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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116/121)

115화

“네, 네. 물론이죠.”

시무스 부인이 일어나서 환대하자, 율리시스가 웃으며 엘리아나에게 손을 뻗었다. 엘리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율리시스의 손을 잡았다.

“레이디들의 대화를 방해해서 송구하단 말씀을 드리면서…….”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이에요, 왕자님.”

비비안 공주가 날카롭게 지적하자, 율리시스는 싱긋 웃고선 엘리아나와 함께 방을 나섰다.

그들이 복도를 벗어날 때쯤, 부인들의 수다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머 어떡해요! 청혼하려나 봐!”

“여기서 하지, 왜 가서 하는 거야! 궁금하게!”

“엘리아나가 돌아오면 모든 이야기를 풀어 주겠죠?”

“궁금해라! 이런 로맨틱한 사건이 얼마 만인지!”

시무스 부인은 비비안 공주와 눈을 마주치면서 웃었다. 누구도 엘리아나의 불행을 바라지 않았다. 모두들 그녀가 행복하기를, 로맨틱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랐다. 처음 적대적이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

“온다고 말이라도 해 주지 그랬어요?”

“깜짝 놀라게 하는 게 목적이었으니까요?”

“아테르 가문의 일은 잘 정리된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영지의 절반을 내놓았다면서요. 히아신스 영애는 언제 석방되나요?”

“조사를 조금 더 진행하고 석방해야죠. 민심이 흉흉해서 지금 석방해도 좋을 건 없어요.”

“그렇군요.”

“엘리아나를 너무 고생하게 만든 것 같아서, 콘테르 왕국을 대표해서 사과하러 왔어요. 콘티노 국왕께서 몹시 화가 나셨더군요. 제데이아 경이나 질리언 경도 그렇고요.”

“그들은 나를 과하게 아끼는 면이 있어요.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답니다.”

엘리아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을 이어 갔지만, 살짝 열없는 미소를 지었다. 제데이아와 질리언의 걱정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엘리아나도 상처받지 않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한 것만큼 약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었다.

‘다들 날 너무 곱게 자란 귀족 영애로 보는 경향이 있다니까.’

아무리 엘리아나를 겪어 봤더라도 그녀를 한 명의 영애로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귀하게 자란 몸이 아니었다. 한 집안을 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리고, 망할 뻔한 두 나라를 살린 공신이자 타고난 지략가였다.

스스로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엘리아나는 그들의 걱정에 되레 웃음이 날 때가 많았다.

“엘리아나. 하지만 타고난 장군도 적군의 모욕적인 언사 앞에서는 얼굴을 찌푸리는 법이에요.”

“하지만 대신 칼을 빼 드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면, 장수는 크게 화를 내지 않아요. 그것이 장군이 군대를 이끌 수 있는 사령관인 이유죠.”

“도저히 이길 수가 없군요.”

“아직도 나를 이기려고 생각했다니, 의외네요.”

엘리아나의 웃음소리에 율리시스도 함께 웃었다. 그녀는 보통의 여자와 달랐다. 그렇기에 율리시스의 마음을 뒤흔든 것이었다. 율리시스는 이 여인에게 제 남은 생의 모든 것을 걸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율리시스는 정원을 걷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선 엘리아나를 보았다.

“엘리아나.”

“네.”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지, 백 번, 아니 천 번을 생각했어요.”

“…….”

“당신은 최고의 지략가이자, 외교관이죠. 나는 왕이 되기 전에 당신이란 사람을 가장 먼저 내 사람으로 들이고 싶어요. 나의 참모이자, 나의 아름다운 아내로.”

“율리시스.”

“당신을 보호하고 싶다는 어쭙잖은 말은 하지 않겠어요. 대신 그대의 가장 가까이에서 기쁨과 고통을 함께할 기회를 줄 수 있나요?”

율리시스는 어느새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블레이저 안쪽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벨벳 케이스 안에는 아름다운 장미 모양의 반지가 있었다. 누구를 위해서 만들었는지가 분명한 것이었다.

단 한 사람만을 위해서 세공된 반지.

엘리아나는 그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마 못 보겠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율리시스의 손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백 번, 천 번을 준비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싶었다.

엘리아나는 환하게 웃었다.

끌려가듯이 하는 결혼이 아닌, 누군가의 떨림이 온전하게 전해지는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때는 없었다. 이 생에 그런 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허수아비 같은 생이라도 지속하고 싶었다. 가족들의 배를 불릴 수만 있다면 괜찮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엘리아나는 자신이 걸어온 시간을 돌아보듯이 율리시스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율리시스.”

“네.”

“고개를 들어요.”

“너무 떨리는데요.”

“들어 봐요.”

“먼저 대답해 주면 안 돼요?”

“고개를 들어야 대답을 해 줄 거예요.”

“…….”

율리시스는 여유로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맑은 눈동자가 설렘과 두려움에 젖어 있는 것이 너무 귀여웠다. 엘리아나는 그의 턱을 가볍게 쓸면서 말했다.

“반지를 끼워 줘요.”

“그 말은……?”

“네.”

“네?”

“좋아요. 율리시스와 함께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되겠어요.”

율리시스는 그대로 멈춰서 눈만 깜빡거렸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엘리아나가 소리를 내 웃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그는 뛸 듯이 일어나서는 엘리아나를 확 끌어안았다. 엘리아나는 자신을 꽉 끌어안은 그 품을 마주 안아 주었다.

율리시스는 한참을 그녀를 안고 있다가, 퍼뜩 생각난 듯 반지를 그녀의 손에 끼워 주었다.

엘리아나의 손에 꼭 맞춘 듯한 그 루비 반지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율리시스가 올리버 공작으로 분했을 무렵, 도서관에서 처음 줬던 그 머리핀이었다.

“율리시스, 당신이 나를 보호하고 싶다거나, 지켜 주고 싶다며 결혼하자고 했다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예요.”

“…….”

“하지만 당신은 진정한 나의 가치를 알아봐 준 사람이기에, 나의 또 다른 삶을 걸어 보려고 해요.”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게 해 줄게요.”

“부디 그러길 바라요. 난 또다시 결혼에 실패하고 싶진 않거든요. 아 참. 수양딸이 있다면 꼭 미리 말해 줘야 해요. 첫날밤에 또 그 소식을 접하고 싶진 않으니까요.”

엘리아나의 새침한 말에 율리시스가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나는 수양딸도 없고, 정인도 없습니다. 내게 당신만이 유일해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믿어 볼게요.”

“자신 있어요. 수많은 남자 중 나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할 자신이.”

엘리아나는 자신을 향해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웃었다. 율리시스는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붙잡고선 입을 맞추었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고선 말이다. 입맞춤은 달콤했다.

오랜 노력 끝에 얻어 낸 가을의 수확물처럼.

엘리아나는 입 맞추며 웃고 있는 율리시스의 등을 꼭 끌어안았다. 그동안의 고생이 모두 이 순간을 위해서 존재했던 것만 같았다.

***

히아신스가 석방되자마자, 아테르 공작 내외는 로즈 가문을 찾았다. 엘리아나는 조셰프를 필두로 하여 기사단을 응접실 내부에 배치한 채로 그를 맞이했다.

엘리아나가 율리시스에게 청혼받았다는 소문이 퍼진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엘리아나는 제 여식이 석방되고서야 사과를 하러 온 아테르 공작이 괘씸하기도 했다.

그러나 엘리아나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섣불리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아테르 공작은 영지의 절반을 빼앗겼어도 여전히 위협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즈 가문이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진 않았다. 가난하고, 힘이 없을 때도 강단 있던 엘리아나의 아버지는 안경을 올려 쓰고선 말을 이었다.

“우리 로즈 가문은 늘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한 점 없이 살아왔습니다. 나는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쳤고, 우리 큰딸인 엘리아나는 그 뜻대로 자라났죠. 이 아이는 우리 집안의 자랑이자, 콘티노 왕국의 공신이고, 이제 곧 콘테르 왕실의 일원이 될 사람입니다. 그런 아이가 평생 가져갈 만한 상처를 한 가문에서 만들어 냈다니, 이것은 치졸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작께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 가문은 오늘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콘티노 왕실에서 내려온 왕명이기도 합니다. 아테르 가문은 앞으로 우리 엘리아나가 콘테르 왕실과 함께해 나갈 때 하나하나 이 죄를 갚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예비 왕자비 전하께 누가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두고 봐야겠지요.”

로즈 부인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들은 자작이 되었기에 오만해진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하나뿐인 딸을 죽이려고 했던 당사자를 마주하니 화가 끓어오르는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로즈 부인의 손을 꼭 잡아 주고선 말을 이었다.

“아테르 공작.”

“네.”

“아버님의 말씀처럼 저는 경과 경의 가문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지울 수 있다고 믿었다면 오만입니다.”

“로즈 영애.”

“하지만 저는 콘테르 왕국에서 그동안 아테르 가문이 쌓아 온 신뢰와 업적들을 믿습니다. 저에게 저지른 결례를 다른 식으로 갚아 주세요. 콘테르가 바르게 나아가기 위해선 아테르가 꼭 필요합니다.”

엘리아나는 우아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아테르 공작은 그녀의 또렷한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율리시스 밀이 선택한 여자였다. 그저 그런 가문의 영애가 아니라, 콘테르와 콘티노의 전쟁을 막은 여자였다. 보잘것없는 변두리에 살던 로즈 가문을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저택으로 이끈 장본인이기도 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구나. 이 여자는 그저 귀족 영애가 아니야. 히아신스와는 비교되지 않는 왕비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야.’

엘리아나 로즈는 자신을 꿰뚫어 보려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선 말을 이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테르 공작님.”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나온 말에 아테르 공작은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이길 수 없는 상대에 대한 항복의 의미에 가까운 고갯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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