠올렸다. 세법 개정으로 인해서 율리시스가 왕궁에서 3일 동안 나오지 못했던 때였다. 워낙 엄중한 사안인 만큼 모든 것들이 결정될 때까지는 외출이 엄격하게 금지되었기 때문이었다.

율리시스는 그 일이 끝나자마자 엘리아나를 보러 왔었다. 피곤함에 찌든 채로 엘리아나를 안자마자 잠이 들어 버렸지만 말이다.

“맞아요. 그렇게 과로했을 때는 푹 쉬고 왔어야죠.”

“그때 깨어나자마자 엘리아나가 어떤 세법이 고쳐졌는지 물어봐서 얼마나 서운했는지 알아요? 눈을 그렇게 반짝이면서!”

“세법은 중요하잖아요.”

엘리아나는 민망하다는 듯이 웃었다. 율리시스는 자신의 애간장을 태우는 데는 타고난 것 같다면서 말을 이었다.

“이건 일종의 중독 증상이 분명해요. 난 엘리아나가 없으면 몸도 아픈 것 같다고요.”

“과장이 지나쳐요.”

“정말이라니까요?”

율리시스의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를 보면서 엘리아나는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율리시스는 엘리아나의 매일 아침을 웃음으로 채워 주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말이다.

엘리아나는 그런 그가 고마웠다. 그녀는 율리시스의 팔을 조금 더 당겨 잡고선 정원을 거닐었다. 엘리아나가 정원에 관심이 많은 걸 알았기에, 왕실이 가진 별장 중 가장 정원이 넓고 아름다운 곳을 구해 둔 터였다.

“여긴 정말 정원을 잘 꾸며 뒀어요.”

“우리가 머물게 될 성의 정원도 아름다워요. 물론 엘리아나가 더 아름답게 꾸며 줄 테지만.”

“테네브 부인께서 신기한 식물을 잔뜩 보내 주시기로 했어요. 기대돼요.”

“아, 맞다. 헬렌 양의 결혼은 우리 다음 달이라고 했던가요?”

“네. 질리언 경이 해적 소탕으로 출정하는 바람에요. 우리 결혼식에도 아마 못 올 것 같대요.”

엘리아나는 몹시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율리시스는 그가 일부러 그 시기에 바다로 떠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일 엘리아나가 질리언과 결혼한다고 했다면 자신도 비슷한 선택을 했을 것이었다. 차마 두 눈으로 볼 수 없으니 말이다.

특히나 질리언 같은 성정이라면 분명했다. 엘리아나는 의외로 그런 면에서 둔한 부분이 있었다. 자신에게 호감은 느끼고 있지만 그것이 애정까지는 닿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애정이 호감 정도의 옅은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헬렌 양 결혼식에서는 볼 수 있겠죠.”

“아마도요. 그리고 에이린 양과의 혼담도 잘 오가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엘리아나는 자신이 이어 준 두 커플이 잘되어 가는 것에 몹시 흡족한 모습이었다. 율리시스는 아무리 똑똑한 그녀라도 통달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에 웃음이 났지만, 꾹 참았다.

“오후엔 의복사가 오기로 했어요.”

“들었어요. 또 드레스를 줄였다면서요.”

“스무 벌이나 되는 웨딩드레스는 필요 없어요.”

“아니 그래도 다른 영애들은 한 벌이라도 더 맞추고 싶어 한다는데…….”

“웨딩드레스가 많아 봐야 뭘 하겠어요. 난 세 번째 결혼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고요.”

“세 번째 결혼이라뇨!”

“딱 한 벌만 있으면 돼요. 하지만 왕비 전하께서 마음이 쓰이신다고 해서 열 벌까지는 보겠다고 한 거예요. 내가 고르지 않은 드레스들은 폐기된다면서요. 나는 그렇게는 못 해요. 수선사를 붙여서 전부 쓸모 있게 만들 거예요.”

“엘리아나가 원하는 대로 해요. 나는 뭐든 좋아요. 엘리아나가 뭘 입든지요.”

“열 벌 중에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를 고를게요. 율리시스와 나의 소중한 날이니까요.”

“드레스를 고르면 나도 보여 줄 거죠?”

“그럴 순 없죠. 신부의 드레스는 결혼식 당일에 보는 묘미가 있잖아요.”

“그때까지 참으라고요? 그런 구닥다리 예법부터 다 갈아엎어야 하는데.”

“그래요? 난 그날의 율리시스를 상상할 수 있어서 좋은데요. 색깔이야 의복사가 알아서 잘 맞출 테니 대충 예상할 수 있겠지만, 옷이라는 게 입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잖아요.”

“…….”

“게다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하는 날이니, 더 특별해 보일 테고요.”

“정말 엘리아나의 말이면 다 설득되어 버려서 큰일이라고요.”

율리시스는 억울하다는 듯이 입술을 내밀었다. 엘리아나는 크게 웃으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신은 신발은 오델리 백작의 첫 연회가 끝나고 율리시스가 선물했던 편안한 신발이었다. 엘리아나가 가장 아끼는 신발 중 하나였다. 율리시스는 엘리아나가 항상 하고 다니는 싸구려 머리핀으로 손을 뻗었다.

“이게 금방 닳아 버릴 줄은 몰랐어요. 장미가 이젠 색도 없네요.”

“저렴하게 색을 입히려다 보니까 제대로 잘 붙어 있지 않죠. 안 그래도 율리시스만 괜찮다면 여기에 색을 다시 입힐까 해요.”

“다른 걸 사 줄게요.”

“싫어요. 나한텐 아주 의미 있는 선물이라고요.”

엘리아나는 율리시스의 손을 떼어 내면서 웃었다. 엘리아나는 몇천 디온의 보석보다도 이것을 주고받았을 때 느꼈던 감정과 서로의 추억을 더 소중히 했다.

율리시스는 엘리아나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가 검소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과 보냈던 짧은 시간의 기억을 모두 소중히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율리시스는 아침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엘리아나의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그녀의 뺨을 쓸었다.

“그대의 눈동자를 닮은 아이가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그래요? 난 우리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면, 율리시스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럼 사이좋게 하나씩 낳으면 되겠네요.”

“결혼 전에 자녀 계획부터 세우다니……. 너무 멀리 나간 것 아니에요?”

“내가 머릿속으로 엘리아나와 무슨 상상까지 했는지 알게 되면 엘리아나가 나를 살짝 얄미워할지도 몰라요.”

“따로 묻진 않을게요.”

“어? 물어볼 줄 알았는데?”

“대답해 줄 준비는 됐고요?”

“그럼요.”

율리시스가 당당히 말하자, 엘리아나는 왕실의 문장이 새겨진 율리시스의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살짝 스쳤다. 소름이 바로 쏙 돋아날 만큼 간지러운 손길이었다.

“그럼 어디 말해 봐요.”

“엘, 엘리아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상상했는데요?”

엘리아나의 손이 목 뒤에서 부드럽게 어깨를 쓸고 내려왔다. 율리시스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괜히 장난을 쳤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이미 늦은 터였다. 율리시스가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달싹이자, 엘리아나는 웃으면서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아침 식사가 식겠어요. 얼른 가요.”

“조, 좋아요.”

“밥 먹고 나면 얘기해 줘야 해요?”

“아, 아니. 엘리아나!”

“푸흐흐.”

엘리아나가 웃으면서 먼저 걸음을 떼자, 율리시스는 재빠르게 따라가서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작은 손에 촘촘하게 박인 굳은살이 느껴질 때면, 율리시스의 가슴에도 딱딱하고 씁쓸한 느낌이 올라오곤 했다.

이 손이 보드라워질 때까지, 자신은 최선을 다할 것이었다. 율리시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엘리아나의 손을 들어서 입을 맞췄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정성스럽게 말이다.

“간지러워요.”

“적어도 이 손에 대한 상상은 말해 줄 수 있어요.”

“손 말고 다른 많은 곳도 상상한 모양이에요?”

“아, 아니에요!”

율리시스가 빨개진 얼굴로 말하자, 엘리아나는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사랑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 남자의 곁에 있는 건 엘리아나가 상상했던 그 이상의 행복을 안겨 주었다. 매일 이렇게 살 수 있다면, 그런 행복이 자신의 주변에 머문다면…….

엘리아나는 곧 현실이 될 그 삶을 떠올리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머물렀다. 감히 욕심낸 적도 없었던 행복한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주 행복한 해피 엔딩을 향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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